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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하경 변호사, 수성구의 기타리스트가 대한문의 변호사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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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하경 변호사, 수성구의 기타리스트가 대한문의 변호사가 되기까지

익명 (미확인) | 목, 2016/12/29- 16:52

타이틀

민변 자원활동가 작성

공익인권변론센터 김시은, 박지아, 서영우

국제팀 양진희

출판소통팀 이재임

언론연대팀 정원영

지난 밤 너무 기대한 탓일까요, 늦잠을 잔 나머지 서둘러서 서초동의 휴먼사무실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세이프. 여유롭게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준비한 인터뷰 질문지를 눈으로 훑어보았습니다. 민변 자원봉사자들이 준비한 질문들은 대개 ‘현장’과 ‘노동인권’에 대한 것들입니다. 미리 인터넷으로 검색해 찾아본 류하경 변호사는 ‘현장에 익숙한 노동변호사’로 보였습니다. 구글 검색창에 류.하.경.이라는 세 글자를 적어 넣으면 ‘삼성건물 못 들어가는 변호사’라는 기사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삼성건물 경비원마저 익히 알고 있을 정도로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연대하는 분이라고요. 인터뷰가 진행된 날, 류하경 변호사는 ‘대한문 집회’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민변 자원봉사자들은 류하경 변호사가 ‘현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노동변호사’가 되기까지 어떤 고민과 실천을 해왔는지 엿보고 왔습니다.

류하경(이하 류) : 뭐 저 같은 사람을 인터뷰하러 먼 데까지(웃음).

박지아(이하 박) : 변호사님, 자신을 한 마디로 소개하신다면 어떻게 하실 수 있을까요?

류 : 한 마디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길게 쓰라고 한다면 밤새도록 쓸 수 있는데. 저는 강아지를 좋아하고, 기타 치는 걸 좋아하고, 자전거 타는 것도 좋아하고, 운동 좋아하고, 그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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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 현장에서도 기타를 많이 치지 않으셨어요?

류 : 현장에서도 많이 치죠. 내가 이러려고 기타를 배웠나. (웃음) 기타를 오래 쳤어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치고 있어요. 저는 홍대에서 밴드하려고 신촌-홍대에 있는 대학 가려고 공부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올라오니까 나쁜 선배들이 뭔가 주면서 ‘이거 한 번 읽어볼래?’라고 하고, ‘수요일에 뭐 해?’라고 물어서 ‘별거 없는데요’ 그러면 ‘그럼 정문 앞에서 봐.’ 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정문 앞으로 나가면 투쟁하고 있고.(웃음) 그래서 밴드의 꿈을 접고 이렇게 살고 있죠. 지금은 사무실에서 일렉 기타를 쳐요. (류하경 변호사가 기타를 꺼내 들고 나옴. 일동 함성)

밴드를 꿈꾸던 학생, 학생운동의 현장으로

박 : 학부 때 ‘나쁜’ 선배들이 이리저리 데려갔다고 하셨는데, 그걸 계기로 노동운동에 관심이 생기신 건가요?

류 : 그렇죠. 저는 1학년 때부터 학생운동을 했어요. 집회의 기초를 1학년 때 마스터했죠. 2학년 때는 학교 안에만 있기보다는 진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같이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책은 많이 보잖아요. 하지만 책은 종이에만 머무는 거니까 실제로 빈민, 농민, 노동자를 느끼고 싶더군요. 그래서 2학년 때 일산의 아파트촌에서 철거촌 투쟁을 하면서 철거민들과 6개월 정도 살았죠. 그리고 군대 가기 전까지 학회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정치경제학 학술 동아리.(웃음) 공부도 하고 술도 마시는… 그래서 학점은 이제…(웃음) 저는 늘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우리 학교 등록금이 비싼 이유는 정치경제학 동아리를 하라고 그런 거다. 정치경제학 공부를 하지 않고 졸업한다면 대학 등록금비를 헛되게 쓴 것이라는 헛소리를 남기면서. (웃음) 제 대학생활의 절반은 정치경제학 학회였고 절반은 투쟁 현장이었고. 노동조합에서 학생들과 연대하는 활동들을 많이 했어요.

박 : 청소노동자 조합 운동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류 : 군대 제대하고 복학을 했는데, 학생 사회가 너무 경직되어 있는 거예요. 대학생 운동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학생 운동을 하는 친구들은 공부를 우선으로 해요. 공부도 좋지만 현장 투쟁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진짜 운동이거든요. ‘다 불태워서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견학 하듯 투쟁 현장 나갔다오길 반복하고, 이렇게 일시적 단편적인 운동만 계속 이어지구요. 그런데 현장 경험이 일천하면 책을 읽어도 한계에 빨리 봉착하게 돼요. 우선 상상력이 그만큼 낮아지고, 똑같은 책을 읽더라도 노동자로서 살아본 사람이 읽는 거랑 대학 와서 마르크스 서적만 보는 사람이 읽는 거랑 그 책의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또 책을 읽었을 때의 변화도 달라요. 실제로 땀 흘려서 노동하고 내 힘으로 투쟁해서 쟁취해본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때 보여줄 수 있는 변화의 폭과 양은, 계속 책만 들고 팠던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삶의 변화와는 천지차이예요.

내가 주체가 되어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가는 운동에 대한 목마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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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학생운동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내 인생의 경험을 쌓기 위한 운동(이었던 것 같아요). 학생운동하면서도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이런 생각을 은연중에 하거든요. 특히나 학생 운동을 하는 시기에는 그런 욕망이 커요. ‘이 운동을 하면서 내가 성장해야지’, ‘내가 여기 가서 뭘 배우고 나중에 좋은 사람이 되어서 사회에 기여를 해야지’, ‘직접 가서 눈으로 목격해야지’와 같이. 매번 학생 운동의 (대상)이 타자화되는 것 같았어요. 우리가 주체가 되는 운동은 등록금 투쟁 밖에 없는데, 매번 그것만 할 수는 없잖아요. 사회적인 연대 투쟁이란 역사와 사회를 크게 바꿀 수 있는 운동이잖아요. 당사자 운동으로서의 등록금 투쟁이나 얄팍한 연대 활동 말고,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게 없을까하는 그런 목마름이 있었어요.

일상과 주변으로 파고들어간 투쟁 청소노동자 어머니, 아버지와 만나다

제대해서 보니까 학교에 비정규직 문제가 이슈가 됐죠. 그때가 2007년이었는데 이랜드 투쟁을 비롯한 비정규직 투쟁은 2000년대 초반부터 계속 있었잖아요. 운동을 운동답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학교 안의 경비 노동자와 청소 노동자분들이야 말로 우리 바로 옆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인데 멀리까지 가서 연대할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제 생각에는 우리 곁에서 투명인간처럼 지나가는 어머니들, 아버님들이 열악한 처우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인데, 아직 조직화도 안 되어 있고 최저임금도 못 받고 계셨죠. 이런 분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연대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같은 학교에서 다니는 학생들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비정규직 된 지가 80년대 후반부터라고 하더군요. 그러면 그동안 ‘20년이 지났는데 대학생들이 뭐하고 있었나?’ 화가 나더라고요. 매일 ‘노동해방, 신자유주의 철폐’와 같은 거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막상 바로 옆에서 청소하시는 어머니들, 학생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하기 위해 도와주시는 가족과 같은 분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왜 한 번도 학생들이 문제제기 못했을까, 이분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활동들을 왜 다른 분들이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활동을 시작했죠. 거의 수업을 안 들어갔어요. (웃음)

박 : 들어갈 시간이 없었겠네요.

투명인간교내 청소 노동자와의 마주침, 그리고 단 하나의 목표를 세우다.

류 : 학교에 청소노동자 휴게실이 있더라고요. 올라가는 계단 아래를 보면 그 옆에 벽이 있고 문이 하나 달려있죠? 우리는 그 문을 창고라고 생각하잖아요. 그 문을 열면 그 안에 사람이 앉아있어요. 정말 좁아요. 그 문을 열었을 때 무척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한 번 찾아가겠다고 청소하시는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물어봤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학생들이 말 걸면 처음에는 ‘이렇게’(손을 내저었다) 하셔요. 현장 소장이라는 사람이 아주머니들에게는 전두환이나 아이히만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학생들과의 접촉이 발각되면 혼납니다. 미리 싹을 잘라놓는 작업이 있었죠. 그럴 땐 시간이 필요하죠. 인사도 계속하고 음료수도 먼저 갖다 드리고. 그렇게 마음이 열고 난 뒤 찾아갔는데 ‘그 문’이 있었어요. 문을 열어주시는데 어머니가 앉아 계시는 거예요. 들어가니 작지만 예쁘게 꾸며놓으셨어요. 손주들 사진 붙어 있고. 본인 방처럼, 소녀 방처럼 꾸며 놓으셨더라고요. 그걸 보고 대단히 놀랐어요. 누군가의 어머니고 할머니고 부인이지.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 어머니랑 다른 게 없는 분 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분들을 투명인간처럼 지나쳐 보내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분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거잖아요. 조그만 공간에서 이렇게 생활하시는 거면 ‘임금 수준도 형편없고 복리 후생도 말도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죠.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열정이 많이 생기더군요. 처음부터 노동조합 조직과 같은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건 아니에요. 하지만 졸업하기 전에는, 정말 이분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고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가장 밑바닥에 있으니까. 학생들이 일종의 교두보 역할을 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업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나는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이분들의 삶이 변화된 모습을 내가 봐야겠어.’ 라는 마음으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진짜 민중을 만나는 시간 청소노동자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울고 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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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건물마다 다 돌아다녔는데 하나같이 사정이 열악했어요. 제가 연세대학교를 나왔는데 건물도 엄청 많고 캠퍼스도 되게 크잖아요. 그래서 제가 스쿠터를 샀어요. 타고 다니면서 점심을 3번, 4번씩 먹었어요. 왜냐면 어머니들이 마음을 열려면 밥을 같이 먹어야 해요. 사람은 옳은 사람이나 옳은 이야기를 안 들어요.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듣지. 가르치려고 하면 안 되고 일단 친해져야 해요. 목적의식을 갖고 친해져서도 안 되고. 그냥 이분들과 정말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어요. 운동을 해보니 마음을 얻고, 친구가 되고, 비를 같이 맞고 해야 서로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거예요.

저도 많이 울었어요. 만나서 이야기 나누면 대부분 우셔요. 연세가 60대, 70대이신데 한국전쟁 때 태어나셔서 힘든 역사를 거쳐 온 분들이에요. 학생 운동하는 친구들은 자신들이 기억하는 ‘투쟁의 역사’ 같은 역사가 진보적인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그 역사도 엘리트의 역사에요. 우리도 사실 오만했지요. 학생운동사, 노동운동사의 노동조합이 있는 ‘제조업-대공장’의 남성 노동자는 형편이 그나마 나은 거지요. 그리고 한국 현대사, 정치사, 4·19, 87혁명과 같이 큰 덩어리 중심으로 공부했을 뿐이지, 민중사에 대해서는 굉장히 무지해요. 그런데 청소노동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자체가 민중사예요. 이분들은 6·25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중산층이 되지 못했어요. 대개는 계속 빈민으로 살아오신 분입니다.

어머니들 우리 이제 큰 물고기가 됩시다” – 청소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조직을 돕다

그 분들의 이야기를 6, 7개월 동안 들었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서로서로는 몰라요. 건물이 다 분리되어 있고, 청소 하시는 동안에는 다른 건물로 가는 게 금지되어 있어요. 그리고 다른 건물 아주머니랑 퇴근할 때도 말하면 안 되고 그게 적발되면 징계를 받게 돼있어요. 현장 소장이 어머님들께 욕도 하고, 성희롱, 성추행, 성상납 등 별 일이 다 있어요. 현장소장이 자기 집, 교회 와서 청소하라고 하면 어머님들이 다 몰려가서 청소해야 했어요. 어머님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자기들끼리 싸워요. 서로 단결이 안 되니까 소장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만 있지, 소장을 상대로 싸우는 건 없어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에요. 그래서 노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설문지를 통해 알아보니 근로기준법 위반, 최저임금법 위반, 폭행, 모욕, 성희롱, 성추행 등이 빈번했어요. 이제 서서히 노동조합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제안했어요. ‘우리는 소장과 1대1로 상대하고 있다. 우리는 소장한테 질 수밖에 없다. 온갖 부당한 행위도 바꿀 수 없다’라고요. 그리고 또 설명을 드렸지요. ‘조그만 물고기가 있는데, 자기보다 엄청 큰 물고기가 나타나면 물고기 모양으로 대형을 짭니다. 그럼 큰 물고기가 겁을 먹고 작은 물고기를 단 한 마리도 못 건드린다.’ 그게 바로 노동조합이라고 말이죠.

오랜 시간 눌려있던 용수철이 튀어 오르다. –노조가 결성되고 청소 노동자가 주체로 거듭나다.

이런 설명의 시간을 가지고, 청소노동자 어머니들을 한 분씩 모셨어요. 건물마다 프락치들을 다 심어 놨는데, 그런 감시의 눈을 피해서 조용히 모임을 시작했죠. 집중적으로 노동조합을 설명 드렸더니 어머님들이 열의가 넘치셨어요. 그동안 눌려있던 용수철이었던 겁니다. 누가 건드려준 사람이 없었던 거지요. 왜냐면 근로기준법이 뭔지, 최저임금이 올해 얼마인지도 모르고, 소장이 ‘툭툭’ 치는 건 넘어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셨던 분들이니까요. 그렇게 간담회를 가질 때마다 어머님들이 성장하시는 느낌이 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어머님들이 스스로 더 높은 차원의 투쟁을 기획하게 되셨어요. 그때 민주노총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08년 2월,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지부 연세대학교 지회 노동조합 출범식을 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노동조합은 숨기고 쉬쉬하며 하면 절대로 안 되거든요. 그러면 우리를 더 무시해요.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장단 명의로 노동조합 출범식 초청장을 교수들에게 보냈어요. 연세대의 한 주체가 (노동조합) 출범식을 한다고 알린 것이죠. 출범식 전날 어머님들이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아 플래카드로 만들어서 연세대 정문부터 본관까지 걸었어요. 다음날 출범식을 크게 했죠. 그렇게 연세대를 시작으로 홍익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로 이어져서 신촌에서 다 같이 집회를 했어요. 노동조합 생기고 불과 한 6개월 만에 이뤄내신 거지요. 학생 한 명을 변화시키는 데는 10년 정도 걸리지만, 청소 노동자분들은 살아온 인생 자체가 이미 노동계급과 투쟁을 체득한 분들이기 때문에, 변화하는 데는 한 순간이었어요.

김시은(이하 김): 정말 짜릿하셨겠습니다.

약자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언덕은 법, 그렇게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다.

박: 학부 때 이런 활동 하셨으면 아무래도 밖에 나가서도 비슷한 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은데, 단체에 들어가지 않고 로스쿨에 진학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류 : 처음에는 노조 조합원처럼 일을 했죠. 그분들 사무실에서 3년 정도 활동을 했어요. 사실 법이라는 게 대단히 중요하죠. 그분들이 배운 사람들한테 가장 기대하는 것도 법이었어요. “이게 불법이야? 소송하면 얼마 받을 수 있어?” 라고 계속 물어보세요. 법이라는 게 존재하는 이유가, 대화의 창구가 없고 그 문턱이 너무 높아서 넘지 못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지요. 물론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형식적으로는 법원에 누구나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노동부에는 누구나 진정을 제기할 수 있잖아요. 즉, 약자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사회적인 장치죠.

그렇기에 ‘배운 사람들’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 같아 처음에는 노무사 공부를 했어요. 노무사 공부를 두 달 정도 하는데 계속 교내 투쟁이 터지니까 집중을 못했어요. 시험도 봤지만 공부를 안했으니 될 리가 없죠. 또 그때 제 나이가 스물여덟 살이라, 집에 뭐라도 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노무사 시험을 그 핑계로 삼기도 했고요. 그런데 주위에서 법으로 노동운동을 지원하고 싶으면 로스쿨이 생겼으니까 거길 지원을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노무사보다 할 수 있는 게 더 많고, 소송대리권도 있으니까요.

우리 사회의 제일 취약한 고리인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이 바로 보편적인 민생 향상을 위한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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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 전반적으로 노동환경이나 노동문제 개선을 위해서 제정이 필요하거나 개정, 수정이 필요한 제도가 있을 텐데, 근본적으로 무언가 바꿀 수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류 : 입법에서는 간접고용문제 해결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란 말이 있듯이 가장 고통 받고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환경을 먼저 바꾸는 게 맞아요. 지금은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고리가 간접고용 비정규직이에요. 역사가 한 단계씩 진보할 때마다 여러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한건 아니었어요. 물론 68혁명 때는 사회 전반적인 혁명이 일어나긴 했지만, 어떤 시대가 한걸음 더 나가려면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고리를 끊어냈을 때 생각보다 큰 변화가 생길 때가 많아요. 그런 것이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운동들이구요.

지금을 사람들은 ‘87년 체제’라고 하지만, 사실상 ‘IMF체제’입니다. 신자유주의 양극화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조금 더 좋은 사회로 갈 수 있어요. 저는 지금의 체제로 인해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면 다음 사회로 넘어갈 실마리가 풀릴 것이라고 봐요. 지금 가장 고통 받고 있는 계층이 비정규직, 그중에서도 직접고용이 아닌 하청업체 소속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이고요.

노동운동이라 하면 뭔가 매니악하고 투쟁의지가 높고 사나운 사람들이 하는 운동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통계를 보더라도 대한민국 국민 절대다수가 노동자에요.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운동은 부분적인 운동이 아닌 보편타당한 운동입니다. 노동운동 자체가 민생운동이고, 국민들의 전반적인 복지 향상을 위한 거시적인 운동이고요. 이 보편적인 복지를 위한 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의 첫 걸음은 ‘노동개혁’에 의해 가장 고통 받고 문제해결이 시급한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해결이라고 봐요. 입법제안은 민변 노동위에서 한 입법제안을 참고 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웃음)

할머니 손 붙잡고 시위현장을 누비고, 노천극장에서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부른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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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영(이하 정) : 학생운동을 열정적으로 하셨는데, 노동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인생의 첫 순간이 있지 않으신가요?

류 : 87년 혁명 때 5살이었어요. 할머니가 운동권이어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간부를 하셨어요. 할머니 손잡고 집회를 많이 다녔고요. 87, 88년 고향인 대구에서도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집회를 많이 했어요. 할머니랑 손잡고 동성로에 나가면 학생들이 교련복입고 최루탄 때문에 코 막으면서 뛰어다니고 그랬죠. 할머니 따라서 시국집회를 많이 다녔고 노동자들의 거친 투쟁의 모습도 어렴풋이 기억나요. 어린이가 상상 못할 인파가 모인 집회에서 발언도 해봤고요. 그게 나중에 역사책에서 찾아보니까 88년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있었던 전교조 집회였어요. 그때 할머니와 버스타고 가면서 할머니가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알려주셨어요. 집회에서 제가 발언하게 됐는데 발언은 안하고 마이크 쥐자마자 ‘나 태어나~’ 라고 노래를 부른 거예요.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함께 소리 지르며 불렀던 기억이 있어요. 그 당시에는 이게 뭔지도 모르고 이 사람들이 왜 싸우는지도 몰랐지만 그 어릴 때의 기억들을 나이를 먹으면서 계속해서 반추해보곤 했어요.

불온서적<>, 그리고 선하고 착한 사람들이 가는 길에 대한 자각

저희 집은 어릴 때부터 책이 많았어요. 삼촌 고모들이 다 학생운동을 해서요. 그때 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집에 있으면 안 되는 책들이 많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장남이어서 할머니 모시면서 대구에 사니까 집으로 불온서적들을 보낸 거죠. 제 방에도 맑스, 엥겔스 이런 책들이 꽂혀 있었고요. <코스모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광주 민중항쟁 다큐멘터리>, <태백산맥> 같은 책들이 있었어요. 또 저희 집은 <말>지를 정기구독했어요. 그래서 한글을 처음 떼었을 때부터 그런 책들을 읽고 자랐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광주민중항쟁 책에서 광주시민들이 칼에 찔리는 사진을 보고 굉장히 놀란 기억이 있어요. 고모 삼촌의 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 옆에서 책 제목들을 엮어서 노래를 부르며 놀기도 했고요. 92년에 ‘윤금이 피살 사건’이 있었어요. 윤금이 씨가 미군들에 의해 성폭행 당하고 살해당한 사건인데, 그게 <말>지에 실려 있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읽고 엄청 충격을 받아 할머니한테 여쭤봤죠. 그랬더니 보지 말라고 하셔서, 더 보고 싶어졌고요. 그 이후부터 <말>지를 정독하기 시작했어요. 중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현대사책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런 역사책들을 접하면서 어릴 때 스쳐 지나갔던 거리의 풍경, 할머니가 했던 말들, 고모삼촌들이 울면서 ‘누가 잡혀갔다’ 이런 얘기하던 기억들도 이해되었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정서적으로, 이렇게 사는 것이 양심적이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어요. 왜 운동을 해야 되는지, 운동의 쟁점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은 자세히 몰랐지만 ‘착하고 선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러다 대학에 입학하니까 불이 붙었고 체질에 맞았지요.

학창시절 수성구의 류하경에서 집회 현장의 기타리스트가 된 지금

저는 학생운동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락밴드를 처음 시작해서 음악에 미쳐있었어요. 음악과 농구가 인생의 전부였어요. 대학 들어가면 무조건 밴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유명한 밴드를 능가하리라고 다짐하며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준비했죠. 고등학교 2학년 학교 축제에서 밴드 ‘범어동 수퍼하이웨이’를 결성했고. 당시 여고에서 많이 왔었는데 배우 손예진도 왔었죠. “손예진이 뭔데!” 이러면서 락밴드 메탈리카처럼 ‘쎈 척’하고 그랬어요. 고2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고, 제인생의 정점은 고 2 축제에서 공연했을 때였어요. 그때 첫 곡으로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을 연주하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이데아’ 로 마무리 했었죠. 그때부터 (인생이) 기울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왔네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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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집회 나가보면 불타오르는 게 있어요. 그래서 ‘수성구의 류하경’이 메이데이 때 가서 ‘바위처럼’을 칩니다. 그때 쌓았던 기타 실력을 농활, 집회현장 그리고 민변 집회에서 발휘하죠. 원래는 락기타, 블루스기타를 치는데 그런 건 민변 변호사님들이 모르시잖아요.(웃음) 그래서 지금 기울고 있는 상태예요.

진지하지만 유쾌했던 인터뷰가 끝나고 류하경 변호사가 말을 덧붙였습니다. 언제 맥주 한 잔 하자고요. 꼭 그러기로 했습니다. 정말이죠? 류하경 변호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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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평화기행 기행문

- 박종훈 회원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아시아인권팀이 기획한 베트남 평화기행단은 15. 7. 26.부터 15. 8. 1.까지 베트남을 방문하여 일정을 소화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간단한 소감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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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짧은 변명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지금도 몇 번이나 글을 썼다가 지우다를 반복하고 있다. 이제야 고백하건데, 난 (다른 평화기행단 팀원들과는 달리)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베트남으로 떠났고, 현장에서도 알 수 없는 찝찝함을 가슴 속에 담아두어야만 했으며, 아직도 베트남의 아픔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솔직하게 이 글을 쓴다면 그것은 극히 개인적인 감상에 치우친 경험담일 뿐일 터이고, 반면에 (베트남의 아픔을 공감하는 듯하면서) 심각하게 글을 써야만 한다면 결국 이 글마저 찝찝하게 남을 것 같아서 고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이동화 간사님을 비롯한 팀원들과의 계약에 의해) 쓰여 져야만 하고, 또 (이유진 간사님께) 제출되어야만 한다. 결국은 없는 글재주에 거짓말을 할 재능은 더욱 없어서 솔직하게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행여나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나 같은 (불량) 팀원을 제외한 다른 팀원들은 모두 진지한 마음으로 베트남을 다녀왔기에 부디 오해하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2. 어제가 오늘이 되기까지

  영남에서 태어나 2000년대에 대학에 입학한 나로서는 광주의 아픔을 오롯이 알지 못한다. 어디 그 뿐인가, 만점 받을 수 있던 시험을 실수로 하나 틀렸다고 슬퍼하는 동기의 아픔도, 소주잔을 앞에 두고 문득 1년 전 헤어진 애인이 생각나서 아프다는 후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 아픔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하기가 힘들다.

  이야기를 들으면 슬펐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오월 광주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그랬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들이 내 가슴에 멍울로 남아 있지 못했다. 공감하는 척 했지만, 나에게는 오늘이 더 소중했다. 그런 나도 현장에 서서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만큼은 그들의 어제가 나의 오늘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28만명과 117만명,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남베트남 연합군과 북베트남 연합군의 수다. 무려 4배가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음에도 역사는 북베트남이 승리한 전쟁, 그리고 미국이 패배한 전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에게는 베트남 또한 어제의 일이었다.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일도, 한국군이 저질렀다는 민간인 학살도, 다 어제의 일이었다. 난 그 세대가 아니니까, 그냥 기억으로만 남겨두면 되는 일이었고, 오늘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래서 베트남으로 떠나야만 했다.

  그렇게 도착한 베트남에서 전쟁박물관, 구찌 땅굴 등 전쟁을 기록한 곳뿐만 아니라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던 지역들을 방문하게 되었다. 미군에 의한 학살이 있었던 미라이(손미) 마을을 시작으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빈호아, 퐁니·퐁넛, 하미, 투이보 마을을 방문하였고, 생존자들과의 간담회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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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사진을 보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대면해야만 했다. 그렇게 분위기는 숙연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베트남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간담회에서의 시간을 많이 기다렸다. 오늘, 이 곳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3. 오늘을 사는 사람들

  학살이 있었던 마을들을 방문하면서 위령제를 지내고, 아시아인권팀 팀장인 성상희 변호사님께서 축문을 낭독하는 동안 내가 느낀 것은 아이러니한 평화였다. 그곳의 오늘은 너무나도 고요해서, 마치 학살과 관련한 모든 일들이 거짓말인 듯 했다. 고즈넉한 평야 앞에서 헬리콥터가 착륙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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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솔직히 말하고 싶다. 난 여전히 베트남의 어제를 온전히 느끼는 데는 실패했다. 현지의 생존자들은 모두 하나 같이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베트남인은 평화를 사랑한다. 미군과 한국군을 용서했다. 이제 우리는 경제 공동체로서 서로 발전해가야 한다.” 생존자들은 이미 오늘을 살고 있었다. 그들이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내가 기대하고 생각했던 오늘은 그들이 생각하는 오늘과는 같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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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아파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감정을 잘 다스려 아픔을 승화시켰다는 미담을 듣고 싶었던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자본’을 탐하여 베트남에 파병했던 우리와 ‘자본’을 탐하는 베트남이 손을 움켜잡고 있는 오늘은… 한국이 베트남에 대한 최대 투자국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마음의 준비를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 날의 참상을 묘사하며 울먹이는 생존자를 앞에 두고 대화하면서도, 더없이 평화로운 평야를 뒤에 끼고 있으면서도, 단지 그것뿐이었다. 내가 만난 베트남은 오늘의 베트남이었다.

4. 그리고 내일

  베트남 평화기행단의 최종 평가자리에서도 아쉬움을 뒤로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한 것이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베트남의 어제는 현재도 유효한가.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베트남의 오늘, 그리고 내일에는 많은 과제가 남아있다. 지금도 베트남에서는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을 제한하고 있고, 고문을 비롯한 인권침해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며 이를 문제 삼는 인권 변호사들은 국외로 망명을 당하고 있다.

  결국 베트남에도 오늘을 사는 이들이 있고, 이들은 우리의 손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베트남을 다시 찾게 만들 것 같다. 그 때는 더 많은 사람들의 손을 잡고 이 곳을 방문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함께 해서 너무 좋았던 베트남 평화기행단의 팀원들에게 한 마디씩만 남기면서 기행문을 마친다.

  미친 존재감의 김남주 변호사님, 제 누이가 된 김자연 변호사님, 여행 내내 말 못할(그러나 모두가 알았던) 아픔으로 힘들어했던 김하나 변호사님, 박학다식하여 모르는 것이 없던 박진석 변호사님, 말 안 듣는 팀원들 통솔하느라 너무나도 수고하신 팀장 성상희 변호사님, 그리고 성상희 변호사님의 남자 배광열·임재성 변호사님, 본인은 좋다고 하지만 표정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오지은 간사님, 모든 실무를 도맡아서 책임졌던 팀원들 모두가 감사해하고 있는 이동화 간사님(통역님), 선물 고르는데 놀라운 안목을 보여주신 마사지 이상희 변호사님, 김하나 변호사님에 의해서 만두가 되어버린 이종민 자원활동가님, 새로운 권력 이준형 변호사님, 물에 가장 먼저 뛰어든 물개 조영선 변호사님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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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5/08/11-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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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봄을 알리는 입춘이 지난 2월의 어느 날, 민변 가족들에게 전북지부의 소식을 알리게 되어 매우 반갑고 또 영광입니다. 2016년은 민변전북지부의 많은 변화가 있던 한 해였습니다. 민변 전북지부 창립 최초로 회원수가 30명(특별회원 2명 포함 31명)이 넘는 양적인 발전이 있었으며, 8월에는 전북지부를 이끌어갈 새로운 임원단(지부장 : 김현승, 부지부장 : 김석곤, 사무국장 : 박재홍)이 선출되어 여러 운동들을 실행해보고자 하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1.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해 준 인권감수성 향상 프로젝트 공감과 연대

지난 10월 29~30일 우리 민변회원들과 전북지역 로스쿨 인권법학생들이 “공감과 연대”를 주제로 함께 참여한 인권감수성 워크샵은 회원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공기 좋은 완주군 리조트에서 인권 감수성, 가정폭력, 언론과 민변, 그리고 지역 사회의 통일운동과 민변이라는 주제로 전문적이고 열성적인 강사님들로부터 좋은 강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의 후에 마련된 뒤풀이 시간은 민변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함께 세대를 뛰어넘는 고민을 나누며 회원과 인권법학생들 간의 돈독한 우정을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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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촛불집회를 통해 시민의 목소리를 듣다

어지러운 시국 속에서,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국민들과 함께 하고자 우리 전북민변회원들도 매주 토요일 5시 전주 한옥마을 앞 관통로 사거리에 모여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습니다. 때론 비가 왔고, 때론 눈이 왔지만 민변의 깃발은 언제나 힘차게 펄럭였습니다. 촛불집회를 통해 민변회원 뿐만이 아니라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이들의 외침에 우리 민변이 더욱 더 귀를 기울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좋은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또, 집회 후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치맥을 하며 회원들끼리의 우정을 다졌던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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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년을 떠나보내며 2017년 새희망을 보다

유독 국민들을 실의에 빠지고 좌절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많았던 2016년(병신년)을 떠나보내는 송년모임이 12월 14일에 있었습니다. 20명에 가까운 많은 회원들이 참석하였고, 김현승 지부장님의 2017년 민변전북지부의 계획 및 앞으로의 활동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올해 민변전북지부가 많은 양적·질적 성장한 만큼 내년에는 소송 구조와 공동변론활동에 더욱 많은 참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부장님의 말씀에 한편으론 어깨가 무거워지면서도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차오르기도 하였습니다. 미리 준비된 식사와 음주를 하며 회원들 간의 덕담을 주고받고 사무국에서 준비한 송년 선물까지 한가득 받아 몸도 마음도 따뜻한 송년회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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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2016년 민변전북지부는 지부 공동 변론활동으로 김승환 교육감 사건, 한상렬 목사 보안관찰법 위반 사건 등을 수행하였으며, 소송구조로는 남원평화의 집 고소대리 사건, 자림원 사건 등 다수의 사건을 맡아 수행하였고 고종윤, 박일지 회원을 주축으로 시민법률학교 강연과 같은 외부활동에도 충실히 하였습니다. 2017년에는 대한민국의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할 것을 전국의 민변회원 분들게 약속드리며 이상으로 민변전북지부의 2016년 하반기 소식지를 마치려 합니다.

목, 2017/02/09-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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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연 변호사를 만나러 가는 창덕궁 돌담길은 은행잎이 따스하게 흩날렸습니다. 원서동 한 모퉁이의 소극장 건물 3층에 위치한 공감 사무실에는 대부분의 변호사님들이 외근을 나간 와중에 장서연 변호사님이 웃으면서 인터뷰팀을 맞아 주셨습니다. 햇빛이 기웃하는 사무실 입구의 티테이블에서 장서연 변호사님을 모시고 출판홍보팀의 최종연 변호사와 송연주 자원활동가가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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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빠 보이십니다. 오늘 오전에는 어디를 다녀오셨는지요.

 

: 오늘 오전에는 3기 국가인권정책수립계획(NAP)을 수립하는데 있어 연구과제를 맡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성소수자 분야의견을 수렴하는 자리에 다녀왔어요.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국가인권정책수립계획에 관해 권고안을 제출하고, 정부는 정부차원의 국가인권기본계획 수립합니다. 여기에 시민사회의 의견을 수립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어요. 오늘 주로 다룬 내용은 1, 2기 NAP 이행 여부와, 3기 NAP 수립에서의 검토할 내용들이었어요.

 

: 1, 2기 국가인권정책수립계획은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 1, 2기때 인권위에서 굉장히 여러 분야를 권고했어요. 그런데 성소수자 분야는 굉장히 미흡하게 반영되었어요. 1기에서는 동성간 성폭력 처벌(형법개정)만 반영되었고, 2기에서는 전무했죠.

 

: 3기 국가인권정책수립계획에 반영시킬 중점 사항은 어떤 부분이 있을까요.

: 저는 장기적으로 사회 변화를 위해서는 교육 분야, 특히 교육과 청소년 분야가 중요하다고 보아요.

 

: 그렇게 생각하시는 계기는 어떤 것들이 있으신지요.

 

: 저희가 지난 화요일 국가인권위 용역으로 성소수자 차별실태조사결과를 보고하는 자리가 있었어요. 2014년 하반기에 조사했던 것인데, 뒤늦게 결과발표토론을 가졌습니다. 조사 결과 중에 청소년 성소수자 5명 중 1명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내용이 있어요. 이게 왜 심각하냐면 시도는 안 했지만 자살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훨씬 많다는 것이거든요. 학교 안에서의 비하 또는 적대적 분위기에서 정체성을 형성하기에는 성소수자가 취약한 환경이고, 학교뿐만 아니라 가정 안에서도 충분한 지지를 못 받고 있고,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정부 차원의 정책, 교육청 차원의 정책이 전무해요. 더 우려스러운 것은 교육부는국가 차원의 성교육 표준안 만들면서 동성애, 성적 지향 내용 넣지 말라고 하고 있는 거죠.

 

: 청소년과 성소수자 분야에 대해 변호사로서, 법조인으로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 2011년에 서울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도록 노력했어요. 서울학생인권조례는 무상급식과 더불어 진보교육감의 주요 공약이었고, 두발자유, 체벌금지 등 청소년인권운동의 염원이 담긴 정책이었어요. 정권이 바뀌면서 법률로 제정하기에는 입법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주민발의조례로 되었던 것인데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에 관한 차별금지와 보호의 내용도 담겨있었어요. 거기에 대해 보수진영에서 공격을 하면서, 제정이 되면 자녀들이 동성애자가 된다느니, 학교에서 항문성교를 배운다고 피켓 들면서 반대하는 경우도 있었고, 서울시 의원들한테 매일 500통씩 반대문자가 가고 그러던 상황이었어요.

 당시 민주당이 서울시 의회 다수석을 차지하고 있었는데,성소수자 관련 내용이 들어가면 조례 자체가 부결된다는 염려 때문에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서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을삭제하려고 했던시도들이 있어서, 학생인권조례가 원안대로 통과될 수 있도록 성소수자들과 그 지지자들이 2011. 12. 14. 서울시의원회관을점거하고 시위에 돌입했어요, 당시에 민주당 원내대표도 찾아가고 여러 각도로 설득한 끝에 민주당에서 당론으로 정해서 통과를 시켰습니다.

 그 이후에 곽노현 교육감이 물러나고 문용린 교육감이 들어서고, 이주호 장관이 무효소송을 제기하면서 학교현장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정착이 되기 힘들었는데, 조희연 교육감 당선 이후에 학생인권옹호관도 임명하고, 조례를 학교현장에 정착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저도 서울시교육청 학생인권위원회 위원으로서 자문을 하고 있고요.

 

: 장서연 변호사님은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어떤 계기로 관심을 가지게 되셨나요.

 

: 제가 대리했던 사건 중에서 한 고등학생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집단괴롭힘끝에 자살한 사건이 있었어요. 부모가 교육청 상대로 학교폭력에 대하여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음에 대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였어요.

 저는 청소년 성소수자에 대해 정부 차원의 정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외국에서도 성소수자 청소년의 자살이 심각한 문제이고, 탈가정, 탈학교한 청소년의 상당수가 성소수자라는 실태조사도 있는데요, 청소년 성소수자의 자살예방이나 지원을 위한 캠페인 또는 정책을 외국에서는 많이 실시하고 있어요. 대만에서도 남학생이 여성스럽다는 이유로집단괴롭힘끝에 학교 안에서 자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대만사회는 이런 비극적인 사례를 예방하기 위해 성평등교육법을 10년 전에 제정, 시행중이에요.2년 전에 제가 대만의 퀴어퍼레이드에 갔을 때 청소년들이 직접 나와서 활동하는 것을 보고 부럽다는 생각을 했어요.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해도 부모가 진행하는 소송밖에 없고, 사회가 전혀 경각심을 못 느끼는 것 자체가 더 절망적인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 왜 한국에서는 경각심을 못 느낄까요?

 

: 한국은 청소년의 자살률이 굉장히 높잖아요. 이제는 사회가 너무 무감각해진 것이 아닌가 싶어요.

 

: 대리하셨던 청소년 성소수자 사건은 어떻게 마무리되었나요.

 

: 제가 1심부터 맡았던 건아니고, 2013년에 대법원에서 피고 측 책임을 30% 인정한 원심을 파기환송 했어요. 집단괴롭힘이 빈번하지 않고 폭력적이지 않았다면서 자살에 대한 학교 측 예견가능성이 없었다고 판단한 거에요. 그게 법률신문에 나면서 사건의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고, 이 사건이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성 집단 괴롭힘인 것을 나중에 알게 되어서, 파기환송심 부터 개입하게 되었어요.

 사건을 진행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파기환송심은 법에 따라 대법원의 법률적 사실적 판단에 기속이 되는데,저희가 청소년 성소수자 연구자의 전문가 증언이나 자살예방전문가의 심리적 부검 결과도 제출했는데, 결국 자살 부분의 학교 책임에 대해서는 인정이 되지 않았어요.

 

: 대법원에서 결국 자살에 대해 어떤 취지였나요.

 

: 대법원은 괴롭힘이 빈번하지 않고, 물리적 신체적 폭력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중대하고 심각한 괴롭힘이 아니라는 식으로 판단했는데, 저는 대법원이 집단 괴롭힘의 특성, 성소수자 학생의 취약성을 간과했다고 봐요. 또 하나의 문제는 대법원은 법률심인데, 원심에어 인정한 사실관계를 너무 간단하게 뒤집어 버린 거죠. 주심이 김신 대법관이었데, 개인의 종교관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죠.

 

: 청소년 성소수자 문제에서 조금 주제를 바꿔서, 영화 <친구사이>에 관해 소송을 대리하셨다고 읽었습니다. 당시 변론의 중점은 무엇이었나요.

 

: 영화 <친구사이>가 청소년관람불가처분을 받아서 소송을 제기한 것이었어요. 영화 ‘친구사이?’의 제목은, 군복무중인 연우진을 애인인 이제훈이 면회하러 갔는데 면회신청서에 ‘관계’를 적을 때 ‘애인’이라고 적었다가 ‘친구’라고 적은데서 나온 건데요, 다른 영화제에서는 12세나 청소년 관람가로 상영되었고, 성소수자의 현실을 따뜻하고 밝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 영화였어요.

그런데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이 영화가 동성애를 주제로 하고 있고, 여관방에서 둘이 키스를 하는 장면이 있다고 선정성 때문에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준거에요.

제가 왜 <친구사이> 등급 문제를 중요하다고 보았냐면, 제가 얼마 전에 읽은 책에 앤드류 솔로몬이 쓴 <Far From The Tree>라는 책이 있었어요. 이 책의 내용이 far from trees, 즉 가족 또는 어떤 계보에서 떨어져 있다는 뜻인데, 장애인, 트렌스젠더, 게이, 영재의 경우 수평적 정체성이라고 해서, 수직적 정체성인 인종이나 가문 등에서 멀어져 수평적인 정체성을 가진 그룹을 만나야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는 거에요.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는 사회, 문화의 영향을 받고, 그런 사회와 문화의 통념에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나 낙인이 뿌리깊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식을 내면화한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게 되어요. 그래서 소수자에 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미디어가 굉장히 중요해요. 그래서 <친구사이>의 청소년관람불가 결정이 영화사뿐만 아니라 청소년 집단에도 중요한 이슈라고 보고 취소소송을 제기했는데, 청소년관람불가 취소소송은선례가 없고 후례도 없어요. 그 이유는 청소년관람불가가 나오면 그대로 개봉하거나 해당 장면만 삭제해서 상영하면 되는데, <친구사이>처럼 다투려면 4년이나 걸려서 대법원 판단이 나왔기 때문에 흥행이나 금전적으로 도움이 안 되는 거죠. 결국 이 소송은 김조광수 감독이 의지를 갖고 만들었던 사건이라고 볼 수 있지요.

제가 당시 서울행정법원의 첫 기일 분위기를 잊을 수 없는데, 처음에는 우배석 판사가 뭐 이런 사건을 법원에 가지고 왔지 이런 분위기였어요. 1심 재판장은 이광범 부장판사였는데, 영화를 검증한다면서 부장판사 사무실에서 <친구사이> 영화를 기자들과 같이 보았어요. 결국에 재판부는 청소년관람불가가 표현의 자유, 성소수자의 성적 자기결정권, 알 권리, 평등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1심에서 승소했어요. 그 이후에 영등위가 계속 상소했는데, 대법원에서도 승소해서 확정되었지요.

 

: 성소수자 인권문제의 경과에 있어서 작년 서울시청 점거 농성을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변호사님도 계셨던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간단히 들을 수 있을까요.

 

: 작년에 저희는 서울시가 인권헌장이 무산되었다는 발표를 하고, 박원순 시장이목사들에게 사과하면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힌 것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서 서울시청 점거 농성을 시작했어요.

 

: 이제 거의 시청점거농성 1주년이 돌아오는데요, 지금 돌이켜보면 여러 가지 소회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 박원순 시장은 당시에 농성 대표단에게 사과를 하면서 실무적으로 성소수자 인권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보자고 해서, 서울시 혁신기획관과 인권국 차원에서 활동가들과 현장의 인권 이슈에 관해 정례적 면담을 했었어요. 그러데 서울시 행정에서도 여전히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발생하고 있고, 서울시민인권보호관에게 진정한 사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시는 사회적 합의를 위해서 더 노력하겠다고 했지만 서울시민인권헌장에 관한 2015년 예산은 전혀 집행하지 않았고, 2016년에는 예산도 전혀 배정하지 않았어요.

 서울시민인권헌장 폐기 이후 도미노처럼 다른 성소수자 인권이슈에도 악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바로 그 직후인 2014. 12. 30. 성북구청에서 청소년위기지원사업 예산을 불용시켰고, 올해에는 교육부에서 성교육 표준안 문제도 그렇고, 여성가족부가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것도 그렇고, 비온뒤무지개재단의 사단법인 설립 신청에 대해 법무부가 거부 처분한 것도 그래요. 저는 공직자나 정치인들이 성소수자 이슈에서 기본적인 인권 차원에서 단호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 반대시위자들의 기를 살려줬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퀴어문화축제를 진행한지가 벌써 15, 16년째인데, 그 전에는 반대시위자들이 축제를 방해한 적은 없었는데 2014년도에는 길에 몰려나와서 몸으로 막고, 5시간 동안 행사 진행을 방해했어요. 이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몰려다니며 성소수자 인권 이슈에 대해 반대를 하는데, 그것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니까 폭력성이 더 심해지는 것이죠.

 그래도 한편으로는,무지개농성이 있었기 때문에 2015년 퀴어문화축제를 서울시청광장에서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도 있었고, 퀴어문화축제를 취소하라는 압박도 있었는데도. 서울시에서는 시청광장은 신청자 누구나 사용가능하다는 원칙적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퀴어문화축제를 진행할 수 있었죠.

 

장서연 변호사님은 시종일관 온화하고 미소짓는 표정이었지만, 그 내용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굉장히 자세하고 거침없는 답을 해주었습니다. 녹음을 하고 있었지만 다 들을 자신도 없었고, 타자를 치면서도 내용을 그대로 옮기기가 버거웠습니다. 결국 주제를 살짝 전환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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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무거운 주제들에 대해서만 다루었는데, 다른 많은 인터뷰들에서도 다루었지만 과거로 돌아가 볼게요. 한영외고에 다니신 후에 법대로 진학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 법대 가는 사람들은 다 성적대로 가는 것 아닌가요 (웃음) 공감의 공채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된 것은 2006년 광주지검 순천지청 근무중이었는데, 사실 저는 그동안 순응적으로 살아왔던 것 같아요. 부모님 권유대로 특목고 입시를 보았고, 법대에 진학해서 사시를 보았고, 검찰 임용이 되어서, 주류사회에 편입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지만, 제 마음속에는 제가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늘 있었거든요.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제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짝사랑이었지만 여자 선배들을 좋아했고. 그런데 대학교에 입학한 다음에 인터넷 통신을 접하면서 유니텔에 퀴어 동호회를 찾은 거에요, 거기서 다른 성소수자들을 처음 만난 거에요. 이쪽에서는 그걸 데뷔라고 하는데, 사람들과 신나게 잘 놀다가 4학년이 되니까 미래가 불안해지는 거에요, 학점은 너무 안 좋고. 마침 그때 친한 친구가 신림동에 고시공부하러 간다고 해서, 저도 같이 간다고 해서 사시공부를 시작했던 거에요. 그리고 시험이 끝나고 나서 다시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나왔는데, 커뮤니티 사람들을 만날 때는 너무 좋았지만, 공감에 오기 전까지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커뮤니티의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에 따라 일반, 이반 이렇게 나뉘는 삶인거죠. 커뮤니티에서는 온전한 나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장 부담스러웠던 것은 지역에서 검사로 근무하다 보니, 수도권처럼 커뮤니티도 별로 없거니와, 검사라는 신분 때문에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쉽게 만나고 사귈 수도 없는 노릇이었어요. 예를 들면 기업인들도 함부로 만나면 안 되고… 초임 검사 시절이라 그런 경계심이 컸었고.. 그러다보니 제 인생에서 사시공부도 너무 힘들었는데, 검사생활도 너무 불행했어요.

 

: 검사 일 자체는 성격에 맞으셨나봐요(웃음)

 

: 검사 일 자체는 좋았고 검찰청 사람들도 좋았지만 제 삶이 없는 거죠. 고민하던 차에 공감 공채를 보았고, 그 전에 제가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사법연수원에 강연을 왔었고, 정정훈 변호사가 제1회 무지개인권상 수상하며 이런 일을 하는 변호사단체도 있네 알았었거든요. 그래서 공감에 지원했는데, 와보니까 막상 성소수자 관련 업무를 별로 안 하고 있더라구요. 사실 공감에 와서 저도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이주민, 난민, HIV 감염인, 출입국단속, 외국인보호소에 대해 관심 갖게 되었어요. 그리고 2007년에는 성소수자 관련해서 법제도를 검토하고 소송을 진행할 사건이 별로 없었어요.

 

: 최근에 코리아헤럴드에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지난 320일 모로코인 난민신청자가 본국에 강제로 송환되던 중 인천공항에서 결국 사망한 사건이 있었는데, 변호사님도 보셨는지요? 외국인 보호소나 불법체류자 인권 침해 문제가 왜 이렇게 심각한 걸까요?

 

: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IS의 테러가 있고, 이러한 테러의 예방 명목 차원에서 이주민 또는 난민 등을 강제추방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예전에 이명박 정부에서 G20 정상회의한다고 이주민들에 대한 불심검문, 단속강화를 하겠다고 이야기했었어요. 사실은 그것이 인종차별적인 거죠. 그리고 국가 단위에서 봤을 때는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비국민으로서의) 외국인들인데, 제가 사실 외국인보호소나 단속문제에 관심갖게 되었던 이유는 이곳이 정말 무법지대라는 것이었어요. 적법절차라는게 전혀 없고, 구속 및 추방인데도 법원 영장도 없고, 집행기관과 조사기간 역할을 모두 출입국관리소가 담당하는 거고, 인권침해가 굉장히 심각했어요. 합법체류자였는데 부당하게 구금되는 경우도 있었고, 한국인인데도 외국인으로 오인을 받아서 단속되는경우도 있었거든요.

 

: 외국인 인권 문제에서 처음 활동을 시작한 당시보다 진보한 분야는 어떤 것이 있으신가요?

 

: 외국인보호소에 외국인을 수용할 때는 3개월마다 법무부장관의 승인을 받는 것으로 출입국관리법이 2010년에 개정되었어요. 예전에 베트남이주노동자들이 인천항 건설현장 파업으로 인해 구속된 사건이 있었어요. 그것도 경기도경 외사부에서 기획수사로 부풀린 사건이었는데, 업무방해 무죄를 받고 석방되었어요. 당시 인천지역 건설노조연맹에서 지원을 많이 해줬고 석방 이후에도 일자리를 알아봐주었고, 한국에서 베트남공동체가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또 기억나는 사건은 한 중국동포가 고용허가제로 신체검사시 HIV 양성이 나와 출국명령이 떨어졌는데, 당시 생모가 한국에서 귀화해서 살던 상태였어요. 과거에만 해도 감염인은 출입국관리법상 강제퇴거, 입국금지대상이었는데, 단지 HIV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강제퇴거를 시키는 것은 공중보건학적 관점에서 전혀 근거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출국명령취소소송을 했고, 국가인권위가 당시에만 해도 중요한 인권침해사건의 경우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했었는데 이 사건에서도 의견을 법원에 제출해서 1심에서 승소를 하여 출국명령이 취소되었어요. UN에서도 한국 정부에 HIV 감염인에 대한 출입국통제를 폐지하라고 권고를 많이 했었고, 지금은 정책적으로 HIV 감염인이라고 강제추방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 UN의 권고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최근의 자유권 규약 이행실태에 관한 권고도 있고, 국제인권 메커니즘에 의해 국제기구가 권고를 하면 우리 정부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나요?

 

: (파안대소하며) 그렇지는 않죠.

 

: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인권 메커니즘으로 문제제기를 시도하는 이유는요?

 

: (변화를 요구할) 근거가 되니까. 정부가 너무 무시하는 경향도 있기는 하지만, 법무부와 외교부도 국제사회에 나가서는 말이 다릅니다. 외국에 나가서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해 노력, 연구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러나 2007년 차별금지법 무산 이후 정부는 한 번도 발의한 적이 없어요. 그러나 이렇게 말이 다르다는 것은 국제사회의 입장에서 신경을 쓰고는 있다는 것이거든요. 저도 <공감>에 오기 전에는 국제인권 메커니즘에 대해 잘 몰랐어요. 정기적으로 한국에 대해 심의하는 것도 몰랐고, 의견을 내는 것도 몰랐죠. 2012년 인종차별철폐위원회에 NGO 리포트를 내고 심의에도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국제기구의 권고가 정부에 요구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에 계속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법을 만드는 국회는 결국 원내다수석과 다수결의 원리가 작용하는데, 인권이라는 것은 다수결의 원리에서 배제되거나 권리에서 침해되는 이슈들이 많아서, 국제사회의 인권메커니즘을 이용하는 것도 중요 수단이라고 봐요.

 

: 실제 소송에서 국제인권규약이 판결 근거가 된 경우도 있나요?

 

: 2013년에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트렌스젠더 성별정정사건에 대해 판단하면서, 결정이유에서 외국 입법례도 많이 담고 있어요. SOGI(Sexual Orientation & Gender Identity)법정책연구회라고 있어요. <희망을 만드는 법>의 한가람, 류민희 변호사도 있고 다른 LGBTI 활동가들과 연구자로 구성된 정책연구회인데, 2011년에 제가 제안하여 결성되었는데, 장애법연구회를 벤치마킹해서 만든 거에요. 여기서 성별정정에 있어서 외부성기수술을 요구하는 것을 문제제기하기로 하고, 그래서 성기성형수술을 하지 않은 사람이 이 상태에서 성별정정을 해달라는 소송하기로 했어요. 왜냐면 대법원 예규 지침에 보면 외부 성기를 포함한 신체 외관이 전환될 성별의 것과 유사해야 한다고 보고 있는데, 하지만 외국에서는 예를 들면 독일연방헌법재판소에서는 그러한 생식능력제거나 외부성기수술을 의무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신체완전성의 침해라서 위헌이라고 보고 있거든요. 시대가 변하면 그런 부당함에 대해 더 많이 공감하겠지만, 성전환자는 현대 사회에서 강제불임을 강요받는 유일한 집단인거에요. 트랜스젠더라고 모두 성전환수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신체에 대한 위화감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의료적 처우도 각각 다르게 해야한다는 것이 의료계 입장이거든요. 호르몬만 맞더라도, 그걸 transition이라고 하는데 성전환이 이미 많이 된 상태인데, 신분증의 표시와 실제 외관이 달라서, 심지어 투표소에도 못 가고, 채용과정에서 불이익도 당하고, 은행, 병원 같은 데에서도 본인 맞냐고 물어보는 등 차별이 심각해서, 성별정정요건을 완화하는 공익소송을 한거에요. 저희는 대법원까지 갈 줄 알았는데, 다행히 당시 서울서부지법원장이었던 강영호 법원장이심문기일에서 진지하게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인용결정을 하였어요. 그 이후 기사화가 되면서 비슷한 상황에 있는 트렌스젠더분들이 정말 4-50명이 모이고, 법원에 성별정정신청을 많이 했어요.

 

: 이후에 다른 법원에서는 외부성기수술 없는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신청이 어떻게 되었나요?

 

: 지금 다른 곳에서도 인용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인천지법 부천지원, 서울가정법원에서도 인용되는 경우가 있고요. 그런데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도 법원장이 바뀐 이후로 기각이 되는 경우도 있어요.

 

인터뷰 도중에 차를 빼달라는 전화가 와서 인터뷰와 녹음은 잠시 멈추어야 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화가 온 순간부터 녹음은 중지되어 있었습니다. 차를 빼는 동안 동성결혼에 대해 송연주 활동가가 열심히 인터뷰를 나누었지만 기록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은 전적인 인터뷰어의 과실으로, 나중에 장서연 변호사님이 다른 기회에 더욱 상세히 밝히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이제 민변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민변 소수자인권위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계신데, 위원장으로서 위원회 활동을 자평한다면 어떠신가요?

 

답 : 민변 소수자인권위가 출범한지가 이제 5년인데요, 앞으로 민변 소수자인권위원회가 더 발전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입위원들이 민변에 가입할 때 관심 있는 위원회로서 지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희망법도 민변 소수자위에서 만나서 결성이 되었고, 소수자위는 젊은 위원회고 앞으로 활동이 점점 더 확대되고 강화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 이런 질문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민변의 위원회 중심적인 활동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이 있을까요?

 

: 위원회 회의만으로는 실질적인 업무를 함께하기가 힘들고, 예를 들면, 동성결혼소송 변호인단처럼 팀을 구성해서 같이 일할 수 있죠. 신입변호사님들 중에서는 근무시간에는 시간을 내기 어렵고 근무 외 시간을 별도로 내야하고, 보통 보면 3년차까지 제일 바빠서 다른 활동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소수자위 활동도 그런 어려움도 있는데, 그런 부분들은 앞으로 괜찮아질 거라고 봐요.

 

: 이제 공감에 들어오신지 8년이 다 되어가시는데요, 보통 인권변호사를 지망하는 경우 공통적인 특징이 있나요? 또는 인권변호사로서 가장 오래 남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까?

 

 : 공감 변호사나 민변 변호사나 다 꾸준히 하지 않나요(웃음). 제가 보았을 때는, 민변에 가입한다는 것 자체가 인권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을 갖고 법조생활을 하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민변에 일단 가입하라고 권유하고 싶고. 저는 사실 민변이 되게 좋은 울타리라고 생각해요. 제가 변호사 시작할 초창기에 2008년 미국소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있었어요. 거기서 연행된 모든 사람들에게 민변 변호사들이 접견을 갔다는 것과 몇 년 후까지 사건을 지원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2009년 용산참사나 동성결혼 소송을 민변 선배들과 함께 수행하면서 그런 경험들이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그래서 신입 또는 후배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일단 나오시라는 거에요. 처음에는 민변 활동을 하기에 좀 어색하죠. 저도 민변 송년회 나가면 어색해요(웃음). 하지만 자주 나오다 보면 소속감도 느끼고 친근함도 느끼는 것 같아요.

 

: 잘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민변에 계시는 동료 및 선·후배 동기 분들에게 결합 요청을 하시고 싶으시거나, 또는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 2007년 민변에 처음 입회할 당시와 지금은 성소수자 이슈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2014년 서울시청 무지개 농성 당시 (민변 결성을 주도한) 박원순 시장을 상대로 농성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민변에서 적극적으로 연대와 지지결정을 했었거든요. 그리고 외부적이고 정책적인 변화보다 민변 내부의 문화가 바뀌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이성애 중심적인 문화라든가… 민변 안에서도 처음만나면 결혼했는지 물어봐서 불편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민변 문화도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최근에 민변 집행위원회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을 정례화한다고 해서, 제가 ‘성희롱’의 개념에 대해 여성에 대한 성적 괴롭힘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에 대한 비하, 괴롭힘 등 인권감수성을 포괄적으로 담았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는데, 이런 작은 변화들처럼, 민변도 성소수자 및 소수자의 인권 감수성에 관해 점점 변화하고 있고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점심시간을 포함한 인터뷰 시간이 두 시간이 훌쩍 지나고, 뒤늦은 점심식사를 제안했지만 장서연 변호사님은 오후 재판일정 때문에 점심식사도 못 하고 바로 일어났습니다. 돌아오는 서울 시내의 풍경은 마냥 바쁘고 평온했지만, 장서연 변호사님의 말씀과 고민들이 계속해서 묵직하게 남아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말 없는 동물들과 말 못할 외국인들, 말없는 듯하지만 우리 곁에 엄연히 존재하는 소수자들의 대변을 위한 장서연 변호사님의 열정에 많은 이들이 영감을 얻고 함께했으면 합니다.<끝>

 

 

 

목, 2015/11/26-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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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연일 국민안전처의 폭염경보 안내문자가 울리는 대구입니다. 날씨만큼 그동안 대구지부의 활동도 무척 HOT했습니다.

민변 대구지부 활동 (2016년 하반기~ 2017년 상반기)

1. 박근혜 퇴진요구 대구시국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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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 17. 지부는 자체적으로 시국관련 좌담회를 열어 회원(18명)들이 모여 논의를 걸친 끝에 「박근혜 퇴진 대구시민행동」 소속단체로 활동하기로 결정, 이후 대구촛불집회에 총 17차례 참여하였습니다. 최봉태 변호사님께서는 12. 17. 광주시국촛불대회에 참가하셔서 광주시민들 앞에서 발언을 하셨습니다.

2. 지부 송년회 (201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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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소년 선거권 확대를 위한 위한 토론회 및 헌법소원 청구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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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부 봄 야유회 (2017. 4. 29./ 경남 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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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에서 봄 야유회를 오랜만에 개최하였습니다. 4. 29. 회원13명, 가족 17명
으로 해금강, 외도 관광, 옥포해전 기념관 관람 등 알찬 시간을 보냈습니다.

5. 성주 소성리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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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 성주 소성리 수요집회 방문에는 지부회원과 함께 이용수 할머니께서 참석했으며, 주민들께서 정답게 맞아주셨습니다. 성주 소성리 주민들께 지부에서 준비한 물품(반찬)을 전달해 드렸습니다.

6. 지부 총회 (2017.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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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창녕 정재형 변호사님 전원주택에서 지부 총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신입회원 백수범(변시 4회), 예현주 변호사님(변시 3회) 환영회도 함께 진행하였습니다. 회원들 간의 덕담이 오가고 멋진 노래가 어우러져 두고 두고 기억에 남는 총회였다지요^^

7.「흉터의 꽃」 김옥숙 작가 북콘서트 개최 (2017.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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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태 변호사님(소송대리인단 단장)께서 중심이 되어 지부에서는 미국 정부와 원폭제조사, 한국 정부를 상대로 오는 8. 3. 대구지방법원에 원폭피해 조정신청서를 제소하고자 합니다.
이에 앞서 원폭피해자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과 공동주최로 여론 확산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 지난 7. 6. 대구시민공익활동지원센터 2층 상상홀에서 이번 조정신청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흉터의 꽃」 출간을 맞아 작가인 김옥숙씨를 모시고 북콘서트(대담: 예현주 변호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번 조정 신청을 시작으로 원폭피해자들의 치유와 권리구제를 위한 법적 투쟁을 시작하며 종국적으로 원폭 피해자에게 정의가 회복되고 나아가 핵무기 없는 세상이 오기를 기대하며 전국의 민변회원 분께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이상 민변대구지부의 2016년 하반기~ 2017년 상반기 소식을 마치겠습니다.

월, 2017/07/2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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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덥던 한 더위가 지나고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제법 묻어 나오는 계절이 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대구지부입니다. 그동안의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1. 성주 사드TF팀 결성

지난 7월 13일 국방부에서 주한미군 사드배치 지역으로 경북 성주군 성산포대를 선정 발표하였습니다. 성산포대 배치에 성주 주민들이 격렬하게 반발하였고 7월 15일에 는 사드 성주배치 반대시위 도중 국무총리 탑승차량 특가법 위반 사건 등 여러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사드 성주배치 반대 대책위원회에서 도움을 요청하였고 대구지부에서는 7월 18일 저녁 집행부를 비롯한 지부 회원들이 함께 성주 촛불집회에 다녀왔습니다. 경찰소환 대상자가 확대되는 상황에 사안을 신중하게 받아들여 대구지부는 성주 사드TF팀을 결성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8월 12일 ‘사드배치 반대 대경지역 사회인사 815인 선언’에 지부 회원 16명 연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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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월 월례회 행사

5월 20일 경북 창녕군에 있는 정재형 변호사님 전원주택에서 신입회원 환영회 및 친목행사로 월례회를 가졌습니다. 회원 15명 참석하였으며, 도심을 벗어나 탁트인 공간에 오니 마치 MT온 대학생으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습니다.

신입회원 김무락 변호사님(변시 5회), 박정민 변호사님(변시 4회)의 당찬 입회동기와 장승혜 변호사님(변시 2회)의 노련하고 솔직한 입회의 변이 이어졌습니다.

아쉽게도 참석 못하신 김 설 변호사님(변시 5회)을 포함하여 드디어 대구지부가 회원 30명이 되었습니다. 짝짝짝!

이후 전임 인권센터장 정재형 변호사님께 감사패와 선물을 전해드리며 그간의 노고에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사정상 못오신 전임 지부장 남호진 변호사님과 사무국장 박성호 변호사님께는 추후 전달하기로 약속하며 월례회를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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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도 345kV 송전탑 반대 소송사건 경과

지난 2014년 7월 청도 삼평리 송전탑 공사에 항의하다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기소되어 2015년 6월 9일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던 청도 송전탑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최** 씨(박경찬 변호사님) 항소심에 이어 2016년 6월 9일 대법원에서도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4. 성상희 변호사 대경 전단협 운영위원장 선출

대구지부와 연대활동을 하고 있는 대구경북 전문직단체협의회(이하 대경 전단협) 운영위원장에 4월 23일 성상희 변호사님께서 선출되셨습니다. 대경 전단협 활동에 의욕적으로 참여하시고 운영위원장으로서 모범을 보이고 계십니다.

지난 8월 26일에는 각 단체 회원들의 상호교류 활성화를 위하여 전체회원 모임 행사를 추진하였습니다. 46명에 이르는 최대 인원이 참석하여 앞으로 연대활동에 힘을 실을 수 있는 방안 등을 논의하였습니다.

이상 대구지부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16/10/05-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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