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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지부 전봉호변호사의 아침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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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지부 전봉호변호사의 아침편지

익명 (미확인) | 월, 2016/04/11- 10:01

아침편지-2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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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인터뷰이 중에 가장 긴장한 모습의 박민제 변호사였습니다. 편하게 수다 떨 듯이 이야기하면 된다고 하는데도 간간이 떨리는 손과 목소리, 수줍어하며 빨개진 얼굴 때문에 나도 긴장하며 좀 더 진지하게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분이 국회와 청와대를 주름 잡고, 지금의 아내와 만난지 한 달 만에 프로포즈를 했다니 역시 사람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 되나봅니다^^

 

박민제

 

김지미 우리 인터뷰의 첫 공식질문이죠, 저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박민제 저는 다른 변호사님하고 다르게 평범한 사람인 것 같아요. 오히려 평범한 사람이 인터뷰를 하면 나중에 인터뷰를 하는 사람이 부담이 덜하실 것 같아서. 그래서 이번에 좀 컨셉을 바꾸시지 않으셨나(웃음). 저는 사법위원회 활동을 하고 있는 박민제 변호사입니다. 변호사가 되기 전에는 국민의 정부 때 국회에 입법비서관으로 있다가 참여정부 들어서면서 국회 쪽 업무를 해야 할 사람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그 티오로 해서 참여정부 행정관으로 들어가서 대통령 임기 끝까지 있다가 순장을 했습니다. 순장 아시나요? 대통령 임기가 끝남과 동시에 같이 묻혀버렸죠(웃음).

 

김지미 변호사님이 변시 3회시죠. 변호사로서는 2년차이지만 연식은 좀 되셔서(웃음) 변호사가 되기 전에 무슨 일을 하셨는지 상당히 궁금했는데 이거는 차차 물어보기로 하구요. 39살에 로스쿨에 들어가신 건데 뒤늦게 로스쿨을 들어가신 계기가 있을까요?

 

박민제 대통령 임기 끝나고 뭘 해야 하나 고민을 했습니다. 국회에서 다시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아서 하룻밤을 꼬박 세면서 의원실로 다시 돌아갈까 고민을 좀 했었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해서 응원을 해 주셔서 로스쿨을 들어가게 됐습니다.

 

김지미 학부가 고대 법대이잖아요. 법대를 갔을 때는 고시에 대한 생각도 있었을 것 같은데 사회 첫발을 국회 입법비서관으로 내딛게 된 이유가 있나요?

 

박민제 고시에 대한 생각도 있었습니다.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근데 몇 번 시험을 봤는데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아는 분을 통해서 입법비서관 제의를 받았는데 입법이라는 게 정책을 제도화 하는 것이잖아요. 입법을 통해서 국민들한테 체감도 높은 정책이 구현될 수 있는 거니까. 사회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김지미 입법비서관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건가요?

 

박민제 의원입법 관련해서 의원님 보좌하고 그러는 거죠. 제가 환경노동위원회와 국방위원회였었는데요, 거기에 환경노동위원회 관련 단체나 국방위원회 관련 단체 의견 수렴을 해서 입법이나 의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김지미 입법비서관 시절에 변호사님이 관여했던 입법안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뭐가 있을까요?

 

박민제 고용보험법이나 모성보호법, 군인연금법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김지미 국회에는 몇 년 동안 계셨던 거에요?

 

박민제 2001년부터 2003까지 있다가 2004년에 청와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김지미 청와대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죠?

 

박민제 청와대에 있을 때는 4개 부서에 있었습니다. 총무비서관실하고요, 시민사회비서관실, 정책조정비서관실, 그리고 정무비서관실에 있었습니다.

 

김지미 청와대의 인사시스템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데 원래 이렇게 순환 보직을 맡게 되는 건가요?

 

박민제 전보제도가 1년 단위로 있었던 것 같아요. 국회에 대통령 비서실 대응하는 상임위가 운영위가 있어요. 처음엔 국회 운영위·예결위에 대해서 대응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해서 총무비서관에서 그 업무를 했습니다.

 

김지미 국회 경험이 있어서 총무비서관에서 시작을 하셨고 그럼 시민사회비서관실은 어떤가요?

 

박민제 시민사회비서관실에서는 시민단체 현안 이슈 같은 거 모니터링하고 점검하고요, 그 다음에 현안보고서도 쓰고, 그 다음에 자원봉사단체 지원하고 그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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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저희 회원들 중에 다양한 경험을 가지신 분들이 많은데 청와대에 있으셨던 분은 처음 인터뷰하는 거라 궁금한 게 많거든요. 참여정부 시절에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 생활하시는 분은 어땠을까 싶기도 하구요. 청와대 행정관의 하루는 어땠나요?

 

박민제 보통 아침 8시쯤에 비서실장 주재 회의가 있어요. 그러면 그 전에 행정관들이 돌아가면서 회의에서 논의될 안건 같은 것을 미리 확인을 해요. 회의가 끝나면 지시가 내려집니다. 현안보고를 해라, 부처를 통해서 상세하게 알아봐라. 그런 현안들은 실시간으로 바로 보고가돼야 하구요, 대통령 공약 같은 장기과제는 시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간 내에 과제에 대한 보고를 완료해야 됐었고, 그 보고가 시한 내에 완료 안됐을 때는 국정상황실에서 빨리 그것을 마련하라고 하는 그런 것도 있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 특별했던 것은 국가주요정책과 관련한 법안이나 예산이 좀 많이 소요되는 법안 이런 것들을 중점 관리 법안으로 선정을 먼저 했어요. 비서실하고 관련부처하고 같이 선정을 한 다음에 그 법안의 통과를 위해서 여러 부처와 같이 유기적으로 추진 체계를 구축하고 대통령님 주재 회의나 비서실장 주재 수석 비서관 회의 때 계속 보고를 했습니다. 아주 숨 가쁘게 진행이 됐었죠.

 

김지미 변호사님이 근무하실 때 주력했던 법안인데, 그게 결국은 법률이 돼서 지금 시행되고 있는 법안들이 있을까요?

 

박민제 로스쿨 법안(웃음).

 

김지미 직접 수혜를 받으셨군요.

 

박민제 그 로스쿨 법이 되게 어려웠어요. 박근혜 대통령이 그것을 사학법 하고 연결을 시켜서 끝까지 통과가 안 되다가 2007년도에 아마 통과가 됐을 거에요. 그런 법안도 있었고. 그리고 국가재정의 기반을 혁신하기 위한 국가재정법과 자원활동 인프라를 구축하고 지원하기 위한 자원봉사활동기본법 등이 있었어요.

 

김지미 아까 말씀하신 것 중에 입법이 정책을 제도화하는 것이라 중요하다는 부분이 굉장히 와 닿는데 최근 입법의 중요성에 대해서 공감을 하시는 분들이 많아져서 로펌들도 그 분야에 집중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공익입법운동을 시작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개인적으로 일반적으로 어떤 변화를 이끌어 내려면 결국은 제도로 구현이 되어야 하고 그 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은 법률이기 때문에 입법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이 깨닫고 있거든요. 어떤 제도가 법률로 규정이 됨으로서 실생활에는 아주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 있다. 그런 리딩케이스 같은 게 있을까요.

 

박민제 그것보다는 역사적 과제나 시대적 과제를 안고 살아야 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짧지 않은 인생이니까 과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역할을 찾는 것이 중요할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기존에는 시민들이 권력의 객체에 머물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시대에서는 주체적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시민들이 주체적 참여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입법과정에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러기위해서 입법과정에 제도적으로 시민참여를 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실질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이고, 그런 부분에서 앞으로 과제를 좀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입법 과정에서 시민들이 어떤 방식으로 참여를 할 수 있을까요?

 

박민제 시민들의 입법제안 같은 것들이 형식화 되지 말고, 공청회 제도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부여되어야 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 되어야 하겠죠. 또 지방자치가 실질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연결되잖아요. 민주주의가 지역의 삶의 제 영역으로 실현되는 것이 지방자치인데, 사실상 아직 자치입법 같은 경우에는 민주주의와 맥락이 닿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비한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자치입법 과정에서 특히 주민참여가 강화 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김지미 이와 관련해서 ‘지방의회 입법활동의 현황분석과 개선방안 연구’ 라는 논문도 쓰셨죠? 이쪽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박민제 네. 청와대에 있을 때에 업무경험을 바탕으로 썼었던 논문입니다.

 

김지미 대통령 비서실장 모범 표창도 받으셨어요? 이건 혹시 청와대에서 근무하면 다 받는 건가요?(웃음)

 

박민제 그건 아닌데, 대부분이 받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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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그럼 청와대에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5년을 있으셨죠? 이건 개인적인 질문인데요,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근거리에서 접해보신 분으로서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내가 옆에서 보니까 이 부분이 너무 훌륭하더라. 혹시 이런 점들이 있을까요?

 

박민제 단적인 것은 대통령이 참모들보다 더 뛰어나셨습니다. 항상 의제를 먼저 제시하고 그리고 참모들이 보고를 했을 때 문제점들을 파악하셨던 것 같아요. 보완할 부분까지도 지적을 해주시고 그래서 항상 참모들을 끌고 가셨던 것 같아요.

 

김지미 모든 의제에 대한 현안들을 다 꿰뚫고 있어야만 가능한 거잖아요.

 

박민제 네. 기억력과 정보 습득력이 엄청나셨죠. 가장 뛰어나셨어요. 그래서 참모들이 깜짝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저번에 보고했던 것을 그 많은 보고서를 보시면서도 금방금방 기억을 해내셨으니까.

 

김지미 청와대 근무 마치고 나오면서 가장 아쉬웠던 게 있을까요? 이것만큼은 꼭 해놓고 나오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거나.

 

박민제 민생현장에서 직접 접하면서 의제를 발굴하는 활동을 좀 더 강화했으면 좋았을걸. 그냥 부처 보고로 해서 너무 거기에 급급하지 않았나. 시민들과 직접 대화를 하면서 그분들이 필요한 의제와 입법들을 찾았어야 하지 않았나. 이런 아쉬움이 있습니다.

 

김지미 그렇게 일을 그만 두고, 다시금 예전에 꾸었던 법조인의 꿈에 다시 도전을 하셨잖아요. 가족들의 지지도 있었다고 했지만, 일단 로스쿨에 가볼까? 라는 생각은 변호사님이 먼저 하셨을 것 같은데 다시금 내가 법조인을 해봐야겠다 라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있을 것 같아요.

 

박민제 학부 때는 시험을 통한 탈출의 개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참여정부 임기 끝나고 나서는 탈출의 개념이 아니라 뭔가 사회구조에 대해서 법조인으로서 책임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었는데 그 양극화를 조금 해소할 수 있는 역할을 법조인이면 좀 더 충실할 수 있지 않을까.

 

김지미 입법 분야의 일을 해 보니까 내가 법률가가 되면 좀 더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셨던 건가요?

 

박민제 네. 그리고 또 로스쿨 제도 취지가 기존에 법조인들이 안가는 직역에 많이 진출하는 의미가 있었어요. 그게 뭐 국회도 있겠지만 자치단체도 있었거든요. 지방자치단체 법치행정을 위해서 법률가가 할 부분이 많이 있었어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생각도 많이 했었죠.

 

김지미 그런데 지금은 개업변호사로 살고 계시잖아요. 애초에 생각했던 길하고 조금 다른 건 아닌가요?

 

박민제 그래서 고문변호사 활동도 하고 있고요, 교육청 일도 하고 있고 그렇습니다.

 

김지미 서울특별시 교육청 행정심판위원 이거 말씀이시죠?

 

박민제 네.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김지미 서울특별시 공익변호사, 대법원, 서울 북부, 남부, 동부 지방법원 국선변호인도 있어요(웃음). 코리아 부동산 아카데미 강사로 활동하고.(웃음)

 

박민제 이거 어떻게 아셨어요? 정보력이 무섭네요(웃음). 부동산 아카데미는 고등학교 선배가 저 몰래 올렸습니다. 지금 내려달라고 하려고요.

 

김지미 사법위원회 활동이 결국은 변호사님 예전에 했던 활동의 연장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민변 가입은 변호사 되시고 바로 하신건가요? 애초에 사법위를 딱 찍고 들어왔을 것 같은데.

 

박민제 네. 너무 거창하긴 하지만 제가 해야 할 시대적 소명 내지는 역사적 과제로 잡고 있는 것이 3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시민이 권력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그런 제도적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고요, 둘째는 패자가 부활할 수 있는 이런 걸 좀 마련하는 거에요. 기존에 부족한 것이 있으면 사회에서 기다려주지 않고 내치잖아요. 그런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일어설 수 있게 기다려주고 지원해 줄 수 있는 이런 부분이 필요하고. 세 번째는 국가권력에 의한 범죄를 좀 방지하자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사법위원회는 세 번째 국가권력에 의한 범죄를 방지하자는 거하고 닿아있는데, 저희 대통령님도 사실상 권력에 의한 희생을 당하신 거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대통령이 이렇게 희생을 당할 정도면 다른 국민들은 더 불안해하고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걸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을 마련하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사법위원회에 들어왔습니다.

 

김지미 그러면 국가권력에 의한 범죄를 방지하는 데 변호사님이 구상하는 어떤 방안 같은 것이 있을까요?

 

박민제 가장 먼저 검찰 개혁하고 국정원 개혁이 있을 수 있는데요, 제가 먼저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은 검찰개혁입니다. 참여정부 때도 검찰개혁을 하려고 했었는데 사실상 했다는 게 내버려 두는 이런 것이었죠. 그러니까 좀 독립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검찰권력이 정치권력하고 떼려야 뗄 수 없는 세력입니다. 자기들 승진이 청와대하고도 관련되니까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거였어요. 그냥 내버려 둔다고 해서 정치적 중립이 되는 게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검찰 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구에는 검찰의 입김이 작용되지 않게 차단된 상태에서 우선 개혁기구를 마련한 다음에 그 기구를 발판으로 해서 검찰을 견제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참여정부 때도 공직자부패수사처 이런 법안도 내고 했지만 사실상 그 당시에도 검찰 흔들기가 많았어요. 또 국회에도 로비도 많이 하고 그랬었는데, 다음 정부에서는 검찰에 흔들리지 않는 이런 개혁기구를 마련해서 그 기구에서 검찰을 견제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내고 법안을 마련해 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김지미 검찰개혁이라는 것은 사법개혁 분야에서 약간 해묵은 주제라고 생각될 정도로 검찰개혁 하자라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왔는데, 실질적으로 잘 안 되고 있잖아요. 검찰개혁에 대해서 공감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 되는 이유가 뭐라고 보세요?

 

박민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청와대의 검사 파견을 못하게 해야 할 것 같아요. 그게 자기들 승진이 청와대에서 낙점하게 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청와대 파견이 금지되어야 할 것 같고. 그 다음에 정치권력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공안부나 이런 것들이 폐지해야 할 것 같아요. 그 다음에 2원화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아까 말씀드렸던 공직자부패수사처처럼 공직자 비리 같은 경우나 정치사건 같은 경우에는 검찰과 독립적인 기구에서 담당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 그 다음에 자치경찰제가 사실상 약간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그게 수사권하고 기소권 분리 문제가 사실상 조직 간의 다툼으로 변질된 것 같아요.사실상 그 취지가 아닌데 그게 좀 국민들에게 잘 못 알려진 게 있는데 사실상 그런 수사권·기소권 분리부분도 검찰개혁의 한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지미 이러한 검찰개혁 과제가 산재해 있는데 하나도 된 게 없는, 검찰개혁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요인이 뭔가요?

 

박민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유지할 수 있도록 외부세력이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감시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또 작은 부분이긴 한데 기소독점주의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재정신청제도 같은 것을 개선을 해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개선점을 찾아야 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지미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예전부터 가져왔던 문제의식들도 상당히 있고 나름대로의 어떤 대안도 생각하고 계신데, 우리끼리 얘기지만 지금 민변 사법위 활동은 좀 약하다 싶은 감이 있어요.

 

박민제 제가 반성해야죠. 부족한 것이 많아서. 그런데 앞으로는 그 논의가 활성화 될 것 같아요. 대한변협 차원에서도 사법제도개혁특위가 꾸려졌더라고요. 그 다음에 아마 대선국면이 가까워오면서 공약부분에서 제시할 부분이 있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사법 분야 공약이 거의 없었다고 알고 있거든요. 공약을 얼마나 이행했느냐 체크해야하는데 아예 공약이 없으니(웃음).

 

김지미 외부에서 볼 때는 사법개혁과 관련된 역할을 할 주체가 결국엔 민변 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기대가 있는 것 같은데 사법개혁과 관련해서 민변이 이런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신 게 있나요?

 

박민제 저는 처음에 사법위 하면서 고정적으로 할 수 있는 역할이 주어진 것에 대해서 대단히 감사하고요. 그거라도 있으니까 한 달 동안이라도 뭔가 방향을 알고 준비할 수 있거든요. 제가 사법위에서 입법감시 업무를 하고 있는데요, 국회에 제출됐지만 잠자고 있는 사법개혁 법안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런 법안들을 좀 깨워서 국회 법사위와 본회의에 통과될 수 있도록 저희가 여론도 조성을 하고 국회에 요구도 하고 그런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김지미 좋은 제안 같은데요. 저희가 입법감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사실 적극 반대하는 법안들 위주로 의견 표명을 하는 선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꼭 통과가 되어야 하는 법안들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시죠?

 

박민제 네. 제가 참여정부 때도 이렇게 했었거든요. 항상 중점관리법안에 대해서 어떻게 추진되고 있는지 체크를 했습니다. 단계별로 어느 단계에 있느냐를 체크를 한 다음에 장·차관님들이 그것에 대해서 국회에 찾아가서 국회의원 면담을 해서 관심을 가지고 통과시켜달라고 하실 수 있게 메모카드 같은 걸 만들었어요. 그 법안의 주요내용과 통과될 필요성 같은 것을 이렇게 조그만 메모카드로 만들어서 그걸 보시면서 국회의원한테 그 메시지를 전달하게 해드리고 그 다음에 장·차관님들이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매주 단위로 부처별로 보고하게 만들었거든요. 그렇게 하니까 그래도 임기 말에 열심히 하시더라고요(웃음). 저는 사법위 선배변호사님들이 토론할 수 있는 토론거리를 풍성하게 만들어 드리자는 생각이 컸는데 아직은 너무 부족해서 배우는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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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이제 변호사가 되신지 만 1년 정도 되었는데 어떠신가요? 변호사 되기 잘했다, 이런 생각 드시나요?

 

박민제 민변이 인권과 민주주의의 첨병이면서도 마지막 보루잖아요. 거기에서 제가 몸 담으면서도 초심을 잃지 않게 하는 그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제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사회에 공헌하고 기여할 수 있는 이런 것들을 잊지 않게 해주고 거기에서 저 자신을 독려할 수 있게 해주는 점에 있어서 저한테 계속 채찍질이 되는 그런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김지미 혹시 사법위 말고 관심 두고 있는 다른 위원회가 있나요?

 

박민제 지금 사법위도 벅차서(웃음). 사법위원회만 해도 할 것이 많아서.

 

김지미 사법위에 뼈를 묻겠다.

 

박민제 예에(웃음). 그렇습니다.

 

김지미 이제 개인사를 좀 물어볼게요. 변호사님이 워낙 말수가 없으시고 그래서 개인사에 대해선 아는 게 전혀 없어요. 우선 결혼은 하셨죠?

 

박민제 네. 했습니다. 2005년에 해서 10주년 됐습니다. 딸아이가 7살인데요, 로스쿨 입학시험 볼 때 태어났어요.

 

김지미 변호사님은 어떤 아빠신가요?

 

박민제 집사람이 엄하기 때문에 저까지 엄하게 하면 딸아이가 더 서럽게 울더라고요. 그래서 안 되겠구나. 나는 엄하게 하면 안 되겠다. 나라도 부드럽게 해야 되겠다. 딸이 짜증을 부릴 때 제가 집사람에게 전화해서 딸이 짜증을 부린다고 이야기했더니 고자질했다고 울더라고요(웃음).

 

김지미 척 봐도 엄하게 못하실 것 같아요. ‘아빠한테 그러면 안 돼’ 이렇게 혼내시는 게 아니라 사모님한테 ‘딸이 나한테 짜증 부려~’ 이렇게(웃음).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박민제 사모님이요? 아, 집사람이요?(웃음) 친척분이 장인·장모님 사는 아파트 라인에 같이 사셨어요. 그래서 소개를 시켜주셨어요. 재미없죠?

 

김지미 변호사님 굉장히 수줍음이 많고 그러시잖아요. 어떻게 결혼까지 이어지게 됐는지가 궁금하네요.

 

박민제 저는 만난 지 딱 4개월 만에 결혼했는데요. 그런데 잘한 결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복 받은 것 같아요.

 

김지미 첫눈에 보고 반하셨어요?

 

박민제 집사람은 계속 만날수록 좋았던 것 같아요. 더 이상 알아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해서 만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프로포즈를 했는데요. 걱정을 많이 했는데 집사람이 받아줘서.

 

김지미 의외로 추진력이 상당하시네요.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드셨나요?

 

박민제 평범한 답변인데요, 이해심도 많고 배려심도 있고 대화도 통하고 그래서. 제가 집사람 얘기를 잘 안하는데. 팔불출 같아서 보기가 안 좋더라고요.

 

김지미 사모님 이야기를 하면 자랑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군요(웃음). 이야기하기 힘들어 하시니 그럼 개인사는 이만 패스할게요. 오늘 자원활동가 두 분이 함께 했는데 혹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기회를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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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홍(자원활동가) 늦은 나이에 로스쿨을 준비하면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박민제 뒤늦게 공부하니까 그건 있더라고요. 이런 공부를 하면 나중에 어떻게 도움이 될까 이런 게 느껴지니까 공부가 더 재미있고 흥미 있고 지겹지 않게 했었던 것 같아요. 의미부여가 되고 합격이후를 생각하면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박재홍 변호사님 동안의 비결이 뭐에요?

 

박민제 거의 듣지 못하는 질문입니다(웃음). 나이에 비해서 더 많이 보는 분들이 더 많으신데 굳이 얘기하자면 생각이 없어서일까요. 실은 고등학교 때의 얼굴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겁니다.(웃음)

 

김지미 마지막 질문을 드릴게요. 지금 하고 있는 뉴스레터 인터뷰는 우리 회원 아니신 분들도 많이 보시더라구요. 그런 취지에서 우리 박재홍씨도 뒤늦게 공부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늦게 공부를 결심한 분들을 위해 격려의 말씀이라고 할까요, 한 말씀 부탁드려요.

 

박민제 로스쿨 제도 취지가 사회의 다양한 경험을 쌓은 사람을 받아들여서 다양한 법률분쟁에 대응하게 만드는 이런 부분도 있잖아요. 저는 좀 뒤늦게 공부를 하고 다시 또 사회에 진출을 하게 됐지만 오히려 기존에 로스쿨 입학 전에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또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수 있고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사회적으로 의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또 변호사가 되기 전에 내가 만약에 변호사였으면 저런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생각했던 것들을 변호사가 돼서 실현할 수 있게 돼서 좋았습니다. 모든 만학도 여러분들 힘내시기 바랍니다.

 

 

목, 2015/09/10-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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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월례회 연극 “옥탑방 고양이” 관람 후기

 

 - 김정숙 회원

 

봄이 지나 여름이 되는 동안, 회사와 집을 반복하는 일상에 지쳐가고 있을 때 즈음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8월 월례회는 대학로에서 연극을 본다고?, 우와~!”

 

그런데, 설렘도 잠시…… 지난 2월 신입회원으로서 열심히 활동해 보겠다던 희망찬 포부와는 달리 위원회 정기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극만 보러가기에는 쑥스러운 마음이 앞서 선뜻 신청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 나타난 구원의 손길은 “김진3” 회원의 연락이었습니다. 쑥스러워 하지 말고 같이 가자는 “김진3” 회원의 설득에 뒤늦게 신청을 하고 연극을 보러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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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앞에 도착하니, 늘 그렇듯 수고해주시는 간사님들과 함께 몇몇 회원님들이 보이고, 어느새 익숙한 얼굴이 된 신입회원님들을 만나 안부 인사를 하며 어색했던 마음도 사라지고 신청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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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시작되자마자 역할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뭉치’와 ‘겨양이’의 활약과 함께, 극장 가운에 자리한 민변 회원들 사이로 경쾌한 웃음소리가 계속 이어졌고 달달하고도 코믹한 시간이었습니다. 회원팀의 기획 의도대로 이번 월례회는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재충전을 하기에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즐거운 여름 밤 이었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어주시는 민변 회원님들께 월례회 후기를 빌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끊임없이 소통하고 함께하려는 민변의 노력을 느끼며 다음 월례회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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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5/09/10-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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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연대-민변 노동위원회 인권선언 토론회 후기

 

- 조연민(민변 노동위원회)

 

지난 8월 26일에 민변 사무실에서 4.16연대와 민변 노동위원회의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저는 지난 7월 11일에 수운회관에서 있었던 4.16 인권선언 추진단 1차 전체회의에 다녀온 이후 인권선언의 진행 경과가 궁금하던 차였기 때문에, 약간의 기대감 그리고 책임감과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토론회는 김혜진 님께서 먼저 인권선언 제정운동의 의미에 대해 소개해 주시고, 이후 장정훈 님의 진행으로 인권선언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참가자 모두가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추진단 1차 전체회의 때에도 느꼈던 바지만, 인권선언이 단순한 하나의 이벤트에서 그치지 않도록 그 의미를 잘 새기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번 토론회에서 나왔던 이야기들 중, 인권선언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사람들이 느꼈던 ‘억울함’이라는 막연한 감정을 ‘부당함’이라는 구체적인 인식으로 바꾸는 작업”이라는 점에 특히 동감이 되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로부터 지금까지의 일련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느껴 왔던 분노와 참담함을, 이제는 소리높여 주장할 수 있는 권리의 형태로 재구성하자는 것이 인권선언의 출발점임을 이번 토론회를 통해 보다 선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토론 과정에서는 인권선언문의 구성 방식에 관한 이야기가 주된 주제로 논의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막연히 ‘헌법이라든지, 아니면 굳이 실정법이 아니더라도 유명한 선언문들을 참조하면 편하지 않을까’하고만 생각하던 차였는데, 토론 자료에 담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선언,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사회헌장, 세계인권선언 등을 보면서 선언의 목적과 성격에 따라 그 형식과 내용이 매우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단순히 권리에 관한 조항만을 나열할 것이 아니라, 인권선언의 특수한 목적과 의미를 살릴 수 있도록 전문, 용어 정의, 원칙, 권리 목록 등의 각 부분이 상호 유기적으로 배치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도 차디찬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둘러싼 중요한 문제들이 해결이 요원한 채로 남겨져 있을뿐더러, 이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대한 가차 없는 탄압마저 이어지는 형국입니다. 오늘도 여러 지역, 단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풀뿌리 토론이 모여 만들어낼 인권선언이 암울한 상황을 타개하고 보다 존엄하고 안전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초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 2015/09/10-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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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대위 활동소식

1.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 한국 국가심의 일정 확정 및 민변 포함 시민단체 대응활동

 

유엔자유권규약위원회(Human Rights Committee)는 오는 10월 19일부터 11월 6일까지 제 115차 세션을 열고, 규약 당사국의 자유권 이행여부를 심의할 예정이다. 한국 정부는 세션 중 10월 22일, 23일 양일간에 거쳐 심의가 될 예정이고, 심의 대상은 유엔자유권규약위원회에 이미 제출한 4차 국가보고서와 위원회의 List of Issues(쟁점목록)에 대한 공식답변(Reply)이다. 이에 민변을 포함한 인권,시민사회, 노동단체는 국가보고서와 공식답변에 대응하는 반박보고서를 작성 중이고, 반박보고서를 통해서 한국 정부가 밝히지 않았거나 보고서에서 미화된 한국의 자유권 실상을 조목조목 짚고 반박할 예정이다. 더불어 위원회 심의 시에 시민단체를 대표하는 참가단을 조직하고 현지에 파견하여 반박보고서의 내용을 적극 위원회에 알릴 예정이다.

2. 버마(미얀마) 민주화 활동가 내툰 나잉 사망 소식 및 사회장 안내

 버마(미얀마) 민주화뿐만 아니라 이주민 인권 등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신 내툰나잉(버마 NLD 한국지부 대표)께서 갑작스런 심근경색과 심실빈맥으로 2015년 9월 4일 새벽 4시에 영면하셨다. 고인은 1969년 9월 버마에서 출생하여 1986년 양곤대학교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을 하였고, 미얀마 사상 첫 총선이 있었던 1990년 9월 아웅산 수찌여사를 도와 야당 NLD(민족민주동맹)에서 선거운동을 하였고, 이후 미얀마가 군부의 쿠데타로 인하여 독재가 지속되자 탄압을 피하기 위해 1994년 한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2000년 민변 난민특별위원회와 함께 한국 정부에 난민신청을 하였고, 2003년 당시 최초로 다른 버마활동가 2명과 함께 난민인정을 받았다. 이후 한국의 시민사회와 함께 한국 내에서 지속적으로 미얀마 민주화 운동 캠페인을 이끌었고, 2013년 후반부터 미얀마헌법개정을 위해 ‘2008 미얀마헌법개정을 위한 국제심포지엄’을 민변 국제연대위와 함께 주도적으로 조직하였으며, 민변 국제연대위 아시아인권팀에서 3차례 현지 방문활동을 기획할 때 큰 도움을 주었다. 고인의 갑작스런 사망소식에 민변을 포함하여 국내 시민사회, 인권단체, 학계, 버마(미얀마)활동가들은 그의 활동을 기리고자, 공동 장례위원회를 구성하였고 9월 11일부터 13일까지 사회장을 엄수할 예정이다. 20년 가까이 머나먼 타국에서 버마(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 내툰나잉을 기억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내툰나잉 장례위원 모집 웹자보_20150908

목, 2015/09/10-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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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차 정기총회 감사 인사말

 

- 회장 한택근

존경하는 회원 여러분,

 

제28차 민변 정기총회가 2015.5.30.-31. 양일간에 걸쳐 경주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번 총회는 132명의 회원과 60여명의 가족들이 참석하여 역대 최다 참석자를 기록하며 성황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우선 제28차 정기총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될 수 있도록 관심과 성원을 보내 주신 모든 회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총회 식전 행사에서는 모임이 ‘회원 1,000명 시대’를 열게 된 것을 자축하고, 모임의 진로를 모색하는 진지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정기총회에서는 모임의 임원선출에 관한 회칙 규정을 정비하였고, 조직의 중·장기적 발전을 모색하기 위한 발전기금 사용 승인 안건을 통과시켰습니다. 저희 집행부는 안건을 통과시켜 주신 회원들의 뜻을 받들어 모임의 발전을 위해 배전을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나아가 이번 정기총회는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회원 분들의 뜨거운 열망과 헌신적 활동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참석한 모든 회원들이 일어나 ‘회원 천명 시대를 맞는 모임의 특별결의문’을 함께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민주사회를 향한 회원들의 결의를 서로가 확인할 수 있었던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 모임은 중대한 도전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모임의 지속가능성과 발전을 담보할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야 하고, 밖으로는 시대를 역행하는 권력기관에 맞서 사회적 약자와 서민의 인권을 보호할 책무를 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도전을 슬기롭게 풀어나갈 수 있는 희망을 정기총회에서 보여주신 회원 여러분의 열망과 결의에서 찾고자 합니다. 집행부와 사무처는 회원 여러분의 헌신과 지혜가 샘솟을 수 있도록 하는 마중물의 역할에 충실하겠습니다.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고, 정의가 넘실대는 ‘민주사회’로의 여정은 한시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민변의 자랑스러운 선배님, 동료 및 후배 회원 모두 깊은 동지애로 함께 걸어갑시다. 그 길에 함께하는 모든 회원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수, 2015/06/10-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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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변호단 2차 워크숍

- 강제동원, 홋카이도를 가다

 

 2015년 8월 그 해, 홋카이도의 여름은 뜨거웠다.

 

 <첫째 여정>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한 서린 홋카이도, 아직도 서러운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 이선경

 

 나에게 있어 홋카이도라는 지역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오고 온천시설이 잘 되어 있는, 겨울 관광지로 좋은 장소 정도의 의미만 있었다.

 

그 홋카이도에 강제징용되어 희생된 분들의 유골이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남아있다는 소식도 이번 워크숍 준비 모임에서 처음 알게 되었을 정도로 나는 홋카이도와 우리 민족의 과거사에 대해 무지하고 또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태로 비행기에 올랐던 나에게, 창 밖에 펼쳐진 삿포로의 풍경은 다소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반듯하게 정리된 논과 밭 사이에 빨갛고 파란색 지붕을 가진 집들이 늘어서 있는 한적한 농촌 풍경은, 그곳이 그 끔찍한 강제징용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게 만들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에 오르자, 이번 워크숍의 가이드 김영환 선생님이 버스가 이동하는 동안 간단히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유골반환 운동의 경과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1997년부터 시작하여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여러 동아시아 지역의 학자와 시민단체가 모여 10여 차례의 학술대회를 거치면서 공동으로 유골발굴을 해왔고, 이는 궁극적으로 동아시아 평화를 모색하기 위한 활동들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방문할 장소들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현장들이라고 하였다.

16일  삿포로별원 - 강제징용 간담회

 

버스로 한참을 달려 101구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본원사 삿포로 별원 납골당에 들어서니 가장 안쪽 구석에 초라한 유골함 3개가 놓여있었다. 본래 일본의 장례절차에 따르면 한 사람의 유골이 하나의 유골함에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삿포로 별원에 101명의 유골이 있으면 총 101개의 유골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1997년도에, 일제시대 강제징용 노동자들에게 노동을 시켰던 지자키 공업의 요청에 따라 삿포로 별원은 무연고 유골이라는 이유로 유골을 모두 합골해 버렸고, 그 때문에 현재 3개의 유골함 안에 101명의 유골이 섞여있다고 하였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최소한의 예우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서글픈 상황들이 담담히 다가왔다. 부디 고국으로 돌아가서 햇볕 잘 드는 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묵념을 하고 돌아섰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2003년 유골 발굴 당시 발굴된 유골이 강제징용 희생자 유골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근거 중 하나가 유골의 발을 감싸고 있던 발싸개 때문이었다는 것인데, 신발이 아닌 천으로 된 발싸개를 신고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강제징용 희생자의 유골임을 확인하였다고 하니, 당시 강제징용 희생자들에 대한 처우가 얼마나 열악하였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16일  삿포로별원 - 납골당 2

 

반가운 소식은 현재까지 홋카이도에 남아있는 미봉환 유골 150구 중(삿포로 별원과 사루후쓰, 비바이 탄광 등에 흩어져있다고 한다) 120구가 올해 9월 한국으로 봉환된다고 한다. 무엇보다 올해 유골봉환은 9. 11.부터 9. 20.까지 9박 10일 동안 진행되는데, 당시 강제징용자들이 끌려왔던 3,500km를 되짚어 서울까지 가는 여정이라고 하였다.

 

이번 유골봉환은 역사적인 의미가 큰 행사이므로 당연히 한국과 일본 양국 정부가 주최가 되어서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정부와 전혀 관계없이 순수 민간 차원에서만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2004. 12. 노무현 정부 때 고이즈미 총리에게 유골봉환을 요청한 이래 정부차원에서 유골봉환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나, 이명박 정부로 바뀌면서 정부가 유골봉환에 의지를 보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현재에는 부득이 순수 민간 차원에서만 유골봉환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였다.

 

물론 유골봉환의 최대 걸림돌은 강제징용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정부의 태도라고 하겠다.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이 일본 정부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입증할 수많은 자료 앞에서도 끝내, 강제징용은 민간기업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므로 일본 정부는 유골봉환을 비롯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일본 정부만을 탓하고 있을 수 있는지… 힘이 없어 자국민이 이 혹한의 땅에 강제로 끌려와 노예처럼 일하는 것도 막아주지 못했던 우리나라는,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서도 그 유골을 봉환해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 국가의 존재이유일 것인데, 과연 우리 정부는 강제징용 희생자들을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둘째 여정>

차별은 조선인만의 몫이 아니었다. 홋카이도의 자연인 아이누를 만나다.

 

- 성춘일

 

8월 17일, 홋카이도 이튿날이 밝았다. 워크숍의 설렘과 고단함을 채 풀기도 전에 오타루 외곽, 해안가에 위치한 청어 잡이 박물관에서 둘째 여정을 시작했다. 가파른 언덕을 굽이굽이 두어 번 올라가자 오래된 낡은 집 한 채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어 잡이 어부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집을 박물관으로 꾸며서인지 박물관 내부와 외부에 전시된 물건은 화려하거나 형식에 치우치기 보다는 100여년 전 어부들의 소박한 삶의 모습을 들려주고 있었다. 박물관 옆에는 해안가 절벽으로 이어지는 아담한 뜰이 펼쳐져 있고 바닷바람에 살랑거리는 풀밭 위, 녹슨 크고 작은 닻과 낡은 고기잡이 도구들이 어부들의 고단한 일상을 전하고 있었다.

 

연세가 제법 있어 보이는 부부가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입장표를 사서 신발을 벗고 건물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는데 두터운 가죽장갑과 눈 위에서 신는 신발이 이곳이 겨울왕국임을 실감하게 했다. 남자 성인용 지게, 여자 성인용 지게, 아이들이 메는 지게를 보니 이곳 주민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생계를 위해 청어 잡이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층에는 당시 주민들의 의상을 걸어 놓고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입어 볼 수 있도록 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아이누족인 가와무라 켄니치(아이누 이름 : 신리츠 에오리)씨가 운영하고 있는 아이누민속박물관에 도착했다. 켄니치씨는 아이누 전통복장 입고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 박물관은 켄니치씨의 조부가 만든 것으로, 일본 정부가 세운 학교에서 아이누 아이들의 교육을 맡길 수 없다며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했다가 현재는 켄니치 씨가 이어 받아 아이누의 역사, 전통, 풍습을 알리는 민속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아이누들의 배, 의상, 그릇부터 낚시, 사냥도구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켄니치씨는 아이누의 역사, 전통, 풍습 등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어머니’를 뜻하는 아이누의 ‘하루코노’라는 단어는 원래 식량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아버지’는 돈 버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한다. 가족의 호칭에 가족 구성원의 역할이 녹아 있어 신기했다.

17일  아이누민속박물관 1

 

아이누족은 일본 정부가 금지하기 전까지 연어잡이와 수렵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민족이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메이지유신 이후 홋카이도를 점령하더니 홋카이도 전체를 일본 정부의 관할 하에 두면서 아이누족들은 일정한 구역에서만 거주할 수 있도록 하고 아이누들의 생활수단이었던 연어잡이와 수렵을 금지했다.

 

일본 정부는 홋카이도를 다스리기 위해 일본 본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둔전병으로 근무하는 일본인에게 일정 면적의 홋카이도 땅을 나누어 주어 유인함). 아이누들이 농사를 지으면 홋카이도 땅을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으나,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는 아이누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모두 빼앗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는 아이누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아이누 전통의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금지했다. 또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누족들의 호적에는 출생지역(아이누 거주지역)을 별도로 표기한 결과, 아이누 거주 지역 출신들은 공직 진출을 금지당하거나 교육 기회가 제한되는 등 많은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출신 지역 표기제는 없어져 눈에 보이는 차별은 사라졌지만 보이지 않는 차별은 여전하다고 한다.

 

아이누 사람들은 몇 년 전 일본정부를 상대로 본래 자신들이 주인이었던 홋카이도를 돌려달라고 반환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다고 한다. 수렵민족인 아이누들에게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자연을 소유한다는 인식이 희박했고, 문자도 없었던 탓에 땅에 대한 소유관계를 표시한 공부 자체가 없었다. 고도 문명의 발명품인 글자로 표기된 문서를 가지고 다투는 법적 소송에서 이들의 패배는 어쩌면 예정된 결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억센 모기마저도 정겨워진 숲 속 고겐사에서의 깊은 밤

17일  고겐사2

 

점심을 해결한 후, 북쪽으로 한참을 달려 슈마리나이 댐 부근에 위치한 고겐사에 도착했다. 고겐사는 현재 ‘동아시아 공동워크숍’의 개최 장소이자 홋카이도 역사교육의 학습장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고겐사가 평화교류와 역사교육의 장소로 변모한 것은 1976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씨가 고겐사 본당에서 죽은 이들의 이름, 나이, 사망 연원일이 적힌 다량의 위패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위패에는 조선인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승려로 활동하면서 위패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죽음이 슈마리나이 댐 공사와 철도 공사 도중 희생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학습장 내부 각 벽에는 유골 발굴 작업과 유골 반환을 위한 각종 활동이 담긴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현재 밝혀진 바에 의하면 슈마리나이 댐 공사와 철도 공사로 희생된 이는 210여명 정도인데 그 중 40여명이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저녁을 먹기 전 슈마리나이 댐을 둘러보기로 했다. 어둠이 조금씩 밀려오는 시간, 일본 최대의 인공호수인 슈마리나이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여름을 잊게 만들 정도로 제법 매서웠다. 거대한 댐의 수문이 물길을 가로막고 서 있고 1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 탑이 수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탑은 슈마리나이 댐 공사 도중 사망한 수백 명의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세운 탑인데, 정작 탑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희생자들의 이름 대신 ‘순직자 위령탑’이라는 이름과 댐을 건설했던 우류전력 사장 아다치 다다시 이름만이 새겨져 있다. 슈마리나이 댐 공사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자 이 지역 사람들이 우류전력에 이들을 위로하는 위령비라도 세워 줄 것을 요구했는데, 위령비 세울 돈 조차 아까웠던 아다치 다다시는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건설했던 교각의 기둥을 옮겨와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일본 각지는 물론 우리나라와 중국에서까지 강제로 끌려와 새벽 4시부터 밤 9시까지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죽어간 사람들에게 위령비 세울 돈조차 아까워했으니 이들이 당시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대했을지 상상이 되었다. 슈마리나이 댐 공사의 참혹함은 이 공사장 집단합숙소의 이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당시 사람들은 슈마리나이 댐 공사장 근처에 있는 집단합숙소를 어항에 들어간 문어가 다시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이 합숙소에 잡혀 들어간 자는 살아서는 나올 수 없다는 의미로 ‘타코베야(문어방)’라고 불렀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 타코베야는 죽음과 공포의 대명사였다고 한다.

 

저녁식사 후, 고겐사에서 위패가 발견된 후 위패의 주인인 유골 발굴 작업과 한‧일 교류를 통해 수십년 동안 유골 봉환운동을 했던 오노데라 마사미(小野寺正巳)교수님과 야마자키 다다시(山崎忠司) 선생님으로부터 슈마리나이 공사 현장의 참혹함은 물론 유골 봉환 운동에서의 에피소드 등 유골 봉환활동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밤이 깊도록 계속 이어졌다.

17일  변호단회의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힘든 몸을 이끌고 고겐사에 도착한 직후부터 슈마리나이 댐, 조선인 유골 매장지까지 우리를 안내해 주신 오노데라 교수님, 일흔 셋의 연세에도 유골봉환 운동을 계속하고 계신 야마자키 다다시(山崎忠司) 선생님, 누가 알아주어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기에 묵묵히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의 활동을 이어가고 두 분의 모습은 마음에 큰 울림을 남겼다. 밤이 깊어가는 것도 잊고 한 잔 한 잔, 비워지는 술잔은 늘어만 간다. 그리고 우리들의 추억도.

 

 

<셋째 여정>

새하얀 메밀밭 한 가운데서 굳은 도약을 외치다.

 

- 이동준

 

고겐사(光顯寺) 조릿대 묘표전시관에서의 숙박. 겨울이면 기온이 영하 41도까지 내려간다는 슈마리나이답게 새벽의 추위가 제법 매서웠다.

 

일본 남자들은 “매일 아침 나에게 된장찌개를 끓여줘요”라고 청혼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어디선가 진짜 일본된장국 냄새가 발길을 이끌었다. 모두들 한솥밥을 떠서 둘러앉아 정겹게 식사하면서 돈독한 정을 나누었다.

 

고겐사를 떠나면서 우리는 9월 본국 봉환 예정인 희생자들의 유골을 살피고 위령의 의미를 담아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70여년의 긴 세월 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유골로 남아있는 희생자들의 원혼을 떠올리니 가슴 한 켠이 아파왔다.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가 편히 잠드실 수 있기를 기원하며 다음 달에 돌아오시는 길 또한 밝혀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18일 아침  유골

 

버스를 달려 슈마리나이(朱鞠內) 호수가에 도착하였다. 동양 최대의 인공호가 보여주는 절경에 감탄사가 나왔지만 잔뜩 찌푸린 하늘과 세찬 물살이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슬픔을 담은 듯 느껴져서 이내 숙연해졌다.

 

삿포로 시로 이동하는 길에는 광활한 메밀밭이 계속되었다(농업은 홋카이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일본의 총 경작 가능한 땅의 4분의 1이 홋카이도에 있다고 한다). 우리는 백은의 언덕이라 명명된 사진촬영지 및 시마다야란 회사의 계약 농장터에서 단체사진을 남겼다. 새하얗게 펼쳐진 메밀밭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한편으로 그들이 가진 풍요로움에 대해 부러운 마음 역시 들었다.

18일  메밀밭2

 

이어서 방문하게 된 곳은 다카도마리의 한 공동묘지였다. 슈마리나이 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후카가와시 다카도마리 공동묘지에는 2명의 조선인을 포함한 5명의 피해자가 묻혀 있었고 그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들 외에도 더 많은 희생자들이 그 인근에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매장 추정지 위로 일반인들의 공동묘지가 들어서 있어 발굴 작업이 어렵다고 하여 몹시 안타까웠다.

 

이어서 이치조지(一乘寺)와 부설 다도시(多度志) 보육원을 방문하였다. 보육원은 이치조지의 주지스님이 서양식 어린이집을 모티브로 하여 만든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모델이었는데, 서양식 종탑과 일본 특유의 견고하고 단정한 목재구조의 건물이 인상적이었고, 해맑은 아이들의 미소는 발길을 돌리기 어렵게 하였다. 벽면에는 매해 어린이들의 졸업 작품으로 공동 제작된다는 대형 판화가 걸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많이 인상적이었는지 보육원을 떠난 뒤에도 동심을 가득 담은 어린이들 특유의 그림체가 자꾸만 머리에 남았다.

 

강제징용이 이루어지던 시절엔 하루가 걸려도 당도하지 못하던 길을 이제는 반나절이면 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토록 우리의 문명은 그 외관(外觀)이 눈부시게 진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內面)은, 특히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는 한국도 일본도 야만(野蠻)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자꾸만 과거로 회기하려 하고 있다. 수십 년이 지나서도 계속 야만과 대치해야하는 작금의 현실에 맞서 우리는 계속해서 투쟁하고 마침내는 승리할 것을 다짐한다.

 

변호사는 단순히 “타인의 송사(訟事)”만을 대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대리하면서 몇 배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번 워크숍은 보고 듣고 느끼는 시간을 거쳐 우리가 힘이 되어드리고자 하는 그분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보고 듣고 느껴서 담은만큼 무거운 마음을 금할 길 없지만, 변호단이 “일시적인” 부침을 겪고 있는 지금, 단단히 심신을 다잡고 도약할 수 있게끔 해주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화, 2015/08/25-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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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민변사람들

 

처서(處暑)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민변 본부로부터 지부 소식글을 올리라는 명령(?)을 받고 불현듯 이 시점에 부산 민변사람들은 누구일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산지부의 월례행사나 밀양 송전탑반대투쟁 관련 형사재판 활동 등은 다들 잘 알고 계실 것이기에 무언가 참신한 내용이 없을까 하는 삐딱한 생각도 이러한 호기심을 일으킨 하나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산 민변사람들의 행적을 알아보고 현재 누가 활동하고 있는지를 말씀드리는 것으로 이번 부산지부 소식에 갈음하고자 합니다.

 

먼저 제가 한 일은 변호사회 도서관을 찾아가 책장 구석에 꽂혀 있는 오래된 부산법조지를 살펴본 일입니다. 부산 민변사람들 모두의 족적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 변영철 회장, 정재성, 강동규, 김외숙, 권혁근 회원 등 부산 민변사람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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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부산노련 조직국장으로 활동하던 변영철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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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부산법조지에 소개된 정재성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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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부산법조지에 소개된 강동규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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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평화를 위한 변호사모임 활동 시절의 김외숙 회원)

이외에도 부산참여자치시민연대와 함께 열심히 활동하시는 최성주 회원을 비롯하여 이재호, 이덕욱, 조성제, 김동진, 이한석, 이호철, 최현우, 문덕현, 이철원, 김용규, 노성진, 류제성, 이정민, 배경렬, 정판희, 박중규, 김해영 회원이 인권이 무엇인지, 그리고 부산 민변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여 왔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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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상을 수상한 권혁근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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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석 회원)    

지부7        (이철원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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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철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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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민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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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영 회원)
 

한편 부산 민변사람들 중 젊은 세대는 서은경, 조형래, 조민주, 이미현, 김지현, 이경민, 변현숙, 정상규, 조애진, 김지은 회원으로 부산 민변의 손과 발이 되어 열심히 활동하고 있고, 실무수습중인 김현철 수습변호사도 조만간 정식 회원이 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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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은경 회원)   

  

지부12      (정상규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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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애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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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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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 회원)
 
 

끝으로 미국의 유명한 변호사이자 정치가인 대니얼 웹스터(Daniel Webster)가 남긴 “최선의 법률가는 바르게 살고, 부지런히 일하며, 가난하게 죽는다”는 법언처럼 부산 민변사람들도 최선의 법률가가 되고자 고민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이만 부산 민변사람들에 관한 글을 마칠까 합니다. 민변 회원님들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화, 2015/08/25-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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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문제연구위원회 활동소식

1. 9회 평화교류회, 오키나와 이시가키 섬으로!!

2007년 10월,  설레임과 수줍은 인사로 시작했던 평화교류회가 매년 특별한 감동과 추억을 선사하며 어느덧 그 아홉 번째 가을, 아홉 번째 만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민변 미군문제연구위원회와 자유법조단 오키나와지부는 매년 교류회를 통해 서로의  과거와 현재를 보듬고, 한국과 오키나와의 평화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이어 오며 돈독한 연대의 정을 쌓아왔습니다. 또한 민변 소속 변호사의 징계청구에 대한 연대 항의성명 발표 및 한국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에 대한 연대 항의성명 발표까지 이어지며 보다 질높은 일상적 연대로의 도약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미군1   <사진 : 이시가키 섬 풍경>

이번 9회 평화교류회는 오키나와 최남서단에 위치한 ‘이시카키’ 라는 아름다운 섬에서 진행되며, 2015년  동북아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 신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과  SOFA 민사청구권을 중심으로 열띤 발제와 토론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또한 교류회 장소인 이사가키섬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본토의 방어진지 역할을 했던 곳인만큼 섬 곳곳에 자리한 전쟁의 상흔과 ‘위안소’ 등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와 고민을 전달해 줄 것으로 기대되구요, 방문지 중 하나인 타케토미 섬은 아오이 유우 주연의 “아오이 유우의 편지”(원제 : ニライカナイからの手紙) 촬영지로 하얀모래와 빨간지붕, 잿빛돌담이 신비로운 곳이라 벌써부터 참가단의 마음을 “심쿵”하게 만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아울러 9월 미군위 월례회에서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하고 제주대학교 SSK 전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영신 박사님을 초청하여 “오키나와 현대사”에 대한 특강을 들을 예정이니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도 요청드립니다.
 

2. 탄저균 반입, 그 후….

치명적인 생물무기인 탄저균이 살아있는 채로 오산 미공군기지에 반입된 사건이 발생한 지 석 달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7월 23일, 미 국방부는 ‘미국 국방부의 의도하지 않은 살아있는 탄저균 포자 배달’이라는 제목의 조사보고서를 공개했는데, 조사 결과의 내용을 요약하면, 탄저균이 왜 살아있었는지와 관련하여 그 ‘근본원인(Root Cause)’를 밝힐 수 없었으며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완벽한 탄저균의 비활성화 처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미 국방부는 미국 내에 탄저균을 통제하기 위한 일관된 규정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미 국방부의 조사 결과 공개 직후 커티스 스캐퍼로티 주한미군사령관은 쥬피터 프로그램 등 한미간의 생물무기 방어 협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백승주 국방부 차관 역시 북의 생물무기에 대응하기 위한 시험과 연습을 필요하며 이를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탄저균 비활성화에 대한 과학적 근거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와 같은 한미 군당국의 입장과 태도는 많은 국민들에게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고 있으며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11일, 한미 당국은 탄저균 반입사건의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한・미 합동실무단(Joint Working Group : JWG)’을 구성하고 살아있는 탄저균이 반입된 오산 미공군기지에 대한 현장조사까지 실시하였습니다. 하지만, 현장조사가 이루어진지 20여일이 지났으나 아직도 조사 결과와 관련한 아무런 내용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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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민변 미군문제연구위원회에서는 탄저균 불법 반입‧실험 규탄 시민사회대책회의 및 시민 8704명을 대리하여 주한미군 사령관과 주한 미7공군(오산기지)사령관에 대해 국민 고발장을 제출하여 사건을 진행하고 있으며, 민변 내에 구성된 탄저균 대응팀과 함께 생물무기금지협약(Biological Weapons Convention) 관련 모니터링 및 국내법 모니터링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님들과 함께 실험중단 및 실험실 폐쇄 가처분, 형사고소를 추진하고 있으며, 올 가을 국정감사를 적극 활용하여 탄저균 반입․실험사건의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계기를 마련코자 합니다. 
 

화, 2015/08/2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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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데이

- 추억찾기-

 

- 김의지 회원

지난 8. 20.은 여성위원회의 호프데이였습니다! 저는 이제 막 민변에 가입한 신입회원이기에 호프데이 준비위원에 자발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워낙 소극적인 성격 탓에 절대 자원하지 않고 있었지만, 애타게 열정적인 신입회원을 찾는 선배 변호사님들의 마음의 소리가 들렸던 것 같습니다.

 

준비위원장이신 이선경 변호사님께서 이전 호프데이에서는 한강에서 유람선 타기, 세계맥주파티 등을 하였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올해는 무엇을 할지를 같이 고민하면서, 호프데이의 심오한 취지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그 취지는 격무에 시달리느라 쌓인 스트레스를 1년에 딱 하루라도 같이 모여 즐겁게 놀면서 날려버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뻘줌해서 여성위에 참여하지 못했던 신입 회원님들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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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참여하게 된 준비과정에서는 현지현 변호사님의 활약이 두드러졌습니다. 유람선 타기, 노래방 가기, 바비큐 파티 등등 여러 아이디어가 나왔으나 현실적인 제약에 걸려 실현되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아이디어 고갈에 시달리던 중에 현지현 변호님께서 ‘추억’이라는 컨셉을 제시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일사천리로 컨셉에 맞게 프로그램이 정해졌습니다. 게임은 ‘공기놀이’, ‘지우개 따먹기’, 음악은 ‘8090 인기가요’, 음식은 ‘옛날 치킨’, ‘옛날 과자’ 등.

 

대망의 호프데이 저녁 6시 30분. 준비위원들은 조금 일찍 모여 음식을 접시에 나누어 담고, 음악을 틀고, 미리 공기도 해보는 등 만만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지현 변호사님께서 주문해주신 추억의 옛날 과자들을 보니 심쿵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초등학생 때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아폴로, 쫀쫀이, 숏다리, 오부라이트(옛 테이프)를 보는 것은 참 오랜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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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둘씩 변호사님들이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시간이 살짝 지난 시간이었기에 모두 허기진 상태였습니다. 눈앞에 놓인 치킨, 떡볶이, 순대 등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시작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각자 자리에 앉아 이번 여름휴가에 있었던 일,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판결 등 여러 가지 주제로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중 조숙현 위원장님께서 도착하였고, 정식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습니다. 야심차게 준비한 공기놀이부터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박순덕 변호사님의 승리였습니다. 초반부터 무서운 기세로 모두를 놀라게 하시더니 결국은 ‘유일한’ 적수였던 이한본 변호사님까지 꺾으셨습니다. 이한본 변호사님은 이 날 참석한 회원 중 유일한 남자로서 섬세한 손놀림을 보여주셨습니다. 거북이 손을 가진 저로서는 뒤에서 수줍게 빅매치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릴 때 더더욱 공기놀이에 매진하지 않은 것이 아쉬울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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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놀이로 한껏 흥겨워진 상태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담소를 이어갔습니다. 한 동안 얼굴을 못보던 반가운 회원, 새로운 얼굴들을 여럿 볼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그 동안 있었던 근황 등을 이야기하다보니 어느덧 10시가 다 되어 아쉽게 자리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내년 호프데이를 기약하였습니다. 3시간여 동안 골치아픈 회사일이나 어려운 세미나 주제는 잊고  호프데이 취지에 걸맞게 유쾌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 진행되지 못했던 지우개 따먹기를 위해 준비된 지우개 10개 중 제 마음에 쏙 드는 지우개 하나도 기념품으로 챙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에서 선배 변호사님들과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신 여성위 변호사님들께 감사드리고, 특히 호프데이를 준비하면서 저를 살뜰히 챙겨주신 이선경 변호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느 곳에서나 ‘신입’은 어렵고 힘든 처지인데, 이런 처지를 잘 헤아려 주시는 선배 변호사님들 덕에 큰 위로를 얻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 역시 선배가 되면 제가 받은 배려와 위로를 후배들에게 베풀며 살도록 노력하겠고, 그 일환으로 내년 호프데이 역시 자발적으로(!) 준비위원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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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5/08/25-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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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문법』, 『인권과 인권들』 독서 토론 후기

 

이하나(민변 13기 자원활동가)

 

7월 월례회는 『인권의 문법』과 『인권과 인권들』 두 책에 대한 독서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각자 발제를 분담해 책을 정리하고 논점을 뽑아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었다. 두 책 모두 인권 관련 담론을 비교적 포괄적으로 다루는 이론서이고, 그 분량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월례회 때까지 다 읽어 오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참여자들 모두가 성실히 발제를 해왔기 때문에 전반적인 책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토론까지 이어갈 수 있었다.

조효제 선생님의 『인권의 문법』은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인권 이론 전반을 개괄하고, 인권에 대한 비판이론을 분야별로 충실히 소개한 뒤, 인권 민주주의의 모색을 결론으로 제시하는 종합적인 인권이론서였다. 저자의 논지는 후반부로 갈수록 뚜렷하게 드러나지만 그 전까지는 다양한 인권담론들을 일별하고 있어서, 처음 인권을 접하는 이들에게 친절한 길잡이가 되어 주기에 충분했다. 반면 정정훈 선생님이 쓴 『인권과 인권들』은 인권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보다 전면에 내세운 책이었다. 『인권의 문법』이 포괄적인 인권 개설서에 가깝다면, 『인권과 인권들』은 저자의 논지를 중심으로 인권에 관한 철학적 논점을 재구성한 정치철학 저술이었다. 나는 두 책 중 『인권과 인권들』을 맡았는데, 책에서 전개되는 논의가 다소 사변적이어서, 보다 생생한 토론을 이끌어내고자 최근에 있었던 이주노조 합법화 판결 사례와 책 내용을 비교하는 발제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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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문법』과 『인권과 인권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바는 바로 인권이 ‘정치적’이라는 점이었다. 이 주장은 인권이 흔히 정치와는 무관하게 보편적으로 합의 가능한 도덕적 권리처럼 여겨지는 통념에 정면으로 반한다. 인권운동을 하는 측에서도 인권보장에 소홀한 정부와 정치권을 비판하기 위해 ‘인권은 정치적 합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인권에 정치적 계산을 대입하지 말라’는 수사를 구사하는 마당에, 위 저자들은 어떤 근거로 저런 도발적인 테제를 제시하는 것인가? 내가 맡은 책 『인권과 인권들』에서는 근대 인권이 등장한 역사적 배경과 그 이후 전개된 일련의 철학적 논쟁들로부터 인권의 근본적인 정치적 성격을 도출하고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 인권은 애초에 그것이 본격적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한 프랑스 혁명기에 현실의 공동체를 변혁하고 재조직하는 ‘정치’의 원리로 제시되었으며, 그 후 이어진 일련의 인권 비판 및 대안 담론들은 모두 정치와 분리된 인권 개념의 위험성을 줄곧 지적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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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인권에 비판적인 이들은 주로 현실에서 인권이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는 점에 주목한다. 실제로 인권은 특정 국민국가에 의해 ‘시민’으로 인정된 이들에게만 제한적으로 보장되어 왔기에, 시민에서 배제되거나(비시민) 열등한 시민으로 규정된(2등 시민) 이들은 권리의 사각지대로 내몰리는 결과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그에 따라 인권 비판론자들은 ‘시민 아닌’ 인간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최소한의 권리로 부여되는 탈정치적 인권 개념이 무용할 뿐만 아니라 현실의 억압을 은폐하는 기만적 역할까지 한다고 공격한다. 이에 맞서 인권을 옹호하는 입장은 바로 그 ‘시민 아닌’ 인간이 인권을 주장함으로써 기존 체제를 변혁하는 저항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인권은 기존 체제에서 배제된 이들로 하여금 그저 ‘살아있게만 하는’ 권리가 아니라,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그 이상에 비추어 부당한 현실을 비판하고 변혁할 수 있게 하는 정치적 주체화의 언어라는 것이다. 정정훈은 바로 후자의 관점을 채택하여, 인권이 근본적으로 정치적 권리임을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과제는 인권을 정치와 무관한 도덕적 규범으로 고착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존엄과 평등자유를 선언한 인권의 이상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권력관계를 변화시키는 ‘인권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인권의 문법』 또한 ‘인권 민주주의’를 제시하면서 비슷한 결론으로 책을 끝맺고 있다. 인권이 그 자체로 최고선을 보증할 수 없는 개념인 만큼, 치열한 토론과 정치적 과정을 거쳐 인권이 민주주의와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인권의 문법』은 『인권과 인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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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를 나눈 뒤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쟁점을 뽑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첫 번째 쟁점은 인권을 보장해야 할 필요성, 두 번째 쟁점은 신자유주의와 인권 간의 관계였다. 우선 인권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각자의 생명 및 존엄을 존중하기로 다른 이들과 약속해야 하므로.’라는 입장과, ‘우리는 홀로 살 수 없고, 언제나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므로’라는 두 가지 의견이 제시되었다. 전자에 대해서는 그 내용이 사회계약론과 유사하기 때문에, 사회계약론의 전제인 ‘자연상태’나 ‘전쟁상태’가 현실과 동떨어진 의제적 개념이라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실제로 무권리 상태에 처하는 경우, 예컨대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아 죽는다거나, 난민 혹은 이주노동자들이 어떠한 제도적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므로, 그러한 무권리 상태를 끔찍한 ‘전쟁상태’에 비유해 인권 보장의 필요성을 도출할 수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두 번째 쟁점인 신자유주의와 인권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제법 팽팽한 의견 대립이 전개되었다. 특히 『인권과 인권들』의 저자가 지나치게 신자유주의를 인권의 ‘적’으로 악마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가 그 특성상 인권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는 반대 의견이 제시되었고, 신자유주의를 인권 친화적인 개념으로 재구성할 수 있지 않느냐는 재반론이 오고갔다. 그러나 토론 자리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정의가 합의되지 않아 제대로 된 논의가 진행되기는 힘들었다. 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토론이 이루어졌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짧은 시간동안 상당한 양의 발제와 각자의 소견을 나눈 것만으로도 7월 월례회는 알찬 시간으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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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독서 토론을 통해 기존에 내가 인권에 대해 갖고 있었던 파편적인 생각들을 정리해 볼 수 있었다. 나아가 여전히 인권이 정치적·사회적으로 유의미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자칫 전문적인 법적 담론에 갇힐 수 있는 인권 개념을, 피억압자들의 생생한 저항의 언어이자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정치적 상상력으로 살려내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았다. 지금도 현장에서 분투하는 수많은 변호사들 및 인권운동가들의 활동이 바로 위 두 책이 힘주어 주장하는 ‘인권의 정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권의 이상을 제약하고 후퇴시키려는 잔혹한 현실에 맞서서, 보편적인 존엄과 평등자유를 요구하며 싸우는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나 또한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회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화, 2015/08/1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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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위 워크샵 소식

 

국제통상위는 2015. 7. 17.∼18. 경기도 용인 파운타운에서 워크샵을 가졌습니다. 다들 업무로 바쁘신 가운데에도 준비를 많이 해 주셔서 1박 2일의 일정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워크샵 발제를 나누는 과정에 발제부분보다 참가자가 많은 초유의 사태가 벌어져 사다리타기를 통한 엄정한 분배로 발제를 맡지 못하신 분들을 위로할 수 밖에 없는 뒷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우선 워크샵의 꽃인 발제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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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ISDS) 제도론중에서 김종우 변호사님께서 ISDS 분쟁해결절차 일반론을, 임영환 변호사님께서 ICSID 중재절차에 관한 연구 부분을, 오현정 변호사님께서 ISDS와 최종성의 원칙 부분을, 차명심 변호사님께서 ISDS와 투명성 확보를 위한 국제적 논의 부분을 맡아서 발제를 해 주셨습니다.

 

다음으로 ISDS 비교 및 사례연구와 관련하여 박삼성 변호사님께서 우리나라가 체결한 국가별 투자협정에 포함된 ISDS 규정의 비교, 분석 부분을, 노주희 변호사님께서 미국투자자들이 세금 부과한 멕시코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ISDS 사례 분석 부분을, 박일지 변호사님께서 사법작용에 관한 ISDS 사례 분석 부분을 발제하여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송기호 변호사님께서 TPP의 현황과 대응과제를 발표하시면서 워크샵 1부의 막을 내렸습니다.

 

노주희 변호사님의 국민MC급의 사회로 발제를 마치고 드디어 바비큐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우를 가져오신 임영환 변호사님께서 직접 요리까지 담당해주시는 멋진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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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샵 뒷풀이의 메인 음료는 역시 요즘 대세남인 백종원표 수박소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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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과 음료가 있는 베란다에서 신입 이연지 변호사님, 오현정 변호사님의 소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뒷풀이가 시작되었고, 밤 깊은 시간까지 멋진 음악을 배경으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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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가볍게 아침을 먹고 산책을 하며, 다음 워크샵을 기약하면서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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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5/08/1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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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위원회 활동소식

#. 감동의 문제작, “불안한 외출” 민변 상영회 

지난 7월 23일 저녁, 하주희 변호사님이 민변 대회의실에서 눈이 빨갛게 충혈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과연, 누가 그녀를 울린 것일까요?
바로 통일위 주관 영화 “불안한 외출” 민변 상영회에 등장하는 주인공 윤기진-황선부부와 그들의 두 딸 민이와 겨레 때문이었지요…
영화 ‘불안한 외출’은 1999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장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0여 년 간의 수배생활과 5년 동안의 감옥 생활을 해야 했던 한 청년과 그 가족들의 삶을 다룬 다큐영화인데요, 수배 중에 결혼 해 두 딸을 낳았지만 한 번도 딸들과 같이 살아보지 못했던 아빠가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살면서 겪게 되는 일상을 담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저 매일 매일 반복되는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이 이들 가족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고 꿈같은 일상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자꾸 묵직하게 만들었지요…
특히 출소 하루 전 감옥에서 쓴 편지를 이유로 검찰은 다시 그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하고, 출소와 함께 재판이 시작되고, 1년만에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요,,,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한 개인과 그 가족구성원들이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깊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통일위원회 설창일, 이광철 변호사님은 영화 속 주인공들의 변호인으로 지금까지도 활약을 하고 계신데요, 그래서인지 영화 후 이어진 간담회와 뒤풀이에서도 영화의 진한 여운이 늦도록 이어졌답니다.^^

통일1

통일2

#. “백두산으로 찾아가자, 우리들의 백두산으로!”

8월 21일(금) 부터~8월 24일(월)까지 3박 4일동안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으로 제3회 백두산 통일기행을 떠납니다.

통일위원회 백두산 통일기행은 1997년 1회 통일기행에 이어 지난 2013년 16만에 두 번 째 백두산 통일기행을 진행하였고, 올해로 3회 통일기행을 맞이하게 되었는데요, 아무쪼록 이번 백두산 통일기행이 막혀있는 남북관계에 작은 통일의 물꼬가 되길 바라봅니다.

백두산 통일기행 참가단은 통일위 꽃미남 7인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원조 꽃미남 천낙붕 변호사님과 그 계보를 잇는 설창일, 김용민, 양승봉, 이광철, 양창영 변호사님이 함께 하시고, 통일위원회 신입회원 서중희 변호사님은 통일위 점심모임에서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말에 감명을 받아 이번 백두산 기행을 결심하게 되었답니다.

그 7인방이 들려주는 대망의 백두산 여행기는 다음 뉴스레터를 기대해 주시구요, 앞으로 통일위원회는 백두산 뿐만 아니라 분단의 역사를 가진 독일 등 세계 곳곳을 누비며 통일기행의 역사를 이어갈 야심찬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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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신의 동아일보 기자가 들려주는 통일이야기”

통일위원회에서는 광복 70돌을 맞이하여 이번 8월 월례회에 아주 특별한 분을 모시려고 합니다.
김일성 종합대학교를 졸업하고 2002년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북한 관련 세계 최다 방문 사이트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를 운영하고 있는 주성하 기자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마침 지난 5월 민변 공부모임에서도 주성하 기자가 지은 『남쪽에서 보낸 편지』를 함께 읽으며 북한 주민의 눈으로 바라 본 남과 북의 실상을 통해 다양한 생각과 토론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특히 객관적인 북한전문가로 평가되는 주성하 기자의 강연은 최근의 북한상황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전하면서 향후 남북관계의 전망과 방향을 제시하는 시간이 되어줄 거라 기대되는데요, 민변 역사상 처음으로 동아일보 기자가 민변에서 강연하는 이색(?)적인 자리에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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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생
김일성 종합대학 졸업
2002년 남한 입국
2003년 동아일보 공채 입사
2015년 현재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북한전문기자)로 활동
저서 :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주성하기자의 북한 바로보기》
《외국특파원들이 본 두 개의 코리아(번역) 《세계의 명문 직업학교를 가다》
《김정은의 북한 어디로 가나》

 

화, 2015/08/11-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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