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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 ‘겨울에 자란 나무처럼’ 소라미 변호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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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 ‘겨울에 자란 나무처럼’ 소라미 변호사 인터뷰

익명 (미확인) | 화, 2015/08/25- 17:23

[회원인터뷰]‘겨울에 자란 나무처럼소라미 변호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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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겨우내 뿌리를 보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합니다. 그 힘으로 나무는 움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선선한 바람마저 서운한 여름의 끝자락. 13기 자원활동가들이 종로구 창덕궁길 공감사무실에서 소라미 변호사님을 마주했습니다. 12년 동안 공익변호사로 길을 걸어온 소라미 변호사님의 이야기는 겨울나무처럼 단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단단함은. 법의 테두리에서 밀려난 이주민. 여성 등 수많은 이들에게 움을 틔워낼 공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귀함’을 법의 언어에 담아내기 위해 쉼 없이 걸어왔던 소라미 변호사님. 그 단단하고, 따뜻한 발걸음 만나보시죠.

 

이우균 : 일단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소라미 변호사 : 저는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올해로 12년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소라미라고 합니다. 공감에서 잔소리를 맡고 있고요, (웃음) 황필규 변호사님은 저를 마님이라고 하시죠. (웃음)

 

우 :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질문부터 드려볼게요. 왜 법조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셨나요?

 

소 : 어렸을 때 막연하게 법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이유는 대단한 건 아니었고, 아버지가 주입시켜준 꿈이기도 했어요. (웃음) 제가 공부를 곧잘 하니까, 여자가 차별받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는 데 좋은 직업이 법조인인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중학교 때부터 해주셨어요. 이태영 변호사님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했고요. 사실 대학에 들어갈 때 법대를 가진 않았어요. 다른 과를 선택했고, 공부보다는 동아리나 학생회 활동을 했죠.

 그렇게 졸업할 때가 되어서 다시 진로고민을 했을 때, 막연하게 생각했던 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그리고 ‘그 일을 하면서 내가 보람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딱 두 가지밖에 없었어요. 공부를 너무 안 해서 전공을 살려서 뭘 하기는 어렵겠다는 현실적인 판단도 있었고요. (웃음) 아무튼 의미 있는 일, 보람 있는 일,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 법조인이 되고 싶었지!’ 이런 막연한 생각들이 일치되면서, ‘아 그래 지금부터라도 내가 고등학교 때처럼 공부를 하면 사시에 합격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굉장히 무모한 생각으로 뒤늦게 학사편입을 해 다시 법대 3학년으로 돌아가서 사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렇죠, 간단하지 않아요. (웃음)

 

우 : 더 간단하지 않은 질문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웃음) 졸업하시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게 지금 하고 계신 공익변호사라는 직업과 연관이 될 것 같아요.

 

소 : 제가 연수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만 해도 공감 같은 단체가 없었어요. 그래서 당장 공익활동을 전담하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고, 다만 좀 보람 있는 일도 할 수 있는, 좋은 선배님들이 많이 계시는, 예를 들면 민변 활동도 많이 하시는 변호사님들이 계신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 나중에 공감과 같은 단체를 만들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제가 수료한 2003년 12월, 연수원 2년차 마지막 겨울에 ‘낮은 곳에 임하는 용기로 소외된 희망을 되살린다’라는 엄청난 문구로 공채 공지가 뜬 거예요.

 당시 아름다운재단 안에 공익변호사 팀을 만들겠다는 취지로 변호사를 공채한다는 공지였는데, 그 문구가 너무 멋있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읽어봐도 뭘 하는 곳인지는 잘 모르더라구요. (웃음) 어떻게 할지 고민을 많이 하다가 그곳에 지원하게 됐습니다. 사실 연수원 수료하고 바로 공익활동을 전담하는 변호사로 일을 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내가 일정 기간 변호사로서 실무 경험도 쌓고 트레이닝을 받고 그 다음에 돌아와서 하는 게 좋을지 고민을 많이 했죠. 몇 분 선배님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의견이 반반인 거예요. “하고 싶은 일이면 바로 시작하는 게 좋다, 나중에 돈맛을 알면 돌아오기 되게 힘들다” 조언해주시는 선배 변호사님도 계셨고, “지금 당장 가서 네가 과연 뭘 얼마나 할 수 있겠느냐, 일정 정도 실무를 쌓고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조언해 주시는 분도 계셨어요.

 그런데 당시 제가 아름다운재단에는 선발이 되었고, 다른 데는 다 선발이 안 되었어요. (웃음) 그래서 뭐 필연적으로, 공감 창립 멤버로 일을 시작하게 된 거죠. 저로서는 당시에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있는 상황에서 공감 활동을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 조상님이 3대 덕을 쌓았나 보다, (웃음) 제가 공감을 창립하는 멤버로 같이 일할 수 있었던 게 매우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우 : 왜 행운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소 : 왜냐하면 우리가 많이 자랑하듯이 (웃음), 공감이 한국사회에서 최초로 설립된, 공익활동을 전담해 비영리로 운영하는 변호사 단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받은 장점이 많죠. 저희 실력이나 능력에 비해 과분하게 인정도 받고, 주목도 많이 받고. 그래서 공감이 빠른 기간 안에 안착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게다가 지금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공익활동 전담으로 일하고 싶다는 후배들이 굉장히 많이 생겼죠. 후배들 만나서 공감 이야기를 해줄 때마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요. 그리고 이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게 다 창립 멤버로서 일을 해왔기 때문이라는 걸 아니까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우 : 공감이 국내 최초의 공익인권법단체라서 유리한 점이 많았다고 하셨지만, 저는 민변에 와서, 공익변호사 활동이 참 쉽지 않다는 점을 많이 느꼈습니다. 민변 소수자위원회에서 진행하는 일들이 계획대로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민변처럼 규모가 큰 변호사단체도 잘 안 되는 일이 많은 것을 보면, 공익변호사로서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활동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이 어떤 게 있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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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 제가 최근에, 곧 다음 주 월요일에 국회에서 있을 정책세미나 발표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너무 맥이 빠지는 거에요. 인신매매 피해자 식별을 위한 제도개선 관련 세미나인데, 사실 그 이슈에 대해서 제가 공감 활동 시작하면서 거의 한 10년 동안 이야기를 해왔거든요. 그런데 하나도 바뀐 게 없어요. 실태도 바뀐 게 없고, 법제도개선하자고 이야기하는 것도 계속 똑같아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또 해달라고 요청이 온 거에요. 해야죠. 해야 하는데, 너무 이야기하기가 싫은 거야. (웃음) 지난 10년 사이 어쩜 이렇게 하나도 바뀔 수가 없을까 싶은 거죠.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늘어난 것도 아니에요. 여전히 소수의 사람들, 소수의 단체, 소수의 변호사들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런 게 힘들어요.

 공감에서 일하는 다른 변호사님들도 마찬가지지만, 하나의 제도를 바꾸고, 실태를 바꾼다는 게 변호사 한 명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국회에서 그런 제도를 개선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외부 시민단체와 함께 해야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왜 이런 걸 국회에서 안할까 의구심을 갖고 제도 개선에 대해 지지를 해주어야 국회도 관심을 가질까말까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슈가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 현실의 벽을 느낄 때가 많죠. 내가 열심히 법안 만들고, 내가 열심히 기자들에게 이야기하고, 발표문 쓰고, 국회 가서 토론하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 구나를 느낄 때가 많아요. 그럴 때 많이 힘들죠.

 

우 : 그런 허탈함을 극복하시는 방법이?

 

소 :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많지만, 개중에 한 두 개씩 바뀔 때가 있어요. (웃음) 그 힘으로 하는 거죠. (웃음) 예를 들면, 제가 입양인들과 함께 입양법 바꾸는 활동을 한 적이 있어요. 한국사회에서는 입양을 막연하게 좋은 것,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아이들 혹은 부모가 양육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새 가정을 찾아주는 아름다운 것, 사회적으로 선한 것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있었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저희 사무실로, 20~30년 전에 해외로 입양되었다가 돌아오신 분들로 구성된 입양인 당사자 운동 단체 분들이 찾아오셨어요. 그 분들이 한국의 입양제도가 얼마나 입양인의 인권, 아동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인지, 본인들이 30년 전에 입양될 때 얼마나 불법적인 방식으로 입양되었는지, 그리고 현재 입양인들이 한국으로 돌아와서 친부모를 찾는 데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그 분들은 “한국에서 입양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고 말씀하셨죠.

 저는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제가 가졌던 입양에 대한 생각과 그 분들이 들려주시는 입양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다른 거예요. 그래서 입양에 대한 법을 다시 보게 되었고, 애초에 아이들이 한국에서 살 수 있게, 출생한 가정에서 살 수 있게 돌보지 않았던 우리 한국사회의 현실, 그동안 아동복지정책의 잘못된 점을 알게 되어서 같이 활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 2011년도에 법이 통과되었어요. 이게 그나마 제가 했던 여러 가지 활동 중 변화를 이끌어냈던 점이고

 재미있었던 건 당시가 이명박 정부였는데, 이명박 정부가 저희와 같은 입장을 취하기가 되게 어렵잖아요, (웃음) 그런데 입양 이슈에 대해서는 의외로 정부가 약간 비슷한 입장을 취한 거예요. 당시 정부가 입양 문제에 대해 굉장히 수치스러워했어요. 한국이 여전히 해외에, 미국으로 입양 보내는 아이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등 이런 수치에 대해서 정부가 부끄러워했고, 국제사회로부터 지적도 많이 받았던 거예요. 그래서 ‘아 이건 좀 바꿔야 한다’는 정부 입장이 있었던 데다가 다행히 당사자 분들이 목소리를 많이 높여주셨고, 거기에 저희가 같이 끼어서 법적인 언어로 바꾸어서 일하니까 빠른 시간 내에 급속도로 제도 개선이 일어났던 거죠. 굉장히 재미있게 일을 했어요. 그런 한 두 가지 사례들이 힘이 되는 거죠. 당장은 아니어도 여러 가지 상황 변화에 따라서 언젠간 또 바꿀 수 있겠구나 희망을 가지는 거죠.

 

이하나 : 현재 주력하고 계시는 여성인권과 아동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소 : 공감에서 2004년에 활동을 시작할 때 멤버가 변호사 4명이었는데, 남성변호사님 세 분과 저였어요. 그래서 ‘여성인권은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선점을 했어요. 제가 여성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특별한 게 있는 것 같진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제가 스스로 여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여대 다니면서 학교에서 여성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고, 다른 이슈보다 조금 더 ‘이건 내 문제다’라고 생각이 든 부분이 있었죠.

 공감 활동을 시작할 당시에 사무실로 이주여성단체와 성매매 피해 여성 지원 단체들의 요청이 많이 들어왔어요. 저희가 맨 처음에 변호사를 파견하는 활동을 했는데, 제가 거의 첫 해에 성매매 피해여성 지원하는 단체로 일주일에 이틀 출근을 하고, 이주여성단체는 일주일에 하루 출근하는 방식으로 단체들과 같이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굉장히 자연스럽게 공감에서 여성인권이슈를 제가 계속 맡아서 활동해 오게 되었죠.

 아동인권 관련해서는.. 저희가 처음부터 아동인권이슈를 한 건 아니었고, 조금 전에 말씀드린 입양 이슈 관련 활동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어요. 입양이 결국에는 한국의 아동복지체계 안에 그 위치가 있거든요. 부모가 돌볼 수 없는 아이들을 어떻게 공적으로 돌볼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는 법이 아동복지법이고, 입양과 관련된 특별법이 있는 건데, 아동복지법을 보니까 제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공백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입양의 문제를 통해 아동복지법 체계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아동이슈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지금도 저희가 아동인권을 다 하는 건 아니에요. 입양 문제, 그 다음에 이주 아동의 문제. 제가 공감에서 이주 이슈나 이주 여성 쪽을 다루니까 이주 아동과 관련된 사례도 지원 요청이 들어오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미혼모 이슈와도 연결이 되고, 아동학대 문제 등과도 관련해서 활동을 조금씩 넓혀 온 게 있죠. 게다가 최근에는 제가 4살 아이의 엄마가 되고 보니 아이들의 문제가 더 남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하 : 다양한 이슈와 분야들에서 활동해오셨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의뢰인이나 사건은 무엇이었나요?

소 : 아동인권에 관해서는 앞에서 말씀 드린 입양 문제였고요, 여성과 관련해서는.. 많이 있을 수 있겠는데, 최근에 지원했던 사례로 말씀드릴게요. 잘 안 된 사건이에요. 캄보디아 여성 두 분이 비닐하우스 농장에서 일하다가 농장주로부터 거의 1년간 지속적으로 성폭행 당했던 사건이에요. 저희 사무실로 지원 요청이 왔을 때에는 이미 검찰 불기소 결정이 난 다음에 항고하는 과정이었어요. 너무 억울한 사건이었어요. 제가 봤을 때에는, 당사자들과의 면담, 신고 경위나 여러 가지 상황을 보면 농장주가 잘못한 게 맞는데, 처벌해야 되는데, 우리가 항고심부터 결합해서 결국에는 항고 기각, 재정 신청마저 기각되어서 결국 잘 안 됐어요. 그 분들이 너무나 많이 우셨고..

성폭력 사건은 초기 사건 대응이 중요하거든요.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 신빙성 하나로 가해자를 처벌해야 하는데, 이 분들이 초기 대응을 잘 못하셨어요. 갑작스럽게 농장에서 구출되어 바로 2~3일 동안 경찰에서 수사를 받았는데, 수사 과정에서 대략적으로 특정했던 사건 발생 시점이 나중에 검찰로 가면서 다 뒤집힌 거예요. 결국 진술이 일관적이지 못해 이 분들은 완전히 못 믿을 사람들로 결론이 난 거죠. 당시 검찰 기록을 보면, 제가 조서만 읽어봤는데도 검사가 막 화를 내는 게 느껴질 정도였어요. 피해 여성분들은 자기들이 피해를 인정받고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쭉 조사를 받았던 건데, 검사가 엄청 다그치니까, 마지막 검찰 조사 받을 때에는 통역해주었던 분이랑 같이 울어버렸대요.

그렇게 꼬인 사건을 항고부터 하려니까 쉽지는 않더라고요.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이분들이 쓰신 진술서 중에, 자기는 한국에 와서 돈 벌어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왜 자기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고, 자기는 여기 와서 완전히 다 망가졌다고 표현하신 내용이 있었어요. 그 진술서도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이 사건이 최근에 기억에 남아요.

농업 이주 여성들 사건을 할 기회가 많지는 않아요. 이런 사건들이 드러나기가 쉽지 않거든요. 보통 이주 여성이 고소고발을 하면 계속 일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크고, 다른 농장으로 사업장을 변경해줄 가능성도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잘못하면 한국에서 일할 기회만 없어진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고용허가제 구조 하에서는 농장주, 사장 등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이주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말하기가 어려워요.

비록 많진 않지만, 들어온 사례들을 보면 피해 여성의 입지가 굉장히 취약해요. 일단 비닐하우스 농장은 밀폐되어 있고 외부로부터 차단된 공간이죠. 게다가 피해 여성분들한테 농장주는 하느님 같은 존재였대요. 농장주가 자기들을 고용하겠다고 해서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는 거죠. 한국에서 버는 한 달 100만 원 정도의 월급이 캄보디아에서는 1년 치 임금보다 높아요. 그러니까 이 분들한테는 한국에서 일하는 게 엄청난 일이고, 또 처음 한두 달은 농장주가 친절하게 대해주니까, 농장주 이름을 무슨 아버지라고 핸드폰에 입력해놓을 정도로 믿고 신뢰했던 사람인거죠. 그런 구조적인 취약함, 경제적인 취약함, 고용허가제 하에서 사업장 변경이 어려운 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거죠.

이 분들이 한 일을 보니까, 성적 착취뿐만 아니라 농장주 집에 가서 설거지하고 빨래하는 게 일상적인 일인 거예요. 그런 식으로 1년 넘게 지속적으로 피해를 당해 오신 거죠. 이런 피해가 사실은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한 두 사람의 문제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놀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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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들에 대한 혐오가 점점 심해지고 조직화되어가고 있어서, 이주민 관련 활동을 하시는데 어려운 점이 많을 것 같아요. 이런 혐오 문제를 해결하고 인식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소 : 이주민에 대한 혐오라..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까요? 저는 이자스민 의원실과 ‘이주아동권리보장법’을 제정하는 활동을 몇 년 동안 해왔어요. 그리고 작년 2014년 12월에는 의원실에서 법안 발의를 했고요. 그런데 그 후에 이 법안에 반대하시는 분들이 조직적으로 이자스민 의원실에 전화로 항의하고, 팩스를 보내고, 홈페이지에 댓글 다는 등의 반대운동을 했어요. 이로 인해서 이자스민 의원실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죠.

사실 저는 반대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보지는 않았어요. 맘 상할까봐. (웃음) 주위에서 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던 건, 예전에는 이런 반대운동을 하는 분들이 소규모였거든요. 예를 들면 국제결혼 피해자 모임에 속한 남성분들 정도요. 이분들의 모임이 있어서 결혼이주여성의 인권을 보장하자는 국회의원들 활동이 있으면 조직적으로 오셔서 피켓팅도 하고, 공적으로 발언도 많이 하시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게 굉장히 확산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일반 주부들이 모여 있는 엄마들 카페에서도 이 법안 이야기를 하면서, ‘아니 우리 아이들에게 지원할 것을 어떻게 세금도 안 내는 이주 아동들에게 지원할 수 있느냐’는 식의 논리로 반대하신다고 하더라고요.

이게 뭘까. 좀 고민이 되더라고요. 제가 보기에 이 논리는 결국 일베의 논리와 같거든요. 일베들이 무임승차한다는 취지로 소수자 인권, 여성 인권 이야기하는 데마다 반대하는 논리거든요. ‘왜 우리가 낸 세금으로 그들에게.’ 이런 논리가 의외로 확장력을 가지면서 그냥 일반 사람들도 가만히 듣고 보면 뭔가 억울한 느낌을 받는 거죠. 거기에 삶이 경제적으로 각박해지고 박탈감이 전반적으로 팽배한 현실에서, 내 것을 뺏긴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또 이게 사회 전반적 분위기와 맞물리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신은미·황선 통일토크콘서트에 한 고등학생이 사제폭탄을 던진 사건 같은 경우에 나왔던 반응들이요. 그 사건은 사실 굉장히 무서운 것이잖아요. 그런데 사회적으로 그 행동을 잘했다고 영웅시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이에 대한 정부의 코멘트도 이상하게 나왔어요. 이 현상을 문제적으로 바라보고 이것을 사회적 문제로 인지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애초의 종북 콘서트가 문제였다는 방식으로 말이죠. 마치 이런 관점을 허용하고 묵인하고 방조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혐오는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기보다, 전체적인 인식의 문제, 그런 논리를 확산시키고 조장하는 정권과 언론의 태도가 바뀌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하 : ‘왜 내 세금으로 저 사람들을 지원해주어야 해?’라는 논리는, 이 나라의 ‘시민’에 이주민들을 포함하지 않는 논리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생각했던 것은 ‘시민’ 개념이 좀 더 확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변호사님께서는 시민 개념이 어떤 식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소 : 그런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데요. 이주민들이 정말 세금을 안낼까요? 직장을 다니게 되면, 일단 근로소득세를 내죠. 그리고 우리나라의 세금 부담 비율이 직접세보다 간접세가 더 높아요. 간접세가 한 70% 정도를 차지하거든요. 이주민들이 마트에 가서 장을 본다든지, 생필품을 산다든지 하면 거기에 다 부가가치세가 붙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사는 이주민은 직접, 간접의 세금을 부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공동체 개념을 확장할 필요가 있는 거죠. 예전의 국적·민족 중심의 공동체 개념에서 벗어나, 어쨌든 한국에서 같이 주민으로 살아가고 있고 세금 부담도 같이 하고 있는 사람들을 국적과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타적으로 대해야 할 것인가 재고할 필요가 있어요. 이러한 배타적인 시각은 이주민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거든요. 이 부분은 사실 국회나 정부도 크게 입장이 다르지 않아요. 예를 들어, 저희가 이주아동 권리보장 기본법을 제정할 때의 일이었어요. 사실 이 법은 너무 당연한 것이거든요.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나 태어날 곳을 선택한 게 아니잖아요. 한국에서 태어나고 보니까 부모가 미등록 이주노동자인 것이죠. 그런데 그 이유로 아이들은 신분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공교육이나 의료보험 등에서 계속해서 배제되죠. 결국 이주아동 권리보장 기본법은 아이들만이라도 우리가 비준한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따라서 건강하게 발달·성장하고, 교육받을 수 있고, 병원에 갈 수 있게 보호해주자는 취지의 법이거든요. 너무나 당연한데, 이게 왜 통과가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이 법의 제정에 대한 반대 논리가 법무부에서 나왔어요. 법무부는 아이들을 보호하면, 그들의 부모까지 보호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모든 불법체류자들이 다 아이를 낳고 한국에 정착하려하지 않겠는지 우려해요. 이런 악용 가능성을 이유로 이 법의 제정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하죠.

 법무부는 이 법의 제정이 ‘공익’과 충돌한다고 말해요. 여기서 법무부가 말하는 공익은 출입국관리를 말하는 것이거든요. 공익과 사익이 충돌한다는 말인데, 저는 이게 너무 충격적이에요. 아동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사익이고, 출입국관리를 제대로 하는 것은 공익이기 때문에 공익이 앞선다는 논리가 저는 너무 무서운 논리라고 생각해요. 출입국관리법을 준수하는 것이 이주아동의 권리를 보장해야하는 것보다 앞설 수 있을까? 이런 법무부의 인식이 외국인 혐오를 조장하고, 또 묵인한다고 생각해요. 초과 체류나 미등록 체류이기 때문에 인권보장도 안 된다는 법무부의 입장은 외국인 혐오 세력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저는 법무부가, 정부가 이런 입장을 견지하는 한 외국인 혐오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3

 

하 : 변호사님께서 ‘법적인 관점의 해결이 어려워도 인권적 관점의 해결을 도모한다.’라는 말씀을 하신 인터뷰를 봤어요. 법적인 관점과 인권적 관점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또 양자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소 :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웃음) 저는 공익 변호사, 인권 변호사, 공감이나 민변에서 활동하는 변호사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인권의 문제를 법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양자의 균형을 맞춘다기보다는, 기존의 법에 담겨있지 않은, 혹은 기존의 법에 충분히 담겨있지 않은 목소리, 예컨대 소수자의 인권이나 입양인의 인권 등과 같은 관점을 법에 새롭게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존의 법은 현재의 소수자들의 인권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거나 침해할 수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보면 법과 인권이 충돌한다고 말할 수 있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일을 시작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법과 인권이 충돌하는 것은 아니에요. 인권의 문제가 법에 반영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활동해야 하는 거죠.

 

하 : 공감의 10년 기록이 담긴 ‘우리는 희망을 변론한다.’가 출간되었는데요. 그동안 공감이 이뤄낸 성과와 가장 큰 보람은 무엇일까요.

 

소 : 공감이 계속 존재해왔다는 것?(웃음) 사실 저희가 맨 처음 시작을 했을 때, ‘몇 년이나 가겠어?’하고 반신반의했거든요. 왜냐하면 후원금으로 운영비와 사업비를 충당한다는 것이 굉장히 생소했고, 거기다 일반적으로는 ‘돈을 잘 버는’ 변호사가 후원을 받는다는 것도 낯설었거든요. 다른 가난한 인권시민단체처럼 후원금으로 보수를 받으면서 활동한다는 것이 가능할지 의심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공감의 성과는 문 안 닫고 12년 동안 잘 해오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그리고 최근 2, 3년 사이에 저희가 제일 보람을 느끼는 것은 공익법 활동을 하는 후배들이 많아졌다는 것이에요. 희망법도 생겼고, 어필도 생겼고, 또 공익활동을 전담해서 일하겠다는 변호사들이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했거든요. 시민단체의 상근 변호사가 된다든지, 홀로 단체를 꾸리는 변호사님도 생기고. 예전에는 ‘민변 방식’의 공익법 활동밖에 없었다고 하면, 공감이 생기면서 새로운 방식의 공익법 활동이 등장했고, 지금은 더 다양해진 것이죠. 또 공익법 활동이 사회적으로 점점 확산되는 상황에서 공감이 선배 역할을 하고 있구나, 우리가 후배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고 있구나 하는 것에서 굉장히 큰 보람을 느끼고 있죠.

 

하 : 한국 사회에서, 특히 젊은이들이 ‘공감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한국 사회의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소 : 저는 공감하는 일이 굉장히 어려운 일 같아요. ‘공감’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에서 일하고 있는데, 일을 하면 할수록 이 공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달아 가는 것 같아요. 우리가 정말로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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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제가 일하면서 마주하는 사람들, 관계 맺는 사람들에게 제가 정말로 공감하고 있는가 되물었을 때 한계를 많이 느끼거든요. 변호사라는 직업은 의뢰인의 사건을 법적으로 검토해야 하기에 의뢰인에게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변호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100%의 공감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도 계속해서 확인하는 거죠. 저 분이 정말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구나, 내가 쉽게 접근하거나 생각할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점을 깨닫는 것이죠.

 저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문제가 자신만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할 일, 해야 하는 일을 열심히 하시되, 내 문제가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는 보는 정도의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가지시고, 학교에서 그런 활동을 하거나, 신문을 보시거나 하면서요. 이런 것들을 보면서 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덜 지치게 되지 않을까, 좀 더 길게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 : 마지막 질문입니다. 민변 회원 분들께 한마디만 해주세요!

 

소 : 제가 돌아보니까 연차가 낮았을 때에는 선배들이 저를 도와주고 챙겨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많이 했는데, 어느새 제가 선배 변호사가 되었더라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후배 변호사님들과 많이 친해지고 싶어요. 제가 공감에서 하는 일에 대해 궁금하거나 같이 하고 싶으시면 언제든 연락을 주시고, 찾아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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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위원회 비법전수워크샵 후기

변호사 김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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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통상임금의 기준에 대하여 정기성, 고정성, 일률성이라는 요건을 제시했다. 그 후에도 통상임금 소송은 노동계의 핫이슈였다. 갑을오토텍, GM대우, 현대자동차 사건에서 각종 상여금, 근속수당, 기술수당, 복지수당 등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킬지 여부에 대하여 당사자 간 의견대립이 첨예했다.

   필자는 로스쿨을 다니던 때, 개별노동법 강의에서 발표를 계기로 통상임금 사건에 처음 관심을 가졌다. 케이스에서 등장한 고열작업수당부분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킬지 여부에 대해 원심과 대법원의 판단이 달라 법리를 정리하는 것이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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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비법전수워크샵-통상임금소송에서는 통상임금 소송의 대가 강호민 변호사님이 연사로 나섰다. 그는 직접 진행했던 케이스와 자료들을 토대로 상담-위임계약-소장제출-금액산정액셀작업-변론기일진행-합의 및 조정단계에서 변호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A to Z로 짚어주었다. 필자와 같은 후배 변호사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알찬 강의였다.

   배운 내용을 정리해 보면, 통상임금소송에서 할 일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자료 정리다. 통상임금에 포함시킬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정리해야 하므로 의뢰인으로부터 최근 3년간 임금협정서/단체협약서/취업규칙(급여규정)/급여명세서/퇴직금산정서 등의 자료를 받는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은 급여명세서에 명시되지 않은 수당도 검토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버스회사 같은 곳에서 담뱃값이나 식대를 현물로 매일 지급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이런 수당이 있는지 의뢰인에게 확인해야 한다.

   자료가 미비한 부분이 있으면 문서제출명령을 잘 활용하라는 팁도 유익했다. 의뢰인과 회사로부터 자료를 받으면 이를 엑셀시트로 정리를 해야 하는 데 키워드는 정확신속이다. 재판 진행 중에 재판부로부터 엑셀식 구성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므로 사무직원뿐만 아니라 변호사도 이 엑셀시트에 대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일단 엑셀시트를 잘 정리해놓으면 그 이후는 일사천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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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정리가 통상임금 소송의 주된 반쪽이라면 두 번째는 의뢰인과 재판부를 상대하는 부분이다. 의뢰인에게 사실관계 검토 결과를 설명하며 예상 청구금액에 따른 인지대 납부액을 설명하여야 하고, 사건 위임계약을 맺어야 한다.

   이 위임계약을 맺는 부분에서 원고가 여럿일 경우 선정당사자제도를 활용할지 여부가 문제되는데 그다지 추천하고 싶진 않다고 한다. 선정당사자 제도가 오히려 번거로운 부분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다수당사자인 경우 대리할 때 기일이 따로 잡히면 곤란하므로 특약사항을 통해 창구단일화는 꼭 필요하다.

   소장 제출 시에 청구할 임금액을 고민해서 결정하여야 하는데, 이는 단독으로 진행하다 중간에 청구금액이 늘어나 합의부로 이송될 경우 소송기간이 길어지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 임금대장 등의 자료를 받기가 용이하므로 가급적 전자소송을 진행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통상임금 소송이 생겨난 것은 결국 휴일근무와 연장근무를 과도하게 강요하는 노동환경 때문이며, 이런 장시간 노동이 지양되어 통상임금 다툼이 사라지길 바란다고 끝맺었다. 필자도 위 의견에 적극 동의한다.

   변호사님의 강의를 듣고 나니 어렵게만 느껴졌던 통상임금소송의 가닥이 잡히는 느낌이었다.(그러나 엑셀은 여전히 두렵다…..웃음) 강의를 들으면서 이런 부분까지 알려주셔도 되나?”란 생각이 들 정도로 비법과 팁을 아낌없이 전수해주신 강호민 변호사님과 이런 자리를 만들어주신 김진 노동위원장님께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또 다음 워크샵을 기대하며 첫 회에 오시지 않은 분들께 두 번째 워크샵은 꼭 참석하기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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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6/07/1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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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참여팀] 참여연대의 자원활동가는 상근 활동가들과 손발을 맞춰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10대 청소년부터 일흔이 넘으신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학생, 주부, 직장인, 은퇴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원활동가들의 숨은 활약을 자원활동가 인터뷰를 통해 알려드립니다.

 

"참여연대가 많은 위안을 줬어요."

 

사회복지위원회 자원활동가 류민하님

 

 

참여연대 자원활동가 류민하

사회복지위원회 자원활동가 류민하님

 

 

자원 활동을 그만둔 사람인데 인터뷰를 해도 되는지, 준비된 말이 아니면 말주변이 없어 어려운데 괜찮은지 이런 저런 고민이 들었다는 류민하 자원활동가. 인터뷰 약속을 잡을 때 보여줬던 발랄함은 뒤로하고 잔뜩 긴장한 모습을 내비치며 한마디, 두 마디 말을 이어가는 그의 태도가 참 신중하고 진실해보였다.

 

Q. 반갑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참여연대에서 했던 일을 설명해주세요. 
A. 대학교 4학년, 입학한지 7년 만에 4학년이 되었어요. 전공은 미디어커뮤니케이션과 정책 이렇게 2개이고요. 학교에서 학번을 밝히면 이제 굉장히 놀라게 되는 그런 상황입니다. 기자 지망생이구요, 대학 생활이 거의 끝나가서 학교생활을 재밌게 누리는 것보다는 자기소개서 쓰고 스터디하고 그런 조금은 재미없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 동아리는 아직 하고 있어요.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에서 자원활동을 했어요.

 

Q. 사회복지위원회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A. 사회복지위원회에서 하는 일은 정확히 다 알지는 못하는데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굉장히 많은 일을 조세담당하시는 분, 복지를 담당하시는 분 이렇게 2명의 간사님이 하시는 것 같았어요. 제가 맡은 일은 <복지동향>이라는 잡지에 실릴 인터뷰의 녹취를 푸는 일이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녹음된 걸 풀어내면 되는 거였는데 자택근무였어요. 집에서 일을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편하고 좋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기왕 시작한 자원 활동인데 뭔가 더 저에게 남는 일을 하고 싶어서 간사님께 일주일에 한 번 출근할 테니 나에게 시킬 일이 없느냐고 여쭤봤었어요.
간사님이 처음에는 조금 당황하셨어요. 저를 그런 식으로 써먹는 걸 생각하지 않으셨으니까. 그래서 저를 위해 일을 따로 만드셨죠. (웃음) 도로명으로 바뀐 주소를 고쳐 쓰는 일도 하고 중복된 복지들이 효율적으로 바뀌고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맡았었습니다.

 

Q. 참여연대는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A. 자원활동을 지원하기 전부터 이름을 알고는 있었어요. 워낙 큰 단체이기도 하고 유명하기도 해서. 본격적으로 알게 된 건 공익활동가학교 16기를 통해서였습니다. 학교에서 학보사 기자 활동을 함께했던 친구가 15기를 했는데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다고 추천을 해줘서 지원하게 되었어요. 16기 활동을 하면서 참여연대 회원으로 가입도 하고, 청년참여연대 후원도 하게 되었고, 16기가 끝나고 나서도 뭔가 더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자원활동도 지원했어요. 간사님 졸라서 일을 더 하기도 했고. 
 기자를 꿈꾸는 학생으로서 공익활동가학교는 정말 좋은 활동이었어요. 참여연대 안에 계신 분들만 뵙게 될 줄 알았는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을 직접 만나고, 강연도 들을 수 있는 기회도 생기고. 기자를 준비하면서 ‘시민사회란 이런 곳이다’라고 체험할 수 있는 입문코스 같은 느낌이었어요.

 

Q. 어렸을 때부터 기자가 꿈이셨어요? 
A. 그렇지는 않아요. 전공을 선택하고, 심지어 학보사에 들어갈 때까지도 기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대학생활에 뭔가 남기고 싶어서 시작한 활동이었는데 일을 하면서 적성에도 맞는 것 같고 흥미가 생기게 되었어요.
기자라는 직업이 분명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무언가를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리면서, 내가 직접 활동가로 살지는 않지만 나의 본분에 맞는 일을 하면서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Q. 학내의 기자로 활동하며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는지.
A. 한겨레 안수찬 기자를 만났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단순히 기자를 직업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사명의식만 가지고 밀어붙이는 분 같지도 않았어요. 균형이 참 잘 잡혀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분이 했던 말이 너무 좋아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기자는 직업이 아닌 삶의 방식이다”라는 말을 하셨는데 정말 공감이 되는 말이었어요. 
또 수습기자 시절에 교직원들이 파업을 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런 집회나, 점거나, 시위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단순히 그냥 수업만 듣고 다녔으면 보지 못했을 법한 장면들을 목격한다는 것을 넘어서 그런 행위들이 무언가를 다 알리려고 하는 것들이잖아요. 좋은 기자는 이런 사람들의 목소리를 언론이 갖고 있는 스피커의 힘으로 멀리 퍼뜨리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Q. 앞선 생각들을 하는데 참여연대 활동이 좋은 영향을 주었나요?
A. 일단 토론하는 분위기가 분명해서 좋았어요. 학교 수업에서는 다들 눈치 보기 바쁘고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질문하거나 혹은 토론하는 학생이 적었는데 활동가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이 있고 또 그걸 말로서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것 같아요.
또 이런 활동을 하기 전에는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부분들이 눈에 보이면서 문제를 대하는 자세도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그저 신문이나 뉴스에서 사건을 접하는 느낌이었는데 활동하시는 걸 보니까 이런 것들을 알리기 위해 이렇게 까지 노력하시는 구나, 이런 것들을 중점적으로 다뤄주길 바라는 구나, 그런 생각이 커졌어요.
사회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치권 욕하고 뭐 그런 행동을 하겠지만 분명 그것만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부채의식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럴 때 참여연대 같은 단체에 후원을 하든가, 아주 조그마한 일이라도 하는 일이 큰 위안이 되요. 꼭 참여연대가 아니더라도 좋겠지요. 최근에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어요. 같이 신문 스터디 하는 친구들이랑 기사를 읽으면서 토론을 하는데 정말 거국적인 이야기가 오갔어요. 재분배가 무엇이고, 사회가 어떻고, 어떤 원리가 있고 등등 거대하고 원론적인 이야기를 한참 하고 스터디를 마쳤어요. 집에 갈 준비를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하는데 그 때 마침 학교에서 총학생회가 장학금 삭감 관련해서 천막농성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걸 보면서 친구들이랑 참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대화를 나눴어요. 여태까지 사회가 어떻고, 시국이 어떻고 대단한 얘기들을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현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각자 ‘스펙쌓기’ 바쁜 사람들이었다는 죄책감이 들더라구요. 그런 죄책감이 들 때 참여연대가 많은 위안을 줬어요. 아 맞다, 난 그래도 참여연대에 후원도 하고 자원활동도 하고 그랬지, 하는 생각이 위로가 되더라구요. 그런 면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이런 일에 관심을 갖고 사는 게 참 좋은 것 같아요.

 

Q. 마지막 질문, 민하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이 있잖아요. 꿈은 아니더라도 흥미가 있는 일은 다들 분명 있겠죠.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노력한다면, 혹은 아주 큰 노력은 꼭 아니더라도 원한다면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것만 하더라도 충분히 보람이 있고 먹고 살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또 정치에 꼭 엄청나게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하면 사회를 살아가는데 크게 무리가 없는 사회였으면 좋겠어요. 너무 유토피아 같나요?(웃음)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그는 종종 민망한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민망하시냐고 물으니 그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자신이 지금 내뱉은 말들을 과연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걱정이 되며 부끄럽다고 표현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부끄러워하는 건 참 좋은 일이에요’ 라고 답했지만 나는 생활 속에서 얼마나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는지 그를 보며 또 다른 부끄러움을 떠올렸다. 집에 가는 길에 들은 바로는 언론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대략 2000명 정도라고 한다. 광화문 근처에 있는 언론사가 대략 20개라고 한다면 100명의 청춘을 이겨야 겨우 합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그가 꼭 기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부끄러움을 아는 그가 좋은 기자가 될 때까지 응원을 아끼지 않고 싶다. 민하님, 신문에서 꼭 봤으면 좋겠습니다.

 

작성 자원활동가 박영민 (활동가를 위해 활동하고 싶은 대학생)

월, 2016/03/07-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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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법조인으로서의 삶]

안현영(이하 ‘안’) : 모르시는 회원분이 없으시겠지만, 시작에 앞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정연순(이하 ‘정’) : 회장 취임을 앞두고 있는 정연순입니다. 반갑습니다.

 

유소영(이하 ‘유’) : 저희와 같은 나이에는 어떤 학생이셨고, 어떤 꿈을 꾸셨는지 궁금해요.

정: 특별히 다를 것 없는 80년대 대학생이었는데요. 고등학교까지는 모범생이었다가 대학에 들어와서야 광주 항쟁이 뭔지 알게 되었고, 박정희가 독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뒤의 대학생활도 그 또래의 경험과 비슷해요. 매일 최루탄 연기 맡으며 교문 들어가고, 학교를 떠올리면 최루탄 냄새와 그 교문도 같이 떠오르는.

 

유 : 사법시험은 어떻게 응시하게 되셨어요?

정 : 87년 민주화가 되고 나서 이듬해 4학년이 되니 할 일이 없었거든요, 정신적 혼란기였죠. 무엇을 해야 할 지도 잘 모르겠고, 학점도 형편이 없어서 시험이라도 봐야 겠다, 이랬어요.

 

안 : 보통은 학점이 안 나왔다고 해서 사시 보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웃음)

정: 그때가 한국사회의 고도성장기라 취직이 잘되었다고 하지만, 여성에게는 꼭 그렇지는 않은, 다른 문제였어요. 막상 졸업을 앞두고 취업하려고 보니 막막했어요. 해 놓은 건 없고… 그래서 일단 시험을 보자 이랬는데, 여성합격자가 많지 않으니까 부모님이 네가 되겠느냐 걱정 많이 하셨죠. 1차라도 합격하면 다행이라고. 일단 대학원에 진학하고 그 2년 안에 합격하지 않으면 두말 않고 취직해서 돈 벌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대학원 등록금도 아르바이트로 벌구요. 다행히 학위과정 끝나기 전에 합격해서 다 마칠 수 있었죠.

 

안 : 석사과정과 시험을 같이 마치시다니, 너무 쉽게 얘기하시네요(일동 웃음)

정 : 아… 그게.. 역시 학점은 안 좋아요… 다만 뭐랄까요, 집중력이 좋다 할까요, 평소에는 느긋해 하다가 시험처럼 통과해야 하는 걸 목표로 설정하고 이걸 해 내야겠다 한번 마음먹고 나면 열심히 하는 편이에요.

 

안 : 어떤 법조인이 되야 겠다 생각하셨나요?

정 : 처음 일했던 곳이 법무법인 덕수였는데, 그 선배님들이 너무 멋져 보여서 그분들을 닮은 변호사가 되겠다 했죠. 그러다 보니 민변 가입도 필수였고.

 

안 : 경력을 보면 미주리 주립대 유학이 있는데요, 어떻게 가시게 된 건가요?

정: ADR(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이라고, 대안적 분쟁해결절차를 공부했어요. 2003년이었는데, 변호사 생활을 10년 정도 하게 되면 많이 지쳐요. 승패로만 이루어진 판결을 받는 과정에 회의가 들게 되죠. 안식년을 갖게 되었는데 그 무렵 부안 방폐장 사건 등 사회적 갈등이 계속 커지고 있었거든요. 사회적 갈등을 중재하고 조정하는 방법이나 절차 이런 것을 공부해보고 싶었죠. 미주리 주립대에 석사과정이 있어서 지원했는데, 입학에 필요한 대학 학점과 영어 점수 미달이라.. 진짜 고생했고, 은사님인 안경환 교수님이 정말 두툼한 추천서를 쓰셔야 했어요. 이 친구가 학점이 낮은 것은 특수한 한국적 상황에 기인했다고, 그 상황을 설명해 주시느라(일동 웃음).. 수업 중에 인성을 훈련하기 위해 명상을 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모두가 눈감고 명상하는데, 영어로 명상을 하니까 그냥 눈뜨고 들어도 졸린데 정말 주체 못하게 졸면서 헤드뱅잉을 했던 기억이..(웃음).. 그런데 막상 한국에 돌아와서 전공을 못살려서 좀 아쉽죠.

 

김주환(이하 ‘김’) :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본부장도 하셨어요.

정 : 80년대까지는 격동의 시대라, 사실 차별문제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어요. 90년대를 넘어서서 한국 사회에서도 그런 이슈들이 폭발하기 시작했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2005년 하반기에 차별시정본부를 설치하게 되는데요, 사실 그때까지 저도 변호사로서 주로 구금, 고문 등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차별시정본부가 설립되고 나서 본부장이 필요하다고 하여, 여성으로서 가졌던 소수자 의식을 가지고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지원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막상 시작해 보니 정말 많은 과제들이 있었더군요. 제가 재직 중에 연령차별금지법, 장애인 차별 금지법, 장애인권리협약 제정등 많은 진전이 있었죠. 비록 통과는 못 되었지만 차별금지법안도 만들어졌고요. 그 과정에서 오히려 저야말로 가장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귀한 기회였어요.

 

안 : 변호사를 하다 보면, 해도 안되는 것 같을 때가 많고 거대한 세력에 좀 무력감을 많이 느끼셨을 것 같아요. 그건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정 : 어떤 사람과 같이 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제가 고영구 전임 회장님 인터뷰를 했는데, ‘민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질문 드렸어요. 그랬더니 ‘고향’이란 생각이 든다고 하시더군요. 마음의 고향이죠. 변호사 생활을 가능하게 한 것이 민변이었기에, 민변을 생각하면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 얼굴이 하나 둘 다 떠오른대요. 저도 그래요. 격려가 되고, 힘이 되는 동료들이 있었으니까, 이건 최소한의 합리적인 요구다 이렇게 생각했는데도 받아들여주지 않는 법원에 검찰에 많이 실망하지만, 우리끼리 모여서 욕도 좀 해가며 뭐 나만 힘든 게 아니라 우리 다 같이 힘든 일을 하고 있는 거니까, 그런 데서 위안을 받는 거죠.

 

[그녀, 그리고 민변]

안 : 민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을 꼽으라면요?

정 : 그런 의미에서 여성위원회를 만든 일이죠. 1999년, 선후배와 함께 여성위원회를 함께 만들었는데요, 이제는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 일생을 살면서 가장 좋은 동료이고 위안이 되는 사람들이 된 거죠.

 

안 : 회장직에 출마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요?

정 : 제가 총장시절부터 중장기적 발전 전략을 수립하고 민변의 장래에 대한 모색에 관심이 많았어요. 이번에도 조직발전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했는데요, 회원 1,000명 시대에서 새롭게 해야 할 일들을 잘 해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재화 변호사님도 잘 하시겠지만 제가 민변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출마하게 되었어요.

 

안 : 선거운동 중 어려웠던 부분은 무엇이었는지요?

정 : 음… 선거운동 기간이 너무 길었어요. 좀 줄여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대통령 선거보다 더 기니까요, 아주 힘들었다기보다는 다른 일을 거의 못하게 되는 게 문제였어요.

 

안 : 당선될 수 있었던 자신만의 강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정 : 흔히들 선거의 핵심 요소는 조직·정책·인물이라고 하는데, 조직이나 정책이나 다 비슷했기에 그 차이는 뭐였지 이러다 보니 결론이 결국 인물인가?(모두 웃음) 농담이구요. 이재화 후보님도 인품이나 능력 다 훌륭하셨지만, 아무래도 사무총장을 지낸 경험이, 민변의 역사나 과제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것이 제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동재(이하 ‘이’): 최초의 경선에서 당선된 회장이라는 게 상징하는 게 있을 것 같아요

정: 추대방식이었다가 선거 방식 도입된 게 10여 년 전인데요, 추대 혹은 단독출마에 따른 찬반투표가 비민주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예전에는 서로가 잘 알았던 작은 규모였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는 추대가 훨씬 더 민주적이었죠. 이제는 민변의 장래를 두고 각자의 포부와 각자의 전망을 가진 후보들이 복수로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규모가 커진 것이고, 이번 경선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질적인 수준에서도 민변의 활동이 굉장히 다양해졌어요. 시국사건 변론, 양심수 변론 등과 같은 사건에 주안점을 두고 출범했지만, 이제는 민생경제, 장애인, 성소수자, 아동, 디지털 정보 인권까지 나오니까. 다양한 활동만큼 민변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우리 회원들이 과연 어디까지를 공유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 수도 있었는데, 이번 경선은 그런 공유 지점들을 회원들 사이에서 다시금 확인하는 중요한 자리였던 것 같아요.

 

이 : 공약으로 공익인권변론센터에 중점을 뒀던 것 같은데, 민변의 앞으로의 방향성과 어떻게 연관된 것인지 궁금해요.

정 : 민변은 전통적으로 전문성을 가진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일하는 위원회가 중심이고, 그 활동에 상당한 자율성이 보장되는 구조에요. 지금도 그렇구요. 회비납부도 참여도 다 같이 하는 구조인데, 양적으로 성장하면서 두 가지 문제점이 나타났죠. 하나는 참여기회를 갖지 못하는 회원들, 특히 활동의 중심인 위원회 활동에서 벗어나다 보니 자연스레 참여기회를 갖지 못하는 회원들이 생겨서 그 참여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고요, 또 하나는, 지금도 위원회가 15개이지만 그 활동으로 커버되지 않는 과제와 영역들, 이런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주고 위원회를 지원하며 기획변론을 강화하는 것, 시민들과 함께하는 변론 등을 활성화해야할 필요가 있는 거죠. 이게 어느 특정 위원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결국 조직발전특별위원회에서 논의를 한 결과, 연구소와 센터 두가지 설립안 중에서 일단 센터를 설치한다, 이런 결론이 나왔던 거죠. 여전히 위원회 활동이 중심이겠으나 앞으로는 센터나 사무처에서 일반 회원들을 상대로 한 구심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 : 센터가 일을 먼저 찾아서 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는데, 민변활동은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 건가요.

정 : 지금까지도 잘 해왔지만 여력이 있다면 조금 더 중장기적인 제도 개혁이나 평범한 국민들의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에 대해서도 더 관심을 가져야 되지 않겠나 생각해요. 흔히들 사회권이라고 하는 민생 경제, 복지, 장애인 인권 등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넘어서서 경제적, 문화적 권리에 대해서 더 열심히 해야 될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을 센터가 앞서서 기획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게 시국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만히 있어도 밀려오는 큰 사건들을 처리해야 하니까, 회원들이 좀 벅차하는 것 같아요.

 

이 : 공약 중에 인권 탄압에 더 공고히 대항하겠다는 공약이 있는데 그 실현방안은 어떤 건지 간단히 말씀해주신다면?

정 : 기본적으로 연대를 더 강화해야겠죠. 시민단체와의 연대는 물론이지만, 시민단체가 아니어도 일반 시민들과 강력하게 연대하는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고요. 변화하는 환경에 맞추어 효과적인 여러 소통수단들을 고민하고 있어요.

 

김 : 앞으로의 민변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 같으신가요?

정 : 회원 수가 늘어남에 따라서, 회원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있어요. 민변이 왜 좋은가 하면, 공동체적 분위기, 그것은 결코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가치라고 생각해 왔는데요, 많은 회원들이 다양한 관심사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민변이 그 몫을 다할 수 있게 되니 좋기도 하지만, 회원들 사이의 거리가 옛날만큼 가깝지 않은 게 좀 걱정이 되어요. 그렇다고 모여서 노는 걸 강화할 수 있는 대중단체는 아니라서요. 다양한 배경 속에서도 하나의 기본적인 원칙에 있어서는 공감하고 그 원칙으로 묶일 수 있는 그런 조직,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던 간에 회원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조직이 되었으면 해요. 제가 천명의 민변, 천개의 전선이라고 표현했는데, 로펌에서 서면을 쓰고 있는 회원이나 거리에서 경찰하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회원이나 다 같이 ‘민변’이라는 하나의 가치 아래서 공통된 자부심과 일체감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조직인 거죠.

 

안 : 임기가 끝나실 때는 어떤 회장으로 기억되시길 원하시나요?

정 : 아직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푸근한 회장, 어려운 때 편하게 전화하고 해도 좋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느껴지는, 존경 이런 게 아니라 회원들이 가깝게 느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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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피할 수 없는 가족 이야기]

유 : 부군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고, 무엇에 반하셨나요?

정 : 제가 처음 들어간 사무실의 선배이자 동료였어요. 서로의 가치관이 비슷한 것이 좋았죠. 저희가 민변의 1호 커플이에요. 민변에는 부부회원이 상당히 많아요. 아마도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게 더욱 끌리는 요인이 되지 않나 싶어요. 열 쌍을 훌쩍 넘긴 걸로 알고 있어요. 올 봄에도 한 커플이 있었고.

 

안 : 부군도 민변 회장이셨는데 어떤 팁 같은 걸 알려주신 건 없나요?

정 : 뭐 특별한 게 있다기보다는.. 저는 국가인권위원회 공무원생활을 2년 반 정도 했어요. 그 기간은 특별회원이었는데도 민변에서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없었어요. 왜냐면 남편이 그때 회장이었거든요. 부부간 대화가 주로 저녁마다 민변 이야기를..(웃음) 남편이 창립멤버이다 보니 민변의 역사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들어서 아무래도 더 잘 알게 되는 게 도움이 되었죠.

 

유 : 아직도 누군가의 배우자나 연인으로 호명되는 경향이 한국사회에서는 많아요. 예전 인터뷰에서도 언급하셨던 것 같은데, 전 민변 회장의 배우자나 첫 여성 회장 같은 수식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 : 내가 나 자신으로 알려지지 않고 누구의 부인이라고 호명되는 게 너무 싫었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이제는 세월이 흘러흘러 이분이 정변호사 남편이십니다, 이렇게도 호명되어요.(웃음) 첫 여성 회장에 대해서는 영광스럽게 생각해요. 내가 잘났다는 것을 드디어 인정받았구나 이런 게 아니라, 여성들에게는 이것은 안 될 수도 있어, 못 할 수도 있어 라고 저 깊은 마음속에서 일정하게 그어 놓는 선이 있거든요. 그걸 넘어섰다는 것, 말로는 여성도 회장할 수 있지 이래 왔지만 제가 그 실제의 예가 되었다는 게 굉장히 기뻐요. 여성 후배들에게 선배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생각에서요. 민변이 진보적 법률가 단체라고들 하잖아요, 그 단체에서 30년 되지 않은 역사에 여성 회장이 나왔다는 것이 매우 보수적인 한국 법조계에서, 역시 민변답다, 이런 느낌을 주는 것도 좋구요.

 

유 : 일이나 생활에 있어서 균형을 맞추며 살아야 하는데, 여성이라면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역할들이 있잖아요, 그 균형을 맞추는 게 안 힘드셨나요.

정 : 당연히 힘들었죠. 사실 30대 초반, 중반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일과 가정을 양립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라, 30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을 정도로요. 두 가지 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때론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어야 했나 하는 후회와 짜증이 없지 않았어요. 개인적으로는 내가 과연 둘다 잘 하고 있나, 그런 심리적 스트레스를 벗어나기 어려웠어요.

 

유 : 예전 인터뷰에, 가정에 남편이 둘 있었다고 표현을 하셨네요.

정 : 나도 나만 도와주는 마누라를 갖고 싶다, 뭐 그런 거죠(일동 웃음) 사실 저는 시부모님과 10년을 같이 살았거든요. 그러기에 가사노동을 심하게 한 것도 아니고 육아나 가사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것보다는 어머니로서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시선과, 본인이 그렇게 교육받은 것에 있는 거예요. 일하는 엄마로서의 죄책감이라는 것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운 거죠. 조금 크니까 큰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엄마 없으면 더 잘 지내더라구요(웃음).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엄마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다고 무조건 좋은 엄마는 아닌 거예요. 근데 이건 사실 말로 되는 게 아니라, 겪어봐야 아는 거죠. 페미니즘이니 뭐니 이성으로는 알고 있어도 내 스스로가 사회화된 게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심리적 부담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웠어요.

 

안 : 정말, 밥도 왜 엄마만 해줘야 되는 것인가요. 아빠도 있는데.

정 : 요즘에는 남성 후배들 보니까 ‘선배님 저 애기 보러 가야 해요, 마누라가 오늘 외출하기 때문에 제가 당번입니다’ 그러더라구요. ‘야, 회의해야 하는데!’(웃음) 그걸 보고 여성인 제가 절대로 뭐라 할 수는 없고 꾹 참고, ‘당연히 들어가야지!’ 이런 대화가 자연스럽게 되는 분위기로 바뀌었더라고요. 지금의 후배들은 육아 분담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생각해서 참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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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인간 정연순]

안 : 사실 저희는 인간 정연순이 많이 궁금해요 여가 시간에는 주로 뭘 하시나요

정: 시간이 나면 여행가거나 책 읽는 것, 둘 중 하나를 해요. 남은 인생의 버킷 리스트의 대부분도 여행이에요. 두 번째로는, 독서인데, 눈이 닿는 곳에는 책을 두고 있죠. 틈나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보는 거에요. 책을 읽을 수만 있다면, 늘 행복할 것 같아요.

 

안: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다면요

정; 1998년에 민변 선배이신 차병직변호사님, 조광희변호사, 저와 남편이 노래방에서 놀다가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부르게 되었어요. 우리가 한 번도 안 가봤는데 거기에 표범이 있는지 어떻게 아냐, 이렇게 되어 넷이서 돈을 모아, 킬리만자로로 떠났어요. 지금은 직항도 있지만 그때는 암스테르담 가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다시 탄자니아로 들어가는, 이틀을 비행기를 타야 하는 여행이었구요. 하루 입산객이 제한되어 있는, 우리 같은 등산객들은 가방만 가볍게 메고 요리사, 가이드, 짐꾼 다 같이 함께 줄줄이 올라가는 흔하지 않는 경험이었죠. 3,000미터가 넘어서 본 산장에서 올려다 본 밤하늘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은하수가 대륙의 하늘에 걸쳐 있더군요. 그런데 4천미터를 넘어서 고산증에 시달려서 다 토하고 정신을 못 차리고, 결국 차병직 변호사님 혼자서 정상에 올라가고 저를 돌보느라 나머지 사람들은 못 올라갔죠. 제 인생에서 가장 멋있고 좋았던 여행이에요. 여러분들도 꼭 킬리만자로를 가보세요.

 

안 : 여행 얘기를 했으니, 책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인가요. 20대 중반, 미래를 설계하는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세요.

정 : 글쎄요. 책 추천만큼 어려운 게 없는 것 같은데…

 

김 : 책을 고르는 기준이나 읽게 되는 기준이 뭔지요?

정 : 1년에 한번이나 두 번, 한꺼번에 책을 사요. 100여 권 정도를. 신간 소개를 유심히 봐서 장바구니에 넣어 두었다가 한꺼번에 구입하죠. 그런데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서 어떤 책을 좋다 해야 할 지 참 어려워요. 10대 20대에는 소설을 많이 읽으면 좋을 것 같고요. 그때의 소설은 내가 이해하지 못한, 접하지 못한 세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정말 좋은 경험이라 생각해요. 동시에 20대들은, 조금 무거운 책을 읽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기본적으로는 역사와 철학일텐데, 제 인생에서 가장 도움이 됐던 건 역시 ‘자본론’을 공부했던 거에요. 법학도에게는 그걸 배울 기회가 별로 없는데, 80년대의 분위기 속에서 선배들에게 야단맞아 가며 공부할 수 있었던 게, 그나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보는 이 정도의 교양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요. 철학도 계보가 길어서 다 공부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렇다면 역시 자본론을 읽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게 원전은 너무 어렵거든요. 대신 그걸 소개하는 책들을 읽으면 되죠. 너무 무겁나?(웃음)

 

안 : 교수님으로부터 숙제를 받은 기분이에요.(웃음)

정 : 또 하나 요즘 중요한 게 있다면, 과학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현재와 미래에 걸쳐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 한편으로는 단순히 기술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인간과 지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철학을 정립하는 게 중요한 문제거든요. 요즘은 좋은 책들이 빨리빨리 번역되어 나와서 읽기 좋아요.

 

안 : 가장 인상깊게 보셨던 영화가 있다면요?

정 : <정복자 펠레>라는 영화가 있어요. 스웨덴이던가,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른 나라의 농장 노동자로 이주하는 이주민의 이야기에요. 어린 소년이 목격하게 되는 삶의 군상이 쭉 펼쳐져요. 그 비참한 환경 속에서도 아이는 조금씩 커서 결국 아버지를 두고 하얗게 눈이 내리는 농장의 길을 걸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 장면이 정말 감동적이에요.

 

안 : 변호사가 아닌 사람 정연순으로서는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신가요?

정 : 멋있는 할머니가 되겠다.(일동 감탄) 변호사로서 위대하거나 대법관이 된다든지 국회의원이 된다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 멋진 할머니 멘토가 좀 있어야겠다는 꿈을 꾸고 있어요. 사실 우리 어머니 세대들은 너무 힘들게도 사셨지만 급격한 사회 변화로 이후 세대와 공유하는 게 적기도 하거든요. ‘헌신성’ 이거 하나 외에는 요. 그러다 보니 젊은 세대를 잘 이해해주고 소통할 줄 아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남성 멘토들만 많구요. 저는 20대나 10대들이 아, 이해받았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무조건 니들이 꿈을 가져라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멋진 ‘할머니’가 되어야지, 잘 늙어야지 이게 소원이에요.

 

안 : 정변호사님이 생각하는 민주사회란 무엇인가요? 궁극적으로 이상적인 사회란 어떤 것일까요?

정 : 글쎄요, 완벽한 이상적인 사회라는 게, 평등과 차별의 문제를 두고 볼 때에도 논리적으로 완전한 평등, 완전한 이상적인 모습이라는 걸 그려 보면 오히려 그게 매트릭스 같은 영화에 나온, 깨어 보니 모두가 통 속에 들어가 있는 사회가 될 수도 있죠. 그런 이상사회는 도래하지 않을 것 같고 도래해도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더 소중한 것은, 저기 멀리 어디에 있는 이상적인 사회가 아니라, 그러한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의 신념과 행동이 소중한 것임을 아는 사회, 그것을 지켜줄 수 있는 사회가 아닌가 싶어요. 차이와 차별은 끝내 없어지지 않고 존재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문제를 현명하게 조율해가면서 조정해 나가는 것, 그럼으로써 현실에서 조금 더 나아가는 것, 미약하나마 조금씩 이루어내는 것에 대해 우리가 신념과 긍지를 가지고 만족할 수 있으면 아, 잘 살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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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월, 2016/06/13-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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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위원회는 지난 12월 29일,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를 방문하여 ‘사드 배치 철회를 위한 법률 대응 설명회’를 진행하였습니다.

01

처음 들어선 마을에는 입구부터 사드 배치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들이 이어져 있었는데요, 플래카드가 이어진 길을 따라 들어가니, 사드 배치의 유력 후보지인 성주 골프장과 함께 주민들을 감시하기 위한 경찰 버스 한 대가 나타났습니다.

 

설명회를 시작하기 전에 설명회 참여를 독려드릴 겸, 잠시 소성리 마을회관에 들렀습니다.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마을 회관 입구에는 ‘사드 배치 반대’ 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서 계신 어르신이 보였고, 어르신께 “사드 때문에 서울에서 온 변호사들입니다.” 라고 인사를 드리자, 서울에서 귀한 손님이 왔다면서 직접 제주도에서 공수해 오신 귤까지 내오며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귤껍질을 벗기며 “사드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지요.” 하고 운을 띄우니, 마을 어르신들께서는 “도대체 누구 마음대로 우리 마을에 사드를 배치한다는 것이냐.”, “나는 여기서만 살았는데, 떠나고 싶지도 않고 떠날 곳도 없다.” 며 울분 섞인 감정들을 토로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드를 배치하는 것은 군사적, 외교적인 문제를 넘어 우리 국민들의 생존권과 곧바로 직결되는 문제였습니다.

02

오후 두 시부터 원불교 대웅전에 모여 설명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설명회 참석률이 저조할까봐 걱정했었는데, 기우였습니다. 100명도 넘는 소성리 주민들이 대웅전을 가득 채웠고, 일부 주민들은 앉을 자리가 없어 서서 설명회를 들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미군위원회는 사드 배치를 막기 위한 향후 소송 전략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구체적으로, 평화적 생존권, 환경권 등 기본권의 침해를 이유로 하여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청구하는 것이 가능하고, 만일 국방부가 계속하여 사드 배치를 강행할 경우, 순차적으로 부작위위법확인소송, 가처분 신청, 손해배상청구소송 등을 검토하여 볼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진보하는 데에 큰 힘을 보태는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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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리 주민들은 “소송에서 이길 가능성은 있느냐.”, “국방부에 민원을 넣으면 효과가 있느냐.”, “소송을 위임하려면 어떤 절차와 자격을 갖춰야 하느냐.” 등의 다양한 질문을 하며, 소송에 대한 열의를 보였고, 결국 미군위원회에 사드 배치 철회를 위한 소송 등을 위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현재, 미군위원회는 사드 배치를 철회하도록 하기 위한 헌법 소원 등의 다양한 법률적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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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리는 가야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원불교의 성지가 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입니다. 성주 골프장 산등성이에서 소성리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에 군사시설이 설치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마음과 함께 아쉬운 마음이 교차했습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 소성리, 그리고 소성리 주민들을 비롯한 모든 국민들이 평화롭게 살 권리를 온전히 향유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미군위원회의 소식을 마치겠습니다.

목, 2017/02/09-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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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황수영 |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간사

인터뷰 및 정리 이경민 |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작년 7월, 경북 성주 주민들에게 예고 없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한미 정부가 성주에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THAAD)를 배치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나라 돌아가는 일은 나라님에게 맡겨두고 평생 농사지으며 풍년에 웃고 흉년에 울던 마을 주민들. ‘국가 안보’란 4글자 때문에 사드를 배치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은 주민들의 삶을 절망으로 만들었다. 한 발 양보해 대한민국 다수를 위해 사드를 배치한다고 해도 삶의 모든 순간들이 고스란히 녹아져있는 곳에 미군기지가 들어선다는데 주민들에게 충분한 설명과 진정성 있는 설득, 진심어린 위로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했어야 할 일을 못한 국가를 대신한 활동가, 황수영. 사드 배치 예정지 성주 소성리 주민들에게 황수영 활동가는 사드 반대 상황실 아가씨(?)로 불리우고 있다. 성주·김천 주민들, 그리고 성지를 지키기 위해 나선 원불교 교도들과 함께 “평화를 지키는 무기는 없다, 한국 어디에도 사드 배치는 안 된다”고 외치고, 그들의 목소리가 더 많은 시민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확성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소소한 일부터 어려운 일까지 함께하며 대소사를 대변하는 그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 운동이라고 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기소개 부탁한다.
이름은 황수영이라고 한다. 현재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주로 국방, 외교 분야 감시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드 배치나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해외파병, 국방예산, 무기도입 사업 감시, 군사비 축소 요구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예산 관련해서는 군사비를 축소해서 복지비용으로 사용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시민운동 경험은 참여연대가 처음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2008년에 티베트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직후 티베트인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뉴스에서 보았다. 티베트 여행 카페에서 그 모습을 지켜만 볼 수는 없다며 ‘여행자의 윤리’를 고민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고 베이징올림픽 즈음해 티베트와 연대하는 촛불을 들었다. 그러면서 팔레스타인 연대 활동, 아프가니스탄 재파병 반대 활동 등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평화문제 전반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참여연대 입사 전에는 ‘경계를 넘어’라는 작은 평화단체에 있었다. 주로 파병 반대,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활동, 국제분쟁을 알리는 활동을 했었다. 


최근 성주에 사드배치가 이슈가 되고 있다. 사드배치 대응 활동을 하고 있는데, 사드가 무엇이며 무엇이 문제인지 설명해 달라. 
사드는 미국 미사일방어체제(MD)에 속하는 무기다. 날아오는 미사일을 미사일로 맞춰 방어한다는 개념이다.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 등을 견제하기 위해 미사일방어체제를 구축하고 있고, 사드는 그 일부다. MD는 고도별로 여러 무기체계로 구성되는데 사드는 그중 상대적으로 높은 고도(40~150km)에서 미사일을 요격하는 무기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라고 한다. 탐지하는 X-밴드 레이더와 요격하는 미사일이 사드의 핵심 장비다.  


분단이라는 현실에서, 사드가 우리의 안보를 지켜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우선, 방어체계라고 하니 사드가 방어용 무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미사일 방어라는 개념 자체가 ‘절대 방패’를 만들겠다는 미국의 욕망에서 탄생한 것으로, 단순히 ‘방어용’ 체계가 아니다. 군사적으로 완벽한 방어는 완벽한 공격과 동의어로 매우 위협적인 개념이다. 미국은 MD 구축으로 상대방의 미사일 공격은 완벽하게 방어하면서, 미국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선제공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려고 한다. 미국은 핵무기 선제사용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방의 핵미사일 공격을 무력화할 수 있는 MD는 게임의 규칙을 바꿔버릴 수 있다. 
한국에 사드를 배치한다는 것은 미국과 일본이 아시아 지역에 구축하는 MD에 한국이 하위 파트너로 편입된다는 걸 의미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사드 한국 배치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한미일이 MD를 강화할수록 중국이나 러시아도 그것을 무력화할 수 있는 무기체계를 개발하고 구축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사드의 본질적인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질적으로 다른 군비경쟁이 유발한다.
두 번째로, 박근혜 정부는 마치 사드가 있으면 북한의 핵미사일을 다 막을 것처럼 이야기해왔지만 사실 한반도에 별로 효용성이 없다. 남한과 북한은 가깝기 때문에 미사일이 저고도로 날아오고, 북한의 공격이 발생한다면 단거리 미사일이나 장사정포, 방사포를 사용할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이다. 최소 요격고도가 40km인 사드는 쓸모가 없다. 사드가 한반도에 군사적 효용성이 낮다는 것은 그동안 한국 국방부, 미국 국방부의 자료와 여러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로 검증이 되어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아직까지 실전 배치된 적도 없고 기술적으로 검증도 되지 않은 무기다. 
세 번째로는, 결국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막기 위해 무기를 도입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북한의 핵 능력이 커져온 시간은 사실 대화나 협상이 단절됐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한국과 미국 정부의 대북 적대정책은 이미 실패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한반도 핵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결국 대화와 협상이다. 사드 배치 등 군사동맹 강화, 군사력 확장은 답이 아니다.

 

ⓒ 참여연대

 

사드 배치가 비민주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 한미간 합의 내용이나 부지를 성주로 결정한 근거 등이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정해진 것이 없다고 해놓고 3일 뒤에 배치 결정을 발표했다. 사드 배치는 기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범위를 뛰어넘는 무기체계이기 때문에 사실상 새로운 조약을 맺는 행위에 해당하고, 헌법상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국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고, 주민의 동의는커녕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않았다. 롯데에게 부지를 취득하는 과정, 주한미군에 부지를 공여하는 과정 등 절차 전반에 불법과 탈법이 판을 치고 있다. 주민들에게 호언장담했던 환경영향평가도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사회적 합의나 주민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국가 안보, 국가 안보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위한 국가 안보이고 누구를 지키기 위한 국가 안보인지 모르겠다. 주민들이 반대하고, 사드가 우리 안전과 평화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안보를 위한 것이라며 묻지도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고 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일본도 비슷한 일을 경험했는데, 비교하면 어떠한가? 
X-밴드 레이더가 배치된 일본 교가미사키 기지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절망스럽다. 일본 정부와 지자체는 레이더 배치 전 주민 설명회를 약 16차례 열었다. 지자체와 중앙 정부 간의 면담 자료, 공사 일정, 공사 계획, 각종 질의에 대한 답변, 각종 환경 조사 측정값 등을 교탄고시, 교토현 웹사이트에 상세히 공개했다. 예를 들어 레이더 설치를 하면 비행제한구역을 정하게 되는데, 응급상황 시 헬기를 띄워야 할 때 어떻게 레이더를 멈출 수 있는지 등과 같은 주민들의 궁금증을 듣고 합의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현재 사드가 배치되는 성주 주민들은 사드가 성주에 배치된다는 걸 TV를 보고 알았다. 그리고 이런 불투명함에 대해 황교안은 국가안보를 위해서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성주 현장 상황을 공유해 달라. 
작년 7월에 소식을 접한 후 성주 주민들은 현재까지 투쟁을 하고 있다. 처음 군은 성주읍 성산포대를 부지로 정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성주 주민들은 인구밀집지역에 사드를 배치한 선례도 없을뿐더러 아이들이 있는 곳에는 절대 안 된다며 반대했다. 나아가 성주뿐 아니라 한국 어디에도 사드는 필요 없다, 평화를 지키는 무기는 없다고 외쳤다. 
이후 군이 제3부지를 검토하겠다는 자세로 돌아섰고 그곳이 초전면 소성리다. 소성리는 160명 정도,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소성리가 김천 혁신도시 바로 옆이다 보니 김천 주민들과 함께 반대 운동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곳에 원불교 성지가 있다. 원불교 교도들이 평화의 구도길 순례를 하는 곳이다. 원불교는 평화의 종교이며 성지에 전쟁 무기는 안 된다고 하며 결국 현재 성주 주민, 김천 주민, 원불교가 적극 대응하게 되었다. 성주 대책위 상황실장님은 사드 배치에 맞서 성주가 싸워 온 과정을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참 열심히도 해주었고, 300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각자의 자리를 지켜주고 있다. 성주는 이미 그 자체로 진정한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묘사한다. 

 

ⓒ 참여연대


대부분의 주민들이 생업을 거의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농사는 때를 놓치면 망치다 보니 작년에 대부분은 생업을 못 챙기셨다. 사실상 생업을 포기한 채 성주 소성리 상황실에 상주하시는 김천 주민 한분은 일요일에 밭에 갔다가 양파한테 정말 미안해서 울었다고 하시더라. 작년에는 참외밭을 갈아엎은 주민들도 많았다. 경찰과 대치하면서도 추운 날씨에 두고 나온 딸기들이 걱정인 분들이다.


최근에는 사드 유지비를 한국에게 부담하라고 하지 않았나?
트럼프가 사드배치에 대한 비용으로 10억 달러를 요구했다. 우리나라 돈으로 1조 원 이상이다. 원래는 우리가 부지와 전기 등 기반시설을 제공하고 나머지 운영비용, 전개비용은 미군이 부담한다는 것이 한국 국방부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비용 부담에 대한 한미간이면 합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그래서 비용 관련해서 합의내용을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아직까지 현 정부가 사드 배치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새 정부에서의 사드배치 전망은 어떻게 보고 있나?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시절 차기 정부에서 재검토를 하겠다고 했다. 우리가 보낸 질의서에서도 집권하면 최우선적으로 사드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사드 배치는 주민과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답변했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새 정부가 약속을 지켰으면 좋겠다.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였으면 좋겠다. 평화를 어떻게 만들어야할지 근본적으로 고민했으면 좋겠다. 

 

성주에서 사드 반대 상황실 아가씨(?)로 불리울 정도로 열심히 대응하고 있다고 들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소성리에 몇 주간 내려가 있었다. 그 와중에 4월 26일 새벽 사드 장비가 반입되었다. 할머니들이 “단 한 번이라도 우리 의견 물은 적 있느냐”며 절규하는 가운데 경찰에게 다 뜯겨나와 고착당한 채로 레이더, 발사대 등이 들어갔다. 그 후 연휴 기간에 소성리와 함께 하고 사드 장비 추가 반입 등을 막기 위해 전국에서 시민들이 달려와 주셨고 후원 물품이 쏟아졌다. 만감이 교차하던 시간들이었다. 지금은 또 서울에서 대응할 것들이 많아서 올라와 있다. 이 사안은 박근혜 정부의 적폐임이 명백하기 때문에 적폐 청산을 요구할 것이다. 오늘부터 김천 주민들이 청와대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님, 성주‧김천 주민들이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매일 1인 시위를 이어갈 예정이다. 6월 중 한미정상회담이 있을 예정인데 국제 네트워크를 통해서도 미국 측에도 우리의 요구를 전달할 예정이다. 쉽지 않겠지만 성주, 김천 주민들은 사드배치가 철회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운동이,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드 문제에 있어서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리고, 사드가 아니라 평화를 선택하자는 우리의 메시지에 동의할 수 있도록 시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또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당분간 평화운동을 계속할 예정인데, 거창한 계획은 없다. 우선은 내가 지금 있는 이곳에 있을 생각이다.

 

목, 2017/06/0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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