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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인터뷰: 장영란(77/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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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인터뷰: 장영란(77/국문)

익명 (미확인) | 화, 2015/06/30- 16:16

내삶은 내가 창조하는거다가르침의 삶

                                                                    장영란(77/국문)

 

정선임: 안녕하세요.장영란선배님! 3년 전 무주에 있는 선배님 댁을 방문하여 하루 밤을 보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선배님 댁에서의 1박2일은 짧은 시간이였지만 소박한 삶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 이런 거로구나”하며 아주 구체적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자기 둥지를 틀러 나가기 시작하니 좀 줄이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안을 둘러보니 뭐가 그리 많은지요. 선배님 댁은 정말 있어야 할 것만 있는 단아하고 군더더기 없는 삶의 모습이였어요. 선배님 집이야기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장영란: 먼저 간단 소개를 해야겠지요. 77학번 장영란입니다. 96년 서울을 떠나 98년 무주에 자리 잡고 농사를 짓고 있어요. 그때 작은애가 돌도 채 되기 전이었는데 지금은 사회복무요원이랍니다. 부부는 농사를 짓고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지내니 네 식구가 하루 세끼 함께 먹으며 살았습니다. 징글징글하지요? 이렇게 4식구가 365일 24시간 붙어 지내는 우리 집은 평수로 15평. 시골집이다 보니 양 옆으로 헛간이 있긴 하지만 작은집입니다. 집이 작으니 적게 지닐 수밖에 없네요. 후배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놀란 게 아마 안방 때문일 텐데……. 아무것도 없고 뒷벽에 대나무 활대 하나 결려 있습니다. 아궁이로 불을 때는 구들방인데 아궁이 자리 위로 반다지 벽장이 있어 옷가지와 이불을 거기다 넣어놓으니 불편할 건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방. 이건 무슨 대단한 철학이 있어 시작된 게 아니라 구들방에 종이장판이라 뭘 놓으면 그 자리에 곰팡이가 피더라고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 놓고 살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살다 보니 좋데요. 사람이 잠자는 방이 고요하고 걸리적거리는 게 없으니까요. 또 손님이 오시면 그 방에서 모여 이야기 나누기도 좋고요.

정선임: 선배님 제가 찾아뵈었을 때 명상요가를 하셨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장영란: 명상은 했지만 요가쪽 명상은 아니고요, 그냥 가만히 앉아서 하는 명상을 했어요. 명상하는 분이 동네로 이사를 오셔서 명상이 뭔가 한번 배워보자 하고 시작을 했는데……. 한동안은 열심히 했어요. 아침저녁으로. 3년 이웃들과 명상모임도 하고요. 한데 안하던 사람이 하려니까 억지일 때가 있어요. 그래서 올해는 명상모임도 쉬면서 다음 단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명상을 하면서 뭐 깨달았냐? 그럴 리가. 다만 세계관이 바뀌었지요. 죽음이 무언가? 지금 이 생, 그리고 나. 생각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공부도 한 거지요. 그러면서 전에는 이게 옳아! 이런 절대선 기준이 강했다는 걸 알았지요. 아마 그래서 운동권과 잘 맞았던 것 같네요. 명상을 시작할 무렵이었을 거예요. 어느 날 돌아보니 내가 생각하는 게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내 삶은 내가 창조하는 거다’라는 가르침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창조하고 웃으면서 받아들이자. 이게 요즘 마음입니다. 혹시 명상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나비랑북스에서 나온 책 <옴니>를 권해 드려요.

정선임: 그리고 김광화선생님의 요즈음의 근황도 알고 싶습니다. 대학 안간 청소년들과 함께 즐거운 도모를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장영란: 우리 남편 근황은 질문자의 개인 관심사인 것 같은데요? 우리 부부는 거의 모든 삶을 함께 하니 그냥 내 이야기로 풀어가도 괜찮을까요? 우리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지 않더니 어느덧 대학도 다들 안 갔어요. 그 덕에 돈 걱정 없이 살았지요. 앞에도 산 뒤에도 산 옆에도 산. 첩첩 산에 살다 보니 사람이 아주 귀하지요. 아이들이 많이 외로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아이들은 자연이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삶을 알려 동지들과 만나려고요. 삶을 쓰는 일이 그래요. 어딘가에 연재를 하고 그 연재한 걸 모아서 책이 되려면 몇 년 거기에 집중해야 하더라고요. 이 책은 우리 4식구가 몇 년을 집중해서 얻은 보석이지요. 그 덕에 유유상종. 아이들 친구들이 생겨났고, 우리 아이들이 잘 자라났습니다. 이제는 학교 안 간다고 하면 ‘아! 홈스쿨링 하는구나!’ 하고 이해하는 사회문화도 만들어졌고요. 이렇게 우리 아이들 자랐는데, 문제는 연애와 결혼이에요. 그래서 우리 부부가 다시 ‘며느릿감 사윗감 기르기’를 해야겠구나 생각했답니다. 이 사회에 젊은 청년들 가운데 시골서 농사짓고 살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을 응원해 며느릿감 사윗감 풀을 만들어야겠구나. 우리 아이들이 시골서 살고 싶어 하느냐고요? 맞습니다. 이상하지요? 저이가 복이 많구나! 이렇게 넘어가 주세요! 자식들과 동지일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하지만 당사자인 우리 아이들은 고군분투해야 할 때가 많답니다. 아직 개척기니까요. 그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지요. 큰애가 스물다섯까지 집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는지 서울로 올라가 청년공동체 생활을 3년 했어요. 혼자서 고요히 살던 아이가 한 방에 넷씩 살고 한 집에 열 명 남짓 복작거리는 곳에서 살려니 어땠을까요? 여하튼 그 덕에 신랑감을 찾았네요. 올 5월에 어느 산골에서 친구들이 꾸려준 결혼식을 했어요. 결혼식도 젊은이들답게 1박2일을 하데요. 힘도 좋아라~~ 우리는 밤에 도망 왔지요. 지금은 전남 누구네 빈 집에 살면서 자기들의 보금자리를 만들 땅을 찾고 있답니다. 큰애 덕에 도시서 사는 청년들을 여럿 만나보았는데요, 시골서 살고 싶어 하는 젊은이가 제법 있어요. 뻔히 내다보이는 규격화된 삶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아보고 싶은 거지요. 그러려니 자본의 간섭이 약한 시골에서 몸 움직여 살고 싶다. 또 대안교육이 십년 이십년 흘러가면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청년들이 생겨나기도 하구요. 요즘 귀농학교에 19살, 스무 살 청년이 수강을 하는 것도 이런 흐름이겠지요. 어느 날 남편이 나서데요. 20대 젊은이 가운데 지금 시골서 사는 이들을 모으고 있어요. 요즘 시골에 스무 살 젊은이가 살고 있냐고요? 있긴 있어요. 다들 그리움이랄까 여하튼 마음이 통해 지금 작은 모임을 하고 있답니다. 아직까지는 주먹 안에 들어갈 작은 눈덩이지만, 앞으로 청년유랑단을 만들 예정이에요. 누군가 불러주면 달려가 ‘시골서 사는 20대 청년 이야기’를 해 주려고 하고 있답니다. 응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선임: 제가 찾아뵈었을 때는 직파법으로 논농사를 지으셨던 것 같은데 농사 이야기도 들려주시고 선배님 가족이 함께 쓴 ‘아이들은 자연이다’, ‘자연달력 제철밥상’의 책이야기도 부탁드립니다.

장영란: 하룻밤 자고 갔는데 유심히 보셨네요. 우리 남편은 논을 사랑해요! 상주 들판 사람이라 벼농사 짓던 유전자가 강한 듯해요. 논농사 지으며 한쪽에서 이런저런 실험을 여러 해 하더니 직파를 하고 있습니다. 직파가 뭐냐? 논농사를 잘 몰라도 모내기는 아시지요? 모내기는 못자리에서 벼의 싹을 길러서 그 모(벼 싹)을 논에 심는 일을 말해요. 우리는 손으로 모내기를 십년 이상 했어요. 아. 힘들어라.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허리가! 직파는 모내기 없이 볍씨를 논에다가 바로 흩뿌리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농사만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몇날 며칠 새벽부터 저녁까지 할 일이, 한 시간 볍씨 훌훌 뿌려가지고 되니까요. 물론 말같이 쉬운 건 아니에요. 일단은 벼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벼만이 아니라 논에서 사는 여러 가지 풀까지도 잘 알아야 해요. 일만 쉬운 게 아니라 벼가 달라요. 벼가 활개 치며 자라는 게 눈에 보인답니다. 농사법도 농부의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어요. 직파는 벼를 좀 더 자연스럽게 길러보고 싶다는 거지요. 유치원부터 대학에 유학까지 공들여 자식을 기르는 집이 있는가 하면 우리처럼 학교에도 안 보내고 그냥 놔두니 저 알아서 크는 집이 있는 것처럼요. 올해 논농사가 잘 되면 나중에 쌀을 팔까요? 논에서 활개 치고 자란 쌀을요. 논에 직파를 한다면 밭은 자연농법을 합니다. 기계로 땅을 갈지 않고요, 되도록 땅이 스스로 살아나게 하는 농사입니다. 풀은 호미로 일일이 다 매요. 유기농은 농약 비료를 안 주는 농사라면 자연농법은 기계 비닐 이런 것까지 쓰지 않는 농사에요. 온갖 기계와 기술이 발달한 지금에 맞지 않지요? 뭐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직접 해 보면 식구들 먹을거리를 이것저것 조금씩 심어 가꾸기에 좋아요. 이렇게 자연에 맞추어 자급자족하는 농사 이야기가 바로 <자연달력 제철밥상>입니다. 귀농계 베스트셀러라 ‘귀농의 정석’라는 별명이 있지요. 혹시 텃밭을 조금이라도 가꿔 볼 생각이 있는 분이라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시골 밥상에 관해서 여러 군데 글을 쓰고 책도 여러 권 냈어요. 산골서 식구들과 살면서 하기 좋은 일이 글 쓰는 일이더라고요. 돈도 들어오고, 십만 원 이십만 원 이 돈이 도시서는 푼돈일 수 있지만 시골서는 쏠쏠해요. 또 나도 이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도 생겨 농사도 더 열심히 짓게 되더라고요. 그 사이 인터넷과 디지털 카메라까지 생겨나서 글 쓰고 사진 찍어 언론사나 출판사에 보내는 게 다 집안에서 할 수 있으니까요.

지난해까지 한겨레신문에 “숨 쉬는 밥상‘ 연재를 마치고, 요즘에는 꽃 이야기를 쓰고 있답니다. 꽃은 꽃이되, 벼꽃, 콩꽃, 고추꽃, 호박꽃 이런 우리를 먹여 살리는 농작물의 꽃 이야기이지요. 남편과 둘이 공동 작업을 하고 있는데 착착 잘 되네요. <아이들은 자연이다>때 집중해서 몇 년 공동 작업할 때를 떠올리게 되네요. 그때도 참 좋았지요. 부부로 여러 해 살면서도 둘이서 정신세계에 대해 이렇게 진지하게 교감을 나눠본 적이 없었거든요. 지금은 식물 하나하나에 관해 혼자라면 살피지 못할 여러 면을 둘이기에 서로 묻고 새로운 각도에서 사진으로 남기는 일을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살면서 늘 밥 먹고, 콩 먹고, 오이 먹고 살지만 그 식물들이 어떻게 꽃을 피워 자손을 번식시켜 가는지? 모르잖아요. 내 몸을 이루는 벼와 콩에 대해 그 생명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나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져요. 기독교에서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고 하잖아요. 그 말이 뭔 말인지 이해가 가지요. 그래서 곡식 꽃에 관한 이야기와 사진을 하나하나 모으고 있답니다. 또 이렇게 모인 사진으로 동영상(곡식 꽃 하나에 3분, 5분짜리)도 시나브로 만들고 있어요.

정선임: 마지막으로 서강민주동우회에 하고픈 말씀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장영란: 멀리 살다 보니 민동 모임에 가지 못한지 오래네요. 민동 사무국이 다시 꾸려져서 반갑습니다. 멀리서나마 응원할 마음을 딱 먹었는데, 이런 인터뷰를 해 달라고 하네요. 하라는 거라도 고분고분 하기로 했는데 이런 질문이 떡 달려있네요. 제대로 참여도 안 하는 사람으로 주제넘은 이야기라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그래도 한마디 해 볼까요? 개떡같이 이야기해도 찰떡같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전여농이라는 단체를 아세요? 전국여성농민연합회. 우리나라 농민운동이 다시 일어나면서 전농(전국농민연합회)이 생겼지요. 그때 농촌여성들의 자주적인 활동을 위해 따로 여성농민연합회를 만들었으니 전농과 커플 조직입니다. 전여농은 투쟁투쟁! 농민운동에 열심인 조직인데요, 여기서 몇 년 전 토종씨앗 운동을 시작했어요. 지금 토종씨앗 모임인 씨드림이 바로 전여농 덕에 만들어진 모임인데요, 농촌여성들이 우리 토종씨앗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걸 모으고 실험 재배하는 일을 하면서 모임이 새롭게 바뀌는 걸 지켜보았습니다. 뭔가에 대항하는 모임에서 뭔가를 창조해나가는 모임으로.

민동 역시 태생이 투쟁 투쟁이잖아요. 게다가 현직 대통령의 출신학교로서 부담도 있을 테고요. 하지만 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자고 하는 일이잖아요. 민동 회원들이라서 할 수 있는 행복한 일이 뭐가 있을까?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민동 식구들은 피붙이 같아요. 그냥 학교 동창이 아니라 사촌 육촌 같다고나 할까요. 다들 자기가 하고픈 대로 맘껏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 가운데 혼자라서 못한 그 하고픈 것. 투쟁을 넘어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가는 민동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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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균동문 재심 시작하다 

                                       

1987610, 대한민국 곳곳은 군사독재 타도를 외치면서 참여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함성으로 가득 메워졌다. 당시 정당한 요구를 하는 시민들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부당한 법 집행으로, 죄 없는 자국의 국민을 간첩으로 몰아 구금·고문·재판에 회부하면서 그 당사자와 가족에게 큰 고통과 상처를 입혔고, 역사에 지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그리고 후유증은 아직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87년 당시 국군보안사령부와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서 조작·발표된 일본 유학생 간첩 사건이다. 이 사건의 피해자인 장의균(70 신방)동문의 간첩조작 사건에 대한 재심심문이 61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법무법인 지향의 재심심의 요청으로 진행되었다. 그 첫 심문이 7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으며 다음 심의는 721240분 서울고등법원 서관 505호에서 열릴 예정이다.

장동문은 당시 37세의 나이에 간첩이라는 낙인 속에 차디찬 감옥에서 사랑했던 가족·친구들과 떨어져 8년이란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제 2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받은 고문의 후유증과 간첩이라는 낙인은 장동문의 삶을 너무도 힘겹게 짓누르고 있다. 이제 정확한 사실을 입증하여 진실을 밝혀내고 다시는 이 땅에 치욕의 조작사건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간첩도 만들어지는 걸 아십니까?>

윤혜경(장의균 동문 부인)

국민 여러분! 한마디의 간첩신고가 국가 안보의 초석이 됩니다....”

부평에서 종각까지 출근하는 나는 매일 아침, 부천역과 역곡역 사이, 시청에서 종각역에 닿는 동안에 어김없이 방송되는 목소리를 새겨듣습니다.

국민 여러분! 간첩을 신고하시면 삼천만원의 상금을 드립니다....”

때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듣고 있는지 무심한 표정들을 살피기도 합니다.

당신은 간첩이 만들어 지는 것을 압니까? 나는 만들어진 간첩과 그 가족들을 알고 있습니다.” 커다랗게 외치는 마음 속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저녁 종각역과 부평역을 오가면서 방송을 들으며 새삼스레 공안정국이라 이름 붙여진 요즈음의 세상살이에 분노하기도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나약함에 부끄러워 체념하지 않으려 열심히 사는 많은 사람들, 건강한 우리 아이들을 떠올립니다.

 

요즈음 올림픽 일주년 기념행사를 한다는 선전이 요란합니다.

지금은 까마득히 느껴지는 올림픽 공식신발’‘올림픽 공식라면’‘올림픽 공식○○온통 올림픽 홍수 속에서 살던 때였습니다.

엄마! 북한 사람들이 오면 환영해야지? 우리는 한민족인데..” 학교에서 돌아온 국민학교 4학년 여림이가 당치않다는 듯 이야기합니다.

열 문제인 도덕 시험에서 하나 틀렸다고 했습니다. 서울 올림픽을 맞이하여 북한 공산당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문제인데 보기가 경계해야 한다.환영해야 한다 .... ....였습니다. 딸아이는 환영해야 한다 라고 했고 선생님의 정답은 번이었습니다. 선생님께 말씀드렸냐는 물음에는 고개를 흔드는 여림이에게 틀렸어도 네가 맞는 거야. 우리는 같은 민족이니까 통일이 될 거니까 환영해야지라고 했지만 감옥에 갇힌 아빠를 둔 딸아이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과 같이 살고 있는 부모의 가르침의 차이에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며 착잡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우연히 TV에서 북한을 다녀왔다는 교수의 인터뷰를 아이들과 함께 보았습니다. “엄마! 왜 저 아저씨는 북한을 다녀왔는데 TV에도 나오고 우리 아빠는 일본에서 북한이랑 친한 사람 만났다고 감옥에 있어야 해?” 아이들은 정주영씨. 박철언씨는 구속되지 않고 문익환 목사.서경원 의원, 문정현 신부, 임수경은 구속 되어야 하는지를 그렇게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간첩이 된 서경원 씨가 독일에서 만났다는 사람 중의 하나가 그 교수였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때 TV에 나왔던 교수가 또 얼마 전에는 간첩의 동조자로 신문에 나온 것을 결코 알 수가 없었습니다.

2년 전, 198794일 내 남편은 하루 저녁 사이에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모든 신문마다 5단 이상의 기사를 채우고 덧붙여 해설기사, 사설에까지 등장하고 TV에 특집으로 방송되는 등 톱뉴스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정치권 침투 사건‘. ’재야 침투 간첩 장의균‘ ‘일본 유학 중 조총련 자진포섭’ ‘대학 재학시 좌경 사상에 물들어..’ 온갖 제목이 붙여져 신문에 난 남편의 모습은 우리가 배워 온 간첩답게 흉악범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세 아이의 아버지로 여길만한 모습은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간첩사건에 꼭 있음직한 조직표에는 나도 한 몫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엄청난 간첩가족으로서의 생활이 공표된 것입니다. 이미 두 달 전에 잡혀가 이틀 전에야 구치소에서 만난 남편으로부터 안기부 마음대로 되거나 검사 마음대로 되는 사건이 아니다. 정치적 판단에 따라 이용된다. 죄가 아닌 부분을 죄로 만들어 놓고 저항할 수 없는 서류가 되더라도. TV에 나더라도, 세상을 속이려 하지 마라. 당하기 싫어서 못하고 사는 것, 역사적으로 권리를 찾아라. 아이들에게 아빠는 통일을 원하는 사람이라고 하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의 일이었지만 붉은 전사 장의균으로 방송되는 특집에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의 행동 하나 하나는 지령을 받고,, 간첩하고..,로 계속되었습니다.

두 달 전 눈가리우고 끌려가 때론 치료해 주기도하면서 고문 받고 10일이 지나서야 2시간 재우고 보안사에 있던 한 달 간 하루에 2~3시간씩 밖에 재우지 않는 동안에 그들은 내 남편을 간첩으로 연출시킨 것입니다.

장의균씨는 1970년에 서강대학교에 입학해서 1980년에 졸업을 한 조금은 일상적이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구두닦이, 넝마주이 생활을 하며 개발되기 전의 잠실에서 개미회라고 하여 20~30명의 구두닦이, 넝마주이들의 살림을 맡아 함께 살기도 하였습니다. 결혼을 하고 학교에 복학한 후 우리말,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갖고,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깊은 감동을 받아 주역, 상고사 공부 등을 하며 개마서원이라는 출판사를 만들어 단기고사, 진한국마한사 등을 펴내기도 하였습니다. 1985년에 나름대로의 결심을 하고 일본으로 가 교토대학에서 우에다 마사하끼 교수의 개인연구원으로 공부를 하면서 세 아이 아버지로 노동을 해서 돈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남과 북이 한데 모여 사는 일본에서 상고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민족의 통일에 관심을 갖고 민족의 미래를 확인하고자 일본에 있는 조총련계 대학인 조선 대학을 방문하고 통일문제를 공부하고 토론한 것이 저들에게 준 빌미의 전부입니다. 박종철 사건 이후 고양된 국민들의 의식에 도움이 되고자 정치사회연구소라는 연구소 설립과정에 참여하다가 연구소 발족 5일 전 198775일부터 갇혔습니다.

6.29선언 바로 며칠 뒤의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속이구로 알게 된 5공 말에 내 남편의 간첩으로서의 역할이 정권을 지키려는 자들에 의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2년이 지난 지금 백담사에 전 대통령을 가둔 우리 국민들은 얼마나 거짓된 것이 많았는가를 느끼기는 합니다. 그러나 분단된 땅에 살면서 공안의 이름으로 붙여진 일들에는 설마! 무언가 있었겠지라는 안이함으로 저들의 정권욕에 어두운 조작, 인간성을 말살하는 고문을 방기함으로 분단의 벽을 두텁게 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몸으로 겪은 진실을 큰소리로 외칩니다.

여러분! 간첩도 만들어 집니다!!!!

화, 2015/06/30-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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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회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범국민추모제 엄수되다>

 

 

671시 보신각에 전국대학민주동문회협의회(이하 전민동) 소속의 민주동문들과 각 대학 재학생들이 엄숙한 마음으로 집결하였다. 80년대 군부독재정권을 청산하고 민주화쟁취를 위해 희생된 학생열사 합동추모제를 계기로 현 정부와 수구세력의 반역사적 책동을 저지하는데 힘과 지혜를 모아나가기 위해서이다.

서강민주동우회에서도 오세제회장과 정선임국장이 김의기열사의 영정을 모시고 보신각에서 청계광장까지 열사거리 순례를 하였다. 이어 청계광장에서 학생열사 희생자 합동 추모 문화제를 진행하였으며 3시 노동열사 순례단과 결합하여 범국민추모제를 함께 진행하였다. 그리고 윤봉구(83 물리)동문이 서강민동 깃발을 들고 기수단으로 참가하였다.

전민동과 전대협동우회는 후배 학생운동세대와 함께 매년<민족민주 학생열사. 희생자 합동추모 문화제>를 공동으로 추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이를 통해 연대와 소통을 공고히 하여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고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역사를 만드는데 소임을 다할 것임을 결의하였다.

 

화, 2015/06/30-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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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운영위 열리다>

626일 여느달과 같이 네 번째 금요일, 위지안에서 민동 운영위원회가 열렸다. 가장 주된 논의사항은 운영위 워크샾에 관한 것이었다. 현재와 같이 아직 운영위원이 없는 학번이 많은 상황에서는 현재 출석하고 있는 운영위원들 중심으로 구심점 형성이 중요하다는 취지였다. 나아가 현재의 운영위원 조차도 민동 활동에 대한 기대와 전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서울 근교에서 1박하며 충분히 의논할 기회를 가지려한 것이었다. 회장이 직접 발제하여 왜 민동을 해야 하는지, 내년에는 어떤 사업을 할 것인지에 관해 논의하려 했다. 이에 대해 이정수위원은 잘 되는 학번에 집중하고 아직 10명도 안되는데 이르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와 같은 의견이 많아 일단 운영위원이 더 확충될 때까지 연기하기로 하고 현재의 운영위원회에서 많은 논의를 하기로 했다.

 

두 번째 사안은 우리 회원 가운데 귀농 귀촌자가 많고 유기농을 비롯해 믿고 먹을 수 있는 농산품을 많이 생산하는데 아직 농사가 오래 되지 않아 충분한 판매루트를 확보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민동에서는 이들의 생산품과 시기 등을 파악하여 도시에 사는 회원들과 연결하자는 사업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정선임사무국장은 그 계기로 정재경장학회가 구상하고 있는 11월 김장계획과 연계하여 추진하면서 장터를 펼치고 귀농자모임을 활성화하는 계기로 삼아 귀농 동문들의 상품도 소개하자고 제안했다. 아울러 김종기위원은 가을에 큰 모임을 통해 동기들끼리 모여 자유롭게 얘기할 기회를 만들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이정수위원도 운동회를 가져서 다수 동문들이 모이는 계기를 갖자고 제안했다. 원래 집행부도 가을소풍 계획을 가지고 있던 터라 이 구상은 사무국의 구체적인 확인과 조율을 통해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가을부터 적극 추진하려던 컨셉을 가진 걷기는 동문 중 걷기대장도 찾고 내년부터 추진하기로 했다. 현재 모임이 진행되고 있는 운동성을 가진 동아리도 동문모임 때 동아리모임을 제안하기로 했다.

그 외에 518재단이 제안한 서울의 518사적지 순례도 검토하기로 했고, 박승현동문(82 국문)이 감사를 맡기로 수락했다는 점, 비영리재단이 되면 동문들이 내는 회비와 기금을 연말 소득공제할 수 있다는 점 등도 정확히 확인해 추진하기로 했다. 아울러 아픈 동문이 있는 경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대응하기로 했고, 소식지 편집위원장도 시급히 구하기로 했다.

화, 2015/06/30-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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