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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의 흥행과 구미현 어머님의 가족사

영화 '암살'의 흥행과 구미현 어머님의 가족사

익명 (미확인) | 화, 2015/08/11- 21:21

이 이야기는 영화 <암살>의 '가상의 서사'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는 '현실의 역사'입니다.

 

밀양에 연대하는 이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만, 단장면 용회마을위 주민투쟁을 이끌어오신 구미현 어머님이 계십니다.

그 분을 아는 이들은 한결같이 그분의 헌신적인 활동과 반듯하고 온화한 인품에 존경하는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분에게는 무언가 그 세대 어르신들과는 조금 다른 이지적이고 또한 단아한 기품이 느껴집니다.

 

최근, 영화 <암살>이 1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미현 어머님의 조부이신 일우 구영필 선생(1891~1926)이 영화 <암살>의 밑그림이 되는 '의열단'의 실질적인 주도자이자 배후였으며, 친가와 외가 전원이 만주로 이주하여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기지건설에 바쳤으며, 끝내 김좌진과 신민부가 만주 영고탑 지역에서 벌인 횡포에 맞서다 끝내 암살되셨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일우 선생의 일가는 제 과오를 감추고자하는 김좌진 신민부 세력에 의해 '일제 밀정'이라는 끔찍한 모욕을 뒤집어쓰고 90년이 지난 지금까지 독립유공자 서훈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구미현 어머님의 부친 구수만 선생은 광주학생의거로부터 시작하여 오랜 시간동안 지하활동을 하셨고, 거듭된 구속과 끔찍한 고문 끝에 육신이 거의 망가져 불우한 여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구미현 사모님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삶의 안정을 되찾았으나, 집 바로 뒷산을 지나가는 초고압 송전탑 건설에 맞서는 '밀양송전탑' 투쟁에 참여하여 끔찍한 국가폭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제, 90년을 기다려온 역사적 진실이 조금씩 세상 앞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가슴아프고도 놀라운 이야기를 널리 알려주세요.

 

<한겨레21>이 광복절 특집으로 구미현 사모님 3대의 비극과 고통을 정면으로 다루었습니다.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4008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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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대책위입니다.

 

2014610, 당시 밀양 송전탑 4개 움막 농성장에서 다큐멘터리 <핵마피아> 촬영 작업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6.11행정대집행 직전으로, 오랜 움막 농성으로 인한 피로에 더하여 경찰 공권력의 폭력과 주민 저항으로 발생할 수도 있을 불상사에 대한 우려 등으로 극도의 긴장 속에서 지내시던 상황이었습니다.

 

이 당시 이루어진 촬영의 적절성과 방식에 대하여 <핵마피아> 촬영팀 내부에서 지속적인 문제제기와 사과 요구가 있었으며, 이에 대해, 김환태 감독이 밀양대책위와 주민 어르신들께 사과문을 작성하여 보내왔습니다.

 

저희 밀양대책위는 지난 31, 어르신들 40여분이 참석한 공부모임’ 4강 강좌에서 이 사과문 내용과 그간의 과정을 설명드렸으며, 어르신들의 동의를 받아 밀양대책위 블로그와 페이스북 계정에 이 사과문을 게시합니다.

 

201632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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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밀양에 계신 여러분.

저는 <핵마피아>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있는 김환태입니다.

 

지난 20146, 저는 밀양 현장을 담기 위해 <핵마피아> 출연자인 공혜원 씨, 야마가타 트윅스터 씨와 함께 밀양을 다녀왔습니다. 그 후, 저는 저희의 연대방식에 대해 문제가 있었다는 의견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희 영화의 출연자인 공혜원 씨의 직접적인 문제제기와 그녀를 통한 다른 연대자 분들의 문제제기로 이전까지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깨닫게 되어 저희의 잘못에 대한 사과를 드리고자 이렇게 글을 드립니다.

 

당시 저희는 밀양의 주요 현장들을 돌며 현장 촬영과 가수인 야마가타 트윅스터 씨의 공연을 진행했었습니다. 문제제기를 받고 돌아보니 행정대집행을 이틀 앞두고 극심한 긴장 상황 속에 계셨을 밀양 분들과 연대자 분들께 저희는 그저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청객이었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때문에 미리 충분한 소통과 저희 연대방식에 대한 의견을 구했어야 했음에도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었습니다. 저희의 쫓기는 일정 속에 급하게 진행된 촬영과 공연이 현장에 계셨던 밀양 주민 분들과 연대자 분들께는 마음 불편하고 힘든 기억으로 남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밀양 연대자로서 활동하고 계신 공혜원 씨께서도 매우 난처하고 힘든 시간이셨을 것 같습니다.

 

저희 다큐의 출연자인 공혜원 씨와 저로 인해 불편하셨던 밀양에 계셨던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고민하고 미리 계획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장에 계신 분들께 연락드리고 상의하여 진정으로 현장에 계신 분들께서도 좋아하실 수 있는 연대활동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밀양의 대책위 분들과 많은 주민 분들, 연대자 분들께서 저희 영화 <핵마피아>에 많은 관심과 응원을 보내주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죄송하고 또 감사드리는 마음뿐입니다. 부디 이 영화의 결과물이 밀양에 계신 여러 분들께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또한 그 과정을 담아가며 탈핵과 관련한 좋은 작품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거듭 죄송하게도 이 글은 그날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러 뒤늦은 사과의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때를 놓친 사과를 받아주실 분들이 많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부디 저의 마음이 여러 분들께 잘 전달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 다큐멘터리 <핵마피아> 감독 김환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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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6/03/0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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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는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3.1 운동으로 폭발한 민심에 놀란 일제는 힘으로만 누르는 무단 통치 대신 회유책을 병행하는 문화통치를 시작했고, 이로 인해 조선인들은 ‘나도 노력하면 일본인이 될 수 있다!’는 일제의 기만적 전술에 서서히 물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일제가 친일파를 본격적으로 양성(?)하는 것 역시 바로 이 시기부터입니다.

일부 명망가들 역시 상황 논리에 기대거나 체념하는 방식의 주장을 합니다. 일제는 너무 강하고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강대국의 동정을 얻어 독립을 이루자는 이승만의 외교론, 식민지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치를 이루자는 이광수의 자치론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전혀 다른 방식의 독립을 주장한 스물한 살 청년이 있었습니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그가 다름 아닌 의열단 단장 김원봉입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등장하는 바로 그 인물입니다. 기성세대와 달리 절망적 현실에 주눅 들지 않았던 그의 당당한 태도는 조국의 독립에 목말랐던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수많은 청년들은 그와 함께 무장투쟁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은 우선 자신들의 타깃을 명확하게 규정합니다.

1.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2. 일본 천황 및 각 관공리
3. 정탐노, 매국적
4. 적의 일체 시설물

일단 타깃이 정해지면 깔끔한 양복을 차려 입고 준비한 폭탄과 권총, 태극기 그리고 종이 한 장을 품고 홀연히 경성과 동경으로 떠나게 됩니다. 요인 암살과 일제 중요 기관 폭파가 이들의 최종 목표입니다.

1923년 1월 12일. 문화통치로 길들여진 잠잠한 경성 한 복판에 커다란 폭발음이 울려 퍼집니다. 온갖 고문이 가해졌던 종로경찰서에 누군가가 폭탄을 투척한 것입니다. 현장에서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경찰부장 우마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기자들에게 설명을 합니다.

“민심이 너무 평온하기 때문에 일부러 과격한 독립파 사람들이 어찌할 수가 없어서 최후수단으로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외다. 민심동요는 별로 근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마노는 민심 동요를 우려하여 보도 금지 조치를 내리고 즉시 정복 순사 1,000여 명을 풀어 수색을 지시합니다. 그렇게 10일 만에 경찰이 찾아낸 범인은 32살의 철물점 주인 출신인 의열단원 김상옥이었습니다. 의열단원 중에서도 명 저격수였던 김상옥은 권총을 양손에 쥐고 일본 경찰 400여 명을 상대로 무려 3시간이나 총격전을 벌이다 마지막 남은 한발을 자신에게 겨누고 숨을 거두게 됩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범인은 최후까지 권총을 두 손으로 쥐고 바른 손에는 사망한 후에도
둘째 손가락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걸고 권총을 힘 있게 쥐고 있었다며
여하간 범인은 처음에 발에 총을 맞았으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것과 최후까지 총을 쥐고 죽은 것을 보면 매우 대담한 사람이라고 말하더라.
(동아일보 1923년 1월 23일 ‘세군데 총을 맞고도 죽은 후에도 총을 쥐고 있어’)

1926년 12월 28일에는 토지수탈의 중심이었던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이 투척됩니다. 도심 한복판인 을지로, 그것도 백주 대낮에 말이죠. 심지어 뒤쫓는 경찰 7명을 권총으로 사살한 이 역시 의열단원인 나석주였습니다. 그는 자결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의열단원들의 맹활약으로 인해 일제는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 잡기에 혈안이 됩니다. 암살과 폭파 자체가 일제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는 없었지만, 자존감을 잃어가는 당시 조선인들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원봉은 심지어 김구보다 더 높은 현상금이 걸리게 됩니다. 현재 금액으로 치면 약 320억 원이란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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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20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총독부, 종로경찰서, 부산경찰서, 동양척식회사, 심지어는 동경의 황궁에까지 폭탄이 투척됩니다. 폭탄을 투척한 이들은 모두가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양복 품속에 거사를 위한 무기(총, 폭탄)와 태극기만이 아니라 또 다른 종이 한 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종이는 단재 신채호가 김원봉의 부탁을 받아 작성한 의열단선언(조선혁명선언)이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이루고 싶었던 세상과, 그 세상을 이루기 위해 총을 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 장의 종이에 6,400자의 글자로 담겨져 있습니다. 다음은 그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파괴할 기백은 없고 건설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생각만 있다 하면
5백년을 경과하여도 혁명의 꿈도 꾸어보지 못할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잡고
암살, 파괴, 폭동으로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치(해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단기 4256년 1월 의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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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의거를 한 자리는 현재 1호선 종각 역 종각지하 쇼핑센터 8번 출구 바로 앞입니다. 그 앞엔 아주 작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수, 2015/08/12-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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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일신여학교 재학 당시 차별적인 식민 교육에 항거해 동맹 휴학을 주도하는가 하면 항일여성운동의 전국적인 통일기관인 ‘근우회’에서 활동하며 개혁적인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의 길을 모색했던 박차정. 서울지역 11개 여학교를 비밀리에 조직해 1930년 1월 대규모 학생시위를 주도한 박차정은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1930년 의열단에 합류했고, 이를 이끌던 독립운동의 거두 김원봉과 결혼해 사랑과 혁명의 길을 함께 걷는다. 1935년, 의열단 등 좌우 독립운동단체 5개를 통합한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당하자 박차정은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해 조선 여성들이 총단결하여 민족독립과 여성해방을 쟁취할 것을 독려한다. 이는 박차정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이념이었다.

우리 조선 부녀를 현재 봉건적 노예제도 하에
속박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이고
또 우리를 민족적으로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제국주의이다.
우리들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부녀는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지적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남경조선부녀회 선언문 中-

1938년 조선의용대 창설 후 부녀복무단 단장으로 활약하며 항일투쟁의 선봉에 선 박차정은 1939년 2월, 곤륜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1944년 34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자주독립과 민주혁명을 이룬 통일조국이라는 박차정의 못다 이룬 꿈은, 그러나 김원봉 또한 보지 못했다. 연합국의 힘으로 해방된 조국은 미군정의 주도권 하에 있었고 소용돌이치는 해방정국 안에서 독립운동가 김원봉은 친일경찰 노덕술에 체포돼 참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한다. 역사의 모순이 빚어낸 참상이었다.

분단과 이념의 대립 속에서 지워진 역사. 박차정은 사후 50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고, 김원봉은 광복 70주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남과 북 그 어느 곳에서도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삶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금, 2016/01/08-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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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송전탑 반대 촛불 200회 기념 및 6.11 행정대집행 1주년 기억 문화제 후일담> * 사진 장영식 박민혁

 

딱 24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바로 어제 이시간까지 우리가 느꼈던 기운이 아련합니다.

...

 

행사 당일전까지만해도 태풍 소식에 또 얼마나 모일 수 있을지, 펑크난 순서는 없을지, 걱정투성이였습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그 고통을 기억해주는 이웃이 사라진다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후 3시, 위양마을사랑방 앞에서 부산민주공원풍물패가 풍악을 울리자, 덕촌할머니는 그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셨습니다.

 

모두가 순간 먹먹한 기분이 되고 말았지요. 얼마나 그리웠을까요. 마을을 뒤흔드는 풍악소리, 밀양이 끝나지 않았음을, 우리가 아직 싸우고 있음을, 마음을 뒤흔드는 온갖 번민을 장쾌하게 찢어발기는 풍악소리 앞에 무릎을 꿇으시는 할매의 마음.

어제의 행사는 오래도록 기억남을 것입니다. 밀양역을 가득 메운 700여명의 참가자, 밀양이라는 외진 소도시에서 700명이 모이는 집회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서울, 부산, 울산, 거제, 대구, 청도, 강릉, 청주, 군산, 전주, 해남, 경주, 횡성, 부천, 인천, 고성, 콜트 콜텍, 스타케미컬, 기륭전자, 용산참사범대위, 마인드프리즘, 전교조,

 

밀양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 밀양의 친구가 된 사람들이 전국 곳곳에서 밀양을 찾았습니다.

밀양 할매들은 돼지를 두 마리나 잡아 수육과 싱싱한 간과 내장까지 썰어내었고, 고동국을 끓이고 겉절이를 무치고, 전을 부치고 막걸리를 내와서 손님 대접을 했습니다.

 

평밭마을 사라할매가 빨간마후라를 매고 전투기를 몰고 철탑을 박살내버리는 '빨간 마후라' 영상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포복절도하며 환호하였습니다.


올리베따노 수녀님들이 어르신들을 대신하여 하느님께 아뢰어주었습니다. '우리 할매 할배들의 정의로운 싸움을 당신께서 기억해 주시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을 말입니다.

 

그 1년의 상처를 들춰내어 훌훌 털어버리기 위해 그사이 겪었던 힘든 이야기들을 풀어낼 때는 모두가 숙연해주었지만, 사회자 김덕진 님의 표현처럼 '기-승-전-연대'로 귀결되는 할매들의 당부는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는 강력한 요청이었습니다.

 

풍등에 우리의 그리움을 희망을 담아 띄워올릴 때 이상하게 눈물이 났습니다. 어딘가로 무언가를 떠나보낼 때는 늘 이렇게 눈시울이 더워질까요.

 

밀양의 밤하늘로 우리는 색색의 풍등에 지난 시절의 상처를 아픔을, 그리고 희망을 띄워올렸습니다.

함께 해 주신 모든 손길에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밀양송전탑 반대 대책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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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5/07/20-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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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새만금 철탑 공사 현장에서 계속 충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군산을 도와주십시오~

 

밀양 어르신들이 지난 월요일 군산에 다녀왔습니다.

군산시청 앞에서 매주 진행하는 ‘집단민원접수’ 행사에 참여하였다가 공사 현장에서 대치하는 세 군데 농성장을 들렀습니다.

함께 하신 밀양 어르신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신 말씀은 ‘옛날 우리랑 너무 똑같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군산 할머니들이 밀양 어르신들 보더니 금세 눈물을 흘리시고 맙니다.

 

차가 쌩쌩 내달리는 도로에서 포크레인을 붙잡고 노숙농성을 준비하며 기약없이 앉아계시는 어르신들이 밀양 어르신들을 끌어안고 서러움의 눈물을 훔칩니다.

 

한전 직원이 차량으로 치고 가버려서 뇌출혈을 일으키는 사고가 나도 저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저 아래 사진에서처럼 70대 80대 노인들에게 저런 막무가내의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사합니다.

 

새만금 산업단지로 전력을 보내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관계자분들의 설명을 들어보니 대안 노선도 있고, 지금 당장 345kV 송전탑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새만금 산단의 전력 수급은 별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밀양에서도 그러했듯이 한전의 태도는 그저 ‘낙장불입’ 그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밀양에서도 몸서리나게 당한 저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재현되는 이 현실이 몸서리납니다

 

전국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군산 새만금 철탑 문제가 너무 위태롭습니다. 어르신들이 계속 쓰러지고 폭행당하고 있습니다.

군산을 알려주시고 도울 길을 마련해 봅시다. 밀양도 지속적으로 도우려고 합니다.  (연락처 강경식 대책위 법무간사 010 8480 2260)

 

-----------군산에서 보내온 일일 상황 보고서 -------------------------

 

어제 72번 철탑 (군산시 신관동 42-155)에서 일하던 포크레인 2대를 주변 도로에서 주민들이 잡아서 앞뒤로 차와 사람으로 막아서 못 가도록 막은 상태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밤에 길에서 자려니 텐트를 쳤고, 오늘 낮에는 비가 와서 사람들이 그 텐트 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오후 2시 20분경에 비가 오는 와중에 사람들이 적은 틈을 타서 군산시청이 들이닥쳐 행정대집행을 하였습니다.

먼저 버스 2대에 탑승한 주로 여경으로 구성된 경찰들이 와서 양쪽 포크레인 옆 천막에 각각 4명씩 있던 도합 8명의 할머니들을 잡아서 들어내고 군산시청이 동원한 사람들이 천막을 치워 버린 것입니다.

 

도로가에서 영업하는 불법 포장마차 철거와 똑같은 과정이라 보면 됩니다.

포장마차는 며칠씩 영업한 다음에나 철거하던데 군산시청은 단 하루 만에 전격적으로 처리한 것입니다. 역시 한전의 든든한 후원자입니다.

 

이번 행정대집행 과정에서 옥구읍 주민 3명이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모두 여경들이 잡아서 끌어내는 과정에서 다친 것인데, 2명은 크게 다친 것 같습니다.

80세의 이양근 할머니는 여경들이 팔뚝을 잡고 비틀면서 끌어냈는데 어떻게 팔뚝을 잡아서 비틀었는지 팔뚝이 시커멓게 멍들고 화상을 입은 것처럼 수포가 생겼습니다.

 

70세의 김복순 할머니는 여경 4명이 팔다리를 잡고 길을 한참 끌고 갔다는데, 현재 심장에 이상이 있어 입원했습니다.

53세 양순애 씨는 병원에 실려갔으나 상태가 나아졌다고 바로 퇴원했습니다.

 

오늘 행정대집행은 워낙 숫적으로 상대가 안돼서 순간적으로 끝났고, 주민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 갔을 때는 모든 상황이 종료돼서 집행 당시의 사진은 없고 할머니들의 병원에서 찍은 사진만 보내 드립니다.

사진을 보십시오. 참 처참합니다.

 

어떻게 경찰까지 이럴 수 있습니까?
경찰은 2~30대 젊은이를 다루는 것과 7~80대 할머니 다루는 것을 똑같이 합니까?

10배가 넘는 인원으로 할머니들을 다루면서 이렇게 무자비한 폭력을 써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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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5/07/09-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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