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자] 조건 없이 삶을 사랑한 루빈슈타인
조건 없이 삶을 사랑한
루빈슈타인
글. 이채훈 MBC 해직PD
MBC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클래식 음악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2012년 해직된 뒤 ‘진실의 힘 음악 여행’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저서 『클래식, 마음을 어루만지다』, 『클래식 400년의 산책』등.
“폐암 하나 주세요”, “뇌졸중 두 갑 주세요.” 흡연자를 아예 환자 취급하다니, 참 폭력적인 광고다. 담배가 질병이라면 왜 국가가 판매하는 것인가? 이 광고를 하지 말든지, 담배 판매를 중단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아니냐고 열을 올려보지만, 똘똘한 친구의 답변에 말문이 막힌다. “국가가 흡연의 위험성을 이렇게 경고했으니 담배 소송 걸리면 국가가 유리해지는 거”란다.
1년 전 담뱃값이 올랐을 때도 끊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정부에 세금 더 내기 싫어서 흡연량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다짐했을 뿐이다. 예상대로 이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담배 한 갑 사면서 5,000원 내고 500원 거슬러 받기를 되풀이했다. 이제 연말, 책상 위에 쌓여가는 500원짜리 동전을 세어 보고 9개가 되면 “아, 이걸로 한 갑 살 수 있게 됐네” 하며 기뻐하는 바보스런 나를 발견한다. 새해, 담배 줄이겠다는 무모한 다짐은 하지 않겠다. 일하다가 한 대 피울 때 그냥 여유롭게, 눈치 안 보며 피우고 싶을 뿐이다.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1887~1982)은 시가를 즐겨 피웠지만 영원한 청년으로 95살까지 살았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삶을 지극히 사랑했다. 무대에 오르는 것을 즐겼고,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진정한 로맨티스트 루빈슈타인. “행복의 비결은 삶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좋은 삶이든 나쁜 삶이든 말이죠.”
시가를 즐겨 피웠던 피아니스트 루빈슈타인.
이런 그가 20살 때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사랑하던 여자가 자기에게 무관심하자 인생이 텅 빈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연주 여행을 위해 머물던 베를린의 호텔에서 목을 매달았다. 자살은 미수로 끝났고 그는 삶을 다시 발견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무한한 축복이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집이나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조건없이 삶을 사랑할 것. 그는 죽음의 순간에도 살아있으니 행복할 거라고 했다.
쇼팽 폴로네즈 Ab장조 Op.53 <영웅> 이 음악을 듣고 싶다면?
유투브에서 chopin polonaise 1964 rubinstein을 검색하세요.
https://youtu.be/noS1SXHrUOE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1964년 모스크바 연주 실황)
삶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은 음악에도 드러난다. 그가 연주한 쇼팽의 폴로네즈 Ab장조 <영웅>, 경이로운 연주다. 끝부분, 왼손을 머리 위까지 번쩍 들어 올려 건반에 수직으로 내리꽂는 ‘공중제비 타건’은 탄성을 자아낸다. 거인과 같은 스케일과 테크닉으로 청중을 압도해버리는 옛 거장의 카리스마…. 더욱 중요한 것은 탁월한 전달력이다. 그가 연주하는 서정적인 패시지중요한 멜로디 라인을 연결하는 악절는 비할 바 없이 맑고 섬세하다. 그는 항상 열정적이고, 유쾌하고, 부드럽다. 그는 어떤 곡이든 음악혼의 정수를 명료하게 청중의 마음으로 전달한다.
그의 레퍼토리 중심에는 쇼팽이 있다. 쇼팽의 조국 폴란드는 루빈슈타인의 조국이기도 했다. 1964년 모스크바에서 폴로네즈를 연주하며 루빈슈타인은 말했다. “러시아가 폴란드의 모든 걸 빼앗아 갈 수 있겠죠. 하지만 이 폴로네즈 한 곡으로 러시아를 정복할 수 있습니다.” 루빈스타인의 쇼팽은 폴란드 민중의 정서에 가까웠으며, 무척 인간적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쇼팽의 또 다른 이름’이라 부른다.
“음악에서 진정한 예술성은, 음표를 정확히 표현하느냐가 아니라 음표와 음표 사이의 쉼표를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가 연주한 쇼팽의 녹턴 G단조 Op.37-1의 첫 음을 들어보자.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고 잠시 멈춰 있을 때,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목이 메는 느낌이다. 순간의 침묵이 음표보다 더 많은 것을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쇼팽 녹턴 G단조 Op.37-1 <향수> 이 음악을 듣고 싶다면?
유투브에서 chopin nocturn op.37-1 rubinstein을 검색하세요.
https://youtu.be/9PB3bYaWosM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루빈슈타인은 나이가 들수록 생명력과 힘을 더해갔다. 그는 평생 독주, 협연, 앙상블을 통해 음악의 모든 것을 즐겼다. 그는 술, 여행, 미술, 사랑 등 인생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즐기고 나눈 멋진 이웃이었다. 자기 영달만 추구한 양심 없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 침략에 맞서 입대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연주회 수익을 모두 적십자사에 기부했다.
“내가 연주하는 작품을 쓴 작곡가들은 보잘것없는 돈밖에 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연주회와 레코딩으로 많은 돈을 벌고 있죠. 그래서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받는지 모릅니다. 이 얼마나 불공평한 현실입니까.”
루빈슈타인은 낭만주의의 기치를 내건 마지막 피아니스트였지만, 낭만주의의 저속한 면은 피하고 좋은 면만 취한 현명한 음악가였다. 그는 선율의 흐름을 끊거나 리듬을 엿가락처럼 늘이고 줄이지 않았다. 기본 템포를 유지하며 기품 있는 루바토박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연주법를 구사하여 자연스런 감정을 표현할 것, 형식과 내용의 완벽한 균형 위에서 아름답게 노래할 것, 영혼의 자연스런 흐름을 따라가며 음악의 정서와 의미를 드러낼 것. 루빈슈타인의 이러한 쇼팽 해석은 20세기 모든 쇼팽 연주자들의 출발점이 됐다. 폴리니부터 조성진까지, 쇼팽 콩쿨의 우승자들은 모두 루빈슈타인의 쇼팽 해석에 발을 딛고 새로운 해석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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