[특별대담] ‘4·27 판문점선언’과 한반도의 미래

 

편집자-지난 5월 18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연구소 5층 교육장에서 연구소 회원과 시민 50여 명이 자리한 가운데 ‘4·27 판문점선언과 한반도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특별대담이 열렸다. 신용옥 상임이사(내일을여는역사 편집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 대담에서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와 남북관계 최고 전문가 정세현 한반도평화포럼 이사장(전 통일부장관)이 남북 정상의 ‘4·27 판문점선언’이 지니는 역사적 현실적 의미를 진단하고 나아가 북미정상회담의 향방과 동북아평화체제 구축, 경제공동체의 성립 등을 전망하였다. 대담 요지를 정리하여 싣는다. 전체 동영상은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 역사TV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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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27 판문점선언에 대한 소회

강만길 : 여러분 반갑습니다. 나도 텔레비전에서 쭉 봤는데 2000년 6·15공동선언 때가 생각납디다. 6·15공동선언 때 두 정상이 평양 백화원에서 선언에 합의했는데, 그 장면을 아무도 찍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시 사진기자를 불러가지고 재연을 했습니다. 이번에 두 정상이 같이 걸으면서 기자들 마음대로 와서 사진 찍게 하고 정담을 나누고, 나무의자 같은데 앉아 가지고 둘이서 한참 이야기하고. 두 사람 사이에 연령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나는데도 전혀 그런 걸 느낄 수 없었습니다. 요새 2, 3일 동안에 조금 다른 이야기가 들리고 있어요. 근데 나는 쉽게 극복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날 두 사람이 회담하는 것을 보고 마치 한 집안의 혹은 한 동네의 노소가 모인 것처럼 이렇게 자연스러운데 이게 앞으로의 남북관계에 그대로 영향을 미칠 거다, 그래서 6·15 때보다 훨씬 더 희망적이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정세현 : 저도 김정일 국무위원장이 분계선을 넘어오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봤습니다. 그걸 보면서 넘어오는 순간 ‘이건 보통일이 아니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이전 상황을 보면서 사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김정은 위원장이 북미정상회담을 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벌인 일의 연장선상에서 성사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미국이 그동안에 북한한테 무시해도 좋을 만한 정도의 행동력밖에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압박과 제재로 그걸 뺏어내려고 그랬지만, 작년 11월 29일 13,000km 사정거리가 나오는 ICBM 발사에 성공하고 난 뒤에는 미국이 김정은을 노스 코리아를 만만하게 보지를 못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7월 4일에 미국 본토 서부지역에 도달할 수 있는 8,000km짜리의 ICBM을 개발했을 때만 해도 동부지역에 도달할 수 있는 13,000km 사거리의 ICBM이 개발되려면 최소한 2, 3년 걸릴 것이라고 미국 과학자들이 이야기했었어요. 근데 불과 4개월 만에 5,000km가 더 멀리 나가는 미사일을 개발하고 나서부터는 미국이 조용해졌어요. 실제적으로 굉장히 겁나는 일이 벌어졌던 거고 그러면서 미국이 이걸 방치하고 압박과 제재로 문제를 풀려고 했다가는 일이 더 커지게 생겼다고 판단하고 이제 북한을 상대해주려고 했기 때문에 12월 한 달 동안 트럼프도 조용했었습니다.
그랬는데 김정은이 1월 1일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다며 대화하자는 제안을 했죠. 김정은의 생각은 이 정도 되면 미국과 일대일로 회담할 수 있고 일대일로 회담해서 북미수교까지 끌어내면 경제적인 여건은 좋아질 수밖에 없다. 북미수교까지 하고 나면 제재는 다 풀어야 되는 거고 ADB(아시아개발은행)나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같은 데서 장기차관이 그냥 쉽게 들어올 수 있어요. 그걸 받아내려면 트럼프하고 소위 한판 승부를 벌여야 되는데 막바로 회담을 제의해 가지고는 안 될 거다. 그러면 도리 없이 문재인 대통령의 등에 업히자. 문재인의 힘을 빌려서 트럼프를 만나서 빅딜을 끝내자. 그 사람들은 남북정상회담을 과정으로 생각하고 수단으로 생각하지 그 자체가 최종목표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게 해서 특사가 갔고 구체적으로 특사에 대한 답방 차원에서 우리 특사가 가서 김정은으로부터 들은 얘기를 그대로 그냥 트럼프한테 전달하니까 트럼프가 바로 그 자리에서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러면 김정은과 회담을 하고 싶다고 한 겁니다. 그렇게 해서 북미정상회담까지 합의해놓고 남북정상회담에 온 겁니다.
그래도 도보다리 대화에서 솔직한 얘기를 털어놨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판문점선언보다 더 핵심적인 이야기가 도보다리에서 나왔어요. 미국이 종전하고 불가침만 약속해주면 핵은 포기하겠다. 폐기시키겠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좀 넉넉하게 살고 싶다. 이번에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그런 의지를 내가 확실히 밝힐 테니 미국한테도 그렇게 전달해주기를 바란다는 얘기죠. 이어서 우리가 만약 개방개혁으로 간다면 중국식보다는 베트남식을 따르고 싶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건 중국의 간섭을 배제하겠다는 얘기예요. 북한이 중국에 대해서 굉장히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자세로 중국을 상대하는데 밖에서는 그것도 미국이 우리한테서 가지고 있는 정도의 영향력을 중국도 북한에 대해서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자꾸 압력을 넣어서 해결하려고 하는데, 북한이 중국말을 안 듣습니다. 김정은이 이번에 판문점회담을 계기로 확실하게 살 길을 찾으려고 굉장히 노력하는구나, 가능하면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김정은을 필두로 북한을 도와주는 것이 결과적으로 북핵문제 해결에 길을 열어주는 것이죠. 북핵문제가 해결되면 북한한테 돈 들어간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만큼 우리는 전쟁공포 없이 살 수 있기 때문에 국민을 위해서는 북핵문제를 해결하도록 북한 편을 들어줘야 돼요

 

2. 판문점선언의 역사적 의의
강만길 : 1972년 7·4공동성명이 왜 갑자기 나왔는가, 우리가 모두 놀라지 않았습니까? 중앙정보부장이 은밀히 평양에 갔다가 평양 쪽하고 합의하여 우리의 통일은 평화적으로 하기로 했다고 하루아침에 선언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선언이 나온 이유를 알 수 있어요. 남과 북은 미국과 소련이, 미국과 중국이 대립해 있으면 있을수록 안전합니다. 그런데 미국하고 소련이 데탕트 한다고 하면서 허물어지고 또 미국과 중국도 데탕트 한다고 허물어지고 이러면 두 세력을 받들고 있는 배후가 서로 허물어지면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남북이 만나서 7·4공동성명이라고 내면서 우리 통일은 평화적으로 한다고 했어요. 그래도 불안하니까 남은 유신을 하고 북은 사회주의헌법을 강화합니다. 다만 7·4공동성명이 역사적으로 이득이 있었다면 처음으로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하겠다고 선언한 겁니다. 그게 이후 통일문제의 하나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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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또 군사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때는 북에서 연방제통일안을 내놓게 됩니다. 국가는 하나로 하고 정부는 남북의 두 정부를 상당기간 유지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도 상당히 유지한다. 그 대신 국가는 하나로 한다. 그 국가가 군사권과 외교권을 가진다는 것이었죠. 남에서는 그것도 아직 시기상조라며 연합제를 내놨었죠. 국가도 상당기간 둘인 채로 두고 정부도 남북정부를 두고 체제도 그대로 두되 서로 평화적으로 교섭하고 내왕한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6·15공동선언에서 합의가 되었어요. 국가를 하나로 하는 것은 당장 어렵지만 군사권과 외교권에 타협한다. 군사권은 양측이 훈련할 때 상대방에게 알린다. 그래서 이게 침략 목적이 아니고 훈련목적으로 하는 거다 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알려서 와서 관람하게 한다고 합의되었었습니다. 외교권도 여태까지는 외교마당에서 사사건건 대립해 왔는데 이제부터 서로 협조한다는 것이 6·15공동선언에서 실제로 합의된 부분입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사이에 합의되어 가지고 상당히 효과가 있었어요.아까 우리 장관님께서 이야기했습니다만 북측이 핵무장하니까 미국도 이제 협상에 응해줬다고 했는데, 사실은요 이번에 김정은 위원장이 ‘선대의 유훈’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남과 북을 막론하고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게 김일성 주석의 유훈입니다. 그것을 이번에 상기시켰죠.
왜 해방이 되면서 우리나라가 분단되었습니까? 4강의 자기 이익 때문에 분단된 겁니다. 4강은 한반도에 흔히 이런 말을 하지요. 역사에서 “한반도가 대륙세력권에 들어가면 한반도는 해양세력 특히 일본을 겨누는 칼이 된다.” 이것은 러일전쟁 때 소련이 우리 임금을 공사관에 데려다 놓고 마산에다가 군항을 만들려고 하니까 일본이 곧 위협을 받게 된다고 야단났었죠. 일본이 그때 러시아를 대상으로 전쟁할 형편이 안 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미국과 영국이 전쟁비용을 빌려줘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또한 “한반도가 해양세력 일본이나 미국의 세력 속에 들어가게 되면 대륙을 침략하는 다리가 된다.”고 그랬습니다. 6·25 때 보면 김일성 쪽에서 전쟁을 일으켜 승승장구하는데 모택동이 7월 초에 전쟁준비를 시킵니다. 왜냐? 미국이 6월 28일에 참전하겠다고 선언하지요. 미국이 참전한 이상 김일성이 못 이긴다는 겁니다. 이후 진행이 모택동 말대로 전개되었죠. 유엔군이 삼팔선을 넘었고 압록강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중공군이 안 나올 수가 없었죠. 이제 중공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는데 부산까지 내려가지 않고 휴전선을 그어가지고 전쟁을 끝내고 말지요. 이것이 바로 한반도가 위치하고 있는 지정학적인 문제입니다.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평양이 미국의 호수가 되어야 되는데 일본이 무너지면 붉은 호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미국은 언제나 태평양이 자기들 수중에 있어야 되는데 그래서 하와이를 점령하고 필리핀을 점령하고 호주와 뉴질랜드는 언제나 친미국가여야 한다고.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 때 비로소 우리 문제가 해결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의 통일문제는 남북이 스스로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4강이나 6자회담이 우리를 통일시켜 줄 이유가 없지요.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 낸 것이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핵을 가지게 된 상황까지 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하여금 타협적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남쪽정부에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것에 대해서 역할을 하게 되었죠. 앞으로 우리 정부가 특히 남북이 어떻게 이 문제를 헤쳐 나갈 것인가를 실무에 있는 분들이 적당한 방법을 찾아내고 그래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세현 : 1992년의 남북 기본합의서는 2000년 6·15공동선언에 많이 녹아들어갔습니다. 남북 기본합의서를 만든 사람이 임동원 당시 통일부차관입니다. 임동원 차관이 나중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원장이 돼가지고 김대중-김정은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면서 공동선언문을 만듭니다. 그때 기본합의서의 정신과 내용이 거기에 고스란히 들어가요. 기본합의서나 6·15공동선언은 모두 투 코리아를 인정하는 겁니다. 강교수님은 실질적으로 남북연합, 국가연합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바로 투 코리아를 전제로 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남측이 남측의 통일방안인 남북연합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에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그 방향에서 통일을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학문적으로 국가연합을 얘기하는 것이고 개념적으로 노태우정부 때 만들어진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남북연합과 같습니다. 그리고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합의한 10·4선언은 6·15공동선언에 근거해서 구체적인 사업들을 합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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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전 통일부장관

4·27선언이 이전 선언들과 다른 점은 핵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뤘다는 겁니다. 그동안은 물론 10·4선언 때도 핵문제가 있긴 있었습니다. 핵문제가 있었지만 핵문제와 관련해서는 자세한 얘기는 없고 그저 핵문제 해결의 한 방편으로서 한반도 문제와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의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한국전쟁의 공식적인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한다는 합의만 있었죠. 근데 판문점선언 1조는 남북관계 발전이고 2조가 국방부 소관인 평화체제입니다. 3조가 바로 비핵화 문제인데 완전한 비핵화를 통한 핵 없는 한반도를 완성한다고 합의했습니다. 이게 북미정상회담으로 건너가기 위한 징검다리로서의 남북정상회담도 있지만 그 자체로도 핵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디딤돌을 여기서 깔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앞으로 이 판문점선언이 제대로 이행되어서 국민들한테 정말 평화를 갖다 안겨주려면 유관부처인 외교부, 국방부, 통일부가 판문점선언을 아주 정말 철저하게 탐구해서 그것에 위배되지 않도록 북한에게 빌미를 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 판문점선언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제일 먼저 강조한 이유

정세현 : 남북관계 발전 1조 6개항입니다. 6개항은 그동안에 나왔던 얘기를 전부 종합해 놓은 정도고, 특별하게 새로운 것은 발견하지 못했어요. 중요한 것은 특히 3조의 비핵화 문제를 남북 간에 본격적으로 다뤘다는 사실입니다. 그전에는 비핵화문제는 남북 간에 다룰 수 있는 의제가 아니라는 것이 북한의 입장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완전한 비핵화를 남북정상이 합의하고 비핵화와 관련한 조항까지 만들었다는 점이 의미가 커요. 조금 전에 평화 번영 그리고 통일 제목은 그렇게 되어 있다고 그러지만 평화 번영 이전에 평화만 어서 정착을 시켜도 대단한 겁니다.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 간에 평화로운 교류 협력을 통해서 남북 간에 공동으로 번영하다보면 여러 가지 경제 사회 문화적인 동질성이 커진 연후에 비로소 통일을 논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독이 독일 통일을 완수했는데 20년 동안 꾸준히 연간 29억 달러씩 동독에다가 현금을 보냈기 때문에 동독의 민심이 서쪽으로 넘어갔고 동서독의 민심이 연결되는 것이 그렇게 해서 결국 독일의 구심력이 커지니까 독일의 원심력으로 작용하던 주변 국가들이 그것을 더 이상 뜯어말릴 수 없어서 통일된 거거든요. 제가 요즘 그거 설명하면서 결혼 구심력이 커지면 처녀 총각이 부모들이 아무리 원심력으로 작용해도 뜯어말릴 수가 없다는 비유를 듭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에 쌀과 비료가 가고 여러 가지 왕래가 잦아지면서 민간차원에서 절대로 빈손으로 가지 않던 그 시절에 북쪽 사람들의 민심이 남쪽으로 녹아서 흘러내려온다는 것을 우리는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게 20년만 됐으면 이야기는 달라져요. 근데 중간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모든 것을 가차 없이 끊어 버리는 바람에 지금 스톱이 됐습니다. 남북관계도 10년 동안 쌓아놓은 것이 있으니까 이제 다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서 시작만 한다면 과거에 쌓아 놓았던 그 위에 (5층까지 쌓았다 치고) 6층 7층 8층 10층까지 쌓아나가면 동서독과 같은 그런 방식의 통일이 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평화가 중요하고 평화의 출발점은 비핵화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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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명예이사장

 

강만길 : 박근혜정부가 개성공단 문 닫기 일주일 전에 공식적으로 개성을 다녀왔어요. 남북의 역사학자협의회가 개성의 고려시대 궁궐터를 복원해서 관광자원으로 하자고 합의했어요. 그래서 발굴작업을 위해 근 10년 만에 개성을 갔습니다. 근데 개성이 많이 변했어요. 우선 아파트가 많아졌어요. 근데 그 아파트가 전부 5층이에요. 전기가 없어서 엘리베이터를 못 놓는다는 겁니다. 돌아올 때 북측 실무자하고 같이 왔는데, 왜 2차, 3차 사업을 하지 않느냐 물어봤더니 북에서는 하자고 하는데 남에서 못하게 한다는 거예요. 고적지에 가면 가게가 생겼습니다. 가게에서 달러 주고 물건 사가지고 오는 걸 남측이 싫어한다는 거예요.
분단 과정을 역사적으로 3단계로 나눕니다. 첫째는 1945년 해방 직후 삼팔선이 생김으로써 국토분단이 되었습니다. 그다음 1948년에 두 개의 국가가 생김으로써 국가분단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남북 주민들 사이에 동족의식은 있습니다. 하지만 6·25전쟁이 터짐으로써 동족이 하루아침에 적이 되어버렸어요. 그것을 민족분단이라고 그럽니다. 6·15공동선언 때 우리 이제 같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공동선언문에 서로 협력하고 화해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민족이 통일되기 시작했다고 나는 얘기합니다. 민족이 회복되기 시작하니까 어떻게 합디까? 철도가 연결되고 개성공단이 생기고 해주공단 이야기가 나오고 이제 국토가 통일되어갑니다. 그다음에 이제 국가통일이 남았는데 국가통일도 어느 정도 합의가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통일문제는 해결되기 마련입니다.
20세기 세계사는 가장 불행한 시기였습니다. 제국주의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치렀습니다. 게다가 또 냉전을 치렀습니다. 이런 20세기가 다 가기 전에 세계사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옛날에는 남의 나라 갈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지금은 노비자 지역이 자꾸 늘어나고 있어요. 더욱 놀라운 것은 지역 공동체가 생겨나고 있는 겁니다. 유럽의 EU를 비롯해서 아시아의 아세안(ASEAN)이 생겨 가지고 잘하고 있어요. 사회주의적으로 통일한 월남도 거기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와 중국과 일본, 그리고 북한도 넣어서 동아시아공동체가 생겨야 돼요. 아프리카공동체, 남미공동체, 동아시아공동체, 유럽공동체 이런 식으로 해서 21세기의 세계사가 평화적 공동체로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당장 내 생각으로는 아세안 플러스 3국 쪽에 북한을 넣어가지고 아세안 플러스 4국 이렇게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이 주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의 통일문제가 정말 순조롭게 해결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우리 국민이 이런 긴 안목으로 세계사를 보면서 우리 문제를 해결해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4.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정세현 : 종전선언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전선언을 하면 바로 그 순간 전쟁이 끝나는 걸 선언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워요. 실제로는 지금 이 순간부터 종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시키기 위한 프로세스를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관련 당사국들의 공동선언, 그래서 이걸 위해서 첫 번째 한반도 지역에서의 군사적 긴장완화를 시키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이러저러한 것을 한다는 문구가 담기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지금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으로부터 각각 2km 북방과 남방에 철조망이 처져 있고 절대로 GP가 그 앞에 전진 배치시킬 수가 없는데 서로 위반해서 500미터 사이를 두고 마주보고 있는 경우도 많이 있잖아요. 이번에 지금 비무장지대에서 확성기 방송을 중단시켰지만 이제 GP를 뒤로 물리는 것도 하고 사실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 조치를 순차적으로 취해가야 합니다. 그런 다음 남북 간에 소위 군축이나 군비통제를 시작하고 마지막 3단계에 가서 평화협정 협상을 시작한다는 스케줄을 거기다 넣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런 실례가 있었습니다. 헬싱키프로세스입니다. 1975년에 동서유럽이 평화를 향해서 가는 협약을 헬싱키에서 체결한 뒤에 10년 동안 꾸준히 약속을 이행한 끝에 나중에 미소 간에 군비감축협상까지 했고, 그리고 1989년 연말 1990년 초에는 이른바 동서 유럽 간의 냉전이 끝났다는 걸 선언합니다. 우리도 헬싱키프로세스를 한반도 실정에 맞게 벤치마킹해서 단계별로 이러이러하게 해나가겠다고 합의해야 합니다. 트럼프의 정치 일정상 2년 이내에 비핵화 협상을 끝내야 됩니다. 2년 이내에 평화협정까지 마무리하려면 가령 시작으로부터 1년 동안은 앞에 있는 두 단계를 이행해 나가고 나머지 한 1년 정도를 가지고 평화협정 협상을 시작해서 마무리하는 겁니다.
잠시 제가 남북경협 현장에서 있었던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금강산관광을 시작할 때는 현대 정주영 회장이 그걸 디딤돌로 해서 자기 고향 통천에 공단을 만들고 싶어서 시작했습니다. 소 판 돈을 훔쳐 가지고 온데 대한 속죄에서 그런지 몰라도 고향 사람들 잘 살게 해주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겁니다. 그런 후 원산, 함흥, 나진, 선봉 등 소위 임해공단벨트를 구상했어요. 문재인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한반도 신경제지도에 동해경제벨트가 있는데 결국 정주영 회장의 금강산관광에서 확장된 거예요. 그다음에 개성공단. 개성공단에 사실은 현대가 들어왔지요? 개성공단을 하기 전에 처음에 정주영 회장이 김정일 위원장한테 해주를 달라고 했습니다. 해주는 군사지역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면서 신의주로 하라고 했습니다. 근데 신의주에다 공단을 만들면 물류비가 너무 많이 들고 접근성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개성으로 결정되었고 10·4선언에서는 해주공단을 하기로 했습니다.
개성 해주 계속 올라가면서 남포 신의주 서해벨트 이쪽으로 해가지고 우리는 우리대로 기업들이 살길이 열리지만 북쪽은 북쪽대로 노동자들이 거기서 임금을 벌어서 잘살게 되고 북한은 북한대로 거기서 외화를 벌어가지고 자기 경제를 발전시키기를 바랐었어요.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은 우리의 수출입국, 관광입국 모델을 그대로 따라 배우라고 열어준 학습장입니다. 왜냐면 무조건 먹여 살릴 수가 없어요. 자생력을 키워줘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했는데 그걸 퍼주기라고 그러니까 그게 참 퍼주기 아니면 통일 못합니다. 민심이 연결이 안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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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옥 상임이사

 

5. 6·25전쟁의 성격과 관련해서 종전선언의 의미

강만길 : 6·25전쟁은 통일전쟁이죠. 그때는 북측에서 통일방법이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죠. 통일이 될 뻔 했습니다. 내 고향이 경상남도 마산인데 마산이 최전방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산만 넘어지면 대구는 있어봐야 소용이 없어요. 부산까지 갈 테니까. 그런데 미군 부대가 대량으로 상륙해서 결국 밀어 부쳤습니다. 이번에는 또 역으로 통일될 뻔 했죠.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런 식의 통일은 안되는 게 이 땅의 지정학적 위치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결국 평화통일밖에 없습니다.
황해도 재령 지역에 갔었어요. 가서 보니까 6·25 때 농가가 다 파괴되어 나중에 시멘트로 얼기설기 지었는데 지금은 거의 무너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남쪽의 어느 농촌하고 연계시켜서 집을 지어줘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하나 개성에서 겪은 일입니다. 어느 여인이 일제시대 때 그랬는데 마른 풀을 베어 엮어가지고 머리에 이고 가는 걸 봤어요. 그게 연료입니다. 그쪽의 열악한 상황을 우선 해결해 줘야 된다. 남쪽의 어느 면과 북쪽의 어느 면을 연결시켜 가지고 그런 문제부터 우선 해결해주는 게 좋겠다. 그게 바로 통일의 길이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될 수 있으면 남쪽 사람이 북에 많이 가봐야 되겠어요. 가서 보면 우리 통일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다는 것을 많이 알게 됩니다. 나는 그동안에 이십여 차례 갔다 왔는데 한 700명을 데리고 갔다 왔어요. 근데 한번 가서 보고 온 사람은 좀 달라집니다. 이건 아주 정확합니다. 그 생각이 달라져요. 그래서 남북 사이에 민간교류가 아주 많이 있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누누이 해왔습니다. 내가 문재인 대통령하고 만날 기회가 있어서 될 수 있으면 남쪽 사람을 북에다가 많이 보내야 된다고 조언했어요. 기회만 있으면 많이 가봐야 됩니다. 많이 가서 그들하고 접촉을 많이 해야 됩니다. 국민 각자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될 수 있으면 북에 많이 가봐야 되겠고, 북에 내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내가 아까 하라는 이야기보다 딴 이야기를 해버려서 미안합니다.

6. 평화협정이 동북아질서에 미치는 영향

정세현 : 판문점선언은 사실 한반도 냉전 해체의 터닝 포인트입니다. 한반도 냉전구조가 해체될 뻔 했었죠. 1989년 12월 3일부터 4일까지 지중해 몰타섬 근처에서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그동안에 미소 간에 여러 가지 경쟁관계, 군사적인 대결관계를 끝내자고 합의했습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헬싱키프로세스 연장선상에서 마지막 화룡점정이었던 몰타에서의 미소정상회담이었습니다.
그런 흐름을 읽은 노태우 정부와 참모들이 유명한 7·7선언이라는 것을 내놓지 않습니까. 1988년 7·7선언에서 우리가 소련과 중국과 수교하고 싶다. 우리가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자료 원료공급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북한의 동맹국들과 수교하니까 우리 동맹국인 미국과 일본도 북한과 수교를 해달라. 그렇게 되면 군사적 긴장은 현저히 완화될 거고 교류협력을 통해서 서로 돕고 우리 경제도 활성화될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북미수교를 거절했습니다. 동구라파 국가들이 붕괴하니까 북한도 금방 붕괴하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하고 북한 붕괴론에 입각한 압박정책을 시작합니다. 북한붕괴론이 미제(美製)예요. 미국에서 들어오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머릿속에 꽉 박혀가지고 안 빠져나갑니다. 이게 국산 같으면 벌써 날라 갔을 거예요. (웃음)
이에 위협을 느낀 김일성이 1989년에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어요. 통일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가 누구에게 먹히는 식으로 돼서는 안 된다고. 1992년 신년사에서 연방제도 이제 느슨한 연방제로 나가야 된다는 얘기까지 해요. 잘못하면 남쪽에 흡수 통일될 수 있다는 공포를 사실상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 때문에 북한이 기본합의서 타결에 적극적으로 협조합니다. 기본합의서를 통해서 남쪽으로부터 체제 보장을 받으려고 했던 거예요. 그때 체제불안 내지는 체제붕괴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북한의 모습을 보며 미국은 더 자신만만하게 압박정책을 강화한 겁니다.
1992년 1월 22일 당시 유엔대사였던 김용순이- 나중에 조선노동당 대남비서가 됨- 뉴욕 유엔 대표부로 미국의 아놀드 켄터 국무부장관을 불러내서 충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앞으로 남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철수를 요구하지 않겠다. 그 조건으로 수교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김일성 입장에서는 기본합의서도 적들의 발목을 잡았고 미국으로부터 체제보장을 받기 위해서 주한미군 주둔을 전제로 한 수교를 요구했던 겁니다. 그때 아버지 부시 정부죠. 거절했어요. 그러고는 1992년부터 국제원자력기구를 시켜 핵과 관련된 의심나는 지역을 샅샅이 뒤지는 특별사찰을 하도록 했어요. 그러니까 김일성은 미국이 우리를 군사력으로 압살하려고 할 때는 이걸 들고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식으로 버틸 수 있는 수단이 있어야 한다면서 그때부터 핵을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미국이 우리를 군사적으로 치지 않고 체제만 인정해준다면 우리가 핵을 굳이 가질 필요가 없다고 얘기한 거예요.
2000년 6월 14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백화원 초대소에서 정상회담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냉전이 끝나고 난 뒤에 남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냉전시대에는 우리를 억제하고 우리를 위협하는 그런 군사력이었지만 냉전이 끝난 뒤에 동아시아 질서가 그런대로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게 남쪽에 그나마 미군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얘기는 90년대 초에 이미 미국에서 전해 놨습니다. 아직 답을 못 듣고 있을 뿐입니다.” 2000년 10월 24일 26일까지 올브라이트가 클린턴의 방북을 준비하기 위해서 평양에 갔지요. 그때 올브라이트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죠.
김정은이 이번에 비핵화가 선대 유훈이라는 말했을 뿐만 아니라 주한미군 주둔을 전제로 한 수교만 해주면 우리는 핵을 포기할 수 있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트럼프가 오케이 그러면 내가 김정은과 북미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고 한 거죠. 북미수교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미군 철수하라는 것이 그들의 기본 주제가입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 하는 자리에서 배석한 외교안보수석이 노동신문에 왜 자꾸 주한미군 철수하라는 얘기가 나오냐고 질문했답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답이 참 걸작이에요. “아, 인민들은 아직 거기까지만 알고 있으면 됩니다.” (웃음) 공식적으로 하는 얘기를 가지고 그것이 그들의 진심이고 그들의 핵심전략인줄 알고 했다가는 돈키호테 되는 거예요.
이렇듯 앞으로 북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와 관련하여 북한은 선대의 유훈이라는 명분하에 굉장히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4·27정상선언이 무슨 위장평화 쇼니 억장이 무너지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내막을 몰라서 그래요. 많은 사람들이 김정은 위원장이 분계선을 넘어오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데 극소수의 사람들은 억장이 무너지고 있었으니 도대체 이게 같은 혈통인지 DNA 검사 좀 해 봐야겠어요.(웃음)

 

7. 통일과정에서 북한이 나아가야 할 개혁개방의 방향
정세현 : 김정은이 도보다리에서 개혁개방이 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동안에는 그런 용어를 좀 쓰기 싫어했어요. 개방에 대해서 김일성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개방하지 않았는가. 우리 개방하려고 문 열고 나가려고 하면 밖에 미국놈들이 문을 걸어 잠갔지.” 무슨 개혁이라 그러면 자기네들이 마치 무슨 제도가 나빠서 고치는 것처럼 보이니까 무슨 조정이라고 하는데 그건 어휘에 불과한 거고 본질은 개혁개방이에요.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 중국에서 개혁개방, 베트남에서 쇄신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다 개혁개방입니다. 사회주의 경제 운영방식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본주의 방식, 곧 시장경제 원리를 도입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은 중국보다는 베트남식으로 하겠다는 것이 중국의 간섭을 두려워해서 그런 측면도 있지만 여건이 중국보다는 베트남의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베트남의 경우를 보면 지형부터가 상당히 불리합니다. 중간지역에 중부 베트남은 완전히 산악지대고 옛날에 왕조가 거기 있었다고 그러지만 북쪽과 남쪽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연결되기는 참 어렵게 되어있죠. 중국은 화교들의 자본을 기반으로 심천을 만들었습니다. 화교들이 심천을 개발하는 것을 보고 중국의 정부가 직접 만든 것이 상하이의 푸동입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밖에 도와줄 교포도 없습니다. 조총련이나 재미교포들도 별로 돈이 없어요. 그러니까 돈 없이 남의 돈으로 경제를 살려야 된다는 점에서는 자기 자본이 없는 상황에서는 중국식보다는 베트남식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베트남식을 선호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북한은 급하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2년 안에 2010년 5월에 선포했던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2020년 말까지 끝내야 되는데 시간이 별로 없다. 근데 수교는 빨라야 2020년 중반이 될 거 같다. 그렇다면 먼저 베트남처럼 미국의 압박과 제재는 풀리게 만들고 그걸 토대로 해서 외국의 자본을 먼저 끌어들여서 경제를 먼저 살리면서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는 차후에 해도 좋다. 소위 선개방 후수교라는 베트남식입니다. 북한은 시장사회주의라는 표현까지는 안 쓰면서도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창조적으로 적용했다고 하면서 베트남 것도 따오고 중국 것도 따오고 싱가포르 것도 벤치마킹할 겁니다.
2002년 11월 초에 여기 남쪽에 와서 15일 동안 경제 시찰을 한 뒤에 바로 평양으로 가지를 않고 싱가포르, 말레시아, 태국을 보름동안 순회하고 돌아갔어요. 돌아가서 북한 경제를 상당히 시장경제 쪽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때 앞장섰던 사람이 지금 내각총리로 있는 박봉주입니다. 박봉주가 시장경제원리를 과감히 도입하다가 소위 보수세력들한테 찍혀가지고 밀려났었어요. 1212년에 장성택이 힘쓸 때 다시 불려 나와서 지금까지 6년 이상 총리를 하고 있는데 아마 그대로 갈 거 같아요.
지금 북한사회에 아까 말씀하신 아파트 같은 게 들어서는 거예요. 말하자면 돈주(물주)들이 생겨가지고 적은 돈이지만 그걸로 해서 중국에서 시멘트, 철근을 구해다가 집 짓고 판단 말이에요. 거기서 이문이 생기면 그것을 세금으로 바치는 식으로 해서 국가와 돈주가 짜고 경제를 불려가니까 북한당국으로서는 세금을 많이 거둬들여서 좋고 북한주민들 입장에서는 일용품도 많아지고 또 사는 형편도 좋아지고 있습니다. 박봉주 체제하에서 중국식이든 베트남식이든 국가의 이해 세력들이 경제를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을 이미 시작했어요.

강만길 : 많이 변하고 있었어요. 실제로 개성공단을 열려고 할 때 군부가 크게 반대했답니다. 그러자 김정일 위원장이 개성이 6·25 전에는 남쪽 땅 아니냐. 도로 내주는 셈 치자라고 설득 했다고 들었습니다. 평양의 백화점에 가보면 아는데 갈 때마다 참 달라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갔을 때는 이게 무슨 백화점이냐 하는 생각을 했는데 많이 달라져 가고 있었고. 일요일에 평양냉면 먹으러 가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갔을 때는 택시가 상당히 많이 돌아다녔고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많이 변하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북한의 변화는 빨라진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을 변화시키려면 첫째는 미국이 위협하지 말아야 되고 둘째는 남쪽이 위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인데 그 나름대로의 변화를 추진할 만한 자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로 가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데 이것은 세계사적인 문제입니다. 나는 21세기에 들어와서 – 이것은 역사적인 하나의 추론입니다만 – 그렇게 멀지 않아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수정세력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틀림없이 사회주의의 견제가 없어져버린 자본주의의 방탕함이라 그럴까, 여기에 대해서는 반드시 새로운 어떤 견제 세력이나 견제 논리가 나오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20세기에 혁명가들은 나왔었는데 위대한 사상가가 별로 나오지 않았어요. 21세기야말로 위대한 사상가가 나올만한 세기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세계사가 자본주의 일색으로 가는 것에 대한 대안 이론으로서 어떤 새로운 이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내가 젊은 사람보고 그럽니다. 자신 있으면 한 번 도전해 보라고요.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중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중국을 지키는 팔이 두 개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하나는 조선 팔이고 하나는 월남 팔입니다. 그런데 월남 팔과 조선 팔의 차이가 있어요. 뭐냐 하면 월남 팔 밖에는 일본 같은 세력이 없는 데 비해 조선 팔 밖에는 일본이라는 세력이 있어요. 그래서 월남이 저렇게 해가지고 통일되었는데 조선은 왜 안 되는가 하면 일본 때문에 그런 겁니다. 왜냐하면 조선이 어느 쪽으로 통일이 되느냐에 따라서 일본과 중국의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고요. 그렇다고 우리 땅의 위치를 원망할 수는 없는 일이고, 우리의 역사적인 지정학적인 위치를 잘 알고 이에 잘 대응하는 것이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8. 통일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견지해야 할 자세

정세현 : 통일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국가가 해야 될 일이 있고 국민 차원에서 해야 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통일의 구심력 얘기를 했습니다만 국가는 통일의 구심력이 커질 수 있는 쪽으로 정책을 만들어서 밀어주고, 국민들은 통일의 구심력을 키우는 선봉장 역할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간 차원에서는 남북간의 교류 협력을 활성화하고 남북 간의 기본합의서나 선언문 같은 것이 이행될 수 있도록 하며 이에 딴지 거는 사람들에게 그런 짓 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려야 합니다. 국가는 통일의 구심력을 키우는데 민간단체가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밀어주는 역할을 하면 됩니다. 나중에 구심력이 상당히 커져 가지고 원심력을 하나씩 뜯어내야 될 때 비로소 통일이 될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아베 일본 수상이 통일의 원심력이에요. 그것이 안에도 있어요. 억장이 무너지는 사람들은 분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예요. 이러한 통일의 원심력을 하나씩 밀어내고 거꾸로 통일의 원심력이 통일의 구심력을 더 키워주는 그런 세력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국가가 해야 될 몫입니다. 순서는 선 구심력 강화, 후 원심력 약화 순으로 밟아야 합니다.
독일의 경우를 제가 말씀드릴게요.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돈을 많이 벌지 않았어요? 그렇게 돈을 벌어 놓으니까 분배문제가 나오는 거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분배문제에 있어서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진보정당이 표를 많이 얻게 되어 브란트 총리가 이끄는 사민당이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사민당은 안에서 나눠 쓰고 그러고도 남는 돈을 동쪽으로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동독이 안 받으려고 그랬습니다. 그러자 사민당은 받지 않을 수 없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서 동독으로 일정하게 돈이 가고 물건이 가도록 만들고 그걸 구조화시켰습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가는 물자와 현물에 대한 의존성이 생겼을 때 서독은 비로소 개혁개방이나 인권문제를 하나씩 고치라고 요구했어요. 그렇게 해서 구심력이 커지니까 드디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던 겁니다.
근데 독일 민족이 우수한 이유가 어디 있냐면 우리하고 다른 점에서 참 서글픈 얘기지만 사민당이 1969년에 집권해서 13년 동안 정치를 잘하다가 1982년에 기민당으로 정권이 넘어갔습니다. 13년간 추진해 왔던 동방정책, 이른바 서독의 대동독 퍼주기 정책이 이제 종언을 고해야 하는 상황이 온 거예요. 왜 정적들의 정책을 계승 발전시킬 후임 정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기민당 정권이 동방정책을 이어받아 계속 추진했습니다. 그때 기민당 내부나 보수적인 사람들이 가만히 안 있었죠. 하지만 서독국민의 절대 다수가 동방정책을 찬성하여 그로부터 7년 후에 동서독이 통일된 겁니다.
한편 독일 민심이 다 넘어오고 통일에 대한 구심력이 커졌다고 느껴질 때 선거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면서 기민당의 콜 총리가 주변 4강을 관리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미국을 잡습니다. 우리가 통일되고 나면 유럽 질서가 요동칠 것이다, 이때 나토 산하의 미군이 균형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며 아버지 부시를 설득합니다. 그때부터 미국은 독일의 통일을 도와주는 쪽으로 입장을 바꿉니다.
소련은 돈 주고 내보냈습니다. 1989년 몰타선언 이후에도 소련 경제가 형편없었어요. 이 경제를 발전시키겠다고 선언했는데 돈 줄 사람이 어디 있어요? 유럽의 가장 부자인 독일이 차관을 주겠다. 돈 주면서 나가라고 안 해도 나가게 됐어요. 이후 소련도 독일 통일을 밀어주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인데 콜 총리가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을 참 잘 관리했어요. 독일 통일에 대해서 가장 불안해 할 나라는 프랑스입니다. 그래도 사사건건 전화해서 어떻게 해주면 당신네가 통일을 도와주겠는가 하고 설득했어요. 마침 그때 프랑스 대통령이 미테랑이니까 가능했지요. 천시(天時) 인화(人和) 지리(地利)가 맞아가지고 성공한 겁니다. 순서상으로 보면 독일이 구심력을 키우는 정책을 먼저 추진한 뒤에 진보 보수를 초월해서 20년 동안 구심력을 확실하게 키워놓고 원심력을 밀어내는데 하나씩 각개 격파하니까 영국은 도와줄 것도 없고 하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곯아 떨어져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통일하려면 민간 차원에서는 통일의 구심력을 키우는데 모두가 앞장서고, 남북의 민심을 연결하기 위해서 대북지원을 퍼주기라고 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야 됩니다. 그리고 국가는 국민들의 대북지원활동이나 화해 협력 교류활동을 정책적으로 밀어주면서 동시에 구심력이 커졌을 때 -지금 이 정부에서는 4, 5년 안에는 어려우리라고 봅니다만- 원심력을 밀어낼 수 있는 외교를 전개하되 대상별 외교를 해야 됩니다.(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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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신용옥 상임이사, 조광 국사편찬위원장, 강만길 명예이사장, 정세현 전 장관, 임헌영 소장, 이부영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강만길 : 또 역사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임진왜란 이후 이씨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섰으면 아마 실학자들이 새로운 왕조의 이데올로그가 됐을 겁니다. 그랬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애국계몽운동이 아니라 공화주의운동이 전개되었을 거예요. 역사에서 보면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를 아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중립론이 많이 나옵니다. 김옥균이나 유길준이 중립론을 주장합니다. 우리의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제국주의 시대로 들어가면서 영세 국외 중립을 해야 한다고 여러 사람이 얘기했는데 안됐어요. 그 후에도 중립론 이야기가 여러 번 나왔습니다. 우리가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속에서 국제적으로는 중립을 해야 된다, 또 중립론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으니까 중립론보다는 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지역공동체 안에 한 지역이 되면서 통일을 해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직까지도 중립주의가 없어진 것은 아니에요. 스위스 같은 곳도 다 그렇게 하고 있고, 스위스는 중립을 하면서 유엔에는 안 들어갔습니다. 근데 오스트리아는 유엔에도 들어갔고 EU에도 들어갔어요. 그러니까 한반도가 중립으로 통일이 되어도 동아시아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길은 있어요.
어떻든 시대가 변해야 할 때 변해야 하는 것,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 지금 우리에게 닥쳐온 게 뭐겠습니까? 남북통일입니다. 평화통일입니다. 이 시대적인 요인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전 국민이 지혜를 짜가지고 우리가 시대적으로 해야 할 일을 담당해 나가야 합니다.(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