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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성 이야기 –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이주여성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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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성 이야기 –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이주여성 인터뷰

익명 (미확인) | 월, 2016/11/07- 17:24

저마다 고향과 나름의 이유를 가진 이주민들이 우리 곁에서 살고 있습니다. 단일한 배경과 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끼리 사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른바 우리는 문화 다양성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다양함이 서로 어울려 조화롭게 돌아가는 사회를 ‘다문화 사회’라고 합니다. 다문화는 단일한 문화를 내세우는 것에 대치되는 상태 혹은 그 태도입니다.

1990년대 말, 국제결혼과 외국인 근로자의 이주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한국 역시 문화 다양성의 사회로 진입했습니다. <재한외국인처우개선법>, <다문화가족지원법> 등의 법률이 만들어지고,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설립 등 각종 정책이 쏟아졌습니다.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다문화정책은 이제 10년이 되어갑니다. 희망제작소는 새로운 시민으로 우리 곁에 찾아온 이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려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다문화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연구의 일환으로 지난 10월 말 두 이주여성을 만났습니다.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통번역사로 일하고 있는 이주여성 나랑체첵(몽골어 통번역, 6년째 근무) 씨와 주영애(중국어 통번역, 3년째 근무) 씨입니다. 나랑체첵 씨는 2004년에, 주영애 씨는 1997년에 한국에 왔습니다.

우리도 한국인이에요

사람들은 두 사람을 한국인으로 대하고 있을까? ‘혹시’하고 물은 대답은 ‘역시나’였다.

“말을 안 하면 잘 몰라요. 입을 열면 외국인이냐고 묻죠.” (나랑체첵)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인사를 하던 주영애씨는 외국인이냐는 질문이 난감하다고 했다.

“저는 이미 귀화해서 한국인인데, 중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다들 외국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는 사람은 나쁜 뜻이라고 생각 안 하지만, 듣는 입장에선 상처가 되더라고요.” (주영애)

두 사람은, 요즘 많이 회자하는 다문화 가정, 다문화 아동, 다문화인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많은 듯했다.

“다문화라는 것은 여러 문화가 어우러진다는 아름다운 의미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못 사는 국가의 여자들이 한국에 와서 결혼 못 하는 남자들과 결혼하는 것’이라고 인식되는 것 같아요. 끌어안아야 하는 짐, 부담처럼 보이는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저는 20년 가까이 한국에 살고 있고, 또 한국인으로 살고 싶은데 말이에요.” (주영애)

주영애 씨와 나랑체첵 씨는 그동안 진행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지금은 그곳의 직원이 되어 일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다문화사업에 대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생긴 지 10년이 되었거든요. 저는 센터가 처음 생길 때부터 이용해왔어요. 센터는, 열악한 환경에서 코리안드림을 위해 한국에 온 사람들을 끌어안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한국 사람답게 만들기 위한 곳이라고 봐요. 그런데 자국민도 잘 챙기지 못하면서 왜 외국인에게 예산 낭비하냐고, 역차별 아니냐고, 한국인들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데 왜 이주여성 일자리만 지원하냐며 반대의견이 나올 때는 너무 속상합니다.” (주영애)

▲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홈페이지(namyangjusi.liveinkorea.kr)

▲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홈페이지(http://namyangjusi.liveinkorea.kr)


눈치, 성과 압박, 해고의 두려움… 한국의 사회생활

구제대상으로 들어와서 한국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사회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보는 것 같다며 주영애씨는 토로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일하게 되면서 왜 외국인에게까지 일자리 주냐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당시에는 소극적으로 대처했는데요. 속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각각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일하는 외국인 직원은 1~2명이지만, 한국인 직원은 더 많다고요. 즉, 우리 같은 사람들 일자리가 한 개 생기면, 한국인들 일자리도 덩달아 더 많이 늘어나는 게 아닌가’라고요.” (주영애)

곱지 않은 시선에다 엄청난 경쟁률까지 뚫고 하게 된 통번역사 일이 할 만한지 물었다. 녹록지 않다는 표정이 두 사람의 얼굴을 스쳤다.

“통번역사 제도는 2009년부터 시작됐어요. 현재 전국에 300여 명의 (이주여성)통번역사가 있는데, 근무 기간이 짧아요. 우선 한국인들 속에서 적응하기가 어려워요. 행정업무 처리하기도 어렵고, 통번역 외에 센터의 다른 사업도 해야 하고요.” (나랑체첵)

‘일자리는 좋은데, 사회생활 자체가 어렵다’고 나랑체첵씨는 표현했다.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했다.

“우리는 눈치 없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주영애)

“그건 저도 인정해요.(웃음)” (나랑체첵)

한국의 사회생활에서 규정이나 매뉴얼보다 중요하다는 ‘눈치껏 잘하기’. 이들에게는 생소하고 어려운 문화인 것이다.

“직장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느껴요. 중국이나 몽골은 수평관계인데, 한국은 수직관계인 거 같습니다. 눈치로 배워야 하는 게 많아요. 이런 부분은 아직도 어렵죠.” (주영애)

“저는 행정적인 부분이 제일 어렵고 힘들었어요. 뭐 하나 하려면 기획서, 보고서 등 써야 할 게 엄청 많아서 처음엔 엄청 어려웠어요. 물론 하면서 엄청 성장했지만요.(웃음)” (나랑체첵)

눈치로 시작된 이야기는 일자리 처우 개선까지 이어졌다. 6년째인데 막내처럼 일해서 답답한 점, 최저임금이 안돼서 8시간에서 7시간 근무로 바뀌었지만 업무량은 여전하다는 점, 그런데도 성과는 전년 대비 늘 좋아야 한다는 점, 평가를 통해 하위 10%는 재계약에서 탈락하기 때문에 압박도 많다는 점 등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꿈에 그리던 ‘사무직’이고, ‘배울 수도 있는’ 일인데 유지하기 어려운 게 안타깝다고 두 사람은 말한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사는 주영애 씨는 출근하는 데만 2시간 남짓 걸린다. 무려 4시간 가까이 걸리는 시간을 감수하며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한국 오고 20년 동안 안 해본 일 없을 정도로 고생했다며 눈시울을 붉히더니 대답했다.

“전문직을 선호해서 이곳으로 왔어요.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 고려했다면 안 왔을 거예요. 지금까지 일한 곳 중 여기 급여가 제일 적으니까요. 그간 한국 생활을 하며 어려움을 겪은 한 사람으로, 다른 다문화가족에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주영애)

“한국 처음 왔을 때 남편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남편은 좋은 사람 찾아가라고 했지만, 나는 젊었으니 닥치는 대로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느냐 말하고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하지만 어려운 건 어려운 거더라고요. 그러다 통번역사 기회가 와서 정말 기뻤어요.” (나랑체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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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선배로 이끌고 다독여주기

한국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무척 어려웠지만 자신들은 그 단계를 넘어 여기까지 왔으니,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갈 이주여성을 돕는 일을 하고 싶고 또 잘할 수 있다고 했다.

“결혼이민자들의 입장을 잘 알고 있고, 시행착오도 먼저 겪었으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크죠. 또 그들 입장에서도 우리가 다가가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요? 제 도움을 받은 사람이 고마워하거나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저 자신이 쓸모있는 사람으로 느껴져요. 그게 가장 큰 보람이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죠.” (나랑체첵)

“저는 (통번역사 일을 한 지) 만 3년 차에 접어들었는데 그동안의 저 자신을 평가하자면, 놀랄 만큼 많은 성장을 했다는 거예요. 가장 값진 건 한국에서 직장다운 직장을 처음 가지게 된 거죠. 이전에 15년 일했던 것 이상의 의미가 있어요.” (주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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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다문화가정 서포터’ 회의 모습. 서포터들은 이주여성들이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돕는다.

두 사람은,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겪었지만 한국에 잘 정착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다른 이주민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제가 느끼는 보람은, 고통의 시기를 겪고 있는 이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앞에서 줄을 끌어주는 것 같은 느낌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사람들에게 제가 교훈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영애)

경기도의 경우, 이주여성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이용률은 18% 정도다. 두 사람은 숨어있다시피 하는 여성들을 발굴해서 연결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은행, 버스 이용 등의 생활 지원을 하고요.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어요. 제일 중요한 건 잘 안아주고 다독여주는 것인데, 제가 결혼이민 선배다 보니 정보도 많이 주려 하고 잘 이해해주니 많이들 따라오시더라고요.” (나랑체첵)

“작년부터 검정고시반을 맡아서 하고 있어요. 15명이 참여해서 11명이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졸업장을 수여했는데요. 다들 마치 대학 학사학위를 받는 것처럼 기뻐하시더라고요. 덩달아 저도 뿌듯했죠.” (주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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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검정고시반’ 주말 스터디


실질적으로 무언가 할 수 있도록

결혼이주여성들이 목말라 하는 정보 대부분은 취업과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취업도 중요하지만 언어나 한국의 문화를 먼저 익히는 게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에 관해 물었다.

“물론 언어도 중요하죠. 하지만 오셔서 맞벌이해야 하는 분들도 있어요. 빨리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겠죠. 그분에게 중요한 것은 언어보다 돈인 거죠.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그 사람의 사정이고 상황이라고 생각했으면 해요. 그리고 돈을 벌다 보면 한국어가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에 결국 언어를 배우러 오게 돼요. 이 지역만 해도 (이주여성의) 50% 이상이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해요.” (나랑체첵)

그렇다고 돈을 달라거나 특별한 것을 지원해달라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무언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이주여성의 가정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데에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주여성이 일자리 찾기는 어렵고, 그렇게 되면 남편이 혼자 돈을 벌어야 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혼자 돈 벌고, 거기에 아이까지 있으면 힘들어요. 가정에 불화가 생길 가능성도 크고요. 이주여성들은 점점 자신이 없어지고, 한국 사회에서 일어설 기회가 없어지는 거죠.” (나랑체첵)

“아이가 있는 분들은 긴 시간 일하지 못합니다. 시간 짧은 것, 아르바이트 같은 것을 하고자 해요. 그래서 시간을 탄력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봐요.” (주영애)

높은 취업 욕구보다 준비와 노력이 부족한 이주여성들도 물론 있다. 두 사람은, 당장은 아니어도 장기적으로 실질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꾸준한 취업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결혼이민자분들이 아예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에요. 결혼이주여성이 도망가는 사례 등은 좋지 않은 여론을 만들고 큰 화젯거리가 돼요. 하지만 잘하고 계신 분들도 많아요. 저는 모든 게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몇 년이 지나면 적응하고 한국 사람이 되잖아요. 가끔 다문화정책이 잘 되고 있나 의문이 들 때가 있는데요. 숫자와 실적에만 매몰되기 때문이죠. 실제 도움이 되지 않는 사업을 한다거나, 매번 오는 사람들만 지원받을 때도 그렇죠. 많은 사람이 동등하게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해요.” (나랑체첵)

다문화 체감도 높이고 다름 인정하는 태도 필요해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다문화에 대한 인식은 이중적이다. 인터넷에 난무하는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댓글들이 보여주는 한 면과 공식적으로 나타나는 대체로 신중하고 호의적인 인식조사 결과가 또 다른 한 면이다. 2015년 서울서베이를 보면, 자녀의 외국인과 결혼, 외국인 친구, 외국인 이웃 등에 대한 태도는 종합적으로 60%가 호의적이었고, 결혼이민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 해소에는 50.9%가 긍정적이었고, 일자리를 뺏긴다는 우려는 40.5%였다. 여기에 대해 주영애 씨와 나랑체첵 씨는 여전히 낮은 다문화 체감도를 높이고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람은 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다름을 인정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결혼이민자들이 이렇다저렇다 이야기하지 말고, 그 상태 그대로 다름을 인정해주고, 다르면 이상하게 취급하는 시선만 아니었으면 해요. 그리고 잘 적응해서 성공하고, 잘 살아가는 본보기라고나 할까, 이런 사례를 자주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주영애)

“저도 예전에는 외국인인 걸 숨기고 싶을 정도로 조용히 지낸 적이 있어요. 시선 자체가 차가워서 자꾸 주눅이 들었어요. 물론 지금은 숨기지 않고 말하죠. 이건 제가 지금 당당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갑자기 당당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나랑체첵)

주영애 씨는 공교육에 진입하지 못하는 중도입국자녀가 너무 많다며, 이들을 잘 끌어안고 한국문화에 잘 융화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회와 역할을 주고 함께 성장할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옆집에 베트남 사람이 와서 살지만 모르는 경우도 많아요. 다문화가 무슨 상관이냐고 하지만 학교와 직장을 살펴보면 다문화가족 출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출산시대라고 하는데, 다문화가족은 다둥이인 경우가 많아요. 여기에 중도입국자녀들도 있는데, 이 아이들이 적응 못 하는 경우가 수두룩해요. 사람들이 체감을 못 하는 게 이런 것들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인 것 같아요. 중도입국자녀가 한국사회에 문젯거리로 전락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나만 안전하면 된다고 하지만, 안전지대가 없어질 수도 있어요. 이들이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지 않게 하려면 지금 잘 해야 합니다.” (주영애)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차별과 배척의 시선만을 느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제도와 지원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있지만, 무엇보다 따뜻했던 것은 처음 접했던 한국인들의 도움이었다.

“제 아이 역시 중도입국자녀예요. 적응을 굉장히 힘들어했어요. 지금 같으면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을 이용했겠지만, 10년 전에는 그런 게 없었잖아요. 그러다 한국 아주머니와 대학생들이 외국인 근로자와 학생들에게 한국어 가르치는 행사가 있다고 해서 아들과 함께 갔어요. 열정적으로 가르쳐주는 걸 보고 ‘한국 사람들이 무조건 외국인을 싫어하는 게 아니구나’,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엄마 말은 안 듣던 아들이 그때 한국어 가르치던 누나 말은 잘 들어서, 지금도 연락을 하더라고요.” (주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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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인터뷰가 희망제작소 뉴스레터에 실린다고 하자, 나랑체첵 씨는 어떤 사람들이 독자냐고 물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관심 가진 분들이라고 답하니,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고 했다.

“이주민들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눈치가 없어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웃음) 한국 사람처럼 행동하길 바라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일률적인 행동을 기대하지는 않았으면 해요. 우리는 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같아지려 해도 시간이 걸리지만, 같아지려 하는 게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이주민들의) 문화도 존중해주길 바라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런 한국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랑체첵)

이주민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늘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앞으로 살고 싶은 나라가 어떤 곳인지 먼저 물어야 한다. 이주민들이 한국에서 살면서 많은 시간 고민하는 것은, ‘한국인이냐, 아니냐’보다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것, 성장하는 것, 보람을 느끼고 이 사회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혼란스러운 시절을 살아가는 여느 한국인의 모습,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뷰 진행 : 이은경 사회의제팀 팀장 · [email protected]
녹취 및 정리 : 이은경 사회의제팀 팀장 · [email protected]
녹취 및 정리 : 최은영 미디어홍보팀 연구원 · [email protected]

* 인터뷰 참여자의 요청으로 개인 사진은 게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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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회비회원이라 강조하는 여연심 변호사는 민변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에 상당히 미안해했습니다. 하지만 여연심 변호사야말로 민변 밖에서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민변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그라니 맑은 눈으로 어찌나 막힘없이 조리 있게 이야기를 풀어가는지 다른 분들에 비해 턱 없이 짧은 인터뷰 시간에도 숨가쁘게 진행된 그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김지미 오늘 인터뷰도 자기소개로 시작할게요.

 

여연심 저는 법무법인 지평에서 일하고 있는 여연심이라고 합니다. 변호사 된지 10년차고 그래서 민변회원도 10년차 되었습니다. 실제 활동은 잘 못하고 있지만 회비는 꼬박꼬박 납부하고 있다는 말을 꼭 써주십시오. 그리고 지금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이사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여변호사님은 연수원 수료하실 때 화제가 됐던 인물이잖아요. 감히 넘볼 수 없는 연수원 수료 성적이 4등. 저로서는 400등도 어려운데 말이죠.(웃음) 그 정도의 최상위 성적이면 법원으로 가는 게 기정사실화 되고 있던 현실에서 민주노총 법률원으로 가셨어요. 그것 때문에 언론에도 많이 나오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여연심 공부를 하면서 민변 활동 같은 것을 하는 변호사가 돼야지 이런 막연한 상은 있었는데 민주노총 법률원은 잘 몰랐어요. 노동변호사라는 관념 자체가 생소했고 그냥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연수원에 갔는데, 연수원에서 노동법학회에 가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법률원 변호사님들도 알게 되고 실무수습을 그쪽으로 나가면서 더 친해지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가게 됐어요.

 

김지미 민변 활동을 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공부하면서부터 가지고 계셨다면 학창시절에도 공부만 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여연심 대학 때는 쪽방촌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꽃마을이라고, 지금 대법원 맞은편 거기가 원래 저희 대학 다닐 때만 해도 판자촌이었어요. 지금 법률원에 있는 김태욱, 우지연 변호사가 다 저랑 같은 동아리였습니다. 되게 순수한 동아리였는데, 왜 다들 법률원에 갔지?(웃음) 초등학생 아이들 가르치는 공부방이었어요. 들꽃공부방이라고. 지금은 없어졌어요.

 

김지미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판자촌이었으니까, 일종의 빈활 비슷한 건가요?

 

여연심 네. 맞아요. 여름에는 빈민활동도 계속 다녔고, 전철연이라고 철거민 조직하고 같이 연대활동도 할 수 있는 곳도 해보고 그렇게 했었죠. 그런데 주된 활동이 아이들 가르치는 것이었어요.

 

김지미 이런 쪽에 특히나 끌렸던 이유가 있을까요? 대학에도 여러 갈래의 운동이 있는데.

 

여연심 대학에 들어갔을 때 제가 사실 공부하는 것은 별로 안 좋아해서 철학책, 사회과학책 읽는 동아리들은 안 끌리더라고요. 그래서 몸으로 하고 아이들 좋아하니까 아이들 가르치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하게 됐어요.

김지미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오면 그럼 연수원 다니실 때 법원이나 검찰은 생각이 없으셨나요?

 

여연심 특별히 선을 정해놓고 된다 안 된다를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검찰이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어요. 제가 잘 속아 넘어가고 사람을 잘 추궁하지 못해요.(웃음).

 

김지미 부모님이나 주위에서 우려가 있었을 것 같아요. 노동변호사라고 하면 고생할 게 자명하고 실제 법률원 변호사님들의 노동 강도는 세기로 유명하잖아요.

 

여연심 부모님은 아쉬워하시기는 했는데 강하게 반대하진 않았어요. 제가 그때 나이가 31살이었고, 부모님은 제가 하고 싶어 하면 반대를 하는 성격은 아니시거든요. 오히려 연수원 동기들이 성적 좋은데 왜 그러냐며 아쉬워했어요.

 

김지미 법률원이 초창기여서 조금 더 힘들었을 것 같은데 법률원에서 어떤 일들을 주로 하셨고 막연히 꿈꾸던 노동 변호사라는 생활이 기대하던 것과 비슷했었는지 궁금합니다.

 

여연심 지금 법률원 변호사님들이 하는 일이랑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요즘은 비정규직 소송이 늘어난 게 좀 다를까. 그때도 여전히 징계나 해고사건, 노조 관련된 사건, 집시법 관련된 형사사건 위주로 많이 했었어요. 법률원에서 시보를 했었기 때문에 생각했던 변호사 일이랑 크게 다르지는 않았는데, 들어가서 3년 동안 일하면서 느꼈던 것은 내가 더 배우고 이런 일을 했었야 했는데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일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신입 변호사를 위한 교육 시스템이 정말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어요.

 

김지미 그건 민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민변도 최근에는 신입변호사연수 프로그램이 많이 생겼지만, 제가 1년차 때만 해도 그런 프로그램이 전혀 없어서 좀 힘들었었거든요.

 

여연심 맞아요. 저도 그게 제일 아쉬웠던 것 같아요. 제가 지금은 지평이라는 꽤 큰 로펌에서 일을 하는데 법률사무소가 크면 교육시스템이 잘 되어 있을 수밖에 없고, 거기에 투자를 많이 할 수 있어요. 그만큼 여력이나 비용도 있고 이 사람을 키우는 게 자산이 된다라는 것을 알고 유기적으로 돌아갈 수 있거든요. 그런데 법률원이나 여러 공익인권변호사 단체는 그게 힘들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 저는 민변에서든 변호사단체에서든 그런 교육의 역할을 잘해줘야 한다라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민주노총 입사하면서 남긴 한마디가 저는 와 닿던데요.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을 하면서 필요한 만큼 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사건수임은 거절한다.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그런 것이 기쁨을 준다’ 이거 여변호사님이 하신 말씀인가요?

 

여연심 제가 직접한 것이 아니라 아마 그때 경향인가 어디에서 법률원 변호사 전체를 취재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권두섭, 송영섭변호사님 다 나왔던 그런 기사였으니까 누군가가 하신 말일 것 같아요. 그런데 다들 이런 생각을 갖고 일했었던 것은 맞아요. 지금도 그러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지미 해야 할 일을 하면서 필요한 만큼 번다. 되게 좋은 말인 것 같아요.

 

여연심 필요한 만큼 잘 버시는지 늘 걱정이에요.

 

김지미 민주노총에 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소송 중에 하나로 뉴코아 비정규직 투쟁을 꼽으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여연심 1년차 때부터 해서 기억에 많이 남는 것도 있고, 그때 기간제법 시행 때문에 뉴코아와 이랜드 노조에서 공동으로 투쟁을 조직을 했는데 제가 뉴코아를 담당한 변호사인 셈이었어요. 투쟁을 준비할 때부터 노조분들하고 밀착해서 여러 가지 조언들을 많이 해주기도 하고 물론 제가 배우는 게 더욱 많았지만 그런 관계를 맺어서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너무 친해져서 나중에 제가 객관성을 잃어서 좀 힘들었어요. 몇 달 동안 수배생활을 하는 김호진 당시 부위원장님은 제가 정말 좋아하던 분이었기 때문에 못나가서 너무 괴로워하고 극단적인 생각도 때로는 하고 이런 걸 다 알게 되니까 같이 괴로웠어요. 지난주에 그 당시 다른 부위원장님 한 분이 있는데 그분을 만나서, 소주를 한 잔 했거든요. 그 분들이랑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그때 노조활동했던 분들 해고당했던 분들이 다 그 뒤로 여러 가지로 힘들다고 알고 있어요. 다시 비슷한 직장에 취직하기도 어렵고.. 그래도 자기는 그때로 돌아가면 다시 똑같이 투쟁할 것이란 얘기도 하시고. 이런 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갑자기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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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주위에 여러 우려에도 민주노총 법률원에 가셨는데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3년 정도 있다가 국선전담변호사로 진로를 바꾸셨어요. 이전에 인터뷰 하신 걸 보니까 노동·형사사건에 관심이 있었다라고 말씀하신 게 있던데, 관심 있어 하는 분야의 일을 하고 싶어서 국선전담을 선택하셨던 건가요?

 

여연심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법률원을 그만두게 됐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때 로펌으로는 가기 싫고 개업할 자신은 없고, 저는 그때는 노동사건을 하면 법률원의 업무를 뺏는 셈이 된다고 생각을 해서 좀 꺼려지더라고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국선전담이 그러면 여러 가지 타협책으로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서 지원을 해서 됐죠.

 막상 전담을 해보니까 제 성격은 일을 찾아서 하고 싶은 성격인데, 되게 좋은 일이지만 적성에는 잘 안 맞는 것 같아서 일자리를 찾다가 지평 쪽에서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1년 10개월하고 그만두게 되었어요.

 

김지미 제가 알기로는 국선전담 끝나고 지평으로 바로 가신 건 맞는데 그 사이에 법원에 지원을 하셨었죠?

 

여연심 네. 맞아요.

 

김지미 그런데 안 되셨잖아요. 연수원 성적이나 국선전담 경력 등을 봤을 때는 경력직 법관으로 여변호사님만한 분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여연심변호사가 안되면 민변에서는 아무도 법원으로 갈 수 없다는 얘기도 돌고 그랬어요. (웃음).

 

여연심 저도 왜 떨어졌는지 모르니까 뭐라고 말씀 드릴 건 없는데 제가 민노당, 진보신당 활동을 하다가 탈당을 한 상태였는데 당 활동에 대해서 소명서를 내라고 하더라구요. 그거 때문이 아닌가 추측만 할 뿐이죠.

 

김지미 지평에 가신지 4년 정도 되신 것 같은데 지평이 공익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두루라는 법인을 따로 만들었잖아요. 지평에서 특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공익활동 분야는 어떤 건가요?

 

여연심 두루에 지금 일하시는 변호사님들이 세 분이세요. 예전보다 영역을 계속 넓혀 나가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장애인권 관련해서 임성택변호사님하고 많이 해왔었고요, 요즘은 기업과 인권분야라거나 아동인권분야 등으로 공익활동이 훨씬 체계화되고 있어요. 변호사의 자문이나 이런 것이 필요한 사건도 이분들이 많이 매칭해주시고 그렇게 하고 있어요.

 

김지미 공익활동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해보면, 대형 로펌들이 나서서 공익을 전담으로 하는 새로운 법인을 세우는 추세이긴 한데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공익변호사들을 지원하는 측면에서는 부족한 면이 있거든요. 여변호사님이 현재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이사를 맡고 계신데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실 것 같아요.

 

여연심 네. 제가 인권이사로 있다보니까 여러 공익활동을 하는 변호사님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어려움이 많으시더라고요. 상대적으로 로펌소속으로 일하는 변호사보다 외부에서 자립해서 일을 해야 하는 공익변호사 단체들이나 나홀로 일하는 변호사님들에게 어떻게든 공적으로 지원이 필요하겠다라고 생각을 하게 됐고,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봤을 때 자립을 지원할 수 있는 초기단계가 제일 중요한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이 자립이라는 것이 금전적인 자립도 필요하지만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서 훌륭한 공익변호사로 잘 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게 선배 변호사들이나 변호사단체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을 해서 지금 가칭이기는 한데 프로보노지원센터라는 것을 서울지방변호사회 산하에 만들까하고 기획하고 있는 초기단계에 있습니다.

 

김지미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이사가 되신 지 1년 정도 되셨잖아요. 지난 집행부 때와 현 집행부의 인권위원회 역할을 보면 큰 차이가 있어요. 이건 순전히 인권이사의 역할 때문이다라는 게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어떠신가요?

 

여연심 독재체제라서 그래요(웃음).

 

김지미 여변호사님이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이사를 하시고 나서 의미 있는 사업들이 몇 가지가 있었어요. 집회현장에서의 인권침해감시 활동도 있었고 그밖에 여러 가지 기대할 수 없었던 성명이 나오기도 하고, 소녀상 지킴이 학생들도 만나시고 인권위에 진정을 하기도 했죠. 방금 말씀하셨던 프로보노센터도 기획단계이고. 인권에 대한 진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인권이사를 하시면서 어려웠던 점은 어떤 게 있을까요?

 

여연심 기획을 해야 하는 것이 많아서 좀 힘들었고 작년에는 조영래변호사님 기념사업을 제 소관 하에 해서 회사일을 조금 줄이고 그 일에 전담할만큼 일이 많아서 좀 힘들었어요. 그런데 이런 거는 그냥 열심히 일하면 되니까. 또 직원들도 워낙 일을 잘 해줘서 별로 어렵지 않은데, 회원들간의 눈높이를 어떻게 맞춰야 할까가 되게 어려운 부분인 것 같아요. 서울회는 회원들이 내는 회비로 운영이 되는 회원조직이니까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전화해서 항의하는 회원님들도 많이 계세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일들 중에서 그 일을 반대하는 회원들도 개인적으로는 싫지만 저 정도는 할 수 있지 라고 양해할 수 있는 그 접점을 찾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실제로 인권위원회에서 제안했지만 못한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를 찾기 위해 다른 집행부나 회장님·부회장님이나 하고 계속 얘기를 하면서 설득도 하고, 제가 설득을 당하기도 하고. 그게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김지미 민변하고는 다르게 서울지방변호사회는 연령층이나 가치관이 다양한 사람들이 다 구성원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사업에 대해서 다 동의를 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러면 기존의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에서 했던 것 중에 가장 큰 반대에 부딪혔던 사업은 뭐에요?

 

여연심 반대에 부딪혀서 아예 못한 것들도 있구요. 한 것 중에서는 작년에 변호사회관 지하1층에서 노동인권토론회를 했었는데 그 안은 한 번 부결되고 다시 올려서 결국 가결이 됐었어요. 이때는 노동인권이라는 주제를 서울변회에서 다룬 적이 없었는데, 제가 내 관심분야인데 어쩔꺼냐 라는 식으로 약간 질렀어요. 그런데 어쨌든 회원들도 많이 오고 되게 성공적이고 재미있게 잘돼서 거기서 기운을 받아서 그 뒤로 서울회 혹은 서울회 인권위원회 주최로 몇 차례 그런 식의 토론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김지미 2년이라는 시간이 뭔가 제대로 일하기에 짧은 시간일 수도 있잖아요.

 

여연심 아니에요~~(웃음).

 

김지미 서울회도 2년에 한 번씩 집행부가 바뀌기 때문에 사업의 연속성이 담보가 안 될 수도 있잖아요. 아까 말한 것처럼 다양한 층위의 회원들이 있으니까요. 이제 임기가 1년 남았는데 남은 1년 동안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을까요?

 

여연심 물론 집행부가 바뀌고 또 우리 회원들 생각이 바뀌면 하던 사업도 접을 수 있고 또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어쨌든 저는 우리나라에서 공익변호사들이 점점 더 많이 생기고 있고 그러면서도 초기단계니까 프로보노센터를 제도적으로 안정화시켜서 장기적으로 공익변호사님들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싶고요, 그 다음에 이게 참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라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집회시위감시단은 올해도 꾸준히 해서 언론에도 나오고 우리 회원들한테도 알리고 이렇게 해서 서울변호사회는 문제가 있을 때 이렇게 가서 인권침해감시활동을 하는구나라는 것을 인식시켜서 이런 활동이 앞으로도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이예요. 거기다가 더해서 인권위원회 차원에서 인권침해현장을 많이 찾자고 위원장님이 얘기를 하셨고 다들 동의를 하셨잖아요. 저도 거기에 동의를 해서 집행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데, 그런 활동 많이 해서 아 지방변호사회가 이렇게 찾아가는, 찾아가서 직접 침해 사실을 발굴하고 구제하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라는 그런 게 남아있도록 그렇게 활동을 하고 싶어요.

 

김지미 집회에서 인권침해감시단은 2번을 나갔었죠. 처음 나갔을 때는 집회 참가자들이 우리를 경찰 쪽 사람인 줄 알고 적대적으로 대하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이게 안착이 되려면 많이 알려져야 되는 것들도 있을 테지만 내부적으로 이런 점들은 보완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점이 있을까요?

 

여연심 아직 2번밖에 안 해서.. 이건 정말 실험적으로 해본 셈인데, 아직 초기단계여서 특별히 더 바랄 건 없을 거 같고 집회가 단지 주말에 있으니까 애기들을 봐야하는 부모님들이 나오기에는 굉장히 어려워요. 특히 날씨도 춥고 이러면. 그래서 아쉽다기보단 이걸 어떻게 하면 인권위원들도 힘들지 않고 잘 할 수 있을까 그게 고민입니다.

 

김지미 프로보노센터가 아직 기획단계이긴 하지만 구상하시는 큰 줄기만이라도 설명을 해 주세요.

 

여연심 네, 어디까지나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씀 드리면 큰 줄기는 센터라는 기구를 독립적으로 만들고 센터장님도 모실 생각이에요. 꼭 상근이 아니더라도 이 센터 일을 중심으로 하는 분을 모시고 우리 회 직원들하고 함께 결합해서 주로 하는 업무는 프로보노 단체들을 지원하고 프로보노를 육성하는 거죠. 그래서 자립지원 펀딩도 해서 가능하면 많은 인원에 대해서 일정한 금액을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싶어요. 이거는 제가 개인적으로 꼭 하고 싶은 사업입니다. 그렇게 지원하는 사업과 교육하는 사업, 초반에 공익변호사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자리를 잘 찾아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교육사업을 생각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공익전담이 아닌 변호사님들 있잖아요. 일반 개업한 변호사님들이나 공익활동을 하고 싶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매칭해주는 사업도 생각을 하고 있고, 그 다음에 공익변호사 활동이나 공익전담변호사들에게 도움이 되는 간행물 같은 거나 아니면 책자 같은 것을 만들 계획도 세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작년에 나우에서 지원해서 만든 공익입법메뉴얼 같은 거요. 그 다음에 공익변호사별로 이 주제를 좀 더 연구해보고 싶은데 비용적인 지원이나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 하면 연구비 지원 같은 사업도 해보고 싶고요, 그 다음에 공익변호사 단체나 개인이 해외랑 접촉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국제대회 참가할 때 그런 것을 지원하는 부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꿈이 엄청 거창하죠.

 

김지미 6개 정도 말씀하셨는데, 결국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사업이고 일례로 펀딩을 얘기를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식의 펀딩을 생각하고 계시는지.

 

여연심 이거는 사실 회 내부 문제인데요, 회원들에게 돈을 받거나 이럴 생각이 있는 것은 일단은 아니에요. 지금 회에 있는 예산에서 일정부분을 공익변호사를 위한 기금같은 것으로 적립하거나 아니면 회에 여러 수입이 있잖아요. 그 수입 중에 요 부분은 이 기금으로 적립한다거나 이런 방식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공감에서 하고 있는 공익변호사 자립지원사업 같은 그런 거네요.

 

여연심 그걸 그대로 베낀 겁니다(웃음).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으시겠다 하셔가지고. 공감 변호사님도 매우 기뻐했어요. 공감도 앞으로 계속하시겠지만 많이 하면 좋으니까요.

 

김지미 제 개인적으로는 민변에서도 이런 사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민변 회원들이 여러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것도 좋지만 1-2명 선정해서 이것만 제대로 해봐라라고 지원을 해주는 것도 민변으로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라고 보거든요. 어쨌든 서울회에서라도 하셨으면 정말 좋겠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교육사업 같은 경우는 민변에서도 교육사업 굉장히 신경 쓰고 있는데 인적자원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교육사업은 구체적으로 어떤 구상이 있으신 거에요?

 

여연심 김지미변호사님도 들어와 계시지만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에 공익인권교육TF를 만들었어요. 일단은 전체회원들 상대로 국제인권법 강의를 할 예정입니다. 4-5월, 2달에 걸쳐서 할 예정인데,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 TF가 센터랑 결합을 하든지 구체적인 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공익인권활동과 관련된 심화학습, 실무적인 교육 이런 것도 가능하면 해야겠죠. 강사진 구성이 문젠데, 강사진 구성은 오랫동안 공익변호사 활동을 해오신 분들한테 맡겨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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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이제 민변 얘기를 좀 하면 여변호사님은 노동위 소속이시죠.

 

여연심 네~활동은 못하지만 노동위 회비도 꼬박꼬박 내고 있다고 꼭 좀 말해 주세요.(웃음)

 

김지미 지금이야 워낙 바쁘시니까 활동을 하기가 쉽지는 않으실 텐데 처음부터 회비 회원은 아니셨던 거죠?

 

여연심 사실은 처음부터 회비회원이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1년차 때 민변에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당연히 노동위 활동을 했고, 그때는 법률원 변호사들이 노동위에 결합을 많이 못했어요. 법률원이 생긴지 얼마 안 된 조직이라서 자기 안정화가 힘들었던 때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노동위 수요모임에 나와 본 것이 3번 밖에 안돼요. 그래서 뭐 먹었는지도 다 기억나요(웃음). 중국집 호화반점에서 짬뽕 먹은 거. 두어 달 전에 도시락 먹은 거. 그래서 이게 부끄럽기도 하고 간사님께도 늘 죄송합니다.

 

김지미 저희가 처음에 뉴스레터 인터뷰 기획했을 때 회비회원들 인터뷰를 하면 좋겠다는 분이 계셨어요. 회비회원들이 무슨 생각하는지 물어보라고(웃음).

 

여연심 드디어 그걸 지키셨군요.(웃음) 저는 회비로밖에 기여하지 못해 늘 죄송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민변 회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아요.

 

김지미 그럼 회비회원으로서 민변에 바라는 점을 들으면서 인터뷰 마칠까 합니다.

 

여연심 이렇게 좋은 곳으로 이사도 오고 참 좋아요. 단, 좀 추운 것 같아서 온풍기도 구입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웃음) 저는 회비회원이라 너무 부끄러운데 늘 돈도 안 되고 건강에도 별로 좋지 못하는데 열심히 하는 회원들과 사무처에서 일하시는 분들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노동위 텔레그램방을 정말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보거든요. 다들 그러시겠지만 우리 훌륭한 회원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구나라는 걸 보면 되게 힘도 나고 자랑스러워요. 그래서 너무 힘들거나 지치지 않게 계속 그런 활동을 하면서 우리가 뭘하고 있다라는 걸 회원들한테 많이 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듣는 것만으로도 회비회원들에게는 힘이 됩니다. 회비 많이 벌게요.(웃음)

 

김지미 여변호사님이 민변의 지향과 동떨어진 일을 하고 계신 건 아니기 때문에, 민변에서는 여연심변호사님이 우리 회원이라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바쁘신데 점심도 못 드시고 이렇게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연심 네~감사합니다.

 

월, 2016/02/15-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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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회원 인터뷰, 그 마지막은 전주전북지부 박재홍 변호사입니다. 시간과 거리의 한계상 수차례의 전화와 메일이 오고 간 서면+전화 인터뷰가 되었는데요. 몇 번의 전화통화만으로도 어찌나 즐겁던지 한 번 꼭 시간을 내어 전주에 가서 막걸리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멋진 회원이 많은 민변, 역시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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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먼저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박재홍 안녕하세요, 민변 전북지부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박재홍 변호사라고 합니다. 변시1회이구요, 5살 1살 두 아들의 아빠이자 남편으로 육아에 힘쓰고 있습니다.

 

김지미 이번 총회에서 모범회원상을 수상하셨는데 소감을 다시 한번 들어볼까요?

 

박재홍 아직 제가 받기에는 너무나도 큰 상인데, 이렇게 큰 상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 지부 회원들은 총회에 참석하면 소수이기도 하고 대다수 활동은 본부와 서울에서 이루어지기에, 총회는 우리의 축제라는 인식이 약했거든요. 그런데 지부 회원에게 상을 주시니까 지부 회원들에게 많은 격려가 될 것 같습니다. 훌륭하신 선배님들이 받던 상을 막상 제가 받고 나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고, 매일 출근하면서 책장에 모셔둔 상패를 보면서 ‘내가 이 상을 받은 거 맞지?’라고 되묻곤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내아이 둘을 양육하느라(아내는 저 포함 아들 셋이라고 가끔 농담을 하지만) 고생하는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김지미 매일 출근길에 되새길 만큼 민변 모범회원상이 변호사님께 큰 의미인가요?

 

박재홍 변호사가 되기 전에 바라 본 민변은 저에게 굉장히 큰 존재였거든요. 그리고 해마다 모범회원상 수상하시는 선배님들을 보면서, 와 정말 존경스럽다란 생각이 절로 들었는데, 그런 상을 제가 받게 되니 실감이 나질 않지요. 그래서 그런 큰 상을 일단 받기는 받았으니, 이제부터라도 그에 걸맞는 변호사가 되어야겠다라고 다짐하고 있어요(웃음).

 

김지미 이번 모범회원상은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했는데 박변호사님이 수상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박재홍 얼굴 때문이 아닐까요?(웃음) 농담이구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제가 상을 주신 분께 여쭙고 싶은데요, 아무래도 지부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무국장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그 대표 격으로 저에게 상을 주신 것 맞죠? 석명을 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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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작년 가을에 전주지부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전주 지부는 회원 수도 적고 솔직히 말씀드려 그다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인상은 못 받았는데 그 이후에 회원 수도 많이 늘고 뉴스레터 지부 활동 소식을 보면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이러한 동력이 어디서 나왔다고 보시나요?

 

박재홍 작년에 가시적으로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셨다면 사무국장으로서 소임을 다 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긁적 긁적). 저희 지부는 2000년 초경 전봉호, 안호영, 박민수, 황규표 변호사님을 주축으로 지부에서 자생적으로 창립되었습니다. 회원 수가 많지는 않지만, 선배 변호사님들 한 분 한 분이 전라북도 곳곳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계시거든요.

작년 봄부터 지부장이신 장석재 변호사님과 한 뜻으로 회원 확대 사업을 우선으로 우리 지역 로스쿨 학생들과의 교류를 확대하자는데 마음을 모았습니다.

이후에 후배 변호사님들이 대거 회원으로 가입하셨고, 전북대 원광대 법학전문대학원생들과 간담회, 봄산행 등을 진행하면서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얼마 전에는 ‘민변전북지부 회원들과 법학전문대학원생들의 인권감수성 향상을 위한 워크숍’이란 거창한(?) 표제로 선후배님들과 함께 1박 2일간 동고동락했습니다. 참, 제가 워크숍 간 동안 시커먼 두 아들 덕에 고생한 아내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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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인 활동에 대한 동력은 아무래도 지부장님의 강한 의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부장님께서 저희 젊은 변호사들에게 자주 하시는 말씀이 “우리 장년층 변호사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민변과 소통하고 있거나 요청이 들어오는 단체에 젊은 변호사님들을 적극적으로 연결해 줄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 지역 민변 변호사 수가 적어서 지역에 있는 각종 시민단체나 노동조합의 일들이 일부 변호사들에게 집중되면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에 버거웠지만, 이제 후배 변호사님들이 많이 들어오셔서 시민 단체들과 적극적으로 호흡하면서 우리 지부 변호사님들의 역할이 더욱 커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와 동시에 젊은 변호사님들이 이 지역에서 자리를 잘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지부장님의 의지 덕분에 지역 사회에서 저희 지부에 거는 기대가 더 커지고 있고, 저희 지부도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작년 세월호 사건 이후에 있었던 범시민단체 릴레이 단식농성에 참여했었는데, 한 활동가 한 분이 ‘이제는 민변이 선봉에 서시네요!’라는 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향후 지부장님과 함께 현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저희 지부가 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신용비어천가인데요~(웃음) 솔직히 지부장님보다는 실무를 하는 나의 역할이 지대했다..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시지는 않는지요?

 

박재홍 그건 아닌 것 같구요(웃음), 이미 선배들이 형성해 놓은 토대 위에 지부장님이 방향을 잘 잡으셨고, 무엇보다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지미 그렇게 말씀하시면 민변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분께 상을 드린 것처럼 되잖아요(웃음). 이 참에 자랑을 좀 해 주세요. 제가 이만큼 했습니다. 지난 1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이런 거요

 

박재홍 전주지역에는 버스파업이 큰 문제인데요, 2012년도에 전주지역 시내버스 회사들이 약 3개월 정도 직장폐쇄를 하였는데 이 직장폐쇄가 위법하다는 이유로 저희 법인 선배이자 민변 선배이신 안호영 변호사님과 임금 청구 소송을 수행하였고, 얼마 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하여, 버스 노동자분들의 생계와 전주지역 버스 문제 해결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2년도에 우리 지역 진보 교육감이신 김승환 교육감님이 직무 유기로 형사재판을 받으셨는데, 민변 회원들이 힘을 모아 대법원까지 무죄 판결을 이끌어 내었고, 우리 힘으로 진보교육감을 지켜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통일교사로 알려진 김형근 선생님이 인터넷 게시판에 북한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고, 하드디스크에 북한 신년사 등을 소지, 거주지에 이적표현물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에서 김희수 변호사님, 안호영 변호사님, 이민호 변호사님, 김현승 변호사님과 함께 변론을 준비했었는데, 디지털증거에 대해 공부도 하고, 공동변론을 위해 중간에서 여러 가지로 바빴었거든요, 수사기록이 2박스 정도 되었던 걸로 기억나는데, 최종 정리는 제 몫이라…그런데 결론이 만족스럽지 못하여 아쉬웠습니다. 지금 항소심 재판 중인데, 선생께서 그 사이에 과도한 스트레스 등으로 중병에 걸리셔서 죄스러운 마음이 큽니다. 선생께서 비슷한 사건으로 집행유예 기간이셨고, 유사 사건 경험을 토대로 나름 최대한 조심하신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이분께서 스크랩하여 올리신 글이나 하드디스크나 주거지에 보관하고 있었던 자료가 우리 사회의 근간을 위협할 정도인지 납득이 가지 않았고,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남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해당 사건의 변호인의 한 사람으로서 개탄스럽습니다.

아, 제가 잠시 흥분을 했네요.

생각해 보니 바쁘게 산 것 같긴 한데 사무국장 일은 티가 잘 나지 않는 것 같아요. 지부 사무국장으로서 매월 간담회를 준비하는데, 모임 일정을 팩스로 보내고, 단체문자 보내고, 미회신 회원들에게 전화 돌리고 그러지요. 일정 끝나면 장부에 영수증 정리하고, 회의 내용 정리 하구요. 한 가지 제가 총무를 맡으면서 잘 한 것은 지부 통장을 다시 개설하면서 전용 카드를 만들었는데 회계의 투명성을 높이고 있습니다(웃음).

 

김지미 전주 지부가 최근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활동은 어떤 것인가요?

 

박재홍 작년 한 해 동안 지부 회원들을 모집하고 로스쿨 학생들과 교류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올해는 시민사회 단체들과의 소통에 중점을 두고 ‘1시민단체 1변호사’라는 구호 아래 젊은 변호사들이 전라북도 곳곳의 시민 사회단체들과 호흡하고 교류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 주세요

 

박재홍 민주노총 전북본부에 저와 저희 지부 이동현 변호사님이 매주 상담을 나가고 있고, 작년 초부터 전주 여성의 전화 부설 가정폭력상담소에 저희 지부 회원 4명이 출장 상담을 나가고 있습니다. 현장에 가서 상담을 하다 보니 만족도가 높고, 청년 변호사들의 활동 반경도 넓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여, 올해 초부터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에 2명, 전북환경운동연합에 2명, 전주 공무원노조에 2명, 남원․순창․장수 공무원노조에 각 1명, 전북 교원노조에 1명을 각 고문 내지 전담 변호사로 활동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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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박변호사님은 이 중에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박재홍 요즘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위한 시민 추진위원’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평화의 소녀상’이라고 들어보셨죠? 일본군 위안부 대사관 앞에 세웠던.. 그 소녀상을 전국적으로 설립하는 운동이 지역별로 있는 걸로 알고 있고, 전주에서도 이 운동이 전개되어 다음 달이면 시민들의 이름으로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게 됩니다.

학부 시절 모의재판위원회라는 학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하여 모의법정을 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할머니들을 초청해서 모의법정을 열었었는데, 그 때 저랑 동기 한 명이 일본군 측 변호사단 역할을 했었는데, 할머님들이 저희 연기를 보시고 방청석에서 고성으로 화를 내시며 울부짖으셨던 것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만 해도 할머님들 6-70대로 정정하셨는데, 많이 돌아가시고 남은 분들도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조속히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길 바랍니다.

제가 집행위로 활동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시민 법정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우선은 제막식을 하고 예산이 남을 경우 추진해 보기로 했습니다. 학부시절 모의 법정을 끌어주셨던 김창록 교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자료도 받았고, 예산도 많이 남을 것 같은데, 내년 즈음으로 하여 전북 지역 시민 단체, 학생들과 함께 고민해서 시민 법정을 한 번 세워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법학전문대학원 2학년 때, 동기들은 검찰이나 법원에 실무교육 받으러 바빴었는데, 저는 성당에서 중고등부 교리교사 회장을 하면서 학생들 캠프를 준비했었습니다. 교회나 성당 다니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여름에는 학생들을 위한 캠프를 준비하는데 여간 바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을 여건이 좋지 않은 학생들에게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커서 시작했었는데, 그런 활동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지요.

 ‘전라북도 학생인권 조례’는 서울, 광주, 경기에 비해 나름 진일보한 조례로 제정되었는데, 이 조례에 근거한 ‘학생인권심의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교육 문제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지미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방송 출연도 활발히 하신다던데요?

 

박재홍 아… 올해 초부터 KBS1(전주)에서 ‘경제가마솥’이라는 프로그램에 격주로 패널 활동을 하고 있어요. 올해가 양의 해잖아요? 1월 2일에 전북KBS ‘아침마당’에 양띠 특집으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나가게 되었고, 저는 주로 이슈와 관련된 법률적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딱딱한 법률 이야기나 경제 이야기를 일반 시민들이 지루하지 않게 전달하려고 제 나름대로는 개그도 하면서 노력하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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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 보니 전북아침마당 5월 가정의 달 특집으로 저희 회사 여직원들과 노래자랑에 나간 적이 있는데, 시청자들을 웃기고픈 마음에 대머리 가발을 쓰고 유치한 춤을 추기도 했네요. 부끄럽습니다(웃음). 혹시 찾아서 사진으로 올리진 말아 주세요(두손 모으고 불쌍한 표정으로).

 

김지미 박변호사님은 어떤 계기로 변호사가 되셨나요?

 

박재홍 제가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전자공학을 전공했었어요. 노래를 좋아해서 민중가요 노래패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서 자연스레 학생회 활동도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가 많다는 것을 하나씩 알게 되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지극히 1차원적인 생각이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막연히 학교를 그만두고 법대에 다시 입학을 했습니다.

법대 들어갈 당시부터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고, 사람을 쫓아 학회 활동하고 집회 참여도 하다 보니 당시에는 사법시험을 볼 엄두는 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제가 지금 전주에 살게 된 계기이기도 한데, 대학 때 지금 있는 곳에 교류학생으로 와서 2년 동안 음주, 가무, 사람 ‘3독’(불가에서는 탐, 진, 치라던데…)에 빠져 잘 놀았습니다. 그렇다고 음주가무만 한 것은 아니고요, 교환학생은 듣고 싶은 과목을 우선적으로 수강신청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는데, 그 때 단과대 별로 제가 듣고 싶었던 다양한 과목을 들으면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20대 후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나는 왜 태어났나?’‘뭐하고 살아야 되나?’라는 화두를 안고 유럽으로 한 6개월 정도 어학 연수 겸 방랑 생활을 했습니다. 6개월 간 먹고, 자고, 걸어 다니면서, 살아 있다는 존재 자체로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복잡한 고민들을 떨쳐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법학전문대학원이 생긴다는 발표가 있었고, ‘아 이건 내가 변호사가 되라는 계시다’라고 생각하면서 변호사가 되기 위해 2009년도에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변호사가 된 것은 아닌 것 같고요, 지금생각해 보면 1차원적인 생각이지만 막연히 사람을 도와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법대에 진학하게 되었고 운이 좋게도 서른 즈음에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을 해서 변호사가 된 것 같습니다.

 

김지미 변호사가 되고 나서 민변에 가입하게 된 계기는요?

 

박재홍 민변에 가입하게 된 것은 법학전문대학원 2학년 시절에 민변에서 실무 수습을 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당시 김선수 변호사님이 담당 변호사님이셨는데, 복잡하고 다양한 사건을 처리하시면서도 늘 평정심을 잃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배려해 주시는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이 멋져 보여, 수습이 끝날 즈음 김선수 변호사님께 추천사를 써 달라고 부탁을 드렸지요.

학부 시절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하던 한 선배가 술자리에서‘나중에 변호사가 되거든 꼭 민변에 가입해라, 만약 가입 안하면 나한테 주먹으로 맞을 각오해라.’라고 말했고, 저는 꼭 그러리라 다짐을 했었는데, 지금 민변 변호사로 나름 열심히 활동하고 있으니, 그 선배와의 약속은 지킨 것 같습니다.

변호사 합격여부가 발표되기 전 2달 정도 지역에 있는 비정규직센터에서 근무를 하다가, 우리 지역에 민변 선배이신 안호영 변호사님과 함께 지금 근무하고 있는 법무법인 백제에서 수습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었구요, 자연스레 민변 사건도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한 때는 시민단체에서 상근으로 일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물론 받아 주실지는 여쭤봐야겠지만요, 지부 민변 사무국장으로 시민 사회 단체의 다양한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접하면서 변호사로서의 역량이 일천하다는 것을 깨닫고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열심히 배우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부산 출신인데, 사무실 이름은 ‘백제’라서 가끔 “신라 사람이 백제에 와서 일도 하고 백제 처녀 만나서 아들 둘 낳아 잘 키우고 있으니, 우리 사무실과 제 가정이야 말로 동서 화합의 모범이다”라고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김지미 부산 출신이신데 어떻게 해서 전주에 터를 잡게 되셨나요?

 

박재홍 대학시절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전주에 왔다가, 성당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성당오빠나 교회오빠가 무섭다지요?) 처음엔 와이프가 프로포즈를 받아줄 때까지 전주에 있겠노라고 다짐했다가 결혼하고 아이들도 낳고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지금은 전주가 제2의 고향이 되었고 아이들은 백제 사람이 되었네요(웃음).

 

김지미 민변 활동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는 언제인가요?

 

박재홍 2012년도 말에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신 이병진 씨 관련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병진 씨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복역 중이신데, ‘작은책’이라는 잡지에 방북 경험 및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수필 형식으로 기고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 중 북한에 도착한 이후 북한의 실상을 묘사한 내용이 있어 전주교도소가 기고문을 발송 불허했고, 이에 대해 취소소송을 제기하여 1년 6개월에 걸쳐 대법원의 최종적인 승소 판결이 확정되고 난 후 전주교도소가 기고문이 담긴 편지들을 발송한 사건입니다.

그 기간 동안 이병진 씨로부터 편지를 많이 받았는데, 마지막 대법원 판결문을 보내드리고 나서 받은 편지에 ‘…형사재판에서 억눌리고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버리게 되어 홀가분하고,…제가 가장 어렵고 힘들었을 때 도움의 손을 내어 준 변호사님은 제 인생에서 소중한 분입니다. 변호사님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써 주셨습니다. 제가 민변 변호사로 역할을 다하고 있을지 의문이 날 때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위안을 받곤 합니다.

 

김지미 그럼 지부 회원의 입장에서 이런 점은 개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점도 있을까요?

 

박재홍 특별한 것은 없고요, 지금처럼 지부와 소통하면서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지미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박재홍 개인적으로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육아에 좀 더 신경쓰고 싶어요. 지금 5살 1살인데, 정서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시기라고 하더라구요. 요즘 첫째가 투정부리는 것이 늘어서 걱정이되기도 해서 다니던 운동도 포기하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회사 끝나면 일찍 들어가 아이들과 놀아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노후 준비는 ‘아내’라는 말이 있던데, 요즘 노후 준비 확실히 하고 있네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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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 차원에서는 올해 대구지부가 대구 송전탑 TF팀으로 모범 지부상을 수상하셨는데 전북지역도 군산 송전탑 문제가 현재 이슈가 되고 있거든요, 저희도 ‘군산 송전탑 TF팀’을 꾸려 내년에는 모범 지부 수상에 욕심을 내 보려고요(웃음).

더불어, 지부에서도 자체적으로 성명도 발표하고 현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계획입니다. 회원 수도 늘어났고, 워크숍도 하고 시민단체 연계 사업을 하면서 현장의 다양한 이야기도 듣고 있으니,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할 때라고나 할까요? 전북 지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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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5/07/2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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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자원활동가 작성

공익인권변론센터 김시은, 박지아, 서영우

국제팀 양진희

출판소통팀 이재임

언론연대팀 정원영

지난 밤 너무 기대한 탓일까요, 늦잠을 잔 나머지 서둘러서 서초동의 휴먼사무실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세이프. 여유롭게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준비한 인터뷰 질문지를 눈으로 훑어보았습니다. 민변 자원봉사자들이 준비한 질문들은 대개 ‘현장’과 ‘노동인권’에 대한 것들입니다. 미리 인터넷으로 검색해 찾아본 류하경 변호사는 ‘현장에 익숙한 노동변호사’로 보였습니다. 구글 검색창에 류.하.경.이라는 세 글자를 적어 넣으면 ‘삼성건물 못 들어가는 변호사’라는 기사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삼성건물 경비원마저 익히 알고 있을 정도로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연대하는 분이라고요. 인터뷰가 진행된 날, 류하경 변호사는 ‘대한문 집회’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민변 자원봉사자들은 류하경 변호사가 ‘현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노동변호사’가 되기까지 어떤 고민과 실천을 해왔는지 엿보고 왔습니다.

류하경(이하 류) : 뭐 저 같은 사람을 인터뷰하러 먼 데까지(웃음).

박지아(이하 박) : 변호사님, 자신을 한 마디로 소개하신다면 어떻게 하실 수 있을까요?

류 : 한 마디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길게 쓰라고 한다면 밤새도록 쓸 수 있는데. 저는 강아지를 좋아하고, 기타 치는 걸 좋아하고, 자전거 타는 것도 좋아하고, 운동 좋아하고, 그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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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 현장에서도 기타를 많이 치지 않으셨어요?

류 : 현장에서도 많이 치죠. 내가 이러려고 기타를 배웠나. (웃음) 기타를 오래 쳤어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치고 있어요. 저는 홍대에서 밴드하려고 신촌-홍대에 있는 대학 가려고 공부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올라오니까 나쁜 선배들이 뭔가 주면서 ‘이거 한 번 읽어볼래?’라고 하고, ‘수요일에 뭐 해?’라고 물어서 ‘별거 없는데요’ 그러면 ‘그럼 정문 앞에서 봐.’ 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정문 앞으로 나가면 투쟁하고 있고.(웃음) 그래서 밴드의 꿈을 접고 이렇게 살고 있죠. 지금은 사무실에서 일렉 기타를 쳐요. (류하경 변호사가 기타를 꺼내 들고 나옴. 일동 함성)

밴드를 꿈꾸던 학생, 학생운동의 현장으로

박 : 학부 때 ‘나쁜’ 선배들이 이리저리 데려갔다고 하셨는데, 그걸 계기로 노동운동에 관심이 생기신 건가요?

류 : 그렇죠. 저는 1학년 때부터 학생운동을 했어요. 집회의 기초를 1학년 때 마스터했죠. 2학년 때는 학교 안에만 있기보다는 진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같이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책은 많이 보잖아요. 하지만 책은 종이에만 머무는 거니까 실제로 빈민, 농민, 노동자를 느끼고 싶더군요. 그래서 2학년 때 일산의 아파트촌에서 철거촌 투쟁을 하면서 철거민들과 6개월 정도 살았죠. 그리고 군대 가기 전까지 학회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정치경제학 학술 동아리.(웃음) 공부도 하고 술도 마시는… 그래서 학점은 이제…(웃음) 저는 늘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우리 학교 등록금이 비싼 이유는 정치경제학 동아리를 하라고 그런 거다. 정치경제학 공부를 하지 않고 졸업한다면 대학 등록금비를 헛되게 쓴 것이라는 헛소리를 남기면서. (웃음) 제 대학생활의 절반은 정치경제학 학회였고 절반은 투쟁 현장이었고. 노동조합에서 학생들과 연대하는 활동들을 많이 했어요.

박 : 청소노동자 조합 운동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류 : 군대 제대하고 복학을 했는데, 학생 사회가 너무 경직되어 있는 거예요. 대학생 운동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학생 운동을 하는 친구들은 공부를 우선으로 해요. 공부도 좋지만 현장 투쟁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진짜 운동이거든요. ‘다 불태워서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견학 하듯 투쟁 현장 나갔다오길 반복하고, 이렇게 일시적 단편적인 운동만 계속 이어지구요. 그런데 현장 경험이 일천하면 책을 읽어도 한계에 빨리 봉착하게 돼요. 우선 상상력이 그만큼 낮아지고, 똑같은 책을 읽더라도 노동자로서 살아본 사람이 읽는 거랑 대학 와서 마르크스 서적만 보는 사람이 읽는 거랑 그 책의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또 책을 읽었을 때의 변화도 달라요. 실제로 땀 흘려서 노동하고 내 힘으로 투쟁해서 쟁취해본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때 보여줄 수 있는 변화의 폭과 양은, 계속 책만 들고 팠던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삶의 변화와는 천지차이예요.

내가 주체가 되어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가는 운동에 대한 목마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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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학생운동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내 인생의 경험을 쌓기 위한 운동(이었던 것 같아요). 학생운동하면서도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이런 생각을 은연중에 하거든요. 특히나 학생 운동을 하는 시기에는 그런 욕망이 커요. ‘이 운동을 하면서 내가 성장해야지’, ‘내가 여기 가서 뭘 배우고 나중에 좋은 사람이 되어서 사회에 기여를 해야지’, ‘직접 가서 눈으로 목격해야지’와 같이. 매번 학생 운동의 (대상)이 타자화되는 것 같았어요. 우리가 주체가 되는 운동은 등록금 투쟁 밖에 없는데, 매번 그것만 할 수는 없잖아요. 사회적인 연대 투쟁이란 역사와 사회를 크게 바꿀 수 있는 운동이잖아요. 당사자 운동으로서의 등록금 투쟁이나 얄팍한 연대 활동 말고,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게 없을까하는 그런 목마름이 있었어요.

일상과 주변으로 파고들어간 투쟁 청소노동자 어머니, 아버지와 만나다

제대해서 보니까 학교에 비정규직 문제가 이슈가 됐죠. 그때가 2007년이었는데 이랜드 투쟁을 비롯한 비정규직 투쟁은 2000년대 초반부터 계속 있었잖아요. 운동을 운동답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학교 안의 경비 노동자와 청소 노동자분들이야 말로 우리 바로 옆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인데 멀리까지 가서 연대할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제 생각에는 우리 곁에서 투명인간처럼 지나가는 어머니들, 아버님들이 열악한 처우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인데, 아직 조직화도 안 되어 있고 최저임금도 못 받고 계셨죠. 이런 분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연대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같은 학교에서 다니는 학생들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비정규직 된 지가 80년대 후반부터라고 하더군요. 그러면 그동안 ‘20년이 지났는데 대학생들이 뭐하고 있었나?’ 화가 나더라고요. 매일 ‘노동해방, 신자유주의 철폐’와 같은 거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막상 바로 옆에서 청소하시는 어머니들, 학생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하기 위해 도와주시는 가족과 같은 분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왜 한 번도 학생들이 문제제기 못했을까, 이분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활동들을 왜 다른 분들이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활동을 시작했죠. 거의 수업을 안 들어갔어요. (웃음)

박 : 들어갈 시간이 없었겠네요.

투명인간교내 청소 노동자와의 마주침, 그리고 단 하나의 목표를 세우다.

류 : 학교에 청소노동자 휴게실이 있더라고요. 올라가는 계단 아래를 보면 그 옆에 벽이 있고 문이 하나 달려있죠? 우리는 그 문을 창고라고 생각하잖아요. 그 문을 열면 그 안에 사람이 앉아있어요. 정말 좁아요. 그 문을 열었을 때 무척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한 번 찾아가겠다고 청소하시는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물어봤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학생들이 말 걸면 처음에는 ‘이렇게’(손을 내저었다) 하셔요. 현장 소장이라는 사람이 아주머니들에게는 전두환이나 아이히만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학생들과의 접촉이 발각되면 혼납니다. 미리 싹을 잘라놓는 작업이 있었죠. 그럴 땐 시간이 필요하죠. 인사도 계속하고 음료수도 먼저 갖다 드리고. 그렇게 마음이 열고 난 뒤 찾아갔는데 ‘그 문’이 있었어요. 문을 열어주시는데 어머니가 앉아 계시는 거예요. 들어가니 작지만 예쁘게 꾸며놓으셨어요. 손주들 사진 붙어 있고. 본인 방처럼, 소녀 방처럼 꾸며 놓으셨더라고요. 그걸 보고 대단히 놀랐어요. 누군가의 어머니고 할머니고 부인이지.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 어머니랑 다른 게 없는 분 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분들을 투명인간처럼 지나쳐 보내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분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거잖아요. 조그만 공간에서 이렇게 생활하시는 거면 ‘임금 수준도 형편없고 복리 후생도 말도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죠.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열정이 많이 생기더군요. 처음부터 노동조합 조직과 같은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건 아니에요. 하지만 졸업하기 전에는, 정말 이분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고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가장 밑바닥에 있으니까. 학생들이 일종의 교두보 역할을 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업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나는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이분들의 삶이 변화된 모습을 내가 봐야겠어.’ 라는 마음으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진짜 민중을 만나는 시간 청소노동자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울고 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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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건물마다 다 돌아다녔는데 하나같이 사정이 열악했어요. 제가 연세대학교를 나왔는데 건물도 엄청 많고 캠퍼스도 되게 크잖아요. 그래서 제가 스쿠터를 샀어요. 타고 다니면서 점심을 3번, 4번씩 먹었어요. 왜냐면 어머니들이 마음을 열려면 밥을 같이 먹어야 해요. 사람은 옳은 사람이나 옳은 이야기를 안 들어요.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듣지. 가르치려고 하면 안 되고 일단 친해져야 해요. 목적의식을 갖고 친해져서도 안 되고. 그냥 이분들과 정말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어요. 운동을 해보니 마음을 얻고, 친구가 되고, 비를 같이 맞고 해야 서로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거예요.

저도 많이 울었어요. 만나서 이야기 나누면 대부분 우셔요. 연세가 60대, 70대이신데 한국전쟁 때 태어나셔서 힘든 역사를 거쳐 온 분들이에요. 학생 운동하는 친구들은 자신들이 기억하는 ‘투쟁의 역사’ 같은 역사가 진보적인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그 역사도 엘리트의 역사에요. 우리도 사실 오만했지요. 학생운동사, 노동운동사의 노동조합이 있는 ‘제조업-대공장’의 남성 노동자는 형편이 그나마 나은 거지요. 그리고 한국 현대사, 정치사, 4·19, 87혁명과 같이 큰 덩어리 중심으로 공부했을 뿐이지, 민중사에 대해서는 굉장히 무지해요. 그런데 청소노동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자체가 민중사예요. 이분들은 6·25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중산층이 되지 못했어요. 대개는 계속 빈민으로 살아오신 분입니다.

어머니들 우리 이제 큰 물고기가 됩시다” – 청소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조직을 돕다

그 분들의 이야기를 6, 7개월 동안 들었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서로서로는 몰라요. 건물이 다 분리되어 있고, 청소 하시는 동안에는 다른 건물로 가는 게 금지되어 있어요. 그리고 다른 건물 아주머니랑 퇴근할 때도 말하면 안 되고 그게 적발되면 징계를 받게 돼있어요. 현장 소장이 어머님들께 욕도 하고, 성희롱, 성추행, 성상납 등 별 일이 다 있어요. 현장소장이 자기 집, 교회 와서 청소하라고 하면 어머님들이 다 몰려가서 청소해야 했어요. 어머님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자기들끼리 싸워요. 서로 단결이 안 되니까 소장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만 있지, 소장을 상대로 싸우는 건 없어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에요. 그래서 노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설문지를 통해 알아보니 근로기준법 위반, 최저임금법 위반, 폭행, 모욕, 성희롱, 성추행 등이 빈번했어요. 이제 서서히 노동조합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제안했어요. ‘우리는 소장과 1대1로 상대하고 있다. 우리는 소장한테 질 수밖에 없다. 온갖 부당한 행위도 바꿀 수 없다’라고요. 그리고 또 설명을 드렸지요. ‘조그만 물고기가 있는데, 자기보다 엄청 큰 물고기가 나타나면 물고기 모양으로 대형을 짭니다. 그럼 큰 물고기가 겁을 먹고 작은 물고기를 단 한 마리도 못 건드린다.’ 그게 바로 노동조합이라고 말이죠.

오랜 시간 눌려있던 용수철이 튀어 오르다. –노조가 결성되고 청소 노동자가 주체로 거듭나다.

이런 설명의 시간을 가지고, 청소노동자 어머니들을 한 분씩 모셨어요. 건물마다 프락치들을 다 심어 놨는데, 그런 감시의 눈을 피해서 조용히 모임을 시작했죠. 집중적으로 노동조합을 설명 드렸더니 어머님들이 열의가 넘치셨어요. 그동안 눌려있던 용수철이었던 겁니다. 누가 건드려준 사람이 없었던 거지요. 왜냐면 근로기준법이 뭔지, 최저임금이 올해 얼마인지도 모르고, 소장이 ‘툭툭’ 치는 건 넘어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셨던 분들이니까요. 그렇게 간담회를 가질 때마다 어머님들이 성장하시는 느낌이 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어머님들이 스스로 더 높은 차원의 투쟁을 기획하게 되셨어요. 그때 민주노총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08년 2월,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지부 연세대학교 지회 노동조합 출범식을 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노동조합은 숨기고 쉬쉬하며 하면 절대로 안 되거든요. 그러면 우리를 더 무시해요.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장단 명의로 노동조합 출범식 초청장을 교수들에게 보냈어요. 연세대의 한 주체가 (노동조합) 출범식을 한다고 알린 것이죠. 출범식 전날 어머님들이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아 플래카드로 만들어서 연세대 정문부터 본관까지 걸었어요. 다음날 출범식을 크게 했죠. 그렇게 연세대를 시작으로 홍익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로 이어져서 신촌에서 다 같이 집회를 했어요. 노동조합 생기고 불과 한 6개월 만에 이뤄내신 거지요. 학생 한 명을 변화시키는 데는 10년 정도 걸리지만, 청소 노동자분들은 살아온 인생 자체가 이미 노동계급과 투쟁을 체득한 분들이기 때문에, 변화하는 데는 한 순간이었어요.

김시은(이하 김): 정말 짜릿하셨겠습니다.

약자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언덕은 법, 그렇게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다.

박: 학부 때 이런 활동 하셨으면 아무래도 밖에 나가서도 비슷한 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은데, 단체에 들어가지 않고 로스쿨에 진학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류 : 처음에는 노조 조합원처럼 일을 했죠. 그분들 사무실에서 3년 정도 활동을 했어요. 사실 법이라는 게 대단히 중요하죠. 그분들이 배운 사람들한테 가장 기대하는 것도 법이었어요. “이게 불법이야? 소송하면 얼마 받을 수 있어?” 라고 계속 물어보세요. 법이라는 게 존재하는 이유가, 대화의 창구가 없고 그 문턱이 너무 높아서 넘지 못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지요. 물론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형식적으로는 법원에 누구나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노동부에는 누구나 진정을 제기할 수 있잖아요. 즉, 약자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사회적인 장치죠.

그렇기에 ‘배운 사람들’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 같아 처음에는 노무사 공부를 했어요. 노무사 공부를 두 달 정도 하는데 계속 교내 투쟁이 터지니까 집중을 못했어요. 시험도 봤지만 공부를 안했으니 될 리가 없죠. 또 그때 제 나이가 스물여덟 살이라, 집에 뭐라도 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노무사 시험을 그 핑계로 삼기도 했고요. 그런데 주위에서 법으로 노동운동을 지원하고 싶으면 로스쿨이 생겼으니까 거길 지원을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노무사보다 할 수 있는 게 더 많고, 소송대리권도 있으니까요.

우리 사회의 제일 취약한 고리인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이 바로 보편적인 민생 향상을 위한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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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 전반적으로 노동환경이나 노동문제 개선을 위해서 제정이 필요하거나 개정, 수정이 필요한 제도가 있을 텐데, 근본적으로 무언가 바꿀 수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류 : 입법에서는 간접고용문제 해결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란 말이 있듯이 가장 고통 받고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환경을 먼저 바꾸는 게 맞아요. 지금은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고리가 간접고용 비정규직이에요. 역사가 한 단계씩 진보할 때마다 여러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한건 아니었어요. 물론 68혁명 때는 사회 전반적인 혁명이 일어나긴 했지만, 어떤 시대가 한걸음 더 나가려면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고리를 끊어냈을 때 생각보다 큰 변화가 생길 때가 많아요. 그런 것이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운동들이구요.

지금을 사람들은 ‘87년 체제’라고 하지만, 사실상 ‘IMF체제’입니다. 신자유주의 양극화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조금 더 좋은 사회로 갈 수 있어요. 저는 지금의 체제로 인해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면 다음 사회로 넘어갈 실마리가 풀릴 것이라고 봐요. 지금 가장 고통 받고 있는 계층이 비정규직, 그중에서도 직접고용이 아닌 하청업체 소속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이고요.

노동운동이라 하면 뭔가 매니악하고 투쟁의지가 높고 사나운 사람들이 하는 운동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통계를 보더라도 대한민국 국민 절대다수가 노동자에요.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운동은 부분적인 운동이 아닌 보편타당한 운동입니다. 노동운동 자체가 민생운동이고, 국민들의 전반적인 복지 향상을 위한 거시적인 운동이고요. 이 보편적인 복지를 위한 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의 첫 걸음은 ‘노동개혁’에 의해 가장 고통 받고 문제해결이 시급한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해결이라고 봐요. 입법제안은 민변 노동위에서 한 입법제안을 참고 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웃음)

할머니 손 붙잡고 시위현장을 누비고, 노천극장에서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부른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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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영(이하 정) : 학생운동을 열정적으로 하셨는데, 노동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인생의 첫 순간이 있지 않으신가요?

류 : 87년 혁명 때 5살이었어요. 할머니가 운동권이어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간부를 하셨어요. 할머니 손잡고 집회를 많이 다녔고요. 87, 88년 고향인 대구에서도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집회를 많이 했어요. 할머니랑 손잡고 동성로에 나가면 학생들이 교련복입고 최루탄 때문에 코 막으면서 뛰어다니고 그랬죠. 할머니 따라서 시국집회를 많이 다녔고 노동자들의 거친 투쟁의 모습도 어렴풋이 기억나요. 어린이가 상상 못할 인파가 모인 집회에서 발언도 해봤고요. 그게 나중에 역사책에서 찾아보니까 88년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있었던 전교조 집회였어요. 그때 할머니와 버스타고 가면서 할머니가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알려주셨어요. 집회에서 제가 발언하게 됐는데 발언은 안하고 마이크 쥐자마자 ‘나 태어나~’ 라고 노래를 부른 거예요.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함께 소리 지르며 불렀던 기억이 있어요. 그 당시에는 이게 뭔지도 모르고 이 사람들이 왜 싸우는지도 몰랐지만 그 어릴 때의 기억들을 나이를 먹으면서 계속해서 반추해보곤 했어요.

불온서적<>, 그리고 선하고 착한 사람들이 가는 길에 대한 자각

저희 집은 어릴 때부터 책이 많았어요. 삼촌 고모들이 다 학생운동을 해서요. 그때 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집에 있으면 안 되는 책들이 많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장남이어서 할머니 모시면서 대구에 사니까 집으로 불온서적들을 보낸 거죠. 제 방에도 맑스, 엥겔스 이런 책들이 꽂혀 있었고요. <코스모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광주 민중항쟁 다큐멘터리>, <태백산맥> 같은 책들이 있었어요. 또 저희 집은 <말>지를 정기구독했어요. 그래서 한글을 처음 떼었을 때부터 그런 책들을 읽고 자랐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광주민중항쟁 책에서 광주시민들이 칼에 찔리는 사진을 보고 굉장히 놀란 기억이 있어요. 고모 삼촌의 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 옆에서 책 제목들을 엮어서 노래를 부르며 놀기도 했고요. 92년에 ‘윤금이 피살 사건’이 있었어요. 윤금이 씨가 미군들에 의해 성폭행 당하고 살해당한 사건인데, 그게 <말>지에 실려 있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읽고 엄청 충격을 받아 할머니한테 여쭤봤죠. 그랬더니 보지 말라고 하셔서, 더 보고 싶어졌고요. 그 이후부터 <말>지를 정독하기 시작했어요. 중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현대사책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런 역사책들을 접하면서 어릴 때 스쳐 지나갔던 거리의 풍경, 할머니가 했던 말들, 고모삼촌들이 울면서 ‘누가 잡혀갔다’ 이런 얘기하던 기억들도 이해되었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정서적으로, 이렇게 사는 것이 양심적이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어요. 왜 운동을 해야 되는지, 운동의 쟁점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은 자세히 몰랐지만 ‘착하고 선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러다 대학에 입학하니까 불이 붙었고 체질에 맞았지요.

학창시절 수성구의 류하경에서 집회 현장의 기타리스트가 된 지금

저는 학생운동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락밴드를 처음 시작해서 음악에 미쳐있었어요. 음악과 농구가 인생의 전부였어요. 대학 들어가면 무조건 밴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유명한 밴드를 능가하리라고 다짐하며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준비했죠. 고등학교 2학년 학교 축제에서 밴드 ‘범어동 수퍼하이웨이’를 결성했고. 당시 여고에서 많이 왔었는데 배우 손예진도 왔었죠. “손예진이 뭔데!” 이러면서 락밴드 메탈리카처럼 ‘쎈 척’하고 그랬어요. 고2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고, 제인생의 정점은 고 2 축제에서 공연했을 때였어요. 그때 첫 곡으로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을 연주하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이데아’ 로 마무리 했었죠. 그때부터 (인생이) 기울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왔네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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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집회 나가보면 불타오르는 게 있어요. 그래서 ‘수성구의 류하경’이 메이데이 때 가서 ‘바위처럼’을 칩니다. 그때 쌓았던 기타 실력을 농활, 집회현장 그리고 민변 집회에서 발휘하죠. 원래는 락기타, 블루스기타를 치는데 그런 건 민변 변호사님들이 모르시잖아요.(웃음) 그래서 지금 기울고 있는 상태예요.

진지하지만 유쾌했던 인터뷰가 끝나고 류하경 변호사가 말을 덧붙였습니다. 언제 맥주 한 잔 하자고요. 꼭 그러기로 했습니다. 정말이죠? 류하경 변호사님!

목, 2016/12/29-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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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는 문예반 학생이었다. 법률 전문기자가 되려고 법대에 갔다. 그러다 혼자서 민사 소송을 해 엄마가 떼인 돈을 받아냈다. 이후 법학이 다르게 보였고, 재판이 재미있어 변호사가 되기로 했다. 변호사가 되고 나서는 ‘노동법으로 밥벌이를 해야겠다’고 맘먹고 금속노조법률원에 들어갔다. 그러다 다시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진로를 틀었다. 보좌관으로 잔뼈가 굵을 무렵, 국회 문을 열고 나와 이번엔 국선전담변호사가 되었다. 6년간 국선전담 변호사 활동을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40일간의 유럽 순방(?)을 마치고 민변으로 온전히 복귀한 조수진 변호사를 만나 그 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B내리고 C뿌리던 법대생, 민사 소송을 하다

문예반 활동을 하던 ‘고등학생 조수진’은 국문과를 갈 줄 알았다. 대학 진학 무렵, ‘얼결에 들어간 거지만 시 쓰는 문예반에서 활동했으니 국문과를 가야겠지.. 그런데 시를 쓰면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라는 여러 생각과 의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신문방송학과를 가서 기자 생활을 하면 시를 쓰는 것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생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조수진 변호사의 언니가 조수진 변호사를 꼬드겼다. “법대에 가서 법조기자가 되면 얼마나 좋겠니?”

언니의 꼬임(?)에 넘어간 고등학생 조수진은 이내 ‘수업이 이해가 안 돼 학점이 안 나오는 법대생’이 됐다. 논리학을 공부하는 것도 어려웠고, ‘내가 이걸 왜 외워야 하나’ 이해도 되지 않았다. 한창 학점에 B가 내리고 C를 뿌리던 대학생 조수진에게 어느 날 큰 일이 생겼다.

당시 조수진 변호사의 어머니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300만 원 정도를 달아놓고 먹던 중소기업이 부도 위기를 맞자 그간 누적된 식대를 주지 못하겠다고 나왔다. 딸이 법대생인데, 소송 까짓 거 못 할 게 뭔가. 조수진 변호사의 어머니는 ‘돈을 받아내면 10%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가족이니까 엄마를 대리해서 재판을 해서 돈을 받겠다”고 대학생이 서면을 써서 법원에 제출했다. 상대방은 재판에 출석도 하지 않았고, 결과는 조수진 변호사의 승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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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소하면 돈을 당연히 받는 줄 알았더니, 그게 또 아니란다. 집행 절차가 필요했다. “‘이게 뭐지?’ 하면서 집행관에게 서류를 줬어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집행관이 ‘그 사무실에 있는 집기에 딱지를 붙입시다’ 하더라고요.” 집행 절차에는 집행인이 동행해야 했다. 그래서 법원 집행관이 사무실 집기에 ‘빨간 딱지’ 붙이는 데 따라갔다. “그 사무실 분들이 뜨아한 표정으로 보는 거예요. ‘이건 뭐냐’ 이런 분위기로. 근데 그 딱지를 붙인 다음날 바로 돈이 입금됐어요.”

그때부터 법 공부에 흥미가 붙은 조수진 변호사는 죽기 살기로 공부에 매달렸다. “그때 저는 변호사가 적게 일하고 돈 많이 버는 직업으로 잘못 알고 있었어요. 노동시간도 짧은데 단시간에 큰돈을 버는 줄 알았죠.”

그렇게 본격적인 법 공부를 시작해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사법연수원에서 노동법학회를 했어요. 그러다 ‘노동법으로 밥을 먹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노동법만 할 수 있는 사무소를 찾다가 금속노조 법률원에 들어갔어요.” ‘입사’하니 선배들은 당연히 노동위원회에 가입해야한다는 거 아닌가. 그래서 ‘당연한가보다’ 생각하고 변호사가 된 첫 해에 노동위원회 가입으로 민변 활동을 시작했다.

국회에 가다

막상 변호사가 되니 ‘적게 일하고 많이 번다’는 오해가 깨진 것은 둘째 치고, 비정규직 법안 자체가 잘못되어있는 상황 속에서 ‘변론’으로만 할 수 있는 활동에 한계를 느꼈다. “거기서 한 2년 반 정도 하다보니까 비정규직 법 때문에 너무 문제가 많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여성인권위원회에서 한 번 만난 인연으로 연락을 준 이정희 변호사님. 당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셨던 그 분의 보좌관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제가 알기로는 돌아가신 김승규 변호사님께서 저를 추천해주신 걸로 알아요. 그래서 2년 반 정도 18대 국회 때 의원실에서 보좌관 활동을 했죠.”

조수진 변호사의 표현에 따르면, 국회의원이 299명이면 국회에는 299개의 중소기업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회의원 월급 다 삭감하자’는 식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국회에서 활동해본 조수진 변호사의 설명으로는 국회의원이 제대로 활동한다면 세비 900만 원은 남아나지 않는 게 정상이다. 사람도 만나고, 지역구 사무실도 운영해야 하고, 정책개발을 위해 연구자들에게 용역비용도 지출한다.

이렇게 역동적인 국회는 변호사들에게도 좋은 무대다. 입법 보좌관들의 노력으로 법을 처음부터 잘 만들면 재판까지 이어지는 사건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같은 나라는 국회와 행정부에 굉장히 많은 변호사들이 들어가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법을 만들거나 집행하는 단계부터 문제가 없게 하기 때문에 사법부로 넘어가는 사건을 줄일 수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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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생활은 조수진 변호사의 변호사 생활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다. “옆에서 ‘아, 이런 식으로 문제를 파고 들어서 공부하는 거구나’를 배웠어요. (이정희 의원은)어떤 문제가 있어서 ‘새로운 법을 만들자’라고 맘먹으면 자료를 그냥 보는 게 아니라 관련 법안, 관련 연구 논문까지 다 찾아보시는 거예요. 1차 자료를 다 보고 나서 그걸 보강하는 2차 자료, 어떤 때는 3차 자료까지 보셨어요.” 법 이론상 가능한 이야기인지, 부작용은 없는지 다방면으로 검토한 후에야 새로운 법안이 탄생했다. 자료를 어떤 식으로 보고 정리해 나가야 하는지, 얼마나 다양하게 검토해야 하는지 큰 영향을 받았다.

재판을 좋아해서 다시 변호사 생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때의 경험은 조수진 변호사가 법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을 바꿔놓았다. “만들어진 법을 공부하는 건 음식점으로 치면 설거지 같은 단계예요. 법을 만드는 일은 재료 다듬고 음식 만드는 일로 비유할 수 있을 거 같고요.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국회에서 지켜보니 너무 신기했어요.”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역동적이고, ‘선한 가치’라고 하여 필연적으로 법안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판례는 유연하게 바뀌어야 한다

국회를 나온 조수진 변호사는 국선전담변호사로 다시 송무를 시작했다. 형사 피고인을 변호하는 형사 국선전담변호사. 1~2년 개업 변호사로서의 경험과 역량을 다지는 계기로 삼으려던 게 어느 덧 6년이나 이어졌다.

형사 국선전담변호사를 하면 한 달에 20-30명가량의 피고인을 만난다. 1년이면 300명이 넘는다. 당연히 형사 재판을 처리하는데 속도가 붙는다. 조수진 변호사는 “변호사의 업무능력 면에서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효율성을 배운 것 같다”며 사람을 매우 많이 만난다는 점을 국선전담변호사의 특징으로 꼽았다. 또 “아무래도 배움이 길지 못했거나 저소득층이 국선을 신청하시는 분이 많다”며 “변론 외적으로도 챙겨주는 마음이 필요한 게 이 분야의 특이한 점”이라고 짚었다.

사건을 수행하다 보면 당연히 안타깝거나 기억에 남는 사건도 생기게 마련이다. 조수진 변호사가 꼽는 ‘정이 많이 갔던 사람’은 취업사기를 당했는데 오히려 사기 공범으로 몰렸던 젊은 여성이다. 이 여성은 사장이 중국 출장 중이라는 말만 믿고 쇼핑몰 회사에 취업한 뒤 ‘카카오톡’으로 업무 지시를 받아 쇼핑몰을 운영했는데, 어느 날 사기 공범으로 체포됐다. “알고 보니 그 쇼핑몰은 허위였던 거예요. 완전 취업사기죠. 사장이라는 사람은 중국에서 아예 입국하지 않고 돈만 환치기 형식으로 중국으로 넘어갔어요.” 사건을 설명하는 조수진 변호사의 목소리가 점차 격앙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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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몇 십 억 대 사기사건의 공범이 됐고, 유죄를 인정받으면 20대 젊은 사람이 손해배상을 계속 당할 수도 있잖아요. 평생 어떻게 살겠어요?” 이 여성은 언니와 함께 발 벗고 나서 직접 증거로 쓸 수 있는 CCTV 영상을 찾아다니고, 몇 개월간 온갖 증인을 찾아 법정에 세웠다. 법정에는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 계속 방청을 왔다. “분연히 다퉜는데 집행유예를 받은 거예요. 아마 그 판사님은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졸지에 ‘사기사건 공범’이 된 ‘취업사기 피해자’는 “꼭 무죄를 끝까지 다투겠다”며 2심으로 넘어갔다. “국선전담이 약간 아쉬운 게, 그렇게 애착이 가는 사건을 끝까지 추적할 수가 없어요. 빨리 정을 떼야 돼. 빨리 정 주고, 빨리 떼고. 그런 게 약간 힘들죠.”

국회에서의 경험은 변호사로서 재판을 수행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기존 대법원 판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대법원 판례를 깨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별로 무섭지도 않아요.” 법은 시대와 사회의 모습에 따라 변한다. 현상이 변해 더 이상 기존의 법으로 담아낼 수 없다면 누군가 새 법안을 발의하고, 법이 바뀐다. “하물며 그 법을 해석한 판례야말로 현실이 바뀌어도 최대한 많은 현실을 담아낼 수 있게 더 넓게, 적극적으로 법을 활용하는 것이 맞는 판례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나의 취미는 민변!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취미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일과 일 사이에 잠깐 쉬고 재충전하기 위한 취미, 두 번째는 여가를 즐김으로써 평소의 일과 생활에서 한 발짝 떨어질 수 있는 취미, 세 번째는, ‘지금 여기’에 집중함으로서 삶의 의미를 고양하는 취미. 조수진 변호사에게 민변은 ‘세 번째 종류’의 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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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너무 가볍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주변에서 ‘너 민변도 나가니?’라고 놀라는 분이 있으면 ‘취미생활’이라고 얘기해요.” 대학교 서클 활동처럼, 돈을 벌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재미있어서, 내 선택으로 하는 활동이다.

조수진 변호사가 주로 활약하고 있는 위원회는 민생경제위원회다. “민생은 전통적인 인권 개념과 달리 굉장히 새로운 분야예요. 그만큼 실생활과 밀접한 여러 문제에 대해 활동하실 수 있죠.” 부동산, 임차 등 주택정책, 부산저축은행 사태와 파산회생 등 금융정책, 중소기업을 보호하고 재벌을 견제하는 공정경제 분야, 세금 낭비를 감시하고 조세정의를 실현하는 조세재정 분야 등 실생활의 많은 문제들이 민생경제위원회의 소관이다. 5월 15일부터는 매주 월요일 저녁 민생위가 준비한 민생 관련 법률 실무 강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민생위의 장점은, 어느 위원회나 그렇겠지만,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고, 민생위가 다루는 문제들이 후배도 큰 소리 낼 수가 있는 분야라는 점이에요. 생계형 문제가 많기 때문에 후배들이 선배들의 노하우를 배워서 금방 뛰어넘을 수 있죠.” 그래서 조수진 변호사는 민생위를 ‘봉숭아 학당 같아서 정이 간다’고 표현한다.

다시 새로운 도전 앞에서

민변 활동에서 조수진 변호사가 자신의 첫째가는 롤모델로 꼽는 선배는 ‘민생경제위원회의 조물주’ 김남근 변호사다. “공익활동 하면서도 변호사로서의 전문성도 유지하시고, 박사도, 또 공익이 아닌 전문법으로 박사학위 받으셨잖아요.” 여전한 열정에 철저한 건강관리까지, 닮고 싶은 부분이 많다. 이제 새롭게 개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선배 변호사들에게 묻고 도움 받는 부분이 많다.

“요 며칠 2-3주 개업을 준비하려고 생각해보니, 내가 구슬만 많이 모았고 한 줄로 꿰지는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앞으로는 뭔가를 좀 진득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변호사로서 해볼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구슬을 모았다’고 표현하는 것을 듣고 있으니 문득 만화 <드래곤볼>이 떠올랐다. 7개를 모으면 무엇이 되었든 하나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신비한 구슬을 찾아 떠나는 모험 이야기다. ‘드래곤볼’처럼 변호사가 할 수 있는 7개의 역할을 모으면…… 그런 상상을 하다 웃고 말았다.

“(‘드래곤볼’)다 모으면 ‘여자 김남근’ 되는 거 아니에요? 조수진 변호사님 개업과 동시에 여자 김남근 변호사님이 되실 거 같네요.”

“저야 영광이죠!”

조수진 변호사는 개업과 함께 민변에서 더욱 활발하게 활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 우선 민생경제위원회 조세재정팀에서 인천 아시안게임 당시 사용한 예산에 대해 진행 중인 주민소송부터 참여할 계획이다. 변호사로서의 다양한 역할을 담금질하고 있는 조수진 변호사, 내일은 또 무슨 도전을 할지 그 행보가 사뭇 기대된다.

화, 2017/04/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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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은 조지훈 변호사님인데요. 자기 소개부터 부탁드릴게요

 

조지훈 저는 연수원 38기이고 현재 법무법인 다산에서 일하고 있는 조지훈입니다.

 

김지미 조변호사님에 대해서 찾아봤더니 처음엔 전자계산학과를 다니시다가 다시 법대를 들어가셨더라구요.

 

조지훈 네. 처음엔 수원에 있는 경기대 전자계산학과에 들어갔었는데요, 들어가고 나서 학과공부는 전혀 안하고 동아리 생활만 하다가 3학년 때 동아리연합회 부회장, 4학년인 96년도에 총학생회 부회장을 하면서 연세대 투쟁, 그것 때문에 구속이 됐었어요. 1996년 8월에 구속이 돼서 99년 2월에.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어요. 6개월 정도 있었죠. 민변 다른 선배님들에 비하면 아주 짧은 기간이었죠.

 

김지미 1심에서는 실형을 받으셨던 거죠?

 

조지훈 네. 실형 1년 받았었어요. 그때 변호해주셨던 분이 해마루에 계신 박세경 변호사님이에요.

 

김지미 우리 회원 중에 그런 분들이 있어요. 민변의 변론을 받다가 민변 회원이 되신(웃음).

 

조지훈 그런 인연이 있었죠. 출소하고 났더니 제적이 되어 있어서 군대를 공익근무요원으로 다니면서 수능 공부를 했어요.

 

김지미 법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직접 재판의 과정도 겪어보고 그러면서 필요성을 느끼셨던 거에요?

 

조지훈 공대 출신이고 한겨레 신문 정도만 보던 때인데, 형사절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전혀 예견할 수가 없는 거잖아요. 내가 어떤 지위인지도 전혀 몰랐고. 그게 좀 컸었던 것 같아요.

김지미 되게 답답했을 것 같아요.

 

조지훈 네. 그때는 경찰한테 엄청 맞았어요. 끌려갈 때도 맞고, 경찰서에서도 엄청 맞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왜 계속 맞고 있었나(웃음). 저는 연대 안이 아니고 밖에 있었는데 밖에서 들어가다가 연행됐던 거죠. 신촌 지하철역에서 연행돼서 교차로까지 맞으면서 왔었어요.

 

김지미 가담 정도에 비해서 형이 많이 나온 것 같네요(웃음). 1심에서 1년이 나왔으면.

 

조지훈 그때는 모든 걸 직책으로 판단해서 총학생회 부회장이라는 게 컸죠.

 

김지미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셨다고 했는데 어떤 동아리였어요?

 

조지훈 민속연구회라고. 탈패였는데요. 탈춤이나 장구나 이런 것들은 전혀 못치고(웃음) 그래서 형들이 이상한 거 쥐어주면서 그냥 너는 앞에 나가라, 그러면서 인생이 어떻게 보면 꼬인거죠.

 

김지미 그러다가 한양대 법대는 언제 들어가신 거에요?

 

조지훈 00학번이요. 27살에 들어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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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군대까지 다녀오고. 늦은 나이에 대학을 다시 가게 됐는데 특히나 이과생이 법학이라는 학문에 적응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을 것 같아요.

 

조지훈 저는 적응하는 데만 1년 6개월 정도 걸린 것 같아요. 대규모 강의도 경험이 없고, 1년 반 정도는 내가 왜 여기에 왔나하는 생각을 했죠.

 

김지미 늦은 나이에 법대를 가신 건 당연히 고시를 염두에 둔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요. 한양대에 가서는 학생운동이나 이런 쪽에는 관여 안하셨어요?

 

조지훈 그 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어요. 학생회 활동을 하던 친구들하고 같이 고시공부를 했죠.

 

김지미 적응이 너무 어려웠다 라고 하는 것 치고는 2004년에 졸업을 하시고, 2006년에 합격을 하신 거니까 비교적 단기간에 붙었다고 볼 수 있는데, 공부 열심히 하셨나봐요.

 

조지훈 운이 좋았어요. 04년에 졸업하고 그 다음해에 1차, 그 다음해에 2차를 붙었으니까요.

 

김지미 조변호사님이 38기 노동법학회장이잖아요. 제가 37기 노동법학회였는데, 38기 노동법학회장이 굉장히 훈남이다 라는 소문이 있었어요(웃음).

 

조지훈 그런 잘못된 소문이.(웃음)

 

김지미 학생 때 가지고 있었던 지향을 이어가는 의미에서 학회활동을 하신 거겠네요.

 

조지훈 연수원 가서 다들 그렇겠지만 연수원 공부가 많이 안 맞았어요. 연수원 공부에 매달리기에는 나이도 많았고. 그리고 저희 학회에 좋은 친구들이 많았어요.

 

김지미 노동법학회가 맥이 끊겼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회원 중에도 예전부터 열심히 활동하시던 분들은 다 노동법학회 말씀을 하시거든요., 그래서 노동법학회 맥이 끊긴 게 참 안타까워요. 연수원 수료 후에 바로 다산으로 들어가신 거죠?

 

조지훈 네. 제가 다니던 경기대가 수원에 있었고 그래서 그때 사건이 터지면 대부분 다산에서 변론을 해 주셨어요. 우연찮게 저희 노동법학회 지도교수님이셨던 노정희 교수님이 또 다산 출신이세요.

 

김지미 변호사님이 활동하시는 걸 보니 ‘인권재단 사람’ 감사도 하시고 약간 특색있는 게 성남에 있는 ‘이로운재단’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시고 지금까지 이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계시던데 이로운 재단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요?

 

조지훈 아름다운 재단이 전국단위의 재단이라면 이로운 재단은 지역 재단이라고 할 수 있어요. 미국 같은 경우에는 그런 재단이 각 카운티마다 있어서 큰 역할을 하는데요, 그런 걸 모태삼아서 지역에서 기부와 나눔을, 아름다운 재단의 지역판을 만들어보자. 그래서 시작을 하게 된 거죠.

 

김지미 여기에는 어떻게 처음부터 참여를 하시게 된 거에요?

 

조지훈 저희 집이 성남이에요. 거기에서 지역 시민사회단체 분들을 만나면서 같이 하게 됐죠.

 

김지미 ‘이로운재단’은 지금 잘 운영이 되고 있는가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기부를 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이런 모토로 운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가 어쨌든 기부문화가 굉장히 취약하잖아요. 그리고 지역에서만 기반해서 활동을 하면 범위가 좁아질 수밖에 없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조지훈 아직 성공이라고 보기에는 좀 그렇지만 일단 성남에 기업들이 많잖아요. 판교테크노밸리나 이런 곳에 있는 기업들한테 기부를 받고 있고 그 다음에 성남시와 같이 거버넌스를 형성해서 만들어 가려고 하는 단계예요. 그래서 지금은 청년 문제를 지역재단 차원에서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공모사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얼마 전에 성남시에서 청년수당 주겠다는 얘기도 한참 이슈가 됐었고, 성남에서 청년문제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네요,

 

조지훈 네. 이런 사업들이 자리를 잡아서 시장이 바뀌더라도 유지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김지미 변호사님 예전 이력도 있고 수혜를 받았던 입장이기도 해서 아무래도 시국사건, 집시, 노동 쪽으로 변론을 많이 하시게 되겠네요.

 

조지훈 네. 그런데 아시겠지만 노동사건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민주노총 법률원에서 주로 담당을 하셔서. 아무래도 국가보안법 사건, 집시법 사건을 많이 하죠.

 

김지미 국가보안법 사건은 조금 후에 애기를 하기로 하고, 보니까 집단소송을 꽤 하신 것 같더라고요. 비료담합 관련해서 농업인들 대리해서 2만 8천명 규모의 집단소송을 하신 것도 있고, LPG 담합과 관련해서 개인택시 운전자 만 명을 대리해서 집단소송 하신 것도 있고. 집단소송도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활성화가 되어 있지 않잖아요. 인용되는 경우도 잘 없고.

 

조지훈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나라 집단소송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되게 어려운거죠. 원고 2만 8천명 개별로 입증을 해야 되는 거니까요. 비료담합이면 2만 8천명의 비료 구매량, 손해액 이런 것들이 다 특정이 되어야 해서, LPG 담합도 마찬가지고. 그런 게 너무 어렵고 담합행위에 대해서는 손해액추정 이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해야 되는데 아직 법원이 다른 민사사건이랑 동일하게 취급을 해요.

 

김지미 담합이 있었다는 결정이 나오더라도 그것과는 별개로 손해입증은 또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조지훈 네. 그냥 일반 민사와 거의 동일한 기준으로 판단을 하고 있어서 그런 점이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그리고 담합 같은 경우는 기업들이 어떻게 대응을 하냐면, 행정소송으로 시간을 무조건 끌어요. 행정소송에서 담합이 맞냐, 안 맞냐 이거 판단 받는 것만도 몇 년이 걸리는 거에요. 그렇게 결정이 되면 다시 민사가 시작되는 거죠. 그래서 말씀하신 사건들이 2010년. 2011년 사건들인데 아직까지 진행 중이에요.

 

김지미 길고 어려운 싸움을 하고 계시네요. 변호사님 하면 피해갈 수 없는 게 국가보안법 사건일 텐데 특히 내란음모 사건 정말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내란음모 사건 변호인단 중에서도 조지훈 변호사님이 제일 고생 많이 했다라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어요. 간사를 맡으셔서 실무를 거의 도맡아 하셨잖아요. 민주변론에 박치현 변호사님이 변론기도 쓰셨는데 그 내용도 굉장히 흥미진진했거든요.

 

조지훈 제가 실무담당을 하게 된 이유가 사건이 수원 남부서라서(웃음). 제 사무실과 되게 가깝고 영장실질심사를 수원지법에서 하고, 그래서 피해갈 수 없었던 거죠. 제 담당 직원은 다음부터 이런 사건 또 오면 회사 나가겠다 이런 얘기를 하고(웃음). 내란음모사건은 진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간사변호사 실무를 제가 하게 됐는데 모두 다 열심히 하셨어요. 김칠준 변호사님도 여러 가지 경험을 했지만 이번처럼 변호인단이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움직인 경우는 처음인 것 같다고 하셨으니까요. 저는 이런 대규모 변호인단으로 한 사건은 거의 처음이었으니까 그게 좀 달랐던 것 같아요.

그리고 워낙 여론이 안 좋았고 저도 처음에는 워낙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아서 언론의 얘기가 맞나 이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증거기록을 다 분석하면서 이게 진짜 아니구나 하는 걸 계속 깨달아 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른바 제보자라고 하는 사람에 대한 증인신문. 그 분은 저도 아는 사람이었거든요. 제가 통합진보당 경기도당 당기위원장을 했었는데 그 사람이 당기위원이었어요, 김칠준 변호사님은 더 잘 알고. 그래서 그때 신문과정이 뭐랄까 같은 사람인데 완전 다른 사람을 보는..기분이 이상했어요.

그 사람이 김칠준 변호사님하고 저한테 그런 식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대놓고 그래서 김칠준 변호사님께서 정말 화가 나셔서 큰 소리 치고 그랬었죠. 인간이 저렇게 될 수 있나하는 철학적인 고민까지 하게 되더라고요.

 

김지미 저랑 같이 사는 사람도 그랬지만 조변호사님도 거의 이혼당할 뻔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집에 들어오지를 않으니까(웃음).

 

조지훈 설변호사님이 저한테 한 번 그러던데요. 자기는 그래도 자주 들어가는 거라고, 조변호사는 더 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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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말씀하신 것처럼 사건을 직접 하는 사람은 기록을 보면 볼수록 이거 진짜 아니구나 하면서 점점 사건에 빠져들고 어떤 사명감도 생기고 그렇지만 어쨌든 집에 있는 사람은 모르잖아요. 이게 큰 사건이고 언론에도 나오고는 하지만 이해받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해를 시키셨어요?

 

조지훈 끝날 때까지 이 재판의 역사적 의미와 무게에 대해서(웃음). 와이프가 경기대에서 학생회 활동 같이 했던 동기에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이해는 좀 하죠.

 

김지미 이해 안 되던데요(웃음).

 

조지훈 이해는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참는 거죠. 분노를 관리하고 참는 거죠.(웃음)

 

김지미 처음에는 다산에서 쪽잠을 자다가 나중에는 아예 숙소를 잡았잖아요. 그리고 조변호사님하고 설변호사하고 몇 분은 거의 상주하다시피 거기서 지내셨잖아요. 그런 식의 작업을 하는 사건은 저도 처음 봤거든요. 또 변론기를 읽어보면, 대규모 변호인단을 꾸리더라도 이름만 올려놓은 사람들이 많고 실질적으로 수행을 하는 사람은 소수인데 이 변호인단은 참여한 사람이 모두가 다 역할을 갖고 일을 했던 유일한 변호단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내용이 있거든요. 어떻게 해서 변호인단이 그렇게 잘 운영이 됐을까요?

 

조지훈 일단 변호인단 구조를 김칠준 변호사님, 천낙붕 변호사님, 심재환 변호사님 이 세 분을 대표단 그룹으로 하고, 저랑 설변호사님이랑 박치현 변호사님이랑 하주희 변호사님 포함해서 5-6명이 실무단 변호사, 그리고 나머지 변호사님들은 각자 역할을 나눠서 그런 체계가 잘 잡혀있었어요. 그리고 대표단 세 분이 잘 이끌어 주셨던 것 같아요.

 

김지미 제가 들은 것 중엔 구글드라이브를 통해서 여러 명이 하나의 서면을 동시에 작업을 했다라고 하던데 이건 윤영태 변호사님의 공이었던 거죠?

 

조지훈 네. 윤영태 변호사님의 역할이 아주 컸어요. 윤변호사님이 IT 쪽으로 아주 해박하셔서 디지털 증거와 관련해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김지미 디지털 증거의 증거능력 관련해서 최근에 저도 관심이 많이 생겼어요. 디지털 증거는 사실 왕재산 사건이나 일심회 사건 같은 국가보안법 사건을 통해서 이론이 정립된 측면이 있거든요. 이번에 내란음모 사건도 녹음파일과 관련해서 치열하게 다투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부분과 관련해서 디지털 증거의 증거능력을 다투는 것이 왜 중요한지 얘기해 주신다면요?

 

조지훈 저도 이전에는 큰 고민 없었는데 국가보안법 사건은 디지털 증거가 많이 나오거든요. 일반사건에서는 파일 같은 디지털 증거 관련해서 다투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다퉈보면 약점이 나오더라고요. 내란음모사건에서도 녹음을 디지털 녹음기로 했는데, 그 중에 2개는 해쉬값 자체가 틀렸어요. 해시값의 동일성이 인정이 안된 거에요. 우리가 동의했으면 그냥 넘어갈 문제인데, 부동의 하니까 해쉬값을 다 맞춰보는 거죠. 그런데 기재된 해시값 자체가 다른 거에요. 그렇게 해서 2개는 증거능력이 인정이 안 되었어요.

 

김지미 해쉬값이 다르다는 건 증거로 낸 파일이 원본과 동일한 파일이라고 볼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검찰에서 그걸 그냥 증거로 냈다는 거죠.

 

조지훈 네. 그런데 기술적인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쉬값 자체가 다른 것은 심각한 결함이잖아요. 이런 것을 발견하려면 디지털 증거는 정말 꼼꼼히 봐야 한다. 많이 문제 됐던 것은 암호를 푸는 복호화 과정인데, 복호화 과정 자체를 통제 안 한 것은 위법하다는 판결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어요. 그런 것들이 의미가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김지미 조금 더 이야기를 해 보자면 국가보안법 같은 시국사건을 통해서 디지털 증거의 증거능력에 대해서 문제점을 인식하신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최근 카톡이나 국정원 해킹 등 정보인권 관련해서 굵직한 사건들도 생겨서 지금 민변에서 정보인권위원회 준비모임을 하고 있고, 조변호사님도 참여를 하고 계시죠. 그래서 형사사건에서 동영상이나 녹음 파일, 디지털 사진 같은 것들이 증거로 나왔을 때 첫 대응을 이렇게 해야한다는 팁을 알려주신다면.

 

조지훈 처음에 디지털 증거, 녹음파일이나 디지털 사진 이런 거에 대해서 부동의 의견을 밝히면 많은 판사들이 그래요. 그럼 이게 그 현장을 찍지 않았다는 얘기냐. 이게 조작됐다는, 위변조 됐다는 얘기냐. 위변조 되지 않았으면 왜 부동의 하느냐 이렇게 물어보는 거에요. 그럴 때는 디지털 증거는 본질적으로 조작이나 변개에 아주 취약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변조가 되지 않은 증거능력 있는 증거라는 입증을 먼저 검사가 해야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부동의 하는 거다 그렇게 해야 되는 거에요. 동영상을 찍었으면 촬영한 사람, 파일을 저장하고 복사한 사람을 다 불러서 증거의 연속성, 무결성이 지켜졌는지 봐야 하는 거고. 동영상 파일이 해당 캠코더에 저장된 원본이 아니라고 하면 해쉬값에 따라서 연속성이나 동일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거고. 이런 것들을 법정에서 다 밝혀야 되는 거거든요. 그걸 요구해야 해요.

 

김지미 그러면 어떻게 하랴는 얘기냐, 국과수에 보내서 감정이라도 하라는 말이냐, 감정 비용을 피고인에게 부담하게 하겠다는 식으로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판사도 있거든요. 그때는 어떤 식의 답변을 해야 할까요?

 

조지훈 만약 녹음파일이라고 한다면 녹음자를 출석시켜야 하고 그것을 다른 디지털 저장 장치에 넘길 때 있었던 사람들이 다 나와야 하는 거죠. 저희 내란음모사건 때 그래서 녹음자들이 다 나왔거든요.

김지미 저도 처음에 디지털 증거에 대한 자료를 보면서 해쉬값이 뭐지? 무결성이 뭐지? 어떻게 하라는 거지? 되게 막연했거든요. 디지털 증거가 증거능력을 가지기 위한 요건에 관해서 짧게 얘기해주시면.

 

조지훈 과정상의 자료의 동일성 인정되어야 되는 것이죠. 수집절차, 복제하는 절차, 그리고 증거로 제출되는 절차. 디지털 파일이라는 것이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0101, 이렇게 이진법으로 되어 있는 자료이기 때문에 위변조가 너무 용이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걸 봉쇄할 수 있는 조치가 취해졌느냐 그게 요건의 가장 기본 뼈대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어요.

가장 간편한 게 해쉬값을 추츨해서 원본하고 사본의 해쉬값이 같으면 동일성이 인정이 되는데,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 녹음자 아니면 경찰이 채증한 거면 채증한 사람, 이걸 또 저장한 사람 각각 다 불러서 이게 무결하게 계속 원본 동일성이 유지되는지가 입증이 되어야지만 증거능력이 있다라는 거죠.

 

김지미 사실 이건 민변 변호사들 아니면 싸울 수가 없는 부분이고, 최근에는 우리 회원들 사이에서도 이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물어보시는 분들이 꽤 계시거든요.

 

조지훈 왕재산 사건 이후에 천낙붕, 이광철 변호사님 위주로 이런 문제의식이 있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디지털정보위원회 준비모임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 분야에 관심이 있거나 공부하고 싶으신 분들이 오시면 많이 배우고 굉장히 유익할거예요. 그리고 지금시기에 굉장히 필요한 작업인 것 같아요. 증거능력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정보인권 관련해서 카톡도 있고 해킹도 있고 사실 산재해 있는데, 민변에 대응할 만한 단위가 없어서 내년에 정식 위원회 발족을 목표로 하고 있고 선배들의 노하우도 배울 수 있는 좋은 모임입니다. 많이 참여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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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내란음모 사건 얘기로 다시 돌아오면 기록을 보면서 진짜 이건 아니다는 생각을 하셨는데 1심에서는 모두 유죄가 나왔잖아요. 몇 달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가고 엄청 고생을 했는데 결과가 그렇게 나왔을 때 상실감이 굉장히 컸을 것 같아요.

 

조지훈 네. 멘붕상태였죠. 아직도 생생해요. 1심 판결을 법정에 가서 들었고, 김칠준 변호사님이 선고 후에 바로 나와서 그 자리에서 즉흥연설을, 거의 절규를 하셨죠. 그래서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한데, 한쪽에서는 우리가 너무 쉽게 봤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 식으로 판단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거죠. 또 한편으로 항소심에서 더 크게 칼을 갈아서 붙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김지미 1심에서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항소심 가서 특별히 더 할 것이 있을까 생각이 언뜻 드는데, 항소심에서 뭔가를 할 만한 게 더 있었나요?

 

조지훈 역사적인 무게도 있지만 기록도 방대하고 증인신문도 저희가 조금 부족했던 게 주5일 재판이었잖아요. 그래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던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논리체계나 변론의 실질적인 내용이 구조적으로 체계적으로 짜임새 있게 탁 다가가지 못했던 그 부분은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항소심에서는 거기에 좀 더 집중을 했던 거였죠.

 

 

김지미 언뜻 생각해 봐도 변호인단은 그렇게 많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주5일 재판을 하다보니까 정리가 안 되는데, 재판부는 당연히 정리가 안 될 것 같거든요. 그래서 어쩌면 이 판결을 그래도 조금 뒤집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더 들었을 것 같아요.

 

조지훈 1심 판결문 자체가 비약이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항소심에서 충분히 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내란음모를 인정하는 부분에 있어서. 그래서 항소심에서는 음모를 깨는데 있어서, 윤영태 변호사님이 아이디어를 주셔서 음모에 관한 하급심 판결을 다 뒤졌어요. ‘음모’자 들어가는 모든 하급심 판결을 다 뽑아서 그거를 의견서로 제출했죠. 그게 음모부분에 대해서 법리적으로 깨는 근거가 됐고, 또 하나는 일본에 이른바 삼무판결, 예전 오키나와 투쟁 때 했던 음모와 관련한 아주 중요한 판결들이 많아서 그걸 조사해서 제출했어요. 그게 법리적으로 큰 근거가 됐었죠.

 

김지미 그런데 항소심에서 내란음모는 무죄가 됐지만 내란선동은 유죄가 됐단 말이죠. 모르는 사람이 듣더라도 내란음모는 무죄고 내란선동은 유죄라는 게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그게 결국에는 대법원까지 확정이 돼서 그 사건은 종결이 됐는데, 그런 엄청난 큰 사건을 끝내고 났을 때의 감회랄까 이제는 정리가 좀 되셨나요?

 

조지훈 개인적으로 쭉 정리해 볼 시간은 없었는데, 그 이후에 계속 재판을 하다보면 문득문득 내가 많이 좀 성장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사건을 겪으면서 재판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 그 다음에 변론기술이라면 기술 이런 것들이 아직도 많이 부족한데 문득문득 이런 큰 여러 가지 다양한 것을 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가졌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김지미 변호사라는 직업이 혼자서 하는 직업이잖아요. 보통은 내가 혼자 서면 쓰고 혼자 재판 나가고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를 알기가 쉽지 않은데 변호인단 활동을 하면 배우는 것도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의 변론 스타일이나 증인신문 할 때 태도 이런 것들 보면서도 굉장히 많은 공부가 될 것 같거든요.

 

조지훈 설변호사님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증인신문을 능숙하게 잘 하시더라고요.

 

김지미 마치 제가 이 대답을 유도한 것 같네요.(웃음). 그럼 이쯤에서 피해갈 수 없는 개인사를 또 여쭤보면. 아까 살짝 사모님하고 학생시절에 만났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조지훈 네. 알게 된 건 94,5년도부터 알게 됐는데, 결혼은 2006년도에 했지요.

 

김지미 2006년이요? 2차 시험을 본 해이신 것 같은데요.

 

조지훈 2차 시험 보기 1달 전에 결혼을 했어요.

 

김지미 시험보기 한 달 전에요? 시험을 포기하셨나요(웃음)?

 

조지훈 많은 사람들이 제 청첩장을 보고 얘는 포기했구나 이렇게 봤죠.

 

김지미 2차 시험을 끝내고 했어도 됐을 텐데..아무래도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겠네요.(웃음)

 

조지훈 우리 첫째요.(웃음) 첫째 딸 생일이 2006년 10월 11일인데, 그 다음날 2차 발표가 있었어요. 복덩이죠. 산부인과에서 와이프랑 있어서 저는 합격자 명단도 못 봤어요. 신림동에 있는 후배가 됐다고 알려줘서 알았죠.

 

김지미 출산과 합격 중 어느 쪽에 더 마음을 졸이셨어요? 예정일이 거의 같았을 텐데.

 

조지훈 제 와이프가 출산 전에 너무 아팠어요. 저희가 참 무식해서 자연분만 좋다고 그래서 늙은 거는 생각지도 않고 그거 한다고 고집을 부렸던 거에요. 그래서 아프다고 하는데 산부인과 가면 안 좋다고 해서. 엄청 고생했어요. 출산하기 몇 주 전부터 일어나지 못했어요. 출산하고도 6개월 동안 못 일어났어요 골반 쪽에 문제가 있어서. 그래서 출산하러 갈 때도 친구들 불러서 들고 이동하고 그랬었어요. 그래서 2차 발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죠.

 

김지미 그렇게 무사히 아이도 태어나고 다음날 바로 합격도 하고 진짜 복덩이네요. 아이가.

 

조지훈 요즘 말을 참 안 들어서(웃음).

 

김지미 2006년이면 지금 10살 됐겠네요. 그럼 아이는 1명이신가요?

 

조지훈 저희 사무실 이름이 다산이기 때문에 거기에 부응하느라 2010년에 둘째를 낳았지요. 저희 사무실은 변호사님들도 다 다산이에요(웃음).

 

김지미 사모님은 학교 때 알고는 지냈지만 본격적으로 사귄 건 그때는 아니었나 봐요?

 

조지훈 제가 학교를 그만두는 그 때쯤부터 해서 연애를 10년 정도 했어요. 제 공부 뒷바라지를 지금의 와이프가 해 줬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제가 꼼짝을 못해요. 뒷바라지 다 해줬더니 당신이 지금은 뭐라도 된 줄 아냐? 부터 해서 나없었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말이야 막 이래요(웃음).

 

김지미 변호사님들 인터뷰 하다보면 사모님들 훌륭하신 분들이 많더라구요. 오세범 변호사님은 사모님을 가리켜서 ‘장비’같다고 표현하셨어요.(웃음) 그러면 사모님은 변호사님의 성인 이후의 거의 모든 걸 다 알고 계시는 것과 마찬가지네요.

 

조지훈 네. 그래서 제가 사람들에게 잘 공개하지 않아요(웃음).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입 뻥끗하면 너는 끝난다 이러고 있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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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저희 회원행사에 한 번 같이 오시죠(웃음). 변호사님은 지금 정보인권모임 말고는 위원회 활동을 특별히 하시진 않으시죠?

 

조지훈 네. 수료하고 노동법학회장 출신이라서 노동위원회 해야 된다 이런 얘기 들었었는데 사무실이 수원이라 모임에 참석하는 게 쉽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디지털정보인권위에 주력을 하려고 하고 있어요.

 

김지미 어느덧 7년차 중견변호사가 되셨는데 요즘 정세가 참 암울하잖아요. 이럴 때 민변이 이런 역할을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조지훈 7년차 중견변호사인데, 저희 다산에서는 아직도 막내에요. 제 후임이 오세범 변호사님이라(웃음). 제 주위에 지인들이 제가 민변 회원이라고 하면 그것 자체로 되게 높이, 아 정말 고생 많다 이렇게 해주는 분들이 많거든요. 시민들이 민변에 바라는 요구는 되게 높은 것 같아요. 특히 지금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민변이 한 발 더 치고나가는 역할을 해야 되지 않나. 지금도 잘 하고 있지만, 더 뭔가 시민들의 쌓인 분노를 어떤 지식인의 목소리, 전문가의 호소 이런 것을 모아서 반 발짝씩이라도 더 치고 나갈 필요가 있지 않나.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내란음모, 정당해산을 쭉 다 겪었잖아요. 내란음모 할 때 어떤 변호사님이 내란음모까지 터졌으면 재네들 다 한 거다, 이보다 더 할 게 있겠나 했는데 정당해산까지 갔잖아요. 지금 정권은 로드맵이 있는데 저도 그렇지만 지식인들이 대부분이 김대중, 노무현 10년의 역사가 있는데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을 거다 이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한홍구 교수님이 하신 얘기 중에 예전에 국정원 과거사위 할 때 자기 밑에서 열심히 도와준 담당자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유우성 사건에서 증거 위조한 과장이라는 거에요. 정말 우리가 잘못한 게 이 정도 하면 청산이 될 줄 알았는데 그건 정말 환상이었다. 인적 청산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무지했거나 너무 방관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는데 그게 냉철한 진단인 것 같아요.

 

김지미 민변의 역할이 커질수록 어쨌든 회원들을 믿고 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 조변호사님의 적극적인 활동을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좋은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목, 2015/11/1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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