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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재미있게 일하면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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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재미있게 일하면 안 되나요?

익명 (미확인) | 화, 2016/01/26- 11:15

희망제작소는 2016년 창립 10주년을 앞두고 시민 관점의 정책제안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이 시리즈는 ‘좋은 일’의 기준을 찾는 설문조사를 위한 것입니다. 설문결과는 전문가토론을 거쳐 ‘2016 정책제안 보고서’에 반영됩니다.

[기획연재] 좋은 일, 공정한 노동⑧ 재미있게 일하면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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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원래대로 출근할 것입니다.”
최근 세계 최대 당첨금 액수로 유명한 미국의 ‘파워볼’ 복권 당첨자인 한 중년 부부가 NBC 방송에 출연해서 한 말이다. 남편은 창고 관리자로, 아내는 병원 사무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들은 우리 돈으로 약 4,800억 원에 달하는 당첨금을 일시불로 받게 됐는데도 “직장을 그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102살의 나이에도 유치원‧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요리와 바느질을 가르치는 미국의 ‘할머니 선생님’ 이야기도 최근 화제가 됐다. 이 선생님은 “이 일을 가능한 한 오래 하고 싶다”, “가르치는 일이 행복하다”고 했다.
지금도 고된 일상을 주머니 속 복권 한 장에 대한 희망으로 이겨내고 있는, 어떻게든 빨리 일에서 놓여나야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하는 많은 직장인들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이란, 금전적 여유가 충분하면 할 필요 없는 것일까?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그랬던 시절도 있었다. 알랭 드 보통은 책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원전 4세기에 “만족과 보수를 받는 일자리는 구조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한 말을 전한다. 이후 2,000년 이상 이런 생각이 유지되다가 18세기에 이르러 신흥 자본가 계급인 부르지아지에 의해 “보수를 받는 일에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태도가 나타났다. 이는 “결혼 안에도 로맨스가 있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었다면서, 알랭 드 보통은 책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일을 중심에 둔 것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이 형벌이나 속죄 이상의 어떤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처음이다. (중략) 직업 선택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 사귀게 된 사람에게도 어디 출신이냐, 부모가 누구냐 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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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어떤 직업을 원하느냐?’와 같은 뜻으로 이해된다. 우리는 그런 질문을 수없이 들으며 자란다. 어려서는 무작정 야구선수, 요리사, 연예인 등 ‘재미있을 것 같은’ 직업을 댄다. 주변의 시선과 인정, 부모님의 기대 등을 의식하면서 의사, 변호사 등 보다 현실적인 직업을 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역시 ‘개인의 삶은 포기해도 돈은 많이 받는’ 식의 기준을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니다. 기왕이면 사회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기능할 수 있는 일,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일, 그 과정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직업 선택의 요건에 늘 ‘적성’이 들어가는 것도 그런 이유다. 적성이란, 내가 그 일에서 재미를 느낄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좋은 일’의 조건에서 ‘재미’는 어디쯤 위치할까? 고용이 안정되고, 임금과 근무조건이 괜찮고, 인정과 존중이 있는 일이라 해도 ‘재미’가 없으면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일까? 여기서의 ‘재미’란, 어떤 의미일까?

‘구성원 즐겁게 해주기’ 전담팀 둔 기업

요즘 부러움을 사는 근무환경으로 ‘꿈의 직장’이라 통하는 기업이 몇 군데 있다. 그 중에서 ‘재미있는 직장’으로 자주 거론되는 기업 ‘㈜우아한형제들’을 찾아가봤다.
‘배달의민족’ 어플리케이션 개발‧운영업체로 더 유명한 ‘우아한형제들’은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바로 앞, 놀이동산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건물에 위치해 있다. 최근 몇 년간 정규직만 300명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하고, 신선식품을 배달하는 ‘배민프레시’, 맛집 메뉴를 배달하는 ‘배민라이더스’등 조직이 더 생기면서 지금은 본사의 옆 건물 일부도 사용하고 있었다.

이용화 피플팀장과 성호경 홍보팀장을 만나기 위해 지난 1월 13일 오전 찾아갔을 때, 이들은 옆 건물 지하의 식당으로 안내했다. 직원들에게 월요일 점심, 화~금요일 아침과 점심 식사를 제공하는 식당인데, 요리를 책임지는 쉐프 2명도 피플팀 소속의 직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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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팀은 인사팀의 다른 이름인가 했는데, 전혀 다른 일을 하는 부서였다. 쉐프를 제외하면 총 5명으로 구성된 이 팀은 ‘구성원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주된 업무다.
“저희는 직원이 아니라 구성원이라고 불러요. ‘관리’가 아니라 ‘관심’이라는 말을 쓰고요. 구성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기업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저희 팀의 역할입니다.”

대표적인 업무가 구성원의 생일을 챙기는 것이다. 300명의 생일을 일일이 챙기는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닐 텐데, 그 수준도 회의 때 이름 불러서 문화상품권 주는 그런 정도가 아니다.
이 팀장이 “제가 최근에 받았던 생일 케이크”라면서 보여준 휴대전화 속 사진을 보니, 케이크 위에 ‘용’과 ‘꽃’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팀장의 이름(용화)에 맞게 구성원들이 데코레이션을 해준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생일 맞은 사람의 특성에 맞게 케이크를 준비하고, 개성 있는 사진을 담은 포스터를 만들어 복도에 붙여 놓고 여러 사람에게 축하 메시지를 받아서 전달한다.

생일날에는 오후 4시에 퇴근하게 한다. 이것을 ‘지만가’라고 하는데 ‘지(자기)만 집에 가도 돼요’라는 뜻이란다. ‘지만가’는 본인뿐 아니라 배우자, 자녀, 양가 부모님 생일과 결혼기념일에도 적용된다. 각 부서에서 이를 제대로 지키도록 하는 것도 피플팀의 일이다. 부서장에게 일주일 전부터 날짜를 알리고, 적극적으로 업무를 조정해서 해당 일에 구성원을 일찍 퇴근시키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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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9월에는 전 직원 야유회라고 할 수 있는 ‘플레이샵’ 행사가 크게 열린다. 2015년 9월에는 회사 전체를 피터팬 동화 속 네버랜드를 콘셉트로 꾸몄다. 이런 일은 피플팀원들끼리 할 수 없기 때문에 ‘자발적 노예’라는 이름의 봉사자를 모집한다. 자기 업무를 하면서 시간을 더 내서 참여하라는 것인데도 경쟁률이 상당하다. 지원 동기와 특기를 적어내도록 해서 이를 바탕으로 선발해야 할 정도다.

“내 아이디어가 채택될 때 제일 즐겁다”

이렇게 별도의 팀까지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구성원을 즐겁게 하는’ 이유에 대해, 이 팀장은 “경쟁이 치열한 업계다보니 발 빠르게 대응해야 될 상황도 자주 생기고, 야근도 자주 하게 되는데 구성원들끼리 친하고 즐겁지 않으면 어떻게 일하겠느냐”고 했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기업은 성과에 대한 압박, 내부 경쟁, ‘밀리면 끝장’이라는 공포 분위기를 활용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 팀장은 “재치 있고 기발한 서비스, 광고, 이벤트 등을 계속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사업인데, 그런 문화가 내부에서부터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사람들을 설득시키겠느냐는 생각도 깔려 있다”고 부연 설명했다. 이 말은 즉, 사람들이 즐겁게 일하는 것이 이 기업의 경쟁력이라는 뜻이다.

“소통이 중요하다는 건 어느 기업이나 알아요. 그렇지만 ‘소통하라’고 액자에 써서 온 사무실에 붙여 놓는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탑다운’(top-down) 방식은 한계가 있어요. 뭔가를 진짜로 바꾸려면 아래로부터 문화를 만들어내고 유지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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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업에서 중시하는 ‘재미’는 비단 이벤트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일 자체가 재미있어야 한다는 데 더 강조점이 있다. 사내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송파구에서 일 잘하는 방법 11가지’라는 포스터를 보면 “개발자가 개발만 잘하고, 디자이너가 디자인만 잘하면 회사는 망한다”, “잡담을 많이 나누는 것이 경쟁력이다”, “나는 일의 마지막이 아닌 중간에 있다” 등 문구들이 눈에 띈다. 자기 업무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업무 전체를 파악하고, 능동적으로 일하라는 메시지다.

성호경 홍보팀장은 “구성원 개개인이 일하면서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런 생각은 대학생 인턴십 프로그램의 운영 방식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대학생 인턴은 ‘열정 노동’ 논란이 일면서 없어지거나 축소되는 추세지만, 우아한형제들은 지난 여름까지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IT 개발자 지망생을 위한 ‘배민 개발학당’, 마케팅과 디자인 분야 지망자를 위한 ‘우아한 캠프’ 등이 진행됐는데, 처음부터 채용을 조건으로 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참여자들의 반응은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성 팀장은 커피를 따라 줬던 종이컵을 들어 보이며, “여기 이 ‘나를 따르라’는 문구도 대학생 인턴 팀에서 디자인한 것”이라며 “현재 비즈니스에 사용되는 아이템”이라고 했다. 또 다른 팀은 대학들을 다니면서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계단을 활용한 옥외 광고 아이디어를 내서 실제로 실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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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을 마칠 때 들어보면 ‘제일 즐거웠던 순간은 내가 낸 아이디어가 채택됐을 때’라고들 합니다. 조사하느라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고, 야근도 하면서 고생했지만 그만큼 재미있었다는 거지요. 그런 면에서 이 프로그램은 기업에 도움이 됐을 뿐만 아니라 참가자들에게도 도움이 됐다고 봅니다.”

독특한 기업 문화가 알려지면서 견학을 오는 기업들도 많아졌다. 성 팀장은 “제가 알기로는 젊은 기업, 특히 IT업계 기업들 중에는 기업문화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곳들이 꽤 많다”면서 “세대가 바뀌어감에 따라서 새로운 문화가 많이 생겨날 것”이라고 했다. 다만, 초점이 ‘구성원에 대한 관심’이어야 하고, 아래서부터 문화가 생겨나야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공포 줄여야 재미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 만난 사람은 전자책 출판 협동조합 롤링다이스의 제현주 대표다. 최근 ‘내리막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누구와 어떻게 무엇을 위해 일할 것인가’라는 부제를 가진 책인데 ‘재미’의 측면에 대해 조금 색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대학 졸업 후 글로벌 경영컨설팅 회사, 투자은행, 사모펀드 등을 거치며 누구 못지않게 치열한 시간을 보냈던 제 대표는 직장을 그만뒀을 때 “왜 그만뒀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 때마다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해 “재미없어서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독서 모임을 함께 하던 사람들과 협동조합을 만들었을 때도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라고 답했다.
“그래서 돈을 벌겠느냐”, “무책임한 소리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는데, 제 대표는 “재미를 ‘쾌락’의 개념으로 생각해서 나오는 반응들이 아닐까 하는데, 제가 생각하는 재미는 이렇다”면서 네 가지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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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활동 자체가 주는 재미다. 몇 시간이 잠깐처럼 느껴질 만큼 몰입해서 일할 때 느끼는 그런 재미를 말한다. 두 번째는 원하는 판을 짜서 일하는 재미다. 이것은 자기결정권의 문제라고 제 대표는 말한다.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을 책임질 마음으로 일하는 것”에서 오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재미다. 이것은 두 번째 재미와 어느 정도 연결된다. “내가 원하는 판에서 일해 결과를 만들어내는 재미는 때로 지루하고 괴로운 활동을 견뎌내고 남을 정도로 크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재미다. 혼자 하거나 잘 맞지 않는 사람과 할 때는 재미없는 일도 맘이 맞는 사람과 합을 맞추면 재미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설명을 들으니 비로소 일의 ‘재미’라는 게 특정 분야, 특정 직업, 특수한 환경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보다는 ‘어떻게’, ‘누구와 일하느냐’, 얼마만큼의 자율성과 결정권을 가지고 일하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다.

2012년 설립된 롤링다이스는 조합원 12명이 공동으로 책임지는 구조다. 처음에는 상근 직원이 한 명도 없었다. 각기 직업을 가진 12명이 일주일에 서너 시간씩 할애하면 한 명의 풀타임 직원이 하는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지금은 상근자 2명, 파트타임 직원 2명을 두고 있다.

제 대표는 “사실, 일은 언제든지 그만두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때 제일 재미있다”고 했다. 롤링다이스는 망하더라도 12명이 12분의 1 만큼 책임지면 된다는 마음으로 시작했기에 큰 부담이 없었고, 그래서 재미있었던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무리 재미있던 일도 꼭 해야 하는 일이 될 때 싫어지게 마련이죠. 그래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 말라는 말도 있고요. 우리 사회는 직장생활이든 사업이든 자기 인생을 온전히 걸어야 할 때가 많아요. 그럴 때 오는 부담은 ‘공포’에 가깝죠. 공포를 느끼면서 동시에 재미를 느끼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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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대표는 마치 시시포스 신화에 나오는 돌 굴리기처럼 고된 노동을 그만둘 수 없게 하는 이유 중 첫째가 ‘생계유지의 공포’라면서 이 공포를 줄일 수 있어야 ‘일의 재미’를 되찾을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자칫 돌을 놓치더라도 잠깐 손을 뻗어서 잡아줄 수 있는 존재가 옆에 있다면 공포는 줄어들 거예요. 그 존재는 동료일 수도 있고, 맞벌이하는 배우자일 수도 있고, 공동체, 혹은 사회복지일 수도 있어요. 그렇게 ‘굶어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기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기겠죠. 그럴 때 일에서 재미를 느낄 수도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 구조와 의식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 못지않게 일하는 사람 개개인이 자신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오늘 당장 누릴 즐거움과 행복감이 있어야 사회 변화를 이끌 동력도 생기기 때문이다.

일이 즐거운 시대는 언제 올까? 혹시 이제 곧?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강원도 대관령에 집에 있고 서울을 오가며 일한다는 제 대표는 “조금씩 할 때는 뿌듯하고 재미있지만 혼자서 해야 하고, 꼭 해야 할 때 고되고 공포스러워지는 대표적인 일이 눈 치우기”라면서 웃었다.

책 ‘가슴 뛰는 회사’를 펴낸 존 애이브램스는 자신이 공동 창립한 미국의 건축회사 ‘사우스 마운틴’에 대해 “이윤보다 우선시해야 할 다양한 가치들을 지향한다”고 했다. 그 중에는 ‘직원의 마음이 기쁜지, 생계는 잘 유지되는지, 서로 잘 배려하는지’ 등이 포함된다. 그밖에도 고객, 지역, 환경 등의 가치를 고려하는데, 그 이유는 ‘성공하는 회사가 되는 데 경쟁보다 협동이 유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004년 독일의 단체 ‘노동의 새로운 질을 위한 운동’은 “좋은 노동이란 무엇인가?”라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7,444명의 근로자에게 일의 어떤 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노동은 재미있어야 한다”(85%), “노동은 의미 있게 느껴져야 한다”(73%)는 대답이 고정적 소득(92%), 안정성(88%) 못지않게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책 ‘노동에 대한 새로운 철학’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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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 연재 시리즈를 통해서 고용안정, 노동시간, 임금, 노동조합, 일과 삶의 균형, 존중, 그리고 재미와 발전까지 ‘좋은 일’의 측면을 나눠서 생각해 봤다. 매 회차마다 수만 명이 글을 읽었고, 함께 진행한 ‘좋은 일’의 기준을 찾는 설문조사에는 1만 2,000여명이 참여했다. 그만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불만과 더 나은 일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또 아직 집계 중이지만, 기존 산업화 시대의 좋은 직장과는 다른 차원의 ‘좋은 일’에 대한 기대들이 상당수 눈에 띈다.

그러나 “직장이 놀이터냐”, “이것저것 따지는 사람을 누가 쓰겠느냐”, “놀 거 다 놀고 월급 받으려 하느냐” 등의 비판도 많았다. 이 글 밑에도 틀림없이 그런 댓글이 달릴 것이다. 고용주인 기업가들만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매일 하는 일을 ‘의미 없는 밥벌이’라고 한탄하면서도, 우리는 왜 ‘원래 그런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을까?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꿈’을 묻고 ‘적성을 찾으라’고 하면서 어른이 돼서는 왜 다 잊어버리는 걸까?

어쩌면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래로 아직 충분히 시간이 흐르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연애결혼’이란 건 상상도 못 했던 시절은 지나갔는데, ‘일은 즐거울 수 있다’, ‘좋은 일을 요구하자’고 생각하는 시대는 언제쯤에나 올까? 혹시, 지금 거의 도래했는데 깨닫지 못 하는 것은 아닐까?

이로써 8회에 걸친 ‘좋은 일’ 탐방은 끝났다. 1월 31일로 설문조사는 마감되며, 결과는 2월 중에 발표된다. 아울러, 자신의 일 이야기를 들려줄 세대별, 직군별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심층 인터뷰, 전문가들에게 구체적인 정책 방향과 대안을 묻는 토론회도 진행된다. 그 이후로도, ‘좋은 일’의 상(像)을 찾는 노력은 계속될 예정이다.

글 황세원(연구조정실 선임연구원 / [email protected])
사진 이우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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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진로탐색 지원사업인 ‘내-일상상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 지원으로 진행되는 사업이며, 희망제작소·남원춘향골교육공동체·지리산마을교육공동체·진주교육공동체 ‘결’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청소년이 자신의 재능과 지역의 필요성을 연결해 창의적인 일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프로젝트로 상상학교, 내일생각워크숍, 내일찾기프로젝의 3개 모듈을 바탕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내-일상상프로젝트’를 운영 중인 희망제작소 연구원들이 해당 사업을 지원하는 아름다운재단을 만났습니다.

우리 동네 미용실에서 진로 탐색을 한다고?

수십년 전에는 청소년들이 진로를 탐색할 방법이 별로 없었다. 원하는 직업을 체험할 기회는 아예 없었고, 그런 직업의 어른들을 만나볼 일도 거의 없었다. 그나마 간접적으로 정보를 얻는 통로도 책, TV 정도였다. 드라마에 이색 전문직종이 한번 등장하면 청소년들의 관심이 확 쏠리곤 했다.

그에 비해서는 이제 세월이 많이 좋아졌다. 기회도 많아졌고 방식도 새로워졌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어른들을 만날 수 있다. 기업 및 단체의 인턴으로 일을 해보거나 친구들과 함께 관련 프로젝트를 하기도 한다. 어른들이 보기엔 ‘정말 부럽다. 나도 저런 기회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러한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는가? 사는 지역에 따라서 청소년들의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것 아닐까? 그래서 누군가는 또래 청소년들을 바라보면서 여전히 ‘정말 부럽다’고 느끼고, 오히려 더 큰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기회를 더 평등하게 넓히기 위해, 아름다운재단은 희망제작소와 함께 지난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간 청소년 진로탐색 지원사업 ‘내-일상상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구축한 모델을 확산하기 위해 2019년부터 다시 3년의 여정을 시작했다.


이시원 연구원, 유진 연구원, 오지은 센터장(왼쪽부터)

진로 탐색의 길이 넓어졌다지만, 과연 기회는 평등할까

‘내-일상상 프로젝트’의 청소년 프로그램들은 △강연과 사람책 등으로 진로를 새롭게 상상해보는 ‘상상학교’ △다양한 워크숍을 통해 욕구와 재능을 발견하는 ‘내일생각워크숍’ △지역에 필요한 일을 직접 설계하고 실행하는 ‘내일찾기프로젝트’의 3가지 모듈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지역’이다. 즉, 수도권을 벗어나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사업을 펼치는 것이다. 이미 1차 사업에서도 전북의 도시와 농촌 지역에서 모델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새로운 지역에서 모델을 실제로 적용하고 확산하고자 남원과 진주에서 사업을 펼친다.


이시원 희망제작소 시민주권센터 연구원

이시원 희망제작소 연구원은 “지역 청소년들은 활동 반경 자체가 좁다”고 말했다. 한번 시내에 가는 데만 차를 타고 30~40분이 걸리는 상황에서는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수십년 전과 비교해볼 때 지역 청소년들의 삶이 달라진 점은 인터넷과 유튜브 등으로 진로 관련 정보를 찾아본다는 정도이다.

양은 물론 질적으로도 차이가 있다. 청소년들이 자주 이용하는 진로체험센터 프로그램은 1회성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고 주제도 다소 협소하다. 그러나 이를 담당자의 문제로 볼 수는 없다. 그보다는 지역의 문제이다. 더 나은 프로그램을 위해서는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참여시키고 다양한 체험 현장을 제공해야 하지만, 워낙 지역 내 자원이 없다 보니 발생하는 문제인 것이다.

자원이 부족한 지역사회에서는 민간단체들의 상황 역시 열악하다. 인력은 적고 후원금도 적다. 기존 사업만으로도 벅찬데,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고 새로운 청소년들을 발굴하기에는 너무나도 힘에 부친다. 지자체나 교육청의 위탁을 받아서 새로 사업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이는 기관장 임기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조마조마한 예산이다.

결국 지역 청소년의 진로 탐색 기회가 부족한 것은 지역사회의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이는 고질적인 ‘지역 양극화’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는 악순환의 형태를 띈다.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한데도 지역 청소년들은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나마 진로를 열심히 탐색한 청소년들은 대체로 지역을 떠나 수도권에 자리를 잡는다. 수도권과 지역의 간극은 더 커진다.

그래서 ‘내-일상상 프로젝트’는 진로 탐색 활동도 지역 안에서 진행한다. 되도록 지역사회 안에서 롤모델을 찾고 지역사회 안에서 체험을 하고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지역의 청소년과 지역사회가 함께 성장해야만 지금의 악순환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모듈 조립해 프로그램 기획, 자생력 기르는 지역사회

지난 3년간 여러 노력과 시행착오 끝에 모델을 만들었다면, 앞으로의 3년은 이런 모델을 실제로 적용하고 확산하는 게 중요한 시기다. 이를 위해서 지역의 청소년은 물론 지역사회 전체의 주도성을 높여야 한다. 애초에 모듈 형식으로 프로그램 모델을 만든 것 역시 지역마다 저마다의 특성에 따라 맞춤형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한 의도였다.


오지은 희망제작소 시민주권센터 센터장

오지은 희망제작소 시민주권센터장은 “언제까지나 저희들이 지역에 있을 수는 없다. 저희가 빠지고 나서도 사업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스로 지역 청소년들의 수요를 발굴하고 자원을 이어줄 수 있도록, 지역사회의 자생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욱 더 지역사회와 밀착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청소년 관련 단체만이 아니라 지역의 여러 시설도 자원으로 발굴해 연결한다. 꼭 공공 시설이 아니라도 좋다. 웨딩 플래너를 꿈꾸는 청소년에게는 결혼식 준비에 필요한 지역의 미용실도 참 좋은 자원이 된다.

모듈을 어떻게 조립해서 프로그램을 설계할 지 결정하는 것도 온전히 단체의 몫이다. 희망제작소는 한발 뒤로 물러나 단체들을 지원하고, 프로그램 진행 과정을 관찰해 연구하며, 지역 활동가를 키우고 지역간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1차년도 사업 때와 대상 지역과 청소년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단체들 간의 역할 분담도 크게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2차 사업은 또다시 새로운 도전이다.

올해부터 각 지역의 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지역내 자원을 조사하고 있다. 지역 청소년과 단체들이 더 많은 자원을 보다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와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와 함께 지역의 담당 활동가들을 위한 강연과 워크숍은 물론 지난 3년간 함께했던 1기 기관들과의 네트워킹도 강화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지역 활동가들이 새로운 기법과 이슈를 만나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서 역량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 모든 사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지역의 청소년들이 좋은 시민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내-일상상프로젝트’의 프로그램은 단순히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삶을 살고 싶은 걸까‘, ‘원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이를 통해 스스로 미래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결국 주체적 시민으로 성장하는 과정인 셈이다.

이는 동시에 지역까지 성장시키는 변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청소년들과 다른 지역 구성원들이 함께 배우고 교류하면서 공동체를 만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청소년들이 지역에 남아 좋은 어른이 되고 또다른 청소년들의 진로 탐색을 돕는다면, 새로운 지역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오랜 세월 굳어진 지역 양극화의 악순환 고리도 조금은 약해질 것이다.

청소년기부터 시작하는 ‘지역 생태계’의 떡잎

2차 사업이 끝나는 2021년, 과연 지역은 어떻게 변화해 있을까? ‘내-일상상프로젝트’를 맡은 사업 담당자들의 ‘내일 상상’은 작은 변화였다.

오지은 센터장은 “진로를 탐색할 때 누구나 지역의 자원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DB를 강조했다. 유진 연구원은 “청소년들이 자신의 욕구를 발견하고 이를 더 많이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시원 연구원은 “나도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작은 모임을 하면서 느낀 책임감이 굉장히 컸다. 청소년들이 이런 자극을 받고 컸으면 한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소박한 상상들이다. 아마도 이 문제를 오래 고민해온 실무자들이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짧은 기간 내에 몇몇 단체들의 협업만으로는 거대한 악순환의 구조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여전히 대다수 지역 청소년들이 ‘탈지역, 인서울’을 꿈꾸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이렇게 사람을 바꾸고 지역을 바꾸는 작은 변화가 결국 세상을 바꾸는 더 큰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유진 희망제작소 시민주권센터 연구원

유진 연구원은 “자신의 꿈을 위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협력했던 경험이 쌓인다면, 언젠가 청소년들이 지역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오지은 센터장은 “함께 걸어가는 친구, 어른, 동네 주민이 지역에 많다는 것을 청소년들이 느꼈으면 좋겠다”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지역 안에서 청소년과 여러 구성원들이 함께 나아가는(진進) 길(로路)에서 아름다운재단도 희망제작소도 좋은 길동무가 될 것이다. 그래서 결국 길이 없던 곳에 길을 만들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 함께 걸으면 그것이 곧 길이 될 테니까.

– 해당 글과 사진은 아름다운재단에서 작성 및 제공했습니다.

화, 2019/10/01-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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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이 없는 삶을 바라지만, 재난을 완전히 피할 수 없습니다. 태풍, 가뭄, 홍수, 지진 등 자연 재난부터 세월호 참사처럼 사회 재난까지 우리 곁에서 재난은 늘 일어나고 있습니다. 더구나 재난의 피해는 광범위합니다. 피해 당사자의 물리적 피해 혹은 심리적·정서적 트라우마뿐 아니라 재난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도 피해를 겪으면서 공동체, 사회, 국가의 역할과 책임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 희망제작소는 지난 11월 26일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대회의실에서 2차 전문가포럼 ‘안산공동체, 사회적참사 지역 특성화 모델이 되어 확산을 말하다’를 개최했다.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참석 인원 제한 및 거리두기 좌석제로 진행됐다.

안산시에서는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제정된 ‘4·16 세월호참사 피해지원 특별법’에 따라 공동체 회복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진을 겪은 포항시에서도 피해 구제법 및 시행령 제정을 통해 공동체 회복의 필요성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2019년에 이어 올해에도 안산시 공동체 회복 프로그램 연구를 맡고 있는 희망제작소는 지난 11월 26일 전문가포럼을 열어 공동체 회복 모델 연구 및 특성화 모델 확산에 관한 의견을 나눴습니다.

4·16생명안전공원, 희생자만이 아닌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먼저 세월호 참사 이후 안산시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과정으로 4·16 생명안전공원(가칭)을 꼽았습니다.

당초 4·16생명안전공원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지만, 현재는 모든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시민의 참여를 이끄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억식, 추모문화제뿐 아니라 시민정원 만들기, 음악회 등 시민과 시간과 공간을 나누는 다양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 임병광 416재단 나눔사업2팀장

임병광 416재단 나눔사업2팀장은 “(참사 이후) 초기에는 슬픔과 애도의 기간을 가졌다면 이후 생명과 안전에 관한 공통의 가치를 찾아가고 있다”라며 “생명이 존중받고 안전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기억하고, 성찰하는 장소가 필요하기에 4·16 생명안전공원의 건립이 필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임 팀장은 “4·16 생명안전공원은 희생자, 당사자의 문제뿐 아니라 모두의 책임을 환기한다”라며 공동체적 의미를 짚었습니다. 앞으로 4·16 생명안전공원은 세월호 참사 7주기인 내년 국제설계공모를 거친 뒤 착공에 돌입해 2024년 완공될 예정입니다.

연민이 아닌 공감 위주 주민교육으로 시민을 만나야

앞서 공동체 회복을 ‘공간’ 위주로 살폈다면, ‘관계’ 중심의 사례도 제안됐습니다. 재난을 겪은 당사자나 간접적으로 재난을 경험한 시민 혹은 주민 간의 접점 마련이 공동체를 회복에서 빼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지선 안산온마음센터 공동체성장팀 팀장은 “2014년 광화문 광장에서 도로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과 심리적으로 멀게 느껴져 충격적이었다”라며 “당시 시민 대상 캠페인뿐 아니라 주민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라고 말했습니다.


▲ 정지선 안산온마음센터 공동체성장팀 팀장

무엇보다 안산시 주민들이 참여하는 교육을 기획할 때 ‘연민이 아닌 공감’을 키워드로 삼았다고 합니다.

교육 초기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가 집중된 지역인 ‘고와선’(고잔동, 와동, 선부동) 주민을 대상으로 부담 없는 강연 콘텐츠를 제공하며 사람들이 한곳에 모이는 데 방점을 맞췄습니다. 교육 중기인 2018년부터는 ‘고와선’ 지역 외에 안산시 전역으로 넓혔고, 더불어 주민독서토론 동아리 모임 등 작은 모임을 지원하며 ‘느슨한 연결’을 이어갔습니다.

정 팀장은 주민 교육을 기획할 때 일반 시민의 참여 허들을 낮추는 것뿐 아니라 전면적으로 4·16 세월호 참사를 드러내기보다 강연 혹은 교육 내에 간접적으로 녹여내야 자칫 남의 일처럼 느껴질 수 있는 ‘공동체 회복 담론’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새로운 시민과의 접점이 넓어져야 자발적인 주민 모임으로 엮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이근미 안산마을만들기지원센터 사무국장

안산시에서는 내년부터 25개구 주민자치회 전환을 앞두고, 다양한 마을 자치 활동을 벌이는 등 ‘주민 공론장’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주민이 마을 의제를 발굴하고, 마을 사업 및 계획을 수립하는 일을 지원하는 이근미 안산마을만들기지원센터 사무국장은 ‘공동체 회복 의제와 담론’의 중요성을 언급했습니다.

이 사무국장은 “안산시 17개동에서 주민들이 마을비전을 만들기 위해 여러 의제를 발굴했는데 막상 세월호 참사 혹은 공동체 회복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라며 “이러한 상황에서 마을만들기지원센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 공동체 회복 활동을 하는 주최가 많은데 우리 관계 내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낼지 근본적으로 짚어봐야 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언급되지 않는 마을공동체, 성찰하고, 연결지점 찾아야

이어 희망제작소가 연구를 맡은 ‘세월호 참사 피해지역 재난극복 공동체 회복 모델 구축 연구’와 관련 종합토론을 벌였습니다.

송창식 안산환경재단 정책실장은 이번 연구에서 사회적 참사와 공동체 회복의 정의를 내리고, 공동체 회복의 요건으로 지역주민을 주체로 내세운 점을 주목했습니다. 기존에는 재난 이후 대응이 행정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참사를 겪은 당사자, 주민, 넓게는 시민까지 주체를 넓힌 데 이어 주체별 역할 및 주체 간 상호 교류 작용을 통한 신뢰 맺기를 공동체 회복의 요소로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 종합토론 현장

향후 후속 연구의 과제도 제시됐습니다. 이번 연구에서는 참사 지역 공동체 회복 모델의 일환으로 총 5단계에 걸쳐 시기를 구분했는데, 다른 재난 지역에서도 똑같은 기준으로 적용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또 16개 평가지표의 경우, 공동체 회복 전 과정을 일괄적으로 평가하기보다 시기별 과정에서 발생하는 단체별, 주체별 세부적 지표를 개발해 통합적으로 성과평가를 산출하는 방향도 제안됐습니다.

이밖에 홍석현 안산시 자치행정과 주무관은 이번 연구를 통해 마련된 공동체 회복 가이드라인을 따라 공동체 회복 추진단계별 성과평가 지표가 적용될 거라고 내다봤고, 임남희 고잔문화센터 쉼과힘 사무국장은 특정한 사람이 재난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참여해야 한다며, 간접적으로 획득된 감수성으로 마을과 사람으로 연결돼 공동체의 실행력을 높이는 게 의미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세월호 참사 피해지역 재난극복 공동체 회복 모델구축 연구는?

안산시에서는 4‧16 세월호 참사 이후 2017년부터 2019년까지 공동체 회복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희망제작소는 지난 2019년 해당 프로그램의 성과를 평가하는 1차년도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이어 지난 5월부터 11월까지 약 6개월 간 공동체 회복 모델 구축 및 평가지표 개발을 위한 2차년도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2차년도 연구에서는 2019년에 진행한 공동체 회복 프로그램 성과 분석 및 평가 결과를 토대로 사회적 참사 발생지역의 △특성화 모델 정립 △가이드라인 마련 △평가지표 도출을 수행함으로써 안산뿐 아니라 다른 재난 지역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특성화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 피해 당사자, 안산시민, 시민사회, 행정기관, 연구자 등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 및 전문가 자문 등을 진행했으며, 해당 결과에 따라 재난 발생 단계를 총 5단계(최초 발생기, 참사 영향 확산기, 2차 이슈 발생 및 갈등 점화기, 갈등 고착기, 전환 모색기)로 나눴고, 이를 통해 공동체 회복 추진단계도 총 5단계(피해 복구 집중기, 역할 모색기, 소통 확대기, 사회적 합의 추진기, 회복 역량 강화기)로 정리했습니다. 특히 공동체 회복 추진단계에 따라 피해 당사자, 피해지역주민, 시민, 시민사회단체, 행정 등 5개 주체별 역할을 제시했습니다.

더불어 공동체 회복 프로그램 및 사업의 평가지표(안)를 도출했습니다. 그간 대부분의 성과평가가 예산을 지원하는 ‘국가’나 사업을 실행하는 ‘지자체’ 입장을 주로 고려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번 연구에서는 공동체 회복을 위해 다양한 역할을 하는 유가족, 시민, 유관단체 등 다양한 ‘지역 주체’의 의견을 충분히 담아냈습니다. 이를 토대로 ‘지역 주체’의 관점을 반영한 성과평가 지표를 제안했습니다.

– 글: 방연주 미디어센터 연구원 [email protected]
– 사진: 미디어센터

수, 2020/12/0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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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연대기금 모금의 건' 발송공문(노총 미비사업단 제521호) 및 첨부자료를 게재하오니 업무에 참고하...
금, 2017/10/27-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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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코로나19 이후를 이야기하다’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전국 최초로 재난기본소득 지원을 결정하고 실행하고 있는 김승수 전주시장의 인터뷰를 전합니다. 전주시가 지원하는 재난기본소득은 중위소득 80% 이하인 5만 명에게 52만 7천 원을 체크카드에 담아 지급하며 전주시 내에서 3개월 동안 쓸 수 있습니다.
김승수 시장은 희망제작소가 사무국을 맡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천하며 지역민과 함께 지속가능한 지역발전을 이루어나가는 지방정부 단체장 모임인 목민관클럽의 공동대표를 맡아 지방정부의 자발적 협력과 연구에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전주형 재난기본소득과 코로나 이후 사회를 준비하는 지방정부의 고민을 듣기 위해 김제선 희망제작소 소장이 직접 김승수 시장을 만났습니다.

현재 코로나19 관련 전주시의 상황은 어떤가요.

대한민국 전체가 재난 현장이고 시민들의 삶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전주 역시 모든 분야에서 초유의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유동인구가 많은 도시인만큼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클 것 같습니다.

모든 도시는 여러 군락으로 경제생태계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현재는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는 거지요. 예를 들면 전주경제의 중심인 관광생태계만 보더라도 여행사 매출이 ‘0’입니다. 여행사 매출이 ‘0’이면 전세버스, 관광해설사, 음식점, 숙박업 등 줄줄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지역 경제와 일자리에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전주는 특히 그렇지요.

전주시가 ‘착한임대운동’을 국내에서 제일 먼저 시작했습니다. 시에서 관심을 쏟았던 건가요.

‘착한임대운동’은 이미 4년 전부터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도 계속 연구해 왔고, 건물주와 임차인 상생협약인 ‘함께가게’, 착한 공인 중개 정책인 ‘사회적 부동산’도 운영해 왔습니다. 아울러 구도심에서 임대계약을 ‘매출 연동형 임대료’나 ‘임대료 동결’을 유지할 경우 건물 리모델링 비용을 시에서 직접 지원하는 정책도 시행해 왔습니다. 이 기반을 바탕으로 ‘착한임대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건물주들 설득하는 시작단계에서 많은 분이 우려했습니다. 취지는 좋지만 불가능할 것이고, 실패할 경우 시장의 정치적 부담이나 행정의 권위 실추 등이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느끼는 임차인들의 절박함과 삶은 무게는 저에게 한 치의 주저함 없이 ‘착한임대운동’을 결단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좋은 취지이지만, ‘착한임대운동’을 마냥 반기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실행단계에서 건물주들이 반발했고 공무원들이 굉장한 고생을 했습니다. 여러 차례 긴급간부회와 동장 회의를 통해서 공무원들이 직접 건물주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처음엔 건물주들로부터 모멸도 당하고 핀잔도 들었는데 그 진심이 전해지면서 많은 분이 호응해 주셨습니다. 사실, ‘착한임대운동’에 참여해 주신 대부분의 건물주들은 영세한 분들입니다. 나도 힘들지만 나보다 더 힘든 분들을 위해 마음을 내어 주신 겁니다. 특히, 초기 단계에서는 1년 전부터 꾸준히 모임을 갖고 고민해 온 한옥마을 상인들과 주민들이 선뜻 응해 주셔서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후, 대통령께서 페이스북을 통해 ‘전주시 착한임대운동’을 칭찬해 주시면서 전국으로 파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건물주들도 시민들도 큰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고 전주가 ‘가장 인간적인 도시’로 가는 큰 문이 하나 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주형 재난기본소득도 지방자치가 국가 운영의 틀을 바꾸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됐나요.

재난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경제 위기가 오면 가장 먼저, 가장 깊게, 가장 늦게까지 고통을 받는 층이 바로 저소득층을 포함한 취약계층입니다. 고통이 지속하면 인간의 존엄마저 해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상을 뛰어넘는 과감한 결단과 상식을 깨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당시 처음 시작하는 ‘전주형 재난기본소득’이 바로 그런 일이었습니다. 누구나 처음 가는 길은 어렵고 예측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이 있다면 용기를 내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래 의미의 기본소득 개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위기에 즉각 대응하는 ‘한시적인’, 그리고 취약계층에 한정하는 ‘제한적인’ 재난소득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아울러 ‘구호 수당’이라는 낙인감을 덜기 위해 ‘전주형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용어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전주시장으로서 결단을 내릴 때 어떤 부분을 고려했나요?

위기 때 찾아오는 공동체 파괴를 어떻게 막아 낼 것인가?(아니면 더 강화할 것인가?) 중앙정부 지원의 사각지대와 천차만별 상황에 놓인 취약계층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멈춰버린 지역경제를 어떻게 재작동 시킬 것인가? 크게 이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전주형 재난기본소득의 기본 철학은 “전주형 기본소득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 힘들 때 ‘당신 곁에 우리가 함께 한다’는 사회적 연대”에 있습니다. 시민들의 따듯한 마음과 마음이 반드시 서로 이어지리라 믿고 있습니다. 둘째, 직접 지원이기 때문에 취약계층 시민들께서 가장 급하고 어려운 곳에 우선 사용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셋째, 선불카드로 지급되고 3개월 이내에 전주에서 소비해야하기 때문에 263억 원이 지역에서 돌게 되고 지역 상권도 지금보다 활기를 띠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모든 정책에는 실험적 요소가 있습니다. 전주가 전국에서 처음 시행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전문기관을 통해 전 과정을 객관적으로 분석-평가할 것이고, 그 결과는 향후 유사한 사업을 진행할 때 유용한 참고가 될 것입니다.

재난기본소득을 실시하기로 하면서 전주시의 우려는 없었나요.

많은 분이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막대한 예산 소요, 엄청난 행정력 낭비와 소모, 현실적 기준 마련의 어려움, 제외된 시민들의 불만 등으로 인한 정치적 부담 등등이 지적됐습니다. 물론 다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그 지적이 모두 옳다고 하더라도, 우리 할 수 있는 힘만 있다면 어려움에 부닥친 시민들을 우리가 따뜻하게 안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려움에 부닥친 시민들이 희망의 끈을 놓치면 삶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겪을 고통과 상처, 후회보다는 지금 결단하는 것이 훨씬 현명하고 가치 있다고 보았습니다.

전주시 의회는 어땠나요.

재난기본소득 도입 초반에는 ‘의회 패싱’이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워낙 긴급한 사안이었기에 잘 받아주셨습니다. 의원들께서도 현장의 절박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순조롭게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전주시 의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총선 국면을 앞둔 가운데 중앙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소득 하위 70% 대상) 관련해 여야 할 것 없이 전 국민에게 지급하자는 쪽으로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다만 지자체의 재원 20%를 부담하게 하는 등 지방정부의 입장과 재정을 봤을 때 마냥 반길 순 없지 않나요.

지방정부는 현장과 가장 밀접해 있습니다. 시민들의 직접적인 삶과 맞닥뜨려 있기 때문에 중앙보다 더 어렵고 힘든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위기상황일수록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서로 탓하거나 미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렵지만 서로 소통하고 지혜를 짜내서 위기를 극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19 관련해 중앙정부 중심의 방역/관리체계가 이뤄지고 있는데 지방정부에서는 어떤 역할을 주목하나요.

국가 단위에서 방역/관리 체계를 만들어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중앙에서 큰 원칙과 방향을 잡아주면 지방정부에서는 각자 처한 상황에 맞게 창의적인 대책을 세웁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 방역에 마스크 착용과 소독이 중요하다”는 지침이 발표되면 전주시는 ‘매주 수요일은 전주시민 일제소독의 날’로 정해서 대대적인 소독을 합니다. 해외입국자 격리지침이 발표되면 대학기숙사나 시내 호텔 등을 섭외하여 철저한 검진과 격리를 추진합니다. 이처럼 지방정부는 이른 시일 안에 구체적이고 현실 가능하며 실효성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중앙정부가 뼈대를 만들어 간다면 지방정부를 피를 돌게 하고 살을 붙여가는 역할을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금, 2020/04/10-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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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정부에서는 정책을 결정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민과 함께하는 다양한 숙의 유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전 시리즈에서는 다섯 가지 숙의 유형(⓵시민배심원제, ⓶합의회의, ⓷시나리오 워크숍, ⓸공론조사, ⓹타운홀 미팅 방법 등) 중 시민배심원제, 합의회의, 시나리오워크숍 등을 살펴봤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숙의 유형 중 공론조사에 관해 전합니다. 일반적인 여론 조사 내 숙의 과정을 포함한 것으로 특정 안건에 관해 새로운 의미와 여론을 측정하는 데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공론조사는 시민의 의견을 수집하고 확인한다는 점에서 기존 여론조사와 같은 맥락이지만, 능동적인 학습과 토론이라는 숙의 과정을 거친 시민의 의견을 측정하는 점에서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7년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와 2018년 대입제도개편과 관련해 국가 단위의 공론 조사를 실시했고, 지방정부 단위에서는 김해의 장유소각장 현대화 사업, 남해의 망운산 풍력발전소 건립에 관한 공론 조사를 벌였습니다.

숙의를 거치며 변화하는 시민의 생각과 의견

공론조사의 첫 단계는 공론화 의제와 관련한 1차 여론조사를 시작으로 조사결과에 근거해 대표성을 갖춘 시민참여단을 선정하는 것입니다. 약 200~300명 정도로 구성된 시민참여단은 균형 잡힌 정보를 제공 받고, 전문가 강의를 포함한 상호 토론 과정을 거칩니다.

충분한 학습과 토론이 진행되었다면, 1차 여론조사와 동일한 질문으로 2차 여론조사를 진행해 학습과 토론에 따른 참여자의 태도와 인식의 변화를 살펴봅니다. 다시 말해 의제를 학습한 시민의 의견을 청취하고, 숙의 과정을 거치며 발생하는 의견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등 사회적 수용성을 높이고, 정책을 결정하는 데 공론 조사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에 대한 공론조사

신고리 5·6호기는 지난 2016년 건설 허가 이후 2017년 6월에는 종합공정률이 28.8%에 이르는 상황이었습니다. 2017년 대선 당시 ‘안전한 대한민국’을 천명하고, 신고리 5·6호기 건설의 중단을 공약으로 내세운 문재인 대통령은 공사 자체가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점을 고려해 신고리 5·6호기 건설중단 관련한 사회적 합의를 따르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2017년 7월 17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었습니다.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 구성

공론화위원회 위원 선정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각 분야 별 전문기관 및 단체 당 3인의 후보를 추천 받아 1차 후보군을 구성했습니다. 후보군 내 원전 찬반 입장을 갖는 기관 및 단체의 제척 의견을 받은 뒤 제척된 인사를 제외한 나머지 17인 중 8인의 후보군을 선정했습니다. 공론화위원회는 위원장 1인과 인문사회, 과학기술, 조사 통계, 갈등 관리 분야 등 각 2인을 포함해 총 9명으로 구성됐습니다.

시민참여단 구성은 국민의 대표성 확보를 위해 층화추출을 위한 이중추출법을 사용했습니다. 대한민국 국적의 만 19세 이상 국민을 지역, 성별, 연령으로 3차원으로 층화한 후, 비례 배분한 20,000명을 층화 무작위 추출헤 1차 표본을 구성해 1차 공론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1차 표본을 건설 재개/중단/판단유보, 성별과 연령으로 층화한 뒤, 비례 배분한 500명을 무작위로 추출해 2차(478명), 3차(471명), 4차(471명)에 걸친 공론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시민참여단은 학습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숙의 프로그램은 오리엔테이션(1일), 숙의 자료집, 2박 3일 종합토론회, 이러닝(e-learning), 온라인 교육 등이 제공됐고, 지역순회 공개토론회, TV 토론회, 미래세대 토론회도 열렸습니다.

건설 재개, 그러나 원자력발전은 축소

1차 공론 조사 결과는 건설 중단에 비해 건설 재개의 비율이 유의미한 차이로 높게 나타났습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그 차이가 더욱 커지면서 되어 최종 공론 조사 결과에서는 건설 재개를 선택한 비율이 59.5%로, 건설 중단을 선택한 40.5%보다 19.0%p 더 높았습니다.

한편, ‘원자력발전의 축소’가 53.2%로 ‘원자력발전 유지’, ‘확대’보다 높게 나타나 원자력발전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에너지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시도된 전국 단위 대규모 공론 조사

문재인 정부의 출범 이후 처음 시도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시민참여형 공론 조사는 전문성을 이유로 관련 전문가 또는 지역 주민 등 직접 이해관계자 중심으로 논의되던 방식을 국민의 생활 이슈로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특히 양자택일 상황을 요구하던 과거 공적 의사결정구조에서 벗어나 선택의 폭을 넓혀서 대안을 모색하고, 국민을 대상으로 사회적 논의를 실시했다는 데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기존 공론 조사에 비해 표본의 규모가 대폭 확대된 점과 고도화된 표본 추출방식을 활용한 점은 조사의 신뢰성을 높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시민참여단의 높은 참여 덕분에 숙의 과정에서 다양한 관점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공론의 장’이 마련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전문가가 아닌 왜 일반 시민이 결정하는가

그러나 공론화 의제와 방식을 정하는 단계에서 충분한 논의와 검토가 필요했다는 의견도 제기됐습니다. 갈등이 첨예하고, 공론화를 저해할 만한 요인이 다수 존재하는 사안이었던 만큼 공론화 의제와 방식에 충분한 의견 수렴과 숙고가 없다면, 공론화는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전문 영역의 결정을 전문가가 아닌 왜 일반 시민이 결정하는가”에 관한 의문 등 공론화 자체를 부정하거나 참여를 거부하는 이해관계자도 있어, 공론화 방법을 선정하는 단계에서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치밀하게 설계돼야 하는 부분입니다.

이처럼 공론화 절차에 관한 신뢰도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찬반이 팽팽한 만큼 공론 조사라는 숙의 유형만으로 의사 결정의 공정성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번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숙의 과정이 모든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거나 갈등을 완전히 해소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이 전문가의 결정으로만 실현될 수 없듯이 민주주의를 이끌고 가는 시민의 참여와 숙고로 갈등을 해소하고, 대안을 찾는 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기존에는 전문가와 생산자가 논의를 주도했다면 이제는 원자력 에너지를 실제 소비하는 시민들이 논의의 주체가 됐다”라는 김지형 공론화위원장의 말처럼 숙의를 활용해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가는 ‘시민 주인공’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인터뷰 출처: BBC코리아, 김지형 공론화위원장: “좋은 절차가 정의일 수 있다”(링크)

– 글: 안영삼 미디어센터장·[email protected], 감수: 이규홍 대안연구센터 연구원·[email protected]

토, 2020/04/1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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