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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노래, 독립의 노래
– 항일음악회 ‘다시 부르는 독립의 노래’를 보고

송복남 경기고양파주지부 회원

 

종종 생각한다. 길을 걷다가 혹은 누군가 물어온 길을 알려주거나 앞서 걷는 다른 이의 등을 보며. 그것은 일종의 측은지심이거나 익명의 사람에 대한 애틋함인지도 모른다. 뒤따르는 막연한 후회감도 감출 수 없다. 그 감정이 순간의 감흥이거나 감상 따위가 아니기를 바라서다. 하지만 매일 보고 스치고 이야기를 나누는 다른 사람들.
사람에게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지나온 이야기일 수도 있고 이제 막 써내려가기 시작한 흥미진진한 이야기일 수도, 또 앞으로 쓰일 이야기를 디자인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지난 이야기들. 거기에는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 아는, 타인에게는 감쪽같이 묻혀버린 그만의 시간이 존재한다. 그의 감정과 흥분과 슬픔과 때론 분노와 절망 나아가 희망 같은 것들. 그 지점에 이르면 비로소 측은지심이 생긴다. 세상에는 정말 아무도 모르는 온전한 개인 순수의 경험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누군가가 알아주기도 전에 묻혀버린 알 수도 없는 무(無)로서의 존재.
항일음악회를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름 없이 성도 없이 만주 벌판에서 산골짝에서 죽어간, 그 적막하고 두려운 공포의 시간을 온전히 감내해야 했던 그 시대 그 사람들의 지난 이야기들. ‘다시 부르는 독립의 노래’, 언젠가 누군가 부른 누군가와 같이 부른 노래. 노래가사들은 하나같이 독립을 이야기한다. 일제를 무찌르기 위해 싸우러 나가야 했고, 싸우기 위해 군가를 불렀다. 하지만 그 노래와 리듬에서 전투를 상상하지 않았다. 이상하지만 노래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불타오르는 누군가의 사랑의 속삭임. 한참 뒤 알았다. 그때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진정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전투를 하러 나가는 사람들의 노래가 사랑노래처럼 들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 민요를 빌린 ‘애국가’를 타국의 노래처럼 듣지 않고 우리 가슴속 울림처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아일랜드 목동의 하루를 노래한 ‘목동가’가 결코 목가적으로 들리지 않았던 것도, 등잔 밑의 형제를 구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자던 ‘압록강행진곡’이란 한국혁명군의 출전가가 사랑을 고백하러 가는 여정처럼 느껴진 것도. 진정 누군가를 그 무엇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결코 그렇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절박함, 거기에는 조급증이나 우울, 천한 분풀이가 없다. 오로지 신명뿐이다. 타국의 리듬이 결코 다른 소리로 들리지 않았던 것은, 우리 몸의 신명이 그 리듬을 불러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랑과 신명은 동의어 같기도 하다. 밀양아리랑과 경기아리랑과 정선아리랑을 모두 합친, 오래전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부르던 아리랑 노래. 토하듯 긁어 올리듯 부르는 아리랑 노래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사랑은 절박함이 있을 때 더욱 빛난다. 평소 삶이 지속적으로 그것을 요청하고 있을 때, 비로소 절박함은 노래가 된다.
‘다시 부르는 독립의 노래’는 이미 오래전 자신의 몸을 던져 사랑한 사람들,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의 애틋하고 힘 있는 노래다. 훗날 누군가 당신의 삶을 기억할 때 그 삶에서 사랑을 느끼게 될까. 내 삶에는 내 노래에는 얼마만한 사랑이 담겨 있을까. 자신이 없다. 그러면 노래를 부르자, 사랑노래를.

 

우리는 한국혁명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