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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통일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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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통일기행

익명 (미확인) | 목, 2015/09/10- 14:40

 

백두산 통일기행을 다녀와서

- 통일위원회 양승봉 변호사

 

천지는 푸르다.

천지는 맑고 넓다.

그리고 천지는 슬프다.

 

2015. 8. 21.일부터 24일까지 3박 4일 동안 민변 통일위가 주관한 통일기행 백두산 탐방을 천낙붕, 이광철, 서중희, 양창영, 설창일, 김용민, 그리고 저를 포함하여 7명의 단촐한 식구가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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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의 모토는 “가보자 북녘땅, 만나자 북녘동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행을 시작할 즈음은 남북이 극단적 대치를 한 후 협상을 막 시작한 때로 통일 기행 내내 우리는 인터넷을 확인하며 협상 결과를 주시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습니다. 통일을 위해 한창 교류를 하고 미래의 청사진을 공유해도 시원찮을 판에 이런 극단적인 상황까지 남북 관계를 악화시켜 온 양쪽 수뇌부의 퇴행적인 행태가 참으로 아쉬웠습니다.

 

21일-송강하를 향하다.

 

말로만 듣던 백두산 천지를 간다는 설렘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른 아침 인천공항, 간단히 수속을 마치고 약 1시간 10여 분에 걸친 짧은 비행시간 후 심양에 도착하였습니다. 비자심사를 마친 후 가이드를 만나 심양공항을 배경으로 현수막을 내걸고 기념사진을 찍고 곧바로 백두산을 오르는 전초기지, 송강하라는 곳을 향하는 버스를 탔습니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는 해박한 역사 지식을 자랑하는 59살의 조선생님이라는 조선족이었습니다. 조선생은 해박한 지식으로 여행내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선생과 나눈 대화는 여행의 또 다른 맛은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선생의 할아버지는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출신이라고 하였고 조선생은 딸 둘을 모두 훌륭하게 키워 큰딸은 중국에서 판사를 하고 있고 작은 딸은 한국의 대학에서 유학 중이었습니다.

 

가이드를 낀 여행이 그렇듯이 조선생도 버스에 타자마자 간단히 심양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심양의 옛 이름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봉천으로 현재 1,200만명 정도가 살고 있는 중국 5-6위에 해당하는 매우 큰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도시가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한동안 달려도 산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심양에서 송강하까지 약 6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하여 본격적인 도로주행을 앞두고 우리는 중국의 구멍가게에서 중국이 자랑하는 맛난 칭따오 10병과 안주를 샀습니다. 그런데 그 비용이 무려 75위안!! 우리 돈으로 약 15,000원 정도에 불과해 돈 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맥주를 마시며 우리는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가 중국시간으로 오전 10시가 겨우 넘은 시간이었으니 우리는 취하면 애비도 몰라본다는 낮술을 점심 먹기 전부터 시작하는 소박한 호사?를 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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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에 차량이 거의 없었지만 의외로 속도를 크게 내지 않아 약간 더디게 나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양쪽에 옥수수밭을 지나 달리고 또 달려도 계속 옥수수밭, 한국에서라면 당연히 지루하고 따분했을텐데 여행이 주는 설레임은 지루함을 못 느끼게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많이 살아 어쩌면 우리 땅이 되었을 수도 있는 만주벌판을 거의 다섯 시간 가까이 달려 3시 40분 경 늦은 점심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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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후 조선생은 이제부터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달린다 하면서 약 60km가 남았는데 세 시간 정도 가야한다고 하였습니다. 기껏 60km를 세 시간에 간다는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막상 도로를 달려보니 곧바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달린 길은 편도 1차, 왕복 2차선으로 된 좁은 도로였는데 그 도로를 달리는 모든 차량은 흡사 곡예를 하듯이 달렸고 여러 번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도로 곳곳에 경운기가 다니고 소를 비롯한 가축을 싣고 가는 트럭들, 그리고 차선을 무시하고 달리는 차량으로 도로의 모든 차량은 가다서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우리가 목격한 가장 압권인 장면은 터널 내부임에도 양쪽 차선을 꽉 채워 일방도로처럼 3대씩 줄지어 달리는 광경이었는데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송강하는 백두산 등정을 하는 관광객이 머무는 곳으로 이름도 왠지 멋지게 느껴집니다. 송강하를 거의 도착할 즈음 조선생은 1년에 약 300여 명의 중국인들이 백두산에 송이나 산삼, 약초 등을 채취하러 들어가 실종이 되어 결국은 돌아오지 못한다는 믿기 힘든 말을 해주었습니다. 백두산을 부산모수(父山母水)라고 칭하여 아버지의 산이라고도 한다는 데 그 산에서 해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어 종적을 알 수 없게 된다고 하니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생이 말했던 것보다 약 1시간 일찍 우리는 숙소인 그린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이동하여 간단히 저녁 식사를 마쳤습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연길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오는 유가려 가족을 기다렸습니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유가려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의 피해자인 유우성의 여동생입니다. 여동생 유가려는 아버지와 고모, 그리고 2주 뒤 결혼을 할 남편과 함께 왔습니다. 유가려는 국정원 합동심문센터에서 2013년 4월 26일 석방된 후 오빠의 재판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허위 진술을 하게 되었는지 조작 과정을 자세히 밝힌 후 2013년 7월 초 추방이 되었습니다. 반가왔지만 늦은 시간이라 간단히 맥주를 마시고 다음 날 점심때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22일-천지를 보다

 

조선생은 백두산은 관광객이 너무 많아 늦게 출발하면 기다리다 지친다며 최소한 6시에는 일어나서 식사를 마쳐야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일찍 식사를 시작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지런한 한국관광객들이 한꺼번에 식당으로 밀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이 제일 단촐해 우리는 제일 일찍 백두산을 향했습니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도 설레임을 주었습니다. 곳곳에 작약나무가 부러져 있었고 길 양쪽으로는 예쁜 꽃이 피어있었습니다. 조선생은 백두산을 우는 아기 얼굴이라고도 부른다면서(언제 어떻게 표정이 바뀔지 알 수가 없다는 의미로..) 은근히 천지를 구경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언질을 하였습니다. 길 옆 곳곳에 늪처럼 보이는 웅덩이, 그리고 무성한 숲은 남한 땅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나는 그 곳이 바로 개마고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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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분을 달려 백두산 입구 매표소에 도달하였는데 가지고 간 현수막을 펼치지 못하였습니다. 중국 공안은 백두산 인근에서는 한글로 된 현수막을 펼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심지어 가이드가 드는 안내 깃발에 사용된 한글도 현출시키지 못하게 한답니다. 중국은 백두산에서 한글이 현출되는 것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강한 제재를 한다는 것입니다. 백두산을 포함한 인근의 땅에 대하여 자신감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하는 나만의 추측을 해보았습니다. 조상들이 제대로 대응을 못해 멋진 땅을 놓쳐 버렸다는 아쉬움이 다시 들었습니다.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한 후 또 버스를 타고 백두산 천지를 향하는데 입장료와 버스표 가격이 무려 4만 원이 넘는 고가였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관광객들이 지불하는 돈이 모두 중국의 주머니로 향한다고 생각하니 참 아까왔습니다.

 

드디어 천지를 향해 버스를 타고 달립니다. 작약나무 숲을 지나고, 잡목을 스치고…나지막한 풀숲과 오밀조밀 이쁜 야생화를 굽이굽이 지나치면서 달렸습니다. 30분 정도 달린 후 우리는 드디어 천지를 향해 걷습니다. 일찍 서둘렀는데도 벌써 산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있습니다. 1,441개의 계단을 설레는 마음을 안고 한 걸음씩 밟고 올라갑니다. 날씨가 흐렸고 곳곳에 안개가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천지를 보기는 글렀구나하고 내심 포기를 하였습니다. 다음에 보면 되지…근데 언제 또 올 수 있으려나….흠흠

 

마침내 계단을 다 올라 천지를 내려다 본 순간, 잊을 수 없는 멋진 광경이 눈앞에 드러났습니다. 아 천지… 멋진 장면에 입이 다물어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절로 입이 벌어졌습니다. 순간 뭉클하고 감동의 물결이 가슴을 스칩니다. 우리 일행 모두에게 감동의 물결이 스치는 것이 저절로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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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에 안 가본 사람들이 여행자랑을 하면 말을 섞지 말자고 하였습니다.–천지도 안가봤으면서–좋은 책을 일독을 권하듯이 저는 천지에 다녀온 후 지인들에게 천지를 권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도 권합니다. 앞으로 2-3년 내에 송강하에 직항이 생길 예정이라고 하니 훨씬 편하게 구경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천지에 뛰어 내려가 직접 물을 만지고 싶었지만 접근을 금지시킵니다. 직접 접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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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번을 가면 두 번을 본다고 해서 백두산이라고 한다던 농담부터 시작해서 3대의 덕이 모여야 천지를 볼 수 있다는 말까지…참 다양한 말들이 천지를 더 신비롭게 합니다. 우리는 구름이 걷히는 순간부터 해맑은 천지까지 멋진 모습을 모두 관찰하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피곤한 일정이었지만 우리 일행 모두 천지를 보는 순간 참으로 들떠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오르는 방향에 따라 서파, 북파, 남파…라고 일컫는데 우리는 서파로 올랐습니다. 서파에는 북한과 중국의 경계비가 서있고 비록 북녘 동포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천지에서 허용된 북녘 땅만 조금 밟아보았습니다.

 

천지가 주는 웅장한 경관은 참으로 감탄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천지는 통일을 원하는 우리 동포의 염원을 모두 담을 만큼 크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멋진 천지를 우리 땅이 아닌 중국 땅을 통해 구경을 해야만 하고 여전히 우리는 티격태격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조선생의 채근에 아쉬움을 가득 남기고 천지를 떠납니다. 또 언제 올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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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에서 내려와 용암이 쓸고 간 흔적인 금강대협곡을 구경하였습니다. 백두산 바닥은 용암이 굳은 곳에 나무가 자라 뿌리가 야무지게 뻗지 못해서 곳곳에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사람이 다니는 곳을 빼고는 주변이 울창해 호랑이라도 튀어 나올 듯 합니다.

 

금강대협곡까지 돌아본 후 아쉬움을 두고 하산을 합니다. 매표소를 거쳐 강원도 식당이라는 곳에서 한국식으로 된 식사를 합니다. 그 곳에서 어제 약속했던 대로 유가려를 다시 만나 점심을 함께 하고 헤어졌습니다.

 

이제 통화로 향합니다. 통화로 가는 길도 약 4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여 서둘렀습니다. 피곤하였지만 주변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였습니다.

 

백산이라는 곳을 지나기 전에 본 석탄촌은 곳곳에 석탄이 쌓여 있었는데 아침에 석탄을 캐서 바로 성냥불로 불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품질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중국은 자연자원은 재생이 안되니 후손에게 자연자원을 물려주자며 될 수 있으면 개발을 늦춘다고 합니다. 백산이라는 곳은 석탄으로 유명한 곳이었다는 데 지금은 북한에서 석탄과 철광을 수입을 하고 있고 북한의 무산 철광을 수입해 철판으로 가공하여 돈을 버는 것은 일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도요타에서 50년간 50억 불을 제공하기로 하고 철판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통화는 제약과 포도주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통화 중심부에는 비류수가 흐릅니다. 비류수는 부여와 고구려의 경계로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주몽을 구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입니다.

 

우리가 백두산부터 오랜 시간을 달려왔던 그리고 내일 달려갈 모든 땅이 모두 고구려의 땅이었습니다.

 

통화에서는 저녁에 북한식당인 “묘향산”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식당을 가기 전 일행은 발맛사지를 받고 백두산을 오르느라 고생했던 발에 호강을 시켜주었습니다.

 

북한 식당은 이번 여행 중에서 가장 입맛에 맞는 음식을 우리에게 제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술값이 너무 비싸서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맥주 1병에 1만 원, 소주 1병에 4만 원, 설창일 위원장님이 기분좋게 한 턱 쏘셔서 맛나게 먹었습니다. 생각보다 중국인 관광객도 제법 있었고 흥에 겨운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북한 가수들의 노래에 어우러져 춤을 추는 모습도 정겨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짐을 푼 후 아쉬운 마음에 비류수, 통화의 강가를 7인의 낭인처럼 어슬렁거렸습니다. 통화는 상당히 깨끗하였는데 비류수 주변도 산책로가 잘 다듬어져있어 운치있었습니다. 산책을 마치고도 아쉬움에 호텔 옆 가게에서 양꼬치를 시켜 기어코 맥주를 한 사발씩 먹고 들어갑니다. 식사를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주문을 할 수 없었는데 우리 7명이 주문한 양꼬치보다 옆자리에 앉은 대륙의 남녀 2명이 주문한 음식이 훨씬 푸짐하고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서비스하는 남자가 우리를 쏘아보는 눈빛이 예사롭지는 않았다는…

 

23일과 24일

 

백두산을 본 뒤라 비교적 여유가 있었습니다. 다음 날 천낙붕 변호사님의 제안으로 일정에 없었던 양정우 기념관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양정우 기념관 가는 도중 10시도 채 안된 시간이었는데 엄청난 폭죽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란 우리들을 향해 조선생은 결혼식 축포라고 하면서 적게는 몇 십만 원부터 많게는 몇 백만 원씩 비용을 들여 폭죽을 쏜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양정우는 동북일대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했던 사람으로 우리에게는 낯선 사람이었지만 중국에서는 기념관과 무덤을 둘 정도로 유명한 항일투쟁가였습니다. 그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36세에 일본군과 대치하다 사살을 당하였는데 그와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한 사람들 중 조선인이 많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양정우 기념관을 잘 꾸며서 후손들이 기리고 있는 모습은 부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양정우 기념관을 보면서 조국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게 살아서 영화를 안겨주지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반드시 제대로 대접을 해줘야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양정우 기념관 관람을 끝내고 내일 비행기를 탈 심양을 향해 갑니다. 다시 4시간의 긴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맛난 맥주를 사서 낮술을 먹습니다. 비교적 한가한 일정이라 버스 안에서 변호사스럽게 자신이 겪었던 훌륭하신 판사님과 검사님에 대한 초보적인 뒷담화를 시작해서 어느 덧 우리 사회의 여러 현상과 제도에까지 소재를 넓혀가면서 맛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재미난 이야기와 맥주로 배를 채우다 보니 저절로 생긴 뇨의는 우리를 매우 당황하게도 하였습니다. 참고로 버스기사님은 벌금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요구를 묵살하고 결코 정차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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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에 도착하여 서시라는 시장의 양념파는 곳을 짧고 산만하게 구경하고 조선생님이 극찬을 하는 로벤교자라는 만두집으로 향합니다. 만두집이 하나의 건물로 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 맛은 한국에서 먹는 만두와 별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짐을 풀었지만 우리는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합니다. 피곤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면 각종 서면이 기다린다….

 

시내에서 한가롭게 배회를 합니다. 인도가 참 널찍하니 사람이 많아도 산책하기가 수월합니다. 음악소리가 어찌나 크던지…..군것질도 하면서 산책을 합니다. 호텔로 복귀 후 친철하고 영리해보이는 아가씨가 서빙을 하는 대로변 양꼬치집에서 소박하고 즐겁게 맥주를 마셨습니다.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는 북릉이라는 곳을 방문합니다. 북릉은 황태극의 무덤으로 황태극은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아들로 청이라 국가이름을 바꾼 사람입니다. 그는 1592년에 태어나 1643년에 사망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임진왜란을 겪었던 해에 태어나 자신은 우리에게 병자호란을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그가 죽을 때 앉은 채로 사망하여 청에서 새긴 용은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하는데 여하튼 우리와 좋은 인연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북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비교적 잘 가꾸어 놓았습니다.

 

북릉을 가면서 생각보다 교통이 덜 혼잡하여 이유를 물었더니 출근시차제라는 것을 적용하여 직장의 아침 출근 시간을 조금씩 조절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생은 중국의 모습을 수탉의 모습이라고 묘사를 하면서 동북삼성은 닭의 모가지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생은 기마민족이 말을 타고 움직이는 습성이 있다보니 성격도 급하다고 하면서 우리 민족도 기마민족이어서 성격이 급하고 우리나라의 버선코가 위로 굽은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 기마족이 말을 달릴 때 유용하도록 신발을 만든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북릉을 구경하고 중국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한식당에서 하였습니다. 패키지 여행의 마지막에 한식을 주는 것은 만족을 느끼고 돌아가라는 의미인 것 같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새로 지은 박물관으로 이동을 하였지만 막상 휴관을 하여 구경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박물관에는 삼부인과 청동단검과 비파형동검 등 우리가 교과서에서 봤던 물건들이 있다고 하였는데 문을 열지 않았으니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여 조선생과 헤어졌고 우리는 다시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오는 길에 항공사에서 무작위로 업그레이드를 해주는 서비스에 우리 일행이 모두 비즈니스석을 배정받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비즈니스석을 배정받고도 이를 모른 채 언제 이런 자리에서 편하게 여행해보나..하는 생각으로 지나쳤는데. 그 자리에 앉아서 돌아올 줄이야…..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참 편합니다. 무지 편합니다. 잠이 안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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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마치며

우리가 3박 4일간 여행을 하면서 백두산 천지에 머문 시간은 매우 짧았고 중국 땅, 그것도 길에 뿌린 시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천지가 준 감동은 오래 남았습니다.

 

비록 중국 땅에서 본 천지지만 언젠가 우리 땅에서 오르리라.. 통일이 되는 날 천지에 한 번 더 오르리라…우리 일행은 천지에 많은 다짐을 남기고 왔고 천지에 그런 다짐을 둔 것만으로도 여행은 충분히 즐겁고 가치있었습니다. 더불어 좋은 사람들과 같은 하늘아래에서 3박 4일가 어울린 것 역시 소중한 추억이었습니다.

 

비록 북녘땅과 북한동포를 많이 접하진 못했지만 천지에 담은 희망으로 내일을 기약하면서 여행기를 마칩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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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밤

목, 2015/11/26-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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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위원회 소식

 

변호사 박인숙

 

언론위원회 박인숙 위원입니다.

오늘은 제가 최근 시민들과 함께 모의 방송심의를 진행한 경과와 내용을 소개해 드리고, 좋은 방송을 이끌어내기 위한 관심과 노력을 함께해달라는 부탁을 올리겠습니다.

 

지난 5월 23일 수요일 저녁 7시에 합정동 국민TV 미디어협동조합 지하1층 국민카페 온에어에서 시민 방송심의위원회 ‘심의, 시민이 하면?’ 행사가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 주최로 열렸습니다.

 

3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9명의 위원 전부가 50대 이상의 남성이어서 ‘젠더 불평등 심의’라는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 후 2018년 1월 말에 새롭게 출범한 4기는 이러한 논란을 극복하기 위해 다행히도 40대 위원과 여성 위원을 3인씩 포함하였으나 아직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한계를 넘어 시민의 눈높이와 상식에 맞는 심의를 구현하기 위한 대안 제시 차원에서 20대~60대 연령의 다양한 전문성을 가진 위원들로 시민 방송심의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김진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전 EBS PD, 40대 남성), 박민 전북민언련 참여미디어연구소 소장(40대 남성), 석원정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 소장(50대 여성), 권보현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20대 여성), 엄주웅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전 방송통신심의위원, 60대 남성), 윤성옥 경기대 교수(40대 여성), 장은경 미디액트 사무국장(30대 여성), 한희정 국민대 교수(50대 여성)님과 함께, 제가 40대 여성으로서 민변 언론위원회를 대표하여 이 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 날 총 네 건의 안건에 대해 모의 심의 형태의 재심을 진행하였습니다. 첫 번째 안건으로 세월호 수색을 도왔던 이광욱 잠수사 사망과 관련해 당시 MBC 뉴스데스크 박상후 MBC 전국부장이 ‘데스크 리포트’에서 “조급증에 걸린 우리 사회가 왜 잠수부를 빨리 투입하지 않느냐며 그를 떠민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대목”, “19세기에 개발된 장비로 20세기에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을 21세기에 사용한다는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한국인이 무섭다” 등 세월호 생존자 수색에 다이빙벨을 투입한 한국을 폄훼하는 일본 인터넷사이트 게시글을 인용한 것에 대하여, 당시 3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행정지도인 권고를 결정했으나 이번에 시민 방송심의위는 ‘프로그램 정정·수정’ 및 ‘관계자 징계’를 결정하였습니다.

 

두 번째 안건으로 TV조선 장성민의 시사탱크에서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의 전신) 혁신위원회의 ‘공천 10% 청년 할당’ 제안에 대해 출연자가 ‘걸스카우트, 보이스카우트 정당’ 등의 표현으로 정치 주체로서의 청년을 비하하고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지방자치단체장이 구 통합진보당 출신 인사들이 주도하는 행사를 후원하니 ‘종북숙주당’이라는 비판을 듣는다고 발언한 것에 대하여, 3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는 행정지도인 권고를 결정하였으나 시민 방송심의위는 관계자 징계 및 법정제재인 경고를 결정했습니다.

 

세 번째 JTBC 선암여고 탐정단의 동성 연인인 고교생의 키스 장면과 머리를 쓸어 올리는 장면에 대해 3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방송심의규정 제43조 1항 어린이 및 청소년의 정서함양과 제27조 품위유지를 적용해 법정제재인 경고를 부과했으나, 시민 방송심의위 심의에서는 ‘문제없음’ 의견이 다수로 나왔습니다. 해당 심의에서 저는 “지난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이성간의 고등학생이 키스하는 장면에 대해서도 행정지도 결정을 한 적이 있는데, 3기 위원들이 동성애만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니고 고등학생들의 키스장면 자체를 문제 삼는다고 보인다. 왜 고등학생의 키스 장면을 문제 삼는지 이해할 수 없다. 법에서도 13세 이상의 자는 성적자기결정권을 갖고, 방송심의규정 제43조 제3항은 방송이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이행의 폭을 넓히는데 이바지하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드라마야말로 청소년들의 성과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드라마가 아닌가”라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마지막 안건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방중 성과와 관련해 출연자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문재인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대한 4대원칙을 합의한데 대해 대담하는 과정에서 “떼놈이 지금 북한 핵 무기를 앞에 놓고 우리보고 거기에 절하라는 것 아닙니까”라고 발언한 MBN <뉴스와이드>에 대해, 즉시 사과하였다는 이유로 현 4기 방통심의위에서 ‘문제없음’으로 결론 났으나 시민 방송심의위는 다수 의견으로 법정제재인 ‘경고’를 결정했습니다. 저는 “떼놈 발언 후 출연자가 사과했지만, 이런 지적을 여러 차례 받다 보니 어떻게 할지 알게 된 것 같다. 우선 막말을 뱉고 진행자가 지적을 하면 사과하면 된다는 노하우를 가진 듯 보인다. 이런 부분을 고려해 조치하지 않으면 계속 이런 식으로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저는 이날 시민위원으로 참여하기 전에 그 당시 방송을 시청하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①방송심의소위원회 회의록(안건상정), ②방송심의소위원회 회의록(의견진술 및 제재), ③전체회의 회의록(최종 제재 결정) ④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과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해설집’을 꼼꼼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각 심의안건에 대해서 의견을 발표하였습니다.

 

인적 구성의 다양성을 최대한 살린 시민 방송심의위원회에서 기존의 결정과는 전혀 다른 결론이 도출되는 과정에서, 두 번째 안건에 대해 권보현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20대 여성)는 “‘소아적 발상’, ‘걸스카우트, 보이스카우트 정당’ 등이라고 하는 건 어린이, 청소년 혐오표현이다. 청소년, 청년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존재라는 편견을 담고 있다.”라고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는데, 공감도 되면서 신선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중요한 요직에 나이가 많은 남성을 앉히고 정해진 결론을 형식적으로 만드는 과정만을 갖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좋은 자리였습니다. 현재 저는 SBS 시청자위원으로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서 좀 더 깊이 있게 방송통신위원회 심의에 대해서 생각하고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시청자위원으로서 방송심의규정을 늘 옆에 두고 방송을 볼 때에도 무엇을 좀 더 중점적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위 행사를 시작으로 민주언론연합회는 ‘시민 방송심의위원회’를 온라인으로 이어가겠다고 밝히고 시민 방송심의위원회 페이지(http://www.ccdm.or.kr/xe/simin04)를 오픈하였습니다. 2018. 8. 8. 11차 안건인 MBN <뉴스8>(7/24)의 <타살설로 시끌> 보도에 대해서는 785명의 시민들이 심의 의견을 제출하였습니다. 재승인 심사에 벌점이 있는 ‘법정제재’가 779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했고 벌점이 없는 ‘행정지도’ 및 ‘문제없음’은 총 6명에 그쳤습니다. 앞으로도 시민 방송심의위원회는 계속될 것입니다. 공정하고 품격 있는 방송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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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8/08/1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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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경제위원회 활동소식

 

 

1. 경제민주화

2015년도 이제 저물어 갑니다. 여의도에서는 19대 국회 마지막 일정을 앞두고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민생법안에 맞서 야권도 각종 민생법안을 발의하는 등 민생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한창입니다.

 민변 민생경제위원회는 참여연대·청년유니온·경제민주화실현전국네트워크 등 각종 시민·청년단체와 함께 11월 11일(수) 국회 정론관에서는 정의당과 기자회견을 진행하였고, 12일(목)에는 국회에서 새정치민주연합과 간담회를 진행하는 등 정부의 민생악법을 막고 제대로 된 ‘진짜 민생법안’의 도입을 촉구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민생법안은 그 이름과는 달리 대다수 서민들의 삶의 질을 악화시키고 대기업의 경제력 독점을 막는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민생경제위원회는 이름뿐인 정부·여당의 민생법안 입법을 저지하고 중소상공인·전월세거주자·저소득층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킬 ‘진짜 민생법안’ 입법에 총력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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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생위 외부 인사 강연

이번 11월에 민생경제위원회에서는 교수·국회의원 등 외부 인사분들을 모시고 민생경제 각 분야의 현안에 대하여 듣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11월 17일(화) 저녁 7시에는 부동산팀 주최로 서울대 김용창 교수님을 모시고 “도시계획제도와 시민단체의 과제”라는 주제로 강연을 개최합니다. 이어 11월 18일 저녁 7시에는 11월 민생위 월례회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을지로위원회 우원식 의원님을 모시고 정당과 시민단체의 연대모델, 경제민주화 사업의 중요성 등을 다룰 간담회를 개최합니다.

 민생경제위원회 일정은 민생경제위원회 위원 뿐만 아니라 민생경제 분야에 관심있는 모든 회원분께 열려있습니다. 관심있는 회원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민생경제위원회와 관련된 각종 문의사항은 사무처 송아람 상근변호사(02-522-7284)로 연락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이상 민생경제위원회 소식이었습니다^^

 

목, 2015/11/12-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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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그 곳에서 발견한 학살과 고통의 흔적

성유리(김인숙회원의 자녀)

입시가 끝난 후, 엄마의 권유에 따라 제주평화기행이라는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사회와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건조해지지 않도록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제주 평화기행은 내 생각과 달리 엄마와 나와 둘이 함께하는 프로그램이 아니었고, 얼 결에 민변 과거사위 분들과 함께 이행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내가 알고있던 4.3사건이란

내가 제주 4.3사건을 가장 최근에 들은 것은 지나가듯 얼핏 본 알쓸신잡의 한 장면에서였다.

4.3사건이라는 명칭과 순이삼촌이라는 소설의 제목을 들었다. 딱 그 정도의 익숙함이었고, 그 프로그램 또한 마저 보지 않은 탓에 4.3사건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대규모 학살에 가까운 살인이 있었다, 그 규모는 몇십에서 몇백에 이른다’

이 정도의 설익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탓에 처음 버스에 오르고 배부 받은 안내 책자를 읽었을 때, 큰 충격에 빠졌다.

‘남북전쟁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라는 표현이 주는 가늠할 수 없는 규모에 당황했다. 그렇게 많은 사상자가 생긴 사건을 나는 왜 모르고 있을까? 내가 이 정도로 무지한 걸까?

그 정도의 규모의 사건이라면 대한민국에 이 사건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야 하는 것 아닐까?

주위의 사람들 여럿에게 이 사건에 대하여 아는 바가 있는지 물었다. 다들 똑똑하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공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규모를 1만 명 이상으로 대답한 사람은 1명, 6만 명 이상으로 대답한 국사를 전공한 사람 1명을 제외하고는 나와 같이 이 사건의 규모에 대하여 현실의 반의반만큼도 알고 있지 못했다.

4.3사건은 4.3일 하루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약 7여년에 걸쳐 1947. 3. 1~1954. 9. 21 대대적으로 일어난 민간인 학살사건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일부 희생자들끼리의 이념 대립 또한 있겠으나, 가장 많은 희생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인이었고 이들이 민간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아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민간인 희생자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고자 한다.

발단은 어린아이가 경찰이 타고 있던 말의 뒷발에 다친 일이다. 1947년 3월 1일, 행렬을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말에 치여 부상을 입었다. 경찰은 어린아이가 다친 것을 몰랐고, 사람들은 다친 어린아이를 두고 떠나는 경찰의 뒤를 돌멩이를 던지며 쫓았다. 놀란 경찰은 긴급히 피신했고, 이를 본 경찰들은 총을 발포해 6명의 사상자를 냈다. 일제시대 때도 사람이 사망한 일이 없었다는 제주도에서 주민들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폭력을 거부한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 와중 2명의 경찰 사상자가 나왔다. 소통이 안 된 환경 속 오해는 그렇게 불어났고, 분단을 바라지 않은 사람들은 폭도로 규정되어 사살 대상자가 되었다. 국가는 1000명을 죽이면 한 명의 폭도를 잡을 수 있다고 하며 대량학살을 자행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4.3사건을 쳐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이 설명이 틀리다고 할 수 없으나 충분하지 못하다.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이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은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대량학살당한 주민들은 대부분 민간인이었으며, 무력을 앞세워 정부에 반대한 인사들로부터도 오히려 도망다녀야했던 사람들이었다. 무력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희생당했다고 보기 보다는, 엄청난 규모의 학살을 통해 그 속에 숨어있을지 모를 반대자들을 없애겠다는 국가의 방침에 따른 참혹한 살인이었고 슬픔이었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이름들, 알려지지 못한 사람들

평화공원에 갔다.

위패봉안소에 가서 신분이 확인된 피해자분들의 위패를 보았다. 처음엔 그것이 위패인 줄 몰랐다.

약 14,000개가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대량 학살이 일어난 현장에서 신분을 알기란 요원한 일이다. 마을 단위로 사라진 곳도 있다 하였고,

일가족이 몰살된 경우 또한 흔하다 했다. 그 가운데에서 신원이 확인된 사상자만 14,000명이라는 이야기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은 그 몇 배가 될 터였다.

면접 스터디에서 특히 중점을 두고 연습했던 사안 중 하나가 ‘한’생명의 소중함과 무거움이었다.

다수를 살릴 수 있다 하여도 죄 없는 한 사람의 목숨을 다수의 목숨과 교량하여 희생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모두 공감했다. 희생될 한 명의 사람이 나라고 생각했을 때, 과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한’명의 생명권이 얼마나 엄중한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나날들이 불과 며칠 전인데 14,000명이 이름 하나 남기고 사라진 장소에 있다는 생각에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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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념 후 들어온 위패봉안실의 안내문. 14,000명이 넘는 희생자의 수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아직도 트라우마를 겪으며 가족의 이름을 이 곳에 올리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 마을 단위로 사라진 경우, 그 들의 희생을 알릴 수 있는 생존자가 단 한명도 없기에 그들이 있었는지조차 우리는 알 수 없다.>

묵념 후 들어온 위패봉안실의 안내문. 14,000명이 넘는 희생자의 수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아직도 트라우마를 겪으며 가족의 이름을 이 곳에 올리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 마을 단위로 사라진 경우, 그 들의 희생을 알릴 수 있는 생존자가 단 한명도 없기에 그들이 있었는지조차 우리는 알 수 없다.

위패에 새겨진 이름 하나하나를 보면 더욱 이 사람들이 실존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비슷한 이름이 함께 같은 지역자란에 적혀져 있었다. 돌림 이름을 지었던 우리나라의 관습을 생각해보면 이 들이 형제 혹은 남매일 터였다. 감히 그분들의 성명을 빌려 설명을 돕자면

고창수, 고창동.. 김치우, 김치현. 같은 지역의 사람인 것을 감안하면, 가족 단위로 희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 어려 이름을 남기지 못한 아이도 있었다. 김영중의 자. 이런 식으로 이름마저 아직 남기지 못한 어린아이들의 위패가 적지 않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떤 죄목으로 희생당한 걸까? 당시 제주의 인구가 30만 명이라 했다. 공식적으로 1만 명 이상, 비공식적으로는 3만에서 6만, 8만까지 희생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수가 과연 희생당한 사람의 수가 맞는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

로스쿨에서의 공부를 돕기 위해 예비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들이 있는데, 내가 다니는 로스쿨에서 예비교육을 하는 첫 번째 시간에 헌법 수업을 들었다. 인권이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배웠다. 당시 나는 4.3사건에 대하여 이 사건에 대하여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고, 며칠이나마 기행을 통해 설명을 듣고 현장을 보고 느낀 내가 잘못된 사실을 전달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때문에 인권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시는 교수님의 말씀에 더욱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인권은 대체 무엇일까. 인간으로서 가지는 권리, 그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권리인 생존권이 이렇게 무참하게 짓밟힐 수 있는 것일까.

교수님은 인권이란 개인의 자유에 대한 국가적 간섭 배제 요청권이라고 하셨다.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대 국가적 방어권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했던 주범이 국가였던 시절이 있었기에 생긴 개념일 것이다. 학부 때에도 분명 배운 개념인데, 제주를 다녀온 후 인권이라는 개념이 훨씬 더 무겁게 다가왔다. 제주에 그저 여행의 목적을 가지고 놀러 갔다면 이 표현이 가지는 무게를 알 수 없었으리라. 국가의 폭력 앞에 개인은 이렇게 무력할 수 있다. 본질적인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의 현실은 이렇게나 참혹하고 슬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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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에 몰려서 살해당하기를 기다리는 모습.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개 숙인 모습과 절망 섞인 표정이 시신 없는 행방 불명자들의 비석 가운데에 나타나있었다. 이 들의 심정을 상상하고 이 들이 느꼈을 두려움을 공감하는 경험을 언제 또 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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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한 채 마구잡이로 형무소에 갇혔던 사람들. 수장되기도 했고 피살되어 대규모로 땅에 묻히기도 하였다.>

영문도 모른 채 수감되어 사랑하는 가족의 소식조차 듣지 못하고 끝내 사망한 사람들.

남아있는 편지에서 이들에게는 너무나 현실이었을 순간을 공유할 수 있었다. 이때에 든 생각 또한 처음 위패봉안소에 갔을 때와 같았다. 이렇게 참담한 사건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많은 사람 또한 모르겠구나. 외부 사람들 중에는 4.3사건을 4.3폭동이라는 명칭을 붙여 부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사망한 사람들 대부분은 밤이면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숨어야 했고, 낮이면 경찰들을 무서워하며 도망가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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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한 날을 보면 집단적 사살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의 이름을 보고 나이를 보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보다 10살 이상 어린 아이들, 나와 같은 나이의 친구들. 시대의 아픔에 희생되기엔 너무나 이른 나이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동굴로 피해 겨울 날씨에 동사하고 굶주려 아사했다. 또는 운동장으로 불려가 무차별적인 총살을 당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생존해있는 피해자분들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시기 때문이다. 국가를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이 당했던 것은 국가폭력이었기 때문이다. 혹여나 또 붙잡혀갈까, 혹은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서 말하기 힘든 것이다.

혹자는 너무나 큰 갈등의 크기 때문에 생존자분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사건엔 명칭을 붙이기 힘들 정도로 큰 고통과 두려움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현장을 생생하게 들려주실 수 있는 분들이 아직 있을 때, 용기 내주시는 분들이 있을 때 진상 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더 이상 폭동이라고 부르지 않도록, 희생자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아파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유가족을 위로할 수 있도록.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라는 프로가 있다. 여기에 독일 사람들이 한국에 여행 왔을 때, 그들이 서대문 형무소에 가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좋게 여겼다. 국가폭력의 가해자가 되었던 나라의 후손으로서 비슷한 아픔의 현장을 보고 과거를 되새기며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려는 자세를 봤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아픔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역사의 아픔의 현장을 보면서 이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갖는 다크투어가 더욱더 성행해야 한다. 실제로 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보고 설명을 듣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데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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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하나 하나에 모두 눈길이 가지만, 어린 아이의 사진을 보았을 때의 참담한 심정을 잊을 수 없다. 저 아이가 무엇을 알고 무슨 잘못을 해서 희생당한 것일까.>

평화박물관에서 본 희생자들의 얼굴.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보았다. 살아생전의 모습을 보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고 아플까. 이 들이 저항도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더욱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 많이 아파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해야 한다. 유가족들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은 관심과 공감이다. 평화박물관에서 설명을 해주시는 가이드분을 보며 느꼈다. 몇 번씩 반복해서 4.3사건에 대해 설명을 하실 텐데 이야기하실 때 눈시울이 붉어지시는 것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아는 것을 원하셨고, 희생자들을 기억해 줄 것을 원하셨다. 이 사건을 돌아보며 이를 평화의 도구로서 쓸 수 있도록 우리가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지켜주어야 한다. 명칭마저 지어지지 않은 이 아픈 역사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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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름다운 바다를 볼 때에도 절벽마다 요새가 지어져있는 볼 수 있었다. 군사적 요충지로서 섬 전체가 요새화되었기에 제주도민들의 저항을 더욱 경계한 것일까. 1000명 죽이면 한 명은 폭도일 것이니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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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봉을 파는 강아지가 있는 아름다운 섬 제주도.

서울에 가자마자 순이삼촌 책을 샀다. 중단편 모음집 속 순이삼촌은 그리 분량이 길지 않다.

누구라도 부담 없이 금방 읽을 수 있다. 책을 읽으며, 혹은 읽고 제주 다크투어를 통하건 혹은 개인적으로 방문하건 학살이 일어났던 장소를 둘러보면 이분들이 얼마나 큰 공포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생존자 할머님이 들려주신 총의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고 2년 만에 사망한 어린 동생의 이야기, 운동장에 수십수백 명이 모여 한꺼번에 총살 당한 이야기를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왜 제주도민들이 같은 날에 오열하며 합동 장례를 치르는지 알 수 있다.

이해관계를 떠나 한 명 한 명의 목숨을 기릴 수조차 없이 마을 단위로 사라져 존재조차 알 수 없는 주민들의 희생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왜 이 사건을 알리고자 다크투어를 기획한 사람들이 있는지, 왜 바쁜 시간을 쪼개어 진상조사를 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생존자 마을회장 할머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처음엔 상대가 미웠지만, 이제는 모두가 피해자라고 생각하신다고.

수많은 사망자와 행방 불명자, 유가족과 생존자들을 기억하고 위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라고

그분들이 말씀해주실 수 있을 때 진상조사가 활발히 일어나 조금이라도 더 정확한 역사를 기록할 수 있길 바란다.

화, 2018/02/27-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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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16. 과거사청산위원회 신입회원간담회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하여 과거사위 입회원들과 배회원들이 함께하는 신선한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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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에는 신입회원들을 위한 뜨거운 환영과 배려, 그리고 아주 특별한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장완익 변호사님께서 들려주시는 과거사위의 역사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과거사위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과거사위가 걸어온 길을 함께 훑어보면서, 우리 위원회를 조금 더 알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29차 활동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마음을 새롭게 다잡았습니다.

 맛있는 음식, 다른 곳에서 듣기 어려운 귀중한 말씀, 그리고 좋은 사람들.

배도 마음도 따뜻하게 채워지는 점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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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희 위원장님 말씀처럼 우리 과거사위가 앞으로 더 재밌고 유쾌한 모습으로 자주 뵐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끝으로 지난 5년 남짓 과거사위와 함께하셨던 오지은 간사님께서 아쉽게도 과거사위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간사님께 그동안 수고 많으셨고,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월, 2016/06/2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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