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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하경 변호사, 수성구의 기타리스트가 대한문의 변호사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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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하경 변호사, 수성구의 기타리스트가 대한문의 변호사가 되기까지

익명 (미확인) | 목, 2016/12/29- 16:52

타이틀

민변 자원활동가 작성

공익인권변론센터 김시은, 박지아, 서영우

국제팀 양진희

출판소통팀 이재임

언론연대팀 정원영

지난 밤 너무 기대한 탓일까요, 늦잠을 잔 나머지 서둘러서 서초동의 휴먼사무실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세이프. 여유롭게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준비한 인터뷰 질문지를 눈으로 훑어보았습니다. 민변 자원봉사자들이 준비한 질문들은 대개 ‘현장’과 ‘노동인권’에 대한 것들입니다. 미리 인터넷으로 검색해 찾아본 류하경 변호사는 ‘현장에 익숙한 노동변호사’로 보였습니다. 구글 검색창에 류.하.경.이라는 세 글자를 적어 넣으면 ‘삼성건물 못 들어가는 변호사’라는 기사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삼성건물 경비원마저 익히 알고 있을 정도로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연대하는 분이라고요. 인터뷰가 진행된 날, 류하경 변호사는 ‘대한문 집회’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민변 자원봉사자들은 류하경 변호사가 ‘현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노동변호사’가 되기까지 어떤 고민과 실천을 해왔는지 엿보고 왔습니다.

류하경(이하 류) : 뭐 저 같은 사람을 인터뷰하러 먼 데까지(웃음).

박지아(이하 박) : 변호사님, 자신을 한 마디로 소개하신다면 어떻게 하실 수 있을까요?

류 : 한 마디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길게 쓰라고 한다면 밤새도록 쓸 수 있는데. 저는 강아지를 좋아하고, 기타 치는 걸 좋아하고, 자전거 타는 것도 좋아하고, 운동 좋아하고, 그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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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 현장에서도 기타를 많이 치지 않으셨어요?

류 : 현장에서도 많이 치죠. 내가 이러려고 기타를 배웠나. (웃음) 기타를 오래 쳤어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치고 있어요. 저는 홍대에서 밴드하려고 신촌-홍대에 있는 대학 가려고 공부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올라오니까 나쁜 선배들이 뭔가 주면서 ‘이거 한 번 읽어볼래?’라고 하고, ‘수요일에 뭐 해?’라고 물어서 ‘별거 없는데요’ 그러면 ‘그럼 정문 앞에서 봐.’ 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정문 앞으로 나가면 투쟁하고 있고.(웃음) 그래서 밴드의 꿈을 접고 이렇게 살고 있죠. 지금은 사무실에서 일렉 기타를 쳐요. (류하경 변호사가 기타를 꺼내 들고 나옴. 일동 함성)

밴드를 꿈꾸던 학생, 학생운동의 현장으로

박 : 학부 때 ‘나쁜’ 선배들이 이리저리 데려갔다고 하셨는데, 그걸 계기로 노동운동에 관심이 생기신 건가요?

류 : 그렇죠. 저는 1학년 때부터 학생운동을 했어요. 집회의 기초를 1학년 때 마스터했죠. 2학년 때는 학교 안에만 있기보다는 진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같이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책은 많이 보잖아요. 하지만 책은 종이에만 머무는 거니까 실제로 빈민, 농민, 노동자를 느끼고 싶더군요. 그래서 2학년 때 일산의 아파트촌에서 철거촌 투쟁을 하면서 철거민들과 6개월 정도 살았죠. 그리고 군대 가기 전까지 학회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정치경제학 학술 동아리.(웃음) 공부도 하고 술도 마시는… 그래서 학점은 이제…(웃음) 저는 늘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우리 학교 등록금이 비싼 이유는 정치경제학 동아리를 하라고 그런 거다. 정치경제학 공부를 하지 않고 졸업한다면 대학 등록금비를 헛되게 쓴 것이라는 헛소리를 남기면서. (웃음) 제 대학생활의 절반은 정치경제학 학회였고 절반은 투쟁 현장이었고. 노동조합에서 학생들과 연대하는 활동들을 많이 했어요.

박 : 청소노동자 조합 운동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류 : 군대 제대하고 복학을 했는데, 학생 사회가 너무 경직되어 있는 거예요. 대학생 운동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학생 운동을 하는 친구들은 공부를 우선으로 해요. 공부도 좋지만 현장 투쟁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진짜 운동이거든요. ‘다 불태워서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견학 하듯 투쟁 현장 나갔다오길 반복하고, 이렇게 일시적 단편적인 운동만 계속 이어지구요. 그런데 현장 경험이 일천하면 책을 읽어도 한계에 빨리 봉착하게 돼요. 우선 상상력이 그만큼 낮아지고, 똑같은 책을 읽더라도 노동자로서 살아본 사람이 읽는 거랑 대학 와서 마르크스 서적만 보는 사람이 읽는 거랑 그 책의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또 책을 읽었을 때의 변화도 달라요. 실제로 땀 흘려서 노동하고 내 힘으로 투쟁해서 쟁취해본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때 보여줄 수 있는 변화의 폭과 양은, 계속 책만 들고 팠던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삶의 변화와는 천지차이예요.

내가 주체가 되어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가는 운동에 대한 목마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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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학생운동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내 인생의 경험을 쌓기 위한 운동(이었던 것 같아요). 학생운동하면서도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이런 생각을 은연중에 하거든요. 특히나 학생 운동을 하는 시기에는 그런 욕망이 커요. ‘이 운동을 하면서 내가 성장해야지’, ‘내가 여기 가서 뭘 배우고 나중에 좋은 사람이 되어서 사회에 기여를 해야지’, ‘직접 가서 눈으로 목격해야지’와 같이. 매번 학생 운동의 (대상)이 타자화되는 것 같았어요. 우리가 주체가 되는 운동은 등록금 투쟁 밖에 없는데, 매번 그것만 할 수는 없잖아요. 사회적인 연대 투쟁이란 역사와 사회를 크게 바꿀 수 있는 운동이잖아요. 당사자 운동으로서의 등록금 투쟁이나 얄팍한 연대 활동 말고,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게 없을까하는 그런 목마름이 있었어요.

일상과 주변으로 파고들어간 투쟁 청소노동자 어머니, 아버지와 만나다

제대해서 보니까 학교에 비정규직 문제가 이슈가 됐죠. 그때가 2007년이었는데 이랜드 투쟁을 비롯한 비정규직 투쟁은 2000년대 초반부터 계속 있었잖아요. 운동을 운동답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학교 안의 경비 노동자와 청소 노동자분들이야 말로 우리 바로 옆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인데 멀리까지 가서 연대할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제 생각에는 우리 곁에서 투명인간처럼 지나가는 어머니들, 아버님들이 열악한 처우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인데, 아직 조직화도 안 되어 있고 최저임금도 못 받고 계셨죠. 이런 분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연대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같은 학교에서 다니는 학생들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비정규직 된 지가 80년대 후반부터라고 하더군요. 그러면 그동안 ‘20년이 지났는데 대학생들이 뭐하고 있었나?’ 화가 나더라고요. 매일 ‘노동해방, 신자유주의 철폐’와 같은 거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막상 바로 옆에서 청소하시는 어머니들, 학생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하기 위해 도와주시는 가족과 같은 분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왜 한 번도 학생들이 문제제기 못했을까, 이분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활동들을 왜 다른 분들이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활동을 시작했죠. 거의 수업을 안 들어갔어요. (웃음)

박 : 들어갈 시간이 없었겠네요.

투명인간교내 청소 노동자와의 마주침, 그리고 단 하나의 목표를 세우다.

류 : 학교에 청소노동자 휴게실이 있더라고요. 올라가는 계단 아래를 보면 그 옆에 벽이 있고 문이 하나 달려있죠? 우리는 그 문을 창고라고 생각하잖아요. 그 문을 열면 그 안에 사람이 앉아있어요. 정말 좁아요. 그 문을 열었을 때 무척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한 번 찾아가겠다고 청소하시는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물어봤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학생들이 말 걸면 처음에는 ‘이렇게’(손을 내저었다) 하셔요. 현장 소장이라는 사람이 아주머니들에게는 전두환이나 아이히만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학생들과의 접촉이 발각되면 혼납니다. 미리 싹을 잘라놓는 작업이 있었죠. 그럴 땐 시간이 필요하죠. 인사도 계속하고 음료수도 먼저 갖다 드리고. 그렇게 마음이 열고 난 뒤 찾아갔는데 ‘그 문’이 있었어요. 문을 열어주시는데 어머니가 앉아 계시는 거예요. 들어가니 작지만 예쁘게 꾸며놓으셨어요. 손주들 사진 붙어 있고. 본인 방처럼, 소녀 방처럼 꾸며 놓으셨더라고요. 그걸 보고 대단히 놀랐어요. 누군가의 어머니고 할머니고 부인이지.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 어머니랑 다른 게 없는 분 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분들을 투명인간처럼 지나쳐 보내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분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거잖아요. 조그만 공간에서 이렇게 생활하시는 거면 ‘임금 수준도 형편없고 복리 후생도 말도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죠.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열정이 많이 생기더군요. 처음부터 노동조합 조직과 같은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건 아니에요. 하지만 졸업하기 전에는, 정말 이분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고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가장 밑바닥에 있으니까. 학생들이 일종의 교두보 역할을 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업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나는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이분들의 삶이 변화된 모습을 내가 봐야겠어.’ 라는 마음으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진짜 민중을 만나는 시간 청소노동자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울고 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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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건물마다 다 돌아다녔는데 하나같이 사정이 열악했어요. 제가 연세대학교를 나왔는데 건물도 엄청 많고 캠퍼스도 되게 크잖아요. 그래서 제가 스쿠터를 샀어요. 타고 다니면서 점심을 3번, 4번씩 먹었어요. 왜냐면 어머니들이 마음을 열려면 밥을 같이 먹어야 해요. 사람은 옳은 사람이나 옳은 이야기를 안 들어요.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듣지. 가르치려고 하면 안 되고 일단 친해져야 해요. 목적의식을 갖고 친해져서도 안 되고. 그냥 이분들과 정말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어요. 운동을 해보니 마음을 얻고, 친구가 되고, 비를 같이 맞고 해야 서로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거예요.

저도 많이 울었어요. 만나서 이야기 나누면 대부분 우셔요. 연세가 60대, 70대이신데 한국전쟁 때 태어나셔서 힘든 역사를 거쳐 온 분들이에요. 학생 운동하는 친구들은 자신들이 기억하는 ‘투쟁의 역사’ 같은 역사가 진보적인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그 역사도 엘리트의 역사에요. 우리도 사실 오만했지요. 학생운동사, 노동운동사의 노동조합이 있는 ‘제조업-대공장’의 남성 노동자는 형편이 그나마 나은 거지요. 그리고 한국 현대사, 정치사, 4·19, 87혁명과 같이 큰 덩어리 중심으로 공부했을 뿐이지, 민중사에 대해서는 굉장히 무지해요. 그런데 청소노동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자체가 민중사예요. 이분들은 6·25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중산층이 되지 못했어요. 대개는 계속 빈민으로 살아오신 분입니다.

어머니들 우리 이제 큰 물고기가 됩시다” – 청소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조직을 돕다

그 분들의 이야기를 6, 7개월 동안 들었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서로서로는 몰라요. 건물이 다 분리되어 있고, 청소 하시는 동안에는 다른 건물로 가는 게 금지되어 있어요. 그리고 다른 건물 아주머니랑 퇴근할 때도 말하면 안 되고 그게 적발되면 징계를 받게 돼있어요. 현장 소장이 어머님들께 욕도 하고, 성희롱, 성추행, 성상납 등 별 일이 다 있어요. 현장소장이 자기 집, 교회 와서 청소하라고 하면 어머님들이 다 몰려가서 청소해야 했어요. 어머님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자기들끼리 싸워요. 서로 단결이 안 되니까 소장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만 있지, 소장을 상대로 싸우는 건 없어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에요. 그래서 노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설문지를 통해 알아보니 근로기준법 위반, 최저임금법 위반, 폭행, 모욕, 성희롱, 성추행 등이 빈번했어요. 이제 서서히 노동조합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제안했어요. ‘우리는 소장과 1대1로 상대하고 있다. 우리는 소장한테 질 수밖에 없다. 온갖 부당한 행위도 바꿀 수 없다’라고요. 그리고 또 설명을 드렸지요. ‘조그만 물고기가 있는데, 자기보다 엄청 큰 물고기가 나타나면 물고기 모양으로 대형을 짭니다. 그럼 큰 물고기가 겁을 먹고 작은 물고기를 단 한 마리도 못 건드린다.’ 그게 바로 노동조합이라고 말이죠.

오랜 시간 눌려있던 용수철이 튀어 오르다. –노조가 결성되고 청소 노동자가 주체로 거듭나다.

이런 설명의 시간을 가지고, 청소노동자 어머니들을 한 분씩 모셨어요. 건물마다 프락치들을 다 심어 놨는데, 그런 감시의 눈을 피해서 조용히 모임을 시작했죠. 집중적으로 노동조합을 설명 드렸더니 어머님들이 열의가 넘치셨어요. 그동안 눌려있던 용수철이었던 겁니다. 누가 건드려준 사람이 없었던 거지요. 왜냐면 근로기준법이 뭔지, 최저임금이 올해 얼마인지도 모르고, 소장이 ‘툭툭’ 치는 건 넘어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셨던 분들이니까요. 그렇게 간담회를 가질 때마다 어머님들이 성장하시는 느낌이 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어머님들이 스스로 더 높은 차원의 투쟁을 기획하게 되셨어요. 그때 민주노총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08년 2월,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지부 연세대학교 지회 노동조합 출범식을 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노동조합은 숨기고 쉬쉬하며 하면 절대로 안 되거든요. 그러면 우리를 더 무시해요.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장단 명의로 노동조합 출범식 초청장을 교수들에게 보냈어요. 연세대의 한 주체가 (노동조합) 출범식을 한다고 알린 것이죠. 출범식 전날 어머님들이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아 플래카드로 만들어서 연세대 정문부터 본관까지 걸었어요. 다음날 출범식을 크게 했죠. 그렇게 연세대를 시작으로 홍익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로 이어져서 신촌에서 다 같이 집회를 했어요. 노동조합 생기고 불과 한 6개월 만에 이뤄내신 거지요. 학생 한 명을 변화시키는 데는 10년 정도 걸리지만, 청소 노동자분들은 살아온 인생 자체가 이미 노동계급과 투쟁을 체득한 분들이기 때문에, 변화하는 데는 한 순간이었어요.

김시은(이하 김): 정말 짜릿하셨겠습니다.

약자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언덕은 법, 그렇게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다.

박: 학부 때 이런 활동 하셨으면 아무래도 밖에 나가서도 비슷한 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은데, 단체에 들어가지 않고 로스쿨에 진학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류 : 처음에는 노조 조합원처럼 일을 했죠. 그분들 사무실에서 3년 정도 활동을 했어요. 사실 법이라는 게 대단히 중요하죠. 그분들이 배운 사람들한테 가장 기대하는 것도 법이었어요. “이게 불법이야? 소송하면 얼마 받을 수 있어?” 라고 계속 물어보세요. 법이라는 게 존재하는 이유가, 대화의 창구가 없고 그 문턱이 너무 높아서 넘지 못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지요. 물론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형식적으로는 법원에 누구나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노동부에는 누구나 진정을 제기할 수 있잖아요. 즉, 약자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사회적인 장치죠.

그렇기에 ‘배운 사람들’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 같아 처음에는 노무사 공부를 했어요. 노무사 공부를 두 달 정도 하는데 계속 교내 투쟁이 터지니까 집중을 못했어요. 시험도 봤지만 공부를 안했으니 될 리가 없죠. 또 그때 제 나이가 스물여덟 살이라, 집에 뭐라도 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노무사 시험을 그 핑계로 삼기도 했고요. 그런데 주위에서 법으로 노동운동을 지원하고 싶으면 로스쿨이 생겼으니까 거길 지원을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노무사보다 할 수 있는 게 더 많고, 소송대리권도 있으니까요.

우리 사회의 제일 취약한 고리인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이 바로 보편적인 민생 향상을 위한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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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 전반적으로 노동환경이나 노동문제 개선을 위해서 제정이 필요하거나 개정, 수정이 필요한 제도가 있을 텐데, 근본적으로 무언가 바꿀 수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류 : 입법에서는 간접고용문제 해결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란 말이 있듯이 가장 고통 받고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환경을 먼저 바꾸는 게 맞아요. 지금은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고리가 간접고용 비정규직이에요. 역사가 한 단계씩 진보할 때마다 여러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한건 아니었어요. 물론 68혁명 때는 사회 전반적인 혁명이 일어나긴 했지만, 어떤 시대가 한걸음 더 나가려면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고리를 끊어냈을 때 생각보다 큰 변화가 생길 때가 많아요. 그런 것이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운동들이구요.

지금을 사람들은 ‘87년 체제’라고 하지만, 사실상 ‘IMF체제’입니다. 신자유주의 양극화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조금 더 좋은 사회로 갈 수 있어요. 저는 지금의 체제로 인해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면 다음 사회로 넘어갈 실마리가 풀릴 것이라고 봐요. 지금 가장 고통 받고 있는 계층이 비정규직, 그중에서도 직접고용이 아닌 하청업체 소속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이고요.

노동운동이라 하면 뭔가 매니악하고 투쟁의지가 높고 사나운 사람들이 하는 운동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통계를 보더라도 대한민국 국민 절대다수가 노동자에요.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운동은 부분적인 운동이 아닌 보편타당한 운동입니다. 노동운동 자체가 민생운동이고, 국민들의 전반적인 복지 향상을 위한 거시적인 운동이고요. 이 보편적인 복지를 위한 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의 첫 걸음은 ‘노동개혁’에 의해 가장 고통 받고 문제해결이 시급한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해결이라고 봐요. 입법제안은 민변 노동위에서 한 입법제안을 참고 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웃음)

할머니 손 붙잡고 시위현장을 누비고, 노천극장에서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부른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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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영(이하 정) : 학생운동을 열정적으로 하셨는데, 노동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인생의 첫 순간이 있지 않으신가요?

류 : 87년 혁명 때 5살이었어요. 할머니가 운동권이어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간부를 하셨어요. 할머니 손잡고 집회를 많이 다녔고요. 87, 88년 고향인 대구에서도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집회를 많이 했어요. 할머니랑 손잡고 동성로에 나가면 학생들이 교련복입고 최루탄 때문에 코 막으면서 뛰어다니고 그랬죠. 할머니 따라서 시국집회를 많이 다녔고 노동자들의 거친 투쟁의 모습도 어렴풋이 기억나요. 어린이가 상상 못할 인파가 모인 집회에서 발언도 해봤고요. 그게 나중에 역사책에서 찾아보니까 88년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있었던 전교조 집회였어요. 그때 할머니와 버스타고 가면서 할머니가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알려주셨어요. 집회에서 제가 발언하게 됐는데 발언은 안하고 마이크 쥐자마자 ‘나 태어나~’ 라고 노래를 부른 거예요.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함께 소리 지르며 불렀던 기억이 있어요. 그 당시에는 이게 뭔지도 모르고 이 사람들이 왜 싸우는지도 몰랐지만 그 어릴 때의 기억들을 나이를 먹으면서 계속해서 반추해보곤 했어요.

불온서적<>, 그리고 선하고 착한 사람들이 가는 길에 대한 자각

저희 집은 어릴 때부터 책이 많았어요. 삼촌 고모들이 다 학생운동을 해서요. 그때 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집에 있으면 안 되는 책들이 많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장남이어서 할머니 모시면서 대구에 사니까 집으로 불온서적들을 보낸 거죠. 제 방에도 맑스, 엥겔스 이런 책들이 꽂혀 있었고요. <코스모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광주 민중항쟁 다큐멘터리>, <태백산맥> 같은 책들이 있었어요. 또 저희 집은 <말>지를 정기구독했어요. 그래서 한글을 처음 떼었을 때부터 그런 책들을 읽고 자랐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광주민중항쟁 책에서 광주시민들이 칼에 찔리는 사진을 보고 굉장히 놀란 기억이 있어요. 고모 삼촌의 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 옆에서 책 제목들을 엮어서 노래를 부르며 놀기도 했고요. 92년에 ‘윤금이 피살 사건’이 있었어요. 윤금이 씨가 미군들에 의해 성폭행 당하고 살해당한 사건인데, 그게 <말>지에 실려 있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읽고 엄청 충격을 받아 할머니한테 여쭤봤죠. 그랬더니 보지 말라고 하셔서, 더 보고 싶어졌고요. 그 이후부터 <말>지를 정독하기 시작했어요. 중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현대사책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런 역사책들을 접하면서 어릴 때 스쳐 지나갔던 거리의 풍경, 할머니가 했던 말들, 고모삼촌들이 울면서 ‘누가 잡혀갔다’ 이런 얘기하던 기억들도 이해되었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정서적으로, 이렇게 사는 것이 양심적이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어요. 왜 운동을 해야 되는지, 운동의 쟁점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은 자세히 몰랐지만 ‘착하고 선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러다 대학에 입학하니까 불이 붙었고 체질에 맞았지요.

학창시절 수성구의 류하경에서 집회 현장의 기타리스트가 된 지금

저는 학생운동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락밴드를 처음 시작해서 음악에 미쳐있었어요. 음악과 농구가 인생의 전부였어요. 대학 들어가면 무조건 밴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유명한 밴드를 능가하리라고 다짐하며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준비했죠. 고등학교 2학년 학교 축제에서 밴드 ‘범어동 수퍼하이웨이’를 결성했고. 당시 여고에서 많이 왔었는데 배우 손예진도 왔었죠. “손예진이 뭔데!” 이러면서 락밴드 메탈리카처럼 ‘쎈 척’하고 그랬어요. 고2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고, 제인생의 정점은 고 2 축제에서 공연했을 때였어요. 그때 첫 곡으로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을 연주하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이데아’ 로 마무리 했었죠. 그때부터 (인생이) 기울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왔네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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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집회 나가보면 불타오르는 게 있어요. 그래서 ‘수성구의 류하경’이 메이데이 때 가서 ‘바위처럼’을 칩니다. 그때 쌓았던 기타 실력을 농활, 집회현장 그리고 민변 집회에서 발휘하죠. 원래는 락기타, 블루스기타를 치는데 그런 건 민변 변호사님들이 모르시잖아요.(웃음) 그래서 지금 기울고 있는 상태예요.

진지하지만 유쾌했던 인터뷰가 끝나고 류하경 변호사가 말을 덧붙였습니다. 언제 맥주 한 잔 하자고요. 꼭 그러기로 했습니다. 정말이죠? 류하경 변호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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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참여팀] 참여연대의 자원활동가는 상근 활동가들과 손발을 맞춰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10대 청소년부터 일흔이 넘으신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학생, 주부, 직장인, 은퇴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원활동가들의 숨은 활약을 자원활동가 인터뷰를 통해 알려드립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사회를 꿈꿔요.

갑질하는 용이라면 모두가 용이 아니었으면 해요."

 

아카데미 느티나무 자원활동가 이수종님

 

 

참여연대 자원활동가 이수종

아카데미 느티나무 자원활동가 이수종님

 

 

평일 오전이라 한가할 줄 알았던 종로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그 어느 때보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였고, 카페 한가운데 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 우리를 제외한 카페 안의 모든 사람이 너무나 친밀한 분위기에서 수다를 나누고 있어, 처음 본 사이였지만 괜한 마음에 수종님과 친구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Q. 간단한 자기소개
A. 지금 대학에서 경제학과와 정치외교학과를 공부하고 있는 22살 이수종이라고 합니다.
(그게 다인가요) 네! 간단하게. (웃음) 참여연대 공익활동가학교 16기, 정의당 경희대학교 학생위원장, 대학연석회의 간사,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자원활동. 아, 그리고 학교에서 하고 있는 일 중에 하나는 임기가 끝났어요. 내일이면 끝나요. 정말 기쁩니다.
 

Q. 참여연대는 언제 처음 알게 되었나.
A. 공익활동가학교 16기를 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인턴이라고 불렀던 프로그램인데 청년 중에 공익활동가를 꿈꾸는 사람들을 모아서 인권이나 공익활동과 연결된 민생이나 그런 부분에 대한 강연도 듣고, 방학 1달 동안 교육을 받고 자기가 직접 접해보고 싶은 활동을 준비해보는 프로그램입니다.

 

Q. 그 중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이 어느 것이었나
A. 저는 일단.. 술 마시는 것이 가장 좋았구요 (웃음)
(공익 활동 중에 여쭤 본 건데, 사익활동이 아니라) (웃음) 공익 활동 중에는 인권활동가 박래군 선생님이 세월호 추모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잡혀가시기 바로 직전에 저희한테 강연을 하시고, 그 다음날 바로 잡혀가셨어요. 학교에서도 박래군 선생님 강연을 듣기도 했었는데 그게 참 기억이 남아요. 또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는 김만권 선생님 강의가 되게 열정적이에요. 학교에서 정치철학을 배울 때는 교수님이 철인정치를 좋아하시는 분이라 안 맞는 부분이 많았는데 김만권 선생님 강연을 들으니까 되게 재밌더라구요. 그렇게 2가지 강연이 기억에 남았던 것 같아요. 

 

Q. 이런 문제(공익)에 대해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나?
A. 원래 관심을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에 들어와서 선배들 따라 집회에 나가보기도 하고 교지에 글을 쓰기도 하고, 학회를 맡아서 하기도 하고. 계속 관심을 갖고 있다가 3학년쯤 되니 여유가 생기더라구요. 이제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은 상대적으로 줄어들다 보니 외부활동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친구 중에 한명이 저번 겨울에 참여연대 활동을 했었어요. 친구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것도 재밌겠다 싶은 마음에 하게 되었습니다. 
계기가 되었던 건 2008년 광우병 집회 때 인 것 같아요. 그 때는 정말 누구나 다 나가는 분위기였잖아요.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고.
(22살이시면 그 때는..) 네, 중 2때였어요. 그 때는 다 나가는 분위기라서 저도 그랬어요. 그리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노동문제나 청년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어요. 저도 기숙사에 살고 있는데 이게 한 학기씩 등록하는 거라서 당장 다음 학기에는 어디에 살아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될 수도 있고. 내 삶과 바로 직결되는 문제이다 보니까 더 관심이 많이 갔던 것 같아요. 

 

Q. 정의당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A. 학교에서 학생위원회 활동을 하고 있어요. 
(조직 활동인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는데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은 만들어나가고 뭐 그런..조직활동 맞네요. (웃음) 경희대 학생위원회가 따로 있어요. 10~14명 정도? 다들 어떻게 관심을 갖고 와주셔서..주변 사람들이 저보고 정당계에 은수저라고 하더라구요. (웃음) 조직활동을 따로 안 해도 사람들이 가입을 알아서 한다고.
(경희대 정도면 은수저 맞는 것 같아요. 성공회대 같은 곳은 금수저이고) (웃음) 학교 자체에 관심을 갖고 다니는 친구들이 많은 것 같아요. 교양수업에도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수업도 많고. 이런 활동을 하러 나가라고 말하는 수업들도 있어요. 시민활동 같은 것들. 학생회가 목소리가 큰 편이기도 하고, 교양수업에서 인문학이나 시민교육을 강조하는 부분이 잘 형성이 되어있어서 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있는 것 같아요. 

 

Q. 왜 하필이면 정의당을 선택하셨는지.
A. 일단 새정치민주연합 내에서는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겠다고 생각했고, 원외에 정말 훌륭한 정당들이 있지만 그래도 원내에서 이런 목소리를 총화하고 관철시킬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느릴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조금씩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잘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답답한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 당연히 그런 부분은 있죠. 노동당 같은 정당은 색이 확실하고 사안에 대해 뚜렷하게 입장을 가지고 가는 것들이 있는데 그에 비해 정의당은 어떻게 보면 좀 희석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시민들과 더 가까워졌다고 볼 수도 있는 거라서요. 저는 후자에 방점을 찍지만 아무래도 관심 있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전자에 무게가 쏠리는 경우가 많아서 설명하는데 힘이 들 때가 있어요. 좀 더 많은 단어를 붙여야 한다는 것. 그런 부분이 항상 고민이 되요. 또 학교에 학생회부터 노동당, 청년좌파, 알바노조, 청년유니온 이런 곳에서 정말 훌륭하게 활동하고 계신 분들이 많아서 그런 분들과 내가 다른 것이 무엇일까, 차별성이 있나 하는 고민도 많이 되요. 그럼에도 약간은 애매할 수 있는 부분이 달리 보면 확장성이 있다는 말일 수도 있으니까 그 부분을 넓혀나가는데 집중하고 싶어요.
(저도 알바노조 조합원이에요) 저도요. 생각을 곰곰이 해봤어요. 정의당에 10000원, 알바노조에 11000원, 청년유니온에 5500원, 민달팽이 유니온에 5000원, 참여연대에 5000원, 청년좌파에 5000원. 계산을 해보니까 3-4만원 나오더라구요. 아, 어디서 돈이 세나 했더니. (웃음) 어느 순간 도움이 되겠죠, 뭐.
일종에 보험이 아닌가 싶어요. 내가 알바를 할 수도 있고 자취를 할 수도 있고 그냥 막연히 부당한 일을 당할 수도 있는데 이 사람들이 그 때 나와 함께해주겠지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Q. 개인적으로 ‘당사자성’을 획득하는 게 참 힘들었다. 당사자성이 없을 때 하는 고민과 행동은 한계가 느껴지더라, 한계에 탁, 하고 부딪히면 바로 앞에 한 계단을 못 오르겠는 그 느낌. 수종님은 그 부분을 잘 획득하고 계신 느낌이 든다. 
A. 1학년 때는 그런 부분에 부딪힌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이렇게 해서 세상이 바뀌나’하는 고민도 들었구요. 선배들한테 그런 얘기를 많이 하기도 했고. 시위하고 농활가고 이렇게 해서 세상이 바뀔 것이었다면 진즉에 바뀌지 않았을까, 안 바뀐다면 이건 정말 철옹성 같은 건데 철옹성의 경계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고 세상을 바꿔야 하지 않나, 또 그걸 누그러뜨릴 수 있는 건 ‘당사자성’에 있지 않나. 내 문제가 되는 순간 경계 밖에 있던 사람이 넘어오게 될 테니, 그럼으로써 경계가 흐트러지고, 또 그럼으로써 세상이 느리지만 조금씩 바뀌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는 내 문제도 아니고, 세상도 안 바뀌고, 선배들은 안 그런 척 하지만 지쳐 보이고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런 고민을 정말 많이 했었거든요.

 

Q. 그런 고민들이 들 때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훨씬 편했을 것 같은데.
A. 어찌 보면 지금이 도망자의 모습일 수도 있어요. 원래 하던 일들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이게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고 내 알바, 내 자취방, 내 일자리에 관한 문제이고 또 더 많은 사람들을 쉬운 단어로 설득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이것 역시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이전에는 비정규직이나 신자유주의나 큰 문제를 다뤘었어요. 그것들이 같은 맥락에 일들이지만 단어 자체가 비정규직과 알바를 비교해봤을 때 저조차도 비정규직이라는 단어가 너무 거대하게 느껴지거든요. 피부에 와 닿는 단어로 설명하다보면 관심이 간다, 공감이 간다, 가입을 하고 싶다는 친구들이 생기기도 하더라구요.
(결국은 가입이 하고 싶다는 말로 끝나다니, 정말 대단한 당원이시네요) (웃음) 학기 초에 6명으로 시작했는데 이렇게 해서 14명이 넘게 되었으니, 하하. 가입을 한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현실적으로 공무원을 준비하는 친구나, ROTC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가입을 하라고 하기가 힘드니까. 그래도 내 편이 생기는 건 정말 중요한 변화라고 생각해요. 관심이 생긴다는 말로 힘이 되어주는 일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다양한 고민을 하는데 있어서 참여연대가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
A. 네, 16기 공익활동가학교에서도 다양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 사람들의 고민을 하나씩 듣고 이 고민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강연을 들을 때도 강연자 분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물음표가 항상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 물음표를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꾸준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 그 고민을 25명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저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서로에게 참 의지가 되는 존재였어요.

 

Q. 가지고 있는 꿈은 무엇인지.
A. 공정한 기회, 공정한 경쟁, 충분한 패자부활전. 제일 마지막에 방점을 찍고 싶어요. 뭐 어찌 해서 공부하고 열심히 살고 대학을 가고 하는 부분은 꽤 많이 가능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한 번 밀려났을 때 다시 돌아오는 건 아직도 정말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지쳐서 세상의 주변부를 맴돌다 그대로 살아지는 그런 분위기. 여전히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데 아직 까지는 사회구조가 그들을 다시 경쟁으로 이끌어줄 뒷받침을 못해주는 것 같아요. 아, 그리고 ‘탈조선’ 안 해도 되는 사회! 죽창을 안 들어도 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웃음)

 

인터뷰를 마치고 한참을 더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각자의 활동과 경험, 그 안에서 느낀 이야기들을 나누다보니 수종님이 얼마나 이성적이고 동시에 감수성이 깊은지 느껴졌다. 적절한 열정을 가지고 변화를 꾀하려고 하는 그를 보니 ‘평생을 그저 편하게 살기는 글렀다’ 싶은 생각이 피식, 하는 웃음과 함께 스쳤다. 약속을 해야 하고, 행동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사람을 생각해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야하고.. 그가 숱한 고민들 속에서 정해 놓은 그만의 방법들 중 무엇 하나 쉬워 보이는 것이 없었던 탓이기도 하고 그가 참 꾸준할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일 수도 있겠다. 앞으로 몇 년간 방황할 예정인 나에게 수종님 같은 사람은 참 중요한 사례이다. 그가 지치지 않고 살아남아 나를 포함한 누군가에게 죄책감과 채찍질로 다가오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수종님.

 

작성 자원활동가 박영민 (활동가를 위해 활동하고 싶은 대학생)

수, 2015/12/30-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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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위원회 활동 소식

2016. 10. 25. 15개 사립대학의 10,000명의 학생들이 재학중인 각 사립대학들을 상대로 입학금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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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내는 입학금이지만 수업료 외에 왜 내는지, 어디에다 쓰는지 누구도 모르는 거라. 여러 가지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사립대학교의 평균 입학금이 77만원인데, 이는 등록금의 약 10%에 해당되는 금액이고, 학교별로도 천차만별이라 가장 비싼 고려대학교의 경우 103만원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입학금은 법령상 ‘수업료’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입학에 소요되는 비용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적인 청구원인입니다. 고등교육법상 ‘수업료’와 ‘그 밖의 납부금’은 문언적으로 구별되고, 입학금은 ‘그 밖의 납부금’에 해당합니다. 대학등록금에 관한 규칙에서 입학금에 대해서 추가로 규정하고 있는데, 입학금의 징수방법, 징수시기, 반환시기, 반환금액에 있어서 수업료와 전혀 다르게 취급됩니다. 「대학등록금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수업료는 학칙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학점별, 학기별 또는 월별로 징수하나, 입학금은 입학시에 전액을 징수하고, 수업료는 학기 개시일 이후에 반환 사유가 발생하였을 때 일정 비율의 금액이 반환되지만, 입학금은 입학일 이후에는 어떠한 사유로도 반환되지 않습니다. 국민권익위원회 역시 2013년 ‘입학금 산정근거 및 사용기준의 불명확성’에 관하여 제도개선 권고를 하면서 입학금에 대해서 “각 학교는 통상적으로 오리엔테이션, 학생증 발급 등 신입생 관리 시 별도로 소요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입학금을 징수”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즉 수업료가 교육일반에 사용가능하다면, 입학금은 ‘입학’이라는 특정의 목적을 위해서만 징수되고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근거도 없이 책정되는 금액을 신입생들에게 일괄적으로 징수하고 납부하지 않으면 등록을 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부당이득이자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여 이익제공을 강요하는 불법행위입니다. 또한 수원대학교의 등록금 환불 사건에서 법원이 “등록금의 부당 과잉징수가 객관적으로 보아 현저할 뿐만 아니라, 원고들이 위 대학교를 선택하여 입학금을 납부할 당시의 기대나 예상에 현저히 미달함으로써 원고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하였”다는 판시(서울고등법원 2016. 7. 8. 선고 2015나14473 판결)에 근거하여 입학금의 현저한 과다징수에 대한 위자료도 청구하였습니다.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헌법이 보장한 ‘권리’입니다. 그럼에도 대학등록금은 너무 비싸고 이에 따라 교육의 기회는 공정하지가 않습니다. 입학금 반환청구가 대학등록금 부담을 경감시켜 보다 ‘교육’에 충실할 수 있는 등록금에 접근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월, 2016/11/2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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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돌봄으로 가기위한 한걸음

 

인터뷰 : 김남희(참여연대 복지조세팀장)
패널 : 이경민(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윤지영(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배연희(전국요양보호사협회 협회장)
정리 : 이경민(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도입된지 올해로 8년이다. 그러나 제도 도입 초기, 공공 인프라 구축 없이 시행됨에 따라 서비스 공급에 대한 민간기관 의존도가 높았는데 장기요양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열악한 기관은 소멸될 것이라는 정부의 주장과는 다르게 민간기관이 난립하는 등 불법운영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또한 국가 및 지자체의 관리감독 미흡으로 요양보호사의 노동환경 및 처우는 열악했고, 이는 결국 대상자의 서비스 질 저하 문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고령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의 수혜자는 늘어날 것이며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우리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최근 우여곡절 끝에 장기요양에 대한 국가책임강화, 요양보호사의 처우개선, 기관의 회계기준 마련 등을 골자로 한 노인장기요양보험법 개정안 통과를 이끈 숨은 주역들이 있었다. 그들을 통해 현재 장기요양제도를 진단하고, 좋은 돌봄을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았다.

 

자기소개 부탁한다.

배연희 : 현재 전국요양보호사협회 협회장을 맡고 있다. 전국요양보호사협회는 2008년 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되면서 당사자가 주축이 되어 운영하고 있다.

윤지영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윤지영이다. 공감에서는 주로 노동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불안정한 노동자, 청소년, 이주노동자, 중고령 노동자의 노동문제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경민 :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 주로 보건의료, 돌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된지 벌써 9년째이다.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무엇이 있는가?

배연희 : 법과 제도가 여전히 미흡하다. 특히 방문요양 같은 경우, 임금가이드라인이 없어 시급이 다르고 최저임금 수준도 안 된다. 또한 처우개선비가 있지만 여전히 요양보호사에게 지급하지 않은 곳이 많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상자가 사망하거나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요양보호사는 실직하게 된다. 이처럼 요양보호사의 노동환경 및 처우는 굉장히 열악한 실정이다.

윤지영 :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는 사회보험으로 운영된다. 즉, 노인에 대한 요양을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처음 제도를 설계할 때, 민간에 위탁하면서 민간장기요양기관이 필요이상으로 늘어나고 사회보험 누수현상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요양보호사 같은 경우 불안정한 고용의 형태, 강도 높은 노동 등 노동환경과 처우가 매우 열악하며, 전문가임에도 전문가로 능력을 발휘한다기 보다 국가공익파출부같은 처우를 받고 있는데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이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시행 이후,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19대 국회에서 노인장기요양보험법 개정을 추진했었다. 그 과정에 대해 설명해 달라.

윤지영 :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될 때, 정부는 경쟁을 통해 질을 높이겠다고 했으나그 예상은 빗나갔고 민간기관들의 난립, 그로 인한 부정행위, 요양보호사의 처우문제가 발생하는 등 제도가 엉망이 되었다, 그래서 당사자인 요양보호사협회, 여성단체, 노조 등이 모여 제도의 전면개편을 요구하고자 공대위를 2011년에 꾸렸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의 전면개정을 주장했다.

 

처음 제안한 개정안과 통과된 개정안의 내용이 많이 다르다고 하던데...

윤지영 : 개정안을 만들기 전에 요양보호사 및 당사자, 공단, 기관의 이야기를 들으면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으며 설명회도 진행했다. 그리고 1년 가까이 법안을 만들었고 마침내 의원을 통한 입법발의를 했다. 처음 개정안에는 기관 설립 허가제, 국가와 지자체 책임 강화, 요양보호사 및 대상자의 인권보호를 위해 기관장과 대상자의 책무 강화 등의 내용을 담았었다. 그러나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많은 내용들이 빠졌다.

이경민 : 김성주, 오제세 의원이 발의한 기관의 회계기준 마련에 대한 내용과 조정하면서 빠진 듯하다.

윤지영 : 회계기준 마련 안은 좋다고 생각한다. 공대위가 제시한 안 이외 정부가 발의한 내용이 먼저 통과되면서 조정된 것 같다.

 

개정안이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있을 때, 참여연대가 결합했다.

이경민 : 작년 초 노인장기요양보험법 개정안 통과를 위한 연대 요청이 있었고, 그 때부터 참여연대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공대위에서는 일부 반대하는 의원실 및 지역사무실을 찾아다니며 면담을 하고, 피켓팅을 하였고, 참여연대는 입법로비 및 대중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것은 작년 5월 1일 법사위에 안건이 상정되었는데 노동절 행사에 나가서 계속 법사위 결과를 주목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일부 의원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하고, 그 이후 일 년 넘게 법사위에 상정조차 안됐었다. 의견서를 발표하고 법사위 및 보복위 의원들에게 의견서를 보내고, 홍보물을 만들어 의원들 트위터 및 페이스북에 게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19대 국회 마지막 법사위를 앞두고 반대하는 의원의 실명을 거론한 성명까지 발표하기도 했다.

윤지영 : 민간기관들의 반대가 엄청났다. 개정안이 통과 되지 않을 것 같아 의원들에게 편지를 썼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이며 모든 국민의 이해관계가 달려있는 사안을 특정집단의 반대로 법안 통과를 주저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배연희 : 참여연대가 함께 결합해서 의견서도 내고, 기자회견도 하는 등 더 힘을 모을 수 있었다.

이경민 : 개정안이 통과되기 위해 이 전부터 노력한 요양보호사분들과 공대위의 공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한다.

 

실질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양보호사의 노동 현실은 어떠한가?

배연희 : 인터뷰 전에도 요양보호사들과 상담을 했었다. 요양보호사의 노동환경과 처우는 문제가 많다. 최근 최저임금이 높아지면서 요양보호사의 시간은 줄고 노동일수는 늘어 토요일에도 근무를 하게 되었다. 평균적으로 임금이 5~8만 원정도 줄었다고 한다. 요양보호사들의 평균임금 55만 원인데 여기서 더 줄었다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누가 요양보호사에 대한 직업을 전문직업으로 여기겠는가. 이와 같은 일은 대부분 기관에 대한 관리감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요양보호사의 처우 등에 대해 기관의 재량에 따라 운영되는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그리고 요양보호사의 처우와 노동환경이 열악하고 기관의 이익추구는 결국 서비스 질 저하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인권침해 사례도 많다고 들었다.

배연희 : 방문 요양은 좁은 공간에 여자든 남자든 어르신과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장기요양등급 3급 같은 경우, 혼자 목욕을 시킬 경우가 있는데 그 때 성희롱이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일에 대해 기관에 건의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왜냐면 대상자가 끊기면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일을 하면서 발생하는 일에 대해 요양보호사를 보호하는 창구가 없다.

윤지영 : 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사회에서 여성의 돌봄과 헌신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 제대로 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허드렛일이라고 생각한다. 시설에 근무하는 요양보호사들은 장시간 노동을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재가는 근무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임금이 보장되지 않는다. 현재 시간당 수가가 정해져 있는 바우처 방식이 문제인데, 노동에서 호출형 노동이라고 표현한다. 기관은 공급자로서 안정적인 노동 유지, 그에 대한 대가 지불 등을 해야 하는 책임이 있지만 이에 대해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대부분 요양보호사에게 책임을 떠맡게 된다.

이경민 : 그 뿐만이 아니라 인권문제,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심각하기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면, 사회복지사가 방문상담을 할 때, 특히 남자인 경우 2인 1조가 되어 움직이는 경우가 많은데, 요양보호사에게는 그런 가이드라인이 없다, 성폭력, 성희롱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배연희 : 이런 환경에서 좋은 돌봄이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좋은 돌봄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윤지영 : 시설 같은 경우, 24시간 맞교대 근무가 많은데, 밤은 휴게시간으로 잡아 임금으로 주지 않는다고 들었다. 사실 밤에도 대상자의 상태를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업무를 하고 있는데 말이다.

배연희 : 업무도 굉장히 강도가 높다. 어르신들의 몸무게가 70-80kg인 경우가 많은데, 체위변경을 하려면 50대 이상의 요양보호사가 온몸으로 노동을 한다. 그래서 요양보호사들이 근골격계질환을 비롯한 산재직업병 등이 많이 발생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요양보호사의 출퇴근시간을 체크하는 RFID를 적용하고 있다. 개인정보 유출이 아닌가 싶은데, 이것은 위치추척이고, 통신비 2000원도 요양보호사가 지불해야 한다. 동의를 받고 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설명과 숙지 없이 하는 것이 문제이다.

윤지영 :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이나 노인복지법도 그렇고 요양보호사의 책무는 얘기하면서 그들을 보호하는 제도는 미비하다. 그나마 이번 개정안을 통해 일부 요양보호사를 보호하는 제도가 시행 될 것인데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여전히 미흡하지만 개정안이 통과되었는데, 앞으로 우선적으로 보완되었으면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윤지영 : 법이 애매하게 통과된 부분이 있어 아쉽다. 그래서 앞으로 기관장의 책무, 난립하는 민간기관의 통제, 국가와 지자체의 책무강화 등의 내용 등을 다시 정리해서 제안해야 할 것 같다.

배연희 : 요양보호사협회 협회장이기 때문에 요양보호사의 노동환경과 처우개선을 위해 제안할 수밖에 없다. 임금가이드라인을 통해 적당한 노동과 합당한 임금을 요양보호사들이 받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요양보호사의 책무 이외 업무를 명확히 하여 요양보호사가 전문가로써 사회적으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국가 및 지자체에서 업그레이된 교육을 하고 양질의 서비스를 대상자에게 제공할 수 있길 바란다.

이경민 : 이번 개정안이 여전히 미흡한 부분은 있지만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씩 바꿔나가길 바라며 많은 인내심이 필요할 것 같다. 무엇보다 재가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각 구마다 공공재가서비스센터가 설립되어 운영의 본보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바우처 방식의 문제 등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스템 부분의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좋은 돌봄은 무엇일까?

윤지영 : 좋은 돌봄은 누군가의 희생을 기반하면 안된다. 돌봄의 가치를 인정하고 정당한 보상이 주어져야만이 성립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요양보호사 및 대상자를 존중하는 가운데 좋은 돌봄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배연희 : 고령화 시대에 요양보호사들이 어르신들의 삶을 돌봐주고 있다. 핵가족화되는 사회 속에서 요양보호사의 역할은 크다고 본다. 따라서 그들의 전문성을 인정할 때, 대상자에 대한 서비스 질도 높아지고 좋은 돌봄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요양보호사의 노동이 귀하게 여겨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경민 : 늙는다는 것은 절망과 좌절이 아니다. 늙음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이에대한 책임을 사회가 함께 져야 한다. 그래서 사회보험으로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시행되고 있지만 제도만 있을 뿐 내용은 여전히 허접하다. 돌봄은 누군가의 희생이 아님을 우리가 인식해야 하며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이 더 강화되어야 할 것 같다.

금, 2016/07/01-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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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대위 소식

 

1. 월례회의

6.15. 국제연대위 월례회의가 열렸습니다. 장영석위원장을 비롯한 회원들이 참석하여 연대위 활동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특히, 방서은변호사님이 신입회원으로 참석하셨습니다. 감사드리고, 열정적으로 활동하실 것을 기해합니다.

 

2. 탄저균 대응팀 활동

언론보도로 드러만 미군의 탄저균 배달사고(?)에 대응하기 위한 민변내 대응팀이 미군위, 환경위, 국제연대위 공동으로 결성되고 회의를 가졌습니다. 22일 2차 회의에서 오산공군기지 내 탄저균 반입.실험 대응과 관련한 상황공유, 이와 관련한 타국의 대응, 유엔 및 BWC 국제협약 등의 활용방안, 소파(SOFA)상 검역 문제와 관련한 사항 등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본 회의에 국제연대위의 회원분들이 다수 참석하셨습니다.

 

3. 베트남 평화기행

아시아인권팀은 이번 여름 7.26.부터 7일간의 일정으로 베트남 평화기행을 떠날 준비에 한창입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 발생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현장과 각종 박물관을 둘러보고 희생자 및 관련자들을 면담하는 등의 주요일정으로 준비중입니다. 이번 평화기행에는 과거사위, 미군위 등 다른 위원회 소속 회원님들도 참여하여 총 15명이 참가할 예정입니다.

 

4. 미얀마 공동세미나

아시아인권팀은 7.23부터 4일간의 일정으로 미얀마 양곤에서 미얀마의 젊은 변호사들과 노동문제, 국제인권메커니즘 활용, 그리고 법률NGO 활동에 있어 어려움과 해결책 등에 대한 세미나를 진행합니다. 본 공동세미나는 미얀마변호사네트워크와 공동으로 주최하고 진행하는 행사로 작년에 이어 두 번째 행사입니다. 아시아인권팀에서는 팀장 성상희변호사를 포함한 세 명의 변호사가 함께 할 예정입니다.

 

5. 탈북자인권감시팀

지난 23일 탈북자(새터민) 인권 모니터링을 위해 작년 말에 결성된 탈북자인권감시팀의 회의를 가졌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공부모임의 성격으로 운영되고 있고 3~4차례의 세미나를 거쳐 본격적인 모니터링과 활동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6. 자유권위원회 국가심의 준비

국제연대위는 국내인권시민단체로 구성된 국제인권네트워크에 참여중입니다. 현재 자유권위원회 한국심의 대응에 함께 참여하고 있으며 간사단체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올 10월말에 예정된 한국정부에 대한 심의에 대응하기 위해 7월1일 인권시민사회단체들이 다시 모일 예정이며, 이 때 구체적인 준비일정을 논의하여 확정될 예정입니다.

 

그 밖에 통합진보당 해산과 관련하여 자유권위원회에 제출하게 될 개인청원이 준비중이고, 국정원의 법관임용에 면접을 본 사안에 대해 법관독립을 위한 특별보고관(유엔특별절차)에 진정서를 제출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25일 유엔인권최고대표와 한국시민단체 간의 간담회에 참석하여 질의하고 인권현안에 대해 논의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금, 2015/06/26-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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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평화인권기행

 

– 강성헌 회원

  1. 기행에 앞서

7명의 회원과 함께 2016. 7. 23. ~ 8. 1.까지 ‘2016. 민변 국제연대위 아시아인권팀(팀장 이준형 회원) 캄보디아 평화인권기행 – 한국계 기업의 노동현실 실태 조사’를 마치고 이 글을 쓰는 저는 강성헌 회원입니다. 팀의 ‘활동’을 담은 정식 보고서는 현재 준비 중이고, 이 글에는 팀의 ‘느낌’을 부담 없이 담으려 합니다.

매년 여름 진행되는 아시아 인권기행을 몇 차례 하신 분들도 계시나, 저는 이번이 첫 동행이었습니다. 사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의미 있는 활동 반, 친목과 관광 반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고 동기 회원과 함께 덜컥 합류 신청을 했습니다. 준비회의에 가서 처음 받은 느낌은 ‘내가 너무 순진했구나’ 였지만, 발을 빼기엔 애매해져 버린 터라, 그냥 함께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참 잘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입니다.

  1. 캄보디아의 슬픔, 크메르 루즈

토요일 밤 늦게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는데, 다음 날은 일요일이라 특별한 일정 없이 ‘투얼 슬렝 박물관’을 견학했습니다(김기남, 김남주, 임재성, 배광열 회원은 여독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일요일 새벽, 2016. 7. 10. 살해당한 캄보디아의 정치평론가 켐 레이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오기도 하였고요).

박물관은 크메르 루즈에 의해 세워진(정확히는 학교 시설에서 ‘전용’된) S-21 수용소를 보존하여 당시의 실상을 보여주는 장소로 사용되는 곳이었는데, 한국어 오디오가이드를 들으며 건물과 층마다 옮기는 발걸음이 참 무거웠습니다. 가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인간이 인간을 학살한 자리에 서서 그 상황을 반추하는 일은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처벌 그리고 종국적 치유를 기원하지만, 제3자가 보기에도 진상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모든’ 학살자들이 역사와 현실의 법정에 제대로 세워진 것 같지가 않으며, 무엇보다 캄보디아 시민들 자체가 잊고 싶은 기억으로 밀쳐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어 무척 슬프기도 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놈펜에 가게 된다면 꼭 들러보아야 할 의미 있는 장소라 하겠습니다.

  1. 캄보디아의 인권 및 노동현실 전반을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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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공식일정은 캄보디아 인권센터에서 활동가(케이티 존스, 영국 변호사)로부터 캄보디아 인권상황 전반을 듣는 자리를 가지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활동가 역시 캄보디아 활동을 오랜 기간 하신 분이 아니어서 ‘깊이’는 많이 느끼지 못했으나, 캄보디아의 현재 정세와 인권 전반을 꼼꼼하게 소개해 주어서 현실과 문제점을 어느 정도 알게 된, 의미 있는 간담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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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만나게 된 사람이 ‘조엘’이라는 호주 출신의 변호사였습니다. 2개월 예정으로 왔다가 내리 5년을 캄보디아의 노동과 인권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서, 세 시간 넘게 캄보디아 노동문제와 관련하여 브리핑 및 질문 답변을 해 주었습니다. 조엘은 노조를 조직하고, 그 힘으로 사용자와 맞서 노동기본권을 확보하기 위해 싸우는 형태의 전형적 노조활동가는 아니었습니다. 대신 캄보디아 노동현실 특히 섬유산업의 특성에 맞춰 ‘발주처’인 다국적 기업들에 압력을 행사하는 등의 방식으로 노동문제를 풀어가는 활동을 주로 한다더군요. 조엘로부터 캄보디아의 노동 이슈에 대한 여러 가지 내용을 듣고, 저희는 조금 더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었습니다.

‘최저임금’과 관련된 내용이 특히 인상 깊었는데요, 우리의 인식과는 다르게 캄보디아는 ‘최저임금’이 사실상 임노동자들의 평균적 임금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그 결정 내역과 파급 효과는 우리 나라의 최저임금과는 아주 다르다 하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저희들의 보고서를 참고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후 3일 동안은, 한국계 기업의 노동실태를 조사하는 데 오롯이 활동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1. 캄보디아 내 한국기업의 노동현실을 살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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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CLC 아 톤 대표(캄보디아 노동총연합, 위 사진)를 만나 캄보디아의 노동문제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저희들이 궁금했던 내용들을 성실하게 답변해 주시더군요. 두 시간 가까이 자리에 서서, 꼿꼿한 태도로 쉼 없이 말씀하시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대표님께 들은 이야기 중 놀랍다면 놀랍고, 하등 이상하지 않다면 이상하지 않은 이야기는 우리의 전직인 이명박 대통령과 관련된 내용이었지요. 캄보디아는 원래 무기계약직이 일반적 근로형태였으나, 이 대통령의 ‘조언’으로 ‘단기(2개월 정도부터) 계약직 근로제’가 최근 몇 년 동안 극적으로 활성화되었다는 것. ‘노동 한류’의 위엄과 씁쓸함을 곱씹으며 CLC 대표와의 만남을 마쳤습니다.

이어 한국계 기업 중 5곳의 노조 위원장들과 만나서, 설문조사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질문/답변을 통하여 한국계 기업의 상세한 노동현실을 조사하고자 노력을 하였습니다. 조사 활동은 회원들마다 분야를 나눠서 진행하였는데요, 임금 및 노동보건 분야는 김남주 회원이, 노동시간 및 고용형태 분야는 박상현 회원이, 결사의 자유 분야는 임재성 회원이, 여성 및 아동노동 분야는 배광열 회원이 맡았습니다. 김자연 회원은 2013~2014 총파업 이후 상황을 정리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 모든 활동의 중심에는 활동을 기획하고, 일정을 조율하고 혼자 영한 통역까지 도맡은 김기남 회원이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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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위원장들로부터 자신들이 속한 기업의 노동현실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설명과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개별 기업의 노동자들을 만나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활동을 수행했습니다. 크메르어-영어-한국어 삼중 통역으로 이루어지는 쉽지 않은 의사소통의 과정이었으나, 각자 맡은 분야의 답을 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회원들을 보면서, 구체적 분야 없이 총무와 식사 정도 맡은 제가 송구해지더군요.

  1. 눈으로 본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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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지대를 돌며 노동자들을 만나다가 퇴근하는 노동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대중교통이 거의 개발되지 않은 프놈펜에서 노동자들은 위 사진과 같이 트럭을 타고 출퇴근을 합니다. 최근 출퇴근 트럭 두 대가 충돌하여 수 많은 노동자들이 사상당한 사고가 있었는데, 제 눈에 보기에도 참으로 위험해 보이는 풍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캄보디아에는, 임금과 노동환경의 문제 못지 않게, 트럭 발판에 올라서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출퇴근을 해야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는, 노동자의 전반적 ‘생존’의 문제가 사실상 원초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환경, 교통 등 기본적인 국가 시스템과 인프라가 전혀 갖춰져 있지 않은 것도 분명해 보였고요. 사실 많이 의아했지만, 나중에 한 한국계기업의 노조 위원장이 준 ‘월급 명세서’를 보고,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월급은 약 334달러였는데, 세금 등 공적으로 떼는 돈은 3.75달러에 불과하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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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방문했던 곳 중 인상적인 곳이라면, 노동자들의 집단 숙소(위 사진)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시내에서 적지 않게 떨어져 있는 공장지대의 특성상, 노동자 일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숙소가 공장지대에 많이 있었습니다. 서너 평 정도의 방 하나에 변기, 부르스타 하나로 구성된 숙소에서 4~5명의 노동자 일가족이 생활하고 있었지요. 방 문 앞에는 최저임금 인상을 촉구하는 스티커가 붙어 있고, 밖에는 빨래들이 걸려 있었고요. 양철 지붕은 캄보디아의 살인적 더위를 제대로 막아줄 수 없었지만, 뛰노는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표정은 우리 아이들의 그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1. 프놈펜과 시엠립, 술잔과 이야기를 나누며

견디기 힘든 열대의 무더위 속에서,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도 시원치 않은 허름한 식당 한 켠에서 조사 활동을 3일 정도 하니 신체적·정신적으로 힘들었지만 모두들 잘 견뎠습니다. 밤마다, 면세점에서 산 ‘좋은 술’과 현지 맥주를 나눠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했고, 현지의 ‘맛집’을 찾아 전통 음식을 먹기도 하였습니다. 캄보디아는 사실 전통 음식이랄 게 많지 않은 나라라고 하지만, ‘아목’, ‘록락’ 등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도 아주 좋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순박한 인상에 친절한 태도를 보여줬고요. 다만, 현지 교통수단인 ‘툭툭’을 타고 가다가 김모 회원이 신상 아이폰을 오토바이 2인조에게 날치기를 당한 것이 아픔으로 남았습니다만, 이후 다들 조심성이 높아져 더 이상의 큰 사고가 없었던 것이 위안이었습니다.

월~목요일 4일간의 공식 일정을 마치고, 금요일에는 현지 국내선을 타고 시엠립으로 향했습니다. 앙코르 와트라 불리는 캄보디아 유적지의 배후도시인데요, 그 규모는 작지만 수도 프놈펜과는 달리 그럴 듯한 국제 관광도시라 하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묵었다는 ‘소카 앙코르 리조트’에 체크인을 하고, 공식 활동을 결산한 후 본격적인 관광에 나섰지요. 펍 스트리트에서 다 함께 피자를 안주로 하여 맥주를 마시고, 야시장에서 소소한 기념품들을 챙기고. 저는 동양 최대의 호수라는 톤레삽 호수로 향했습니다.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여, 그 장관이라는 일몰을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 자체 만으로 훌륭하고 초현실적인 풍광이었습니다. 영어가 되는 툭툭 기사가 꿈이라는 젊은이의 가이드로 톤레삽 호수의 초입을 돌고, 현지 고아들을 교육하는 수상 학교를 들르면서 캄보디아의 아동문제와 교육문제를 고민하기도 하였습니다.

  1. 맺으며, 짧은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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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전날에는 앙코르 유적지를 들러, 앙코르 와트에서 일출(위 사진)을 보고 바이욘 사원과 영화 툼레이더로 유명한 따 프롬 사원을 거쳐 프놈 바켕에서 일몰을 보는 것으로 마지막 날의 관광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월요일 새벽에 인천에 내려 바로 출근해야 했는데,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이틀을 보내고 좀 정신을 차려서 이 글을 씁니다. 체력 관리를 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네요.

단 며칠 동안의 일정으로 캄보디아를, 그 속의 노동 현실을,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의 유적을 다 보고 느낄 수는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받은 느낌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6~70년대 청계피복노조의 노동현실을 국가가 나서서 강제하는 나라, 집단 학살과 전쟁의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못한 나라, 21세기 다국적 노동관계 먹이사슬의 맨 아랫단에서 신음하는 노동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고 친절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들.

캄보디아를 다녀 온 많은 이들이 아동들에 의한 구걸 문제를 많이 이야기해주었지만, 실상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몇해 전 다녀온 회원들도, 예전보다 많이 사라진 것 같다고 했고요. 저임금 노동력을 찾아 공장의 국적을 바꾸길 수 차례, 이제 많은 공장들이 캄보디아에 자리를 잡으며 이제 시민들이 급속도로 임노동자로 편입되는 과정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거지나 극빈층이 줄고 있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나쁘지 않은 것이라고 봅니다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심각한 노동문제는 또 다른 그늘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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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과 다른 회원들은 몇 달 동안 여러 방면에서 캄보디아와 관련된 내용들을 사전 조사하고, 일정을 조율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고생과 노력에 숟가락 하나 얹고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기행이었기에, 무엇보다 죄송스러운 마음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노력들이 실개울이 되고, 샛강이 되었다가 종래는 아시아의 노동문제와 인권현실을 조금이나마 개선하는, 메콩강과 같은 도저한 흐름이 될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애 쓰신 동료 회원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며, 이번 기행에 참가하지 않은 많은 민변 회원님들의 캄보디아와 또 다른 아시아 기행에 대한 관심도 부탁드리며, 짧은 기행문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화, 2016/08/2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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