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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억문화에서 시민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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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억문화에서 시민의 역할

익명 (미확인) | 화, 2017/03/28- 17:13

희망제작소는 안산시,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과 함께 ‘기억의 조건 : 한국과 독일의 사례로 보는 기억문화의 역할과 과제’라는 주제로 2017년 3월 23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 국제회의장에서 포럼을 열었습니다. 4‧16 세월호 참사,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한국사회의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며, 기억문화가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독일 초청연사인 미하일 파락(Michael Parak, ‘반망각-민주주의진흥재단’ 사무총장)의 발제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앞에서 발표를 하게 돼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엊그제 21일에 이어 오늘 23일 안산을 두 번째 찾는데, 희생자 가족과 시민사회의 엄청난 조직력과 서로 돕는 모습에 대해 감탄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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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역사,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

저는 오늘 기억 속으로 작은 여행을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모두 역사를 80년 전 혹은 100년 전으로 돌려 보십시오. 여러분의 증조부 내지는 할아버지, 할머니 시대가 될 겁니다.

지난 80~100년을 되돌아봤을 때 여러분은 어떤 역사적 사건을 떠올리게 됩니까? TV를 켰을 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어떤 사건을 반복해서 이야기 하고 있나요? 이에 대한 답을 떠올려 본다면 제가 오늘 발표하는 ‘기억문화’를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억문화는 아주 많은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벌어진 역사적 사건 중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하고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역사는 독재처럼 부정적인 기억을 주기도 하는 반면, 새로운 힘을 주는 긍정적 역할도 합니다. 오늘 저는, 우리가 역사를 기억문화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시민단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는 기억문화를 아래로부터 어떻게 만들고 활용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독일의 사례를 들어볼까요. 독일 사람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어떤 것을 기억하지 않는지 말입니다. 제가 있는 ‘반망각-민주주의진흥재단’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독일은 나치시대 ‘홀로코스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가 있었고, 공산주의 독재가 있었습니다. 또 독일 절반이 소련에 점령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용감한 시민이 1989년 ‘평화혁명’을 주도한 이후 동독과 서독이 통일됐습니다. 지난 100년의 역사 중 독일인이 자주 기억하는 사건입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공공의 주목을 덜 받는 사건도 있습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식민정치’가 대표적입니다. 식민지배국가로 독일은 다양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또 독일 첫 의회 설립시기도 관심에서 먼 사건입니다.

희생자 수 중심의 기억과 비교는 무의미

사람들 간에는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 한다’라는 기억 간 경쟁이 있습니다. 어디에 더 귀를 기울일 것인지 하는 문제 말입니다. 독일이 한국과 다른 점은 정치적 희생자가 좀 더 주목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독재시대에 엄청난 희생자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정치적 희생의 경우 서로 토론을 통해서 개선점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큰 자연재해도 있었지만, 관심을 끌진 않았습니다.

우리가 나치시대에 대해 말할 땐, 유태인을 빼놓지 않습니다. 철저한 민족말살 정책의 대상자였기 때문입니다. 무려 600만 명 이상이 희생됐고 그중에는 어린이 120만 명이 포함돼 있습니다. 숫자만 봐도 얼마나 큰 희생이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세계 유례없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산업적 학살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다른 역사적 사건을 홀로코스트와 비교하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희생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40년 공산독재를 겪었습니다. 희생자나 기간으로 보면 홀로코스트와 공산독재를 비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서로 타협점을 찾을 수는 있습니다.

희생자 규모에 초점을 맞춰 생각한다면 나치가 저지른 범죄가 중요할 겁니다. 하지만 공산정권의 부당행위의 심각성도 무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가지 사건이 상대적으로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범죄의 잔혹성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역사적 범죄행위의 피해규모, 특히 희생자 숫자를 단순 비교하기보다 각각에 귀를 기울이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다른 희생자 그룹도 있습니다. ‘반공주의’에 대한 탄압이나 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 주둔군에 의해 자행된 독일 국민 학살 문제가 대표적인데, 아직까지 많은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독일에서 기억문화가 시작된 시기는 1990년대부터입니다. 당시 국가가 나서서 추모시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은 독일을 기억문화의 모범사례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독일이 나치 이후 공산정권 그리고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추모 및 기억문화를 준비해왔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독일이 반드시 모범적이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겁니다. 따라서 오늘 이 자리가 시민이 주도하는 한국의 기억문화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억문화 형성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역할

‘기억 간 경쟁’에 관한 담론에 이어 이번엔 기억문화 형성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억에 대한 해석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역사적 사건을 활용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개선하려 한다면 그것은 기억문화의 부정적 측면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닙니다. 과거를 통해 개선점을 얻는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산시가 하고 있는 기억문화 만들기가 그 예입니다.

기억문화는 어떤 가치를 갖게 될까요? 우리는 기억의 대상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협상과 토론이 필요하며, 다원화된 사고를 해야합니다. 정부는 박물관, 추모관 등 지원자의 역할을 할 뿐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주도적으로 나설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역사 해석은 갈등이자 다툼을 의미 합니다. 갈등의 끝에는 결국 사회적·정치적 협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협상 과정은 굉장히 깁니다. 더욱이 한 사람이 자기주장만 내세운다면 시간은 더 걸리게 마련입니다. 독일의 경우 이 토론에 50년 이상이 걸렸고, 최근에 와서야 기억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정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토론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살아 있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민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시민사회를 가리켜 ‘제3섹터’ 라고 합니다. 공공의 주제를 사회의제로 담론화 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시민사회와 공공부문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민사회에서 일하는 동시에 공공영역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이 나쁜 게 아니라고 봅니다. 양쪽에 걸쳐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가 일하는 ‘반망각-민주주의진흥재단’을 소개하겠습니다. 독일에서 기억문화는 매우 중요하며, 이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모든 사회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한쪽으로 치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반망각-민주주의진흥재단’ 설립과 강제노역 피해 보상

우리 재단의 이상은 각 지역마다 존재하는 기억문화를 정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정치권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재단이 설립된 1993년은 평화혁명이 일어난 시기와 멀지 않습니다. 독일에 거주하는 외국인에 대한 공격이 빈번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사회에 차별과 반인류적 행동이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견지했습니다.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공공을 위한 책임을 만드는 데 방점을 뒀습니다. 때문에 반유태주의 등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을 다룹니다.

재단 활동은 3가지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첫 번째, ‘정치·사회적 로비’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에 대한 자문을 합니다. 두 번째는 ‘지역활동’으로, 우리는 연간 약 500건의 지역행사를 직접 기획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전문정보 제공’입니다. 기억문화와 관련한 전문적인 내용을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합니다.

여기서 재단의 대표적인 활동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제2차 세계대전 때 있었던 강제노역에 대한 보상을 이끌어낸 성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약 1300만 명의 사람이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노역을 했습니다. 1950년대였으니 이후 40년 넘게 이들에 대한 보상논의가 없었습니다. 정치권과 피해를 알리고 경제계에 보상을 요구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했지만, 당사자들의 나이가 많아 적극적으로 활동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에 재단은 당시 독일 내 강제노역이 있었다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독일 대표기업 지멘스를 사례로 들겠습니다. 지멘스는 창립 150주년을 앞둔 세계적 기업이었지만 그간 강제노역 사실을 철저히 감춰왔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미국에서 독일기업에 대한 집단소송이 벌어지는 등 많은 압력이 가해졌습니다. 시민사회는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경제계에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 결과 독일 경제계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보상 계획을 밝힌 곳이 폭스바겐입니다. 1998년에 보상 관련법이 생겼는데, 2차 세계대전 이후 60여 년이 지나 약 50억 유로가 마련된 것입니다. 이중 절반은 경제계, 나머지 절반은 공공에서 마련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2007년까지 170만 명의 강제노역 피해자들에게 보상이 이뤄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민사회는 전문가에게 의견을 전달하고 정치권에 관련 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넣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매개체 역할을 하며 협상을 잘 이뤄낸 것입니다. 특히 재단 회원들 중 정치가가 많았는데, 훌륭한 가교 역할을 해줬습니다.

‘과거를 그대로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는 믿음

재단의 또 다른 주요 활동은 지역 별 기념관 건립 활동 입니다. 나치시절 독일 전역에 강제수용소가 있었습니다. 정치탄압은 물론 인종차별 등을 이유로 80만~100만 명 정도가 사망했습니다. 지역에서는 당시를 어떻게 기억할까요. 이중 독일 남쪽의 한 수용소를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그 지방에서는 강제노역을 통해 공군기지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601명이 강제 수용됐고 결국 이 가운데 186명이 희생됐습니다.

뒤늦은 추모사업은 쉽게 진전하지 못했습니다. 4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탓에 정책 결정권자가 대부분 바뀌었고,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과거는 과거로 내버려 두자’는 입장이 우세했습니다. 당시 나치에 복역했던 사람들은 물론 수용소에 갇혀 희생당한 사람들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 시민사회를 비롯한 몇몇 소수만이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관련 자료를 보면 이들을 ‘아웃사이더’, ‘내부고발자’ 또는 ‘게임을 망치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독일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기억문화의 선진국이 아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56년이 지났는데 긍정적 변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후 전환점을 맞습니다. 우리세대가 할아버지와 할머니 세대를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재단과 같은 시민단체가 생겼고, 현·전직 정치인도 대거 참여하게 됩니다. 권위 있는 정치가들은 지난 2005년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생존자들을 처음으로 초청했습니다. 무려 56년이 지나서야 시청에서 전시회를 열고 기념비를 세우고 관련 문서를 보관하게 된 것입니다. 장기적으로 시민사회는 각 주체를 잇는 가교역할을 해야 합니다. 또 나치시대가 각 지역 역사에서 절대 잊힐 수 없다는 메시지도 던집니다.

마지막으로 시민사회 활동 중 추가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사람은 누구나 이름이 있다’라는 홀로코스트 관련 프로젝트입니다. 1951년 11월 9일 독일 뮌헨에서 희생자에 관한 첫 추모행사가 열린 후 40여 년이 지난 1988년, 1989년에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숫자가 아닌 실제 희생자의 이름을 시립기록보관소에서 전시하기로 한 것입니다. 희생자를 다시 한 번 기억하는 동시에 과거 역사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아래로부터의 기억’이 성공하려면

지금까지 언급한 사례를 살펴보면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지난 40~50년 간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않았을까요? 역사학자들은 수 년이 아닌 수 세대를 내다보며 사고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40~50년 뒤 어떤 사건이 중요해질지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일단 무엇이든 기록하고 보관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적으로 기억문화를 이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성공적인 기억문화가 된다’라는 식의 편향된 사고를 하거나 진영을 가르면 안 됩니다. 여당에 무조건 반대하거나 야당에 앞뒤 안 보고 찬성하기보다 초당적으로 활동하면서 우리의 기억을 일목요연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억문화를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실행방식도 다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에는 기념비를, 또 다른 지역은 추모행사를 벌이는 등 여러 가지 실행 아이디어를 마련해야 합니다.

시민사회는 기억문화를 만드는 데 동기를 부여하고 협상을 주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희망하는 결과만을 목표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시민사회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시민사회는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각자의 사명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 의문을 품어야 하며, 또 그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점도 명심해야 합니다. 기억문화는 앞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녹취 및 정리 : 김현수 | 사회의제팀 선임연구원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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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교역 물품 ‘마스코바도’ 설탕

물품에 담긴 사탕수수 생산자 자립의 꿈

ATPI 힐다 카두야 대표 강연회

 

2016년, 한살림의 마스코바도 설탕 첫 취급과 함께 필리핀의 사탕수수 생산자와 한살림의 소비자 조합원을 잇는 민중교류 관계 역시 시작되었습니다.

마스코바도 민중교역을 담당하고 있는 필리핀 무역단체 ATPI(대안무역 필리핀)의 힐다 카두야Gilda Caduya 대표가 ‘경기도 국제 공정무역 컨퍼런스’의 소그룹 강연자로 초청돼 올해 9월 한국을 방문한 가운데, 지난 9월 28일에는 한살림을 방문하여 마스코바도에 담긴 사탕수수 생산자의 ‘투쟁과 희망’을 나누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마스코바도 생산지인 필리핀 네그로스 섬은 예전부터 필리핀 전체 설탕 생산의 약 60%가 생산되던 지역입니다. 하지만 수출주도의 사탕수수 단작생산과 사회 양극화라는 기존의 사회문제에 1980년대 국제설탕가 폭락까지 더해지면서 사탕수수 생산노동자들은 극심한 빈곤과 굶주림에 처하게 됩니다. 이에 네그로스 지역을 돕기 위한 전세계적 구호운동이 벌어졌고 그 중 일본의 구호단체는 단순한 원조가 아닌 사탕수수 생산노동자들을 도울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고민합니다. 이로부터 민중교역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민중교역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도 전해졌습니다.

특히 한살림이 취급하고 있는 마스코바도 설탕은 민중을 의미하는 단어인 mass로부터 파생한 것으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네그로스 사탕수수 생산노동자의 투쟁과 희망을 상징화한 것입니다.

 

힐다 대표는 민중교역 외에도 필리핀 네그로스 생산공동체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활동들도 소개하였습니다. 식량주권 확보를 위한 진정한 먹거리 운동, 사탕수수 단작으로 황폐화된 네그로스의 농업 생태계를 회복하기 위한 농생태마을, 필리핀 내 소비자와 생산자를 연결하는 꾸러미사업 등이 그것입니다. 또 힐다대표는 올해 초 필리핀 어머니들로 구성된 소비자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며 한살림의 조합원활동의 경험을 묻기도 하며 강연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목, 2017/11/1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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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 그 사람 이 물품]

 

겨울에 더욱 맛있는 어묵

 

자연이준식품 김봉순 생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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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순 생산자(오른쪽에서 두번째)와 동료들이 자연이준식품 물품을 자랑하고 있다

 

 

가공식품에도 제철이 있다. 겨울에 어묵을 먹으면 더 맛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겨울을 맞이한 자연이준식품에서는 생산자들이 이른 아침부터 신선한 현미유를 달구며 작업장을 고소한 어묵 냄새로 가득 채운다. 덕분에 둘러보는 내내 코끝이 즐거웠지만 어디에서도 기름때 자국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청소도 생산입니다.” 김봉순 생산자는 가공생산에 있어 위생 관리의 중요성을 짧은 한마디로 정리했다. 동시에 철저한 위생 수준에 대한 자부심도 내비친다. 자연이준식품은 매일 한살림 종이행주와 한살림주방세제로 생산 설비를 닦으며 작업을 마무리하는 것은 물론, 매주 목요일에는 아예 생산을 멈추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청소만 한다. “집에서 아들에게 엄마가 만든 것보다 더 깨끗한 음식이라고 하며 어묵 반찬을 내놓아요. 살림을 열심히 할 때도 이렇게까지 깔끔하지는 못 했어요.”

 

내 집 부엌에 견줄 수 없이 철저히 작업장을 살피는 것은 김봉순 생산자도 조합원으로 한살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1990년대 후반 아이의 건강 때문에 안전한 물품이 필요해서 한살림을 찾았다. “물품을 꼼꼼히 살피다 보니 자연스레 한살림이 자연과 생산자를 대하는 태도를 알게 되었고 저도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며 새내기 조합원에서 열혈 조합원으로, 생산자로 한살림 안에서 다양한 영역을 두루 거치며 성장해 온 지난 20년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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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여러 활동을 거들며 한살림강원영동 이사를 맡기도 하였다. 2009년 들살림 총무부장을 맡으며 생산 실무자로서 새로운 영역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해 한살림강원영동은 지역순환경제를 꿈꾸며 지역 생산자들과 손잡고 들살림을 설립했다. 일반 제조회사에서 10년 가까이 총무회계 업무를 담당해 실무에 밝고 한살림에 대한 이해 또한 남다르던 그는 막 시작되는 한살림 조직의 행정을 꾸려가기에 적임자였다. “2014년 들살림이 체계가 잡히고 안정되어 갈 즈음 자연이준식품으로 자리를 옮겨 왔어요.”

 

자연이준식품은 조합원의 열망으로 세워진 생산지다. 원산지와 유통기한을 확인할 수 없는 원부재료, 재사용 기름, 첨가물 남용, 비위생적인 설비 관리 등 시중 어묵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지며 한살림다운 어묵을 원하는 이가 늘어났다. 조합원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2005년 동트는세상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창립 구성원 중 어묵을 만들 줄 알고 일을 시작한 사람은 없었어요.” 김봉순 생산자는 조합원이 믿고 먹을 만한 물품을 만들겠다는 뜻 하나로 더듬더듬 배워가며 물품을 개발하고 생산하던 당시를 회상했다. 맛은 어설펐지만 재료는 처음부터 최상이었다. 꾸준한 연구개발 끝에 오늘날과 같은 쫄깃함과 고소함이 살아 있는 어묵으로 거듭났지만 재료에 대한 원칙은 그대로다.

 

재료를 달리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식감과 풍미를 돋울 수 있었을까? 비결은 반죽과 튀김 온도에 있었다. 해답을 찾기까지 지역의 대학과 산학협력을 맺어 연구를 진행하는 등 적잖은 품이 들었다.

 

캡처

 

개발과 사업 기초를 다지는 동안 자연이준식품을 받쳐 준 것은 지역의 한살림 가공 생산지들이었다. “특히 한살림 수산가공 생산지인 아침바다는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낮은 임대료로 공간을 빌려 주고 있어요.” 자연이준식품뿐 아니라 밀가공품과 소스 생산지인 다자연도 같은 곳에 터를 잡고 이웃해 생활하고 있다. “더불어 천향, 선유, 행복한빵가게까지 여섯 생산지가 작업장 앞마당을 공동 물류 집하장으로 쓰고 있다”며 지역 한살림 생산지들 사이의 끈끈한 연대를 한 번 더 확인시켜준다. 나중에 자연이준식품에 합류한 김봉순 생산자가 설립 초기 사정까지 꿰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저를 비롯해 그동안 자연이준식품을 이끌어 온 생산자들 모두 한살림 안에서 성장한 사람들이에요. 우리의 성장이 조합원들과 지역사회에 새로운 그림을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원칙을 지키면서도 품질을 향상시키는 데 성공했고, 경쟁이 아닌 상생으로 사업을 키워 왔기 때문이죠.”

 

2017년 자연이준식품은 다시 한 번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쌀과 깻잎 등 좀 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새로운 어묵 모양도 개발하고 있다. 지난해 설비도 새로이 정비하였다.

 

꼬치어묵탕

 

“맛보다는 애정으로 조합원들이 우리 물품을 이용해주던 시절을 기억합니다. 12년 동안 자연이준식품이 축적한 경험과 기술은 조합원들의 공이기도 해요. 많은 사람의 실천이 헛되지 않도록 조합원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이어갈 것입니다.”

 

글ㆍ사진 정연선 편집부

 

 

알면 알수록 안심되는

자연이준식품 원부재료

 

명태연육

 

알래스카산 고급 명태연육

 

어획과 동시에 살만 발라낸 후 배에서 급랭시켜 육질이 단단하고 쫄깃합니다. 과거에는 우리나라 연안에서도 많이 어획되었으나 해수 온도 상승으로 근래에는 알래스카에서 어획하여 들여옵니다. 입고 시마다방사성물질검사를 거쳐 안정성을 확인합니다.

 

14면_그사람이물품_대파

 14면_그사람이물품_양파

 

우리밀, 유기농 감자 전분, 친환경 채소

 

우리밀 밀가루, 제주 생드르영농조합 당근, 마하탑 볶은소금 등 부재료는 한살림 생산지 물품을 위주로 사용합니다. 생산량이나 계절이 맞지 않아 한살림에서 공급받기 어려운 때에는 친환경 식재료를 이용하여 생산합니다.

 

현미유

 

미유
어묵 생산에서 튀김유는 중요한 부재료입니다. 자연이준식품은 발연점이 높고 쌀겨의 영양이 잘 살아 있으며 튀겼을 때 고소하고 담백한 풍미를 돋우는 현미유를 사용합니다.
월, 2017/02/20-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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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사회포럼] 20대 총선, 전망과 시민사회 대응전략
- 일시: 2016년 1월 18일(월) 오후 3~6시
- 장소: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
- 사회: 윤홍식 참여사회연구소 소장(인하대 교수)
- 발제:
1) 한국사회 불평등, 선거, 시민사회의 대응 /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참여사회연구소 연구위원)
2) 20대 총선 전망과 시민사회운동의 대응 방향 / 김윤철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자유토론: 참석 간사, 참여연대 실행위원 및 연구소 연구위원

 

※ 2016년 1월 <참여사회포럼>은 내부 포럼으로 진행되어, 자료는 홈페이지상에서 제공하지 않습니다. 

 

월, 2016/01/18-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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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겨울, 유학을 위한 재정 마련을 위해 나는 부모님을 열심히 설득하고 있었다. MBA를 다녀왔을 때 얻을 많은 기회와 보상에 대해 강조하며(예컨대 MBA 후 받을 수 있는 연봉), 부모님께 용돈도 많이 드릴 수 있다는 약간의 사기성(?) 발언을 가미해 딸에게 투자해달라 말씀드렸다. 그리고 1년 후, 나는 부모님의 투자금(?)과 그간 모아둔 자산을 탈탈 털어 유학길에 올랐다. 어렵게 온 만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열심히 경험하고 배우자는 생각이었다. 후회 없이 3년의 유학 생활을 보내고 작년 여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희망제작소 연구원이 되었다.

투자금 상환 실패로, 엄마는 나에게 ‘사기꾼’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셨다. 나는 5년 전과 비슷한 수법으로 엄마에게 말했다. 희망제작소는 돈 이상의 사회적 가치를 만드는 곳이고 나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곳이기에 동반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입사 초기였기에 확신은 없었다. 확신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1년 동안 나는 엄마를, 아니 나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희망제작소의 특별한 무언가를 찾고자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왜 희망제작소에서 일하는가?

한 사람의 연구원으로, 시민으로, 후원회원으로 나는 희망제작소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곳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희망제작소의 캐치프레이즈인 ‘시민과 함께 사회혁신을 실천하는 민간 독립 싱크앤두탱크(Think&Do Tank)’. 이 말을 일곱 가지로 쪼개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희망제작소가 함께 하고자 하는 ‘시민’은 누구이며, 희망제작소가 시민과 어떤 방식으로 ‘함께’ 사회혁신을 실천한다는 것인지, 희망제작소가 말하는 ‘사회혁신’의 상은 무엇인지, ‘실천’ ‘민간’ ‘독립’ 그리고 ‘싱크앤두탱크’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하나씩 떼어놓고 바라봤다.

우선 10년 동안 발간된 활동보고서와 홈페이지의 글, 관련 기사를 살폈다. 그리고 희망제작소와 인연이 스친 사람이라면 누구든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연구원들과 이사회뿐만 아니라 후원회원인 사람, 과거 후원회원이었던 사람, 희망제작소에서 일했던 사람,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사람까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들의 입을 통해 희망제작소가 어떤 곳인지 느꼈다.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그 ‘확신’은 절실했다. ‘희망제작소를 후원해주세요’라는 말 뒤에 한 치의 부끄러움과 불안이 없어야 했기에. 저 말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나는 온 힘을 다해 희망제작소의 가치에 대해 고민했다.

경계에 서 있다는 것, 불확실성과 모호함은 옵션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기 위해 꼭 지나야 하는 것, 바로 경계(Frontier)다. 경계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이도 저도 아닌 불확실함과 모호함에 힘들어한다. 이쪽을 바라보면 이게 옳은 것 같고, 저쪽을 바라보면 저게 옳은 것 같다. 인도해주는 사람도, 이정표도 없기에 감당해야 할 불확실성은 더욱 커진다.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하는 희망제작소의 미션 상, 희망제작소 연구원들은 항상 사회의 경계에 서서 한 영역과 다른 영역을 연결해야 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연구원들은 항상 불확실성 속에서 자신을 믿고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확신이 중요하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자기 생각과 경험에 기초하여 방향을 잡고 뚜벅뚜벅 걸어나가야 한다.

희망제작소 연구원들은 자신의 연구와 사업에 관한 확신을 위해 작게 자신의 생각을 실험하고 시민을 만나 피드백을 구한다. 그렇게 자신이 만드는 희망에 관한 확신을 쌓아간다. 지난 1년간 후원사업팀의 연구원인 나는 이 사람들에 대한 확신을 쌓아왔고 그것이 충분하다고 느끼고 있다. 마음속 가득한 뜨거운 확신을 고이고이 포장해 시민에게 전달하면 된다.

희망제작소 3층 주방에는 ‘희망제작소스러움’이라는 게시판이 마련돼 있다. 연구원들은 각자 생각하거나 원하는 희망제작소에 대해 자유롭게 적을 수 있다. 몇 개의 문구를 뽑아봤다.

– 경계 없이 무엇이든 연결하고 연대하는 희망제작소
– 불확실성도 수용하는 희망제작소
– 우리 사회의 침묵을 깨는 희망제작소
– 가슴 설레는 재미가 있는 희망제작소
– 나를 믿고 너를 믿고 우리를 믿는 희망제작소
– 다양한 기회를 만드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희망제작소.
– 치고 나가는 희망제작소
– 오지라퍼 집합소, 희망제작소

내가 이런 곳에 다니고 있다니! 가슴이 설렌다. 후원회원과 연구원의 경계에 서서 두 영역을 이어야 하는, 그리고 이어줄 수 있는 후원사업팀의 일원으로 하고 싶은 일이 참 많다. 후원회원을 비롯한 시민의 피드백이 우리의 연구로 흘러들어 가고, 이 연구에 시민의 관심이 커져 삶에 적용되고, 더 나은 연구를 위한 자원이 우리 주변으로 모이고, 그 자원을 가지고 우리는 더 많은 대안을 제시하고… 희망제작소의 에너지가 우리 사회에 넓게 확산하는 선순환 구조! 이것이 후원사업팀 연구원인 나의 꿈이고 희망이다.

글 : 박다겸 | 후원사업팀 연구원 · [email protected]

화, 2016/12/2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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