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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콘] “50년 운동의 원동력은 ‘거룩한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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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콘] “50년 운동의 원동력은 ‘거룩한 분노’”

익명 (미확인) | 월, 2015/06/01- 10:59

[여성연합 '온콘' 2014 기획 시리즈_생각을 바꾼 그녀들 세상을 바꾼 그녀들_시즌2] 한국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



“50년 운동의 원동력은 ‘거룩한 분노’”


1996년 남편과 민중교회 통해 이주노동자 운동 시작
한국의 이주여성 인권운동 개척자로 제도화 기틀 마련
“집착하지 않고 내가 시대적 사명을 다했는가 질문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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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염 대표는 자신의 정체성을 '종교여성운동가'라며 '다시 태어나도 또 여성운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이 누구인가?”


자그마치 50년. 반세기 동안 삶의 모퉁이 모퉁이에서 그는 질문했다.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이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 발걸음의 이정표가 됐고, 길이 됐고, 역사가 됐다. 20여년 전에 남편과 함께 서울 창신동에서 민중교회를 섬기기 시작했을 때도 그는 같은 질문을 했고, 그 답은 ‘이주노동자’였다. 그렇게 이주노동자 운동에 뛰어든 한국염(68)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는 이후 ‘이주여성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한국의 이주여성 인권운동을 이끌어 왔다.
“1996년에 성남에 있는 양말 공장에서 일하다 도망쳐 나온 중국 한족 출신 이주노동자 8명을 만난 것이 시작이었지. 임금체불과 성추행을 겪다 도망 나온 노동자 8명 중에 7명이 여성이었어요. 그렇게 남편이 사역하던 청암교회에서 서울이주노동자센터를 만들었고, 나는 낮에는 여신학자협의회에서 일하고 밤에는 이주여성노동자들 상담을 했지요.”
한 대표는 “이주노동자 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이들이라 소위 민주화 개념은 있었으나 젠더의식은 굉장히 약했다”며 여성을 위한 시설과 인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가장 절박했던 것은 이주여성노동자들을 위한 쉼터였다. 당시 이주여성노동자를 위한 쉼터가 전무한 상태인데다 기존의 쉼터들도 열악한 처지라 남성들이 입소하면 여성들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여신학자협의회에서 일하고 있던 한 대표는 독일의 세계기독위원회에 편지를 써 이주여성노동자 쉼터 마련을 위한 기금 3천만 원을 요청했고, 2년만에야 돈이 도착했다. 하지만 2년 동안 건물 한 층을 임대할 수 있는 전세금은 3천만 원에서 5천만 원으로 훌쩍 올라버려 모자란 돈 2천만 원은 따로 모금을 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1년 ‘외국인여성노동자의 집’이라고 이름붙인 쉼터를 마련했고, 그렇게 이주여성을 위한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 쉼터를 마련할 때 외국인 여성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하니 아무도 집을 안 발려 주는 거에요. 부동산에서는 ‘그러지 말고 그냥 집을 하나 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순전히 배짱으로 건물을 매입하고 돈을 모아 해마다 한 층씩 전세 들어 있는 사람들을 내보냈죠. 건물 한 채를 온전히 마련하는데 7년 쯤 걸린 것 같아요.”
15년 전 이주여성노동자를 대상으로 시작한 쉼터는 2003년 ‘이주여성인권센터’로 이름을 바꾸고 결혼이주여성들을 위한 활동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게 된다.
“쉼터에서 다양한 이주여성을 만났어요. 결혼이주여성과 성매매로 유입된 여성도 만나게 됐어요. 실제로 만나보니 성매매로 유입된 이주여성들의 인권문제가 가장 심각했는데 그들을 위해서는 이미 활동하고 있는 두레방이나 새움터같은 전문가들이 있었어요. 결혼이주여성들을 만나면서는 이들이 24시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이주여성노동자들은 퇴근하면 그래도 사생활이 있는데 폭력 피해를 당하는 결혼이주여성들은 그럴 수도 없는 거에요. 그들의 상황이 너무 참혹해서 활동의 중심을 결혼이주여성으로 옮기고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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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염 대표는 여성운동 후배들에게 '마음을 비우고 사는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민중과 더불어 살기 위해 학위 포기


45여년 전 한국에서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던 시절 한국염 대표는 ‘여자 목사’가 되고자 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성직자의 길을 택한 데는 어린 시절 죽을 고비를 넘나들었던 개인적 체험도 한 몫을 했다. 한국전쟁 이후 스칸디나비아 반도 3국이 운영하던 지금의 국립중앙의료원의 전신이었던 병원에서 한 대표처럼 위독한 환자가 들어와 살아나간 게 처음이었단다. 주변 사람들 모두 죽는다고 했던 13살짜리 소녀는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그 경험은 그를 자연스레 신학교로 이끌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한국에 여자 목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신학교에 갔어요. 그 때만 해도 나는 여자들이 똑똑하지 못해서 목사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지, 제도 때문인 걸 몰랐어요. 그런데 입학하고 보니 여자는 목사가 못된다는 거야. 학교를 그만둬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던 중에 우리 학교에 여자 교수가 있는 걸 보고는 ‘목사가 못되면 교수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남았죠.”
1969년 한신대학교에 입학한 한 대표는 대학시절 기장여신도회에서 여성목사 안수를 위해 교단과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자진해서 찾아다녔다. 해당 교단에서 여성목사 안수제는 1975년 세계여성의 해를 한 해 앞둔 1974년 통과됐다. 한국염 대표의 여성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 대표는 대학원 졸업 후 기독교 잡지에서 기자로 활동하다 여신도회 전국연합회에서 기독교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기독교신문 기자였던 남편 최의팔 목사는 주요 일간지에서 싣지 않았던 ‘인혁당 사건’을 신문에 실었다가 안기부에 의해 해고를 당했다. 그 후 한 대표 부부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건너갔고, 여성신학으로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한 대표는 체류 3년 만에 학위를 포기하고 귀국했다.
“독일 가기 전 민중신학을 하시던 교수님들의 삶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그분들을 존경하지만, 교수라는 위치 때문에 민중처럼 살지는 못하시더라고요. 민중 지향성을 갖고는 있지만 민중과 더불어 사는 삶은 안되는 거에요. 내가 공부를 더 해야하나 고민할 때 그 생각이 나면서 나도 교수가 되면 그렇게 살게 될 것 같아 학위를 접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50년 운동을 돌아볼 때 가장 잘 한 일 중의 하나가 학위를 포기한 것이에요. 기득권 자리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었어요.”


독일에서 돌아온 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운동에도 결합한 한국염 대표는 수 년 째 정대협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1차 아시아연대회의의 실무책임자이기도 했던 그는 1996년부터 실행위원을 시작하는 등 20여년 간 정대협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정대협 운동은 성, 계급, 인종 문제가 다 녹아들어 있는 거에요. 당시 한국에서 힘없는 사람들이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갔거든. 거기에 계급 문제가 있고, 일본 제국에 의해 희생당한 것이니 제국주의 문제가 있고, 여성이 겪는 성폭력 문제이면서 민족과 인종 갈등까지도 포함된 문제이지요.”
한 대표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미군 위안부’나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게 성폭행 당한 베트남 피해 여성들에 대해서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일본처럼 국가가 모집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군이 베트남 피점령지 여성에 가한 폭력에 대해서는 당연히 사죄를 해야지요. 정대협 운동이 자국의 여성에만 국한하지 않고 전시 하 체제 여성 문제로 끌어안고 가는 것에 대해 의미부여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 민족이기 때문에 한국인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이 진짜 민족주의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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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8일 세계여성의날 기념 제31회 한국여성대회 '퍼플워킹'에 이주여성들과 함께 참여한 한국염 대표. 앞줄 소녀상 왼쪽 의자에 앉아있는 한 대표.>

“앞으로도 이주여성인권센터가 내딛는 걸음이 곧 길이 되길”


한국염 대표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와 함께 활동한 지 15년, 정부가 이주여성을 위한 지원사업을 시작한 지 10년이 흘렀다. 한국사회에서 이주여성들의 인권문제가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지만 지난 10년간 가정폭력방지법 개정, 이주여성 쉼터 마련, 콜센터 개설 등 이주여성의 인권을 위한 제도화 작업은 계속 진행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와 한 대표의 활동이 큰 부분을 차지했음은 물론이다.  
“어쨌든 제도는 좀 나아졌지요. 초창기에는 결혼이주여성들을 전업주부로 상정하고 입국시키기 때문에 이혼하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법무부에 체류법 변경을 요구해서 일반인은 5년이 지나야 영주권이나 국적을 신청할 수 있는데 결혼이주여성은 2년 만에 신청할 수 있게 바뀌었어요. 이혼 시 혼인 파탄의 책임이 당사자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면 체류할 수 있게 됐죠. 또 초창기에는 결혼이주여성들이 취업을 못했어요. 친정집에 돈 보내는 문제로 남편과 갈등이 생기고 여성들의 자존심이 다치니까 일자리를 줘서 여성들이 떳떳하게 자기가 번 돈을 고향에 보내게 하자고 설득했죠. 그렇게 결혼이주여성들의 취업권이 열리게 됐습니다. 누군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내딛은 걸음이 곧 길이 됐다’고 얘기를 하는데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정체성을 ‘종교여성운동가’라고 말하는 한국염 대표는 “다시 태어나도 또 여성운동을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평생 낮은 곳에서 힘들지 않으셨냐’는 필자의 질문에 그는 “나 이름 많아. 명예도 있고. 상도 여러개 탔어”라며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없이 살았어. 사람들이 나보고 어떻게 생활했냐고 물어보는데 하루 세끼 밥 먹고 살았어요. 결국 집착을 안하면 쉬운 것 같아요. 우리 센터도 돈이 없어 언제까지 버티겠나 생각하다가도 이거 오래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 욕심이다, 시대적 사명을 다하면 접는 거지 뭐. 문제는 내가 시대적 사명을 다했느냐 하는 질문이에요.”  


글/사진 : 김수희 여성연합 활동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는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여성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서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민간단체로

외국인이주여성의 인권보호와 권익신장,
모성보호와 육아지원을 통한 이주여성과 자녀들의 생명존중,
성인지적 관점에서 이주여성을 위한 교육과 문화활동을 통한 한국사회의 적응지원,
국경을 넘는 연대를 통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듦으로서
평등하고 평화로운 지구촌 사회를 실현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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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여성대회 후기]

희망은 연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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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세계여성의 날을 며칠 앞둔 지난 3월 5일 토요일 32번째 한국여성대회의 열기는 악천후를 이겨낼 정도로 열광적이었다. 당일 숨은 주역이었던 여성연합의 스태프들과 자원봉사자들은 행사 사전준비와 행사보조를 원활하게 이끌어가며 참여자들의 목소리를 확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 날 자원활동가로 행사에 참여하면서 다른 봉사자들과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행사는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서울시청 다목적홀과 종로 일대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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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11시 4분

참가자들을 맞이하기 전에 준비할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안내 데스크 정리 외에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께서 그린 그림 위에 참여자들이 자신만의 그림을 덧붙여 그려 넣는 일을 도와야 했다. 엘리베이터 사이에 놓인 책상에는 길원옥 할머니의 작품을 모티브로 그려진 A6사이즈의 스노우지에 꽃 두 송이만 그려진 백지가 놓여있었다. 자원활동가들이 사전에 해야 할 일은 몇 장의 샘플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곳 그림판에 배정된 자원활동가는 아니었지만 다른 팀에 소속되었던 자원활동가들과 함께 멋진 가이드라인을 그려넣을 수 있게 다들 심혈을 기울였다. 그림을 그리면서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간 듯한 소소한 기쁨을 느꼈다.
우리가 그린 이 작품들도 여성미래센터 허스토리홀에서 진행 중인 ‘소녀의 꿈, 함께 피우다-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꽃할머니 전시(3.2-4.1)’에 함께 전시된다는 사실을 안 건 한참 후였다.정성을 들여 한 작품만 만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오전 11시 4분~오후 1시 50분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기념식이 진행되는 서울시청 다목적홀 로비에서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2016년의 희망’을 피켓에 적고 그 피켓을 든 모습을 SNS에 올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해시태그 ‘#희망연결’과 연동되게 SNS에 ‘인증사진’을 올리는 시민들에게는 케이크 선물도 제공했다. 함께 진행했던 친구는 재작년에도 참여했다고 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대학 입학 후 계속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그 친구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직접 현장 속 일원이 되고자 하는 열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어 부럽기도 했다.
피켓에 내용을 적는 것에 대해 상업용이라거나 혹은 ‘쓸 말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90% 정도였다면 나머지 10%는 여성인권에 대해 그 많은 생각을 간단하게 요약하기 힘들어해 인상 깊었다. 한 줄의 말을 쓰는 일에도 진지하게 참여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여성 인권에 대한 고심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 중 어떤 남성분이 적은 ‘성평등은 모두를 위한 진보다’라는 문구는 여성으로서 평소에 여성인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의 졸렬함을 반성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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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50분~오후 2시 30분

방송인이자 한여성단체연합 홍보대사인 김미화씨의 사회로 ‘2016년 3.8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32회 한국여성대회’가 마침내 시작됐다. 오프닝 율동에 이어 시상식이 이어졌고 3.8여성선언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1000여명의 참여자가 의자에 혹은 바닥에 앉아 보라색 손수건을 들고 비정규직 철폐, 여성폭력 반대, 역사 왜곡에 대한 아픔을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구호를 외쳤다. 보라색 물결 속에서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오후 2시30분~오후 4시40분

장대비를 맞으며 참여자들은 실외로 나가 행진을 시작했다. 자원활동가들은 대열을 정비하고 퍼레이드의 끝 지점에서 플랜카드, 피켓 등을 수거하는 일을 도왔다. 거센 비에도 불구하고 꺽이지 않는 무소의 뿔처럼 어린아이, 어르신 할 것 없이 보라색, 흰색 우비를 쓰고 소녀상까지 힘찬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퍼레이드 도중 만난 박기혁씨는 자활지원센터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로 재작년부터 전국연대에 가입해 여성 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외치는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깃대를 든 모습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굳건해 보였다. 박씨 외에도 많은 참여자들을 보면서 한국여성 인권이 적어도 지금보다 더 추락할 수 없도록 하는 든든한 ‘시민 배리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국여성의 권리가 불충분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의 스쳐갔던 생각들이 ‘개념 있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글 : 이새봄(제32회 한국여성대회 온라인 기자단)
사진 : 김동현, 정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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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6/03/21-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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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콘] 세상을 바꾼 그녀들 15 김윤자 경남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운동은 타인의 변화를 요구하지만 나도 변화하는 것

 

경남여성연대에서 2002년 경남여성연합 창립

지역 넘어 경남 전체 아우르는 연합체 운동 시작

여성운동,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더 잘 살 수 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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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여성운동을 좀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어느날 남편이 당신은 참 잘 살고 있는 것 같다라고 얘기하더라고요. 엄청 가부장적인 사람이라 결혼 후 직장도 못 갖게 하더니 요즘에는 오히려 어떤 사건이 터지면 여성단체 뭐하냐’, ‘시민단체가 가만히 있으면 되느냐고 말해요. 이제는 여성운동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었어요. 여성운동을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남편도 더 일찍 바뀌지 않았을까요?”

50대 후반인 김윤자 경남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좀 더 빨리 여성운동을 시작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던 남편이 여성운동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고, 두 아이들도 엄마의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을 보면서 이 좋은여성운동을 좀 더 빨리 시작했더라면 주변의 더욱 많은 사람들이 변화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김 대표의 더 짙은 아쉬움은 여성운동으로 인한 바로 자신의 변화다. 자신이 누구보다 많은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여성운동과의 늦은 만남이 안타깝기만 하다.

각 단체 활동가들이 들어왔다가 금방 그만두면 제가 막 나무랍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만둔다고요. 운동을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지만 나도 변화하는 거잖아요. 나의 변화에 가치의 중점을 두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일을 하면서 공부가 많이 필요해서 공부를 하고 싶은데 지금 시작해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내 발목을 잡더라고요.”

김 대표가 여성운동을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 2004년 진해여성의전화에서 부설기관으로 방과 후 교실을 시작할 때 교사로 합류하면서 처음 여성운동을 접했다. 아내가 바깥일하는 것을 싫어라 하던 남편도 전직 교사였던 아내의 아이들이 좋아서라는 이유에는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운동하는단체인 줄 모르고 발을 디딘 진해여성의전화에서 김 대표는 방과 후 교실 실장, 진해여성의전화 회장, 상담소장을 거쳐 2014년 경남여성단체연합 대표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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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2013 여성주간기념 여성정치세력화 토론회 모습 @경남여성연합 홈페이지>


경남여성연합 창립으로 경남 내 여성운동 확산

 

경남여성장애인연대, 경남여성회, 김해여성의전화, 김해여성회, 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 진주여성민우회, 진해여성의전화, 창원여성살림공동체, 창원여성의전화, 통영여성장애인연대, 거제여성회 등 11개 여성단체들의 연합조직인 경남여성단체연합은 2002년 창립했다. 경남여연이 생기기 전에도 1987년 창립한 경남여성회를 중심으로 10여개의 여성단체들이 경남여성연대라는 이름으로 3.8세계여성의날 기념 여성대회나 여성주간 행사를 지속해왔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여성 운동을 해보자는 의견이 모아졌고 한국여성단체연합과 연이 닿아 200221일 경남여성연합으로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김 대표는 경남 전체를 아우르는 연합체인 경남여연이 창립하면서 경남 지역에 여성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경남여연 이전에는 연대 형식의 운동을 하더라도 전국 단위의 여성이슈는 다루지 않았어요. 지역도 창원, 마산, 김해, 진해 등 근거리에 있는 단체 중심으로만 모였고요. 통영이나 거제, 양산, 진주까지 먼 거리의 단체들은 경남여연이 생기면서 함께 하게 됐죠. 경남여연이 출범하면서 각 지역에 여성단체의 필요성에 대해 우리가 제안하기도 하고 관심있는 사람들이 단체를 만들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여성운동이 보다 많이 알려지고 확산되었죠.”

 

창립 15주년을 앞두고 있는 경남여연은 경남도의 여성정책을 모니터링해 평가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활동에 주력해왔다. 지방선거나 총선 때는 여성정책 공약을 만들어 후보들에게 공약을 채택할지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그 답변을 발표하며 여성정책 확산에도 힘쓰고 있다. 또한 경남도의 각종 위원회에 참여해 정책력 강화에 목소리를 높이고 지역의 현안 대응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또한 연합체인 만큼 회원단체들의 활동가 임파워링과 교육에도 애를 쓰고 있다. 김 대표는 최근 여성단체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 전반적으로 힘이 빠지고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그것이 현재 경남 도정과의 거버넌스가 어려워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경남도가 시민단체를 거버넌스의 동반자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도와 소통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여성단체가 지원할 수 있는 사업들에 대해서도 도가 자꾸 제한을 해서 거버넌스를 위한 사업들이 계속 줄어들고 있어요. 여성주간사업으로 해마다 토론회와 토크콘서트를 진행했었는데 올해는 사업비가 절반으로 줄어 토론회와 토크콘서트를 묶어서 원탁토론회 하나만 진행했거든요. NGO 박람회도 예산절약 명목으로 없어졌어요. 이런 외적인 영향으로 여성단체와 시민단체 활동이 위축되다보니 활동가들이 보람을 찾기 힘들어 자꾸 자신감을 잃어가는 것 같아요.”

지난 7월에는 창원시의원의 직원 성추행 사건이 발생해 경남여연이 중심이 되어 피해자 상담지원과 가해자 징계를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의원들과의 간담회 자리도 마련해 함께 했던 여성의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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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구색 맞추기일 뿐 실천의 동반자로 생각 안해

 

김윤자 대표는 도와의 거버넌스 뿐만 아니라 경남이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지역이라 여성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특히 많은 이슈에서 연대하는 소위 진보라 불리는 남성 활동가들과 관계에서 더욱 절망감을 느낀다.

진보라고 불리면서도 가부장성에 갇혀있는 남성들을 보면서 우리가 이 사람들조차도 변화시키지 못하면서 일반 시민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생각합니다. 그들은 구색맞추기로 여성단체를 필요로 할 뿐, 실천의 동반자로 생각하지 않아요. 과제 중의 과제에요. 성별영향평가 같은 것으로 공무원들과 이야기를 해봐도 성평등을 무조건 ‘55’라고만 생각해요. 여성들이나 연대단체들조차도 이러한 가부장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성운동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여성문제가 잘 안보이는 것입니다.”

 

올 여름 큰 수술을 하고 아직 치료중인 김윤자 대표는 힘든 치료 과정중임에도 시종 밝고 기운차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인터뷰 당일 회원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한 여성운동 아카데미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평소 사람을 싫어하거나 하는 일이 없을 정도로 매사에 긍정적이라는 김 대표는 최근에는 뉴스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다며 중앙과 경남의 정치세태를 꼬집었다. 덧붙여 지역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단체들이 더욱 많은 정보를 공유해줄 것을 주문했다.

지역에 있으면 관련 정보나 지식이 많이 부족합니다. 서울에서 진행하는 어떤 일들이 우리에게는 좋은 모델이 되기도 하거든요. 여성연합 성평등지역정치위원회에서 논의한 내용들을 가져다가 경남에서 필요한 것을 더 넣어 우리의 의제로 만들기도 하죠. 앞으로도 그런 것들을 많이 공유해 주면 좋겠어요. 또 지역을 넘어 다른 곳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의 교류도 확대되었으면 합니다.”

 글/사진 : 김수희 여성연합 활동가

경남여성단체연합은 경남지역 11개 여성단체연합으로

경남지역 여성운동 단체간의 협력과 조직적 교류를 도모하고

양성평등, 여성복지, 민주, 평화통일을 실현하고자 합니다.


경남여성단체연합에서는

여성권익향상을 위한 법률, 제도의 제정과 개선활동

여성복지와 일하는 여성을 위한 관련사업

지방자치단체의 성평등 정책분석과 평가

정책개발 의제발굴을 통한 성 주류화 정책실현

여성운동활동가

지역여성교육,연수사업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 기념 경남여성대회 주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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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연합 '온콘' '생각을 바꾼 그녀들 세상을 바꾼 그녀들'

2014년 시즌1을 진행한데 이어 2015년 시즌2

전국의 여성운동가 인터뷰를 이어갑니다.

우리 사회 통념을 바꾸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을 만들어가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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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5/11/12-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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