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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고령자가 지배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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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고령자가 지배한다면?

익명 (미확인) | 목, 2015/12/31- 23:30

올 한 해를 돌아보며 ‘자유’라는 단어가 이만큼 수난을 당하던 시절이 또 있었나 싶은 생각을 했다. 꽤 오랜 기간 사회 현안에 대한 각종 토론 자리에 참석했지만, 올해만큼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을 많이 맞닥뜨린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한국과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 변화 추이와 65살 이상 고령인구 비율 추이를 지켜보면 놀랍도록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970년부터 1995년까지 25년 동안의 변화를 보면,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달러가량에서 2만달러 수준으로 껑충 뛰어오른다. 동시에 65살 이상 인구 비율도 7%대에서 14%대로 2배가 된다(그림1·2 참조).

같은 기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천달러 미만의 미미한 수준에서 1만1천달러대로 훌쩍 뛰어오른다. 또한 65살 이상 고령인구 비율도 3%대에서 6% 근처로 2배 커진다. 재미있는 것은 1995년 한국의 위치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과 고령인구 비율은 거의 정확히 1970년 일본 수준에 있다.

일본에서 목격한 ‘제론토크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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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수치를 보자. 이번에는 1995년부터 2010년까지 15년 동안의 변화 추세다.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이제 2만달러 수준에서 4만달러 이상으로 훌쩍 커졌다. 65살 이상 고령인구 비율은 이 기간에는 14%가량에서 23%가량으로 다시 한번 크게 뛰었다.

같은 기간 한국은 어떨까? 1만1천달러 수준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달러 남짓으로 2배 뛴다. 그리고 65살 이상 인구 비율은 6%대에서 11%대로 2배가량 뛴다. 결과적으로 2010년의 한국은 다시 한번 1995년의 일본과 비슷한 위치에 서게 된다.

이 그래프대로라면 한국의 다음 10년, 15년도 단순하게 떠올려볼 수 있다. 일본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실제로 여러 예측을 종합해보면, 2030년 한국의 65살 이상 인구 비율은 2010년의 일본 수준이거나 그보다 더 높아질 것으로 추정된다. 또 1인당 국민소득은 2010년의 일본 수준보다는 낮지만, 현재보다 꽤 높을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의 미래를 일본에 빗대본 것은 2014년 일본에서 목격했던 ‘제론토크라시’(Gerontocracy)의 모습이 떠올라서다. 지난해 나는 일본에서 두 달 동안 지내며 일본 사회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센다이, 후쿠시마, 이시노마키 등 3·11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을 둘러보기도 했다. 일본 사회의 역동성을 다시 불어넣으려 애쓰는 젊은 사회적 기업가들을 만나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오구마 에이지 게이오대학 교수를 만나게 됐다. 오구마 교수는 <사회를 바꾸려면> 등의 저서로 유명한 인문학자다. 그런데 그는 일본 사회의 여러 문제를 설명하면서 제론토크라시로 단순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제론토크라시는 고령자 지배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오구마 교수는 일본 사회를 민주주의 사회라고 부르기도 하고 자본주의 사회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실은 그 모든 것이 제론토크라시라는 내용에 덧씌워진 것에 가깝다고 말했다.

오구마 교수가 일본 사회를 제론토크라시라고 부르는 이유는, 일본 사회가 중앙부터 지역까지 촘촘하게 외부인과 사회적 약자에 대해 배제적인 고령자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특히 3·11 동일본 대지진 뒤 피해 현장에서 그 지배체제의 민낯을 목격했다고 한다.

사실 일본 지역경제에서 제론토크라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려면 현미경을 들이대야 한다. 오구마 교수도 피해 지역 현장에 가서 직접 사람들을 만나며 그 구체적인 작동 방식을 알게 됐다.

일본은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20년’을 맞는다. 경제는 저성장을 맞고 글로벌화로 기업들의 해외 아웃소싱이 일반화된다. 비정규직 비중이 빠르게 높아지기 시작하며 지역경제는 피폐해지는 과정이 진행된다.

고령자 ‘리더’가 ‘지배자’로 바뀌어가고

축소 및 노화되는 지역경제는 전국 각지에서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 동북부 이와테현의 도시 가마이시는 한때 철강산업의 메카였다. 신일본제철의 주요 제철소가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제철소는 외국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남아 있는 공장에서는 부산품 정도를 생산할 뿐이다.

정부는 이 지역에 공공일자리(Public Work)를 만들어 인구 유출을 막으려 한다. 정부가 지원금을 내어주면 그 돈으로 지역주민들이 공공사업에 고용되어 일하는 방식의 일자리 창출 정책이다. 그런데 대대적인 공공일자리 사업의 결과, 지역주민들이 의존적으로 변화해가기 시작한다. 공공일자리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인구가 늘어나고, 공공일자리가 줄면 사람들이 떠나가고 그러면 공공일자리를 더 줄일 수밖에 없게 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지역사회의 배타적 제론토크라시를 인정하게 된다. 지역에서 활동하던 고령자들이 비즈니스 리더이자 지역사회 리더이자 지역 정치인으로까지 변신한다. 리더가 아니라 지배자로 바뀌어간다. 당연히 지역사회는 활력을 잃는다.

정부는 각종 지원 정책을 쏟아붓는다. 그런데 지원 대상이 개인이 아니었다는 데 문제의 시작이 있었다. 일본 중앙정부는 지역사회와 지방정부를 지원 대상으로 삼았다. 취지는 좋았다. 개인을 돕는 것보다 공동체를 돕는 것이 지역사회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명분에서였다.

이런 방식으로 지원정책을 펼치다보니 지역을 지배하는 고령자들의 힘은 더욱 세졌다. 대부분 지역에 이미 지방정부나 공동체 지배구조를 주도하고 있던 고령의 지역 토호들이 있던 상황이었다. 이들은 원래 지방정부를 운영하고 지역사회 규칙을 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넘어서서, 지역으로 들어오는 돈과 일자리를 배분하는 역할까지 맡게 된 것이다. 공공일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사실상 이들이 결정하게 됨에 따라, 결국 지역의 경제력까지 차지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활력을 잃은 가마이시 지역은 제철소가 떠난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고 만다. 인구는 줄고 고령화가 진행된다. 9만 명이던 인구가 절반이 되었고 65살 이상 인구가 30% 이상으로 변화해간다.

오구마 교수는 이런 과정이 일본 사회의 전형적인 운영 방식을 보여준다고 본다.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룬 패러다임을 계속 이어가면서 다음 세대의 일본 사회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30년 불황·저성장 고착화의 원인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때 경찰관들이 무너진 건물에서 희생자의 주검을 옮기고 있다. 일본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이 배제되는 고령자 지배체제인 ‘제론토크라시’가 지진 복구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런 제론토크라시 체제가 갖는 잔인한 면이 눈에 띄게 드러난 것은 3·11 동일본 대지진 복구 과정에서다. 여러 경로를 통해 복구 과정에서 외국인, 장애인, 신규 거주자들이 지원에서 배제됐고, 여성과 청년들은 대피소 및 지원 물품 배정 등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가 불가능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건강한 지역공동체라면 약자와 소수자를 먼저 배려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피해 지역에서는 비상 상황이라는 이유 아래 경제성이나 환경영향평가 없이 대규모 건설공사가 마구 벌어졌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명분에서였다. 이들은 상당 부분 정부 지원사업의 일환이었다. 동일본 지역 곳곳에선 도로 복구공사와 해변의 대규모 방조제 공사가 벌어진다. 쓰나미를 막는다는 명분에서였다.

후쿠시마 지역의 방사능 제거 작업을 보자. 제목만 보면 첨단기술 공법을 동원할 것처럼 느껴지는 공사다. 하지만 사실 이 공사는 오염 지역의 땅에 있는 흙을 수십cm 파내 다른 곳으로 옮겨 보관하는 초대형 토목공사다.

이들 대부분이 정부 돈으로 진행되는 공사다. 공공일자리가 대거 나온다. 그 일자리를 배정하는 권한은 다시 고령의 지역 토호들 손으로 넘어간다. 그들이 고령의 지역 정치인과 고령의 정부 관료들과 통한다. 그들이 받아온 돈으로 젊은이들이 생존할 수 있게 나누어줄 수 있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에서 지역주민 다수는, 특히 청년이나 여성이나 신규 이주자 같은 새로운 인구는 배제된다는 것이다. 이런 담합 구조 아래서 이것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사람들이 환영받을 리 없다. 전형적인 폐쇄적 제론토크라시 상황이다.

1980년대 이후 30년 동안 제론토크라시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30년 동안의 불황이었다. 저성장의 고착화였다. 집권 ‘자민당’ 보수정치의 일당지배였다. 일본 경제는 활력을 잃었다. 소니는 삼성에 밀렸고, 세계 2위 경제대국 자리를 중국에 내놓았다. 정치도 경제도 악명 높은 담합 구조가 됐다. 오랜 기간의 고령화 추세와 소득수준 향상, 그리고 사회 각 부문에서 기득권을 온존시키면서 가져온 사회적 결과다.

급기야 일본은 새로운 활력을 찾기 위해 위험한 국가주의를 만지작거리는 상황이 됐다. 헌법을 고쳐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기치로 국민을 결집시킨다. 혐한론과 반중 정서가 심해지면서 국수주의적으로 변해간다. 활력을 잃은 사회가 찾아가는 비뚤어진 출구다.

그게 바로 1995년 이후 2010년까지 일본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어쩌면 한국에서 앞으로 10년, 15년 동안 벌어지지는 않을지 두렵다. 고령화율과 1인당 국민소득 추이가 그 길을 따라가고 있듯이 말이다.

이미 조짐이 보이는 듯해 불안하다. 행정부의 최고 의사결정 회의체인 국무회의에는 50대도 끼어들기 힘든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정당들은 노인층에 구애하는 정책을 궁리하느라 바쁘고, 아무리 개혁적인 법안이라도 노인층의 심기를 거스를 듯하면 바로 발을 뺀다.

노인층 심기 거스르지 않으려는 정치권

경제계도 마찬가지다. 2000년대 초반 이후 벤처기업가들이 혜성같이 나타나 한국 경제의 주요 리더로 등장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기업 서열은 그대로 고착되는 중이다. 42살 이민화가 혜성같이 나타나서 메디슨을 이끌며 벤처기업협회를 만들고, 37살 전하진이 한글과컴퓨터를 이끌며 국산 소프트웨어의 개발을 외치며, 33살 안철수가 안철수연구소를 세우던 때가 불과 20년 전인 1995년이었다. 그 뒤를 이어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이재웅, 네이버의 이해진,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등 30대 초반의 기업가들이 줄줄이 새로운 경제 리더로 등장했다. 그런 날은 다시 올 수 있을까?

어쩌면 한국에서 제론토크라시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과거 30여 년을 되돌아보면, 한국도 이대로 가다가는 그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이 없다. 지금이라도 무언가 충격이 필요한 때인지도 모른다. 고령자 지배체제를 넘어선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도록 말이다.

[ 한겨레21 / 2015.12.31 /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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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기금은 줄어드는 게 당연…보험료 높이는 게 바람직”

‘사회보장 최저선 권고안’ 하게메예르 명예교수 ― 연금 최고 전문가 김연명 교수 대담

현재 기금은 연금급여 29년치…1~2년치가 적당
보험료 안 올리면 급여액은 줄 수밖에 없어
노사정이 합의해 보험료 인상 시기·규모 정해야

하게메예르 교수(가운데)와 김연명 중앙대 교수(오른쪽)가 지난 달 23일 서울 통인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한국 연금 제도의 개혁 방안을 주제로 대담을 나누고 있다.
하게메예르 교수(가운데)와 김연명 중앙대 교수(오른쪽)가 지난 달 23일 서울 통인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한국 연금 제도의 개혁 방안을 주제로 대담을 나누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고령화 속도 1위, 노인 빈곤율 1위의 한국. 국민연금의 중요도는 날로 커지는데 2060년이면 기금이 고갈될 것으로 보여, 국민연금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 방향성을 가늠해보고자 크리스토프 하게메예르(Krzystof Hagemejer) 본 라인 지그 대학(Hochschule Bonn-Rhein-Sieg) 명예교수와 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최근 서울 통인동의 한 카페에서 대담을 했다.

하게메예르 교수는 20여년간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일하며 사회보장 제도의 의의와 중요성을 담은 제202호 사회보장 최저선 권고안(2012년 채택)을 만들고 수정하는 작업을 담당했다. 그는 공적연금강화 국민행동,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권미혁·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 윤소하 정의당 의원, 사회공공연구원이 주최한 국민연금 국제 심포지엄 참여차 한국을 찾았다.

김연명(이하 김) 한국 사회에서 연금은 굉장히 중요한 사회적 이슈다. (2047년에 기금이 소진된다는 2003년 국민연금 재정추계 결과를 바탕으로) 2007년에 국민연금법이 개정되어 60%였던 소득대체율을 2028년까지 40%로 점진적으로 인하하기로 했다. 이에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올해도 국민연금 재정추계가 예정되어 있어 국민적 관심이 매우 높은데 교수님의 오랜 연구 경험이 한국의 연금 개혁에 많은 도움이 될 거라 예상한다.지난 20년 동안 세계은행이 주도하는 시장 친화적 연금 개혁이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이와 관련해 국제노동기구는 끊임없이 세계은행을 비판해온 것으로 안다. 두 기관의 연금 개혁 방안 차이는 무엇인가?

하게메예르 세계은행의 연금 개혁 방안은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미국 사회보장 개혁 논쟁에서 시작됐다. 당시 미국 경제학자들은 두 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한쪽은 연금 급여액을 소득의 일정 비율 또는 일정 금액으로 지불하여 은퇴 후 소득보장을 해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확정급여형, DB, Defined Benefit), 다른 쪽은 그런 방향이 비현실적이고 너무 비싸니까 민간에 맡겨서 운영하며 적립한 기여금과 기여금의 투자수익에 의해 급여액을 결정하는 확정기여형(DC, Defined Contribution)을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논쟁은 시카고 학파 학자들의 주도로 1980년대 칠레의 연금 개혁으로 이어졌다. 당시 칠레는 국가 차원에서 확정급여형 연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으나 아에페뻬(AFP, Administradoras de Fondos de Pensiones)라는 민간회사로 관리 주체를 바꾸며 확정기여형의 개인계좌제 연금이 도입되었다. 이때 고용주의 기여분이 없어지고 장애인 급여도 사라졌다. 칠레 연금 개혁은 중부 유럽과 동유럽 국가의 연금개혁으로 이어졌다. 유럽 국가들은 칠레보다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칠레처럼 근본적인 연금 개혁은 아니었지만 금융계가 이 흐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세계은행의 연금 개혁안이 시장 친화적으로 바뀌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세계은행은 각 나라의 재정부가 참여하는 기관이다. 빈곤을 없애는 게 세계은행의 목표지만 실제로는 재정 균형을 맞추는 데 집중하며 정부의 지출 증가를 반대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금 개혁도 지출 통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령 인구가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금 지출액을 유지하려고 하니 확정기여형을 지지하는 게 당연하다. 금융 서비스 기관의 로비로 인해 연금 민영화를 부분적으로 지지하기도 한다.

반면 국제노동기구는 각 나라의 노사정 연합이 모여 국제 노동표준을 정하는 기관이다. 노동자의 입장도 반영하는 곳이다 보니 국제노동기구의 연금 개혁안은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제102호 사회보장의 최저기준에 관한 협약, 제128호 장해·노령 및 유족급여에 관한 협약, 제202호 사회보장 최저선에 관한 권고안에 근거하여 연금 개혁에 관한 입장을 낸다. 특히 기여 기간이 짧거나 저소득층인 이들을 보호하는 데 주목하고 있다.

1990년대 초 유럽에서는 정년 연장 논의가 벌어졌다. 정년을 연장하지 않으면 재정 부담이 늘어나 세계은행식의 연금 지급액을 줄이는 개혁안이 적용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보편적 보장 위해 각 계층·집단에 적합한 연금제도 필요

 과거의 국제노동기구는 소득 비례 연금 제도를 굉장히 강조했으나 지금은 정액 연금으로 방향을 튼 것 같다. 실제 그러한가?

하게메예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국제노동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에 영국의 연금 기여 방식 논쟁을 참고하여 제67호 소득보장권고를 채택했다. 이 권고안의 핵심 내용은 실업, 장애, 노령, 출산 등의 이유로 빈곤에 처할 경우 사회보험에 가입한 사람은 사회보험을 통해, 그렇지 못한 사람은 공공부조를 통해 소득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채택된 제102호 협약은 기여식, 소득비례, 지역기반, 임금수준 연결, 자산조사에 근거한 연금 보장 등 다양한 연금보장 방식을 다루고 있다. 제102호 협약이 채택되었을 때는 제조업이 성장하고 있던 시기라 임금노동이 큰 비중을 차지할거라 생각해 기여형 연금을 구상했다. 하지만 저개발 국가에서는 임금노동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비공식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아 기여형 연금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지난 20년간 정액 연금과 기초연금이 발달한 이유는 저개발 지역의 5~10%밖에 안 되는 임금노동 인구만 기여형 연금으로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90%를 위해서는 정액, 비기여 방식이 도입될 수 밖에 없었다. 제102호 협약을 보충하기 위해 채택된 제202호 권고안의 핵심 내용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 보장을 해주기 위해서는 각 계층과 집단에 맞는 연금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계은행이 2008년에 발행한 ‘연금 격차 해소 방안’(Closing the Coverage Gap)이라는 보고서도 이 내용을 다루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연금 제도를 확정기여식으로 바꾸면 더 많은 사람이 연금 제도에 가입할 거라 예상했지만 결과는 예상을 빗나갔다. 이후 세계은행은 남미의 연금 제도 개혁에 비판적인 입장으로 전환했고 기여식 연금에 가입하지 못한 이들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국제노동기구 내부에서도 제202호 권고안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연금은 연금가입자들의 보험료 수입으로 지급하는 게 원칙인데 제202호 권고안은 이 원칙에서 벗어난다는 게 이들 주장의 요지다. 비기여식 정액 연금의 예산을 어떻게 확보할 것이냐가 논란이 되었다. 한국의 기초연금은 지급액이 적기 때문에 예산에 큰 위협이 되지 않지만 추후 연금을 확대하려면 재정안정성을 확보하는 게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다. 재정문제가 생긴 후 보장수준을 낮추거나 지출을 삭감할 순 없지 않나. 어떻게 방지할 수 있을지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국제노동기구는 제102호 협약과 제128호 협약에서 강조한 기여 방식의 연금 제도를 포기한 게 아니라 제202호를 통해 보완한 건가?

하게메예르 그렇다. 제202호도 기여제에 가입할 수 있는 사람들은 기여제를 통해 보장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더불어 공식 고용 관계를 확대하여 더 많은 이들이 기여식 연금제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ILO 권고는 ‘노동자 편’이 아니라 노사정 합의

 한국 사회는 국제노동기구의 협약이나 권고가 노동자의 이해관계만 반영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론 노사 상호 협약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사용자도 충분히 수용 가능한 내용이지 않나?

하게메예르 협약과 권고안은 다르다는 걸 우선 짚고 넘어가자. 국제노동기구의 협약은 개별 국가가 비준하여 해당 국가의 법률처럼 작동한다. 준수할 의무가 부여되는 것이다. 하지만 권고안은 말 그대로 권고에 그치기 때문에 준수 의무가 강제되지 않는다.

국제노동기구의 모든 권고는 노사정 합의로 만들어진다. 권고안의 내용이 작성되면 매년 6월에 개최되는 회의에서 투표로 채택 여부를 결정한다. 회의 구성원은 정부 50%, 노동 25%, 사용자 25%로 참가자 2/3 이상이 찬성해야 채택될 수 있다. 그러니 노동계나 고용계 한쪽에게만 유리한 권고안이 만들어질 수 없다. 몇 년 전 특수고용직을 없애는 내용의 권고안이 사용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채택되긴 했지만 대부분 채택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핵심적인 내용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만장일치로 채택된 제102호 협약도 노동자와 사용자 모두가 반대하며 오랜 기간 논쟁을 거쳤다. 공식 부분에서 일하며 기여식 연금에 가입할 수 있는 노동자가 남미의 경우 40% 정도다. 이들은 사회보호최저선 같은 정액 연금이 도입되면 기여식 연금을 통해 받는 연금액이 줄어든다. 사용자도 새로운 기준이 적용되는 걸 원치 않았던지라 협의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국내에서 칠레 연금 개혁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실패한 모델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국제 사회는 칠레 연금 모델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하게메예르 칠레의 첫 번째 연금 개혁은 적용 범위가 좁아지고 보장 수준도 낮아졌기 때문에 비판을 많이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여를 중단하고 낮은 연금을 받으며 비공식 부분에서 일을 해 돈을 벌어 문제가 되었다. 바첼레트 대통령이 추진한 2차 연금개혁은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비기여 방식의 정액 연금을 강화하여 적용 범위를 확대했고 두 번째 임기 때는 사용자 기여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바첼레트는 두 번의 대통령 임기 사이에(칠레 대통령은 연임이 불가능하다) 유엔(UN)의 사회적 보호 최저선 자문기구(Social Protection Floor Advisory Group)의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사회적 보호 최저선이 전 세계에 확산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칠레의 연금개혁과 비슷한 방향이었다.

김 지금까지 오이시디나 영향력 있는 국제기구들은 연금을 삭감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적절한 소득보장엔 관심이 없었다. 최근 들어 적절성(adequacy) 개념이 부각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또, 국제적 수준에서 논의되는 적절성 개념에서 봤을 때 한국의 연금은 소득보장이 부족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

하게메예르 오이시디가 발표한 보고서를 보니 한국의 연금 제도에 굉장히 비판적이었다. 기여 수준이 낮고 노년 빈곤을 해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이시디는 일반적으로 비용 절감에 초점을 맞춘다는 걸 생각해보면 심각한 상황이다. 유럽이나 다른 나라를 보면, 노년 빈곤보다 청년 빈곤이 심각하다. 미래의 소득보장률이 더 낮아서 빈곤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적정성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노년 빈곤 해결과 적정성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가입기간 40년에 소득대체율 40%는 ILO 기준 못미쳐

김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하게메예르 한국에 오기 전 오이시디의 자료를 검토하긴 했으나 한국의 사회적 맥락을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얘기를 들어달라. 한국의 기여형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한국의 사회적 맥락을 잘 모르기 때문에 두 연금에도 불구하고 왜 노인 빈곤이 해결되지 않는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아무래도 급여수준이 빈곤선보다 더 낮기 때문에 노년 빈곤에 충분한 대응책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가입 40년 후 40%의 소득을 대체하는 것으로 국민연금이 설계되었다고 알고 있다. 현재 연금을 수령하는 이들은 가입기간도 짧고 보험료도 9%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보장액이 적다. 기여 제도를 운용하려면 가입기간을 늘려야 한다. 40년 후 40%를 보장하는 목표는 그렇게 나쁜 수준은 아니나 아이엘오 기준에 비하면 부족하다. 제202호에서는 30년 후 40%를 보장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2060년에 연금 기금이 소진될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던데 나는 크게 걱정할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문제가 심각해지기 전에 분명 조치를 취할 것이다. 미국은 2030년 후반에 기금이 고갈될 거라고 예상하지만 신경 쓰는 국민은 거의 없다.

 국민연금의 급여 적절성을 확보하기 위해 9%에 불과한 기여율을 더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노동계가 보험료 인상에 부정적인데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상승분을 정부가 세금으로 부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정치 불신으로 인해 보험료를 올린다고 급여액이 높아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계를 어떻게 설득하면 좋을지 의견을 달라.

하게메예르 지금은 국민연금이 도입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기금이 존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드는 게 맞다. 사실 국민연금의 주요 재원은 보험료다. 기금은 안정성과 유동성을 확보하고 인구구조 변화에 대비하는 완충기금의 역할을 할 뿐이다. 보험료를 올리지 않으면 급여액이 줄어들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 걸 이해해야 노조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폴란드 연대 노조에서 일을 해봐서 아는데, 노조를 설득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노조도 연금 제도를 이해해야 한다. 재분배 성격을 가진 확정급여 제도를 유지하려면 점진적인 보험료 인상이 필요하다. 또한 퇴직연령의 점진적인 인상도 필요하다. (이러한 제도의 변화가 없다면) 명목확정기여제도(NDC, Notional Defined Contribution)가 도입될 수 밖에 없다. 명목확정기여제도는 노동자에게 불리한 제도다. 기여금의 합계를 기대여명으로 나누는 것이기에 재정적 안정성은 보장되지만 급여의 적절성이 확보되지 않는다.

정부가 재정을 투입하여 연금 제도를 보조하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독일, 프랑스 등 연금 제도가 성숙한 국가에서 정부의 세금 보전은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단 형평성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독일, 프랑스는 국민 거의 모두가 연금 가입자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에서 세금을 투입한다면 정당성을 잃을 수 있다.

김 국민연금 기금이 2060년에 고갈될 거라는 전망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금 규모는 지디피(GDP) 대비 37%로 일본의 28%, 스웨덴의 29%보다 높다. 심지어 50%로 증가할 예정이다. 우리나라처럼 적립금이 많은 국가가 별로 없는데 우리 국민들은 기금 고갈에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기금의 규모가 이렇게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갈을 걱정하는 국민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 또, 노동계나 진보계에서는 국민연금의 일부를 공공병원, 공공주택, 공보육에 투자하자고 하는데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

하게메예르 기금의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 연금 급여는 기여금으로 보전하는 것이지 기금으로 보전하는 것이 아니다. 초기에는 급여 수준보다 보험료가 높게 책정되었기 때문에 기금이 쌓였다. 지금 한국의 기금 규모는 29년치 연금을 지급할 수 있는 정도인데 (일반적으로는) 1~2년치 정도가 적당하다. 적립금은 줄이고 보험료를 높이는 게 더 바람직하다. 노사정이 합의해서 보험료 인상 시기와 규모를 정해야 한다.기금 투자 전문가가 아니라 의견을 내기 조심스럽지만 기금은 급여를 보장하는 데 쓰거나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곳에 투자하는 게 맞다. 수익이 낮은 곳에 투자하는 건 가입자 입장에서 보면 적절하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다. 가입자에게 더 많은 보상을 주는 데 집중해야 한다. 전문가들이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수익을 극대화하는 투자 방식이 있다고 얘기하니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수익 극대화라는 목표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정리·사진 송진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 연구원 [email protected]
“국민연금 기금은 줄어드는 게 당연…보험료 높이는 게 바람직”, <한겨레>, 2018년 4월 13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rights/840421.html&gt; (2018.4.16.-접속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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