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운동 “한강녹조 주범은 수중보, 철거하면…”
올해 초 중견기업 관리직에서 퇴직한 최모(57)씨는 최근 빌딩 경비원으로 재취업했다. 가족들은 “좀 쉬라”고 권했지만 자녀 2명이 모두 대학에 다니고 있는 최씨는 마음이 바빴다. 그는 “은퇴 후 공백 없이 바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니 가족들도 어느 정도 안도하는 눈치”라고 말했다. 직장을 그만둔 중장년층의 재취업이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근로자의 평균 퇴직 연령은 52.6세였다. 고령화 추세에서 그 나이는 노인 축에도 …..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에서 ‘중간일자리’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2014년 8월 통계청 발표 기준으로 20대와 30대의 일자리 현황을 살펴봤더니, 10년 전과 견줘 중간일자리 비중이 줄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상대적으로 상위와 하위 일자리 비중이 늘었다.
중간일자리는 중위임금의 67~133%에 해당하는 임금소득을 올리는 일자리를 뜻한다. 이번에 현대경제연구원은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 자료를 사용했다. 이 조사에서 ‘최근 3개월간 직장에서 받은 임금’에 대한 응답의 중간값은 약 180만원이었는데, 이를 기준으로 하면 월급 120만6000~239만4000원에 해당하는 일자리가 중간일자리다.
젊은 층의 중간일자리 비중이 줄고 일자리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소식에 나는 ‘헬조선 지옥불반도’라는 말이 떠올랐다.
헬조선 지옥불반도는 최근 젊은 네티즌들이 대한민국에 붙여준 별명이다. 지옥같은 나라이고, 불길로 뒤덮인 땅이라는 뜻이다. 온라인 게임 ‘디아블로’에 등장하는 ‘불지옥’은 일반, 악몽, 지옥의 단계를 넘어 게임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레벨이다. 이 나라에 살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정부 비판을 넘어서, 나라 비판을 넘어서, 이 땅 전체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마음이 돌아선 이들이 지르는 비명같은 이야기다.
핵심은 넘어설 수 없는 ‘신분’의 벽이다. 이들은 한국사회가 다섯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말한다.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똥수저다. 어떤 부모를 만나 무엇을 물려받았느냐를 기준으로 나뉜다. 금수저는 최상류층이고 똥수저는 저소득 서민계층이다.
‘헬조선’은 증오와 과장과 풍자를 오가는 표현이지만,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바로 이 신분의 벽에 대한 비판이 그 진실의 일부다. 한국사회는 점점 더 세습자본주의 성격을 강하게 띠어가고 있다.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가도 좋은 일자리를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직장을 구하더라도, 정직하게 월급쟁이로만 살아서는 부를 축적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정년을 일찍 마치면 자영업에 뛰어드는 길이 열리는데, 손쉽게 창업할 수 있는 음식점 등의 업종은 경쟁이 지나치게 과열돼 실패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이런 업종에 대기업과 재벌 2세들까지 뛰어들고 있는 현실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지옥불반도의 지도는 의미심장하다. 출생과 함께 ‘헬게이트(지옥문)’가 열린다. 노예 전초지(학교)를 지나면 거대한 ‘대기업의 성채’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웬만해서는 성채 안 진입은 어렵다. 성채 진입에 실패하고 나면 자영업 소굴과 치킨 사원과 백수의 웅덩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안전한 곳이라고는 대기업의 성 안을 제외하면 공무원 거점과 정치인의 옥좌뿐이다. 너무 극단적이라고 여길 수는 있지만 아예 틀렸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그림이다.
젊은 세대에게 한국사회가 이렇게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면 다 잘 될 것’이라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핵심적 약속이 깨어진 탓이다.
월급 모아 자기 집을 마련한 뒤 집값이 올라 인생역전을 이뤘던 선배세대의 신화는 이미 올라버린 부동산값 탓에 돌아오지 않을 과거가 됐다. 오히려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해 열악한 주거환경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과거와 달리 대기업이 영세자영업자들의 영역에까지 들어와 경쟁하면서 월급을 모아 작은 가게 하나 내는 꿈도 이루기 어렵게 됐다.
이런 모든 변화에 더해, 한 가지 중요한 변화가 바로 일자리 양극화다. 중간일자리 비중 축소는 이런 일자리 양극화를 상징하는 현상이다. 이번 현대경제연구원 조사결과를 보면, 20대의 경우 10년 전 중간일자리 가운데 38%를 차지했는데 지난해에는 27%로 떨어졌다. 30대의 경우도 27%를 차지하던 것이 25%로 낮아졌다.
특히 20대의 경우는 일자리 절대 숫자도 떨어졌다. 2004년 226.6만명에서 2014년 201만명으로 11.3% 줄었다. 젊은 세대가 충격을 받을 만도 하다.
고학력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충격을 키운다. 20대 중간일자리 종사자 가운데 ‘대졸 이상’ 비중은 2004
년 51%에서 지난해는 66%로 높아졌다. 30대의 경우 10년 전 36%에서 지난해 62%로 껑충 뛰었다. 중간일자리는 이제 대졸자들의 일자리라는 이야기다.
대학진학률이 80%에 육박하는 세대다. 비슷한 교육과 기술 이해 수준과 문화적 자본을 갖춘 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일자리 양극화가 점점 심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위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지옥과 같은 경쟁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 ‘헬조선’을 농담으로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이유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놓자’는 정책목표를 자주 접한다.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넘어서야 할 격차가 너무 커지면 사다리를 놓아도 이동하기 어려워진다. 너무 긴 사다리를 놓지 않아도 될 만큼, 좋은 일자리와 그렇지 않은 일자리 사이 간격이 좁아지는 것이 중요하다. 중간 일자리를 늘리는 일이 그 구체적인 정책목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뉴스토마토 / 2015.9.8 /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
대기업들 상당수는 요즘 새로운 산업을 찾아 개척하기보다는 그저 ‘버티기’에 급급하다는 인상을 준다. 늘 찾고 있다는 ‘신수종 사업’은 소문만 떠돌고 실체가 없다. 조직은 굳어지고 고령화되고 있다. 모험적 미래기술에 대한 투자에는 소극적이고, 골목상권 장사처럼 안전하고 쉬운 현금 챙기기에 자꾸 한눈을 판다.
재벌기업들은 승계 과정에서 이런 경향이 더 강해진 듯하다. 웬만하면 흠을 잡히지 않는 데 집중하는 모습이다. 새로운 투자기회를 찾아 공을 세우려 나서는 임직원은 드물고 몸을 사리는 이들이 는다. 이런 상황이니 현금을 쌓아두고도 투자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이래서는 청년 일자리도 생기기 어렵다.
이에 관해 마리아나 마추카토 영국 서식스대학 경제학 교수는 <창업가형 국가>(The Entrepreneurial State)를 통해 흥미로운 통찰을 전한다.
그는 우선 ‘왜 애플과 구글과 페이스북은 모두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나왔고, 유럽에서 나오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통념적인 대답은 이렇다. ‘미국 실리콘밸리는 기업가정신과 혁신이 넘쳐난다. 그 배경에는 위험을 감수하며 투자하는 벤처캐피털과 창고에서 시작해 인생을 불태우는 젊은 기업가들이 있다.’
놀랍게도 마추카토의 연구 결과는 통념을 전면 부정한다. 이들 신산업을 구성하는 주요 기술은 대부분 미국 정부의 투자로 개발됐다. 예를 들어 아이폰의 주요 기술을 보자. 마이크로칩, 인터넷, 지피에스(GPS), 터치스크린은 미 국방부와 방위고등연구계획국과 중앙정보국의 작품이며, 미국 바이오산업의 신물질 신약의 75%가 국립보건원 연구실에서 나왔다.
이 기술들은 개발 당시에는 미래가 불확실했다. 정부가 위험한 투자를 감행했다. 기업들은 이런 연구 성과를 잘 조합해 이용하고 포장했을 뿐이다.
어쩌면 한국 경제 성장 방법도 비슷했다. 조선·철강·자동차 등 중화학공업도 통신서비스도 아이티(IT)벤처기업도,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고 시디엠에이(CDMA)에 투자하며 초고속인터넷망을 전국에 깔도록 움직이는 정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부가 불확실한 기술에 투자하며 기회의 창을 열었던 셈이다.
마추카토 교수 이야기는 최근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소득주도성장론의 빈자리를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소득주도성장론은 지난해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경제정책 담론으로 거론되기도 했고, 최근에는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한국 경제 성장전략이다. 임금과 가계소득을 높임으로써 내수소비를 진작시켜 경제성장 동력을 마련한다는 전략이다.
물론 현재 한국 경제 상황에서 소득 증대는 중요하다. 그러나 소득 증대가 자동으로 성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위험을 짊어지고 투자할 주체가 있어야 그 돌파구가 열린다.
누가 이런 모험적 투자를 감행할까? 대기업은 의지가 없다. 중소기업은 여력이 없다. 개인은 불안해서 지갑을 열지 않는다. 이럴 때는 국가가 위험을 짊어지고 투자하는 혁신가의 면모를 보여줘야 한다. 이게 마추카토 교수 연구의 시사점이다.
한국 사회는 굳히기에 들어간 듯하다. 이대로 두면 기존 질서가 바위처럼 굳어 영구화될 것처럼 보인다.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공공부문-민간부문 사이의 확대되는 격차와 굳어지는 갑을관계는 신분제를 연상하게 한다.
이런 굳히기를 뒤흔들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투자로 신산업을 키우며 판을 뒤흔드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패자를 보듬는 안전망도 필요하고, 모험가를 키우는 교육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 모두에 더해 실패 위험을 감수하며 투자하는 혁신적 국가의 리더십도 필수적이다. 소득주도성장론이 좋은 방향이면서도 과감한 성장전략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도 이런 부분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 한겨레 / 2015.9.8 /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
연봉 2억원을 받는 동창은 아이를 외국 기숙학교로 보내고 양가 일가친척들 모시고 매년 해외여행을 가며 서울 강남에 집을 사서 유지하다보니 살림이 너무 빠듯하다며 울상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아주 약간의 생활비만 벌며 달동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던 선생님은 수십 년 만에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도로 가서 연세(年貰) 50만원짜리 방을 얻어 만족스럽고 여유 있게 살게 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우리 삶은 300배 나아졌는가
혼란스럽다.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벌어야 충분한 것일까?
우선 우리가 얼마나 벌어왔는지를 살펴보자. 1960년에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를 밑돌았다. 2015년 1인당 국민소득은 3만달러에 육박한다. 그야말로 기하급수적 상승이다. 55년 만에 300배 늘어났다. 소득 100달러 시대에 소득 1천달러는 다다를 수 없는 불가능한 목표처럼 보인다. 소득 3만달러 시대에 소득 30만달러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100달러가 3만달러가 된다. 그 길을 달려왔으니, 숨가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시간 동안 이 땅의 가치평가 기준은 단순했다. 1인당 국민소득 하나가 사회와 국가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으로 모두 인식했다. 소득 증대는 삶의 목적이며 국가의 국정목표였다. 외길이었다.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이고 한국이 3천달러라면, 미국이 꼭 10배만큼 잘사는 나라라고 여겼다. 1인당 국민소득이 국가의 품격도 보여주고, 한편으로는 개인의 행복도 보여준다고 믿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던 시기였다. 많이 벌기만 하면 무조건 좋아진다고 믿던 시대였다.
분명 성과는 있었다. 이 나라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세계에서 소득을 늘리는 것으로는 가장 성공한 나라 축에 든다. 일본이 여기 비교할 만하고, 중국이 따라오고 있는 정도다.
그래서 지금 다시 질문해볼 때가 됐다. 1960년과 비교하면 우리 삶은 300배 나아졌나? 2015년의 20대는 1960년에 20대이던 할아버지 세대보다 300배 나은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일까?
그 이유는 두 영역으로 나누어 살펴보는 게 좋겠다. 첫째는 소득 자체의 문제, 둘째는 소득 외적인 문제다.
소득 자체의 문제는 ‘1인당 국민소득대로라면 우리 가족 1인당 3천만원씩은 벌어야 하는데, 왜 그만큼 벌고 있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유는 간명하다. 실제로 소득이 그만큼 오르지 않은 사람이 많다. 1인당 국민소득은 전체 국민소득의 평균값이다. 하지만 한 개인의 소득은 전체 국민소득 가운데 기업 및 정부 소득을 뺀 가계소득에 해당하는 몫이다. 그중에서도 특정 개인이 벌어들인 몫이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빠르게 늘고 있다. 영국·프랑스·미국·일본 등보다 높고 중국과도 비슷하다. 중국은 인구증가율이 높아 경제성장률은 한국보다 훨씬 높지만, 인구수로 나눈 1인당 소득성장률은 한국과 차이를 좁힌다.
그런데 가계소득과 국민소득의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다. 2014년의 경우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2만8천달러였다. 이 숫자는 국가 전체가 벌어들인 부가가치를 단순하게 국민 수로 나눈 것이다. 그중 가계로 돌아온 소득 전체를 국민 수로 나눈 수치가 가계총처분가능소득(PGDI)이다. 이 수치가 2014년 약 1만6천달러였다. 가계소득이 국민소득의 60%가 되지 못한다.
기업만 행복한 나라
한국에서 가계소득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기업소득과 비슷하게 움직였다. 즉, 국민소득 전체가 늘어나면 기업소득과 가계소득은 비슷한 정도로 늘어났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둘의 격차는 점점 벌어진다. 특히 가계소득 증가 속도는 점점 떨어져서 경제성장률에 뒤처지는 정도가 점점 심해진다. 1992년 가계소득과 기업소득의 격차가 0이라 가정하고 계산해보면, 그 격차는 점점 넓어져서 2010년대를 지나면 3.5를 오르내리는 숫자가 된다. 특히 가계소득은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에 견주어도 크게 뒤처지고 있는데, 이런 현상이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다.
국제 비교를 해보면 가계소득이 GDP보다 뒤지는 현상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수준이다. 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 등 유럽의 복지국가뿐 아니라 미국·영국 같은 시장이 강조되는 나라에서도 가계소득 증가율은 최근 경제성장률을 앞서고 있었다. 일본·독일·폴란드·체코 같은 나라들에서 가계소득 증가율은 GDP 성장률에 못 미치지만, 한국만큼 정도가 심한 곳은 없다. 즉, 한국은 경제성장의 혜택이 가계소득으로 제대로 순환되지 않는 정도가 세계에서 가장 심하다. ‘부자 국가 가난한 국민’이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노동소득분배율의 하락이다. 과거 한국은 노동소득분배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기업이 돈을 벌면 어쨌든 상당 부분 임금으로 지출되는 구조였다. 1987년 민주화와 노동운동 활성화, 3저호황 등을 동시에 맞으며 임금소득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중반쯤부터 흔들리기 시작해서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부터 노동소득분배율이 본격적으로 낮아진다. 2000년 이후로는 아예 실질임금이 정체 상태에 돌입한다. 임금 상승 속도가 노동생산성 상승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다.
여기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도 영향을 끼쳤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삼성전자가 돈을 벌면 그 협력업체들도 다 같이 벌었다. 그러면 협력업체 직원들의 임금도 다 같이 많이 올랐다. 이른바 ‘낙수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1990년대 중반 이후 점점 더 대·중소기업 사이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그 효과는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여기에 개인소득 사이 불평등이 심화하는 것도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김낙년 동국대 교수는 <21세기 자본>으로 전세계에 화제를 몰고 온 토마 피케티 교수가 분석했던 방법으로 한국의 소득분포를 연구했다. 한국에서 소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 3122만 명의 과세 자료를 살펴봤더니, 중위소득자의 연간소득이 1074만원이었다. 취업자를 기준으로 다시 살펴봐도, 1594만원밖에 되지 않는다. 1인당 국민소득인 3천만원 수준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 연구 결과를 보면, 한국의 불평등도가 상당히 높다는 근거가 곳곳에 등장한다. 예를 들면 연소득 1억원 이상인 사람은 56만 명이다. 인구의 1%가 되지 않는 엄청난 고소득자인 셈이다. 6천만원 이상이 219만 명이다. 전체 인구의 5%가 되지 않는다. 상위 10%가 가져가는 소득은 이 나라 전체 소득의 50%에 육박한다.
상위 10%가 소득 절반을 가지는 나라
귀농한 부부의 일상.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소득만이 아니다. 정용일 기자
여기에 더해 욕구의 문제가 생긴다. 사람들의 욕구는 점점 더 평등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욕구 자체가 많이 달랐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전체 인구의 25%가량 되던 대학 진학률은 이제 75%를 훌쩍 넘어선다. 똑같이 대학을 나온 사람들인데, 상위 10%에 들면 괜찮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나락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 그런데 상위 10%에 들어가려는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진다.
같이 똑같은 스마트폰을 쓰고, 같은 기술의 혜택을 입는다.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미디어에 비슷하게 노출된다. 같은 공교육을 받고, 비슷하게 대학을 가고, 비슷하게 스펙을 쌓고, 해외연수도 갔다 오면서 모두 비슷한 자격을 갖춘다. 그런 이들이 이 불평등한 사회에 그대로 던져진다면, 그건 맹수를 정글에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엄청난 갈등과 박탈감에 시달리게 된다.
여기까지는 소득과 직접 연관을 맺고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좀더 근본적인 것은 소득 외적 이야기에 있다. 실제 꽤 높은 소득을 벌어들이는 사람들조차도 삶이 빠듯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런 소득 바깥의 이야기에 있다. ‘이스털린의 역설’로부터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미국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30여 개국의 행복도와 소득을 조사 분석한 뒤, 기본 수요가 충족된 이후에는 소득이 높아진다고 반드시 행복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다. 이 연구 결과를 해석하자면, 소득이 일정한 수준 이상이 된 뒤 행복도를 높이려면 소득 증대 노력이 아니라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경제학적 근거를 댈 필요조차 없는 상식적 이야기일 수도 있다. 우리가 소득을 높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따져물으면, 대부분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또 많은 이들은 좀더 선하게 잘 살기 위해서라거나 수준 높게 살고 싶어서일 수도 있겠다. 여유가 있으면 남한테 베풀고 살 수도 있고, 문화예술도 찾고 깊이 있는 사색도 하면서 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거꾸로 소득이 높아진다고 반드시 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소득은 수준 높은 삶을 살 수 있는 필요조건이다.
그럼 소득에 덧붙여 무엇이 필요할까? 일의 주체가 되어 보람이 커지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또 우정과 이웃과 가족 같은 공동체가 강화돼 교류가 늘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소득 증대만 신성시하는 흐름이 주류다. 2014년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였다는 발표와 함께 나온 해설에는 ‘한국이 국민소득 2만달러에서 정체되고 있다’는 기조가 주류를 이뤘다. 한국 1인당 소득이 2만달러를 돌파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다는 호들갑을 떨던 2000년대 중반에서 10년도 지나지 않았다. 1만달러 돌파를 처음으로 했던 게 IMF 구제금융 직전인 1990년대 중반인데, 경제위기로 1만달러 아래로 떨어졌다가 2000년대 초에 다시 1만달러 이상으로 올라갔었다. 더 거슬러 요약하자면, 1960년에 100달러였던 것이 2000년대 초에 1만달러가 되고 2000년대 중반에 2만달러가 되고 지금 2010년대 중반에 3만달러가 된 것이다. 이런 속도로 1인당 국민소득이 증가하는데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면, 평균소득 증가 이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생각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일의 보람, 여가, 공동체
임금을 올려 가계소득을 늘려야 한다. 격차를 줄여야 한다. 그래도 행복하지 않다면, 일의 가치와 보람을 찾고 여가를 공동체와 함께 보낼 시간을 확보하도록 해줘야 한다. 삶의 다른 잣대를 마련해줘야 한다. 어쩌면 더 버는 것은 해법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 모두가 이제, ‘얼마나 벌어야 충분한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시기가 됐다.
[ 한겨레21 / 2015.9.4 /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
김종배의 시사통 인터뷰
– 2015년 9월 3일 / 이원재 소장
김종배 : 오늘 이슈 인터뷰에서는 경제 문제, 민생 문제 이 문제들을 좀 짚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요즘 경제면을 보면 연일 우울한 소식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수출이 부진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고요, 또 어제오늘(9월 2~3일)은 2분기 경제소득이 전년 동기 대비 감소했다, 이런 뉴스도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경제 모든 지표가 하향 지표를 그리고 있는데, 이런 상태에서 또 정치권에서는 성장담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건지 오늘 관점을 세우는 시간으로 꾸밀 건데요, 도움 말씀 주실 분은 저희 방송에서 ‘세대통’을 진행해 주셨던 희망제작소의 이원재 소장입니다. 지금 바로 연결 …..
좋은 민주주의는 좋은 대표를 필요로 한다. 적어도 대의민주주의에서는 그렇다. 좋은 대표를 어떻게 뽑느냐에 대해 인류는 오랫동안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것은 민주적 선거다. 이 제도에서는 대표자를 뽑되, 이 대표자가 유권자들의 이익과 의견에 상반되는 행위를 계속할 경우 그를 탄핵하거나 다음 선거에서 갈아치울 수 있다. 이것이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다.
정책과 입법보다 지역 민원
그런데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선출된 대표자에 대한 견제는 대부분 형식적이고 실효성이 없다. 탄핵은 상당히 어렵다. 다음 선거에서 벌을 주는 것만으로는 시간이 너무 늦거나 징벌이 충분하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다음 대표자도 역시 비슷한 사람이 되는 경우다. 이것이 지금 한국 정치에서 가장 큰 문제다.
국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형편없다. 19대 국회에서 형사처분으로 의원직을 잃은 사람이 17명이고, 현재 재판 중인 의원도 17명에 달한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더 문제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 입법 로비, 성폭행, 자식의 취업 청탁 등 비리의 종합선물세트다.
현재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심학봉 의원은 도덕성과 직무능력이 별개라면서 일을 잘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국회 본연의 일은 잘하고 있는 것일까? 총선을 앞두고 열린 국정감사는 행정부에 대한 감시보다 정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실 지금 국회의원들의 마음은 국정감사보다는 지역구에 가 있을 것이다. 다시 당선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치를 잘하면 다시 당선되지 않을까? 엄밀히 말하면 별 상관이 없다. 여기에 한국 정치의 함정이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는 모두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는 명분으로 국민이 참여하는 공천 방식을 제시했다. 새누리당은 오픈프라이머리를,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회는 100% 국민경선을 도입한다고 한다. 국민에게 공천권을 돌려주면 과연 정치가 좋아질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의원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지역구 관리다. 재선을 결정하는 것은 정책과 입법이 아니라 지역 민원을 얼마나 잘 해결하느냐, 지역 예산을 얼마나 잘 따오느냐에 달렸다.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보는 공보물도 대부분 이 내용으로 채워진다. 정치적 비전과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통찰은 중요하지 않다. 일단 지역구 활동을 잘해야 입법 활동도 눈에 들어온다. 후자만 강조해서는 “뽑아놨더니 자기 잘난 척만 하고, 동네에는 코빼기도 안 비친다”는 평을 듣기 십상이다.
현역들이 지역구에 ‘올인’한다고 하면, 새로운 인물들은 어떤가? 이번 19대 국회에서도 적지 않은 인적 교체가 이뤄졌다.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을 합쳐 90명의 비정치권 외부 인사가 공천됐다. 초선 의원 비율도 56%에 달했다. 그래도 국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정치 신인·소수 정당을 더 많이 국회로
정치 신인들의 당락은 정치적 능력보다는 학력과 경력에 크게 좌우된다. 새누리당 공천에 관여했던 사람은 “정치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도 총선에서 떨어질 것 같아 공천을 못 받는 경우가 있고, 정치를 잘할지는 모르겠지만 스펙이 좋고 전문성이 있어 공천을 한 경우가 있다”고 실토한다. 새정치연합의 한 의원은 “정치를 해보니 오히려 중요한 것은 전문성이 아니라 소통 능력”이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런 기준이 공천에 반영될 가능성은 적다. 이것이 우리 정치의 현재다.
문제는 앞으로도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선거를 통한 대의민주주의의의 장점은 좋은 대표를 뽑고 나쁜 대표를 솎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정치에서는 20대 총선을 치러서 더 나은 국회가 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 새로 물갈이를 해도, 비정치인이 들어가도, 결과는 거의 같을 것이다. 암담하다.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비례대표를 늘려 지역구 선거의 영향을 덜 받는 괜찮은 정치 신인을 많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 두 거대 정당의 틈바구니 속에서 제대로 대표되고 있지 않은 계층, 세대, 사회적 문제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소수 정당과 정치인들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맞다.
그런데 어렵다. 비례대표를 늘리려면 의원 정수를 늘리거나 지역구 의원 수를 줄여야 한다. 의원 정수 확대는 다수의 국민들이 반대한다. 많은 정치학자나 시민사회에서는 국회의원을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의 벽은 실로 높다. 그렇다면 지역구 의원 수를 줄이는 것은 가능할까? 선거법 개정이 국회의원들의 손에 달려 있는 한, 토끼 머리에 뿔이 날 때쯤에 일어날 일이다.
결국 답은 하나다. 시민이 좋은 대표를 뽑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대의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그런데 좋은 대표는 그냥 뽑히지 않는다. 참여민주주의만큼이나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이 필요하다. 투표를 열심히 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비슷비슷하게 나쁜 후보들을 놓고 투표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시민이 공천 과정에서부터 개입해야 한다. 좋은 후보를 공천하고 나쁜 후보를 공천하지 말라고 정당에 요구해야 한다. 한국 시민사회는 이미 그렇게 해본 경험이 있다. 2000년 총선에서 일단 나쁜 후보를 걸러내려는 시도가 있었다. 주로 도덕성을 중심으로 88명의 부적격 명단을 발표했다. 이 중 59명(67%)이 공천받지 못했다. 부적격 명단 중에 공천된 후보를 대상으로는 낙선운동을 벌여 15명(68%)을 낙선시켰다. 수도권에서는 20명의 낙선 대상 중에서 1명만이 당선될 수 있었다.
1987년 민주화를 기점으로 보면 13년 만에 시민사회가 그만큼 성장해서 ‘정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에서 처음 제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15년이 지났다. 총선시민연대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정치권으로 들어갔다. 시민사회는 오히려 더 위축된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합시다, 바로 지금
바로 지금이 시민의 정치 참여가 질적으로 한 단계 올라설 때다. 시민들이 직접 공천과 선거에 개입해야 한다. ‘나쁜 후보 걸러내기’라는 부정적·소극적 시도를 넘어서, 좋은 후보란 어떤 후보인지 기준을 제시하고, 그런 후보를 공천해달라는 긍정적·적극적 주장을 펼쳐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선거의 진짜 의미다. 여론조사를 통해 이뤄지는 아래로부터의 공천은 선거에 대한 많은 역사적 탐구를 볼 때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선거의 진짜 효용은 출마한 후보자들 중 누가 좋은 대표인지, 그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해 시민들이 모여 토론함으로써 스스로 정치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가진 진짜 힘이다. 선거가 비슷비슷한 나쁜 사람들을 계속 재생산하는 제도라면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선거를 앞두고 벌어지는 ‘시민들의 토론, 좋은 대표에 대한 비전 제시, 정당에 대한 요구, 자기 성찰’이야말로 선거를 통해 정치가 나아질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단기적 이익을 좇는 사람들의 선호는 공적 대화를 통해 변화할 수 있다. 지역구에 예산을 따오는 후보, 동네 산악회에 와서 머리 한 번 더 숙이는 후보, 학력이 좋고 인물이 훤한 후보가 아니라, 좋은 입법과 좋은 정치를 하는 후보를 어떻게 고를지, 그리고 그런 후보를 어떻게 정당에 요구할지를 이야기할 때다. 바로 지금.
[ 한겨레21 / 2015.9.23 / 이관후 희망제작소 연구조정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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