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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차 정기총회 감사 인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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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차 정기총회 감사 인사말

익명 (미확인) | 수, 2015/06/10- 14:30

28차 정기총회 감사 인사말

 

- 회장 한택근

존경하는 회원 여러분,

 

제28차 민변 정기총회가 2015.5.30.-31. 양일간에 걸쳐 경주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번 총회는 132명의 회원과 60여명의 가족들이 참석하여 역대 최다 참석자를 기록하며 성황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우선 제28차 정기총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될 수 있도록 관심과 성원을 보내 주신 모든 회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총회 식전 행사에서는 모임이 ‘회원 1,000명 시대’를 열게 된 것을 자축하고, 모임의 진로를 모색하는 진지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정기총회에서는 모임의 임원선출에 관한 회칙 규정을 정비하였고, 조직의 중·장기적 발전을 모색하기 위한 발전기금 사용 승인 안건을 통과시켰습니다. 저희 집행부는 안건을 통과시켜 주신 회원들의 뜻을 받들어 모임의 발전을 위해 배전을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나아가 이번 정기총회는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회원 분들의 뜨거운 열망과 헌신적 활동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참석한 모든 회원들이 일어나 ‘회원 천명 시대를 맞는 모임의 특별결의문’을 함께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민주사회를 향한 회원들의 결의를 서로가 확인할 수 있었던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 모임은 중대한 도전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모임의 지속가능성과 발전을 담보할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야 하고, 밖으로는 시대를 역행하는 권력기관에 맞서 사회적 약자와 서민의 인권을 보호할 책무를 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도전을 슬기롭게 풀어나갈 수 있는 희망을 정기총회에서 보여주신 회원 여러분의 열망과 결의에서 찾고자 합니다. 집행부와 사무처는 회원 여러분의 헌신과 지혜가 샘솟을 수 있도록 하는 마중물의 역할에 충실하겠습니다.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고, 정의가 넘실대는 ‘민주사회’로의 여정은 한시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민변의 자랑스러운 선배님, 동료 및 후배 회원 모두 깊은 동지애로 함께 걸어갑시다. 그 길에 함께하는 모든 회원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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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자원활동가 작성

공익인권변론센터 김시은, 박지아, 서영우

국제팀 양진희

출판소통팀 이재임

언론연대팀 정원영

지난 밤 너무 기대한 탓일까요, 늦잠을 잔 나머지 서둘러서 서초동의 휴먼사무실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세이프. 여유롭게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준비한 인터뷰 질문지를 눈으로 훑어보았습니다. 민변 자원봉사자들이 준비한 질문들은 대개 ‘현장’과 ‘노동인권’에 대한 것들입니다. 미리 인터넷으로 검색해 찾아본 류하경 변호사는 ‘현장에 익숙한 노동변호사’로 보였습니다. 구글 검색창에 류.하.경.이라는 세 글자를 적어 넣으면 ‘삼성건물 못 들어가는 변호사’라는 기사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삼성건물 경비원마저 익히 알고 있을 정도로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연대하는 분이라고요. 인터뷰가 진행된 날, 류하경 변호사는 ‘대한문 집회’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민변 자원봉사자들은 류하경 변호사가 ‘현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노동변호사’가 되기까지 어떤 고민과 실천을 해왔는지 엿보고 왔습니다.

류하경(이하 류) : 뭐 저 같은 사람을 인터뷰하러 먼 데까지(웃음).

박지아(이하 박) : 변호사님, 자신을 한 마디로 소개하신다면 어떻게 하실 수 있을까요?

류 : 한 마디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길게 쓰라고 한다면 밤새도록 쓸 수 있는데. 저는 강아지를 좋아하고, 기타 치는 걸 좋아하고, 자전거 타는 것도 좋아하고, 운동 좋아하고, 그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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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 현장에서도 기타를 많이 치지 않으셨어요?

류 : 현장에서도 많이 치죠. 내가 이러려고 기타를 배웠나. (웃음) 기타를 오래 쳤어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치고 있어요. 저는 홍대에서 밴드하려고 신촌-홍대에 있는 대학 가려고 공부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올라오니까 나쁜 선배들이 뭔가 주면서 ‘이거 한 번 읽어볼래?’라고 하고, ‘수요일에 뭐 해?’라고 물어서 ‘별거 없는데요’ 그러면 ‘그럼 정문 앞에서 봐.’ 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정문 앞으로 나가면 투쟁하고 있고.(웃음) 그래서 밴드의 꿈을 접고 이렇게 살고 있죠. 지금은 사무실에서 일렉 기타를 쳐요. (류하경 변호사가 기타를 꺼내 들고 나옴. 일동 함성)

밴드를 꿈꾸던 학생, 학생운동의 현장으로

박 : 학부 때 ‘나쁜’ 선배들이 이리저리 데려갔다고 하셨는데, 그걸 계기로 노동운동에 관심이 생기신 건가요?

류 : 그렇죠. 저는 1학년 때부터 학생운동을 했어요. 집회의 기초를 1학년 때 마스터했죠. 2학년 때는 학교 안에만 있기보다는 진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같이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책은 많이 보잖아요. 하지만 책은 종이에만 머무는 거니까 실제로 빈민, 농민, 노동자를 느끼고 싶더군요. 그래서 2학년 때 일산의 아파트촌에서 철거촌 투쟁을 하면서 철거민들과 6개월 정도 살았죠. 그리고 군대 가기 전까지 학회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정치경제학 학술 동아리.(웃음) 공부도 하고 술도 마시는… 그래서 학점은 이제…(웃음) 저는 늘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우리 학교 등록금이 비싼 이유는 정치경제학 동아리를 하라고 그런 거다. 정치경제학 공부를 하지 않고 졸업한다면 대학 등록금비를 헛되게 쓴 것이라는 헛소리를 남기면서. (웃음) 제 대학생활의 절반은 정치경제학 학회였고 절반은 투쟁 현장이었고. 노동조합에서 학생들과 연대하는 활동들을 많이 했어요.

박 : 청소노동자 조합 운동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류 : 군대 제대하고 복학을 했는데, 학생 사회가 너무 경직되어 있는 거예요. 대학생 운동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학생 운동을 하는 친구들은 공부를 우선으로 해요. 공부도 좋지만 현장 투쟁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진짜 운동이거든요. ‘다 불태워서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견학 하듯 투쟁 현장 나갔다오길 반복하고, 이렇게 일시적 단편적인 운동만 계속 이어지구요. 그런데 현장 경험이 일천하면 책을 읽어도 한계에 빨리 봉착하게 돼요. 우선 상상력이 그만큼 낮아지고, 똑같은 책을 읽더라도 노동자로서 살아본 사람이 읽는 거랑 대학 와서 마르크스 서적만 보는 사람이 읽는 거랑 그 책의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또 책을 읽었을 때의 변화도 달라요. 실제로 땀 흘려서 노동하고 내 힘으로 투쟁해서 쟁취해본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때 보여줄 수 있는 변화의 폭과 양은, 계속 책만 들고 팠던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삶의 변화와는 천지차이예요.

내가 주체가 되어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가는 운동에 대한 목마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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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학생운동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내 인생의 경험을 쌓기 위한 운동(이었던 것 같아요). 학생운동하면서도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이런 생각을 은연중에 하거든요. 특히나 학생 운동을 하는 시기에는 그런 욕망이 커요. ‘이 운동을 하면서 내가 성장해야지’, ‘내가 여기 가서 뭘 배우고 나중에 좋은 사람이 되어서 사회에 기여를 해야지’, ‘직접 가서 눈으로 목격해야지’와 같이. 매번 학생 운동의 (대상)이 타자화되는 것 같았어요. 우리가 주체가 되는 운동은 등록금 투쟁 밖에 없는데, 매번 그것만 할 수는 없잖아요. 사회적인 연대 투쟁이란 역사와 사회를 크게 바꿀 수 있는 운동이잖아요. 당사자 운동으로서의 등록금 투쟁이나 얄팍한 연대 활동 말고,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게 없을까하는 그런 목마름이 있었어요.

일상과 주변으로 파고들어간 투쟁 청소노동자 어머니, 아버지와 만나다

제대해서 보니까 학교에 비정규직 문제가 이슈가 됐죠. 그때가 2007년이었는데 이랜드 투쟁을 비롯한 비정규직 투쟁은 2000년대 초반부터 계속 있었잖아요. 운동을 운동답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학교 안의 경비 노동자와 청소 노동자분들이야 말로 우리 바로 옆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인데 멀리까지 가서 연대할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제 생각에는 우리 곁에서 투명인간처럼 지나가는 어머니들, 아버님들이 열악한 처우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인데, 아직 조직화도 안 되어 있고 최저임금도 못 받고 계셨죠. 이런 분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연대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같은 학교에서 다니는 학생들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비정규직 된 지가 80년대 후반부터라고 하더군요. 그러면 그동안 ‘20년이 지났는데 대학생들이 뭐하고 있었나?’ 화가 나더라고요. 매일 ‘노동해방, 신자유주의 철폐’와 같은 거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막상 바로 옆에서 청소하시는 어머니들, 학생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하기 위해 도와주시는 가족과 같은 분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왜 한 번도 학생들이 문제제기 못했을까, 이분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활동들을 왜 다른 분들이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활동을 시작했죠. 거의 수업을 안 들어갔어요. (웃음)

박 : 들어갈 시간이 없었겠네요.

투명인간교내 청소 노동자와의 마주침, 그리고 단 하나의 목표를 세우다.

류 : 학교에 청소노동자 휴게실이 있더라고요. 올라가는 계단 아래를 보면 그 옆에 벽이 있고 문이 하나 달려있죠? 우리는 그 문을 창고라고 생각하잖아요. 그 문을 열면 그 안에 사람이 앉아있어요. 정말 좁아요. 그 문을 열었을 때 무척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한 번 찾아가겠다고 청소하시는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물어봤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학생들이 말 걸면 처음에는 ‘이렇게’(손을 내저었다) 하셔요. 현장 소장이라는 사람이 아주머니들에게는 전두환이나 아이히만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학생들과의 접촉이 발각되면 혼납니다. 미리 싹을 잘라놓는 작업이 있었죠. 그럴 땐 시간이 필요하죠. 인사도 계속하고 음료수도 먼저 갖다 드리고. 그렇게 마음이 열고 난 뒤 찾아갔는데 ‘그 문’이 있었어요. 문을 열어주시는데 어머니가 앉아 계시는 거예요. 들어가니 작지만 예쁘게 꾸며놓으셨어요. 손주들 사진 붙어 있고. 본인 방처럼, 소녀 방처럼 꾸며 놓으셨더라고요. 그걸 보고 대단히 놀랐어요. 누군가의 어머니고 할머니고 부인이지.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 어머니랑 다른 게 없는 분 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분들을 투명인간처럼 지나쳐 보내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분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거잖아요. 조그만 공간에서 이렇게 생활하시는 거면 ‘임금 수준도 형편없고 복리 후생도 말도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죠.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열정이 많이 생기더군요. 처음부터 노동조합 조직과 같은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건 아니에요. 하지만 졸업하기 전에는, 정말 이분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고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가장 밑바닥에 있으니까. 학생들이 일종의 교두보 역할을 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업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나는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이분들의 삶이 변화된 모습을 내가 봐야겠어.’ 라는 마음으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진짜 민중을 만나는 시간 청소노동자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울고 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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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건물마다 다 돌아다녔는데 하나같이 사정이 열악했어요. 제가 연세대학교를 나왔는데 건물도 엄청 많고 캠퍼스도 되게 크잖아요. 그래서 제가 스쿠터를 샀어요. 타고 다니면서 점심을 3번, 4번씩 먹었어요. 왜냐면 어머니들이 마음을 열려면 밥을 같이 먹어야 해요. 사람은 옳은 사람이나 옳은 이야기를 안 들어요.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듣지. 가르치려고 하면 안 되고 일단 친해져야 해요. 목적의식을 갖고 친해져서도 안 되고. 그냥 이분들과 정말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어요. 운동을 해보니 마음을 얻고, 친구가 되고, 비를 같이 맞고 해야 서로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거예요.

저도 많이 울었어요. 만나서 이야기 나누면 대부분 우셔요. 연세가 60대, 70대이신데 한국전쟁 때 태어나셔서 힘든 역사를 거쳐 온 분들이에요. 학생 운동하는 친구들은 자신들이 기억하는 ‘투쟁의 역사’ 같은 역사가 진보적인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그 역사도 엘리트의 역사에요. 우리도 사실 오만했지요. 학생운동사, 노동운동사의 노동조합이 있는 ‘제조업-대공장’의 남성 노동자는 형편이 그나마 나은 거지요. 그리고 한국 현대사, 정치사, 4·19, 87혁명과 같이 큰 덩어리 중심으로 공부했을 뿐이지, 민중사에 대해서는 굉장히 무지해요. 그런데 청소노동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자체가 민중사예요. 이분들은 6·25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중산층이 되지 못했어요. 대개는 계속 빈민으로 살아오신 분입니다.

어머니들 우리 이제 큰 물고기가 됩시다” – 청소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조직을 돕다

그 분들의 이야기를 6, 7개월 동안 들었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서로서로는 몰라요. 건물이 다 분리되어 있고, 청소 하시는 동안에는 다른 건물로 가는 게 금지되어 있어요. 그리고 다른 건물 아주머니랑 퇴근할 때도 말하면 안 되고 그게 적발되면 징계를 받게 돼있어요. 현장 소장이 어머님들께 욕도 하고, 성희롱, 성추행, 성상납 등 별 일이 다 있어요. 현장소장이 자기 집, 교회 와서 청소하라고 하면 어머님들이 다 몰려가서 청소해야 했어요. 어머님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자기들끼리 싸워요. 서로 단결이 안 되니까 소장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만 있지, 소장을 상대로 싸우는 건 없어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에요. 그래서 노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설문지를 통해 알아보니 근로기준법 위반, 최저임금법 위반, 폭행, 모욕, 성희롱, 성추행 등이 빈번했어요. 이제 서서히 노동조합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제안했어요. ‘우리는 소장과 1대1로 상대하고 있다. 우리는 소장한테 질 수밖에 없다. 온갖 부당한 행위도 바꿀 수 없다’라고요. 그리고 또 설명을 드렸지요. ‘조그만 물고기가 있는데, 자기보다 엄청 큰 물고기가 나타나면 물고기 모양으로 대형을 짭니다. 그럼 큰 물고기가 겁을 먹고 작은 물고기를 단 한 마리도 못 건드린다.’ 그게 바로 노동조합이라고 말이죠.

오랜 시간 눌려있던 용수철이 튀어 오르다. –노조가 결성되고 청소 노동자가 주체로 거듭나다.

이런 설명의 시간을 가지고, 청소노동자 어머니들을 한 분씩 모셨어요. 건물마다 프락치들을 다 심어 놨는데, 그런 감시의 눈을 피해서 조용히 모임을 시작했죠. 집중적으로 노동조합을 설명 드렸더니 어머님들이 열의가 넘치셨어요. 그동안 눌려있던 용수철이었던 겁니다. 누가 건드려준 사람이 없었던 거지요. 왜냐면 근로기준법이 뭔지, 최저임금이 올해 얼마인지도 모르고, 소장이 ‘툭툭’ 치는 건 넘어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셨던 분들이니까요. 그렇게 간담회를 가질 때마다 어머님들이 성장하시는 느낌이 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어머님들이 스스로 더 높은 차원의 투쟁을 기획하게 되셨어요. 그때 민주노총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08년 2월,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지부 연세대학교 지회 노동조합 출범식을 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노동조합은 숨기고 쉬쉬하며 하면 절대로 안 되거든요. 그러면 우리를 더 무시해요.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장단 명의로 노동조합 출범식 초청장을 교수들에게 보냈어요. 연세대의 한 주체가 (노동조합) 출범식을 한다고 알린 것이죠. 출범식 전날 어머님들이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아 플래카드로 만들어서 연세대 정문부터 본관까지 걸었어요. 다음날 출범식을 크게 했죠. 그렇게 연세대를 시작으로 홍익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로 이어져서 신촌에서 다 같이 집회를 했어요. 노동조합 생기고 불과 한 6개월 만에 이뤄내신 거지요. 학생 한 명을 변화시키는 데는 10년 정도 걸리지만, 청소 노동자분들은 살아온 인생 자체가 이미 노동계급과 투쟁을 체득한 분들이기 때문에, 변화하는 데는 한 순간이었어요.

김시은(이하 김): 정말 짜릿하셨겠습니다.

약자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언덕은 법, 그렇게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다.

박: 학부 때 이런 활동 하셨으면 아무래도 밖에 나가서도 비슷한 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은데, 단체에 들어가지 않고 로스쿨에 진학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류 : 처음에는 노조 조합원처럼 일을 했죠. 그분들 사무실에서 3년 정도 활동을 했어요. 사실 법이라는 게 대단히 중요하죠. 그분들이 배운 사람들한테 가장 기대하는 것도 법이었어요. “이게 불법이야? 소송하면 얼마 받을 수 있어?” 라고 계속 물어보세요. 법이라는 게 존재하는 이유가, 대화의 창구가 없고 그 문턱이 너무 높아서 넘지 못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지요. 물론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형식적으로는 법원에 누구나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노동부에는 누구나 진정을 제기할 수 있잖아요. 즉, 약자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사회적인 장치죠.

그렇기에 ‘배운 사람들’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 같아 처음에는 노무사 공부를 했어요. 노무사 공부를 두 달 정도 하는데 계속 교내 투쟁이 터지니까 집중을 못했어요. 시험도 봤지만 공부를 안했으니 될 리가 없죠. 또 그때 제 나이가 스물여덟 살이라, 집에 뭐라도 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노무사 시험을 그 핑계로 삼기도 했고요. 그런데 주위에서 법으로 노동운동을 지원하고 싶으면 로스쿨이 생겼으니까 거길 지원을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노무사보다 할 수 있는 게 더 많고, 소송대리권도 있으니까요.

우리 사회의 제일 취약한 고리인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이 바로 보편적인 민생 향상을 위한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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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 전반적으로 노동환경이나 노동문제 개선을 위해서 제정이 필요하거나 개정, 수정이 필요한 제도가 있을 텐데, 근본적으로 무언가 바꿀 수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류 : 입법에서는 간접고용문제 해결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란 말이 있듯이 가장 고통 받고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환경을 먼저 바꾸는 게 맞아요. 지금은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고리가 간접고용 비정규직이에요. 역사가 한 단계씩 진보할 때마다 여러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한건 아니었어요. 물론 68혁명 때는 사회 전반적인 혁명이 일어나긴 했지만, 어떤 시대가 한걸음 더 나가려면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고리를 끊어냈을 때 생각보다 큰 변화가 생길 때가 많아요. 그런 것이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운동들이구요.

지금을 사람들은 ‘87년 체제’라고 하지만, 사실상 ‘IMF체제’입니다. 신자유주의 양극화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조금 더 좋은 사회로 갈 수 있어요. 저는 지금의 체제로 인해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면 다음 사회로 넘어갈 실마리가 풀릴 것이라고 봐요. 지금 가장 고통 받고 있는 계층이 비정규직, 그중에서도 직접고용이 아닌 하청업체 소속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이고요.

노동운동이라 하면 뭔가 매니악하고 투쟁의지가 높고 사나운 사람들이 하는 운동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통계를 보더라도 대한민국 국민 절대다수가 노동자에요.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운동은 부분적인 운동이 아닌 보편타당한 운동입니다. 노동운동 자체가 민생운동이고, 국민들의 전반적인 복지 향상을 위한 거시적인 운동이고요. 이 보편적인 복지를 위한 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의 첫 걸음은 ‘노동개혁’에 의해 가장 고통 받고 문제해결이 시급한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해결이라고 봐요. 입법제안은 민변 노동위에서 한 입법제안을 참고 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웃음)

할머니 손 붙잡고 시위현장을 누비고, 노천극장에서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부른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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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영(이하 정) : 학생운동을 열정적으로 하셨는데, 노동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인생의 첫 순간이 있지 않으신가요?

류 : 87년 혁명 때 5살이었어요. 할머니가 운동권이어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간부를 하셨어요. 할머니 손잡고 집회를 많이 다녔고요. 87, 88년 고향인 대구에서도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집회를 많이 했어요. 할머니랑 손잡고 동성로에 나가면 학생들이 교련복입고 최루탄 때문에 코 막으면서 뛰어다니고 그랬죠. 할머니 따라서 시국집회를 많이 다녔고 노동자들의 거친 투쟁의 모습도 어렴풋이 기억나요. 어린이가 상상 못할 인파가 모인 집회에서 발언도 해봤고요. 그게 나중에 역사책에서 찾아보니까 88년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있었던 전교조 집회였어요. 그때 할머니와 버스타고 가면서 할머니가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알려주셨어요. 집회에서 제가 발언하게 됐는데 발언은 안하고 마이크 쥐자마자 ‘나 태어나~’ 라고 노래를 부른 거예요.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함께 소리 지르며 불렀던 기억이 있어요. 그 당시에는 이게 뭔지도 모르고 이 사람들이 왜 싸우는지도 몰랐지만 그 어릴 때의 기억들을 나이를 먹으면서 계속해서 반추해보곤 했어요.

불온서적<>, 그리고 선하고 착한 사람들이 가는 길에 대한 자각

저희 집은 어릴 때부터 책이 많았어요. 삼촌 고모들이 다 학생운동을 해서요. 그때 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집에 있으면 안 되는 책들이 많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장남이어서 할머니 모시면서 대구에 사니까 집으로 불온서적들을 보낸 거죠. 제 방에도 맑스, 엥겔스 이런 책들이 꽂혀 있었고요. <코스모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광주 민중항쟁 다큐멘터리>, <태백산맥> 같은 책들이 있었어요. 또 저희 집은 <말>지를 정기구독했어요. 그래서 한글을 처음 떼었을 때부터 그런 책들을 읽고 자랐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광주민중항쟁 책에서 광주시민들이 칼에 찔리는 사진을 보고 굉장히 놀란 기억이 있어요. 고모 삼촌의 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 옆에서 책 제목들을 엮어서 노래를 부르며 놀기도 했고요. 92년에 ‘윤금이 피살 사건’이 있었어요. 윤금이 씨가 미군들에 의해 성폭행 당하고 살해당한 사건인데, 그게 <말>지에 실려 있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읽고 엄청 충격을 받아 할머니한테 여쭤봤죠. 그랬더니 보지 말라고 하셔서, 더 보고 싶어졌고요. 그 이후부터 <말>지를 정독하기 시작했어요. 중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현대사책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런 역사책들을 접하면서 어릴 때 스쳐 지나갔던 거리의 풍경, 할머니가 했던 말들, 고모삼촌들이 울면서 ‘누가 잡혀갔다’ 이런 얘기하던 기억들도 이해되었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정서적으로, 이렇게 사는 것이 양심적이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어요. 왜 운동을 해야 되는지, 운동의 쟁점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은 자세히 몰랐지만 ‘착하고 선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러다 대학에 입학하니까 불이 붙었고 체질에 맞았지요.

학창시절 수성구의 류하경에서 집회 현장의 기타리스트가 된 지금

저는 학생운동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락밴드를 처음 시작해서 음악에 미쳐있었어요. 음악과 농구가 인생의 전부였어요. 대학 들어가면 무조건 밴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유명한 밴드를 능가하리라고 다짐하며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준비했죠. 고등학교 2학년 학교 축제에서 밴드 ‘범어동 수퍼하이웨이’를 결성했고. 당시 여고에서 많이 왔었는데 배우 손예진도 왔었죠. “손예진이 뭔데!” 이러면서 락밴드 메탈리카처럼 ‘쎈 척’하고 그랬어요. 고2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고, 제인생의 정점은 고 2 축제에서 공연했을 때였어요. 그때 첫 곡으로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을 연주하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이데아’ 로 마무리 했었죠. 그때부터 (인생이) 기울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왔네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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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집회 나가보면 불타오르는 게 있어요. 그래서 ‘수성구의 류하경’이 메이데이 때 가서 ‘바위처럼’을 칩니다. 그때 쌓았던 기타 실력을 농활, 집회현장 그리고 민변 집회에서 발휘하죠. 원래는 락기타, 블루스기타를 치는데 그런 건 민변 변호사님들이 모르시잖아요.(웃음) 그래서 지금 기울고 있는 상태예요.

진지하지만 유쾌했던 인터뷰가 끝나고 류하경 변호사가 말을 덧붙였습니다. 언제 맥주 한 잔 하자고요. 꼭 그러기로 했습니다. 정말이죠? 류하경 변호사님!

목, 2016/12/29-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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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차 민변 총회 참가 후기

아끼는 곳에서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

경남지부 유태영 회원

올해로 민변에 가입한지 3년째, 어느새 5월 민변 총회, 6월 국제노동팀 ILO 총회 참가, 가을 노동위원회-오사카 민변단 교류는 내 연간 일정에서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총회는 한해의 주요 사업을 공유하고 살림살이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모인 반가운 얼굴들을 오랜만에 만나고 민변의 정체성을 다지는 자리이다. 게다가 올해 제30차 민변 총회는 경남지부에서 공동으로 준비하는 터라 더욱 의미가 있었다. 통영은 지금 근무하는 법무법인 희망으로 이직하기 전에, 노동청에 6개월간 근무하면서 경남 생활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곳이다. 내가 아주 아끼는 곳인 통영에, 아끼는 사람들을 초대한다고 생각하니, 장소 선정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그 설렘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2017년 3월 16일, 총회 준비팀과 함께 한 사전답사부터 나의 총회 참가는 시작되었다. 백주선 회원팀장님, 이현아, 김서정 간사님, 신입회원 안지희 변호사님을 만나 후보지인 두 리조트 사이에서 어느 곳이 먼 길 달려온 민변 회원들의 고단함을 녹여줄지 신중하게 논의했다. 푸짐한 해산물이 끊이지 않는 다찌집에서 얼음 채운 바께스에 담겨 나온 소주와 맥주를 마시면서…

총회 당일, 점심 식사와 새 정부 출범 관련 사전 간담회, 중앙시장 투어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한택근 변호사님께서 해저터널, 윤이상기념관, 중앙시장으로 이어지는 완벽한 도보 코스를 안내해주셨다. 짧은 경험이었지만 민변 변호사님들의 오랜 동지로서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는 합과 풍성한 여행 노하우에 감탄했다. 필자는 김인숙, 하주희, 김유정, 전민경, 이현지 변호사님과 건어물 쇼핑, 충무 김밥 간식, 강구안 까페까지 촘촘하게 즐기고, 다른 변호사님들은 중앙시장에서 막걸리까지 한잔씩 하고들 오셨다는 알찬 시간이었다.

이후 늘 그럴 듯 5시간 이상 이어진 정기총회가 각 지부, 위원회 보고 등으로 시작되었다. 공익변론센터의 디지털도서관 시연은 기대가 컸으나 기술적으로 여의치 않아서 아쉬웠고, 신입회원들의 공연을 보며 후배들의 민변 활동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경남지부 박미혜 지부장님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회원들의 모범회원상 수상, 오민애 변호사님의 멋진회원상 수상을 보면서는 자랑스러움과 부러움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번 총회에서는 특히 회칙 개정안 안건에 대한 토론이 뜨거웠는데, 앞으로 1년간 민변 내 여러 단위에서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더욱 널리 공론화되고 충실히 공유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총회 장소 입구에서는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ADI, 광주전남공익변호사모임 동행의 홍보 부쓰가 세워져 후원과 연대의 자리가 만들어졌다.

총회 뒷풀이는 민변의 여러 변호사님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술 한잔 나누면서, 선후배 회원들의 경험과 인간미, 노래 실력까지 느낄 수 있는 자리다. 탄팟 팟캐스트로 익숙해진 김준우 변호사님의 맛깔난 진행을 다시 들을 수 있어 반가웠다. 필자는 경남지부 내에서도 통영, 거제시 여성 변호사 1호로 송무를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총회에서 만나는 선배 여성 변호사님들과의 교류는 특히 더 소중한 시간이다.

둘째 날 프로그램은 세병관과 소매물도로 나누어 투어가 진행되었다. 점심 식사로 통영의 맛집 한산섬식당에서 뽈락매운탕을 먹고, 통영의 특산물 멸치에서 이름을 딴 엔초비호텔에서 커피를 마셨다.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한명의 회원이라도 더 마주하고 싶었는데, 수많은 후배들에게 커피 타임을 만들어 주신 심재환 변호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린다.

1박 2일 간 민변 회원으로서 가졌던 자부심과 앞으로의 민변 활동에 대한 의지, 거기다 통영의 쪽빛 바다의 아름다움을 가시 한번 기억하길 바라며 통영에서 태어나고 자란 박경리 작가의 ‘김약국의 딸들’ 도입부로 이 후기를 마친다.

 

제 1 장

통영(統營)

통영(지금은 忠武市)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중략)

지금도 흔히 여염집에 들르는 뜨내기 소반장수가 싸구려 소반을 통영소반이라 사칭하고

거래하는 풍경 있는데 통영갓, 통영소반은 그 세공이 정묘하여 매우 값진 상품이었다.

이밖에도 소라 껍데기로 만든 나전 기물이 이름 높다.

원료를 바다에서 채집하는 관계상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진주빛보다 미려하고 표질이 조밀한 소라 껍데기,

혹은 전복 껍데기를 갖가지 의장(意匠)으로 목재에 박아서 만든

장롱, 교잣상, 경대, 문갑, 자(尺)에 이르기까지

화려 찬란한 가구 제작은 일찍부터 발달되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바다에 나가서 생선 배나 찔러먹고 사는

이 고장의 조야하고 거친 풍토 속에서 그처럼 섬세하고 탐미적인 수공업이

발달되었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바닷빛이 고운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노오란 유자가 무르익고 타는 듯 붉은 동백꽃이 피는

청명한 기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화, 2017/06/13-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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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가?’

 - 김서영 (14기 자원활동가)

 

 * 본 후기는 주제별로 나왔던 논의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맨 뒤에 제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이는 형태로 작성하였습니다. 토론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부 자유 토론 (각 20분): 혐오발언 형사처벌해야 하는가? 일베·메갈리아 사이트 폐지해야 하는가?

2부 형식 토론 (40분): 아이유 ‘Zeze’ 음원 판매를 중지해야 하는가?

3부 마무리 발언 (20분): 표현의 자유,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가?

 

 [들어가며]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는 자유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가장 근간이 되는 기본권입니다. 인격권의 핵심을 이룰 뿐 아니라 정치적 담론 형성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에, 일반적으로 다른 기본권보다 우월적 지위를 갖습니다. 올해는 계속적으로 늘어나는 인터넷 신조어들로부터 불거진 혐오발언의 정의규명부터 아이유의 노래 ‘Zeze’에 대한 해석까지, 온·오프라인에서 표현의 자유와 그 보장 범위에 대한 논의가 뜨겁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에 저희 14기 자원활동가들도 ‘표현의 자유,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가?’에 대한 토론을 해보았습니다.

 

 [주제 1] 혐오발언 형사처벌해야 하는가?

먼저 혐오발언(hate speech)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로 토론의 장을 열었습니다. 각각 제시한 의견들을 종합하면 “인종, 국적, 종교, 성별, 성적 지향과 같은 어떤 속성을 갖는 집단이나 개인에게 그 속성을 이유로 가하는 차별표현” 정도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혐오발언의 예시로는 ‘김치녀’, ‘맘충’, ‘홍어’ 등이 언급되었습니다. 아직까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정의는 없지만, 유엔의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자유권규약), ‘인종차별철폐조약’ 등에는 위와 같은 혐오발언을 막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혐오발언이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한국법제원에 따르면 특정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사적인 혐오발언은 형법상 명예훼손죄와 모욕죄로 처벌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두 죄목 모두 피해자가 특정되어야 하기에, ‘김치녀’와 ‘홍어’처럼 특정 집단이나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혐오발언은 처벌하기 어렵습니다.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또한 사실상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저희는 특정인을 겨냥하지 않은 혐오발언도 형사처벌 가능케 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진행해 나갔습니다.

 혐오발언의 형사처벌에 찬성하는 활동가들은 혐오발언이 공동체에 미치는 심각한 악영향을 그 이유로 들었습니다. 혐오발언은 한 개인의 좋고 싫음의 표현을 넘어선, 소수자에 대한 차별 및 폭력을 선동하는 사회적 행위이기 때문에 마땅히 형법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혐오발언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추세를 보아, 자정작용을 기대하기 어렵기에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주요 선진국에서 혐오발언자를 무겁게 처벌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혐오발언이 심각한 사회적 범죄로 인식되어 그 수가 줄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실제로 영국은 ‘1986년 공공질서법’에 따라 피부색과 인종, 국적, 출신국 의해 구별되는 집단에 대한 혐오발언을, ‘2006년 인종·종교혐오금지법’에 따라 특정 종교에 대한 혐오발언을, ‘2008년 형사사법 및 이민법’에 따라 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각각 형사처벌하고 있다고 합니다. 독일 또한 형법 제130조1항으로 ‘특정 인구집단을 모욕하거나 악의적으로 비방해 타인의 인간적 존엄성을 침해하는 행위’를 형사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 또한 특정 집단 및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혐오발언을 형사처벌할 수 있는 법규정을 마련해 혐오발언을 효과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반면, 혐오발언의 형사처벌을 반대하는 활동가들은 형사처벌이 지나친 표현의 자유 제한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한국의 특수한 정치적 경험과 지형을 고려하면, 혐오발언에 대한 형사처벌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개연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현 법체계상의 명예훼손죄와 모욕죄를 국가권력이 악용한 사례가 이미 여럿 있는데, 특정 집단 및 불특정 다수에 대한 혐오발언까지 형법 항목에 포함시키면 표현의 자유가 지나치게 위축될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혐오발언이 일상이 된 현 사회분위기 대한 문제 의식은 공유하지만, 혐오발언을 규제한다면 형사처벌이 아니라 민사상 손해배상이나 행정적 제재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비록 입법이 몇 차례 좌절되었지만, 뉴질랜드(1993년), 아일랜드(2004년), 프랑스(2008년), 스웨덴(2009)을 따라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여 혐오발언을 규제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주제 2] 일베·메갈리아 사이트 폐지해야 하는가?

 혐오발언과 이의 범죄화에 대한 논의에서 자연스럽게 일간베스트 저장소(이하 일베) 및 메갈리아에 대한 논의로 넘어왔습니다. 먼저 혐오발언이 만연한 일베 사이트를 폐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았습니다.

 간략하게 이슈를 소개하자면, 일베는 극우성향 인터넷 사이트로 1분당 동시 접속자 수가 대략 1만7000~2만명, 모바일 기준 한 달 순방문자수만 약 173만명으로 전체 커뮤니티 사이트 중 8위에 해당하는 규모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여성과 특정 지역 및 종교를 폄훼하는 게시글과 댓글들이 하루에 수백 건씩 올라옵니다. 이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별 문제없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일베 컨텐츠 자체에 대해서 여러 갈래의 의견이 나왔습니다. 한 활동가는 일베를 무조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하기보다 ‘무임승차 논리’와 같이 일베를 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논리에 대한 이해가 우선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다른 활동가도 무임승차 논리의 타당성 자체가 일베 문제의 핵심은 아니지만, 무임승차 논리 자체는 꽤 타당한 것 같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일베 유저들이 사용하는 많은 표현들은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선을 자주 넘는다고 덧붙였습니다. 다른 활동가 또한 일베의 정치적 성향과 논리 자체에는 문제를 제기할 수 없지만, 혐오발언으로 분류될 수 있는 과격한 표현은 심각한 사회적 해악이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논의가 일베 사이트를 폐지할 수 있는지, 폐지해야 하는지에 이르자 입장이 둘로 갈렸습니다. 먼저, 사이트 폐지 가능 여부에 대해서는, 변호사님께서 현 법체계에 특정 단체를 해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법조항이 없다는 점을 짚어주시면서 논의가 일단락 되었습니다. 일베에 올라오는 많은 게시물들은 형사상과 민사상 범죄요건에 성립되지만, 일베 사이트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고정적 주체나 조직이 아닌 열린 온라인 플랫폼이기 때문에 폐지하기 더 어려울 것입니다. 설사 운영금지 가처분 신청이 통과되어 도메인이 폐지된다고 해도, 또 다른 유해 사이트인 소라넷이 도메인을 이동하며 계속 운영되듯,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금껏 해왔던 활동을 지속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었습니다.

 폐지해야 하는가, 즉 당위성에 대한 논의에는 여러 입장이 있었습니다. 한 활동가는 혐오가 공기보다 당연한 일베 같은 과격한 사이트는 폐지되었으면 좋겠으나, 근 10년 이내에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입장을 내비췄고, 다른 활동가들은 특정 게시물에 대한 사과나 삭제조치 요청은 할 수 있지만, 사이트 운영을 금지하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게시물 뿐 아니라 해당 사이트의 모든 게시물이 제한을 받는다는 점 등에서 과도한 표현의 자유의 침해를 우려했습니다. 특정 사이트를 폐지하기 이전에 형법 개정, 차별금지법 제정 등 혐오발언 자체에 대한 법적 규제를 강화하고 사회적 인식을 개선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였습니다.

 다음으로 지나치게 과격한 발언으로 타인에게 불쾌감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몇 차례 삭제된 메갈리아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에 대한 논의를 했습니다. 예전부터 존재해왔던 일베나 김치녀 페이스북 페이지는 멀쩡히 운영되는데 메갈리아만 삭제되는 것은 형평성의 문제가 있다는 점에는 동의가 있었지만, 메갈리아와 일베가 본질적으로 다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그렇다면 메갈리아의 미러링 전략이 혐오인지, 그 과격성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그리고 메갈리아와 일베를 같은 층위에서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차례로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활동가들은 첫 질문인 ‘메갈리아의 미러링 전략이 혐오인지’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먼저 각각 ‘김치녀’와 ‘삼일한’에 대한 대응어로 탄생한 ‘김치남’과 ‘숨쉴한’ 등의 용어를 남성에 대한 혐오로 보는 입장이 있었습니다. 이 용어들의 탄생 및 사용 목적이 어떠하든 그 안에 담긴 혐오를 부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남성 혐오’가 아니라 ‘여성 혐오에 대한 혐오’라고 바라보는 입장이 있었습니다. 즉, 남성을 혐오하기 위해 과격한 표현들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성별을 막론하고 익숙하고 만연했던 여성 혐오적 발언을 거꾸로 뒤집어 낯설게 하여 그 문제성을 지적하기 위해 미러링 전략을 채택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메갈리아의 과격한 표현이 혐오이든 아니든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준다면 그 과격성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젠더 갈등을 부추기는 행동이 아닌지 등의 의문이 제기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활동가들은 목적이 정당하다고 해서 수단마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보았고, 다른 활동가들은 미러링은 혐오발언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과격성에도 문제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고인드립이 난무하고 뚜렷한 정치성향을 띄는 일베와 메갈리아는 탄생배경과 활동 목적 및 내용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은 층위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나왔던 의견을 일일히 옮겨적을 수 없을만큼 논의가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첫 질문인 ‘메갈리아의 과격한 표현이 혐오인지’에서 벌어진 간극을 그대로 유지한 채 양측 모두 같은 말을 반복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아마 그 간극이 혐오발언의 본질 및 정의의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몇십년전에 비하면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고 하나, 아직까지 한국은 성차별이 만연한, 여성에게 녹록지 않은 곳입니다. 한국의 여자들은 같은 일을 하는 남자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임금을 받고 있으며, 세계경제포럼이 올해 발표한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성평등지수는 세계 최하위 수준입니다. 불평등 뿐만이 아닙니다. 빈번하게 벌어지는 성폭력 및 데이트폭력 사건에서 아직까지도 ‘충분히 조심하지 못한’ 피해자 여성을 질책하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이처럼 한국에서 여성은 수적으로는 인구의 반을 차지할지 몰라도,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의 아래에 놓여 있는 소수이며 약자입니다.

 메갈리아의 거친 표현이 혐오인지, 다음으로 메갈리아와 일베가 다른지에 대해 논하려면 위 맥락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좋고 싫음의 표현과 달리 혐오발언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대상자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고 선동하여 그를 사회에서 배제시키고 그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자의 사회적 발언력이 약할수록 그 위험이 더욱 크며, 자칫하면 물리적 폭력을 포함한 차별적 행위까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소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차별적 발언만을 혐오발언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가장 뜨겁게 달아올랐던 일베와 메갈리아에 대한 논의는 이처럼 혐오발언의 정의에 대한 논의로 되돌아가면서 마무리 되었습니다.

 

 [주제 3] 아이유 ‘Zeze’ 음원 판매를 중지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최근에 가장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던 아이유의 노래 ‘Zeze’에 대한 형식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찬반은 개인적 입장과 상관없이 사다리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간략하게 이슈 소개를 하자면, 아이유의 네 번째 미니앨범 ‘챗셔(CHAT-SHIRE)’에 수록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주인공인 다섯 살 꼬마 ‘제제’를 모티브로 한 노래 ‘Zeze’의 가사에 대하여 학대를 받고 자란 다섯 살짜리 아이를 성적 대상으로 묘사한 것인지, 창작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원작을 왜곡한 것인지, 원작 재해석에 대한 문제를 넘어 소아성애ㆍ롤리타신드롬을 자극하는지 등 논란이 일었습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한국어판을 펴낸 동녘 출판사는 아이유가 원작 속 캐릭터 ‘제제’를 잘못 해석했으며 다섯살 제제를 성적 대상으로 삼아 유감이라며 문제 제기를 했으나, 2차 창작물에 대한 해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을 받고 “해석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아이유 또한 “맹세코 다섯 살 어린아이를 성적 대상화하려는 의도로 가사를 쓰지 않았”지만 가사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사과문을 본인의 페이스북 공식 페이지에 게재하였습니다. 허지웅, 진중권, 소재원, 윤종신 등 문화 인사들도 자신의 의견을 적극 표명하며 설전을 벌였습니다. 11월 9일 기준, 다음 아고라에서는 ‘Zeze’ 음원 폐기와 보전을 요청하는 서명운동에 각각 3만2천여 명과 1천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사실 ‘Zeze’의 가사가 소아성애적 표현을 담고 있는지, 컨텐츠 자체에 대한 논의가 주가 되었어야 하지만, 시간상 가사 한 줄 한 줄을 분석할 수 없어 소아성애적 표현이 있다는 전제 하에 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간단하게만 요약을 하자면, “넌 아주 순진해 그러나 분명 교활하지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듯해도 어딘가는 더러워”,“어서 나무에 올라와. 여기서 제일 어린잎을 가져가. 하나뿐인 꽃을 꺾어가”, “발그레해진 저 두 뺨을 봐”에서 나타나는 성적인 은유로 흔히 쓰이는 표현과 함께, 제제가 갖고 있는 (이중적인) 성질을 “섹시하다”고 느꼈고 “제제를 질투하는 모습에서 밍기뉴가 여자로” 느껴졌다는 아이유의 인터뷰, 그리고 핀업걸을 연상시키는 제제 일러스트를 한데 묶어 생각해보면 명백히소아성애적 은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찬성 측은 ‘Zeze’의 소아성애적 표현이 일차적으로 이미 피해를 입었거나 앞으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소아들에게 폭력적이며, 이차적으로 사회의 성도덕을 침해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정의에는 부합하지 않아도, 가사에 담긴 소아성애적 은유 자체로 충분히 음란하고 부적절하다는 것입니다. (참고: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은 “아동·청소년 또는 아동·청소년으로 명백하게 인식될 수 있는 사람이나 표현물이 등장하여 제4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거나 그 밖의 성적 행위를 하는 내용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필름·비디오물·게임물 또는 컴퓨터나 그 밖의 통신매체를 통한 화상·영상 등의 형태로 된 것”으로 정의됩니다.)

 반대 측은 창작물 속 제제는 원작 속 제제와 다르게 다뤄져야 하지 않냐고 질문했습니다. 아이유의 노래는 어디까지나 원작 속 제제에 대한 아이유의 해석을 바탕으로한 2차 창작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찬성 측은 아이유의 노래 ‘Zeze’에서의 제제가 원작 속 가난함과 가족들의 폭력 및 몰이해에 상처 받고 사랑에 굶주린 다섯 살 아이이든, 아이유의 이차적 창작물 속 가상의 인물이든 중요하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유의 ‘Zeze’가 주체적인 입장과 목소리를 가지기 힘든 소아에게 성적 은유를 부여했다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소아는 대리인 없이는 법정에도 서지 못하는 약자이기 때문에 더욱 소아성애적 표현에 문제를 제기하고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반대 측은 현아의 ‘버블팝’, 그리고 비슷한 컨셉을 차용한 수많은 아이돌들의 노래와 아이유의 ‘Zeze’가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에 대해 찬성 측은 현아가 자기 자신에게 롤리타적 컨셉을 입히는 것과, 성인 아이유가 소아인 제제를 성적 대상화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미성년자이더라도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청소년인 아이돌 가수들과 다섯 살짜리 아이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형법에서 미성년자에 대한 간음과 추행 사건에서 피해자가 13세 미만인 경우 더 엄중히 처벌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말입니다. 앞서 나왔던 이야기로 돌아가, 13세 미만의 경우, 주체적인 입장과 목소리를 가지기 힘들다는 판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롤리타 컴플렉스’라는 단어를 만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와 아이유의 ‘Zeze’는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찬성 측은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세계적으로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 받은 문학 작품이지만, 아이유의 ‘Zeze’는 소아성애적 컨셉을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소비만 한, 예술성 없이 음란성만 있는 노래라고 평가했습니다. 대법원 2000.10.27. 선고 98도679판결을 근거로 들며 “문학성 내지 예술성과 음란성은 차원을 달리하는 관념이므로 어느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문학성 내지 예술성이 있다고 하여 그 작품의 음란성이 당연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그 작품의 문학적·예술적 가치, 주제와 성적 표현의 관련성 정도 등에 따라서는 그 음란성이 완화되어 결국은 형법이 처벌대상으로 삼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가지고 ‘롤리타’와 ‘Zeze’ 둘 다 소아성애를 다루는 창작물이지만, ‘롤리타’는 소아성애가 작품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소재이며, 작품 자체의 예술적 가치가 매우 뛰어난 반면, ‘Zeze’는 소아성애를 소재로 상업적으로 소비하기만 하기에 예술작품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을 살펴보기 위해선 ‘Zeze’가 예술성이 있는지 없는지 컨텐츠 자체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하는데, 시간 관계상 그럴 수 없어 아쉽게도 예술성과 음란성과 관련된 논의는 여기서 일단락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Zeze’ 음원 판매 중지 방법에 대한 논의를 했습니다. 시간이 부족해 많은 의견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찬성 측과 반대 측 모두 음원 판매 중지를 하는데 있어서 국가권력 혹은 기타 독점적 권력에 의해 제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의 음원 불매 운동, 민사 소송,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음원 폐기 서명운동 등에 의해 소속사 및 아이유 측에서 자체 판매 중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모았습니다.

 

[마치며] 표현의 자유,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가?

 토론을 준비하면서, 토론을 하면서, 토론 후에 후기를 쓰면서 생각이 계속 달라졌습니다. 그만큼 새로운 시각들도 많이 접하고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던 월례회였습니다. ‘표현의 자유,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가?’는 아마 논란이 되는 문제마다 계속해서 던져야 할 질문일 것입니다. 다만, 표현은 사회적 행위이며 헌법이 정한 범위 내에서 행해야 한다는 점은 항상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술가를 비롯한 표현의 주체가 자신의 표현에 폭력이 내재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이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인지한 채 보다 성숙한 비판을 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수, 2015/12/2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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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는 문예반 학생이었다. 법률 전문기자가 되려고 법대에 갔다. 그러다 혼자서 민사 소송을 해 엄마가 떼인 돈을 받아냈다. 이후 법학이 다르게 보였고, 재판이 재미있어 변호사가 되기로 했다. 변호사가 되고 나서는 ‘노동법으로 밥벌이를 해야겠다’고 맘먹고 금속노조법률원에 들어갔다. 그러다 다시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진로를 틀었다. 보좌관으로 잔뼈가 굵을 무렵, 국회 문을 열고 나와 이번엔 국선전담변호사가 되었다. 6년간 국선전담 변호사 활동을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40일간의 유럽 순방(?)을 마치고 민변으로 온전히 복귀한 조수진 변호사를 만나 그 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B내리고 C뿌리던 법대생, 민사 소송을 하다

문예반 활동을 하던 ‘고등학생 조수진’은 국문과를 갈 줄 알았다. 대학 진학 무렵, ‘얼결에 들어간 거지만 시 쓰는 문예반에서 활동했으니 국문과를 가야겠지.. 그런데 시를 쓰면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라는 여러 생각과 의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신문방송학과를 가서 기자 생활을 하면 시를 쓰는 것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생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조수진 변호사의 언니가 조수진 변호사를 꼬드겼다. “법대에 가서 법조기자가 되면 얼마나 좋겠니?”

언니의 꼬임(?)에 넘어간 고등학생 조수진은 이내 ‘수업이 이해가 안 돼 학점이 안 나오는 법대생’이 됐다. 논리학을 공부하는 것도 어려웠고, ‘내가 이걸 왜 외워야 하나’ 이해도 되지 않았다. 한창 학점에 B가 내리고 C를 뿌리던 대학생 조수진에게 어느 날 큰 일이 생겼다.

당시 조수진 변호사의 어머니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300만 원 정도를 달아놓고 먹던 중소기업이 부도 위기를 맞자 그간 누적된 식대를 주지 못하겠다고 나왔다. 딸이 법대생인데, 소송 까짓 거 못 할 게 뭔가. 조수진 변호사의 어머니는 ‘돈을 받아내면 10%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가족이니까 엄마를 대리해서 재판을 해서 돈을 받겠다”고 대학생이 서면을 써서 법원에 제출했다. 상대방은 재판에 출석도 하지 않았고, 결과는 조수진 변호사의 승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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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소하면 돈을 당연히 받는 줄 알았더니, 그게 또 아니란다. 집행 절차가 필요했다. “‘이게 뭐지?’ 하면서 집행관에게 서류를 줬어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집행관이 ‘그 사무실에 있는 집기에 딱지를 붙입시다’ 하더라고요.” 집행 절차에는 집행인이 동행해야 했다. 그래서 법원 집행관이 사무실 집기에 ‘빨간 딱지’ 붙이는 데 따라갔다. “그 사무실 분들이 뜨아한 표정으로 보는 거예요. ‘이건 뭐냐’ 이런 분위기로. 근데 그 딱지를 붙인 다음날 바로 돈이 입금됐어요.”

그때부터 법 공부에 흥미가 붙은 조수진 변호사는 죽기 살기로 공부에 매달렸다. “그때 저는 변호사가 적게 일하고 돈 많이 버는 직업으로 잘못 알고 있었어요. 노동시간도 짧은데 단시간에 큰돈을 버는 줄 알았죠.”

그렇게 본격적인 법 공부를 시작해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사법연수원에서 노동법학회를 했어요. 그러다 ‘노동법으로 밥을 먹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노동법만 할 수 있는 사무소를 찾다가 금속노조 법률원에 들어갔어요.” ‘입사’하니 선배들은 당연히 노동위원회에 가입해야한다는 거 아닌가. 그래서 ‘당연한가보다’ 생각하고 변호사가 된 첫 해에 노동위원회 가입으로 민변 활동을 시작했다.

국회에 가다

막상 변호사가 되니 ‘적게 일하고 많이 번다’는 오해가 깨진 것은 둘째 치고, 비정규직 법안 자체가 잘못되어있는 상황 속에서 ‘변론’으로만 할 수 있는 활동에 한계를 느꼈다. “거기서 한 2년 반 정도 하다보니까 비정규직 법 때문에 너무 문제가 많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여성인권위원회에서 한 번 만난 인연으로 연락을 준 이정희 변호사님. 당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셨던 그 분의 보좌관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제가 알기로는 돌아가신 김승규 변호사님께서 저를 추천해주신 걸로 알아요. 그래서 2년 반 정도 18대 국회 때 의원실에서 보좌관 활동을 했죠.”

조수진 변호사의 표현에 따르면, 국회의원이 299명이면 국회에는 299개의 중소기업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회의원 월급 다 삭감하자’는 식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국회에서 활동해본 조수진 변호사의 설명으로는 국회의원이 제대로 활동한다면 세비 900만 원은 남아나지 않는 게 정상이다. 사람도 만나고, 지역구 사무실도 운영해야 하고, 정책개발을 위해 연구자들에게 용역비용도 지출한다.

이렇게 역동적인 국회는 변호사들에게도 좋은 무대다. 입법 보좌관들의 노력으로 법을 처음부터 잘 만들면 재판까지 이어지는 사건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같은 나라는 국회와 행정부에 굉장히 많은 변호사들이 들어가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법을 만들거나 집행하는 단계부터 문제가 없게 하기 때문에 사법부로 넘어가는 사건을 줄일 수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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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생활은 조수진 변호사의 변호사 생활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다. “옆에서 ‘아, 이런 식으로 문제를 파고 들어서 공부하는 거구나’를 배웠어요. (이정희 의원은)어떤 문제가 있어서 ‘새로운 법을 만들자’라고 맘먹으면 자료를 그냥 보는 게 아니라 관련 법안, 관련 연구 논문까지 다 찾아보시는 거예요. 1차 자료를 다 보고 나서 그걸 보강하는 2차 자료, 어떤 때는 3차 자료까지 보셨어요.” 법 이론상 가능한 이야기인지, 부작용은 없는지 다방면으로 검토한 후에야 새로운 법안이 탄생했다. 자료를 어떤 식으로 보고 정리해 나가야 하는지, 얼마나 다양하게 검토해야 하는지 큰 영향을 받았다.

재판을 좋아해서 다시 변호사 생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때의 경험은 조수진 변호사가 법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을 바꿔놓았다. “만들어진 법을 공부하는 건 음식점으로 치면 설거지 같은 단계예요. 법을 만드는 일은 재료 다듬고 음식 만드는 일로 비유할 수 있을 거 같고요.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국회에서 지켜보니 너무 신기했어요.”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역동적이고, ‘선한 가치’라고 하여 필연적으로 법안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판례는 유연하게 바뀌어야 한다

국회를 나온 조수진 변호사는 국선전담변호사로 다시 송무를 시작했다. 형사 피고인을 변호하는 형사 국선전담변호사. 1~2년 개업 변호사로서의 경험과 역량을 다지는 계기로 삼으려던 게 어느 덧 6년이나 이어졌다.

형사 국선전담변호사를 하면 한 달에 20-30명가량의 피고인을 만난다. 1년이면 300명이 넘는다. 당연히 형사 재판을 처리하는데 속도가 붙는다. 조수진 변호사는 “변호사의 업무능력 면에서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효율성을 배운 것 같다”며 사람을 매우 많이 만난다는 점을 국선전담변호사의 특징으로 꼽았다. 또 “아무래도 배움이 길지 못했거나 저소득층이 국선을 신청하시는 분이 많다”며 “변론 외적으로도 챙겨주는 마음이 필요한 게 이 분야의 특이한 점”이라고 짚었다.

사건을 수행하다 보면 당연히 안타깝거나 기억에 남는 사건도 생기게 마련이다. 조수진 변호사가 꼽는 ‘정이 많이 갔던 사람’은 취업사기를 당했는데 오히려 사기 공범으로 몰렸던 젊은 여성이다. 이 여성은 사장이 중국 출장 중이라는 말만 믿고 쇼핑몰 회사에 취업한 뒤 ‘카카오톡’으로 업무 지시를 받아 쇼핑몰을 운영했는데, 어느 날 사기 공범으로 체포됐다. “알고 보니 그 쇼핑몰은 허위였던 거예요. 완전 취업사기죠. 사장이라는 사람은 중국에서 아예 입국하지 않고 돈만 환치기 형식으로 중국으로 넘어갔어요.” 사건을 설명하는 조수진 변호사의 목소리가 점차 격앙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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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몇 십 억 대 사기사건의 공범이 됐고, 유죄를 인정받으면 20대 젊은 사람이 손해배상을 계속 당할 수도 있잖아요. 평생 어떻게 살겠어요?” 이 여성은 언니와 함께 발 벗고 나서 직접 증거로 쓸 수 있는 CCTV 영상을 찾아다니고, 몇 개월간 온갖 증인을 찾아 법정에 세웠다. 법정에는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 계속 방청을 왔다. “분연히 다퉜는데 집행유예를 받은 거예요. 아마 그 판사님은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졸지에 ‘사기사건 공범’이 된 ‘취업사기 피해자’는 “꼭 무죄를 끝까지 다투겠다”며 2심으로 넘어갔다. “국선전담이 약간 아쉬운 게, 그렇게 애착이 가는 사건을 끝까지 추적할 수가 없어요. 빨리 정을 떼야 돼. 빨리 정 주고, 빨리 떼고. 그런 게 약간 힘들죠.”

국회에서의 경험은 변호사로서 재판을 수행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기존 대법원 판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대법원 판례를 깨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별로 무섭지도 않아요.” 법은 시대와 사회의 모습에 따라 변한다. 현상이 변해 더 이상 기존의 법으로 담아낼 수 없다면 누군가 새 법안을 발의하고, 법이 바뀐다. “하물며 그 법을 해석한 판례야말로 현실이 바뀌어도 최대한 많은 현실을 담아낼 수 있게 더 넓게, 적극적으로 법을 활용하는 것이 맞는 판례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나의 취미는 민변!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취미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일과 일 사이에 잠깐 쉬고 재충전하기 위한 취미, 두 번째는 여가를 즐김으로써 평소의 일과 생활에서 한 발짝 떨어질 수 있는 취미, 세 번째는, ‘지금 여기’에 집중함으로서 삶의 의미를 고양하는 취미. 조수진 변호사에게 민변은 ‘세 번째 종류’의 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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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너무 가볍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주변에서 ‘너 민변도 나가니?’라고 놀라는 분이 있으면 ‘취미생활’이라고 얘기해요.” 대학교 서클 활동처럼, 돈을 벌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재미있어서, 내 선택으로 하는 활동이다.

조수진 변호사가 주로 활약하고 있는 위원회는 민생경제위원회다. “민생은 전통적인 인권 개념과 달리 굉장히 새로운 분야예요. 그만큼 실생활과 밀접한 여러 문제에 대해 활동하실 수 있죠.” 부동산, 임차 등 주택정책, 부산저축은행 사태와 파산회생 등 금융정책, 중소기업을 보호하고 재벌을 견제하는 공정경제 분야, 세금 낭비를 감시하고 조세정의를 실현하는 조세재정 분야 등 실생활의 많은 문제들이 민생경제위원회의 소관이다. 5월 15일부터는 매주 월요일 저녁 민생위가 준비한 민생 관련 법률 실무 강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민생위의 장점은, 어느 위원회나 그렇겠지만,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고, 민생위가 다루는 문제들이 후배도 큰 소리 낼 수가 있는 분야라는 점이에요. 생계형 문제가 많기 때문에 후배들이 선배들의 노하우를 배워서 금방 뛰어넘을 수 있죠.” 그래서 조수진 변호사는 민생위를 ‘봉숭아 학당 같아서 정이 간다’고 표현한다.

다시 새로운 도전 앞에서

민변 활동에서 조수진 변호사가 자신의 첫째가는 롤모델로 꼽는 선배는 ‘민생경제위원회의 조물주’ 김남근 변호사다. “공익활동 하면서도 변호사로서의 전문성도 유지하시고, 박사도, 또 공익이 아닌 전문법으로 박사학위 받으셨잖아요.” 여전한 열정에 철저한 건강관리까지, 닮고 싶은 부분이 많다. 이제 새롭게 개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선배 변호사들에게 묻고 도움 받는 부분이 많다.

“요 며칠 2-3주 개업을 준비하려고 생각해보니, 내가 구슬만 많이 모았고 한 줄로 꿰지는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앞으로는 뭔가를 좀 진득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변호사로서 해볼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구슬을 모았다’고 표현하는 것을 듣고 있으니 문득 만화 <드래곤볼>이 떠올랐다. 7개를 모으면 무엇이 되었든 하나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신비한 구슬을 찾아 떠나는 모험 이야기다. ‘드래곤볼’처럼 변호사가 할 수 있는 7개의 역할을 모으면…… 그런 상상을 하다 웃고 말았다.

“(‘드래곤볼’)다 모으면 ‘여자 김남근’ 되는 거 아니에요? 조수진 변호사님 개업과 동시에 여자 김남근 변호사님이 되실 거 같네요.”

“저야 영광이죠!”

조수진 변호사는 개업과 함께 민변에서 더욱 활발하게 활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 우선 민생경제위원회 조세재정팀에서 인천 아시안게임 당시 사용한 예산에 대해 진행 중인 주민소송부터 참여할 계획이다. 변호사로서의 다양한 역할을 담금질하고 있는 조수진 변호사, 내일은 또 무슨 도전을 할지 그 행보가 사뭇 기대된다.

화, 2017/04/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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