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버스 불법주정차 금지’
전세계 선진국에서 불평등이 주요 의제로 떠오르면서 불평등 극복을 위한 분배론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런데 한국 정치권에서만은 성장론이 대세인 것처럼 보인다. 새누리당은 말할 것도 없고 새정치민주연합에서도 성장론을 들고나온다. ‘유능한 경제정당’이 되겠다고 외치며 소득주도성장론을 들고나왔다. 여기까지도 좋다. 그런데 여기서 ‘성장’이란, 정확히 어떤 의미일까?
가장 쉬운 설명을 찾기 위해 <초등사회 개념사전>(아울북)을 보면 ‘경제성장’은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경제성장이란 한 나라의 경제 능력이 커져 국민 소득이나 국내총생산이 계속해서 늘어나는 것을 말해. 즉 한 나라의 국민이 일정 기간 동안 새로 만들어낸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 또는 한 나라 안에서 새로 만들어낸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가 꾸준히 늘어났음을 의미하는 거지.”
아무래도 초등학생 수준보다 더 쉬워져야겠다. 좀더 풀어 써보자. 한 개인의 시각으로 들여다본다. 한 개인이 보기에 경제가 성장한다는 것은, 자신이 소비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가 늘어나는 것이다. 좀더 풀어 쓴다면, 그가 사용하는 물건과 서비스의 가치가 커지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어떤 ‘가치’가 늘어나는가
그런데 이 ‘가치’가 늘어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그가 사용하는 물건과 서비스의 ‘양’이 늘어난다. 하루 한 끼 먹던 사람이 하루 세 끼를 먹게 된다면, 이는 그가 소비하는 재화가 늘어난 것이다. 평생 6년 학교교육을 받던 사람이 12년의 학교교육을 받게 된다면, 그가 소비하는 서비스가 늘어난 것이다. 성장률이 5%라면, 밥의 양이 5% 늘어나거나 받는 교육량이 5% 늘어나는 것이다.
둘째, 그가 사용하는 물건과 서비스의 ‘질’이 높아진다. 맛없는 묵은 쌀밥을 먹던 사람이 맛있고 건강에 좋은 유기농 현미밥을 먹게 된다면 그 질이 높아진 것이고, 한 학급에 60명이 수업을 듣는 학교에 다니던 사람이 한 학급 20명의 학교에 다니게 되더라도 그 질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성장률이 5%라면, 그 밥과 교육의 질이 5% 나아졌다는 뜻이다.
셋째, 그가 ‘새로운 종류’의 물건과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이다. 쌀밥에 김치 반찬만 먹던 사람이, 여기다 고기 반찬을 더 먹게 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소비다. 세상에 없던 온라인 교육 서비스가 개발되어 새롭게 사용하게 되는 것 역시 이 경우에 해당된다. 여기서 성장률이 5%라면, 이런 새로운 재화와 서비스가 5%만큼 생겨났다는 의미다.
전체 국민에게 벌어지는 이 세 가지 사건을 모두 종합해 전년 대비 얼마나 가치가 늘어났는지를 숫자로 계산하면, 그게 바로 경제성장률이다. 이때 ‘가치’는 통상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치로 계산한다. 하지만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다고 해서 가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계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격이 매겨져 거래되지 않는 것은 계산해 보여주기 어렵기 때문에, 계량화가 가능한 요소만으로 전체 경제성장을 보여줄 수 있는 지표를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성장률이 3%라거나, 5%라거나, 10%라는 이야기를 실제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경제적 사건으로 환원해본다면 어떤 의미일까?
역시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다. 사용하는 물건이나 서비스의 양이나 질이 한 해 그만큼 늘어났다는 뜻이다. 사람이 70년을 산다고 가정하면, 3% 경제성장률이 계속 유지된다면 태어날 때보다 죽을 때에 8배 늘어난 물건이나 서비스를 사용하게 된다. 경제성장률 5%라면 30배가 되고, 10%라면 790배가 된다. 실로 무지막지한 숫자다.
실제로 한국의 1970~80년대 평균 경제성장률(실질 국내총생산(GDP) 기준)은 연평균 9%대였다. 1990년대에 7%대였고, 2000년대에도 4%대를 유지했다. 이게 2010년대에는 3%대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삶의 양상을 크게 변화시키는 성장
경제성장률 수치로 보면, 한국인들은 세계사에 유례가 드물게 무지막지한 삶의 변화를 경험한 셈이다. 1970~80년대에는 평생 416배의 성장을, 10년마다 2.3배의 성장을 경험한 셈이니 말이다. 경제성장률이 2010년대처럼 3%만 되더라도 70 평생을 계산하면 8배 가까이 성장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먹는 일만 놓고 보면, 1인당 평균 식사량의 증가분과, 식사의 질적 향상분과, 새로운 메뉴가 등장한 몫을 모두 합치면 1980년대에는 평생 수백 배, 2010년대에는 평생 8배 커졌다는 계산이 나온다. 삶을 둘러싼 모든 소비생활이 그만큼 늘어날 수 있도록, 사회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해내게 됐다는 의미다. 이걸 한 사람의 경우가 아니라 그 모든 사례를 합친 전체 국민으로 확대해 생각하면, 한국의 빠른 경제성장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 모든 국민의 물질적 삶이 실물 기준으로 평생 8배 커진다면 그것은 정말 대단한 변화다. 경제성장률 3%는 무시할 수 없는 큰 수치라는 이야기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도, 단 2%의 경제성장률이라도 오래 지속된다면 엄청난 변화가 생긴다는 점을 언급했다. 케인스는 1930년에 <우리 후손들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당시로부터 100년 뒤인 2030년에는 인류가 주당 15시간가량만 일하면 생존에 필요한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 수 있으므로, 나머지 시간을 문화와 예술과 철학을 즐기며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책에서 이야기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경제성장률(자본스톡 증가분 기준)이 단 2%였다. 2%의 경제성장률이 100년간 지속되면 인류 전체의 노동시간이 여가시간보다 현저하게 줄어든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한 것이다.
그는 역시 경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경제성장은 실제 삶의 양상을 변화시킨다. 이 점을 통찰하지 않으면 단순히 소득이나 자산이 늘어나는 일종의 금융 현상으로 인식하기 쉽다.
특히 케인스는 이를 ‘시간’이라는 삶의 또 다른 본질적 요소와 결합시켰다. 경제성장과 우리 삶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꿰뚫은 통찰이다. 우리가 GDP와 경제성장률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 삶의 본질적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양적 성장은 경제 수준이 일정한 궤도에 오르고 나면 한계에 부닥치고 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밥을 한 끼 먹던 사람이 세 끼 먹게 될 수는 있어도, 다섯 끼 열 끼 먹게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어느 시점 이후에는 성장의 내용은 재화 및 서비스의 질적 향상, 그리고 새로운 재화와 서비스의 등장으로 채워지게 된다.
한국에서는 베이비붐 세대로 대표되는 현재의 50~60대와 청년 세대라 부를 수 있는 20~30대 사이의 차이가 도드라지게 된다. 베이비붐 세대는 경제성장을 양적 성장으로 경험했다. 그러나 청년 세대는 그 양적 성장이 사실상 종료되는 시점에 성인기에 접어들었다.
양적 성장에서 질적 향상으로
즉 1950년대에 태어난 평균적 한국인이라면, 스무 살이 된 1970년대에 먹었던 음식에 견줘 서른 살이 된 1990년대에 먹은 음식이 2.3배 나아졌을 것이다.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은 양적 증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음식 자체의 양과 섭취하는 영양분이 커졌을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에 태어난 평균적 한국인이라면, 스무 살에 견줘 서른 살에는 1.3배 나은 음식을 섭취했을 것이지만, 그 성장분 가운데 상당 부분은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거나 새로운 메뉴의 등장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1970년대에 태어난 나는 20대에 PC통신을 만났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사실상 유일한) PC통신 ‘케텔’ 게시판에 시사와 관련된 글을 써서 올리곤 했다. 어느 날 내가 올린 글이 큰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당일 시사 관련 글 가운데 가장 높은 조회 수를 기록했다. 그 조회 수가 136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지금 페이스북 등의 서비스에서 당일 가장 인기가 높은 글의 조회 수는 얼마나 될까. 136회의 1천~1만 배는 되지 않을까.
1990년대와 2010년대 사이에 PC통신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인터넷 카페가 메웠다. 삐삐가 등장했고 휴대전화도 빠르게 보급됐다. 초고속 인터넷망이 전국을 뒤덮었고 전 국민이 컴퓨터와 전자우편 아이디를 갖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다시 전 국민이 스마트폰을 갖고 돌아다니면서 전자우편을 확인하며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활용하게 됐다.
물론 이 모든 새로운 서비스가 경제성장을 구성한다. 그런데 한 개인에게 이런 성장은, 케텔 게시판에 글을 올리면서 136명의 독자를 확보하며 누리는 보람과 기쁨이 그 20년 뒤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수천~수만 명의 독자에게 읽히면서 누리는 보람과 기쁨으로 바뀐 것으로 나타난다. 그 사이의 간격이 바로 성장이다. 한국에서도 시간이 갈수록 이런 성장이 식사량의 증가보다는 훨씬 더 중요하고 현실적인 성장일 것이다. 지금의 청년 세대에게는 이런 경향이 더 강해질 것이다.
경제성장의 정의에 대해 이렇게 할 수 있는 한 가장 쉽고 가장 원론적으로 설명해보는 이유는, 한국 정치에서 ‘경제성장’이라는 존재가 신격화의 단계로 접어드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를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며 범법 기업인들의 사면 핑계로까지 사용하는 새누리당 쪽에서는 이 신을 숭배한다. 그러니 모든 토론의 마무리는 성장신의 재림을 비는 기도로 끝난다. ‘소득주도성장론’을 통해 ‘소득분배’라는 가치를 ‘경제성장’에 덧대려 노력하는 새정치민주연합은 이 신을 두려워한다. 그러니 다른 올바른 일들조차도 성장신의 이름을 빌려 구현하려 안간힘을 쓴다.
성장을 ‘신’으로 섬기는 자들
좋다. 성장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신이어서가 아니다. 현실의 삶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경제가 성장하는 것이 좋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성장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더 많은 음식과 더 큰 자동차와 더 큰 집이 필요하다는 뜻인가?
아니면 당신의 성장은 더 나은 교육과 보육과 간병과 의료와 노인 돌봄을 뜻하는가? 아니면 드론과 무인 자동차와 웨어러블 디지털 기기들이 등장하는 성장을 뜻하는가? 더 뛰어난 소프트웨어와 예술작품과 노벨상을 받을 정도의 과학 및 경제학 지식이 등장해야 한다는 뜻인가?
미래 세대에게 중요한 가치가 더 많이 더 잘 구현되도록 하는 것이 미래지향적 성장일 텐데, 그것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자신들이 지향하는 성장이 어떤 성장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경제를 아는 것이고, 유능한 것이다.
[ 한겨레21 / 2015.8.12 /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명백한 의료․공공서비스 민영화법이다.
서비스법은 ‘독이 든 뱀술’이다. 독주를 권하는 정부가 국민의 진정한 위협이다.
지난 2일 청와대, 그리고 3일 보건복지부가 나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하 서비스법)이 의료민영화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법 통과를 압박했다. 서비스법에는 의료 관련 규정이 없고, 의료법이 우선이기 때문에 서비스법으로 의료민영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사를 언급하며 국민들이 부질없는 의심을 거둬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 간 정부가 추진한 영리자회사, 민간보험사 해외환자 유치, 원격의료 추진 등도 의료민영화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우리는 이러한 정부의 설명이 완전한 거짓이고 기만임을 밝힌다. 또한 국민들의 합리적인 비판에 대해 ‘술잔의 뱀 그림자’ 운운하는 것에도 분노한다.
첫째, 서비스법은 명백한 의료․공공서비스 민영화법이다. 서비스법 적용 대상은 농림어업과 제조업만 제외하고 의료를 포함한 모든 사회공공서비스를 포함한다. 이 법은 기재부장관이 위원장인 서비스산업선진화위원회가 사회공공서비스의 5년 기본계획을 심의하고, 각 부처의 연도별 시행계획을 기재부장관이 직접 검토하고, 추진실적을 선진화위원회가 검토․점검하여 개선의견을 통보할 수 있으며, 각 부처가 사실상 이에 따르도록 한다. 즉 경제부처인 기재부가 향후 모든 사회공공서비스에 대한 전권을 쥐고 의료법 등 모든 공공적 규제를 허무는 토대를 만드는 법이다. 이것이 박근혜 정부가 그토록 이 법 통과에 목을 매는 이유이고, 시민사회단체가 보건의료 제외 뿐 아니라 법 자체가 완전히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둘째, 박근혜정부의 영리자회사, 민간보험사 해외환자 유치, 원격의료 등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의료민영화다. 영리자회사 허용은 외부투자․배당을 허용해 의료법상 병원 비영리 원칙을 허무는 심각한 의료민영화 정책이며 이 때문에 국민 200여만명이 반대서명한 것이다. 민간보험사 해외환자 유치는 민간보험사가 병원을 지배하는 미국식 의료민영화의 발판이다. 원격의료는 안전성과 효과성이 입증되지 않았고 개인질병정보가 유출될 수 있는, 의료기기․통신 업체만을 위해 추진되는 정책이다. 게다가 영리병원을 최초로 승인하고, 의료관광을 빌미로 의료민영화를 추진하고, 새로운 의료기술에 대한 평가를 완화하는 등 박근혜 정부가 추진해온 의료민영화는 다 열거하기조차 어렵다. 최근에는 건강관리라는 명목으로 대기업의 의료진출을 법도 아닌 가이드라인으로 밀어붙이겠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건강보험당연지정제를 폐지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의료민영화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의료를 국가책임이 아니라 기업의 책임 하에 두는 것이 바로 미국식 의료의 도입이다. 게다가 이미 제주영리병원 허용으로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무너졌다. 이런 정부가 이제 서비스법을 바탕으로 공공서비스 전체를 경제논리 아래 짓밟겠다는데 국민들이 어떻게 반대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번에 직접 나선 청와대의 안종범 수석은 복지수석이 아니라 경제수석이다. 또한 방문규 복지부 차관은 기재부 2차관 출신의 경제관료로 보건복지차관에 임명된 인사다. 박근혜정부가 보건복지를 사회보장제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내야하는 산업으로 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리고 그 경제적 이익은 국민의 주머니에서 지출되어야 한다. 즉 의료민영화의 귀결은 의료비 폭등이다. 보건복지부 인사들도 경제관료 출신들로 채우며, 서비스법으로 복지부를 기재부 발밑에 두려는 것이 박근혜 정부가 국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책임져야할 보건복지를 대하는 태도이다.
19대 국회 종료를 앞두고 가장 심각한 민영화법인 서비스법의 통과 압박이 국민들을 기만하며 벌어지고 있다. 청와대가 ‘술잔의 뱀 그림자’ 하는 서비스법은 실제 ‘독이 든 뱀술’이다. 독주를 권하며 ‘의심을 거두라’고 말하는 정부가 바로 진정한 위협이다. 국민들은 서비스법 통과를 지켜만 보지 않을 것이며, 서비스법 및 의료민영화 정책 통과․협조에 관련된 인사들은 시민사회단체들의 강력한 낙선운동의 대상이 될 것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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