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사회를 알면 알수록 정말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내가 학생시절에 교육을 받은 내용은 60~70년대 북한에서 진행하는 정부정책에 공장마다 탁아소를 운영하고, 동네마다 밥차를 운영해서 여성들에 대한 노동착취를 전사회적으로 실시한다는 것이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 생각을 해보면 우리나라 상황에 이것을 적용해보면 얼마나 좋은 정책인가!

노동과 육아 그리고 가사노동을 정부정책으로 책임지는 위대한 발상이 아닌가!

그리고 주요 정부인사를 살펴봐도 우리나라보다 여성들을 주요직책에 등용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확인된다.

항일무장투쟁 때 여성중대 이야기는 이러한 북한의 정책이 어떻게 실현이 되었는지 그 정신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와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부족한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바로 고쳐내는 북한 사회가 정말 합리적인 세상이 아닌가!

지금까지 북한을 악마화 하고 북한을 혐오하게 만들어온 잘못된 우리나라 정책과 사회구조를 바꿔야한다. 

아래는 김일성 주석이 작성한 “세기와 더불어”라는 회고록의 일부를 소개한다.

(아래)

세기와 더불어 13-4. 녀성중대

한때 조선사람들은 독립군의 유일한 녀장부 리관린을 놓고 《만록총중 일점홍》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빨찌산을 핵심으로 하는 항일의 만록총중에는 우리 민족이 낳은 수백수천점의 붉은꽃들이 아름답게 피여있었다.

애국의 일념으로 불타는 이 나라의 어머니들과 딸들은 남성들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육체적부담과 정신적고통을 겪으면서도 혁명의 길에서 물러서지 않았으며 일제를 조국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성스러운 싸움에 생명도 청춘도 가정도 다 바쳤다.

그 자랑스러운 녀성투사들에 대하여 생각할 때면 나는 1936년 봄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사단을 편성하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조직하였던 녀성중대에 대하여 회고하게 된다.
남호두회의이후 백두산으로 나오는 길에서 새로운 주력사단과 함께 녀성중대를 따로 조직한것은 유격대오의 급속한 확대발전과 전반적항일무장투쟁의 새로운 앙양을 시사해주는 경이적인 사변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녀성중대의 탄생, 그것은 봉건적질곡에 의해 수천년동안 뒤고방에 갇혀있던 우리 조선의 녀성들이 혁명투쟁의 제1선에 당당히 나섰다는것을 의미하는 중대사였다.
지금은 우리가 녀성들의 사회적지위를 두고 말할 때마다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라는 표현을 쓰고있지만 항일혁명시기에만 해도 녀성이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라는것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못하였다. 더우기 녀자가 총을 잡고 남성들과 같이 장기간 무장투쟁을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여 나도 초기에는 녀성들의 참군을 불합리한것으로 보았다. 녀성들은 남성들보다 육체적으로 연약하다는 생각, 그들이 그 연약한 몸으로 유격투쟁앞에 나서는 모든 중하를 감당해낼수 없을것이라는 선입견이 내 머리를 지배하였던것이다.
물론 우리는 몇몇 녀성들이 지난날 외래침략자들과의 싸움에서 세인을 경탄케 하는 공적도 세우고 경이의 대상이 될수 있는 일화도 남기였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적장 소서비의 목을 베게 한 평양의 명기 계월향이나 진주의 론개와 같은 애국녀성들의 무훈담은 세상에 너무나도 잘 알려져있다.

《임진록》을 읽어본 사람들은 행주산성싸움이 얼마나 격렬했고 그 싸움에서 녀성들이 얼마만큼 큰 몫을 담당했는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있을것이다. 권률장군이 경기도 고양군에 있는 행주산성에 배수진을 치고 산성을 포위한 3만여명의 왜병과 힘에 부치는 결사전을 하고있을 때 그고장 부녀자들은 치마폭에 돌을 담아 석전을 하는 우리 군사들에게 부지런히 날라다주었다. 행주산성녀성들의 그 짧은 애국치마들은 후날 조선의 모든 가정부인들이 동자질할 때도 띠고 치레거리로도 띠는 맵시있는 앞치마가 되였다. 행주산성싸움에서 유래된것이라고 하여 그 앞치마를 《행주치마》라고 한다.

고려시기에 남복차림으로 전장에 달려나가 거란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무훈을 떨친 설죽화의 이야기 또한 유명한것이다.
력사는 설죽화와 같은 개별적인 녀걸들의 참군담은 더러 전해주고있지만 순수 부녀들로만 꾸려진 전투부대가 용약 전장에 진출하여 백병전을 벌린 전례가 있었다는 기록은 별로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진행한 유격전쟁에서는 녀성들이 간호원이나 재봉대원이나 취사원과 같은 보조적역할뿐아니라 전투원으로서의 사명도 동시에 감당해야 하였다. 일단 참군이 결정되면 녀성들도 무자비한 전쟁의 론리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전쟁은 녀성들이라고 하여 인도주의를 선사하지 않는다. 정세가 요구하면 남자들과 똑같이 무거운 장구류를 이고지고 며칠씩 강행군도 해야 하고 언땅에 배를 붙이고 포화속에서 싸움도 해야 하며 때에 따라서는 창격전에도 뛰여들어야 한다. 정치공작이나 식량공작을 위해 적구에 파견될수도 있고 살을 저미는것 같은 강추위속에서 토공일 같은것도 해야 한다. 엄동설한에 풍찬로숙하며 몇년을 싸워야 할지, 몇십년을 싸워야 할지 그것도 알수 없다.
이 모든 난관을 과연 녀성들이 감당해낼수 있겠는가? 이러한 사지판에 녀성들을 끌어들이는것이 과연 옳은 처사로 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마음을 정할수 없는 일이였다.

길림시절부터 우리의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동무들가운데는 나에게 참군의 의사를 표시한 녀성들도 적지 않았다. 한영애도 눈물을 흘리며 유격투쟁을 하게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그러나 나는 동만으로 나올 때 그를 억지로 북만에 떼두었다. 길림시절의 소년회원들가운데는 참군을 하고싶어 돈화에까지 따라온 녀자들도 있었고 중부만주에서 편지로 참군의사를 표명해온 녀동무도 있었다. 애국의 일념에 불타는 청들이였으나 나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였다.
녀자들이 무장투쟁에 참가하겠다는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그것은 남성들이나 할 일이다, 녀자들에게는 녀자들만이 하는 일이 따로 있다, 녀성들을 뒤고방에서 끌어내다가 사회혁명에 참가시키는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그들더러 어떻게 무장투쟁까지 하라고 하겠는가. 당시 나의 머리속에는 이런 생각이 없지 않았다.

무장투쟁준비가 성숙되고 여기저기에서 유격대들이 련이어 무어지게 되자 참군을 열망하는 녀자들의 목소리는 더 높아갔다. 지하조직들에서 활동하던 녀자들가운데는 남들이야 뭐라건말건 막무가내로 유격대에 들어와 승인도 없이 그대로 퍼더버리고 앉는 동무들이 적지 않았다.
형세가 이쯤되자 우리는 녀성들의 참군문제를 정식으로 론의에 올리지 않을수 없었다.

녀성참군문제가 화제에 오르자 일부 기혼자들은 두마디안팎에 그 가능성을 부정해버리였다. 녀성들은 집안일을 보고 남성들은 집밖의 일을 보는것이 조상전래의 관례이다, 리관린이 한때 피스톨을 차고 독립군을 따라다닌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천에 하나나 있으나마나한 경우이고 보통녀성들이야 어떻게 험한 산발을 타고다니며 남자들도 감당키 어려운 유격활동을 하겠는가, 녀자들을 전쟁마당에 끌어내는것은 모험이라고 하였다. 지어 어떤 동무들은 녀성참군문제는 론의할 여지조차 없다고 우겨대였다.

그러나 차광수를 비롯한 다른 동무들은 그런 주장들을 즉석에서 일축해버리였다. …당신들은 인류력사에 모권제가 오래동안 존재해왔고 그 모권제의 그늘밑에서 남자들이 녀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온 시대가 있었다는걸 인정하는가?
자식이 불속에 들면 그속에 선참으로 뛰여드는것도 녀자이다, 항차 나라가 피눈물에 잠겼는데 녀자라고 왜 가만히 앉아있겠는가, 녀성참군은 우리 누이들자신의 요구일뿐아니라 시대의 부름이라는걸 알아야 한다.…

결국 녀성참군에 대한 론쟁은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매번 공전만 거듭하였다. 우리는 남성청년들로 유격대를 조직한뒤에 형세를 봐가며 후날 다시 의논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미루어버린 녀성참군문제가 아무런 의견충돌도 없이 모두의 지지속에 매듭을 지을수 있게 되였는데 그 계기로 된것은 무장을 탈취하기 위한 간도녀성들의 투쟁소식이였다. 화룡현의 대담무쌍한 두 녀성이 빨래방치로 일본순사를 까눕히고 보총을 빼앗아냈다는 희소식이 날아들어 녀성참군을 반대하던 사람들의 입을 봉해버리였다. 온 간도가 무장을 해결하기 위해 떨쳐나서던 때였다.

조직을 통하여 무기획득의 중요성과 절박성을 깨달은 18살의 나어린 처녀 김수복은 적의 무장을 빼앗아낼 방도를 모색하던 끝에 자기의 짝패처녀와 함께 빨래함지를 이고 강가의 외나무다리목으로 나갔다. 며칠전의 장마비에 다리는 떠내려가고 말뚝만 남아있는 빈 다리목이였다. 두 처녀는 종일토록 거기서 빨래하는 시늉을 하며 알맞춤한 기회를 노리였다. 해질녘이 거의다 되여서야 일본경관 한놈이 나타나 처녀들에게 자기를 업어 강을 건네달라고 호령하였다. 김수복이 경관을 업고 강물에 들어서자 짝패처녀도 부축해주는체하면서 그를 따라나섰다. 강심에 이르자 김수복은 신발이 젖는다고 발버둥치는 경관을 물속에 처박고 빨래방치로 란장을 쳤다. 학살당한 부모들의 이름으로 원쑤를 료정내고 무기를 빼앗은 두 처녀는 1933년 여름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였다. 그때부터 김수복에게는 《빨래방치》라는 별명이 붙었다.

후날 우리 주력부대에서 재봉대책임자로 공작한 박수환도 역시 빨래방치로 적병을 까눕히고 무장을 빼앗아낸 녀성이였다. 여러명의 녀성들이 짜고들어 경찰놈들에게 술을 먹이고 단꺼번에 여러자루의 무기를 빼앗아낸 실례도 있었다.

그 어떤 증서도 그들이 빼앗아낸 무기처럼 우리 녀성들이 도달한 새로운 정신적높이와 의지를 힘있게 증언할수는 없을것이다. 조선의 북부국경지대와 만주의 여러 지역에서는 녀성들이 자기 힘으로 탈취한 총을 손에 잡고 무장대오에 뛰여들고있었다.

녀성들의 이 급진적인 진출과 의미심장한 변화는 무엇을 말하여주는가? 어찌하여 푸성귀나 가꾸며 팔자를 한탄하던 녀성들이 수백년동안 자기들을 비끄러매고있던 봉건의 질곡을 대담하게 타파하고 용약 무력항전에 참가하는 경지에까지 도달하였는가? 그것은 손에 총을 잡고 나서는 길외에는 달리는 살수 없는 조선녀성들의 엄혹한 생활이 마련해준 필연적인 귀결이였다.
녀자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은 속박의 사슬과 원한뿐이였다. 조선의 봉건사회가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의 하나는 남존녀비를 계률로 삼아 모든 녀자들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구속하고 천대한것이다. 녀자는 아이를 낳고 음식이나 지어바치고 손이 오리발이 되도록 밭을 가꾸고 길쌈이나 하는 집안의 머슴과도 같이 치부되고있었다. 젊어서 남편을 잃어도 홀몸으로 늙어죽어야 하는것도 녀자였고 빚값에 팔려가는것도 녀자였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이 모든 불행우에 녀성의 도구화, 상품화라는 불행을 덧얹어놓았고 망국노라는 치명적인 락인을 찍어놓았다.

항일혁명은 그 모든 액운과 부조리의 근원을 송두리채 쓸어버리는 폭풍이였으며 이 나라 녀성들을 혁명의 길로 인도해준 세기적인 사변이였다. 조선의 녀성들은 펜이 아니라 선혈로써 대지우에 자기의 새 력사를 쓰기 시작하였다.
녀성참군자수가 늘어남에 따라 우리는 그들을 더 잘 보살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비록 총은 잡았어도 녀성은 역시 녀성인것만큼 유격전쟁을 하는 어려운 조건일망정 녀성고유의 생활을 유지해나갈수 있도록 해줘야 하였다.

유격대오에 녀성대원들이 생긴 때로부터 우리는 언제나 누이동생들을 돌보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특혜를 베풀어주었다. 총도 제일 좋은것을 주었고 잠자리도 제일 아늑한곳에 정해주었으며 전리품도 제일 훌륭한것으로 골라서 분배하였다.

이러는 과정에 나는 그 특수우대의 격을 한층더 높여 녀대원들로 따로 대오를 편성해줌으로써 그들의 생활단위와 군사행동단위를 일원화해야 할 필요를 느끼였다. 녀대원들만으로 따로 중대를 조직하게 되면 그들의 혁명적자부심과 열의도 한층더 높여줄수 있고 자각성과 전투력도 최대한으로 발양시킬수 있으며 생활상 불편도 덜어줄수 있다고 보았다. 전투원이 되게 해달라, 총을 잡고 아버지, 어머니, 오빠를 학살한 원쑤놈들을 다문 몇놈이라도 잡아서 원한을 풀어야 하겠다는것이 녀대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였다. 재봉대에 가도 병원에 가도 작식대에 가도 녀대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런 간절한 소망을 말하였다.

우리가 사령부에 직속된 녀성중대를 따로 꾸려야겠다고 확고히 결심한것은 무송에 나와 새 사단을 꾸릴 때였다.
그때 우리가 새 사단의 골간으로 삼은 100여명의 《민생단》혐의자들가운데는 장철구, 김확실을 비롯하여 녀대원들이 적지 않았다.

《민생단》혐의자료들이 불타 없어지고 어제날의 《민생단》혐의자들이 모두 무죄선언을 받았다는 소식이 날아가자 사처에 숨어있던 《민생단》련루자들이 우리를 찾아왔는데 그들가운데도 적지 않은 녀성들이 끼여있었다. 리계순, 김선, 정만금 등이 그런 녀성들이였다. 이불보따리를 이고 나타난 박록금처럼 개별적으로 찾아온 녀대원들도 여럿이였고 대첨창과 오도양차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다가 새 사단에 편입한 군소부대와 함께 집단적으로 참군한 녀대원들도 여럿이였다.

우리가 미혼진밀영에 갔을 때 그곳 재봉대에 있던 김철호와 허성숙이 전투부대로 돌려달라고 어찌나 성화를 먹이는지 아무리 설복하여야 막무가내였다. 재봉대전원이 다짜고짜로 우리를 따라나서겠다는것이였다. 동무들이 우리를 다 따라나서면 군복은 누가 지어주겠는가고 하니 자기들을 대신할수 있는 병약한 녀대원들은 얼마든지 있다는것이였다. 알아보니 미혼진밀영에는 재봉대, 병원, 작식대들에 필요한 인원을 푼푼히 배당하고도 남을만큼 녀대원들이 많은것은 사실이였다.

남은 녀대원들을 전투중대에 배치하든가 아니면 그보다 더 실효성있는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래서 우리는 녀성중대를 시범적으로 따로 무어볼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미혼진의 녀대원들만 가지고서는 1개 중대를 무을수 없었다. 력량이 부족하였다. 나는 최현에게 앞으로 녀동무들이 한사코 요구하면 녀성소대를 하나쯤 무어보라고 귀띔하여주었다.
《순수 녀성들만으로 전투중대를 하나 따로 무어주면 어떨것 같소?》
어느날 내가 박록금에게 넌지시 이런 말을 비치자 그는 대뜸 환성을 올리며 절대찬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산호와 리동학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순 녀자들끼리만 무어가지고 전투랑 꽤 치러낼가요? 녀자들만 있어가지고서는 사나운 왜놈무리들과 맞서 변변한 싸움을 해낼것 같지 못합니다. 중대와 소대들의 지휘를 남성들이 맡아해준다면 몰라도…》
김산호의 말이였다.
《남성들이 지휘한다면 그걸 어떻게 녀성중대, 녀성소대라 할수 있겠소? 녀성중대면 지휘도 녀성들이 맡아하게 해야지.》
나는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글쎄,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동무네는 무슨 사관학교나 군사대학을 다녀서 지휘관이 되였소?》
김산호는 말문이 막히였으나 여전히 석연치 않아하는 눈치였다. 리동학도 《녀성중대라, 녀성중대라…》 하면서 머리를 기웃거리였다.

우리가 녀성중대에 대한 문제를 화제에 올리자마자 김주현은 펄쩍 뛰였다. 순수 녀성들만으로 중대를 편성하여 전투장에 내보내면 싸움을 망치고말터인데 그렇게 되면 조선인민혁명군의 위신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우리가 만강부근에서 녀성중대조직준비를 한창 하고있던 1936년 4월경에 불쑥 남녀혼성부대가 우리앞에 나타났다. 남녀혼성이라지만 그속에 남성대원은 4~5명뿐이고 나머지는 김철호, 허성숙, 최장숙, 황순희를 포함하여 전부가 녀성들이였다.
내가 김철호에게 동무는 앓는 최현동무를 내버리고 무슨 일로 여기 왔는가고 묻자 그는 바로 최현이 보내서 왔다고 하였다. 병을 털고 일어난 최현은 녀대원들이 자꾸만 전투원으로 돌려달라고 성화를 먹이자 그중 시끄럽게 구는 건강한 녀대원들만 따로 추려 소부대를 무어주면서 나한테 찾아가면 알도리가 있다고 하더라는것이다. 분명 녀대원들한테서 당하는 성화를 우리한테 밀어버리고 그들의 운명문제까지도 우리의 처분에 맡기자는 심산이였던것 같다.

김철호네 녀성소부대 대장은 조동무라고 부르는 애젊은 남성대원이였다. 햇병아리같은 신입대원이 녀성소부대의 대장으로 대렬을 인솔해온것이 어쩐지 부자연스러워 까닭을 알아보았더니 허성숙은 《우리 같은 치마들이야 뭐 최현동지의 안중에나 있습니까. 밥이나 시키면 고작이지 어디 대장질을 시키겠답니까?》 하고 볼부은 소리를 하였다.
그 녀성소부대의 부책임자도 역시 태병렬이라고 하는 키가 자그마한 애젊은 신입대원이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대렬을 관리하고 인도해온것은 키꼴이 장대한 최장숙이였다. 그는 총과 배낭외에도 쌀이 한자루 가득 들어있는 무쇠가마와 작식도구들, 도끼와 톱까지 지고왔는데 사람보다 짐이 더 컸다. 허성숙의 짐도 최장숙의것에 못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까지 유격대생활을 해오는 과정에 남녀를 불문하고 최장숙이와 허성숙이처럼 많은 짐을 진 대원은 나도 처음 보았다. 최장숙의 짐을 받아내리워주었는데 어찌나 무거웠던지 힘에 부쳤다.

《힘장사로구만!》
내가 못내 감탄하자 태병렬이 《그 누님은 한끼에 만두를 100개나 널름하였습니다. 60개를 널름하고 보초를 선 다음에 다시 40개를 더 꿀꺽했는데 아무 탈없이 다 소화시킨 녀장수입니다.》하고 벌쭉거렸다. 그바람에 폭소가 터졌다.
최장숙은 태병렬에게 눈을 흘기면서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였다.
《무슨 거짓말이겠소? 한끼에 만두 100개쯤 제껴대지 않고서야 이렇게 엄청난 짐을 져낼수 있겠소?》
내가 태병렬을 두둔해주자 모두들 또 한바탕 웃음판을 터쳤다.

그날 나는 슬쩍 남녀대원들의 힘내기를 조직하였다.
곰같이 힘이 세다고 공인돼있는 한 남대원을 불러내여 먼저 허성숙이 벗어놓은 배낭을 져보라고 하였다.
그는 호미자루로 잔뼈가 굵어졌다는 사람인데 왕청일판에서는 상등씨름군으로 소문났었다. 앉은자리에서 찰떡을 맹물에 묻혀 35개까지 먹었다는 떡보이기도 하였다.
그 대원은 허성숙의 짐을 지고 수월히 일어났다. 나는 토퉁 두자루를 메워주면서 그 짐과 총을 가지고 휴식없이 얼마만한 거리까지 행군할수 있을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이 한 10리쯤은 쉬지 않고 갈것 같다고 하였다.

다음은 최장숙의 짐을 져보라고 하였다. 장숙의 짐을 진 그는 땅을 짚고 가까스로 일어났다. 다시금 토퉁 두자루를 메워주며 이번에는 얼마만한 거리를 행군할것 같은가고 물으니 고작해서 5리쯤 갈수 있을것 같다는 대답을 하였다.
최장숙에게 그 짐을 지고 얼마나 행군했는가고 물어보자 그는 쑥스러워 말을 못하였다. 김철호가 그를 대신해서 대포시하에서 전투를 치른 다음 여기까지 쉼없이 행군해왔다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자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졌다. 대포시하에서부터라면 거의 100리나 되는 먼거리였다.

남대원과 최장숙의 힘내기에서는 최장숙이 이긴셈이였다. 나는 허성숙을 시켜 대포시하부근에서 녀성소부대가 겪은 전투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하였다.
허성숙은 얼굴이 거밋거밋하고 몸이 다부지게 생긴 녀대원이였다. 인정이 많은 대신 입이 무겁고 말수더구가 적었다. 그러나 요긴한 말은 꼭 하고야마는 곧고 대바른 성미였다.
최장숙을 《선봉장》으로 하는 녀성소부대는 우리를 찾아오던 도중 식량이 떨어져 고생하던 끝에 산중에서 어떤 반일부대를 만나 그들과의 공동작전으로 대포시하부근의 어느 집단부락을 기습하였다. 녀대원들은 그 전투에서 남대원들에 못지 않은 투지를 발휘하였다.

반일부대병사들은 좋은 신식총을 가지고있었으나 퇴각했던 위만경찰대가 반격을 가해오자 겁이 나서 뿔뿔이 도망쳤다. 하지만 최장숙이네 녀성소부대는 구식토퉁을 가지고서도 적들을 본때있게 족쳐댔다. 그들은 반일부대가 차지하고있던 계선으로 달려드는 적들까지도 다 도맡아 료정냈다.
특히 그날 보초를 섰던 녀대원이 아주 희생적으로 잘 싸웠다. 옆구리에 총상을 당하여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적들을 완강하게 견제하였다. 그의 총알에 맞아 여러명의 적병들이 연방 거꾸러졌다. 그러자 시체를 끌고 달아나는 놈들이 나타났다. 녀성전투원들은 함성을 지르며 돌격에로 넘어갔다. 반일부대대장은 도망치는 자기 부하들에게 《개자식들! 조선녀자들은 토퉁을 가지구두 저렇게 용감하게 싸우는데 너희들은 도망을 쳐.》 하고 고함을 질렀다. 대렬을 리탈했던 반일부대대원들은 그제서야 대오에 돌아와 추격전에 합세하였다. 전투는 승리적으로 결속되였다.
그 전투담을 듣고는 모두가 녀대원들의 용감성과 대담성, 견인불발성에 감탄하였다.

1936년 4월 만강부근의 수림속에서는 녀성중대의 탄생이 정식으로 선포되였다. 우리는 이 중대를 사령부직속으로 두고 소대와 분대들을 직접 편성해주었다. 첫 중대장으로는 박록금이 임명되였다.
녀성중대는 우리 나라 군건설력사상 처음으로 생겨난 녀성전투구분대였다.
녀성중대의 탄생은 수천년동안 고질화되여왔던 남존녀비사상과 인습을 타파하고 녀성들의 정신적지위와 사회적지위를 실제적으로 남성들과 동등한 수평선상에 올려세운 하나의 사변이였다.

예로부터 남존녀비가 가장 우심하게 적용되고 발현되였던것은 정치분야보다도 군사분야였다. 물론 정치분야에서 녀성들의 참정권은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마력과도 같은 녀성의 남성에 대한 은페된 지배력이나 영향력이 정치와 정치인들에게 미쳐 국가의 존망까지도 좌지우지한 실례는 허다하다.
하지만 정치분야에서는 때때로 제왕이나 군사령관보다 더 힘이 있었다고 하는 녀성들도 군사분야에 들어가서는 별로 맥을 추지 못하였다. 군사는 거의 남성들의 독점물로 되여왔다. 우리는 군사분야에서 남녀평등을 실현함으로써 비록 우리 혁명군에 국한된것이기는 하지만 녀성해방을 실제로 이룩하였다.

녀성중대의 출현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전민족적인 폭과 인민적인 성격을 뚜렷이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또한 의의가 있었다.
혁명군에 녀성중대가 있고 그 녀성중대의 대원들이 남성군인들 못지 않게 잘 싸운다는것은 미구에 전민족이 다 아는 사실로 되였고 세계를 경탄시키는 의의있는 화제거리로 되였다.

1930년대 후반기 우리 나라의 국내신문에는 《김일성부대에는 녀대원도 10여명》이라는 보도기사가 실린적이 있었다. 짤막한 글이였지만 그 기사가 우리 인민들의 마음속에 던진 파문은 대단히 컸다.
녀성들이 남성들과 똑같이 손에 총을 잡고 항일무장대오에서 용감하게 싸운다는 소식은 조선의 모든 녀성들과 인민대중을 힘있게 고무추동하였다. 그 소식은 국내와 해외에서 인민혁명군에 입대할것을 열망하는 수많은 참군지망자들을 낳게 하였다.

우리는 녀성중대를 조직한후 그가 제발로 걸어나갈수 있도록 세심히 돌봐주고 이끌어주었으며 실전을 통하여 그들을 단련시키였다. 녀대원들의 정치적열의와 자각성을 높여주기 위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을 감화시킬수 있는 이야기도 해주군하였다.
소탕하에 머무를 때 녀성중대원들에게 김스딴께위츠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던것이 생각난다.
김스딴께위츠란 로씨야에서 나서자라 전생애를 공산주의위업에 바친 이름난 조선인녀성투사이다. 그의 본적지는 함경북도 경원군(새별군)이였다.
그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일찌기 소학교 교사가 되였으나 로령으로 찾아오는 교포들과 망명자들의 수가 늘어나자 교원생활을 그만두고 울라지보스또크에 가서 로씨야 각지에 널려있는 조선인로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

짜리가 타도된후 볼쉐위크당에 가입한 김스딴께위츠는 남편과 아이들을 집에 남겨두고 10월의 전취물을 수호하기 위한 직업적인 혁명의 길에 나섰다. 그는 하바롭스크에 있는 볼쉐위크당 원동부에서 대외사업을 맡아보는 한편 조선인독립운동자들인 리동휘, 김립 등을 추동하여 한인사회당을 조직하도록 열정적으로 떠밀어주었다.

김스딴께위츠의 눈부신 활동은 연해주지방은 물론, 로씨야에 있는 모든 조선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냈으며 적극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원동의 형세가 반혁명에 유리하게 전변되고 볼쉐위크당 원동부가 하바롭스크에서 철수하게 되였을 때 김스딴께위츠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뒤처리를 마무리한 다음 기선을 타고 떠나다가 불행하게도 아무르강에서 백파도당에게 체포되여 총살당하였다. 최후순간을 앞두고 그는 적들을 향하여 절규하였다.
《나는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이다. 비렬하고 악독한 너희들의 운명도 오래지 않다. 상가집 개무리가 공산주의를 무너뜨린다는것은 망상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34살이였다.

김스딴께위츠와 함께 설죽화, 계월향, 류관순, 리관린 같은 명인녀걸들도 우리 녀대원들의 친근한 정신적벗으로 되였다.
녀성중대는 세상에 태여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들은 어디에 가나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독차지하였다. 오각별이 빛나는 군모를 쓰고 어깨에 기병총을 멘 녀대원들의 모습이 먼발치에 얼핏 나타나기만 해도 사람들은 《녀자군대가 왔다!》고 소리치면서 동네방네를 뛰여다니였다.

녀성중대가 사람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게 된것은 우선 녀대원들이 어떤 정황에서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도덕품성을 가지고 성심성의로 인민을 도와주고 존대하면서 처신을 잘한데 있었다. 우리는 어느 부락에 주둔할 때나 주인집 뜨락을 쓸어주고 물을 길어주고 설겆이를 해주고 터밭의 김을 매주는 녀대원들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
녀대원들은 인민들앞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연설도 하고 글도 가르쳐주었다. 녀성중대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자랑이였고 진귀한 꽃이였다.

사실 발족초기의 녀성중대는 무기가 변변치 못하였다. 대부분이 구식토퉁이였는데 개중에는 그런 총마저 못가진 대원도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가볍고 맵시있는 기병총을 메워주려고 작정하였다. 그래서 몇차례 전투도 조직했지만 기병총은 좀처럼 맞다들지 못하였다.
그러던중 시난차부근에 주둔하고있는 위만군수비대가 말을 타고 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였다. 정찰을 통하여 그 수비대가 병실공사를 벌리고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나는 공사장습격전투를 결심하고 그 과업을 녀성중대에 맡기였다. 그리고 그들을 고무해주려고 공사장 가까이에까지 같이 갔다. 그 전투가 아주 인상적이였다.

금시 비가 억수로 쏟아져내릴것 같은 날씨여서 적병들은 작업을 중지하였고 보초병도 경계를 늦추고있었다. 박록금중대장이 울린 신호총성과 함께 공사장근처에 매복해있던 녀대원들은 비호같이 달려나가 적들의 가슴에 총구를 들이댔다. 여기저기에서 《손들엇!》, 《손들엇!》 하는 녀대원들의 야무진 호령소리가 들려왔다. 적병 하나가 총가에서 총을 꺼내들고 반항을 시도했으나 장정숙이 날쌔게 총탁으로 까눕히였다. 전투는 10분도 못되는 사이에 결속되였다.몇명을 살상하고 나머지는 전원 포로하였다. 전투에서 수십정의 저격무기들을 로획했으나 아쉽게도 전리품들중에는 기병총이 한자루도 없었다. 포로들의 말에 의하면 기병총은 기마순찰을 나간자들이 다 메고갔다는것이였다. 포로들은 자기들을 습격하고 사로잡은것이 녀성유격대라는 사실앞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녀성중대는 그후 여러 전투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웠다. 대영전투와 동강전투도 녀성중대가 특출한 솜씨를 발휘한 전투였다.
그들은 어느 전투에서나 잊을수 없는 무훈담을 남기였다. 장정숙은 대영전투때 총알이 아까와서 적보초를 주먹으로 단매에 쳐눕히고 돌격로를 열었다. 김확실을 비롯한 3명의 녀대원이 어스름한 달빛속에서 각각 한발씩 총을 쏘아 적의 경비전화선을 잘라버렸다는 신비한 이야기는 동강전투가 남긴 기담이다. 력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녀성중대의 활동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관하의 함경남도 경찰부가 여러건의 기록을 남기고있다고 한다. 거기에는 김일성부대의 부녀대원 박록금이하 40여명이 소화 11년(1936년) 음력 5월초순경 무송현 시난차의 위만군수비대를 공격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같은 시기에 그들이 대영을 습격하여 장총 10여정과 군복 등을 로획해갔다는 사실도 기록되여있다. 녀성중대가 진행한 무송현 동강전투에 대한 기록도 있다.

조국을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친 항일혁명렬사들의 군상을 돌이켜볼 때마다 나는 그 군상의 한복판에 있는 녀성중대원들과 대담무쌍한 녀장부들을 추억하게 된다.
녀성중대의 첫 중대장 박록금은 중대를 잘 통솔하였다. 많은 전우들은 박록금의 특징을 단마디로 녀장부라고 규정하였다.
박록금이 지금의 41문짜리 지하족을 신고 다녔다고 하면 아마 깜짝 놀라는 사람들도 있을것이다. 유격대의 전리품들중에 지하족 같은것이 많았지만 그렇게 큰것은 드물었다. 그래서 박록금은 초신을 많이 신고다니였다.

박록금은 왕청에 있을 때 구부녀회주임까지 한 경력을 가지고있는 녀성활동가였다. 집살림이 얼마나 가난했던지 결혼할 때 이불 한채 마련하지 못하고 누데기차림으로 혼례를 치르었다. 남편 강증룡이네 집안도 역시 살림이 째지게 가난해서 신랑신부가 첫날 덮고잘 이불조차 마련해주지 못하였다. 부부는 한날한시에 입대하여 왕청유격대 1중대에 배속되였다.

어느날 1중대 정치지도원은 나를 찾아와 박록금이 방금전에 해산을 하였는데 그가 가있는 친정집에는 포대기 하나 만들만한 천조차 없다고 걱정하였다. 그 말을 듣고 부랴부랴 가보았더니 정말 이불은 고사하고 그 비슷한것도 보이지 않았다. 홀아비살림에 딸의 시중까지 드느라고 쩔쩔 매던 박록금의 아버지는 자기네는 란리통에 너무나 여러번 곤두박질을 하다보니 이불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까마득하다고 하였다. 갓난애기는 헌누데기에 싸여있었다.

나는 곧 소부대를 파견하여 이불과 포단 감을 마련하였다. 재봉대원들은 밤을 새워가며 그 천으로 두툼하고 푹신한 이불과 애기포단, 애기옷을 마련하여 보내주었다.
그런데 박록금이네 부부는 애기옷과 애기포단은 갓난애에게 입혀주고 덮어주면서도 이불만은 쓸 생각을 하지 않고 큼직한 보자기에 싸서 궤짝우에 고이 얹어두기만 하였다. 살을 에이는 혹한에 등뼈가 가드라들 때에도 그것만은 다치지 않았다.

강증룡이 7중대 소대장이 되여 안도독립련대로 떠나간후부터 줄창 왕청부대에서 생활해온 박록금은 남편이 속한 부대가 우리 부대에 편입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올 결심을 하였다. 그는 친정집을 떠날 때 우리가 해준 이불을 아버지에게 넘겨주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김대장이 너희들을 위해 마련해준 소중한 이불인데 너희 부부가 덮어야 한다면서 기어이 그 이불을 가지고 떠나게 하였다.
박록금이 이고온 이불보따리는 그대로 그의 별명이 되고말았다. 전우들은 이름대신 그를 《이불보따리》라고 불렀다.

박록금은 겉보기에는 성미가 무뚝뚝한것 같았지만 속이 깊고 인정미가 있는 녀성이였다. 붙임성이 좋아서 지하공작에도 적임자였다.
이런 점을 참작하여 1937년초에 우리는 그를 장백현 신흥촌에 정치공작원으로 파견하였다. 그의 임무는 권영벽과 리제순을 도와 장백현 상강구일대의 녀성들을 조국광복회조직에 묶어세우는것이였다. 박록금은 그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하던중 불행하게도 적들에게 체포되여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는 리제순처럼 남들이 한 일까지 자기가 다했다고 진술함으로써 적지 않은 혁명가들을 감옥에서 석방시키였다. 고문으로 피투성이가 된 동지들이 맥을 놓고 감방안에 쓰러져있을 때면 혁명가요를 불러 그들을 일으켜세웠다.
박록금이 혜산경찰서에 갇혀있다가 함흥형무소로 이송되였을 때 적들은 그를 결핵환자가 있는 감방에 밀어넣었다. 병에 전염되여 감옥귀신이 되라는것이였다. 그 결핵환자는 정평농조사건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된 김가성을 가진 녀성이였다. 박록금은 일신의 건강같은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중태에 놓여있는 그 녀성을 살붙이처럼 간호해주었다.

사경에 이른 그 녀성은 얼마후 병보석으로 놓여나갔는데 그대신 박록금이 병에 전염되여 눕게 되였다. 가석방된 그 녀성의 가족들이 신세를 갚는다고 하면서 명주저고리와 떡을 해가지고 감옥으로 찾아왔으나 감옥당국은 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평생 남을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랑을 기울여온 이 인정많은 유격대의 녀장부는 그 녀성이 죽음을 앞두고 마련한 눈물겨운 지성마저도 받아보지 못하고 모진 병에 시달리다가 옥중에서 눈을 감았다.

우리의 녀대원들중에는 마동희의 누이동생 마국화도 있었다. 그는 우리가 서간도지방에 나가서 활동할 때 17도구 평강덕에서 우리 부대 정치공작원인 김세옥의 영향을 받아 유격대에 입대하였다. 김세옥은 마국화의 스승인 동시에 애인이기도 하였다. 조국의 해방을 성취한 다음에 가정을 이루기로 약속한 그들은 모든것을 미래에 맡겨두고 오로지 혁명을 위해서만 분투하였다.

어느날 작식공작을 하던 마국화는 부엌에서 강낭죽을 퍼서 전우들에게 나누어주다가 두사람 몫이 모자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두몫중 한몫은 자기가 굶으면 되는데 나머지 한몫은 누구를 굶겨야 하는가. 이런 어려운 사정앞에서 마국화는 망설이기만 하다가 김세옥의 량해를 받아볼 결심을 하였다.
그는 병실밖으로 김세옥을 불러내다가 딱한 사정을 하소하였다.
《세옥동무, 량해하세요. 오늘저녁만은 동무의 몫이 없는걸로 여기고 굶어주세요. 참 안됐어요.》
《안되다니? 이런 때에야 응당 내가 굶어야지. 그대신 조국이 해방된 다음에는 매끼 곱배기를 한다는걸 미리 선언하는바이요.》
김세옥은 이런 롱까지 하고나서 밝은 낯으로 돌아섰다.

그날밤 마국화는 맹물로 끼니를 굼땐 애인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자기가 굶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둘 다 조국광복의 날을 보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마국화가 전사한후 녀대원들은 그의 배낭속에서 한쌍의 학을 수놓은 이불거죽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마국화가 궂은 비와 눈속에서 마련한 결혼지참품이였다.
세상에 이보다 값지고 이보다 슬픈 지참품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녀전사는 거치른 황야에 쓰러지고 꽃피지 못한 꿈만 이국땅에 남았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녀대원들은 그 이불거죽으로 고인의 시체를 감싸주었다.

녀성중대는 탄생후 반년 정도밖에 존재하지 못하였지만 조국이 영원히 기억하고 인민이 길이길이 따라배울 불멸의 위훈을 남기였다.
항일혁명의 1선에서 무장을 잡고 강적일제를 상대로 하여 피어린 싸움을 벌려온 녀전사들이야말로 현대 조선녀성들의 빛나는 귀감이며 인류해방투쟁사에서 참다운 전형으로 내세울수 있는 녀성영웅들이다. 그들은 녀성들의 사회적, 인륜적 평등을 남먼저 이룩하고 우리 나라 녀성해방의 길을 피로써 개척한 선구자들이였다.

우리 로동당시대는 항일혁명투쟁시기 녀성중대원들이 발휘한 백두의 혁명정신과 투쟁전통을 이어받은 무수한 녀성영웅들과 녀성활동가들, 녀성로력혁신자들을 배출하였다. 안영애, 조옥희, 리수덕, 리신자, 정춘실 등을 비롯하여 우리 시대가 낳은 녀성영웅들의 사고와 실천을 지배한것은 백두의 넋이였다. 우리의 수백만 녀성들은 오늘도 이 넋으로 이 땅에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릴수 없는 사회주의보루를 쌓아가고 있다.

오늘 우리 인민군대에는 항일의 혁명전통을 이어받은 수많은 녀성구분대들이 있다. 총을 잡고 조국의 방선을 지키고있는 녀전사들은 비단 인민군대의 녀성구분대들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로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들에도 총을 잡은 녀대원들이 수두룩하다. 전민무장화를 실현한 우리 나라에서는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있는 1,000만의 녀성전체가 유사시에 조국의 촌토를 사수하기 위하여 총을 잡고 싸울 준비가 되여있다. 
이 1,000만 녀성무장대의 원형이 바로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직속 녀성중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