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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올바른 정치개혁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윤식 변호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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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올바른 정치개혁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윤식 변호사 인터뷰

익명 (미확인) | 월, 2016/03/14-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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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자기 소개부터 시작할까요?

 

오윤식 저는 연수원 34기로 12년차 변호사로 법무법이 공간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권리구제의 공간, 사회기여의 공간’이라는 법무법인 공간 명함을 파서 다니고 있는데요, 변호사로서 저의 지향점이 그 말에 녹아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변호사들이 권리구제를 통해서 사회기여를 해야 한다는. 그런 명함 파가가지고 다니니까 ‘사회기여’라는 말을 빼고 돈 많이 벌어라고 핀잔 주던 후배도 있었는데, 생활의 기반이 되는 물적 토대도 매우 중요하죠. 성현(聖賢)이신 맹자도 항산항심(恒産恒心)이라고 했으니까요. 그런 물적 토대가 튼실하지 못한 것이 좀 아쉽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변호사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받은 재능을 공동체에 돌려줌으로써 사회기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늘 부족하지만, 이런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김지미 처음부터 이런 말씀 드리기가 좀 뭣하지만(웃음) 73년생이라고 하기엔 중후한 외양의 소유자시잖아요. 그런 말씀 많이 들으셨죠?

 

오윤식 머리만 흰데..저는 제가 동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웃음)

 

김지미 조금 더 지나서 이덕우 변호사님처럼 완전 백발이 되면 더 멋있으실 거 같아요.

 

오윤식 그럴 수도 있죠. 지금 이거는 아주 자연스럽게 된 상태니까.

 

김지미 몇 년 안에 더 멋있어진 오변호사님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이제 오변호사님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볼까요?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오셨네요.

 

오윤식 네. 고향은 전북 남원이고 지금도 부모님은 남원에 계세요. 고등학교는 유학을 간 거죠.

 

김지미 대학에서는 법학을 전공하셨는데 역시 법조인의 꿈을 가지고 진학을 하신 거겠죠?

 

오윤식 네. 어렸을 때 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김지미 어떤 면에서 판사가 멋있어 보였을까요?

 

오윤식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어떤 사안에 대해 판정을 해주는 것이 멋있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때 장래희망을 판사로 쓴 기억이 있고, 국민학교 때는 미술시간에 그림으로 그린 적도 있어요.

 

김지미 그래서 연수원 34기로 합격을 하셨잖아요. 고향에 플랭카드 좀 붙었겠는데요(웃음)

 

오윤식 시골이라서 붙었어요. 잔치도 했습니다.(웃음)

 

김지미 보통 변호사가 된 첫 해에 민변에 가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변호사님은 그런 케이스는 아니죠? 언제 가입을 하셨나요?

 

오윤식 제 기억으로 2008년, 그때 정도에 입회를 했어요. 변호사 생활을 한 게 2005년부터인데 바로 입회한 건 아니고 촛불 집회가 한창일 때 입회를 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제가 변호사를 안산에서 시작했어요. 그 다음에 고양시에서 하다가 서울로 들어왔거든요. 별 생각 없이 지내다가 촛불집회 보고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입회를 했습니다.

 

김지미 그럼 2008년 당시 민변 신입회원이셨는데 촛불집회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고, 2009년에 용산사건진상조사단 활동도 하셨고, 그것 때문에 모범회원상도 받으셨죠?

 

오윤식 그 때가 정권 교체된 직후라 여러 가지 일이 많았고 열심히 해야 될 시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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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모범회원상을 받으면 기분이 어떤가요?

 

오윤식 제가 입회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큰 상을 받아서 영광이었죠(웃음).

 

김지미 제가 오변호사님을 처음 뵌 것도 촛불 집회 한창일 때였던 걸로 기억해요.

 

오윤식 목동 쪽에서 봤잖아요. 그 때 집회 방송 차량을 김종웅 변호사랑 제가 인천에서부터 타고 왔어요. 근데 목동부터 제지를 당한 거죠. 방송 차량이 집회 현장으로 가지 못하게 경찰이 막은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도와달라고 지원요청을 했었는데 김변호사님이 가까이 있어서 왔던 것으로 기억이 나요. 경찰하고 한창 실랑이를 해서 결국 가져갔죠.

 

김지미 네. 집이 목동이어서 주말에 쉬고 있는데 갑자기 불려 나갔었죠.(웃음) 그 당시에 제가 오변호사님이 굉장히 지적이어서 멋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했었어요~모르셨죠?

 

오윤식 한때 지적으로 보였나보죠?(웃음).

 

김지미 보니까 언론에 기고도 많이 하시고, 글 쓰는 걸 잘 하시고,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오윤식 2008년, 2009년 그 즈음에는 프레시안이나 민중의 소리에 기고를 좀 했는데 요새는 많이 안하는 편이에요.

 

김지미 당시 기고하셨던 글들을 보면 ‘방패로 시위대를 공격하는 것은 위법이다.’, ‘권력검찰을 혁파해야 된다’, 미네르바 구속이나 신영철대법관 사퇴해야 되는 이유 등등 현안에 대해 법률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글들을 많이 쓰셨던 것 같아요.

 

오윤식 네. 검찰 권력을 혁파해야된다는 글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직후에 쓴 글이예요.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한때는 신영철 징계해야 한다 이런 주장도 하고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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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2009년에는 용산철거민사망사건진상조사단이 민변 안에 꾸려지게 되는데 당시 조사단장이 장주영변호사님이셨고, 오변호사님이 법률지원팀장을 하셨어요. 갓 입회한 신입회원이나 다름없는 입장에서 중책을 맡으셨는데, 이때 활동에 대해서 잠깐 소개를 해주세요.

 

오윤식 그때 용산 사건에서 발화가 어떻게 됐는지, 사망자들이 어떻게 돌아가시게 됐는지 주로 그 부분을 중점으로 원인 규명을 하려고 했고 보고서를 발간했어요.

 

김지미 그 당시 검찰이 수사기록을 끝까지 내놓지 않았잖아요. 진상조사를 한다고는 하지만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오윤식 유가족 인터뷰를 하고 그랬는데 사실 자료가 많지 않아서 어려움이 있었어요.

 

김지미 이외에도 언소주(언론소비자주권캠페인) 관련 소송도 하셨는데 이 사안도 촛불집회 와 연관이 있고 그러고보면 오변호사님은 민변 차원의 활동엔 적극적으로 결합하시는데 비해 의외로 위원회 활동은 잘 안하시는 거 같아요.

 

오윤식 노동위 소속이긴 한데 제가 촛불 때 즈음해서 민변 활동을 하다보니까 그런 사건 위주로 활동을 한 거죠

 

김지미 검찰혁파 얘기도 하셨고, 신영철대법관 얘기도 하시는 것 보니까 사법위원회가 제격일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이건 순전히 사심을 채우려는 의도로 질문 드리는 겁니다.(웃음)

 

오윤식 저도 그런 생각은 있습니다.

 

김지미 네. 매월 3번째 목요일 회의입니다(웃음).

 

오윤식 당장 하겠다는 말씀은 못 드리겠어요. 사실 언론위 활동을 해볼까 이런 생각이 있어요. 책 쓰는 것하고 연결이 돼서.

 

김지미 표현의 자유 쪽에 관심이 있으신 거죠?

 

오윤식 네. 선거법이 말과 글을 통제하는 시스템이거든요. 표현의 자유 측면 또는 국민의 선거의 자유, 선거 참여의 자유를제약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언론위 활동을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죠.

 

김지미 말이 나온 김에 최근에 ‘후보자와 정당을 위한 공직선거법 해설’이라는 책을 내셨어요. 책이 굉장히 두꺼워요. 천 페이지 가까이 되는데, 이걸 변호사님이 혼자서 쓰셨잖아요, 이게 몇 년 동안 작업을 하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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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식 몇 년은 아니고요, 재작년이죠. 2014년 11월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김지미 1년이 안 걸린 거네요.

 

오윤식 작년 10월 초반에 최종 탈고를 했어요. 그런데 선거법이 12월에 두 번인가 바뀌었어요. 그래서 고치고 해서 제가 최종 넘긴 것은 12월 20일 정도에 넘겼거든요. 그런 것까지 하면은 1년은 넘게 걸렸죠.

 

김지미 이 책을 저술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오윤식 제가 2014년 지방선거 때 박원순시장님 캠프 법률팀에서 일을 했었죠. 선거자문을 주로 했어요. 캠프에 들어가서 선거운동을 하는데 문제가 많이 생길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 때 서류로 써 놓은 것이 있었어요. 선거 끝나고 6월 말 정도에 생산한 문서를 보니까 300장정도 됐거든요. 그게 책에 반영은 많이 안 되었지만 이 책에 보면 선거운동 할 때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실전팁이 들어가 있거든요. 그 부분은 참고가 많이 됐습니다.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죠. 처음엔 300쪽 되는 문서를 묵혀 놓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거를 활용해볼까 이런 생각도 있었는데, 조금 쓰다보니까 선거법이 워낙 조문이 많거든요. 그래서 쉽게 책 쓰는 거는 초중반에 쓰다가 포기하고 전문서적으로 나가게 된 거예요. 제가 사실은 처음에는 책 쓰는 기간을 3개월 정도 예상했었어요. 저도 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거에만 매달릴 수가 없어서 3개월 정도 예상을 했었는데, 쓰다보니까 엄청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시간이 늘어지면서 양이 많아지고 그리고 기록화 되는 거니까 신경 안 쓸 수가 없어요. 그리고 쓰다보면 욕심이 많이 생겨요. 그래서 수정도 하고 이것저것 논문도 많이 보고 독일 선거법 참고 하면서 그러다보니까 점점 늦어지다 10월 달에 탈고를 했죠.

 

김지미 말씀하신 것처럼 생업을 유지하면서 틈틈이 쓰신 거잖아요.

 

오윤식 대충 시간 계산을 해봤어요. 1주일에 토·일요일 쉬는 날 빼고 한 2-3일정도를 쓴 것 같아요. 사실은 힘들었어요. 일주일에 2-3일을 9시에 나와서 9시에 퇴근했거든요. 고시공부하듯이 책을 썼어요. 그래서 나중에 힘들다이런 생각 많이 했어요.

 

김지미 이 책 머리말에도 쓰셨지만 선거법이 변호사 등 법률전문가에게도 어려운 정도로 많은 조문을 담고 있다. 이게 사실이거든요. 그렇다면 이 책의 장점을 한마디로 표현하신다면? 책에는 실전지침서와 이론서를 다 지향했다 이렇게 쓰셨는데, 내 책은 깊이 있는 이론도 담고 있으면서, 실전에도 강하다 이런 건가요?(웃음)

 

오윤식 실전팁, 그러니까 선거운동을 하면서 선거지침으로 삼을 만한 부분을 뽑아서 실전팁이라고 해서 30개 정도 들어가 있거든요. 그 부분을 따로 목차를 잡아 놓을까 이런 생각도 있었는데, 그걸 얘기하니까 누가 그것만 카피한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서 목차를 안 잡았어요. 그런 부분은 선거 관계자들, 후보나 선거운동원이나 이런 분들한테 실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선거법 전문서로는 가장 최근법에 맞는, 충실한 내용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아까 독일법 얘기 잠깐 하셨는데 저희 정치관계법TF 방에도 변호사님이 독일법 올리신 게 있었잖아요. 직접 번역을 하신 거죠?

 

오윤식 네. 제가 직접 했습니다.

 

김지미 독일어는 언제 또 공부를 하신 거예요?

 

오윤식 독일어는 사시 준비할 때부터 했고요, 잘하는 수준은 아니에요. 그런데 독일어 번역할 때 법조문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해야 하는데, 독일연방선거법은 2009년도에 중앙선관위에서 번역을 해놓은 것이 있어요. 그래서 많이 참고를 하기는 했는데, 번역이 잘못된 것이 더러 좀 있어요. 독일연방선거법 부속법령 중에 선거심사절차법이 있는데, 그건 번역본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다 번역을 한 건데, 그래서 번역노트도 100페이지가 넘게 있어요. 일일이 찾아가면서 했기 때문에 그것도 대단히 힘들게 했습니다.

 

김지미 사시의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공부했다고 해도 누구나 이렇게 번역을 할 수 있는 건 아닐 텐데요.

 

오윤식 제가 번역만 하는데 한 달 가까이 걸렸거든요. 독일에서만 쓰는 전문적 용어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독일법령용어집이 있고, 사전 같은 게 2권 있는데 그런 책도 많이 참고해가면서 한 거죠.

 

김지미 내가 직접 번역을 해보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도 대단한 것 같아요.

 

오윤식 독일 논문을 읽고 논문을 써봐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지금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그 전에 논문을 한 10편 정도 썼는데 그거는 독일 논문은 참고 못하고 법조문 정도는 참고 했는데, 저도 모르는 단어가 많이 나오고 그래서 해석을 하고 그러면서 시간이 걸려요.

 

김지미 논문을 많이 쓰셨네요. 보면 분야를 넘나들고 있어요. 공직선거법 관련된 것도 있지만, 노동법에 관련 된 것도 있고.

 

오윤식 지금 쓰고 있는 논문은 선거구획정에 관한 것이에요.

 

김지미 역시 지적이시군요. 저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어요(웃음).

 

오윤식 지적인 것보다 제가 스스로 학자변호사를 지향하고 있어요. 꼭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아요. 변호사는 원래 사건을 많이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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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평생 공부해야 하는 직업이 변호사다 라는 말이 있는데 관련해서 보면 변호사님이 민변에 발전전략TF에서도 정책연구소 얘기를 많이 하셨잖아요.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되는 건가요?

 

오윤식 그렇죠. 저는 우리가 법률가이기 때문에 법적 영역 또는 정책적 영역으로 사회에 기여를 해야 한다, 사회에 영향 미쳐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민변 기존의 활동 흐름을 보면 그게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TF할 때도 그런 얘기를 많이 했었는데, 민변 내부에 연구센터라든지 아니면 별도로 연구소를 차리게 되면 기존 위원회 중심의 활동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거든요. 그래서 공익변론센터가 우선 설립되게 된 걸로 이해를 하고 있는데 장기적으로는 연구소 형태의 정책연구소 이런 것을 만들어서 위상을 높여야 한다 이런 생각을 좀 하죠.

 

김지미 당장의 현안들이 너무 많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당장 성과가 없더라도 쭉 밀고 나가야 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러기에는 민변이 예산이나 인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잖아요. 변호사님이 생각하기에 민변에서 이런 것들은 공부를 해봤으면 좋겠다 하는 주제나 분야가 있을까요?

 

오윤식 제 책과도 조금 관련이 되어 있는데, 제가 독일선거법보면서 깜짝 놀란 것이 독일에서는 선거운동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그래서 선거운동 자체를 규제를 안 하는 거예요. 선거 비용 자체도 규제를 안 해요. 선거비용은 금권선거 이런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규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는데 법에서 규제를 안 하고 정당간의 자율협약으로 규제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법에 없어요. 그런 것을 보면 아주 선진적인 선거법 모델이라고 할 수 있죠. 반면에 우리 선거법에는 선거운동에 관한 규제조항이 많아요. 우리 선거법은 일본 시스템이거든요. 이게 일제시대에 성립한 억압적인 선거법 체계거든요. 그게 1958년 정도에 참의원이 선거법 개정하면서 그런 시스템이 들어온 거예요. 그 전까지는 우리 법도 강하게 포괄적으로 규제하는 체계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선거법 자체가 일본 잔재인 측면이 있죠. 그런데 계속 가져가잖아요. 지금 정치권에서는 기득권을 지키는 차원에서 규제하는 측면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선거법을 연구할 때 비교법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김지미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우리가 선거운동이라든지 선거방법에 대해서 규제를 해 온 것이 50년, 60년 넘었단 말이죠. 그런데도 계속 선거비리, 금권·관권선거 그런 얘기가 나오잖아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규제를 하는데도 이런데, 규제를 풀면 돈 있는 사람, 힘 있는 사람이 결국 이기는 거 아니냐. 독일하고 비교를 해보면 독일은 규제를 하지 않음에도 선거과정에서의 부작용이랄까 그런 것들이 우리나라보다 덜하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온다고 보세요?

 

오윤식 우리의 정치문화나 국민의 의식 수준의 차이, 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김지미 오히려 시민들 사이에서 자율적으로 이루어진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런 문화가 덜 발달됐다라고 보시는 건가요?

 

오윤식 네, 그렇게 볼 수도 있어요. 그래서 학자들 중에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 60년 동안 우리가 억압적으로 포괄적으로 강하게 규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비리, 부정선거 이런 게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것은 규제하는 시스템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발상의 전환을 통해서 국민의 자율에 맡기는 시스템 도입을 할 필요가 있다. 저도 그런 생각에 공감을 하는 거지요. 우리 선거법이 강하게 규제를 하는 건 관권선거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3·15부정선거라든지 최근 2012년 대선도 광범위한 부정 관권선거 의혹이 있는데, 그런 것은 규제 안 할 수가 없죠. 저도 전면적으로 선거법 규제를 풀자 그렇게 주장하는 건 아니에요. 공무원의 선거관여 이런 것은 현행 수준 아니면 거기보다 강하게 할 수도 있겠죠. 다만 일반 국민들의, 유권자들의 선거운동의 자유라든지국민의 선거 참여의 자유를 너무 강하게 규제를 하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선거가 어떻게 보면 국민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과정인데 국민들을 구경꾼으로 전락시키는 측면이 있죠.

 

김지미 기존의 규제를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 건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세력에 더 유리한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앞으로 총선·대선을 앞두고 국민들의 표현의 자유가 더 위축될 것이다 라는 우려가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같은 연장선상에서 언론위 활동을 하고 싶다 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죠?

 

오윤식 그런 측면도 있죠. 3월 정도 즈음에 선거 분위기가 조성되면 표현의 자유라든지 국민의 선거운동 확대라든지 그런 측면에서 민변이 역할을 일정부분 해야 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고 그때 제가 역할을 좀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김지미 총선이 끝났다고 해서 그런 사건이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어느 정도 마무리 되면 사법위 오시는 걸로(웃음). 변호사님 책상에도 이게 있지만, 따로 물어보려고 했던 것이 이 사건인데요, 종교인 소득세 납부자료 정보공개청구소송에서 일부 승소를 하셨고 이 사건을 맡으셨는데 이게 보니까 원래는 한겨레 21이 국세청에 성직자의 소득세 납부 현황 등에 대해 정보공개청구를 했는데, 비공개 결정이 났고 이 기사를 보고 변호사님이 먼저 한겨레 21에 연락을 하신 거죠?

 

오윤식 네. 고나무 기자인데 기사를 읽고 나서 “제가 공감을 해서 무보수 대리를 해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먼저 연락을 했어요. 개인적으로 같은 국민이기 때문에 종교인도 과세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국가 운영의 근본이되는 것이 세금이거든요. 종교인들이 하늘나라에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 내에서 봉사하기 때문에 당연하게 세금을 내야 한다. 이런 생각이 강하게 있었어요. 그래서 기사보고 제가 메일을 보냈죠. 제가 1심 중간부터 같이 했는데 2심에서 이겼어요. 그런데 대법원에서는 공개거부처분이 옳다고 해서 졌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져서 아쉬운 측면이 있죠.

 

김지미 성격이 보기보다 적극적이신 거 같아요. 최근에는 민중총궐기 대응 변호인단에 참여를 하고 계시잖아요. 저희가 당시 살수차 영상에 대해서 증거보전신청을 해서 그건 홍성지원에서 기일을 진행했었고 내일 다른 살수차 영상에 대한 증거보전 관련해서 광주를 가시죠?

 

오윤식 백남기 선생님은 분명한 국가폭력의 피해자이시죠, 국가 공권력의 발동, 특히 형사 사법절차에서는 염결성이라고 하잖아요. 적법절차를 준수하면서 공권력이 발동되어야 하는데 그런 걸 준수하지 않는 공권력은 사실은 흉기와 같다고 생각을 해요. 백남기 선생님 같은 케이스가 그런 사례잖아요. 기본적으로 이건 아니다 싶어서 참여를 하게 됐죠.

 

김지미 내일 검증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잠깐 소개를 해주세요.

 

오윤식 홍성지원에서는 충남청 소속 살수차에 달린 영상에 대해서 어떻게 물포를 쏘고 백남기 선생님이 그때 당시에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떻게 피해를 입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검증을 했어요. 이번에 광주지법에서 하는 검증은 백남기 선생님을 피격한 살수차 말고 다른 살수차에 대한 것인데 당시 조준 살수를 했는지, 고의성이 있었는지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김지미 민변의 열혈 회원으로서 앞으로 민변이 나아갈 방향, 민변의 발전을 위해서 평소에 생각하신 바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오윤식 초반에 말씀드린 부분이기도 한데, 민변이 장기적으로 연구소를 설립해서 정책 역량·연구역량을 강화해야 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요. 대의원회 자료집을 보니까 공익변론센터에서 위원회에서 포섭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연구에 대한 지원 같은 내용이 있던데 그런 계획이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김지미 기승전 정책연구소네요(웃음). 정책연구소 필요하죠. 예를 들면 저희가 정치관계법 TF를 만들기는 했지만 평소에 이런 분야에 대한 연구가 되어 있으면 정치관계법 개혁 논의가 있을 때 민변이 선도적으로 연구 성과물도 내놓고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전문가 단체로서의 성격을 확실히 하려면 그런 쪽에 역량이 좀 투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있어요.

 

오윤식 제가 책 쓰면서도 느낀 건데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어떤 것도 바뀌지 않는다.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미완의 불완전한 개혁에 머무를 것이다. 우리가 법률가인데 가끔 잊어버리는 측면이 있다고 보는 게 정치하는 사람들이민주주의 구현 수단인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그 국회의원들이 국회를 통해서 법을 만들어 내잖아요. 정치인들이 국민의 선택을 받아서 국회에 들어가서 법을 만들면 그 법에 우리 사회의국민·모든 기관이 지배를 받는 거잖아요. 그래서 민주주의하고 법치주의가 결합이 될 수밖에 없고 저는 그걸 ‘민주법치주의’ 이렇게 표현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 회원이 정치권에 적극 나가서 세력을 형성해서 법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를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편이죠. 그래서 입후보 하신 분들이 제 책을 보시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웃음)

 

김지미 정말 좋은 말이네요. 올바른 정치개혁 없이는 어떤 사회개혁의 성취도, 어떤 경제개혁의 완성도 어렵고, 가능하더라도 불완전한 미완의 개혁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올바른 정치개혁이 가장 중요하다.

 

오윤식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독일의 사민당 정도의 정치세력을 만들어서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다고 생각하는데 잘 안됐었죠. 그런 것이 좀 아쉽다고 생각하고요, 앞으로 정치혁명, 민주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갈 정치세력 형성의 중요하다. 그 세력 형성에 민변도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저도 미약하게라도 그런 역할에 기여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김지미 혁명이나 개혁 이런 말로 회원 인터뷰를 끝맺기는 처음인 것 같아요. 변호사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민변 회원으로서 시대적인 소명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 오변호사님을 자주 뵐 것 같다는 예감도 들구요.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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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우선,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동화 저는 이동화 혹은 셀림이라고 하구요. 민변에서는 2007년 1월부터 근무하고 있고, 국제연대위와 국제통상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무처에서는 회원팀, 입법감시TF 등 여러 가지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안혜성 저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요르단 대학에서 아랍어를 공부하셨다고 하는데, 방금 한 자기소개를 아랍어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동화 아 진짜 이거 몇 년 만에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مرحبا، اسمي سليم، وأنا أعمل في minbyun منذ عام 2007 باعتباره المنسق الدولي. تشرفت بمقابلتك. وداعا. (앗 쌀람 알라이쿰 이쓰 미 셀림. 아나 다라쓰투 루가 아라비아 피 마르카주 루가 피 알 아루두니야. 알 안 아나 알 아말 피 민변 민 투싸나아 세바하. 슈크란 좌질란……)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셀림입니다. 저는 2007년부터 민변이라는 곳에서 국제연대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뭐 이런 뜻입니다.(웃음)

일동 우와~ (웃음)

안혜성 2007년부터 민변에서 일하셨다고 했는데, 민변과 함께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동화 요르단에서 공부도 하고, 캐나다에서 자격증도 따고. 그러다 2006년 10월 경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그 때, 오래전부터 제 ‘길이자, 꿈이자 계획‘이라고 생각했던 국제연대 활동, 그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물색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국제연대 활동을 하며 단체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지는 않았고, 민변과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정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 모두에 합격했지만(웃음) 민변으로 오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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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코이카와 민변 중 왜 민변을 선택하셨나요?

이동화 아무래도 제가 활동할 수 있는지를 따져 봤을 때, 민변이 훨씬 더 유리할 것 같고, 민변에 대해 이전부터 좋은 일을 하는 단체라고 생각했기에 여기서 활동하기로 결정했죠. 그땐 제가 뭘 잘 몰랐던 것 같아요.(웃음)

안혜성 국제연대 활동이 왜 본인의 ‘길이자 꿈이자 계획’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자세하게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대학교와 대학원 시절, 교수님의 말씀 및 여러 시민사회 활동가분들과의 교류를 통해 국제연대의 중요성에 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전에는 국내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고 가장 처절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한번 돌려보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정말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국제연대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계기는 이라크 전쟁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그 사건이 저한테 길을 보여준 것이죠.

박재홍 전쟁을 지켜보셨던 당시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동화 저는 전쟁이라는 것이 처절한 이미지로 다가왔어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려오는 느낌이랄까요. 사람이 죽고, 부상당하고, 삶이 쪼개지는, 사람의 상식과 논리를 뛰어넘는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진행되죠. 그래서 치열하게 반전을 외쳤습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전에 세계 곳곳의 반전 여론을 보며, 전쟁을 시민과 민중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정치적 논리로 전쟁이 발발하고야 말더군요.

구체적인 활동 이야기를 하자면, 제 대학원 선배 중에 전쟁을 막기 위해 ‘인간방패 운동’에 참여한 선배가 있었어요. 세계 각지에서 활동가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이라크에 들어가서는 포격 대상이 될 만한 시설에 투입되는 방식의 운동을 말하는데요. 이게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방식은 아니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꽤나 참여를 했습니다. 저 역시 ‘저렇게라도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생각하며 출국 일정이 잡았었습니다. 그런데 이라크 전쟁 전에는 입국이 가능했었는데, 개전 이후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포기해야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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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직접 참여는 못하셨지만,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들겠다고 결심하신 건데요. 그에 따른 두려움은 없었는지, 두려움을 이기게 한 원동력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동화 철없음? (웃음) 현지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보다, 당장의 참혹한 일을 막아야겠다는 절박함이 컸기에 그런 두려움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앞서 가있는 사람들이 있었고요. 또 당시에 저는 당시 싱글이었죠. (웃음) 지금 가라고 하면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박재홍 ‘인간방패 운동’이 좌절된 이후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라크에 가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이동화 이라크는 예상보다 빠르고 쉽게 몰락을 해요. 이후에는 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했습니다. 재건 노력을 시민사회가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었고, 이에 동의했던 저는 2003년 6월 4일에 이라크에 입국을 했습니다. 도시가 예상보다는 황폐하지 않았지만 미국이 주요 관공서, 도로 등을 정밀하게 타격해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폭격의 상흔이 남은 도시에 사람들이, 그 말도 안 되는 공간에서 그대로 살고 있더라고요. 그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매우 빈곤했던 한 마을에 들어가 어린이를 위한 시설과 진료소를 지었습니다. 당시 한겨레신문을 통해 모금 받은 금액으로 진행을 했고요.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사고도 있었고, 금전 문제도 있었던 바람에 함께 했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떠나갔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시에 시간적 여유도 있었고, 거기가 너무나 좋아서, 혼자였지만 남아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예상과 정말 다른 매력, 사람이 주는 매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시골 사람들 보면서 순박하고 정이 많다고 하죠. 그 사람들이 정말 그랬습니다. 또 그 때가, 셀림이라는 이름을 받은 계기이기도 한데요. 제가 당시 시설을 지을 때 일을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그때 사람들이 저를 셀림이라 불렀어요, 친구한테 그게 무슨 뜻인지 물었더니, 한국의 마당쇠, 돌쇠처럼 우직하게 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지금까지도 저를 그렇게 불러달라고 합니다.

안혜성 그 때 셀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셨군요. (웃음) 이라크에서의 나머지 이야기도 마저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이라크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게 됩니다. 너무 더워 지붕에 앉아있는데 총알이 날아다니는 게 보이더군요. 폭탄이 터지는 게 일상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더 최악이었던 건, 2003년 12월에 한국에 들어왔다가 2004년 6월에 다시 이라크에 들어가는데, 그 때부터는 외국 사람들이 인질로 납치가 되는 게 유행이 되고 있었던 겁니다. 2004년 정도부터 현지에서는 NGO나 언론, 혹은 외국 기업 관계자를 납치하고 각국 정부와 협상을 벌여 외화를 버는 형태의 범죄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고 김선일씨의 일도 그 때 당시의 일이었어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습니다. 활동가로서 현지에서 죽음을 당한다는 데는 두 가지 차원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내가 죽는 것을 넘어 현지 사람들에게 힘듦을 안겨줄 수도 있고, 운동의 의미도 많이 깨지게 되니까요.

바그다드에 있는 허름한 호텔에 머물렀을 때, 어느 날 새벽에 무장괴한이 사람들을 끌고 가는 모습을 바로 맞은편에서 목격했었습니다. 그 일을 겪고 대사관에서 머물렀었습니다. 활동을 보장해준다더니, 아예 나가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같이 있던 형이 대사관 담을 넘으려고도 했었죠(웃음) 그러던 중, 여권법이 개정되었습니다. 현지 정부의 승인 없이 체류한다면 영구적으로 추방될 수도 있게 된 거죠. 다시 이라크에 가지 못하는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했었습니다. 이후 이라크는 여행 금지국으로 지정되더군요. 그렇게 이라크에서의 생활이 끝났네요.

안혜성 간사님께 큰 영향을 미쳤던 이라크에서의 생활을 마친 소회와 그 이후 중동 유학시절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이동화 한국에 돌아와 저는, 이라크에 있을 때 왜 사람들과 소통이 생각만큼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을까에 관해 고민했었습니다. 언어의 문제 때문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당시 영어를 썼는데 아무래도 현지에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대학교육을 받은 남자라는 대단히 소수집단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중간 매개자를 끼고 소통을 한다는 건 내용이 변질되는 부분도 있고 전달이 잘 안 되는 부분도 있잖아요. 저는 어쨌든 다시 가서 활동을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랍어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 돈이 좀 필요해서 반월공단에서 7개월쯤 일하기도 했었어요. 그러고서 요르단에 가서는 아랍어를 공부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처음 간 것도 그때였어요. 원래는 이라크 옆이라서 요르단을 간 건데요. 가보니까 요르단 옆에 이스라엘이,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있더라고요. 물론 팔레스타인은 지도상에 없지만 요르단 인구의 1/3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 지역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대개 한국 활동가들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입문하는 방식이 저와 비슷해요. 요르단을 통해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접하는데, 현지에 가보면 새로운 문제들을 알게 됩니다. 기회가 생겨 저도 팔레스타인에 가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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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팔레스타인에 가셔서 어떤 걸 보고 느끼셨나요?

이동화 팔레스타인은 1948년부터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지날 수밖에 없는데요. 이라크에서는 높은 벽이 있는 경우 그 내부에는 미국 대사관 같이 무언가 지켜져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높이 10m의 두꺼운 벽이 800km 길이로 팔레스타인을 감싸고 있어요. 여기를 들어가려면 이 장벽에 있는 체크 포인트를 한 명씩 들어가야 해요. 이렇게 들어가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벽 안에도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정착촌이 있어요. 그러면 그것들을 연결해서 또 블록으로 싸죠. 이것을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총을 발사하거나 폭탄을 투하하는 것과는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동의 자유를 제한받는 것이죠. 어떤 사건만 생기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사가 아닌 처벌의 목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활에 불편함을 가중시켜 왔습니다.

또한 2006년 초, 팔레스타인은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하마스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선거감시인단의 감독 하에 민주적으로 치러진 선거였으나 이스라엘은 이 정권이 테러정당이라고 발표한 뒤 통화 제재를 시작합니다. 팔레스타인은 자체 통화를 갖지 않고 원조를 받거나 송금을 받아 사용하는데, 이스라엘이 이를 막습니다. 또한 이외로도 수도를 막고, 나무를 베고 하는 식으로 삶을 옥죄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떠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말해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의 사정을 알려 달라!”며 입을 모아 말하죠.

박재홍 그래서 알리셨나요?

이동화 글쎄요. 현지 활동가도 많아졌고 우리나라도 예전만큼 팔레스타인에 부정적이진 않지만 세상을 바꿀 정도 수준은 못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팔레스타인이 제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 거기도 하고요. 이라크나 팔레스타인이나 모두 무슬림이고, 모두가 피해자죠. 당시 저는 ‘미 제국주의’ 이런 용어를 즐겨 썼는데요. (웃음) 지금은 그 정도로 날 서 있지는 않지만 강대국에게 핍박받는 부분들에 대해 많이 공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당시에는 말도 못할 수준의 억압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대부분 무슬림들이더라고요. 제가 원래 종교를 안 믿는데 당시엔 그들 때문에 무슬림이 되기도 했었어요. 두 국가, 두 나라가 제 시선을 붙잡았고 제 길이 되었습니다.

박재홍 그러다가 이제 한국으로 들어오셨고요?

이동화 그렇죠. 그리고 이제 민변 활동가가 됐죠.

박재홍 민변에서는 주로 어떤 일들을 해 오셨나요?

이동화 처음에는 국제연대위원회와 민생경제위원회, 사법위원회를 담당하는 활동을 했어요. 이후에 민변 사무국이 사무처로 개편이 되면서 위원회는 국제연대위원회와 국제통상위 그리고 사무처에서는 회원팀, 그리고 입법감시 tf 활동을 하게 되었고 또 사무처에서 일어나는 단기적 사업(총회나 인권보고대회 등)에도 다른 상근자와 함께 진행하였어요. 연차가 조금씩 쌓이면서 주어진 일 외에도 여러 일을 담당했던 것 같아요. 회원분 들에게는 주로 문자나 메일로 각종 행사나 회의에 참석 및 회신을 요청하는 ‘스팸문자’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어요.

박재홍 민변에서 8년을 지내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을 꼽으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동화 아무래도 광우병 고시무효 헌법소원과 이어지는 촛불집회인 것 같아요. 민변차원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활동일 것 같은데, 광우병 헌법소원은 정말 별다른 고민 없이 제안되었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1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여를 해주었어요. 그 와중에 서버도 몇 번이나 다운되고, 시민들이 사무국으로 문의하는 내용에 답변을 주면 바로 다음 아고라에서 Top으로 논의되고.. 조금 무섭더라고요. 그리고 2박3일간 2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밤낮으로 도장작업을 했던, 지금 생각하면 조금 기이한 현상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리고 헌법소원 이후 매일 밤 이어진 촛불집회, 정말 많은 민변 회원들과 함께 노란색 인권침해감시조끼를 입고 광화문과 종로를 누볐던 기억이 나요. 거의 한달 이상을 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 했었던 정말 가슴 뜨거웠던 기억인 것 같아요.

안혜성 현재 회원팀장을 맡고 계신 걸로 아는데 1,000명이 넘는 민변 회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혹은 가장 인상 깊은 회원이 있을까요?

이동화 너무 난감한 질문인데요. 솔직히 너무 많은 회원 분들과 현재도 친분을 나누고 있기에 누군가를 한명 찍기가 너무 어렵구요. 다만 가장 가슴이 아팠던 회원은 같은 상근자이기도 했던 故 어중선 간사입니다. 같이 근무하면서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저를 많이 따랐고 저도 늘 마음이 갔던 동생 같은 녀석이었어요. 뜻한 바 있어 귀농을 했는데 몇 개월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죽기 1주일 전에 저희 집에서 진탕 술을 먹고 같이 곯아 떨어졌는데 그 다음 주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안혜성 자원활동가 1기부터 쭉 지켜봐 오셨을 텐데 간사님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원활동가의 상은 어떤 것인가요?

이동화 무엇보다 민변의 자원활동가(이전 인턴)분들은 자신들의 시간과 노력을 민변에 쏟아주시는 분들이기에 기본적으로 훌륭하신 분들이고, 반면에 민변이 조직적으로 그 분들의 노력과 활동에 비하여 제대로 된 평가와 인정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그분들에게 무언가를 더 바라는 건 조금 죄송스러운 기분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생각하는 자원활동가의 상은 자원 활동하는 그 기간 동안은 민변에 한 번 깊이 빠져드는 그런 자원활동가인 것 같아요. 민변은 정말 다양하고 많은 활동을 하잖아요. 저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을 정도이기에, 많이 경험하고 체험하려 노력하는 자원활동가면 더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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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민변은 변호사 단체인데요. 변호사가 아닌 활동가로서 생활하면서 한계를 느끼신 점 혹은 불편한 점은 없으셨나요?

이동화 이거 얘기 잘해야겠네.(웃음) 활동가는 기본적으로 organizing(조직)과 coordinating을 담당해야 합니다. 거기에 더하여 물론 전문성도 필요한 거죠. organizing을 하고 coordinating을 하는 것에 있어서는 다른 단체와 별반 차이점이 있지는 않아요. 어디에서 활동하던 회원들의 활동을 끌어내고 행사를 조직하는 역할은 비슷합니다. 법률 전문가 단체에서 법률 전문가가 아닌 상태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어려운 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비전과 연관이 된다면 사실을 활동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게 민변 활동의 한계로 작용하지는 않아요. 민변이 변호사 협회거나 학술단체이면 법률에 대해 전문성이 없는 우리가 비전을 갖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민변은 인권단체이고 운동단체이기 때문에 그 활동의 대상은 변호사가 아니라 피해 받는 일반, 다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민변에 있으면서 순간 순간 어려운 점을 겪기도 했지만, 내가 많이 부족해서 제대로 안 된 거지 내가 변호사가 아니기 때문에 안 됐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아요.

게다가 민변의 활동은 굉장히 다양해요, 지금 생각나는 것만 해도 기자회견, 토론회, 집회 내부 행사, 시위 선전, 기고, 면담 등이 있네요. 상근자들이 잘 해야 되는 것들은 1000명을 넘는 회원 분들의 역량을 끄집어내는 영역이죠. 저는 회원 분들의 힘들을 끌어내는 일, 그것이 조직 내 활동가가 가져야 할 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박재홍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에 계시다가 한국에 들어오셨고, 민변으로 들어와서 활동을 하게 되셨는데요. 그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2007년 이후로 지금까지 하고 계시는 일, 그리고 그것이 중동지역에서 겪으신 일들과 어떤 맥락에서 이어지는 것인지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기본적으로 단체로 일하는 활동가이기 때문에 그 정체성 측면에서 이전 활동들이 다 민변 활동의 밑거름이 되죠. 민변은 2008년 이후로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됩니다. 특히 시민들과 만나고 하면서 촛불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저는 그 틈에서 밀알이 되었던 것 같아요. 잇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리고 저는 스스로가 행사를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일부러 일을 만들기도 했고, 열심히 했었어요. 민변의 국제연대위 소속으로서 연대활동을 하면서 제 활동, 활동의 정당성 등을 보장받을 수 있었구요,

또 운동이라는 것들이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이 중심에 있지만, 사실 그것들만 볼 수는 없어요. 아시아 지역에도 다양한 문제점이 있어요. 예를 들어 필리핀에서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길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기도 하고요. 말레이시아에서는 승려들이 기름 값 올랐다고 시위하다가 총 맞아 죽었습니다. 티벳과 같은 경우는 중국과 종교적으로 달라 중국에 독립을 요청했는데, 또 총을 맞는 거죠. 이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 정말 많은 인권침해 사례이 있어요. 이러한 사례들로 제 시야가 넓어지면서 이러한 일들에 대해 회원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시아 인권 팀도 생겼고요. 한국 내에 있는 해외 대상 단체들과 연계해서 일하는 것도 시작되었습니다. 필리핀 연대, 버마 연대 등등 말이죠.

박재홍 활동가로 한 단체에서 10년 가까이 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상근활동가로서 반복되는 업무에 지칠 때도 있었을 텐데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인가요?

이동화 언젠가 아내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도 있지만 저는 민변과 잘 맞는 거 같아요. 위원회 내에서 많이 배우기도 하고 제 활동에 대한 인정과 배려도 있고, 사무처 일도 보람 있고, 특히 제가 활동한 시기가 대체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 겹치기 때문에 민변이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했고, 하고 있거든요. 그 활동의 어느 지점에 저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면 활동가로서 만족도 있고요. 결국은 민변에서 좋은 사람들 만나서 지금까지 즐겁게 활동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안혜성 2014년 안식월을 가지셔서 팔레스타인에 가신 것으로 아는데, 그 이야기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아, 이 얘기 해야겠네요. 민변은 7~8년을 근무하면 3개월간 유급 안식월을 주는 제도가 있습니다. 아주 감사하고 좋은 제도에요. (웃음) 저는 언제부터인가 셀림이라는 말을 쓰기가 많이 창피해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너무나 고통 받고 잇는데, 지금 나는 내 안위를 위해서 너무 편한 활동만 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미안한 생각 이 커졌기 때문이에요.그래서 민변에서 7년 딱 있다가 생각한 것은 다시 현장을 가보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안식월에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향했습니다.

예전과 달리 그 당시에는 현지에 ISM이라는 국제 활동가들이 가입해서 자원 활동하는 단체가 있는데요. 물론 저도 가입을 했고요.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을 막는 활동, 장벽 반대 활동을 했었고 또 야간 공습이 있으면 그걸 카메라로 찍는 활동 등을 했어요. 당연히 활동 중에 죽는 사람들도 여럿이고요.

현장은 늘 그런 것 같아요. 예전처럼 울컥하는 느낌도 있지만, ‘어쨌든 제 평생 안고 갈 주제인데… ’ 라는 생각도 들고. 거기 있는 사람들도 또 다 굳건하게 일상을 살아내고 있거든요.

박재홍 지금 카톡 프로필을 보니 ‘다시 그 길 위를 걷다’라는 상태 메시지를 설정해 두셨네요. 살아오신 길과 관련하여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동화 카카오톡까지 보시다니, 무슨 제 뒷조사 하시나요? (웃음) 이라크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으면서, 이 얽힌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낼까 계속적으로 고민해왔었어요. 결론은 이건 내가 평생 가면서 풀어내야 할 문제, 평생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었어요.

저는 평생 활동을 하려고 해요. 거기에 있어서 민변 활동들이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지만 자칫 하다간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다시 팔레스타인을 다녀오면서 그게 명확해졌던 것 같아요. 나는 혼자 울컥했다가 가라앉았다가 오르막 내리막을 겪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평생을 계속 거기서 살아내고 있더라고요. 그 때 든 생각이에요. 이제는 그 간격을 좁혀서 길을 나아가야겠다는 거에요. 또 중요한 것은 나는 비록 갈지자로 가고 있다고 느끼곤 있지만 어쨌든 나도 이 길을 가고 있다는 거. 지금 당장 내가 현장에서 활동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고요. 예전만큼 예봉이 날카롭진 않더라도, 운동이 제 평생의 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안혜성 지금 가정도 있으신데, 이번에 다시 팔레스타인에 들어가실 때 아내 분의 반대 등은 없었나요? 저희가 알기로 아내 분이 참여연대 활동가시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이해를 많이 해주는 편인가요?

이동화 와이프가 제 걱정을 가장 많이 하죠. 와이프랑 함께 살아오면서 서로의 길과 꿈에 대한 인정과 이해가 있어 왔다는 생각을 해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고 이해를 해주지 않았나 합니다. 물론 약간의 뻥도 쳤죠. 안 위험하다고. 그런데 가자마자 폭격이. (웃음)

김서영 아내 자랑 좀 해주세요!

이동화 참여연대가 민변보다 훨씬 힘든 곳이에요. 내부의 날선 비판도 많고요. 무언가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문화가 있죠. 그런데도 아내는 10년 이상 버텨온 저력이 있는 사람이에요. 전형적인 외유내강 형이라고 보면 돼요. 사실 저랑 살기로 한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모험이었을 거에요. (웃음) 늘 고맙고요. 이쁘고 사랑스럽고 착한 사람이죠. 현명하고…

김서영 두 분은 어떻게 만나신 건가요?

이동화 소개팅이요. (웃음) 절박했죠.

김서영 술을 엄청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주량은 얼마나 되시나요?

이동화 편차가 크긴 한데, 굳이 말하자면 소주 2병정도인 것 같네요.

박재홍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 보면 대부분 사람을 좋아하더라고요. (웃음) 이라크 복구사업 당시 그 곳에 홀로 남았을 때도 아이들이 좋아서 그랬다고 하셨고. 인터뷰를 하면서 간사님께서 매우 일관된 삶을 살아오셨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동화 저는 사람 각자가 주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만났던 이라크,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다른 것을 생각하기 힘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어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조건 속에서도 정말 평화롭게 살거든요. 제가 처음에 이라크에 있던 7개월 동안은 제가 살았던 시간 중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어요. 역설적으로 너무 좋았다. 그들 속에 마약과 같은 느낌이 있었고요. 그들과 떨어지니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방황도 했던 거죠.

거기는 돈 많고 힘 있는 것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곳입니다, 전기도 없고, 시장, 학교 가려면 목숨 걸어야 될 때도 있고요. 폭탄이 어디서 터질지 모르니까요. 그럼에도 가족끼리, 마을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선 다들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는 모습은 정말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제가 살면서 뭘 하고 있더라도 그걸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들과 함께 있든 그렇지 않든 저는 항상 그곳을 생각하고 있을 거에요.

김서영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먼저 활동을 하셨던 선배님으로서 로스쿨을 꿈꾸는 사람들이나 활동가 지망생들, 혹은 저희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어떤 걸까요?

이동화 진짜 현장운동을 많이 하신 선배님들도 많아 제가 선배로 이야기하는 건 적절치 않고, 함께 활동하는 측면에서 이야기 하자면, 나중에 활동가가 되건 법률가가 되건 끊임없이 눈과 귀는 현장에 두라는 거죠, 한국이든 팔레스타인이건 이라크건, 제가 갔고 봤고 들었기 때문에 알 수 있던 문제들이었어요. 사람은 자기 주변을 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본인을 현장에 둬야할 필요성이 있는 거죠. 국회 앞에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농성을 해요. 그럼 가서 봐야죠. 기자회견을 한다, 농성을 한다, 가서 직접 보고 이야기를 들어봐야죠. 여러분이 나중에 변호사가 될 수도, 기자가 될 수도, 사업을 할 수도 있을 거예요. 다만 민변을 거쳐 가며 얻어야 할 것들은 기본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대단히 많은 차원이 얽힌 채 존재합니다. 현장과 함께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느끼려고 하는 것이 그래서 필요한 거죠. 신념과 열정만 가지고서는 알 수 없는 차원들이 있어요. 끊임없는 자극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함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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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5/09/2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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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더위가 시작되던 지난 7월 7일 강의를 위해 서울에 방문하신 박진희 씨를 만났습니다. 박진희 씨는 사회적 기업인 푸드앤 저스티스 지니스 테이블을 운영 중이시며 유기 농산물 재배 농부이시기도 합니다. 박진희 씨의 먹거리 정의 이야기와 냉장고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성사된 인터뷰, 소개해드릴게요.

 

환경정의(이하 환경):의식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박진희(이하 박): 먹거리가 제일 중요합니다. 집은 주거복지라는 개념이 있어 정책도 있지요. 옷은 몇 벌 가지고 있느냐가 생존을 좌우하지는 않습니다. 문화적 코드의 개념이 강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먹거리 복지라는 개념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먹을거리는 생존에 관한 문제입니다. 주택은 공유할 수 있고 옷은 재활용하거나 공유할 수 있지만 먹을 것은 그렇게 되지 않죠. 그래서 의식주가 한 데 묶이는 것은 어렵고 ‘식의주’라고 이야기되어야 하는 게 맞는다고 봅니다. 먹을거리가 기본적으로 보장된 다음에 주거의 문제를 논하고 문화적인 것(의복)을 충족하는 게 맞는다고 봐요.

어렸을 때, 길거리에 서있는 장애인 형제를 본 적이 있어요. 그때 그분들이 새우깡 같은 과자를 먹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제 눈에 보기에, 즐기려고 먹는 것이 아니라 배고파서 과자를 먹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 제가 ‘아 우리가 간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주식일 수 있구나.’라는 경험을 처음 해보았던 거 같아요. 그때부터 먹거리에 대한 중요성을 어렴풋이 했던 거 같습니다.

환경: 냉장고 용량은 어떻게 되나요?

박: 양문형 하나, 김치냉장고 하나가 있고 마을용 저온저장고가 있어서 이것도 이용하고 있어요. 김치냉장고는 배추를 팔고 남은 것을 다 담아야 하고 또 어머님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여차여차 마련하게 되었어요. 냉장고는 오래전부터 썼던 냉장고가 고장 나서 냉동실이 큰 양문형을 마련했고요. 음식을 바로바로 해 먹기 때문에 봄-가을엔 냉장실이 거의 비어있습니다. 냉장실의 가치는 다진 마늘, 장류, 오이소박이 보관하는 정도에요. 냉동실에는 다져놓은 마늘과 씨앗 그리고 농번기 필수 아이템인 얼음이 있어요.

냉장고는 소비를 부추기는 최적화된 시스템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이걸 사서 냉장고에 넣어놓으면 보관이 언제나 가능하다는 무언의 압력이 있잖아요. 용량을 늘리는 것이 부를 상징하기도 하고요. 대형 냉장고를 가져야 하고 양문형 냉장고를 사야 하는 문화적 코드와 맞물리는 거죠. 냉장고는 산업화와 소비지향의 트렌드를 극렬하게 반영하는 것이라는 생각해요.

 

환경: 먹거리를 살 때 가장 중점적으로 보는 것은 어떤 건가요?

박: 1순위 원산지, 2순위 화학첨가물입니다. 화학첨가물을 염두에 두면 살 수 있는 게 많이 없어요. 아이들과 같이 장을 보러 가서 성분 표시표 보면서 최소한으로 들어간 것을 구매해요. 아이들이 음식을 먹더라도 무엇을 먹는지 인지하면서 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아이들과 먹거리 교육을 할 때 미각 수업을 진행하거든요. 그때 어떤 것을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인지를 봐야 해요. 먹거리의 대안으로 생협 식품을 이야기하지만 시골에서는 생협 조합원을 부모로 둔 아이들은 아마 거의 없을 거예요. 아이들이 현장에서 생활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 방법을 알려주지 않으면 취약계층 아이들은 미각 수업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요리 수업도 사용할 수 없는 기구와 식재료 가져와서 만들면 집에 가선 요리가 안 되잖아요. 식생활 지도 나 요리수업들이 내 삶으로 연결되는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해요.

 

환경: 소비의 양극화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있다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박: 소비 양극화는 경제적 양극화가 원인이에요. 경제 양극화는 구조적으로 부를 분배하는 시스템 문제이고요. 소비 양극화 현상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은 그 위에 문화적 코드를 입히는 것입니다. 누구는 스마트 폰을 갖고 있어, 라든가 뭘 입고 있어 라든가 문화적으로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으면 양극화가 없는 것처럼 가려지는 현상인 거죠. 이것이 소비 양극화나 빈부격차를 은폐시키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생각합니다. 상품 소비를 통해 얻어지는 동질감은 문화적인 것이어서 가난한 학생에게 “스마트 폰 살 돈으로 밥을 사먹어.”라는 말은 할 수 없어요. 그 아이가 지금 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죠. 비슷한 예로 미국에서 푸드 스탬프 이용자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활동이 스타벅스 가서 커피 마시기에요. 그 자체가 문화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죠. “왜 다른 먹을 것을 사지 않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문화를 느끼고 싶은 사람의 욕구는 당연하잖아요. 상업적으로 잘 포장된 상술이 문화적인 것들을 향유한다고 믿어서 소비 양극화를 은폐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먹거리 정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를 공유하고 확산해야만 합니다.

 

환경: 시스템을 변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한국에서 소비 양극화 해결의 방향은 어떤 게 있을까요?

박: 먹거리와 관련된 다양한 시민 소모임 양성이 필요합니다. 토종종자가 관심인 시민, 내 아이 먹일 간식에 관심 갖는 시민, 시민 텃밭에 관심 갖는 시민, 음식 만드는 것이 관심인 시민 등 다양한 시민들이요. 보통은 활동을 정하고 시민들을 그 활동에 맞추는데, 그 프로그램에 맞는 사람은 소수고 그 활동이 안 맞으면 오지 않게 되기 때문에 모두를 아우를 수 없는 문제가 생겨요. 시민활동으로서의 자기 활동을 정한다면 확산될 거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 시민활동 플랫폼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역할을 시민 단체가 해주었으면 좋겠고 또, ‘당신의 냉장고 프로젝트’가 그런 일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자체에서도 다양한 먹거리 시민활동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중요해요. 저는 정말 풀뿌리가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법이 먼저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필요에 의해 건의가 되는 거잖아요? 이런 풀뿌리들이 모여 활동들을 서포트 해줄 수 있는 법까지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환경: 먹거리 정의와 먹거리에 대한 철학에 대해 말해주세요.

박: 먹거리 정의는 생산, 유통, 가공, 소비되는 모든 영역이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 정의입니다. 그러나 저는 나아가 소득에 관계없이 누구나 기본적인 먹거리를 조달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까지 포함해요. 즉 이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 휴머니즘이죠. 먹거리 이야기를 하면 미식가를 생각하는 분들이 많고 먹거리 정의라 하면 공정무역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아요. 공정무역은 생산자의 문제, 윤리적 소비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먹거리 정의는 씨앗부터 밥상에 올라가는 그 전체 과정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농사의 완성은 무엇이죠? 바로 섭취에요. 농업에도 이로우려면 먹는 과정도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먹거리 정의는 휴머니즘이라 생각해요.

저도 이렇게 확고한 생각을 가질 줄은 몰랐어요. 유기농 농사를 하려고 귀농을 했는데 유기농은 왜 특정 계층에게만 공급되는 시스템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어요. ‘모두가 먹거리를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이 들었고 검색을 하다가 먹거리 정의 개념을 알게 되어 먹거리 정의 활동까지 하고 있어요. 농부가 안 됐으면 이런 일은 안 했을 거예요.

 

 

박진희 씨와의 인터뷰 재밌게 보셨나요? 이 인터뷰를 통해 먹거리 정의의 개념과 여러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먹거리 정의와 관련된 분들의 인터뷰는 계속될 예정이니 관심가져주세요!

 

 

수, 2015/07/29-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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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환경연대 문을 두드려주신 고맙고 반가운 신입회원님들,

어떤 분들인지, 여성환경연대는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새해 소망은 뭔지 궁금궁금해서 두 분께 

이메일로 짧은 인터뷰를 청했습니다. 역시나 우리 회원님들은 멋진 분들이라는 게 인터뷰의 결론! 

권세현, 정숙희 회원님을 소개합니다. 큰 박수로 맞아주세요 !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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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년 12월부터 여성환경연대 후원을 시작한 권세현이라고 합니다.

전 자연을 사랑하고 노을 보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노을이 질 때 마다 사진을 찍거나 감상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제가 찍은 사진 중에 자연 사진, 노을 사진이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요.ㅎㅎ

걷는 것도 정말 좋아해서 이곳저곳 혼자 열심히 쏘다니며 사진을 많이 찍습니다. 인스타에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올리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낍니다.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아 일상생활에서 실천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손으로 이것저것 무언가 하는 것을 즐겨하고 끄적끄적 낙서 같은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글쓰기를 좋아해서 거의 매일 일기를 쓰고, 아주 가끔 시 비스무리 한 걸 끄적일 때도 있답니다. 밀가루보다는 쌀을 좋아하고, 고기보다는 나물을 좋아하고, 마요네즈 보다는 고추장, 된장을 좋아하는 아주 평범한 한국 사람입니다:)

사실 여성환경연대를 알게 된 건 정말 얼마 안 되었어요. 작년 9월 즈음 평화재단이라는 곳에서 주최하는 ‘청년학교’를 신청하게 되었는데 10강으로 구성된 강의 중 환경이 주제였던 날 EBS에서 방영한 ‘플라스틱인류’ 라는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영상을 보면서 이것저것 메모를 해 두었는데 청년학교가 끝날 때 까지 그 페이지는 다시 열어보지 않고 덮어두었습니다. 그러다가 12월 말에 무심코 그 때 메모해 둔 페이지를 펴보니 여성환경연대 라는 단어가 적혀 있더라구요. 그래서 ‘한번 검색해볼까?’ 하고 검색해 봤는데 저의 관심사와 가치관과 맞는 부분이 정말 많았습니다.

환경문제에 대한 이야기, 건강한 먹거리에 대한 중요성, 생태적인 삶, 같이 하는 삶,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아닌 나만의 속도로 사는 삶 등 여러 가지 면이 제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어서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얘기를 더 편하게 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구요. 그래서 ‘이거다!’ 싶어 바로 후원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기웃거릴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

2017년 다짐은 여성환경연대 덕분에 방향성이 많이 잡힌 것 같습니다. 12월 후원자에게 보내주신 선물 중 <우리는 플라스틱 없이 살기로 했다>라는 책을 읽고 1월부터 플라스틱 최대한 안 쓰고 살아보기 프로젝트를 하고 있거든요. 마음 맞는 친구와 둘이서 하면서 이런저런 정보들도 공유하며 나름 재미나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시작한지 일주일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매일 기록해 가면서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또 여성환경연대에서 보내주신 ‘Redbook’ 을 읽고 나서 면 생리대를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한테도 좋은 게 결국은 환경에게도 좋은거니까요.그래서 올해는 더 푸르게 사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 거는 희망은 몸도 마음도 더 건강한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작지만 큰 바램?! 국민이 주인인 나라, 이웃과 서로 웃으며 인사 할 수 있는 나라, 아이들이 받은 교육이 사회에서도 통하는 그런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¼¼­¿ï=´º½Ã½º¡½Á¶¸í±Ô ±âÀÚ = 10ÀÏ ¿ÀÈÄ ¼­¿ï Á¾·Î±¸ ±¤È­¹®±¤Àå¿¡¼­ ¹Ú±ÙÇý ´ëÅë·É ÅðÁøÀ» Ã˱¸ÇÏ´Â Á¦7Â÷ ¹ü±¹¹Î ÃкÒÁýȸ°¡ ¿­¸° °¡¿îµ¥ Âü°¡ÀÚµéÀÌ Ã»¿îµ¿ »ç¹«¼Ò ¾Õ¿¡¼­ ÃкÒÀ» µé°í ÀÖ´Ù. 2016.12.10. mkcho@newsis.com안녕하세요. 저는 50대 중반 워킹주부이자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딸 정숙희입니다. 저는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여성환경연대 페이지를 보고 가입하게 되었어요.

우리세대는 많은 정보를 접하며 살고 있으므로 몸에 해로운 먹거리는 먹지 않아야 하고, 몸에 해로운 생활용품은 사용하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신 부모님은 ‘물건 아까운 것’만을 고집하고 다 드시거나 사용하거나 쌓아둡니다. 무척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소통이 어려워서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았어요.
애초 생산단계부터 이런 우리 몸에 해로운 것들은 생산가능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페이스북에서 여성환경’연대’를 만나게 되었죠. 나 혼자  호소하는 것보다는 연대해서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새해에도 다름없이 내가 먹을 건 내가 일해서 벌 테니 국가는 자영업자들 등골 빼는 제도 좀 줄여주면 좋겠습니다. 정치인들은 제발 나라 살림과 백성 안위만을 위해 일해주면 좋겠습니다. 덕망있고 능력있는 대통령이 뽑혀서 평안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수, 2017/01/1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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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고향과 나름의 이유를 가진 이주민들이 우리 곁에서 살고 있습니다. 단일한 배경과 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끼리 사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른바 우리는 문화 다양성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다양함이 서로 어울려 조화롭게 돌아가는 사회를 ‘다문화 사회’라고 합니다. 다문화는 단일한 문화를 내세우는 것에 대치되는 상태 혹은 그 태도입니다.

1990년대 말, 국제결혼과 외국인 근로자의 이주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한국 역시 문화 다양성의 사회로 진입했습니다. <재한외국인처우개선법>, <다문화가족지원법> 등의 법률이 만들어지고,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설립 등 각종 정책이 쏟아졌습니다.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다문화정책은 이제 10년이 되어갑니다. 희망제작소는 새로운 시민으로 우리 곁에 찾아온 이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려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다문화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연구의 일환으로 지난 10월 말 두 이주여성을 만났습니다.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통번역사로 일하고 있는 이주여성 나랑체첵(몽골어 통번역, 6년째 근무) 씨와 주영애(중국어 통번역, 3년째 근무) 씨입니다. 나랑체첵 씨는 2004년에, 주영애 씨는 1997년에 한국에 왔습니다.

우리도 한국인이에요

사람들은 두 사람을 한국인으로 대하고 있을까? ‘혹시’하고 물은 대답은 ‘역시나’였다.

“말을 안 하면 잘 몰라요. 입을 열면 외국인이냐고 묻죠.” (나랑체첵)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인사를 하던 주영애씨는 외국인이냐는 질문이 난감하다고 했다.

“저는 이미 귀화해서 한국인인데, 중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다들 외국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는 사람은 나쁜 뜻이라고 생각 안 하지만, 듣는 입장에선 상처가 되더라고요.” (주영애)

두 사람은, 요즘 많이 회자하는 다문화 가정, 다문화 아동, 다문화인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많은 듯했다.

“다문화라는 것은 여러 문화가 어우러진다는 아름다운 의미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못 사는 국가의 여자들이 한국에 와서 결혼 못 하는 남자들과 결혼하는 것’이라고 인식되는 것 같아요. 끌어안아야 하는 짐, 부담처럼 보이는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저는 20년 가까이 한국에 살고 있고, 또 한국인으로 살고 싶은데 말이에요.” (주영애)

주영애 씨와 나랑체첵 씨는 그동안 진행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지금은 그곳의 직원이 되어 일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다문화사업에 대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생긴 지 10년이 되었거든요. 저는 센터가 처음 생길 때부터 이용해왔어요. 센터는, 열악한 환경에서 코리안드림을 위해 한국에 온 사람들을 끌어안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한국 사람답게 만들기 위한 곳이라고 봐요. 그런데 자국민도 잘 챙기지 못하면서 왜 외국인에게 예산 낭비하냐고, 역차별 아니냐고, 한국인들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데 왜 이주여성 일자리만 지원하냐며 반대의견이 나올 때는 너무 속상합니다.” (주영애)

▲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홈페이지(namyangjusi.liveinkorea.kr)

▲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홈페이지(http://namyangjusi.liveinkorea.kr)


눈치, 성과 압박, 해고의 두려움… 한국의 사회생활

구제대상으로 들어와서 한국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사회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보는 것 같다며 주영애씨는 토로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일하게 되면서 왜 외국인에게까지 일자리 주냐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당시에는 소극적으로 대처했는데요. 속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각각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일하는 외국인 직원은 1~2명이지만, 한국인 직원은 더 많다고요. 즉, 우리 같은 사람들 일자리가 한 개 생기면, 한국인들 일자리도 덩달아 더 많이 늘어나는 게 아닌가’라고요.” (주영애)

곱지 않은 시선에다 엄청난 경쟁률까지 뚫고 하게 된 통번역사 일이 할 만한지 물었다. 녹록지 않다는 표정이 두 사람의 얼굴을 스쳤다.

“통번역사 제도는 2009년부터 시작됐어요. 현재 전국에 300여 명의 (이주여성)통번역사가 있는데, 근무 기간이 짧아요. 우선 한국인들 속에서 적응하기가 어려워요. 행정업무 처리하기도 어렵고, 통번역 외에 센터의 다른 사업도 해야 하고요.” (나랑체첵)

‘일자리는 좋은데, 사회생활 자체가 어렵다’고 나랑체첵씨는 표현했다.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했다.

“우리는 눈치 없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주영애)

“그건 저도 인정해요.(웃음)” (나랑체첵)

한국의 사회생활에서 규정이나 매뉴얼보다 중요하다는 ‘눈치껏 잘하기’. 이들에게는 생소하고 어려운 문화인 것이다.

“직장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느껴요. 중국이나 몽골은 수평관계인데, 한국은 수직관계인 거 같습니다. 눈치로 배워야 하는 게 많아요. 이런 부분은 아직도 어렵죠.” (주영애)

“저는 행정적인 부분이 제일 어렵고 힘들었어요. 뭐 하나 하려면 기획서, 보고서 등 써야 할 게 엄청 많아서 처음엔 엄청 어려웠어요. 물론 하면서 엄청 성장했지만요.(웃음)” (나랑체첵)

눈치로 시작된 이야기는 일자리 처우 개선까지 이어졌다. 6년째인데 막내처럼 일해서 답답한 점, 최저임금이 안돼서 8시간에서 7시간 근무로 바뀌었지만 업무량은 여전하다는 점, 그런데도 성과는 전년 대비 늘 좋아야 한다는 점, 평가를 통해 하위 10%는 재계약에서 탈락하기 때문에 압박도 많다는 점 등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꿈에 그리던 ‘사무직’이고, ‘배울 수도 있는’ 일인데 유지하기 어려운 게 안타깝다고 두 사람은 말한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사는 주영애 씨는 출근하는 데만 2시간 남짓 걸린다. 무려 4시간 가까이 걸리는 시간을 감수하며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한국 오고 20년 동안 안 해본 일 없을 정도로 고생했다며 눈시울을 붉히더니 대답했다.

“전문직을 선호해서 이곳으로 왔어요.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 고려했다면 안 왔을 거예요. 지금까지 일한 곳 중 여기 급여가 제일 적으니까요. 그간 한국 생활을 하며 어려움을 겪은 한 사람으로, 다른 다문화가족에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주영애)

“한국 처음 왔을 때 남편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남편은 좋은 사람 찾아가라고 했지만, 나는 젊었으니 닥치는 대로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느냐 말하고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하지만 어려운 건 어려운 거더라고요. 그러다 통번역사 기회가 와서 정말 기뻤어요.” (나랑체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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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선배로 이끌고 다독여주기

한국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무척 어려웠지만 자신들은 그 단계를 넘어 여기까지 왔으니,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갈 이주여성을 돕는 일을 하고 싶고 또 잘할 수 있다고 했다.

“결혼이민자들의 입장을 잘 알고 있고, 시행착오도 먼저 겪었으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크죠. 또 그들 입장에서도 우리가 다가가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요? 제 도움을 받은 사람이 고마워하거나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저 자신이 쓸모있는 사람으로 느껴져요. 그게 가장 큰 보람이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죠.” (나랑체첵)

“저는 (통번역사 일을 한 지) 만 3년 차에 접어들었는데 그동안의 저 자신을 평가하자면, 놀랄 만큼 많은 성장을 했다는 거예요. 가장 값진 건 한국에서 직장다운 직장을 처음 가지게 된 거죠. 이전에 15년 일했던 것 이상의 의미가 있어요.” (주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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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다문화가족지원서포터즈’ 회의 모습. 서포터즈는, 이주여성들이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돕는다.

두 사람은,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겪었지만 한국에 잘 정착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다른 이주민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제가 느끼는 보람은, 고통의 시기를 겪고 있는 이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앞에서 줄을 끌어주는 것 같은 느낌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사람들에게 제가 교훈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영애)

이주여성을 끌어주고 도와주는 활동은 통번역사 일 말고도 이들이 담당하고 있는 다른 사업으로도 이어진다. 나랑체첵 씨는 남양주시 다문화가족지원서포터즈를 맡아서 해왔고 주영애 씨는 검정고시반을 맡고 있다.

“2012년쯤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이용률이 12% 정도였는데요. 이주민의 이용 참여를 높이기 위해 경기도에서 ‘다문화가족지원서포터즈’ 사업을 시작했어요. 서포터즈는 숨어있다시피 하는 이주여성을 연결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은행이나 버스 이용 등의 생활 지원을 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있어요. 제일 중요한 건 잘 안아주고 다독여주는 것인데, 제가 결혼이민 선배다 보니 정보도 많이 주려하고 잘 이해해주니 많이들 따라오시더라고요.” (나랑체첵)

“작년부터 검정고시반을 맡아서 하고 있어요. 15명이 참여해서 11명이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졸업장을 수여했는데요. 다들 마치 대학 학사학위를 받는 것처럼 기뻐하시더라고요. 덩달아 저도 뿌듯했죠.” (주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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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검정고시반’ 주말 스터디


실질적으로 무언가 할 수 있도록

결혼이주여성들이 목말라 하는 정보 대부분은 취업과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취업도 중요하지만 언어나 한국의 문화를 먼저 익히는 게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에 관해 물었다.

“물론 언어도 중요하죠. 하지만 오셔서 맞벌이해야 하는 분들도 있어요. 빨리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겠죠. 그분에게 중요한 것은 언어보다 돈인 거죠.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그 사람의 사정이고 상황이라고 생각했으면 해요. 그리고 돈을 벌다 보면 한국어가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에 결국 언어를 배우러 오게 돼요. 이 지역만 해도 (이주여성의) 50% 이상이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해요.” (나랑체첵)

그렇다고 돈을 달라거나 특별한 것을 지원해달라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무언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이주여성의 가정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데에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주여성이 일자리 찾기는 어렵고, 그렇게 되면 남편이 혼자 돈을 벌어야 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혼자 돈 벌고, 거기에 아이까지 있으면 힘들어요. 가정에 불화가 생길 가능성도 크고요. 이주여성들은 점점 자신이 없어지고, 한국 사회에서 일어설 기회가 없어지는 거죠.” (나랑체첵)

“아이가 있는 분들은 긴 시간 일하지 못합니다. 시간 짧은 것, 아르바이트 같은 것을 하고자 해요. 그래서 시간을 탄력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봐요.” (주영애)

높은 취업 욕구보다 준비와 노력이 부족한 이주여성들도 물론 있다. 두 사람은, 당장은 아니어도 장기적으로 실질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꾸준한 취업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결혼이민자분들이 아예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에요. 결혼이주여성이 도망가는 사례 등은 좋지 않은 여론을 만들고 큰 화젯거리가 돼요. 하지만 잘하고 계신 분들도 많아요. 저는 모든 게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몇 년이 지나면 적응하고 한국 사람이 되잖아요. 가끔 다문화정책이 잘 되고 있나 의문이 들 때가 있는데요. 숫자와 실적에만 매몰되기 때문이죠. 실제 도움이 되지 않는 사업을 한다거나, 매번 오는 사람들만 지원받을 때도 그렇죠. 많은 사람이 동등하게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해요.” (나랑체첵)

다문화 체감도 높이고 다름 인정하는 태도 필요해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다문화에 대한 인식은 이중적이다. 인터넷에 난무하는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댓글들이 보여주는 한 면과 공식적으로 나타나는 대체로 신중하고 호의적인 인식조사 결과가 또 다른 한 면이다. 2015년 서울서베이를 보면, 자녀의 외국인과 결혼, 외국인 친구, 외국인 이웃 등에 대한 태도는 종합적으로 60%가 호의적이었고, 결혼이민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 해소에는 50.9%가 긍정적이었고, 일자리를 뺏긴다는 우려는 40.5%였다. 여기에 대해 주영애 씨와 나랑체첵 씨는 여전히 낮은 다문화 체감도를 높이고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람은 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다름을 인정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결혼이민자들이 이렇다저렇다 이야기하지 말고, 그 상태 그대로 다름을 인정해주고, 다르면 이상하게 취급하는 시선만 아니었으면 해요. 그리고 잘 적응해서 성공하고, 잘 살아가는 본보기라고나 할까, 이런 사례를 자주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주영애)

“저도 예전에는 외국인인 걸 숨기고 싶을 정도로 조용히 지낸 적이 있어요. 시선 자체가 차가워서 자꾸 주눅이 들었어요. 물론 지금은 숨기지 않고 말하죠. 이건 제가 지금 당당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갑자기 당당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나랑체첵)

주영애 씨는 공교육에 진입하지 못하는 중도입국자녀가 너무 많다며, 이들을 잘 끌어안고 한국문화에 잘 융화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회와 역할을 주고 함께 성장할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옆집에 베트남 사람이 와서 살지만 모르는 경우도 많아요. 다문화가 무슨 상관이냐고 하지만 학교와 직장을 살펴보면 다문화가족 출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출산시대라고 하는데, 다문화가족은 다둥이인 경우가 많아요. 여기에 중도입국자녀들도 있는데, 이 아이들이 적응 못 하는 경우가 수두룩해요. 사람들이 체감을 못 하는 게 이런 것들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인 것 같아요. 중도입국자녀가 한국사회에 문젯거리로 전락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나만 안전하면 된다고 하지만, 안전지대가 없어질 수도 있어요. 이들이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지 않게 하려면 지금 잘 해야 합니다.” (주영애)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차별과 배척의 시선만을 느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제도와 지원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있지만, 무엇보다 따뜻했던 것은 처음 접했던 한국인들의 도움이었다.

“제 아이 역시 중도입국자녀예요. 적응을 굉장히 힘들어했어요. 지금 같으면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을 이용했겠지만, 10년 전에는 그런 게 없었잖아요. 그러다 한국 아주머니와 대학생들이 외국인 근로자와 학생들에게 한국어 가르치는 행사가 있다고 해서 아들과 함께 갔어요. 열정적으로 가르쳐주는 걸 보고 ‘한국 사람들이 무조건 외국인을 싫어하는 게 아니구나’,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엄마 말은 안 듣던 아들이 그때 한국어 가르치던 누나 말은 잘 들어서, 지금도 연락을 하더라고요.” (주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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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인터뷰가 희망제작소 뉴스레터에 실린다고 하자, 나랑체첵 씨는 어떤 사람들이 독자냐고 물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관심 가진 분들이라고 답하니,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고 했다.

“이주민들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눈치가 없어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웃음) 한국 사람처럼 행동하길 바라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일률적인 행동을 기대하지는 않았으면 해요. 우리는 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같아지려 해도 시간이 걸리지만, 같아지려 하는 게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이주민들의) 문화도 존중해주길 바라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런 한국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랑체첵)

이주민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늘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앞으로 살고 싶은 나라가 어떤 곳인지 먼저 물어야 한다. 이주민들이 한국에서 살면서 많은 시간 고민하는 것은, ‘한국인이냐, 아니냐’보다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것, 성장하는 것, 보람을 느끼고 이 사회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혼란스러운 시절을 살아가는 여느 한국인의 모습,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뷰 진행 : 이은경 사회의제팀 팀장 · [email protected]
녹취 및 정리 : 이은경 사회의제팀 팀장 · [email protected]
녹취 및 정리 : 최은영 미디어홍보팀 연구원 · [email protected]

* 인터뷰 참여자의 요청으로 개인 사진은 게재하지 않습니다.

월, 2016/11/0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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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참여팀] 참여연대의 자원활동가는 상근 활동가들과 손발을 맞춰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10대 청소년부터 일흔이 넘으신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학생, 주부, 직장인, 은퇴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원활동가들의 숨은 활약을 자원활동가 인터뷰를 통해 알려드립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더는 가만히 있지 않기 위해 자원활동을 시작했어요."

 

미디어홍보팀 자원활동가 조김재훈님

 

 

참여연대 미디어홍보팀 자원활동가 조김재훈

미디어홍보팀 자원활동가 조김재훈님 ⓒ참여연대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한낮의 여름, 조김재훈님을 만났다.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들어선 그는, 내성적이고 말주변이 없는 성격 탓에 인터뷰 걱정으로 지난밤 잠을 설쳤다며 수줍게 고백했다. 앞선 고백처럼, 재훈님은 분명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나긋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재훈님은 참여연대에서 발간하는 월간지인 『참여사회』의 교정을 맡고 있다. 조용한 성격의 재훈님이 참여연대에서 자원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작년 4월 무렵이었다. 정확하게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이후였다. 그전에는 언론 등에 보이는 참여연대의 활동을 그저 지켜보는 게 다였다. 그러다 세월호 참사 이후, 더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작은 일이라도 직접 하고 싶어서 참여연대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자원활동을 시작하게 된 만큼, 재훈님은 참여연대에서 진행하는 세월호 관련 활동이나 인양촉구 서명운동 등에도 참여하며 처음의 마음가짐을 이어나갔다.


자원 활동을 시작하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생각의 폭이 넓어졌다는 점이다. 전에는 어떤 사회 현상에 대해 그 현상 자체에 대해서만 주목했다면, 이제는 그러한 현상을 작동하게 하는 원리 등까지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힘이 길러졌다. 『참여사회』의 교정을 돕다 보니 자연스레 많은 글을 접하게 되었고, 그 글들을 읽고 생각했던 시간이 모여 지금의 변화를 끌어냈을 것이다.


재훈님은 앞으로 사회복지사로서 활동하고 싶다고 한다. 사회 복지에 있어 중요한 것은 정말 많지만, 재훈님은 그중에서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연대’를 꼽았다. 그리곤 참여연대에 처음 들어설 때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고서 사회복지사로서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대변하는 것은 물론, 그들을 억누르는 환경을 바꾸는 데 미미하더라도 일조하고 싶다고 수줍은 듯 힘을 실어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재훈님은 머릿속에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은 가득한데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어렵다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렇게 꺼낸 만큼, 그 말들은 재훈님의 선한 눈매에 새겨진 웃음 자국만큼이나 깊고 진심이 담긴 이야기들이었다. 

 

 

작성 자원활동가 이성민 (계속해서 자라고 싶은 대학생)

 
화, 2015/06/3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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