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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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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사노이에 전경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평화와 교육, 환경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전쟁과 평화를 생각하는 자료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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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평화박물관’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15년전쟁’(1931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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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사노이에 전시장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피해’와 ‘가해’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저항’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간도 빨치산의 노래’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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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교 문집과 ‘간도 빨치산의 노래’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이라는 말처럼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헌법의 숲’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박물관’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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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노보효 전시관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사사노보효’라는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고겐지(光顕寺)’에서 수십 개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도 여러 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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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平善彦) ‘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 대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화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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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를 띄우자’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蔡鴻哲, 현재 강제연행·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화장인허가증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한일대학생공동워크숍’(이후 2001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70년만의 귀향’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70년만의 귀향’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