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에 엄청난 국민적 저항 불러 일으켜
민문연 이민우 운영위원장은 답하라(2)
이민우 운영위원장, 지난 5월 14일부터 질문을 하고 있는데 답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맞으면 맞다, 틀리면 틀리다, 답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아무런 답이 없어서 다시 촉구하면서, 어제(6. 25) 올린 글에서 두번째로 언급한 중대한 내용에 대한 질문을 아래와 같이 다시 한번 올리니 답을 주기 바랍니다.
(질문)
2.
그리고 개정된 정관에 보면 “운영위원장은 당연직 이사가 된다”라는 규정이 엄연히 살아있음에도 이사회에도 못 들어간 이민우 운영위원장, 이유가 무언가? 정말 위원장 자격이 있는가?
전국의 만3천명의 회원을 대표해서 겨우 이사회에서 한자리 차지하는 것 마저 놓치고 이사도 못된 이민우…전국의 회원 망신은 이민우가 다 시키고 있다. 창피하기 짝이 없다. 그러고도 그 자리에 있고 싶은가?
2018. 6. 25
회원 여인철
(전 대전지부장, 9대 운영위원장)

연구소 소장을 지낸 한상범 교수님이 지난 10월 15일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교수님은 2001년 2월부터 2003년 9월까지 연구소 2대 소장을 지내셨으며 2002년 4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끝으로 공식적인 대외활동은 거의 못하셨다. 그 이유는 갑자기 찾아온 병마 때문이었다.
선과 악의 문제에 있어서는 조금의 주저함이 없으셨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본질을 꿰뚫어 설명하셨던 교수님, 실천하지 않고 현학적인 수사만 늘어놓는 지식 장사꾼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시던 교수님을 더 이상 뵙지 못함이 안타깝다. 연구소 소장님으로 2년 남짓 모셨던 인연으로 몇 가지 교수님과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나마 고인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1991년 창립부터 10년 동안 봉사해온 김봉우 초대 소장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갑자기 소장 직을 그만둔 후 후임 소장 물색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조문기 이사장님께서 신의 한 수처럼 모셔 온 분이 바로 한상범 동국대 법대 교수님이었다. 연구소로서는 천군만마요 야구로 치면 믿을만한 구원투수의 등판이었다. 왜냐하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법학계에서 한교수님만큼 친일청산의 중요성을 역설한 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1년 <한국법학계를지배한일본법학의유산>을 발표해 법학계의 일제잔재청산을 공개적으로 문제화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의 법문화와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일제잔재 무엇이 문제인가>등 제목만보면연구소가 펴낸책 이라고해도 믿을정도로 한교수님은 친일청산문제에 남다른 관심과 대안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게다가 <박정희, 역사법정에세우다><전두환체제의 나팔수들>에서 볼수 있듯이 독재와 불의에 대해서는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분이었다. 그야말로 준비된 구원투수의 등장이 아닐 수 없었다.
연구소 소장 재임 시절 술을 전혀 안 하시는 이유를 여쭤보니 1980년대 초 평생 마실 술을 다 드셨다고 한다. 이유인즉 신군부 시절 불법으로 연행당해 며칠 동안 고초를 겪고 난 뒤 울화가 치밀어 매일 밤 독주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법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무법이 횡행하는 시절을 살아내기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복기, 김기춘, 우병우 등 시대를 막론하고 늘 ‘법꾸라지’들이 난무했기에 교수님은 ????화있을진저 너희들 법률가여????라는책을펴내서법기술자들을질타했다.
또한 법 문구를 어렵게 만들고 난해하게 표현하여 특권층의 도구로 삼아선 안 된다며 <한글헌법 노트><한자숭배 나라망친다>는책을 펴내기도했다.법학자로서보기 드문 한글 사랑으로 한교수님은 ‘외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번은 재일교포 단체 초청으로 일본을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다. 독재시절 민주화운동을 했던 재일교포들과 양심적인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한교수님은 원고 없이 유창한 일본어로 잠시 강연하시더니 곧바로 “나는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자격으로 왔으므로 이제부터 한국말로 연설하겠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신다. 실용에 앞서 자존을 중시하는 태도였다.
민족적 자존 나아가 인간의 존엄은 개성 출신으로서 6·25의 참화를 처절하게 겪어낸 한교수님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다. 따라서 인간 존엄을 해치는 체제에 대한 본능적 저항은 한교수님에게는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교수님은 멀리 지방 출장길은 물론이거니와 가까운 외출 때도 늘 작은 책을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시집일 때가 많다. 한번은 나에게 “시인 중에 누굴 좋아하시나?”라고 물으시며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은 시와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셨다. 사회적 모순과 싸운답시고 자칫 거칠고 메마를 수 있는 감정을 다독이며 사회운동의 초심을 지키라는 조언이셨을 것이다.
지방 출장 중에 부득이 한방에서 묵어야 할 때도 전혀 개의치 않으시면서 늦은 시간까지 당대 인물들에 대한 평을 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당시 평판에 올랐던 인물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명박근혜 정권 때 중용되어 지금까지도 몇몇은 여전히 악명을 떨치고 있다.(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그 인물평들을 녹음해 두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이 밖에 서울 문래동 박정희 흉상 철거로 나를 포함해 여러 명이 재판을 받을 당시, 법정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법적, 역사적으로 박정희의 악행을 거론하며 흉상 철거는 정당하다고 저항권의 입장에서 무죄를 주장하던 한교수님은 피고인석에 선 우리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셨다.
이제 연구소는 1991년 창립 이래 터 잡고 활동하던 동대문시대를 접고 용산시대를 연다. 동대문시대에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성취했다면 용산시대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과 대중화라는 또 다른 과제를 안고 있다. 동대문을 떠나며 가장 어려운 시절 연구소 2대 소장으로서 큰 역할을 해주셨던 한상범 교수님이 더욱 그리워진다.
“국가보안법? 허~ 참나. 머릿속의 생각을 벌주는 나라가 어딨어?”
방학진 기획실장
和山僧韻(화산승운)
不德無才器(부덕무재기)
浮遊獨醉吟(부유독취음)
前宵巖下宿(전소암하숙)
此夜覓松林(차야멱송림)
山僧의 詩에 화답하다
덕이 부족한 데다가 才器도 없어
이리저리 떠돌며 홀로 취해 읊소
간밤엔 바위 밑에서 잠을 잤는데
이 밤에는 솔숲을 찾아볼까 하오.
<時調로 改譯>
부덕하고 才器 없어 떠돌며 홀로 醉吟
간밤엔 바위 밑에서 잠을 청해 봤는데
이 밤엔 소나무 숲을 찾아볼까 한다오.
*和韻: 남이 지은 詩의 韻字를 써서 화답하는 詩를 지음 *不德: 덕이 없거나 부족
함 *才器: 사람이 지닌 재주와 기량. 재주가 있어 人才가 될 만한 인품. 또는 그런
사람 *浮遊: 물 위나 물속, 또는 공기 중에 떠다님. 행선지를 안 정하고 이리저리
떠돎 *醉吟: 술에 취해 詩나 노래를 읊음 *前宵: 어젯밤 *此夜: 이 밤 *松林: 솔숲.
<2018.7.7, 이우식 지음>
■방송 : 경남CBS<시사포커스 경남> (창원 FM 106.9MHz, 진주 94.1MHz)
■제작 : 손성경 PD, 주소원 작가실습생
■ 진행 : 김효영 기자 (경남CBS 보도국장)
■ 대담 : 김민철 박사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김효영 : 영화 ‘군함도’를 계기로 일제 강점기에 자행된 우리 국민들의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죠. 그러나 여전히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이 부정되고,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도 마무리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길 좀 해보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김민철 박사 연결되어있습니다.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 김민철 박사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김민철 : 네, 안녕하세요?
◇ 김효영 : 다시한번 정리하죠.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이 이뤄졌던 시기는 언제입니까?
◆ 김민철 : 법적으로나 학술적으로 1939년부터 1945년 사이로 보고있습니다.
◇ 김효영 : 39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 김민철 : 네. 1938년에 일본이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바로 시행하지는 않습니다만 그 이듬해부터 실질적으로 그런 내용들이 적용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1939년부터 강제동원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김효영 : 정확한 인원은 파악이 되고 있습니까?
◆ 김민철 : 정확한 인원은 지금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당시 일본 정부나 조선총독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자료를 가지고 최소 인원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김효영 : 얼마입니까?
◆ 김민철 : 우선 몇 가지 유형에 따라 좀 달라지는데요. 군인 군속의 경우, 군 병력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한 42만 명 정도 되고 그 다음에 국외 시베리아나 일본 등 노동력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한 75만 명 내지 80만 명 정도 되는데요.
최소 인원이라 하면 이 통계상에는 1945년 4월 이후 통계는 다 빠져있거든요. 조사가 안 된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게 최소 인원입니다.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 정확하게 몇 만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동원했던 주체인 일본 정부나 기업이 자료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설들이 나오는데 최소한 당시에 39년에서 45년 사이에 120만 명의 조선의 젊은 사람들이, 남녀 청장년들이 강제로 동원되었고요. 그리고 국내 동원된 게 있습니다. 이것은 1개월, 3개월 도내, 도외 동원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주로 북쪽 지방이 많죠. 전쟁을 하기 위해서 북쪽에 여러가지 군수공업들이나 도로를 만든다든지 하는데 그렇게 동원된 경우가 이게 총 연인원해서 550만 명이니까요.
쉽게 말씀드리면 집집마다 한 명씩 동원됐다고 이해하시는 게 훨씬 쉽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 김효영 : 집집마다 한 명씩 동원됐다?
◆ 김민철 : 네, 당시 인구가 2천만 명 좀 넘으니까 가구당 한 명씩 동원됐다고 생각하면 빠르죠.
◇ 김효영 : 그렇군요. 그런데 일본 정부가 이 강제동원을 인정을 하는 듯하기도 하고, 아닌 듯하기도 하고 태도가 자꾸 변하고 있죠?
◆ 김민철 : 근본적으로 바뀐 건 없습니다. 왜 그런 착각을 할 수 있냐면, 2년 전에 아베 정부가 메이지의 산업혁명 유산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했습니다.
◇ 김효영 : 유네스코 등재.
◆ 김민철 : 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하려고 했죠. 그 소식을 듣고 한국과 일본의 피해자와 민간단체에서 이것은 도저히 들어줘서는 안 되겠다. 왜냐면 소위 군함도 같은 주요 시설들 중에는 유네스코에서 지향하고 있는 인권이나 보편적인 가치 이런 것과는 정배치되는 강제노동이나 연합군 포로 노동도 있고,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강제로 연행해서 노동을 시켰거든요. 국제법상에서도 어긋나는 그런 강제노동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이른바 어두운 역사를 갖고 있는 거죠.
그런 피해자들의 증언이나 자료들을 가지고 국제사회에 호소를 했죠. 그걸 그대로 등재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2년 전 총회에서 당시 일본대사가 공식적으로 국제사회에서 회원국을 상대로 강제노동이 있었고 유네스코의 권고대로 거기에 그런 역사를 기록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언을 했습니다.
◇ 김효영 : 그 발언을 번역해보면요. ‘수많은 조선인 등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연행되어 가혹한 상태로 노동을 강요당했다’ 이렇게 돼있습니다.
◆ 김민철 : 그게 이른바 ILO(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국제노동기구)에서 규정하고 있는 강제노동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일본 관광장관이 그걸 바로 부정하고 나왔죠. 형태상으로는 강제노동일 수는 있으나, 그 것까지는 부정하지는 못 하니까. 법적으로 국제노동기구에서 말하는 강제노동은 아니다. 왜냐면 1910년 강제병합이 일본으로서는 지금까지 합법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합법이기 때문에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도 합법이고, 전쟁 상황이기 때문에 강제노동의 예외 조항에 해당된다. 강제노동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을 했고요.
또 하나 그 이유는 한국에서 2012년 5월 24일 한국 대법원이 징용 당했던 분들의 피해 호소를 강제동원당해서 강제노동했기 때문에 피해 배상하라고 한국 법원에 호소를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일본 기업이 배상 책임이 있다고 중요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 김효영 : 미쓰비시하고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했던 소송.
◆ 김민철 : 네, 그걸 병합해서 했는데요. 하급심에서는 일본 기업의 입장을 들어줬는데 대법원이 그걸 파기환송했죠. 상당히 의미 있는 판결인데. 고등법원으로 돌린 다음에 금액을 어떻게 할 것이냐를 놓고 최종 확정을 해야 되는데 그것을 지금 아직 못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원고로 계셨던 분들이 지금은 다 돌아가셨죠.
◇ 김효영 : 아이고, 그 몇 년 사이에 또 다 돌아가셨군요.
◆ 김민철 : 나이가 최소한 팔십, 구십 넘었으니까.
◇ 김효영 : 그 때 박근혜 정부 때 아닙니까? 우리 외교부가 또 이상한 일을 하지 않았나요?
◆ 김민철 : 네, 나중에 확인이 됐는데 외교부에서는 대법원에 공문을 보내서 사실상 ‘하지 마라, 한일관계에 굉장히 심각한 해를 끼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의견을 보냈죠. 이것은 한국 외교부가 정말 우리나라 외교부인지 하는 그런 비판을 면하기가 힘들죠.
◇ 김효영 : 적어도 지난 정부에서 처럼 외교부까 해서는 안 되겠죠.
◆ 김민철 : 그렇죠. 엄연하게 그것은 안 되는 일이죠. 그렇지만 한국 정부의 경우에 전체적인 방향에 대해서는 지난번 대통령의 8·15담화나 일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우리가 조금 암시할 수 있듯이 해결하려는 그런 의지는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보입니다.
◇ 김효영 : 이제 남은 것은 처벌 또는 배상, 그리고 제대로 역사에 남기는 기록 이런 작업들이 앞으로 남은 과제이지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될까요?
◆ 김민철 : 우선, 많은 부분 진상 규명이 됐습니다만 여전히 절반 이상은 피해가 밝혀지지 않았거든요? 추가적인 진상 규명 작업들이 우선 있어야 됩니다. 그게 국가 차원이든 시민사회 차원이든. 그 다음에 중요한 거는 몇 분 안 되지만 피해자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추가적인 배상 조치나 그런 것들이 되어야 하고요. 그리고 그런 것들은 교육의 자료로 계속 남겨져야 되고 기록할 의무가 다음세대에게 있기 때문에 잘 보존하고 교육의 자료로 정리하는 작업들이 필요하죠.
◇ 김효영 : 일본의 사죄, 아베 정권에서는 힘들겠죠?
◆ 김민철 : 거의 뭐 불가능하다고 보입니다. 국제사회에서 다들 입을 모아서 비판하고 있는 권고하고 있는 위안부 문제조차도 털끝만큼 할 생각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은 기대하기 어려울 겁니다.
◇ 김효영 : 마지막으로요. 우리가 일제 강제징용을 기억해야 되는 이유 말씀해주시고 인터뷰 마치겠습니다.
◆ 김민철 : 우선 많은 선배세대들이 식민지 시기에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동원되어서 고통당했습니다. 그런 아픈 역사들을 기록하고 기억해야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과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그런 측면도 있고요. 또 하나는 개인의 소중한 권리들이 침해당했습니다. 침해당한 권리들을 우리가 기억할 때 비로소 현재의 권리들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조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의미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 김효영 :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 김민철 : 네, 고맙습니다.
◇ 김효영 : 지금까지 민족문제연구소의 연구위원 김민철 박사 만나봤습니다.
<2017-11-08> 노컷뉴스
☞기사원문: “대법원 판결 늦어져 일본배상 청구인들 모두 사망”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