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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말?]국정화 반대하지 않는 근현대사 전공교수는 3명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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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말?]국정화 반대하지 않는 근현대사 전공교수는 3명 뿐

익명 (미확인) | 수, 2015/11/18-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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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국정 역사교과서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은 근현대사 부분입니다. 과연 근현대사 부분의 집필은 누가 맡게 될까요?

뉴스타파 취재진이 지금까지 전국 일반대학의 역사 전공 현직 교수들의 국정 교과서에 대해 밝힌 입장을 취합해 확인한 결과 국정 교과서 집필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는 근현대사 전공 교수는 단 3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뉴스타파가 국정 교과서 반대 선언을 하거나 집필 거부 선언을 한 역사 전공 현직 교수들의 명단을 바탕으로 전국 90개 일반대학의 역사 관련 128개 학과와 교육부 산하 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교수 등 총 690명을 전수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국정 교과서 반대’나 ‘집필 거부’를 선언한 교수는 모두 537명으로 전체의 78%에 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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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연세대 사학과와 고려대 사학과, 서울대 역사교육과 등 59개 과에서는 교수 전원(301명)이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대 성명에 참가하지 않은 교수 가운데는 참여 의사는 있었지만 성명서를 낼 당시에 출장 중이거나 연락이 닿지 않아, 또는 학교 분위기 때문에 불참한 교수도 많아 실제로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는 교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근현대사 전공 현직 교수 가운데 96%가 국정화 반대

공식적으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은 교수 149명 가운데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한 교수는 모두 7명이었습니다. 7명을 모두 확인해 보았더니 이 가운데 4명(지수걸[공주대 역사교육과],박종린[한남대 역사교육과],박환[수원대 사학과],김영미[국민대 국사학과] 교수)은 출장이나 기타 이유로 성명에 참여하지 못했을 뿐 국정교과서에 반대한다고 밝혔습니다.

전체 역사 전공 현직 교수 가운데 근현대사 전공 교수는 모두 73명이었습니다. 결국 근현대사 전공 현직 교수 96%(73명 가운데 70명)가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는 것이 됩니다.

남은 3명은 건국대 한상도 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권희영, 정영순 교수 등 3명입니다.

이 가운데 권희영 교수와 정영순 교수는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이 속해있는 한국현대사학회 소속으로 그동안 국정교과서에 적극적인 찬성 입장을 밝혀왔습니다. 건국대의 한상도 교수는 독립운동을 깊이 연구한 학자로 MB 정부 때 국사편찬위 편집위원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취재진은 지난 11월 12일 한국학중앙연구원·국사편찬위원회·동북아역사재단이 공동 주최한 광복70주념 기념 학술대회에서 정영순 교수와 한상도 교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국정화 반대입장을 밝히지 않은 근현대사 전공 교수 3명을 추려냈는데 그 가운데 2명이 국책기관 주최 행사에 함께 참가했다는 것은 사실 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취재진의 질문에 정영순 교수는 “집필 제안을 받은 적은 없다”면서도 집필 참여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한상도 교수도 국정 교과서 찬반 여부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잘 모른다”며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 지난 11월 12일 서울프레스 센터에서 열린 광복7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석한 정영순, 한상도 교수에게 뉴스타파 홍여진 기자가 국정 교과서와 집필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이쯤되면 왜 국사편찬위원회가 국정 교과서의 집필진을 공개하지 못하고 있는지, 왜 역사 전공 학자 이외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교과서 제작에 참여시키는지 이해가 갈 만합니다. 국편이 집필진을 현직에서 은퇴한 명예교수와 국책연구기관 연구원을 중심으로 찾는 것도 현직 교수 가운데서는 집필자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또 교과서를 심의할 편찬 심의위원에 대해서 비공개로 일관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으로 보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측은 오는 20일까지 집필진 구성을 끝내겠다고 밝혔지만 “집필진 명단까지 공개할 계획은 없다”고 전했습니다. 국편 위원장도 교육부 장관도, 취재진이 만나 직접 물었지만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 지난 11월 12일 서울프레스 센터에서 열린 광복7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석한 황우여 교육부 장관과 김정배 국편 위원장이 국정 교과서 집필진에 대해서 뉴스타파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는 영상입니다.

아래의 표는 각 대학 역사 전공 교수들의 국정화에 대한 반대 현황입니다.

– 정원을 파악할 때 명예교수와 특수신분 교수는 제외했습니다.
– 공개적인 성명으로 입장을 표명한 교수 만을 집계했습니다.
– 여러 전공이 함께 있는 학부나 학과의 경우 역사 전공 교수의 숫자를 정원으로 잡았습니다.
– 누락되거나 수정이 필요한 항목에 대해서는 연락을 주시면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 이외에도 서울교대 사회교육과와 상명대 교양학부, 대구한의대에도 성명에 참여한 역사 전공 교수가 있었지만 정원 파악이 불가능해 #표로 표시하고 계산에서 제외했습니다.

학교 정원 반대
가톨릭관동대 역사교육과 3 0
가톨릭대 국사학과 4 3
강릉원주대 사학과 5 5
강원대 교양학부 2 2
강원대 역사교육과 5 5
강원대 사학과 6 5
건국대 사학과 6 5
경기대 사학과 5 0
경남대 역사학과 6 1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고고학 3 2
경북대 역사교육과 7 3
경북대 사학과 9 9
경상대 역사교육과 5 5
경상대 역사교육과 5 5
경상대 사학과 8 7
경성대 사학전공 3 3
경인교육대 사회과교육과 역사전공 3 3
경희대 사학과 9 9
계명대 사학과 7 4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고고학 9 4
고려대 역사교육 4 4
고려대 사학 5 5
고려대 한국사학 9 9
공주대 역사교육과 5 0
공주대 사학과 6 2
광주교육대 사회과교육 역사담당 2 2
광주대 관광경영학과,영문학과 3 3
국민대 국사학과 9 6
군산대 사학과 5 3
단국대 외국어대 역사학과 5 5
단국대 문과대 사학과 6 6
단국대 교양학부 8 5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5 1
대구교대 사회과교육과 3 1
대구대 역사교육과 4 4
대구한의대 아동복지,호텔관광 # 2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5 5
대진대 역사문화콘텐츠학부 역사전공 3 2
덕성여대 사학과 4 4
동국대 역사교육 4 4
동국대 사학과 5 4
동국대(경주) 국사학과 4 2
동국대(경주) 고고미술사학과 5 1
동덕여대 국사학과 5 5
동아대 사학과 6 4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7 0
동의대 사학과 4 4
명지대 미술사학과 4 3
명지대 사학과 7 6
목원대 역사학과 3 3
목포대 고고학과 4 0
목포대 사학과 7 7
부경대 사학과 6 5
부산교육대 사회교육과 2 2
부산대 고고학 5 5
부산대 역사교육 6 6
부산대 사학 12 11
부산외국어대 역사관광학과 4 4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6 5
상명대 교양학부 # 1
서강대 사학전공 11 8
서울과학기술대 기초교육학부 역사전공 3 3
서울교육대 사회교육과 # 1
서울대 역사교육과 7 7
서울대 동양사학 8 7
서울대 고고미술사학 9 7
서울대 서양사학과 9 5
서울대 국사학과 12 11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8 8
서울여대 사학과 4 4
서원대 역사교육과 5 5
선문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4 4
성균관대 사학과 11 10
성신여대 사학과 5 5
세종대 역사학과 2 0
수원대 사학과 4 0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8 7
순천대 사학과 5 5
숭실대 사학과 6 5
신라대 역사교육 4 4
신라대 역사문화학과 4 4
아주대 사학과 6 6
안동대 사학과 6 5
연세대 사학과 13 13
연세대(원주) 역사문화학과 5 5
영남대 역사학과 5 4
우석대 역사교육 3 2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6 6
원광대 사학과 4 3
원광대 역사교육과 5 5
이화여대 사회과교육과 3 2
이화여대 사학과 7 5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5 0
인천대 역사교육과 3 3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한국사 담당 2 2
인하대 사학과 6 4
전남대 인류학과 고고학전공 3 3
전남대 고고학,전문대학원 4 4
전남대 역사교육 6 6
전남대 사학 11 9
전북대 역사교육과 3 2
전북대 사학과 8 3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9 4
제주대 사학과 6 6
조선대 역사문화학과 7 7
중앙대 역사학과 5 5
진주교육대 사회과교육 역사담당 2 2
창원대 사학과 6 6
청주대 역사문화학과 4 3
총신대 역사교육과 4 0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역사담당 2 2
충남대 국사학과 4 4
충남대 사학과 7 7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6 3
충북대 사학과 6 4
충북대 역사교육과 6 4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8 8
한국외대 사학과 7 7
한국학중앙연구원   10 8
한국해양대 유럽학과 1 1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2 2
한남대 사학과 4 4
한남대 역사교육과 6 5
한림대 사학과 8 3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9 9
한신대 국사학과 5 5
한양대 사학과 6 4
홍익대 역사교육과 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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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첫 보도에 나타난 서울 지역 3·1만세시위의 현장

 

• 이순우 책임연구원

 

 

① 경성 종로통 :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촉발시킨 탑골공원(파고다공원)의 전경이다. 추가적인 집회를 막기 위해 일본 군인들이 이곳을 장악한 직후 모든 출입구는 폐쇄되고 말았다.
② 덕수궁 대한문 앞 : 이곳은 고종 국장 행렬의 출발점인 동시에 공간 자체가 광장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레 만세시위군중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교차지점이 되기도 했다. 왼쪽에 있는 것이 대한문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경성일보사(매일신보사, 지금의 서울시청 자리)이다.
③ 경성우편국 앞 : 종로에서 남대문정거장으로 나가거나 덕수궁 대한문 쪽에서 본정통(혼마치)로 이동할 때 교차지점이 되는 경성우편국 앞 광장의 전경이다. 왼쪽에 보이는 조선은행도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선은전(鮮銀前, 센긴마에)’이라는 명칭으로 통용되기도 했던 공간이다.
④ 남대문정거장 앞 : 경부철도 남대문정거장의 전면 모습이다. 이 자리는 다시 수 만 명이 참여한 3월 5일 제2차 만세시위의 집결지였을 뿐만 아니라 불과 반년 후인 1919년 9월 2일 사이토 신임 총독이 부임하던 날 다시 강우규 의거의 현장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⑤ 조선보병대 앞 : 광화문 앞 옛 삼군부 터(지금의 정부서울청사 자리)에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가 있었고, 그 아래로 헌병대 숙사(宿舍)와 경성제2헌병분대가 나란히 터를 잡고 있었다.
⑥ 미국총영사관 : 독립선언서를 미국총영사관(정동 10번지)에 전달하고 덕수궁 담장길을 따라 되돌아나오는 만세시위행렬의 모습이다. 독립선언의 취지를 전달하고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만세시위 참여자들은 서울 주재 서양 각국의 영사관을 빠지지 않고 방문하였다.
⑦ 본정통 : 일본인들의 중심 거리인 본정통(혼마치, 지금의 충무로) 일대의 거리풍경이다. 만세시위행렬은 강압적인 식민통치의 본거지인 조선총독부가 있던 남산 왜성대를 향해 나아가려다가 이곳에서 일제의 방어선에 막혀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⑧ 종로경찰서 앞 : 다수의 시위참여자가 체포된 종로경찰서 앞의 거리 풍경이다. 왼쪽에 보이는 시계탑 건물이 옛 한성전기 사옥이자 1919년 당시 종로경찰서로 사용된 건물이며, 오른쪽으로 붙어있는 건물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이다. 종로경찰서는 1923년 1월 김상옥 의거의 현장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1919년 3월 1일, 일제는 탑골공원(塔洞公園, 파고다공원)과 명월관 지점(明月館支店, 태화관)에서 촉발된 ‘독립선언’이라는 우리 민족의 거대한 저항에 부딪히자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강압적 식민통치기구를 대거 동원하여 시위참가자들에 대해 구타, 체포, 구금, 살상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이와 더불어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막고자 일체의 보도를 철저히 통제하였다.
그러나 조선독립의 대의를 외치는 큰 흐름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이 명백해지자 3월 7일에 이르러서야 이른바 ‘소요사건(騷擾事件)’이라는 제목이 붙은 각 지역 만세시위의 양상에 대한 기사가 처음 신문지상에 등장하게 된다. 이때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1919년 3월 7일자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서울 지역에서 이뤄진 시위양상을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3월 1일 오후 2시 반에 학생 3, 4천 명은 경성 종로통 ①에 모여 군중이 부화하여 여러 대로 나뉘어 일단은 덕수궁 대한문 앞 ②에 이르러 한국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일시 대한문 안으로 침입하였다가 다시 대한문 앞 넓은 마당에서 독립연설을 하였고 일단은 경성우편국 앞 ③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시 남대문정거장 앞④에서 의주통으로 나아가 불란서영사관에 이르고 일단은 창덕궁 문 앞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일단은 조선보병대 앞 ⑤으로 가서 그 영문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못하고 또 대한문 앞에 단체에서 나뉜 일단은 미국총영사관 ⑥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다른 단체 약 3천 명은 총독부로 향하려 함으로써 본정통 ⑦에서 이것을 막아 운동은 일시 표면으로는 진정되었고 군중 중에 괴수로 인정할 만한 자 130명을 체포하였으며 처음의 소요가 진정된 후 1일 오후 8시 경에 마포전차종점 부근에 약 1
천 명이 모였었고 또 11시쯤에 야소교 부속 연희전문학교 부근에 학생 약 200명이 집합하였으나 얼마 아니하여 헤어졌고, 2일 정시 20분에 종로네거리에서부터 약 400명이 만세를 부르며 종로경찰서 앞⑧으로 지나가매 경찰서에서는 이것을 제지하고 괴수로 인정할 만한자 20명을 체포하였는데 나머지 군중은 모두 헤어졌더라.
그러한데 이 군중의 다수는 노동자요 학생도 더러 섞여 있었고 3일의 경성은 전일 이래로 매우 고요하여 훈련원 장제장의 장식은 성대 무사히 마치었고 3월 4일에는 각 관공사립학교에 결석생도가 많고 혹은 한 명도 출석치 아니한 학교가 있었는데 그 원인은 불량학생들이 이번 시위운동에 참가치 아니하면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거나 또는 부형이 위험을 염려하여 출입을 금하고 혹은 3월 1일 소요 후 고향으로 돌아간 자가 많은 까닭이라더라.

1919년 당시 20세였던 이학(李鶴)이라는 중동학교(中東學校) 중등과 학생이 있었다. 함경북도 경성군 오촌면 일리동에 본적지를 둔 그는 공업전습소 학생인 안형선(安衡善)과 함께 경성부 연건동 39번지에서 세를 얻어 살고 있었다. 3월 1일 아침 낙원동에서 만난 친구 안형선에게서 오늘 파고다공원에서 조선의 독립선언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으로 가서 만세시위행렬에 참가하게 된다.
이날 하루 그는 서울 시내의 이곳저곳을 따라다니며 거의 전 행로에 동참했으며, 3월 5일에 다시 남대문 역전에서 벌어진 제2차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북미창정(지금의 북창동)을 거쳐 대한문 앞으로 나가는 도중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는 상황에 처하였다. 그는 5월 3일 총독부 판사 앞에서 “독립선언을 한다는 것에 찬성하여 파고다공원에 갔다”고 당당히 밝혔는데, 그의 신문조서에는 만세시위에 동행한 행로를 이렇게 적고 있다.

 

안형선으로부터 위의 말을 들었으므로 그와 함께 정오가 지나서 파고다공원에 갔다. 그때는 다수의 사람이 모여 있지 않았으나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점차 사람이 많아지고 마침내 다수의 군중이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오후 2시경이 되니 육각당 쪽에서 누군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혹자는 독립신문을 살포했으므로 나는 그것을 주워 보았다. 그러는 중에 군중은 박수를 치고 또 독립만세를 불렀으므로 나도 거기에 맞춰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나서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종로로 나와 남대문역전, 서대문 밖, 영성문(永成門) 앞을 거쳐 미국영사관 앞으로 갔다가 거기서 대한문, 종로, 광화문을 거쳐 서대문 밖 프랑스영사관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서소문정, 대한문앞, 장곡천정(長谷川町)을 거쳐 본정 2정목에 이르렀더니 경찰관이 제지했으므로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위의 행로에 나오는 ‘영성문’은 경운궁 선원전 구역에서 신문로 방향으로 나가는 쪽에 설치된 북쪽 대문이며, 1900년에 만들어졌다가 덕수궁 해체과정에서 1920년에 철거되어 사라진 유적이다. 그리고 ‘장곡천정’은 일찍이 한국주차군사령관을 지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3.1 당시의 조선총독)가 자신의 관저로 삼았던 대관정(大觀亭)이 있는 동네라고 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소공동(小公洞)’의 일제식 지명을 가리킨다.
이학이 만세시위행렬을 따라 다닌 행로는 앞서 보았던 ????매일신보???? 첫 보도에 기술된 장소들과 거의 겹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3일에 있던 고종 국상일을 넘기고 다시 5일에 열린 제2차 만세시위에 나갔다가 체포되기에 이른다. 비록 닷새 남짓에 불과한 기간이었지만 그 역시 자신의 삶을 통틀어 가장 자유롭고 가슴 벅찬 나날들을 보낸 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금, 2019/03/29-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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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남대문로 반민특위 본부 터>

KB국민은행 옛 명동 본점에 위치
일제강점기 식민지 자본주의 심장부
48년 제헌의회서 제정한 헌법기관
반민특위 터, 2017년 미 금융사에 매각
지상 18층짜리 호텔, 터파기 공사 중
9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푯돌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임시 보관
49년 6월 이승만 지시받은 경찰이 습격

친일 청산, 좌우 세력이 정치적 이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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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남대문로84 옛 국민은행 명동 본점 건물이 호텔 신축을 위해 철거돼 사라졌다. 이 건물 지하주차장 모퉁이에 있던 반민특위 푯돌은 용산구 청파동2가 식민지역사박물관으로 옮겨져 제자리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중구 남대문로84 KB국민은행 옛 명동 본점,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 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반민특위는 1948년 9월 제헌의회에서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해 제정한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발족한 헌법기관이다. 1949년 8월 활동을 마칠 때까지 당시 명동 롯데백화점 맞은편 옛 상공부 특허국 건물을 독립 청사로 썼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6번 출구로 나오면 한국전력 서울본부와 SK네트웍스 빌딩 바로 다음 건물이다. SK 명동 빌딩과 이비스(ibis) 앰배서더호텔을 지나면 명동 입구에 닿는다. 조선 건국 이래 광통교 아랫동네는 종각~을지로 입구~명동~숭례문을 잇는 남대문로 상의 최고 상권이었다. 길 건너편은 소공동 옛 반도호텔(롯데호텔)~옛 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이어졌다. 남대문로는 ‘경성의 월스트리트’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식민지 자본주의’의 심장부였다.

0418-11

▲ 반민특위 청사로 쓰였던 옛 상공부 특허국 건물.

반민특위 터는 철거돼 사라졌다. 사방에 둘러쳐진 가림막 안을 가만히 엿보니 텅 빈 터에 터파기(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파내는 기초 공사)가 진행 중이고, 수시로 공사 굉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다. 철거 안내문과 건축 허가 표지판이 붙어 있는 가림막 앞 보도에는 ‘명동 국민은행 앞’이라고 적힌 버스정류장 안내판이 서 있다.

이것이 사람들의 뇌리에 남은 장소성이다. 대지 면적 2589㎡(783평), 연면적 2만6764㎡(8096평)의 이 건물은 2017년 마스턴투자운용과 미국계 대체투자 운용사인 안젤로고든에 2400억원에 팔렸다고 한다. 지하 3층~지상 18층짜리 고급 호텔과 상점이 들어서면 남대문로의 풍경을 또 한번 바꿀 것으로 예상된다.

반민특위 푯돌은 보이지 않는다. 공사 전 푯돌은 은행 정문을 지나 명동7가길로 꺾여 돌아가는 건물 주차장 입구 모퉁이에 엄전하게 있었다. 본래 이곳은 체포된 부역자를 가두던 유치장 자리였다. 1999년 푯돌 건립 당시 관계 기관에서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지나다니는 대로변에 세우지 않았으면 한다”라면서 난색을 보였기 때문에 정문을 피해 유치장 터로 밀려난 것이다.

푯돌은 어디로 갔을까? 굴곡진 반민특위와 푯돌의 행로가 오버랩되면서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철거 공사가 시작되기 전인 지난해 말 푯돌 순례자의 두 눈으로 확인한 푯돌에는 ‘이곳은 민족말살에 앞장섰던 친일파들을 조사, 처벌하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가 있던 곳임’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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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은행 명동 지점이 철거되기 전인 2018년 9월 촬영한 반민특위 푯돌.

철거 과정에서 이 은행 지하주차장 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푯돌의 행방이 묘연하다.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이 빌딩 1층 화단에 세웠으나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두 차례 다른 자리로 전전한 끝에 얻은 안식처였다. 그러나 푯돌의 옆면과 뒷면을 모퉁이에 바짝 붙여 놓아서 숨쉬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푯돌 앞을 지나칠 때마다 안팎곱사등이(가슴과 등이 병적으로 튀어나온 사람) 푯돌 신세가 처량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확인해보니 이번에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면서 오갈 데가 없어 용산구 청파동 2가 식민지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라고 했다.

언론인 정운현의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증언 반민특위>에 따르면, “반민특위 사무실은 1층과 2층 각각 100평 정도의 공간이었고, 1층에 칸막이를 만들어 제1, 2, 3조사부와 조사부장, 조사관, 서기관 자리를 만들었다. 김상덕 위원장실은 회의실로 사용했다. 2층은 검찰관들이 사용했다. 반민 피의자의 체포와 특위 요원 경호를 위해 총경부터 경사에 이르기까지 47명의 경찰관으로 구성된 특별경찰대원들은 1층 구석 칸막이방을 사용했다”는 구술이 나온다.

업무 공간이 다소 좁아서 불편했지만 입지는 최고였다. 줄줄이 잡혀 들어오는 친일 명사들을 보려고 구름 인파가 몰려들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활동을 시작했다. 특별조사위원회(위원장 김상덕 의원)와 특별재판부(부장 김병로 대법원장), 특별검찰부(부장 권승렬 법무장관) 등 거국적인 조직을 갖췄다.

‘백화점 왕’으로 군림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일본 관동군 첩자 노릇을 한 <대한일보> 사장 이종형, 2·8독립선언서를 쓴 춘원 이광수, 3·1독립선언서를 쓴 육당 최남선, 민족대표 33인이자 <매일신보> 사장을 지낸 최린, 중추원 부의장 박중양,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 배정자를 비롯해 수도경찰청(서울경찰청) 수사국장 노덕술,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차석 홍택희, 중부서장 박경림 등 친일 경찰 간부를 체포하는 성과를 거뒀다.

총 688명을 조사해 408명에게 영장을 발부하고, 559건을 검찰에 송치했으며 221건을 기소했다. 이 중 1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5명은 집행유예, 7명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36년간의 식민 시기에 부역한 7천여 명에 이르는 친일파 일람표를 작성해, 심판하겠다고 요란하게 출범한 것치고는 초라한 결과였다. 나치 독일에 5년간 점령당한 프랑스가 부역자 1만 명을 사형에 처하고, 10만 명에게 실형을 선고한 사례와 비교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반민특위의 실패는 예정돼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친일파 처벌은 저주와 속박의 굴레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스의 드골 군대와 레지스탕스는 연합군과 함께 점령군 자격으로 파리에 입성해 나치 협력자를 처단했지만, 우리 임시정부 요인과 광복군 기백명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을 뿐이다. 독자적으로 독립과 해방을 맞지 못한 원죄가 앞을 가로막았다.

해방 이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전까지 3년간 남한을 통치한 미군정은 친일파 숙청은 군정의 업무가 아니라고 일축했다. 그들에게 해방된 약소국의 민족 감정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친일 관료와 경찰, 군인은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거나 오히려 승진했다. 미국에게는 치안 유지와 소련과의 냉전체제 경쟁이 중요했다. 친일부역자 처단보다 공산 세력 척결이 시급했다.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9월 스탈린은 “민족주의적 감정에 호소해 친일파 청산 문제를 통해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내라”는 비밀 지령을 좌익 세력에게 내려보냈다. 미국과 소련 양 대국에게 친일파 청산은 체제 경쟁용에 불과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 친일 경찰의 백주 반민특위 테러 사건 그리고 백범 김구 암살이라는 일련의 사건이 이어지면서 반민특위는 힘을 잃고, 해체 과정을 밟게 된다. 1949년 6월6일 아침 7시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40여 명의 경찰관이 반민특위를 습격해, 35명의 특위 인사를 붙잡아 고문한 사건은 이 대통령의 지시와 김태선 시경국장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이 대통령은 6월9일자 회견에서 “내가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 명령했다”고 실토했다. 결국 대통령을 등에 업은 친일 경찰이 국회를 기반으로 한 특위를 무력화한 셈이다. 지독한 반미·반일주의자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정치적 의중과 맞아떨어졌다.

이 대통령은 “국내 기반이 없는 자신의 정치적 우군이 친일 세력이고, 민족의 절반을 차지하는 친일 부역자 처벌은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는 부질없는 짓”이라고 여겼다. 경찰과 군 간부 대부분이 친일 부역자였다. 경찰의 경우 1946년 10월까지 임명된 서울 시내 10개 경찰서장 중 9명이 친일 경찰 출신이었다. 1946년 11월까지 경찰 간부 비율을 보면 경위 이상 1157명 중 82%인 949명이 일제강점기 경찰 경력자였다. 하위직의 30%도 경력자였다.

군대는 일본군과 만주군에 복무했던 친일파들이 군의 요직을 완전히 장악했다. 무엇보다 반민법 제5조는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반민법은 반민특위와 이승만의 숙명적 대결을 예고했다.

지금 우리에게 반민특위는 역사 교과서 속 교훈이 아니다. 해방 후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대의명분에도 좌우익 간 이데올로기 대립의 와중에 그 기회를 놓쳤다. 반민특위의 좌절은 민족 통합의 좌절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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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에 이전된 반민특위 푯돌.

반민특위 푯돌을 잘 보관 중이라니 다행이다. 하지만 만약 푯돌의 건립 주체가 민족문제연구소가 아니라 서울시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건물 신축 과정에서 갈 곳 없는 푯돌을 시청 창고나 서울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넣어두진 않을 터이다. 건물 옆 다른 자리에 임시로 옮겨놓았다가 다시 원위치하는 순서를 밟는 게 이치다.

그렇다면 혹시 푯돌의 건립 주체가 민간 단체이기 때문에 이렇게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반민특위 푯돌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일본인이 많이 드나드는 호텔 신축 이후 푯돌이 제자리로 돌아갈지 장담 못한다고 한다. 반민특위 푯돌이 일본인 관광객 유치와 국민 통합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곳에 꼭꼭 숨겨 놓으려 한 권위주의 시대 관계 당국의 판단 착오가 반복되지 않으리라 믿고 싶다. 푯돌이 반드시 돌아와 반민특위 유치장이 아닌 정문 앞에 당당히 자리잡길 바란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2019-04-18> 한겨레 

☞기사원문: 이승만 “민족 분열만 초래” 경찰 동원 강제 해산…푯돌마저 ‘수난’

목, 2019/04/1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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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천교육너머’에서는 ‘김천의 3.1운동과 개령출신 독립운동가 김단야’를 조명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일시 : 4월 26일 오후 7시 30분
장소 : 대한법률구조공단 대강당(김천시 율곡동)

금, 2019/04/19-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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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친형오마이고경상아!

다음주 0426황동요일날

내가 공공일짜리하고 인는

마산 회원구 봉암동 수원지

 

시내빠수 승강장관리14곳

낼은 한국노총 주최로  팔용산걱기 대회 한단다.

모랜 또  그래도  강진과해남이 아닌  일부텃새 동네지만,

그계장님  동생을 바서라도…..?

봉덕초등에서  해요일  동민이 날  행사도 한단다.

자료참고 사진은 행사후

무학본사 대강당이  오데인노.

ㄱㅗ대생과  자유당정치깡패

폭행상해

정치와주먹은

실장님국장님  고래해처묵는 가배?

오늘이 곡우장애인의 나리구나?

 

일사일촌

일교일촌

ㅇㅗㅡㄴㄹ 인력이라도  출근해바야할

몬난니친구니동상니형님이

…….315와419……….

토, 2019/04/20-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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