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국제인권기준에서 본 한국의 집회의 자유
※ 이 글은 최승호 피디의 영화 <자백>과 <그것이 알고 싶다> 1060회 ‘비선의 그림자, 김기춘’의 내용을 참고해 작성하였습니다.
김기춘의 미디어 데뷔, ‘학원침투 북괴간첩단 사건’

기자회견하는 30대 김기춘
1975년 11월 22일,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 수사국장 김기춘이 ‘학원침투 북괴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김기춘은 기자들 앞에서 “북괴의 지령에 따라 모국 유학생을 가장하여 국내에 잠입”한 21명의 ‘간첩’ 명단을 공개했고, 이 ‘간첩’들은 사형 등 중형을 선고받아 장기간 복역하고 일본으로 추방당했다. 당시 재일교포 유학생이 200~300명인 것을 감안하면, 이들 중 10%가 ‘간첩’으로 구속된 것이다.
당시 30대였던 김기춘은 중앙정보부 대공 수사국장으로 사건의 책임자였으며, ‘간첩’들의 자백을 받아내고 ‘북괴를 소탕’한 공로를 인정받아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승승장구_김기춘
김기춘이 ‘간첩’들의 자백을 받아내는데 탁월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간첩을 알아보는 매의 눈? 아니면 누구든 간첩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
간첩을 잡는 특별한 기술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자신의 두뇌”라고.

두뇌대장 김기춘
“간첩은 머리, 두뇌로 잡는 것이지
몽둥이로 잡는 것이 아니다”
1973년에 무려 법무부 ‘인권옹호과’ 과장이기도 했던 그는 당당하게 자신의 ‘두뇌’로 간첩을 잡았다고 했다.
그의 수사에는 인권 침해도 없었고, 과거사 진상규명의 대상도 아니라고. 자신이 고문을 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당당한 김기춘
고문 피해자들, 40년만에 감옥에서 나오다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을 ‘고문에 의한 조작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이어 2012년 6월, 사건의 피해자들이 재심을 청구했고, 무죄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영화 <자백>
당연히 무죄인데 이 소리를 들을 때까지 40년이 걸렸습니다.
-이철, 학원침투 북괴간첩단 사건 고문 피해자
법원은 피해자들을 ‘간첩’으로 볼만한 증거가 없다고 했다.
당시 대부분의 증거는 ‘자백’ 밖에 없었는데 이 자백은 구타, 가혹행위 등 고문에 의해 받아낸 것이라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기밀 누설”이라는 혐의조차 “현 시국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것에 불과”하며 “이미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공지의 사실에 불과”하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간첩이라는 시선 속에서 40년 동안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생활해야 했던 피해자들.
40년이 넘어 진실은 밝혀졌지만, 중앙정보부가 파괴한 한 사람과 그 가족의 인생은 어떤 방법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
한국은 나쁜 나라

피해자 이철
팬티까지 발가벗기고 무조건 패기 시작했습니다. 성기까지 붙잡고 꼼짝 못하게 하고 담배불로 지지려했습니다. 내가 보는 앞에서 내 여자를 겁탈하는 것을 보고싶냐. 장모까지 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정을 했습니다. 모든 말을 들을테니까 그렇게 하지 마시오.
-이철, 간첩 조작 사건 고문 피해자
무죄판결을 받은 이철씨의 아버지는 이철씨가 구속된 날 쓰러서 53살의 나이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약혼녀도 간첩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조국에 기대를 가지고 왔다가 인생이 망가진 채 일본으로 돌아간 사람이 많다.
일본으로 가자마자 죽거나 정신병원에 간 사람도 있다.
수사관들이 멋대로 쓰고 마지막에 강제로 지장을 찍게 했어. 안 찍겠다고 하면 때려 죽인다고 하면서 얼굴을 때리고 내 손을 갖다가 멋대로 찍어버렸어. 한국인은 목적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
-김승효, 고문 피해자
김승효씨는 아직 재심 신청을 하지 않았다. “지옥 같은 세월”을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며 한국에 가는 것조차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당시 고문으로 인한 자백 후 정신이상증세를 보인 그는 치료받지 못한 채 7년을 감옥에 보냈고, 출소한 후에도 일본에 돌아가 수십 년을 정신병원에 드나들며 지금까지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고문피해자, 김승효
암흑의 세월을, 지옥 같은 세월을 잊어버리고 싶단 말이야. 가슴이 아파서 죽을 지경이야. 왜냐하면 무죄로 못됐으니까 죽을 지경이야. 죽고 싶단 말이야. 나는 무죄야.
수사관들은 마치 먹이를 앞에 둔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저에게 굴었습니다. 잠을 안 재운 채, 협박하고 구타하며, 제 몸과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김명수, 재심 청구소송 모두발언 중
“제 사건일지를 가지고 김기춘씨가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온 후, 수사관들은 저를 서울구치소가 아니라 지하 고문실로 데려갔습니다. 3주 동안 그곳에서 취조를 받았습니다. 개돼지 취급을 받으며 강도 높은 취조를 받았어요. 20일 동안 밤잠을 자지 못하게 했어요. 온갖 고문과 언어폭력으로 몸과 정신이 완전히 망가지고 탈진한 상태였어요. 지하실에서 나올 때는, 저는 간첩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 나이 스물여섯이었습니다.
-김명수, 재심 청구소송 모두발언 중
졸지에 간첩 가족이 된 저의 부모형제들은 일가친척, 친지, 교회, 사회공동체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채, 절망과 좌절 속에서 공포의 순간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처럼 고문은 무고한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릴 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한 평생을 송두리째 빼앗는 잔인하고 도구이다.
고문 피해자 있지만, 책임자는 없는 한국
“인권침해해서 간첩 잡았으면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했던 사건의 책임자는 피해자들의 잇다른 무죄판결 속에서도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부활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처벌은 커녕 사과도 없었다. 재심 판결 전까지 당당하게 설교했던 그는 무죄판결이 잇다르자 “자기와 관계 없는” “기억에 없는 일”이라고 했다. 심지어 자신의 친필사인까지도.

2004년, 한치 앞을 모르는 김기춘
무죄판결 나기 전의 당당한 모습

무죄 판결 후 모든 기억을 잃은 김기춘
무죄판견 이후 돌연 기억상실 모드
정신적 육체적 각종 후유증과 싸우며 40년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생활해야 했던 고문 피해자.
40년 내내 한결같이, “공직자”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 없는 사건 책임자.
국가권력이 특정집단에 의해 사유화될 경우,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파괴되고 불행하게 될 수 있는가를 제 사건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겨주기도 했어요.
존경하는 재판관님,
저 개인 한 사람의 희생으로 족합니다. 앞으로 우리 역사에 더 이상 간첩조작사건과 같은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고, 더 이상 저와 같이 희생당하는 주권자 국민이 나오지 않도록 사법정의(司法正義)가 살아있는 사회를 만들어주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김명수, 고문 피해자 재심 모두 발언 중
“자기가 인권침해를 했으면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김기춘은 지금 구치소에 있다. 고문 혐의가 아니라 블랙리스트 개입으로.

김기춘의 운명은?
김기춘의 운명은?
2주 전 오대산 선재길을 걷는 회원나들이가 있어요~
회원 분들이 선재길 걷는 동안 심심하지 않게 하고
주변을 좀 더 관찰하고 살펴보길 바라며 사진 콘테스트를 개최했었지요^^
사진 콘테스트의 주제는 선재길 유래에서 따왔습니다.
선재동자가 걸으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선재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길.
그래서 주제는 '깨달음'
이제 활동가들의 투표로 뽑힌 3작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사진을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독사진/개별사진 및 뒷풀이 단체사진은 사진 정리 후 별도의 방식을 통해 회원 여러분께 공유해드릴 예정입니다.
5월 27일 아침. 일찍부터 통영으로 출발할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사무처 구성원들. 공익인권변론센터 조영관 변호사는 한 손 가득 이름표뭉치를 든 이름표부자가 되었네요!
휴게소는 만남의 광장! 삼삼오오 모여 커피도 나누고 담소도 나눕니다.
드디어 통영 도착, 도착하자마자 점심식사부터 합니다. 한나절 꼬박 달려왔네요. 사진 속 바글바글한 회원들을 보며 이 많은 사람들이 통영까지 왔나 싶으시겠지만, 놀랍게도 이 사진은 회원 중 일부의 모습이 빠져있답니다.
점심식사 후 관광을 마다하고 총회 장소로 먼저 달려온 회원들. 촛불과 정권교체 이후 민변의 활동은 어때야 할지 진지하고 열띤 토론이 이어집니다.
드디어 총회 시작 5분 전!
뮤지컬 <RENT>의 상징과 같은 그 곡, <Seasons of Love>를 개사한 신입회원들의 재치있는 공연도 보고! 모범회원, 모범 모임, 신인모범회원 시상도 이어지는 가운데…
수상자 위치선정의 나쁜 예.jpg…. 아아 박미혜 회원님 어찌하여 얼굴에 글자가 둥둥 뜨는 그 자리에 서셨나요. 안타깝습니다ㅠㅠ
신인모범회원 상을 탄 광주전남지부 공익소송기획단 부단장 홍지은 회원. 열렬히 축하하며 현수막 들고 뛰쳐 나오는 동료 회원분들 덕분에 사진 제목은 이렇게 붙여야 할 것 같네요.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요.jpg”…
총회 마지막, 류민희 회원이 자유발언을 통해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80년대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던 민변만큼이나, 소수자 인권 의제를 놓치려고 하지 않는 2017년의 민변은 너무나도 멋집니다. 이것은 민변의 끊임없는 성찰과 진화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저희가 법률가로서 관념적으로 평등과 반차별 원칙을 금과옥조로 삼을 수는 있지만, 잘 모르는 존재인 성소수자들의 의제에 대해서 회원분들이 감정적으로 느끼시는 것은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좀더 회원 여러분들과 대화하지 못한 점을 통감하기도 합니다.
(…중략…) 하지만 제가 이러한 의제를 대변하는 변호사로서 제가 속한 모임의 동료들도 설득하지 못한다면, 저는 대중 앞에 설 자격이 없는 변호사일 것입니다. 앞으로 모임 안에서 많이 만나고 많이 이야기하겠습니다. 저에게 그리고 많은 성소수자들에게 든든한 안전망이 되어주신 민변 그리고 동지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리고 동료 회원들의 긴 박수가 이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단체사진 한 방!
이렇게 총회가 끝나고,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뒷풀이가 시작됐습니다.
‘찍사’ 김 간사가 뽑은 최고의 포토제닉은 전주전북지부입니다! 이 역동적인 건배! ‘미니 지부’라고 하시더니, 함성은 최고였네요!
다음 날 아침 일찍 소매물도로 떠난 팀이 아름다운 절경과 등산코스를 즐기고 있을 무렵,
통영 관광 후 서울로 올라가는 팀은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건물이었던 세병관을 둘러보러 왔습니다. 세병관의 연원을 설명해주시는 문화유산해설사 선생님의 목소리에 홀린 것처럼 집중하는 회원들. 민변 회원들의 호응이 가장 좋을 때는 1) 퀴즈 내기 할 때 2) 뭔가를 배울 때 라더니, 그 말이 진짜였네요.
이날 문화유산 해설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세병(洗兵)’이란 두보의 시구에서 인용한 구절이라고 해서, 찾아봤습니다! 두보의 <세병마행(洗兵馬行)>(클릭) 중 마지막 구절, ‘安得壯士挽天河 淨洗甲兵長不用‘에서 따온 구절이네요.
이렇게 1박 2일, 민변의 30차 총회가 무사히 끝났습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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