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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비평] 수정명령, 검정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만드는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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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비평] 수정명령, 검정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만드는 마법

익명 (미확인) | 일, 2012/10/07- 15:14

 

정부가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어 논란이 뜨겁습니다. 

여기에 법원도 최근 정부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렸는데요.
지난 9월 15일, 서울고등법원은 한국사 교과서 6종의 집필자 12명이 교육부장관을 상대로 제기한 수정명령 취소소송에서 교육부의 수정명령이 적법하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과연 국가권력은 교육내용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 우리 헌법이 교육에 대해 취하고 있는 정신은 무엇인지, 판결의 쟁점을 짚어보며 고민해봤으면 합니다.

 


 

[광장에 나온 판결] 교육부의 한국사 교과서 수정명령 항소심 적법 판결  

수정명령, 검정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만드는 마법

 

 

서울고등법원 제4행정부 2015. 9. 15. 선고. 2015누41441 수정명령취소
판사 지대운(재판장) 강영훈 박창제 

 

 

김선휴 간사

김선휴 참여연대 시민감시팀 간사, 변호사

 

 

 

현재 대한민국의 고등학교용 ‘한국사’ 교과서는 국정교과서가 아닌 검정교과서이다. 국정교과서는 교육부가 직접 또는 위탁하여 편찬하고 모든 학교가 이를 반드시 사용하여야 한다. 반면 검정교과서는 민간에서 집필한 도서에 대해 교육부장관이 일정한 절차를 거쳐 검정합격을 결정하면, 각 학교가 합격된 검정도서 중 해당 학교에서 사용할 도서를 선택할 수 있게 되어있다. 이는 다양하고 탄력적인 내용의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 정답을 찾아가고 다양한 사고방식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며 교사와 학생의 교재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교육부장관이 검정에 합격한 6개 출판사의 한국사 교과서에 대하여 내용을 수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를 들면, 국군의 거창양민학살을 서술한 부분에 대해 ‘균형 잡힌 서술을 위해 북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실례도 제시하라’, 북한의 주체사상을 소개한 부분에 대해 ‘학생들이 잘못 이해할 수 있으므로 북한이 주장하는 자주 노선이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며 대내통합을 위한 체제유지전략이었음을 서술하라’, ‘피로 얼룩진 5.18 민주화 운동’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다’로,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다니’를 ‘극단으로 치닫는 강압정치’로 수정하라는 것 등이다. 

 

이에 위 교과서의 집필자들은 교육부장관의 수정명령이 법적 근거가 없고 절차적으로도 문제가 있으므로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1심인 서울행정법원은 교육부장관의 수정명령이 적법하다고 인정하였고, 항소심인 서울고등법원도 1심판결을 거의 그대로 원용하면서 교육부장관의 수정명령을 정당화해주었다.

 

이미 검정에 합격한 교과서의 내용을 교육부장관이 수정하라고 명령할 수 있을까? 

 

이는 근본적으로 ‘국가권력이 교육내용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또한 국가권력의 교육내용 개입에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면, 부당한 개입을 막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와 요건이 필요한가를 묻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국가와 교육의 관계에 대해 규정한 헌법에서부터 찾아보자.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 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헌법 제31조 제4항)

 

헌법의 위 규정은 교육이 국가 백년대계의 기초인 만큼 외부세력의 부당한 간섭에 영향 받지 않도록 교육자나 교육전문가에 의하여 주도되고 관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위해 교육행정권력에 의한 교육내용의 개입이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요구 또한 위 헌법규정에서 도출된다. 그런 점에서 헌법재판소도 “국정교과서제도는 정부의 행정관료에 의하여 교과내용 및 교육내용이 영향을 받을 소지가 있어 교육의 자주성을 보장하는 위 헌법규정과 모순될 수 있다”고 판시한 것이다(헌재 1992. 11. 12. 89헌마88 결정). 
 

우리 사회의 가치체계를 나타내는 헌법이 교육에 대해 취하고 있는 이와 같은 기본 관점을 전제로, 이 사건 판결이 과연 이러한 헌법정신에 충실한 판결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쟁점 ① 법률유보원칙 : 검정 권한이 있다면 수정 명령을 내릴 권한도 있다?

 

첫 번째로 살펴볼 쟁점은 법률유보원칙 위반 여부, 즉 교육부장관의 이 사건 수정명령이 법률에 근거를 둔 것인지 여부이다. 

대통령령인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 제26조 제1항은 교육부장관에게 검정도서의 ‘수정’을 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통령령의 근거가 되는 초·중등교육법 제29조 제2항은 교과용도서의 ‘범위·저작·검정·인정·발행·공급·선정 및 가격 사정(査定)’에 필요한 사항을 대통령령에 위임한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 교과용 도서의 ‘수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 때문에 교육부장관의 수정명령이 ‘법률’에 근거한 것인지 문제되었다. 

 

이에 대해 법원은 “‘검정권한’에는 본질적으로 ‘그 내용을 교육목적에 적합하게 수정하도록 명할 수 있는 권한’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석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였다. 쉽게 말해 ‘검정은 수정을 포함’하기 때문에 ‘검정’의 근거규정인 초·중등교육법 제29조 제2항이 ‘수정명령’의 근거조항이기도 하고, 따라서 이 사건 수정명령은 법률유보원칙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표현상의 잘못이나 기술적 사항 또는 객관적 오류를 바로잡는 정도를 넘어서서, 이미 검정을 거친 내용을 실질적으로 변경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수정명령권한까지도 검정권한에 포함된다는 해석은, 검정권한의 내용과 범위를 너무 확대해서 해석한 것은 아닐까. 검정교과서제도를 채택한 취지는 헌법이 천명한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구현하고 국민의 교육받을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데 있다(대법원 2011두21485 판결 참조). 그렇다면 국가의 검정권한의 내용과 범위는 국가의 교육내용에 대한 개입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방향(내용의 변경을 가져오는 수정명령도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확대 해석하기보다는,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구현할 수 있도록 제한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쟁점 ② 절차적 적법성: 검정절차의 ‘취지를 구현’할 수 있는 절차였는가? 

 

행정부와 법원의 판단대로 내용의 실질적 변경을 가져오는 수정명령도 교육부장관의 검정권한에 포함된 것이라면, 그와 같은 수정명령이 적법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인지, 이 사건 수정명령은 그와 같은 절차를 거친 것인지 여부가 두 번째 쟁점이다. 

내용의 실질적 변경을 가져오는 수정명령을 내리기 위해 거쳐야 할 절차에 대해서는 2013년 대법원에서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이 역시 검정을 마친 교과서에 대해 교육부장관이 내린 수정명령을 다툰 사안이었는데, “(수정명령이) 이미 검정을 거친 내용을 실질적으로 변경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에는 새로운 검정절차를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으므로 검정절차상의 교과용도서심의회의 심의에 ‘준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판시하였던 것이다(대법원 2013. 2. 15. 선고 2011두21485 판결 참조). 
 

이 사건 수정명령을 내리기 위해 교육부장관은 새로운 검정절차를 다시 거치지는 않았고, 대신 ‘수정심의위원회’라는 것을 구성하여 심의를 진행한 뒤 수정명령을 내렸다. 법원은 이 ‘수정심의위원회’의 위원 선정방식, 위원구성, 소집절차와 심의방식 등이 교과용도서심의회의 경우와 거의 동일하게 이루어졌으므로 검정절차에 ‘준하는’ 절차라고 인정하였다. 심의기간이 비교적 단기간이라거나 수정심의회의 심의사항 및 수정심의회 위원의 인적사항이 비공개되었다는 사정만으로는 절차적 위법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검정절차에 ‘준하는’ 절차를 거쳤는지 여부를 지나치게 형식적으로만 판단한 것이다. 국가의 공권력 행사에 있어 특정한 절차를 요구하는 것은 그 절차의 보장을 통해서 달성하고자 하는 실질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위 2011두21485 판결에서 검정절차에 ‘준하는’ 절차를 요구하는 이유가 “그렇지 않으면 행정청이 수정명령을 통하여 검정제도의 취지를 훼손하거나 잠탈할 수 있”기 때문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렇다면 검정절차에 준하는 절차는 단순히 ‘형식적’으로 교과용도서심의회의 절차와 ‘유사한 외관’을 갖춘 절차를 거쳤다는 점만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검정절차를 둔 “취지를 구현할 수 있는 절차”여야 한다. 따라서 법원은 단순히 수정심의회의 의사/의결정족수, 기초심사와 본심사의 분리운영, 위원의 분리구성 등이 교과용도서심의회와 거의 유사하게 이루어졌다는 외관의 판단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수정심의회 절차의 투명성, 수정심의회 구성원의 다양성, 교육행정권력으로부터의 일정한 독립성, 심의회 내에서의 충실한 토론과 의견 개진 및 이를 위한 충분한 기간 등이 확보된 절차였는지, 그래서 검정절차를 둔 취지를 구현할 수 있는 절차였는지를 더욱 면밀하게 판단했어야 한다. 재판이 있기 전까지 수정심의회 및 그 사전절차에 대해 거의 공개되지 않았고, 재판과정에서도 그 절차의 부실함, 불투명성이 드러났음에도 절차적 적법성을 인정한 법원의 판결은 지나치게 형식적인 판단에 그쳤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려울 것이다.  

 

쟁점 ③ 재량 일탈·남용: 검정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만들 수 있는 재량?

 

이 사건 판결의 마지막 쟁점은 재량의 일탈·남용 여부, 즉 이 사건 수정명령이 교육부장관에게 주어진 재량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판단이다. 

법원은 검정권한에 포함된 수정권한을 ‘그 내용을 교육목적에 적합하게 수정하도록 명할 수 있는 권한’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수정명령은 ‘교육목적에 적합하지 않은 것’을 ‘적합한 것’으로 바꾸도록 하는 범위에서만 정당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법원은 이 사건 수정명령들이 “오해 또는 오인의 소지가 있는 표현을 없애거나 고치도록 한 것”, “중요한 사안에 대한 서술의 비중을 다른 쟁점과 균형이 맞는 수준으로 늘리기 위한 것”, “학생들에게 보다 완전하고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재량의 범위 내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르면 법원은 수정 전 교과서의 내용이 “교육적합성”을 갖추지 못해 검정도서로서 도저히 유지될 수 없는 정도라고 본 것은 아니다. 다만 법원이 보기에는 수정명령이 서술의 균형을 맞추고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향이기 때문에 수정명령대로 고쳐도 무방하다는 취지로 읽힌다. 사실 수정 전 교과서의 내용이 교육적합성을 갖추지 못한 정도라면 불과 3개월 전 더욱 엄격하게 진행된 검정절차에서 합격했을 리도 만무하다.

 

수정 전 교과서의 내용(A)과 수정명령의 내용(B)에 대한 선호나 가치평가를 떠나서, 만약 A와 B 모두 검정교과서로서 교육적합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면, A를 반드시 B로 바꾸도록 강제하는 수정명령은 ‘교육적합성’이라는 목적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다. A라는 내용의 교과서도, B라는 내용의 교과서도 검정교과서 제도 하에서 공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계속 강조하는 바와 같이 헌법정신과 검정제도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교육적합성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서술의 순서나 분량, 자료의 취사선택, 세부적 표현 등은 역사학자이자 교육전문가인 저자들에게 맡겨진 자율의 범위 내에 있어야 한다. 명백하게 교육적합성을 상실한 것도 아닌 검정합격도서에 대해, 교육부가 지엽적인 서술 순서나 세부적인 표현까지 고치도록 명령하는 것을 재량의 이름으로 허용한다면, 이는 결국 검정교과서 제도를 수정명령을 통해 국정교과서와 같이 운영할 수 있는 재량을 허용하는 것과 같다. 

 

바람직한 해결을 기대하며 

 

사실 문제의 발단은 첫 번째 쟁점인 법률유보원칙 위반에 있다. 초·중등교육법 제29조 제2항이 교과서제도에 대해 법률단계에서 전혀 정하지 않은 채 포괄적으로 대통령령에 백지위임하고 있다 보니, 수정권한의 존부와 범위, 필요한 절차가 모두 해석에 맡겨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행정권의 자의적 해석이 불가능하도록 교과서제도의 중요한 내용들을 법률의 단계에 구체화시켜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그와 같은 입법적 개선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라면, 법원은 존재하는 법령을 최대한 헌법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해석함으로써 행정권의 위헌적인 공권력 행사에 제동을 걸어야 할 책임이 있다. 대법원 상고심에서는 보다 현명한 판단이 내려지기를 기대해본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최근 판결 중 사회 변화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거나 국민의 법 감정과 괴리된 판결, 기본권과 인권보호에 기여하지 못한 판결, 또는 그와 반대로 인권수호기관으로서 위상을 정립하는데 기여한 판결을 소재로 [판결비평]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로 법률가 층에만 국한되는 판결비평을 시민사회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다양한 의견을 나눔으로써 법원의 판결이 더욱더 발전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시민들의 의견

04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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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1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화, 2019/04/0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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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소파 방정환에 대한 친일행위와 조선일보와의 관계에 대하여 알고 싶은데..제가 역사적 사실을 많이 알고 있지가 않아서요..!

방정환은 존경 받아야 하는 사람인지? 조선일보 사주와의 관계에서 무관한 사람인지가 궁금합니다.

화, 2019/04/09-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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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야를 읽고

‘김천교육너머’ 사무국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 김천 출신으로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던 ‘김단야’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없다고 하자,
“우리가 공부해보고 김천에 이런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걸 알리는 작업을 했으면 해요.”
그리고는 그에 대한 참고 자료들을 소개했다.
경북역사교사모임에서 경북의 항일운동가를 찾아 김천을 답사한 적이 있다고 해서 물어보니
“김천엔 흔적이 너무 없어서 별로 못 가보았다.”면서
“‘단야’라는 소설이 있으니 읽어보세요.”
김찬수 사드저지대경대책위 대표가 귀뜸해 주었다.

시립도서관 도서 자료를 검색하니 관련 자료뿐만 아니라 소설책 ‘단야’도 없었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서 그런가? 할 수 없이 인터넷 서점을 뒤졌다. ‘한국사회주의 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길사)외에는 없었다. 중고장터를 뒤졌다. 정동주 지음 전 7권으로 된 대하소설. 발간연도는 1992년이었다. 출판 당시 평을 찾아보니 나쁘지 않은데 절판된 모양이다.
‘단야’는 김천의 독립운동가 ‘김단야’(본명 김태연)를 모델로 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 운동을 선택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은 그가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러시아인이든 하나같이 자신의 이해관계, ‘이기심’을 따라 움직인다.
문수리, 후에는 대양읍에서 자신의 이익과 욕망에 따라 살아가지만, 그것은 거대한 정치 흐름 속에서의 삶이다. 그 흐름 속에서 인물들의 활동 범위도 넓어져 갔고, 헌병보조원이 되는 등 일본에 적극 가담하여 동포를 괴롭히는 데 앞잡이가 되기도 하고, 일본인과 친일파를 죽이거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반일 행동을 하기도 한다.
조선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사람들은 지배계급인 양반의 수탈에서 일본에게 나라를 뺏기는 과정에서 일상의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의식하든 못하든 그 속에서 각자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구한말부터 일본인들은 조선을 지배하러 치밀한 계획아래 들어오고 있었다.
“일본의 특징은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오.”
조선을 침략하기 몇십 년 전부터 첩자들을 보낸다. 조선의 말을 배우고, 조선 사람들의 성격을 분석하고, 고을의 가장 신임 받는 명망가를 조사한다. 한편으로는 가장 천대받는 출신 중 똑똑한 아이들을 조사한다.
그 결과 조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분상의 차별이고, 조선인들은 성급하고 말로 싸우지 문서에 약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가장 공을 들여야 할 것은 공동체 파괴라는 분석을 내린다.

대양읍에 온 일본인은 먼저 돈밖에 모르는 최건이라는 인물을 이용한다. 그의 이름으로 땅을 사고 제재소를 차려서 일본인 기술자를 불러서 운영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그 고을의 노름을 좋아하는 사람을 시켜서 화투를 보급한다. 처음엔 다 잃어주며 농민들을 화투판에 끌어들여 드디어는 그들의 집과 땅을 넘겨받는다. 일본인들이 많아지자 그들이 사는 집을 짓고 유곽을 만들어 최건에게 관리하게 한다. 그러다 최건이 기억에만 의존해 관리하는 걸 약점으로 문서를 만들어 도장을 찍게 하고 제재소에는 손을 떼게 한다.
그리고 가장 유지였던 이들을 이런 저런 친분과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야금야금 그들의 이름으로 소작인들에게 장리빚을 주게 하고, 땅을 사게 하고, 그래서 다시 그들에게서 그 땅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 자녀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낸다. 당연히 마을 유지들은 자식이 일본에서 공부하면 자신의 지위가 더 높아지리라는 기대 심리로, 신분이 천한 김형구는 돈은 많으나 아직도 차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자식만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그 유혹에 응한다. 일본이 이렇게 유지들의 자녀들을 유학 보내는 것은 일종의 볼모로 데려가는 것이다. 점점 요구 조건을 세게 해서 들어주지 않을 때 걸핏하면 아이들을 들먹임으로써 점차 자신들이 쳐놓은 그물망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한편 천민 출신으로서 뛰어난 아이들도 유학대상이다. 그들의 울분과 분노로 조선을 뒤집으려 하는 것이다. 조선은 조선인의 손으로 망하게 한다는 치밀한 프로젝트였다. 이 과제에 일본에서 들어온 경찰과 깡패들, 또 군대, 헌병들은 당연히 힘으로 조력하였다.
김형구의 아들 단야는 그런 천민, 그 중에서도 가장 천한 백정의 혈통이었다. 할아버지 대부터 돈을 모아 부자가 되고 신분의 차는 없어졌다고 하나 그는 어릴 때부터 그 백정의 출신이라 해서 받는 냉대를 느끼고 자랐다.
이복형 시영은 유부녀인 순개와 바람이 났으나 순개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자 외면하고, 부모가 없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시집가야 하는 양반집 딸 명채를 아내로 맞이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 가로놓인 신분 차이를 뛰어넘지를 못한다. 명채는 어쩔 수 없이 시영의 아내로 살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남편과 시댁을 멸시하고 은연중 남편을 냉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영이 일본인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도망가서 숨어 살며 독립운동을 하는 사이, 명채는 가끔 시영의 소식을 몰래 전해 주던 시영의 친구 정수와 사랑을 나누다가 들키자 아이를 두고 쫓겨난다.

단야 역시 어린 시절 정수 아버지 강재상의 사랑방에서 만난 채호와 게걸 목사가 세운 교회학교에서 배우면서 양반 딸인 지호와 사랑이 싹트지만, 그 만남은 순탄할 수가 없었다. 강재상은 지호와 단야가 어울리는 것을 묵인했지만, 그 어머니는 싫어한다. 어머니의 강요로 혼례식을 치른 첫날 지호는 엽기적인 행각으로 신랑을 노하게 하고 파혼을 한다. 그리고 단야를 찾아 일본으로 떠났으나 둘은 같이 살면 살수록 신분이라는 벽을 깨뜨릴 수가 없었다. 절망한 지호는 아이를 낳자마자 죽여 버린다. 그리고 단야와 조선으로 돌아와 오랜 고민 끝에 헤어지기로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단야는 일본에서 독립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땅에서 쫓겨난 듯 살아야 하는 천민의 처지에서 인간답게 살다 죽을 수 있는 해갈과 해방의 샘물’을 갈구하게 된다. 그에게 사회주의를 가르쳐준 스승이 조선 총독부에서 제의한 문화제도 연구를 하러 조선으로 들어가면서 단야에게도 같이 하자 제의했을 때, 그는 스승에게 실망하고 단호히 거부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일본의 사회주의 역시 일본에 오면 일본 제국주의화한다는 것을.
단야, 지호의 두 오빠, 최석두 모두 아버지가 처음부터 또는 피치 못해서 친일의 길로 들어섰고, 그 아버지들의 욕망 때문에 일본에 유학 왔지만, 부모들과 달리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은 최건의 아들 최석두.
단야는 러시아로 간다. 러시아에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넘어온 조선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주로 함경도에서 힘들게 살다가 시베리아로 가면 먹고 살만한 것을 알고 겨울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이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촘촘히 초소를 세우고 총을 쏘아댄다. 총탄을 피해가며 강을 건너가면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죽은 걸 날이 밝아서야 확인하게 된다. 일단 강을 넘어가면 시베리아에 정착해 살 수 있다. 당시 시베리아 땅을 개간하는데 조선은 귀한 자원이었고, 그러한 러시아에 많은 조선인들이 귀화한다. 제정러시아 때는 짜르 왕정을 위해 러일전쟁에 가담하고 혁명이 일어나서는 자연스럽게 백군위의 편을 들게 된다. 그러나 백군위 쪽을 일본군이 지원하고 볼세비키 혁명에서 적군의 승리가 확실시되면서 조선인들은 갈등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적군에 가담하기로 한다.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자 더 많은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하러 또는 일본의 수탈을 피해 시베리아로 향했다. 개중에는 조선에서 지배계층이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여기서도 지배계층이 되길 원해서 갈등이 있기도 했다.

단야는 독립에서 나아가 해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의미의 조선 해방은 신분우월주의자들의 뿌리 깊은 참회와 그 실천이 한 켠에 서고, 차별 받아온 사람들의 몸에 밴 굴종의식과 자기 비하를 태워내고서 평등관을 받아들이는 실천이 다른 한 편에 서서 이룩해내는 것일 때에라야만 조선인 모두를 위한 해방이 될 것이야.”
라고 그는 조선의 해방, 사랑과 평등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레닌에게서 발견하고 그에게 고려연방제, 또는 고려연방국을 제의한다.
“농민과 노동자의 나라가 러시아이며, 러시아의 희망은 농민과 노동자로 하여금 러시아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데 있음을 맨 처음 설파한 사람도 레닌이오.”
“레닌은 참고할 만하다고 믿어. 따라서 소비에트 정부를 지지하는 노선을 따르면서 우리의 독자성을 살려갈 수 있도록 노력을 해보자는 것이오.”
러시아는, 특히 시베리아는 아직 적군이 백군과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지도 못했고, 또 연합국이 철수했지만 일본이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어서 조선인들이 앞장서서 일본을 막아주기를 바라는 처지였다. 하지만 일본의 힘이 강력해서 적군은 그들과 싸울 여력이 없어 레닌은 일본과 협상을 도모하던 차였다. 일본 또한 많은 친일 조선인들을 보내어 이로 인해 시베리아의 조선인들은 갈래갈래 찢어졌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대양읍에도 그 물결이 밀려왔다.
일본은 수리조합을 세워 고리대금업을 하고, 빼앗은 조선인 땅을 다시 밀고 네모반듯하게 만들어 소작을 시켰다. 그리고 신작로를 만드는데 마을 사람들을 동원했다. 신작로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일직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주와 관계 되는 곳(사실은 지주 이름의 일본 땅)은 돌면서 마을을 두 동강 내기도 하면서 진행되니 자연히 동네 사람들의 불만은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작로를 만드는데 모든 동민들이 동원되었다.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고 응하지 않자 할당량을 정해 일찍 마치면 보내준다고 회유도 하고 그래도 응하지 않는 자는 매로 다스리니 사람들은 움직임이 달라졌다. 그러다가 말다툼이 일어나서 일본인 감독을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죽이고 파묻기도 했다.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경찰은 숫자상으로 적으니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일본에서 지원 군대가 오자 무력 진압은 심해져, 예배당에 있는 사람들을 몰아넣고 밖에서 총을 쏘고 불을 질러 몰살시켰다.
그렇게 진압되고 나자 사람들은 낮에는 아무 말없이 일하다가 밤에는 산으로 가서 나무마다 태극기를 달았다. 아침 햇살에 태극기가 나무마다 나부끼는 대목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삼일운동이 일어날 무렵 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서 밝혀진 민족자결주의는 제국주의들의 민족자결주의지 식민지 민족들의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 다녀온 단야는 우울해졌다. 그를 우울하게 만든 것은 삼일운동의 실패가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 친구들이 식민지 상황에 체념하고 목숨을 잘 보전하자는 자세 때문이었다.
시베리아에서도 일본의 대대적인 반격이 있어 조선인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모조리 강간하는 처참한 살육이 있었다. 레닌은 일본과 협상이 이루어져가고 있는 동안에 일어난 이 사건은 조선인들이 경거망동하여 일본인들을 자극하여 일으킨 사건이라 생각하고 화를 냈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 조선인 대표를 만났다.
1921년 한국공산당이 창립되고, 이동휘가 대통령이 되었다. 한국공산당은 그것이 곧 완전하고 성숙한 유일한 조선인들의 합법적인 정부가 되기를 갈망했다.
1922년 백위군 잔여 세력은 지리멸렬해지고 최후 거점이던 블라디보스토크에 적색 깃발이 올려졌다. 일본군은 사할린을 제외한 전 시베리아 지역에서 쫓겨나고 친일하던 조선인들도 국내로 철수했다.
하지만 단야는 실종되었고, 최석두는 죽었다. 레닌도 죽고 조선인들을 과히 탐탁지 않아 하던 스탈린이 권력을 잡아 시베리아 조선인에겐 강제이주정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는 ‘조선공산당’이 세워졌다.

긴 호흡의 이야기 요소요소마다 작가는 다양한 사료를 인용했다. 그 중 가장 애절한 것은 고종황제에게 을사조약이나 정미칠조약을 체결한 매국대신들을 처벌하라는 간곡한 상소문이었다. 일본군의 겁박에 굴하지 말고 그들을 처벌하여 기강을 바로잡으라는 최익현의 글에 넘치는 기개는 꼰대로만 알고 있었던 그 최익현이 아니었다.
2·8독립선언문이나 레닌의 연설문등을 읽으며 문득 왜 우린 이런 사료들을 가지고 공부하지 않았을까 의문스러웠다. 신채호의 ‘조선독립선언’을 읽으면 이 사람을 무정부주의자라고 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데 말이다.

우리 교육의 목표는 도대체 무엇일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헌병제도를 도입하여 모든 군인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칼을 차게 했다. 그들의 교육 목표는 일본 천황의 충실한 종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천황의 명령을 받을 정도의 지식이면 족했다. 그래서 너무 많이 배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찰도 마찬가지였다. 주지는 총독부에서 임명했고, 일본식 절이 동네에 파고들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조선인들의 의식을 일본화해서 근본적으로 조선을 없애겠다는 것이 일본의 목표라고 단야는 생각했고, 그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 교육 목표는 뭘까? 서울대를 비롯한 스카이대 진학인가? 한국의 학생들은 모두 학자가 될 듯이 밤 12시가 넘도록 공부를 한다. 예전엔 대학만 가면 되었지만, 지금은 대학에 가서도 취직 공부로 날을 보낸다. 그런데 왜 한국인의 의식 수준은 나아지지 않는 걸까? 왜 우린 역사에 대해 제대로 잘 모르는 걸까?
동국대 철학과 강유원 교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서해 유성룡의 ‘징비록’을 제목과 저자만 알지 읽지 않는다. 다 안다고 착각을 한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도 징비록을 읽지 않았다. 일본을 욕하는 이 글을 일본인들은 한 해 5천 부씩 사 본다고 하는데 말이다. 우리 후배들도 교육법을 달달 외면서 교사 임용고시 공부는 하지만 실제 관련 책을 읽지는 않는다. 읽었다고 착각을 한다. 그러니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그나저나 이 작가가 이 이야기에서 희망으로 말한 것은 무엇일까? 예배당에 도망가 있다가 총탄과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박근우와 김순지의 사랑, 김시영과 순개 사이에서 태어나 절에 맡겨졌던 선봉 스님, 그리고 최석두가 총 맞아 죽는 순간 품에 지니고 있었던 신채호의 ‘조선독립선언’에서 희망을 찾은 걸까?

“개인적 저주나 원한은 그 대상물이 사라지면 투쟁의 목표와 방법을 잃게 된다. 그러나 투쟁의 대상과 목표가 단순히 시간적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는 경우가 아니라 한 사회 전체에 걸쳐서 내재한 때에는 그렇지 않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투쟁은 곧 인간 자체의 해방과 자유에 기여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싸움이며 이는 곧 행복이라는 차원으로 치닫는 숭고한 과제인 것이다.”
는 말에 감동을 받고,
“저는 조선이라는 한 국가의 해방에 머물지 않는, 조선인이라는 인간 자체의 해방을 원하고 있습니다.”
는 염원 속에 작가의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일까?

수, 2019/04/10-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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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 조선희

올해 2월에 들어서 김천 출신 독립운동가 ‘김단야’를 알았다. 김단야는 개령에서 첫 만세 시위를 이끌었고, 6·10만세운동을 기획했던 인물이었다. 더구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을 몰랐다니! 그를 좀 더 알고 알리는 일을 하기 위해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단야’공부 모임을 꾸렸다.
정동주 작 ‘단야’ 소설을 읽고 그에 대한 논문 여러 편을 읽고, 개령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드디어 후손들을 만나 면담을 하고 어느 정도 자료정리를 했다. 그리고 ‘세 여자’를 읽었다. 김단야의 두 여자인 고명자와 주세죽이 나오기 때문에 궁금해서였다.

책은 두 권으로 이루어졌고, 12년 세월에 걸쳐 자료 모으고 기록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그런 만큼 세월에 따라 생각도 열정도 잃어가는 모습이 때론 처절하게 때론 냉정하게 그려졌다. 작가 스스로 말했듯이 허구가 사실을 압도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사실에 입각한 기록이 마음에 들었다.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가 20년대 일제강점기 트로이카이듯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또한 트로이카였다. 청계천 여름에 발을 담그고 사진 찍은 세 단발랑. 그들은 다들 잘 사는 집 귀한 딸들이었다. 주세죽이 조금 형편이 어렵긴 하나 어쨌든 단신으로 상해로 유학갈 정도로 돈을 모았다. 그러나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깨닫고 독립운동에 뛰어 들면서 겪어야 했던 고통은 때론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하고 이상을 냉소하게도 만들었다.
하녀를 두고 얌전히 자수를 놓던 강경 부자 딸 고명자, 이상한 활동을 한다고 마님에게 삼월이가 대신 매를 맞아야 했던 그런 집 딸 고명자가,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며 고통스러워했을 때 그 고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애인인 단야가 곁에 있어주지 않은 것이었다. 자신이 상해에서 의심받고 있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꿈인 듯 아닌 듯 혼미한 속에 제 정신인 듯 아닌 듯 전향서를 쓰는 대목에서 가슴이 아려왔다.
자수로 생계를 이으면서 겨우 연명하다 전향자들로 이루어진 잡지 ‘동광지광’에서 마지못해 친일 글을 쓰던 그녀는 어느 날 느닷없이 해방을 맞이했다.

“명자가 철이 들었을 때 조선은 식민지였고 그것은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문제이고 모순이며 바꾸거나 선택할 수 있다고 했을 때 공산주의는 얼마나 위대해 보였던가. 하지만 해방운동 하네 계급운동 하네 하면서도 무의식에는 천황은 전지전능이고 일본은 천하무적이고 식민지는 조선의 운명이라는 열패감이 깔려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소련군이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역으로 달려갔으나 오지 않았다. 그리고 소련군이 평양까지만 들어오고 서울에는 곧 미군이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그러니까 일제가 물러가고 대신 미군이 통치한다는 것인가’는 두려움을 명자는 가졌다.

이런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준 이는 여운형이었다. 자신은 전향하고 친일 활동을 했다고 거절할 때 몽양 여운형은 “그렇게라도 소극적인 행동을 한 것은 많이 견딘 것이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에 마음이 움직여 여운형 밑에서 일하지만 해방 정국의 혼란상은 만만하지 않았다. 여운형은 열 번이나 테러를 당했다. 마지막엔 목숨을 잃었다. 여운형은 좌와 우에서 다 공격을 당했던 인물이다. 반탁의 거센 물결 속에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를 신중하게 듣고 따져보자는 그의 태도는 우익의 테러를 불러왔다.

20년 동안 단야의 소식을 기다리던 명자는 여운형에게서 단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 그러나 주세죽과 사이는 알지 못했다가 6·25전쟁 때 내려온 허정숙에게서 주세죽과 단야가 결혼했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 여운형처럼 중간지대에서 헤매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지붕이 날라간 자신의 집에서 숨을 거두는 고명자의 최후도 가슴 아팠다. 개인적으로 나는 고명자가 가장 인간적으로 느껴졌고, 나또한 그런 상황에서는 그의 길을 선택했을 것 같다. 너무 고통스러울 땐 전향서를 썼다가 친일을 강요받았을 땐 마지못해 하는 시늉을 하다가, 때가 좋아지면 다시 자신의 이상대로 활동하는 모습, 그걸 기회주의자라 말할 수도 있겠고, 친일청산에서 약간 생각할 여지는 있겠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박헌영의 아내 주세죽, 그녀는 음악도였다. 주세죽의 어머니는 딸을 존중해주는 사람으로 딸이 선택한 남자를 사위로 받아들였다. 첩실의 아들, 가난한 청년은 형무소에서 고문으로 거의 미치게 되었다. 그 남자를 보는 주세죽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박헌영은 혁명을 하는 동안엔 자식을 갖지 않겠다 맹세했으나 감옥에서 나와서는 아이를 가졌다. 만삭의 주세죽과 박헌영은 조선을 탈출하고 모스크바로 간다. 긴 기차여행에서 주세죽은 병에 걸려 신음하기도 했다.
주세죽에게 선택의 순간이 왔다. 아이를 두고 박헌영을 따라 상해로 갈 것인가, 아니면 아이와 함께 박헌영과 이별하고 남겨질 것인가. 그녀는 눈물로 딸을 혁명가보육원에 맡기고 상해로 간다.
박헌영이 일경에게 잡혀갈 때 주세죽과 김단야는 도망을 쳐서 모스크바로 오게 된다. 여기서 그녀는 김단야와 결혼을 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결혼을 하니 집과 식량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김단야는 체포당하고 주세죽은 낯선 땅으로 유형의 길을 떠난다. 김단야가 총살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카자흐스탄에서 무너져 내리던 주세죽의 처절한 모습……
김단야 사이의 아기는 죽고 그녀만 살아남아 모진 세월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유형기가 끝나고도 그녀는 이동하기가 어려웠다.
박헌영의 소식이 ‘프라우다’지에 실렸다. 그녀는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고 자신을 남편 곁에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박헌영은 거부했다. 그는 북한 땅에서 재혼했다. 하지만 딸 비비안나에게는 다정한 아버지로 남겨졌다. 소련의 보육 시설은 매우 훌륭해서 비비안나는 엄마 아버지가 낳았을 뿐 키워 준 것은 스탈린이 아버지였다.
박헌영은 남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쟁이 예상과 다르게 흐르면서 남로당파는 숙청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 남편은 일본의 스파이, 또 한 남편은 미국의 스파이라는 죄명으로 처형당하는 슬픈 운명에 처한 주세죽. 그래도 주세죽의 최후는 사위인 빅토르가 지켜주었고 딸은 자신의 성인 ‘박’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이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세 여자중 허정숙은 조금 독특했다. 세 여자 모두 결혼과 이혼의 자유를 부르짖었지만, 특히 허정숙은 스스로 남자를 선택하고 아니다 싶으면 자신의 선택 방향을 틀었다. 임원근과 결혼할 때도 그녀가 먼저 청혼했다. 주위 사람들이 허정숙의 남성 편력을 비판할 때 그녀는 남편인 임원근을 청산하고 오히려 애인이었던 송봉우를 선택했다.
허정숙의 아버지 허헌은 몇 안 되던 양심적인 변호사였다. 그는 딸로 인해 사상의 변화를 겪으면서 때로 고초를 겪어야 했다.
허정숙은 세 번째 남편인 최창익과 함께 무장투쟁을 하러 중국으로 간다. 조선의용단이 되어 죽음의 고개를 넘던 그들 연안파들도 해방을 맞이했다. 그리고 남북 분단 소식을 듣는다. 지도를 펼치고 3·8선이 어딘가 찾아보는데 당시 지도엔 35도와 40도만 표기되어 있어 그 사이를 5등분해서 줄을 긋는 장면은 슬픔 그 자체였다.
그래도 그들은 보무당당하게 행진해서 돌아가고자 했다. 다 낡아빠진 군복을 입고 행진하던 일행은 갈수록 인원이 불어나 몇 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땅 부근에서 그들은 소련군에게 제지를 당한다. 결국 무장해제하고 돌아온 땅에서 소련파, 남로당파, 연안파 간 처절한 전쟁이 시작된다. 남로당파가 먼저, 다음 연안파가 숙청되는 와중에도 허정숙은 살아남았다. 그는 90세로 죽었다. 작가는 남자를 선택한 사람과 선택당한 사람 간 차이냐고 물었는데 글쎄?

단순히 독립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고 인간 해방을 이루어야 된다고 믿었던 젊은이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 자신의 독선이나 아집으로 혹은 지도자의 지배욕에 휘둘리면서 그렇게 때로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했고, 그 선택은 죽음과 삶의 갈림길이 되기도 했다. 그 경험은 나이와 함께 세상에 대한 냉소로 흐르기도 했다.

유발 하라리는 역사적 사건은 우연히 이루어지고, 강자에게 저항하지만 결국 약자들은 그들이 저항하던 바로 그 강자의 문화를 따른다고 했다. 그 냉소적인 시선 속에 역사 속 순교자들의 희생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은 다만 스스로가 만든 관념에 속을 따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유시민을 좋아하는 것은 그 유발 하라리와 이야기 풀어나가는 방식이 비슷하긴 하나 유시민에겐 그럼에도 인간이 존엄함을 입증하기 위해 살아가는 삶은 의미 있다고 보는 따스함이 있기 때문이다.

젊음도 지나가고 분노도 지나가고 열정도 지나간 그 자리, 그래도 남아 희망을 바라보며 사는 것은 아무리 적자생존을 얘기하더라도 여전히 인간의 고귀한 그 무엇은 남아있다는 믿음 때문이 아닐지?

포탄에 죽어간 동지를 묻으며 불렀던 노래가 가슴에 다가온다.

사나운 비바람 몰아치는 길가에
다 못 풀고 쓰러지는 너의 뜻을
우리들이 이룰 것을 맹세하느니
진리의 묘비 아래 길이길이 잠들라
불멸의 영령

수, 2019/04/10-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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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청 누리홀에서 4 8(월)~ 11(목), 오전 9시 ~ 오후 6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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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경기동부지부가 성남시청 누리홀에서 전시회를 진행하며 해설하고 있다. © 성남피플

3.1혁명과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동부지부 (지부장 박종완)는 < 3.1 혁명 및 임정수립 100주년 특별전>을 4월 8일~11일까지 성남시청 누리홀에서 가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 1919년 3월부터 약 두달 간 한반도 전국에 걸쳐 독립선언문 발표와 만세시위가 있었고 4월 11일에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가 수립되었으며 만주와 북간도 지역에서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불사하는 무장 투쟁이 이어져왔다.

이번 전시회는 우리 성남 광주 지역 독립운동가 및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반민족행위자와 임시정부 27년사를 중심으로 근현대사 자료를 내 놓았다.

특히 성남 광주지역의 독립운동과 친일행위자의 생가, 활동중심지, 묘지 등 근거지와 민주화운동의 사적지를 지도상에 나타낸 ‘성남 광주 근현대 역사지도’ 와 백범 김구선생의 휘호를 목판에 새긴 서각 작품을 다수 선보였는데 이 지도와 서각은 허남해 전 지부장이 다년간 공들인 소중한 향토 역사연구의 결과물들이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동부지부는 이번 전시회 이후, 성남광주 근현대사 역사지도를 앱 형태로 디지털화하여 현장의 표식(6월행쟁 표지석 처럼)과 함께 역사아키이브 구축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동부지부는 성남 전시가 끝나면 광주시에서도 전시를 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다. 관람 시간은 매일 오전 9:00~ 오후 6:00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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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 모습 © 성남피플

<2019-04-10> 성남피플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 ,3.1 혁명 및 임정수립 100주년 특별전

금, 2019/04/12-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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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현충원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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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표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사무국장이 지난 10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김창룡의 묘 앞에서 그의 친일 행적을 설명하고 있다(왼쪽 사진). 애국지사 묘역에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지사와 아들 김인 지사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오른쪽).

백범 어머니·아들 묘역에서600m 떨어진 곳에 김창룡 묘
시민들, 이장 촉구만 20년째
“법 개정안, 국회 통과 안돼”

“저 너머에 김구 선생의 어머니와 아들이 묻혀 있습니다. 자식과 아버지의 암살 배후로 지목된 인물과 같은 곳에 계신 셈이죠. 역사적 단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 민족사가 국립묘지에 그대로 응축돼 있는 겁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10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홍경표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사무국장이 김창룡의 묘 앞에서 산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김창룡의 묘는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장군1묘역 상단 두 번째 열에 자리 잡고 있다. 홍 국장은 “장군1묘역은 현충원 안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고 있는 형국의 명당”이라며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도록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김창룡은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해방 후 소련군정에 전범으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했고,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에 입교해 육군 장교로 임관하면서 군내에서 승승장구했다. 기무사령부 전신인 육군 특무부대장을 지내며 소장까지 진급했고, 1956년 암살된 후엔 중장 계급이 추서됐다.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죽기 전 “김창룡으로부터 강한 암시를 받았다”며 그를 사실상 암살의 배후로 지목했다.

김창룡이 묻힌 장군1묘역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애국지사 묘역이 나온다. 직선거리로 60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이곳에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지사와 아들 김인 지사가 나란히 묻혀 있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이런 ‘기막힌 동거’를 만들어낸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와 민중당 대전시당이 조사한 자료를 보면 대전현충원에는 28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안장돼 있다.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인물이다. 4명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도 수록됐다. 28명 가운데 22명이 장군 묘역에 안장된 군 장성 출신이다. 일제강점기엔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등으로 활동하다 해방 후 옷을 갈아입고 한국전쟁기 등을 거치며 군에서 성장한 인물들이다. 애국지사 묘역을 지나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장군2묘역에도 이들 중 5명이 묻혀 있다.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는 2000년부터 매년 현충일이면 김창룡의 묘 앞에서 ‘파묘 시위’ 등을 하며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묘 이장을 촉구하고 있다. 벌써 20년째다. 이들의 공허한 외침 속에 대전현충원에는 되레 친일파의 묘가 18기나 늘어났다. 친일반민족행위를 이유로 군 장성 등의 묘를 강제 이장하려면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야 하지만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현충일을 앞두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수록된 자에 한해 현충원에 안장할 수 없도록 하는 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그마저도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홍 국장은 “해방 후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아 친일파 후손들이 지금도 우리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법 개정이 어려운 이유”라며 “3·1운동과 임정 수립 100주년인 올해를 놓치면 법 개정도 친일 잔재 청산도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이종섭 기자 [email protected]

<2019-04-11> 경향신문 

☞기사원문: “백범 가족과 백범 암살 배후가 한자리 묻혀 있어서야…”

금, 2019/04/12-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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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소연 임정기념관건립추진위 자료실장 인터뷰

38년간 독립운동 알리기 헌신
`독립견문록` 3000㎞ 취재 동행

백범일지 영인본 만든 1994년
원본 품고 다니던 감동 못잊어

재산 다 팔고 독립운동 떠났던
이명서·명선 형제 기억됐으면

◆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 독립견문록, 임정을 순례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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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홍소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추진위 자료실장이 1949년 6월 백범 김구 선생이 네 발의 총탄을 맞고 서거한 경교장 2층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있다. [이승환 기자]

툭 치면 와르르 쏟아졌다. 중국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향하는 길, 한 장의 사진에서 독립운동가 생애가 재현됐고 한 권의 책 표지에서 100년 전 기억이 육화됐다. `독립견문록, 임정을 순례하다`의 마지막 편을 송고한 뒤 만남을 청하자 “독립운동사의 교통순경일 뿐,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진심을 다하는 막후(幕後)의 배후자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설득해 오래 사양하던 그를 탁자에 앉혔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이면을 쫓아 38년간 외길을 걸은 홍소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자료실장(61)을 지난 5일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 서울 경교장(京橋莊)에서 만났다.

―첫 출근 날 풍경부터 기억해 볼까요.

▷1982년 가을, 친구 집에 놀러가니 친구 시아버님이 “뭐하는 친군가” 하고 물으셨어요. 그분이 백범 제자 안윤기 선생이었습니다. 얼떨결에 출근했죠. 을지로3가 상지빌딩 3층, 좁은 방에 철제 책상 3개뿐이었어요. 안 선생님이 떠나시면서 맡게 됐습니다. 그 일이 평생 업(業)이 됐네요.

―벅차오르는 한순간은.

▷글쎄…. `백범일지` 영인본을 만든 1994년 기억이 생생해요. `백범일지` 원본(原本)을 품고 인쇄소를 한 달간 오갔어요. 흑백으로 하자는 어른들을 겨우 설득해 컬러로 했죠. 가슴이 두근거려 혼났어요. 시대의 분신(分身)이었으니까요. 아, 그땐 `백범일지`가 보물로 지정되기 전이었습니다(`백범일지`는 1997년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됐다).

―보급판 `백범일지`도 만드셨죠.

▷도진순 교수님을 우연히 알게 됐고, 돌베개 출판사를 만나 의기투합했어요. 백범김구기념관 10주년을 맞아 2013년 `백범 김구 사진 자료집`을 만들었는데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에요( `주해본 백범일지`는 스테디셀러이며 현재 55쇄로, 총 63만부가 팔렸다. 역시 홍 실장이 참여한 `쉽게 읽는 백범일지`는 39쇄로, 12만부가 팔렸다).

―임정 길을 20회 밟으셨어요. 비행기에 오를 때마다 설렘과 절망, 어느 쪽입니까.

▷가끔은 거꾸로, 중국이 집 같아요. 그중에서도 충칭의 화상산 묘지는 특히 애착이 가는 임정 유적지예요. 갈 때마다 모습이 달라져요. 이제 죽음과 거리가 멀어진 장소가 돼 버렸어요.

―중국에서 느낀 건데, 이봉창 의사를 특히 존경하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울퉁불퉁하게 살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정확한 길을 간 분이니까요. 이봉창 의사는 우리 같은 사람이었다가 결국 시대정신을 알아채고 그 길을 걸은 분이에요. 시대정신요? 그 시대에 해야만 하는 불가능한 일을 실천하는 것이죠.

―조명이 필요한 독립운동가는.

▷이명서·이명선 형제를 꼭 기억해 주세요. 황해도 장연에 살던 형제가 재산을 다 처분하니, 가족은 `우리 서울 가나` 했는데 내려보니 만주더랍니다. 두 형제는 독립운동 기지를 만든다고 떠나고 나머지는 여자들 몫이 되었지요. 훗날 손녀를 만났는데, 할머니가 그러셨대요. “김구의 `김(金)자`도 입 밖에 내지 말라.” 그보다 미운 사람이 있었겠어요?

―서거 전날 이곳 경교장에서 백범과 단둘이 만났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어떤 대화가 오갈까요.

▷역사에 선생님이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말도 하고 싶어요. 결국 `김구(金九)`는 수십만 명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하나의 앞선 이름이에요. 그 이면에는, 이름조차 못 남긴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었습니다. 이 말은, 독립운동을 실천한 모든 분께 올리는 말씀입니다.

―`임정 안내자`로 평생을 사셨습니다. 후회는 없습니까.

▷한참 어려울 때 안윤기 선생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적어도 우린 이 세상에 나와 뭐가 옳은 길인지 알고 가지 않느냐.` 옳음을 안다는 게 건방진 얘기인지 몰라도, 적어도 나쁜 길을 걷지는 않았으니 후회는 없습니다.

중국 난징의 거리에서 작은 기념품을 사는 홍 실장 옆에 오래 서 있었다.

한자가 새겨진 금속활자를 골라 만드는 기이한 도장이었다. 고심 끝에 그가 선택한 두 글자는 `쟁족(爭足)`이었다. 백범이 던진 화두로 `대가리가 되려 싸우지 말고, 발이 되길 다투라`는 뜻이다. 다들 우두머리를 탐하는 세상, 누군가는 평생 `발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김유태 기자]

<2019-04-11> 매일경제 

☞기사원문: [독립견문록] “백범은 수십만 독립운동가중 한 분…잊힌 영웅 아직도 많아”

토, 2019/04/13-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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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강(羅智綱)은 일제강점기에 학무과, 공립학교 교직원 및 여러군의 군수로 활동해 친일행위를 한 친일반민족행위자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나지강이라는 서예가와 한자이름과 출생년도, 출신학교가 같다는 글이 있어서 찾아보니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아마도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친일파 나지강도 대구경북 지역에서 교직원과 군수로 활동했는데 1997년판 한국미술연감 44쪽에 나온다고 하는 서예가 나지강도 출신지가 평양고등보통학교이고, 1899년에 출생했다는 글이 인터넷에 있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찾아본 결과 나지강은 반민특위 조사 후 공무원으로 임용되어 경북대 등에서 공직을 하다가, 은퇴 후 서예가로 활동해 여러차례 상을 받은 뒤 1989년 사망한 것으로 보이나, 서예가 나지강과는 출신학교가 같고 생년이 같다는 것 외의 직접증거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81212003292…
기사에 따르면 1958년 12월 12일 경북대학교 사무국장인 이사관보에 보해졌고,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604003292…
1963년 6월 1일 행정부이사관에서 정년퇴직하였습니다.

일반직 공무원의 정년은 당시 61세였으나, 당시에는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한자명칭이 같고 거주지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공무원 나지강과 친일파 나지강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한편 서예가 나지강은 국선에 입상해 여러차례 상을 받았는데, 공무원에서 은퇴한 시기에 서예에 입문했다고 하면 얼추 맞아 떨어지며, 서예가 나지강이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는 글도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출생년도와 한자이름이 친일파와 똑같았습니다.

조계종의 원학스님을 비롯해 서예가 나지강의 제자 분들이 아직 살아계시고, 서예가 나지강이 참여한 서예 단체 또한 남아있는 만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수정 보완 작업을 할 때 반민특위 이후 행적과 사망년도가 친일인명사전에서 빠져 있던 나지강씨가 이 서예가 및 공무원과 동일인물인지를 확인하여 보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 2019/04/1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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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선융화의 상징으로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최초 외교관으로 발탁

일제가 어떻게 친일파를 양성했으며, 지식인은 어떤 과정으로

친일파가 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유툽과 팟빵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4024

월, 2019/04/15-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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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항일음악회 성황리 개최… 남북공동행사로 개최되길 희망해
이재준 고양시장”강제 징집된 피해자들의 아픔을 되새기게 되어다.

[내외통신]정석철 기자=고양시가 지난 13일,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일제 강점기 아픔의 장소인 30사단 내(고양시 화전동 소재)에서 항일음악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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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일제 강점기 아픔의 장소 30사단 내 ‘항일음악회’ 성료

고양시가 주최하고 고양문화재단이 주관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가 후원한 이번 행사는 30사단이 가진 역사적 아픔의 의미(일제강점기 일본군 주둔지 및 강제징집 피해자들의 집결소)를 되새기고, 잊혀져가는 광복군가 등의 항일음악 연주를 통해 새로운 희망과 평화의 불씨를 되살리자는 취지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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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준 고양시장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재준 시장은 이날 인사말을 통해 “100년 전 그날을 기억하고 그간의 발전 과정을 차분하게 성찰하는 동시에, 3.1운동 정신을 바탕으로 희망찬 미래 100년을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한다”며, “역사의 아픔을 지닌 이곳에서 잊혀져 가는 광복군가와 독립운동가를 함께 부르며 강제 징집된 피해자들의 아픔을 되새기게 되어 뜻깊다”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약 2천5백여 명의 시민 및 군 장병들의 참여와 함께, 고양시 교향악단, 고양시립합창단 등의 공연을 시작으로 고양신한류예술단, 노관우 밴드, 30사단 군악대 등이 항일음악을 연주했다.

또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참여해 그 의미를 더했으며, 마지막으로 출연한 싱어송라이터 인기가수 신형원씨는 누구에게나 친숙한 개똥벌레를 시작으로 독립애국가, 더좋은날 등의 히트곡과 항일음악을 불렀고, 마지막 무대는 전 출연진이 함께 올라와 터를 부르며 많은 시민들의 가슴에 묵직한 울림을 줬다.

이재준 시장은 이날 인사말을 통해 “100년 전 그날을 기억하고 그간의 발전 과정을 차분하게 성찰하는 동시에, 3.1운동 정신을 바탕으로 희망찬 미래 100년을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한다”며, “역사의 아픔을 지닌 이곳에서 잊혀져 가는 광복군가와 독립운동가를 함께 부르며 강제 징집된 피해자들의 아픔을 되새기게 되어 뜻깊다”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약 2천5백여 명의 시민 및 군 장병들의 참여와 함께, 고양시 교향악단, 고양시립합창단 등의 공연을 시작으로 고양신한류예술단, 노관우 밴드, 30사단 군악대 등이 항일음악을 연주했다.

또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참여해 그 의미를 더했으며, 마지막으로 출연한 싱어송라이터 인기가수 신형원씨는 누구에게나 친숙한 개똥벌레를 시작으로 독립애국가, 더좋은날 등의 히트곡과 항일음악을 불렀고, 마지막 무대는 전 출연진이 함께 올라와 터를 부르며 많은 시민들의 가슴에 묵직한 울림을 줬다.

<2019-04-15> 내외통신뉴스 

☞기사원문: 고양시, 일제 강점기 아픔의 장소 30사단 내 ‘항일음악회’ 성료 

※관련기사 

☞뉴스1: 일제강점기 강제징집 집결소였던 30사단서 ‘항일음악회’ 개최 

☞신문고뉴스: 고양시, 일제 강점기 아픔의 장소 30사단 내 ‘항일음악회’ 성료 

☞경인일보: 고양시, 일제강점기 아픔의 장소 30사단 ‘항일음악회’ 성료 

☞시사포커스: 고양시, 일제 강점기 아픔의 장소 30사단 내 ‘항일음악회’

☞KFM경기방송: 고양시, 일본군 주둔지 30사단 내 ‘항일음악회’

월, 2019/04/15-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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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 (4.16)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9편 “이승우” 창씨개명을 적극적으로 앞장 서 추진한 변호사

☞ (4.0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8편 “김우영” _내선융화의 상징, 조선인 부영사 되다

☞ (4.0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7편 “최린” 독립선언의 주역, 변절의 아이콘이 되다

☞ (3.26) ‘내역사’ 시즌 3: 강제동원 3편 “피해자 변호인단에게 판결과정과 향후 활동계획을 듣는다

☞ (3.21)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6편 “박중양” 3.1운동 진압을 위해 자제단을 이끈 거물급 친일파

☞ (3.1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5편 “김대우” – 황국신민서사를 제정 입안하여 황국신민화에 앞장선 인물

☞ (3.06)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좌담회 2부

☞ (3.05)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좌담회 1부

☞ (2.27)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만세열전2부

☞ (2.26)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만세열전1부

☞ (2.1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4편 “심우섭” 한 시대 형제의 다른 삶, 기회주의자 지식인의 원형

☞ (2.12)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_2편_한일청구권협정의 쟁점은?

☞ (2.05)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3편 “오현주”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를 밀고한 배신자, 반민특위 법정에 선다

☞ (1.2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2편 “노덕술” 고문으로 유명한 악덕 친일경찰, 대한민국 훈장을 받다

☞ (1.2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편 “이종형” 의열단 행세하며 독립군 때려잡은 악명 높은 밀정

☞ (1.15)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_1편

☞ (1.08) ‘내역사’ 시즌 3: 프롤로그 – 70년만에 부활하는 반민특위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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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화, 2019/04/16-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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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년 새 학기를 맞아 우리 고장 제주도에도 산과 바다, 공원, 흐드러지게 핀 꽃과 들판 여기저기서 봄의 완연한 기운이 우리를 감싸 안는 계절이 찾아왔다.

특히, 생동하는 이 자연과 더불어 가장 이 계절을 기다렸음직한 어린이들이 야외로 나가 실컷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은 소망은 나와 같은 어른들의 당연한 기대감이리라.

역시 아이들의 본성은 실내보다 실외를 선호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진리니까.

하지만 매년 이맘때면 찾아오는 불청객이 하나 있다. 미세먼지다.

면역에 취약한 어린이들에게는 건강의 적신호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요새는 그런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또 하나의 적신호가 있다.

숫자로는 소수겠지만 어린이들만을 노리는 불순한 인간들의 존재가 훨씬 더 해롭고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자못 두렵기까지 하다.

 

화, 2019/04/16-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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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현상금 1위? 30만 달러 액수 근거 부족
김원봉·김구 현상금 역시 공식 근거는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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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 자유한국당 최고위원회

“이승만이 현상금 1위”라는 자유한국당 정미경 최고위원님께.

정 위원님께서 오늘 아침 한국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지난 주 목요일 전화를 한 통 받았다”면서 말씀하신 KBS 기자입니다. 그날 아침 회의에서 말씀하신 “이승만 대통령이 현상금 1위”라는 근거가 궁금했습니다. 널리 알려진 바처럼 김원봉에게 가장 많은 현상금이 걸린 것 아닌가 궁금했습니다. 팩트체크 취재의 기본은 관련 주장을 한 인물 또는 단체 등에게 주장이 나오게 된 근거를 먼저 확인하는 것입니다.

위원님은 질문에 “검색포털 등에서 관련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하셨죠. 바로 언론진흥재단에서 운영하는 언론기사 검색 사이트와 인터넷 포털 등에서 연관 단어들을 검색했습니다. 역시 대부분의 언론 기사와 인용된 전문가 인터뷰들은 김원봉 100만원, 김구 60만 원에 이어 이승만 30만 달러라고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위원님의 말씀을 맞다 틀리다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KBS 펙트체크팀은 기사가 아니라, 원문과 공식 자료를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 중 일제의 공식적인 현상금 기록이나 원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김원봉이 ‘현상금 100만 원의 사나이’라는 것은 일종의 ‘신화’라는 점도 새로 알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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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 발언하는 정미경 최고위원

이승만 현상금의 근거…<소년중국紙> “이승만 등 3인에 30만 상금”

마침 취재하던 문제도 있고 해서 이 문제는 잠시 미뤄뒀습니다. 오늘 위원님께서 다시 언급하시기 전까지 말입니다. 위원님께서 제가 드린 전화를 언급하시며 친절히 답해주신 점 감사합니다.

위원님의 근거는 첫째, <소년중국紙>를 근거로 임정수립 당시인 1919년 이승만 현상금은 30만 달러다. 다음으로 김구와 김원봉 등의 현상금은 시기도 1930년대일 뿐더러 근거도 특정되지 않았다라는 점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럼 하나하나 짚어보겠습니다.

이승만의 현상금에 대한 근거는 말씀하셨듯, 미국에서 발간된 <소년중국>이란 잡지에 기록돼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는 1919년 5월 22일자 신한민보에 인용돼있습니다. 신한민보는 1909년 2월 1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간된 교민단체인 국민회(國民會)의 기관지입니다.

기사를 보면, “리승만, 리완, 리위종 3명 (三씨)를 잡기 위해 일제가 자객을 파견했다”는 ‘소년중국’의 동경 특별통신을 인용했습니다. 이때 기사는 “三十만 상금의 밀약으로 三씨의 머리를 구한다”고 돼있습니다. 이 기사의 진위를 떠나 표현을 보더라도 이승만 1명에게 30만 인지 3명에게 30만 인지도 불명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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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국사편찬위 자료 ‘현상금’ 언급하고 있지만, 발언의 공신력 생각해봐야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자료들을 볼까요.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41.)을 보면 “한국인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담력이 있다.”면서 “그동안 일본은 그들 각각에 5십만 달러에 달하는 현상금을 걸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대표적으로 이승만과 김구를 거론했습니다. 이 내용은 “한국은 일본의 가장 오래된 적수이다”라는 1943년 3월 7일자 <워싱턴 포스트> 기사 입니다. 즉, 국사편찬위의 공식 자료집이지만 출처는 언론보도여서 역시 현상금 관련 공식 기록이라고 보기엔 어렵습니다.

또 1942년 3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 회의록(Korean Liberty Conference)을 보면, 피치 여사는 김구를 가르켜 “가장 많은 현상금이 걸린 김구 씨는 조용하고 친절하고 예절바른 신사”라고 말합니다. 피치 여사는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일제를 피해 김구 등을 숨겨준 피치(George A. Fitch) 목사의 부인입니다. (임시정부 자료집 20.)

이승만의 현상금을 논하는 자료는 또 있습니다. 해리스 목사가 스팀슨 미 육군장관에게 1942년 2월 4일 보낸 서한에는 “한국인들의 지도자 이승만 박사는…40년 동안 그의 목에 1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어두었던 적들에게 그의 능력과 고국을 위한 헌신이 잘 알려져 있으며,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임시정부 자료집 43.)

회의록과 서한이었지만 역시 “얼마의 현상금이 걸렸다”고 단정할 순 없는 내용들입니다.

현상금 논란은 본질 흐리기…일제는 누굴 두려워했을까

취재에 도움을 준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이사는 “이승만이 자신의 현상금을 부풀려 과시해 교민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은 기록도 있다”고 전했습니다. 물론, 정미경 위원님의 발언대로 김원봉의 현상금에 대한 근거는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역시 백범일지만을 근거로 김구의 현상금을 논하기에도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조 이사는 그러면서 “누가 진정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했는가가 중요하지 현상금 논란은 본질을 흐리는 유치한 발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이승만이 임정 대통령일 때는 실제 일본에 위협이 될 수 있었겠지만 그 시기가 매우 짧았다”면서 “일제가 말기로 갈수록 미국에 있는 이승만과 의열투쟁을 벌이고 있는 김원봉, 김구 어느 쪽을 위험시했을까는 쉽게 상식적으로 짐작이 간다.”고 설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위원님께서 “1919년 임정 수립 직후 항일독립운동가에게 내건 최고 현상금 건 사람 이승만이란 결론. 대답이 됐나?”고 물으셨는데 저는 ‘아니오’라고 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KBS 팩트체크팀의 판단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2019-04-15> KBS NEWS 

☞기사원문: [팩트체크K] “이승만이 현상금 1위” 한국당 정미경 위원님께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팩트체크] 한국당 “이승만, 독립운동가 중 최고현상금”… 사실은

수, 2019/04/1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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