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길라잡이가 새식구를 맞이했습니다. 서류심사와 전화인터뷰등을 통해 모인 20명의 도성길라잡이 8기 선생님들과의 첫만남 살짝 설레고, 슬쩍 어색하고, 조금은 긴장되는 첫 날의 분위기 전해봅니다.
도성길라잡이 8기 모집은 쉽지 않았습니다. 교육시기가 대학생의 경우 기말고사 기간이고, 사회인들에겐 연말 송년회가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고, 또 사회가 워낙에 팍팍하니 삶의 활력소를 찾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운 현실... 이런 어려운 환경을 뚫고 여기 도성길라잡이 8기 20명이 모였습니다. 8년 연속 도성길라잡이 오리엔테이션 사회자, 우미정 사무국장의 진행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준태 서울KYC 공동대표와 이상인 도성길라잡이 대표의 서울KYC와 도성길라잡이 활동 소개시간 참여와 나눔의 공동체 서울KYC~ 라는 말을 앞으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으실테지만, 도성길라잡이 활동 외의 다양한 회원활동을 통해 삶의 활력소를 차차 찾아가시길 바래요~
그리고 이어진 도성길라잡이 소개~ 왜 배워서 남준다고 하는지, 배워서 남주는 활동이 나를 어떻게 성장시키는지... 이런것은 사실 말로 설명드린다고 확 와닿지 않겠죠?
이렇게 기존 도성길라잡이 활동을 하고 계신 분들이 직접 본인들의 경험을 설명드린다해도 직접 해봐야 그 참여와 나눔의 기쁨을 알수 있겠지요? 차차 시간을 갖고 알아가셨으면 합니다.
도성길라잡이 활동은 멤버쉽이 아주 중요해요. 특히 팀으로 움직이다 보니, 해설자와 진행자와의 호흡이 중요합니다. 호흡을 맞추려면 서로를 잘 알아보는것이 첫번째 일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진 서로를 알아보는 인터뷰 게임~!!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떻게 도성길라잡이가 되셨어요? 로 시작하는 인터뷰 게임~~.
이번에 오신 8기 선생님들 중에는 도성길라잡이 정기안내와 순성놀이를 통해 오신분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연초에 도성길라잡이를 대상으로 했던 설문조사중에, 도성길라잡이 활동중 보람된 순간을 묻는 질문에 많은 도성길라잡이 선생님들이 [어떻게 하면 도성길라잡이 될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을때라고 했었는데 많은 도성길라잡이 선생님들의 "보람"이 "도성길라잡이 8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도성길라잡이가 되기 위해 해야할 일들을 소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원칙과 소신의 담당활동가! 조인숙 활동가의 기본교육 활동 소개 지각 싫어요~ 결석은 더 싫어요~ 함께 시작했으니 끝까지 함께 해요~~를 강조하며 처음 만나는 도성길라잡이 8기선생님들을 살짝쿵 긴장시켰습니다.
마무리는 스스로에게 다짐과 응원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살짝 오글오글하긴 했지만, 나도모르게 한손이 번쩍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도성길라잡이 000~ 8기 시작이다~ / 도성길라잡이 000 잘 하고 있다 ]
이렇게 훈훈한 분위기로 도성길라잡이 8기와의 첫 만남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시민에서 도성길라잡이로의 변신~!! 시간도, 공력도 많이 드는 과정이지만, 참여와 나눔 그리고 성찰을 통한 자기성장의 도성길라잡이 활동을 함께 만들어가게 되어서 무척 기대됩니다.
다시 한번 도성길라잡이 8기 선생님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두팔벌려 환영합니다 ^-----^
6월 18일 근현대사아카데미 실내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강의는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장 김승은 실장님께서 함께해주셨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 재조명"이 주제였는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일협정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맺어졌고, 일본은 그 당시 배상을 모두 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일협정이 어떤 상황에서, 무슨 내용으로 맺어진 협정인지는 대부분 모르고 있습니다. 이번 근현대사아카데미 강의에서는 한일협정에 대해 쉽게, 자세히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강의였을지 궁금하시죠?
우선 한일협정이란 무엇일까요? 한일협정은 한국과 일본의 국교를 정상화하는 협정입니다.
20여년동안 국교를 정상화하지 않고 있었다가 한일협정때부터 국교가 정상화되었습니다. 실제로 한일협정을 맺기위해 1952년 한일회담을 했고 협정을 맺기까지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일협정하면 많이 이야기하는것이 일본에서 주장하는 '배상금'인데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차관 3억달러였지만 실제로 '돈'을 받은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상 3억달러의 경우 이에 해당하는 생산품, 시설, 기자재 등을 받았고 유상과 차관은 배상이라 볼 수 없습니다. 결국 일본에서는 배상이었다고 말하지만 간접적으로는 "수출"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이에 대해서 배상금이 아닌 독립축하금이라는 명목을 달았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세계를 상대로 한일협정때 돈을 다 줬음에도 피해자들이 계속 돈을 달라고 떼쓰고 있다며 이들을 떼쟁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 당시 전쟁은 '돈'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은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고 청일전쟁 배상금 역시 예산의 4년치에 해당할만큼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때 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해 대공황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패전국과 승전국 모두 어려운 경제상황을 겪었습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줄 곳이 일본뿐이라 생각했던 미국은 만약 일본 역시 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해 어려운 경제상황을 겪을 경우 공산주의가 확대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고 일본의 전쟁 책임과 식민지 지배책임을 강하게 추궁하는 대신 대소반공체제 구축을 위해 일본을 파트너로 삼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일회담을 조속히 마무리짓기 위해 미국이 한일회담 과정에 깊게 관여하여 정치적 타결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한일협정을 위해 나섰던 한국 정부 역시 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과거사 청산, 피해자에 대한 사과 및 보상에 대한 부분은 뒷전으로 둔 채 경제발전과 안보에만 집중하여 금액 조정에만 신경썼습니다. 이는 일본이 바라던 바이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만, 조선인을 모집하여 포로감시원으로 활동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패망후 사로잡혀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포로감시원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들어가게 된 사람이 200여명, 사형을 당한 사람도 수십명이었습니다. A급 전범으로 사형을 받은 일본인이 7명임을 감안한다면 이는 과연 옳은 판결과 형 집행이었을까요?
당시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조선인들은 동진회를 만들어 지금까지도 그때의 억울함에 대한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만 그때그때의 작은 보상을 할뿐 일본은 여전히 그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포로감시원으로 활동했던 사람들, 강제징용되어 끌려갔던 사람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본군 위안부로 처절한 삶을 살았던 여성들, 일본에 있으면서 원폭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까지.
너무나 많은 피해자들이 있었지만 한일협정에서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한일협정은 언뜻 보기에도 우리에게 유리한점이 별로 보이지 않는 협정입니다. 침략에 대한 사과도, 그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들에게 전해진 사과와 보상도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실제로 한일협정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국민들을 진압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국민들의 목소리를 억눌렀습니다.
피해자들이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할때마다 일본은 한일협정때 다 정리가 됐다라는 입장이었고 그러다보니 한일협정 내용을 알기 위해 정보 공개 소송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한일협정 정보가 공개되었고, 일본에서도 정보 공개 소송이 진행되어 내용이 공개됐습니다. 우리나라가 가진 정보에는 간략한 내용들만이 담겨있었지만 실제 일본에서 공개된 정보는 그 양도 엄청났고 세세한 이야기들까지 다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동북아역사재단 홈페이지에서 원본을 볼 수 있으니 직접 보셔도 좋을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일본이 근대 산업시설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되었던 하지마 지역 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 한단 소식이 자꾸 들려옵니다. 그 중 한곳은 요시다 쇼인의 개인 서당인데 이곳이 대체 산업화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걸까요? 요시대 쇼인은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 등을 주창하며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이토 히로부미 등 이 서당 출신 사람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봤을때 일본의 산업화는 침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전쟁에 대한 반성이 보이지 않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에게 진실된 사과 역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일협정에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는 일본, 산업화라는 말로 침략을 대신하려는 일본. 그리고 그런 일본에게 제대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지 못하는 한국까지.
이러한 일들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우리 세대가 성숙해야 과거 청산 역시 가능합니다.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이를 세계인과 공유해야 합니다.
이 강의를 들으며 한일간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사 마찰의 시발점이 된 1965년 6월에 체결된 한일협정에 대해 다시 배우고,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쉽지 않은 내용인 한일협정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신 김승은 실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 1월 19일(화) 공동대표 선거 공고 -
2월 2일(화) 후보 등록 마감 / 미등록 - 선관위와 운영위원 논의를 통해 2월 14일(일)까지 등록기간 연장 - 2월 14일(일)
후보 등록 마감/ 미등록
2. 결과 - 한차례 후보등록 기간을 연장하였으나, 최종적으로 미등록 - 후보 미등록으로
인해 선거 무산 - 2016년 정기 총회 안건 상정 불가능
정기 총회 총회 후, 임시운영위원회를 통해 2016~2017
서울KYC 공동대표 재선거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기로 함.
[참고] KYC 선거에 관한 규정 KYC "선거에 관한 규정"에 의거하여 투표권은 아래 회당하는 회원들에게 주어집니다. (1) 선거공고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1회 이상의 회비를 납부한 정회원 (2) 선거공고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1회 이상의 회비를 납부한 후원회원 중 투표의사가 있는 회원 단, 투표에 참여한 자를 투표의사를 밝힌 것으로 간주하여 투표 정족수에 포함 시킨다.
2016년 1월 19일 정기총회 공고일 기준으로 -2015년 7월 19일~2016년 1월 19일 기간에 1회 이상의 회비를 납부한 정회원 누구나 -2015년 7월 19일~2016년 1월 19일 기간에 1회 이상의 회비를 납부한 후원회원중 투표의사가 있는 회원
2011년 한양경성서울 600년 역사도시를 걷는다 2012년 100년, 남산의 역사를 걷는다 2013년 낙산. 그리고 동대문의 기억 2014년 백악아래 펼쳐진 600년 수도 서울의 중심 그리고 2015년 역사도시 서울, 그리고 서촌의 근대적 변화 2011년부터 시작된 서울KYC 역사도시 걷기 시민강좌가 올해 5회째를 맞이했습니다.
한양도성 안을 걸으며, 역사도시 "서울"을 이해하는 강의와 답사로 시작해서 매년 한양도성의 남쪽, 동쪽, 북쪽을 거쳐 2015년 올해는 한양도성의 서쪽 안팎을 주제로 했습니다.
3번의 실내강의와 3번의 현장답사! 최근 "핫플레이스"가 된 상촌-웃대-서촌-세종마을에 대한 관심 때문일까요? 작은 교육장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회원들과 시민들이 신청해주셨습니다.
현대에 와서 "서촌"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누가 살았고, 어떤 역사가 있는지 전우용 선생님이 첫강의를 열어주셨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서촌"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과거의 서촌과 다르고, 정확한 위치와 명칭은 아니라고 합니다.
[참고] 북산 밑을 북촌, 남산 밑을 남촌, 낙산 근처를 동촌, 서소문 내외를 서촌, 장교, 수표교 어름을 중촌, 광통교 이상을 우대, 효교동 이하를 아래대, 강변을 오강, 성밖 사면 십리 이하를 내자(字內라 함은 서울 성벽에 천지현황의 순으로 어느 점으로부터 어느 점까지의 간은 천자구역 혹은 지자구역이라 하여 그 문자와 문자의 간을 각 군영에서 분담 수비한 고이다)라 하여 동서남북의 네 촌(통칭 왈 四山밑)에는 양반이 살되 북촌에는 문반, 남촌에는 무반이 살았으며, … 西村에는 西人이 살았으며 그 후 서인이 다시 노론 소론으로 나뉘고, 동인이 다시 남인 북인 또 대북 소북으로 나뉨에 미쳐는 서촌은 소론, 북촌은 노론, 남촌은 남인이 살았다고 할 수 있으나 사실은 소론까지 잡거하되 주로 무반이 살았으며 그리고 동촌에는 小北, 중촌에는 중인, 우대는 육조 이하의 각사에 소속한 吏輩 庫直 족속이 살되 특히 茶洞, 相思洞 등지에 商賈(통칭 시정배)가 살았고 아래대는 각종의 軍屬(장교 집사등류)이 살았으며 특히 궁가를 중심으로 하여 경복궁 서편 누하동 근처는 소위 대전별감(궁가의 隸屬)파들이 살고 창덕궁 동편의 원남동 연지동 근처는 武監 족속이 살았으며 동소문안 성균관 근처는 館人(속칭 관사람)이 살고 왕십리에는 軍銃(兵村)들이 살고 오강변에는 船人商賈들이 많이 살았는데 속칭 강대사람이라 함은 강변에 사는 사람을 지칭함이었다. (이중화, ‘京城 町洞名의 由來及今昔의 比較’ “別乾坤” 4-6, 1929.10)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를 통해 인왕산아래 명소를 둘러보는 두번째 강의 "윤진영"선생님 중인들이 중심이 되어 시사를 조직하고, 공동시집을 발간하며 "중인문학"을 꽃피우던 지역 조선의 기후에 맞게, 바위산과 소나무가 멋졌던 인왕 인왕산과 그 주변 지역을 멋진 그림으로 남겼던 겸재정선의 많은 작품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따라가보는 재미있는 시간도 이어졌습니다. 수송동 계곡은 겸재정선이 남긴 그림을 기초로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옛모습을 통해, 새것을 만들어가며 과거와 현재가 만나 원형이 복원된 멋진곳이네요.
일제강점기, 해방과 전쟁을 지나 도시 "서울"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경복궁 서쪽 지역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살펴보는 강의 "안창모 선생님" 총독부가 경복궁에 자리잡으며, 서쪽은 동척 관사를 비롯해 제법 규모있는 관사가 들어옵니다. 지금도 그 형태가 많이 남아있다고 하네요. 경무대가 청와대에 들어서면서, 북악과 인왕 아래지역은 도시 개발이 지체되고 단절도 생깁니다.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주변 지역의 분위기도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런 이유로 상대적으로 북촌에 비해 오래된 골목길이 그대로 남아있게 된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되며, 이 지역도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있는데. 어떻게 될까요??
현장답사도 세번 이뤄졌습니다. 그 첫번째는, 안창모선생님과 함께 대한제국의 꿈을 꾸었고 근대 이후 정치외교의 중심지였던 정동일대를 둘러봤습니다. 대한문에서 시작해서, 성공회대성당, 서울시청서소문별관 전망대, 정동,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그리고 사직동에서 마무리 했습니다. 경운궁과 대한문이 대한제국의 중심으로, 어떻게 새로운 도심으로 성장하게 되었는지 살피고 경운궁에 외국공사관이 들어서며, 맞이한 변화들. 학교, 병원, 교회 등 근대의 모습을 어떻게 지켜고 보존할 것인가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두번째 답사는 돈의문 밖, 물길(만초천)을 따라걷는 답사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 선생님과 함께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를 시작으로 독립문공원, 영천시장, 서지西池 터, 경기감영터(적십자병원)를 지나 만초천 위에 지어 구부러진 서소문아파트, 서소문공원까지 갔습니다. 조선후기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이 지역의 변화가 많았다고 합니다. 최초의 일본 공사관이 있던 지역이고, 근대적 시설도 많이 들어섭니다. 사대외교의 상징 영은문을 헐고 자주독립의 의미로 만들어진 독립문 일본에 의해 교묘하게 이용당한 '독립'의 진정한 의미와는 좀 멀기도 했습니다. 경인철도와 종로선 전차의 두선로가 교차하던 지점이라 호텔등도 생겨나고 번성했던 이곳. 만초천이 복개되면서 많은 도시의 변화들이 생겨나고 이젠 그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물길 위에 지어져 휘어진 모습으로 남아있는 서소문아파트가 옛지형을 상상하게 합니다.
세번째 답사는, 경복궁 서쪽의 큰 물길인 백운동천과 옥인동천 물길따라 걷는 답사입니다.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시작하면서, 내사산을 중심으로 경복궁과 종묘,사직, 육조, 종로와 운종가! 600년 계획도시 "한성"의 도시 구조를 이해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치만, 경복궁으로 흘러들어가는 대은암천 길을 따라 동척 관사 지역이었던 통의동으로 들어갑니다. 이 지역은 비교적 오래된 건물과 골목의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물길이 복개되면서, 도로가 생기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길이 또 넓어지고 골목이 나뉘어지고 하는 등, 지형적 변화도 그대로 느껴볼 수 있는 지역입니다. 옥인동은 오전인데도, 찾아오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칩니다. 서울 도심에서, 오래된 과거의 풍경을 간직하며 시간의 층위들이 쌓여가고있는 지역. 또하나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오래된 풍경과 함께 그 풍경을 만들고, 지속시켜온 시간과 역사, 사람들의 이야기도 제대로 기억해서, 역사도시 서울의 또하나의 상징으로 남는 지역이 되길 바래봅니다.
지난겨울부터 봄까지 이어진 촛불, 촛불의 시작은 아마도 세월호참사였을겁니다. 5월, 세월호가 올라온 목포 답사를 시작으로 전우용 선생님과 "광장 민주주의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권력을 사유화한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이후, 전국에서 타올랐던 탄핵촛불! 그 촛불의 연대와 힘으로 대통령을 탄핵하고 "촛불대선"을 치뤘습니다.
다수의 시민들이 외쳤던 "이게 나라냐?" 이 물음에 고민하면서, 2017년, 우리들은 광장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꿈꿨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서부터, 3.1운동과 해방후 어떤 나라를 만들것인가에 대한 고뇌, 4.19혁명과 5월광주에서 6월항쟁까지... "시민"의 힘이 광장으로 쏟아져 분출되었고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광장민주주의"는 우리사회 진보적 변화를 만들어온 커다란 흐름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국가권력의 시대에서 "시민권력"의 시대로! 시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열린 광장에 무엇을 채울 것인지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루었고, 2017년 촛불(혁명, 항쟁, 시위, 운동)을 통해 정권교체를 했습니다.
30년이 흐른 2017년, 대통령이 6월항쟁 기념식에 참석했습니다. 6월항쟁의 정신 속에 문재인 정부가 있다는 것을 천명하며 유가족들과 손잡고 "광야에서"를 제창하고 ‘더 넓고, 더 깊고, 더 단단한 민주주의’를 만들어 갈 것을 약속했습니다. 민주주의가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질때, 6월 정신은 온전하다고 했습니다.
다른어느때보다 감동적인 것은 지난 겨울 촛불을 들었기 때문일까요? 어른아이 할 것없이 많은 분들이 손을 잡고 울면서 불렀던 광야에서가 절절합니다.
6월항쟁의 상징적인 청년 박종철과 이한열.. 그리고 이름불려지지 않는 수많은 종철이, 한열이들 6월의 거리를 달렸던 그들을 만났습니다.
시청광장에서는 '철이 친구들'이 박종철 열사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남영동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고 쓰러진 박종철 부실한 수사와 조작된 기록, 그리고 밝혀지는 죽음의 진실 1987년의 박종철이 2017년의 우리들에게 어떤 말을 건냈을까요..?
서울광장 주변으로 6월항쟁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1987년 5.18 7주기 추도식이 열린 명동성당. 그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며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항쟁 기간 중 농성이 시작되며 시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끊임없이 모여들던 곳입니다.
그 아래쪽 향린교회. 1987년 5월27일 각 분야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대표자 200여명이 모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된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 성공회대성당! 국본지도부는 1987년 6월10일 성당에 들어와 종을 치며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개최를 선언했습니다. 이곳에는 "유월민주항쟁진원지"라는 비석이 남아있는 이유입니다. 해마다 6월이 되면, 6월항쟁의 시작을 알렸던 타종을 재현하며 그날을 기억합니다.
시청을 벗어나, 이한열을 만나러 신촌으로 왔습니다. 그가 다녔던 연세대학교, 그곳에서 멀지 않은 작은 골목에 "이한열 기념관"이 있습니다.
1987년 6월9일 연세대 앞에서 시위하다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고 쓰러진 이한열 그의 나이 21살. 대학교2학년 이었습니다. 병원으로 이동중에도... "내일 시청에 가야하는데....." 이 말을 남기고 잠들었습니다.
이한열을 비롯한 청년들의 희생과 죽음으로 결국 군부는 항복하며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이한열의 쓰러진 모습과 그에게 날아오는 불붙은 화염병 그가 입고 있었던 티셔츠, 청바지.. 운동화.. 책들... 어느 전경의 일기까지 당시를 기억하는 것들이 소박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한열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벌써 30년이 지났네요. 우리는 얼만큼, 어떻게 변했을까요..?
87년, 6월항쟁을 통해 직선제를 이루고 대통령을 국민들이 뽑게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갖췄습니다. 하지만, 지난 30년동안 우리 삶은 양극화. 분열, 단절 속에서 제자리를 돌며 어려워졌습니다.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모습에 더이상 참지 못해, 6월항쟁 보다 더 많은 사람이 거리로 달려나왔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다시 민주주의! 여전히 "더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대입니다.
긴 역사 속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스스로 지키고 키워온 "우리의 것"입니다. 수많은 과거와 6월항쟁이 만들어낸 민주주의가 더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단단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제 더이상은, 퇴보하거나 후퇴하지 않도록 뿌리를 튼튼하게 내려야 합니다. 그것이 지난 30년동안 몸소 체험하고 배웠던 경험이 아닐까요? "밥이 민주주의"이고, 우리 일상이, 내 삶이 민주주의와 더욱 밀착할때 6월항쟁은 우리 곁에서 살아숨쉬게 될겁니다. 어떤 민주주의를 만들어갈지, 기분좋은 상상을 해봅니다.
6월의 거리에서, 30년전 청년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기억하면서, 더불어 함께 좋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갖습니다.
KYC가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청년들과 의견을 나누고, 내년까지 지속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가기 위해 두 가지의 모임을 엽니다. KYC와 함께해온 체인지리더는 물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모임입니다.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사이트(http://seoulyg.net/) 가입 후 신청 가능합니다.
첫 번째 모임은 2017대선정책연구소입니다. 지난 총선, 청년의 목소리를 담은 정책은 어디에 있었나요? 내년 대선에는 청년이 말하는 정책이 제대로 이야기되어야 합니다. 청년들이 모여 대선 정책요구안을 미리미리 준비하는 모임입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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