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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얼마나 벌어야 충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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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얼마나 벌어야 충분한가

익명 (미확인) | 금, 2015/09/04- 22:00

연봉 2억원을 받는 동창은 아이를 외국 기숙학교로 보내고 양가 일가친척들 모시고 매년 해외여행을 가며 서울 강남에 집을 사서 유지하다보니 살림이 너무 빠듯하다며 울상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아주 약간의 생활비만 벌며 달동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던 선생님은 수십 년 만에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도로 가서 연세(年貰) 50만원짜리 방을 얻어 만족스럽고 여유 있게 살게 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우리 삶은 300배 나아졌는가

혼란스럽다.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벌어야 충분한 것일까?

우선 우리가 얼마나 벌어왔는지를 살펴보자. 1960년에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를 밑돌았다. 2015년 1인당 국민소득은 3만달러에 육박한다. 그야말로 기하급수적 상승이다. 55년 만에 300배 늘어났다. 소득 100달러 시대에 소득 1천달러는 다다를 수 없는 불가능한 목표처럼 보인다. 소득 3만달러 시대에 소득 30만달러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100달러가 3만달러가 된다. 그 길을 달려왔으니, 숨가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시간 동안 이 땅의 가치평가 기준은 단순했다. 1인당 국민소득 하나가 사회와 국가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으로 모두 인식했다. 소득 증대는 삶의 목적이며 국가의 국정목표였다. 외길이었다.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이고 한국이 3천달러라면, 미국이 꼭 10배만큼 잘사는 나라라고 여겼다. 1인당 국민소득이 국가의 품격도 보여주고, 한편으로는 개인의 행복도 보여준다고 믿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던 시기였다. 많이 벌기만 하면 무조건 좋아진다고 믿던 시대였다.

분명 성과는 있었다. 이 나라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세계에서 소득을 늘리는 것으로는 가장 성공한 나라 축에 든다. 일본이 여기 비교할 만하고, 중국이 따라오고 있는 정도다.

그래서 지금 다시 질문해볼 때가 됐다. 1960년과 비교하면 우리 삶은 300배 나아졌나? 2015년의 20대는 1960년에 20대이던 할아버지 세대보다 300배 나은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일까?

그 이유는 두 영역으로 나누어 살펴보는 게 좋겠다. 첫째는 소득 자체의 문제, 둘째는 소득 외적인 문제다.

소득 자체의 문제는 ‘1인당 국민소득대로라면 우리 가족 1인당 3천만원씩은 벌어야 하는데, 왜 그만큼 벌고 있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유는 간명하다. 실제로 소득이 그만큼 오르지 않은 사람이 많다. 1인당 국민소득은 전체 국민소득의 평균값이다. 하지만 한 개인의 소득은 전체 국민소득 가운데 기업 및 정부 소득을 뺀 가계소득에 해당하는 몫이다. 그중에서도 특정 개인이 벌어들인 몫이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빠르게 늘고 있다. 영국·프랑스·미국·일본 등보다 높고 중국과도 비슷하다. 중국은 인구증가율이 높아 경제성장률은 한국보다 훨씬 높지만, 인구수로 나눈 1인당 소득성장률은 한국과 차이를 좁힌다.

그런데 가계소득과 국민소득의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다. 2014년의 경우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2만8천달러였다. 이 숫자는 국가 전체가 벌어들인 부가가치를 단순하게 국민 수로 나눈 것이다. 그중 가계로 돌아온 소득 전체를 국민 수로 나눈 수치가 가계총처분가능소득(PGDI)이다. 이 수치가 2014년 약 1만6천달러였다. 가계소득이 국민소득의 60%가 되지 못한다.

기업만 행복한 나라

한국에서 가계소득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기업소득과 비슷하게 움직였다. 즉, 국민소득 전체가 늘어나면 기업소득과 가계소득은 비슷한 정도로 늘어났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둘의 격차는 점점 벌어진다. 특히 가계소득 증가 속도는 점점 떨어져서 경제성장률에 뒤처지는 정도가 점점 심해진다. 1992년 가계소득과 기업소득의 격차가 0이라 가정하고 계산해보면, 그 격차는 점점 넓어져서 2010년대를 지나면 3.5를 오르내리는 숫자가 된다. 특히 가계소득은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에 견주어도 크게 뒤처지고 있는데, 이런 현상이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다.

국제 비교를 해보면 가계소득이 GDP보다 뒤지는 현상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수준이다. 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 등 유럽의 복지국가뿐 아니라 미국·영국 같은 시장이 강조되는 나라에서도 가계소득 증가율은 최근 경제성장률을 앞서고 있었다. 일본·독일·폴란드·체코 같은 나라들에서 가계소득 증가율은 GDP 성장률에 못 미치지만, 한국만큼 정도가 심한 곳은 없다. 즉, 한국은 경제성장의 혜택이 가계소득으로 제대로 순환되지 않는 정도가 세계에서 가장 심하다. ‘부자 국가 가난한 국민’이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노동소득분배율의 하락이다. 과거 한국은 노동소득분배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기업이 돈을 벌면 어쨌든 상당 부분 임금으로 지출되는 구조였다. 1987년 민주화와 노동운동 활성화, 3저호황 등을 동시에 맞으며 임금소득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중반쯤부터 흔들리기 시작해서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부터 노동소득분배율이 본격적으로 낮아진다. 2000년 이후로는 아예 실질임금이 정체 상태에 돌입한다. 임금 상승 속도가 노동생산성 상승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다.

여기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도 영향을 끼쳤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삼성전자가 돈을 벌면 그 협력업체들도 다 같이 벌었다. 그러면 협력업체 직원들의 임금도 다 같이 많이 올랐다. 이른바 ‘낙수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1990년대 중반 이후 점점 더 대·중소기업 사이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그 효과는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여기에 개인소득 사이 불평등이 심화하는 것도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김낙년 동국대 교수는 <21세기 자본>으로 전세계에 화제를 몰고 온 토마 피케티 교수가 분석했던 방법으로 한국의 소득분포를 연구했다. 한국에서 소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 3122만 명의 과세 자료를 살펴봤더니, 중위소득자의 연간소득이 1074만원이었다. 취업자를 기준으로 다시 살펴봐도, 1594만원밖에 되지 않는다. 1인당 국민소득인 3천만원 수준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 연구 결과를 보면, 한국의 불평등도가 상당히 높다는 근거가 곳곳에 등장한다. 예를 들면 연소득 1억원 이상인 사람은 56만 명이다. 인구의 1%가 되지 않는 엄청난 고소득자인 셈이다. 6천만원 이상이 219만 명이다. 전체 인구의 5%가 되지 않는다. 상위 10%가 가져가는 소득은 이 나라 전체 소득의 50%에 육박한다.

상위 10%가 소득 절반을 가지는 나라

귀농한 부부의 일상.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소득만이 아니다. 정용일 기자
여기에 더해 욕구의 문제가 생긴다. 사람들의 욕구는 점점 더 평등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욕구 자체가 많이 달랐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전체 인구의 25%가량 되던 대학 진학률은 이제 75%를 훌쩍 넘어선다. 똑같이 대학을 나온 사람들인데, 상위 10%에 들면 괜찮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나락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 그런데 상위 10%에 들어가려는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진다.

같이 똑같은 스마트폰을 쓰고, 같은 기술의 혜택을 입는다.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미디어에 비슷하게 노출된다. 같은 공교육을 받고, 비슷하게 대학을 가고, 비슷하게 스펙을 쌓고, 해외연수도 갔다 오면서 모두 비슷한 자격을 갖춘다. 그런 이들이 이 불평등한 사회에 그대로 던져진다면, 그건 맹수를 정글에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엄청난 갈등과 박탈감에 시달리게 된다.

여기까지는 소득과 직접 연관을 맺고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좀더 근본적인 것은 소득 외적 이야기에 있다. 실제 꽤 높은 소득을 벌어들이는 사람들조차도 삶이 빠듯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런 소득 바깥의 이야기에 있다. ‘이스털린의 역설’로부터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미국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30여 개국의 행복도와 소득을 조사 분석한 뒤, 기본 수요가 충족된 이후에는 소득이 높아진다고 반드시 행복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다. 이 연구 결과를 해석하자면, 소득이 일정한 수준 이상이 된 뒤 행복도를 높이려면 소득 증대 노력이 아니라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경제학적 근거를 댈 필요조차 없는 상식적 이야기일 수도 있다. 우리가 소득을 높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따져물으면, 대부분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또 많은 이들은 좀더 선하게 잘 살기 위해서라거나 수준 높게 살고 싶어서일 수도 있겠다. 여유가 있으면 남한테 베풀고 살 수도 있고, 문화예술도 찾고 깊이 있는 사색도 하면서 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거꾸로 소득이 높아진다고 반드시 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소득은 수준 높은 삶을 살 수 있는 필요조건이다.

그럼 소득에 덧붙여 무엇이 필요할까? 일의 주체가 되어 보람이 커지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또 우정과 이웃과 가족 같은 공동체가 강화돼 교류가 늘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소득 증대만 신성시하는 흐름이 주류다. 2014년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였다는 발표와 함께 나온 해설에는 ‘한국이 국민소득 2만달러에서 정체되고 있다’는 기조가 주류를 이뤘다. 한국 1인당 소득이 2만달러를 돌파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다는 호들갑을 떨던 2000년대 중반에서 10년도 지나지 않았다. 1만달러 돌파를 처음으로 했던 게 IMF 구제금융 직전인 1990년대 중반인데, 경제위기로 1만달러 아래로 떨어졌다가 2000년대 초에 다시 1만달러 이상으로 올라갔었다. 더 거슬러 요약하자면, 1960년에 100달러였던 것이 2000년대 초에 1만달러가 되고 2000년대 중반에 2만달러가 되고 지금 2010년대 중반에 3만달러가 된 것이다. 이런 속도로 1인당 국민소득이 증가하는데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면, 평균소득 증가 이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생각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일의 보람, 여가, 공동체

임금을 올려 가계소득을 늘려야 한다. 격차를 줄여야 한다. 그래도 행복하지 않다면, 일의 가치와 보람을 찾고 여가를 공동체와 함께 보낼 시간을 확보하도록 해줘야 한다. 삶의 다른 잣대를 마련해줘야 한다. 어쩌면 더 버는 것은 해법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 모두가 이제, ‘얼마나 벌어야 충분한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시기가 됐다.

[ 한겨레21 / 2015.9.4 /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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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여자는 이래야지’하는 사회… 나는 매일 ‘탈코’에 실패한다

[2018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컨퍼런스③]

 

작성 : 안현진

 

지난 10월 11일 여성과 자연에 가해지는 억압과 교차성에 대해 논의하고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상생과 공존의 가치를 전하는 2018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컨퍼런스가 열렸습니다. 200명의 참가자와 함께했던 뜨거운 현장과 연사들의 강의를 가감없이 소개합니다.

최근 온라인에서는 ‘탈코르셋’에 대한 관심과 인증샷이 활발하다. 탈코르셋은 ‘코르셋을 벗어나자’는 의미로 과거 얇은 허리를 미의 기준으로 내세우며 여성의 몸을 옥죄어왔던 코르셋을 상징해 만들어진 단어이다. 과거에는 코르셋을 입은 여성이 미의 기준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듯, 사회상에 따라 여성에게 강요되는 획일화된 미의 기준과 외모에 대한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취지에서 ‘탈코르셋’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처럼 여성들이 외모억압과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한 것은 비단 오늘날의 일만은 아니다. 1920년대 경성에서는 신여성들이 여성에 대한 억압과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단발을 유행시켰으며, 1968년 미스 USA 심사장 밖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이 브라를 불태우는 시위를 벌였었다. 또한,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몸을 긍정하기 위한 보디 포지티브(Body positive) 운동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2018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컨퍼런스에서 강연중인 안현진
▲  2018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컨퍼런스에서 강연중인 안현진
ⓒ 여성환경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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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탈코르셋 운동이 가지고 있는 의의와 한국 사회에서 몸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어떤 논의와 행동이 이뤄져야 하는지 여성환경연대 활동가, 안현진 씨를 만나보았다.

 인스타그램에 게시된 탈코르셋 인증샷
▲  인스타그램에 게시된 탈코르셋 인증샷
ⓒ 온라인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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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SNS에 여성들의 삭발 사진이나, 화장품, ‘여성스러운 아이템’들을 부수는 인증샷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바로 탈코르셋 인증을 위한 사진들이었습니다.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다움과 이에 부여되는 규범을 깨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화장은 예의’라며 여성의 꾸밈노동을 당연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꾸미지 않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 자체가 타인에게 용기를 주고, 더 많은 이들에게 선택지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어떻게 해야 탈코르셋에 성공한 걸까요? 저는 성공한 것 같나요, 실패한 것 같나요? 탈코르셋을 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오늘도 실패했다
“저는 평상시에는 편한 옷차림으로 다닙니다. 단발로 머리 길이를 유지하거나 머리를 질끈 묶고, 렌즈가 아닌 안경을 쓰고, 노브라에 운동화나 슬리퍼를 신고 출근을 하곤 합니다. 그런 제 모습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저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 저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것 같나요? 편한 차림일 때도 많지만 사람들 앞이나 미디어에 나설 때면 화장을 하고 셔츠와 슬랙스, 원피스 같은 것들로 차려입기도 합니다.

그런 날이면 ‘못생긴 게 줄 긋는다고 수박 되냐’, ‘네 다리는 사회적인 민폐다, 시각 테러다’, ‘네 몸에 그게 어울리냐’, ‘살이나 빼고 입어라’와 같은 말들을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사회적인 시선은 대개 남성의 시선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뚱뚱한 몸은 욕망의 대상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에 나의 꾸밈은 그들의 기준에서 허락되지 않는 꾸밈이 되어버리는 거죠.

편한 차림을 즐기는 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화장을 하거나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꾸밀 때 기분이 좋아지는 내가 있고, 한편으로는 내가 어떻게 보여 지는 지를 고민하는 내가 있고, 혹은 내가 바라는 내 모습이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내가 있습니다.”

당신이 뚱뚱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오늘도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책망하며 다이어트를 결심한다. 쇼핑몰과 미디어 속에 등장하는 마른 몸매의 여성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몸은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고 여기기도 한다.

여성환경연대가 2017년 상반기 총 31개 브랜드의 5개 품목 13종 의류를 조사한 결과 전체 74.2%가 3단계 이하의 사이즈만 구비하고 있었다. 여성환경연대는 지난해 7월 26일 각종 SPA 브랜드 매장과 쇼핑몰, 백화점이 들어선 명동 거리에서 “문제는 마네킹이야” 기자회견(https://youtu.be/2xA7Ty_2YNY)을 열어 이 결과를 공개하며 문제는 여성의 몸이 아니라 불가능한 몸의 기준을 제시하는 마네킹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다.

 모리스-캐피에로의 프로젝트  ‘The Watchers’
▲  모리스-캐피에로의 프로젝트 ‘The Watchers’
ⓒ ‘The Watc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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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들은 사진작가이자 행위예술가인 헤일리 모리스-캐피에로가 거리, 쇼핑몰과 같은 일상의 공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담아낸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6년 동안 진행됐고, 이후 ‘The Watchers’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한 헤일리 모리스-캐피에로는 “사진 속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단, 나를 평가하거나,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담긴 사진을 선택했습니다”고 답했습니다.

저는 제 몸과 외모 때문에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졌었습니다. 수십번씩 면접을 보고, 모든 조건을 일터에 맞춘다고 말해도, 더 싹싹하게 웃고 상냥하게 대답해도 단정한 용모의 벽은 넘을 수 없었습니다. 사회에서 뚱뚱한 몸, 그리고 꾸미지 못하는 몸은 자기관리를 하지 못하는 게으른 몸으로 대변됩니다. 자본주의와 능력주의는 내 몸을 오로지 부지런하고 꼼꼼하게 일을 잘할 수 있는지, 생산성의 가치로만 판단합니다.

우리는 ‘남자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서만 벗어나면 되는 걸까요? 남성들이 욕망하는 모습에서만 벗어나면 탈코르셋을 잘한걸까요? 외모의 문제에는 젠더 권력의 문제 외에도 복합적인 사회적 권력관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저는 매일 고민합니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과 ‘예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회적인 욕망 속에서 고민합니다. 편안한 내 모습과 욕망되지 않는 내 몸을 보며 단정하고 똑부러지는 사람으로 비치길 바라며 고민합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탈코르셋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기준(standard)에서 지워지는 몸

 캘리그래피 : @kaito_calli
▲  캘리그래피 : @kaito_calli
ⓒ 여성환경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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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개 외모, 아름답다, 예쁘다, 뷰티 등의 단어를 통해 젊은 여성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나 중년, 노년 등 나이든 여성의 이미지는 쉽게 떠올릴 수 없다. 이는 ‘탈코르셋’을 떠올릴 때도 마찬가지다. 중년이나 노년의, 나이든 여성의 탈코르셋은 어떤 모습일까. 왜 우리는 장애를 가진 여성의 몸이나 유색 인종의 몸은, 이와 같은 사람들이 하는 탈코르셋은 상상하기 어려울까.

“사회는 우리가 어떤 몸을 생각할 때, 몸에 대한 기준을 만들 때 그 안에 속해도 되는 몸과 되지 않는 몸을 구분합니다. 정상적인 몸과 비정상적인 몸을 계속해서 분리하죠. 그리고 비정상에 속하는 사람들의 몸과 경험, 이미지는 지워지고 배제됩니다.

앞서서 말한 것처럼 게으르고 뚱뚱한 몸은 지워지고 부지런하고 마른 몸 혹은 건강한 몸만 인정되고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질환이나 병을 가지고 있거나 장애를 가진 몸이 아닌 건강한 몸, 그렇게 ‘극복한 몸’만 비치고, 유색인종이 아닌 백인(한국 사회에서는 ‘순수한’ 단일민족으로서의 한국인), 동성애나 양성애 등이 아닌 이성애자, 그리고 트랜스젠더가 아닌 사회적으로 부여받은 성별과 자신이 정체화한 성별이 일치하는 사람들, 시스젠더인 사람들.

내가 어떤 몸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이 사회에서 존재하는지, 자신의 몸이 사회에서 위치 지어지는 방식에 따라 각자가 경험하는 몸에 대한 기준이나 방식들은 전부 다 다릅니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비정상에 속한 사람들의 경험과 모습과 존재는 계속해서 지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특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몸의 모습과 경험만 남아 있습니다.”

외모억압은 모두에게 다르게 나타난다

한편 온라인상에서는 탈코르셋을 숏컷의 여부, 안경이나 렌즈의 착용 여부, 화장 여부 등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여자의 외모는 이래야 해~’, ‘이래야 여자답지~’ 머리카락부터 발바닥의 각질까지 하나하나 정해주는 사회에서 여자다움, 여성성에 부여된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누구에게나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실천을 하고자 할 때 느끼는 감정과, 억압과 좌절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머리를 자르고 화장을 지우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이겨내고, 외모 꾸미기로 인해 잃어버린 자신의 자유와 시간, 비용들을 되찾는 일일 것입니다. 어느 누군가에게는 커리어와 직장을, 자신의 생계를 걸어야 하는 일일 것이고, 어느 누군가에게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존엄함을 걸어야 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또 어느 누군가에게는 그 실천 때문에 폭력을 당하는 것을 감내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몸을 상상하기
▲  다양한 몸을 상상하기
ⓒ 여성환경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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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몸을 상상하기

“우리가 탈코르셋을 통해서 나아가려는 세상의 모습은 지금처럼 구체적인, 특정한 모습의 몸만 상상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이 운동을 통해서 가려는 길은 여자다움이나 여성성의 딱지가 붙은 모든 것을 도려내고 금지하는 길도, ‘내 욕망은 모두 옳다고’ 말하는 길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남자들이 원하는 외모’를 넘어서서 사회가 만들어낸 몸이 수행해야하는 정상성의 조건을 깨나가야 합니다. 어떤 실천을 하든 그 기준에 놓은 몸이 한정적이라면 실천과 운동 또한 그 기준 안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하나의 기준 안에 있지 않은 다양한 몸의 경험이고, 그들의 목소리이고, 상상입니다.

우리 내 몸을 둘러싼 제멋대로의 다양한 욕망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바라는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내 욕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그리고 내 존재가 다른 존재들 사이에서 어떻게 위치 지어졌는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안현진씨는 ‘다양한 몸들의 경험이 나누어지고, 그 차이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수많은 실패 속에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낼 것’이라며 대안을 제시했다.

 

목, 2018/11/1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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