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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하경 변호사, 수성구의 기타리스트가 대한문의 변호사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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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하경 변호사, 수성구의 기타리스트가 대한문의 변호사가 되기까지

익명 (미확인) | 목, 2016/12/29- 16:52

타이틀

민변 자원활동가 작성

공익인권변론센터 김시은, 박지아, 서영우

국제팀 양진희

출판소통팀 이재임

언론연대팀 정원영

지난 밤 너무 기대한 탓일까요, 늦잠을 잔 나머지 서둘러서 서초동의 휴먼사무실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세이프. 여유롭게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준비한 인터뷰 질문지를 눈으로 훑어보았습니다. 민변 자원봉사자들이 준비한 질문들은 대개 ‘현장’과 ‘노동인권’에 대한 것들입니다. 미리 인터넷으로 검색해 찾아본 류하경 변호사는 ‘현장에 익숙한 노동변호사’로 보였습니다. 구글 검색창에 류.하.경.이라는 세 글자를 적어 넣으면 ‘삼성건물 못 들어가는 변호사’라는 기사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삼성건물 경비원마저 익히 알고 있을 정도로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연대하는 분이라고요. 인터뷰가 진행된 날, 류하경 변호사는 ‘대한문 집회’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민변 자원봉사자들은 류하경 변호사가 ‘현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노동변호사’가 되기까지 어떤 고민과 실천을 해왔는지 엿보고 왔습니다.

류하경(이하 류) : 뭐 저 같은 사람을 인터뷰하러 먼 데까지(웃음).

박지아(이하 박) : 변호사님, 자신을 한 마디로 소개하신다면 어떻게 하실 수 있을까요?

류 : 한 마디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길게 쓰라고 한다면 밤새도록 쓸 수 있는데. 저는 강아지를 좋아하고, 기타 치는 걸 좋아하고, 자전거 타는 것도 좋아하고, 운동 좋아하고, 그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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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 현장에서도 기타를 많이 치지 않으셨어요?

류 : 현장에서도 많이 치죠. 내가 이러려고 기타를 배웠나. (웃음) 기타를 오래 쳤어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치고 있어요. 저는 홍대에서 밴드하려고 신촌-홍대에 있는 대학 가려고 공부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올라오니까 나쁜 선배들이 뭔가 주면서 ‘이거 한 번 읽어볼래?’라고 하고, ‘수요일에 뭐 해?’라고 물어서 ‘별거 없는데요’ 그러면 ‘그럼 정문 앞에서 봐.’ 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정문 앞으로 나가면 투쟁하고 있고.(웃음) 그래서 밴드의 꿈을 접고 이렇게 살고 있죠. 지금은 사무실에서 일렉 기타를 쳐요. (류하경 변호사가 기타를 꺼내 들고 나옴. 일동 함성)

밴드를 꿈꾸던 학생, 학생운동의 현장으로

박 : 학부 때 ‘나쁜’ 선배들이 이리저리 데려갔다고 하셨는데, 그걸 계기로 노동운동에 관심이 생기신 건가요?

류 : 그렇죠. 저는 1학년 때부터 학생운동을 했어요. 집회의 기초를 1학년 때 마스터했죠. 2학년 때는 학교 안에만 있기보다는 진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같이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책은 많이 보잖아요. 하지만 책은 종이에만 머무는 거니까 실제로 빈민, 농민, 노동자를 느끼고 싶더군요. 그래서 2학년 때 일산의 아파트촌에서 철거촌 투쟁을 하면서 철거민들과 6개월 정도 살았죠. 그리고 군대 가기 전까지 학회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정치경제학 학술 동아리.(웃음) 공부도 하고 술도 마시는… 그래서 학점은 이제…(웃음) 저는 늘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우리 학교 등록금이 비싼 이유는 정치경제학 동아리를 하라고 그런 거다. 정치경제학 공부를 하지 않고 졸업한다면 대학 등록금비를 헛되게 쓴 것이라는 헛소리를 남기면서. (웃음) 제 대학생활의 절반은 정치경제학 학회였고 절반은 투쟁 현장이었고. 노동조합에서 학생들과 연대하는 활동들을 많이 했어요.

박 : 청소노동자 조합 운동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류 : 군대 제대하고 복학을 했는데, 학생 사회가 너무 경직되어 있는 거예요. 대학생 운동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학생 운동을 하는 친구들은 공부를 우선으로 해요. 공부도 좋지만 현장 투쟁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진짜 운동이거든요. ‘다 불태워서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견학 하듯 투쟁 현장 나갔다오길 반복하고, 이렇게 일시적 단편적인 운동만 계속 이어지구요. 그런데 현장 경험이 일천하면 책을 읽어도 한계에 빨리 봉착하게 돼요. 우선 상상력이 그만큼 낮아지고, 똑같은 책을 읽더라도 노동자로서 살아본 사람이 읽는 거랑 대학 와서 마르크스 서적만 보는 사람이 읽는 거랑 그 책의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또 책을 읽었을 때의 변화도 달라요. 실제로 땀 흘려서 노동하고 내 힘으로 투쟁해서 쟁취해본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때 보여줄 수 있는 변화의 폭과 양은, 계속 책만 들고 팠던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삶의 변화와는 천지차이예요.

내가 주체가 되어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가는 운동에 대한 목마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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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학생운동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내 인생의 경험을 쌓기 위한 운동(이었던 것 같아요). 학생운동하면서도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이런 생각을 은연중에 하거든요. 특히나 학생 운동을 하는 시기에는 그런 욕망이 커요. ‘이 운동을 하면서 내가 성장해야지’, ‘내가 여기 가서 뭘 배우고 나중에 좋은 사람이 되어서 사회에 기여를 해야지’, ‘직접 가서 눈으로 목격해야지’와 같이. 매번 학생 운동의 (대상)이 타자화되는 것 같았어요. 우리가 주체가 되는 운동은 등록금 투쟁 밖에 없는데, 매번 그것만 할 수는 없잖아요. 사회적인 연대 투쟁이란 역사와 사회를 크게 바꿀 수 있는 운동이잖아요. 당사자 운동으로서의 등록금 투쟁이나 얄팍한 연대 활동 말고,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게 없을까하는 그런 목마름이 있었어요.

일상과 주변으로 파고들어간 투쟁 청소노동자 어머니, 아버지와 만나다

제대해서 보니까 학교에 비정규직 문제가 이슈가 됐죠. 그때가 2007년이었는데 이랜드 투쟁을 비롯한 비정규직 투쟁은 2000년대 초반부터 계속 있었잖아요. 운동을 운동답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학교 안의 경비 노동자와 청소 노동자분들이야 말로 우리 바로 옆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인데 멀리까지 가서 연대할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제 생각에는 우리 곁에서 투명인간처럼 지나가는 어머니들, 아버님들이 열악한 처우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인데, 아직 조직화도 안 되어 있고 최저임금도 못 받고 계셨죠. 이런 분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연대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같은 학교에서 다니는 학생들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비정규직 된 지가 80년대 후반부터라고 하더군요. 그러면 그동안 ‘20년이 지났는데 대학생들이 뭐하고 있었나?’ 화가 나더라고요. 매일 ‘노동해방, 신자유주의 철폐’와 같은 거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막상 바로 옆에서 청소하시는 어머니들, 학생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하기 위해 도와주시는 가족과 같은 분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왜 한 번도 학생들이 문제제기 못했을까, 이분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활동들을 왜 다른 분들이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활동을 시작했죠. 거의 수업을 안 들어갔어요. (웃음)

박 : 들어갈 시간이 없었겠네요.

투명인간교내 청소 노동자와의 마주침, 그리고 단 하나의 목표를 세우다.

류 : 학교에 청소노동자 휴게실이 있더라고요. 올라가는 계단 아래를 보면 그 옆에 벽이 있고 문이 하나 달려있죠? 우리는 그 문을 창고라고 생각하잖아요. 그 문을 열면 그 안에 사람이 앉아있어요. 정말 좁아요. 그 문을 열었을 때 무척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한 번 찾아가겠다고 청소하시는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물어봤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학생들이 말 걸면 처음에는 ‘이렇게’(손을 내저었다) 하셔요. 현장 소장이라는 사람이 아주머니들에게는 전두환이나 아이히만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학생들과의 접촉이 발각되면 혼납니다. 미리 싹을 잘라놓는 작업이 있었죠. 그럴 땐 시간이 필요하죠. 인사도 계속하고 음료수도 먼저 갖다 드리고. 그렇게 마음이 열고 난 뒤 찾아갔는데 ‘그 문’이 있었어요. 문을 열어주시는데 어머니가 앉아 계시는 거예요. 들어가니 작지만 예쁘게 꾸며놓으셨어요. 손주들 사진 붙어 있고. 본인 방처럼, 소녀 방처럼 꾸며 놓으셨더라고요. 그걸 보고 대단히 놀랐어요. 누군가의 어머니고 할머니고 부인이지.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 어머니랑 다른 게 없는 분 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분들을 투명인간처럼 지나쳐 보내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분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거잖아요. 조그만 공간에서 이렇게 생활하시는 거면 ‘임금 수준도 형편없고 복리 후생도 말도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죠.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열정이 많이 생기더군요. 처음부터 노동조합 조직과 같은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건 아니에요. 하지만 졸업하기 전에는, 정말 이분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고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가장 밑바닥에 있으니까. 학생들이 일종의 교두보 역할을 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업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나는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이분들의 삶이 변화된 모습을 내가 봐야겠어.’ 라는 마음으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진짜 민중을 만나는 시간 청소노동자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울고 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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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건물마다 다 돌아다녔는데 하나같이 사정이 열악했어요. 제가 연세대학교를 나왔는데 건물도 엄청 많고 캠퍼스도 되게 크잖아요. 그래서 제가 스쿠터를 샀어요. 타고 다니면서 점심을 3번, 4번씩 먹었어요. 왜냐면 어머니들이 마음을 열려면 밥을 같이 먹어야 해요. 사람은 옳은 사람이나 옳은 이야기를 안 들어요.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듣지. 가르치려고 하면 안 되고 일단 친해져야 해요. 목적의식을 갖고 친해져서도 안 되고. 그냥 이분들과 정말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어요. 운동을 해보니 마음을 얻고, 친구가 되고, 비를 같이 맞고 해야 서로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거예요.

저도 많이 울었어요. 만나서 이야기 나누면 대부분 우셔요. 연세가 60대, 70대이신데 한국전쟁 때 태어나셔서 힘든 역사를 거쳐 온 분들이에요. 학생 운동하는 친구들은 자신들이 기억하는 ‘투쟁의 역사’ 같은 역사가 진보적인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그 역사도 엘리트의 역사에요. 우리도 사실 오만했지요. 학생운동사, 노동운동사의 노동조합이 있는 ‘제조업-대공장’의 남성 노동자는 형편이 그나마 나은 거지요. 그리고 한국 현대사, 정치사, 4·19, 87혁명과 같이 큰 덩어리 중심으로 공부했을 뿐이지, 민중사에 대해서는 굉장히 무지해요. 그런데 청소노동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자체가 민중사예요. 이분들은 6·25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중산층이 되지 못했어요. 대개는 계속 빈민으로 살아오신 분입니다.

어머니들 우리 이제 큰 물고기가 됩시다” – 청소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조직을 돕다

그 분들의 이야기를 6, 7개월 동안 들었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서로서로는 몰라요. 건물이 다 분리되어 있고, 청소 하시는 동안에는 다른 건물로 가는 게 금지되어 있어요. 그리고 다른 건물 아주머니랑 퇴근할 때도 말하면 안 되고 그게 적발되면 징계를 받게 돼있어요. 현장 소장이 어머님들께 욕도 하고, 성희롱, 성추행, 성상납 등 별 일이 다 있어요. 현장소장이 자기 집, 교회 와서 청소하라고 하면 어머님들이 다 몰려가서 청소해야 했어요. 어머님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자기들끼리 싸워요. 서로 단결이 안 되니까 소장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만 있지, 소장을 상대로 싸우는 건 없어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에요. 그래서 노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설문지를 통해 알아보니 근로기준법 위반, 최저임금법 위반, 폭행, 모욕, 성희롱, 성추행 등이 빈번했어요. 이제 서서히 노동조합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제안했어요. ‘우리는 소장과 1대1로 상대하고 있다. 우리는 소장한테 질 수밖에 없다. 온갖 부당한 행위도 바꿀 수 없다’라고요. 그리고 또 설명을 드렸지요. ‘조그만 물고기가 있는데, 자기보다 엄청 큰 물고기가 나타나면 물고기 모양으로 대형을 짭니다. 그럼 큰 물고기가 겁을 먹고 작은 물고기를 단 한 마리도 못 건드린다.’ 그게 바로 노동조합이라고 말이죠.

오랜 시간 눌려있던 용수철이 튀어 오르다. –노조가 결성되고 청소 노동자가 주체로 거듭나다.

이런 설명의 시간을 가지고, 청소노동자 어머니들을 한 분씩 모셨어요. 건물마다 프락치들을 다 심어 놨는데, 그런 감시의 눈을 피해서 조용히 모임을 시작했죠. 집중적으로 노동조합을 설명 드렸더니 어머님들이 열의가 넘치셨어요. 그동안 눌려있던 용수철이었던 겁니다. 누가 건드려준 사람이 없었던 거지요. 왜냐면 근로기준법이 뭔지, 최저임금이 올해 얼마인지도 모르고, 소장이 ‘툭툭’ 치는 건 넘어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셨던 분들이니까요. 그렇게 간담회를 가질 때마다 어머님들이 성장하시는 느낌이 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어머님들이 스스로 더 높은 차원의 투쟁을 기획하게 되셨어요. 그때 민주노총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08년 2월,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지부 연세대학교 지회 노동조합 출범식을 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노동조합은 숨기고 쉬쉬하며 하면 절대로 안 되거든요. 그러면 우리를 더 무시해요.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장단 명의로 노동조합 출범식 초청장을 교수들에게 보냈어요. 연세대의 한 주체가 (노동조합) 출범식을 한다고 알린 것이죠. 출범식 전날 어머님들이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아 플래카드로 만들어서 연세대 정문부터 본관까지 걸었어요. 다음날 출범식을 크게 했죠. 그렇게 연세대를 시작으로 홍익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로 이어져서 신촌에서 다 같이 집회를 했어요. 노동조합 생기고 불과 한 6개월 만에 이뤄내신 거지요. 학생 한 명을 변화시키는 데는 10년 정도 걸리지만, 청소 노동자분들은 살아온 인생 자체가 이미 노동계급과 투쟁을 체득한 분들이기 때문에, 변화하는 데는 한 순간이었어요.

김시은(이하 김): 정말 짜릿하셨겠습니다.

약자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언덕은 법, 그렇게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다.

박: 학부 때 이런 활동 하셨으면 아무래도 밖에 나가서도 비슷한 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은데, 단체에 들어가지 않고 로스쿨에 진학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류 : 처음에는 노조 조합원처럼 일을 했죠. 그분들 사무실에서 3년 정도 활동을 했어요. 사실 법이라는 게 대단히 중요하죠. 그분들이 배운 사람들한테 가장 기대하는 것도 법이었어요. “이게 불법이야? 소송하면 얼마 받을 수 있어?” 라고 계속 물어보세요. 법이라는 게 존재하는 이유가, 대화의 창구가 없고 그 문턱이 너무 높아서 넘지 못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지요. 물론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형식적으로는 법원에 누구나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노동부에는 누구나 진정을 제기할 수 있잖아요. 즉, 약자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사회적인 장치죠.

그렇기에 ‘배운 사람들’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 같아 처음에는 노무사 공부를 했어요. 노무사 공부를 두 달 정도 하는데 계속 교내 투쟁이 터지니까 집중을 못했어요. 시험도 봤지만 공부를 안했으니 될 리가 없죠. 또 그때 제 나이가 스물여덟 살이라, 집에 뭐라도 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노무사 시험을 그 핑계로 삼기도 했고요. 그런데 주위에서 법으로 노동운동을 지원하고 싶으면 로스쿨이 생겼으니까 거길 지원을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노무사보다 할 수 있는 게 더 많고, 소송대리권도 있으니까요.

우리 사회의 제일 취약한 고리인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이 바로 보편적인 민생 향상을 위한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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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 전반적으로 노동환경이나 노동문제 개선을 위해서 제정이 필요하거나 개정, 수정이 필요한 제도가 있을 텐데, 근본적으로 무언가 바꿀 수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류 : 입법에서는 간접고용문제 해결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란 말이 있듯이 가장 고통 받고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환경을 먼저 바꾸는 게 맞아요. 지금은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고리가 간접고용 비정규직이에요. 역사가 한 단계씩 진보할 때마다 여러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한건 아니었어요. 물론 68혁명 때는 사회 전반적인 혁명이 일어나긴 했지만, 어떤 시대가 한걸음 더 나가려면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고리를 끊어냈을 때 생각보다 큰 변화가 생길 때가 많아요. 그런 것이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운동들이구요.

지금을 사람들은 ‘87년 체제’라고 하지만, 사실상 ‘IMF체제’입니다. 신자유주의 양극화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조금 더 좋은 사회로 갈 수 있어요. 저는 지금의 체제로 인해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면 다음 사회로 넘어갈 실마리가 풀릴 것이라고 봐요. 지금 가장 고통 받고 있는 계층이 비정규직, 그중에서도 직접고용이 아닌 하청업체 소속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이고요.

노동운동이라 하면 뭔가 매니악하고 투쟁의지가 높고 사나운 사람들이 하는 운동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통계를 보더라도 대한민국 국민 절대다수가 노동자에요.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운동은 부분적인 운동이 아닌 보편타당한 운동입니다. 노동운동 자체가 민생운동이고, 국민들의 전반적인 복지 향상을 위한 거시적인 운동이고요. 이 보편적인 복지를 위한 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의 첫 걸음은 ‘노동개혁’에 의해 가장 고통 받고 문제해결이 시급한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해결이라고 봐요. 입법제안은 민변 노동위에서 한 입법제안을 참고 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웃음)

할머니 손 붙잡고 시위현장을 누비고, 노천극장에서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부른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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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영(이하 정) : 학생운동을 열정적으로 하셨는데, 노동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인생의 첫 순간이 있지 않으신가요?

류 : 87년 혁명 때 5살이었어요. 할머니가 운동권이어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간부를 하셨어요. 할머니 손잡고 집회를 많이 다녔고요. 87, 88년 고향인 대구에서도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집회를 많이 했어요. 할머니랑 손잡고 동성로에 나가면 학생들이 교련복입고 최루탄 때문에 코 막으면서 뛰어다니고 그랬죠. 할머니 따라서 시국집회를 많이 다녔고 노동자들의 거친 투쟁의 모습도 어렴풋이 기억나요. 어린이가 상상 못할 인파가 모인 집회에서 발언도 해봤고요. 그게 나중에 역사책에서 찾아보니까 88년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있었던 전교조 집회였어요. 그때 할머니와 버스타고 가면서 할머니가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알려주셨어요. 집회에서 제가 발언하게 됐는데 발언은 안하고 마이크 쥐자마자 ‘나 태어나~’ 라고 노래를 부른 거예요.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함께 소리 지르며 불렀던 기억이 있어요. 그 당시에는 이게 뭔지도 모르고 이 사람들이 왜 싸우는지도 몰랐지만 그 어릴 때의 기억들을 나이를 먹으면서 계속해서 반추해보곤 했어요.

불온서적<>, 그리고 선하고 착한 사람들이 가는 길에 대한 자각

저희 집은 어릴 때부터 책이 많았어요. 삼촌 고모들이 다 학생운동을 해서요. 그때 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집에 있으면 안 되는 책들이 많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장남이어서 할머니 모시면서 대구에 사니까 집으로 불온서적들을 보낸 거죠. 제 방에도 맑스, 엥겔스 이런 책들이 꽂혀 있었고요. <코스모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광주 민중항쟁 다큐멘터리>, <태백산맥> 같은 책들이 있었어요. 또 저희 집은 <말>지를 정기구독했어요. 그래서 한글을 처음 떼었을 때부터 그런 책들을 읽고 자랐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광주민중항쟁 책에서 광주시민들이 칼에 찔리는 사진을 보고 굉장히 놀란 기억이 있어요. 고모 삼촌의 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 옆에서 책 제목들을 엮어서 노래를 부르며 놀기도 했고요. 92년에 ‘윤금이 피살 사건’이 있었어요. 윤금이 씨가 미군들에 의해 성폭행 당하고 살해당한 사건인데, 그게 <말>지에 실려 있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읽고 엄청 충격을 받아 할머니한테 여쭤봤죠. 그랬더니 보지 말라고 하셔서, 더 보고 싶어졌고요. 그 이후부터 <말>지를 정독하기 시작했어요. 중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현대사책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런 역사책들을 접하면서 어릴 때 스쳐 지나갔던 거리의 풍경, 할머니가 했던 말들, 고모삼촌들이 울면서 ‘누가 잡혀갔다’ 이런 얘기하던 기억들도 이해되었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정서적으로, 이렇게 사는 것이 양심적이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어요. 왜 운동을 해야 되는지, 운동의 쟁점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은 자세히 몰랐지만 ‘착하고 선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러다 대학에 입학하니까 불이 붙었고 체질에 맞았지요.

학창시절 수성구의 류하경에서 집회 현장의 기타리스트가 된 지금

저는 학생운동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락밴드를 처음 시작해서 음악에 미쳐있었어요. 음악과 농구가 인생의 전부였어요. 대학 들어가면 무조건 밴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유명한 밴드를 능가하리라고 다짐하며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준비했죠. 고등학교 2학년 학교 축제에서 밴드 ‘범어동 수퍼하이웨이’를 결성했고. 당시 여고에서 많이 왔었는데 배우 손예진도 왔었죠. “손예진이 뭔데!” 이러면서 락밴드 메탈리카처럼 ‘쎈 척’하고 그랬어요. 고2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고, 제인생의 정점은 고 2 축제에서 공연했을 때였어요. 그때 첫 곡으로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을 연주하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이데아’ 로 마무리 했었죠. 그때부터 (인생이) 기울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왔네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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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집회 나가보면 불타오르는 게 있어요. 그래서 ‘수성구의 류하경’이 메이데이 때 가서 ‘바위처럼’을 칩니다. 그때 쌓았던 기타 실력을 농활, 집회현장 그리고 민변 집회에서 발휘하죠. 원래는 락기타, 블루스기타를 치는데 그런 건 민변 변호사님들이 모르시잖아요.(웃음) 그래서 지금 기울고 있는 상태예요.

진지하지만 유쾌했던 인터뷰가 끝나고 류하경 변호사가 말을 덧붙였습니다. 언제 맥주 한 잔 하자고요. 꼭 그러기로 했습니다. 정말이죠? 류하경 변호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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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지부의 날씨 및 근황을 전해드립니다.

경남은 강력한 태풍의 영향권 아래 많은 피해를 입었고, 직접 침수피해를 입은 회원들도 있었습니다. 법원 앞 사거리는 마치 범람한 계곡을 방불케 하는 긴급사태를 맞았고, 재판에 참석하려 물살을 헤치고 홀딱 젖은 정장차림으로 전진하는 회원님들도 계셨습니다.

이러한 힘겨운 상황을 맞았지만 경남지부에서는 굴하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해나갔습니다.

경남지역은 조선업의 붕괴로 인해 심각한 노동환경 악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특히 기업을 살리겠다는 명목으로 대량 해고 등 모든 위험을 노동자들에게 전가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어 경남지부 안한진 사무국장님이 기자회견에 참석하여 입장을 발표 하는 등 지원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이 1회성에 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10. 24.부터 일주일간 경남지부 회원들이 릴레이로 거제고성통영 하청노동자들을 위한 거리법률상담소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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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지부는 부마민주항쟁 기념사업회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더운 여름날 열린 후원주점에 참여하여 술 한잔을 거들며 돈을 보태는 뜻 깊은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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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위원회가 비밀리에 3차례에 걸쳐 북한과 접촉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경남지부 회원들은 남북대화 촉구, 한반도 평화실현 경남100인 원탁회의에 참석하여 결의문을 채택하는데 힘을 보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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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에서는 매년 이주민과 함께하는 다문화축제 MAMF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경남지부에서는 이 행사에 추진위원으로 참가하여 이주민들과 경남도민이 함께 어울리는 축제를 만드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경남지부 지부장님의 예쁘고 똑똑한 따님도 합창에 참여하여 노래솜씨를 뽐내었으나, 사진이 남아있지 않아 회원님들에게 보여드릴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경남지부의 2016년 최고과제는 회원들이 더 자주 만나고 더 많이 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제의 달성을 위해 경남지부 회원들은 매월 월례회를 열어 밥 한 끼라도 더 먹고, 사는 얘기를 나누며 소통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가장 큰 토론거리는 순번 상 내년 정기총회가 경남지역에서 열릴 것으로 예상되므로, 어느 곳이 놀기 좋은지에 관한 것이며, 아직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내년에는 전국 회원님들을 아름다운 경남에서 만나 뵙길 희망합니다.

목, 2016/10/27-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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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점규 활동가 강연 후기

 

- 김소리(변시 4회)

 

변호사 업무를 배우며 익숙하지 않은 일들에 적응하느라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그냥 그렇게 보내던 중 오랫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투쟁해온 박점규 활동가의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현재 비정규직 투쟁 상황에 대해서 우울한 이야기와 희망적인 이야기 모두 들으면서 앞으로도 함께 해야할 일이 참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쳐있던 저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준(?) 강연이었습니다.

 

박점규 활동가는 2003년부터 금속노조에서 선전홍보, 단체교섭, 비정규직 사업을 하면서 2011년 한진중공업, 2013년 현대자동차, 밀양 희망버스 기획단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장그래살리기운동본부’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번 강연에서는 최근에 ‘삼성의 도시’ 수원에서 시작해 1년 2개월 동안 전국의 노동 현장 28곳을 발로 뛰며 쓴 『노동여지도』에 기록된 전국 노동현장의 목소리와 그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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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노동 인구의 거의 절반인 44.6%가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하니, 비정규직 문제는 정말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점규 활동가는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 노조가 아름답게 연대한 사례들을 보며 희망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성과급을 받는 대신 후배들을 정규직으로 만든 타타대우 노조의 사례를 들려주었습니다. 타타대우의 정규직 노조 지도부는 조합원을 일일이 설득하며 후배들을 비정규직 인생으로 살게 하지 말자고 했고, 결국 노조 규약을 바꿔 모든 비정규직을 노조에 가입시켰습니다. 그리하여 타타대우는 곧 ‘비정규직 없는 공장’이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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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현대기아차 자동차생산 공장의 전체 공정에서 일하는 사내하청업체 노동자 사용은 불법파견에 해당한다고 한 대법원 판결을 비롯하여 법원에서 불법파견을 인정한 사례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어 다행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비정규직 노조가 없는 곳이 많고 이런 곳에서는 비정규직 투쟁이 없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해고를 감수하고 회사에 소를 제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여전히 정당한 요구를 하려면 투사가 되어야 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아쉬움도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비정규직 노조가 없는 곳, 또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조를 외면하고 적대시하는 곳이 많은 상황에서, 앞으로도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제들이 참 많은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특히 노동자들에게 변호사 친구는 전태일에게 대학생 친구와 같은 존재라고 한 박점규 활동가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변호사가 된지 3개월밖에 안된 새내기 변호사인 제가 언젠가는 노동자들의 든든한 친구가 되어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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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5/07/1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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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소식을 전하는 민생경제위원회입니다. 여러분의 2016년 하반기는 어떤 시간이었나요? 민생경제위원회의 2016년 하반기는 주거인권, 금융인권과 도시의 미래를 고민하기 위해 에콰도르, 일본 등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연대한 시간들이었답니다.

UN HABITAT III 한국 민간위원회 참여

먼저 이강훈 위원이 민변을 대표하여 UN HABITAT III 한국 민간위원회에 참여, UN HABITAT III가 열리는 에콰도르로 날아갔습니다. 10월 17일부터 20일까지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Quito)에서 개최된 UN HABITAT III는 향후 20년간 주거와 지속 가능한 도시에 관한 지구적 책임을 논의하고, “새로운 도시 의제(New Urban Agenda)”를 채택했습니다.

‘새로운 도시 의제’는 도시 공간 내에 주거, 경제, 환경, 거버넌스 등 포괄적인 도시 의제를 제시하며 ‘도시에 대한 권리(Right to the City)’로 담론을 확장합니다. 도시화의 다양한 문제와 위기에 대응하는 한편 도시 내에서 지속가능한 발전 동력을 찾고,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고 지향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논의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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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Habitat III 한국 민간위원회 발족식 및 기념 세미나 © UN-Habitat lll 한국 민간위원회

UN HABITAT III 한국 민간위원회는 지난 7월 주거, 장애, 여성, 환경, 지방의제 등 42개 시민사회단체와 민관협의체로 구성됐습니다. UN HABITAT III 기간 동안 UN 주거권 특별보고관 면담, 강정마을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 상영회, 강정마을 활동가들의 생명평화 100배 퍼포먼스 등의 활동을 펼쳤고요.

민생위 이강훈 위원은 18일 오전 릴라니 파라 UN 주거권 특별보고관을 면담하고 한국의 주거권 현실과 UN 사회권 협약 가입 현황, 한국의 주거권 관련 법률 제정 현황 등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2017년 한국에 방문하겠다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같은 날 오후 ‘Networking Session-포용 및 투명도시개발’에서는 서울시의 공공주택 확충, 도시 재생 및 투명하고 효율적인 공공건설 관리 등을 핵심으로 한 서울의 포용도시정책 방향과 관련한 세션 활동을 모니터링했습니다.

다음 날인 19일 오전 11시반부터는 릴라니 파라 UN 주거권 특별보고관이 유엔 고등인권판무관 사무소와 함께 개최한 The Shift라는 제목의 사이드세션에 참가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이번 UN HABITAT III가 채택한 신도시의제에서 주거권 문제가 중심의제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못했고 향후 이와 관련한 관점의 전환 및 이를 위한 국제적 네트워크 활동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유엔 주거권 특별보고관 및 유엔 고등 인권 판무관 사무소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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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인 20일 오전, HABITAT 행사장 내에서 제주 강정마을 활동가들과 함께 생명평화를 염원하고 주거 지속 가능한 도시에 대한 권리를 선언하는 생명 평화 100배 퍼포먼스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UN HABITAT III는 20년 전의 UN HABITAT II나, 40년 전의 UN HABITAT I에 비교하여 주거의 권리 면에서 특별히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UN HABITAT III 한국 민간위원회에 민변을 대표해 참여하고 민간보고서 작성에도 함께한 이강훈 위원은 활동보고서를 통해 “각국 정부의 반대와 신도시의제를 추진하는 그룹들 사이에 상당한 이견이 있었다”는 점과 “도시에 대한 권리는 주거에 대한 권리를 대체하는 개념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내년 UN 특별보고관 방문 약속을 받은 점, 민간위원회 구성 과정을 통해 주거복지활동을 하는 일선 활동가들과 함께하여 앞으로 주거운동에 관련된 연대 활동의 폭이 더 넓어졌다는 점, HIC(세계주거연맹)과 만나고 토론하는 기회를 통해 앞으로 주거문제 관련 국제적 연대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 등, 한국 시민사회와 민변의 입장에서는 적지 않은 성과도 있었습니다.

제7회 동아시아 금융피해자 교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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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인 연대활동은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지난 10월 22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제7회 동아시아 금융피해자 교류회에 민생위 이헌욱, 백주선, 김태근, 박현근, 이은종, 허정택, 이유리 위원이 참가했습니다. 권정순 위원 역시 서울시 공무원 자격으로 참석했고요. 제윤경 의원, 서울시 공무원, 한국파산회생변호사회의 변호사들, 한국금융피해자협회와 참여연대의 활동가들도 함께 했습니다.

‘동아시아 금융피해자 교류회’는 부채를 이유로 개인의 삶이 박탈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국, 일본, 대만의 뜻 있는 법률가들이 모이는 자리입니다. 매년 동아시아 금융 피해자 교류회를 열어 각 국의 사회현실과 문제점을 보고하고, 상호 교류의 장을 마련하여 채무자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여 왔습니다.

이날 한국과 일본의 금융 정책 발제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일본 야스 시의 생활곤궁자 지원 정책과 서울시의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가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연계하여 운영하고 있는 ‘빠른 파산면책제도’였습니다.

일본 야스 시는 시청의 공무원이 세금 체납 현황을 통해 생활곤궁자를 확인합니다. 확인만 하면 아무 의미가 없겠죠? 시청 공무원이 시의 상징 캐릭터 인형옷을 입고 채무자 상담부터 진행합니다. 통합 행정지원, 심지어 당장 요기 할 라면까지 지원해준다고 하네요. 우리로 치면, 고양시의 ‘고양고양이’같은 귀여운 인형탈 입은 공무원이 생활곤궁자의 집 상황을 들여다보고, 채무자 상담을 해주고, 필요한 행정지원까지 해주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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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위 회원이기도 한 권정순 변호사는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와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연계하여 운영하는 ‘빠른 파산면책제도’를 소개했습니다. 지자체와 법원이 협업하여 신용상담과 법적 면책을 연계하는 정책에 각국 참가자들이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각 국의 주거권과 금융피해 현황, 채무 관련 제도를 서로 공유하는 시간도 이어졌습니다. 주거권 섹션에서는 민생위 김태근 위원이 한국 정부의 주거정책의 문제점 및 그 대안에 관하여 발제했습니다.

금융 피해 현황을 발제하는 시간에는 각 나라별 차이가 두드러졌습니다. 특히 일본은 채무자 운동이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고 사회적 제도 정비가 완비된 상태라, 일본 채무자 운동의 관심사는 빠칭코 등 도박으로 인한 부채 문제로 옮겨간 상황입니다.

채무 관련 제도에 대한 발제 시간에는 일본 측에서 은행의 소비자 대상 대출 증가 문제 및 그 대책에 대하여 발표하였고, 대만 측에서는 소비자 부채정리제도에 대한 실무상 개선점을 발표했습니다. 한국 측에서는 민생위 백주선 위원이 서울시 대부업분쟁조정위원회의 사례를 분석하여 대부업자와 금융소비자 사이의 분쟁 조정 기준을 정리했습니다.

한국, 일본, 대만의 금융과 채무 관련 현황이나 관심사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공통점을 확인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세 나라 모두 대학생의 학자금 대출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공유했거든요.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과 대만에서도 사회적으로 채무자를 도덕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 시선이 많습니다. 채무자들은 빚 때문에도 어려움을 겪지만 이런 사회적 시선 때문에도 고통 받고 있고요. ‘동아시아 금융 피해자 교류회’는 채무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각 국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노력들을 공유하고, 서로의 사례를 참고로 하여 함께 발전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금, 2016/12/30-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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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더위가 시작되던 지난 7월 7일 강의를 위해 서울에 방문하신 박진희 씨를 만났습니다. 박진희 씨는 사회적 기업인 푸드앤 저스티스 지니스 테이블을 운영 중이시며 유기 농산물 재배 농부이시기도 합니다. 박진희 씨의 먹거리 정의 이야기와 냉장고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성사된 인터뷰, 소개해드릴게요.

 

환경정의(이하 환경):의식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박진희(이하 박): 먹거리가 제일 중요합니다. 집은 주거복지라는 개념이 있어 정책도 있지요. 옷은 몇 벌 가지고 있느냐가 생존을 좌우하지는 않습니다. 문화적 코드의 개념이 강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먹거리 복지라는 개념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먹을거리는 생존에 관한 문제입니다. 주택은 공유할 수 있고 옷은 재활용하거나 공유할 수 있지만 먹을 것은 그렇게 되지 않죠. 그래서 의식주가 한 데 묶이는 것은 어렵고 ‘식의주’라고 이야기되어야 하는 게 맞는다고 봅니다. 먹을거리가 기본적으로 보장된 다음에 주거의 문제를 논하고 문화적인 것(의복)을 충족하는 게 맞는다고 봐요.

어렸을 때, 길거리에 서있는 장애인 형제를 본 적이 있어요. 그때 그분들이 새우깡 같은 과자를 먹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제 눈에 보기에, 즐기려고 먹는 것이 아니라 배고파서 과자를 먹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 제가 ‘아 우리가 간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주식일 수 있구나.’라는 경험을 처음 해보았던 거 같아요. 그때부터 먹거리에 대한 중요성을 어렴풋이 했던 거 같습니다.

환경: 냉장고 용량은 어떻게 되나요?

박: 양문형 하나, 김치냉장고 하나가 있고 마을용 저온저장고가 있어서 이것도 이용하고 있어요. 김치냉장고는 배추를 팔고 남은 것을 다 담아야 하고 또 어머님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여차여차 마련하게 되었어요. 냉장고는 오래전부터 썼던 냉장고가 고장 나서 냉동실이 큰 양문형을 마련했고요. 음식을 바로바로 해 먹기 때문에 봄-가을엔 냉장실이 거의 비어있습니다. 냉장실의 가치는 다진 마늘, 장류, 오이소박이 보관하는 정도에요. 냉동실에는 다져놓은 마늘과 씨앗 그리고 농번기 필수 아이템인 얼음이 있어요.

냉장고는 소비를 부추기는 최적화된 시스템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이걸 사서 냉장고에 넣어놓으면 보관이 언제나 가능하다는 무언의 압력이 있잖아요. 용량을 늘리는 것이 부를 상징하기도 하고요. 대형 냉장고를 가져야 하고 양문형 냉장고를 사야 하는 문화적 코드와 맞물리는 거죠. 냉장고는 산업화와 소비지향의 트렌드를 극렬하게 반영하는 것이라는 생각해요.

 

환경: 먹거리를 살 때 가장 중점적으로 보는 것은 어떤 건가요?

박: 1순위 원산지, 2순위 화학첨가물입니다. 화학첨가물을 염두에 두면 살 수 있는 게 많이 없어요. 아이들과 같이 장을 보러 가서 성분 표시표 보면서 최소한으로 들어간 것을 구매해요. 아이들이 음식을 먹더라도 무엇을 먹는지 인지하면서 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아이들과 먹거리 교육을 할 때 미각 수업을 진행하거든요. 그때 어떤 것을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인지를 봐야 해요. 먹거리의 대안으로 생협 식품을 이야기하지만 시골에서는 생협 조합원을 부모로 둔 아이들은 아마 거의 없을 거예요. 아이들이 현장에서 생활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 방법을 알려주지 않으면 취약계층 아이들은 미각 수업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요리 수업도 사용할 수 없는 기구와 식재료 가져와서 만들면 집에 가선 요리가 안 되잖아요. 식생활 지도 나 요리수업들이 내 삶으로 연결되는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해요.

 

환경: 소비의 양극화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있다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박: 소비 양극화는 경제적 양극화가 원인이에요. 경제 양극화는 구조적으로 부를 분배하는 시스템 문제이고요. 소비 양극화 현상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은 그 위에 문화적 코드를 입히는 것입니다. 누구는 스마트 폰을 갖고 있어, 라든가 뭘 입고 있어 라든가 문화적으로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으면 양극화가 없는 것처럼 가려지는 현상인 거죠. 이것이 소비 양극화나 빈부격차를 은폐시키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생각합니다. 상품 소비를 통해 얻어지는 동질감은 문화적인 것이어서 가난한 학생에게 “스마트 폰 살 돈으로 밥을 사먹어.”라는 말은 할 수 없어요. 그 아이가 지금 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죠. 비슷한 예로 미국에서 푸드 스탬프 이용자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활동이 스타벅스 가서 커피 마시기에요. 그 자체가 문화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죠. “왜 다른 먹을 것을 사지 않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문화를 느끼고 싶은 사람의 욕구는 당연하잖아요. 상업적으로 잘 포장된 상술이 문화적인 것들을 향유한다고 믿어서 소비 양극화를 은폐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먹거리 정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를 공유하고 확산해야만 합니다.

 

환경: 시스템을 변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한국에서 소비 양극화 해결의 방향은 어떤 게 있을까요?

박: 먹거리와 관련된 다양한 시민 소모임 양성이 필요합니다. 토종종자가 관심인 시민, 내 아이 먹일 간식에 관심 갖는 시민, 시민 텃밭에 관심 갖는 시민, 음식 만드는 것이 관심인 시민 등 다양한 시민들이요. 보통은 활동을 정하고 시민들을 그 활동에 맞추는데, 그 프로그램에 맞는 사람은 소수고 그 활동이 안 맞으면 오지 않게 되기 때문에 모두를 아우를 수 없는 문제가 생겨요. 시민활동으로서의 자기 활동을 정한다면 확산될 거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 시민활동 플랫폼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역할을 시민 단체가 해주었으면 좋겠고 또, ‘당신의 냉장고 프로젝트’가 그런 일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자체에서도 다양한 먹거리 시민활동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중요해요. 저는 정말 풀뿌리가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법이 먼저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필요에 의해 건의가 되는 거잖아요? 이런 풀뿌리들이 모여 활동들을 서포트 해줄 수 있는 법까지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환경: 먹거리 정의와 먹거리에 대한 철학에 대해 말해주세요.

박: 먹거리 정의는 생산, 유통, 가공, 소비되는 모든 영역이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 정의입니다. 그러나 저는 나아가 소득에 관계없이 누구나 기본적인 먹거리를 조달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까지 포함해요. 즉 이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 휴머니즘이죠. 먹거리 이야기를 하면 미식가를 생각하는 분들이 많고 먹거리 정의라 하면 공정무역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아요. 공정무역은 생산자의 문제, 윤리적 소비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먹거리 정의는 씨앗부터 밥상에 올라가는 그 전체 과정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농사의 완성은 무엇이죠? 바로 섭취에요. 농업에도 이로우려면 먹는 과정도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먹거리 정의는 휴머니즘이라 생각해요.

저도 이렇게 확고한 생각을 가질 줄은 몰랐어요. 유기농 농사를 하려고 귀농을 했는데 유기농은 왜 특정 계층에게만 공급되는 시스템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어요. ‘모두가 먹거리를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이 들었고 검색을 하다가 먹거리 정의 개념을 알게 되어 먹거리 정의 활동까지 하고 있어요. 농부가 안 됐으면 이런 일은 안 했을 거예요.

 

 

박진희 씨와의 인터뷰 재밌게 보셨나요? 이 인터뷰를 통해 먹거리 정의의 개념과 여러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먹거리 정의와 관련된 분들의 인터뷰는 계속될 예정이니 관심가져주세요!

 

 

수, 2015/07/29-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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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0일부터 1박 2일 동안 파주에서 민변 통일위원회 워크샵이 열렸습니다. 워크샵 주제는 “통일위 화합과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바야흐로 문재인 대통령 시대를 맞이하여 통일위의 새로운 비전을 함께 모색하자는 것이었는데 실상은 워크샵을 통한 통일위 단합이 우선이었지요

남한의 최북단 파주에 위치한 ‘착한 펜션’에 저녁 6시까지 모이기로 했는데 4시부터 한 분씩 출발을 알려왔습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천낙붕 변호사님팀이 펜션의 정확한 위치와 그곳의 현황을 알리면서 출발을 독려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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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먼저 도착해 동심으로 즐거운 천낙붕 변호사님❯

 

펜션 주변은 한적한 농촌이어서 번잡한 서울과 달리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기기에 좋았습니다. 짐을 풀고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어디선가 계속 음악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동네 잔치가 열렸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음악이 끊이지 않고 약간은 소음이라고 생각될 정도여서 음악소리의 근원을 파악해보니 그 음악소리는 휴전선을 두고 남과 북이 서로에게 보내는 선전선동을 동반한 소음?이었습니다. 서로를 향해 총 대신 음악을 쏘아대는 “음악교전”이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네요. 씁쓸한 현실이었습니다.

6시를 전후하여 한분씩 도착하였는데 우리에게 배정된 방이 공교롭게도 ‘백두산’과 ‘묘향산’이었습니다. 짐을 풀고 곧바로 식사준비. 풍성한 밥상과 다양한 주류를 맛나게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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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난 저녁식사와 반주로 단합을 다집니다.❯

 

준비성 좋은 채희준 위원장님이 막걸리만 해도 4종류를 준비해오셔서 밤 깊은 줄 모르고 맛나게 마시며 재미난 얘기와 향후 통일위 활동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오영 변호사님의 제안으로 현장 월례회가 제안되어 즉석에서 강화도 교동도에서의 월례회가 결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역시 워크샵의 묘미는 여유있는 식사와 반주, 그리고 주제를 정하지 않고 나누는 대화입니다.

한참을 맛나게 먹고 중간중간 기념촬영도 해가가면서 재미난 시간을 나누었습니다. 다음 날의 일정 때문에 중간에 일어나야하는 변호사님들이 몇 분 있었습니다. 자리를 뜨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일정상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뜨는 분들을 그냥 보내기엔 너무 아쉬워 각자 노래를 하나씩 불러야 이석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앵콜송까지 하나씩 더 부르고 3분이 먼저 자리를 떴습니다. 3분이 자리를 뜨는 중간에 휴식과 자리 정돈을 하고 다시 뒷풀이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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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자동차 불빛을 이용하여 한 컷❯

 

다음 날은 반구정과 임진각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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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 입구에서 ❯

반구정은 잘 알다시피 황희정승이 말년을 보낸 곳입니다. 임진강 바로 옆에 위치해있어 참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이었지만 임진강 주변을 따라 설치된 철책에 본래의 운치가 변질?된 듯했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구질구질한 철책을 두르고 있어야하는지 답답했습니다. 반구정에서 내려다본 임진강은 평화롭게 흐르는데 어찌 우리 민족은 7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는지. 통일위가 앞으로 해야할 일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구정 바로 아래 철책이 설치되어 있고 임진강 건너 편 강둑에도 철책이 설치되어 있어 짧은 시간이나마 강건너가 바로 북한 땅이라는 착각 속에 재미난 얘기가 오갔습니다. 어떤 얘기가 오고갔는지 상상에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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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 바로 아래 설치되어 있는 철책❯

 

반구정을 구경하고 임진각과 평화누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임진각은 이른 시간임에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망향의 서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려 실향민들이 자주 방문하는 곳인데 외국인 관광객도 제법 있었습니다. 임진각 곳곳에 분단과 전쟁 때의 광경을 담은 사진이 있었고 북을 향해 달리고 싶은 녹슨 기차도 있었습니다. 유명한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문구를 확인하였습니다.

1년 전인 2016년 6월 통일위는 “독일통일기행”을 다녀왔는데 당시 독일의 시골마을인 뫼들라로이트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었습니다. 한때는 동서독 분단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동서독 분단을 기억하는 국경박물관으로 남아있었는데 많이 부러웠습니다. 참 아름다운 시골 풍경도 부러웠지만 이제는 분단을 과거로 기념하며 박물관으로 남아있는 것이라 더 부러웠습니다. 임진각 역시 아름다운 곳이지만 분단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우리의 임진각이 하루빨리 통일의 기념관으로, 분단을 과거로 기념하는 곳으로 남기를 가슴깊이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통일위 회원들은 임진각 3층에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커피를 한잔씩 마시고 2017년도 통일위 워크샵을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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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통일위가 방문한 독일 국경박물관이 있는 뫼들라로이트의 철책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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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임진각에서 북쪽을 바라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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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각 3층에서❯

월, 2017/07/24-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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