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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고위급 회담 타결에 따른 경실련통일협회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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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고위급 회담 타결에 따른 경실련통일협회 입장

익명 (미확인) | 화, 2015/08/25- 11:20
남북회담 타결, 대화와 타협에 기반한 남북관계 발전의 시금석되야-남북회담 결과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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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공동성명 및 관계개선에 따른 사드배치 효과의 변화 ‘사드보복’의 환상과 사라지는 사드배치의 효과 최근 중국과 한국의 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사드에도 불구하고 한·중 간 관계가 서로의 긴밀성을 더해가면서 협력관계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이는 ‘사드보복’이라는 희망 섞인 상상에도 불구하고 모니터링을 통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2017년도 한·중 간 무역량이 늘어나고 있었다는 것과 통화스왑의 재계약을 통해 보다 선명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변화와 흐름들은 지난 번 올린 페이스북의 중국과 관련된 글에서도 그러하지만 성주투쟁위 내부에서는 어느 정도 공유되고 있는 지점들이기도 하다. 이런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은 미국중심의 경제블록과 중국 중심의 경제블록이 대립·경쟁하면서 교역량에서 세계 11위 권인 한국에 대해 미국은 다른 경제블록으로 넘어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중국은 자신들의 경제적 영향권으로 견인하기 위한 전략들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또한 미·중 간 세계통화를 둘러싼 주도권 경쟁의 문제가 얽혀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분명 이런 흐름들은 지금 우리들이 벌이고 있는 사드철회투쟁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분명치 않던 한국과 중국 간의 관계의 방향이 조금씩 선명해 지면서 역으로 그 선명함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매우 또렷하게 동북아의 긴장을 만들어내던 사드의 배치효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드가 형성시키던 동북아의 긴장관계, 전쟁의 위험 등이 한·중 간 관계설정을 통해 상당부분 소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계의 설정은 중국의 대 한반도 전략으로 보인다. 이는 박근혜 정부 초기 행보로 볼 때 당시 활발하게 진행되다가 어떤 요인에 의해 중지된 것으로 보이며 문재인 정부에서 다시 추진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동안 사드를 통해 동북아와 한반도의 평화를 중심으로 투쟁해 오던 우리들에게도 동북아와 관련된 포괄적인 투쟁의 주요의제가 사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중국과의 관계의 심화는 주한미군 주둔의 효과와 의미를 상실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지만 주한미군의 철수가 생각처럼 한반도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 않게 될 것이다. 이는 변화하는 세계자본주의의 관계 망으로 편입되고 포획되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스스로를 향해있는 '기만' 일반적으로는 편하게 ‘기만적’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해서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기만’은 우리들 스스로를 향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투쟁’을 위해서 우리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사드투쟁의 전략적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가 이전의 정부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해야 하고, 스스로도 그렇다고 고집하며 자기최면을 걸어야 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솝우화의 ‘포도와 여우’의 이야기와 동일한 것일 뿐이다. 투쟁에서 평화와 같은 거대 담론과 의제가 사라지는 것은 거시적 투쟁을 하는 이들에게는 두려운 일이다. 권력의 성격에 대한 판단은 오로지 대중들의 몫이다. 그것은 옳다 그르다와 같은 범주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들 스스로가 책임질 문제라는 의미이다. 많은 이들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혼자만 그렇다고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고립된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다른 이들이 가지지 못한 진리의 기준을 독점하고 그것에 의해 판단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민주적 삶을 위한 예민한 감각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다른 이들과 동떨어진 진리에 대한 감각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한 것이다. 이전의 정부는 전제군주적인 성격을 보여주었다. 강압적 방식으로 권력관계들을 유지시키려고 하였다. 결국 이런 것들이 사단이 나서 촛불집회가 일어난 것이고 탄핵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면에서 투쟁은 단순했다. 투쟁할 용기와 계기, 방식의 문제이기는 했지만 고도의 지능적인 판단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서는 푸코가 말하던 ‘자율권력’과 같은 것들을 고민해야만 하는 지점에 맞닥트려 있다. 현상적 폭력과 강제는 사라지고 미시적 구조의 영역으로 포획되는 권력관계에 맞닥트리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중국과의 교역확대, 러시아와의 유라시아철도건설, 가스관공사, 북한과의 화해협력 등의 상황이 벌어지면서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남아있으면서 ‘국가의 발전’과 같은 ‘희망찬 청사진’에 다른 문제들이 덮여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앞으로는 소수자의 문제들은 더욱 가려지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게 될 것이다. 사드라는 주요고리의 소멸 사드가 만들어내고 있던 효과의 상실은 이것을 소위 ‘주요고리’로 하여 한반도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던 다양한 투쟁들의 근거 또한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사드투쟁이 목적하던 동북아 긴장의 해소와 평화의 문제들은 중국과 한국정부의 전략적 대응과 변화를 통해 다른 의미들로 전환되어 버렸다. 강도의 손에 들려있던 망치가 이전의 세상을 망치로 부수고 창조하는 민주주의자의 손으로 까지 넘어간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 이익을 누리려는 목수의 손으로 넘어간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성명에서 언급된 사드운용의 범위를 넘어갈 때, 미국의 압력에 의해 박근혜 정부와 같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포기될 때 여전히 새로운 긴장형성의 문제들은 있지만 적어도 현재의 흐름을 뒤집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사드철회투쟁을 통한 세계평화와 같은 거대담론 투쟁의 의제가 소멸되고 있음은 분명해 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에 대한 우려와 걱정은 사드를 통해 한반도의 ‘주요모순’을 해결하려고 하던 통속적 맑스주의자들의 문제일 뿐이다. 즉 사드를 모순의 ‘주요고리’로 생각하던 이들에게 국한된 문제라는 점이다. 성주의 주민들에게는 여전히 사드가 가져온 삶의 문제와 안전, 건강의 문제가 남아있다. 그리고 사드에 인접한 이들에게 이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사드투쟁은 이제 밀양이나 청도의 송전탑투쟁과 같이 실질적 의미에서의 주요하게는 지역성을 통하여 모든 이들의 삶의 문제와 연결되게 되었다. 사라진 근거들을 가지고 거대의제를 담아낼 방법은 없다. 그렇게 진행하고자 한다면 고립과 친해지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지금까지 매우 친밀했던 것 이기는 할 것이다. 관성은 어느 정도 지속되겠지만 고립을 싫어하는 이들은 성주를 떠나갈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들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본래 그런 자들이기 때문이다. 섭섭하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오해일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선한(?)목적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선함과 동일한 것으로 오해해 왔다는 점이다. 이제 ‘고리끼의 어머니’가 되어버린 ‘벌거벗은 인간’의 죽음을 목격해야 하는 시간 또한 다가오고 있다. 제국주의의 환상, MD체계 MD체계란 ‘기표(signifiant)’로서 의미를 방출한다. 즉 은행의 청원경찰이 입고 있는 제복의 의미이다. “지키고 있으니 침입하지 말라.”, “당신의 돈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는 신호를 방출하는 것이다. MD체계가 지키는 은행은 바로 월스트리트, 세계자본주의이다. 물론 이것은 라캉이 이야기하던 ‘기표의 물질성’이라는 의미로서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기표외적 체계의 물리적 힘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체계들이 그 물질성을 통해 은행에 총을 들고 들어오는 강도는 막을지 모르겠지만 옆에 개업한 다른 은행의 영업능력과 전략을 차단하는 데는 한계를 가진다. 물론 지금까지 유엔의 동맹체계, 미국의 군사시스템이 그동안 세계자본주의를 위해 월스트리트의 안전을 지켜온 것은 분명하다. 물리력에 기반 한 침략과 수탈, 파괴를 통한 자기파괴의 자본주의, 즉 제국주의(imperialism)시대는 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유엔체제로 상징되는 제국(empire)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체제는 자본주의 간의 전쟁을 통한 경쟁보다는 타협과 협상을 통한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제국주의와는 분명히 다르다. 물론 이 체제도 수많은 전쟁을 행하였다. 하지만 대전의 종결 이후 전쟁은 자본주의와 그 외부 사이에서 일어났다. 2차 대전 이후 일어난 전쟁은 거의 월남, 중동과 같은 비자본주의 체제와의 전쟁이며 자본주의 내부의 전쟁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안토니오 네그리나 마이클 하트의 생각처럼 ‘제국’의 내부로 세계가 자본주의로 모두 통합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제국’의 외부도 분명히 존재하며 한 개의 덩어리라고 하기 보다는 몇 개의 블록으로 구획되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 중 하나의 자본주의 블록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 중심의 아시아 경제블록을 MD체계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한다는 것은 효과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자신들의 방어력을 신뢰하도록 하고 강력한 물리력의 소유에 대한 신호는 변화하는 ‘제국’의 시대에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한국이 미국의 충실한 ‘식민지’라면 지금의 체제를 벗어날 방법은 없겠지만 한국의 기업과 금융들이 월가의 고객들이라면 이제 그들은 좀 더 친절하고 많은 이익을 만들어주는 서비스를 통해 고객을 끌어들여야만 할 것이다. 제국주의의 존재에 대한 환상은 국가에게도 있지만 투쟁의 주체인 우리들에게도 존재한다. 거시적 투쟁에서 미시적 투쟁과 삶으로 세상은 미시적 권력관계들이 그물망처럼 형성된 자본주의의 포획시스템을 통해 지배된다. 이전처럼 하나의 주요고리를 잡아 올리면 모든 문제가 풀려나가는 일은 없다. 어쩌면 그런 것은 이전에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드를 통해 동북아의 긴장을 형성시키고자 했던 미국의 전략은 무력화되고 있다. 사드의 배치는 박근혜 정부와 미국과 관계 속에 놓이게 되면서 분명 전쟁의 위기를 만드는 요소로 자리 잡았지만 그것이 한·중 간 관계의 변화에 따라 같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시기, 그리고 일정정도 관성이 유지되는 시점에서 사드가 평화의 의제를 던졌고 배치에 반대하는 투쟁은 반전(反戰)의 의미를 가졌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의미들이 소멸되고 있는 것이다. 거시적 문제에서 미시적인 것들로 전환된 것이다. 오히려 전자파문제나 미군부대에 의한 주민피해, 이질적인 것들의 침입에 의한 불안 등이 주요한 문제들이 되어버렸다. 보이지 않는 것들, 들리지 않는 것들, 소리 없는 것들을 찾아내고 그것들과 연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수자들의 연대, 미시적인 것들 사이의 접속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세상의 투쟁에 귀를 기울이며 작은 소리를 들어내는 능력을 요구하는 것들이다. 이미 우리들은 오랜 투쟁을 통해 이런 감각들을 만들어 왔다. 우리들의 투쟁 또한 다른 이들의 기억에서 조금씩 사라져 가면서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소리를 듣고 보는 이들이 또한 있다. 또한 그리고 우리들은 소리를 변환시키고 양태를 바꾸는 능력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게 다양하게 성주의 토양 속으로 주민들의 삶의 영역 안으로 섞여 들어가야 한다. 평화와 반전의 거시적인 구호들을 앞세워 우리들은 성주주민들의 생활과 삶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외면해 온 것들도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들의 거대한 의제를 통해 모든 투쟁을 사드투쟁 내부로 포획하려는 알지 못할 행위들 또한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작고 소소한 많은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우리의 투쟁을 전개해야 할 지점에 이른 것 같다. 우리의 투쟁이 작아지면서 다른 투쟁과 동등함을 느껴가는 겸손함을 가질 수 있는 시점이 오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작아지고 왜소해 지는 것이 아니라 동동한 연대 속에서 더 많은 것들과 관계를 이루는 신체가 되어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더욱 확장되는 투쟁의 힘을 의미한다. ‘투쟁의 전략적 전환’과 같은 거창한 말들을 사용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변화하고 있는 상황을 진솔하게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그로부터 투쟁을 생각하고, 준비하고, 만들어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 지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출발하자.
월, 2017/11/0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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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7/12/21-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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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그 날(162) 하루 종일 비가 왔다. 촛불집회 때는 소나기가 내렸다. 농기계 시위를 했다. 트랙터 30대와 트럭 50대가 성주읍, 초전면, 소성리 세 곳에 나누어 집결했다. 13:00 평화나비광장에서 출정식을 하고 농기계를 앞세워 행진을 시작하자, 경찰 1천5백 명이 동원되어 막았다. 성주읍에서 대치하다 해산하고, 초전면에서 대치하다 해산했다. 16:30 5백여 명이 소성리에서 “사드배치 철회 평화대회”를 개최했다. 성주와 김천은 물론 제주, 광주, 전남, 부산, 울산, 대구, 경북, 충청, 서울, 경남, 경기 등 전국 각지에서 먼 길을 마다않고 평화버스를 타고 왔다. 소성리 할머니들이 동지 팥죽을 끓였다. 경찰과 대치하다 팥죽 다 끓었다는 말에 다들 되돌아와 팥죽을 먹었다. 언론에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졌으니 목적을 달성했다. 우리는 평화적으로 싸웠고, 경찰은 어이없어 했다. 우리는 저들이 원하는 대로 싸우지 않았다. 11:10 황교안 총리 뺑소니 사건 민사재판(이민수)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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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7/12/21-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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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대한 좌절의 모습에서 그것이 공격이건 아니면 존재의 확인이건 흔히 내부를 향하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헤겔은 인정투쟁이라는 것을 통해 이런 인간의 존재상태를 이야기한다. 좌절된 ‘자기의식’은 내부를 향하게 되며 차단된 ‘외적존재’, ‘외적현실’에 대해서는 포기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을 헤겔은 ‘금욕주의’라고 부른다. . 세상에 던져진 실존으로서 피투(被投)적 존재가 그 현실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키는 기투(企投)적 존재방식의 좌절을 통해 맞이하는 ‘금욕주의’, 그것은 내부를 향하지만 또렷한 ‘자기의식’을 형성하기에 주인의 의식처럼 보여 진다. 하지만 그것은 좌절, 외부세계에 대한 금욕, 외적 현실에 대한 부정, 회피와 포기를 통해 만들어진 인정이기에 사실은 노예의 인정일 뿐이다. 즉 주인에 의해 인정된 것이 아니라 노예적 의식에 의해 인정된 것일 뿐이기에 헤겔은 ‘소외’되었다고 표현한다. . 좌절된 외부, 이로부터 생겨나는 불안, 흔히 이것을 물리칠 방법이 외부세계에 대한 무관심과 절제를 통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에 대한 인정, 즉 존재감의 근거가 내부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을 경계해야한다. 사드에 대해 점점 냉정해지는 외적인 세상과 단절하면서 내부에 대한 비난과 그 존재에 대한 공격을 통해 근거를 만들어내는 방식이야 말로 비참한 노예적 존재방식일 뿐이다. . 많은 경우 외부로 표현되는 과격한 언사는 ‘금욕주의’와 쌍을 이룬다. 그런 언어적 표현들이야 말로 좌절된 현실로부터 회피하는 모습을 감추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언어의 투쟁들에 비해 현실의 투쟁은 어림없이 빈곤할 뿐이다. 현실의 투쟁이 충분하다면 언어가 격렬할 이유는 없다. . 좌절을 통해 내부를 향하는 자기의식의 공격성은 파괴적이다. 내부의 적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대한 공격을 통해 외부의 적을 대체하는 방식은 모두가 피해야할 것들이다. 내부의 적을 향한 증오와 분노를 통해 투쟁의 정당성에 대한 근거로 삼는 행위는 노예적 자기의식의 표현이다. . 쉽지 않지만 새해에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힘을 북돋아주고, 격려하고, 상대의 못남보다는 잘남을 칭송하고 오히려 그 잘남을 딛고 일어나는 스스로 더 잘나고 위대한 존재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 존재감의 확인은 외부의 대중(multude)들과 함께하는, 연기(緣起)되어 있는 존재의 확인을 의미한다. 지금과 같은 때 일수록 외부와의 연결을 더욱 강화하고 확대해야 한다. 그것이 고립을 막는 방법이며 자기를 확장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단순히 투쟁의 순수함과 강고함만을 고집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강기’, ‘퇴조기’라고 부르는 언어적 표현에는 투쟁의 ‘숭고주의’가 이미 내포되어있다. 그 순수함과 순결함을 변절시켜야 하기에 퇴조 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은 투쟁을 대중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것은 투쟁의 순결함을 던져버리고 대중의 낮은 심연으로 내려앉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시기에 우리의 생명을 강화시키는 것이며 삶의 기쁨을 확장하는 방법이다. . 투쟁은 퇴조하지 않으며 결코 소강상태를 맞이하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의 투쟁이 어느 바다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가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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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8/01/03-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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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그 날 (183) 주민 16명이 김천, 원불교와 함께 민주당 당사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저녁이 되자, 7명만 농성장에 남고 돌아왔다. 성주촛불투쟁이 전북 부안 방폐장 반대 투쟁이 기록한 연속 183일간의 투쟁을 오늘로서 넘어섰다. 성주촛불투쟁의 기록이 하나 더 추가됐다. 김수상 시인이 사드배치철회 성주촛불투쟁 200일 기념 시집, “성주가 평화다”에 대하여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한 달 전쯤이다.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의 김충환 공동위원장이 평화나비광장 난로에 슬며시 오시더니 “현장에서 낭송한 시들을 시집으로 묶으면 어떻겠어요?”하고 제안을 하셨다. ‘기록은 또 다른 투쟁이다’는 생각에 그날 이후로 대구경북작가회의와 성주문학회 회원들이 낭송한 시를 모으고 청탁도 드렸다. 대구경북작가회의와 성주문학회의 시인들이 많은 시들을 보내주셔서 행복했다. 다 실으려니 200여 쪽이 넘는 분량이라서, 안타깝지만 이번 시집에는 현장에서 낭송된 시들만을 게재하기로 했다. 뜨거운 참여로 원고를 보내주신 대경작가회의와 성주문학회 회원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부득이 이번 시집에 실리지 못한 시들은 <작가정신>에 게재하기로 했고, 또 다음 시집을 기약하기로 한다. 성주의 촛불은 이렇게 서사를 쌓아간다. 농담 같은 얘기를 하자면, 성주 촛불에 있다가 다른 촛불에 가면 조금 싱겁다. 성주 촛불은 이재동 사회자의 말처럼 “질기고, 재미있고, 건강”하다. 시집에는 별고을 촛불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촛불 영웅들도 대거 등장한다. 김충환 위원장의 발문도 명문이고 투쟁위의 결의문도 뜨거운 문장이다.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출판을 맡아주신 한티재의 오은지 대표님과 변홍철 편집장님, 그리고 불평 한마디 없이 그 어려운 원고 정리를 도맡아서 감당해주신 성주문학회의 박덕희 총무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우리는 별에 갈 수는 없지만 별을 향해 갈 수는 있다. 성주의 촛불에서 평화의 푸른 촛농이 뚝뚝 듣는다. 이 시집은 설날에 평화나비광장에서 배포된다. 많이 사랑해주셨으면 좋겠다. 14:00 제6차 소성리 수요집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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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8/01/1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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