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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 모범회원 인터뷰 4탄, 전주지부 박재홍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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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 모범회원 인터뷰 4탄, 전주지부 박재홍 변호사.

익명 (미확인) | 화, 2015/07/28- 14:10

모범회원 인터뷰, 그 마지막은 전주전북지부 박재홍 변호사입니다. 시간과 거리의 한계상 수차례의 전화와 메일이 오고 간 서면+전화 인터뷰가 되었는데요. 몇 번의 전화통화만으로도 어찌나 즐겁던지 한 번 꼭 시간을 내어 전주에 가서 막걸리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멋진 회원이 많은 민변, 역시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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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먼저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박재홍 안녕하세요, 민변 전북지부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박재홍 변호사라고 합니다. 변시1회이구요, 5살 1살 두 아들의 아빠이자 남편으로 육아에 힘쓰고 있습니다.

 

김지미 이번 총회에서 모범회원상을 수상하셨는데 소감을 다시 한번 들어볼까요?

 

박재홍 아직 제가 받기에는 너무나도 큰 상인데, 이렇게 큰 상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 지부 회원들은 총회에 참석하면 소수이기도 하고 대다수 활동은 본부와 서울에서 이루어지기에, 총회는 우리의 축제라는 인식이 약했거든요. 그런데 지부 회원에게 상을 주시니까 지부 회원들에게 많은 격려가 될 것 같습니다. 훌륭하신 선배님들이 받던 상을 막상 제가 받고 나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고, 매일 출근하면서 책장에 모셔둔 상패를 보면서 ‘내가 이 상을 받은 거 맞지?’라고 되묻곤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내아이 둘을 양육하느라(아내는 저 포함 아들 셋이라고 가끔 농담을 하지만) 고생하는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김지미 매일 출근길에 되새길 만큼 민변 모범회원상이 변호사님께 큰 의미인가요?

 

박재홍 변호사가 되기 전에 바라 본 민변은 저에게 굉장히 큰 존재였거든요. 그리고 해마다 모범회원상 수상하시는 선배님들을 보면서, 와 정말 존경스럽다란 생각이 절로 들었는데, 그런 상을 제가 받게 되니 실감이 나질 않지요. 그래서 그런 큰 상을 일단 받기는 받았으니, 이제부터라도 그에 걸맞는 변호사가 되어야겠다라고 다짐하고 있어요(웃음).

 

김지미 이번 모범회원상은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했는데 박변호사님이 수상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박재홍 얼굴 때문이 아닐까요?(웃음) 농담이구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제가 상을 주신 분께 여쭙고 싶은데요, 아무래도 지부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무국장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그 대표 격으로 저에게 상을 주신 것 맞죠? 석명을 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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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작년 가을에 전주지부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전주 지부는 회원 수도 적고 솔직히 말씀드려 그다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인상은 못 받았는데 그 이후에 회원 수도 많이 늘고 뉴스레터 지부 활동 소식을 보면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이러한 동력이 어디서 나왔다고 보시나요?

 

박재홍 작년에 가시적으로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셨다면 사무국장으로서 소임을 다 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긁적 긁적). 저희 지부는 2000년 초경 전봉호, 안호영, 박민수, 황규표 변호사님을 주축으로 지부에서 자생적으로 창립되었습니다. 회원 수가 많지는 않지만, 선배 변호사님들 한 분 한 분이 전라북도 곳곳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계시거든요.

작년 봄부터 지부장이신 장석재 변호사님과 한 뜻으로 회원 확대 사업을 우선으로 우리 지역 로스쿨 학생들과의 교류를 확대하자는데 마음을 모았습니다.

이후에 후배 변호사님들이 대거 회원으로 가입하셨고, 전북대 원광대 법학전문대학원생들과 간담회, 봄산행 등을 진행하면서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얼마 전에는 ‘민변전북지부 회원들과 법학전문대학원생들의 인권감수성 향상을 위한 워크숍’이란 거창한(?) 표제로 선후배님들과 함께 1박 2일간 동고동락했습니다. 참, 제가 워크숍 간 동안 시커먼 두 아들 덕에 고생한 아내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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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인 활동에 대한 동력은 아무래도 지부장님의 강한 의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부장님께서 저희 젊은 변호사들에게 자주 하시는 말씀이 “우리 장년층 변호사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민변과 소통하고 있거나 요청이 들어오는 단체에 젊은 변호사님들을 적극적으로 연결해 줄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 지역 민변 변호사 수가 적어서 지역에 있는 각종 시민단체나 노동조합의 일들이 일부 변호사들에게 집중되면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에 버거웠지만, 이제 후배 변호사님들이 많이 들어오셔서 시민 단체들과 적극적으로 호흡하면서 우리 지부 변호사님들의 역할이 더욱 커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와 동시에 젊은 변호사님들이 이 지역에서 자리를 잘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지부장님의 의지 덕분에 지역 사회에서 저희 지부에 거는 기대가 더 커지고 있고, 저희 지부도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작년 세월호 사건 이후에 있었던 범시민단체 릴레이 단식농성에 참여했었는데, 한 활동가 한 분이 ‘이제는 민변이 선봉에 서시네요!’라는 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향후 지부장님과 함께 현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저희 지부가 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신용비어천가인데요~(웃음) 솔직히 지부장님보다는 실무를 하는 나의 역할이 지대했다..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시지는 않는지요?

 

박재홍 그건 아닌 것 같구요(웃음), 이미 선배들이 형성해 놓은 토대 위에 지부장님이 방향을 잘 잡으셨고, 무엇보다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지미 그렇게 말씀하시면 민변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분께 상을 드린 것처럼 되잖아요(웃음). 이 참에 자랑을 좀 해 주세요. 제가 이만큼 했습니다. 지난 1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이런 거요

 

박재홍 전주지역에는 버스파업이 큰 문제인데요, 2012년도에 전주지역 시내버스 회사들이 약 3개월 정도 직장폐쇄를 하였는데 이 직장폐쇄가 위법하다는 이유로 저희 법인 선배이자 민변 선배이신 안호영 변호사님과 임금 청구 소송을 수행하였고, 얼마 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하여, 버스 노동자분들의 생계와 전주지역 버스 문제 해결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2년도에 우리 지역 진보 교육감이신 김승환 교육감님이 직무 유기로 형사재판을 받으셨는데, 민변 회원들이 힘을 모아 대법원까지 무죄 판결을 이끌어 내었고, 우리 힘으로 진보교육감을 지켜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통일교사로 알려진 김형근 선생님이 인터넷 게시판에 북한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고, 하드디스크에 북한 신년사 등을 소지, 거주지에 이적표현물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에서 김희수 변호사님, 안호영 변호사님, 이민호 변호사님, 김현승 변호사님과 함께 변론을 준비했었는데, 디지털증거에 대해 공부도 하고, 공동변론을 위해 중간에서 여러 가지로 바빴었거든요, 수사기록이 2박스 정도 되었던 걸로 기억나는데, 최종 정리는 제 몫이라…그런데 결론이 만족스럽지 못하여 아쉬웠습니다. 지금 항소심 재판 중인데, 선생께서 그 사이에 과도한 스트레스 등으로 중병에 걸리셔서 죄스러운 마음이 큽니다. 선생께서 비슷한 사건으로 집행유예 기간이셨고, 유사 사건 경험을 토대로 나름 최대한 조심하신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이분께서 스크랩하여 올리신 글이나 하드디스크나 주거지에 보관하고 있었던 자료가 우리 사회의 근간을 위협할 정도인지 납득이 가지 않았고,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남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해당 사건의 변호인의 한 사람으로서 개탄스럽습니다.

아, 제가 잠시 흥분을 했네요.

생각해 보니 바쁘게 산 것 같긴 한데 사무국장 일은 티가 잘 나지 않는 것 같아요. 지부 사무국장으로서 매월 간담회를 준비하는데, 모임 일정을 팩스로 보내고, 단체문자 보내고, 미회신 회원들에게 전화 돌리고 그러지요. 일정 끝나면 장부에 영수증 정리하고, 회의 내용 정리 하구요. 한 가지 제가 총무를 맡으면서 잘 한 것은 지부 통장을 다시 개설하면서 전용 카드를 만들었는데 회계의 투명성을 높이고 있습니다(웃음).

 

김지미 전주 지부가 최근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활동은 어떤 것인가요?

 

박재홍 작년 한 해 동안 지부 회원들을 모집하고 로스쿨 학생들과 교류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올해는 시민사회 단체들과의 소통에 중점을 두고 ‘1시민단체 1변호사’라는 구호 아래 젊은 변호사들이 전라북도 곳곳의 시민 사회단체들과 호흡하고 교류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 주세요

 

박재홍 민주노총 전북본부에 저와 저희 지부 이동현 변호사님이 매주 상담을 나가고 있고, 작년 초부터 전주 여성의 전화 부설 가정폭력상담소에 저희 지부 회원 4명이 출장 상담을 나가고 있습니다. 현장에 가서 상담을 하다 보니 만족도가 높고, 청년 변호사들의 활동 반경도 넓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여, 올해 초부터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에 2명, 전북환경운동연합에 2명, 전주 공무원노조에 2명, 남원․순창․장수 공무원노조에 각 1명, 전북 교원노조에 1명을 각 고문 내지 전담 변호사로 활동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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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박변호사님은 이 중에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박재홍 요즘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위한 시민 추진위원’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평화의 소녀상’이라고 들어보셨죠? 일본군 위안부 대사관 앞에 세웠던.. 그 소녀상을 전국적으로 설립하는 운동이 지역별로 있는 걸로 알고 있고, 전주에서도 이 운동이 전개되어 다음 달이면 시민들의 이름으로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게 됩니다.

학부 시절 모의재판위원회라는 학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하여 모의법정을 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할머니들을 초청해서 모의법정을 열었었는데, 그 때 저랑 동기 한 명이 일본군 측 변호사단 역할을 했었는데, 할머님들이 저희 연기를 보시고 방청석에서 고성으로 화를 내시며 울부짖으셨던 것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만 해도 할머님들 6-70대로 정정하셨는데, 많이 돌아가시고 남은 분들도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조속히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길 바랍니다.

제가 집행위로 활동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시민 법정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우선은 제막식을 하고 예산이 남을 경우 추진해 보기로 했습니다. 학부시절 모의 법정을 끌어주셨던 김창록 교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자료도 받았고, 예산도 많이 남을 것 같은데, 내년 즈음으로 하여 전북 지역 시민 단체, 학생들과 함께 고민해서 시민 법정을 한 번 세워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법학전문대학원 2학년 때, 동기들은 검찰이나 법원에 실무교육 받으러 바빴었는데, 저는 성당에서 중고등부 교리교사 회장을 하면서 학생들 캠프를 준비했었습니다. 교회나 성당 다니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여름에는 학생들을 위한 캠프를 준비하는데 여간 바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을 여건이 좋지 않은 학생들에게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커서 시작했었는데, 그런 활동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지요.

 ‘전라북도 학생인권 조례’는 서울, 광주, 경기에 비해 나름 진일보한 조례로 제정되었는데, 이 조례에 근거한 ‘학생인권심의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교육 문제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지미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방송 출연도 활발히 하신다던데요?

 

박재홍 아… 올해 초부터 KBS1(전주)에서 ‘경제가마솥’이라는 프로그램에 격주로 패널 활동을 하고 있어요. 올해가 양의 해잖아요? 1월 2일에 전북KBS ‘아침마당’에 양띠 특집으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나가게 되었고, 저는 주로 이슈와 관련된 법률적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딱딱한 법률 이야기나 경제 이야기를 일반 시민들이 지루하지 않게 전달하려고 제 나름대로는 개그도 하면서 노력하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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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 보니 전북아침마당 5월 가정의 달 특집으로 저희 회사 여직원들과 노래자랑에 나간 적이 있는데, 시청자들을 웃기고픈 마음에 대머리 가발을 쓰고 유치한 춤을 추기도 했네요. 부끄럽습니다(웃음). 혹시 찾아서 사진으로 올리진 말아 주세요(두손 모으고 불쌍한 표정으로).

 

김지미 박변호사님은 어떤 계기로 변호사가 되셨나요?

 

박재홍 제가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전자공학을 전공했었어요. 노래를 좋아해서 민중가요 노래패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서 자연스레 학생회 활동도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가 많다는 것을 하나씩 알게 되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지극히 1차원적인 생각이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막연히 학교를 그만두고 법대에 다시 입학을 했습니다.

법대 들어갈 당시부터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고, 사람을 쫓아 학회 활동하고 집회 참여도 하다 보니 당시에는 사법시험을 볼 엄두는 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제가 지금 전주에 살게 된 계기이기도 한데, 대학 때 지금 있는 곳에 교류학생으로 와서 2년 동안 음주, 가무, 사람 ‘3독’(불가에서는 탐, 진, 치라던데…)에 빠져 잘 놀았습니다. 그렇다고 음주가무만 한 것은 아니고요, 교환학생은 듣고 싶은 과목을 우선적으로 수강신청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는데, 그 때 단과대 별로 제가 듣고 싶었던 다양한 과목을 들으면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20대 후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나는 왜 태어났나?’‘뭐하고 살아야 되나?’라는 화두를 안고 유럽으로 한 6개월 정도 어학 연수 겸 방랑 생활을 했습니다. 6개월 간 먹고, 자고, 걸어 다니면서, 살아 있다는 존재 자체로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복잡한 고민들을 떨쳐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법학전문대학원이 생긴다는 발표가 있었고, ‘아 이건 내가 변호사가 되라는 계시다’라고 생각하면서 변호사가 되기 위해 2009년도에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변호사가 된 것은 아닌 것 같고요, 지금생각해 보면 1차원적인 생각이지만 막연히 사람을 도와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법대에 진학하게 되었고 운이 좋게도 서른 즈음에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을 해서 변호사가 된 것 같습니다.

 

김지미 변호사가 되고 나서 민변에 가입하게 된 계기는요?

 

박재홍 민변에 가입하게 된 것은 법학전문대학원 2학년 시절에 민변에서 실무 수습을 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당시 김선수 변호사님이 담당 변호사님이셨는데, 복잡하고 다양한 사건을 처리하시면서도 늘 평정심을 잃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배려해 주시는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이 멋져 보여, 수습이 끝날 즈음 김선수 변호사님께 추천사를 써 달라고 부탁을 드렸지요.

학부 시절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하던 한 선배가 술자리에서‘나중에 변호사가 되거든 꼭 민변에 가입해라, 만약 가입 안하면 나한테 주먹으로 맞을 각오해라.’라고 말했고, 저는 꼭 그러리라 다짐을 했었는데, 지금 민변 변호사로 나름 열심히 활동하고 있으니, 그 선배와의 약속은 지킨 것 같습니다.

변호사 합격여부가 발표되기 전 2달 정도 지역에 있는 비정규직센터에서 근무를 하다가, 우리 지역에 민변 선배이신 안호영 변호사님과 함께 지금 근무하고 있는 법무법인 백제에서 수습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었구요, 자연스레 민변 사건도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한 때는 시민단체에서 상근으로 일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물론 받아 주실지는 여쭤봐야겠지만요, 지부 민변 사무국장으로 시민 사회 단체의 다양한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접하면서 변호사로서의 역량이 일천하다는 것을 깨닫고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열심히 배우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부산 출신인데, 사무실 이름은 ‘백제’라서 가끔 “신라 사람이 백제에 와서 일도 하고 백제 처녀 만나서 아들 둘 낳아 잘 키우고 있으니, 우리 사무실과 제 가정이야 말로 동서 화합의 모범이다”라고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김지미 부산 출신이신데 어떻게 해서 전주에 터를 잡게 되셨나요?

 

박재홍 대학시절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전주에 왔다가, 성당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성당오빠나 교회오빠가 무섭다지요?) 처음엔 와이프가 프로포즈를 받아줄 때까지 전주에 있겠노라고 다짐했다가 결혼하고 아이들도 낳고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지금은 전주가 제2의 고향이 되었고 아이들은 백제 사람이 되었네요(웃음).

 

김지미 민변 활동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는 언제인가요?

 

박재홍 2012년도 말에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신 이병진 씨 관련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병진 씨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복역 중이신데, ‘작은책’이라는 잡지에 방북 경험 및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수필 형식으로 기고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 중 북한에 도착한 이후 북한의 실상을 묘사한 내용이 있어 전주교도소가 기고문을 발송 불허했고, 이에 대해 취소소송을 제기하여 1년 6개월에 걸쳐 대법원의 최종적인 승소 판결이 확정되고 난 후 전주교도소가 기고문이 담긴 편지들을 발송한 사건입니다.

그 기간 동안 이병진 씨로부터 편지를 많이 받았는데, 마지막 대법원 판결문을 보내드리고 나서 받은 편지에 ‘…형사재판에서 억눌리고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버리게 되어 홀가분하고,…제가 가장 어렵고 힘들었을 때 도움의 손을 내어 준 변호사님은 제 인생에서 소중한 분입니다. 변호사님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써 주셨습니다. 제가 민변 변호사로 역할을 다하고 있을지 의문이 날 때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위안을 받곤 합니다.

 

김지미 그럼 지부 회원의 입장에서 이런 점은 개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점도 있을까요?

 

박재홍 특별한 것은 없고요, 지금처럼 지부와 소통하면서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지미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박재홍 개인적으로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육아에 좀 더 신경쓰고 싶어요. 지금 5살 1살인데, 정서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시기라고 하더라구요. 요즘 첫째가 투정부리는 것이 늘어서 걱정이되기도 해서 다니던 운동도 포기하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회사 끝나면 일찍 들어가 아이들과 놀아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노후 준비는 ‘아내’라는 말이 있던데, 요즘 노후 준비 확실히 하고 있네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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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 차원에서는 올해 대구지부가 대구 송전탑 TF팀으로 모범 지부상을 수상하셨는데 전북지역도 군산 송전탑 문제가 현재 이슈가 되고 있거든요, 저희도 ‘군산 송전탑 TF팀’을 꾸려 내년에는 모범 지부 수상에 욕심을 내 보려고요(웃음).

더불어, 지부에서도 자체적으로 성명도 발표하고 현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계획입니다. 회원 수도 늘어났고, 워크숍도 하고 시민단체 연계 사업을 하면서 현장의 다양한 이야기도 듣고 있으니,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할 때라고나 할까요? 전북 지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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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5월 17일,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는 국제 질병 분류에서 정신질환으로 분류되던 동성애를 제외했다. 이를 기념하며 5월 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Transphobia and Biphobia로 지정되었다. 31번째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이하며,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사무국장이자 사업운영팀장인 보통 활동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 안녕하세요, 보통님과 띵동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에서 활동하는 보통입니다. 제가 활동하고 있는 띵동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위기를 지원하는 센터에요. 청소년 성소수자에게는 다양한 위기가 있습니다. 성적 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이유로 따돌림이나 가정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요. 정체성이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내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생길까’ 라는 두려움 때문에 불안하거나 우울감이 높은 경우도 많고요. 그 외에도 진로나 대인관계 등 청소년으로서 겪는 여러 고민과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띵동은 어떤 종류이든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청소년 성소수자가 있다면 이들을 만나 상담과 위기 지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보통 활동가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보통 활동가

Q.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더 이상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 이 힘든 시기를 넘기고 같이 살아가자는 마음을 모아 시작되었어요.

띵동은 2013년에 모금을 시작해서 2014년 겨울에 개소했어요. 띵동이 왜 모금을 하면서 시작되었는지 혹은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전문적인 센터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궁금한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다른 사회 집단들도 그렇듯) 성소수자도 자신들만의 커뮤니티가 있고, 이를 통해 서로 교류하면서 친밀하게 지내요. 수십 년 전부터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은 너무 많은 친구와 동료, 지인들의 안타까운 선택을 목격한 아픔이 있어요. 이로 인해 우울에 빠지기도 하고요. 그중에서도 특히 10대의 자살 위기가 높아요. 실제로 10대에 자신의 친구를 떠나보낸 경험도 정말 많고요. 10대 성소수자의 정체성이 밝혀졌을 때, 주변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움받을 곳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동안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성소수자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많이 애썼지만, 그럼에도 죽음으로 떠나보낸 청소년 성소수자가 많았어요. 띵동이 개소하기 전에도 소중한 청소년 한 명을 잃었습니다. 그때 더는 안 되겠다며 성소수자 인권 단체들과 이런 위기에 공감한 여러 사람이 모여서 모금 활동을 시작한 거죠. ‘우리가 돕자. 상담센터든 쉼터든 뭐든 만들자. 더 이상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 이 힘든 시기를 넘기고 같이 살아가자.’라는 마음을 모아 시작되었습니다.

Q.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정체성이 밝혀졌을 때, 주변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움받을 곳이 없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학생에게 ‘다른 학생들이 너의 특수함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괴롭힘을 감수하라.’며 학교 폭력을 정당화하는 선생님이나 자녀의 따돌림을 걱정하기 이전에 ‘네가 어떻게 성소수자냐. 너를 내 자식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집 밖으로 쫓아내거나 폭력을 가하는 부모님들이 계세요.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이렇게 내몰렸을 때 도움받을 곳이 없는 거예요.

한국에는 청소년 쉼터가 있어요. 청소년들이 집을 나가게 되었을 때 쉼터에 갈 수 있는 제도도 마련되어 있고요. 하지만 찾아온 청소년이 성소수자일 때는 쉼터에서 입소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가정 폭력을 당해서 집을 나왔다고 입소 상담을 했는데, 해당 쉼터에 성소수자가 입소할 경우 다른 청소년에게 해를 미칠 것 같아 입소가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온 적도 있고요. 트렌스젠더 청소년은 성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져 있는 쉼터의 특성상 어느 쉼터를 가야 할 지부터 고민해요. 고민 끝에 입소 상담을 받더라도 우리 쉼터에 못 들어오실 것 같다는 응답을 받기도 하고요.

Q. 쉼터 외의 청소년 센터는 어떤가요? 말씀해주신 쉼터들과 유사하게 청소년 성소수자가 원활하게 이용하기 어려운 상황인가요?

네. 구체적 사례를 인용할 수는 없지만, 이와 관련된 사례가 너무 많이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학교 안에도 위(Wee)클래스 상담이 있고 학교 밖에도 청소년 상담센터가 많이 있으나 복불복이에요. 그건 꼭 청소년 상담 센터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상담 센터도 그렇고요. 어느 센터의 어느 상담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상이해요. 어떻게 문제를 다뤄야 하는지 모르는 상담자들도 많고요. 어떤 상담자는 정체성 이야기만 해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부모님께 연락해 내담자를 아웃팅(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해 본인의 동의 없이 밝히는 행위)시켜요. 정체성에 대한 정보 공개는 본인의 동의와 충분한 확인이 필요한 문제인데 말이에요.

상담자가 혐오 표현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직 어리니까 좀 더 생각해보고 치료를 받아보라’는 혐오 발언을 했던 인권침해적 상담이 띵동에 제보된 적도 있습니다. 이 사례는 해당 청소년의 동의를 얻어 기사화하고 운영 기관에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를 했었습니다. 당시 띵동의 문제 제기로 인해 해당 기관에서 전체 상담자 대상 성소수자 인권 교육이 1회 시행되었는데,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모니터링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청소년쉼터 종사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는 보통 활동가

청소년쉼터 종사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는 보통 활동가

Q.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전문 기관의 부재로 생겨난 띵동은 주로 위기 상황에 놓인 청소년 성소수자를 만나는 것 같은데요. 한 해에 대략 몇 명의 청소년을 만나고 상담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궁금합니다.

띵동의 연간 상담 건수는 첫 해 220건에서 매해 점차 늘어나 2020년에는 487건이 되었어요. 이번 2021년은 500건을 넘길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 상담 이전에 카카오톡을 통해 상담 문의나 접수를 하고, 간단한 정보를 나누거나 일상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작년 한 해 2,400건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6명의 활동가가 매일 투입되고 있지만, 활동가들이 상담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캠페인·인권 교육·모금 등 비영리 민간 단체 운영을 위한 전반적인 업무를 함께 하다 보니 소화할 수 있는 상담의 수에 한계가 있어요. 상담 요청과 위기는 많은데 그 건수를 조절하며 운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담은 카카오톡 채널을 이용하여 신청을 해주면 상담 활동가와 일정을 잡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띵동 센터에 방문하셔서 대면 상담으로 진행하는 것을 권해 드리지만, 센터 방문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 전화 상담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방에 살고 있거나 부모님의 감시가 있는 청소년 혹은 성소수자 센터에 방문하기 두려운 분들이 주로 전화 상담을 이용합니다. 작년부터는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줌 상담도 추가되었습니다.

Q.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청소년’이자 ‘성소수자’이기에 복합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데요. 코로나19 이후 가중되는 어려움도 있나요?

(코로나19 이후)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느끼는 고립감도 굉장히 높아졌어요.
일상 공간에 있기만 해도 성소수자들은 외로울 수밖에 없거든요.
진짜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니까요.

기존의 상담 주제부터 말하자면, 띵동의 가장 많은 상담 주제는 정신건강(심리문제)입니다.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가 일상인 사회니까요. 본인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성소수자 혐오 표현이 학교나 가정에서 들리면 상처받게 돼요. 우울감과 함께,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죠.

두 번째로는 가족과의 갈등도 높습니다. 학대도 많이 다뤄지는 주제에요. 진로, 취업, 학업 등도 많이 다뤄지고요. 원래 청소년 상담에서 많이 다뤄지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내가 취업을 할 수 있나? 내가 성소수자인 게 밝혀지면 나는 어떻게 되지?”와 같은 걱정도 가지고 있어요. 진로와 학업에 대한 고민이 더 막막한 거예요. 성소수자로서의 롤모델이 부재하고 자립을 꿈꿀 수 있는 것들이 너무 없어요.

자립 상담도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되자 마자 집을 나가 자립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들이요. 성소수자인 자신을 가족이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많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독립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어요. 아니면 연애 고민도 있습니다. 짝사랑 혹은 연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까요.

코로나19 이후에는 대면이 어려워져 프로그램을 많이 줄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 건수는 늘어났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가정에서 폭력을 겪을 위기가 증가했어요. 실제로 이로 인한 탈가정 사례도 늘었는데, 코로나19로 청소년 센터들도 이용 인원에 제한을 두다 보니 탈가정한 청소년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나 지원이 줄어들어 위기가 높았던 2020년이었습니다.

성소수자 친구와 카톡을 하거나 전화를 할 때 가족이 보는 등 사생활에 대한 보호가 낮아지니까 아웃팅 위험이 커졌어요. 코로나19로 인해 외출 시마다 동선을 부모님에게 공유하면서 오프라인으로 성소수자 친구를 만나기도 어려워졌고요. 이렇듯 가정 폭력과 탈가정 문제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또래 친구와 어울릴 기회가 줄어들어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느끼는 고립감도 굉장히 높아졌어요. 일상 공간에 있기만 해도 성소수자들은 외로울 수밖에 없거든요. 진짜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니까요. 성소수자 모임을 나가거나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이러한 외로움을 해소해줄 수 있는데, 그걸 못하게 되니까 우울감과 고립감이 높아진 거에요. 코로나19 발생 이후 탈가정과 정신건강, 우울 문제의 상담 건이 굉장히 많이 증가했습니다.

2020-2021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활동보고서 ‘2020년 주요 상담 주제’ (p.12)

2020-2021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활동보고서 ‘2020년 주요 상담 주제’ (p.12)

Q. 청소년 성소수자를 지원하기 위해 띵동이 설립된 지 7년 정도가 흘렀는데, 점차 위기 지원이 필요한 청소년들이 많아진다는 게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요.

말씀하신 내용에 동의하면서도, 저는 다행이다 싶기도 해요. 시간이 흐르면서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의 수가 늘어난 게 아니라, 그동안 도움이 필요하지만 고립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던 청소년이 이제 띵동에게 연락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띵동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청소년이 혼자 고립되어 있지 않고 저희와 연결되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띵동을 모르는 청소년 성소수자들도 많으니까, 더 많이 연결되기를 희망하고 있어요.

Q. 청소년 성소수자를 지원하는 공적영역이 부재한 상태인데요,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국가와 국제사회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성소수자가 우리 시민이자 동료라는 인식이 필요해요. 이 인식에서 시작한 국가와 국제사회의 변화가 필요하고요. 2022년에 ILGAThe International Lesbian, Gay, Bisexual, Trans and Intersex Association라는 협회에서 LGBTIQ YOUTH: Future Present Change를 주제로 국제 컨퍼런스를 개최해요. 현재 청소년 성소수자의 삶과 미래를 주목하고 있는거죠. 국제 사회도 이들이 행복해야 하고, 삶을 유지할 수 있어야 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그래야 하죠. 이미 한국은 UN에게 경고를 많이 받아왔어요. 2019년 9월 유엔아동권리협약의 이행에 대한 제 5·6차 심의에서 한국 정부에게 아동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했고 실질적인 정책 시행을 요구했어요. 지금 느린 거죠.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지 10여 년만에 서울시교육청에서 2기 학생인권종합계획성소수자 학생을 보호하고 지원하겠다는 문구를 추가했습니다. 띵동에서 이를 질책하기도 했지만, 응원도 많이 했었죠. 그러나 예산표를 보니, 성소수자 학생 보호 지원 예산이 0원으로 편성되어 있었어요. 단지 명시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해요. 작년과 올해 극심한 트렌스젠더 혐오로 고통받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러고 있으면 안 되죠. 국제 정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이 답답합니다.

2021년 서울시교육청 제 2기 학생인권종합계획에 '성소수자 학생 보호 및 지원'이 포함된 것을 환영하는 현수막을 설치했다. (서울시교육청 정문 앞)

2021년 서울시교육청 제 2기 학생인권종합계획에 ‘성소수자 학생 보호 및 지원’이 포함된 것을 환영하는 현수막을 설치했다. (서울시교육청 정문 앞)

Q. 국가뿐만 아니라 성소수자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시민들, 특히 청소년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시민(앨라이)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일단 앨라이분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어요. 사실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게 대단한 일도 아니고, 칭찬받아야 하는 일이 아닌 게 맞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지지한다는 마음조차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

일단 앨라이분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어요. 사실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게 대단한 일도 아니고, 칭찬받아야 하는 일이 아닌 게 맞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지지한다는 마음조차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 그런 사회에서 ‘그래도 나는 앨라이다, 나는 성소수자를 지지하고 관심을 가질 거야’라고 말씀해주시는 분은 성소수자들에게 정말 큰 도움이 돼요.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너무나 위로가 될 테니, 만약 성소수자를 지지하고 계신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알려주세요. 누군가 성소수자 차별적인 말을 할 때 적극적으로 반대해주시는 것도 큰 힘이 되고요.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국민 청원도 계획 중에 있으니 많이 동참해주시길 바라요. 무엇보다, 성소수자가 우리 동료이자 시민이고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주위에 많이 알리고, 여러분들도 동료로서 같이 잘 살아주세요.

Q. 마지막으로,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이하여 청소년 성소수자를 포함해 모든 사람이 인권을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회원과 지지자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청소년들에게는 “다시 생각해봐. 일시적인 혼란이야. 고칠 수 있어.” 등의 말보다는, “네가 어떤 사람이든 괜찮아. 행복할 수 있고, 아니면 네가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라는 말이 필요합니다.

일단 성소수자가 낯선 분들도 많을 거에요. TV나 기사로 접하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고요. 사실 성소수자는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단지, 말하지 못할 뿐이죠. 그들은 외계인도 아니고 이상한 사람도 절대 아니에요. 여러분과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사람이죠. 성소수자가 오직 성과 관련된 사람이 아니라, 오늘의 식사 메뉴를 고민하고 일과에 피곤함을 느끼며 일상을 살아가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청소년이 성소수자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져요. “너 너무 혼란스러운 거 아니니?’, “넌 아직 어리니까, 그 때는 그럴 수 있어.”, “나도 네 나이 때 그랬어.” 등의 말씀을 하시기도 하고요. 청소년은 어려서 혼란스럽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주세요. 청소년기에 겪는 일시적인 혼란이 아닙니다. 정체성에는 혼란이 없어요. 내가 성소수자인 것 같을 때 그래서 앞으로 내가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할 때 엄청난 혼란이 찾아오긴 합니다. 그러나 이건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아니라 ‘내가 성소수자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내 주변 사람 혹은 이 사회가 나를 거부하지 않을까’라는 고민에서 오는 공포와 혼란입니다. 내가 성소수자가 아닐 수도 있어서 오는 혼란이 절대 아닙니다. 이때 청소년들에게는 “다시 생각해봐. 일시적인 혼란이야. 고칠 수 있어.” 등의 말보다는, “네가 어떤 사람이든 괜찮아. 행복할 수 있고, 아니면 네가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라는 말이 필요합니다.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은 만큼, 혐오의 말보다 서로를 지지하고 도와주는 말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더불어 청소년 성소수자의 존재를 알고, 띵동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오직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무지개빛 에너지 뿜뿜! 청소년 성소수자 응원프로젝트!

국제앰네스티는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이하며,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스트레스컴퍼니와 함께 청소년 성소수자 응원프로젝트 [영롱한 무지개빛 당신을 응원해요!] 캠페인을 운영중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세상의 혐오와 차별에 분노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듬고 이에 맞서 나로 존재하는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응원합니다!

화, 2021/05/18-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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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간 국제앰네스티의 국제사무국 소속 동아시아 조사관Researcher으로 일했던 아놀드 팡Arnold Fang 조사관이 5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앰네스티를 떠났습니다. 코로나19로 직접 만날 수 없어 온라인 상에서 작별 인사를 해야 했는데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커뮤니케이션팀의 신한나 팀장이 아놀드 팡 조사관과 만나 그간의 소회, 한국지부 회원과 지지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들을 들어보았습니다.
아놀드팡 조사관과 국제앰네스티 신한나 팀장

아놀드 팡 조사관은 홍콩에서, 신한나 팀장은 서울에서 줌으로 만났다.

한나: 안녕, 아놀드.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 너무 아쉬워요. 아놀드를 잘 모르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회원과 지지자분들에게 본인을 소개해 주시겠어요?

아놀드: 안녕하세요 저는 아놀드 팡입니다. 앰네스티 국제사무국 소속 동아시아 조사관이고요. 홍콩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 북한, 몽골, 일본 지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전에는 각 나라를 방문하며 조사 활동을 펼치기도 했고, 한국도 자주 방문했었어요. 북한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조사했고, 관련 단체의 역량 강화capacity building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고요. 북한 이슈를 알리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한나: 조사관으로는 얼마 동안 일하신 거죠?

아놀드: 2014년부터 7년 간 일했습니다. 생각해보니 꽤 오랜 시간이네요. 2014년에 입사하자마 한국지부에 방문했었어요. 노마(Noma) 조사관과 함께 갔었어요. 당시에는 사무실이 합정에 있었죠? (노마 조사관은 2007년 촛불집회를 다룬 <한국: 촛불 집회에서 경찰력 집행>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다.)

국제앰네스티 아놀드팡 조사관이 한국지부 사무실에서 PROTECT THE HUMAN 피켓을 들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아놀드팡 조사관이 한국지부 사무실에서 “PROTECT THE HUMAN” 피켓을 들고 있다

한나: 저도 그 때 생각이 나네요. 저와 거의 입사 동기였네요. (전 그 후에 잠시 떠난 후 재입사하긴 했지만요) 조사관 업무는 그 전에도 경험이 있으셨나요?

아놀드: 당시 인권 단체에서 조사관으로 일한 것은 앰네스티에서의 경험이 처음이었어요. 그 전에는 국제개발단체에서 일했고, 북한과 관련한 업무를 진행했었습니다.

한나: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아놀드: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랬습니다. 처음엔 정말 어려웠습니다. 국제개발 분야에서 북한 프로그램을 담당할 때와는 전혀 다른 관점이 필요했거든요. 국제앰네스티 안에서도 북한이라는 주제는 뜨거운 감자였어요. 북한에 대해 전 세계 여러 지부가 알고 싶어하지만,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쉽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북한에 대해 궁금하면 전 세계 지부에서 저에게 문의를 했었고요. (웃음)

한나: 한국지부에 4년 전부터 북한인권 담당자가 생겼어요.

아놀드: 한국지부에 북한 인권 담당자가 있는 것은 큰 성과입니다. 저는 한국지부가 북한 관련 인권 문제를 조금 더 주도적으로 가져가서 전 세계에 알리기를 바라고 있어요.

2016년 3월 9일 북한 인권 보고서 기자회견 현장에서 아놀드 팡 조사관

2016년 3월 9일 북한 인권 보고서 <통제된 사회, 단절된 삶: 북한 내 휴대폰 사용 및 외부세계 정보 제한 실태> 기자회견 현장에서 아놀드 팡 조사관

한나: 북한인권 외에 또 어떤 업무를 진행하셨죠?

아놀드: 여러 국가의 ‘표현의 자유’ 문제를 담당했었어요. 7년 전 국제앰네스티에서 처음 일했을 때 한국 내 시위대를 향한 과도한 경찰력에 대해 다뤘었죠. 홍콩 사람으로 현재 홍콩에서 벌어지는 시위에 대한 과도한 공권력 남용을 볼 때마다 그 때가 떠오릅니다.

조사관이 아니라 한 명의 개인으로 말하자면 지난 7년간 저는 한국사회의 변화를 목격했습니다. 한국사회가 시민들의 투표로 정권을 바꾸는 모습, 2016년의 촛불집회, 시민들의 힘, 피플 파워people power를 봤죠. 그 이후 표현의 자유나 집회 시위에 대한 이슈를 많이 다루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한국사회 내 LGBTI성소수자 인권, 군형법, 트랜스젠더, 여성 인권 이슈 등을 더 다루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조사하는 영역은 아니지만요)

한나: 코로나19 이후에 조사관으로서 달라진 점이 있나요?

아놀드: 각 나라 지부를 방문하는 것은 언제나 좋은 경험이었어요. 물에 손가락을 넣고 온도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현장’을 직접 느낄 수 있었어요. 각 지부의 직원, 협업 파트너, 평범한 시민들을 통해 인권 문제에 대해 듣는 경험이 저에게 정말 중요했습니다. 코로나19로 여행이 제한된 것이 안타까웠어요. 그러고 보니 제가 한국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게 2020년 2월 국제앰네스티 세계인권현황 연례보고서 발표 기자회견 때였네요.

한나: 저도 아놀드를 보지 못해 아쉬워요. 이제 앰네스티 조사관이라는 직업에 대해 물어볼게요. 앰네스티 조사관이라는 역할을 누군가에게 추천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요?

아놀드: 먼저, 인권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겠죠. 특히 국제앰네스티에 대해서도요. 국제법과 앰네스티만의 정책, 앰네스티의 입장에 대해 계속 배워야 해요. 글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엄청난 문서들을 작성해야 하거든요. (웃음). 읽는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각기 다른 글쓰기 방식도 필요해요. 유엔을 상대로 애드보커시 문서를 써야 할 때도 있고, 대중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써야 할 때도 있죠. 글쓰기 방식이 아주 다른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메시지를 읽는 이에 맞추어 잘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조사관은 많은 시간을 글쓰기에 쓰게 됩니다. 글을 쓰기 위한 미팅과 자료 조사, 또 다른 문서 읽기를 포함해서 말이죠.

보고서 『통제된 사회, 단절된 삶』의 표지

보고서 『통제된 사회, 단절된 삶』의 표지

한나: 조사관으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나요?

아놀드: 본인의 개인적인 의견이 있다고 해도 조사관은 앰네스티라는 단체를 대표해서 발언해야 합니다. 중립적인 입장을 표현해야 하고, 경청하는 것이 중요해요. 늘 자신에게 익숙한 주제만 다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파트너와 이해관계자의 이야기를 잘 듣고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나: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바라는 점이 있나요?

아놀드: 한국과 북한이 조금 더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도, 정보도요. 이산 가족들도 서로 만나고, 서로의 문화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사회 내에선 차별금지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봐요.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여러 소수자들을 위해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합니다.

한나: 한국지부의 회원과 지지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아놀드: 한국 시민들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어요. 이 변화는 희망을 주었죠. 홍콩의 많은 시민들도 한국의 사례를 보고 힘을 얻었고요. 우리가 모두 함께 변화를 위해 행동한다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시민들에게는 전 세계를 향한 사명이 있는 것 같아요. 시민들의 힘을 보여준 국가니까요, 이 어두운 세계 속에 계속 작은 빛을 내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한나: 마지막 질문이에요. 인권 단체의 조사관으로 일하는 것은 늘 스트레스와 마주하는 일일 텐데요. 본인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나 인내심 유지 비법이 있을까요?

아놀드: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일 이외에 다른 활동을 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전 요즘 운동을 많이 해요. 음악을 만들기도 해요. (아놀드는 앨범을 발매한 뮤지션이다). 액티비즘 이외에도 나만의 활동이 있어야 해요. 코로나19로 야외활동을 잘 하지 못하게 되면서 베이킹을 시작했어요. 어제도 샌드위치 빵과 사워 도우sour dough를 만들었답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아놀드에게 보내는 굿바이 편지

앰네스티 한국지부 동료들이 아놀드에게 남긴 롤링페이퍼, 온라인 롤링페이퍼로 작성해 보내주었다.

7년간 함께 일하면서 한국사회 내 인권의 변화를 경험한 동료를 떠나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멀어진 물리적 거리로 직접 전해주진 못했지만 한국지부의 동료들은 온라인 롤링 페이퍼로 아놀드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랜선 너머로 아놀드의 커다란 웃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놀드 팡 조사관, 수고 많았어요!
인터뷰: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커뮤니케이션팀 신한나
월, 2021/07/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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