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아무도 잊히지 마라” 제주4.3을 모르는 당신에게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 단재 신채호 -
장하나 환경운동연합 권력감시팀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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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유적지 한수기곶.ⓒ김은숙[/caption]
제주4.3이 뭐죠? 어쩌면 당연한 질문입니다. 제주4.3을 모르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역사를 빼앗긴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역사교과서는 점점 얇아져 가고, 역사를 몰라도 입시와 진학이 가능한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민의 힘으로 국정교과서를 사실상 백지화시켰고 이제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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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제 69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이 4.3평화공원에서 열렸다. ⓒ SA Yunsoo[/caption]
4월 3일은 69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일입니다. 저 유명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을 오늘 되새기며, 제주사쩜삼이 아닌 제주사삼을 아는 것은 제주4.3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일 그리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003년 10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확정한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더라도 당시 제주 인구의 9분의 1에 달하는 3만 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당시 이승만 정부가 주도한 강경진압작전으로 제주도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만9285동이 소각됐다고 합니다.
왜 이런 대량학살이 일어났을까요? 어떻게 이런 엄청난 비극이 잊혀질 수 있었을까요? 이런 의문을 품은 채 4.3의 자취를 따라가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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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4.3백비, 이름짓지 못한 역사. 백비(白碑),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항쟁.폭동.사태.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김은숙[/caption]
1945년 8월 우리 민족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국권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미군과 소련군이 남과 북에 들어와 38도선을 경계로 주둔함으로써 원치 않는 분단 상황이 조성되고 말았죠. 미군이 제주도에 진주한 것은 1945년 9월 28일, 실질적인 군정 업무를 담당할 제59군정중대가 도착한 것은 11월 9일이었습니다. 제59군정중대는 인력 부족과 정보 부재로 원만한 통치 업무를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영향력이 강했던 인민위원회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민위원회란 어떤 조직일까요? 광복 직후 자주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건국준비위원회(약칭 : 건준)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었고, 제주에서도 45년 9월 10일에는 제주도 건준이 결성되었습니다. 9월 23일 건준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고 이를 계기로 45년 말까지 청년동맹・부녀동맹・농민위원회・소비조합 등 각종 사회단체가 속속 조직되었죠.
제주도인민위원회가 가장 주력한 것은 치안 활동이었습니다. 일본군 패잔병의 횡포를 막는 일, 토지・산업체 등 적산(敵産) 및 군수물자를 감시하는 일에서 지역별로 초등학교・중학원 등을 설립하여 자치교육을 실시하기까지 인민위원회는 실질적으로 도내 행정을 주도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미군정에 의해 행정이 실시되었지만 여러 마을에서 인민위원장이 이장이 되었고, 인민위원회는 주로 마을 향사를 사무실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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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 직후 상황을 표기한 미군 보고서 1948.4.9. ⓒ김은숙[/caption]
그러나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공식적인 행정기관이나 통치기구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미군정은 도청과 경찰의 요직에 일제 때의 관리를 그대로 앉혔으며, 서서히 우익인사들을 조직화시켜 인민위원회에 대항할 세력으로 키워갔습니다. 1946년 말부터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제주4.3의 근본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47년 3월 1일은 해방 후 두 번째 맞이하는 3・1절로서 앞선 2월 17일에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교육계・유교계・학교단체 등 각계각층이 망라 된 ‘3・1투쟁기념행사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전도적인 기념행사를 치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3・1절 행사 때 시위는 절대 불허한다는 방침과 집회 사전 허가원칙을 정하였고, 미군정 당국과 수차례 협상하였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3・1절 행사는 시민주도로 강행될 수밖에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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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넓궤(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산90번지 일대)큰넓궤는 제주4.3당시 동광리 주민들이 2개월 가량 집단적으로 은신생활을 했던 곳이다. 1948년 11월 중순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이 시행된 이후 주민들은 야산을 흩어져 숨어 있다가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40여일 후 토벌대의 집요한 추적 끝에 발각되었다. 주민들은 한라산을 바라보며 무작정 산으로 들어갔으나 인근 볼레오름 지경에서 토벌대에 총살되거나, 상포된 후 정방폭포나 그 인근에서 학살됐다.ⓒ김은숙[/caption] 3・1절 기념대회는 각 읍・면 별로 치러졌고, 제주북국민학교에는 제주읍・애월면・조천면 주민 3만여 명이 모였습니다. 3・1절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군중들은 곧바로 가두시위에 나섰는데 이 때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고, 기마경찰이 다친 어린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 무장경찰은 군중에게 발포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나온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고, 사망자 중에는 15세 국민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피살된 여인도 있었습니다. ‘3.1발포 사건’으로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미군정에 대한 불만 여론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반면 미군정과 경찰은 사태 수습보다는 시위 주동자를 검거 하는 일에 주력하였고 이것이 결국 제주4.3으로 가는 단초가 되고 맙니다. [caption id="attachment_176108" align="aligncenter" width="640"]
다랑쉬굴. 다랑쉬굴은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위치한 길이 30m 인 용암동굴이다. 이곳은 4.3사건으로 피신해 있던 지역 주민 11명이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현장으로 1992년 발견 당시 유골과 당시 동굴 내부에서 쓰였던 항아리, 가마솥, 질그릇,물허벅,요강 등의 생활용품과 낫, 곡괭이, 도끼 등의 농기구가 발견되었다.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넣어 입구를 봉쇄했고 굴 속의 주민들은 연기에 질식되어 죽어갔다. 다랑쉬굴은 잃어버린 마을을 조사하던 ‘주제4.3연구소’회원들에 의해 1991년 12월 발견되어 1992년 4월 1일 공개했으며, 11구의 희생자 유해는 45일만인 5월 15일 한줌의 재로 바다에 뿌려졌다. 다랑쉬굴은 유해들이 밖으로 꺼내진 뒤, 나머지 유물들을 그대로 남긴 채 입구는 다시 콘크리트로 봉쇄되었다.ⓒ김은숙[/ca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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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못굴(제주시 애월읍 어음2리 706번지)이곳은 1949년 1월 16일, 토벌대와 민보단이 합동으로 대대적인 수색작전에 의해 동굴이 발각되면서 이 속에 숨어 있던 애월면 어음,납읍,장전리 주민 29명이 집단학살 당하였고 동굴 속에서 나오지 못해 굶어죽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또 다른 어머니와 딸 4구가 발견된 비극의 현장이다. 토벌대는 전날(1949년1월15일) 봉성리 구몰동이 무장대에 의해 습격을 당한 후 토벌대와 민보단이 대대적인 수색을 벌여 빌레못굴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 당시는 겨울이어서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동굴 입구를 찾은 토벌대는 굴 속에 숨어 있는 주민 29명을 집단총살하였다. 또한 남자 아이의 발을 잡고 휘둘러 돌에 메쳐 죽이는 참혹한 일도 일어났으며 이 아이의 어머니와 젖먹이 여동생은 동굴 안으로 깊숙이 숨어들었다가 어둠속에서 길을 잃어 굶어죽은 시신도 1971년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빌레몰동굴탐사반에 의해 발견되어 유족에게 인도되었다. 이 빌레못굴은 총 길이 11,749로 세계 최장의 용암동굴이며, 천연기념물 342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은숙[/caption] 제주도민들은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을 폭로하며 희생자 구호금 모금에 나섰고, 이어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발로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청 등 관공서는 물론 은행・회사・학교・운수업체・통신기관 등 도내 156개 기관, 단체, 회사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현직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하는 전도적인 파업이었습니다. 3월 14일,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이 제주도에 와서 총파업을 와해시켜 나갔습니다. 미군정은 3월 15일 전남・북 응원경찰 222명, 3월 18일 경기도 응원경찰 99명을 증파하여 총파업에 강경 대응하였고, 조병옥 경무부장은 3월 19일 담화문을 통해 경찰의 발포는 정당방위였으며 3.1절 집회가와 총파업이 북조선과의 통모로 발생했다는 내용을 공표하여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조작하였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176119" align="aligncenter" width="640"]
3.10총파업이 좌익에 의해 선동되었다고 기술한 미군보고서(1947.3.14.)ⓒ김은숙[/caption]
이 사건 직후 미군정 보고서에는 “제주도는 70%가 좌익정당에 동조적이거나 가입해 있을 정도로 좌익의 본거지”라고 기록되었으며, 미군정은 3월 15일부터 파업 주모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는데 3・1발포 사건 이후 1948년 제주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검속되었고, 이것이 ‘Red Hunt’ 즉 빨갱이 사냥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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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알오름 양민학살터섯알오름 탄약고터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할 때 모슬포 경찰서 관내의 예비검속된 사람들, 모슬포지역 132명, 한림지역 63명을 학살했던 장소이다. 예비검속이란 ‘사건을 일으킬 사람이라 예상하여 미리 잡아놓는다’라는 뜻이다.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6년 뒤인 1956년에 시신을 수습하여 백조일손지지(조상이 다른 백서른 두명이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되었다)에 132구, 만뱅듸 공동장지에 62구가 안장되었다. 이분들이 돌아가신 음력 7월 7일에 합동위령제를 이곳에서 올리고 있다.ⓒ김은숙[/caption] 1948년 1월 남한 단독선거안이 명백해지자 남한 내의 많은 정당과 단체에서 잇따라 반대성명을 발표하면서 격렬하게 반발하였습니다. 한반도 영구 분단에 대한 우려로 단선 반대 대열에는 좌파 진영만이 아니라 우파 일부와 중도파까지도 가세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단독선거 찬반 문제를 놓고 우파 진영도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던 상황이구요. 이런 정치 흐름 속에서 남조선노동당(약칭 :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강력한 투쟁계획을 세웠고 48년 2월 7일의 전국적인 총파업 ‘2.7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주도내 좌익진영은 47년 3월 10일 총파업 이후 이미 핵심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었고 궤멸상태에 있었는데, 미군정은 ‘2.7사건’을 구실로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연행과 취조를 실시했습니다. 48년 3월 학생 박용철이 경찰 고문에 의해 사망, 대정리 출신 양은하씨가 경찰 구타로 사망, 청년 박행구가 서북청년단에 끌려가 구타 후 총살당하는 등 한 달 새 3건의 사망사건이 발생하고, 이는 제주4.3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고 맙니다. [caption id="attachment_176115" align="aligncenter" width="640"]
이덕구 산전, 교래 북받친밭(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산 137-1번지)1949년 2월 4일 제주읍 동부8리 대토벌을 계기로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하고 봉개리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주민들은 당장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더욱 깊은 산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은신하기 좋은 곳을 찾아 헤매다 더욱 산속 깊숙이 들어갔으며 이곳 ‘시안모루’,‘북받친밭’까지 와서 은신생활을 했었다. 이곳은 피난 주민들이 귀순한 1949년 봄 이후에는 무장대사령부인 이덕구부대가 잠시 주둔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이곳 일대를 ‘이덕구산전(山田)’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엔 당시 움막을 지었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고 음식을 해 먹었던 무쇠솥과 그릇들이 그대로 널려 있다.ⓒ김은숙[/caption]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일어났습니다. 350명의 무장대는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고,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습니다. 4월 3일 하루 동안에 △경찰=사망 4명, 부상 6명, 행방불명 2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사망 2명, 생포 1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으니 이 날의 참사는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이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제주4.3은 이 날의 무장봉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는 제주4·3에 대해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제주4・3은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우리나라 건국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입니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된 제주4.3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3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가져왔고, 이는 당시 제주 인구의 9분의 1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인원입니다. [caption id="attachment_176116" align="aligncenter" width="640"]
북촌리 너븐숭이 옴팡밭.조천읍 북촌리 너븐숭이 일대는 1949년 4.3사건 당시 443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옴팡밭은 ‘오목하게 쏙 들어가 있는 밭’이라는 뜻이다. 4.3사건 당시 최대의 인명피해로 기록되고 있는 1949년 1월 17일 북촌대학살 현장의 한 곳이다. 당시 이 일대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 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이 밭의 가운데 작은 봉분도 당시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이다.ⓒ김은숙[/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76117" align="aligncenter" width="640"]
너븐숭이 애기무덤. 북촌리 주민 학살 사건 때 어른들의 시신은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해 다른 곳에 안장되었으나 어린아이들의 시신은 임시매장한 상태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현재 20여기의 애기무덤이 모여 있는데 적어도 8기 이상은 북촌 대학살 때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이다. 너븐숭이에서 벌어진 엄청난 사건을 소설가 현기영은 ‘순이삼촌’이라는 소설로 세상에 알렸다. ⓒ김은숙[/caption]
48년 5월 10일, 통일정부의 건설을 바라는 여러 정치세력들의 반대 속에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총선거에는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 참가 세력과 많은 중도계 인사들이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그리고 일부 중도세력만 출마하였습니다. 초대 국회는 3권 분립과 대통령중심제, 국회의 간접 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출 등을 요지로 하는 제헌 헌법을 만들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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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7월 20일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선출됐다. 해방된지 3년째가 되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선포식이 열렸다.ⓒ김은숙[/caption]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습니다. 그런데 10월 19일 제주4.3 진압을 위해 파견하려던 여수의 국방경비대 제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남으로써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여수순천사건으로 민간인 439명이 경찰과 국군에 의해 집단 희생되었고, 희생자가 2천 여 명에 달할 것으로 조사 보고하였으니 제주4.3과 함께 반드시 기억해야하는 역사일 것입니다.
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이때부터 제주도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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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대통령의 계엄령. 토벌대는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중산간마을에 들이닥쳐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가림없이 무차별 학살하는 ‘초토화작전’을 자행했다. 학살극은 제9연대장 송요찬이 1948년 10월 17일 ‘정부의 최고 지령’에 따라 ‘해안선에서 5km이외에 있는 사람은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하면서 예고됐고,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됨에 따라 본격화됐다. ⓒ김은숙[/caption]
이와 관련한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48년 10월 당시 9연대 군수참모를 지냈던 김정무는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른 작전을 군 내부에서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렀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제주4・3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군에 지시했고 이른바 ‘초토화작전’은 미국과의 교감 속에 진행됐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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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제주4.3사건 등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모슬포 경찰서와 성산포경찰서를 신설했고,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시켰다.ⓒ김은숙[/caption]
‘초토화작전’에 의해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참혹한 집단 양민 학살이 행해졌으며 4・3사건 전 기간 동안의 희생자 수는 3만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토벌대는 무장대와 민중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안 마을로 강제 소개(疏開)시키고 100여 곳의 중산간 마을을 불 태웠습니다. 소개령이 내려졌지만 병자・노인・어린이 등을 포함한 일부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허다했는데, 이승만 정부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으며 소개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채 방화와 학살이 이뤄진 마을도 많았습니다.
1949년 4월 1일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1948년 한 해 동안 1만 5,000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습니다. 그 중 80%가 토벌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부터 1949년 봄까지 겨우 몇 달 사이에 군・경 토벌대의 진압작전과 무장대의 보복 살상으로 수만 명의 희생되었고 130여 마을이 소개령 등으로 초토화됨으로써 제주공동체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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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은 정권의 탄압을 받아 필화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1970~80년대 학살극을 폭로한 소설가와 시인들이 공안당국에 끌려가 고문을 받거나 구속됐다. 이승만의 양아들은 ‘불법 4.3게엄령’을 보도한 언론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1978년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 발표돼 4.3의 참혹상을 정면으로 폭로하면서 4월 혁명 이후 18년만에 4.3논의의 물꼬를 텄으나 소설은 곧 판금되고 작가는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1987년엔 이산하 시인이 4.3을 소재로 '한라산'이라는 시를 썼다가 구속됐고, 김명식은1988년 4.3자료집을 펴냈다가 옥고를 치렀다.ⓒ김은숙[/caption]
이것이 제주4.3입니다.
1999년 12월 국회 본회의에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이에 따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약칭 : 4・3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2003년 10월 4・3사건의 진상을 담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보고서가 확정되었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진상보고서에 근거해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습니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희생’ 사실을 정부가 비로소 인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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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15일 '국가 공권력의 인권유린'으로 규정한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됐고, 10월 31일 노무현대통령은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김은숙[/caption]
그리고 지난 2014년부터는 제주4.3이 국가추념일로 지정되어 정부가 주관하는 행사로 치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는 제주4.3은 한없이 처량하고 무의미합니다. 바로 당신이 이 글을 읽는 순간 비로소 제주4.3은 역사가 되고 우리의 내일이 되는 것입니다.
어제는 69주기 제주4.3 추념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일 년 동안 제주4.3 70주년을 준비하려 합니다.
지난 3월 1일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 범국민위원회가 결성되었고 환경운동연합도 뜻을 모았습니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무고한 희생자들의 개별적인 배・보상 문제, 재판도 없이 감옥에 끌려 간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 문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4·3 행방불명인 문제, 제주4·3을 폭동이라 주장하고 제주를 '반란의 섬', '빨갱이들의 천국'으로 매도하는 역사왜곡 세력의 문제, 미군정 시기에 발발한 제주4.3에 대한 미국의 책임과 사과 문제 등 제주4.3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환경운동연합은 모든 생명에 평화롭게 공존하는 생태민주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 제주4.3을 이야기합니다.
이 글을 쓴 저는 제주도가 고향입니다. 제주4.3의 이야기를 들어주신 당신께 정말 감사드립니다.(사료 출처 : 제주4.3평화재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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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공간 re:born + 벨롱장[/caption]



















그림1) 보고서 개요[/caption]
환경운동연합은 2023년 상반기 전국 광역지자체 242개를 대상으로 그림1과 같이 질의하였다. 242개 중 답변이 온 지자체는 239개였다. 답변이 없는 지자체는 △경기도 과천시, △서울시 중랑구, △전라남도였다. 전국의 광역·지자체 평균 점수는 5점 만점 중 2.63점이었다. 5.0 만점인 지자체는 2곳이었으며, ▲부산광역시 사하구, ▲부산광역시 중구가 해당했다. 무응답(0점) 제외 0.3에서 1점 사이의 지자체는 8곳으로 △충남 당진시(0.3점), △경기도 용인시(0.7점), △서울시 강서구(0.7점), △서울시 성북구(0.7점), △서울시 서초구(1점), △서울시 용산구(1점), △인천광역시 강화군(1점), △전남 함평군(1점)이 해당했다. 상·하위 지자체는 아래 그림2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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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상·하위 지자체[/caption]
'1회용품 사용 줄이기' 정책은 2022년 11월 24일 본격 시행 예정이었다. 그러나 환경부가 돌연 1년 간의 계도 기간을 두기로 결정해 논란이 되었다. 본격적인 제도 시행을 2개월 앞둔 지금, 환경부는 지자체가 적극적선도적인 플라스틱 규제와 지역 주민 홍보 및 교육 등을 진행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기반과 틀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와 함께 1회용컵 보증금제 시행 지역 축소·1회용품 사용 줄이기 계도기간 등과 같은 자원순환 정책의 후퇴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
환경운동연합 김춘이 사무총장은 기후위기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가 플라스틱이며 환경운동연합은 생산 단계부터의 플라스틱 감축을 목표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전국 지자체 1회용품 대응 현황 보고서가 그 일환이라고 말했다. 또한 "환경운동연합은 자원순환 정책이 후퇴하지 말고 당당히 걸어가야 하며, 정부에게 오늘 나온 보고서를 토대로 유예시켰던 정책 운영을 촉구한다"라고 말했다. 환경운동연합은 앞으로도 환경부에 불필요한 1회용품 사용 감량과 재활용 불가능한 플라스틱 사용 감축을 위해 적극적이고 선도적인 정책을 펼칠 것을 요구할 예정이다. 또한, 하반기 시민들과 함께 11월 24일 본격적으로 시행될 ‘1회용품 사용 줄이기’ 정책이 계도 기간 동안 잘 정착했는지, 플라스틱 폐기물을 실질적으로 감량할 수 있었는지 모니터링할 예정이다.

2023.9.2.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반대 2차 범국민대회에 참가중인 시민들. 이날 약 5만여 명의 시민들이 함께 했다. Ⓒ환경운동연합[/caption]
쓰레기를 주워 보신 분은 아실 겁니다. 절대로 값지고 좋은 물건은 쓰레기로 나오지 않습니다. 길에 버려진 쓰레기는 무조건 더 이상 필요가 없고, 더럽고 누구나 피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팔아서 돈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게 처치하려면 종량제 봉투를 사던지, 폐기물 신고를 하던지 비용을 내가 부담해야 합니다. 후쿠시마 핵 오염수도 이런 쓰레기의 본질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일본 정부에게 득이 되고, 팔아서 돈이 되고, 효용가치가 있는 것은 절대 버려지지 않습니다. 가지고 있기 싫고, 더럽고, 빨리 눈 앞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은 것을 버리는 데, 그 종량제봉투의 값이 최대한 적게 드는 방식을 선택한 것입니다. 지구 상에서 가장 거대한, 더 이상 큰 사이즈가 없는 종량제봉투입니다. 바다입니다.
저는 이번 방사능 오염수의 방류로 진짜 무슨 심각한 인간 건강에 위해가 일어나길 바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세계인 중 단 한명이라도, 바다에 사는 온갖 동식물들 중 한 존재라도 이번 오염수 투기의 악영향을 받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바다에 쓰레기를 버리면서 이 쓰레기가 단 한 존재도 해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려면 애초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육상에서 이 폐기물을 처리하고 감당했어야 합니다. 그 정도의 부담도 지지 않으려면 원자력발전소를 지으면 안 됩니다. 원자력의 혜택은 있는대로 다 누리면서, 원치 않는 사고가 났을 때의 뒷감당은 해당 지역 주민이나 아무 관련도 없는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 나누어 지자고 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백번 양보해서 국제정치의 원리가 슬프게도 오로지 힘과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만 지배되니, 일본 정부는 자국의 이득에만 눈이 멀어 해양투기 결정을 내렸구나하고 쳐봅시다. 더 어이가 없는게, 우리나라 정부의 대처입니다. 8/31일자 KBS뉴스에도 나오던데, 우리 정부가 수산물 활성화를 위해 800억원을 투입한다고 합니다. 이건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30여년에 걸친 오염수 방류가 우리 나라의 관련 산업과 국민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들을 최소화하기 위해 오랜 시간동안 많은 금액의 세금을 투입해야 할겁니다. 그런데 이런 세금 투입이 대체 누구 때문에 시작 된겁니까? 왜 일본의 쓰레기 투기를 위해서 우리가 이런 엄청난 감당을 해야하는 지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됩니다. 오염수 방류에 문제제기를 하는 국민들을 싸잡아서, 괴담을 만들어낸다느니 불안감을 조장한다느니 비난하는 것이 나라의 지도자가 할 일은 아닙니다. 왜 많은 국민이 불안해하는지, 그것을 해소하려면 어떤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하는지 고민하고 현명한 방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지도자와 집권당이 해야 할 책무입니다. 대통령은 절반의 대통령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 국민의 대통령이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정말로 더 걱정되는 건 이번 오염수 방류가 끝이 아닐까봐입니다. 나쁜 선례라는 말이 있죠. 법에서도 앞선 비슷한 사례들에서 어떤 판결이 실제로 내려졌던지가 현재 사건의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를 넘어 열대화가 되어 간다고 유엔 사무총장이 말할 정도로, 우리는 이미 이상기후가 일상이 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전세계 이산화탄소 배출을 제로로 만든다 해도 이미 배출된 온실가스로 인해 상당기간 우리는 해수면상승, 이상 기후의 빈번한 발생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지금 대한민국을 포함해,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하고 있는 탄소절감 실천을 보면 지금 당장 온실가스 제로가 되긴 틀렸습니다. 지금처럼 탄소배출량을 신나게 늘려가다가는 북극곰 걱정할 것이 아니라, 당장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저는 다가올 해수면 상승과 폭염, 폭우, 잦은 태풍, 해일, 산불, 토네이도 같은 극심한 이상기후현상들이 지금껏 우리가 해변에 잔뜩 지어놓은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 정말 염려됩니다. 일본이 지진대비 강국이라고 자처하지만, 자연의 움직임 앞에 그 원전이 무력하기 짝이 없던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일본 탓만 해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전 세계에 현재 운전중인 원전만 422기, 건설중과 계획중인 것 까지 합하면 583기에 달합니다. 그 중 절대적으로 많은 숫자가 해안에 위치합니다. 우리 나라의 운행중인 한울, 월성, 새울, 고리, 한빛원전들. 한결같이 바닷가에 딱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제2, 제3의 후쿠시마를 잠재적으로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번 오염수 방류에 어떻게 대처하는 지가 정말 중요한 시험대인 것입니다.
위험성을 정확히 알 수 없으면 안전하다고 하는 자와, 안전성을 정확히 알 수 없으면 위험하다고 하는 자의 싸움. 언뜻 보면 논리 싸움인 듯, 힘의 대결인 듯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순간에도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은 논리에서, 힘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 그리고 자유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공교롭게도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은 2011년에 일어난 또 하나의 비극,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우린 기억합니다. 그때도 환경부 그리고 옥시와 같은 제조사들은 법적 문제가 전혀 없는 제품을 만들어 판매한 거라고 초반에는 아주 당당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결론이 났습니까? 673명이 사망하고 총 피해자가 7800여명입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훗날 인류에게 이런 구체적인 피해자 수치를 만들어 준 계기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더 보수적으로 좀 더 보수적으로 우리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는 국민의 기본적인 건강과 안전, 행복에 대한 추구의 권리를 옹호하고 보호해주는 나라가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제 꿈이 너무 야무진가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사고가 벌써 12년 전의 일이란 것이 새삼스럽습니다. 지금 우리를 이 자리에 불러모은 방사능 오염수의 방류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의 기억 속에서 12년전 그 끔찍했던 날은 조용히 시간의 지층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일본 사고 현지의 주민들과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들은 여전히 고통이 현재형이겠으나, 적어도 일본국민이 아닌 다른 나라 보통 사람들의 시선은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원자력발전의 음영이 이렇게나 짙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 쉽게 잊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의 방류를 진절머리 나게 반대하고, 분통터지는 여기에 모인 우리라 하더라도 원자력발전의 어두움 앞에서 남 탓만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추구해 온 소비와 성공과 눈부신 경제적 번영 아래에는 핵 오염수와 미세플라스틱과 불에 탄 숲속 동물의 사체가 뒤엉켜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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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2.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반대 2차 범국민대회에 참가중인 시민들. 이날 약 5만여 명의 시민들이 함께 했다. Ⓒ환경운동연합[/caption]
저는 오늘 이 자리를 빌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의 계획이 일본 정부에게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바로 그 시점부터 방류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보이고 운동에 함께 하지 못 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을 고백합니다. 저의 마음 깊숙이 자리했던 무력감, 어차피 아무리 반대해도 대통령이, 일본 정부가, 국제기구가 정한대로 흘러갈 거라는 허탈한 심정. 그것이 진작에 여러분과 함께 적극적인 행보를 걷는 것을 방해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여기에! 여러분과 함께 있고 저의 속마음을 충분히 내보였으니, 이젠 더 많은 친구들과 만나서 함께 쓰레기를 주우며, 우리가 만들어 갈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인생은 짧고 운동은 길다. 여러분 힘내서 함께 걸어갑시다!!
(이 글은 2023.9.2.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반대 2차 범국민대회에서 발언한 내용입니다)
지난 7월15일 미호강의 제방 붕괴로 인해 궁평2지하차도가 잠기면서 14명의 무고한 시민의 희생되었다. 이후 7월 28일 국무조정실은 오송 참사와 관련해 5개 기관 공직자 34명과 공사현장 관계자 2명 등 총 36명을 대검찰청에 수사 의뢰했다. 감찰 과정에서 충북도, 청주시, 행복청, 충북경찰청, 충북소방본부 등 5개 기관의 관리·감독의 문제가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국무조정실은 최고책임자인 충북도지사와 청주시장은 감찰대상에 포함조차 시키지 않았다.
감찰 내용에 따르면 ① 행복청의 경우 ‘오송-청주 도로확장공사’ 발주기관으로서 기존 제방 무단 철거, 부실한 임시제방에 대한 관리감독 위반, 제방 붕괴 인지 이후 재난 관련 비상상황에 대한 대응 미조치 ② 충북도는 오송 궁평2지하차도 관리 주체로서 홍수경보 발령에도 교통통제 미실시 및 미호천 범람 신고에 따른 비상상황 대응 부재 ③ 청주시는 미호강 범람 위기 상황을 통보받았음에도 이에 대한 조치 부재 ④ 충북경찰청은 112신고 접수에도 현장출동을 하지 않고 112신고 시스템 조작 ⑤ 충북소방본부는 현장의 상황보고에도 인력과 장비 신속 투입 등 조치 부재 등의 문제가 드러났다.
오송 참사는 검찰에서 지목한 행복청, 충청북도, 청주시, 충북경찰청, 충북소방본부가 각 기관의 역할만 충실히 이행했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전국 시민사회를 비롯해 전문가들은 이번 오송 참사가 ‘공중이용시설의 설계, 제조, 설치, 관리상의 결함으로 인한 중대시민재해’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정조사실의 발표는 이러한 주장을 묵살했다. 그리고 오송 참사의 책임자로 지목된 충청북도 김영환 지사와 청주시 이범석 시장은 지금까지도 오송 참사 피해의 수습과 회복,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재발방지의 노력을 뒷전이고 책임 떠넘기기와 기억 지우기에 전념하고 있다.
오송 참사는 명확한 인재다. 오송 참사가 일어난 지 50여 일이 지났고 수많은 의혹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진상규명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오송 참사는 명확한 중대시민재해로 그에 따른 진상조사와 처벌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도로관리청의 경영책임자로서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충북도지사, 기존 제방을 무단으로 철거하고 임시 제방을 부실하게 관리한 행복청, 재난관리책임기관의 장으로서 재난대응조치를 취하지 않은 청주시장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에 환경운동연합 전국 지역조직은 각 기관의 최고책임자를 검찰이 당장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으로 기소하고, 조사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이번 오송 참사가 진상규명과 책임자에 대한 처벌 없이 꼬리 자르기로 끝난다면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오송 참사에 이은 인재는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걸 명심하길 바란다.






대행진 3일차에 날이 갠 제주도의 하늘과 푸른 바다ⓒDaum cafe '구럼비야 사랑해'[/ca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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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항 설러불라!(집어치워라!)ⓒDaum cafe '구럼비야 사랑해'[/caption]
제주도, 나는 어디까지 알고 있었나?
'이건 진짜 기후재난이다. 이게 바로 재난급 폭우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비를 맞으며 도착한 강정 해군기지 앞. 코로나로 인해 4년만에 재개되어 인원이 줄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행진에 참여하기 위해 저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왔습니다. 민군복합형관광미항을 표방한 미군 해군기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가는 길마다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란다는 인사 발언으로 시작된 2023 제주생명평화대행진.
처음인데다 배경은 잘 몰랐지만 '생명'과 '평화'를 말하는 대행진에 2박3일간 참여하고 왔습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부터 시작해, 제2공항으로 고통받는 성산을 지나 제주시까지 ‘평화’를 외치며 3일간 50여km를 걸었는데요.
그렇게 걷고 또 걸었던 제주에서의 3일은, 제가 그동안 알고 있던 제주와 제주의 이야기는 참 작은 일부였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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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럼비를 되찾자! 제2공항 결사반대! ⓒDaum cafe ‘구럼비야 사랑해’[/caption]
해군기지로 인해 강정마을에는 미국의 핵잠수함이 드나들며 평화가 위협받고 있었고, 제2공항은 성산 주민들이 반대하고 있음에도 강행되고 있었습니다. 개발과 보존을 둘러싼 찬성과 반대 속에 주민들은 갈등이 심화되어 공동체가 전과 같지 않음은 물론, 난개발과 과잉관광으로 제주의 자연과 생태계가 위험에 처해 있었는데요. 보호생물들은 그들의 존재가 환경영향평가서에 '보호종 없음'이란 말로 지워진 채, 구럼비와 샘물, 해안, 연산호군락지 등 서식지 파괴와 함께 무참히 사라졌고, 지나는 마을마다 아픔이 깃들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며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속에 겉보기엔 활기를 띠는 듯하지만, 끝없는 개발 욕심에 제주도민분들의 삶과 자연 생태계는 메말라가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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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고통을 지닌 제주 북촌리의 역사를 엿보았던 시간ⓒDaum cafe ‘구럼비야 사랑해’[/ca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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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 참가자들이 손수 칠해 완성한 메세지를 두르고 걷는 학생들ⓒ환경운동연합[/caption]
목을 축이며 더위를 피하는 속에 제주도의 역사적 아픔(4.3)에 대한 공부를 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또 여러 단체와 사람들이 모였던 만큼 다양한 이슈를 접할 수 있었는데요. '해군기지 폐쇄하라! 제2공항 중단하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중단하라!' 를 소리 높여 외치기도 하고, 차별 받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노래를 들으며 행진을 계속했습니다. 그것이 차별인지도 모른 채 지내왔구나 싶기도 해 생각에 잠겨 걷기도, 앞으로 더 많은 나날들을 기후/생태계 위기 속에 살아가며 부딪혀야 할 학생들의 씩씩하고 즐거운 발걸음을 보며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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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팀으로 참가자들을 위해 노고하셨던 제주환경운동연합 활동가님들과ⓒ환경운동연합[/caption]
이번 대행진을 위해 정말 많은 분들이 노고해주셨는데요. 참가자들의 안전을 위해 그 누구보다 많이 걷고 뛰셨던 제주환경운동연합의 활동가님들, 그리고 행진을 준비해오신 모든 스태프 분들 덕분에 고된 일정이었지만 모두가 무사히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학생으로서 참가해오다가 올해는 안전팀 요원으로서 열정적으로 활약해주신 분도 계셨구요. 매년 (제2공항과 해군기지 문제가 해결되어) 이번 행진이 마지막이기를 바라며 준비하신다면서도, 너무나도 밝고 즐겁게 곳곳에서 든든히 계셔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지금도 큰 감사의 마음이 듭니다. 함께 사진을 남기거나 연락처를 주고받진 못했어도, 마음에 새긴 분들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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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진 율동을 추는 볍씨, 보물섬 학생들ⓒ환경운동연합[/caption]
대행진을 다녀오며
행진 기간 동안 제가 혼자 있을 때면, 어느샌가 곁에 다가와 함께 걸어주시고 챙겨주시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지방에서 대안학교 선생님으로 계신 그 분은, 제주도의 대안학교인 볍씨 학교 학생들이 행진에 참여한다고 해 전날 미리 오셔서 같이 지내기도 하시고, 일정 내내 매일 아침 볍씨 학생들의 아침 달리기와 밤에는 하루 나눔을 함께 하셨는데요.
인디언 달리기를 하는 아이들을 따라 헉헉대며 두 바퀴를 애써 뛰시다가, 세 바퀴부터는 도저히 힘들어 잰 걸음으로 쫓아만 가셨다고 해요. 행진을 마치고는 피곤한 몸으로 3시간 가까이 학생들의 하루 나눔을 들어주셨구요. 학생들은 그런 선생님이 너무 고마웠다며 서로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얼음물을 나눠마시며 선생님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셨어요. ‘저 어린 애들도 태도가 중요한 걸 아는 거지.’
속도를 똑같이 맞추지는 못해도, 달리지 못한다면 걸어서라도 함께하고자 노력하는 태도. 그렇게라도 그 마음 높이를 맞추려 열심히 애쓰는 진심. 뚝딱거리는 몸일지라도 행진곡에 맞춰 배운 율동을 함께 추려고 하는 부끄러운 몸짓. 그 진심어린 태도가 강정마을에도, 성산에도, 곳곳에서 차별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경운동에서도 마찬가지구요.
공항과 생태, 해군기지와 평화, 개발과 보존. 양립하기 힘든 단어들 틈에 고통받는 존재들과 환경을 지키기 위해 환경운동연합 생태 보전/해양 보전 활동가로서 나아가겠습니다. 그 누구라도 ‘태도’는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요.
대행진은 끝났지만
제주도의 평화와 자연을 지키기 위한 투쟁은 계속되듯, 지금 육해상에서는 계속해서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파괴를 막기 위한 활동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사업, 지리산 산악열차 건설, 국가물관리기본계획 변경 등 생태 이슈들이 쏟아지고 있는 요즘이지만 '그럴수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 환경운동연합은 곧장 문제에 맞서 시민들, 생명들과 함께하기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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