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주제 4] 국민건강보험 보장성 및 정책결정 구조
국민건강보험 보장성 및 정책결정 구조
이재훈 ㅣ사회공공연구원 연구위원
올해도 건강보험 재정이 당기수지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6년 연속이다. 2005년부터 쌓이기 시작한 누적적립금으로 치면 약 16조 규모로, 사상 최대 규모다. 원래 건강보험은 단기보험으로 당해연도 재정수지, 즉 수입과 지출을 균형 상태로 맞추는 게 원칙이다. 법에서 정하고 있는 준비금보다 훨씬 많은 적립금이 쌓여있지만 이를 급여확대를 위해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 사이 건강보험 보장률은 2009년 65%에서 2013년 62%로 해마다 낮아지고 있다. 전체 진료비에서 건강보험이 부담하는 비율이 낮아지는 만큼 환자 부담은 늘어나고 있다는 뜻인데, 비급여진료비는 18%까지 높아졌고 법정 본인부담금까지 감안하면 환자가 부담해야하는 의료비는 38%에 이르고 있다.
지난 9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건강보험 보장률을 2020년 68%, 2025년에는 7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보험자인 공단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고, 보장성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OECD 평균수준인 80%까지 올리겠다는 기존 계획을 70%로 하향조정한 것은 일단 제쳐두고라도, 이조차 얼마나 현실로 이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실 공단은 건강보험 급여확대를 결정할 실질적인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현행 국민건강보험법에서는 보건복지부 산하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에서 급여, 보험료 뿐 아니라 건강보험 주요정책을 심의, 의결하도록 되어 있다.
건강보험 보장성 결정구조와 문제
지난 10년 동안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는 건강보험제도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로 손꼽혀 왔다. 2003년 재정통합 이후, 건강보험의 중심의제가 외형적 확대를 위한 대상범위 포괄(population coverage)에서 급여범위 확대(benefit coverage)로 변화한 것이다. 핵심의제가 변화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치적 공간과 과정 역시 건정심이라는 제도적 틀을 중심으로 합의, 퇴장 또는 탈퇴 등이 반복되는 역동적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건강보험은 건강보험료와 정부지원금이라는 공적재원을 중심으로 운영되지만, 실제 의료서비스의 공급은 민간병원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보험자와 가입자, 그리고 공급자로 이뤄진 3자 구도인 셈이다. 그러다보니 복잡한 이해관계와 첨예한 갈등구조를 내재하고 있다. 건정심은 이러한 각 당사자들이 동수로 참여해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 협의해 정책결정의 참여와 합의를 높이기 위한 사회적 기구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 형식적으론 균형감 있게 구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들춰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먼저 위원선정 뿐 아니라, 의제 선정과 실제 정책결정까지 정부의 영향력이 너무 강하다. 특히 보장성 강화와 관련해서는 무엇보다 정부의 정책목표와 이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의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전체 목표보장성 계획은 실종된 채 비급여에 대한 통제기전 없이 선별적으로 일부 항목별 급여확대 접근방식만 취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건강보험 보장률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건정심 위원구성도 편향적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 당시 참여연대, 경실련, 건강세상네트워크 등 보건의료개혁에 적극적이었던 시민단체가 건정심이나 재정운영위원회에서 배제되고, 친정부 성향의 바른사회시민회의가 가입자를 대표해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부편향에 따라 자의적으로 위원을 선정하고 있는 것이다. 공익위원 역시 전문가는 정부가 선정하다보니 공정성과 객관성 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역시 준정부기관임을 감안하면 이름만 공익위원일 뿐 사실상 정부위원이다. 특히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과거 의료보험심의위원회(1994~2000년)나 건강보험심의조정위원회(2000~2001년) 당시만 하더라도 가입자의 대리인으로 가입자대표로 분류됐으나, 건정심 내에서는 보험자로서의 자기위상보다 정부의 대리인에 가까운 실정이다.
또한 건강보험제도의 중장기 발전방향에 대한 전망과 계획에 대한 논의와 합의 없이 정부정책을 기본으로 차기년도 재정전망에 입각해 보험료 인상률 및 보장성 수준을 결정하다보니, 단기적 이해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특히 주요 제도개선에 대한 사항은 보고안건으로 다뤄 의견수렴만 할 뿐이다. 회의 역시 지나치게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회의는 참석자와 안건제목, 결과만 간략하게 공표될 뿐, 다른 정부위원회와 달리 별도의 회의록을 작성하거나, 공개하고 있지 않다.
끊임없는 건정심 구조개악 시도
이런 문제점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공급자 중심으로 건강보험 정책구조를 개편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다. 지난 2014년 의사파업 이후, 복지부와 의사협회의 의정협의과정에서 건강보험의 공정한 거버넌스 구조를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건정심 구조 개편을 논의했다. 당시 의협의 요구는 수가협상이 결렬될 경우, 건정심 결정 이전에 중립적 조정소위원회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계약당사자(공급자단체)가 수가를 결정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겠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을뿐더러, 결코 중립적일수도 없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법에서 규정한 가입자단체의 요양비용 결정권한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고, 협상과정이 성실히 이뤄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또한 의협의 요구를 받아 새누리당 박인숙 의원이 발의했던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 역시 2년만인 지난 11월 9일 보건복지위원회에 상정돼 법안심사를 앞두고 있다. 박인숙 의원의 개정안은 건정심 구성을 정부와 가입자단체 5인, 공급자단체 5인 그리고 전문가 3인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정부와 가입자단체의 입장이 서로 상이함에도, 이를 합한 위원 수가 공급자단체와 동일하게 변경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정부 및 가입자단체의 비중을 축소하고 공급자단체의 영향력을 높이려는 것이다. 개정안대로라면 공급자단체는 5인이 참여하고, 전문가 3인 가운데 2인에 대한 추천권한을 지니기 때문에 사실상 전체 13인의 위원 가운데 과반이 넘는 7인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형식적인 사회적 논의의 기본 틀조차 부정하고, 파기하려는 것이다.
건강보험 보장성 결정구조, 이렇게 개선하자
현행 건정심 구조의 미시적 조정보다는 보다 과감한 구조개편이 필요하다. 건강보험 재원의 대부분이 가입자의 보험료 수입과 정부지원으로 이뤄지고 있고, 건강보험제도 역시 가입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가입자의 역할은 더욱 강화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건강보험공단이 보험자로서 재정지출과 수입 등 건강보험 재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도록 하고, 가입자대표들이 참여하는 공단 산하 건강보험재정운영위원회에서 공급자단체와의 수가협상 뿐 아니라 보험료와 보장성 전반을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은 건정심에서 보험료율을 결정하도록 하고 있는데, 사실상 공급자단체가 보험료율을 결정하는 데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다.
애초 2000년 국민건강보험이 출범할 당시, 건강보험재정운영위원회에서 수가협상권 뿐 아니라 지역가입자의 보험료를 결정하고 직장가입자의 보험료에 대한 의견을 낼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2001년 건강보험 재정위기 당시 제정된 건강보험재정건전화특별법에 의해 현재의 건정심 구조로 개편된 것인데, 재정이 안정되고 특별법이 만료된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건강보험의 실질적인 주인인 가입자의 역할이 그만큼 축소된 것이다.
또한 건강보험 급여는 재정상황과 맞물릴 수밖에 없는데, 지출과 수입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수가와 보험료에 대한 결정과 함께 종합적으로 논의, 결정할 필요가 있다. 이는 건강보험 재정에 대한 가입자의 권한 뿐 아니라, 책임까지 강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건강보험 급여우선순위 국민참여위원회의 경험을 토대로 이를 확대개편해 다양한 방식으로 건강보험 급여확대에 대한 국민 참여를 높이는 방식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현재 건정심에서 결정하는 약제 및 치료재료, 상대가치 등도 재정운영위원회에서 함께 다루도록 해야 한다. 요양급여비용계약 대상에서 임의로 제외하고 있는 것을 포함하자는 것이다. 사실 약제 및 치료재료는 건정심에서 서면심의라는 형식적 과정만 거칠 뿐 치료재료전문평가위원회, 약제전문평가위원회 등 공급자위원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는 별도의 전문위원회에서 급여여부와 함께 사실상 가격까지 결정하고 있다. 점차 증가하고 있는 치료재료 등에 대해 재정과 연계된 관리감독이 필요하며, 공급자단체의 과도한 영향력을 제어하고 보다 투명하게 운영되어야 한다.
건정심의 주요 기능인 보험료와 급여에 대한 의결기능을 재정운영위원회로 이관하는 대신, 건정심은 단기적 이해에 대한 조정이나 결정보다는 사회적 기구라는 위상에 맞게 역할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매년 다양하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보험료와 수가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합의나 조정 자체에 집중하다보면 목표와 방향을 상실한 채 갈등을 최소화하는 데만 초점이 맞춰질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건강보험제도의 발전 방향과 원칙 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기반으로 구체적인 제도개선 과제들에 대한 전략적 합의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중장기(또는 5개년) 보장성계획이나 재정 등에 대한 종합계획을 마련하거나 이행과정을 점검, 평가하는 역할이나, 의료전달체계 개편처럼 해묵은 과제지만 뚜렷한 진전이 없는 주요 제도개선 사항들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행과 같이 공단과 각 의약계 대표의 유형별 수가협상이 결렬될 경우 이에 대한 조정기능은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
마치며
건강보험제도가 국민건강을 책임질 수 있는 보다 든든한 제도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보장성 강화뿐 아니라, 여전히 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 특히 재정에 대한 다양한 외부적 압박과 내부적 과제가 중첩되어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앞으로 제도적으로 보장된 형태의 사회적 논의는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행히 가입자와 공급자, 그리고 정부 간 축적된 신뢰도, 내놓을만한 사회적 합의의 역사적 경험도 없다. 지금부터라도, 낮은 수준이라도 그 맹아적 경험을 쌓아가는 게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건강보험 정책을 결정하는 사회적 기구를 민주적으로 재편하는 것이 첫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