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고문 책임자 김기춘의 승승장구 40년과 그 후

지역

고문 책임자 김기춘의 승승장구 40년과 그 후

익명 (미확인) | 월, 2017/02/06- 17:15

※ 이 글은 최승호 피디의 영화 <자백>과 <그것이 알고 싶다> 1060회 ‘비선의 그림자, 김기춘’의 내용을 참고해 작성하였습니다.


김기춘의 미디어 데뷔, ‘학원침투 북괴간첩단 사건’
기자회견하는 30대 김기춘

기자회견하는 30대 김기춘

1975년 11월 22일,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 수사국장 김기춘이 ‘학원침투 북괴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김기춘은 기자들 앞에서 “북괴의 지령에 따라 모국 유학생을 가장하여 국내에 잠입”한 21명의 ‘간첩’ 명단을 공개했고, 이 ‘간첩’들은 사형 등 중형을 선고받아 장기간 복역하고 일본으로 추방당했다. 당시 재일교포 유학생이 200~300명인 것을 감안하면, 이들 중 10%가 ‘간첩’으로 구속된 것이다.

당시 30대였던 김기춘은 중앙정보부 대공 수사국장으로 사건의 책임자였으며, ‘간첩’들의 자백을 받아내고 ‘북괴를 소탕’한 공로를 인정받아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승승장구_김기춘

김기춘이 ‘간첩’들의 자백을 받아내는데 탁월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간첩을 알아보는 매의 눈? 아니면 누구든 간첩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

간첩을 잡는 특별한 기술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자신의 두뇌”라고.

두뇌대장 김기춘

두뇌대장 김기춘

“간첩은 머리, 두뇌로 잡는 것이지
몽둥이로 잡는 것이 아니다”

1973년에 무려 법무부 ‘인권옹호과’ 과장이기도 했던 그는 당당하게 자신의 ‘두뇌’로 간첩을 잡았다고 했다.
그의 수사에는 인권 침해도 없었고, 과거사 진상규명의 대상도 아니라고. 자신이 고문을 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당당한 김기춘

당당한 김기춘



고문 피해자들, 40년만에 감옥에서 나오다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을 ‘고문에 의한 조작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이어 2012년 6월, 사건의 피해자들이 재심을 청구했고, 무죄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영화

영화 <자백>

당연히 무죄인데 이 소리를 들을 때까지 40년이 걸렸습니다.

-이철, 학원침투 북괴간첩단 사건 고문 피해자

법원은 피해자들을 ‘간첩’으로 볼만한 증거가 없다고 했다.

당시 대부분의 증거는 ‘자백’ 밖에 없었는데 이 자백은 구타, 가혹행위 등 고문에 의해 받아낸 것이라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기밀 누설”이라는 혐의조차 “현 시국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것에 불과”하며 “이미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공지의 사실에 불과”하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간첩이라는 시선 속에서 40년 동안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생활해야 했던 피해자들.
40년이 넘어 진실은 밝혀졌지만, 중앙정보부가 파괴한 한 사람과 그 가족의 인생은 어떤 방법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


한국은 나쁜 나라
피해자 이철

피해자 이철

팬티까지 발가벗기고 무조건 패기 시작했습니다. 성기까지 붙잡고 꼼짝 못하게 하고 담배불로 지지려했습니다. 내가 보는 앞에서 내 여자를 겁탈하는 것을 보고싶냐. 장모까지 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정을 했습니다. 모든 말을 들을테니까 그렇게 하지 마시오.

-이철, 간첩 조작 사건 고문 피해자

무죄판결을 받은 이철씨의 아버지는 이철씨가 구속된 날 쓰러서 53살의 나이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약혼녀도 간첩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조국에 기대를 가지고 왔다가 인생이 망가진 채 일본으로 돌아간 사람이 많다.
일본으로 가자마자 죽거나 정신병원에 간 사람도 있다.

수사관들이 멋대로 쓰고 마지막에 강제로 지장을 찍게 했어. 안 찍겠다고 하면 때려 죽인다고 하면서 얼굴을 때리고 내 손을 갖다가 멋대로 찍어버렸어. 한국인은 목적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

-김승효, 고문 피해자

김승효씨는 아직 재심 신청을 하지 않았다. “지옥 같은 세월”을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며 한국에 가는 것조차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당시 고문으로 인한 자백 후 정신이상증세를 보인 그는 치료받지 못한 채 7년을 감옥에 보냈고, 출소한 후에도 일본에 돌아가 수십 년을 정신병원에 드나들며 지금까지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고문피해자, 김승효

고문피해자, 김승효

암흑의 세월을, 지옥 같은 세월을 잊어버리고 싶단 말이야. 가슴이 아파서 죽을 지경이야. 왜냐하면 무죄로 못됐으니까 죽을 지경이야. 죽고 싶단 말이야. 나는 무죄야.


수사관들은 마치 먹이를 앞에 둔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저에게 굴었습니다. 잠을 안 재운 채, 협박하고 구타하며, 제 몸과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김명수, 재심 청구소송 모두발언 중

“제 사건일지를 가지고 김기춘씨가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온 후, 수사관들은 저를 서울구치소가 아니라 지하 고문실로 데려갔습니다. 3주 동안 그곳에서 취조를 받았습니다. 개돼지 취급을 받으며 강도 높은 취조를 받았어요. 20일 동안 밤잠을 자지 못하게 했어요. 온갖 고문과 언어폭력으로 몸과 정신이 완전히 망가지고 탈진한 상태였어요. 지하실에서 나올 때는, 저는 간첩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 나이 스물여섯이었습니다.

-김명수, 재심 청구소송 모두발언 중

졸지에 간첩 가족이 된 저의 부모형제들은 일가친척, 친지, 교회, 사회공동체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채, 절망과 좌절 속에서 공포의 순간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처럼 고문은 무고한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릴 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한 평생을 송두리째 빼앗는 잔인하고 도구이다.


고문 피해자 있지만, 책임자는 없는 한국

“인권침해해서 간첩 잡았으면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했던 사건의 책임자는 피해자들의 잇다른 무죄판결 속에서도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부활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처벌은 커녕 사과도 없었다. 재심 판결 전까지 당당하게 설교했던 그는 무죄판결이 잇다르자 “자기와 관계 없는” “기억에 없는 일”이라고 했다. 심지어 자신의 친필사인까지도.

2004년 한치 앞을 모르는 김기춘

2004년, 한치 앞을 모르는 김기춘

무죄판결 나기 전의 당당한 모습

무죄 판결 후 모든 기억을 잃은 김기춘

무죄 판결 후 모든 기억을 잃은 김기춘

무죄판견 이후 돌연 기억상실 모드

정신적 육체적 각종 후유증과 싸우며 40년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생활해야 했던 고문 피해자.
40년 내내 한결같이, “공직자”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 없는 사건 책임자.

국가권력이 특정집단에 의해 사유화될 경우,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파괴되고 불행하게 될 수 있는가를 제 사건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겨주기도 했어요.

존경하는 재판관님,
저 개인 한 사람의 희생으로 족합니다. 앞으로 우리 역사에 더 이상 간첩조작사건과 같은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고, 더 이상 저와 같이 희생당하는 주권자 국민이 나오지 않도록 사법정의(司法正義)가 살아있는 사회를 만들어주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김명수, 고문 피해자 재심 모두 발언 중

“자기가 인권침해를 했으면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김기춘은 지금 구치소에 있다. 고문 혐의가 아니라 블랙리스트 개입으로.

김기춘의 운명은?

김기춘의 운명은?

김기춘의 운명은?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IDAHOTB?

5월 17일은 IDAHOTB,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입니다. 국제적으로는 그 의미가 조금씩 널리 알려지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조금 생소한 날입니다. 그리고 이날이 어떤 날인지, IDAHOTB은 어떻게 읽는 것인지, 어떻게 생긴 것인지 등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2021년 5월 17일, IDAHOTB을 맞아 이날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Q. IDAHOTB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IDAHOTB은 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Transphobia and Biphobia의 줄임말입니다.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번역해보자면 “국제적으로 동성애 혐오Homophobia, 트랜스 혐오Transphobia, 양성애 혐오Biphobia를 반대하는 날”을 뜻합니다. 한국에서는 이를 줄여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또는 “아이다호 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Q. IDAHOTB은 어떻게 생긴 날인가요?

1990년 5월 17일, 세계보건기구는 국제질병분류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를 개정하며 “동성애”를 정신장애 부문에서 삭제하고 ‘성적 지향만으로는 장애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명시했습니다. 전 세계 LGBTI 커뮤니티와 관련 단체는 이런 5월 17일을 기념하여, 이날을 국제적으로 LGBTI 혐오를 반대하는 날로 정하고 지금까지 기념해오고 있습니다.

Q. 세계의 사람들은 이날을 어떻게 보낼까요?

1990년 이후 31년이 지났지만 세계에는 아직도 LGBTI를 향한 혐오와 차별이 만연합니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LGBTI와 앨라이들은 IDAHOTB에 각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자긍심을 드높입니다. 일상에서, 거리에서 세상의 혐오와 차별에 대항합니다.

Q. 여전히 남아있는 혐오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양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이어져온 혐오와 차별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분명 많은 이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혐오가 설 자리는 없다고, 혐오의 자리를 우리들의 자긍심과 연대로 가득 채울 것이라고 당당히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상처와 아픔, 떠나가고 잃어버린 이들을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변화의 과정이 지난하고 힘이 든다면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쉬어가도 좋습니다. 함께 하는 이들이 다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도와줄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며 원하는 변화를 만들어 낼 때까지 한발 한발 계속 나아가면 됩니다.

사회를 바꿔야만 합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사회를 설득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권리를 인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감히 인권에 대해 논하지 말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먼저 떠난 이들을 기리고, 기억해야 합니다.

조지나 베이어Georgina Beyer, 세계 최초의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국회의원

Q. 2021년 IDAHOTB에 국제앰네스티는 무엇을 하나요?

국제앰네스티는 IDAHOTB을 맞이하며, 띵동, 스트레스컴퍼니, 청소년 성소수자 당사자들과 함께 ‘청소년 성소수자 응원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세상의 혐오와 차별에 분노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듬고 이에 맞서 나로 존재하는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응원하고자 합니다.

 

 

한편 지난 3월 31일,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는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 컨퍼런스: 국회로 간 트랜스젠더의 목소리’를 진행했었습니다. IDAHOTB을 맞아 이날의 발표자 중 한 명이었던 세계 최초의 트랜스젠더 국회의원 조지나 베이어Georgina Beyer에게 한국 트랜스젠더 활동가들의 질문을 전달하고 답변을 들어보았습니다.

다른 IDAHOTB 관련 글을 읽어보고 싶다면?


윤지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처장의 기고글 보기
제2의 변희수 하사가 나오지 않으려면
월, 2021/05/17- 17:00
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