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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 ‘겨울에 자란 나무처럼’ 소라미 변호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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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 ‘겨울에 자란 나무처럼’ 소라미 변호사 인터뷰

익명 (미확인) | 화, 2015/08/25- 17:23

[회원인터뷰]‘겨울에 자란 나무처럼소라미 변호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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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겨우내 뿌리를 보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합니다. 그 힘으로 나무는 움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선선한 바람마저 서운한 여름의 끝자락. 13기 자원활동가들이 종로구 창덕궁길 공감사무실에서 소라미 변호사님을 마주했습니다. 12년 동안 공익변호사로 길을 걸어온 소라미 변호사님의 이야기는 겨울나무처럼 단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단단함은. 법의 테두리에서 밀려난 이주민. 여성 등 수많은 이들에게 움을 틔워낼 공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귀함’을 법의 언어에 담아내기 위해 쉼 없이 걸어왔던 소라미 변호사님. 그 단단하고, 따뜻한 발걸음 만나보시죠.

 

이우균 : 일단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소라미 변호사 : 저는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올해로 12년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소라미라고 합니다. 공감에서 잔소리를 맡고 있고요, (웃음) 황필규 변호사님은 저를 마님이라고 하시죠. (웃음)

 

우 :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질문부터 드려볼게요. 왜 법조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셨나요?

 

소 : 어렸을 때 막연하게 법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이유는 대단한 건 아니었고, 아버지가 주입시켜준 꿈이기도 했어요. (웃음) 제가 공부를 곧잘 하니까, 여자가 차별받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는 데 좋은 직업이 법조인인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중학교 때부터 해주셨어요. 이태영 변호사님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했고요. 사실 대학에 들어갈 때 법대를 가진 않았어요. 다른 과를 선택했고, 공부보다는 동아리나 학생회 활동을 했죠.

 그렇게 졸업할 때가 되어서 다시 진로고민을 했을 때, 막연하게 생각했던 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그리고 ‘그 일을 하면서 내가 보람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딱 두 가지밖에 없었어요. 공부를 너무 안 해서 전공을 살려서 뭘 하기는 어렵겠다는 현실적인 판단도 있었고요. (웃음) 아무튼 의미 있는 일, 보람 있는 일,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 법조인이 되고 싶었지!’ 이런 막연한 생각들이 일치되면서, ‘아 그래 지금부터라도 내가 고등학교 때처럼 공부를 하면 사시에 합격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굉장히 무모한 생각으로 뒤늦게 학사편입을 해 다시 법대 3학년으로 돌아가서 사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렇죠, 간단하지 않아요. (웃음)

 

우 : 더 간단하지 않은 질문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웃음) 졸업하시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게 지금 하고 계신 공익변호사라는 직업과 연관이 될 것 같아요.

 

소 : 제가 연수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만 해도 공감 같은 단체가 없었어요. 그래서 당장 공익활동을 전담하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고, 다만 좀 보람 있는 일도 할 수 있는, 좋은 선배님들이 많이 계시는, 예를 들면 민변 활동도 많이 하시는 변호사님들이 계신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 나중에 공감과 같은 단체를 만들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제가 수료한 2003년 12월, 연수원 2년차 마지막 겨울에 ‘낮은 곳에 임하는 용기로 소외된 희망을 되살린다’라는 엄청난 문구로 공채 공지가 뜬 거예요.

 당시 아름다운재단 안에 공익변호사 팀을 만들겠다는 취지로 변호사를 공채한다는 공지였는데, 그 문구가 너무 멋있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읽어봐도 뭘 하는 곳인지는 잘 모르더라구요. (웃음) 어떻게 할지 고민을 많이 하다가 그곳에 지원하게 됐습니다. 사실 연수원 수료하고 바로 공익활동을 전담하는 변호사로 일을 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내가 일정 기간 변호사로서 실무 경험도 쌓고 트레이닝을 받고 그 다음에 돌아와서 하는 게 좋을지 고민을 많이 했죠. 몇 분 선배님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의견이 반반인 거예요. “하고 싶은 일이면 바로 시작하는 게 좋다, 나중에 돈맛을 알면 돌아오기 되게 힘들다” 조언해주시는 선배 변호사님도 계셨고, “지금 당장 가서 네가 과연 뭘 얼마나 할 수 있겠느냐, 일정 정도 실무를 쌓고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조언해 주시는 분도 계셨어요.

 그런데 당시 제가 아름다운재단에는 선발이 되었고, 다른 데는 다 선발이 안 되었어요. (웃음) 그래서 뭐 필연적으로, 공감 창립 멤버로 일을 시작하게 된 거죠. 저로서는 당시에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있는 상황에서 공감 활동을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 조상님이 3대 덕을 쌓았나 보다, (웃음) 제가 공감을 창립하는 멤버로 같이 일할 수 있었던 게 매우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우 : 왜 행운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소 : 왜냐하면 우리가 많이 자랑하듯이 (웃음), 공감이 한국사회에서 최초로 설립된, 공익활동을 전담해 비영리로 운영하는 변호사 단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받은 장점이 많죠. 저희 실력이나 능력에 비해 과분하게 인정도 받고, 주목도 많이 받고. 그래서 공감이 빠른 기간 안에 안착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게다가 지금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공익활동 전담으로 일하고 싶다는 후배들이 굉장히 많이 생겼죠. 후배들 만나서 공감 이야기를 해줄 때마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요. 그리고 이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게 다 창립 멤버로서 일을 해왔기 때문이라는 걸 아니까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우 : 공감이 국내 최초의 공익인권법단체라서 유리한 점이 많았다고 하셨지만, 저는 민변에 와서, 공익변호사 활동이 참 쉽지 않다는 점을 많이 느꼈습니다. 민변 소수자위원회에서 진행하는 일들이 계획대로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민변처럼 규모가 큰 변호사단체도 잘 안 되는 일이 많은 것을 보면, 공익변호사로서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활동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이 어떤 게 있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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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 제가 최근에, 곧 다음 주 월요일에 국회에서 있을 정책세미나 발표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너무 맥이 빠지는 거에요. 인신매매 피해자 식별을 위한 제도개선 관련 세미나인데, 사실 그 이슈에 대해서 제가 공감 활동 시작하면서 거의 한 10년 동안 이야기를 해왔거든요. 그런데 하나도 바뀐 게 없어요. 실태도 바뀐 게 없고, 법제도개선하자고 이야기하는 것도 계속 똑같아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또 해달라고 요청이 온 거에요. 해야죠. 해야 하는데, 너무 이야기하기가 싫은 거야. (웃음) 지난 10년 사이 어쩜 이렇게 하나도 바뀔 수가 없을까 싶은 거죠.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늘어난 것도 아니에요. 여전히 소수의 사람들, 소수의 단체, 소수의 변호사들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런 게 힘들어요.

 공감에서 일하는 다른 변호사님들도 마찬가지지만, 하나의 제도를 바꾸고, 실태를 바꾼다는 게 변호사 한 명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국회에서 그런 제도를 개선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외부 시민단체와 함께 해야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왜 이런 걸 국회에서 안할까 의구심을 갖고 제도 개선에 대해 지지를 해주어야 국회도 관심을 가질까말까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슈가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 현실의 벽을 느낄 때가 많죠. 내가 열심히 법안 만들고, 내가 열심히 기자들에게 이야기하고, 발표문 쓰고, 국회 가서 토론하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 구나를 느낄 때가 많아요. 그럴 때 많이 힘들죠.

 

우 : 그런 허탈함을 극복하시는 방법이?

 

소 :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많지만, 개중에 한 두 개씩 바뀔 때가 있어요. (웃음) 그 힘으로 하는 거죠. (웃음) 예를 들면, 제가 입양인들과 함께 입양법 바꾸는 활동을 한 적이 있어요. 한국사회에서는 입양을 막연하게 좋은 것,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아이들 혹은 부모가 양육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새 가정을 찾아주는 아름다운 것, 사회적으로 선한 것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있었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저희 사무실로, 20~30년 전에 해외로 입양되었다가 돌아오신 분들로 구성된 입양인 당사자 운동 단체 분들이 찾아오셨어요. 그 분들이 한국의 입양제도가 얼마나 입양인의 인권, 아동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인지, 본인들이 30년 전에 입양될 때 얼마나 불법적인 방식으로 입양되었는지, 그리고 현재 입양인들이 한국으로 돌아와서 친부모를 찾는 데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그 분들은 “한국에서 입양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고 말씀하셨죠.

 저는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제가 가졌던 입양에 대한 생각과 그 분들이 들려주시는 입양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다른 거예요. 그래서 입양에 대한 법을 다시 보게 되었고, 애초에 아이들이 한국에서 살 수 있게, 출생한 가정에서 살 수 있게 돌보지 않았던 우리 한국사회의 현실, 그동안 아동복지정책의 잘못된 점을 알게 되어서 같이 활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 2011년도에 법이 통과되었어요. 이게 그나마 제가 했던 여러 가지 활동 중 변화를 이끌어냈던 점이고

 재미있었던 건 당시가 이명박 정부였는데, 이명박 정부가 저희와 같은 입장을 취하기가 되게 어렵잖아요, (웃음) 그런데 입양 이슈에 대해서는 의외로 정부가 약간 비슷한 입장을 취한 거예요. 당시 정부가 입양 문제에 대해 굉장히 수치스러워했어요. 한국이 여전히 해외에, 미국으로 입양 보내는 아이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등 이런 수치에 대해서 정부가 부끄러워했고, 국제사회로부터 지적도 많이 받았던 거예요. 그래서 ‘아 이건 좀 바꿔야 한다’는 정부 입장이 있었던 데다가 다행히 당사자 분들이 목소리를 많이 높여주셨고, 거기에 저희가 같이 끼어서 법적인 언어로 바꾸어서 일하니까 빠른 시간 내에 급속도로 제도 개선이 일어났던 거죠. 굉장히 재미있게 일을 했어요. 그런 한 두 가지 사례들이 힘이 되는 거죠. 당장은 아니어도 여러 가지 상황 변화에 따라서 언젠간 또 바꿀 수 있겠구나 희망을 가지는 거죠.

 

이하나 : 현재 주력하고 계시는 여성인권과 아동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소 : 공감에서 2004년에 활동을 시작할 때 멤버가 변호사 4명이었는데, 남성변호사님 세 분과 저였어요. 그래서 ‘여성인권은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선점을 했어요. 제가 여성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특별한 게 있는 것 같진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제가 스스로 여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여대 다니면서 학교에서 여성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고, 다른 이슈보다 조금 더 ‘이건 내 문제다’라고 생각이 든 부분이 있었죠.

 공감 활동을 시작할 당시에 사무실로 이주여성단체와 성매매 피해 여성 지원 단체들의 요청이 많이 들어왔어요. 저희가 맨 처음에 변호사를 파견하는 활동을 했는데, 제가 거의 첫 해에 성매매 피해여성 지원하는 단체로 일주일에 이틀 출근을 하고, 이주여성단체는 일주일에 하루 출근하는 방식으로 단체들과 같이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굉장히 자연스럽게 공감에서 여성인권이슈를 제가 계속 맡아서 활동해 오게 되었죠.

 아동인권 관련해서는.. 저희가 처음부터 아동인권이슈를 한 건 아니었고, 조금 전에 말씀드린 입양 이슈 관련 활동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어요. 입양이 결국에는 한국의 아동복지체계 안에 그 위치가 있거든요. 부모가 돌볼 수 없는 아이들을 어떻게 공적으로 돌볼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는 법이 아동복지법이고, 입양과 관련된 특별법이 있는 건데, 아동복지법을 보니까 제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공백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입양의 문제를 통해 아동복지법 체계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아동이슈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지금도 저희가 아동인권을 다 하는 건 아니에요. 입양 문제, 그 다음에 이주 아동의 문제. 제가 공감에서 이주 이슈나 이주 여성 쪽을 다루니까 이주 아동과 관련된 사례도 지원 요청이 들어오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미혼모 이슈와도 연결이 되고, 아동학대 문제 등과도 관련해서 활동을 조금씩 넓혀 온 게 있죠. 게다가 최근에는 제가 4살 아이의 엄마가 되고 보니 아이들의 문제가 더 남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하 : 다양한 이슈와 분야들에서 활동해오셨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의뢰인이나 사건은 무엇이었나요?

소 : 아동인권에 관해서는 앞에서 말씀 드린 입양 문제였고요, 여성과 관련해서는.. 많이 있을 수 있겠는데, 최근에 지원했던 사례로 말씀드릴게요. 잘 안 된 사건이에요. 캄보디아 여성 두 분이 비닐하우스 농장에서 일하다가 농장주로부터 거의 1년간 지속적으로 성폭행 당했던 사건이에요. 저희 사무실로 지원 요청이 왔을 때에는 이미 검찰 불기소 결정이 난 다음에 항고하는 과정이었어요. 너무 억울한 사건이었어요. 제가 봤을 때에는, 당사자들과의 면담, 신고 경위나 여러 가지 상황을 보면 농장주가 잘못한 게 맞는데, 처벌해야 되는데, 우리가 항고심부터 결합해서 결국에는 항고 기각, 재정 신청마저 기각되어서 결국 잘 안 됐어요. 그 분들이 너무나 많이 우셨고..

성폭력 사건은 초기 사건 대응이 중요하거든요.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 신빙성 하나로 가해자를 처벌해야 하는데, 이 분들이 초기 대응을 잘 못하셨어요. 갑작스럽게 농장에서 구출되어 바로 2~3일 동안 경찰에서 수사를 받았는데, 수사 과정에서 대략적으로 특정했던 사건 발생 시점이 나중에 검찰로 가면서 다 뒤집힌 거예요. 결국 진술이 일관적이지 못해 이 분들은 완전히 못 믿을 사람들로 결론이 난 거죠. 당시 검찰 기록을 보면, 제가 조서만 읽어봤는데도 검사가 막 화를 내는 게 느껴질 정도였어요. 피해 여성분들은 자기들이 피해를 인정받고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쭉 조사를 받았던 건데, 검사가 엄청 다그치니까, 마지막 검찰 조사 받을 때에는 통역해주었던 분이랑 같이 울어버렸대요.

그렇게 꼬인 사건을 항고부터 하려니까 쉽지는 않더라고요.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이분들이 쓰신 진술서 중에, 자기는 한국에 와서 돈 벌어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왜 자기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고, 자기는 여기 와서 완전히 다 망가졌다고 표현하신 내용이 있었어요. 그 진술서도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이 사건이 최근에 기억에 남아요.

농업 이주 여성들 사건을 할 기회가 많지는 않아요. 이런 사건들이 드러나기가 쉽지 않거든요. 보통 이주 여성이 고소고발을 하면 계속 일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크고, 다른 농장으로 사업장을 변경해줄 가능성도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잘못하면 한국에서 일할 기회만 없어진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고용허가제 구조 하에서는 농장주, 사장 등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이주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말하기가 어려워요.

비록 많진 않지만, 들어온 사례들을 보면 피해 여성의 입지가 굉장히 취약해요. 일단 비닐하우스 농장은 밀폐되어 있고 외부로부터 차단된 공간이죠. 게다가 피해 여성분들한테 농장주는 하느님 같은 존재였대요. 농장주가 자기들을 고용하겠다고 해서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는 거죠. 한국에서 버는 한 달 100만 원 정도의 월급이 캄보디아에서는 1년 치 임금보다 높아요. 그러니까 이 분들한테는 한국에서 일하는 게 엄청난 일이고, 또 처음 한두 달은 농장주가 친절하게 대해주니까, 농장주 이름을 무슨 아버지라고 핸드폰에 입력해놓을 정도로 믿고 신뢰했던 사람인거죠. 그런 구조적인 취약함, 경제적인 취약함, 고용허가제 하에서 사업장 변경이 어려운 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거죠.

이 분들이 한 일을 보니까, 성적 착취뿐만 아니라 농장주 집에 가서 설거지하고 빨래하는 게 일상적인 일인 거예요. 그런 식으로 1년 넘게 지속적으로 피해를 당해 오신 거죠. 이런 피해가 사실은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한 두 사람의 문제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놀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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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들에 대한 혐오가 점점 심해지고 조직화되어가고 있어서, 이주민 관련 활동을 하시는데 어려운 점이 많을 것 같아요. 이런 혐오 문제를 해결하고 인식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소 : 이주민에 대한 혐오라..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까요? 저는 이자스민 의원실과 ‘이주아동권리보장법’을 제정하는 활동을 몇 년 동안 해왔어요. 그리고 작년 2014년 12월에는 의원실에서 법안 발의를 했고요. 그런데 그 후에 이 법안에 반대하시는 분들이 조직적으로 이자스민 의원실에 전화로 항의하고, 팩스를 보내고, 홈페이지에 댓글 다는 등의 반대운동을 했어요. 이로 인해서 이자스민 의원실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죠.

사실 저는 반대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보지는 않았어요. 맘 상할까봐. (웃음) 주위에서 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던 건, 예전에는 이런 반대운동을 하는 분들이 소규모였거든요. 예를 들면 국제결혼 피해자 모임에 속한 남성분들 정도요. 이분들의 모임이 있어서 결혼이주여성의 인권을 보장하자는 국회의원들 활동이 있으면 조직적으로 오셔서 피켓팅도 하고, 공적으로 발언도 많이 하시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게 굉장히 확산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일반 주부들이 모여 있는 엄마들 카페에서도 이 법안 이야기를 하면서, ‘아니 우리 아이들에게 지원할 것을 어떻게 세금도 안 내는 이주 아동들에게 지원할 수 있느냐’는 식의 논리로 반대하신다고 하더라고요.

이게 뭘까. 좀 고민이 되더라고요. 제가 보기에 이 논리는 결국 일베의 논리와 같거든요. 일베들이 무임승차한다는 취지로 소수자 인권, 여성 인권 이야기하는 데마다 반대하는 논리거든요. ‘왜 우리가 낸 세금으로 그들에게.’ 이런 논리가 의외로 확장력을 가지면서 그냥 일반 사람들도 가만히 듣고 보면 뭔가 억울한 느낌을 받는 거죠. 거기에 삶이 경제적으로 각박해지고 박탈감이 전반적으로 팽배한 현실에서, 내 것을 뺏긴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또 이게 사회 전반적 분위기와 맞물리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신은미·황선 통일토크콘서트에 한 고등학생이 사제폭탄을 던진 사건 같은 경우에 나왔던 반응들이요. 그 사건은 사실 굉장히 무서운 것이잖아요. 그런데 사회적으로 그 행동을 잘했다고 영웅시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이에 대한 정부의 코멘트도 이상하게 나왔어요. 이 현상을 문제적으로 바라보고 이것을 사회적 문제로 인지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애초의 종북 콘서트가 문제였다는 방식으로 말이죠. 마치 이런 관점을 허용하고 묵인하고 방조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혐오는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기보다, 전체적인 인식의 문제, 그런 논리를 확산시키고 조장하는 정권과 언론의 태도가 바뀌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하 : ‘왜 내 세금으로 저 사람들을 지원해주어야 해?’라는 논리는, 이 나라의 ‘시민’에 이주민들을 포함하지 않는 논리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생각했던 것은 ‘시민’ 개념이 좀 더 확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변호사님께서는 시민 개념이 어떤 식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소 : 그런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데요. 이주민들이 정말 세금을 안낼까요? 직장을 다니게 되면, 일단 근로소득세를 내죠. 그리고 우리나라의 세금 부담 비율이 직접세보다 간접세가 더 높아요. 간접세가 한 70% 정도를 차지하거든요. 이주민들이 마트에 가서 장을 본다든지, 생필품을 산다든지 하면 거기에 다 부가가치세가 붙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사는 이주민은 직접, 간접의 세금을 부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공동체 개념을 확장할 필요가 있는 거죠. 예전의 국적·민족 중심의 공동체 개념에서 벗어나, 어쨌든 한국에서 같이 주민으로 살아가고 있고 세금 부담도 같이 하고 있는 사람들을 국적과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타적으로 대해야 할 것인가 재고할 필요가 있어요. 이러한 배타적인 시각은 이주민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거든요. 이 부분은 사실 국회나 정부도 크게 입장이 다르지 않아요. 예를 들어, 저희가 이주아동 권리보장 기본법을 제정할 때의 일이었어요. 사실 이 법은 너무 당연한 것이거든요.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나 태어날 곳을 선택한 게 아니잖아요. 한국에서 태어나고 보니까 부모가 미등록 이주노동자인 것이죠. 그런데 그 이유로 아이들은 신분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공교육이나 의료보험 등에서 계속해서 배제되죠. 결국 이주아동 권리보장 기본법은 아이들만이라도 우리가 비준한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따라서 건강하게 발달·성장하고, 교육받을 수 있고, 병원에 갈 수 있게 보호해주자는 취지의 법이거든요. 너무나 당연한데, 이게 왜 통과가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이 법의 제정에 대한 반대 논리가 법무부에서 나왔어요. 법무부는 아이들을 보호하면, 그들의 부모까지 보호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모든 불법체류자들이 다 아이를 낳고 한국에 정착하려하지 않겠는지 우려해요. 이런 악용 가능성을 이유로 이 법의 제정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하죠.

 법무부는 이 법의 제정이 ‘공익’과 충돌한다고 말해요. 여기서 법무부가 말하는 공익은 출입국관리를 말하는 것이거든요. 공익과 사익이 충돌한다는 말인데, 저는 이게 너무 충격적이에요. 아동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사익이고, 출입국관리를 제대로 하는 것은 공익이기 때문에 공익이 앞선다는 논리가 저는 너무 무서운 논리라고 생각해요. 출입국관리법을 준수하는 것이 이주아동의 권리를 보장해야하는 것보다 앞설 수 있을까? 이런 법무부의 인식이 외국인 혐오를 조장하고, 또 묵인한다고 생각해요. 초과 체류나 미등록 체류이기 때문에 인권보장도 안 된다는 법무부의 입장은 외국인 혐오 세력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저는 법무부가, 정부가 이런 입장을 견지하는 한 외국인 혐오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3

 

하 : 변호사님께서 ‘법적인 관점의 해결이 어려워도 인권적 관점의 해결을 도모한다.’라는 말씀을 하신 인터뷰를 봤어요. 법적인 관점과 인권적 관점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또 양자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소 :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웃음) 저는 공익 변호사, 인권 변호사, 공감이나 민변에서 활동하는 변호사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인권의 문제를 법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양자의 균형을 맞춘다기보다는, 기존의 법에 담겨있지 않은, 혹은 기존의 법에 충분히 담겨있지 않은 목소리, 예컨대 소수자의 인권이나 입양인의 인권 등과 같은 관점을 법에 새롭게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존의 법은 현재의 소수자들의 인권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거나 침해할 수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보면 법과 인권이 충돌한다고 말할 수 있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일을 시작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법과 인권이 충돌하는 것은 아니에요. 인권의 문제가 법에 반영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활동해야 하는 거죠.

 

하 : 공감의 10년 기록이 담긴 ‘우리는 희망을 변론한다.’가 출간되었는데요. 그동안 공감이 이뤄낸 성과와 가장 큰 보람은 무엇일까요.

 

소 : 공감이 계속 존재해왔다는 것?(웃음) 사실 저희가 맨 처음 시작을 했을 때, ‘몇 년이나 가겠어?’하고 반신반의했거든요. 왜냐하면 후원금으로 운영비와 사업비를 충당한다는 것이 굉장히 생소했고, 거기다 일반적으로는 ‘돈을 잘 버는’ 변호사가 후원을 받는다는 것도 낯설었거든요. 다른 가난한 인권시민단체처럼 후원금으로 보수를 받으면서 활동한다는 것이 가능할지 의심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공감의 성과는 문 안 닫고 12년 동안 잘 해오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그리고 최근 2, 3년 사이에 저희가 제일 보람을 느끼는 것은 공익법 활동을 하는 후배들이 많아졌다는 것이에요. 희망법도 생겼고, 어필도 생겼고, 또 공익활동을 전담해서 일하겠다는 변호사들이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했거든요. 시민단체의 상근 변호사가 된다든지, 홀로 단체를 꾸리는 변호사님도 생기고. 예전에는 ‘민변 방식’의 공익법 활동밖에 없었다고 하면, 공감이 생기면서 새로운 방식의 공익법 활동이 등장했고, 지금은 더 다양해진 것이죠. 또 공익법 활동이 사회적으로 점점 확산되는 상황에서 공감이 선배 역할을 하고 있구나, 우리가 후배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고 있구나 하는 것에서 굉장히 큰 보람을 느끼고 있죠.

 

하 : 한국 사회에서, 특히 젊은이들이 ‘공감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한국 사회의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소 : 저는 공감하는 일이 굉장히 어려운 일 같아요. ‘공감’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에서 일하고 있는데, 일을 하면 할수록 이 공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달아 가는 것 같아요. 우리가 정말로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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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제가 일하면서 마주하는 사람들, 관계 맺는 사람들에게 제가 정말로 공감하고 있는가 되물었을 때 한계를 많이 느끼거든요. 변호사라는 직업은 의뢰인의 사건을 법적으로 검토해야 하기에 의뢰인에게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변호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100%의 공감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도 계속해서 확인하는 거죠. 저 분이 정말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구나, 내가 쉽게 접근하거나 생각할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점을 깨닫는 것이죠.

 저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문제가 자신만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할 일, 해야 하는 일을 열심히 하시되, 내 문제가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는 보는 정도의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가지시고, 학교에서 그런 활동을 하거나, 신문을 보시거나 하면서요. 이런 것들을 보면서 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덜 지치게 되지 않을까, 좀 더 길게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 : 마지막 질문입니다. 민변 회원 분들께 한마디만 해주세요!

 

소 : 제가 돌아보니까 연차가 낮았을 때에는 선배들이 저를 도와주고 챙겨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많이 했는데, 어느새 제가 선배 변호사가 되었더라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후배 변호사님들과 많이 친해지고 싶어요. 제가 공감에서 하는 일에 대해 궁금하거나 같이 하고 싶으시면 언제든 연락을 주시고, 찾아도 주십시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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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문제연구위원회 활동소식

1. 9회 평화교류회, 오키나와 이시가키 섬으로!!

2007년 10월,  설레임과 수줍은 인사로 시작했던 평화교류회가 매년 특별한 감동과 추억을 선사하며 어느덧 그 아홉 번째 가을, 아홉 번째 만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민변 미군문제연구위원회와 자유법조단 오키나와지부는 매년 교류회를 통해 서로의  과거와 현재를 보듬고, 한국과 오키나와의 평화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이어 오며 돈독한 연대의 정을 쌓아왔습니다. 또한 민변 소속 변호사의 징계청구에 대한 연대 항의성명 발표 및 한국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에 대한 연대 항의성명 발표까지 이어지며 보다 질높은 일상적 연대로의 도약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미군1   <사진 : 이시가키 섬 풍경>

이번 9회 평화교류회는 오키나와 최남서단에 위치한 ‘이시카키’ 라는 아름다운 섬에서 진행되며, 2015년  동북아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 신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과  SOFA 민사청구권을 중심으로 열띤 발제와 토론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또한 교류회 장소인 이사가키섬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본토의 방어진지 역할을 했던 곳인만큼 섬 곳곳에 자리한 전쟁의 상흔과 ‘위안소’ 등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와 고민을 전달해 줄 것으로 기대되구요, 방문지 중 하나인 타케토미 섬은 아오이 유우 주연의 “아오이 유우의 편지”(원제 : ニライカナイからの手紙) 촬영지로 하얀모래와 빨간지붕, 잿빛돌담이 신비로운 곳이라 벌써부터 참가단의 마음을 “심쿵”하게 만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아울러 9월 미군위 월례회에서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하고 제주대학교 SSK 전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영신 박사님을 초청하여 “오키나와 현대사”에 대한 특강을 들을 예정이니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도 요청드립니다.
 

2. 탄저균 반입, 그 후….

치명적인 생물무기인 탄저균이 살아있는 채로 오산 미공군기지에 반입된 사건이 발생한 지 석 달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7월 23일, 미 국방부는 ‘미국 국방부의 의도하지 않은 살아있는 탄저균 포자 배달’이라는 제목의 조사보고서를 공개했는데, 조사 결과의 내용을 요약하면, 탄저균이 왜 살아있었는지와 관련하여 그 ‘근본원인(Root Cause)’를 밝힐 수 없었으며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완벽한 탄저균의 비활성화 처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미 국방부는 미국 내에 탄저균을 통제하기 위한 일관된 규정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미 국방부의 조사 결과 공개 직후 커티스 스캐퍼로티 주한미군사령관은 쥬피터 프로그램 등 한미간의 생물무기 방어 협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백승주 국방부 차관 역시 북의 생물무기에 대응하기 위한 시험과 연습을 필요하며 이를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탄저균 비활성화에 대한 과학적 근거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와 같은 한미 군당국의 입장과 태도는 많은 국민들에게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고 있으며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11일, 한미 당국은 탄저균 반입사건의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한・미 합동실무단(Joint Working Group : JWG)’을 구성하고 살아있는 탄저균이 반입된 오산 미공군기지에 대한 현장조사까지 실시하였습니다. 하지만, 현장조사가 이루어진지 20여일이 지났으나 아직도 조사 결과와 관련한 아무런 내용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군2

이에 민변 미군문제연구위원회에서는 탄저균 불법 반입‧실험 규탄 시민사회대책회의 및 시민 8704명을 대리하여 주한미군 사령관과 주한 미7공군(오산기지)사령관에 대해 국민 고발장을 제출하여 사건을 진행하고 있으며, 민변 내에 구성된 탄저균 대응팀과 함께 생물무기금지협약(Biological Weapons Convention) 관련 모니터링 및 국내법 모니터링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님들과 함께 실험중단 및 실험실 폐쇄 가처분, 형사고소를 추진하고 있으며, 올 가을 국정감사를 적극 활용하여 탄저균 반입․실험사건의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계기를 마련코자 합니다. 
 

화, 2015/08/2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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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참여팀] 참여연대의 자원활동가는 상근 활동가들과 손발을 맞춰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10대 청소년부터 일흔이 넘으신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학생, 주부, 직장인, 은퇴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원활동가들의 숨은 활약을 자원활동가 인터뷰를 통해 알려드립니다.

 

"함께 하는 세상을 꿈꿔요"

 

아카데미 느티나무 자원활동가 최경아님

 

참여연대 자원활동가_최경아

아카데미 느티나무 자원활동가 최경아님 ⓒ참여연대

 

같은 공간에 앉아 있었으면서 서로를 한동안 알아보지 못했다. ‘박영민’이란 이름이 남자가 주로 쓰는 이름이라 인터뷰어가 남자일 것이라 생각했던 탓도 있고, 인터뷰이가 외국에서 공부를 오래한 사람이라 해서 나이가 꽤 많을 것이라 생각한 탓도 있었다. 다행히 전화통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봤고, 어색한 기류를 헤치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Q. 간단한 자기소개

A. 저는 특별할 게 없어요. 그냥, 지금은 주부예요. 많은 걸 고민하고 있는 주부죠. (웃음)

 

Q. 주로 어떤 걸 고민하고 있나
A. 가장 큰 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이에요. 최근까지 공부를 했어요. (독일에서 하셨다고) 네, 독일에서 공부를 했고,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돌아와서 논문 작업을 나름대로 했는데, 아무래도 지도 교수님하고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여러 문제들이 생겨서 지금은 중단한 상태에요. 앞으로 다시 독일에 가서 공부를 할지, 한국에서 마무리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제 2의 삶을 살지 고민하고 있어요.

한국에는 2012년에 왔어요. 언제부턴가 공부하면서 시민단체나, 운동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어요. 물론 생각은 독일에서부터 했어요.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요. 저 같은 경우에는 뭐, 좋게 얘기하면 반듯하게? 나쁘게 얘기하면 정말 재미없게 살아온 사람 중에 하나인데, 딱 틀 안에서 교육 잘 받고 사회에서 정해준 대로 그렇게 규격화되어서 살아온 사람이에요. 사실 시민단체 활동에 대해, 사회구조 안에 감춰져 있는 이면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면서 살지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아주 늦게 시작한 거죠. 대학 때도 별 생각 없이 다녔고요(웃음). 독일에 가서도 저에게 주어진 일들, 그곳의 삶에 적응하기 바빴고, 살아남는 일이 급급했어요.
생각해보면 이런 고민들은 독일에서 시작한 것 같아요. 외부에서 한국을 봤을 때 속상할 때도 있었고, 불편하고 안타깝기도 했어요. 그러다 한국에 들어와서 결혼을 했고, 부모님 그늘을 벗어나서 완전히 새로운 가정을 꾸려 살다보니 사회의 어두운 모습들이 더 보이게 되었어요. 공부를 하면서도 고민은 있었지만 당면한 과제들 때문에 깊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많은 것들을 정리하고 휴식기를 갖게 되니 고민이 더 깊어진 것 같아요. 저의 삶을 다시 정돈하고 앞으로의 삶을 설계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면서 참여연대도 와보게 됐고, 이런 저런 활동들에도 관심을 갖게 됐어요. 아직 저를 점검해보는 시간인 것 같아요. 어떤 방향,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그 수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고. 재밌어요. 완전히 저한테 새로운 세계니까요.

 

Q. 밖에 나가보니 한국이 보이게 되는 그런 케이스인 것 같네요.
A. 네. 그리고 제가 외국에 가니까 엄청난 소수자가 되더라고요. 외국인, 이방인, ‘너 뭐냐’ 이렇게 되는 거죠. 외국인들은 한국이란 나라에 특별히 관심도 없고, 내가 정말 소수자일 수 있다는 경험. 또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공부도 잠깐 쉬게 된 경험도 영향을 미쳤어요. 누구나 소수자가 될 수 있고 인생의 힘든 순간들이 올 수 있구나, 나만 안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 건 정말 오만한 생각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Q. 참여연대는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A. 오다가다 많이 보긴 했어요. 참여연대 근처에 올 일이 많았어요.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나와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죠. 세계가 다를 거라고 생각했고요. 시민활동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들이 있잖아요. 저도 그런 게 있었죠. 그래서 참여연대에서 자원활동하겠다고 마음먹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렸어요. 내적 갈등도 있었고요. 그런데 와보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Q.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는지.
A. 저는 대학교 학부생일 때, 약간 과도기에 있던 학번이었어요. 제 학번을 앞뒤로 해서 학내에서 집회를 한다거나 그런 일들이 많이 사라졌어요. 1,2학년 때 까지만 해도 가끔 있었는데 말예요. 그래서 그런지 저보다 한참 앞선 선배들과는 괴리감 같은 것이 있었죠. 그 당시에 운동하는 선배들을 봤을 때, 첫 번째로는 무서웠어요. 근엄하고. 늘 우수에 차있거나 까칠하고. 시니컬하고. ‘너는 인생을 잘못살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불편했어요. 그리고 같이 놀면 나를 집회에 데려갈 것만 같았고요(웃음). 물론 대학 때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내가 그래도 대학생인데 너무 생각 없이 사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은 있었죠. 한편으로는 지금 저렇게 거리에 나가는 것보다 내가 성공하고 힘을 가진 사람이 돼서 더 많은 영향력을 가졌을 때 목소리를 내는 게 더 효과적일 거야, 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 운동했던 선배들이 나이를 먹고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고, 한때 참 뜨거웠던 선배도 운동에 회의를 가지고 떠나는 걸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은 다 편한 거 좋아하는 것만 같고...
그런 생각이 있었는데 참여연대에 와서 보니까 간사님들 너무 좋으세요. 참, 저래서 무슨 투쟁을 하시나! 이런 생각도 들고(웃음). 사람이 다르지 않구나, 사람의 감수성이라는 건 비슷비슷하구나,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일 뿐이고 생각 하나하나에 가치가 있구나,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고민에서 더 자유로워진 부분이 있고요.

 

Q. 물론 이런 활동이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생각을 하는 게 옳은 삶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그른 삶은 아니지만, 어쨌든 결국 ‘돌아왔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부터 사회문제에 뛰어든 사람보다 생각이 더 탄탄하고 고민이 깊다는 생각이 든다.
A. 어떻게 보면 ‘돌아왔다’는 느낌이 저한테는 장점이 될 수도 있겠어요. 오랫동안 이런 활동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도 더 조심스러워지고, 그렇기 때문에 깊어졌어요. 어렵게 선택한 길이기에 앞으로 어떤 삶을 살더라고 지금 고민하고 있는 가치의 방향이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아요. 실제로 시민단체 활동가로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물론 주변에서 우려는 많지만요.

 

Q. 지금 하고 있는 고민들에 자원활동이 도움이 많이 되는가.
A. 굉장히 많이 되는 것 같아요. 일단 시민운동에 대한 심리적인 장벽을 많이 낮춰줬다는 것이 제일 좋았어요. 간사님들을 뵙고 그 분들 활동하시는 것들을 보면서 심리적인 장벽이 많이 낮아졌어요. 또 원래 공부를 계속 해왔기 때문에 사실 공부의 범위를 점점 좁혀가는 연습을 하며 살았는데요, 자원활동하면서 여러 강의도 듣고 공부를 핑계로 미뤄왔던 다양한 분야의 책들도 읽고 하면서 생각하는 범위가 늘어나고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나 되게 멍청하다’ 이런 생각들 되게 많이 했거든요(웃음). 좁은 것밖에 모르고, 좁혀 나간 그 분야도 완벽하게 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어휴(웃음)

 

Q. 마지막으로 꿈은 무엇인가? 막연해도 좋다.
A. 자원활동을 시작하면서 사진하고 나를 소개할 수 있는 멘트를 보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뭐라고 보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함께 하는 세상을 꿈꾼다.’ 이런 식으로 보냈던 것 같아요. 그게 제 꿈인 것 같아요. 내가 뭘 하든,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든. 소수자로, 소외된 사람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나은 생활을 하는데 조금이나마 일조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요.

 

인터뷰 말미에 ‘영민 씨는 무얼 하는 사람이냐’라는 질문을 하며 서로의 활동과 활동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 꽤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혀 다른 환경과 생각 속에서 만난 사람들이었지만 서로의 생각에 깊이 공감하고 응원했다. 이제 막 자원활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겪을 수도 있는 많은 상처나 문제들을 걱정하고 또 겁먹었지만 그 때가 오더라도 처음 활동을 시작한 이유와 방향을 잊지 않으려한다는 그의 다짐에 필자 역시 굉장한 힘을 얻었다. 인터뷰 중 ‘나이가 너무 많아서’라는 말을 종종 하며 민망해했는데, 걱정 마시라. 여전히 누구보다 빛나는 청춘으로 충분히 다가오니. 

 

작성 자원활동가 박영민 (활동가를 위해 활동하고 싶은 대학생)

수, 2015/10/28-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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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3월 월례회 ‘탄캐스트’ 공개방송 후기

이두규 회원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 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대부분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마음을 졸이면서 듣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말. 수많은 사람들이 듣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노력 했던 그 말. 한국 사회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길을 가게 만든 그 말. 2017년 3월 10일은 그 많았던 문장들을 뒤로 하고 저 짧은 세 문장으로 역사에 기억될 것 같습니다.photo_2017-03-30_17-01-06

2016년 10월 24일 JTBC가 최순실 박근혜 게이트를 열어내던 그 날 이후로 6개월 동안 시민들은 광장에서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상황은 헌법재판소를 통해 제도 안에서 해결되었습니다. 제도 내에서 해결되었다는 것은 한국사회가 아직 자정작용을 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고,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살고있는 시민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자랑스러운 한 페이지를 또 끼워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민변이 있었습니다. 박근혜 정권 퇴진 특위에서 노력해주신 변호사님들, 탄캐스트, 탄캐스트의 진행자 김준우 변호사님과 오민애 변호사님, 집회를 개근하신 사무총장 강문대 변호사님, 직접 대통령 탄핵소추 대리인단에서 전 대통령을 겨눈 창이 되신 탁경국 변호사님이 계셨습니다. 저마다 계신 위치에서 자신의 몫을 다한 민변의 1000명 넘는 회원님들과 간사님들이 계셨습니다. 탄핵을 만들어낸 것은 그 모든 분들이었습니다.photo_2017-03-30_16-59-54

월례회는 탄핵을 축하하고, 탄핵을 이뤄낸 시민들의 힘을 경외하며, 그 안에 민변이 있었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던 자리였습니다. 특히 민변이 시민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마지막 탄캐스트가 공개방송으로 이루어져서 많은 시민들이 함께 해주셨던 점, 마지막 탄캐스트의 마지막 게스트가 이번 탄핵의 주역들이었던 김덕진 천주교 인권위원회 사무국장님과 노승일씨였다는 점이 시민 속의 민변, 시민들과 함께 하는 민변을 보여주었습니다.

탄캐스트 마지막 방송은 감동적이었습니다. 탁경국 변호사님께서는 탄핵소추인 대리인단에서 활동하셨음에도 모든 공을 광장으로 넘기는 겸양을 보여주셨고, 강문대 변호사님께서는 탄핵 결정이 난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담담하게 앞으로의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김덕진 사무국장님께서는 집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그랬음에도 퇴진행동이 현재 얼마나 많은 채무를 안고 있는지 말씀하셨고 노승일씨께서는 자신이 가진 자료들을 공개했던 이유는 누군가는 이 일을 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동은 어떤 마음가짐에서 나오는지, 그 마음들이 어떤 행동을 만드는지 들으며 이 수많은 노력들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photo_2017-03-30_17-00-52

이어진 뒤풀이에서는 조금 더 속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김용민 변호사님과 노승일씨가 친구가 되어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고 김덕진 사무국장님의 민변에 대한 애정(“내가 변호사 술 사주는 사람으로 유명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준우 변호사님께서 탄캐스트를 만들며 느꼈던 고충도 들었습니다. 문득 ‘민변의 변호사님들이 어떻게 자라오셨는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실 예정인지 알려주는 그림의 한 조각을 보고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photo_2017-03-30_16-59-43

민변이라는 이름은 저에게 늘 부모님의 등과 같습니다. 제가 따라가야 할, 언젠가는 그 길의 끝이 한 발자국이라도 더 멀리 내딛어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아름답고 넓은 길입니다. 그래서 모든 계절과 모든 걸음을 함께 하고 싶은 공간입니다. 부모님의 등이라는 건 왠지 언제나 가까이서 볼 기회가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의 등을 가까이서 보는 건 뭉클하고 따뜻한 경험입니다. 월례회는 저에게 그런 따뜻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앞으로도 민변의 이름이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도록 저도 선배님들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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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7/03/3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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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T/F 2017. 6. 2. 6. 6. 베트남 현지조사

권민지

  • 이번 베트남 현지조사는 국제연대위원회 산하 아시아인권팀과 과거사청산위원회가 함께 진행했습니다.

사진

2017. 6. 2. 기분좋은 금요일, 출근용 가방을 얹은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습니다.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T/F(이하 ‘T/F’) 소속 회원 6명은 6. 2. ∼ 6. 6. 베트남 다낭 인근 지역으로 현지조사를 다녀왔습니다.

2017. 4. T/F가 인준되기 전부터 2015. 7. 베트남 평화기행에 참여했던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베트남 전쟁 연구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져왔습니다. 2017. 3.에는 그동안 수집한 국내·외 자료를 정리, 확인하고 추후 활동계획을 논의하는 등 중간점검을 위한 1박 2일 워크숍을 열기도 했습니다. 1년이 넘도록 모임을 지킨 구성원간 신뢰는 모임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현재의 베트남에게 베트남 전쟁은 위대한 승리의 기억입니다. 전쟁 도중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은 베트남 정부 차원에서 승자의 아량으로 패자인 한국군을 용서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베트남의 전쟁 신화(베트남 공산주의 혁명의 완성)는 한국에 이르러서는 한강의 기적을 견인한 전쟁 특수(소위 ‘베트남 특수’)로 번역됩니다. 그 틈 어딘가에 한국군에 의한 참혹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번 현지조사는 한국군 해병대 청룡여단이 주둔하였던 베트남 꽝남성 소재 퐁니·퐁넛마을과 하미마을에서 1968. 2.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 일부를 인터뷰하고 위령비, 학살 현장 등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계획되었습니다. 현지조사의 효율을 최대한 높이기 위하여 출국 전에 그동안 취득한 관련 자료를 다시 확인하는 한편 오랜 시간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를 연구하고 활동해온 구수정 박사(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와 협업하여 인터뷰 가능한 학살 생존자를 섭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6. 2. 저녁 비행기로 다낭 국제공항에 도착한 다음날인 6. 3. 오전 퐁니·퐁넛학살 생존자 응우옌 티 탄(57세, 당시 7세)(이하 존칭, 경어 생략)을 인터뷰하였고, 오후에는 퐁니·퐁넛학살 현장을 둘러본 다음 마을에 거주하는 응우옌 티 르엉으로부터 응우옌 티 탄의 피해 사실에 대한 진술을 들었습니다. 6. 4. ∼ 6. 5.에는 하미마을 위령비 참배를 시작으로 하미학살 생존자 응우옌 꺼이(72세, 당시 22세), 쯔엉 티 투(79세, 당시 29세), 응우옌 티 홍(63세, 당시 13세), 당 티 코아(55세 추정, 당시 5세)를 각 인터뷰하였습니다.

인터뷰는 약 2시간씩 이루어졌고, 한국말에 능숙한 베트남인 통역사의 도움으로 인터뷰이와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 없이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만난 응우옌 티 탄은 2015. 4. 평화박물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기도 한, 학살 진상규명을 위하여 노력하는 한국 시민단체 등과 오래전부터 관계맺어온 학살 생존자입니다. 그의 경우 기존 미디어 인터뷰 자료 등을 확인할 수 있었고, 퐁니·퐁넛학살의 경우 학살 직후 작성된 미군 조사보고서가 존재하여 증거자료가 비교적 풍부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미리 상세한 질문지를 작성하여 갈 수 있었습니다.

한편, 하미학살 생존자들은 구수정 박사의 소개로 처음 접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각 개인의 구체적 학살 경험사실을 인터뷰를 통하여 처음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하미마을은 집성촌이었던 까닭에 생존자 대부분은 직계가족 뿐만 아니라 일가친척이 몰살당한 기억을 갖고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자신의 아들, 딸을 잃은 쯔엉 티 투는 당시 입은 부상 때문에 오른 발을 절단하고 40여년을 살아왔습니다. 그가 한국군이 불지른 집에서 간신히 끌고 나온, 당시 신생아였던 딸(우옌 티 러이)은 이제 중년 여성이 되어 어머니 곁에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당 티 코아는 할머니, 어머니, 언니, 동생 둘을 잃고 전쟁고아로 떠돌며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미마을에서 한국군이 학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불도저로 시신들을 훼손하기까지 하였다고 증언했습니다. 실제로 파월한국군 전사(戰史) 해당부분에 의하면 당시 하미마을 인근에 주둔한 청룡여단 소속 중대 중에는 공병중대도 있었습니다.

위에서 저는 끔찍한 살육을 경험한 이들의 고통을 지극히 단편적으로 묘사하였을 뿐입니다. 베트남 정부는 여러 원인(베트남 정치체제의 특성, 한국과 베트남간 긴밀한 경제적 협력관계 등)으로 인하여 적극적으로 한국의 사죄 표명을 요구하지 않았고, 또 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T/F는 이번 현지조사의 작은 성과를 기반으로 2018. 4.에는 시민법정 개최를, 이후 국가배상소송 제기를 각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모든 과정에서 베트남 현지와 교류하면서 동일한 호흡으로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한국 정부는 어두운 역사를 직시하고 베트남인 학살 피해자들에게 사죄하여야 합니다.

화, 2017/06/2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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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제작소가 12년 만에 마련한 보금자리 희망모울은 단장을 하며 시민연구공간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유독 심했던 한파 때문에 일정이 조금 늦춰졌지만, 새 공간에서 시민분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는데요. 3월의 어느 날, 희망모울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을 주신 이일훈 건축가님과 희망모울 설계와 건축을 맡고 계신 박창현 건축가님(에이라운드 건축 대표)을 만났습니다. 두 건축가님은 어떤 인연으로 희망제작소와 함께하게 되셨을까요? 그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번 글은 이일훈 건축가님과의 대화를 담았습니다.

희망모울을 만드는 사람들 ① 이일훈 건축가
“희망제작소가 더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제작소가 12년 만에 마련한 보금자리 희망모울은 단장을 하며 시민연구공간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유독 심했던 한파 때문에 일정이 조금 늦춰졌지만, 새 공간에서 시민분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는데요. 3월의 어느 날, 희망모울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을 주신 이일훈 건축가님과 희망모울 설계와 건축을 맡고 계신 박창현 건축가님(에이라운드 건축 대표)을 만났습니다. 두 건축가님은 어떤 인연으로 희망제작소와 함께하게 되셨을까요? 그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번 글은 이일훈 건축가님과의 대화를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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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규(이음센터 팀장, 이하 한) : 희망제작소와 어떻게 인연이 닿으셨나요?

이일훈 건축가(이하 이) : 희망제작소가 수송동에 있을 때부터 제 후배들이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심이 있었지요. 어느 날, 한 모임을 통해 알게 된 희망제작소 연구원이 사옥 이전 관련하여 자문이 필요하다고 찾아왔습니다. 제 직업이 건축가다 보니, 새 건물 건축 설계를 부탁하려는 줄 알았지요. 대화를 나눠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건물을 매입하려는데, 어떤 것이 좋은지 살펴봐달라는 것이었어요. 열 개 남짓의 건물을 후보로 뽑아서 가져왔더라고요. 그중 어떤 것을 사는 게 좋을지 의견을 구하는 조금은 황당한 이야기였습니다.이건 건축가가 아니라 부동산 중개업자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연구원은 건물을 사서 새 공간으로 만들려면 매매계약서를 잘 써야 하는 것은 물론, 법적·시간적·공간적으로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 많다고 하며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건물 내부를 원하는 공간으로 설계하는 것 역시 부동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이 부분에 공감하고 도움을 주기로 했습니다.

: 저희 새 보금자리 ‘희망모울’ 마련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는지 궁금했는데,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군요. 건물을 매입하는 데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약속을 잘못했던 것 같아요. (웃음) 한 마디로 연못에 돌 던지기였어요. 좋은 건물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후보를 하나씩 탈락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야 결정이 가능한 상황이었거든요. 선정이 아닌 탈락을 위한 검토는 힘들고 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했고, 제 재능이 희망제작소의 시민연구공간 조성에 도움이 된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겨울에 후보 건물을 직접 보러 다녔지요. 오래된 건물이라 도면이 없거나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어요. 추운 날씨에 돌아다니며 건물을 보고 검토하고 의견 내는 작업이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함께 다니던 희망제작소 연구원도 정말 많이 고생했지요.

: 작년 겨울은 정말 추웠는데요. 여러모로 많이 고생하셨을 것 같습니다. 최종 선정된 건물로 결정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 다른 것들을 계속 탈락시키다 보니 그 건물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건축된 지 오래되었다는 우려가 있긴 했지만요. 우선 수명의 한계를 살펴봤습니다. 오래된 건물치고는 튼튼하게 지어졌더라고요. 또 희망제작소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내부변형이 가능한지도 살펴봤는데요. 그 점도 잘 맞았습니다.이 건물은 마포구 성산동에 있어요. 홍대, 합정, 연남동, 성미산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과 인접해 있지요. 물론 소비를 비판하는 시선도 있어요. 그래도 사람이 모이는 곳에 희망제작소가 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또 지하철역과 살짝 거리가 있지만, 걷기에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지요. 홍대입구역, 마포구청역, 망원역, 가좌역 등 여러 개의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도 어떻게 보면 장점이 될 수 있고요.사실 더 좋은 건물도 있었어요. 하지만 형편에 맞지 않았습니다. 재정에 맞춘 적절한 선택과 결정이 필요했습니다. 누구나 좋은 건물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희망제작소도 그랬지요.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었어요. 신축하거나 비싼 건물을 사는 것이 좋은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성산동 건물이 좋겠다고 희망제작소에 의견을 보냈어요. 저는 제 생각을 공유했을 뿐, 결정은 희망제작소에서 했지요.

▲ 희망제작소 새 보금자리 '희망모울'

▲ 희망제작소 새 보금자리 ‘희망모울’ 외관. 현재 내부 공사 중이다.

: 최종 선정된 건물에서 아쉬운 부분은 없었나요?

: 다른 부분은 모두 괜찮았는데, 외관이 제가 생각하는 디자인 건축과 매우 달랐어요. 제 시각에서 보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하지만 내부를 잘 바꿔서 쓰자고 했습니다.

: 여러모로 현실적 측면을 고려한 결정이 아닌가 싶네요. 그래도 건축가라면 양보 못 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요?

: 건축가는 건축에 관해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건축가가 건축하지 않은 건물도 사람들이 잘 사용할 수 있지요. 건축이 건축가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사용자 중심이어야 하지요. 내 고집과 철학에 맞지 않는다 해서 고집을 부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에게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사용자에게는 다를 수 있으니까요.

: 희망모울 설계와 시공을 맡은 박창현 건축가와는 어떤 관계이신지요? 희망제작소에 소개해 주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로 있을 때 제 제자였어요. 졸업한 제자들이 사회에서 다들 좋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인 관계를 이어나가기는 쉽지 않아요. 박창현 건축가는 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계속 찾아오는 제자였어요.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교류하는 사이가 되었지요. 기특하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제자입니다. 박 건축가는 NGO를 이해할 수 있는 건축가예요. 그래서 이번 일을 함께하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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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현 건축가 : 선생님이 갑자기 연락을 주셨어요. 건물을 설계하라는 말씀은 안 하시고, 어디에 가면 이런 건물이 있으니 한번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마침 근처를 지나던 중이라 바로 가서 볼 수 있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인연 같아요. 이후에 다시 최종 결정된 성산동 건물 앞에서 만나 희망제작소와 새 보금자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요. 취지가 좋고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사실 저는 희망제작소와 큰 인연이 없어요. 희망제작소보다 선생님과의 인연이 더 큰 역할을 했지요. 선생님께 배우고 교류하면서 느낀 것은 판단, 행동, 사고를 존경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었지요. 제가 ‘존경’의 의미를 담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분입니다. 이번 일도 선생님의 권유로 하게 된 것이고요. 이렇게 희망제작소와 인연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집을 함께 만든다는 것은 아주 큰 인연입니다.

: 두 분을 보니 참된 스승과 제자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희망모울은 어떤 공간이 되면 좋을까요?

: 건축물에서 중요한 것은 ‘사용자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가 실천되었나’입니다. 장애인용 화장실과 엘리베이터가 대표적이지요. 후보 건물 중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 없는 곳도 있었는데요. 그 부분이 마땅치 않더라고요. 최종 선정된 건물에도 엘리베이터와 장애인용 화장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희망제작소에는 말이지요.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니까 모두에게 편한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희망모울은 모든 시민이 편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사람과 비슷해요. 우리 각자에게는 편한 사람과 불편한 사람이 있습니다. 착한 것과는 다릅니다. 그냥 편한 곳, 누구나 쉽게 와서 머물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또한 앞으로 희망제작소에서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민과 함께할 때, 그 내용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쉽게 쓰여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 사진 왼쪽부터 희망제작소 한상규 팀장,

▲ 사진 왼쪽부터 희망제작소 한상규 팀장, 이일훈 건축가, 박창현 건축가

: 마지막으로 희망제작소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 희망제작소가 더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희망제작소가 하는 활동은 크게 이슈가 되고, 그 반향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희망제작소만큼 잘하는 곳이 많아졌어요. 긍정적인 변화입니다. 희망제작소는 역사가 있으니까 분명 더 잘할 수 있는 동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 보금자리 희망모울을 중심으로, 시민의 관심과 삶에 연결되는 일에 큰 역할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희망모울에서 시민과 시민이 더 많이 연결될 수 있길 바랍니다.

* 2편에서는, 희망모울 설계와 건축을 담당하는 박창현 건축가의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 글 : 한상규 | 이음센터 연구원 · [email protected]
– 사진 : 조현상 | 이음센터 연구원 · [email protected]

화, 2018/04/03-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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