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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여연심변호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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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여연심변호사를 만나다.

익명 (미확인) | 월, 2016/02/15-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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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회비회원이라 강조하는 여연심 변호사는 민변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에 상당히 미안해했습니다. 하지만 여연심 변호사야말로 민변 밖에서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민변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그라니 맑은 눈으로 어찌나 막힘없이 조리 있게 이야기를 풀어가는지 다른 분들에 비해 턱 없이 짧은 인터뷰 시간에도 숨가쁘게 진행된 그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김지미 오늘 인터뷰도 자기소개로 시작할게요.

 

여연심 저는 법무법인 지평에서 일하고 있는 여연심이라고 합니다. 변호사 된지 10년차고 그래서 민변회원도 10년차 되었습니다. 실제 활동은 잘 못하고 있지만 회비는 꼬박꼬박 납부하고 있다는 말을 꼭 써주십시오. 그리고 지금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이사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여변호사님은 연수원 수료하실 때 화제가 됐던 인물이잖아요. 감히 넘볼 수 없는 연수원 수료 성적이 4등. 저로서는 400등도 어려운데 말이죠.(웃음) 그 정도의 최상위 성적이면 법원으로 가는 게 기정사실화 되고 있던 현실에서 민주노총 법률원으로 가셨어요. 그것 때문에 언론에도 많이 나오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여연심 공부를 하면서 민변 활동 같은 것을 하는 변호사가 돼야지 이런 막연한 상은 있었는데 민주노총 법률원은 잘 몰랐어요. 노동변호사라는 관념 자체가 생소했고 그냥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연수원에 갔는데, 연수원에서 노동법학회에 가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법률원 변호사님들도 알게 되고 실무수습을 그쪽으로 나가면서 더 친해지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가게 됐어요.

 

김지미 민변 활동을 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공부하면서부터 가지고 계셨다면 학창시절에도 공부만 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여연심 대학 때는 쪽방촌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꽃마을이라고, 지금 대법원 맞은편 거기가 원래 저희 대학 다닐 때만 해도 판자촌이었어요. 지금 법률원에 있는 김태욱, 우지연 변호사가 다 저랑 같은 동아리였습니다. 되게 순수한 동아리였는데, 왜 다들 법률원에 갔지?(웃음) 초등학생 아이들 가르치는 공부방이었어요. 들꽃공부방이라고. 지금은 없어졌어요.

 

김지미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판자촌이었으니까, 일종의 빈활 비슷한 건가요?

 

여연심 네. 맞아요. 여름에는 빈민활동도 계속 다녔고, 전철연이라고 철거민 조직하고 같이 연대활동도 할 수 있는 곳도 해보고 그렇게 했었죠. 그런데 주된 활동이 아이들 가르치는 것이었어요.

 

김지미 이런 쪽에 특히나 끌렸던 이유가 있을까요? 대학에도 여러 갈래의 운동이 있는데.

 

여연심 대학에 들어갔을 때 제가 사실 공부하는 것은 별로 안 좋아해서 철학책, 사회과학책 읽는 동아리들은 안 끌리더라고요. 그래서 몸으로 하고 아이들 좋아하니까 아이들 가르치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하게 됐어요.

김지미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오면 그럼 연수원 다니실 때 법원이나 검찰은 생각이 없으셨나요?

 

여연심 특별히 선을 정해놓고 된다 안 된다를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검찰이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어요. 제가 잘 속아 넘어가고 사람을 잘 추궁하지 못해요.(웃음).

 

김지미 부모님이나 주위에서 우려가 있었을 것 같아요. 노동변호사라고 하면 고생할 게 자명하고 실제 법률원 변호사님들의 노동 강도는 세기로 유명하잖아요.

 

여연심 부모님은 아쉬워하시기는 했는데 강하게 반대하진 않았어요. 제가 그때 나이가 31살이었고, 부모님은 제가 하고 싶어 하면 반대를 하는 성격은 아니시거든요. 오히려 연수원 동기들이 성적 좋은데 왜 그러냐며 아쉬워했어요.

 

김지미 법률원이 초창기여서 조금 더 힘들었을 것 같은데 법률원에서 어떤 일들을 주로 하셨고 막연히 꿈꾸던 노동 변호사라는 생활이 기대하던 것과 비슷했었는지 궁금합니다.

 

여연심 지금 법률원 변호사님들이 하는 일이랑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요즘은 비정규직 소송이 늘어난 게 좀 다를까. 그때도 여전히 징계나 해고사건, 노조 관련된 사건, 집시법 관련된 형사사건 위주로 많이 했었어요. 법률원에서 시보를 했었기 때문에 생각했던 변호사 일이랑 크게 다르지는 않았는데, 들어가서 3년 동안 일하면서 느꼈던 것은 내가 더 배우고 이런 일을 했었야 했는데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일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신입 변호사를 위한 교육 시스템이 정말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어요.

 

김지미 그건 민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민변도 최근에는 신입변호사연수 프로그램이 많이 생겼지만, 제가 1년차 때만 해도 그런 프로그램이 전혀 없어서 좀 힘들었었거든요.

 

여연심 맞아요. 저도 그게 제일 아쉬웠던 것 같아요. 제가 지금은 지평이라는 꽤 큰 로펌에서 일을 하는데 법률사무소가 크면 교육시스템이 잘 되어 있을 수밖에 없고, 거기에 투자를 많이 할 수 있어요. 그만큼 여력이나 비용도 있고 이 사람을 키우는 게 자산이 된다라는 것을 알고 유기적으로 돌아갈 수 있거든요. 그런데 법률원이나 여러 공익인권변호사 단체는 그게 힘들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 저는 민변에서든 변호사단체에서든 그런 교육의 역할을 잘해줘야 한다라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민주노총 입사하면서 남긴 한마디가 저는 와 닿던데요.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을 하면서 필요한 만큼 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사건수임은 거절한다.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그런 것이 기쁨을 준다’ 이거 여변호사님이 하신 말씀인가요?

 

여연심 제가 직접한 것이 아니라 아마 그때 경향인가 어디에서 법률원 변호사 전체를 취재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권두섭, 송영섭변호사님 다 나왔던 그런 기사였으니까 누군가가 하신 말일 것 같아요. 그런데 다들 이런 생각을 갖고 일했었던 것은 맞아요. 지금도 그러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지미 해야 할 일을 하면서 필요한 만큼 번다. 되게 좋은 말인 것 같아요.

 

여연심 필요한 만큼 잘 버시는지 늘 걱정이에요.

 

김지미 민주노총에 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소송 중에 하나로 뉴코아 비정규직 투쟁을 꼽으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여연심 1년차 때부터 해서 기억에 많이 남는 것도 있고, 그때 기간제법 시행 때문에 뉴코아와 이랜드 노조에서 공동으로 투쟁을 조직을 했는데 제가 뉴코아를 담당한 변호사인 셈이었어요. 투쟁을 준비할 때부터 노조분들하고 밀착해서 여러 가지 조언들을 많이 해주기도 하고 물론 제가 배우는 게 더욱 많았지만 그런 관계를 맺어서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너무 친해져서 나중에 제가 객관성을 잃어서 좀 힘들었어요. 몇 달 동안 수배생활을 하는 김호진 당시 부위원장님은 제가 정말 좋아하던 분이었기 때문에 못나가서 너무 괴로워하고 극단적인 생각도 때로는 하고 이런 걸 다 알게 되니까 같이 괴로웠어요. 지난주에 그 당시 다른 부위원장님 한 분이 있는데 그분을 만나서, 소주를 한 잔 했거든요. 그 분들이랑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그때 노조활동했던 분들 해고당했던 분들이 다 그 뒤로 여러 가지로 힘들다고 알고 있어요. 다시 비슷한 직장에 취직하기도 어렵고.. 그래도 자기는 그때로 돌아가면 다시 똑같이 투쟁할 것이란 얘기도 하시고. 이런 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갑자기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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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주위에 여러 우려에도 민주노총 법률원에 가셨는데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3년 정도 있다가 국선전담변호사로 진로를 바꾸셨어요. 이전에 인터뷰 하신 걸 보니까 노동·형사사건에 관심이 있었다라고 말씀하신 게 있던데, 관심 있어 하는 분야의 일을 하고 싶어서 국선전담을 선택하셨던 건가요?

 

여연심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법률원을 그만두게 됐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때 로펌으로는 가기 싫고 개업할 자신은 없고, 저는 그때는 노동사건을 하면 법률원의 업무를 뺏는 셈이 된다고 생각을 해서 좀 꺼려지더라고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국선전담이 그러면 여러 가지 타협책으로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서 지원을 해서 됐죠.

 막상 전담을 해보니까 제 성격은 일을 찾아서 하고 싶은 성격인데, 되게 좋은 일이지만 적성에는 잘 안 맞는 것 같아서 일자리를 찾다가 지평 쪽에서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1년 10개월하고 그만두게 되었어요.

 

김지미 제가 알기로는 국선전담 끝나고 지평으로 바로 가신 건 맞는데 그 사이에 법원에 지원을 하셨었죠?

 

여연심 네. 맞아요.

 

김지미 그런데 안 되셨잖아요. 연수원 성적이나 국선전담 경력 등을 봤을 때는 경력직 법관으로 여변호사님만한 분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여연심변호사가 안되면 민변에서는 아무도 법원으로 갈 수 없다는 얘기도 돌고 그랬어요. (웃음).

 

여연심 저도 왜 떨어졌는지 모르니까 뭐라고 말씀 드릴 건 없는데 제가 민노당, 진보신당 활동을 하다가 탈당을 한 상태였는데 당 활동에 대해서 소명서를 내라고 하더라구요. 그거 때문이 아닌가 추측만 할 뿐이죠.

 

김지미 지평에 가신지 4년 정도 되신 것 같은데 지평이 공익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두루라는 법인을 따로 만들었잖아요. 지평에서 특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공익활동 분야는 어떤 건가요?

 

여연심 두루에 지금 일하시는 변호사님들이 세 분이세요. 예전보다 영역을 계속 넓혀 나가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장애인권 관련해서 임성택변호사님하고 많이 해왔었고요, 요즘은 기업과 인권분야라거나 아동인권분야 등으로 공익활동이 훨씬 체계화되고 있어요. 변호사의 자문이나 이런 것이 필요한 사건도 이분들이 많이 매칭해주시고 그렇게 하고 있어요.

 

김지미 공익활동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해보면, 대형 로펌들이 나서서 공익을 전담으로 하는 새로운 법인을 세우는 추세이긴 한데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공익변호사들을 지원하는 측면에서는 부족한 면이 있거든요. 여변호사님이 현재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이사를 맡고 계신데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실 것 같아요.

 

여연심 네. 제가 인권이사로 있다보니까 여러 공익활동을 하는 변호사님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어려움이 많으시더라고요. 상대적으로 로펌소속으로 일하는 변호사보다 외부에서 자립해서 일을 해야 하는 공익변호사 단체들이나 나홀로 일하는 변호사님들에게 어떻게든 공적으로 지원이 필요하겠다라고 생각을 하게 됐고,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봤을 때 자립을 지원할 수 있는 초기단계가 제일 중요한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이 자립이라는 것이 금전적인 자립도 필요하지만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서 훌륭한 공익변호사로 잘 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게 선배 변호사들이나 변호사단체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을 해서 지금 가칭이기는 한데 프로보노지원센터라는 것을 서울지방변호사회 산하에 만들까하고 기획하고 있는 초기단계에 있습니다.

 

김지미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이사가 되신 지 1년 정도 되셨잖아요. 지난 집행부 때와 현 집행부의 인권위원회 역할을 보면 큰 차이가 있어요. 이건 순전히 인권이사의 역할 때문이다라는 게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어떠신가요?

 

여연심 독재체제라서 그래요(웃음).

 

김지미 여변호사님이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이사를 하시고 나서 의미 있는 사업들이 몇 가지가 있었어요. 집회현장에서의 인권침해감시 활동도 있었고 그밖에 여러 가지 기대할 수 없었던 성명이 나오기도 하고, 소녀상 지킴이 학생들도 만나시고 인권위에 진정을 하기도 했죠. 방금 말씀하셨던 프로보노센터도 기획단계이고. 인권에 대한 진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인권이사를 하시면서 어려웠던 점은 어떤 게 있을까요?

 

여연심 기획을 해야 하는 것이 많아서 좀 힘들었고 작년에는 조영래변호사님 기념사업을 제 소관 하에 해서 회사일을 조금 줄이고 그 일에 전담할만큼 일이 많아서 좀 힘들었어요. 그런데 이런 거는 그냥 열심히 일하면 되니까. 또 직원들도 워낙 일을 잘 해줘서 별로 어렵지 않은데, 회원들간의 눈높이를 어떻게 맞춰야 할까가 되게 어려운 부분인 것 같아요. 서울회는 회원들이 내는 회비로 운영이 되는 회원조직이니까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전화해서 항의하는 회원님들도 많이 계세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일들 중에서 그 일을 반대하는 회원들도 개인적으로는 싫지만 저 정도는 할 수 있지 라고 양해할 수 있는 그 접점을 찾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실제로 인권위원회에서 제안했지만 못한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를 찾기 위해 다른 집행부나 회장님·부회장님이나 하고 계속 얘기를 하면서 설득도 하고, 제가 설득을 당하기도 하고. 그게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김지미 민변하고는 다르게 서울지방변호사회는 연령층이나 가치관이 다양한 사람들이 다 구성원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사업에 대해서 다 동의를 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러면 기존의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에서 했던 것 중에 가장 큰 반대에 부딪혔던 사업은 뭐에요?

 

여연심 반대에 부딪혀서 아예 못한 것들도 있구요. 한 것 중에서는 작년에 변호사회관 지하1층에서 노동인권토론회를 했었는데 그 안은 한 번 부결되고 다시 올려서 결국 가결이 됐었어요. 이때는 노동인권이라는 주제를 서울변회에서 다룬 적이 없었는데, 제가 내 관심분야인데 어쩔꺼냐 라는 식으로 약간 질렀어요. 그런데 어쨌든 회원들도 많이 오고 되게 성공적이고 재미있게 잘돼서 거기서 기운을 받아서 그 뒤로 서울회 혹은 서울회 인권위원회 주최로 몇 차례 그런 식의 토론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김지미 2년이라는 시간이 뭔가 제대로 일하기에 짧은 시간일 수도 있잖아요.

 

여연심 아니에요~~(웃음).

 

김지미 서울회도 2년에 한 번씩 집행부가 바뀌기 때문에 사업의 연속성이 담보가 안 될 수도 있잖아요. 아까 말한 것처럼 다양한 층위의 회원들이 있으니까요. 이제 임기가 1년 남았는데 남은 1년 동안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을까요?

 

여연심 물론 집행부가 바뀌고 또 우리 회원들 생각이 바뀌면 하던 사업도 접을 수 있고 또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어쨌든 저는 우리나라에서 공익변호사들이 점점 더 많이 생기고 있고 그러면서도 초기단계니까 프로보노센터를 제도적으로 안정화시켜서 장기적으로 공익변호사님들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싶고요, 그 다음에 이게 참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라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집회시위감시단은 올해도 꾸준히 해서 언론에도 나오고 우리 회원들한테도 알리고 이렇게 해서 서울변호사회는 문제가 있을 때 이렇게 가서 인권침해감시활동을 하는구나라는 것을 인식시켜서 이런 활동이 앞으로도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이예요. 거기다가 더해서 인권위원회 차원에서 인권침해현장을 많이 찾자고 위원장님이 얘기를 하셨고 다들 동의를 하셨잖아요. 저도 거기에 동의를 해서 집행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데, 그런 활동 많이 해서 아 지방변호사회가 이렇게 찾아가는, 찾아가서 직접 침해 사실을 발굴하고 구제하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라는 그런 게 남아있도록 그렇게 활동을 하고 싶어요.

 

김지미 집회에서 인권침해감시단은 2번을 나갔었죠. 처음 나갔을 때는 집회 참가자들이 우리를 경찰 쪽 사람인 줄 알고 적대적으로 대하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이게 안착이 되려면 많이 알려져야 되는 것들도 있을 테지만 내부적으로 이런 점들은 보완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점이 있을까요?

 

여연심 아직 2번밖에 안 해서.. 이건 정말 실험적으로 해본 셈인데, 아직 초기단계여서 특별히 더 바랄 건 없을 거 같고 집회가 단지 주말에 있으니까 애기들을 봐야하는 부모님들이 나오기에는 굉장히 어려워요. 특히 날씨도 춥고 이러면. 그래서 아쉽다기보단 이걸 어떻게 하면 인권위원들도 힘들지 않고 잘 할 수 있을까 그게 고민입니다.

 

김지미 프로보노센터가 아직 기획단계이긴 하지만 구상하시는 큰 줄기만이라도 설명을 해 주세요.

 

여연심 네, 어디까지나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씀 드리면 큰 줄기는 센터라는 기구를 독립적으로 만들고 센터장님도 모실 생각이에요. 꼭 상근이 아니더라도 이 센터 일을 중심으로 하는 분을 모시고 우리 회 직원들하고 함께 결합해서 주로 하는 업무는 프로보노 단체들을 지원하고 프로보노를 육성하는 거죠. 그래서 자립지원 펀딩도 해서 가능하면 많은 인원에 대해서 일정한 금액을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싶어요. 이거는 제가 개인적으로 꼭 하고 싶은 사업입니다. 그렇게 지원하는 사업과 교육하는 사업, 초반에 공익변호사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자리를 잘 찾아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교육사업을 생각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공익전담이 아닌 변호사님들 있잖아요. 일반 개업한 변호사님들이나 공익활동을 하고 싶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매칭해주는 사업도 생각을 하고 있고, 그 다음에 공익변호사 활동이나 공익전담변호사들에게 도움이 되는 간행물 같은 거나 아니면 책자 같은 것을 만들 계획도 세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작년에 나우에서 지원해서 만든 공익입법메뉴얼 같은 거요. 그 다음에 공익변호사별로 이 주제를 좀 더 연구해보고 싶은데 비용적인 지원이나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 하면 연구비 지원 같은 사업도 해보고 싶고요, 그 다음에 공익변호사 단체나 개인이 해외랑 접촉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국제대회 참가할 때 그런 것을 지원하는 부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꿈이 엄청 거창하죠.

 

김지미 6개 정도 말씀하셨는데, 결국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사업이고 일례로 펀딩을 얘기를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식의 펀딩을 생각하고 계시는지.

 

여연심 이거는 사실 회 내부 문제인데요, 회원들에게 돈을 받거나 이럴 생각이 있는 것은 일단은 아니에요. 지금 회에 있는 예산에서 일정부분을 공익변호사를 위한 기금같은 것으로 적립하거나 아니면 회에 여러 수입이 있잖아요. 그 수입 중에 요 부분은 이 기금으로 적립한다거나 이런 방식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공감에서 하고 있는 공익변호사 자립지원사업 같은 그런 거네요.

 

여연심 그걸 그대로 베낀 겁니다(웃음).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으시겠다 하셔가지고. 공감 변호사님도 매우 기뻐했어요. 공감도 앞으로 계속하시겠지만 많이 하면 좋으니까요.

 

김지미 제 개인적으로는 민변에서도 이런 사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민변 회원들이 여러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것도 좋지만 1-2명 선정해서 이것만 제대로 해봐라라고 지원을 해주는 것도 민변으로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라고 보거든요. 어쨌든 서울회에서라도 하셨으면 정말 좋겠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교육사업 같은 경우는 민변에서도 교육사업 굉장히 신경 쓰고 있는데 인적자원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교육사업은 구체적으로 어떤 구상이 있으신 거에요?

 

여연심 김지미변호사님도 들어와 계시지만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에 공익인권교육TF를 만들었어요. 일단은 전체회원들 상대로 국제인권법 강의를 할 예정입니다. 4-5월, 2달에 걸쳐서 할 예정인데,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 TF가 센터랑 결합을 하든지 구체적인 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공익인권활동과 관련된 심화학습, 실무적인 교육 이런 것도 가능하면 해야겠죠. 강사진 구성이 문젠데, 강사진 구성은 오랫동안 공익변호사 활동을 해오신 분들한테 맡겨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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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이제 민변 얘기를 좀 하면 여변호사님은 노동위 소속이시죠.

 

여연심 네~활동은 못하지만 노동위 회비도 꼬박꼬박 내고 있다고 꼭 좀 말해 주세요.(웃음)

 

김지미 지금이야 워낙 바쁘시니까 활동을 하기가 쉽지는 않으실 텐데 처음부터 회비 회원은 아니셨던 거죠?

 

여연심 사실은 처음부터 회비회원이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1년차 때 민변에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당연히 노동위 활동을 했고, 그때는 법률원 변호사들이 노동위에 결합을 많이 못했어요. 법률원이 생긴지 얼마 안 된 조직이라서 자기 안정화가 힘들었던 때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노동위 수요모임에 나와 본 것이 3번 밖에 안돼요. 그래서 뭐 먹었는지도 다 기억나요(웃음). 중국집 호화반점에서 짬뽕 먹은 거. 두어 달 전에 도시락 먹은 거. 그래서 이게 부끄럽기도 하고 간사님께도 늘 죄송합니다.

 

김지미 저희가 처음에 뉴스레터 인터뷰 기획했을 때 회비회원들 인터뷰를 하면 좋겠다는 분이 계셨어요. 회비회원들이 무슨 생각하는지 물어보라고(웃음).

 

여연심 드디어 그걸 지키셨군요.(웃음) 저는 회비로밖에 기여하지 못해 늘 죄송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민변 회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아요.

 

김지미 그럼 회비회원으로서 민변에 바라는 점을 들으면서 인터뷰 마칠까 합니다.

 

여연심 이렇게 좋은 곳으로 이사도 오고 참 좋아요. 단, 좀 추운 것 같아서 온풍기도 구입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웃음) 저는 회비회원이라 너무 부끄러운데 늘 돈도 안 되고 건강에도 별로 좋지 못하는데 열심히 하는 회원들과 사무처에서 일하시는 분들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노동위 텔레그램방을 정말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보거든요. 다들 그러시겠지만 우리 훌륭한 회원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구나라는 걸 보면 되게 힘도 나고 자랑스러워요. 그래서 너무 힘들거나 지치지 않게 계속 그런 활동을 하면서 우리가 뭘하고 있다라는 걸 회원들한테 많이 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듣는 것만으로도 회비회원들에게는 힘이 됩니다. 회비 많이 벌게요.(웃음)

 

김지미 여변호사님이 민변의 지향과 동떨어진 일을 하고 계신 건 아니기 때문에, 민변에서는 여연심변호사님이 우리 회원이라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바쁘신데 점심도 못 드시고 이렇게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연심 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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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참여팀] 참여연대의 자원활동가는 상근 활동가들과 손발을 맞춰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10대 청소년부터 일흔이 넘으신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학생, 주부, 직장인, 은퇴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원활동가들의 숨은 활약을 자원활동가 인터뷰를 통해 알려드립니다.

 

"함께 하는 세상을 꿈꿔요"

 

아카데미 느티나무 자원활동가 최경아님

 

참여연대 자원활동가_최경아

아카데미 느티나무 자원활동가 최경아님 ⓒ참여연대

 

같은 공간에 앉아 있었으면서 서로를 한동안 알아보지 못했다. ‘박영민’이란 이름이 남자가 주로 쓰는 이름이라 인터뷰어가 남자일 것이라 생각했던 탓도 있고, 인터뷰이가 외국에서 공부를 오래한 사람이라 해서 나이가 꽤 많을 것이라 생각한 탓도 있었다. 다행히 전화통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봤고, 어색한 기류를 헤치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Q. 간단한 자기소개

A. 저는 특별할 게 없어요. 그냥, 지금은 주부예요. 많은 걸 고민하고 있는 주부죠. (웃음)

 

Q. 주로 어떤 걸 고민하고 있나
A. 가장 큰 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이에요. 최근까지 공부를 했어요. (독일에서 하셨다고) 네, 독일에서 공부를 했고,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돌아와서 논문 작업을 나름대로 했는데, 아무래도 지도 교수님하고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여러 문제들이 생겨서 지금은 중단한 상태에요. 앞으로 다시 독일에 가서 공부를 할지, 한국에서 마무리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제 2의 삶을 살지 고민하고 있어요.

한국에는 2012년에 왔어요. 언제부턴가 공부하면서 시민단체나, 운동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어요. 물론 생각은 독일에서부터 했어요.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요. 저 같은 경우에는 뭐, 좋게 얘기하면 반듯하게? 나쁘게 얘기하면 정말 재미없게 살아온 사람 중에 하나인데, 딱 틀 안에서 교육 잘 받고 사회에서 정해준 대로 그렇게 규격화되어서 살아온 사람이에요. 사실 시민단체 활동에 대해, 사회구조 안에 감춰져 있는 이면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면서 살지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아주 늦게 시작한 거죠. 대학 때도 별 생각 없이 다녔고요(웃음). 독일에 가서도 저에게 주어진 일들, 그곳의 삶에 적응하기 바빴고, 살아남는 일이 급급했어요.
생각해보면 이런 고민들은 독일에서 시작한 것 같아요. 외부에서 한국을 봤을 때 속상할 때도 있었고, 불편하고 안타깝기도 했어요. 그러다 한국에 들어와서 결혼을 했고, 부모님 그늘을 벗어나서 완전히 새로운 가정을 꾸려 살다보니 사회의 어두운 모습들이 더 보이게 되었어요. 공부를 하면서도 고민은 있었지만 당면한 과제들 때문에 깊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많은 것들을 정리하고 휴식기를 갖게 되니 고민이 더 깊어진 것 같아요. 저의 삶을 다시 정돈하고 앞으로의 삶을 설계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면서 참여연대도 와보게 됐고, 이런 저런 활동들에도 관심을 갖게 됐어요. 아직 저를 점검해보는 시간인 것 같아요. 어떤 방향,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그 수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고. 재밌어요. 완전히 저한테 새로운 세계니까요.

 

Q. 밖에 나가보니 한국이 보이게 되는 그런 케이스인 것 같네요.
A. 네. 그리고 제가 외국에 가니까 엄청난 소수자가 되더라고요. 외국인, 이방인, ‘너 뭐냐’ 이렇게 되는 거죠. 외국인들은 한국이란 나라에 특별히 관심도 없고, 내가 정말 소수자일 수 있다는 경험. 또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공부도 잠깐 쉬게 된 경험도 영향을 미쳤어요. 누구나 소수자가 될 수 있고 인생의 힘든 순간들이 올 수 있구나, 나만 안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 건 정말 오만한 생각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Q. 참여연대는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A. 오다가다 많이 보긴 했어요. 참여연대 근처에 올 일이 많았어요.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나와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죠. 세계가 다를 거라고 생각했고요. 시민활동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들이 있잖아요. 저도 그런 게 있었죠. 그래서 참여연대에서 자원활동하겠다고 마음먹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렸어요. 내적 갈등도 있었고요. 그런데 와보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Q.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는지.
A. 저는 대학교 학부생일 때, 약간 과도기에 있던 학번이었어요. 제 학번을 앞뒤로 해서 학내에서 집회를 한다거나 그런 일들이 많이 사라졌어요. 1,2학년 때 까지만 해도 가끔 있었는데 말예요. 그래서 그런지 저보다 한참 앞선 선배들과는 괴리감 같은 것이 있었죠. 그 당시에 운동하는 선배들을 봤을 때, 첫 번째로는 무서웠어요. 근엄하고. 늘 우수에 차있거나 까칠하고. 시니컬하고. ‘너는 인생을 잘못살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불편했어요. 그리고 같이 놀면 나를 집회에 데려갈 것만 같았고요(웃음). 물론 대학 때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내가 그래도 대학생인데 너무 생각 없이 사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은 있었죠. 한편으로는 지금 저렇게 거리에 나가는 것보다 내가 성공하고 힘을 가진 사람이 돼서 더 많은 영향력을 가졌을 때 목소리를 내는 게 더 효과적일 거야, 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 운동했던 선배들이 나이를 먹고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고, 한때 참 뜨거웠던 선배도 운동에 회의를 가지고 떠나는 걸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은 다 편한 거 좋아하는 것만 같고...
그런 생각이 있었는데 참여연대에 와서 보니까 간사님들 너무 좋으세요. 참, 저래서 무슨 투쟁을 하시나! 이런 생각도 들고(웃음). 사람이 다르지 않구나, 사람의 감수성이라는 건 비슷비슷하구나,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일 뿐이고 생각 하나하나에 가치가 있구나,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고민에서 더 자유로워진 부분이 있고요.

 

Q. 물론 이런 활동이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생각을 하는 게 옳은 삶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그른 삶은 아니지만, 어쨌든 결국 ‘돌아왔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부터 사회문제에 뛰어든 사람보다 생각이 더 탄탄하고 고민이 깊다는 생각이 든다.
A. 어떻게 보면 ‘돌아왔다’는 느낌이 저한테는 장점이 될 수도 있겠어요. 오랫동안 이런 활동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도 더 조심스러워지고, 그렇기 때문에 깊어졌어요. 어렵게 선택한 길이기에 앞으로 어떤 삶을 살더라고 지금 고민하고 있는 가치의 방향이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아요. 실제로 시민단체 활동가로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물론 주변에서 우려는 많지만요.

 

Q. 지금 하고 있는 고민들에 자원활동이 도움이 많이 되는가.
A. 굉장히 많이 되는 것 같아요. 일단 시민운동에 대한 심리적인 장벽을 많이 낮춰줬다는 것이 제일 좋았어요. 간사님들을 뵙고 그 분들 활동하시는 것들을 보면서 심리적인 장벽이 많이 낮아졌어요. 또 원래 공부를 계속 해왔기 때문에 사실 공부의 범위를 점점 좁혀가는 연습을 하며 살았는데요, 자원활동하면서 여러 강의도 듣고 공부를 핑계로 미뤄왔던 다양한 분야의 책들도 읽고 하면서 생각하는 범위가 늘어나고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나 되게 멍청하다’ 이런 생각들 되게 많이 했거든요(웃음). 좁은 것밖에 모르고, 좁혀 나간 그 분야도 완벽하게 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어휴(웃음)

 

Q. 마지막으로 꿈은 무엇인가? 막연해도 좋다.
A. 자원활동을 시작하면서 사진하고 나를 소개할 수 있는 멘트를 보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뭐라고 보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함께 하는 세상을 꿈꾼다.’ 이런 식으로 보냈던 것 같아요. 그게 제 꿈인 것 같아요. 내가 뭘 하든,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든. 소수자로, 소외된 사람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나은 생활을 하는데 조금이나마 일조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요.

 

인터뷰 말미에 ‘영민 씨는 무얼 하는 사람이냐’라는 질문을 하며 서로의 활동과 활동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 꽤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혀 다른 환경과 생각 속에서 만난 사람들이었지만 서로의 생각에 깊이 공감하고 응원했다. 이제 막 자원활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겪을 수도 있는 많은 상처나 문제들을 걱정하고 또 겁먹었지만 그 때가 오더라도 처음 활동을 시작한 이유와 방향을 잊지 않으려한다는 그의 다짐에 필자 역시 굉장한 힘을 얻었다. 인터뷰 중 ‘나이가 너무 많아서’라는 말을 종종 하며 민망해했는데, 걱정 마시라. 여전히 누구보다 빛나는 청춘으로 충분히 다가오니. 

 

작성 자원활동가 박영민 (활동가를 위해 활동하고 싶은 대학생)

수, 2015/10/28-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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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제작소가 12년 만에 마련한 보금자리 희망모울은 단장을 하며 시민연구공간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유독 심했던 한파 때문에 일정이 조금 늦춰졌지만, 새 공간에서 시민분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는데요. 3월의 어느 날, 희망모울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을 주신 이일훈 건축가님과 희망모울 설계와 건축을 맡고 계신 박창현 건축가님(에이라운드 건축 대표)을 만났습니다. 두 건축가님은 어떤 인연으로 희망제작소와 함께하게 되셨을까요? 그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번 글은 이일훈 건축가님과의 대화를 담았습니다.

희망모울을 만드는 사람들 ① 이일훈 건축가
“희망제작소가 더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제작소가 12년 만에 마련한 보금자리 희망모울은 단장을 하며 시민연구공간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유독 심했던 한파 때문에 일정이 조금 늦춰졌지만, 새 공간에서 시민분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는데요. 3월의 어느 날, 희망모울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을 주신 이일훈 건축가님과 희망모울 설계와 건축을 맡고 계신 박창현 건축가님(에이라운드 건축 대표)을 만났습니다. 두 건축가님은 어떤 인연으로 희망제작소와 함께하게 되셨을까요? 그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번 글은 이일훈 건축가님과의 대화를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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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규(이음센터 팀장, 이하 한) : 희망제작소와 어떻게 인연이 닿으셨나요?

이일훈 건축가(이하 이) : 희망제작소가 수송동에 있을 때부터 제 후배들이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심이 있었지요. 어느 날, 한 모임을 통해 알게 된 희망제작소 연구원이 사옥 이전 관련하여 자문이 필요하다고 찾아왔습니다. 제 직업이 건축가다 보니, 새 건물 건축 설계를 부탁하려는 줄 알았지요. 대화를 나눠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건물을 매입하려는데, 어떤 것이 좋은지 살펴봐달라는 것이었어요. 열 개 남짓의 건물을 후보로 뽑아서 가져왔더라고요. 그중 어떤 것을 사는 게 좋을지 의견을 구하는 조금은 황당한 이야기였습니다.이건 건축가가 아니라 부동산 중개업자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연구원은 건물을 사서 새 공간으로 만들려면 매매계약서를 잘 써야 하는 것은 물론, 법적·시간적·공간적으로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 많다고 하며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건물 내부를 원하는 공간으로 설계하는 것 역시 부동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이 부분에 공감하고 도움을 주기로 했습니다.

: 저희 새 보금자리 ‘희망모울’ 마련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는지 궁금했는데,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군요. 건물을 매입하는 데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약속을 잘못했던 것 같아요. (웃음) 한 마디로 연못에 돌 던지기였어요. 좋은 건물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후보를 하나씩 탈락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야 결정이 가능한 상황이었거든요. 선정이 아닌 탈락을 위한 검토는 힘들고 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했고, 제 재능이 희망제작소의 시민연구공간 조성에 도움이 된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겨울에 후보 건물을 직접 보러 다녔지요. 오래된 건물이라 도면이 없거나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어요. 추운 날씨에 돌아다니며 건물을 보고 검토하고 의견 내는 작업이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함께 다니던 희망제작소 연구원도 정말 많이 고생했지요.

: 작년 겨울은 정말 추웠는데요. 여러모로 많이 고생하셨을 것 같습니다. 최종 선정된 건물로 결정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 다른 것들을 계속 탈락시키다 보니 그 건물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건축된 지 오래되었다는 우려가 있긴 했지만요. 우선 수명의 한계를 살펴봤습니다. 오래된 건물치고는 튼튼하게 지어졌더라고요. 또 희망제작소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내부변형이 가능한지도 살펴봤는데요. 그 점도 잘 맞았습니다.이 건물은 마포구 성산동에 있어요. 홍대, 합정, 연남동, 성미산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과 인접해 있지요. 물론 소비를 비판하는 시선도 있어요. 그래도 사람이 모이는 곳에 희망제작소가 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또 지하철역과 살짝 거리가 있지만, 걷기에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지요. 홍대입구역, 마포구청역, 망원역, 가좌역 등 여러 개의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도 어떻게 보면 장점이 될 수 있고요.사실 더 좋은 건물도 있었어요. 하지만 형편에 맞지 않았습니다. 재정에 맞춘 적절한 선택과 결정이 필요했습니다. 누구나 좋은 건물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희망제작소도 그랬지요.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었어요. 신축하거나 비싼 건물을 사는 것이 좋은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성산동 건물이 좋겠다고 희망제작소에 의견을 보냈어요. 저는 제 생각을 공유했을 뿐, 결정은 희망제작소에서 했지요.

▲ 희망제작소 새 보금자리 '희망모울'

▲ 희망제작소 새 보금자리 ‘희망모울’ 외관. 현재 내부 공사 중이다.

: 최종 선정된 건물에서 아쉬운 부분은 없었나요?

: 다른 부분은 모두 괜찮았는데, 외관이 제가 생각하는 디자인 건축과 매우 달랐어요. 제 시각에서 보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하지만 내부를 잘 바꿔서 쓰자고 했습니다.

: 여러모로 현실적 측면을 고려한 결정이 아닌가 싶네요. 그래도 건축가라면 양보 못 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요?

: 건축가는 건축에 관해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건축가가 건축하지 않은 건물도 사람들이 잘 사용할 수 있지요. 건축이 건축가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사용자 중심이어야 하지요. 내 고집과 철학에 맞지 않는다 해서 고집을 부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에게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사용자에게는 다를 수 있으니까요.

: 희망모울 설계와 시공을 맡은 박창현 건축가와는 어떤 관계이신지요? 희망제작소에 소개해 주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로 있을 때 제 제자였어요. 졸업한 제자들이 사회에서 다들 좋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인 관계를 이어나가기는 쉽지 않아요. 박창현 건축가는 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계속 찾아오는 제자였어요.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교류하는 사이가 되었지요. 기특하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제자입니다. 박 건축가는 NGO를 이해할 수 있는 건축가예요. 그래서 이번 일을 함께하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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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현 건축가 : 선생님이 갑자기 연락을 주셨어요. 건물을 설계하라는 말씀은 안 하시고, 어디에 가면 이런 건물이 있으니 한번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마침 근처를 지나던 중이라 바로 가서 볼 수 있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인연 같아요. 이후에 다시 최종 결정된 성산동 건물 앞에서 만나 희망제작소와 새 보금자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요. 취지가 좋고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사실 저는 희망제작소와 큰 인연이 없어요. 희망제작소보다 선생님과의 인연이 더 큰 역할을 했지요. 선생님께 배우고 교류하면서 느낀 것은 판단, 행동, 사고를 존경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었지요. 제가 ‘존경’의 의미를 담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분입니다. 이번 일도 선생님의 권유로 하게 된 것이고요. 이렇게 희망제작소와 인연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집을 함께 만든다는 것은 아주 큰 인연입니다.

: 두 분을 보니 참된 스승과 제자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희망모울은 어떤 공간이 되면 좋을까요?

: 건축물에서 중요한 것은 ‘사용자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가 실천되었나’입니다. 장애인용 화장실과 엘리베이터가 대표적이지요. 후보 건물 중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 없는 곳도 있었는데요. 그 부분이 마땅치 않더라고요. 최종 선정된 건물에도 엘리베이터와 장애인용 화장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희망제작소에는 말이지요.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니까 모두에게 편한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희망모울은 모든 시민이 편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사람과 비슷해요. 우리 각자에게는 편한 사람과 불편한 사람이 있습니다. 착한 것과는 다릅니다. 그냥 편한 곳, 누구나 쉽게 와서 머물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또한 앞으로 희망제작소에서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민과 함께할 때, 그 내용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쉽게 쓰여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 사진 왼쪽부터 희망제작소 한상규 팀장,

▲ 사진 왼쪽부터 희망제작소 한상규 팀장, 이일훈 건축가, 박창현 건축가

: 마지막으로 희망제작소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 희망제작소가 더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희망제작소가 하는 활동은 크게 이슈가 되고, 그 반향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희망제작소만큼 잘하는 곳이 많아졌어요. 긍정적인 변화입니다. 희망제작소는 역사가 있으니까 분명 더 잘할 수 있는 동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 보금자리 희망모울을 중심으로, 시민의 관심과 삶에 연결되는 일에 큰 역할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희망모울에서 시민과 시민이 더 많이 연결될 수 있길 바랍니다.

* 2편에서는, 희망모울 설계와 건축을 담당하는 박창현 건축가의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 글 : 한상규 | 이음센터 연구원 · [email protected]
– 사진 : 조현상 | 이음센터 연구원 · [email protected]

화, 2018/04/03-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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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의 시대에 만나는 인권영화

다희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레고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인터뷰 및 정리 | 조준희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정부가 지난 4월 공개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초안에서 ‘성적 소수자’는 지워졌다. 차별금지 조항을 담은 인권조례가 폐기되는 것은 너무나도 순식간이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성주에서, 그리고 수많은 이들의 집과 가게에서, 삶터를 지키려는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오는 6월 6일 서울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릴 스물세 번째 영화제를 준비 중인 두 명의 서울인권영화제 활동가를 만나 지금의 인권현실과 인권영화의 의미를 물었다. 지금의 상황을 ‘적막’이라 말하는 두 활동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기소개 부탁한다

레고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레고라고 한다. 서울인권영화제에서는 2012년 10월부터 상임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희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다희라고 한다. 2015년 영화제까지는 자원활동가로 활동하다가, 2016년부터 상임활동가가 되었다.

 

각자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나?

레고 | 상임활동가가 두 명밖에 없다. 거의 모든 일을 다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희 | 영화제 프로그래밍부터, 영상에 수어통역이나 자막을 넣는 기술적인 일, 대외 홍보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일을 한다. 또, 영화제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 외에도 인권운동과 관련한 연대활동도 중요한 활동 중 하나다.

레고 | 상임활동가 외에도 스무 명 정도의 자원활동가들이 함께하고 있다. 자원활동가들은 영화제를 그 시작단계부터 같이 고민하고 만들어가는 역할을 한다. 6월에 진행될 영화제를 위해, 1월부터 2~3개월간 성소수자, 노동, 환경, 평화, 여성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세미나를 함께 진행하고, 상영작도 함께 선정한다. 이 과정 자체가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인권운동의 하나이다.

 

서울인권영화제라는 이름을 듣고, 1년에 한 번 열리는 영화제의 이름으로만 생각했다

레고 |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다. 서울인권영화제는 영화를 통해 인권운동을 하는 인권운동단체다. 1년에 한 차례 영화제를 치루는 것이 가장 큰 활동이지만, 표현의 자유와 누구나 인권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을 위한 다양한 인권운동을 벌이고 있다.

 

벌써 23번째 영화제를 앞두고 있다. 서울인권영화제가 걸어온 길을 간략하게 소개해준다면?

레고 | 1996년 시작한 서울인권영화제는 원래 인권운동사랑방에 속해있던 영화제팀이었다. 당시에는 영화제라는 것조차 드물던 시절이었고, 특히 독립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다. 1997년 열린 2회 영화제에서는 제주 4ㆍ3항쟁을 다룬 <레드헌트>라는 작품을 상영하고자 했는데, 이 작품이 ‘이적표현물’이라며 상영장이 폐쇄 당했고 집행위원장이 구속, 인권운동사랑방은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탄압을 받았다. 기본적으로 우리 영화제에게는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운동이다. <레드헌트>에 대한 탄압에서 보듯이, 인권영화 상영과 표현의 자유는 뗄 수 없는 관계다. 그 기조는 지금까지도 인권영화에 대한 등급분류를 거부하고 정부와 기업의 후원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이어가고 있다.

다희 | 2008년도 우리 영화제에겐 중요한 시기였다. 2008년부터 상영관이 아닌 거리에서 영화제를 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영비법’)」을 개정해서 등급분류를 받지 않은 영상물을 상영관에서 상영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등급분류를 받지 않은 영화를 상영하면 그 상영관주가 처벌을 받게 법을 바꾼 것이다. 2008년 이전에는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등급분류를 거부하더라도 상영관에서 상영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결국 2008년 영비법의 처벌규정이 신설되고 난 뒤, 표현의 자유를 지키고, 누구나 인권영화를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영화제의 원칙에 부합하는 공간이 어디일까 고민하다 거리로 나오게 되었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 재정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재정운영은 어떻게 하고 있나?

레고 | 아주 가끔 소액의 비영리 목적 기금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거의 100% 개인 후원활동가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현재 320여 분의 후원활동가분들이 후원을 해주시고, 매월 270만 원 정도의 후원금이 들어오고 있다. 이 재정으로 사무실 월세와 최저임금의 50% 가량 밖에 안 되는 상임활동가 상근비를 충당하고, 남는 돈으로는 빚을 갚는다. 영화제를 한 번 치루고 나면 음향, LED스크린 대여, 기념품 제작 등에 들어간 빚이 생기는데 매월 후원금을 모아 아주 조금씩 갚아나가는 식이다.

 

영화제 상영작을 선정하는 기준과 과정도 중요할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레고 | 기획전에 포함되는 영화나 해외작품의 경우 따로 섭외를 하기도 하지만, 국내작의 경우 대부분 공모를 받아 결정한다.  상영할 작품은 상임활동가와 자원활동가가 수개월간 함께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결정된다.

다희 | 상영작을 선정할 때는, 영화가 갖고 있는 형식에는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 그보다는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간혹, 영화의 내용과 전혀 무관하게 상영 여부를 판단할 때도 있다. 그 영화를 둘러싼 사회적인 지형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가령 우리 단체는 이스라엘에 대한 BDS운동에 동참하고 있는데, BDS운동의 취지에 따라 영화 내용과 무관하게 상영을 취소한 적도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BDS운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소개해준다면?

다희 | 이스라엘에 대한 BDS운동은 이스라엘 제품이나 기업, 문화생산물에 대한 “Boycott(불매), Divestment(투자철회), Santion(제재)”운동을 뜻하는데,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팔레스타인 민중이 세계에 호소하고 있는 운동이다. 영화제와 관련지어 설명하자면, 현재의 점령 상황을 희석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거나, 이스라엘 정부 또는 정부가 관여하는 기관의 지원을 받은 영상물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재정적, 정책적으로 성소수자에 관한 영화나 행사를 많이 지원한다. 성소수자 영화 지원을 통해 중동에서 유일한 인권친화적 국가라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화가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상황을 ‘공존’으로 해석하는 등 점령 상황을 미화한다면 역시 상영 거부의 대상이다. 우리가 그런 영화를 상영하게 되면, 이스라엘 정부가 대외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메시지가 세계 어딘가에서 한 번 더 상영된다는 것이고, 결국 이스라엘의 반인권적 행태에 공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울인권영화제의 영화 선정기준은 영화의 내용과 함께, 그 영화를 둘러싼 사회적 지형을 함께 고려한다.

 

오는 6월 6일 마로니에 공원에서 제23회 서울인권영화제가 열린다. 이번 영화제 슬로건이 “적막을 부수는 소란의 파동”인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레고 | 올해는 슬로건을 정하는 데까지 참 오래 걸렸다. 슬로건은 보통 상영작 선정이 끝난 후 상임활동가와 자원활동가가 모여 상영작들의 분위기와 현재 한국사회를 나타낼 수 있는 것으로 고르곤 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슬로건을 결정할 때 아주 선명한 문제의식이 있었다. 가령 정부가 동성애에 반대한다면 뚜렷하게 그에 저항하는 슬로건이 나오는 식이다. 그런데 올해는  다들 무엇이 문제인지 선명하게 이야기하기 어려웠다. 인권과 관련한 문제는 여전하고, 오히려 더 후퇴하고 있는데도 사회적으로는 마치 모든 것이 평화롭고 행복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명 문제가 존재함에도 그것을 이야기하기 어렵게 만드는 현실을 ‘적막’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또, 그 적막을 부수어야 한다는 것에 활동가들의 공감이 있었고,  그것을 부수는 행동의 양상을 ‘파동’으로 표현했다. 파동이라는 것은 그 속성상 서로 만나면 더 커지기도 하고, 다른 모양으로 번져 나가기도 하지 않나. 파동과 같은 소란이 모여 지금의 적막을 부수어 보자는 취지다.

다희| 적막은 현재 정부의 태도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혐오를 ‘장난’이나 관행으로 치부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적막이라는 상태는 누군가 소란을 일으키기 전에는 매끈하고 평상적인 상태인 것처럼 보이는데, 한 예로 미투운동은 이런 적막을 깨는 큰 소란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소란들이 개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파동이 서로 만나 커지는 것처럼 서로 연결되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슬로건에는 개별적인 것처럼 보이는 소란들이 서로 만나 연대해 이 사회의 적막을 부순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사진=서울인권영화제>

 

개막작은 용산참사 그 이후를 다룬 <공동정범>이다. 개막작으로 선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레고 | <공동정범>은 이번 영화제에서 개막작인 동시에, ‘투쟁의 파동’이라는 섹션에 포함되어 있다. ‘투쟁의 파동’ 섹션은 투쟁의 과정에서 생기는 관계의 변화에 주목한 섹션이다. 사람들은 흔히 투쟁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면 너무나도 쉽게 그 투쟁을 ‘망했다’고 표현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용산참사 이후 철거민들의 감정과 갈등을 다룬 <공동정범>을 통해 투쟁이 만든 관계의 변화가 결국 다시금 그 투쟁으로 매개된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같은 섹션의 <바위처럼> 역시 남아프리카공화국 마리카나 지역의 투쟁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변화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다희 | 이런 관점은 이번 영화제의 슬로건과도 연결된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끄집어 내어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투쟁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다뤄져 왔지만, 투쟁 안에 있는 갈등을 드러내고 이야기하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개막작 외에 더 소개해주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레고 | 폐막작인 <잇다, 팔레스타인>이란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 올해가 나크바 70주년이다. 나크바는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하면서,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추방당한 사건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침 오늘이 ‘나크바의 날’이다(인터뷰 날짜는 5월 15일이었다). <잇다,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에 살지는 않지만 팔레스타인 민족 정체성을 가진 12명의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잇다, 팔레스타인>에 등장하는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팔레스타인 전통 자수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지키고 증명한다. 자수를 하는 행위가 곧 그들이 팔레스타인 정체성으로 존재하는 방식이고 일종의 저항이기도 하다.

다희 | 모든 영화가 중요하지만, 꼭 한 두 작품을 소개한다면, ‘제주 4ㆍ3 70주년 특별전’ 섹션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을 소개하고 싶다. 어떤 사건이 이야기될 때, 그 현장의 많은 사람들은 주로 남성으로 대표된다. 제주 4ㆍ3의 경우에도 당시를 증언했던 화자는 주로 남성이었다. 4ㆍ3 특별전을 준비할 때, ‘피해는 여성에게 굉장히 다른 양상으로, 크게 작용했는데 이야기하는 사람은 왜 항상 남성일까’라는 고민이 있었다. 그래서 4ㆍ3에서의 여성은 어땠는지 그리고 그 당시를 여성이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이 섹션에서는 영화가 끝나고 ‘광장에서 말하다’라는 한 시간 가량의 프로그램도 진행해, 함께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이 마련될 예정이다.

 

영화제가 끝나면 하반기에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나?

레고 | 하반기에는 월 1회 주기로 진행하는 정기 상영회에 집중하고 있다. 정기 상영회는 주로 실내 공간을 대관해서 진행하는데, 가끔은 투쟁의 현장에서 직접 상영하기도 한다. 작년에는 젠트리피케이션을 다룬 영화를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고 있는 해방촌에서 상영했다.

다희 | 정기 상영회 외에는 상영지원 활동을 한다. 영화제를 통해서는 1~2회 상영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 때를 놓쳐 영화를 보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모임이나 단체 등으로부터 상영지원 신청을 받아 영화제에서 상영했던 작품을 제공한다. 각 지역 인권영화제나 인권교육을 하는 모임 등에서 신청이 많은 편이다. 작년에는 여성인권과 관련한 작품을 많이 상영했다.

 

활동하면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

레고 | 돈이 없다는 것 아닐까. 재정적으로 조금만 더 여유가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다. 특히 상영지원이 가능한 작품을 늘리기 위해서는 아카이빙 비용이 필요하다. 1~2회 상영하는 상영 비용에 비해 작품을 보관하고 재상영할 수 있는 아카이빙은 그 비용이 더 많이 든다. 감사하게도 아카이빙 비용을 받지 않으시고 작품을 맡겨주시는 감독님들도 계시지만, 해외작의 경우 대부분 배급사에 아카이빙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상영했던 작품은 한글자막, 수어통역, 화면해설 등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아카이브가 커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더 쉽게 인권영화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다희 | 덧붙여서,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장애인 접근권에 대한 활동을 더 벌이고 싶다. 서울인권영화제는 한글자막, 수어통역, 화면해설을 영상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 외에도 영화제 현장에 활동 보조를 지원하고, 점자 리플렛을 만들거나, 휠체어 이동경로를 약도에 넣는 등 영화제를 거듭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더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제가 끝나면 장애인 접근권 보장을 위한 가이드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한다. 영화에 대한 접근권은 물론이고, 어떤 행사에서든 장애인 접근권을 위해 참고할 수 있는 가이드북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여력이 없어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활동계획은 무엇인가?

레고 | 앞서 이스라엘에 대한 BDS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다. 더 많은 문화운동 단체가 이 운동에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문화운동에서 참고할 수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BDS운동 가이드북을 만들고 싶다.

다희 | 인권영화제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다른 단체들과 공유하고 싶다. 서울인권영화제의 자원활동가 모임이나 장애인 접근권을 위한 활동에 관심을 주시는 분들이 많다. 우리 또한 영화제를 할 때 마다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 늘 고민한다. 인권운동을 하는 단체가 서로의 운동 과정을 공유하다 보면 보다 민주적이고, 장애인 접근권이 보장되는 활동을 해나가는 데 서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레고 |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영화제에 많은 분들이 와주시고, 영화를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꼭 와주시길!

금, 2018/06/0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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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번, 제가 감히 이 숫자를 선택해도 될까요?”

얼마 전 1004클럽에 가입한 김종환 후원회원의 고유번호는 518번입니다. 1004클럽으로 기부를 시작할 때 회원들은 1번에서 1004번 중 자신만의 고유번호를 지정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탄생일,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날을 선택하기도, 혹은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을 것 같은 번호를 (예를 들면, 4가 들어간 숫자) 일부러 선택하기도 합니다.

김종환 후원회원에게 생각해둔 숫자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속 숫자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냅니다. “혹시 518번이 남아있습니까?” 가능하다고 말씀드리니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물어봅니다. “제가 감히 이 숫자를 선택해도 될까요?”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이사 온 뒤로 쭉 서울에서 살았지만, 김종환 후원회원은 30여 년 전 고향 광주에서 일어난 가슴 아픈 역사를 항상 기억하며 살아왔다고 합니다. 2018년 8월, 그렇게 1004클럽 518번이 오래도록 기다린 짝꿍을 만났습니다.

김종환3-보정

김종환 후원회원은 우리 사회의 건강지킴이 ‘약사’입니다. 현재는 서울 지역 8000여 명의 약사를 대표하는 서울시약사회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종환 후원회원을 만난 후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의 연륜과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 중 이분처럼 신나게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김종환 후원회원과의 인터뷰로, 그가 여전히 자신만의 소명과 희망을 실천하기 위해 즐겁게 달리고 있는 사람이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서울시약사회 회장으로 활동한 지난 6년간 김종환 후원회원은 건강한 사회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왔습니다. 쉬는 날 없이 일하는 약사 회원들이 일과 삶의 균형 속에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약료 전문가로서의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기적으로 회원들의 소통과 배움의 장을 마련해 왔습니다. 또한 가출 소녀가 많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소녀돌봄약국을 만들고, 폐지수거 어르신 대상 건강 상담 등 지역의 소외된 구성원들을 살피며 공동체 건강지킴이로서의 마을 약사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매년 서울시청 광장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500여 명의 약사와 수천 명의 시민과 서울건강페스티벌을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약사들은 시민의 건강 상담을 진행하고 질병 예방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나눴습니다. 약국 밖에서 적극적으로 시민들과 소통하며 새로운 약사상을 정립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종환 후원회원은 사회, 특히 지역 사회에서 약료전문가로서의 그리고 지역공동체의 건강지킴이로서의 약사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위해 앞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중요한 주체로서 약사 역할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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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환 후원회원에게 희망은 무엇인가요?

“희망은 우리의 내일 또는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자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은 변화의 원동력입니다. 주거, 일자리 등 우리 사회에는 풀어야 할 숙제가 참 많습니다. 그 쉽지 않은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에겐 희망이 참 많이 필요합니다. 특히 요즘 청년들에게 더 많은 희망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김종환 후원회원에게 꿈이 있다면?
“대학생 때까지는 저는 ‘나’를 위해 살았습니다. 결혼 후에는 ‘아이와 가족’을 위해 살았습니다. 환갑을 바라보는 지금, 저는 이제 ‘우리’를 위해 살고 싶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치면 부족한 것보다 못하죠. 일도 삶도 욕심내지 않고 적당하게 살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잘 살아가는 것이 소박한 꿈입니다.”

희망제작소에 하고 싶은 말은?
“솔직히 희망제작소의 활동 하나하나 자세히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희망제작소가 우리 사회의 희망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앞으로도 희망제작소에서 더 많은 정책적 대안이 나오길 바랍니다. 희망제작소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 인터뷰 정리 및 사진 : 박다겸 | 이음센터 연구원 · [email protected]

목, 2018/09/27-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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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현대가 만난 사람] 조형수 참여연대 본부장

주거·통신·교육비 이슈 전문가…서민 가계부담 완화에 앞장서다!

2016.04.01. 주간현대

 

▲ 참여연대 조형수 민생희망본부 본부장     © 주간현대

 

<전략>


-15년간 민생관련 활동을 하셨는데 가장 바꾸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일단 주거비나 이런 부분 관련해서는 서민들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낮추고 참여연대에서도 주거비에 집중 제기할 방침이다. 임대금, 전세금에 폭등해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고 임차인들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진행됐으면 하는 게 바램이다.
 
통신비는 기본요금 폐지부분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각 요금제에는 기본요금 1만1000원이 포함돼 있다. 이것은 예전에 피쳐폰 쓸 때 이야기고 그때는 만이천원 정도였을 거다. 그런데 정액제 요금에도 기본요금이 포함돼있는데 그걸 없애야 된다는 거다. 그걸 없애도 마케팅비나 이런 것을 줄여서 나름대로 영업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정도의 수익을 거두고 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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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6/04/0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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