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의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은 1938년 대구 수동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해 무역업을 시작했다. 사업을 확장해 가던 그는 1961년 5.16쿠데타 직후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된다. 하지만 박정희와 만나 군부 세력에 적극 협조를 약속한 뒤 감옥행을 면한다. 1966년에는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서울지검에 소환돼 계획적 밀수로 폭리를 취하고 정치자금을 조성했단 혐의 등을 받았지만 법적 책임은 이병철 회장 대신 삼성의 부하 직원이 졌다.
그의 대를 이은 이건희 회장도 군사독재정권 기간 삼성을 급성장시킨다. 때로는 세금포탈 혐의로, 때로는 불법 정치자금 제공이나 비자금 조성, 로비 의혹 등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으나 그가 구속 수사를 받거나 감옥에 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삼성 재벌 3세 이재용 부회장 역시 이번에 구속을 면했다. 특검이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 씨 일가에게 수백억 원 대의 뇌물을 공여한 혐의 등으로 이재용 부회장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법원이 19일 새벽 이를 기각한 것이다.
3대에 걸쳐 대물림되고 있는 삼성가의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의 역사. 그리고 3대에 이르도록 단 한번도 삼성재벌 총수를 법의 심판대에 제대로 세워보지 못한 사법 시스템, 대한민국의 법은 과연 언제 ‘법 위의 삼성’ 신화를 깰 수 있을까?
6·25전쟁으로도 어느 쪽으로 통일되지 않았고, 그에 따라 평화통일 가능성은 생각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는가 하면, 심지어는 평화통일론이 이적론(利敵論)으로 간주되어 조봉암 같은 이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은 변하기 마련이어서 7·4 남북공동성명, 6·15 남북공동성명 등을 통해 평화통일론이 겨우 정착되어가는 상황이 되었다. 이같이 어렵사리 정착되어 가는 평화통일론의 역사 위에서 특별히 생각나는 선인을 들라 하면 역시 몽양 여운형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강만길 | 고려대 명예교수
일제강점기 해외에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들어와서 언론활동 등을 하던 그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민족해방이 다가옴을 알아차리고 만주군관학교 졸업생 박승환(朴承煥) 등을 중심으로 비밀조직을 만들어 중국에서 무장투쟁을 하고 있는 무정(武丁)부대와 연계하여 국내에서 게릴라 활동을 함으로써 해방 후 민족사회의 위지를 높이려 노력했다. 그러고는 1944년에 건국동맹, 그리고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해방에 대비하고, 종전되자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신국가 건설을 준비했다. 인민공화국이라 했지만 그 수반에는 이승만을 지명했다.
해방이 38도선 획정과 미·소 양군 분할점령 상태로 오고 민족사회 내에도 좌우익 정치세력이 대립하여 민족분단의 조짐이 나타난 뒤 1946년에 들어서서 이승만 중심 세력에 의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획책하는 이른바 “정읍 발언”이 나오게 되자 그는 기독교 장로 출신이면서도 좌익계 독립운동 정당 조선민족혁명당의 당수요 좌우합작 중경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귀국한 김규식과 함께 1946년에 민족분단을 막고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이에 대해 당시의 조선일보 사설도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어떠한 사상과 어떠한 의도하에서든지 남북통일 좌우합작이 아니고는 조선의 완전독립이 될 수 없음은 상식화한 국민의 총의이다”고 하여 적극 찬성했다. 그리고 미 군정도 당초에는 이승만 등을 도우면 다른 정치세력들의 반대로 미국 영향하의 통일임시정부 수립이 불가능할 거라 해서 좌우합작파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것이 좌우합작운동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되면서 좌우익 정치세력 및 합작파들에 의한 합작 조건들이 제시되기도 했으나, 미 군정청이 입법기관을 설치하고 입법위원 선거를 실시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이 마치 미 군정의 입법기관 설치를 위한 것이 되다시피 되었고 입법위원 선거 결과는 관선의원, 민선의원을 막론하고 우파세력이 대거 당선되어 좌우합작운동에 타격을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해방공간에서의 평화로운 남북 통일국가 수립운동으로서의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지지는 대단히 높았다.
또 한 가지 해방정국 민심의 동향을 말해주는 유의미한 자료가 있다. 1946년 8월에 미 군정청 여론국이 시행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자본주의 지지가 14%, 공산주의 지지가 7%, 모른다가 8%, 사회주의 지지가 70%였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해서 조사한 것도 유의미하지만 사회주의 선호층이 절대우세했다는 결과가 주목된다. 좌우익 진영이 대립하고 민족분단의 위험이 높아져 가는 상황에서 그것을 극복하고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희원하는 사람들이 극우적 자본주의나 극좌적 공산주의가 아닌 사회주의를 택했다고 볼 수 있지도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 노선을 적극적으로 걸었던 여운형은 여러 번 테러를 당하다가 결국 1947년 7월19일 마수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젊은 살해범의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좌우합작위원회도 그해 12월에 해체되고 말았다. 여운형이 희원했던 평화로운 남북통일국가 수립은 그가 목숨을 바친 지 70년이 된 지금까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광장에 ‘군함도의 진실’이라는 영상을 홍보해 주목을 끌었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가 유네스코산업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근대산업시설 중 한국인 등의 강제동원 관련 시설에 ‘역사의 전모’를 밝히라고 일본 정부에 권고한 사항을 이행하도록 촉구하기 위한 영상이다.
그런데 이 영상에는 몇 가지 부정확한 사실이 담겨 있다. 영상에서는 일본 나가사키항 근처의 섬, 군함도에 강제동원되어 죽은 한국인이 120명이라 한다. 그러나 1984년 일본 시민단체가 찾아낸 자료에 따르면 1925년부터 1945년까지 하시마에서 죽은 한국인은 123명이다. 여기에는 강제동원 당사자가 아닌 여자와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강제동원 시기인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엄밀하게 따져 강제동원 희생자는 50여명이라 해야 맞다.
영상에 사용된 사진들도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누워서 탄을 캐는 장면은 후쿠오카 탄광에서 일하던 일본인 광부의 모습이다. 폭행을 당해 등에 상처가 나 있는 모습의 사진은 1920년대 토목노동자를 찍은 것이다. 두 사진 모두 폭력과 학대, 열악한 노동조건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었던 노동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의 사진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이 받은 차별과 학대, 가혹한 노동조건 등 실태를 직접 보여주는 사진은 없다. 통제된 공간에서 그런 사진 자체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1920~30년대 일본 언론의 고발로 확인된 이런 사진들을 통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피해자들의 삶을 유추해볼 수 있고, 숱한 증언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나만 더 지적해두자. 군함도와 함께 등재된 다카시마 탄광에 한국인 4만명이 강제동원되었다는 통계가 보도되고 있다. 이건 단순 실수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 외교부가 강제동원지원위원회에 관련 정보를 요청할 때 위원회 직원이 4천명을 4만명으로 잘못 적어 보고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숫자 몇 개 사진 설명 하나 잘못되었다고 강제동원의 본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의 우익들은 오류나 실수를 공격하면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처럼 군함도의 강제동원 자체를 부정하려 한다. 아니면 피해자들의 주장에 흠집을 내 한국의 주장이 과잉된 민족 감정에 근거해 왜곡·날조된 것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국내는 모르겠으나 국제사회에서는 이게 나름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어 문제다.
군함도를 놓고 국제사회를 향해 일본 정부와 우익은 일제의 강제동원이 강제노동이 아니며, 군함도에서 한국인들은 차별 없이 일본인과 사이좋게 지냈으며, 한국이 엉터리 자료를 만들어 역사를 왜곡·날조하고 있다는 세 가지 여론전을 펼칠 것이다.
강제동원 피해 통계를 두고 벌어지는 진실 논쟁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게 있다. 그것은 가해자인 일본 정부와 기업이 스스로 진실을 밝힌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진상규명 대부분은 모두 피해자와 한·일의 시민단체가 수십년간 싸워서 얻어낸 것들이다. 여기에는 한국 정부의 책임도 크다. 특히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최악이었다. 피해자 유족과 시민단체가 직접 일본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유골조사와 봉환 문제를 협의해 해결의 물꼬를 텄지만, 정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초은행에 1945년 이전 일본 내에서 일했던 한국인 우편저금 통장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부는 모른 체했다. 국제법에 따르면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국가가 지배 국가로부터 관련 문서를 인계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식민주의 극복을 위해 새 정부가 해야 할 긴 목록 가운데 하나다. 영화 <군함도>가 개봉되었다. 무더운 여름이 더 더워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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