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모임, 김기석 목사의 '지금 여기 정의로운 생명 평화' 강연회
예수살기 수도권 11월 모임이 17일 향린교회에서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정필교 목사의 사회로 시작된 이날 모임은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의 ‘지금 여기 정의로운 생명 평화 - 참으로 인간이고자’라는 주제의 강연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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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는 함석헌 선생의 ‘얼굴’, ‘잃어진 얼굴’, ‘당신은 언제 민중을 건지시렵니까?’ 등의 시와 함께 강연을 이어갔다. 김 목사는 사회를 소비사회, 피로사회, 단속사회 등으로 규정하고 인간을 발전 강박에 사로잡혀 신기루를 좇아 분주하게 살아가는 존재로 정의하면서 이런 때야 말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고 오늘의 세상을 진단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창조될 때 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지만 신의 형상답게 살지 못했고 에덴 이후의 상황은 공포심, 불안에 떨게 되었으며 도시라는 일상화된 폭력의 세상에 거주하게 되었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마음의 여백은 잠식되었고 사소한 피해에도 맹렬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존재가 돼버렸다. 창세기는 온통 형제간의 경쟁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럼에도 이 경쟁은 화해를 지향한다.
김 목사는 성경의 이야기를 반(反)제국주의 담론으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바벨탑은 제국의 은유이다. 동일성의 폭력이 자행되는 제국은 일정한 틀에서 찍어낸 벽돌처럼 다른 견해를 배제하고 그것들을 역청처럼 결합시킨다. 그런 바벨탑을 신은 허물어뜨렸다. 신은 문화의 다양성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피라미드는 모든 제국이 상징이다. 특정한 사람에게 집중된 경제력, 기득권의 이해를 반영한 관료제도, 그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피지배계급으로부터 거둬들이거나 전쟁을 통해 충당한 재화, 그리고 피지배계층의 불만과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발생한 사제계급. 이런 구조에서 종교와 권력이 불의의 연대를 이루고 피지배계층은 피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성경은 반제국의 담론으로 읽을 때 제대로 보인다.
제국의 폭력에 신음하는 히브리인들을 신이 이끌어낸다. 열 가지 재앙으로 제국을 심판했고 피라미드의 맨 아랫단을 형성하던 이들은 압제의 땅을 벗어나 홍해를 건넜다. 제국의 군대는 홍해에 수장되었다. 이 이야기는 어떠한 지상이 권력도 상대화해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반면 광야는 새로운 삶, 평등공동체의 이상을 배우는 공간으로 함께 배고픔과 목마름을 겪어내면서 ‘너’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생명의 본질을 알게 해주었다. 그러나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운명공동체로 거듭난 히브리인들은 제국의 유혹에 저항해야 했고 제국의 길로 빠져들려 할 때마다 예언자들이 등장해 경고했다.
신약의 첫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황제에게나 사용하는 표현들을 예수에게 부여하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세상의 구원자, 평화의 왕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호칭들은 예수의 본질규정이라기보다는 제국의 질서에 대한 반(反)담론이자 보잘 것 업는 이들이 우정을 나누는 세상, 경계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담고 있다.로마제국의 대칭개념인 하나님 나라는 다른 삶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제국은 예수를 처형함으로 그 꿈을 처형하였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예수는 부활하였고 초대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공동체, 우정에 바탕을 둔 세상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지금 신자유주의라는 훨씬 더 음험하고 위협적인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 문제는 종교조차 자본주의 질서에 포섭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는 불편한 진실들과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편리함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않고 삶의 방식을 바꾸려고 하지도 않는다. 즉물적 삶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성찰을 거부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이미 늦었다는 비관론에 빠져들거나 결국 과학이 문제를 해결할 거라는 천박한 낙관주의에 빠져드는데 공통점은 지금의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겠다는 것이다.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세상은 루저, 패배자라고 분류하겠지만 이런 자발적 소외를 선택한 이들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움튼다. 세상에 대한 염증과 절망,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과 생태적 감수성이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한다. 남과 구별되는 희소한 것을 얻으려는 시도는 유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희소성의 신화에서 벗어나는 순간 작고 사소한 것들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며 남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선물로 받게 된다. 상처-힐링이라는 도식을 맴도는 영성에 대한 담론은 타자의 고통에 예민해지는 것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삶이 주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길은 고통 받는 타자를 통해 열린다. 레위기 성결법전은 거룩한 삶을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규정한다. 이웃 사랑으로 귀결되지 않는 거룩함은 위선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대화될수록 이를 벗어나려는 이들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세상에서 성공을 재정의하고 삶의 문법을 가꾸려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공히 붙잡고 있는 성경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골3:23)’ 이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들에게 아픔의 자리로 내려가라고 말한다.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것이다.
김기석 목사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누구를 돌보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을 때이다. 진정한 경건은 돌봄으로 표현된다. 그런 돌봄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섬김이다. 이제는 새로운 인류가 등장해야 할 때이다. 발전강박에서 벗어난 사람, 행복을 구성하는 다른 길을 찾은 사람, '홀로 주체'로 서기보다는 '서로 주체'로 살아가려는 사람, 타자의 눈물을 렌즈 삼아 하늘을 볼 수 있는 참 사람 말이다. 우리는 이런 소명 앞에 서 있다.”는 말로 강연을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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