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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여연심변호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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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여연심변호사를 만나다.

익명 (미확인) | 월, 2016/02/15-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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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회비회원이라 강조하는 여연심 변호사는 민변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에 상당히 미안해했습니다. 하지만 여연심 변호사야말로 민변 밖에서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민변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그라니 맑은 눈으로 어찌나 막힘없이 조리 있게 이야기를 풀어가는지 다른 분들에 비해 턱 없이 짧은 인터뷰 시간에도 숨가쁘게 진행된 그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김지미 오늘 인터뷰도 자기소개로 시작할게요.

 

여연심 저는 법무법인 지평에서 일하고 있는 여연심이라고 합니다. 변호사 된지 10년차고 그래서 민변회원도 10년차 되었습니다. 실제 활동은 잘 못하고 있지만 회비는 꼬박꼬박 납부하고 있다는 말을 꼭 써주십시오. 그리고 지금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이사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여변호사님은 연수원 수료하실 때 화제가 됐던 인물이잖아요. 감히 넘볼 수 없는 연수원 수료 성적이 4등. 저로서는 400등도 어려운데 말이죠.(웃음) 그 정도의 최상위 성적이면 법원으로 가는 게 기정사실화 되고 있던 현실에서 민주노총 법률원으로 가셨어요. 그것 때문에 언론에도 많이 나오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여연심 공부를 하면서 민변 활동 같은 것을 하는 변호사가 돼야지 이런 막연한 상은 있었는데 민주노총 법률원은 잘 몰랐어요. 노동변호사라는 관념 자체가 생소했고 그냥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연수원에 갔는데, 연수원에서 노동법학회에 가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법률원 변호사님들도 알게 되고 실무수습을 그쪽으로 나가면서 더 친해지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가게 됐어요.

 

김지미 민변 활동을 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공부하면서부터 가지고 계셨다면 학창시절에도 공부만 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여연심 대학 때는 쪽방촌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꽃마을이라고, 지금 대법원 맞은편 거기가 원래 저희 대학 다닐 때만 해도 판자촌이었어요. 지금 법률원에 있는 김태욱, 우지연 변호사가 다 저랑 같은 동아리였습니다. 되게 순수한 동아리였는데, 왜 다들 법률원에 갔지?(웃음) 초등학생 아이들 가르치는 공부방이었어요. 들꽃공부방이라고. 지금은 없어졌어요.

 

김지미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판자촌이었으니까, 일종의 빈활 비슷한 건가요?

 

여연심 네. 맞아요. 여름에는 빈민활동도 계속 다녔고, 전철연이라고 철거민 조직하고 같이 연대활동도 할 수 있는 곳도 해보고 그렇게 했었죠. 그런데 주된 활동이 아이들 가르치는 것이었어요.

 

김지미 이런 쪽에 특히나 끌렸던 이유가 있을까요? 대학에도 여러 갈래의 운동이 있는데.

 

여연심 대학에 들어갔을 때 제가 사실 공부하는 것은 별로 안 좋아해서 철학책, 사회과학책 읽는 동아리들은 안 끌리더라고요. 그래서 몸으로 하고 아이들 좋아하니까 아이들 가르치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하게 됐어요.

김지미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오면 그럼 연수원 다니실 때 법원이나 검찰은 생각이 없으셨나요?

 

여연심 특별히 선을 정해놓고 된다 안 된다를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검찰이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어요. 제가 잘 속아 넘어가고 사람을 잘 추궁하지 못해요.(웃음).

 

김지미 부모님이나 주위에서 우려가 있었을 것 같아요. 노동변호사라고 하면 고생할 게 자명하고 실제 법률원 변호사님들의 노동 강도는 세기로 유명하잖아요.

 

여연심 부모님은 아쉬워하시기는 했는데 강하게 반대하진 않았어요. 제가 그때 나이가 31살이었고, 부모님은 제가 하고 싶어 하면 반대를 하는 성격은 아니시거든요. 오히려 연수원 동기들이 성적 좋은데 왜 그러냐며 아쉬워했어요.

 

김지미 법률원이 초창기여서 조금 더 힘들었을 것 같은데 법률원에서 어떤 일들을 주로 하셨고 막연히 꿈꾸던 노동 변호사라는 생활이 기대하던 것과 비슷했었는지 궁금합니다.

 

여연심 지금 법률원 변호사님들이 하는 일이랑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요즘은 비정규직 소송이 늘어난 게 좀 다를까. 그때도 여전히 징계나 해고사건, 노조 관련된 사건, 집시법 관련된 형사사건 위주로 많이 했었어요. 법률원에서 시보를 했었기 때문에 생각했던 변호사 일이랑 크게 다르지는 않았는데, 들어가서 3년 동안 일하면서 느꼈던 것은 내가 더 배우고 이런 일을 했었야 했는데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일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신입 변호사를 위한 교육 시스템이 정말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어요.

 

김지미 그건 민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민변도 최근에는 신입변호사연수 프로그램이 많이 생겼지만, 제가 1년차 때만 해도 그런 프로그램이 전혀 없어서 좀 힘들었었거든요.

 

여연심 맞아요. 저도 그게 제일 아쉬웠던 것 같아요. 제가 지금은 지평이라는 꽤 큰 로펌에서 일을 하는데 법률사무소가 크면 교육시스템이 잘 되어 있을 수밖에 없고, 거기에 투자를 많이 할 수 있어요. 그만큼 여력이나 비용도 있고 이 사람을 키우는 게 자산이 된다라는 것을 알고 유기적으로 돌아갈 수 있거든요. 그런데 법률원이나 여러 공익인권변호사 단체는 그게 힘들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 저는 민변에서든 변호사단체에서든 그런 교육의 역할을 잘해줘야 한다라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민주노총 입사하면서 남긴 한마디가 저는 와 닿던데요.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을 하면서 필요한 만큼 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사건수임은 거절한다.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그런 것이 기쁨을 준다’ 이거 여변호사님이 하신 말씀인가요?

 

여연심 제가 직접한 것이 아니라 아마 그때 경향인가 어디에서 법률원 변호사 전체를 취재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권두섭, 송영섭변호사님 다 나왔던 그런 기사였으니까 누군가가 하신 말일 것 같아요. 그런데 다들 이런 생각을 갖고 일했었던 것은 맞아요. 지금도 그러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지미 해야 할 일을 하면서 필요한 만큼 번다. 되게 좋은 말인 것 같아요.

 

여연심 필요한 만큼 잘 버시는지 늘 걱정이에요.

 

김지미 민주노총에 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소송 중에 하나로 뉴코아 비정규직 투쟁을 꼽으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여연심 1년차 때부터 해서 기억에 많이 남는 것도 있고, 그때 기간제법 시행 때문에 뉴코아와 이랜드 노조에서 공동으로 투쟁을 조직을 했는데 제가 뉴코아를 담당한 변호사인 셈이었어요. 투쟁을 준비할 때부터 노조분들하고 밀착해서 여러 가지 조언들을 많이 해주기도 하고 물론 제가 배우는 게 더욱 많았지만 그런 관계를 맺어서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너무 친해져서 나중에 제가 객관성을 잃어서 좀 힘들었어요. 몇 달 동안 수배생활을 하는 김호진 당시 부위원장님은 제가 정말 좋아하던 분이었기 때문에 못나가서 너무 괴로워하고 극단적인 생각도 때로는 하고 이런 걸 다 알게 되니까 같이 괴로웠어요. 지난주에 그 당시 다른 부위원장님 한 분이 있는데 그분을 만나서, 소주를 한 잔 했거든요. 그 분들이랑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그때 노조활동했던 분들 해고당했던 분들이 다 그 뒤로 여러 가지로 힘들다고 알고 있어요. 다시 비슷한 직장에 취직하기도 어렵고.. 그래도 자기는 그때로 돌아가면 다시 똑같이 투쟁할 것이란 얘기도 하시고. 이런 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갑자기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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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주위에 여러 우려에도 민주노총 법률원에 가셨는데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3년 정도 있다가 국선전담변호사로 진로를 바꾸셨어요. 이전에 인터뷰 하신 걸 보니까 노동·형사사건에 관심이 있었다라고 말씀하신 게 있던데, 관심 있어 하는 분야의 일을 하고 싶어서 국선전담을 선택하셨던 건가요?

 

여연심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법률원을 그만두게 됐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때 로펌으로는 가기 싫고 개업할 자신은 없고, 저는 그때는 노동사건을 하면 법률원의 업무를 뺏는 셈이 된다고 생각을 해서 좀 꺼려지더라고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국선전담이 그러면 여러 가지 타협책으로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서 지원을 해서 됐죠.

 막상 전담을 해보니까 제 성격은 일을 찾아서 하고 싶은 성격인데, 되게 좋은 일이지만 적성에는 잘 안 맞는 것 같아서 일자리를 찾다가 지평 쪽에서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1년 10개월하고 그만두게 되었어요.

 

김지미 제가 알기로는 국선전담 끝나고 지평으로 바로 가신 건 맞는데 그 사이에 법원에 지원을 하셨었죠?

 

여연심 네. 맞아요.

 

김지미 그런데 안 되셨잖아요. 연수원 성적이나 국선전담 경력 등을 봤을 때는 경력직 법관으로 여변호사님만한 분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여연심변호사가 안되면 민변에서는 아무도 법원으로 갈 수 없다는 얘기도 돌고 그랬어요. (웃음).

 

여연심 저도 왜 떨어졌는지 모르니까 뭐라고 말씀 드릴 건 없는데 제가 민노당, 진보신당 활동을 하다가 탈당을 한 상태였는데 당 활동에 대해서 소명서를 내라고 하더라구요. 그거 때문이 아닌가 추측만 할 뿐이죠.

 

김지미 지평에 가신지 4년 정도 되신 것 같은데 지평이 공익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두루라는 법인을 따로 만들었잖아요. 지평에서 특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공익활동 분야는 어떤 건가요?

 

여연심 두루에 지금 일하시는 변호사님들이 세 분이세요. 예전보다 영역을 계속 넓혀 나가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장애인권 관련해서 임성택변호사님하고 많이 해왔었고요, 요즘은 기업과 인권분야라거나 아동인권분야 등으로 공익활동이 훨씬 체계화되고 있어요. 변호사의 자문이나 이런 것이 필요한 사건도 이분들이 많이 매칭해주시고 그렇게 하고 있어요.

 

김지미 공익활동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해보면, 대형 로펌들이 나서서 공익을 전담으로 하는 새로운 법인을 세우는 추세이긴 한데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공익변호사들을 지원하는 측면에서는 부족한 면이 있거든요. 여변호사님이 현재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이사를 맡고 계신데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실 것 같아요.

 

여연심 네. 제가 인권이사로 있다보니까 여러 공익활동을 하는 변호사님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어려움이 많으시더라고요. 상대적으로 로펌소속으로 일하는 변호사보다 외부에서 자립해서 일을 해야 하는 공익변호사 단체들이나 나홀로 일하는 변호사님들에게 어떻게든 공적으로 지원이 필요하겠다라고 생각을 하게 됐고,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봤을 때 자립을 지원할 수 있는 초기단계가 제일 중요한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이 자립이라는 것이 금전적인 자립도 필요하지만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서 훌륭한 공익변호사로 잘 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게 선배 변호사들이나 변호사단체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을 해서 지금 가칭이기는 한데 프로보노지원센터라는 것을 서울지방변호사회 산하에 만들까하고 기획하고 있는 초기단계에 있습니다.

 

김지미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이사가 되신 지 1년 정도 되셨잖아요. 지난 집행부 때와 현 집행부의 인권위원회 역할을 보면 큰 차이가 있어요. 이건 순전히 인권이사의 역할 때문이다라는 게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어떠신가요?

 

여연심 독재체제라서 그래요(웃음).

 

김지미 여변호사님이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이사를 하시고 나서 의미 있는 사업들이 몇 가지가 있었어요. 집회현장에서의 인권침해감시 활동도 있었고 그밖에 여러 가지 기대할 수 없었던 성명이 나오기도 하고, 소녀상 지킴이 학생들도 만나시고 인권위에 진정을 하기도 했죠. 방금 말씀하셨던 프로보노센터도 기획단계이고. 인권에 대한 진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인권이사를 하시면서 어려웠던 점은 어떤 게 있을까요?

 

여연심 기획을 해야 하는 것이 많아서 좀 힘들었고 작년에는 조영래변호사님 기념사업을 제 소관 하에 해서 회사일을 조금 줄이고 그 일에 전담할만큼 일이 많아서 좀 힘들었어요. 그런데 이런 거는 그냥 열심히 일하면 되니까. 또 직원들도 워낙 일을 잘 해줘서 별로 어렵지 않은데, 회원들간의 눈높이를 어떻게 맞춰야 할까가 되게 어려운 부분인 것 같아요. 서울회는 회원들이 내는 회비로 운영이 되는 회원조직이니까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전화해서 항의하는 회원님들도 많이 계세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일들 중에서 그 일을 반대하는 회원들도 개인적으로는 싫지만 저 정도는 할 수 있지 라고 양해할 수 있는 그 접점을 찾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실제로 인권위원회에서 제안했지만 못한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를 찾기 위해 다른 집행부나 회장님·부회장님이나 하고 계속 얘기를 하면서 설득도 하고, 제가 설득을 당하기도 하고. 그게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김지미 민변하고는 다르게 서울지방변호사회는 연령층이나 가치관이 다양한 사람들이 다 구성원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사업에 대해서 다 동의를 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러면 기존의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에서 했던 것 중에 가장 큰 반대에 부딪혔던 사업은 뭐에요?

 

여연심 반대에 부딪혀서 아예 못한 것들도 있구요. 한 것 중에서는 작년에 변호사회관 지하1층에서 노동인권토론회를 했었는데 그 안은 한 번 부결되고 다시 올려서 결국 가결이 됐었어요. 이때는 노동인권이라는 주제를 서울변회에서 다룬 적이 없었는데, 제가 내 관심분야인데 어쩔꺼냐 라는 식으로 약간 질렀어요. 그런데 어쨌든 회원들도 많이 오고 되게 성공적이고 재미있게 잘돼서 거기서 기운을 받아서 그 뒤로 서울회 혹은 서울회 인권위원회 주최로 몇 차례 그런 식의 토론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김지미 2년이라는 시간이 뭔가 제대로 일하기에 짧은 시간일 수도 있잖아요.

 

여연심 아니에요~~(웃음).

 

김지미 서울회도 2년에 한 번씩 집행부가 바뀌기 때문에 사업의 연속성이 담보가 안 될 수도 있잖아요. 아까 말한 것처럼 다양한 층위의 회원들이 있으니까요. 이제 임기가 1년 남았는데 남은 1년 동안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을까요?

 

여연심 물론 집행부가 바뀌고 또 우리 회원들 생각이 바뀌면 하던 사업도 접을 수 있고 또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어쨌든 저는 우리나라에서 공익변호사들이 점점 더 많이 생기고 있고 그러면서도 초기단계니까 프로보노센터를 제도적으로 안정화시켜서 장기적으로 공익변호사님들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싶고요, 그 다음에 이게 참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라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집회시위감시단은 올해도 꾸준히 해서 언론에도 나오고 우리 회원들한테도 알리고 이렇게 해서 서울변호사회는 문제가 있을 때 이렇게 가서 인권침해감시활동을 하는구나라는 것을 인식시켜서 이런 활동이 앞으로도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이예요. 거기다가 더해서 인권위원회 차원에서 인권침해현장을 많이 찾자고 위원장님이 얘기를 하셨고 다들 동의를 하셨잖아요. 저도 거기에 동의를 해서 집행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데, 그런 활동 많이 해서 아 지방변호사회가 이렇게 찾아가는, 찾아가서 직접 침해 사실을 발굴하고 구제하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라는 그런 게 남아있도록 그렇게 활동을 하고 싶어요.

 

김지미 집회에서 인권침해감시단은 2번을 나갔었죠. 처음 나갔을 때는 집회 참가자들이 우리를 경찰 쪽 사람인 줄 알고 적대적으로 대하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이게 안착이 되려면 많이 알려져야 되는 것들도 있을 테지만 내부적으로 이런 점들은 보완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점이 있을까요?

 

여연심 아직 2번밖에 안 해서.. 이건 정말 실험적으로 해본 셈인데, 아직 초기단계여서 특별히 더 바랄 건 없을 거 같고 집회가 단지 주말에 있으니까 애기들을 봐야하는 부모님들이 나오기에는 굉장히 어려워요. 특히 날씨도 춥고 이러면. 그래서 아쉽다기보단 이걸 어떻게 하면 인권위원들도 힘들지 않고 잘 할 수 있을까 그게 고민입니다.

 

김지미 프로보노센터가 아직 기획단계이긴 하지만 구상하시는 큰 줄기만이라도 설명을 해 주세요.

 

여연심 네, 어디까지나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씀 드리면 큰 줄기는 센터라는 기구를 독립적으로 만들고 센터장님도 모실 생각이에요. 꼭 상근이 아니더라도 이 센터 일을 중심으로 하는 분을 모시고 우리 회 직원들하고 함께 결합해서 주로 하는 업무는 프로보노 단체들을 지원하고 프로보노를 육성하는 거죠. 그래서 자립지원 펀딩도 해서 가능하면 많은 인원에 대해서 일정한 금액을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싶어요. 이거는 제가 개인적으로 꼭 하고 싶은 사업입니다. 그렇게 지원하는 사업과 교육하는 사업, 초반에 공익변호사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자리를 잘 찾아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교육사업을 생각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공익전담이 아닌 변호사님들 있잖아요. 일반 개업한 변호사님들이나 공익활동을 하고 싶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매칭해주는 사업도 생각을 하고 있고, 그 다음에 공익변호사 활동이나 공익전담변호사들에게 도움이 되는 간행물 같은 거나 아니면 책자 같은 것을 만들 계획도 세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작년에 나우에서 지원해서 만든 공익입법메뉴얼 같은 거요. 그 다음에 공익변호사별로 이 주제를 좀 더 연구해보고 싶은데 비용적인 지원이나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 하면 연구비 지원 같은 사업도 해보고 싶고요, 그 다음에 공익변호사 단체나 개인이 해외랑 접촉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국제대회 참가할 때 그런 것을 지원하는 부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꿈이 엄청 거창하죠.

 

김지미 6개 정도 말씀하셨는데, 결국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사업이고 일례로 펀딩을 얘기를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식의 펀딩을 생각하고 계시는지.

 

여연심 이거는 사실 회 내부 문제인데요, 회원들에게 돈을 받거나 이럴 생각이 있는 것은 일단은 아니에요. 지금 회에 있는 예산에서 일정부분을 공익변호사를 위한 기금같은 것으로 적립하거나 아니면 회에 여러 수입이 있잖아요. 그 수입 중에 요 부분은 이 기금으로 적립한다거나 이런 방식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공감에서 하고 있는 공익변호사 자립지원사업 같은 그런 거네요.

 

여연심 그걸 그대로 베낀 겁니다(웃음).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으시겠다 하셔가지고. 공감 변호사님도 매우 기뻐했어요. 공감도 앞으로 계속하시겠지만 많이 하면 좋으니까요.

 

김지미 제 개인적으로는 민변에서도 이런 사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민변 회원들이 여러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것도 좋지만 1-2명 선정해서 이것만 제대로 해봐라라고 지원을 해주는 것도 민변으로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라고 보거든요. 어쨌든 서울회에서라도 하셨으면 정말 좋겠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교육사업 같은 경우는 민변에서도 교육사업 굉장히 신경 쓰고 있는데 인적자원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교육사업은 구체적으로 어떤 구상이 있으신 거에요?

 

여연심 김지미변호사님도 들어와 계시지만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에 공익인권교육TF를 만들었어요. 일단은 전체회원들 상대로 국제인권법 강의를 할 예정입니다. 4-5월, 2달에 걸쳐서 할 예정인데,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 TF가 센터랑 결합을 하든지 구체적인 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공익인권활동과 관련된 심화학습, 실무적인 교육 이런 것도 가능하면 해야겠죠. 강사진 구성이 문젠데, 강사진 구성은 오랫동안 공익변호사 활동을 해오신 분들한테 맡겨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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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이제 민변 얘기를 좀 하면 여변호사님은 노동위 소속이시죠.

 

여연심 네~활동은 못하지만 노동위 회비도 꼬박꼬박 내고 있다고 꼭 좀 말해 주세요.(웃음)

 

김지미 지금이야 워낙 바쁘시니까 활동을 하기가 쉽지는 않으실 텐데 처음부터 회비 회원은 아니셨던 거죠?

 

여연심 사실은 처음부터 회비회원이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1년차 때 민변에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당연히 노동위 활동을 했고, 그때는 법률원 변호사들이 노동위에 결합을 많이 못했어요. 법률원이 생긴지 얼마 안 된 조직이라서 자기 안정화가 힘들었던 때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노동위 수요모임에 나와 본 것이 3번 밖에 안돼요. 그래서 뭐 먹었는지도 다 기억나요(웃음). 중국집 호화반점에서 짬뽕 먹은 거. 두어 달 전에 도시락 먹은 거. 그래서 이게 부끄럽기도 하고 간사님께도 늘 죄송합니다.

 

김지미 저희가 처음에 뉴스레터 인터뷰 기획했을 때 회비회원들 인터뷰를 하면 좋겠다는 분이 계셨어요. 회비회원들이 무슨 생각하는지 물어보라고(웃음).

 

여연심 드디어 그걸 지키셨군요.(웃음) 저는 회비로밖에 기여하지 못해 늘 죄송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민변 회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아요.

 

김지미 그럼 회비회원으로서 민변에 바라는 점을 들으면서 인터뷰 마칠까 합니다.

 

여연심 이렇게 좋은 곳으로 이사도 오고 참 좋아요. 단, 좀 추운 것 같아서 온풍기도 구입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웃음) 저는 회비회원이라 너무 부끄러운데 늘 돈도 안 되고 건강에도 별로 좋지 못하는데 열심히 하는 회원들과 사무처에서 일하시는 분들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노동위 텔레그램방을 정말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보거든요. 다들 그러시겠지만 우리 훌륭한 회원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구나라는 걸 보면 되게 힘도 나고 자랑스러워요. 그래서 너무 힘들거나 지치지 않게 계속 그런 활동을 하면서 우리가 뭘하고 있다라는 걸 회원들한테 많이 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듣는 것만으로도 회비회원들에게는 힘이 됩니다. 회비 많이 벌게요.(웃음)

 

김지미 여변호사님이 민변의 지향과 동떨어진 일을 하고 계신 건 아니기 때문에, 민변에서는 여연심변호사님이 우리 회원이라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바쁘신데 점심도 못 드시고 이렇게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연심 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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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참여팀] 참여연대의 자원활동가는 상근 활동가들과 손발을 맞춰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10대 청소년부터 일흔이 넘으신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학생, 주부, 직장인, 은퇴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원활동가들의 숨은 활약을 자원활동가 인터뷰를 통해 알려드립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사회를 꿈꿔요.

갑질하는 용이라면 모두가 용이 아니었으면 해요."

 

아카데미 느티나무 자원활동가 이수종님

 

 

참여연대 자원활동가 이수종

아카데미 느티나무 자원활동가 이수종님

 

 

평일 오전이라 한가할 줄 알았던 종로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그 어느 때보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였고, 카페 한가운데 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 우리를 제외한 카페 안의 모든 사람이 너무나 친밀한 분위기에서 수다를 나누고 있어, 처음 본 사이였지만 괜한 마음에 수종님과 친구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Q. 간단한 자기소개
A. 지금 대학에서 경제학과와 정치외교학과를 공부하고 있는 22살 이수종이라고 합니다.
(그게 다인가요) 네! 간단하게. (웃음) 참여연대 공익활동가학교 16기, 정의당 경희대학교 학생위원장, 대학연석회의 간사,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자원활동. 아, 그리고 학교에서 하고 있는 일 중에 하나는 임기가 끝났어요. 내일이면 끝나요. 정말 기쁩니다.
 

Q. 참여연대는 언제 처음 알게 되었나.
A. 공익활동가학교 16기를 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인턴이라고 불렀던 프로그램인데 청년 중에 공익활동가를 꿈꾸는 사람들을 모아서 인권이나 공익활동과 연결된 민생이나 그런 부분에 대한 강연도 듣고, 방학 1달 동안 교육을 받고 자기가 직접 접해보고 싶은 활동을 준비해보는 프로그램입니다.

 

Q. 그 중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이 어느 것이었나
A. 저는 일단.. 술 마시는 것이 가장 좋았구요 (웃음)
(공익 활동 중에 여쭤 본 건데, 사익활동이 아니라) (웃음) 공익 활동 중에는 인권활동가 박래군 선생님이 세월호 추모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잡혀가시기 바로 직전에 저희한테 강연을 하시고, 그 다음날 바로 잡혀가셨어요. 학교에서도 박래군 선생님 강연을 듣기도 했었는데 그게 참 기억이 남아요. 또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는 김만권 선생님 강의가 되게 열정적이에요. 학교에서 정치철학을 배울 때는 교수님이 철인정치를 좋아하시는 분이라 안 맞는 부분이 많았는데 김만권 선생님 강연을 들으니까 되게 재밌더라구요. 그렇게 2가지 강연이 기억에 남았던 것 같아요. 

 

Q. 이런 문제(공익)에 대해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나?
A. 원래 관심을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에 들어와서 선배들 따라 집회에 나가보기도 하고 교지에 글을 쓰기도 하고, 학회를 맡아서 하기도 하고. 계속 관심을 갖고 있다가 3학년쯤 되니 여유가 생기더라구요. 이제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은 상대적으로 줄어들다 보니 외부활동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친구 중에 한명이 저번 겨울에 참여연대 활동을 했었어요. 친구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것도 재밌겠다 싶은 마음에 하게 되었습니다. 
계기가 되었던 건 2008년 광우병 집회 때 인 것 같아요. 그 때는 정말 누구나 다 나가는 분위기였잖아요.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고.
(22살이시면 그 때는..) 네, 중 2때였어요. 그 때는 다 나가는 분위기라서 저도 그랬어요. 그리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노동문제나 청년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어요. 저도 기숙사에 살고 있는데 이게 한 학기씩 등록하는 거라서 당장 다음 학기에는 어디에 살아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될 수도 있고. 내 삶과 바로 직결되는 문제이다 보니까 더 관심이 많이 갔던 것 같아요. 

 

Q. 정의당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A. 학교에서 학생위원회 활동을 하고 있어요. 
(조직 활동인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는데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은 만들어나가고 뭐 그런..조직활동 맞네요. (웃음) 경희대 학생위원회가 따로 있어요. 10~14명 정도? 다들 어떻게 관심을 갖고 와주셔서..주변 사람들이 저보고 정당계에 은수저라고 하더라구요. (웃음) 조직활동을 따로 안 해도 사람들이 가입을 알아서 한다고.
(경희대 정도면 은수저 맞는 것 같아요. 성공회대 같은 곳은 금수저이고) (웃음) 학교 자체에 관심을 갖고 다니는 친구들이 많은 것 같아요. 교양수업에도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수업도 많고. 이런 활동을 하러 나가라고 말하는 수업들도 있어요. 시민활동 같은 것들. 학생회가 목소리가 큰 편이기도 하고, 교양수업에서 인문학이나 시민교육을 강조하는 부분이 잘 형성이 되어있어서 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있는 것 같아요. 

 

Q. 왜 하필이면 정의당을 선택하셨는지.
A. 일단 새정치민주연합 내에서는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겠다고 생각했고, 원외에 정말 훌륭한 정당들이 있지만 그래도 원내에서 이런 목소리를 총화하고 관철시킬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느릴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조금씩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잘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답답한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 당연히 그런 부분은 있죠. 노동당 같은 정당은 색이 확실하고 사안에 대해 뚜렷하게 입장을 가지고 가는 것들이 있는데 그에 비해 정의당은 어떻게 보면 좀 희석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시민들과 더 가까워졌다고 볼 수도 있는 거라서요. 저는 후자에 방점을 찍지만 아무래도 관심 있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전자에 무게가 쏠리는 경우가 많아서 설명하는데 힘이 들 때가 있어요. 좀 더 많은 단어를 붙여야 한다는 것. 그런 부분이 항상 고민이 되요. 또 학교에 학생회부터 노동당, 청년좌파, 알바노조, 청년유니온 이런 곳에서 정말 훌륭하게 활동하고 계신 분들이 많아서 그런 분들과 내가 다른 것이 무엇일까, 차별성이 있나 하는 고민도 많이 되요. 그럼에도 약간은 애매할 수 있는 부분이 달리 보면 확장성이 있다는 말일 수도 있으니까 그 부분을 넓혀나가는데 집중하고 싶어요.
(저도 알바노조 조합원이에요) 저도요. 생각을 곰곰이 해봤어요. 정의당에 10000원, 알바노조에 11000원, 청년유니온에 5500원, 민달팽이 유니온에 5000원, 참여연대에 5000원, 청년좌파에 5000원. 계산을 해보니까 3-4만원 나오더라구요. 아, 어디서 돈이 세나 했더니. (웃음) 어느 순간 도움이 되겠죠, 뭐.
일종에 보험이 아닌가 싶어요. 내가 알바를 할 수도 있고 자취를 할 수도 있고 그냥 막연히 부당한 일을 당할 수도 있는데 이 사람들이 그 때 나와 함께해주겠지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Q. 개인적으로 ‘당사자성’을 획득하는 게 참 힘들었다. 당사자성이 없을 때 하는 고민과 행동은 한계가 느껴지더라, 한계에 탁, 하고 부딪히면 바로 앞에 한 계단을 못 오르겠는 그 느낌. 수종님은 그 부분을 잘 획득하고 계신 느낌이 든다. 
A. 1학년 때는 그런 부분에 부딪힌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이렇게 해서 세상이 바뀌나’하는 고민도 들었구요. 선배들한테 그런 얘기를 많이 하기도 했고. 시위하고 농활가고 이렇게 해서 세상이 바뀔 것이었다면 진즉에 바뀌지 않았을까, 안 바뀐다면 이건 정말 철옹성 같은 건데 철옹성의 경계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고 세상을 바꿔야 하지 않나, 또 그걸 누그러뜨릴 수 있는 건 ‘당사자성’에 있지 않나. 내 문제가 되는 순간 경계 밖에 있던 사람이 넘어오게 될 테니, 그럼으로써 경계가 흐트러지고, 또 그럼으로써 세상이 느리지만 조금씩 바뀌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는 내 문제도 아니고, 세상도 안 바뀌고, 선배들은 안 그런 척 하지만 지쳐 보이고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런 고민을 정말 많이 했었거든요.

 

Q. 그런 고민들이 들 때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훨씬 편했을 것 같은데.
A. 어찌 보면 지금이 도망자의 모습일 수도 있어요. 원래 하던 일들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이게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고 내 알바, 내 자취방, 내 일자리에 관한 문제이고 또 더 많은 사람들을 쉬운 단어로 설득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이것 역시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이전에는 비정규직이나 신자유주의나 큰 문제를 다뤘었어요. 그것들이 같은 맥락에 일들이지만 단어 자체가 비정규직과 알바를 비교해봤을 때 저조차도 비정규직이라는 단어가 너무 거대하게 느껴지거든요. 피부에 와 닿는 단어로 설명하다보면 관심이 간다, 공감이 간다, 가입을 하고 싶다는 친구들이 생기기도 하더라구요.
(결국은 가입이 하고 싶다는 말로 끝나다니, 정말 대단한 당원이시네요) (웃음) 학기 초에 6명으로 시작했는데 이렇게 해서 14명이 넘게 되었으니, 하하. 가입을 한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현실적으로 공무원을 준비하는 친구나, ROTC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가입을 하라고 하기가 힘드니까. 그래도 내 편이 생기는 건 정말 중요한 변화라고 생각해요. 관심이 생긴다는 말로 힘이 되어주는 일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다양한 고민을 하는데 있어서 참여연대가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
A. 네, 16기 공익활동가학교에서도 다양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 사람들의 고민을 하나씩 듣고 이 고민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강연을 들을 때도 강연자 분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물음표가 항상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 물음표를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꾸준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 그 고민을 25명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저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서로에게 참 의지가 되는 존재였어요.

 

Q. 가지고 있는 꿈은 무엇인지.
A. 공정한 기회, 공정한 경쟁, 충분한 패자부활전. 제일 마지막에 방점을 찍고 싶어요. 뭐 어찌 해서 공부하고 열심히 살고 대학을 가고 하는 부분은 꽤 많이 가능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한 번 밀려났을 때 다시 돌아오는 건 아직도 정말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지쳐서 세상의 주변부를 맴돌다 그대로 살아지는 그런 분위기. 여전히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데 아직 까지는 사회구조가 그들을 다시 경쟁으로 이끌어줄 뒷받침을 못해주는 것 같아요. 아, 그리고 ‘탈조선’ 안 해도 되는 사회! 죽창을 안 들어도 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웃음)

 

인터뷰를 마치고 한참을 더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각자의 활동과 경험, 그 안에서 느낀 이야기들을 나누다보니 수종님이 얼마나 이성적이고 동시에 감수성이 깊은지 느껴졌다. 적절한 열정을 가지고 변화를 꾀하려고 하는 그를 보니 ‘평생을 그저 편하게 살기는 글렀다’ 싶은 생각이 피식, 하는 웃음과 함께 스쳤다. 약속을 해야 하고, 행동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사람을 생각해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야하고.. 그가 숱한 고민들 속에서 정해 놓은 그만의 방법들 중 무엇 하나 쉬워 보이는 것이 없었던 탓이기도 하고 그가 참 꾸준할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일 수도 있겠다. 앞으로 몇 년간 방황할 예정인 나에게 수종님 같은 사람은 참 중요한 사례이다. 그가 지치지 않고 살아남아 나를 포함한 누군가에게 죄책감과 채찍질로 다가오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수종님.

 

작성 자원활동가 박영민 (활동가를 위해 활동하고 싶은 대학생)

수, 2015/12/30-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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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돌봄으로 가기위한 한걸음

 

인터뷰 : 김남희(참여연대 복지조세팀장)
패널 : 이경민(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윤지영(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배연희(전국요양보호사협회 협회장)
정리 : 이경민(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도입된지 올해로 8년이다. 그러나 제도 도입 초기, 공공 인프라 구축 없이 시행됨에 따라 서비스 공급에 대한 민간기관 의존도가 높았는데 장기요양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열악한 기관은 소멸될 것이라는 정부의 주장과는 다르게 민간기관이 난립하는 등 불법운영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또한 국가 및 지자체의 관리감독 미흡으로 요양보호사의 노동환경 및 처우는 열악했고, 이는 결국 대상자의 서비스 질 저하 문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고령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의 수혜자는 늘어날 것이며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우리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최근 우여곡절 끝에 장기요양에 대한 국가책임강화, 요양보호사의 처우개선, 기관의 회계기준 마련 등을 골자로 한 노인장기요양보험법 개정안 통과를 이끈 숨은 주역들이 있었다. 그들을 통해 현재 장기요양제도를 진단하고, 좋은 돌봄을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았다.

 

자기소개 부탁한다.

배연희 : 현재 전국요양보호사협회 협회장을 맡고 있다. 전국요양보호사협회는 2008년 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되면서 당사자가 주축이 되어 운영하고 있다.

윤지영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윤지영이다. 공감에서는 주로 노동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불안정한 노동자, 청소년, 이주노동자, 중고령 노동자의 노동문제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경민 :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 주로 보건의료, 돌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된지 벌써 9년째이다.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무엇이 있는가?

배연희 : 법과 제도가 여전히 미흡하다. 특히 방문요양 같은 경우, 임금가이드라인이 없어 시급이 다르고 최저임금 수준도 안 된다. 또한 처우개선비가 있지만 여전히 요양보호사에게 지급하지 않은 곳이 많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상자가 사망하거나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요양보호사는 실직하게 된다. 이처럼 요양보호사의 노동환경 및 처우는 굉장히 열악한 실정이다.

윤지영 :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는 사회보험으로 운영된다. 즉, 노인에 대한 요양을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처음 제도를 설계할 때, 민간에 위탁하면서 민간장기요양기관이 필요이상으로 늘어나고 사회보험 누수현상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요양보호사 같은 경우 불안정한 고용의 형태, 강도 높은 노동 등 노동환경과 처우가 매우 열악하며, 전문가임에도 전문가로 능력을 발휘한다기 보다 국가공익파출부같은 처우를 받고 있는데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이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시행 이후,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19대 국회에서 노인장기요양보험법 개정을 추진했었다. 그 과정에 대해 설명해 달라.

윤지영 :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될 때, 정부는 경쟁을 통해 질을 높이겠다고 했으나그 예상은 빗나갔고 민간기관들의 난립, 그로 인한 부정행위, 요양보호사의 처우문제가 발생하는 등 제도가 엉망이 되었다, 그래서 당사자인 요양보호사협회, 여성단체, 노조 등이 모여 제도의 전면개편을 요구하고자 공대위를 2011년에 꾸렸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의 전면개정을 주장했다.

 

처음 제안한 개정안과 통과된 개정안의 내용이 많이 다르다고 하던데...

윤지영 : 개정안을 만들기 전에 요양보호사 및 당사자, 공단, 기관의 이야기를 들으면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으며 설명회도 진행했다. 그리고 1년 가까이 법안을 만들었고 마침내 의원을 통한 입법발의를 했다. 처음 개정안에는 기관 설립 허가제, 국가와 지자체 책임 강화, 요양보호사 및 대상자의 인권보호를 위해 기관장과 대상자의 책무 강화 등의 내용을 담았었다. 그러나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많은 내용들이 빠졌다.

이경민 : 김성주, 오제세 의원이 발의한 기관의 회계기준 마련에 대한 내용과 조정하면서 빠진 듯하다.

윤지영 : 회계기준 마련 안은 좋다고 생각한다. 공대위가 제시한 안 이외 정부가 발의한 내용이 먼저 통과되면서 조정된 것 같다.

 

개정안이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있을 때, 참여연대가 결합했다.

이경민 : 작년 초 노인장기요양보험법 개정안 통과를 위한 연대 요청이 있었고, 그 때부터 참여연대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공대위에서는 일부 반대하는 의원실 및 지역사무실을 찾아다니며 면담을 하고, 피켓팅을 하였고, 참여연대는 입법로비 및 대중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것은 작년 5월 1일 법사위에 안건이 상정되었는데 노동절 행사에 나가서 계속 법사위 결과를 주목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일부 의원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하고, 그 이후 일 년 넘게 법사위에 상정조차 안됐었다. 의견서를 발표하고 법사위 및 보복위 의원들에게 의견서를 보내고, 홍보물을 만들어 의원들 트위터 및 페이스북에 게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19대 국회 마지막 법사위를 앞두고 반대하는 의원의 실명을 거론한 성명까지 발표하기도 했다.

윤지영 : 민간기관들의 반대가 엄청났다. 개정안이 통과 되지 않을 것 같아 의원들에게 편지를 썼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이며 모든 국민의 이해관계가 달려있는 사안을 특정집단의 반대로 법안 통과를 주저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배연희 : 참여연대가 함께 결합해서 의견서도 내고, 기자회견도 하는 등 더 힘을 모을 수 있었다.

이경민 : 개정안이 통과되기 위해 이 전부터 노력한 요양보호사분들과 공대위의 공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한다.

 

실질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양보호사의 노동 현실은 어떠한가?

배연희 : 인터뷰 전에도 요양보호사들과 상담을 했었다. 요양보호사의 노동환경과 처우는 문제가 많다. 최근 최저임금이 높아지면서 요양보호사의 시간은 줄고 노동일수는 늘어 토요일에도 근무를 하게 되었다. 평균적으로 임금이 5~8만 원정도 줄었다고 한다. 요양보호사들의 평균임금 55만 원인데 여기서 더 줄었다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누가 요양보호사에 대한 직업을 전문직업으로 여기겠는가. 이와 같은 일은 대부분 기관에 대한 관리감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요양보호사의 처우 등에 대해 기관의 재량에 따라 운영되는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그리고 요양보호사의 처우와 노동환경이 열악하고 기관의 이익추구는 결국 서비스 질 저하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인권침해 사례도 많다고 들었다.

배연희 : 방문 요양은 좁은 공간에 여자든 남자든 어르신과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장기요양등급 3급 같은 경우, 혼자 목욕을 시킬 경우가 있는데 그 때 성희롱이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일에 대해 기관에 건의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왜냐면 대상자가 끊기면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일을 하면서 발생하는 일에 대해 요양보호사를 보호하는 창구가 없다.

윤지영 : 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사회에서 여성의 돌봄과 헌신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 제대로 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허드렛일이라고 생각한다. 시설에 근무하는 요양보호사들은 장시간 노동을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재가는 근무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임금이 보장되지 않는다. 현재 시간당 수가가 정해져 있는 바우처 방식이 문제인데, 노동에서 호출형 노동이라고 표현한다. 기관은 공급자로서 안정적인 노동 유지, 그에 대한 대가 지불 등을 해야 하는 책임이 있지만 이에 대해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대부분 요양보호사에게 책임을 떠맡게 된다.

이경민 : 그 뿐만이 아니라 인권문제,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심각하기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면, 사회복지사가 방문상담을 할 때, 특히 남자인 경우 2인 1조가 되어 움직이는 경우가 많은데, 요양보호사에게는 그런 가이드라인이 없다, 성폭력, 성희롱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배연희 : 이런 환경에서 좋은 돌봄이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좋은 돌봄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윤지영 : 시설 같은 경우, 24시간 맞교대 근무가 많은데, 밤은 휴게시간으로 잡아 임금으로 주지 않는다고 들었다. 사실 밤에도 대상자의 상태를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업무를 하고 있는데 말이다.

배연희 : 업무도 굉장히 강도가 높다. 어르신들의 몸무게가 70-80kg인 경우가 많은데, 체위변경을 하려면 50대 이상의 요양보호사가 온몸으로 노동을 한다. 그래서 요양보호사들이 근골격계질환을 비롯한 산재직업병 등이 많이 발생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요양보호사의 출퇴근시간을 체크하는 RFID를 적용하고 있다. 개인정보 유출이 아닌가 싶은데, 이것은 위치추척이고, 통신비 2000원도 요양보호사가 지불해야 한다. 동의를 받고 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설명과 숙지 없이 하는 것이 문제이다.

윤지영 :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이나 노인복지법도 그렇고 요양보호사의 책무는 얘기하면서 그들을 보호하는 제도는 미비하다. 그나마 이번 개정안을 통해 일부 요양보호사를 보호하는 제도가 시행 될 것인데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여전히 미흡하지만 개정안이 통과되었는데, 앞으로 우선적으로 보완되었으면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윤지영 : 법이 애매하게 통과된 부분이 있어 아쉽다. 그래서 앞으로 기관장의 책무, 난립하는 민간기관의 통제, 국가와 지자체의 책무강화 등의 내용 등을 다시 정리해서 제안해야 할 것 같다.

배연희 : 요양보호사협회 협회장이기 때문에 요양보호사의 노동환경과 처우개선을 위해 제안할 수밖에 없다. 임금가이드라인을 통해 적당한 노동과 합당한 임금을 요양보호사들이 받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요양보호사의 책무 이외 업무를 명확히 하여 요양보호사가 전문가로써 사회적으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국가 및 지자체에서 업그레이된 교육을 하고 양질의 서비스를 대상자에게 제공할 수 있길 바란다.

이경민 : 이번 개정안이 여전히 미흡한 부분은 있지만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씩 바꿔나가길 바라며 많은 인내심이 필요할 것 같다. 무엇보다 재가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각 구마다 공공재가서비스센터가 설립되어 운영의 본보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바우처 방식의 문제 등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스템 부분의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좋은 돌봄은 무엇일까?

윤지영 : 좋은 돌봄은 누군가의 희생을 기반하면 안된다. 돌봄의 가치를 인정하고 정당한 보상이 주어져야만이 성립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요양보호사 및 대상자를 존중하는 가운데 좋은 돌봄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배연희 : 고령화 시대에 요양보호사들이 어르신들의 삶을 돌봐주고 있다. 핵가족화되는 사회 속에서 요양보호사의 역할은 크다고 본다. 따라서 그들의 전문성을 인정할 때, 대상자에 대한 서비스 질도 높아지고 좋은 돌봄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요양보호사의 노동이 귀하게 여겨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경민 : 늙는다는 것은 절망과 좌절이 아니다. 늙음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이에대한 책임을 사회가 함께 져야 한다. 그래서 사회보험으로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시행되고 있지만 제도만 있을 뿐 내용은 여전히 허접하다. 돌봄은 누군가의 희생이 아님을 우리가 인식해야 하며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이 더 강화되어야 할 것 같다.

금, 2016/07/01-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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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참여팀] 참여연대의 자원활동가는 상근 활동가들과 손발을 맞춰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10대 청소년부터 일흔이 넘으신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학생, 주부, 직장인, 은퇴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원활동가들의 숨은 활약을 자원활동가 인터뷰를 통해 알려드립니다.

 

"참여연대가 많은 위안을 줬어요."

 

사회복지위원회 자원활동가 류민하님

 

 

참여연대 자원활동가 류민하

사회복지위원회 자원활동가 류민하님

 

 

자원 활동을 그만둔 사람인데 인터뷰를 해도 되는지, 준비된 말이 아니면 말주변이 없어 어려운데 괜찮은지 이런 저런 고민이 들었다는 류민하 자원활동가. 인터뷰 약속을 잡을 때 보여줬던 발랄함은 뒤로하고 잔뜩 긴장한 모습을 내비치며 한마디, 두 마디 말을 이어가는 그의 태도가 참 신중하고 진실해보였다.

 

Q. 반갑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참여연대에서 했던 일을 설명해주세요. 
A. 대학교 4학년, 입학한지 7년 만에 4학년이 되었어요. 전공은 미디어커뮤니케이션과 정책 이렇게 2개이고요. 학교에서 학번을 밝히면 이제 굉장히 놀라게 되는 그런 상황입니다. 기자 지망생이구요, 대학 생활이 거의 끝나가서 학교생활을 재밌게 누리는 것보다는 자기소개서 쓰고 스터디하고 그런 조금은 재미없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 동아리는 아직 하고 있어요.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에서 자원활동을 했어요.

 

Q. 사회복지위원회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A. 사회복지위원회에서 하는 일은 정확히 다 알지는 못하는데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굉장히 많은 일을 조세담당하시는 분, 복지를 담당하시는 분 이렇게 2명의 간사님이 하시는 것 같았어요. 제가 맡은 일은 <복지동향>이라는 잡지에 실릴 인터뷰의 녹취를 푸는 일이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녹음된 걸 풀어내면 되는 거였는데 자택근무였어요. 집에서 일을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편하고 좋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기왕 시작한 자원 활동인데 뭔가 더 저에게 남는 일을 하고 싶어서 간사님께 일주일에 한 번 출근할 테니 나에게 시킬 일이 없느냐고 여쭤봤었어요.
간사님이 처음에는 조금 당황하셨어요. 저를 그런 식으로 써먹는 걸 생각하지 않으셨으니까. 그래서 저를 위해 일을 따로 만드셨죠. (웃음) 도로명으로 바뀐 주소를 고쳐 쓰는 일도 하고 중복된 복지들이 효율적으로 바뀌고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맡았었습니다.

 

Q. 참여연대는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A. 자원활동을 지원하기 전부터 이름을 알고는 있었어요. 워낙 큰 단체이기도 하고 유명하기도 해서. 본격적으로 알게 된 건 공익활동가학교 16기를 통해서였습니다. 학교에서 학보사 기자 활동을 함께했던 친구가 15기를 했는데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다고 추천을 해줘서 지원하게 되었어요. 16기 활동을 하면서 참여연대 회원으로 가입도 하고, 청년참여연대 후원도 하게 되었고, 16기가 끝나고 나서도 뭔가 더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자원활동도 지원했어요. 간사님 졸라서 일을 더 하기도 했고. 
 기자를 꿈꾸는 학생으로서 공익활동가학교는 정말 좋은 활동이었어요. 참여연대 안에 계신 분들만 뵙게 될 줄 알았는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을 직접 만나고, 강연도 들을 수 있는 기회도 생기고. 기자를 준비하면서 ‘시민사회란 이런 곳이다’라고 체험할 수 있는 입문코스 같은 느낌이었어요.

 

Q. 어렸을 때부터 기자가 꿈이셨어요? 
A. 그렇지는 않아요. 전공을 선택하고, 심지어 학보사에 들어갈 때까지도 기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대학생활에 뭔가 남기고 싶어서 시작한 활동이었는데 일을 하면서 적성에도 맞는 것 같고 흥미가 생기게 되었어요.
기자라는 직업이 분명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무언가를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리면서, 내가 직접 활동가로 살지는 않지만 나의 본분에 맞는 일을 하면서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Q. 학내의 기자로 활동하며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는지.
A. 한겨레 안수찬 기자를 만났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단순히 기자를 직업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사명의식만 가지고 밀어붙이는 분 같지도 않았어요. 균형이 참 잘 잡혀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분이 했던 말이 너무 좋아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기자는 직업이 아닌 삶의 방식이다”라는 말을 하셨는데 정말 공감이 되는 말이었어요. 
또 수습기자 시절에 교직원들이 파업을 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런 집회나, 점거나, 시위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단순히 그냥 수업만 듣고 다녔으면 보지 못했을 법한 장면들을 목격한다는 것을 넘어서 그런 행위들이 무언가를 다 알리려고 하는 것들이잖아요. 좋은 기자는 이런 사람들의 목소리를 언론이 갖고 있는 스피커의 힘으로 멀리 퍼뜨리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Q. 앞선 생각들을 하는데 참여연대 활동이 좋은 영향을 주었나요?
A. 일단 토론하는 분위기가 분명해서 좋았어요. 학교 수업에서는 다들 눈치 보기 바쁘고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질문하거나 혹은 토론하는 학생이 적었는데 활동가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이 있고 또 그걸 말로서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것 같아요.
또 이런 활동을 하기 전에는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부분들이 눈에 보이면서 문제를 대하는 자세도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그저 신문이나 뉴스에서 사건을 접하는 느낌이었는데 활동하시는 걸 보니까 이런 것들을 알리기 위해 이렇게 까지 노력하시는 구나, 이런 것들을 중점적으로 다뤄주길 바라는 구나, 그런 생각이 커졌어요.
사회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치권 욕하고 뭐 그런 행동을 하겠지만 분명 그것만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부채의식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럴 때 참여연대 같은 단체에 후원을 하든가, 아주 조그마한 일이라도 하는 일이 큰 위안이 되요. 꼭 참여연대가 아니더라도 좋겠지요. 최근에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어요. 같이 신문 스터디 하는 친구들이랑 기사를 읽으면서 토론을 하는데 정말 거국적인 이야기가 오갔어요. 재분배가 무엇이고, 사회가 어떻고, 어떤 원리가 있고 등등 거대하고 원론적인 이야기를 한참 하고 스터디를 마쳤어요. 집에 갈 준비를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하는데 그 때 마침 학교에서 총학생회가 장학금 삭감 관련해서 천막농성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걸 보면서 친구들이랑 참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대화를 나눴어요. 여태까지 사회가 어떻고, 시국이 어떻고 대단한 얘기들을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현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각자 ‘스펙쌓기’ 바쁜 사람들이었다는 죄책감이 들더라구요. 그런 죄책감이 들 때 참여연대가 많은 위안을 줬어요. 아 맞다, 난 그래도 참여연대에 후원도 하고 자원활동도 하고 그랬지, 하는 생각이 위로가 되더라구요. 그런 면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이런 일에 관심을 갖고 사는 게 참 좋은 것 같아요.

 

Q. 마지막 질문, 민하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이 있잖아요. 꿈은 아니더라도 흥미가 있는 일은 다들 분명 있겠죠.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노력한다면, 혹은 아주 큰 노력은 꼭 아니더라도 원한다면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것만 하더라도 충분히 보람이 있고 먹고 살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또 정치에 꼭 엄청나게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하면 사회를 살아가는데 크게 무리가 없는 사회였으면 좋겠어요. 너무 유토피아 같나요?(웃음)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그는 종종 민망한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민망하시냐고 물으니 그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자신이 지금 내뱉은 말들을 과연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걱정이 되며 부끄럽다고 표현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부끄러워하는 건 참 좋은 일이에요’ 라고 답했지만 나는 생활 속에서 얼마나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는지 그를 보며 또 다른 부끄러움을 떠올렸다. 집에 가는 길에 들은 바로는 언론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대략 2000명 정도라고 한다. 광화문 근처에 있는 언론사가 대략 20개라고 한다면 100명의 청춘을 이겨야 겨우 합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그가 꼭 기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부끄러움을 아는 그가 좋은 기자가 될 때까지 응원을 아끼지 않고 싶다. 민하님, 신문에서 꼭 봤으면 좋겠습니다.

 

작성 자원활동가 박영민 (활동가를 위해 활동하고 싶은 대학생)

월, 2016/03/07-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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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법조인으로서의 삶]

안현영(이하 ‘안’) : 모르시는 회원분이 없으시겠지만, 시작에 앞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정연순(이하 ‘정’) : 회장 취임을 앞두고 있는 정연순입니다. 반갑습니다.

 

유소영(이하 ‘유’) : 저희와 같은 나이에는 어떤 학생이셨고, 어떤 꿈을 꾸셨는지 궁금해요.

정: 특별히 다를 것 없는 80년대 대학생이었는데요. 고등학교까지는 모범생이었다가 대학에 들어와서야 광주 항쟁이 뭔지 알게 되었고, 박정희가 독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뒤의 대학생활도 그 또래의 경험과 비슷해요. 매일 최루탄 연기 맡으며 교문 들어가고, 학교를 떠올리면 최루탄 냄새와 그 교문도 같이 떠오르는.

 

유 : 사법시험은 어떻게 응시하게 되셨어요?

정 : 87년 민주화가 되고 나서 이듬해 4학년이 되니 할 일이 없었거든요, 정신적 혼란기였죠. 무엇을 해야 할 지도 잘 모르겠고, 학점도 형편이 없어서 시험이라도 봐야 겠다, 이랬어요.

 

안 : 보통은 학점이 안 나왔다고 해서 사시 보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웃음)

정: 그때가 한국사회의 고도성장기라 취직이 잘되었다고 하지만, 여성에게는 꼭 그렇지는 않은, 다른 문제였어요. 막상 졸업을 앞두고 취업하려고 보니 막막했어요. 해 놓은 건 없고… 그래서 일단 시험을 보자 이랬는데, 여성합격자가 많지 않으니까 부모님이 네가 되겠느냐 걱정 많이 하셨죠. 1차라도 합격하면 다행이라고. 일단 대학원에 진학하고 그 2년 안에 합격하지 않으면 두말 않고 취직해서 돈 벌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대학원 등록금도 아르바이트로 벌구요. 다행히 학위과정 끝나기 전에 합격해서 다 마칠 수 있었죠.

 

안 : 석사과정과 시험을 같이 마치시다니, 너무 쉽게 얘기하시네요(일동 웃음)

정 : 아… 그게.. 역시 학점은 안 좋아요… 다만 뭐랄까요, 집중력이 좋다 할까요, 평소에는 느긋해 하다가 시험처럼 통과해야 하는 걸 목표로 설정하고 이걸 해 내야겠다 한번 마음먹고 나면 열심히 하는 편이에요.

 

안 : 어떤 법조인이 되야 겠다 생각하셨나요?

정 : 처음 일했던 곳이 법무법인 덕수였는데, 그 선배님들이 너무 멋져 보여서 그분들을 닮은 변호사가 되겠다 했죠. 그러다 보니 민변 가입도 필수였고.

 

안 : 경력을 보면 미주리 주립대 유학이 있는데요, 어떻게 가시게 된 건가요?

정: ADR(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이라고, 대안적 분쟁해결절차를 공부했어요. 2003년이었는데, 변호사 생활을 10년 정도 하게 되면 많이 지쳐요. 승패로만 이루어진 판결을 받는 과정에 회의가 들게 되죠. 안식년을 갖게 되었는데 그 무렵 부안 방폐장 사건 등 사회적 갈등이 계속 커지고 있었거든요. 사회적 갈등을 중재하고 조정하는 방법이나 절차 이런 것을 공부해보고 싶었죠. 미주리 주립대에 석사과정이 있어서 지원했는데, 입학에 필요한 대학 학점과 영어 점수 미달이라.. 진짜 고생했고, 은사님인 안경환 교수님이 정말 두툼한 추천서를 쓰셔야 했어요. 이 친구가 학점이 낮은 것은 특수한 한국적 상황에 기인했다고, 그 상황을 설명해 주시느라(일동 웃음).. 수업 중에 인성을 훈련하기 위해 명상을 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모두가 눈감고 명상하는데, 영어로 명상을 하니까 그냥 눈뜨고 들어도 졸린데 정말 주체 못하게 졸면서 헤드뱅잉을 했던 기억이..(웃음).. 그런데 막상 한국에 돌아와서 전공을 못살려서 좀 아쉽죠.

 

김주환(이하 ‘김’) :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본부장도 하셨어요.

정 : 80년대까지는 격동의 시대라, 사실 차별문제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어요. 90년대를 넘어서서 한국 사회에서도 그런 이슈들이 폭발하기 시작했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2005년 하반기에 차별시정본부를 설치하게 되는데요, 사실 그때까지 저도 변호사로서 주로 구금, 고문 등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차별시정본부가 설립되고 나서 본부장이 필요하다고 하여, 여성으로서 가졌던 소수자 의식을 가지고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지원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막상 시작해 보니 정말 많은 과제들이 있었더군요. 제가 재직 중에 연령차별금지법, 장애인 차별 금지법, 장애인권리협약 제정등 많은 진전이 있었죠. 비록 통과는 못 되었지만 차별금지법안도 만들어졌고요. 그 과정에서 오히려 저야말로 가장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귀한 기회였어요.

 

안 : 변호사를 하다 보면, 해도 안되는 것 같을 때가 많고 거대한 세력에 좀 무력감을 많이 느끼셨을 것 같아요. 그건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정 : 어떤 사람과 같이 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제가 고영구 전임 회장님 인터뷰를 했는데, ‘민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질문 드렸어요. 그랬더니 ‘고향’이란 생각이 든다고 하시더군요. 마음의 고향이죠. 변호사 생활을 가능하게 한 것이 민변이었기에, 민변을 생각하면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 얼굴이 하나 둘 다 떠오른대요. 저도 그래요. 격려가 되고, 힘이 되는 동료들이 있었으니까, 이건 최소한의 합리적인 요구다 이렇게 생각했는데도 받아들여주지 않는 법원에 검찰에 많이 실망하지만, 우리끼리 모여서 욕도 좀 해가며 뭐 나만 힘든 게 아니라 우리 다 같이 힘든 일을 하고 있는 거니까, 그런 데서 위안을 받는 거죠.

 

[그녀, 그리고 민변]

안 : 민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을 꼽으라면요?

정 : 그런 의미에서 여성위원회를 만든 일이죠. 1999년, 선후배와 함께 여성위원회를 함께 만들었는데요, 이제는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 일생을 살면서 가장 좋은 동료이고 위안이 되는 사람들이 된 거죠.

 

안 : 회장직에 출마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요?

정 : 제가 총장시절부터 중장기적 발전 전략을 수립하고 민변의 장래에 대한 모색에 관심이 많았어요. 이번에도 조직발전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했는데요, 회원 1,000명 시대에서 새롭게 해야 할 일들을 잘 해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재화 변호사님도 잘 하시겠지만 제가 민변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출마하게 되었어요.

 

안 : 선거운동 중 어려웠던 부분은 무엇이었는지요?

정 : 음… 선거운동 기간이 너무 길었어요. 좀 줄여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대통령 선거보다 더 기니까요, 아주 힘들었다기보다는 다른 일을 거의 못하게 되는 게 문제였어요.

 

안 : 당선될 수 있었던 자신만의 강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정 : 흔히들 선거의 핵심 요소는 조직·정책·인물이라고 하는데, 조직이나 정책이나 다 비슷했기에 그 차이는 뭐였지 이러다 보니 결론이 결국 인물인가?(모두 웃음) 농담이구요. 이재화 후보님도 인품이나 능력 다 훌륭하셨지만, 아무래도 사무총장을 지낸 경험이, 민변의 역사나 과제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것이 제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동재(이하 ‘이’): 최초의 경선에서 당선된 회장이라는 게 상징하는 게 있을 것 같아요

정: 추대방식이었다가 선거 방식 도입된 게 10여 년 전인데요, 추대 혹은 단독출마에 따른 찬반투표가 비민주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예전에는 서로가 잘 알았던 작은 규모였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는 추대가 훨씬 더 민주적이었죠. 이제는 민변의 장래를 두고 각자의 포부와 각자의 전망을 가진 후보들이 복수로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규모가 커진 것이고, 이번 경선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질적인 수준에서도 민변의 활동이 굉장히 다양해졌어요. 시국사건 변론, 양심수 변론 등과 같은 사건에 주안점을 두고 출범했지만, 이제는 민생경제, 장애인, 성소수자, 아동, 디지털 정보 인권까지 나오니까. 다양한 활동만큼 민변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우리 회원들이 과연 어디까지를 공유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 수도 있었는데, 이번 경선은 그런 공유 지점들을 회원들 사이에서 다시금 확인하는 중요한 자리였던 것 같아요.

 

이 : 공약으로 공익인권변론센터에 중점을 뒀던 것 같은데, 민변의 앞으로의 방향성과 어떻게 연관된 것인지 궁금해요.

정 : 민변은 전통적으로 전문성을 가진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일하는 위원회가 중심이고, 그 활동에 상당한 자율성이 보장되는 구조에요. 지금도 그렇구요. 회비납부도 참여도 다 같이 하는 구조인데, 양적으로 성장하면서 두 가지 문제점이 나타났죠. 하나는 참여기회를 갖지 못하는 회원들, 특히 활동의 중심인 위원회 활동에서 벗어나다 보니 자연스레 참여기회를 갖지 못하는 회원들이 생겨서 그 참여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고요, 또 하나는, 지금도 위원회가 15개이지만 그 활동으로 커버되지 않는 과제와 영역들, 이런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주고 위원회를 지원하며 기획변론을 강화하는 것, 시민들과 함께하는 변론 등을 활성화해야할 필요가 있는 거죠. 이게 어느 특정 위원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결국 조직발전특별위원회에서 논의를 한 결과, 연구소와 센터 두가지 설립안 중에서 일단 센터를 설치한다, 이런 결론이 나왔던 거죠. 여전히 위원회 활동이 중심이겠으나 앞으로는 센터나 사무처에서 일반 회원들을 상대로 한 구심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 : 센터가 일을 먼저 찾아서 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는데, 민변활동은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 건가요.

정 : 지금까지도 잘 해왔지만 여력이 있다면 조금 더 중장기적인 제도 개혁이나 평범한 국민들의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에 대해서도 더 관심을 가져야 되지 않겠나 생각해요. 흔히들 사회권이라고 하는 민생 경제, 복지, 장애인 인권 등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넘어서서 경제적, 문화적 권리에 대해서 더 열심히 해야 될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을 센터가 앞서서 기획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게 시국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만히 있어도 밀려오는 큰 사건들을 처리해야 하니까, 회원들이 좀 벅차하는 것 같아요.

 

이 : 공약 중에 인권 탄압에 더 공고히 대항하겠다는 공약이 있는데 그 실현방안은 어떤 건지 간단히 말씀해주신다면?

정 : 기본적으로 연대를 더 강화해야겠죠. 시민단체와의 연대는 물론이지만, 시민단체가 아니어도 일반 시민들과 강력하게 연대하는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고요. 변화하는 환경에 맞추어 효과적인 여러 소통수단들을 고민하고 있어요.

 

김 : 앞으로의 민변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 같으신가요?

정 : 회원 수가 늘어남에 따라서, 회원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있어요. 민변이 왜 좋은가 하면, 공동체적 분위기, 그것은 결코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가치라고 생각해 왔는데요, 많은 회원들이 다양한 관심사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민변이 그 몫을 다할 수 있게 되니 좋기도 하지만, 회원들 사이의 거리가 옛날만큼 가깝지 않은 게 좀 걱정이 되어요. 그렇다고 모여서 노는 걸 강화할 수 있는 대중단체는 아니라서요. 다양한 배경 속에서도 하나의 기본적인 원칙에 있어서는 공감하고 그 원칙으로 묶일 수 있는 그런 조직,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던 간에 회원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조직이 되었으면 해요. 제가 천명의 민변, 천개의 전선이라고 표현했는데, 로펌에서 서면을 쓰고 있는 회원이나 거리에서 경찰하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회원이나 다 같이 ‘민변’이라는 하나의 가치 아래서 공통된 자부심과 일체감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조직인 거죠.

 

안 : 임기가 끝나실 때는 어떤 회장으로 기억되시길 원하시나요?

정 : 아직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푸근한 회장, 어려운 때 편하게 전화하고 해도 좋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느껴지는, 존경 이런 게 아니라 회원들이 가깝게 느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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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피할 수 없는 가족 이야기]

유 : 부군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고, 무엇에 반하셨나요?

정 : 제가 처음 들어간 사무실의 선배이자 동료였어요. 서로의 가치관이 비슷한 것이 좋았죠. 저희가 민변의 1호 커플이에요. 민변에는 부부회원이 상당히 많아요. 아마도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게 더욱 끌리는 요인이 되지 않나 싶어요. 열 쌍을 훌쩍 넘긴 걸로 알고 있어요. 올 봄에도 한 커플이 있었고.

 

안 : 부군도 민변 회장이셨는데 어떤 팁 같은 걸 알려주신 건 없나요?

정 : 뭐 특별한 게 있다기보다는.. 저는 국가인권위원회 공무원생활을 2년 반 정도 했어요. 그 기간은 특별회원이었는데도 민변에서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없었어요. 왜냐면 남편이 그때 회장이었거든요. 부부간 대화가 주로 저녁마다 민변 이야기를..(웃음) 남편이 창립멤버이다 보니 민변의 역사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들어서 아무래도 더 잘 알게 되는 게 도움이 되었죠.

 

유 : 아직도 누군가의 배우자나 연인으로 호명되는 경향이 한국사회에서는 많아요. 예전 인터뷰에서도 언급하셨던 것 같은데, 전 민변 회장의 배우자나 첫 여성 회장 같은 수식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 : 내가 나 자신으로 알려지지 않고 누구의 부인이라고 호명되는 게 너무 싫었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이제는 세월이 흘러흘러 이분이 정변호사 남편이십니다, 이렇게도 호명되어요.(웃음) 첫 여성 회장에 대해서는 영광스럽게 생각해요. 내가 잘났다는 것을 드디어 인정받았구나 이런 게 아니라, 여성들에게는 이것은 안 될 수도 있어, 못 할 수도 있어 라고 저 깊은 마음속에서 일정하게 그어 놓는 선이 있거든요. 그걸 넘어섰다는 것, 말로는 여성도 회장할 수 있지 이래 왔지만 제가 그 실제의 예가 되었다는 게 굉장히 기뻐요. 여성 후배들에게 선배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생각에서요. 민변이 진보적 법률가 단체라고들 하잖아요, 그 단체에서 30년 되지 않은 역사에 여성 회장이 나왔다는 것이 매우 보수적인 한국 법조계에서, 역시 민변답다, 이런 느낌을 주는 것도 좋구요.

 

유 : 일이나 생활에 있어서 균형을 맞추며 살아야 하는데, 여성이라면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역할들이 있잖아요, 그 균형을 맞추는 게 안 힘드셨나요.

정 : 당연히 힘들었죠. 사실 30대 초반, 중반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일과 가정을 양립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라, 30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을 정도로요. 두 가지 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때론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어야 했나 하는 후회와 짜증이 없지 않았어요. 개인적으로는 내가 과연 둘다 잘 하고 있나, 그런 심리적 스트레스를 벗어나기 어려웠어요.

 

유 : 예전 인터뷰에, 가정에 남편이 둘 있었다고 표현을 하셨네요.

정 : 나도 나만 도와주는 마누라를 갖고 싶다, 뭐 그런 거죠(일동 웃음) 사실 저는 시부모님과 10년을 같이 살았거든요. 그러기에 가사노동을 심하게 한 것도 아니고 육아나 가사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것보다는 어머니로서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시선과, 본인이 그렇게 교육받은 것에 있는 거예요. 일하는 엄마로서의 죄책감이라는 것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운 거죠. 조금 크니까 큰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엄마 없으면 더 잘 지내더라구요(웃음).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엄마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다고 무조건 좋은 엄마는 아닌 거예요. 근데 이건 사실 말로 되는 게 아니라, 겪어봐야 아는 거죠. 페미니즘이니 뭐니 이성으로는 알고 있어도 내 스스로가 사회화된 게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심리적 부담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웠어요.

 

안 : 정말, 밥도 왜 엄마만 해줘야 되는 것인가요. 아빠도 있는데.

정 : 요즘에는 남성 후배들 보니까 ‘선배님 저 애기 보러 가야 해요, 마누라가 오늘 외출하기 때문에 제가 당번입니다’ 그러더라구요. ‘야, 회의해야 하는데!’(웃음) 그걸 보고 여성인 제가 절대로 뭐라 할 수는 없고 꾹 참고, ‘당연히 들어가야지!’ 이런 대화가 자연스럽게 되는 분위기로 바뀌었더라고요. 지금의 후배들은 육아 분담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생각해서 참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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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인간 정연순]

안 : 사실 저희는 인간 정연순이 많이 궁금해요 여가 시간에는 주로 뭘 하시나요

정: 시간이 나면 여행가거나 책 읽는 것, 둘 중 하나를 해요. 남은 인생의 버킷 리스트의 대부분도 여행이에요. 두 번째로는, 독서인데, 눈이 닿는 곳에는 책을 두고 있죠. 틈나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보는 거에요. 책을 읽을 수만 있다면, 늘 행복할 것 같아요.

 

안: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다면요

정; 1998년에 민변 선배이신 차병직변호사님, 조광희변호사, 저와 남편이 노래방에서 놀다가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부르게 되었어요. 우리가 한 번도 안 가봤는데 거기에 표범이 있는지 어떻게 아냐, 이렇게 되어 넷이서 돈을 모아, 킬리만자로로 떠났어요. 지금은 직항도 있지만 그때는 암스테르담 가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다시 탄자니아로 들어가는, 이틀을 비행기를 타야 하는 여행이었구요. 하루 입산객이 제한되어 있는, 우리 같은 등산객들은 가방만 가볍게 메고 요리사, 가이드, 짐꾼 다 같이 함께 줄줄이 올라가는 흔하지 않는 경험이었죠. 3,000미터가 넘어서 본 산장에서 올려다 본 밤하늘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은하수가 대륙의 하늘에 걸쳐 있더군요. 그런데 4천미터를 넘어서 고산증에 시달려서 다 토하고 정신을 못 차리고, 결국 차병직 변호사님 혼자서 정상에 올라가고 저를 돌보느라 나머지 사람들은 못 올라갔죠. 제 인생에서 가장 멋있고 좋았던 여행이에요. 여러분들도 꼭 킬리만자로를 가보세요.

 

안 : 여행 얘기를 했으니, 책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인가요. 20대 중반, 미래를 설계하는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세요.

정 : 글쎄요. 책 추천만큼 어려운 게 없는 것 같은데…

 

김 : 책을 고르는 기준이나 읽게 되는 기준이 뭔지요?

정 : 1년에 한번이나 두 번, 한꺼번에 책을 사요. 100여 권 정도를. 신간 소개를 유심히 봐서 장바구니에 넣어 두었다가 한꺼번에 구입하죠. 그런데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서 어떤 책을 좋다 해야 할 지 참 어려워요. 10대 20대에는 소설을 많이 읽으면 좋을 것 같고요. 그때의 소설은 내가 이해하지 못한, 접하지 못한 세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정말 좋은 경험이라 생각해요. 동시에 20대들은, 조금 무거운 책을 읽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기본적으로는 역사와 철학일텐데, 제 인생에서 가장 도움이 됐던 건 역시 ‘자본론’을 공부했던 거에요. 법학도에게는 그걸 배울 기회가 별로 없는데, 80년대의 분위기 속에서 선배들에게 야단맞아 가며 공부할 수 있었던 게, 그나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보는 이 정도의 교양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요. 철학도 계보가 길어서 다 공부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렇다면 역시 자본론을 읽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게 원전은 너무 어렵거든요. 대신 그걸 소개하는 책들을 읽으면 되죠. 너무 무겁나?(웃음)

 

안 : 교수님으로부터 숙제를 받은 기분이에요.(웃음)

정 : 또 하나 요즘 중요한 게 있다면, 과학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현재와 미래에 걸쳐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 한편으로는 단순히 기술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인간과 지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철학을 정립하는 게 중요한 문제거든요. 요즘은 좋은 책들이 빨리빨리 번역되어 나와서 읽기 좋아요.

 

안 : 가장 인상깊게 보셨던 영화가 있다면요?

정 : <정복자 펠레>라는 영화가 있어요. 스웨덴이던가,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른 나라의 농장 노동자로 이주하는 이주민의 이야기에요. 어린 소년이 목격하게 되는 삶의 군상이 쭉 펼쳐져요. 그 비참한 환경 속에서도 아이는 조금씩 커서 결국 아버지를 두고 하얗게 눈이 내리는 농장의 길을 걸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 장면이 정말 감동적이에요.

 

안 : 변호사가 아닌 사람 정연순으로서는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신가요?

정 : 멋있는 할머니가 되겠다.(일동 감탄) 변호사로서 위대하거나 대법관이 된다든지 국회의원이 된다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 멋진 할머니 멘토가 좀 있어야겠다는 꿈을 꾸고 있어요. 사실 우리 어머니 세대들은 너무 힘들게도 사셨지만 급격한 사회 변화로 이후 세대와 공유하는 게 적기도 하거든요. ‘헌신성’ 이거 하나 외에는 요. 그러다 보니 젊은 세대를 잘 이해해주고 소통할 줄 아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남성 멘토들만 많구요. 저는 20대나 10대들이 아, 이해받았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무조건 니들이 꿈을 가져라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멋진 ‘할머니’가 되어야지, 잘 늙어야지 이게 소원이에요.

 

안 : 정변호사님이 생각하는 민주사회란 무엇인가요? 궁극적으로 이상적인 사회란 어떤 것일까요?

정 : 글쎄요, 완벽한 이상적인 사회라는 게, 평등과 차별의 문제를 두고 볼 때에도 논리적으로 완전한 평등, 완전한 이상적인 모습이라는 걸 그려 보면 오히려 그게 매트릭스 같은 영화에 나온, 깨어 보니 모두가 통 속에 들어가 있는 사회가 될 수도 있죠. 그런 이상사회는 도래하지 않을 것 같고 도래해도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더 소중한 것은, 저기 멀리 어디에 있는 이상적인 사회가 아니라, 그러한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의 신념과 행동이 소중한 것임을 아는 사회, 그것을 지켜줄 수 있는 사회가 아닌가 싶어요. 차이와 차별은 끝내 없어지지 않고 존재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문제를 현명하게 조율해가면서 조정해 나가는 것, 그럼으로써 현실에서 조금 더 나아가는 것, 미약하나마 조금씩 이루어내는 것에 대해 우리가 신념과 긍지를 가지고 만족할 수 있으면 아, 잘 살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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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월, 2016/06/13-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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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황수영 |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간사

인터뷰 및 정리 이경민 |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작년 7월, 경북 성주 주민들에게 예고 없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한미 정부가 성주에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THAAD)를 배치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나라 돌아가는 일은 나라님에게 맡겨두고 평생 농사지으며 풍년에 웃고 흉년에 울던 마을 주민들. ‘국가 안보’란 4글자 때문에 사드를 배치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은 주민들의 삶을 절망으로 만들었다. 한 발 양보해 대한민국 다수를 위해 사드를 배치한다고 해도 삶의 모든 순간들이 고스란히 녹아져있는 곳에 미군기지가 들어선다는데 주민들에게 충분한 설명과 진정성 있는 설득, 진심어린 위로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했어야 할 일을 못한 국가를 대신한 활동가, 황수영. 사드 배치 예정지 성주 소성리 주민들에게 황수영 활동가는 사드 반대 상황실 아가씨(?)로 불리우고 있다. 성주·김천 주민들, 그리고 성지를 지키기 위해 나선 원불교 교도들과 함께 “평화를 지키는 무기는 없다, 한국 어디에도 사드 배치는 안 된다”고 외치고, 그들의 목소리가 더 많은 시민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확성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소소한 일부터 어려운 일까지 함께하며 대소사를 대변하는 그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 운동이라고 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기소개 부탁한다.
이름은 황수영이라고 한다. 현재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주로 국방, 외교 분야 감시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드 배치나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해외파병, 국방예산, 무기도입 사업 감시, 군사비 축소 요구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예산 관련해서는 군사비를 축소해서 복지비용으로 사용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시민운동 경험은 참여연대가 처음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2008년에 티베트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직후 티베트인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뉴스에서 보았다. 티베트 여행 카페에서 그 모습을 지켜만 볼 수는 없다며 ‘여행자의 윤리’를 고민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고 베이징올림픽 즈음해 티베트와 연대하는 촛불을 들었다. 그러면서 팔레스타인 연대 활동, 아프가니스탄 재파병 반대 활동 등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평화문제 전반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참여연대 입사 전에는 ‘경계를 넘어’라는 작은 평화단체에 있었다. 주로 파병 반대,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활동, 국제분쟁을 알리는 활동을 했었다. 


최근 성주에 사드배치가 이슈가 되고 있다. 사드배치 대응 활동을 하고 있는데, 사드가 무엇이며 무엇이 문제인지 설명해 달라. 
사드는 미국 미사일방어체제(MD)에 속하는 무기다. 날아오는 미사일을 미사일로 맞춰 방어한다는 개념이다.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 등을 견제하기 위해 미사일방어체제를 구축하고 있고, 사드는 그 일부다. MD는 고도별로 여러 무기체계로 구성되는데 사드는 그중 상대적으로 높은 고도(40~150km)에서 미사일을 요격하는 무기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라고 한다. 탐지하는 X-밴드 레이더와 요격하는 미사일이 사드의 핵심 장비다.  


분단이라는 현실에서, 사드가 우리의 안보를 지켜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우선, 방어체계라고 하니 사드가 방어용 무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미사일 방어라는 개념 자체가 ‘절대 방패’를 만들겠다는 미국의 욕망에서 탄생한 것으로, 단순히 ‘방어용’ 체계가 아니다. 군사적으로 완벽한 방어는 완벽한 공격과 동의어로 매우 위협적인 개념이다. 미국은 MD 구축으로 상대방의 미사일 공격은 완벽하게 방어하면서, 미국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선제공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려고 한다. 미국은 핵무기 선제사용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방의 핵미사일 공격을 무력화할 수 있는 MD는 게임의 규칙을 바꿔버릴 수 있다. 
한국에 사드를 배치한다는 것은 미국과 일본이 아시아 지역에 구축하는 MD에 한국이 하위 파트너로 편입된다는 걸 의미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사드 한국 배치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한미일이 MD를 강화할수록 중국이나 러시아도 그것을 무력화할 수 있는 무기체계를 개발하고 구축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사드의 본질적인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질적으로 다른 군비경쟁이 유발한다.
두 번째로, 박근혜 정부는 마치 사드가 있으면 북한의 핵미사일을 다 막을 것처럼 이야기해왔지만 사실 한반도에 별로 효용성이 없다. 남한과 북한은 가깝기 때문에 미사일이 저고도로 날아오고, 북한의 공격이 발생한다면 단거리 미사일이나 장사정포, 방사포를 사용할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이다. 최소 요격고도가 40km인 사드는 쓸모가 없다. 사드가 한반도에 군사적 효용성이 낮다는 것은 그동안 한국 국방부, 미국 국방부의 자료와 여러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로 검증이 되어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아직까지 실전 배치된 적도 없고 기술적으로 검증도 되지 않은 무기다. 
세 번째로는, 결국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막기 위해 무기를 도입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북한의 핵 능력이 커져온 시간은 사실 대화나 협상이 단절됐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한국과 미국 정부의 대북 적대정책은 이미 실패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한반도 핵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결국 대화와 협상이다. 사드 배치 등 군사동맹 강화, 군사력 확장은 답이 아니다.

 

ⓒ 참여연대

 

사드 배치가 비민주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 한미간 합의 내용이나 부지를 성주로 결정한 근거 등이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정해진 것이 없다고 해놓고 3일 뒤에 배치 결정을 발표했다. 사드 배치는 기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범위를 뛰어넘는 무기체계이기 때문에 사실상 새로운 조약을 맺는 행위에 해당하고, 헌법상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국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고, 주민의 동의는커녕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않았다. 롯데에게 부지를 취득하는 과정, 주한미군에 부지를 공여하는 과정 등 절차 전반에 불법과 탈법이 판을 치고 있다. 주민들에게 호언장담했던 환경영향평가도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사회적 합의나 주민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국가 안보, 국가 안보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위한 국가 안보이고 누구를 지키기 위한 국가 안보인지 모르겠다. 주민들이 반대하고, 사드가 우리 안전과 평화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안보를 위한 것이라며 묻지도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고 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일본도 비슷한 일을 경험했는데, 비교하면 어떠한가? 
X-밴드 레이더가 배치된 일본 교가미사키 기지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절망스럽다. 일본 정부와 지자체는 레이더 배치 전 주민 설명회를 약 16차례 열었다. 지자체와 중앙 정부 간의 면담 자료, 공사 일정, 공사 계획, 각종 질의에 대한 답변, 각종 환경 조사 측정값 등을 교탄고시, 교토현 웹사이트에 상세히 공개했다. 예를 들어 레이더 설치를 하면 비행제한구역을 정하게 되는데, 응급상황 시 헬기를 띄워야 할 때 어떻게 레이더를 멈출 수 있는지 등과 같은 주민들의 궁금증을 듣고 합의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현재 사드가 배치되는 성주 주민들은 사드가 성주에 배치된다는 걸 TV를 보고 알았다. 그리고 이런 불투명함에 대해 황교안은 국가안보를 위해서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성주 현장 상황을 공유해 달라. 
작년 7월에 소식을 접한 후 성주 주민들은 현재까지 투쟁을 하고 있다. 처음 군은 성주읍 성산포대를 부지로 정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성주 주민들은 인구밀집지역에 사드를 배치한 선례도 없을뿐더러 아이들이 있는 곳에는 절대 안 된다며 반대했다. 나아가 성주뿐 아니라 한국 어디에도 사드는 필요 없다, 평화를 지키는 무기는 없다고 외쳤다. 
이후 군이 제3부지를 검토하겠다는 자세로 돌아섰고 그곳이 초전면 소성리다. 소성리는 160명 정도,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소성리가 김천 혁신도시 바로 옆이다 보니 김천 주민들과 함께 반대 운동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곳에 원불교 성지가 있다. 원불교 교도들이 평화의 구도길 순례를 하는 곳이다. 원불교는 평화의 종교이며 성지에 전쟁 무기는 안 된다고 하며 결국 현재 성주 주민, 김천 주민, 원불교가 적극 대응하게 되었다. 성주 대책위 상황실장님은 사드 배치에 맞서 성주가 싸워 온 과정을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참 열심히도 해주었고, 300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각자의 자리를 지켜주고 있다. 성주는 이미 그 자체로 진정한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묘사한다. 

 

ⓒ 참여연대


대부분의 주민들이 생업을 거의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농사는 때를 놓치면 망치다 보니 작년에 대부분은 생업을 못 챙기셨다. 사실상 생업을 포기한 채 성주 소성리 상황실에 상주하시는 김천 주민 한분은 일요일에 밭에 갔다가 양파한테 정말 미안해서 울었다고 하시더라. 작년에는 참외밭을 갈아엎은 주민들도 많았다. 경찰과 대치하면서도 추운 날씨에 두고 나온 딸기들이 걱정인 분들이다.


최근에는 사드 유지비를 한국에게 부담하라고 하지 않았나?
트럼프가 사드배치에 대한 비용으로 10억 달러를 요구했다. 우리나라 돈으로 1조 원 이상이다. 원래는 우리가 부지와 전기 등 기반시설을 제공하고 나머지 운영비용, 전개비용은 미군이 부담한다는 것이 한국 국방부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비용 부담에 대한 한미간이면 합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그래서 비용 관련해서 합의내용을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아직까지 현 정부가 사드 배치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새 정부에서의 사드배치 전망은 어떻게 보고 있나?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시절 차기 정부에서 재검토를 하겠다고 했다. 우리가 보낸 질의서에서도 집권하면 최우선적으로 사드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사드 배치는 주민과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답변했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새 정부가 약속을 지켰으면 좋겠다.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였으면 좋겠다. 평화를 어떻게 만들어야할지 근본적으로 고민했으면 좋겠다. 

 

성주에서 사드 반대 상황실 아가씨(?)로 불리울 정도로 열심히 대응하고 있다고 들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소성리에 몇 주간 내려가 있었다. 그 와중에 4월 26일 새벽 사드 장비가 반입되었다. 할머니들이 “단 한 번이라도 우리 의견 물은 적 있느냐”며 절규하는 가운데 경찰에게 다 뜯겨나와 고착당한 채로 레이더, 발사대 등이 들어갔다. 그 후 연휴 기간에 소성리와 함께 하고 사드 장비 추가 반입 등을 막기 위해 전국에서 시민들이 달려와 주셨고 후원 물품이 쏟아졌다. 만감이 교차하던 시간들이었다. 지금은 또 서울에서 대응할 것들이 많아서 올라와 있다. 이 사안은 박근혜 정부의 적폐임이 명백하기 때문에 적폐 청산을 요구할 것이다. 오늘부터 김천 주민들이 청와대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님, 성주‧김천 주민들이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매일 1인 시위를 이어갈 예정이다. 6월 중 한미정상회담이 있을 예정인데 국제 네트워크를 통해서도 미국 측에도 우리의 요구를 전달할 예정이다. 쉽지 않겠지만 성주, 김천 주민들은 사드배치가 철회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운동이,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드 문제에 있어서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리고, 사드가 아니라 평화를 선택하자는 우리의 메시지에 동의할 수 있도록 시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또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당분간 평화운동을 계속할 예정인데, 거창한 계획은 없다. 우선은 내가 지금 있는 이곳에 있을 생각이다.

 

목, 2017/06/0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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