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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구소 '창'의 활동가들이 쓴 첫범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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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구소 '창'의 활동가들이 쓴 첫범째 글

익명 (미확인) | 월, 2016/11/14- 17:23

존엄과 안전(엄기호,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백남기 농민이 운명하셨다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죽음과 맞서신지 316일 만에 끝내 숨을 거두셨다우리는 백남기 농민의 죽음과 함께 다시 한 번 한국사회에서 삶이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된다죽음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우리가 전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메르스는 질병 앞에서 국가의 방역망이 어떻게 뚫릴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질병으로부터의 안전이것은 근대국가가 위생과 보건을 도입하면서 가장 먼저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위협이다그 오래된’ 위협이 다시 귀환했지만 국가는 철저히 무능했다.

강남역강남역 사건과 그 이후에 터져 나온 여성들의 목소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성들의 안전은 짓밟히고 있었다는 걸 증언했다이 사건이 우연하고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여성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느끼고 있는 위협이라는 걸 말이다가정에서부터 길거리학교나 직장그 어디에서도 여성을 향한 폭력이 존재한다안전한 곳은 없다.

구의역 사건구의역 사건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먹고 살기 위한 노력이 어떻게 죽음에 닿아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근대 국가가 보장해야하는 안전의 또 다른 영역이 바로 경제다시장의 변덕으로부터 항시적으로 해고의 위협해고로 인한 생계의 위협에 시달리는 삶을 보호하는 게 국가의 역할이다또한 현장에서의 사고를 예방하고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게 국가다그러나 이런 안전은 없다는 걸 구의역 사건은 우리에게 여실히 알려줬다.

경주의 지진물론 자연재해는 근대국가가 완전히 제거하거나 극복할 수 없다그렇기 때문에 자연재해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예방조치들을 한다또한 재해가 발생했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대처한다그러나 경주의 지진은 이 나라가 자연재해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무능력하며나아가 무모한지를 보여줬다무지가 바로 무모함을 낳으며 그 무모함이 국민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처럼 우리는 지난 4년간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국가가 국민들의 삶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국가는 생명을 지키는데무관심하고무지하고무능하고무모했다그리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은 이에 더하여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앗아가는 죽음의 폭력을 휘두르는 데는 매우 유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했다이 죽음의 권력 앞에서 우리는 이 나라에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안전과 더불어 존엄이다.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 있는가인간의 존엄은 생명 하나하나가 대체되지 않는 절대적인 고유성을 갖고 있다는 데에 있다그렇기에 한 생명이 지는 것은 곧 한 우주가 사라지는 일이다인간 존엄의 근거는 그가 누구든그가 어떻게 살았건 상관없이 그의 절대적 고유성을 무조건적으로 가정하는 데에 있다그렇기에 인간의 존엄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가정을 절대적으로 지키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며 존재하기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고도의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이런 노력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는커녕 가장 모독 받는 존재가 된다서구가 나치의 경험 이후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인권과 인도주의와 관련된 법적/제도적 장치를 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인간의 존엄성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의도적 노력에 의해서 가까스로’ 지켜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그것은 이 존엄에 대한 보호가 그저 생명의 존엄을 넘어 인간의 존엄이라는 점이다여기서 인간을 강조하는 것은 생물학적 위계에서 인간보다 아래에 있다고 간주되는 동물이 아닌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오히려 이 인간은 한자가 말하는바 그대로 사이에 존재하는사이로서 삶이라는 의미에서의 존엄이다이것은 그리스인들이 나눈 대로 한다면 인간의 존엄이란 생물학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을 넘어 사회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을 의미한다.

사회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이란 무엇인가그것은 다른 이의 삶을 내 삶의 동반자로 여긴다는 의미에서다그렇기에 그의 존엄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를 삶의 동반자로서공동세계의 일원으로서 존중한다는 의미이다그렇기에 그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나와 함께 공동세계를 짓고 있는 그의 활동그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이 된다그의 말을 묵살하고그를 파괴하는 것이야 말로 그의 사이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파괴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이러하다그의 존엄성을 지켜준다는 말은 공동세계에 참여하는 그의 활동과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이 된다존엄에 입각한 안전이란 공동세계에 참여하는 그의 활동과 의견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활동과 의견이 안전한 사회그 사회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받는 사회다그렇지 않고 그저 생물학적 생명이나 보호하는 사회에는 존엄성은 없다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그저 목숨이나 구걸하고 사는 비루한 존재일 뿐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바라봐야 한다혹자들은 그가 시위에 참여했기 때문에그것도 불법’ 시위에 참여했기 때문에 죽음을 당한 것 아니냐고 말한다즉 그의 행위 자체가 그에게 위해를 가한 것이고안전을 저버린 것은 그 자신이기에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안전하고자 하였으면 시위에 참여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이며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자기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저들이 이야기하는 안전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 수 있다저들이 말하는 안전이란 바로 생물학적 생명에 대한 안전이다그 안전을 위해 말하는 존재로서, ‘사이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존엄을 버리라는 말이 된다그 결과 나오는 국가의 명령이 이것이다안전하고 싶으면 가만히 있으라가만히 있지 않으면 위험하며그 위험은 가만히 있지 않은 당신이 자초한 것이다이를 통해 그들은 안전과 존엄을 대치되는 것으로 만들었다위에서 말한 것처럼 존엄 없는 생명비루한 삶이냐 죽음이냐는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엄의 관점에서 이것은 삶과 죽음의 선택이 아니다이것은 죽음과 죽음의 선택이다이미 미국의 도망노예였던 프레드릭 더글러스가 간파한 것처럼 말할 수 없고공동세계에 참여할 수 없었던 노예는 1) 주인 밑에서의 비루한 노예의 과 2) 도망을 가다 총에 맞는 죽음’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1) 주인 밑에서 비루하게 살다 주인의 변덕에 의해 채찍에 의해 맞아 죽는 죽음’ 과 2) 삶을 위해 도망치다 총에 맞는 죽음’ 두 죽음 사이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그는 비루할지언정 삶은 그래도 삶이 아니냐는 말이 사실은 죽음이라는 걸 간파했다.

저들이 말하는 비루한 삶이라는 안전 역시 마찬가지다그 안전은 안전이 아니라 잠시 유예된그러나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죽음이다공동세계에 참여하는 의견과 활동이 없다고 해도 비루할지언정 삶은 보장되리란 기대를 배신한 것이 바로메르스요강남역이요구의역이다가만히 있는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죽을 뿐이다그렇기에 이것은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 아닌 죽음과 죽음 사이의 선택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구해야하는 것은 존엄과 안전이다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안전하기 위해 가만히 있는 삶이 아니라 활동과 의견이 안전한 사회를 요구해야 한다안전하기 위해 시위를 피해 다니는 삶이 아니라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하는 게 안전해야 한다그런 시위 자체가 우리 삶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국가의 무능과 무관심그리고 무모함을 막기 위한 것이면 더욱 그렇다이런 활동이 안전하지 못할 때국가는 더욱 무관심해지고 무능하며무모해지기 때문이다이 위험을 막기 위한 활동이 안전하지 못할 때 국가는 흉기가 되고 삶은 파괴된다.

우리는 안전이 마치 침묵의 대가인 것처럼 말하는 권력에 맞서야 한다대신말하는 것이 안전한 사회를 요구해야 한다우리는 결국 안전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에 맞서야 한다우리가 요구해야하는 것은 '사회'이지 안전을 지켜내는 각자의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안전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존엄을 요구하는 활동이 안전한 사회가 안전한 사회다존엄과 맞바꾼 안전이 아니라 존엄한 안전을 요구하자.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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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통체계 개편,

과연 제주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소수자의 입장에서 교통체제 개편이 이뤄졌나?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관광안내자가 나름 제주에 대해 열심히 안내하고 있다.

"제주버스에는 제주도 이웃이 타고 있습니다"

'제주도 이웃이 타고 있어요'

문장이 참으로 웃긴다. 누군가가 관찰자의 시선으로 제주도 또는 제주사람을 또 다른 방문자에게 설명하는 듯 하다.

'이웃'은 '이웃'인데 '제주도 이웃'이다. '이웃'이면 그냥 '우리 이웃'이지 왜 제주도 라는 부연설명을 달았을까? '제주버스'라는 교통체계의 이름을 달았으면서 굳히 '제주도'라고 밝히는 이유는 멀까? 누군가에게 '제주도'라는 것을 꼭 그렇게 강조하여 설명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 다음 단어도 희안하다.

보통 '이웃'이라고 하면 자신과 관계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을 일컫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이웃'이라는 말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제주도 이웃'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방문객에게 제주도 사람들이 그들의 이웃이라고 강조하는 건가? 방문객이 제주도 사람들과 이웃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건가?

'타고 있어요'. 굳히 설명이 필요한 제주도의 풍경인가? 늘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되어왔고, 구경거리가 됨에 익숙해버린 웃지 못할 관광지의 비애인 듯 하다.

제주지역을 홍보하거나 제주사람들의 삶을 보여주거나, 또는 편리함을 보여주거나 친근함을 보여주거나 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누군가가 제주버스를 구경하고 있고, 누군가가 그 상황을 설명하고 있고, 버스라는 진열장에 놓은 사람들은 아무런 관계도 없이 구경거리로 전락 되어 '제주도 이웃'이라는 어색한 팻말을 들고있다.

문장 한 마디에 뭐 그리 야박하게 따지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제주행정이 제주사람을 보는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아서 아주 불편하다. 우리는 꼭 그렇게 누군가에게 구경꺼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냥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이용하는 버스에도 꼭 관광이라는 시각을 집어넣어야 하나? 구경하는 사람과 구경 당하는 사람을 분리하는, 서로의 관계를 강요하는 듯한 저 어색한 제주교통체계가 나는 아주 불편하다.

그냥, 아주 그냥, 아주 단순하게 '우리 함께 타고 가요'라고 편하게 한마디 하는게 낫지 않을까?

버스를 바라보는 사람에 대한 편협한 시각은 이 뿐만이 아니다.

달라진 버스의 디자인을 보면 타는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따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내를 걷다보면 저 멀리서 뚜렷한 원색의 버스가 오고 감을 잘 알 수 있다. 앞뒷면과 좌측면의 번호도 잘 보이는 듯 하다. 그런데 정작 타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버스 번호가 잘 보이지 않는다. 우측앞면은 버스를 실제 타는 사람이 필수적으로 지나가는 통로이다. 위의 버스 디자인을 보면 버스 탑승구 주변에 노선을 알려주는 글귀가 있다. 탑승하면서 짧은 시간에 읽기에는 내용이 너무 많다. 그리고 내용이 많다 보니 글씨가 작다. 직관적으로 노선을 이해할 수 있는 버스번호는 하차통로 아래에 쓰여져 있다. 버스를 이용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나이든 어르신들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정한 버스 디자인이다. 과거의 버스 디자인보다도 한참을 더 후퇴한 퇴보이다. 교통체계를 개편하겠다고 해놓고서는 대다수의 시각이 더 강화된, 소수자의 시각은 아랑곳하지 않는 참 무심한 개편이다.

소수자에 대한 불편한 시각은 이 뿐만이 아니다. 환승시스템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용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급한 마음이 앞서는 학생들에게는 번거롭고, 어르신들에게는 환승이 어렵기만하고 이동기간이 대폭 길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어르신들에게는 보다 더 많은 정보습득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그 불편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제주도는 버스정류장마다 안내인을 배치해서 교통체계개편에 따른 불편을 해소한다고 하지만, 결국 행정의 정책을 소수자 중심의 시각으로 변경하거나 낮출 생각을 하지 않고, 행정의 생각만을 제주도민들을 가치르치고 있는 형국이다.

제주교통체계 개편과 관련하여 버스전용차로제나 버스중앙차로 등에도 많은 문제가 제기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연구기관의 용역결과만 가지고 밀어붙인 결과이다. '열린행정'이니 '인권행정'이니, '다가서는 행정'이니 말로는 떠들지만 정작 중요한 행정정책은 자신들의 정책을 도민들에게 공부해서 따르라고 한다. 무료니까 더 열심히 배우고 따르라고 훈계하는 듯하다. 정말 자유로운 이동권이라면 소수자들이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권리도 당연히 포함되는게 아닐가? 교통비를 지원해주는 것만이 이동권 보장이 아니다.

형식적 절차만 중시하는 탁상행정, 주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는 엘리트행정이 타지역의 문제가 아님을 제주도 행정이 다시한번 고민해봐야 한다.

제주지역의 인권은 제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성취되어야 하며, 그를 위해서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필수라고 생각한다. 발전과 성장이 중심이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되는 제주 공동체가 되길 바래본다.

끝. 

제주평화인권연구소 ‘왓’ 신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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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7/11/2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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