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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위원회 활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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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위원회 활동소식

익명 (미확인) | 화, 2015/08/11- 13:55

통일위원회 활동소식

#. 감동의 문제작, “불안한 외출” 민변 상영회 

지난 7월 23일 저녁, 하주희 변호사님이 민변 대회의실에서 눈이 빨갛게 충혈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과연, 누가 그녀를 울린 것일까요?
바로 통일위 주관 영화 “불안한 외출” 민변 상영회에 등장하는 주인공 윤기진-황선부부와 그들의 두 딸 민이와 겨레 때문이었지요…
영화 ‘불안한 외출’은 1999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장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0여 년 간의 수배생활과 5년 동안의 감옥 생활을 해야 했던 한 청년과 그 가족들의 삶을 다룬 다큐영화인데요, 수배 중에 결혼 해 두 딸을 낳았지만 한 번도 딸들과 같이 살아보지 못했던 아빠가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살면서 겪게 되는 일상을 담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저 매일 매일 반복되는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이 이들 가족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고 꿈같은 일상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자꾸 묵직하게 만들었지요…
특히 출소 하루 전 감옥에서 쓴 편지를 이유로 검찰은 다시 그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하고, 출소와 함께 재판이 시작되고, 1년만에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요,,,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한 개인과 그 가족구성원들이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깊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통일위원회 설창일, 이광철 변호사님은 영화 속 주인공들의 변호인으로 지금까지도 활약을 하고 계신데요, 그래서인지 영화 후 이어진 간담회와 뒤풀이에서도 영화의 진한 여운이 늦도록 이어졌답니다.^^

통일1

통일2

#. “백두산으로 찾아가자, 우리들의 백두산으로!”

8월 21일(금) 부터~8월 24일(월)까지 3박 4일동안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으로 제3회 백두산 통일기행을 떠납니다.

통일위원회 백두산 통일기행은 1997년 1회 통일기행에 이어 지난 2013년 16만에 두 번 째 백두산 통일기행을 진행하였고, 올해로 3회 통일기행을 맞이하게 되었는데요, 아무쪼록 이번 백두산 통일기행이 막혀있는 남북관계에 작은 통일의 물꼬가 되길 바라봅니다.

백두산 통일기행 참가단은 통일위 꽃미남 7인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원조 꽃미남 천낙붕 변호사님과 그 계보를 잇는 설창일, 김용민, 양승봉, 이광철, 양창영 변호사님이 함께 하시고, 통일위원회 신입회원 서중희 변호사님은 통일위 점심모임에서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말에 감명을 받아 이번 백두산 기행을 결심하게 되었답니다.

그 7인방이 들려주는 대망의 백두산 여행기는 다음 뉴스레터를 기대해 주시구요, 앞으로 통일위원회는 백두산 뿐만 아니라 분단의 역사를 가진 독일 등 세계 곳곳을 누비며 통일기행의 역사를 이어갈 야심찬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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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신의 동아일보 기자가 들려주는 통일이야기”

통일위원회에서는 광복 70돌을 맞이하여 이번 8월 월례회에 아주 특별한 분을 모시려고 합니다.
김일성 종합대학교를 졸업하고 2002년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북한 관련 세계 최다 방문 사이트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를 운영하고 있는 주성하 기자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마침 지난 5월 민변 공부모임에서도 주성하 기자가 지은 『남쪽에서 보낸 편지』를 함께 읽으며 북한 주민의 눈으로 바라 본 남과 북의 실상을 통해 다양한 생각과 토론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특히 객관적인 북한전문가로 평가되는 주성하 기자의 강연은 최근의 북한상황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전하면서 향후 남북관계의 전망과 방향을 제시하는 시간이 되어줄 거라 기대되는데요, 민변 역사상 처음으로 동아일보 기자가 민변에서 강연하는 이색(?)적인 자리에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대합니다.^^

통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생
김일성 종합대학 졸업
2002년 남한 입국
2003년 동아일보 공채 입사
2015년 현재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북한전문기자)로 활동
저서 :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주성하기자의 북한 바로보기》
《외국특파원들이 본 두 개의 코리아(번역) 《세계의 명문 직업학교를 가다》
《김정은의 북한 어디로 가나》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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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전 통일부장관 초청강연 후기

 

- 권오훈 회원

 

6월 25일 열린 민변 6월 월례회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초청강연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민변통일위원회에서 주최한 이번 강연에서는 6. 15. 선언 15주년을 맞이하여 남북 관계의 현황과 과제에 대한 통일 문제 전문가 정세현 전 장관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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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통일부 장관은 1993년 문민정부 당시 대통령비서실 통일비서관, 1998년 국민의 정부 당시 통일부 차관, 2002년 참여 정부 당시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북한과의 장관급 회담 등 북한 문제에 관한 주요 실무를 직접 담당한 바 있습니다. 이번 강연에서는 장관급 회담 당시 남북 고위급 인사들의 발언 내용을 비롯하여 공동 선언에 대한 협상 과정 등 고위급 회담 당시의 뒷이야기들, 나아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에 대한 향후 예측 등을 정세현 전 장관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3명의 대통령이 진행한 통일 정책을 모두 수행한 정세현 전 장관은 통일 정책에 있어서는 김영삼 대통령 당시의 정책이나,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당시의 정책이 큰 차이가 없으며, 바람직한 통일 정책은 결국 북한과의 평화적인 대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 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통일 정책의 핵심은 모두 6. 15. 선언에 담겨 있으므로, 진보나 보수를 불문하고 6. 15. 선언의 이행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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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통일 정책은 단순히 한반도에 있는 남북한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 열강들의 치열한 정치, 외교적 대립 안에서 이해되고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국은 현재 미국과 G2를 형성하려 하고 있으며, 군사, 경제적으로 중국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로도 외연을 넓히려 하기 때문에, 중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북한의 문제를 쉽사리 미국 및 일본 등에 넘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따라서 남한도 중국, 미국 나아가 러시아, 일본 등 주변 강국들과의 외교적 조율을 통해 통일 정책을 수립해야 하며, 이러한 상황을 배제하다가는 통일 문제에서 주체성을 잃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벌써 6. 15. 선언 15주년을 맞이했지만 통일에 대한 논의는 지지부진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한반도 정세는 남북한 통일을 제외하고 논할 수가 없는 만큼, 통일에 대한 한국 정부, 나아가 국내 전문가들의 주체적인 참여가 중요하다는 정세현 전 장관의 강연을 통해, 남북 문제에 대해 다시금 관심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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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변 통일위원회에서는 남북법제팀, 국가보안법 연구모임 등 통일 관련 활동을 통해 북한 및 남한의 관련 제도를 이해하고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통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회원 분들의 많음 참여 부탁 드립니다.

금, 2015/07/10-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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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변호단 2차 워크숍

- 강제동원, 홋카이도를 가다

 

 2015년 8월 그 해, 홋카이도의 여름은 뜨거웠다.

 

 <첫째 여정>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한 서린 홋카이도, 아직도 서러운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 이선경

 

 나에게 있어 홋카이도라는 지역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오고 온천시설이 잘 되어 있는, 겨울 관광지로 좋은 장소 정도의 의미만 있었다.

 

그 홋카이도에 강제징용되어 희생된 분들의 유골이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남아있다는 소식도 이번 워크숍 준비 모임에서 처음 알게 되었을 정도로 나는 홋카이도와 우리 민족의 과거사에 대해 무지하고 또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태로 비행기에 올랐던 나에게, 창 밖에 펼쳐진 삿포로의 풍경은 다소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반듯하게 정리된 논과 밭 사이에 빨갛고 파란색 지붕을 가진 집들이 늘어서 있는 한적한 농촌 풍경은, 그곳이 그 끔찍한 강제징용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게 만들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에 오르자, 이번 워크숍의 가이드 김영환 선생님이 버스가 이동하는 동안 간단히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유골반환 운동의 경과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1997년부터 시작하여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여러 동아시아 지역의 학자와 시민단체가 모여 10여 차례의 학술대회를 거치면서 공동으로 유골발굴을 해왔고, 이는 궁극적으로 동아시아 평화를 모색하기 위한 활동들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방문할 장소들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현장들이라고 하였다.

16일  삿포로별원 - 강제징용 간담회

 

버스로 한참을 달려 101구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본원사 삿포로 별원 납골당에 들어서니 가장 안쪽 구석에 초라한 유골함 3개가 놓여있었다. 본래 일본의 장례절차에 따르면 한 사람의 유골이 하나의 유골함에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삿포로 별원에 101명의 유골이 있으면 총 101개의 유골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1997년도에, 일제시대 강제징용 노동자들에게 노동을 시켰던 지자키 공업의 요청에 따라 삿포로 별원은 무연고 유골이라는 이유로 유골을 모두 합골해 버렸고, 그 때문에 현재 3개의 유골함 안에 101명의 유골이 섞여있다고 하였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최소한의 예우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서글픈 상황들이 담담히 다가왔다. 부디 고국으로 돌아가서 햇볕 잘 드는 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묵념을 하고 돌아섰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2003년 유골 발굴 당시 발굴된 유골이 강제징용 희생자 유골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근거 중 하나가 유골의 발을 감싸고 있던 발싸개 때문이었다는 것인데, 신발이 아닌 천으로 된 발싸개를 신고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강제징용 희생자의 유골임을 확인하였다고 하니, 당시 강제징용 희생자들에 대한 처우가 얼마나 열악하였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16일  삿포로별원 - 납골당 2

 

반가운 소식은 현재까지 홋카이도에 남아있는 미봉환 유골 150구 중(삿포로 별원과 사루후쓰, 비바이 탄광 등에 흩어져있다고 한다) 120구가 올해 9월 한국으로 봉환된다고 한다. 무엇보다 올해 유골봉환은 9. 11.부터 9. 20.까지 9박 10일 동안 진행되는데, 당시 강제징용자들이 끌려왔던 3,500km를 되짚어 서울까지 가는 여정이라고 하였다.

 

이번 유골봉환은 역사적인 의미가 큰 행사이므로 당연히 한국과 일본 양국 정부가 주최가 되어서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정부와 전혀 관계없이 순수 민간 차원에서만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2004. 12. 노무현 정부 때 고이즈미 총리에게 유골봉환을 요청한 이래 정부차원에서 유골봉환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나, 이명박 정부로 바뀌면서 정부가 유골봉환에 의지를 보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현재에는 부득이 순수 민간 차원에서만 유골봉환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였다.

 

물론 유골봉환의 최대 걸림돌은 강제징용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정부의 태도라고 하겠다.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이 일본 정부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입증할 수많은 자료 앞에서도 끝내, 강제징용은 민간기업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므로 일본 정부는 유골봉환을 비롯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일본 정부만을 탓하고 있을 수 있는지… 힘이 없어 자국민이 이 혹한의 땅에 강제로 끌려와 노예처럼 일하는 것도 막아주지 못했던 우리나라는,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서도 그 유골을 봉환해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 국가의 존재이유일 것인데, 과연 우리 정부는 강제징용 희생자들을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둘째 여정>

차별은 조선인만의 몫이 아니었다. 홋카이도의 자연인 아이누를 만나다.

 

- 성춘일

 

8월 17일, 홋카이도 이튿날이 밝았다. 워크숍의 설렘과 고단함을 채 풀기도 전에 오타루 외곽, 해안가에 위치한 청어 잡이 박물관에서 둘째 여정을 시작했다. 가파른 언덕을 굽이굽이 두어 번 올라가자 오래된 낡은 집 한 채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어 잡이 어부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집을 박물관으로 꾸며서인지 박물관 내부와 외부에 전시된 물건은 화려하거나 형식에 치우치기 보다는 100여년 전 어부들의 소박한 삶의 모습을 들려주고 있었다. 박물관 옆에는 해안가 절벽으로 이어지는 아담한 뜰이 펼쳐져 있고 바닷바람에 살랑거리는 풀밭 위, 녹슨 크고 작은 닻과 낡은 고기잡이 도구들이 어부들의 고단한 일상을 전하고 있었다.

 

연세가 제법 있어 보이는 부부가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입장표를 사서 신발을 벗고 건물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는데 두터운 가죽장갑과 눈 위에서 신는 신발이 이곳이 겨울왕국임을 실감하게 했다. 남자 성인용 지게, 여자 성인용 지게, 아이들이 메는 지게를 보니 이곳 주민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생계를 위해 청어 잡이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층에는 당시 주민들의 의상을 걸어 놓고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입어 볼 수 있도록 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아이누족인 가와무라 켄니치(아이누 이름 : 신리츠 에오리)씨가 운영하고 있는 아이누민속박물관에 도착했다. 켄니치씨는 아이누 전통복장 입고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 박물관은 켄니치씨의 조부가 만든 것으로, 일본 정부가 세운 학교에서 아이누 아이들의 교육을 맡길 수 없다며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했다가 현재는 켄니치 씨가 이어 받아 아이누의 역사, 전통, 풍습을 알리는 민속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아이누들의 배, 의상, 그릇부터 낚시, 사냥도구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켄니치씨는 아이누의 역사, 전통, 풍습 등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어머니’를 뜻하는 아이누의 ‘하루코노’라는 단어는 원래 식량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아버지’는 돈 버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한다. 가족의 호칭에 가족 구성원의 역할이 녹아 있어 신기했다.

17일  아이누민속박물관 1

 

아이누족은 일본 정부가 금지하기 전까지 연어잡이와 수렵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민족이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메이지유신 이후 홋카이도를 점령하더니 홋카이도 전체를 일본 정부의 관할 하에 두면서 아이누족들은 일정한 구역에서만 거주할 수 있도록 하고 아이누들의 생활수단이었던 연어잡이와 수렵을 금지했다.

 

일본 정부는 홋카이도를 다스리기 위해 일본 본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둔전병으로 근무하는 일본인에게 일정 면적의 홋카이도 땅을 나누어 주어 유인함). 아이누들이 농사를 지으면 홋카이도 땅을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으나,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는 아이누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모두 빼앗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는 아이누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아이누 전통의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금지했다. 또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누족들의 호적에는 출생지역(아이누 거주지역)을 별도로 표기한 결과, 아이누 거주 지역 출신들은 공직 진출을 금지당하거나 교육 기회가 제한되는 등 많은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출신 지역 표기제는 없어져 눈에 보이는 차별은 사라졌지만 보이지 않는 차별은 여전하다고 한다.

 

아이누 사람들은 몇 년 전 일본정부를 상대로 본래 자신들이 주인이었던 홋카이도를 돌려달라고 반환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다고 한다. 수렵민족인 아이누들에게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자연을 소유한다는 인식이 희박했고, 문자도 없었던 탓에 땅에 대한 소유관계를 표시한 공부 자체가 없었다. 고도 문명의 발명품인 글자로 표기된 문서를 가지고 다투는 법적 소송에서 이들의 패배는 어쩌면 예정된 결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억센 모기마저도 정겨워진 숲 속 고겐사에서의 깊은 밤

17일  고겐사2

 

점심을 해결한 후, 북쪽으로 한참을 달려 슈마리나이 댐 부근에 위치한 고겐사에 도착했다. 고겐사는 현재 ‘동아시아 공동워크숍’의 개최 장소이자 홋카이도 역사교육의 학습장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고겐사가 평화교류와 역사교육의 장소로 변모한 것은 1976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씨가 고겐사 본당에서 죽은 이들의 이름, 나이, 사망 연원일이 적힌 다량의 위패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위패에는 조선인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승려로 활동하면서 위패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죽음이 슈마리나이 댐 공사와 철도 공사 도중 희생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학습장 내부 각 벽에는 유골 발굴 작업과 유골 반환을 위한 각종 활동이 담긴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현재 밝혀진 바에 의하면 슈마리나이 댐 공사와 철도 공사로 희생된 이는 210여명 정도인데 그 중 40여명이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저녁을 먹기 전 슈마리나이 댐을 둘러보기로 했다. 어둠이 조금씩 밀려오는 시간, 일본 최대의 인공호수인 슈마리나이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여름을 잊게 만들 정도로 제법 매서웠다. 거대한 댐의 수문이 물길을 가로막고 서 있고 1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 탑이 수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탑은 슈마리나이 댐 공사 도중 사망한 수백 명의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세운 탑인데, 정작 탑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희생자들의 이름 대신 ‘순직자 위령탑’이라는 이름과 댐을 건설했던 우류전력 사장 아다치 다다시 이름만이 새겨져 있다. 슈마리나이 댐 공사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자 이 지역 사람들이 우류전력에 이들을 위로하는 위령비라도 세워 줄 것을 요구했는데, 위령비 세울 돈 조차 아까웠던 아다치 다다시는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건설했던 교각의 기둥을 옮겨와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일본 각지는 물론 우리나라와 중국에서까지 강제로 끌려와 새벽 4시부터 밤 9시까지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죽어간 사람들에게 위령비 세울 돈조차 아까워했으니 이들이 당시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대했을지 상상이 되었다. 슈마리나이 댐 공사의 참혹함은 이 공사장 집단합숙소의 이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당시 사람들은 슈마리나이 댐 공사장 근처에 있는 집단합숙소를 어항에 들어간 문어가 다시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이 합숙소에 잡혀 들어간 자는 살아서는 나올 수 없다는 의미로 ‘타코베야(문어방)’라고 불렀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 타코베야는 죽음과 공포의 대명사였다고 한다.

 

저녁식사 후, 고겐사에서 위패가 발견된 후 위패의 주인인 유골 발굴 작업과 한‧일 교류를 통해 수십년 동안 유골 봉환운동을 했던 오노데라 마사미(小野寺正巳)교수님과 야마자키 다다시(山崎忠司) 선생님으로부터 슈마리나이 공사 현장의 참혹함은 물론 유골 봉환 운동에서의 에피소드 등 유골 봉환활동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밤이 깊도록 계속 이어졌다.

17일  변호단회의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힘든 몸을 이끌고 고겐사에 도착한 직후부터 슈마리나이 댐, 조선인 유골 매장지까지 우리를 안내해 주신 오노데라 교수님, 일흔 셋의 연세에도 유골봉환 운동을 계속하고 계신 야마자키 다다시(山崎忠司) 선생님, 누가 알아주어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기에 묵묵히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의 활동을 이어가고 두 분의 모습은 마음에 큰 울림을 남겼다. 밤이 깊어가는 것도 잊고 한 잔 한 잔, 비워지는 술잔은 늘어만 간다. 그리고 우리들의 추억도.

 

 

<셋째 여정>

새하얀 메밀밭 한 가운데서 굳은 도약을 외치다.

 

- 이동준

 

고겐사(光顯寺) 조릿대 묘표전시관에서의 숙박. 겨울이면 기온이 영하 41도까지 내려간다는 슈마리나이답게 새벽의 추위가 제법 매서웠다.

 

일본 남자들은 “매일 아침 나에게 된장찌개를 끓여줘요”라고 청혼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어디선가 진짜 일본된장국 냄새가 발길을 이끌었다. 모두들 한솥밥을 떠서 둘러앉아 정겹게 식사하면서 돈독한 정을 나누었다.

 

고겐사를 떠나면서 우리는 9월 본국 봉환 예정인 희생자들의 유골을 살피고 위령의 의미를 담아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70여년의 긴 세월 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유골로 남아있는 희생자들의 원혼을 떠올리니 가슴 한 켠이 아파왔다.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가 편히 잠드실 수 있기를 기원하며 다음 달에 돌아오시는 길 또한 밝혀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18일 아침  유골

 

버스를 달려 슈마리나이(朱鞠內) 호수가에 도착하였다. 동양 최대의 인공호가 보여주는 절경에 감탄사가 나왔지만 잔뜩 찌푸린 하늘과 세찬 물살이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슬픔을 담은 듯 느껴져서 이내 숙연해졌다.

 

삿포로 시로 이동하는 길에는 광활한 메밀밭이 계속되었다(농업은 홋카이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일본의 총 경작 가능한 땅의 4분의 1이 홋카이도에 있다고 한다). 우리는 백은의 언덕이라 명명된 사진촬영지 및 시마다야란 회사의 계약 농장터에서 단체사진을 남겼다. 새하얗게 펼쳐진 메밀밭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한편으로 그들이 가진 풍요로움에 대해 부러운 마음 역시 들었다.

18일  메밀밭2

 

이어서 방문하게 된 곳은 다카도마리의 한 공동묘지였다. 슈마리나이 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후카가와시 다카도마리 공동묘지에는 2명의 조선인을 포함한 5명의 피해자가 묻혀 있었고 그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들 외에도 더 많은 희생자들이 그 인근에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매장 추정지 위로 일반인들의 공동묘지가 들어서 있어 발굴 작업이 어렵다고 하여 몹시 안타까웠다.

 

이어서 이치조지(一乘寺)와 부설 다도시(多度志) 보육원을 방문하였다. 보육원은 이치조지의 주지스님이 서양식 어린이집을 모티브로 하여 만든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모델이었는데, 서양식 종탑과 일본 특유의 견고하고 단정한 목재구조의 건물이 인상적이었고, 해맑은 아이들의 미소는 발길을 돌리기 어렵게 하였다. 벽면에는 매해 어린이들의 졸업 작품으로 공동 제작된다는 대형 판화가 걸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많이 인상적이었는지 보육원을 떠난 뒤에도 동심을 가득 담은 어린이들 특유의 그림체가 자꾸만 머리에 남았다.

 

강제징용이 이루어지던 시절엔 하루가 걸려도 당도하지 못하던 길을 이제는 반나절이면 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토록 우리의 문명은 그 외관(外觀)이 눈부시게 진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內面)은, 특히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는 한국도 일본도 야만(野蠻)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자꾸만 과거로 회기하려 하고 있다. 수십 년이 지나서도 계속 야만과 대치해야하는 작금의 현실에 맞서 우리는 계속해서 투쟁하고 마침내는 승리할 것을 다짐한다.

 

변호사는 단순히 “타인의 송사(訟事)”만을 대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대리하면서 몇 배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번 워크숍은 보고 듣고 느끼는 시간을 거쳐 우리가 힘이 되어드리고자 하는 그분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보고 듣고 느껴서 담은만큼 무거운 마음을 금할 길 없지만, 변호단이 “일시적인” 부침을 겪고 있는 지금, 단단히 심신을 다잡고 도약할 수 있게끔 해주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화, 2015/08/25-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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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법 실무교육 수강 후기

안지희 회원

 

변호사시험을 치르고 방황하던 어느 날 민변에서 노동법 실무교육을 실시한다는 공고를 보았습니다. 노동법 공부를 해야 하는 줄 어떻게 알고, 할 일 없는지는 어떻게 알고 이런 찰떡같은 기획을 마련하셨는지. 감탄하며 회원신청서를 다운받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교육도 끝나버렸습니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밤에는 노동법 실무교육 덕분에 외롭지 않았는데, 아무 일정이 없는 화요일 저녁이 왠지 쓸쓸합니다.

1강부터 10강까지 모든 강의가 각자 훌륭했는데, 어떻게 후기를 작성해야 하나 난감합니다. 변호사님들의 강의력이 훌륭해서, 경험담이 재미있어서, 강의 자료가 좋아서…등등 강의마다 워낙 특색이 있어 하나씩 언급하기에는 자칫 길어질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강의를 들으면서 좋았던 점들을 편하게 털어놓음으로써, 강의를 준비해주신 변호사님들과 간사님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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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2017년 3월은 앞으로 어떤 법조인으로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막연하게 공익변호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구체화하고, 그동안 수험공부에 치여 미뤄두었던 노동문제를 나름대로 깊이 고민해보고 싶었습니다. 노동법 실무교육은 이런 시기에 필요하고도 유익한 강의였습니다. 수업 중간 중간에 선배 변호사님들께서 갖고 계신 문제의식과 고민들이 저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더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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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 현장에 가보니 비로소 서면을 제대로 쓸 수 있었다는 말씀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의뢰인이 하는 말만 듣고 서면을 작성하기 보다는, 직접 의뢰인이 일하는 곳에 가서 의뢰인이 어떤 일을 하는지 살펴보면 변론준비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록에 답이 있다.’ 시험을 볼 때는 그러했더라도 변호사가 되고나면 의뢰인과 함께 현장에도 가볼 수 있어야겠다고. 그렇게 조금 더 따듯하고 실력 있는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또 어떤 주장을 펼치기 전에 왜 그래야만 하는지 생각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조언도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철저하게 노동자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다가 빠지게 될 수 있는 오류를 항상 경계하라는 취지의 말씀이었습니다. 노동법을 공부하다가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고 상처받을 때가 있는데, 거기에서 나아가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연습이 부족했다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태까지는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것들에 대해서, 이번 실무교육을 통해서 왜 그래야만 하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시간이 쌓여 언젠가는 저도 선배님들의 지혜를 닮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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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가입 후 처음 참석했던 탄핵 촛불집회부터, 최근에 참여했던 강북월례회까지. 여러 기회에 변호사님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시간이 즐거웠지만, 노동법 실무교육은 그중에서도 가장 깊게 변호사님들과 소통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2시간 동안 준비된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 선배 변호사님들의 후배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전달되었습니다. 교육과정에서 배운 것들 열심히 복습해서, 그동안 변호사님들께서 짊어지신 무거운 짐을 후배로서 조금이라도 함께 들어드리고 싶다고 한다면 감사한 마음이 표현될까요. 2017년 3월 노동법 실무교육을 들었던 서초의 따뜻한 봄. 항상 기억하겠습니다.

화, 2017/04/2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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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일 교수(고려대 행정학과, ‘국가는 내 돈을 어떻게 쓰는가’ 저자) 초청

특별 강연 후기

 

- 김종환 회원(변시 2회)

 

 

‘아이쿠!’

월례회 강연 후기 작성을 부탁 받았을 때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생각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집중을 했어야 하는데…’라는 후회도 들더군요.

그렇지만 많은 깨달음을 주고 문제의식을 일깨우는 강연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제 소감을 말씀 드려 보려고 합니다. 질문/토론까지 2시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짧은 지면에 모두 요약하는 것은 제 능력 밖의 일이어서 제가 흥미롭게 느꼈던 부분을 위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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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알려져 있듯, 산업구조가 고도화될수록 경제는 1차산업->2차산업->3차산업으로 그 중심이 이동하게 됩니다. 제조업 중심의 2차산업은 그 속성상 농어업과 같은 1차산업보다 생산성이 높기 때문에 2차산업 중심의 경제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2차산업이 생산성이 높다는 점은 기술이 발달할수록 2차산업은 더 적은 노동력으로도 같거나 더 많은 생산을 이룰 수 있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2차산업에서 생긴 잉여인력이 서비스업과 같은 3차산업으로 옮겨 가게 됩니다. 문제는 서비스업은 일반적으로 생산성 증가가 2차산업에 비하여 더디다는 점입니다. 서비스업의 낮은 생산성 증가는 임금을 인상할 여지가 적어지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결국, 많은 노동자들이 생산성이 낮아 임금이 낮은 서비스업에 종사하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는 1차산업->2차산업으로의 전환기(산업사회의 발전기)에는 생기지 않는데 이는 보통 2차산업의 생산성이 1차산업보다 높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소득도 증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3차산업이 중심이 되는 탈산업사회에서는 산업사회와 달리 근로빈곤(working poor)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요인은 제조업보다 서비스업에서 비정규직의 비중이 크다는 점이라고 합니다.(현대자동차의 정규직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과 맥도날드의 알바생을 자르는 것 중 어느 쪽이 쉬운지를 생각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 결과, 탈산업사회는 낮은 경제 성장률과 질 낮은 고용(높은 실업률)이라는 양대 경제 문제를 떠안게 됩니다. 여기에서 복지 제도 확충의 필요성이 생기게 됩니다. 산업사회에서는 복지제도가 노령, 질병, 실업에 대한 대비를 중심으로 마련되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워킹푸어가 대거 등장하게 되는 탈산업사회에서는 일하는 빈곤층을 위한 복지제도 강화가 중요해집니다. 특히 일하는 빈곤층과 관련하여 복지의 사각제도에 있는 청년층에 대한 복지 확대도 절실하다고 합니다. 복지제도의 강화는 복지인력 고용을 통해 사회 서비스 일자리를 창출하여 실업률을 낮추는 장점도 가지므로 일거양득의 효과도 가집니다.(이와 관련하여, 김태일 교수님은 국가가 아닌 가족이 보육, 간호 등의 책임을 떠맡는 일은 매우 한국적인 현상이라고 비판하셨습니다.)(저 역시, 최근 가장 고용 증가 속도가 빠른 부문이 사회복지 영역이라고 들은 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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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복지 강화를 위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해야 할 것인가? 교수님은 한국의 세율이 여전히 낮은(법인세뿐만 아니라 소득세도 마찬가지) 상황에서 복지 강화를 위하여 증세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보시는 입장이었습니다. 이와 관련, 교수님은 노무현 정권 말기에 흑자재정 상태에 이르렀다가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재정 적자가 커지고 있는데 이것이 복지 제도의 확충 때문이 아니라 이명박 정권의 감세정책이 주된 원인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셨습니다. 증세와 관련해서 토론 시간에 부자증세와 보편적 증세 중 어느 쪽이 올바른 방향인가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교수님은 부유층의 탈세를 막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는 있지만 이것만으로 복지제도 확충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므로 보편적 증세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표명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보시는 듯 했습니다.

 

강의를 듣고 지금의 저성장과 고실업이 범지구적 현상이고 피할 수 없는 트렌드라는 교수님의 지적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헬조선’이 아니라 ‘헬지구’라는 말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수님은 서비스업의 경우, 한 단위직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수가 적으므로 파편화된 노동자들이 조직화되기 어려워 노동조합의 힘이 약화되고 따라서 노동자의 권익이 위협을 받게 된다고 언급하셨는데 그렇다면 이 상황을 탈피하는 추동력은 어떤 세력에게 기대할 수 있을까? 전통적인 진보 운동의 방식으로 이 현실에 대처할 수 있을까? 저로서는 답을 찾기 어려운 많은 의문과 우려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런 상황일수록 ‘시혜’ 개념의 복지가 아닌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복지제도 강화가 필요하다는 교수님의 논지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세’에 대하여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많은 국민들에게 ‘내가 낸 세금이 나를 위해 쓰인다’는 신뢰를 통해 증세에 대한 동의를 얻어 낼 방법에 대한 고민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뒤풀이 자리에서도 논의가 이어져서 증세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매우 치밀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유익한 강연을 들을 기회를 주신 김태일 교수님, 조세재정팀장 조수진 변호사님 그리고 후기를 통해 강연 내용을 돌아 볼 기회를 주신 (처음에는 살짝 귀찮았습니다만 곧 반성했습니다^^) 이유진 간사님 및 사무처 다른 간사님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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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6/04/1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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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충청지부 활동기 “후문입니다.”

1. 느리지만 꾸준한 신입회원 증가

 대전충청지부는 본부나 다른 지부에 비하여 신입회원 증가속도가 매우 느리지만 그래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 역쉬 충청도에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천안에서 활동하고 계신 이문우 회원, 대전에서 활동하고 계신 김영배 회원, 청주에서 활동하고 계신 오진숙 회원께서 새로 가입해 주셨고, 특허청에서 근무하시는 전진희 회원께서는 지부 회원으로 소속 변경해 주셨습니다. 신입회원 분들 중에서 사랑이 싹트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다는 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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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충남대학교 총장 선거 관련 연대 활동

 교육부의 치졸한 압력으로 대학교 총장 선거가 간선제로 전환되는 분위기를 타고 지역의 대표적인 국립대학교인 충남대학교가 총장 선출 간선제 방침을 발표한 가운데, 충남대학교 교수협의회 및 민교협 회원들의 연대 요청으로 민변대전충청지부가 중심이 되어 제 시민단체와 연대하여 충남대학교 총장 선거 간선제 폐지 직선제 시행 촉구 기자회견을 개최하였습니다. 기자회견 후 지부장, 사무처장, 간사가 의기투합하여 곰탕에 낮술을 묵었다는 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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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부대표자회의 및 지부연합산행

 도심을 떠나 황톳길로 유명한 대전 계족산 주변에서 맑은 기운을 충전하시길 기원하며 지부대표자회의를 준비하고, 아울러 지부연합산행까지 주관하였습니다. 일정에 맞는 코스를 적절히 선택하고, 계족산성의 유래 등을 전 사무처장이신 장동환 회원께서 재미나게 설명해 주시고, 계족산성에 올라 함께 점심을 드시며 막걸리에 웃음꽃을 피우고, 여성 이주민들의 원만한 정착과 자립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다문화 식당 아임아시아에서 진한 뒤풀이까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사무처장인 문현웅 회원이 사비를 털어 정연순 부회장님 등께 그 유명한 성심당의 튀소를 뇌물로 안겼다는 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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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타 법률구조 및 연대활동

 성매매 여성들의 자활을 돕는 티움 자활센터 입소인을 대상으로 파산교육, 대전비정규근로자지원센터 상담원 대상 노동법 교육을 진행하였고, 한국타이어 정승기 해고노동자 복직 및 민주노조활동보장 공대위에 참여하였으며 사무처장인 문현웅 회원은 대전시 공익신고자보호조례제정을 위한 토론회에서 사회를 보고, 대전인권연대 주최 인권학교 마지막 강의를 맡아 “쫄지마 수사절차”라는 주제로 강의한 후 강의비를 몽땅 털어 뒤풀이 비용으로 썼다는 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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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민주사회를 위한 대전충청지부는 충청도의 후예답게 정문이 막히면 후문으로라도 진입할 수 있도록 의뭉스럽고도 끈질기게 저희 갈 길을 가겠다고 송년회에서 다짐하였다는 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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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5/12/2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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