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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 긴급조치…… ‘정의’를 고민한 변호사들이 있었다 ─ 과거사위 서중희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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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 긴급조치…… ‘정의’를 고민한 변호사들이 있었다 ─ 과거사위 서중희 위원장

익명 (미확인) | 화, 2016/09/13-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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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9일(금), 법무법인 동화 사무실에서 서중희 변호사를 만났다. 민변에 가입한 지 만 10년 차가 다 되어가는 그는 현재 과거사청산위원회(이하 과거사위)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

가끔 평소에 수줍음 많던 사람이 카메라 앞에서 180도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서글서글하고 순한 인상에 스스로를 ‘수줍음이 많다’고 소개한 서중희 변호사도 비슷했다. 처음에는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고개를 내젓다가 이내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과거사위가 주력하고 있는 ‘위안부’ 문제와 긴급조치 등에 관한 뼈 있는 이야기를 풀어냈다. 대화 사이사이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방 울리는데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신입 회원들에 대한 조언의 말과 과거사위 홍보 뒤에는 친절하게도 사진을 찍으라며 사무실 책상에 앉아 골무를 끼고 짐짓 포즈도 취해주었다.

지금부터 ‘수줍지만 친절한 카메라 체질’ 서중희 변호사를 만나보자.

 

인터뷰/정리_자원활동가 이재임(출판소통팀)

 

백면서생서중희 변호사, 입을 열다

김서정(이하 김):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직업과 민변 이야기는 빼고요. 혹시 본인과 가장 닮은 소설, 희곡, 영화, 만화, 드라마 속 캐릭터가 있을까요?

서중희(이하 서): 직업과 민변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나니까 생각나는 단어가 없더라고요. 이런 데에 감이 별로 없어서. ‘백면서생’, 이 정도가 어울릴 거 같아요. 조용하고 말수가 많지도 않고 수줍음이 많아서 ‘백면서생’, 저한테 이게 딱 맞는 단어 같아요. 아내에게 저와 닮은 캐릭터를 물어봤더니 <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을 말하더라고요. 어떤 점에서 닮았는지는 모르겠어요. 또, 사무실 직원 한 명한테 물어봤더니 고양이 ‘가필드’를 이야기하더라고요.

: 생김새가 닮으셨어요.(웃음)

서: 아무튼 저는 수줍음이 많고, 나서는 것보다는 뒤에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 저희가 오늘 인터뷰를 위해 ‘고급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다음 세 가지 질문에 3초 안에 답해주세요. 첫 번째, 조영선 변호사는 나한테 술로 안 된다, 내가 민변 최고 주당이다! O, X, 하나, 둘, 셋!

: (망설임 없이)X입니다. 조변님은 날마다 술이에요. 쉬지 않고 먹어요. 새벽까지 먹어요. 그리고 다음날 눈 퉁퉁 불어서 와요. 같이 마시면 제가 힘들어요.(웃음)

: 워크숍 때 소주병을 품에 안고 돌아다니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 아, 물론 술 좋아합니다. 좋아하지요.(웃음) 공부할 때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 별다른 게 없어서 주말이면 작정하고 폭음을 했죠. 술을 마셔보니 먹을 만 한 거 같아서 계속 마시다 보니 막걸리를 마시면 취하기 전에 배가 부르고, 소주를 마셔야 적당히 취할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산에 갈 때도 조그만 소주(팩 소주)를 사서 혼자라도 올라갑니다.

: 두 번째 질문입니다. 나한테 조영선 변호사란? 하나, 둘, 셋!

: …아따 거시기하네.(웃음) 만난 지 오래됐어요. 사법고시 공부할 때 신림동에 ‘약수사’라는 절에서 처음 만났거든요. 조 변호사를 처음 만났을 때는 얼굴이 시커먼 양반이 호리호리해서,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는 호리호리했습니다. 술도 좋아하시고 해서 친해지게 됐고. 조 변호사가 먼저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저는 조 변호사보다 늦게 합격한 뒤에 둘이 사무실도 같이 하게 됐죠. 전생에 질긴 무엇이 있나, 채권채무 관계였을까?(웃음) 아무튼 인연이 오랫동안 이어진 것 같습니다. 아까 답한 ‘거시기’에는 온갖 것이 포함된 겁니다. 예를 들면 ‘애증’이라든가.(웃음)

: 마지막입니다. 나한테 ‘마눌님’이란? 하나, 둘, 셋!

서중희-변호사

: (인터뷰 전체에 걸쳐 가장 크게 웃음)이분도 참 대단한 분이에요. (황급히)제가 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하는 분입니다. 무서워요. (웃음)

특히 애 낳고 무서워졌어요. 아들이 연년생 둘이거든요, 쌍둥이는 오히려 고만고만해서 괜찮은데, 연년생은 동생이 형한테 절대 안 지려고 해요. 연년생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는 아이들한테 순서를 잡아줘야 하고 아이들 대장 노릇을 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애들 키우면서 목소리가 커지고. 아무튼 제가 사랑하는 분으로 정리할게요. 매우 매우 사랑한다고.

과거사청산위원회, 역사를 새로 만들어나가다

김: 비교적 조용한 회원으로 활동하시다가 최근에 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하며 과거사청산위원회(이하 과거사위) 위원장까지 되셨어요. 위원장으로서 과거사위를 자랑한다면?

서: 과거사위의 역사가 일단 좀 오래되었죠. 다른 위원회는 잘 모르겠지만 과거사위는 2003년에 만들어져서 올해 13년 차입니다. 사회의 굵직굵직한 이슈에 대해서, 특히 과거사와 관련된 이슈에 대해 변호사님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긴급조치와 ‘위안부’ 이슈에서는 소기의 성과를 보이고 있죠.

과거사위 활동을 하다 보면 국가와 국민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시간적 흐름을 이해하게 되고, 역사적 안목을 키우게 돼요. 과거사 문제라는 게 단순하게 “이게 아닌데요!”하고 외친다고 해결이 되는 문제가 아니고, 안목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과거사위, ‘위안부문제 관련 소송을 제기하다

김: 이제 최근 과거사위에서 활발하게 대응하고 있는 ‘위안부’ 이슈에 대해 여쭤볼게요. 현재 과거사위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제기한 소송은 정보공개청구 소송 2건, 헌법소원 1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 1건으로, 총 4건입니다. 이 중 헌법소원은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된 것’임을 확인하는 12.28 한일합의가 위헌임을 확인해달라는 소원인데요. 12.28 한일합의에 어떠한 헌법적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서: 일단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과거에 헌법재판소 판결이 하나 있죠. 일본의 기본적 입장은 ‘1969년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라는 입장이에요.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청구권 협정 당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봤어요. 그리고 청구권협정 중 3조는 분쟁해결조항인데, 내용을 보면 ‘이 협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외교적으로 해결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분쟁을 통해서 해결하고, 이 결과에 대해서는 승복하자’는 거예요. 그러니 청구권 협정 3조에 의해 국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외교적으로 다시 협상을 하고 분쟁 해결절차를 나아가야 하는 ‘작위 의무’가 있다는 것이죠.

‘위안부’ 강제 동원은 일본군이 위안소를 운영하면서 조선 식민통치기구를 통해 위안부를 모집하고, 이들을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성폭행한 국가 범죄적 행위예요. 국가는 그런 범죄행위에 대한 손해 배상 책임을 져야 하고, 이것을 해결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요. 그리고 국가가 ‘위안부’ 강제 동원으로 인한 피해 보상 협의를 하려 한다면 피해자들의 절차적 참여권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12.28 합의에서는 이 참여권이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이게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어요.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에 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나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신체적 자유에 대해 회복을 구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할 것인데, 국가와 개인은 분명히 법인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이를 대신해서 행사할 수 있는지도 문제고요. 국가가 외교적으로 재외국민을 보호해줘야 하는데, 외교적 조치를 다 했는지도 살펴봐야 해요. 기본적으로 국가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요구하고 있는, 일본 정부와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잘 해결해야 할 작위 의무가 있음에도 12.28 한일합의를 통해 부작위를 선언해버렸던 것도 위헌적인 행위이죠.

김: 헌법소원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각각 ‘위헌’ 판결과 원고 승소 판결을 받을 경우 현실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부분에서 도움이 된다고 보시나요? 또 ‘대한민국’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손해를 배상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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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중간중간 질문을 메모하는 서중희 변호사의 손.

: 이번 12.28 합의가 헌법적으로 위헌 무효라고 한다면 합의 자체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거죠. 국가는 여전히 2011년 헌법재판소 판결대로 일본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외교적 협상과 분쟁 절차에 나서야 할 의무를 다시 지게 됩니다. 12.28 한일합의를 통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분쟁 절차에 나가지 않고 ‘해결됐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불법행위라는 것이거든요. 민사상으로도 국가의 행위는 불법행위라는 것이고, 불법 행위라면 당연히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것이고요. 어쨌든 헌법소원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에서 각각 ‘위헌’ 판결과 원고 승소 판결을 받아내면 ‘12.28 한일합의는 무효다. 국가는 다시 분쟁해결을 위한 협상에 나아가야한다’는 것을 사법적으로 확인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손해보상을 한다는 건 이번 합의가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국가가 국민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국가가 이 피해자들의 피해 회복을 위해서 본 정부와의 협상에 성실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기본적으로는 그런 의미인 것 같아요. 박근혜 정부의 일본 협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사법적으로 확인하는 의미가 있는데, 이번 정부에서는 판결이 쉽지 않을 것 같네요.

배상청구권에 대해서도 헌법 재판소가 2011년에 언급해놓은 게 있어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배상청구권은 재산권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침해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신체의 자유에 대한 사후적 회복의 의미를 가진다.” 단순히 배상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잃고 인권을 침해당한 소녀들의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라는 뜻이겠죠. 인간의 존엄과 가치,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것에 대해 늦게나마 회복해준다는 의미고요. 한 많은 인생에 대한 보상입니다.

: 나의 신체가 국가의 소유가 아니고, 나의 권리와 존엄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굳이 한국의 정부가 ‘나’를 멋대로 대표할 수 없다는 분석도 있더라고요.

: ‘국가가 나서서 개개인의 권리를 처분할 수 있는가’하는 부분에서 견해의 차이가 있어요. 국가가 외국과 협상할 때 ‘국가 일부를 이루는 개인의 권리 일부를 처분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어요. 하지만 국가와 개인의 법인격은 서로 다르거든요. 법률의 관점에서는 똑같은 인격체이기 때문에 개인이 동의하지 않은 이상 타인의 인격, 타인의 권리를 함부로 처분할 수 없어요. 이런 관점에서는 국가가 나서서 개인의 권리에 대한 부분을 합의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관점이 있어요.

‘나의 신체 권리가 국가에 소유되지 않는다’는 분석은 나와 국가를 동등한 인격체에서 보는 관점 같고, 또 이게 맞겠죠. 어차피 피해는 내가 입었는데 제삼자가, 일부 관료가 나서서 나의 피해에 대해 ‘더는 묻지 않겠다’고 합의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식으로든 피해자 본인이 스스로 나서서 결정하고 참여하는 절차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번 협상이나 과거의 협상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죠.

과거사위 긴급조치 변호인단’, 여기까지 왔다

: 그 외에도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및 성폭력 문제, 긴급조치 문제 등 다양한 과거사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사위에서 이제까지 해왔던 활동 중 ‘긴급조치 변호인단’은 오랫동안 이어져온 활동이지만 그만큼 신입 회원들은 잘 모르고 있을 것 같아요.

: 과거사위는 특정 과거사 이슈가 마무리되지 않는 이상 그 이슈에 대해 계속해서 활동하는 거니까요. 긴급조치 변호인단은 벌써 10년 동안 활동하고 있습니다. 긴급조치는 아시다시피 유신독재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항거하는 민주 인사들과 유신 정부에 대한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조치들이죠. 형사소송법을 거의 무력화시켜버리는 초법적인 조치였어요. 국왕이 칙령으로써 통치할 수 있는 그런 정도예요.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면서 폐지되었고 피해자들이 ‘억울하다, 무죄로 만들어달라’ 했더니 형벌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면소 판결을 내려 끝내버렸습니다. 유죄도 아니고 무죄도 아닌 어정쩡한 판결이 면소 판결입니다. 여전히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남아있는.

기본법 보장 규정에도 어긋나고 형사소송법 제반 법칙도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지금 헌법에 비춰 봐도 위헌이고, 유신헌법에 비춰 봐도 위헌이에요. 그래서 재심을 청구하게 된 거죠. 헌법재판소에서도 위헌 무효 소송을 제기했고요. 2010년 10월경 대법원에서 최초로 긴급조치 1호에 대한 위헌 결정을 내렸어요. 그때까지 법원들은 긴급조치 재심 사건에 대해 계속 면소 판결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긍정적인 판결이 나온 겁니다.

위헌 결정 뒤로 구금된 기간 형사 보상을 청구하고, 민사 소송으로 손해 보상 청구까지 들어갔어요. 사실 법리상으로는 대법원의 면소 판결이 형사법에 규정이 되어 있거든요. 법원은 형사소송법에 맞게 판결했고, 형식적 법치주의만 따지면 그게 맞긴 하죠. 하지만 ‘긴급조치가 위헌 무효인가’라는 판단을 이제까지 안 했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던 거예요. 긴급조치가 무효라는 것에 사법부의 판결을 끌어냈다, 변호사가 사회를 발전적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방향으로 일조했다, 그런 흥분감으로 계속 끌고 오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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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질문에 답하는 서중희 변호사의 뒷편으로 긴급조치 관련 재심판결 모음집이 책장 한 칸을 채우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취임한 뒤로 대법원이 긴급조치가 위헌 무효 판결을 받은 것에 대응하는 새로운 논리를 개발했습니다. ‘과거의 긴급조치가 위헌 무효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긴급조치를 발령한 논리는 유효하다. 긴급조치에 기초해서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내리고, 수감생활을 시킨 공무원이 뭘 잘못했냐.’ 이런 거죠. 그러면 ‘대통령이 위헌무효인 긴급조치를 내린 것은 잘못 아닌가요?’ 하니까 ‘그것은 대통령이 통치권 행사의 목적으로 한 것이고 정치적인 책임을 질 문제이지, 개개인에게 행해진 불법행위에 대해 법률적 책임을 질 일이 아니야.’라고 주장해요. 긴급조치는 위헌무효인데, 그에 따른 법률적 행위는 정당하다는 이상한 논리가 되어버렸어요. 지금의 대법원은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를 펴고 있고. 그게 가장 어려운 점 중 하나예요. 성과와 아쉬움을 함께 가지고 있죠. 이 부분은 판례 변경이 필요한 사항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재임(이하 이): 그런 대법원의 입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고, 여기에 대해 반박할 논리는 아직 없나요?

: 이런 논리를 반박하는 논리를 개발하려고 여러 변호사가 노력하고 있는데, 대법원이 아니라고 막고 있으니까 상당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대법원의 구성을 진보적으로 바꾸거나 적절하게 조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서울대학교를 나오시고 판사를 하신 남성분들, 기본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는 분들이 대법관이 되거든요. 대법원이 사회의 다양성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자기 구미에 맞는 사람을 대법원장에 앉힐 가능성도 있고요. 여러 가지 점에서 과연 우리 사법제도가 정당한 건지 의문이 있어요.

법률이 정당하고 정의에 부합하는지 고민하는 변호사 집단이 있었다

: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당대사, contemporary history)’라는 말이 있죠. 과거사위의 활동은 지금의 인권 관점에서 과거의 사건을 평가하고 정의를 회복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100년, 200년 뒤의 누군가가 현재의 역사를 연구하고 어떤 사건의 역할과 의의를 평가할 때 과거사위 활동이 어떤 평가를 받기를 원하시나요? 혹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 것 같으신가요?

: 어렵습니다. 어쨌든 저희가 정치를 하는 집단이 아니기 때문에 ‘부국강병’ 이런 건 정치인들이 이야기하는 관점인 것 같고요. 법조인으로서 ‘당대사’를 말한다면 과거의 권력행사가 정당한 이유와 절차에 따른 것인지에 중점을 두고 보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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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위는 여러 과거사 사건에서 인권이 정당하게 지켜졌는지, 인권침해가 일어났다면 그것이 정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를 따지고, 부당한 인권침해가 일어났다면 침해된 인권을 회복하는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요.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자의적이고 독재화된 권력에 의해 일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죠. 과거사위의 활동은 그런 권력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정의를) 회복하려는 법률적 시도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긴급조치가 당시에는 권력에 의해서 시행되었고 검사와 판사들이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했지만, 이제는 긴급조치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이것이 위헌 무효였다는 것이 사법적으로 밝혀진 거잖아요. 잘못을 밝혀냈다는 것에 의의가 있어요.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법률이 정당하고 정의에 부합하는지 고민해보는 변호사 집단이 있었고, 그것이 과거사청산위원회였다.’, 이런 정도의 평가를 받지 않을까요? 어떻게 평가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좌빨’이니 어쩌니 욕을 하더라도 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필요한 조직 활동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무언가’, 그것을 해라

: 2006년 10월 30일에 가입하셨고, 한 달 지나면 만 10년차가 되시네요. 축하의 박수! (웃음) 10년을 활동해보니 이제 가입하는 신입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 민변 가입할 때 어떤 특별한 활동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아요. 처음엔 우리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며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고, 저는 이분들의 보이지 않는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 정도가 제가 생각한 행동반경이었어요. 그런데 민변을 들락날락하기 시작하니까 달라지기 시작했죠.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하루를 보낼 수 있어요. 그렇지만 ‘내일 뭘 하지’ 생각하면서 하루를 보낼 수도 있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도 나이는 계속 먹겠지만, 저는 익숙하던 대로만 지내면 인생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거나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사회적으로 부조리가 드러나거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말만 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나중에 내 삶을 반추해봤을 때 내 살아온 모습에 대해서 나름의 자긍심이 생기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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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변호사들에게 조언한다면…… 일단은 뭔가를 해라. “네 가슴속에서 우러나와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 ‘뭔가’를 일단 해라”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이왕이면 과거사위를 하면 더 좋고요. 과거사위 활동은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워주고, 좋은 선배 변호사들도 만날 수 있고, 여러 시민단체와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생의 저변을 넓힐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 같아요. 역사적 관점도 얻을 수 있고, 사서나 역사적 서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특히나 좋아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리고 과거사위 선배들은 술을 사달라고 하면 분명 좋아할 겁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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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황수영 |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간사

인터뷰 및 정리 이경민 |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작년 7월, 경북 성주 주민들에게 예고 없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한미 정부가 성주에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THAAD)를 배치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나라 돌아가는 일은 나라님에게 맡겨두고 평생 농사지으며 풍년에 웃고 흉년에 울던 마을 주민들. ‘국가 안보’란 4글자 때문에 사드를 배치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은 주민들의 삶을 절망으로 만들었다. 한 발 양보해 대한민국 다수를 위해 사드를 배치한다고 해도 삶의 모든 순간들이 고스란히 녹아져있는 곳에 미군기지가 들어선다는데 주민들에게 충분한 설명과 진정성 있는 설득, 진심어린 위로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했어야 할 일을 못한 국가를 대신한 활동가, 황수영. 사드 배치 예정지 성주 소성리 주민들에게 황수영 활동가는 사드 반대 상황실 아가씨(?)로 불리우고 있다. 성주·김천 주민들, 그리고 성지를 지키기 위해 나선 원불교 교도들과 함께 “평화를 지키는 무기는 없다, 한국 어디에도 사드 배치는 안 된다”고 외치고, 그들의 목소리가 더 많은 시민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확성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소소한 일부터 어려운 일까지 함께하며 대소사를 대변하는 그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 운동이라고 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기소개 부탁한다.
이름은 황수영이라고 한다. 현재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주로 국방, 외교 분야 감시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드 배치나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해외파병, 국방예산, 무기도입 사업 감시, 군사비 축소 요구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예산 관련해서는 군사비를 축소해서 복지비용으로 사용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시민운동 경험은 참여연대가 처음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2008년에 티베트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직후 티베트인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뉴스에서 보았다. 티베트 여행 카페에서 그 모습을 지켜만 볼 수는 없다며 ‘여행자의 윤리’를 고민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고 베이징올림픽 즈음해 티베트와 연대하는 촛불을 들었다. 그러면서 팔레스타인 연대 활동, 아프가니스탄 재파병 반대 활동 등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평화문제 전반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참여연대 입사 전에는 ‘경계를 넘어’라는 작은 평화단체에 있었다. 주로 파병 반대,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활동, 국제분쟁을 알리는 활동을 했었다. 


최근 성주에 사드배치가 이슈가 되고 있다. 사드배치 대응 활동을 하고 있는데, 사드가 무엇이며 무엇이 문제인지 설명해 달라. 
사드는 미국 미사일방어체제(MD)에 속하는 무기다. 날아오는 미사일을 미사일로 맞춰 방어한다는 개념이다.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 등을 견제하기 위해 미사일방어체제를 구축하고 있고, 사드는 그 일부다. MD는 고도별로 여러 무기체계로 구성되는데 사드는 그중 상대적으로 높은 고도(40~150km)에서 미사일을 요격하는 무기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라고 한다. 탐지하는 X-밴드 레이더와 요격하는 미사일이 사드의 핵심 장비다.  


분단이라는 현실에서, 사드가 우리의 안보를 지켜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우선, 방어체계라고 하니 사드가 방어용 무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미사일 방어라는 개념 자체가 ‘절대 방패’를 만들겠다는 미국의 욕망에서 탄생한 것으로, 단순히 ‘방어용’ 체계가 아니다. 군사적으로 완벽한 방어는 완벽한 공격과 동의어로 매우 위협적인 개념이다. 미국은 MD 구축으로 상대방의 미사일 공격은 완벽하게 방어하면서, 미국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선제공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려고 한다. 미국은 핵무기 선제사용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방의 핵미사일 공격을 무력화할 수 있는 MD는 게임의 규칙을 바꿔버릴 수 있다. 
한국에 사드를 배치한다는 것은 미국과 일본이 아시아 지역에 구축하는 MD에 한국이 하위 파트너로 편입된다는 걸 의미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사드 한국 배치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한미일이 MD를 강화할수록 중국이나 러시아도 그것을 무력화할 수 있는 무기체계를 개발하고 구축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사드의 본질적인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질적으로 다른 군비경쟁이 유발한다.
두 번째로, 박근혜 정부는 마치 사드가 있으면 북한의 핵미사일을 다 막을 것처럼 이야기해왔지만 사실 한반도에 별로 효용성이 없다. 남한과 북한은 가깝기 때문에 미사일이 저고도로 날아오고, 북한의 공격이 발생한다면 단거리 미사일이나 장사정포, 방사포를 사용할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이다. 최소 요격고도가 40km인 사드는 쓸모가 없다. 사드가 한반도에 군사적 효용성이 낮다는 것은 그동안 한국 국방부, 미국 국방부의 자료와 여러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로 검증이 되어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아직까지 실전 배치된 적도 없고 기술적으로 검증도 되지 않은 무기다. 
세 번째로는, 결국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막기 위해 무기를 도입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북한의 핵 능력이 커져온 시간은 사실 대화나 협상이 단절됐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한국과 미국 정부의 대북 적대정책은 이미 실패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한반도 핵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결국 대화와 협상이다. 사드 배치 등 군사동맹 강화, 군사력 확장은 답이 아니다.

 

ⓒ 참여연대

 

사드 배치가 비민주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 한미간 합의 내용이나 부지를 성주로 결정한 근거 등이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정해진 것이 없다고 해놓고 3일 뒤에 배치 결정을 발표했다. 사드 배치는 기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범위를 뛰어넘는 무기체계이기 때문에 사실상 새로운 조약을 맺는 행위에 해당하고, 헌법상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국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고, 주민의 동의는커녕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않았다. 롯데에게 부지를 취득하는 과정, 주한미군에 부지를 공여하는 과정 등 절차 전반에 불법과 탈법이 판을 치고 있다. 주민들에게 호언장담했던 환경영향평가도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사회적 합의나 주민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국가 안보, 국가 안보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위한 국가 안보이고 누구를 지키기 위한 국가 안보인지 모르겠다. 주민들이 반대하고, 사드가 우리 안전과 평화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안보를 위한 것이라며 묻지도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고 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일본도 비슷한 일을 경험했는데, 비교하면 어떠한가? 
X-밴드 레이더가 배치된 일본 교가미사키 기지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절망스럽다. 일본 정부와 지자체는 레이더 배치 전 주민 설명회를 약 16차례 열었다. 지자체와 중앙 정부 간의 면담 자료, 공사 일정, 공사 계획, 각종 질의에 대한 답변, 각종 환경 조사 측정값 등을 교탄고시, 교토현 웹사이트에 상세히 공개했다. 예를 들어 레이더 설치를 하면 비행제한구역을 정하게 되는데, 응급상황 시 헬기를 띄워야 할 때 어떻게 레이더를 멈출 수 있는지 등과 같은 주민들의 궁금증을 듣고 합의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현재 사드가 배치되는 성주 주민들은 사드가 성주에 배치된다는 걸 TV를 보고 알았다. 그리고 이런 불투명함에 대해 황교안은 국가안보를 위해서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성주 현장 상황을 공유해 달라. 
작년 7월에 소식을 접한 후 성주 주민들은 현재까지 투쟁을 하고 있다. 처음 군은 성주읍 성산포대를 부지로 정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성주 주민들은 인구밀집지역에 사드를 배치한 선례도 없을뿐더러 아이들이 있는 곳에는 절대 안 된다며 반대했다. 나아가 성주뿐 아니라 한국 어디에도 사드는 필요 없다, 평화를 지키는 무기는 없다고 외쳤다. 
이후 군이 제3부지를 검토하겠다는 자세로 돌아섰고 그곳이 초전면 소성리다. 소성리는 160명 정도,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소성리가 김천 혁신도시 바로 옆이다 보니 김천 주민들과 함께 반대 운동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곳에 원불교 성지가 있다. 원불교 교도들이 평화의 구도길 순례를 하는 곳이다. 원불교는 평화의 종교이며 성지에 전쟁 무기는 안 된다고 하며 결국 현재 성주 주민, 김천 주민, 원불교가 적극 대응하게 되었다. 성주 대책위 상황실장님은 사드 배치에 맞서 성주가 싸워 온 과정을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참 열심히도 해주었고, 300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각자의 자리를 지켜주고 있다. 성주는 이미 그 자체로 진정한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묘사한다. 

 

ⓒ 참여연대


대부분의 주민들이 생업을 거의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농사는 때를 놓치면 망치다 보니 작년에 대부분은 생업을 못 챙기셨다. 사실상 생업을 포기한 채 성주 소성리 상황실에 상주하시는 김천 주민 한분은 일요일에 밭에 갔다가 양파한테 정말 미안해서 울었다고 하시더라. 작년에는 참외밭을 갈아엎은 주민들도 많았다. 경찰과 대치하면서도 추운 날씨에 두고 나온 딸기들이 걱정인 분들이다.


최근에는 사드 유지비를 한국에게 부담하라고 하지 않았나?
트럼프가 사드배치에 대한 비용으로 10억 달러를 요구했다. 우리나라 돈으로 1조 원 이상이다. 원래는 우리가 부지와 전기 등 기반시설을 제공하고 나머지 운영비용, 전개비용은 미군이 부담한다는 것이 한국 국방부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비용 부담에 대한 한미간이면 합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그래서 비용 관련해서 합의내용을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아직까지 현 정부가 사드 배치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새 정부에서의 사드배치 전망은 어떻게 보고 있나?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시절 차기 정부에서 재검토를 하겠다고 했다. 우리가 보낸 질의서에서도 집권하면 최우선적으로 사드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사드 배치는 주민과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답변했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새 정부가 약속을 지켰으면 좋겠다.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였으면 좋겠다. 평화를 어떻게 만들어야할지 근본적으로 고민했으면 좋겠다. 

 

성주에서 사드 반대 상황실 아가씨(?)로 불리울 정도로 열심히 대응하고 있다고 들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소성리에 몇 주간 내려가 있었다. 그 와중에 4월 26일 새벽 사드 장비가 반입되었다. 할머니들이 “단 한 번이라도 우리 의견 물은 적 있느냐”며 절규하는 가운데 경찰에게 다 뜯겨나와 고착당한 채로 레이더, 발사대 등이 들어갔다. 그 후 연휴 기간에 소성리와 함께 하고 사드 장비 추가 반입 등을 막기 위해 전국에서 시민들이 달려와 주셨고 후원 물품이 쏟아졌다. 만감이 교차하던 시간들이었다. 지금은 또 서울에서 대응할 것들이 많아서 올라와 있다. 이 사안은 박근혜 정부의 적폐임이 명백하기 때문에 적폐 청산을 요구할 것이다. 오늘부터 김천 주민들이 청와대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님, 성주‧김천 주민들이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매일 1인 시위를 이어갈 예정이다. 6월 중 한미정상회담이 있을 예정인데 국제 네트워크를 통해서도 미국 측에도 우리의 요구를 전달할 예정이다. 쉽지 않겠지만 성주, 김천 주민들은 사드배치가 철회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운동이,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드 문제에 있어서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리고, 사드가 아니라 평화를 선택하자는 우리의 메시지에 동의할 수 있도록 시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또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당분간 평화운동을 계속할 예정인데, 거창한 계획은 없다. 우선은 내가 지금 있는 이곳에 있을 생각이다.

 

목, 2017/06/0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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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는 문예반 학생이었다. 법률 전문기자가 되려고 법대에 갔다. 그러다 혼자서 민사 소송을 해 엄마가 떼인 돈을 받아냈다. 이후 법학이 다르게 보였고, 재판이 재미있어 변호사가 되기로 했다. 변호사가 되고 나서는 ‘노동법으로 밥벌이를 해야겠다’고 맘먹고 금속노조법률원에 들어갔다. 그러다 다시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진로를 틀었다. 보좌관으로 잔뼈가 굵을 무렵, 국회 문을 열고 나와 이번엔 국선전담변호사가 되었다. 6년간 국선전담 변호사 활동을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40일간의 유럽 순방(?)을 마치고 민변으로 온전히 복귀한 조수진 변호사를 만나 그 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B내리고 C뿌리던 법대생, 민사 소송을 하다

문예반 활동을 하던 ‘고등학생 조수진’은 국문과를 갈 줄 알았다. 대학 진학 무렵, ‘얼결에 들어간 거지만 시 쓰는 문예반에서 활동했으니 국문과를 가야겠지.. 그런데 시를 쓰면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라는 여러 생각과 의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신문방송학과를 가서 기자 생활을 하면 시를 쓰는 것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생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조수진 변호사의 언니가 조수진 변호사를 꼬드겼다. “법대에 가서 법조기자가 되면 얼마나 좋겠니?”

언니의 꼬임(?)에 넘어간 고등학생 조수진은 이내 ‘수업이 이해가 안 돼 학점이 안 나오는 법대생’이 됐다. 논리학을 공부하는 것도 어려웠고, ‘내가 이걸 왜 외워야 하나’ 이해도 되지 않았다. 한창 학점에 B가 내리고 C를 뿌리던 대학생 조수진에게 어느 날 큰 일이 생겼다.

당시 조수진 변호사의 어머니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300만 원 정도를 달아놓고 먹던 중소기업이 부도 위기를 맞자 그간 누적된 식대를 주지 못하겠다고 나왔다. 딸이 법대생인데, 소송 까짓 거 못 할 게 뭔가. 조수진 변호사의 어머니는 ‘돈을 받아내면 10%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가족이니까 엄마를 대리해서 재판을 해서 돈을 받겠다”고 대학생이 서면을 써서 법원에 제출했다. 상대방은 재판에 출석도 하지 않았고, 결과는 조수진 변호사의 승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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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소하면 돈을 당연히 받는 줄 알았더니, 그게 또 아니란다. 집행 절차가 필요했다. “‘이게 뭐지?’ 하면서 집행관에게 서류를 줬어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집행관이 ‘그 사무실에 있는 집기에 딱지를 붙입시다’ 하더라고요.” 집행 절차에는 집행인이 동행해야 했다. 그래서 법원 집행관이 사무실 집기에 ‘빨간 딱지’ 붙이는 데 따라갔다. “그 사무실 분들이 뜨아한 표정으로 보는 거예요. ‘이건 뭐냐’ 이런 분위기로. 근데 그 딱지를 붙인 다음날 바로 돈이 입금됐어요.”

그때부터 법 공부에 흥미가 붙은 조수진 변호사는 죽기 살기로 공부에 매달렸다. “그때 저는 변호사가 적게 일하고 돈 많이 버는 직업으로 잘못 알고 있었어요. 노동시간도 짧은데 단시간에 큰돈을 버는 줄 알았죠.”

그렇게 본격적인 법 공부를 시작해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사법연수원에서 노동법학회를 했어요. 그러다 ‘노동법으로 밥을 먹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노동법만 할 수 있는 사무소를 찾다가 금속노조 법률원에 들어갔어요.” ‘입사’하니 선배들은 당연히 노동위원회에 가입해야한다는 거 아닌가. 그래서 ‘당연한가보다’ 생각하고 변호사가 된 첫 해에 노동위원회 가입으로 민변 활동을 시작했다.

국회에 가다

막상 변호사가 되니 ‘적게 일하고 많이 번다’는 오해가 깨진 것은 둘째 치고, 비정규직 법안 자체가 잘못되어있는 상황 속에서 ‘변론’으로만 할 수 있는 활동에 한계를 느꼈다. “거기서 한 2년 반 정도 하다보니까 비정규직 법 때문에 너무 문제가 많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여성인권위원회에서 한 번 만난 인연으로 연락을 준 이정희 변호사님. 당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셨던 그 분의 보좌관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제가 알기로는 돌아가신 김승규 변호사님께서 저를 추천해주신 걸로 알아요. 그래서 2년 반 정도 18대 국회 때 의원실에서 보좌관 활동을 했죠.”

조수진 변호사의 표현에 따르면, 국회의원이 299명이면 국회에는 299개의 중소기업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회의원 월급 다 삭감하자’는 식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국회에서 활동해본 조수진 변호사의 설명으로는 국회의원이 제대로 활동한다면 세비 900만 원은 남아나지 않는 게 정상이다. 사람도 만나고, 지역구 사무실도 운영해야 하고, 정책개발을 위해 연구자들에게 용역비용도 지출한다.

이렇게 역동적인 국회는 변호사들에게도 좋은 무대다. 입법 보좌관들의 노력으로 법을 처음부터 잘 만들면 재판까지 이어지는 사건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같은 나라는 국회와 행정부에 굉장히 많은 변호사들이 들어가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법을 만들거나 집행하는 단계부터 문제가 없게 하기 때문에 사법부로 넘어가는 사건을 줄일 수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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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생활은 조수진 변호사의 변호사 생활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다. “옆에서 ‘아, 이런 식으로 문제를 파고 들어서 공부하는 거구나’를 배웠어요. (이정희 의원은)어떤 문제가 있어서 ‘새로운 법을 만들자’라고 맘먹으면 자료를 그냥 보는 게 아니라 관련 법안, 관련 연구 논문까지 다 찾아보시는 거예요. 1차 자료를 다 보고 나서 그걸 보강하는 2차 자료, 어떤 때는 3차 자료까지 보셨어요.” 법 이론상 가능한 이야기인지, 부작용은 없는지 다방면으로 검토한 후에야 새로운 법안이 탄생했다. 자료를 어떤 식으로 보고 정리해 나가야 하는지, 얼마나 다양하게 검토해야 하는지 큰 영향을 받았다.

재판을 좋아해서 다시 변호사 생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때의 경험은 조수진 변호사가 법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을 바꿔놓았다. “만들어진 법을 공부하는 건 음식점으로 치면 설거지 같은 단계예요. 법을 만드는 일은 재료 다듬고 음식 만드는 일로 비유할 수 있을 거 같고요.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국회에서 지켜보니 너무 신기했어요.”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역동적이고, ‘선한 가치’라고 하여 필연적으로 법안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판례는 유연하게 바뀌어야 한다

국회를 나온 조수진 변호사는 국선전담변호사로 다시 송무를 시작했다. 형사 피고인을 변호하는 형사 국선전담변호사. 1~2년 개업 변호사로서의 경험과 역량을 다지는 계기로 삼으려던 게 어느 덧 6년이나 이어졌다.

형사 국선전담변호사를 하면 한 달에 20-30명가량의 피고인을 만난다. 1년이면 300명이 넘는다. 당연히 형사 재판을 처리하는데 속도가 붙는다. 조수진 변호사는 “변호사의 업무능력 면에서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효율성을 배운 것 같다”며 사람을 매우 많이 만난다는 점을 국선전담변호사의 특징으로 꼽았다. 또 “아무래도 배움이 길지 못했거나 저소득층이 국선을 신청하시는 분이 많다”며 “변론 외적으로도 챙겨주는 마음이 필요한 게 이 분야의 특이한 점”이라고 짚었다.

사건을 수행하다 보면 당연히 안타깝거나 기억에 남는 사건도 생기게 마련이다. 조수진 변호사가 꼽는 ‘정이 많이 갔던 사람’은 취업사기를 당했는데 오히려 사기 공범으로 몰렸던 젊은 여성이다. 이 여성은 사장이 중국 출장 중이라는 말만 믿고 쇼핑몰 회사에 취업한 뒤 ‘카카오톡’으로 업무 지시를 받아 쇼핑몰을 운영했는데, 어느 날 사기 공범으로 체포됐다. “알고 보니 그 쇼핑몰은 허위였던 거예요. 완전 취업사기죠. 사장이라는 사람은 중국에서 아예 입국하지 않고 돈만 환치기 형식으로 중국으로 넘어갔어요.” 사건을 설명하는 조수진 변호사의 목소리가 점차 격앙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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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몇 십 억 대 사기사건의 공범이 됐고, 유죄를 인정받으면 20대 젊은 사람이 손해배상을 계속 당할 수도 있잖아요. 평생 어떻게 살겠어요?” 이 여성은 언니와 함께 발 벗고 나서 직접 증거로 쓸 수 있는 CCTV 영상을 찾아다니고, 몇 개월간 온갖 증인을 찾아 법정에 세웠다. 법정에는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 계속 방청을 왔다. “분연히 다퉜는데 집행유예를 받은 거예요. 아마 그 판사님은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졸지에 ‘사기사건 공범’이 된 ‘취업사기 피해자’는 “꼭 무죄를 끝까지 다투겠다”며 2심으로 넘어갔다. “국선전담이 약간 아쉬운 게, 그렇게 애착이 가는 사건을 끝까지 추적할 수가 없어요. 빨리 정을 떼야 돼. 빨리 정 주고, 빨리 떼고. 그런 게 약간 힘들죠.”

국회에서의 경험은 변호사로서 재판을 수행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기존 대법원 판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대법원 판례를 깨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별로 무섭지도 않아요.” 법은 시대와 사회의 모습에 따라 변한다. 현상이 변해 더 이상 기존의 법으로 담아낼 수 없다면 누군가 새 법안을 발의하고, 법이 바뀐다. “하물며 그 법을 해석한 판례야말로 현실이 바뀌어도 최대한 많은 현실을 담아낼 수 있게 더 넓게, 적극적으로 법을 활용하는 것이 맞는 판례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나의 취미는 민변!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취미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일과 일 사이에 잠깐 쉬고 재충전하기 위한 취미, 두 번째는 여가를 즐김으로써 평소의 일과 생활에서 한 발짝 떨어질 수 있는 취미, 세 번째는, ‘지금 여기’에 집중함으로서 삶의 의미를 고양하는 취미. 조수진 변호사에게 민변은 ‘세 번째 종류’의 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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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너무 가볍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주변에서 ‘너 민변도 나가니?’라고 놀라는 분이 있으면 ‘취미생활’이라고 얘기해요.” 대학교 서클 활동처럼, 돈을 벌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재미있어서, 내 선택으로 하는 활동이다.

조수진 변호사가 주로 활약하고 있는 위원회는 민생경제위원회다. “민생은 전통적인 인권 개념과 달리 굉장히 새로운 분야예요. 그만큼 실생활과 밀접한 여러 문제에 대해 활동하실 수 있죠.” 부동산, 임차 등 주택정책, 부산저축은행 사태와 파산회생 등 금융정책, 중소기업을 보호하고 재벌을 견제하는 공정경제 분야, 세금 낭비를 감시하고 조세정의를 실현하는 조세재정 분야 등 실생활의 많은 문제들이 민생경제위원회의 소관이다. 5월 15일부터는 매주 월요일 저녁 민생위가 준비한 민생 관련 법률 실무 강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민생위의 장점은, 어느 위원회나 그렇겠지만,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고, 민생위가 다루는 문제들이 후배도 큰 소리 낼 수가 있는 분야라는 점이에요. 생계형 문제가 많기 때문에 후배들이 선배들의 노하우를 배워서 금방 뛰어넘을 수 있죠.” 그래서 조수진 변호사는 민생위를 ‘봉숭아 학당 같아서 정이 간다’고 표현한다.

다시 새로운 도전 앞에서

민변 활동에서 조수진 변호사가 자신의 첫째가는 롤모델로 꼽는 선배는 ‘민생경제위원회의 조물주’ 김남근 변호사다. “공익활동 하면서도 변호사로서의 전문성도 유지하시고, 박사도, 또 공익이 아닌 전문법으로 박사학위 받으셨잖아요.” 여전한 열정에 철저한 건강관리까지, 닮고 싶은 부분이 많다. 이제 새롭게 개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선배 변호사들에게 묻고 도움 받는 부분이 많다.

“요 며칠 2-3주 개업을 준비하려고 생각해보니, 내가 구슬만 많이 모았고 한 줄로 꿰지는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앞으로는 뭔가를 좀 진득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변호사로서 해볼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구슬을 모았다’고 표현하는 것을 듣고 있으니 문득 만화 <드래곤볼>이 떠올랐다. 7개를 모으면 무엇이 되었든 하나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신비한 구슬을 찾아 떠나는 모험 이야기다. ‘드래곤볼’처럼 변호사가 할 수 있는 7개의 역할을 모으면…… 그런 상상을 하다 웃고 말았다.

“(‘드래곤볼’)다 모으면 ‘여자 김남근’ 되는 거 아니에요? 조수진 변호사님 개업과 동시에 여자 김남근 변호사님이 되실 거 같네요.”

“저야 영광이죠!”

조수진 변호사는 개업과 함께 민변에서 더욱 활발하게 활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 우선 민생경제위원회 조세재정팀에서 인천 아시안게임 당시 사용한 예산에 대해 진행 중인 주민소송부터 참여할 계획이다. 변호사로서의 다양한 역할을 담금질하고 있는 조수진 변호사, 내일은 또 무슨 도전을 할지 그 행보가 사뭇 기대된다.

화, 2017/04/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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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라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탄핵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은 사실 탄핵을 믿는 사람들이 소망하는 어떤 것의 실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령, 탄핵 이후 우리는 반드시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모두가 평등한 그야말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세울 수 있다는 소망 말이다. 또한,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우리가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함께 만들어낸 일들은 ‘한국 사회가 적어도 비정상적이었던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고 다시금 환한 민주주의의 빛을 밝힐 역량이 있었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사실의 증거가 되어있지는 않을까. 탄핵 과정에서 민변이 했던 수많은 활동에 수많은 회원이 함께 하며 지난겨울을 보냈다. 분홍빛 벚꽃 피는 봄을 목전에 둔 3월, 추운 겨울과 함께 했던 수많은 회원 중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했던 세 사람의 회원에게 지난 ‘겨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첫 번째 이야기: ‘2017 민변 탄핵버스킹과 광화문 본무대 발언에 참여했던 김도희 변호사

민변 박근혜 정권 퇴진과 헌정질서 회복을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퇴진특위’) 특검대응팀과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 국민행동’(이하 ‘퇴진행동’) 법률팀에 참여했던 김도희 변호사. 퇴진특위 활동과 회사 일을 병행하다 보니 점점 바빠져서 “아침에 출근하면 제일 먼저 두세 시간 바짝 퇴진특위 논평이나 성명을 쓰고 업무를 시작”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김도희 변호사는 그래도 지난겨울이 재미있었던 것 같은 얼굴이었다. 김도희 변호사는 민변이 지속적으로 성명과 논평을 발표하고, 때로 특검에 고발하기도 하는 일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검찰과 특검이 헌정유린의 주범과 비리 재벌을 수사하는 과정에 대해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메시지를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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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김도희 변호사는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겨울 김도희 변호사는 방송 출연, 팟캐스트 출연, 길거리 버스킹, 광화문 본무대 발언 등 유난히 시민들 앞에 서서 몸을 드러내고 입을 벌려 말해야 할 일이 많았다.

두 차례 광화문 본무대에 올라갔던 일을 두고 김도희 변호사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제가 사실 앞에 나서서 이슈를 만들고 사진을 찍고 그러는 걸 정말 싫어하고, 잘 못해요.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말이 안 나오는 그런 스타일이거든요.”

김도희 변호사가 처음 광화문 본무대에 올라갔을 때는 ‘반올림’에서 활동 중인 삼성반도체 산업재해 피해 노동자와 그 어머니, 현대자동차 노조원까지 네 사람이었다. 김도희 변호사는 “너무 떨려서 겨우 1분 이야기하는 건데, 원고 볼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후로도 계속 다른 사람 앞에 나설 일이 생겼다. 민변 탄핵 정국 특별 팟캐스트 ‘탄캐스트’에도 출연했고, ‘김어준의 파파이스’에도 출연했다. 라디오 인터뷰도 있었고, 눈이 펑펑 내리던 1월의 어느 토요일 ‘2017 민변 탄핵 버스킹’의 두 번째 버스커로 시민들 앞에서 길거리 버스킹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탄핵 전날에는 두 번째로 광화문 본무대에 올랐다.

 

“두 번째 올라갔을 때는 혼자 올라가서 5-6분 정도 발언했어요. 정말 달달달달 외워서 올라갔죠. 그래도 그 때는 좀 흥분하긴 했지만 틀리지는 않았어요. 잠깐 얼어서 말을 못 하는 순간도 있었는데, 보시는 시민 분들이 환호를 해주시면서 괜찮다고 격려해 주시더라고요.” 광화문 촛불집회 본무대만큼 거대한 객석을 마주보는 무대도 없을 텐데, 신기하게도 격려해주고 호응해주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다 들렸다. 그날 김도희 변호사는 “내일 탄핵 인용이 결정되면 박근혜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검찰 앞까지 데려다주고 싶다”고 말해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대면 의사소통에서 언어의 뜻으로 전달되는 정보는 7%밖에 되지 않는대요. 나머지는 전부 눈빛, 표정, 제스쳐, 목소리, 억양 같은 비언어적 정보라는 거예요. 제가 전달하는 정보의 93%가 ‘난 지금 당황했다, 난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잊어버렸다’는 메시지를 ‘뿜뿜’ 내뿜고 있는데, 보시는 분들이 모를 수가 없죠.” 이 이야기를 하면서 김도희 변호사는 광화문 본무대에 섰던 자신의 모습이 다시 생각해보면 민망한 듯 웃었다.

그러면서도 “적성에 안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모두가 탄핵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뛰는데 ‘저랑 안 맞아서 못 하겠어요’라는 말이 안 나오더라”고 말했다. 상황에 떠밀렸다고 할 수도 있지만, 김도희 변호사 스스로의 의지인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이런 경험이 저의 내성적인 성향도 극복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요?”

퇴진특위는 해단식을 치렀지만, 김도희 변호사의 활동은 끝나지 않는다. 특검대응팀은 앞으로도 박근혜에 대한 검찰 수사를 모니터링하고, 필요할 경우 논평과 의견을 발표할 계획이다. 이번 퇴진특위 활동을 계기로 재벌개혁 문제에도 관심이 생겼다. “재벌을 포함한 국정농단 세력이 얻은 그 재물들을 뺏어 와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고, “그게 이뤄지지 않으면 유신 세력이 권력과 돈의 힘으로 뭐든 해결하려는 행태는 계속 남아있을 것”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상 지난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돈으로 흥한 자는 돈으로 응징해줘야” 하고, 범죄수익이 환수되어 “그들이 빼돌린 돈까지 탈탈 털어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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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희 변호사는 “탄핵이 된다는 것에 대해 별로 의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범죄 수익을 환수하고 재벌의 권력을 해체하는 것도 언젠가 이뤄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탄핵 직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진행자가 집요하게 ‘탄핵이 몇 대 몇으로 인용될 것 같냐’고 묻자 “8:0, 최소 7:1”이라고 말했던 김도희 변호사다. 주변에서 “다들 입 조심하는데 8:0을 이렇게 질렀다”고 놀렸지만, 그게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 기쁘기만 하다. 그러니까 재벌과 유신 세력의 범죄수익환수도 언젠가 반드시 될 것이라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제 세대에서는 안 될 수도 있지만, 이것도 믿고 가는 거죠. 되어야 하니까.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거 같아요. 믿고 시작하지 않으면…….”

두 번째 이야기: 국회 탄핵 소추위원 대리인단 전종민, 탁경국 변호사

국회 탄핵소추위원 대리인단에 합류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떠오른 생각 세 가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재판에 참여하게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시작으로, 처음 생각은 ‘역사 앞에 무거운 책임을 지는 재판이니 책임이 무겁구나’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현실적으로 “야, 이거 일이 많겠구나”라는 생각이었다. 마지막은, “민변 회원으로서 탄핵 심판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정말 잘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전종민 변호사와 탁경국 변호사가 탄핵소추 대리인단에 합류한 것은 12월 중순이었다. 국회 법사위원장인 새누리당 권성동 의원이 민주당과 합의하지 않은 채 대리인단을 선임하자 더불어민주당에서 항의했고, 그 과정에서 민변 회원인 두 사람이 9개의 소추 사유 중 언론의 자유 침해 부분을 맡아 합류하게 됐다.IMG_9017

겨울에 시작한 재판이 끝날 때까지 석 달 남짓,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재판이었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엔 사실관계를 두고 다툰 바는 많지 않았지만, 이번엔 반대로 사실관계를 대통령측이 치열하게 다투어서 사실관계를 어떠한 증거조사 방식으로 인정할 것인지, 증인신문, 사실조회, 서증제출을 어느 범위까지 할 것인지에 대하여 대통령 측 대리인단과 치열한 다툼을 벌여야 했다.

전종민 변호사는 “헌재 재판관들도 사실 처음 재판을 시작할 때는 기준을 세우지 못했다”고 전했다. “쉽게 얘기하면 증거를 채택할 때 형사재판에 준하여 채택할 것인가, 아니면 민사재판에 준하여 채택할 것이냐가 문제였거든요, 형사는 굉장히 엄격한 조사방식을 거쳐 증거채택을 하잖아요. 그래서 국회에서는 ‘민사처럼 진행해달라’고 요청했어요,” 형사재판처럼 엄격한 증거 채택 절차를 거친다면 제출된 증거에 대한 피고인의 동의 절차를 거쳐야 하고, 피고인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원 진술자가 재판에 출석하여 진술의 진위를 확인해야 해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재판부는 절충적인 방식을 기준으로 세웠어요, 형사법상 전문법칙을 적용하는 쪽으로 원칙을 세우되, 다만 검찰 기록 중 변호인이 입회하여 진술한 조서는 원진술자가 심판정에 나오지 않더라도 증거로 채택한다는 것 등이지요.” 증거 채택 절차부터 매 순간이 고비였다.

두 번째 고비는 안종범과 정호성의 증인신문이었다. 최순실이 사실대로 증언할 것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다행이 안종범, 정호성이 사실관계를 인정했다. 안종범은 ‘업무수첩 내용은 대통령 재임 기간 중에 작성된 것이 맞다’고 인정했고, 정호성 역시 ‘청와대 내부 문건을 최순실에게 보낸 것은 맞다’고 증언했다. 전종민 변호사는 “안종범이 수첩을 인정하는 순간 ‘5부 능선을 넘었다’고 생각했고, 정호성을 신문하면서 ‘7부 능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고 돌이켰다.

탄핵소추 대리인단이 겪은 마지막 고비는 태극기 집회가 가열되기 시작한 이후였다. 김평우 변호사 등 원로 변호사들이 대거 대통령 측 대리인단으로 선임되었고, 재판은 전종민 변호사의 표현에 따르면 “법리논쟁보다는 정치적인 싸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탁경국 변호사에게 가장 인상적인 증인은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었다. 증인신문에 출석한 유진룡 전 장관은 “2014년 1월 초까지만 해도 ‘장관 소신대로 하라’던 박근혜 대통령이 어느 순간 좌파 척결을 주창하는 김기춘 측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안창호 헌법재판관이 “도대체 어느 시점에 박대통령이 태도가 변한 것 같냐”고 묻자 유 전 장관은 “아마 세월호 참사 이후로 태도가 변한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고 답했다. 탁경국 변호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탁경국 변호사는 “세월호 참사, 언론 자유 침해, 뇌물죄 부분에 대해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세월호 참사와 세계일보에 대한 언론 탄압은 검찰 등 수사기관의 수사 자료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뇌물죄 역시 국회가 탄핵 사유를 작성할 당시 검찰 공소장에 근거해 박근혜 대통령의 위법행위를 ‘직권남용’과 ‘강요’라고 제시한 상태였다. 특검이 박 대통령을 뇌물죄로 입건했다 한들 재판부에 특검 수사 결과를 증거로 제출하는 그 순간부터 대통령 측에 반박할 시간과 기회를 제공해야 했다. 두 사람은 “안종범이 5부 능선, 정호성이 7부 능선이었다. 조기에 승부를 보자는 대리인단의 전략이 주효했다”면서도 “그러한 전략으로 인해 언론 탄압과 세월호 참사가 탄핵 사유로 인용되게 할 수가 없었다”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부터 “탄핵이 인용되지 않을 거란 의심은 없었다”고 했지만, 탄핵 전날 전종민 변호사는 극도의 긴장감을 느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라의 운명을 헌법재판관 8명한테 맡기다니 가혹하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전 변호사는 “말로는 동네방네 8:0이라고 떠들고 다니면서도 한편으로는 긴장됐다”며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이렇게 내기라도 해야 한다”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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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탄핵 선고를 지켜봤던 사람들 입장에서 가장 궁금했던 건 아마도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무슨 생각,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아닐까. 역사적인 재판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탄핵소추 대리인단이 그 순간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지 궁금했다. 전종민 변호사는 “사실 처음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문체부 1급 공무원들에게 사표 받은 것도 배척하고, 세계일보에 대한 언론의 자유 침해도 배척하고, 세월호까지 배척하는 걸 보면서 ‘아 이거 이상한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렸다는 것까지 탄핵 사유에서 배척되자 불안감도 느꼈다.

“사실 세월호 참사를 탄핵 사유에서 배척할 때는 좀 불안했죠. 저희는 문체부 1급 공무원들 사표 받은 것까지 두 개는 인정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국정농단과 기업의 자유를 침해한 부분만 인정했으니까요.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게다가 대통령측 대리인단은 그날 하나같이 밝은 얼굴이었다. 전종민 변호사는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채명성 변호사가 날 보면서 씩 웃는 것 같더라고요.”라고 떠올렸다. 대통령 측 대리인단을 마주보고 앉는 국회 소추위원들이 “저쪽은 우리보다 정보가 훨씬 많을 텐데 뭔가 불길한 일이 있는 거 아니냐”는 의심을 했다는 이야기가 방송에까지 회자됐다.

그러나 탁경국 변호사는 “원래 소추사유는 첫 번째가 국정농단이고, 세계일보 언론 탄압과 세월호 참사는 세 번째, 네 번째였다”고 지적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소추 사유가 먼저 등장하는 것을 듣고 선고 도중에 ‘아, 인용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탄핵이 인용되어 “주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문장이 낭독되자 전종민 변호사를 바라보며 웃던 채명성 변호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이동흡 변호사 역시 급히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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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선고 직전, 탄핵 소추 대리인단 단체 톡방에서는 탄핵이 인용되더라도 웃으면 안 된다는 말이 오갔다. 탁경국 변호사는 “기각되면 웃어도 되죠?”라고 되받았다. “뭐, 저는 워낙에 자신 있었으니까.” 라면서도, “막상 ‘파면한다’는 주문을 듣고 나니까 좀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탄핵을 믿었고, 믿음 그대로의 결과를 만들었지만 감격이 없을 순 없었을 테다. 탄핵 소추 대리인단 중 흡연자들은 담배를 피우러 나간 뒤 서로 치하했고, 탄핵 소추 대리인단에 함께 참여했던 이용구 변호사 역시 언론 인터뷰에서 울었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따로 회포를 풀 만한 여유는 없었다. 전종민 변호사는 “사실 도망간 거죠. 그날 안국역 일대 어땠는지 아시잖아요”라고 웃었다.

인터뷰 말미 전종민 변호사는 “민변에서 치열하게 활동하고 헌신하는 회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며 92년 윤종현, 김선수, 김한주 변호사를 도와 故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을 준비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사법시험 직후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 준비를 돕다가 시험 합격 후 판사가 되었던 전종민 변호사가 법원을 그만 두고 나왔을 때, 10년 만에 다시 마주친 김선수 변호사가 “법원 왜 나왔어? 법원에 좀 더 있지, 밖에 나와서 뭐하려고.” 하시던 게 그렇게 서운했다고. “그 후에 민변 활동을 대의원회 참석하는 정도밖에 못 했어요. 변호사 생활이 바쁘더라고요. 민변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지 못한 마음의 빚 같은 게 있어요. 처음 탄핵 심판에 참여하게 됐을 때 그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으려고 정말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민변에서 법조 첫 출발부터 지금까지 치열하게 활동하고 계시는 변호사님들에게 존경과 격려를 보낸다고, 꼭 적어달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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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끝나고 사진을 찍는 동안, 탁경국 변호사는 “잘 생긴 얼굴이 아니”라며 부끄러워 했다. 육아 및 가사 분담에 철저한 가정적인 남편과 아버지로 유명한 탁경국 변호사 얼굴에 웃는 주름이 선명했다. 탁경국 변호사는 지난 2015년 <계란찜 아빠, 꼬막 남편>이라는 에세이집도 냈다. 탁경국 변호사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것이 가정”이라며 “어려운 이론 말고,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찍었을 때 예쁘게 나오는 얼굴은 따로 있다. 탁 변호사님은 얼굴에 웃는 주름이 잡혀있어서 사진 찍었을 때 근사하다”고 말하자, 탁경국 변호사의 답이 이랬다. “아내한테 사랑받아서 그래요.”

수, 2017/03/29-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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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2015년 11월에 있었던 대규모 집회 주최자라는 이유로 실형 3년과 벌금 50만원을 선고받고 수감중입니다. 그가 수감되고 일년 사이 대한민국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접견과 서신을 통해 한상균 전 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 아래는 한상균 전 위원장의 서면 인터뷰를 요약/편집 하였습니다.


 

 

출소하면 백남기 농민을 찾아뵙고, 어르신의 투쟁이 세상을 깨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며 곡차를 올리고 싶습니다

2016년 12월 13일, 그로부터 일년 전 있었던 11월 14일 민중총궐기대회(이하, 민중총궐기)를 두고 ‘집시법과 도로교통법을 위반한 시위대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고 법질서를 지키기 위한 차벽과 물대포는 정당하다’는 항소심 재판이 있었습니다.

항소심 법원은 검찰과 1심 재판부를 비호한 판결을 내렸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습니다. 대법원이 항소심 판결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관심과 지지가 필요합니다.

민중총궐기가 폭도로 마침표 찍힌 지 1년만에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사람들이 촛불을 들었고 들불처럼 타올랐습니다. 1년 전과 같았던 집회신고 행진코스에 대해 법원은 정당한 권리라며 주권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토록 내어주지 않았던 광화문 광장과 청와대 턱밑까지 말입니다.

출소하면 백남기 농민을 찾아뵙고 어르신의 투쟁이 세상을 깨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며 곡차를 올리고 싶습니다.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 ⓒ민주노총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한국사회의 한 축이 아니라
정치적 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IMF이후 20년 동안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노력 끝에 노동삼권단결권, 단체권, 단체행동권이 무력화되었고,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 힘의 균형은 완전히 기울어졌습니다. 비정규직은 늘어만 가고,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월 200만원 이하 노동자가 500만 명이나 되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입니다.

노동자라면 누구나 노동조합으로 단결하여 교섭하고, 사측의 부당한 대우에 파업이라는 유일한 무기로 맞서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라고 국제노동기준에도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고 파업권을 행사하면서 해고나 구속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ILO(국제노동기구) 협약 비준, 노동 삼권의 완전한 회복, 최저임금 만원과 더불어 주 40시간 이상 초과 노동할 수 없도록 해야하고, 위험하든 안전하든 상시적 일자리를 정규직으로 바꾸기 위해 최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현실 문제에 대한 진단과 대책은 넘쳐납니다. 실제로 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단결이 필수적입니다.

2016년 11월 @Amnesty International

아빠의 무등을 타고 끝없이 파도치는 위대한 촛불
맑은 눈망울 속에 담은 아이들이 이 나라의 주인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분노와 절망이 우리 스스로를 이 땅의 주인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앞으로도 위기는 또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촛불을 들었던 경험이 앞으로 닥칠 위기에서 또 큰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화석처럼 굳어있던 정치신념의 뿌리가 전 세대와 지역에서 허물어졌습니다. 아빠의 무등을 타고 끝없이 파도치는 위대한 촛불을, 맑은 눈망울 속에 담은 아이들이 이 나라의 주인으로 성장할 것이기에 대한민국이 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찬 이유입니다.

 

@Amnesty International

동료와 가족들의 죽음을 멈춘 것은 연대의 손길이었습니다

저는 쌍용차 해고자이자 28명의 동료와 가족들을 하늘로 보낸 상주입니다. 해고는 살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죽음이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저항은 ‘살고 싶다’는 절규였고, 함께 아파하고 도움의 손길, 연대의 손길은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유엔, ILO, OECD, 국제노총, 국제노동단체, 앰네스티, 인권운동가, 석학 등 국제적 연대는 잔혹한 자본독재에 맞서 당당히 싸워갈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외국에서도 한국 대사관을 찾아 항의하며 야만 국가로 남을 것인지, 노동자 민중의 편에 설지를 선택하라 압박해 주셨습니다.

민주노총도 국제사회와 연대를 더욱 강화하고, 노동이 존중되는 윤리적 소비자 운동 등 실천활동을 강화하려 합니다.

 

그리고 국제앰네스티의 따뜻한 연대와 지지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80만 민주노총 전 조합원의 마음을 담아 뜨거운 동지애를 전합니다. 한국사회 민중의 봄을 함께 만들고 있는 앰네스티는 영원한 동지입니다.

저를 포함해 노동탄압에 맞서 싸우다 구속된 많은 동지들은 감옥에서, 법정에서, 노동자답게 싸우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주권자 스스로 지켜내지 않는다면,
위임 받은 권력은 언제든지 스스로를 주인이라 생각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건강하십시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투쟁!

 

2017년 2월23일
춘천교도소에서 한상균

금, 2017/03/1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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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 대응 TF, 故백남기 농민 변호인단, 세월호 특조위 조사관 공무원 보수 지급 청구 소송, 박근혜 정권 퇴진 특위, 민변 탄핵정국 특별 팟캐스트 <탄캐스트> 등 민변의 굵직한 사업이나 변호인단에는 언제나 ‘오 시스터즈’의 이름이 있다.

그런데 정작 둘 사이 사연은 좀 심심하다. 둘이 ‘오 시스터즈’가 된 건 그냥 공교롭게도 성이 같아서 보시는 분들이 별명 붙이기 좋았던 것 같고, 친해지는데 특별한 계기나 사연 같은 건 없고, 같은 기수, 비슷한 나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게 많아서 그런 거라고 한다.

옆에서 가만 보니 오현정 변호사는 말할 때 상대방 눈을 보고 말하고, 오민애 변호사는 자기 얘기하는데 어색해보여도 들을 때는 상대를 잘 쳐다봐준다. 다른 사람 말을 잘 들어주는 오민애 변호사의 장점을 닮고 싶다는 오현정 변호사와, 필요한 순간 필요한 이야기를 자신 있게 하는 오현정 변호사의 장점을 닮고 싶다는 오민애 변호사. ‘오 시스터즈’를 만났다.

법을 공부하면 당연히 차별과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되는 건 줄 알았지

20년쯤 전에, 어떤 영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어린이가 있었다. 그 어린이가 본 영화는 <타임 투 킬(A Time to Kill)>. 아직 KKK단이 횡행하던 시절, 인종차별이 특히 심했던 미국 남부 미시시피의 어떤 흑인 살인자를 변호하게 된 신참내기 백인 변호사 이야기다.

딸을 처참하게 강간한 백인 건달들이 법의 처벌을 벗어나 거리를 나다니는 것을 참지 못한 흑인 아버지 칼리는 법정에서 기관총으로 이들을 살해해버린다. 이 사건 변호를 맡은 백인 변호사 제이크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테러로 살던 집이 완전히 타버리는 상황까지 내몰리면서도 끝내 배심원의 무죄 평결을 받아낸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제이크는 자신의 입으로는 “흑인과 백인은 친구”라 말하면서도 사실은 얼마나 위선적이었는지 깨닫는다. 칼리는 “당신은 내가 어디 사는지 모르지. 우리 아이들은 함께 놀 수가 없어.”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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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임 투 킬(A Time to Kill)> 이야기를 하는 오민애 변호사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본 오민애 어린이는 변호사가 되면, 혹은 법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면 차별과 사회문제를 조금은 해결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대학에 와서 법을 공부하는 동기들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사회적 차별과 구조적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빨리 성공하면 그만큼 더 주목받았다. 대학생 오민애는 변호사가 되면 단순히 법으로 돈을 버는 일이 아니라 공익에 관계된 일이나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오민애 변호사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사연이 아니라서, 재미는 없는 이야기”라면서도, “민변 활동을 하면서 원래 하고 싶었던 활동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어쩐지 전공이 재미가 없다 했더니, 이 길이 내 길이 아니었네

오현정 변호사의 학부 전공은 경제학부다. 어릴 땐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건 어릴 때 얘기다. 경제학을 전공으로 삼긴 했는데 막연하게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에 들어가 뭘 어떻게 하겠다, 이런 계획엔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오현정 변호사는 “그 전에는 사회에서 실제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고 말했다.

오현정 변호사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사건은 프랑스 교환학생 경험이었다. “거기 사회에서 제가 처음으로 ‘여성 이민자’라는 소수자적 입장에서 삶을 살아보게 된 거죠. 그 경험이 저에게 미친 영향이 있었어요.” 마이너리티에 대한 경험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다르다는 걸 목격한 것도 의미가 컸다.

연말의 어느 날, 오현정 변호사는 유명 서점으로 책을 사러 몰려든 사람들 틈에 끼어있던 참이었다. 계산대마다 사람이 수십 명씩 장사진을 쳤다. 그런데 기다리는 사람들을 놓아두고, 계산대 직원이 “근무시간이 끝났다”며 그대로 떠나버렸다. 줄 서있던 사람들 중 누구도 직원을 비난하거나 불만을 토하지 않았다. 그냥 다른 줄로 옮겨갔을 뿐이었다.

“일상적인 거긴 한데, 여기는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시간과 욕구를 존중받으면서 사는구나,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우리나라였으면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 같고, 욕을 하지 않더라도 투덜거리면서 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정도는 있었을 거 같거든요.” 한국에서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4학년이 되자 사회문제에 관심이 생겼다. 이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심을 갖게 되자 자연스럽게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로스쿨에 진학한 뒤에도 오현정 변호사는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공적인 규범을 다루는 일을 하고 싶어 로스쿨에 진학했는데, 정작 로스쿨에서는 “경쟁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하는 삭막한 교육 현실”이 오현정 변호사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면서 여러 이슈를 다루는 민변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싶다는 맘이 많이 들었죠.”

오민애 변호사와 오현정 변호사가 처음 만나 것도 그 즈음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계기는 미군문제연구위원회 위원장 하주희 변호사 덕분이다. 하주희 변호사가 자신이 강연 등으로 인연 맺은 로스쿨 학생들을 모아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때 오민애 변호사는 6개월 실무 수습 기간 동안 <민중의 소리>에서 법조전문 기자 활동을 병행하고 있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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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정 변호사의 이야기를 듣는 오민애 변호사

대학 졸업 후 바로 로스쿨 진학한 과정이 비슷하고,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서, 관심과 고민도 비슷하고, 민변 활동도 같이 한다. 여기에 기수도 같고, 나이도 한 살 차이로 비슷하다. 어떤 게 힘든지, 일이 잘 안 풀릴 땐 무엇이 고민되는지, 일이 잘 됐을 때 얼마나 성취감을 느끼는지, 특별히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금방 알아준다. 초코파이도 아니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같은 사이다.

오현정 변호사는 오민애 변호사에 대해 “당사자 앞에서 말하려니 좀 부끄럽지만, 언니가 정말 착하다”고 칭찬했다. “제가 징징거리면 따뜻하게 받아줘요. 언니가 더 힘든 일이 많을 거 같은데, 저로서는 감사할 뿐이죠.”

서로 다른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오민애 변호사가 말을 꺼내기 전에 한참을 고민하고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 타입이라면 오현정 변호사는 반대로 필요한 말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곧 잘 하는 성격이다. 서로 정확하게 반대되는 특징이라, 오민애 변호사는 오현정 변호사를 부러워하고, 오현정 변호사는 오민애 변호사를 부러워한다.

오현정 변호사는 “제가 철이 없는 거 같기도 하고, 성격인 거 같기도 하다”며 신중한 오민애 변호사를 칭찬했다. 대학 때는 동아리 선배들이 “쟤는 신입생인데, 하고 싶은 말 다 한다”는 얘기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반대로 오민애 변호사는 “생각을 많이 해야 말이 나온다. 그게 저한테는 단점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며 “해야 할 이야기를 못하고 놓치면 피해가 제가 아니라 제가 변호하는 분한테 간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아찔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바로바로 필요한 말을 하는 오현정 변호사의 장점을 배우고 싶다고.

변호사로 살면서 잊을 수 없는 순간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꼽은 건 故백남기 농민의 부검 영장 집행을 끝내 저지했던 그 날이다. 첫 영장이 기각된 후 조건부 영장이 나왔을 때, 오민애 변호사는 “조건이 해석하기에 따라 난점이 좀 있지만, 결국 경찰이 밀고 들어오면 부검이 강행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했다. 영장 집행 기한 마지막 날 박근혜 대통령이 처음으로 ‘태블릿 PC’와 국정농단에 대한 해명 기자회견이 열렸다. 그때서야 ‘아, 영장 집행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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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정 변호사는 대화할 때 가끔 놀랄 정도로 상대의 눈을 또렷하게 쳐다본다.

경찰이 물러가자 서울대병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떠나는 경찰을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곧 축제 분위기가 이어졌다. 오현정 변호사는 “경찰이 최종적으로 영장 집행을 안 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과 같이 환호하고 기뻐했던 경험이 저한테 강렬하게 남았다”며 “영장을 막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사람들이 모여서 결국 영장 집행 저지를 가능하게 한 힘이 됐다는 게 좋았다”고 떠올렸다. 오민애 변호사 역시 “사람들이 찬 바닥에서 자면서 몸으로 막아내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꼈다”며 “영장 집행을 결국 저지하고 축제 분위기가 되는 걸 보면서 힘을 얻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민변에서만 배울 수 있는 특별한 이야기

민변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소문 난 두 사람. ‘오 시스터즈’라는 별명까지 붙은 건 사실 그런 적극적 활동에 대한 칭찬의 의미도 없지 않을 테다. 하지만 오현정 변호사는 “사무실에서 민변 활동을 많이 장려해서 저희가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거”라며 “저희가 독특해 보이는 이유는 사실 다른 초년차 변호사들에 비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사무실에 민변 회원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하거나, 다른 업무에 바쁜 회원들에 비해 여건이 좋기 때문에 유난히 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라는 이야기다.

선배 변호사들을 보고 배우는 점도 많다. 오현정 변호사는 특히 하주희 변호사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꼽았다. “여성 변호사로서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에서 이슈를 발굴하고, 문제의식을 밀고 나가는 부분이 굉장히 닮고 싶다고 생각한다”며 “그냥 어디 들어가 열심히 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정말 어떤 걸 바꿔보고 싶다”고 말했다. 문제를 제기하는데 얼마나 절실하냐에 따라 도전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마련이고, 자신에게 부족한 바로 그 부분을 하주희 변호사한테 배우고 있다고.

오민애 변호사는 “변호사라고 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한 뒤 그 문제를 사후적으로 해결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을 민변과 선배 변호사들을 보며 바꾸게 되었다. “사후적 해결도 중요하지만, 필요한 곳에 가서 ‘어떤 걸 해보자’고 제안도 할 수 있고, 법정에서 서면으로 이야기하는 것 말고도 함께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선배들이 몸소 보여준다.

오민애 변호사는 민변 활동을 하면서 변호사의 역할과 변호사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다. 오민애 변호사는 “변호사는 법정에서 말 잘 하고 서면 잘 쓰면 된다고들 한다”며 “그건 당연한 일이지만, 민변 활동을 하면서 변호사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발부되던 그 때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아이러니를 느꼈다. 법원의 판단 하나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기뻐하거나 이렇게 분노하고 슬퍼할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오민애 변호사는 “변호사가 해야 할 일, 하면 안 되는 일을 딱 잘라 구분 지을 수 없다는 걸 많이 느낀다”며 “다양한 선배 변호사님들을 보면서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 게 가장 적절하고 현명한지 많이 배우게 된다”는 것을 민변 회원이 되기 전과 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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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중인 오민애, 오현정 변호사.

민변에서 다루는 사건은 다른 사건에 비해 훨씬 예민하고 첨예하다. 일반적인 사건이라면 즉각 수사하고 일사천리로 재판까지 이어질 텐데, 故백남기 농민 같은 피해자들은 사건 진행이 유난히 어렵다. 경찰이나 검찰은 수사를 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도 없고, 평범한 사건에서는 문제되지 않을 사소한 절차 하나를 두고 다투는 부수적인 싸움도 많다. 사람마다 대응하는 방식도 다르다. 어떤 사람은 직설적으로 싸우고, 어떤 사람은 우회적인 협상으로 원만하게 넘기기도 한다. 오현정 변호사는 “민감하고 예민한 상황 속에서 각기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여러 선배님들의 다양한 스타일을 보고 배운다”고 말했다.

“민변 활동을 통해 적절할 때 잘 싸울 수 있는 변호사가 되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되는 게 목표구요.” 인터뷰가 끝나고, ‘오 시스터즈’는 민변 사무처로 가는 오르막길을 올랐다. 이날도 점심 회의가 ‘오 시스터즈’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 2017/03/1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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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참여팀] 참여연대의 자원활동가는 상근 활동가들과 손발을 맞춰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10대 청소년부터 일흔이 넘으신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학생, 주부, 직장인, 은퇴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원활동가들의 숨은 활약을 자원활동가 인터뷰를 통해 알려드립니다.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참여연대의 문을 두드렸어요."

 

참여사회연구소 자원활동가 김고운님

 

 

참여연대 자원활동가 김고운
참여사회연구소 자원활동가 김고운님 ⓒ참여연대

 

 

햇빛이 쨍쨍하던 연휴의 마지막 날, 자원활동가 김고운님을 만났다. 지하철역 출구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잠시 걱정했었다. 하지만 이름처럼 고운 모습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심히 필자를 찾던 김고운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바로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대학교 졸업 막바지에 다른 고운님은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에서 자원 활동을 하고 있다. ‘참여사회연구소’라는 이름이 너무 좋았다는 고운님은 그곳에서 기사 브리핑이나 매달 열리는 포럼 준비를 위해 의미 있는 기사를 선별하고 요약·정리하는 활동을 한다. 포럼이 열릴 때는 포럼내용을 속기로 기록하는 일을 맡는다. 최근에는 참여사회연구소의 계간지 『시민과 세계』개편 과정에서 대학생의 취향을 반영하기 위해 고민 중이다. 고운님은 이전에 『시민과 세계』와 같은 학술잡지를 읽은 적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같이 활동하는 참여사회연구소의 간사님께서는 대학생 때 다양한 학술잡지를 통해 사회 문제나 관련 이론들을 많이 배우셨다고 한다. 그래서 더 많은 대학생들이 좋은 콘텐츠로 가득한 『시민과 세계』를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간사님과 함께 『대학 내일』같은 잡지도 보면서 신선하다 싶은 내용이 있으면 참고 중이다.

 

처음 참여연대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고운님에게 꽤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머릿속에서는 항상 여러 생각들이 존재했지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조금 무서운 일이었다. 어떤 사안에 대한 관심이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을 때 그것만으로 ‘어떤 사람’으로 규정되거나, 자기만의 주장이 강한 사람으로 비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고운님이 대학에 입학하던 때는 대선이 있어서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해였기에 보다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늘 한 발 뒤에 물러서 있었지만, 그렇게 계속 물러서 있는 것이 옳은 일 같지는 않았다. 자신의 생각을 만들며 다듬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생각을 실천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참여연대의 문을 두드렸고, 지금까지 자원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참여연대에는 각종 사회 문제들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많은 분들이 있다. 고운님은 그분들이 그저 자기주장만 센 사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회의 여러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참여연대에서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다양했고, 그 다양함이 불편한 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고 한다. 또한, 참여연대 간사님에게서도 많이 배웠는데, 참여사회연구소에서 신문 기사를 선별하고 정리할 때 간사님들이 기사주제와 관련한 내용을 조목조목 알려주시고, 스스로도 자연스레 어떤 사안에 대해 정리할 시간이 주어져서 특히 좋았다고 한다.

 

고운님은 현재 로스쿨 입시를 준비 중이다. ‘법조인’하면 흔히 생각되는 재판 관련 업무가 아니라, 좋은 법에 대한 개정 혹은 입법 운동에 관한 공부를 하고 싶어서 로스쿨 진학을 희망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틀을 잡아가는 과정에 참여연대에서의 자원 활동이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언젠가 또 한 번 고운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바쁜 틈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고운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작성 자원활동가 이성민 (계속해서 자라고 싶은 대학생)

목, 2015/05/28-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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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어도 따뜻한 기억으로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 기억만으로도 온기가 전해지는 사람. 균형감각과 여유, 그리고 온기를 동시에 가지면서도, 술도 세고 스피드를 즐기는 반전 있는 멋진 여자, 위은진 변호사님을 만나기 위해 잰걸음으로 사무실을 찾았다. 2년 연속 큰 상을 받았다고 하니 그 신공이 궁금하기도 하고! 자랑스러운 민변의 울 언니, 어디 한 번 만나 볼까요?

이혜정(이하 이): 2015년 첫 번째 사회공헌대상을 수상하신데 이어 2016년에는 변호사공익대상까지 수상하셨네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먼저 간단한 소개 부탁드릴게요.

위은진 변호사(이하 위) : 감사합니다. 저는, 기수는 31기이고 위은진입니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드려요. 상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제가 변호사로 활동한 기간이 길고, 지속적으로 했기 때문에 주신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는 변협 산하 이주민이나 외국인 관련 위원회 활동 위주로 공익활동을 했기 때문에, 변협 입장에서 다른 변호사들보다 제가 활동하는 게 더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이 사람이 계속해서 활동을 하고 있구나’ 해서 남들보다 쉽게 보이는 위치에 있어서 받은 상 아닌가 싶어요.

: 이주민과 관련된 공익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 이주민 관련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처음엔 사업적인 이유였어요. 초보 변호사로 막 개업한 이후에 앞으로 시장 상황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고, 일반적인 변호사 업무 외에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라고 생각하다 찾은 게 이민에 관련된 업무였거든요. 한국에서 미국, 캐나다 등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사업도 괜찮을 거 같은데, 아직 변호사들이 이 분야에서는 활동이 많지 않구나, 내가 한 번 해보자, 이런 식으로 이주민 관련 업무를 시작했죠.

처음엔 우리가 이민을 보내는 나라인줄로만 알았지 우리나라로 이민을 오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몰랐거든요. 그런데 이주노동자나 이런 분들은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 위치에 있어서 인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오히려 들어오는 이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니 이분들이 경제력이 없었어요. 법률 상담은 물론이고 변호사라는 사람을 한국에서 처음 만난 거죠. 돈이 없으니까 만날 생각도 안 했었고. 굉장히 작은 일에서부터 한국 법을 모르니까 무조건 불이익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자기가 받는 부당한 처우에 대해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사업으로, 영리목적으로 이 사람들을 만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영리 목적으로 일을 할 만큼 잘 하거나 잘 아는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이주민들을 만나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듣고, 돌아오면 다시 공부를 했어요. 법전도 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그런데 혼자 공부하는데 한계가 있잖아요. 공부를 하려고 해도 하다못해 참고할 책도 없었고요. 그때 판례 등을 공부하기 위해서 법률신문, 대한변협신문 같은 것들을 굉장히 열심히 봤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대한변협신문에서 UN 이주노동자 권리협약 비준을 준비하는 공청회가 있다는 기사를 봤어요.

이 기사를 스크랩해놓고, 기사에 위원장으로 나온 변호사님한테 그냥 전화를 했는데, 그 변호사님이 그렇게 연락이 잘 안 닿더라고요. 제가 좀 끈질긴 구석이 있거든요. 그래서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점심 먹고 전화를 했어요. 메모도 남겨놓았는데 리턴 콜이 잘 안 되더라고요. 결국 ‘오늘도 연락이 안 되면 포기해야겠다’고 맘먹고 전화를 했는데, 그날 전화 연결이 된 거예요.

제가 ‘공청회를 같이 준비하고 싶다’고 하니까 간사변호사를 통해서 연락을 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때 간사변호사가 황필규 변호사였어요. 그렇게 공청회 준비를 같이 하기 시작해서 12월에 공청회를 치르고, 처음으로 UN 이주노동자 권리협약을 소개하는 책자도 만들었고요. 그때 참여했던 사람들이 외부 토론회 등에 발제자, 토론자로 활동하면서 관심을 환기시켰던 거죠. 공청회 때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오셨고, 국회 보좌관들이 관심을 갖기도 하고 그랬어요. 물론, UN 이주노동자 권리협약은 아직도 비준이 안 되긴 했지만.

이 공청회 준비를 통해 변호사들 중에 이주민 활동을 하시는 분들을 처음 만났어요. 황필규 변호사님이 공감에 계시잖아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공감에 있는 회원들하고 일을 많이 하게 됐어요. 소라미 변호사님은 이주여성 관련 활동을 하시고, 장서연 변호사님도 이주노동자 관련 일을 하시고. 이런 식으로 공감의 그룹과 조금씩 같이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그분들이 100% 하실 때 저는 10%, 20% 일을 늘려 나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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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사업으로 이주민 업무를 시작하시다가 변협 활동으로 그 폭을 넓히셨는데, 그러면 민변 활동은 어떤 식으로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

: 처음에 어소로 변호사를 시작할 때 대표가 “민변 이런 데 가입하면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당시 민변을 잘 몰랐는데, 이때 ‘민변’이라는 단체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웃음)지금은 창원에 계신 손명숙 변호사님이 제가 막 개업하던 그 즈음에 회원팀으로 활동하고 계셨는데, 손변호사님이 저한테 밥이나 한 번 같이 먹자고 하셨어요. 옆 건물에 있는 여자 선배가 밥을 먹자고 하시니까 당연히 먹었죠. 그렇게 그날 밥을 얻어먹었어요. 비싼 건 아니지만. 밥을 사주시면서 ‘민변에 가입하는 게 어떠냐’고 하시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고, 제가 친했던 분들 중에 민변에 이미 가입하신 분들도 많아서 ‘알았다’고 대답했죠. 활동은 바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고, 그때는 제가 돈을 좀 벌 때였으니까 회비 10만 원도 낼만한 것 같고요. 아무 생각 없이 회비회원으로 가입했던 거죠. 그러다 이주민 활동을 하면서 공익활동을 더 하게 됐는데, 변호사 5년차를 지나던 즈음에는 ‘내가 돈 벌려고 변호사 됐나?’ 그런 고민이 밀려왔어요. 그런데 공익활동을 하고 싶다고 해도 이런 활동을 혼자 막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던 차에 민변이 공익활동을 한다고 하니까 2006년에 처음으로 여성인권위원회 송년회에 갔어요. 처음 자기소개를 하면서 ‘가입한지는 조금 됐는데, 공익활동을 더 활발하게 해보고 싶어서 송년회도 왔다’고 했더니 선배들이 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러시더라고요. 이제부터는 민변 활동을 좀 더 하겠다고 했더니 여성인권위원회 빈곤노동팀 김진 변호사님이 바로 전화를 하셨어요. 그래서 빈곤노동팀에서 스터디를 시작했고, 그러면서 민변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여성인권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점차 민변 활동을 하게 됐고, 이후 사무차장으로 활동하면서 제가 민변 성원이라는 걸 더 느꼈던 거 같아요. 여성인권위원회 할 때는 여성 인권에 관심 있는 변호사들의 모임이라고 느꼈다면, 사무차장을 하면서는 민변 전체가 활동하는 모습이 보이니까 제가 ‘정말 민변 회원, 성원이구나’ 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 남편인 김차곤 변호사님도 민변 회원이시잖아요. 요즘 노동위 뿐 아니라 특위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그 유명한 민변 내 김&김 변호사님! 김차곤 변호사님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 제가 96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고시공부를 한답시고 신림동으로 간 적이 있었어요.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상황이라 진짜 열심히 공부했어요. 내 인생에서 제일 공부를 열심히 했던 시절이었죠. 1차 시험에 막 합격한 뒤에 독서실 총무 중에 한 분이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걸 눈여겨보고 저한테 스터디를 같이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때가 공부 시작한지 2년째였는데, 2년 동안 혼자 공부를 하니까 정말 폐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전공이 문과가 아니라 그때까지만 해도 글을 길게 쓰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에 누가 스터디를 같이 하자고 한 거예요. 그때 그 분이 데려온 멤버가 저희 남편과 몇 명이었어요.

남편하고는 처음엔 그냥 스터디 내에서 좀 친한 오빠동생이었어요. 둘 다 지구과학에 관심이 있고, 스포츠도 좋아하고 해서 말이 잘 통한다고 느껴서 친해졌죠. 그러다 2차 시험을 치르고 결과가 발표됐는데 남편은 떨어지고 저는 붙은 거예요. 전화를 했더니 남편이 “너는 붙고 난 떨어졌는데 술이라도 한 잔 사야하는 거 아니니” 그러더라고요.

일주일 후에 만나서 술을 마셨는데, 마시다 보니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뭔가 분위기가 묘한 게 거기 더 있으면 안 될 거 같더라고요. 그런데 남편이 그때 저한테 “시험에 떨어진 건 괜찮은데 앞으로 널 못보는 게 너무 맘이 아프다”고 하는 거예요. 아 이 소리를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웃음). 저는 붙고 오빠는 떨어지니까 안쓰럽고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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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러면 딱 한 달만 만나보자”고 제안을 했고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네 번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런다고 없는 감정이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한 달 뒤에 “내가 특별히 감정이 안 생긴다”고 솔직히 말하고는, 둘이 소주를 세 병을 마시고 헤어졌어요. 그때 남편은 한 달 후에 1차 시험 봐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집에 돌아오고 나니 ‘이러다 그 오빠 한 달 후에 시험 못 보면 어떡하지? 시험 볼 때까지만 만나야 하나?’ 그런 걱정이 또 막 드는 거예요.

결국 ‘다시 한 달만 더 만나고, 시험 끝나고 결정하자’고 맘먹고 한 달을 더 만났어요. 그러고 나서 한 달 후에 남편이 1차에 또 떨어졌네? 그래서 당시 남편은 바로 취직하고, 저는 연수원에 들어갔는데 연수원에 남편 아는 사람들이 “어머 너 누구랑 사귄다며?” 이러는 거예요. 저는 그냥 오빠 동생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런 식으로 남편하고도 연애를 못하고 연수원에서 누굴 만나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시간이 흘러흘러 여름이 됐어요. 같은 조 사람들하고 지리산을 가기로 하고 남편한테 얘기했더니 “처음 맞는 휴가인데 어떻게 딴사람들이랑 갈 수 있냐”고 자기랑 지리산을 가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조 사람들이 아닌 둘만 따로 지리산에 갔는데, 그 날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거에요. 산에 다 오르지는 못하고 산장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자게 되었는데, 아침에 남편이 저를 깨우는데 이마를 손가락 하나로 톡톡 치면서 깨우더라고요. 그때 사람이 되게 깔끔한 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웃음) 또 내려갈 때 비가 갑자기 쏟아져서 계곡물이 불어났는데 남편이 저를 보호하면서 건너게 해주더라고요. 지리산에 갔다 온 후로 이 사람 좀 괜찮은 거 같다, 그런 생각이 조금씩 들었어요.

문제는 저는 첫눈에 반한 건 아니더라도 불꽃같은 연애를 하고 싶단 로망이 있었는데, 저희 남편하고는 너무 평탄한 관계가 쭉 이어졌다는 거예요. 남들이 공인한 남자친구는 늘 있는데 우리 둘은 너무 뜨뜻미지근하고. 계속 “이렇게 해서 결혼까지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뭔가 매듭을 짓겠다고 생각을 하고 밤에 전화를 해서 헤어지자고 했죠.

그랬더니 남편이 “그럼 그건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더라고요. 다음날 만났더니 저희 남편이 결혼하자고 하는 거예요. 난감하잖아요? 바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그래서 ‘그럼 한 시간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카페에서 나와서 한 시간 동안 같이 산책하면서 한 마디도 안 하고 각자 생각을 했어요. 이 사람하고 결혼을 했을 때, 아니면 이 사람하고 헤어지고 딴 사람하고 연애를 할 때, 시나리오를 계속 생각해봤어요.

지금 불꽃같은 연애를 못하지만, 이 사람하고 결혼하면 죽을 때까지 평온하게 살 거 같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내 성격을 봤을 때 불꽃같은 연애에 휘말리는 일은 없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한 시간쯤 산책하면서 생각하다 ‘불꽃같은 연애는 이 생에는 틀렸다, 다음 생에 태어나서 하자’고 결정하고 ‘결혼하자’고 대답했어요.(웃음)

: 두 분의 연애 이야기 너무 재밌네요. 너무도 평온하면서도 살짝 심쿵하면서도 애뜻한 느낌도 있고. 그런데 그런 두분 실제 결혼하고 나서도 진짜 평온하신가요? 두분 싸우실까요?

: 실제로 지금도 잘 안 싸워요. 결혼하고 한 번도 안 싸우다가 이라크 파병 때 의견이 서로 달라서 한 번 싸웠나. 그 정도?(웃음). 그리고 제가 남편에게 배운 것이 제가 약간 욱하는 성격도 있는데 그 때 남편이 ‘어떻게 가족에게 화를 내냐’고 그 말을 듣고는 반성도 했어요. 정말 처음에 남편을 만날 때 ‘이 사람과 결혼하면 정말 평온하게 끝까지 함께 살 것 같다’ 그런 느낌이 있었는데, 실제 그랬어요.

: 와 ‘어떻게 가족에게 화를 내냐’. 전 가족이라 화 더 많이 내는데…반성되네요(웃음). 김차곤 변호사님 정말 멋있으시네요! 변호사님은 제가 옆에서 보기에도 변협 활동도 많이 하시고 민변 활동도 정말 많이 하시고 계시는데..이렇게 활발한 공익활동과 생계이자 직업으로서의 송무의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지는 않으신가요? 공익활동을 하기엔 시간이나 여건이 안 되는 젊은 변호사들도 많은데, 조언을 좀 해주신다면?

: 이런 얘기를 하게 되면 사실 후배 변호사님들한테 되게 죄송해요. 어쨌든 저는, 시장 상황이 나쁘지 않아서 제가 그냥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변호사 일을 시작했거든요.

저는 2002년에 어소로 변호사를 시작했는데, 남들보다 좀 빨리 개업을 했어요. 연수원 다닐 때부터 개업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연수원에 있을 때 선배 언니들에게 ‘개업할 때 꼭 나랑 같이 하자’ 라고 해놨거든요. 사실 주변 교수님들이나 선배들은 젊은 여자변호사가 개업을 한다는 걸 되게 불안해하시더라고요. 교수님도 내심 걱정이 되셨는지, “어디 인터뷰 있다더라, 가봐라” 이러시면서 취업 자리도 알아봐주셨고. 그래서 어소로 취업을 한 다음 어쨌든 1년여 정도 기본 업무를 배운 게 당시 개업하려던 저한테 굉장히 도움이 됐던 거 같아요.IMG_7356

연수원에 같이 있었던 선배 언니들 중에 저하고 비슷하게 한 1년 정도 어소 변호사로 활동하다 개업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언니가 있었어요. 그 언니가 개업을 준비하면서, 제가 항상 “개업하려면 저 좀 껴주세요”라고 얘기하고 다녔던 걸 생각해내고는 저하고 같이 개업할 생각을 한 거예요. 그 선배 언니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서 갔더니 대뜸 “사무실을 보러 가자” 그래서, 2002년 12월에 어소 변호사로 1년을 채 안 채우고 전격적으로 개업을 하게 됐어요.

제가 변호사가 되었던 시점이, 여성 변호사가 다 합쳐 100명을 막 넘긴 상황이었어요. 변호사 시장 상황도 나쁘지 않았고, 여성 변호사라는 점도 사건 수임하기에 나쁘지 않았어요. 여성 변호사라는 것 때문에 찾아오시는 분도 있었고요. 그리고 굉장히 열심히 성실하게 일을 많이 했죠. 저는 한 번도 사무장한테 상담을 시켜본 적이 없어요. 제가 처음 개업했을 때는 거의 매일 밤 11시까지 일했고, 휴가도 딱 세 번 갔고. 그런데 지금은 시장 상황이 달라졌으니, 어떻게 보면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얘기에요.

2005년~2006년 즈음에는 제가 변호사 5년차가 되면서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한 시기였어요. 많이 벌어서 많이 쓸 건지, 적게 벌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건지에 대해서요. 제가 변호사 일을 하면서 많이 벌어서 명품 가방 같은 것들 사고, 만족감을 느끼고 그런 생각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가방을 사도 좀 지나면 그 가방이 그 가방이다 싶고, 결국 적게 벌더라도 원하는 일을 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게 됐죠.

이주민과 관련된 공익 활동을 시작할 때에는 그 분들이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일단 내가 무료로 하거나 소송 구조를 받아서 변호를 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10년 후에는 이분들이 상황이 나아져서 고객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죠. 의뢰인들 중에 작은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사건을 마무리할 때 헤어지면서 “당신이 성공하면 꼭 나를 고문변호사로 선임해달라”고 인사하기도 하고요. 제가 많지는 않지만 외국인 사건을 계속 하다 보니 실제로 돈이 있는 분들도 소문을 듣고 유료로 사건을 맡기시는 분들도 계세요. 이태원 커뮤니티에 제 연락처가 알려져 있대요. “어떻게 오셨냐” 물으면 이태원 커뮤니티에서 제 연락처 보고 왔다고 답하시는 분들도 있고.IMG_7349

지금은 사건을 좀 가리게 되기도 해요. 다시함께센터에서 성매매 여성들을 도운 적이 있는데, 그 반대의 업무를 맡기시면 거절하기도 하죠. 사건 내용을 들어봤을 때 무죄일 것 같은 경우에는 맡기도 하지만 제가 듣기에 처음부터 좀 아니다 싶은 사건들은 안 맡아요. 가령 “저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많이 대리하는 변호사이기 때문에 선생님 사건을 맡는 건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고 설명하거나, 제가 보기엔 무죄가 아닌데 무죄를 주장하시는 경우엔 “방향이 맞지 않아 제가 적절한 변호를 제공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면 그분들이 알아서 저를 변호인으로 선임하지 않기로 결정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공익활동을 하다 보면 그것도 변호사 업무잖아요? 변호사는 결국 사람을 많이 만나고, 네트워크를 통해서 사건이 생기기도 하니까요. 저는 오히려 공익활동을 2006년부터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시간을 내서 10%, 20%, 나중엔 50%까지 공익활동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조율하고 있어요.

: 마지막 질문이에요. 민변을 전혀 모르고 회비 회원으로 가입하시다가 지금은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잖아요. 변호사님에게 민변이란,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IMG_7347

: 뭐랄까, 마음이 되게 편해지는 공간이에요. 함께 활동하는 변호사님들도 항상 감사하고 존경하는 분들이고. 누가 ‘존경하는 변호사가 누구냐’고 물으면 전 항상 민변 변호사님들이라고 대답해요.

제가 민변하고 결이 굉장히 다른 변호사님들하고도 잘 지내는 편이에요. 그런데 그 분들이 나중에 제가 ‘저 민변이예요’라고 했을 때 깜짝 놀라시는 분들도 있어요. 저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민변 변호사에 대한 변호사 내의 편견들이 좀 있는 거 같아요. 선거 같은 게 있으면 저한테 도와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었는데, 한 번은 “저 민변에서 사무차장을 하고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되물었어요. 그랬더니 그 분이 “아 그럼 안 되겠네?” 하시는 거예요. 민변하고 꽤 친한 편이신 분인데도 그랬어요. 그때 정말 ‘민변에 대한 변호사들의 편견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어떤 변호사님들은 변협 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민변에 대해 제 앞에서 노골적으로 욕하시는 분들도 있었고요. 어떨 땐 ‘내가 그렇게 민변 티가 안 나나?’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는데.(웃음)

그래서 제 역할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민변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것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해요.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저는 민변 선배들 다 존경스럽고 대단하다,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 분들 많지 않다”고 얘기하기도 해요. 제가 다른 데서도 일해 봤지만 민변처럼 일을 펑크 내지 않고 열심히 해주시는 분들이 없어요. 회원들끼리 서로 사정을 아니까 서로 “이번엔 제가 할게요”라고 적극 나서주고. 정말 일하는 모습, 평소 행동이 선배든 후배든 다 존경스러워요.

그래서 저에게 민변은 점점 더 애정도 가고, 내가 편하게 마음을 둘 수 있고, 얘기할 수 있고, 존경하는 분들이 계시고 그 분들과 함께 일하는 것 자체가 기쁜 그런 곳이에요. 여기서 만나는 선배님들, 동료, 후배님들, 밖에서 만나도 한 식구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너무 애정을 듬뿍 담은 대답이었나?(웃음)

: 애정 어린 말씀 너무 감사드려요. 다시 한 번 막강한 후보를 제치고 큰 상을 받으신 거 정말 축하드리고, 이렇게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금, 2017/01/2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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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환경연대 문을 두드려주신 고맙고 반가운 신입회원님들,

어떤 분들인지, 여성환경연대는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새해 소망은 뭔지 궁금궁금해서 두 분께 

이메일로 짧은 인터뷰를 청했습니다. 역시나 우리 회원님들은 멋진 분들이라는 게 인터뷰의 결론! 

권세현, 정숙희 회원님을 소개합니다. 큰 박수로 맞아주세요 !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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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년 12월부터 여성환경연대 후원을 시작한 권세현이라고 합니다.

전 자연을 사랑하고 노을 보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노을이 질 때 마다 사진을 찍거나 감상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제가 찍은 사진 중에 자연 사진, 노을 사진이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요.ㅎㅎ

걷는 것도 정말 좋아해서 이곳저곳 혼자 열심히 쏘다니며 사진을 많이 찍습니다. 인스타에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올리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낍니다.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아 일상생활에서 실천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손으로 이것저것 무언가 하는 것을 즐겨하고 끄적끄적 낙서 같은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글쓰기를 좋아해서 거의 매일 일기를 쓰고, 아주 가끔 시 비스무리 한 걸 끄적일 때도 있답니다. 밀가루보다는 쌀을 좋아하고, 고기보다는 나물을 좋아하고, 마요네즈 보다는 고추장, 된장을 좋아하는 아주 평범한 한국 사람입니다:)

사실 여성환경연대를 알게 된 건 정말 얼마 안 되었어요. 작년 9월 즈음 평화재단이라는 곳에서 주최하는 ‘청년학교’를 신청하게 되었는데 10강으로 구성된 강의 중 환경이 주제였던 날 EBS에서 방영한 ‘플라스틱인류’ 라는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영상을 보면서 이것저것 메모를 해 두었는데 청년학교가 끝날 때 까지 그 페이지는 다시 열어보지 않고 덮어두었습니다. 그러다가 12월 말에 무심코 그 때 메모해 둔 페이지를 펴보니 여성환경연대 라는 단어가 적혀 있더라구요. 그래서 ‘한번 검색해볼까?’ 하고 검색해 봤는데 저의 관심사와 가치관과 맞는 부분이 정말 많았습니다.

환경문제에 대한 이야기, 건강한 먹거리에 대한 중요성, 생태적인 삶, 같이 하는 삶,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아닌 나만의 속도로 사는 삶 등 여러 가지 면이 제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어서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얘기를 더 편하게 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구요. 그래서 ‘이거다!’ 싶어 바로 후원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기웃거릴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

2017년 다짐은 여성환경연대 덕분에 방향성이 많이 잡힌 것 같습니다. 12월 후원자에게 보내주신 선물 중 <우리는 플라스틱 없이 살기로 했다>라는 책을 읽고 1월부터 플라스틱 최대한 안 쓰고 살아보기 프로젝트를 하고 있거든요. 마음 맞는 친구와 둘이서 하면서 이런저런 정보들도 공유하며 나름 재미나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시작한지 일주일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매일 기록해 가면서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또 여성환경연대에서 보내주신 ‘Redbook’ 을 읽고 나서 면 생리대를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한테도 좋은 게 결국은 환경에게도 좋은거니까요.그래서 올해는 더 푸르게 사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 거는 희망은 몸도 마음도 더 건강한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작지만 큰 바램?! 국민이 주인인 나라, 이웃과 서로 웃으며 인사 할 수 있는 나라, 아이들이 받은 교육이 사회에서도 통하는 그런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¼¼­¿ï=´º½Ã½º¡½Á¶¸í±Ô ±âÀÚ = 10ÀÏ ¿ÀÈÄ ¼­¿ï Á¾·Î±¸ ±¤È­¹®±¤Àå¿¡¼­ ¹Ú±ÙÇý ´ëÅë·É ÅðÁøÀ» Ã˱¸ÇÏ´Â Á¦7Â÷ ¹ü±¹¹Î ÃкÒÁýȸ°¡ ¿­¸° °¡¿îµ¥ Âü°¡ÀÚµéÀÌ Ã»¿îµ¿ »ç¹«¼Ò ¾Õ¿¡¼­ ÃкÒÀ» µé°í ÀÖ´Ù. 2016.12.10. mkcho@newsis.com안녕하세요. 저는 50대 중반 워킹주부이자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딸 정숙희입니다. 저는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여성환경연대 페이지를 보고 가입하게 되었어요.

우리세대는 많은 정보를 접하며 살고 있으므로 몸에 해로운 먹거리는 먹지 않아야 하고, 몸에 해로운 생활용품은 사용하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신 부모님은 ‘물건 아까운 것’만을 고집하고 다 드시거나 사용하거나 쌓아둡니다. 무척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소통이 어려워서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았어요.
애초 생산단계부터 이런 우리 몸에 해로운 것들은 생산가능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페이스북에서 여성환경’연대’를 만나게 되었죠. 나 혼자  호소하는 것보다는 연대해서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새해에도 다름없이 내가 먹을 건 내가 일해서 벌 테니 국가는 자영업자들 등골 빼는 제도 좀 줄여주면 좋겠습니다. 정치인들은 제발 나라 살림과 백성 안위만을 위해 일해주면 좋겠습니다. 덕망있고 능력있는 대통령이 뽑혀서 평안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수, 2017/01/1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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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자원활동가 작성

공익인권변론센터 김시은, 박지아, 서영우

국제팀 양진희

출판소통팀 이재임

언론연대팀 정원영

지난 밤 너무 기대한 탓일까요, 늦잠을 잔 나머지 서둘러서 서초동의 휴먼사무실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세이프. 여유롭게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준비한 인터뷰 질문지를 눈으로 훑어보았습니다. 민변 자원봉사자들이 준비한 질문들은 대개 ‘현장’과 ‘노동인권’에 대한 것들입니다. 미리 인터넷으로 검색해 찾아본 류하경 변호사는 ‘현장에 익숙한 노동변호사’로 보였습니다. 구글 검색창에 류.하.경.이라는 세 글자를 적어 넣으면 ‘삼성건물 못 들어가는 변호사’라는 기사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삼성건물 경비원마저 익히 알고 있을 정도로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연대하는 분이라고요. 인터뷰가 진행된 날, 류하경 변호사는 ‘대한문 집회’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민변 자원봉사자들은 류하경 변호사가 ‘현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노동변호사’가 되기까지 어떤 고민과 실천을 해왔는지 엿보고 왔습니다.

류하경(이하 류) : 뭐 저 같은 사람을 인터뷰하러 먼 데까지(웃음).

박지아(이하 박) : 변호사님, 자신을 한 마디로 소개하신다면 어떻게 하실 수 있을까요?

류 : 한 마디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길게 쓰라고 한다면 밤새도록 쓸 수 있는데. 저는 강아지를 좋아하고, 기타 치는 걸 좋아하고, 자전거 타는 것도 좋아하고, 운동 좋아하고, 그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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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 현장에서도 기타를 많이 치지 않으셨어요?

류 : 현장에서도 많이 치죠. 내가 이러려고 기타를 배웠나. (웃음) 기타를 오래 쳤어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치고 있어요. 저는 홍대에서 밴드하려고 신촌-홍대에 있는 대학 가려고 공부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올라오니까 나쁜 선배들이 뭔가 주면서 ‘이거 한 번 읽어볼래?’라고 하고, ‘수요일에 뭐 해?’라고 물어서 ‘별거 없는데요’ 그러면 ‘그럼 정문 앞에서 봐.’ 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정문 앞으로 나가면 투쟁하고 있고.(웃음) 그래서 밴드의 꿈을 접고 이렇게 살고 있죠. 지금은 사무실에서 일렉 기타를 쳐요. (류하경 변호사가 기타를 꺼내 들고 나옴. 일동 함성)

밴드를 꿈꾸던 학생, 학생운동의 현장으로

박 : 학부 때 ‘나쁜’ 선배들이 이리저리 데려갔다고 하셨는데, 그걸 계기로 노동운동에 관심이 생기신 건가요?

류 : 그렇죠. 저는 1학년 때부터 학생운동을 했어요. 집회의 기초를 1학년 때 마스터했죠. 2학년 때는 학교 안에만 있기보다는 진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같이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책은 많이 보잖아요. 하지만 책은 종이에만 머무는 거니까 실제로 빈민, 농민, 노동자를 느끼고 싶더군요. 그래서 2학년 때 일산의 아파트촌에서 철거촌 투쟁을 하면서 철거민들과 6개월 정도 살았죠. 그리고 군대 가기 전까지 학회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정치경제학 학술 동아리.(웃음) 공부도 하고 술도 마시는… 그래서 학점은 이제…(웃음) 저는 늘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우리 학교 등록금이 비싼 이유는 정치경제학 동아리를 하라고 그런 거다. 정치경제학 공부를 하지 않고 졸업한다면 대학 등록금비를 헛되게 쓴 것이라는 헛소리를 남기면서. (웃음) 제 대학생활의 절반은 정치경제학 학회였고 절반은 투쟁 현장이었고. 노동조합에서 학생들과 연대하는 활동들을 많이 했어요.

박 : 청소노동자 조합 운동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류 : 군대 제대하고 복학을 했는데, 학생 사회가 너무 경직되어 있는 거예요. 대학생 운동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학생 운동을 하는 친구들은 공부를 우선으로 해요. 공부도 좋지만 현장 투쟁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진짜 운동이거든요. ‘다 불태워서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견학 하듯 투쟁 현장 나갔다오길 반복하고, 이렇게 일시적 단편적인 운동만 계속 이어지구요. 그런데 현장 경험이 일천하면 책을 읽어도 한계에 빨리 봉착하게 돼요. 우선 상상력이 그만큼 낮아지고, 똑같은 책을 읽더라도 노동자로서 살아본 사람이 읽는 거랑 대학 와서 마르크스 서적만 보는 사람이 읽는 거랑 그 책의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또 책을 읽었을 때의 변화도 달라요. 실제로 땀 흘려서 노동하고 내 힘으로 투쟁해서 쟁취해본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때 보여줄 수 있는 변화의 폭과 양은, 계속 책만 들고 팠던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삶의 변화와는 천지차이예요.

내가 주체가 되어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가는 운동에 대한 목마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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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학생운동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내 인생의 경험을 쌓기 위한 운동(이었던 것 같아요). 학생운동하면서도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이런 생각을 은연중에 하거든요. 특히나 학생 운동을 하는 시기에는 그런 욕망이 커요. ‘이 운동을 하면서 내가 성장해야지’, ‘내가 여기 가서 뭘 배우고 나중에 좋은 사람이 되어서 사회에 기여를 해야지’, ‘직접 가서 눈으로 목격해야지’와 같이. 매번 학생 운동의 (대상)이 타자화되는 것 같았어요. 우리가 주체가 되는 운동은 등록금 투쟁 밖에 없는데, 매번 그것만 할 수는 없잖아요. 사회적인 연대 투쟁이란 역사와 사회를 크게 바꿀 수 있는 운동이잖아요. 당사자 운동으로서의 등록금 투쟁이나 얄팍한 연대 활동 말고,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게 없을까하는 그런 목마름이 있었어요.

일상과 주변으로 파고들어간 투쟁 청소노동자 어머니, 아버지와 만나다

제대해서 보니까 학교에 비정규직 문제가 이슈가 됐죠. 그때가 2007년이었는데 이랜드 투쟁을 비롯한 비정규직 투쟁은 2000년대 초반부터 계속 있었잖아요. 운동을 운동답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학교 안의 경비 노동자와 청소 노동자분들이야 말로 우리 바로 옆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인데 멀리까지 가서 연대할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제 생각에는 우리 곁에서 투명인간처럼 지나가는 어머니들, 아버님들이 열악한 처우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인데, 아직 조직화도 안 되어 있고 최저임금도 못 받고 계셨죠. 이런 분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연대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같은 학교에서 다니는 학생들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비정규직 된 지가 80년대 후반부터라고 하더군요. 그러면 그동안 ‘20년이 지났는데 대학생들이 뭐하고 있었나?’ 화가 나더라고요. 매일 ‘노동해방, 신자유주의 철폐’와 같은 거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막상 바로 옆에서 청소하시는 어머니들, 학생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하기 위해 도와주시는 가족과 같은 분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왜 한 번도 학생들이 문제제기 못했을까, 이분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활동들을 왜 다른 분들이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활동을 시작했죠. 거의 수업을 안 들어갔어요. (웃음)

박 : 들어갈 시간이 없었겠네요.

투명인간교내 청소 노동자와의 마주침, 그리고 단 하나의 목표를 세우다.

류 : 학교에 청소노동자 휴게실이 있더라고요. 올라가는 계단 아래를 보면 그 옆에 벽이 있고 문이 하나 달려있죠? 우리는 그 문을 창고라고 생각하잖아요. 그 문을 열면 그 안에 사람이 앉아있어요. 정말 좁아요. 그 문을 열었을 때 무척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한 번 찾아가겠다고 청소하시는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물어봤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학생들이 말 걸면 처음에는 ‘이렇게’(손을 내저었다) 하셔요. 현장 소장이라는 사람이 아주머니들에게는 전두환이나 아이히만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학생들과의 접촉이 발각되면 혼납니다. 미리 싹을 잘라놓는 작업이 있었죠. 그럴 땐 시간이 필요하죠. 인사도 계속하고 음료수도 먼저 갖다 드리고. 그렇게 마음이 열고 난 뒤 찾아갔는데 ‘그 문’이 있었어요. 문을 열어주시는데 어머니가 앉아 계시는 거예요. 들어가니 작지만 예쁘게 꾸며놓으셨어요. 손주들 사진 붙어 있고. 본인 방처럼, 소녀 방처럼 꾸며 놓으셨더라고요. 그걸 보고 대단히 놀랐어요. 누군가의 어머니고 할머니고 부인이지.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 어머니랑 다른 게 없는 분 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분들을 투명인간처럼 지나쳐 보내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분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거잖아요. 조그만 공간에서 이렇게 생활하시는 거면 ‘임금 수준도 형편없고 복리 후생도 말도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죠.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열정이 많이 생기더군요. 처음부터 노동조합 조직과 같은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건 아니에요. 하지만 졸업하기 전에는, 정말 이분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고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가장 밑바닥에 있으니까. 학생들이 일종의 교두보 역할을 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업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나는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이분들의 삶이 변화된 모습을 내가 봐야겠어.’ 라는 마음으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진짜 민중을 만나는 시간 청소노동자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울고 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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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건물마다 다 돌아다녔는데 하나같이 사정이 열악했어요. 제가 연세대학교를 나왔는데 건물도 엄청 많고 캠퍼스도 되게 크잖아요. 그래서 제가 스쿠터를 샀어요. 타고 다니면서 점심을 3번, 4번씩 먹었어요. 왜냐면 어머니들이 마음을 열려면 밥을 같이 먹어야 해요. 사람은 옳은 사람이나 옳은 이야기를 안 들어요.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듣지. 가르치려고 하면 안 되고 일단 친해져야 해요. 목적의식을 갖고 친해져서도 안 되고. 그냥 이분들과 정말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어요. 운동을 해보니 마음을 얻고, 친구가 되고, 비를 같이 맞고 해야 서로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거예요.

저도 많이 울었어요. 만나서 이야기 나누면 대부분 우셔요. 연세가 60대, 70대이신데 한국전쟁 때 태어나셔서 힘든 역사를 거쳐 온 분들이에요. 학생 운동하는 친구들은 자신들이 기억하는 ‘투쟁의 역사’ 같은 역사가 진보적인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그 역사도 엘리트의 역사에요. 우리도 사실 오만했지요. 학생운동사, 노동운동사의 노동조합이 있는 ‘제조업-대공장’의 남성 노동자는 형편이 그나마 나은 거지요. 그리고 한국 현대사, 정치사, 4·19, 87혁명과 같이 큰 덩어리 중심으로 공부했을 뿐이지, 민중사에 대해서는 굉장히 무지해요. 그런데 청소노동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자체가 민중사예요. 이분들은 6·25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중산층이 되지 못했어요. 대개는 계속 빈민으로 살아오신 분입니다.

어머니들 우리 이제 큰 물고기가 됩시다” – 청소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조직을 돕다

그 분들의 이야기를 6, 7개월 동안 들었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서로서로는 몰라요. 건물이 다 분리되어 있고, 청소 하시는 동안에는 다른 건물로 가는 게 금지되어 있어요. 그리고 다른 건물 아주머니랑 퇴근할 때도 말하면 안 되고 그게 적발되면 징계를 받게 돼있어요. 현장 소장이 어머님들께 욕도 하고, 성희롱, 성추행, 성상납 등 별 일이 다 있어요. 현장소장이 자기 집, 교회 와서 청소하라고 하면 어머님들이 다 몰려가서 청소해야 했어요. 어머님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자기들끼리 싸워요. 서로 단결이 안 되니까 소장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만 있지, 소장을 상대로 싸우는 건 없어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에요. 그래서 노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설문지를 통해 알아보니 근로기준법 위반, 최저임금법 위반, 폭행, 모욕, 성희롱, 성추행 등이 빈번했어요. 이제 서서히 노동조합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제안했어요. ‘우리는 소장과 1대1로 상대하고 있다. 우리는 소장한테 질 수밖에 없다. 온갖 부당한 행위도 바꿀 수 없다’라고요. 그리고 또 설명을 드렸지요. ‘조그만 물고기가 있는데, 자기보다 엄청 큰 물고기가 나타나면 물고기 모양으로 대형을 짭니다. 그럼 큰 물고기가 겁을 먹고 작은 물고기를 단 한 마리도 못 건드린다.’ 그게 바로 노동조합이라고 말이죠.

오랜 시간 눌려있던 용수철이 튀어 오르다. –노조가 결성되고 청소 노동자가 주체로 거듭나다.

이런 설명의 시간을 가지고, 청소노동자 어머니들을 한 분씩 모셨어요. 건물마다 프락치들을 다 심어 놨는데, 그런 감시의 눈을 피해서 조용히 모임을 시작했죠. 집중적으로 노동조합을 설명 드렸더니 어머님들이 열의가 넘치셨어요. 그동안 눌려있던 용수철이었던 겁니다. 누가 건드려준 사람이 없었던 거지요. 왜냐면 근로기준법이 뭔지, 최저임금이 올해 얼마인지도 모르고, 소장이 ‘툭툭’ 치는 건 넘어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셨던 분들이니까요. 그렇게 간담회를 가질 때마다 어머님들이 성장하시는 느낌이 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어머님들이 스스로 더 높은 차원의 투쟁을 기획하게 되셨어요. 그때 민주노총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08년 2월,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지부 연세대학교 지회 노동조합 출범식을 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노동조합은 숨기고 쉬쉬하며 하면 절대로 안 되거든요. 그러면 우리를 더 무시해요.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장단 명의로 노동조합 출범식 초청장을 교수들에게 보냈어요. 연세대의 한 주체가 (노동조합) 출범식을 한다고 알린 것이죠. 출범식 전날 어머님들이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아 플래카드로 만들어서 연세대 정문부터 본관까지 걸었어요. 다음날 출범식을 크게 했죠. 그렇게 연세대를 시작으로 홍익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로 이어져서 신촌에서 다 같이 집회를 했어요. 노동조합 생기고 불과 한 6개월 만에 이뤄내신 거지요. 학생 한 명을 변화시키는 데는 10년 정도 걸리지만, 청소 노동자분들은 살아온 인생 자체가 이미 노동계급과 투쟁을 체득한 분들이기 때문에, 변화하는 데는 한 순간이었어요.

김시은(이하 김): 정말 짜릿하셨겠습니다.

약자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언덕은 법, 그렇게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다.

박: 학부 때 이런 활동 하셨으면 아무래도 밖에 나가서도 비슷한 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은데, 단체에 들어가지 않고 로스쿨에 진학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류 : 처음에는 노조 조합원처럼 일을 했죠. 그분들 사무실에서 3년 정도 활동을 했어요. 사실 법이라는 게 대단히 중요하죠. 그분들이 배운 사람들한테 가장 기대하는 것도 법이었어요. “이게 불법이야? 소송하면 얼마 받을 수 있어?” 라고 계속 물어보세요. 법이라는 게 존재하는 이유가, 대화의 창구가 없고 그 문턱이 너무 높아서 넘지 못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지요. 물론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형식적으로는 법원에 누구나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노동부에는 누구나 진정을 제기할 수 있잖아요. 즉, 약자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사회적인 장치죠.

그렇기에 ‘배운 사람들’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 같아 처음에는 노무사 공부를 했어요. 노무사 공부를 두 달 정도 하는데 계속 교내 투쟁이 터지니까 집중을 못했어요. 시험도 봤지만 공부를 안했으니 될 리가 없죠. 또 그때 제 나이가 스물여덟 살이라, 집에 뭐라도 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노무사 시험을 그 핑계로 삼기도 했고요. 그런데 주위에서 법으로 노동운동을 지원하고 싶으면 로스쿨이 생겼으니까 거길 지원을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노무사보다 할 수 있는 게 더 많고, 소송대리권도 있으니까요.

우리 사회의 제일 취약한 고리인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이 바로 보편적인 민생 향상을 위한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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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 전반적으로 노동환경이나 노동문제 개선을 위해서 제정이 필요하거나 개정, 수정이 필요한 제도가 있을 텐데, 근본적으로 무언가 바꿀 수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류 : 입법에서는 간접고용문제 해결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란 말이 있듯이 가장 고통 받고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환경을 먼저 바꾸는 게 맞아요. 지금은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고리가 간접고용 비정규직이에요. 역사가 한 단계씩 진보할 때마다 여러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한건 아니었어요. 물론 68혁명 때는 사회 전반적인 혁명이 일어나긴 했지만, 어떤 시대가 한걸음 더 나가려면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고리를 끊어냈을 때 생각보다 큰 변화가 생길 때가 많아요. 그런 것이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운동들이구요.

지금을 사람들은 ‘87년 체제’라고 하지만, 사실상 ‘IMF체제’입니다. 신자유주의 양극화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조금 더 좋은 사회로 갈 수 있어요. 저는 지금의 체제로 인해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면 다음 사회로 넘어갈 실마리가 풀릴 것이라고 봐요. 지금 가장 고통 받고 있는 계층이 비정규직, 그중에서도 직접고용이 아닌 하청업체 소속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이고요.

노동운동이라 하면 뭔가 매니악하고 투쟁의지가 높고 사나운 사람들이 하는 운동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통계를 보더라도 대한민국 국민 절대다수가 노동자에요.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운동은 부분적인 운동이 아닌 보편타당한 운동입니다. 노동운동 자체가 민생운동이고, 국민들의 전반적인 복지 향상을 위한 거시적인 운동이고요. 이 보편적인 복지를 위한 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의 첫 걸음은 ‘노동개혁’에 의해 가장 고통 받고 문제해결이 시급한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해결이라고 봐요. 입법제안은 민변 노동위에서 한 입법제안을 참고 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웃음)

할머니 손 붙잡고 시위현장을 누비고, 노천극장에서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부른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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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영(이하 정) : 학생운동을 열정적으로 하셨는데, 노동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인생의 첫 순간이 있지 않으신가요?

류 : 87년 혁명 때 5살이었어요. 할머니가 운동권이어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간부를 하셨어요. 할머니 손잡고 집회를 많이 다녔고요. 87, 88년 고향인 대구에서도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집회를 많이 했어요. 할머니랑 손잡고 동성로에 나가면 학생들이 교련복입고 최루탄 때문에 코 막으면서 뛰어다니고 그랬죠. 할머니 따라서 시국집회를 많이 다녔고 노동자들의 거친 투쟁의 모습도 어렴풋이 기억나요. 어린이가 상상 못할 인파가 모인 집회에서 발언도 해봤고요. 그게 나중에 역사책에서 찾아보니까 88년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있었던 전교조 집회였어요. 그때 할머니와 버스타고 가면서 할머니가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알려주셨어요. 집회에서 제가 발언하게 됐는데 발언은 안하고 마이크 쥐자마자 ‘나 태어나~’ 라고 노래를 부른 거예요.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함께 소리 지르며 불렀던 기억이 있어요. 그 당시에는 이게 뭔지도 모르고 이 사람들이 왜 싸우는지도 몰랐지만 그 어릴 때의 기억들을 나이를 먹으면서 계속해서 반추해보곤 했어요.

불온서적<>, 그리고 선하고 착한 사람들이 가는 길에 대한 자각

저희 집은 어릴 때부터 책이 많았어요. 삼촌 고모들이 다 학생운동을 해서요. 그때 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집에 있으면 안 되는 책들이 많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장남이어서 할머니 모시면서 대구에 사니까 집으로 불온서적들을 보낸 거죠. 제 방에도 맑스, 엥겔스 이런 책들이 꽂혀 있었고요. <코스모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광주 민중항쟁 다큐멘터리>, <태백산맥> 같은 책들이 있었어요. 또 저희 집은 <말>지를 정기구독했어요. 그래서 한글을 처음 떼었을 때부터 그런 책들을 읽고 자랐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광주민중항쟁 책에서 광주시민들이 칼에 찔리는 사진을 보고 굉장히 놀란 기억이 있어요. 고모 삼촌의 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 옆에서 책 제목들을 엮어서 노래를 부르며 놀기도 했고요. 92년에 ‘윤금이 피살 사건’이 있었어요. 윤금이 씨가 미군들에 의해 성폭행 당하고 살해당한 사건인데, 그게 <말>지에 실려 있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읽고 엄청 충격을 받아 할머니한테 여쭤봤죠. 그랬더니 보지 말라고 하셔서, 더 보고 싶어졌고요. 그 이후부터 <말>지를 정독하기 시작했어요. 중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현대사책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런 역사책들을 접하면서 어릴 때 스쳐 지나갔던 거리의 풍경, 할머니가 했던 말들, 고모삼촌들이 울면서 ‘누가 잡혀갔다’ 이런 얘기하던 기억들도 이해되었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정서적으로, 이렇게 사는 것이 양심적이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어요. 왜 운동을 해야 되는지, 운동의 쟁점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은 자세히 몰랐지만 ‘착하고 선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러다 대학에 입학하니까 불이 붙었고 체질에 맞았지요.

학창시절 수성구의 류하경에서 집회 현장의 기타리스트가 된 지금

저는 학생운동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락밴드를 처음 시작해서 음악에 미쳐있었어요. 음악과 농구가 인생의 전부였어요. 대학 들어가면 무조건 밴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유명한 밴드를 능가하리라고 다짐하며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준비했죠. 고등학교 2학년 학교 축제에서 밴드 ‘범어동 수퍼하이웨이’를 결성했고. 당시 여고에서 많이 왔었는데 배우 손예진도 왔었죠. “손예진이 뭔데!” 이러면서 락밴드 메탈리카처럼 ‘쎈 척’하고 그랬어요. 고2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고, 제인생의 정점은 고 2 축제에서 공연했을 때였어요. 그때 첫 곡으로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을 연주하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이데아’ 로 마무리 했었죠. 그때부터 (인생이) 기울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왔네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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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집회 나가보면 불타오르는 게 있어요. 그래서 ‘수성구의 류하경’이 메이데이 때 가서 ‘바위처럼’을 칩니다. 그때 쌓았던 기타 실력을 농활, 집회현장 그리고 민변 집회에서 발휘하죠. 원래는 락기타, 블루스기타를 치는데 그런 건 민변 변호사님들이 모르시잖아요.(웃음) 그래서 지금 기울고 있는 상태예요.

진지하지만 유쾌했던 인터뷰가 끝나고 류하경 변호사가 말을 덧붙였습니다. 언제 맥주 한 잔 하자고요. 꼭 그러기로 했습니다. 정말이죠? 류하경 변호사님!

목, 2016/12/29-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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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갯불에 콩 볶아먹듯이, 이번 인터뷰는 그야말로 콩뿐만 아니라 밤도 구워 먹어보려고 속전속결로 알차게 진행하려 했다. 너무도 바쁜 그 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찰나의 틈새를 포착해 영원처럼 부여잡아야 했기에 갑자기 시간이 되신다는 말을 듣고는 부리나케 민변으로 달려갔다. 그 동안 민변 민생경제위원회 월례회뿐만 아니라 여러 팀 회의의 유리창 너머에는 늘 그 분이 있었다. 서울시, 참여연대 등 각종 회의에도 어김없이 그 분이 있었다. 어디 그뿐이던가. 민생경제와 관련된 기자회견뿐 아니라 각종 현장과 토론회에도 어느새 그 분은 마이크를 잡고 계시더라. 교대와 시청, 여의도를 순간이동하며 종횡무진하시는 그 분. 라볶이를 특히 사랑하시는 그 분. 이쯤 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줘도 체력이 안 될 것 같은데, 그 분은 이를 비웃듯이 현재는 민변 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계시고, 최근 시국을 대비해 미르-K팀을 일찍이 조직해 현재의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특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분은 바로 늘 푸른 청년 변호사, 김남근 변호사님이다.

 

이혜정(이하 ‘이’) : 변호사님께 직접 소개하시라고 하긴 그렇지만, 변호사님을 모르는 신입회원들을 위해 간략하게 소개 부탁드릴게요.

김남근(이하 ‘김’) : 저는 사법연수원 28기이고요, 연수원 마치고 1999년에 변호사 개업하자마자 민변에 가입했어요. 회원 중 김진 변호사, 이재화 변호사하고 동기이구요. 장주영 변호사는 대학 동기예요. 학생 운동을 하고 감옥도 갔다 와서, 노동 운동도 8년 쯤 하다가 고시 공부를 해서 연수원에 들어갔어요. 36살 때는 노동법 학회장이었고요. 제가 주로 후배 변호사님들 모시고 참여연대, YMCA, 환경운동연합, 민변과 같은 시민사회단체를 후배 변호사들에게 소개시켜주고, 활동도 연결시켜주고, 이런 역할을 했죠.

 

후배님들! 꼭 운동하고, 밥 굶지 말고, 수줍어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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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대외활동이 정말 많으신데, 사건 수임해서 재판도 가셔야 하고…돈은 언제 버세요?

김 : 제 나이 때쯤 되면, 시스템으로 일을 하게 돼요. 저 혼자서 상담도 다하고, 서면도 다 쓰고, 법정 나가고 이러긴 어렵고요. 우선 상담을 한 뒤에 바로 쟁점을 정리해서 사건을 어떻게 진행할지 기획하고, 기획에 따라서 쭉 자료 수집하고 서면 작성하고, 최종 감수해서 제출하는 거죠. ‘증인을 주로 통해서 할 소송이다’, ‘전문적인 사실 조회나 감정을 통해서 할 소송이다’, ‘치열한 법리 공방을 주로 해서 할 소송이다’ 이런 소송 전체에 대한 전략을 짜요. 보통 소장과 답변서가 나오면 큰 구도가 잡히잖아요. 진행하기 어려운 사건이나 승패가 불투명하고 복잡한 사건을 많이 맡아두면 이런 활동을 할 때 어려워요. 그런 사건은 가능하면 안 맡으려고 하죠.

이 : 요즘 후배 변호사들은 변호사님 세대와 다르게 생계도 어렵고, 민변 활동을 하고 싶어도 여력이 안 된다 이런 분들이 많거든요. 가끔 내 생계도 못하는데 공익 활동도 못하니까, 더 뻘쭘해서 못 나가겠다, 이런 친구들도 많이 만났어요. 젊은 회원들이 민변 활동을 하면서 경제적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김 : 크게 두 가지 문제인 거 같아요. 하나는 일단, 3년 정도 숙련 과정이 필요해요. 성실하게 의뢰인과 상담도 하고, 소송도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이야기해주고, 소송을 하더라도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여서 하고. 그렇게 하면 신뢰가 생겨서 3년 후면, 처음에 한 의뢰인들이 그 다음 새로운 사람을 데리고 오더라고요. 3년쯤 되면 의뢰인이 2배가 돼요.

그런데 3년 동안 너무 급해서 돈 되는 소송만 찾고, 안 되는 소송도 억지로 소송하고…이런 분들은 3년이 지나든 10년이 지나든 처음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처음에 기초가 잘 안 쌓여있으니 소송 능력에 대해서도 불신이 생기고, 본인의 실력도 잘 안 쌓이는 거죠.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 3년 쯤 쭉 가다보면, 실력도 쌓이고, 의뢰인들과도 신뢰도 생기고, 그게 두 배쯤 되면서 안정화된다, 이런 생각으로 일을 하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또 하나는, 가만히 앉아있으면 의뢰인도 늘어나고 나의 실력도 쌓이느냐, 그런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여유가 있을 때 의식적으로 민변 같은 데에 참여를 하고, 시민 단체에도 참여하고, 필요하면 서울시나 중앙 정부에 참여해보고 하는 적극성이 필요해요. 변호사의 실력은 결국 여러 가지 케이스를 접하면서 느는 건데, 찾아오는 의뢰인만 기다리면 접할 수 있는 케이스에 한계가 있잖아요. 여기저기 많이 나와서 많이 활동하는 분들은 몇 년만 되면 금방 실력이 느는것 같아요. ‘나는 내성적인 성격에 사람 만나는 거 싫다’,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거 싫다’, ‘어려운 거 하기 싫다’ 그러면 한계에 부딪혀요.IMG_8904

저도 대학 동기들한테 물어보면 지금 성격하고는 좀 달랐어요. 대학 때는 굉장히 어둡게, 침울하게 학교 다니고, 샤이하고 그런 사람이었어요. 시민운동을 하면서 남들과 자주 어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나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잘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그러면서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거기에 맞춰서 필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훈련이 된 것 같아요.

다른 사람과의 소통 능력은 떨어져도 자주 어울리는 자리에 참여하고,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자신이 많이 배워서 다른 후배들과 소통하는 게 도움이 돼요. 아무래도 변호사나 법조인 하시는 분들이 성격 활달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그런 분들이 많지 않아요. 대부분의 판검사, 변호사들이 성격이 내성적이고, 사람들과 소통능력이 떨어지고. 그런 사람들이 우리나라 법조인이 되는 게 안타까운 일이죠.

하지만 변호사 시작할 때 똑같이 수줍음 많고 소통력 떨어지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5-6년 지나서 봤을 때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의뢰인과 충실히 소통하며 하시는 분도 있고, 여전히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분도 있어요. 그러니까 노력을 하면 변하는 부분이라는 거죠. 그래서 변호사 초기 단계인 분들이 제일 많이 해야 할 일은 도움은 안 되더라도 사람들을 많이 접하고 상담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녀야 하는 거라고 봐요. 물론 힘들죠. 나한테 도움이 될까 회의적이고. 당장 상담한다고 한 건의 수익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이런 일들이 경험을 축적하는 기회가 돼요. 상담을 100번 하면 100개의 케이스를 접해보는 거니까. 그런 거를 많이 하시는 분은 선배들한테도 굉장히 적극적인 것 같아요. 상담을 하면 문제를 해결해야하니까 책임감이 생겨서 물어보고 그러는 거 같더라고요.

이 : 어떤 때는 참여연대에 계시다 또 민변에 계시고, 다시 서울시에 계시고, 재판도 하시고..오전에 서울변회에서 영어강의도 들으신다면서요. 대학원인지 무슨 시험도 보신다고 들었는데…아무튼 도대체 잠은 언제 주무시고 체력 관리를 어떻게 하시는 거에요?

김 : 운동을 꼭 해야 해요. 헬스를 일주일에 3번하는데, 밤에. 일을 너무 막 하다보면 피로가 쌓이고 스트레스가 차고 하면 몸이 무겁고 그래요. 몸에 노폐물이 많이 쌓이잖아요. 운동을 해서 땀을 흘리고 나면, 쫙 빼고 나면 새로운 활력이 생기고 몸이 가벼워져요. 제가 노동 운동을 8년 정도 했는데, 저와 같이 노동 운동을 처음 시작했던 분들이 2, 3년쯤에 많이 떠나더라고요. 괜히 열정에 치우쳐서 아침도 안 먹고, 술도 많이 마시고, 그랬던 분들이 지쳐서 떠났던 거죠.

저는 공장 다닐 때도 꼭 제가 아침밥 해먹고 그랬어요. 활동을 많이 하려면 스케줄 관리를 잘 해야 되겠죠. 그리고 지적활동과 배움은 계속 해야 해요. 그런 면에서 지적인 자기관리도 필요해요. 지적 활동을 안 하면 사고도, 머리도 쇠퇴되고, 사람이 그러면 보수적이 되거든요. 새로운 거에 도전하지 않고 자꾸 하던 것만 하려고 하고, 하던 것만 관리해서 살아가려고 하면 보수적으로 될 수밖에 없죠. 자꾸 새로운 거에 도전을 하려고 하고, 그런 정신을 안 놓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박근혜 정권 퇴진 특위, 민변의 역할에 대하여

 

이 : 이번 박근혜 정권 퇴진 특위의 역할이 커요. 광화문에 시민 100만 명이 모였고, 상황이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잖아요. 이 역사의 한 가운데서 민변은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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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 역사라는 게 역동적인 거니까.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하면 권력 공백 상태에서 다음 권력을 만들어 낼 때 혼란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이 전개될 수도 있죠. 그런 과정에서 헌법, 법률, 선거에서 전문적인 역량이 있는 법률가와 우리 민변이 해야 할 역할이 많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불행하게도 어쨌든 박근혜 대통령이 완고하게 버티면서 정국이 지지부진하게 흐르면서 다 힘들어지겠죠. 어떻게 보면 정치적, 사회적 타협이 필요한 국면일 수도 있고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기본적인 헌법과 법률의 원칙들을 잘 지켜내면서, 헌법과 법률에 따라서 우리 사회가 한 발 더 나아가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데 있어서 민변이나 변호사의 역할이 상당히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걸 우리가 충실히 해야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민변이 시민 사회 전체나 우리 민중 운동을 주도해 가는 단체다, 라고 생각하시는 회원분도 있으실 것 같고, 한편으로는 민중운동을 주도하는 것은 다른 단체, 예를 들면 민주노총이나 참여연대 같은 곳이 하고 민변은 사회 변혁의 움직임에 법적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소송이나 입법이나 법률적인 의견이나 이런 것들을 지원해주는 게 더 현실적인 역할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죠. 그걸 민변 내 논의를 통해서 ‘어느 쪽이 맞다’, ‘어느 쪽으로 활동한다’라고 결판을 낼 수는 없는 것 같고, 두 가지를 잘 조화시키는 게 민변 집행부의 중요한 역할인 것 같아요. 집행부가 민변의 위치를 잘 잡아나갈 때, 대다수 회원들도 만족하고, 민변이 역동적인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시민운동의 BIG PICTURE

 

이 : 민생위에서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 민생위 분들은 특히 참여연대와 인연이 깊잖아요. 변호사님도 참여연대 활동을 많이 하시길래, 막연히 참여연대에 애정이 많으시구나 했는데 지금은 또 민변 부회장으로 계세요.

김 : 민변과 참여연대 중 어느 곳에 애정이 있느냐, 이런 건 유치하지만(웃음) 시민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 시민운동의 전체적인 역량을 다 보고, 역량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배치할 것인가, 대응할 것인가, 이런 관점이 있어야 해요. 민변은 민변이니까, 참여연대는 참여연대니까, 이렇게 자기 조직 입장만 생각하면서 운동하면 다 망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가능하면 시민 사회 전체적인 관점에서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있어요. 민변 변호사님도 너무 민변 틀 안에만 있을 필요가 없죠. 우리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변호사의 역량으로만은 힘들어요.

변호사의 장점이라면 최종적으로 문제 정리 능력이 뛰어난 거예요. 우리 사회에 쟁점들이 생겼을 때 쟁점의 내용은 뭐고 그걸 최종적으로 어떻게 조합을 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송을 해야 한다, 법을 바꿔야한다, 문제 원인들을 정리해서 의견서를 내야한다’ 이런 결론을 내리고 실행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어요.

한편으로는 변호사들이 아무래도 최초의 문제제기를 하는 단계부터 문제에 함께 참여하기는 어렵죠. 대학교수나 연구자들이 거시적인 정책을 연구하고, 시민운동가 같은 사람들이 기동성 있게 운동을 전개할 수 있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어요. 저는 연구자와 시민운동가와 변호사의 삼박자가 잘 갖춰져야만 사회개혁을 할 수가 있다고 봐요. 민변 변호사님은 그 중 한 축을 담당할 수가 있죠. 그러니까 저는 가능하면 역량 있는 변호사들이 밖에 나가서 여러 시민 사회 결합 활동을 하는 걸 많이 권장해요.

 

세상을 바꾸는 소셜 디자이너의 힘

 

이 : 좀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변호사님 활동력과 능력에 비추어 보면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많았을 것 같은데, 왜 정치권에 안 나가셨는지 궁금해요.IMG_9062

김 : 민생경제위원회는 경제 민주화, 민생에서 입법운동을 많이 해왔어요. 국회의원들도 끌어들여서 연대 활동도 하고, 재벌개혁 운동하시는 대중 단체와 전문가들도 같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해왔어요. 영어에는 deadlock(교착 상태)이라는 표현이 있어요. 어디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팽팽하다 보니까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단어예요. 제가 보기엔 우리 사회가 십수 년 전부터 그런 데드락 상태에 갇혀있는 것 같아요.

보수 입장에서도 자기들이 원하는 만큼 규제를 풀어서 능력 있는 사람이 마음대로 활개치는 사회로 못 나가니까 갑갑하다고 그러고. 진보 입장에서도 이미 실패한 신자유주의적인 국정 운영은 실패한 게 뻔한데, 좀 더 사회를 평등하게 끌고 나가야 하는데 거기를 한 발짝도 못가니까 갑갑하겠죠. 이런 상황에서 특히 사회적으로 위기가 와요. 진보 측 입장에서도 보수 측 입장에서도 자기들이 원하는 걸 못하는 그런 상태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인 해결을 꾀한다는 건 한계가 있어요. 그럴 때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힘을 끌어 올리고, 전문가들을 모아내고, 큰 힘을 코디네이트 하려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봐요. 민변이나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해요. 저는 시민 단체 간사들이나 후배님들한테 코디네이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요. 우리 사회에 대한 social design을 하는 거죠. 우리 사회가 어디로 나아가야 될지 디자인하고, 그에 필요한 일들을 기획하고, 그 기획에 맞춰서 입법이 필요하면 정치권도 끌어들이는 거고, 전문가도 발굴해서 그분들과 끊임없이 소통도 하고 끌어들이고. 시민 단체들과도 결합하고.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바꿀만한 힘을 모아내는 역할을 누군가 해야 해요.

나에게 주어진 일만 하겠다. 이러면 백날해도 나도 발전이 안 되고, 사회도 발전이 안 되고, 불만만 많아져요. 그래서 저는 ‘나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 태도보다는 코디네이터적인 역할을 하자고 마음먹은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정치권에 가면 그런 코디네이터 역할은 어려운 것 같아요.

이 : 소셜 디자이너로서 사회를 코디네이트하고 조직하고,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고….그런 역할이군요. 그럼 이번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를 포함해서, ‘소셜 디자이너로서 우리 사회를 위해 민변이 이런 것 좀 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나 기획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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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 집회 현장에 나온 시민들은 굉장히 다종다양한 분들이잖아요. 집회를 주도하는 분들이 법적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 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변론도 할 수 있죠. 다양한 관점과 계기에서 집회에 참여하는 다양한 시민들에게도 민변이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 생각엔 희망 제작소가 이런 작은 소셜 디자이너를 키우는 역할을 했다고 보는데, 이런 곳과 함께 기획해서 현장에 나온 조그만 단체들, 조그만 인터넷 모임들, 카페모임들한테 단체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도 필요해 보여요. 또 기존의 집회 시위와 관련해서 뿐 아니라, 세입자들을 위한 가이드북 같은 것도 해보고, 가맹점 대리점 창업 시작하는 분들한테, 창업해서 적어도 불공정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가이드북 같은 걸 만든다든가. 그런 다양한 기획들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민변 변호사만 하면 안 되고 여러 시민단체와 결합해서, 그런 쪽으로 관심을 두면 좋겠어요. 민변이 지금까지 너무 큰 담론, 큰 정책, 큰 기획에 집중했던 것 아닌가 싶고요. 많은 회원들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다종다양하게 활동할 수 있는 영역들을 개척해나가는 게 필요해요. 앞으로 민변이 이런 다양한 일과 기획을 해나갔으면 좋겠어요.

이 : 오늘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바로 또 특위 회의가 있어서 이만 보내드려야 겠어요.

김 : 간단한 건 줄 알았는데, 무슨 청문회 하는 것 같아서..(웃음)

 

지속가능한 소셜 디자이너 활동을 위해 끊임없이 자기관리를 하고, 지적활동을 위한 배움을 멈추지 않는 김남근 변호사님과 이야기 나누면서 새삼 ‘존경’이라는 두 글자를 아로새기게 되었다. 우리 사회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소셜 디자이너, 김남근 변호사님을 민변이 찐하게 응원하고 애정합니다!

월, 2016/11/2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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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고향과 나름의 이유를 가진 이주민들이 우리 곁에서 살고 있습니다. 단일한 배경과 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끼리 사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른바 우리는 문화 다양성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다양함이 서로 어울려 조화롭게 돌아가는 사회를 ‘다문화 사회’라고 합니다. 다문화는 단일한 문화를 내세우는 것에 대치되는 상태 혹은 그 태도입니다.

1990년대 말, 국제결혼과 외국인 근로자의 이주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한국 역시 문화 다양성의 사회로 진입했습니다. <재한외국인처우개선법>, <다문화가족지원법> 등의 법률이 만들어지고,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설립 등 각종 정책이 쏟아졌습니다.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다문화정책은 이제 10년이 되어갑니다. 희망제작소는 새로운 시민으로 우리 곁에 찾아온 이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려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다문화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연구의 일환으로 지난 10월 말 두 이주여성을 만났습니다.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통번역사로 일하고 있는 이주여성 나랑체첵(몽골어 통번역, 6년째 근무) 씨와 주영애(중국어 통번역, 3년째 근무) 씨입니다. 나랑체첵 씨는 2004년에, 주영애 씨는 1997년에 한국에 왔습니다.

우리도 한국인이에요

사람들은 두 사람을 한국인으로 대하고 있을까? ‘혹시’하고 물은 대답은 ‘역시나’였다.

“말을 안 하면 잘 몰라요. 입을 열면 외국인이냐고 묻죠.” (나랑체첵)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인사를 하던 주영애씨는 외국인이냐는 질문이 난감하다고 했다.

“저는 이미 귀화해서 한국인인데, 중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다들 외국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는 사람은 나쁜 뜻이라고 생각 안 하지만, 듣는 입장에선 상처가 되더라고요.” (주영애)

두 사람은, 요즘 많이 회자하는 다문화 가정, 다문화 아동, 다문화인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많은 듯했다.

“다문화라는 것은 여러 문화가 어우러진다는 아름다운 의미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못 사는 국가의 여자들이 한국에 와서 결혼 못 하는 남자들과 결혼하는 것’이라고 인식되는 것 같아요. 끌어안아야 하는 짐, 부담처럼 보이는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저는 20년 가까이 한국에 살고 있고, 또 한국인으로 살고 싶은데 말이에요.” (주영애)

주영애 씨와 나랑체첵 씨는 그동안 진행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지금은 그곳의 직원이 되어 일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다문화사업에 대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생긴 지 10년이 되었거든요. 저는 센터가 처음 생길 때부터 이용해왔어요. 센터는, 열악한 환경에서 코리안드림을 위해 한국에 온 사람들을 끌어안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한국 사람답게 만들기 위한 곳이라고 봐요. 그런데 자국민도 잘 챙기지 못하면서 왜 외국인에게 예산 낭비하냐고, 역차별 아니냐고, 한국인들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데 왜 이주여성 일자리만 지원하냐며 반대의견이 나올 때는 너무 속상합니다.” (주영애)

▲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홈페이지(namyangjusi.liveinkorea.kr)

▲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홈페이지(http://namyangjusi.liveinkorea.kr)


눈치, 성과 압박, 해고의 두려움… 한국의 사회생활

구제대상으로 들어와서 한국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사회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보는 것 같다며 주영애씨는 토로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일하게 되면서 왜 외국인에게까지 일자리 주냐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당시에는 소극적으로 대처했는데요. 속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각각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일하는 외국인 직원은 1~2명이지만, 한국인 직원은 더 많다고요. 즉, 우리 같은 사람들 일자리가 한 개 생기면, 한국인들 일자리도 덩달아 더 많이 늘어나는 게 아닌가’라고요.” (주영애)

곱지 않은 시선에다 엄청난 경쟁률까지 뚫고 하게 된 통번역사 일이 할 만한지 물었다. 녹록지 않다는 표정이 두 사람의 얼굴을 스쳤다.

“통번역사 제도는 2009년부터 시작됐어요. 현재 전국에 300여 명의 (이주여성)통번역사가 있는데, 근무 기간이 짧아요. 우선 한국인들 속에서 적응하기가 어려워요. 행정업무 처리하기도 어렵고, 통번역 외에 센터의 다른 사업도 해야 하고요.” (나랑체첵)

‘일자리는 좋은데, 사회생활 자체가 어렵다’고 나랑체첵씨는 표현했다.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했다.

“우리는 눈치 없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주영애)

“그건 저도 인정해요.(웃음)” (나랑체첵)

한국의 사회생활에서 규정이나 매뉴얼보다 중요하다는 ‘눈치껏 잘하기’. 이들에게는 생소하고 어려운 문화인 것이다.

“직장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느껴요. 중국이나 몽골은 수평관계인데, 한국은 수직관계인 거 같습니다. 눈치로 배워야 하는 게 많아요. 이런 부분은 아직도 어렵죠.” (주영애)

“저는 행정적인 부분이 제일 어렵고 힘들었어요. 뭐 하나 하려면 기획서, 보고서 등 써야 할 게 엄청 많아서 처음엔 엄청 어려웠어요. 물론 하면서 엄청 성장했지만요.(웃음)” (나랑체첵)

눈치로 시작된 이야기는 일자리 처우 개선까지 이어졌다. 6년째인데 막내처럼 일해서 답답한 점, 최저임금이 안돼서 8시간에서 7시간 근무로 바뀌었지만 업무량은 여전하다는 점, 그런데도 성과는 전년 대비 늘 좋아야 한다는 점, 평가를 통해 하위 10%는 재계약에서 탈락하기 때문에 압박도 많다는 점 등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꿈에 그리던 ‘사무직’이고, ‘배울 수도 있는’ 일인데 유지하기 어려운 게 안타깝다고 두 사람은 말한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사는 주영애 씨는 출근하는 데만 2시간 남짓 걸린다. 무려 4시간 가까이 걸리는 시간을 감수하며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한국 오고 20년 동안 안 해본 일 없을 정도로 고생했다며 눈시울을 붉히더니 대답했다.

“전문직을 선호해서 이곳으로 왔어요.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 고려했다면 안 왔을 거예요. 지금까지 일한 곳 중 여기 급여가 제일 적으니까요. 그간 한국 생활을 하며 어려움을 겪은 한 사람으로, 다른 다문화가족에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주영애)

“한국 처음 왔을 때 남편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남편은 좋은 사람 찾아가라고 했지만, 나는 젊었으니 닥치는 대로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느냐 말하고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하지만 어려운 건 어려운 거더라고요. 그러다 통번역사 기회가 와서 정말 기뻤어요.” (나랑체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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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선배로 이끌고 다독여주기

한국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무척 어려웠지만 자신들은 그 단계를 넘어 여기까지 왔으니,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갈 이주여성을 돕는 일을 하고 싶고 또 잘할 수 있다고 했다.

“결혼이민자들의 입장을 잘 알고 있고, 시행착오도 먼저 겪었으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크죠. 또 그들 입장에서도 우리가 다가가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요? 제 도움을 받은 사람이 고마워하거나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저 자신이 쓸모있는 사람으로 느껴져요. 그게 가장 큰 보람이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죠.” (나랑체첵)

“저는 (통번역사 일을 한 지) 만 3년 차에 접어들었는데 그동안의 저 자신을 평가하자면, 놀랄 만큼 많은 성장을 했다는 거예요. 가장 값진 건 한국에서 직장다운 직장을 처음 가지게 된 거죠. 이전에 15년 일했던 것 이상의 의미가 있어요.” (주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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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다문화가족지원서포터즈’ 회의 모습. 서포터즈는, 이주여성들이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돕는다.

두 사람은,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겪었지만 한국에 잘 정착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다른 이주민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제가 느끼는 보람은, 고통의 시기를 겪고 있는 이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앞에서 줄을 끌어주는 것 같은 느낌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사람들에게 제가 교훈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영애)

이주여성을 끌어주고 도와주는 활동은 통번역사 일 말고도 이들이 담당하고 있는 다른 사업으로도 이어진다. 나랑체첵 씨는 남양주시 다문화가족지원서포터즈를 맡아서 해왔고 주영애 씨는 검정고시반을 맡고 있다.

“2012년쯤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이용률이 12% 정도였는데요. 이주민의 이용 참여를 높이기 위해 경기도에서 ‘다문화가족지원서포터즈’ 사업을 시작했어요. 서포터즈는 숨어있다시피 하는 이주여성을 연결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은행이나 버스 이용 등의 생활 지원을 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있어요. 제일 중요한 건 잘 안아주고 다독여주는 것인데, 제가 결혼이민 선배다 보니 정보도 많이 주려하고 잘 이해해주니 많이들 따라오시더라고요.” (나랑체첵)

“작년부터 검정고시반을 맡아서 하고 있어요. 15명이 참여해서 11명이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졸업장을 수여했는데요. 다들 마치 대학 학사학위를 받는 것처럼 기뻐하시더라고요. 덩달아 저도 뿌듯했죠.” (주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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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검정고시반’ 주말 스터디


실질적으로 무언가 할 수 있도록

결혼이주여성들이 목말라 하는 정보 대부분은 취업과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취업도 중요하지만 언어나 한국의 문화를 먼저 익히는 게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에 관해 물었다.

“물론 언어도 중요하죠. 하지만 오셔서 맞벌이해야 하는 분들도 있어요. 빨리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겠죠. 그분에게 중요한 것은 언어보다 돈인 거죠.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그 사람의 사정이고 상황이라고 생각했으면 해요. 그리고 돈을 벌다 보면 한국어가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에 결국 언어를 배우러 오게 돼요. 이 지역만 해도 (이주여성의) 50% 이상이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해요.” (나랑체첵)

그렇다고 돈을 달라거나 특별한 것을 지원해달라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무언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이주여성의 가정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데에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주여성이 일자리 찾기는 어렵고, 그렇게 되면 남편이 혼자 돈을 벌어야 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혼자 돈 벌고, 거기에 아이까지 있으면 힘들어요. 가정에 불화가 생길 가능성도 크고요. 이주여성들은 점점 자신이 없어지고, 한국 사회에서 일어설 기회가 없어지는 거죠.” (나랑체첵)

“아이가 있는 분들은 긴 시간 일하지 못합니다. 시간 짧은 것, 아르바이트 같은 것을 하고자 해요. 그래서 시간을 탄력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봐요.” (주영애)

높은 취업 욕구보다 준비와 노력이 부족한 이주여성들도 물론 있다. 두 사람은, 당장은 아니어도 장기적으로 실질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꾸준한 취업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결혼이민자분들이 아예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에요. 결혼이주여성이 도망가는 사례 등은 좋지 않은 여론을 만들고 큰 화젯거리가 돼요. 하지만 잘하고 계신 분들도 많아요. 저는 모든 게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몇 년이 지나면 적응하고 한국 사람이 되잖아요. 가끔 다문화정책이 잘 되고 있나 의문이 들 때가 있는데요. 숫자와 실적에만 매몰되기 때문이죠. 실제 도움이 되지 않는 사업을 한다거나, 매번 오는 사람들만 지원받을 때도 그렇죠. 많은 사람이 동등하게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해요.” (나랑체첵)

다문화 체감도 높이고 다름 인정하는 태도 필요해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다문화에 대한 인식은 이중적이다. 인터넷에 난무하는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댓글들이 보여주는 한 면과 공식적으로 나타나는 대체로 신중하고 호의적인 인식조사 결과가 또 다른 한 면이다. 2015년 서울서베이를 보면, 자녀의 외국인과 결혼, 외국인 친구, 외국인 이웃 등에 대한 태도는 종합적으로 60%가 호의적이었고, 결혼이민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 해소에는 50.9%가 긍정적이었고, 일자리를 뺏긴다는 우려는 40.5%였다. 여기에 대해 주영애 씨와 나랑체첵 씨는 여전히 낮은 다문화 체감도를 높이고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람은 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다름을 인정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결혼이민자들이 이렇다저렇다 이야기하지 말고, 그 상태 그대로 다름을 인정해주고, 다르면 이상하게 취급하는 시선만 아니었으면 해요. 그리고 잘 적응해서 성공하고, 잘 살아가는 본보기라고나 할까, 이런 사례를 자주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주영애)

“저도 예전에는 외국인인 걸 숨기고 싶을 정도로 조용히 지낸 적이 있어요. 시선 자체가 차가워서 자꾸 주눅이 들었어요. 물론 지금은 숨기지 않고 말하죠. 이건 제가 지금 당당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갑자기 당당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나랑체첵)

주영애 씨는 공교육에 진입하지 못하는 중도입국자녀가 너무 많다며, 이들을 잘 끌어안고 한국문화에 잘 융화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회와 역할을 주고 함께 성장할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옆집에 베트남 사람이 와서 살지만 모르는 경우도 많아요. 다문화가 무슨 상관이냐고 하지만 학교와 직장을 살펴보면 다문화가족 출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출산시대라고 하는데, 다문화가족은 다둥이인 경우가 많아요. 여기에 중도입국자녀들도 있는데, 이 아이들이 적응 못 하는 경우가 수두룩해요. 사람들이 체감을 못 하는 게 이런 것들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인 것 같아요. 중도입국자녀가 한국사회에 문젯거리로 전락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나만 안전하면 된다고 하지만, 안전지대가 없어질 수도 있어요. 이들이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지 않게 하려면 지금 잘 해야 합니다.” (주영애)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차별과 배척의 시선만을 느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제도와 지원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있지만, 무엇보다 따뜻했던 것은 처음 접했던 한국인들의 도움이었다.

“제 아이 역시 중도입국자녀예요. 적응을 굉장히 힘들어했어요. 지금 같으면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을 이용했겠지만, 10년 전에는 그런 게 없었잖아요. 그러다 한국 아주머니와 대학생들이 외국인 근로자와 학생들에게 한국어 가르치는 행사가 있다고 해서 아들과 함께 갔어요. 열정적으로 가르쳐주는 걸 보고 ‘한국 사람들이 무조건 외국인을 싫어하는 게 아니구나’,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엄마 말은 안 듣던 아들이 그때 한국어 가르치던 누나 말은 잘 들어서, 지금도 연락을 하더라고요.” (주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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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인터뷰가 희망제작소 뉴스레터에 실린다고 하자, 나랑체첵 씨는 어떤 사람들이 독자냐고 물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관심 가진 분들이라고 답하니,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고 했다.

“이주민들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눈치가 없어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웃음) 한국 사람처럼 행동하길 바라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일률적인 행동을 기대하지는 않았으면 해요. 우리는 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같아지려 해도 시간이 걸리지만, 같아지려 하는 게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이주민들의) 문화도 존중해주길 바라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런 한국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랑체첵)

이주민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늘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앞으로 살고 싶은 나라가 어떤 곳인지 먼저 물어야 한다. 이주민들이 한국에서 살면서 많은 시간 고민하는 것은, ‘한국인이냐, 아니냐’보다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것, 성장하는 것, 보람을 느끼고 이 사회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혼란스러운 시절을 살아가는 여느 한국인의 모습,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뷰 진행 : 이은경 사회의제팀 팀장 · [email protected]
녹취 및 정리 : 이은경 사회의제팀 팀장 · [email protected]
녹취 및 정리 : 최은영 미디어홍보팀 연구원 · [email protected]

* 인터뷰 참여자의 요청으로 개인 사진은 게재하지 않습니다.

월, 2016/11/0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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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고향과 나름의 이유를 가진 이주민들이 우리 곁에서 살고 있습니다. 단일한 배경과 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끼리 사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른바 우리는 문화 다양성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다양함이 서로 어울려 조화롭게 돌아가는 사회를 ‘다문화 사회’라고 합니다. 다문화는 단일한 문화를 내세우는 것에 대치되는 상태 혹은 그 태도입니다.

1990년대 말, 국제결혼과 외국인 근로자의 이주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한국 역시 문화 다양성의 사회로 진입했습니다. <재한외국인처우개선법>, <다문화가족지원법> 등의 법률이 만들어지고,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설립 등 각종 정책이 쏟아졌습니다.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다문화정책은 이제 10년이 되어갑니다. 희망제작소는 새로운 시민으로 우리 곁에 찾아온 이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려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다문화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연구의 일환으로 지난 10월 말 두 이주여성을 만났습니다.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통번역사로 일하고 있는 이주여성 나랑체첵(몽골어 통번역, 6년째 근무) 씨와 주영애(중국어 통번역, 3년째 근무) 씨입니다. 나랑체첵 씨는 2004년에, 주영애 씨는 1997년에 한국에 왔습니다.

우리도 한국인이에요

사람들은 두 사람을 한국인으로 대하고 있을까? ‘혹시’하고 물은 대답은 ‘역시나’였다.

“말을 안 하면 잘 몰라요. 입을 열면 외국인이냐고 묻죠.” (나랑체첵)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인사를 하던 주영애씨는 외국인이냐는 질문이 난감하다고 했다.

“저는 이미 귀화해서 한국인인데, 중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다들 외국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는 사람은 나쁜 뜻이라고 생각 안 하지만, 듣는 입장에선 상처가 되더라고요.” (주영애)

두 사람은, 요즘 많이 회자하는 다문화 가정, 다문화 아동, 다문화인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많은 듯했다.

“다문화라는 것은 여러 문화가 어우러진다는 아름다운 의미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못 사는 국가의 여자들이 한국에 와서 결혼 못 하는 남자들과 결혼하는 것’이라고 인식되는 것 같아요. 끌어안아야 하는 짐, 부담처럼 보이는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저는 20년 가까이 한국에 살고 있고, 또 한국인으로 살고 싶은데 말이에요.” (주영애)

주영애 씨와 나랑체첵 씨는 그동안 진행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지금은 그곳의 직원이 되어 일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다문화사업에 대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생긴 지 10년이 되었거든요. 저는 센터가 처음 생길 때부터 이용해왔어요. 센터는, 열악한 환경에서 코리안드림을 위해 한국에 온 사람들을 끌어안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한국 사람답게 만들기 위한 곳이라고 봐요. 그런데 자국민도 잘 챙기지 못하면서 왜 외국인에게 예산 낭비하냐고, 역차별 아니냐고, 한국인들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데 왜 이주여성 일자리만 지원하냐며 반대의견이 나올 때는 너무 속상합니다.” (주영애)

▲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홈페이지(namyangjusi.liveinkorea.kr)

▲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홈페이지(http://namyangjusi.liveinkorea.kr)


눈치, 성과 압박, 해고의 두려움… 한국의 사회생활

구제대상으로 들어와서 한국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사회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보는 것 같다며 주영애씨는 토로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일하게 되면서 왜 외국인에게까지 일자리 주냐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당시에는 소극적으로 대처했는데요. 속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각각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일하는 외국인 직원은 1~2명이지만, 한국인 직원은 더 많다고요. 즉, 우리 같은 사람들 일자리가 한 개 생기면, 한국인들 일자리도 덩달아 더 많이 늘어나는 게 아닌가’라고요.” (주영애)

곱지 않은 시선에다 엄청난 경쟁률까지 뚫고 하게 된 통번역사 일이 할 만한지 물었다. 녹록지 않다는 표정이 두 사람의 얼굴을 스쳤다.

“통번역사 제도는 2009년부터 시작됐어요. 현재 전국에 300여 명의 (이주여성)통번역사가 있는데, 근무 기간이 짧아요. 우선 한국인들 속에서 적응하기가 어려워요. 행정업무 처리하기도 어렵고, 통번역 외에 센터의 다른 사업도 해야 하고요.” (나랑체첵)

‘일자리는 좋은데, 사회생활 자체가 어렵다’고 나랑체첵씨는 표현했다.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했다.

“우리는 눈치 없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주영애)

“그건 저도 인정해요.(웃음)” (나랑체첵)

한국의 사회생활에서 규정이나 매뉴얼보다 중요하다는 ‘눈치껏 잘하기’. 이들에게는 생소하고 어려운 문화인 것이다.

“직장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느껴요. 중국이나 몽골은 수평관계인데, 한국은 수직관계인 거 같습니다. 눈치로 배워야 하는 게 많아요. 이런 부분은 아직도 어렵죠.” (주영애)

“저는 행정적인 부분이 제일 어렵고 힘들었어요. 뭐 하나 하려면 기획서, 보고서 등 써야 할 게 엄청 많아서 처음엔 엄청 어려웠어요. 물론 하면서 엄청 성장했지만요.(웃음)” (나랑체첵)

눈치로 시작된 이야기는 일자리 처우 개선까지 이어졌다. 6년째인데 막내처럼 일해서 답답한 점, 최저임금이 안돼서 8시간에서 7시간 근무로 바뀌었지만 업무량은 여전하다는 점, 그런데도 성과는 전년 대비 늘 좋아야 한다는 점, 평가를 통해 하위 10%는 재계약에서 탈락하기 때문에 압박도 많다는 점 등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꿈에 그리던 ‘사무직’이고, ‘배울 수도 있는’ 일인데 유지하기 어려운 게 안타깝다고 두 사람은 말한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사는 주영애 씨는 출근하는 데만 2시간 남짓 걸린다. 무려 4시간 가까이 걸리는 시간을 감수하며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한국 오고 20년 동안 안 해본 일 없을 정도로 고생했다며 눈시울을 붉히더니 대답했다.

“전문직을 선호해서 이곳으로 왔어요.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 고려했다면 안 왔을 거예요. 지금까지 일한 곳 중 여기 급여가 제일 적으니까요. 그간 한국 생활을 하며 어려움을 겪은 한 사람으로, 다른 다문화가족에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주영애)

“한국 처음 왔을 때 남편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남편은 좋은 사람 찾아가라고 했지만, 나는 젊었으니 닥치는 대로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느냐 말하고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하지만 어려운 건 어려운 거더라고요. 그러다 통번역사 기회가 와서 정말 기뻤어요.” (나랑체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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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선배로 이끌고 다독여주기

한국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무척 어려웠지만 자신들은 그 단계를 넘어 여기까지 왔으니,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갈 이주여성을 돕는 일을 하고 싶고 또 잘할 수 있다고 했다.

“결혼이민자들의 입장을 잘 알고 있고, 시행착오도 먼저 겪었으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크죠. 또 그들 입장에서도 우리가 다가가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요? 제 도움을 받은 사람이 고마워하거나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저 자신이 쓸모있는 사람으로 느껴져요. 그게 가장 큰 보람이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죠.” (나랑체첵)

“저는 (통번역사 일을 한 지) 만 3년 차에 접어들었는데 그동안의 저 자신을 평가하자면, 놀랄 만큼 많은 성장을 했다는 거예요. 가장 값진 건 한국에서 직장다운 직장을 처음 가지게 된 거죠. 이전에 15년 일했던 것 이상의 의미가 있어요.” (주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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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다문화가정 서포터’ 회의 모습. 서포터들은 이주여성들이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돕는다.

두 사람은,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겪었지만 한국에 잘 정착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다른 이주민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제가 느끼는 보람은, 고통의 시기를 겪고 있는 이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앞에서 줄을 끌어주는 것 같은 느낌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사람들에게 제가 교훈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영애)

경기도의 경우, 이주여성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이용률은 18% 정도다. 두 사람은 숨어있다시피 하는 여성들을 발굴해서 연결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은행, 버스 이용 등의 생활 지원을 하고요.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어요. 제일 중요한 건 잘 안아주고 다독여주는 것인데, 제가 결혼이민 선배다 보니 정보도 많이 주려 하고 잘 이해해주니 많이들 따라오시더라고요.” (나랑체첵)

“작년부터 검정고시반을 맡아서 하고 있어요. 15명이 참여해서 11명이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졸업장을 수여했는데요. 다들 마치 대학 학사학위를 받는 것처럼 기뻐하시더라고요. 덩달아 저도 뿌듯했죠.” (주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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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검정고시반’ 주말 스터디


실질적으로 무언가 할 수 있도록

결혼이주여성들이 목말라 하는 정보 대부분은 취업과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취업도 중요하지만 언어나 한국의 문화를 먼저 익히는 게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에 관해 물었다.

“물론 언어도 중요하죠. 하지만 오셔서 맞벌이해야 하는 분들도 있어요. 빨리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겠죠. 그분에게 중요한 것은 언어보다 돈인 거죠.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그 사람의 사정이고 상황이라고 생각했으면 해요. 그리고 돈을 벌다 보면 한국어가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에 결국 언어를 배우러 오게 돼요. 이 지역만 해도 (이주여성의) 50% 이상이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해요.” (나랑체첵)

그렇다고 돈을 달라거나 특별한 것을 지원해달라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무언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이주여성의 가정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데에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주여성이 일자리 찾기는 어렵고, 그렇게 되면 남편이 혼자 돈을 벌어야 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혼자 돈 벌고, 거기에 아이까지 있으면 힘들어요. 가정에 불화가 생길 가능성도 크고요. 이주여성들은 점점 자신이 없어지고, 한국 사회에서 일어설 기회가 없어지는 거죠.” (나랑체첵)

“아이가 있는 분들은 긴 시간 일하지 못합니다. 시간 짧은 것, 아르바이트 같은 것을 하고자 해요. 그래서 시간을 탄력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봐요.” (주영애)

높은 취업 욕구보다 준비와 노력이 부족한 이주여성들도 물론 있다. 두 사람은, 당장은 아니어도 장기적으로 실질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꾸준한 취업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결혼이민자분들이 아예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에요. 결혼이주여성이 도망가는 사례 등은 좋지 않은 여론을 만들고 큰 화젯거리가 돼요. 하지만 잘하고 계신 분들도 많아요. 저는 모든 게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몇 년이 지나면 적응하고 한국 사람이 되잖아요. 가끔 다문화정책이 잘 되고 있나 의문이 들 때가 있는데요. 숫자와 실적에만 매몰되기 때문이죠. 실제 도움이 되지 않는 사업을 한다거나, 매번 오는 사람들만 지원받을 때도 그렇죠. 많은 사람이 동등하게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해요.” (나랑체첵)

다문화 체감도 높이고 다름 인정하는 태도 필요해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다문화에 대한 인식은 이중적이다. 인터넷에 난무하는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댓글들이 보여주는 한 면과 공식적으로 나타나는 대체로 신중하고 호의적인 인식조사 결과가 또 다른 한 면이다. 2015년 서울서베이를 보면, 자녀의 외국인과 결혼, 외국인 친구, 외국인 이웃 등에 대한 태도는 종합적으로 60%가 호의적이었고, 결혼이민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 해소에는 50.9%가 긍정적이었고, 일자리를 뺏긴다는 우려는 40.5%였다. 여기에 대해 주영애 씨와 나랑체첵 씨는 여전히 낮은 다문화 체감도를 높이고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람은 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다름을 인정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결혼이민자들이 이렇다저렇다 이야기하지 말고, 그 상태 그대로 다름을 인정해주고, 다르면 이상하게 취급하는 시선만 아니었으면 해요. 그리고 잘 적응해서 성공하고, 잘 살아가는 본보기라고나 할까, 이런 사례를 자주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주영애)

“저도 예전에는 외국인인 걸 숨기고 싶을 정도로 조용히 지낸 적이 있어요. 시선 자체가 차가워서 자꾸 주눅이 들었어요. 물론 지금은 숨기지 않고 말하죠. 이건 제가 지금 당당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갑자기 당당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나랑체첵)

주영애 씨는 공교육에 진입하지 못하는 중도입국자녀가 너무 많다며, 이들을 잘 끌어안고 한국문화에 잘 융화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회와 역할을 주고 함께 성장할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옆집에 베트남 사람이 와서 살지만 모르는 경우도 많아요. 다문화가 무슨 상관이냐고 하지만 학교와 직장을 살펴보면 다문화가족 출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출산시대라고 하는데, 다문화가족은 다둥이인 경우가 많아요. 여기에 중도입국자녀들도 있는데, 이 아이들이 적응 못 하는 경우가 수두룩해요. 사람들이 체감을 못 하는 게 이런 것들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인 것 같아요. 중도입국자녀가 한국사회에 문젯거리로 전락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나만 안전하면 된다고 하지만, 안전지대가 없어질 수도 있어요. 이들이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지 않게 하려면 지금 잘 해야 합니다.” (주영애)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차별과 배척의 시선만을 느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제도와 지원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있지만, 무엇보다 따뜻했던 것은 처음 접했던 한국인들의 도움이었다.

“제 아이 역시 중도입국자녀예요. 적응을 굉장히 힘들어했어요. 지금 같으면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을 이용했겠지만, 10년 전에는 그런 게 없었잖아요. 그러다 한국 아주머니와 대학생들이 외국인 근로자와 학생들에게 한국어 가르치는 행사가 있다고 해서 아들과 함께 갔어요. 열정적으로 가르쳐주는 걸 보고 ‘한국 사람들이 무조건 외국인을 싫어하는 게 아니구나’,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엄마 말은 안 듣던 아들이 그때 한국어 가르치던 누나 말은 잘 들어서, 지금도 연락을 하더라고요.” (주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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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인터뷰가 희망제작소 뉴스레터에 실린다고 하자, 나랑체첵 씨는 어떤 사람들이 독자냐고 물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관심 가진 분들이라고 답하니,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고 했다.

“이주민들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눈치가 없어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웃음) 한국 사람처럼 행동하길 바라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일률적인 행동을 기대하지는 않았으면 해요. 우리는 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같아지려 해도 시간이 걸리지만, 같아지려 하는 게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이주민들의) 문화도 존중해주길 바라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런 한국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랑체첵)

이주민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늘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앞으로 살고 싶은 나라가 어떤 곳인지 먼저 물어야 한다. 이주민들이 한국에서 살면서 많은 시간 고민하는 것은, ‘한국인이냐, 아니냐’보다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것, 성장하는 것, 보람을 느끼고 이 사회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혼란스러운 시절을 살아가는 여느 한국인의 모습,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뷰 진행 : 이은경 사회의제팀 팀장 · [email protected]
녹취 및 정리 : 이은경 사회의제팀 팀장 · [email protected]
녹취 및 정리 : 최은영 미디어홍보팀 연구원 · [email protected]

* 인터뷰 참여자의 요청으로 개인 사진은 게재하지 않습니다.

월, 2016/11/0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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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술을 좋아하고, 누구는 먹는 걸 좋아하고, 누구는 ‘멍 때리기’를 좋아한다. 저마다 제각각인 사람들이 민변에서 만나 “아무것도 없이, 우리 돈 내 가면서” 공익인권변호사모임을 만들었다.

그게 벌써 5년, 6명이 모여 시작했던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이하 희망법)이 어느덧 변호사 8명에 상근자 2명까지 10명의 식구를 꾸렸다. 이제 집회와 표현의 자유 팀을 새로 꾸려 한 번 더 발돋움을 준비하고, 이를 위해 후원주점도 열었다. 지난 10월 22일 열린 희망법 후원주점 ‘바람막이’ 현장에서 만난 8명의 민변 회원들에게 각자의 ‘희망법’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희망법을 만든 것 자체가 사건

처음 시작했을 때는 이렇게 멀리 달려올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특정 인권 영역에 집중하는 단체도 아니고, 특별히 오래 버틸만한 탄탄한 기반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한가람 변호사는 “민변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해보려는 자체, (희망법을) 만들었던 과정 자체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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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선영 변호사

희망법 구성원들에게 희망법은 직장 혹은 활동의 베이스캠프 이상의 의미다. 한가람 변호사는 희망법이 “월급 주는 데이기도 하고, 내 새끼이면서 분신”이라고 말했다. 서선영 변호사는 ‘1차 집단’이라고 표현했다. 가족, 친구 등 1차 집단은 비교적 영구적이고, 친밀하며, 개인의 성격과 개성에 깊이 관여한다. 그런 면에서 서선영 변호사의 표현은 가장 적절한 말 같아 보였다. “보통 직장이 가족 같다는 말은 되게 안 좋은 말이잖아요? 그런 말이 아니고, 저의 정서, 감정, 고민, 생각, 이런 것들이 다 들어있는 곳이 희망법인 것 같아요.”

김동현 변호사는 구성원들에게 낯 간지러운 애정표현을 자주 한다. 그에게 희망법은 “정말 제가 존경하는, 함께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그런 분들”과 함께 일할 수 있게 해 준 공간이다. 희망법을 처음 만들고 3-4년 쯤 지난 어느 날, 목욕탕에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단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 이렇게 존경스러운 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알고 나와 같이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래서 술 마시다가도 갑자기 “저는 여러분이 너무 사랑스러워요”라고 고백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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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주점 벽에 붙어있던 희망법의 활동 모습을 담은 사진들

희망법은 장애, 성별지향·성적 정체성(SOGI), 기업과 인권 분야에 대해 팀을 구성해 집중적인 활동을 펼쳐왔다. 장애 분야에서는 장애인의 선거 참여 기회 확대를 위해 장애인 기표소 개선 등을 요구하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응시하는 시각장애인이 독서확대기를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축소본 시험지를 제공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광주광역시 교육청이 교원임용고시에 응시한 뇌병변장애인에게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은 채 부적격 판정을 내리고 불합격 처리한 일을 중심으로 공무원 시험에서 장애인 응시자에게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고 있는 상황을 개선하려는 일련의 소송도 진행 중이다.

SOGI 팀은 국내법 중 유일하게 동성애를 처벌하는 규정인 군형법상 ‘추행’죄(제92조의 6)를 폐지하기 위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이 규정에 대해 세 번째 합헌 판결을 내렸지만, 한가람 변호사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 결정의 문제점을 국내뿐만 아니라 유엔 인권기구 등에 알리고, 제20대 국회에서의 폐지운동과 함께 헌법소원을 다시 제기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김조광수-김승환 부부의 동성결혼 신청을 계기로 동성결혼 인정을 요구하는 소송도 진행 중이다.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지난 7월 1심에서 김조광수-김승환 부부의 혼인신고 불수리처분 불복신청을 각하 처분했다. 류민희 변호사를 포함한 변호인단은 앞으로 한 퀴어 부부의 혼인신고 불수리처분 불복신청이 각하될 때마다 2배수의 새로운 퀴어부부를 원고로 소송 당사자들을 늘려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희망법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퀴어 이슈와 관련해 가장 첨예한 법적 다툼을 벌이고 있는 법률가 조직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기업과 인권 분야에서는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일터 괴롭힘’을 정리하고 정의했다. 서선영 변호사는 일터 괴롭힘을 “일터에서 조직적이거나 개인적으로 당하는, 과로나 모욕적인 말 등으로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해치고 존엄을 침해하는 문제”라고 정의했다. <일터 괴롭힘: 사냥감이 된 사람들>이라는 책도 내놓았다. 여러 인권단체와 1년간 세미나를 통해 연구하고 공부한 내용을 서선영, 이종희 변호사와 인권연구소 ‘창’의 류은숙 활동가가 함께 정리했다. 국내사례로 일터 괴롭힘을 정의하고 제시하는 첫 번째 책이다.

포털사이트 ‘Daum’이 운영하는 컨텐츠 크라우드 펀딩 ‘스토리펀딩’을 통해 연재된 일터 괴롭힘의 사례에 시민들은 너도나도 공감을 표시했다. 이종희 변호사는 “민변 총회에서 서선영 변호사님이 <일터 괴롭힘: 사냥감이 된 사람들> 책을 팔았는데, 100권 다 팔렸다고 한다”며 감사를 전했다.

사람은 적지만 캐릭터는 제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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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법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맑음’과 ‘무엇을 맡을지 찾고 있다’고 밝힌 김재왕(좌), 최현정(우) 변호사

희망법 구성원들에게 각자 자신이 희망법에서 하고 있는 역할이 무엇인 것 같냐고 물었다. 대답은 저마다 제각각이라, 김재왕 변호사는 ‘해맑음’을, 이종희 변호사는 ‘모범’을 담당하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최현정 변호사는 김재왕 변호사를 보며 “나는 아직 희망법에서 무엇을 담당할지 찾고 있어.”라고, 조곤조곤하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조그만 모임에서 많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지만 캐릭터는 제각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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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맞이로 분주하게 일하는 이종희(위), 조혜인(아래) 변호사

이종희 변호사는 정해진 ‘매뉴얼’을 잘 지킨다. 후원주점 티켓을 팔라면 팔아오고, 서류에 무언가를 기록하고 기입해두라고 시키면 그대로 한다. 꿈도 모범적이다. “변호사로서 좀 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또 단체 활동가로서 기획이나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업무를 더 잘 이해하고 싶다”는 꿈이라니. 꿈이 재미없기로는 조혜인 변호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 “SOGI 팀 업무에 대해 변호사들이 해야 하는 일을 좀 더 잘 담당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앞으로 이 분야에서 후배 변호사들이 어떻게 하면 잘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별명이 ‘잔더’, 사실 ‘한잔더’라고 밝힌 서선영 변호사의 꿈은 희망법에 있는 동안 한 번이라도 ‘혼돈의 카오스’ 상태인 책상을 깨끗하게 치우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김재왕 변호사는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다”고 맞장구쳤다. 스스로를 ‘시리어스 앤 볼링 맨(Serious and Boring man)’이라고 소개한 김동현 변호사는 “제가 올해 대표를 맡고 있는데, 다시는 대표를 하고 싶지 않다”며 “대표 아닌 구성원으로 계속 있고 싶다”고 말했다.

희망법의 발돋움, 후원주점

희망법은 앞으로 집회의 자유팀을 신설하여 운영할 계획이다. 서선영 변호사는 “희망법에서 집회 관련 업무를 계속 하고 있었는데 관련 팀이 없다 보니 다른 업무처럼 집중적으로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며 앞으로 집회의 자유를 변호하는데 좀 더 역량을 투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민변에서 공식 모임은 아니지만 집회의 자유 연구 모임이 생겨서 함께 연구할 계획”이고, 앞으로 소송과 연구들을 모아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계획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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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주점을 찾은 희망법의 친구들

장애와 인권 영역을 전담하는 변호사 한 사람과 사무국 상근자 두 사람이 새로 희망법의 식구가 됐다. 팀을 신설하고 구성원을 확충하는 과정에서 재정적 어려움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김재왕 변호사는 “대외적으로는 ‘든든한 둥지’이지만, 속마음으로는 언제 망할지 모르는 불안한 둥지”라고 농담했다. 한가람 변호사 역시 “희망법에서 이루고 싶은 꿈은 월급날 돈 걱정 없이 월급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꿈”이라며 “사실 (아직까지) 그런 날이 없었다”고 말했다. 가뜩이나 아슬아슬한 재정에 새 식구와 새 사업은 큰 부담이 된다.

그래서 새 식구로 합류한 김광민 모금사무국장이 희망법 창립 후 첫 후원주점을 기획했다. 늦가을이지만 아직 단풍은 그저 그런, 대신 날이 선선해 잔디밭에 테이블 깔고 좋은 사람들과 맥주 한 잔이 참 잘 어울리는 토요일. 희망법이 입주해 있는 서울 불광동 서울혁신파크에서 희망법 후원주점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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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변호사

옛 질병관리본부가 있었던 이 자리는 박원순 시장의 주도 하에 2013년부터 다양한 사회적 혁신을 실험하는 ‘서울혁신파크’로 변신했다.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한 북한산 등산객들의 ‘핫 플레이스’였던 이곳에 청년들이 하나둘씩 드나들기 시작했다. 희망법도 지난해 이곳으로 둥지를 옮겼다.

커다란 대강당 전체에 테이블을 놓고 분홍 체크무늬 테이블보를 깔았다. 주문벨은 없지만 흔들면 빛이 반짝거리는 잭오랜턴을 테이블마다 두었다. 호스트인 희망법 구성원들과 서빙을 담당한 자원활동가들은 모두 머리에 하얀 물방울무늬가 박힌 커다란 리본 머리띠를 썼다. “없는 게 메리트라네 난, 있는 게 젊음이라네 난”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어디 유명한 맛집 같은 메리트는 없지만 사랑스러움과 센스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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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하게 손님들의 주문을 받고 있는 최현정 변호사

4시쯤 아직 한산했던 후원주점이 오후 5시를 넘기자 슬슬 손님으로 바글바글해진다. 대강당 실내와 쪽문 너머 잔디밭이 모두 손님으로 꽉꽉 들어찼다. ‘입추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까진 아니지만 빈 테이블은 없다. 머리에 리본 머리띠를 쓴 자원봉사자들이 잭오랜턴이 반짝일 때마다 테이블 사이를 바쁘게 누빈다. 희망법 구성원들도 호스트로 손님을 맞고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사람, 음식 준비와 서빙으로 정신없는 사람, 제각각이다. 재미난 점은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주방에서 일하는 것이 편해 보이고, 호스트 역할을 맡아 손님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그게 더 편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하루 후원주점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수많은 일 중 각자 자기가 가장 편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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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를 돌이켜보는 한가람 변호사

희망법의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어울려 술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짧아진 가을 해가 저문다. 으슬으슬 춥다는 사람도 많지만 민변 사무처 식구들도 뒤늦게 합류하는 친구들을 기다리며 밤이 늦도록 자리를 지켰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얼굴은 계속 바뀌지만 모두 민변 식구들이다.

후원주점이 문을 닫는 10시를 넘기자 희망법 구성원 모두가 무대 앞으로 나와 감사인사를 전했다. 새 구성원 김광민 사무국장도 희망법의 친구들 앞에 소개했다. 이날 하루를 즐겁게 보낸 손님들이 저마다 작별인사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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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말한 류민희(좌), 한가람(우) 변호사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운 행사였다. 류민희 변호사는 “희망법은 회원 커뮤니티가 끈끈한 조직이 아니라 이벤트의 성공 가능성 자체를 좀 회의적으로 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희망법의 후원주점은 마음만으로는 대성공인 듯하다. 날이 점점 쌀쌀해지는 밤까지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뜨지 않고 술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현정 변호사는 “‘안 오지 않을까’, ‘오기 힘들 거야’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왔던 게 가장 마음에 남는다”며 “광주에서 여기까지 와준 로스쿨 친구가 있었다”고 고마움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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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과 이야기 나누는 류민희 변호사

류민희 변호사는 “희망법은 한 가지 권리에 집중하는 단체가 아니라서 특정한 권리에 집중해서 활동하는 단체보다 회원 커뮤니티가 약하다”며 “저희가 일하는 영역에서 함께하는 동료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거 자체가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결산 결과를 떠나서 오늘 행사는 성공이라고도 평가했다. “너희가 있어서 다행이다, 이 말이 많이 고마웠다”고 한다. 한가람 변호사 역시 “수지는 좀 더 계산해봐야 할 것 같지만 이것 자체로 행복하다”는 류민희 변호사의 말에 “완전히 똑같은 생각”이라고 공감을 표시했다.

후원주점에 처음 들어섰을 때, 손님을 맞고 있던 김광민 사무국장이 명함을 건넸다. 엠보싱 후가공으로 점자 표기가 붙어있다. 반사적으로 ‘엠보싱 후가공 비용 장난 아닐 텐데’라는 생각부터 든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서는 명함 등에 점자를 표기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형압 가공이든 엠보싱이든 인쇄물에 점자를 표기하는 후가공 방법은 인쇄물 제작비용을 두세 배로 늘려버리기 일쑤다. 어쩌면 이 명함이 희망법을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꼭 가야 하지만 좁은 길, 남들 가는 길보다 두 배 세 배 어려운 길일지도 모르는 길을 즐겁게 가는 사람들과 이들의 즐거운 친구들. 읽지도 못하는 점자를 오랫동안 만지작거려본다.

목, 2016/10/27-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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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변 대 담: 선배에게 길을 묻다

민변 회원이 1,100명에 이르렀다. 누군가는 아프니까 청춘이라지만 아픈 청춘을 겨우 버텨냈더니 혹독한 청년 변호사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티도 낼 수 없다. 난 변호사니까. 그런데 또 막막하다. 이럴 때 따스한 봄밤의 북두칠성 같은 길잡이가 나타나 길을 헤매지 않도록 안내해주고, 속내도 시원스레 얘기해 주는 선배가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민변 회원이 늘어난 만큼 같은 고민, 같은 궁금증을 가진 후배들이 부쩍 늘어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준비했다. 선후배 대담, “선배에게 길을 묻다”

chapter1. 선배 [先輩] : 지위, 나이, 덕행, 경험 등이 자기보다 앞서거나 높은 사람

태양마저도 녹아버릴 것 같은 타는 여름의 한 가운데에서 선·후배 변호사 4명이 어색하게 마주 앉았다. 류신환, 조숙현(연수원 30기) 변호사와 이 두 선배를 만나러 온 후배 심재섭(연수원 44기), 김경은(변시 5회) 변호사는 민변에 대해서도, 선배들에 대해서도, 변호사의 업무와 일과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들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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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섭(이하 심): 저는 홍대 앞에서 사무실을 개업했습니다. ‘법률사무소 단’이라고, 딸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임신 중이었던 아내랑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합정동 카페거리 근처까지 갔는데 비가 내려서 거리 분위기가 참 운치 있고 좋더라고요. 그런 동네라면 출근할 맛이 나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아내랑 “여기로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아직은 철이 없어서 그런지 수입에 대해 크게 마음이 초조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선배 변호사들이 종종 “수임료를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 같은 조언을 해주시는데 아직 수임료나 수입 면에서 그 정도에 미치지는 않습니다. 강문대 사무총장님이 커피를 사주시면서 “자네, 월급 500만 원은 가져가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뭔가 잘못된 거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아직까진 계속 잘못되어있는 거 같습니다(웃음)

류신환(이하 류): 저는 공익법무관 생활을 하고 2004년부터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거든요. 저는 취업을 해서 고용변호사로 시작했어요. 저는 고용이 안 되면 개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내가 개업해서 잘 할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해보면 아니었을 거 같아요. 지금은 내가 개업을 하면 잘 할 것 같은데, 그때는 아니었어요. 이렇게 말하면 조금 미안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사실 개업 변호사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취업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면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어떤 버팀목 같은 게 있는 것과 같아요. 심 변호사가 나보다 훨씬 더 독립적으로 잘 크고 있는 거지.

김경은(이하 김): 저는 변호사시험 5회 합격하고 대한변협에서 연수를 받다가 지금은 법무법인 향법에서 실무수습으로 3일째 일하고 있어요. 지금 현재로서는 고용으로 취직을 생각하고 있는데 변호사님 말씀 들으니까 저도 개업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거 같네요.(웃음)

저는 여성위원회 활동 하면서 조숙현 변호사님을 많이 만나 뵙고 있어요. 그런데 민변의 선배 변호사들을 만나고 대하는 것이 어렵더라구요. 잘못했을 때는 ‘혼나면 어떡하지?’하는 생각도 들고….

조숙현(이하 조): 그럼 혼나면 돼.(일동 웃음)

김: 그게 무서우니까…….(웃음) 아무튼 민변 선배님들과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는지 궁금해요.

조: 그게 어렵지. 여성위 엠티를 안와서 그래요.(웃음) 우리가 힘든 일을 하고 있으니까 마음이 안 좋고, 회의 때 모니터링 하면 이상한 댓글들 읽고 있어야 하고, 그러니까 회의 때는 표정들이 안 좋아져요. 그런데 MT나 송년회 같은 친목 행사 자리에서 후배들을 보면 평소에 사건들을 통해서 만나는 것보다 편하죠. ‘실수하면 어떡하지’ 하는 건…… 실수를 안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실수를 하면 지적도 받고, 선배들도 다들 그렇게 실수하면서 컸어요.

김: 최근에 강남역 사건 관련해서 선배 변호사께서 저한테 경찰에 제출한 서류의 복사를 맡기셨어요. 그런데 제가 컴퓨터에 파일로 저장되어있는 서류를 굳이 복사해서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를 못해서 그걸 안 한 거예요. 그러다가 갑자기 그 분이 경찰에 제출한 서류의 사본이 필요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런 실수를 하고 나면 저 때문에 선배 변호사들의 일이 많아지니까 죄송한 생각이 들어요.

조: 그럼 ‘최종 제출본의 사본을 내가 꼭 갖고 있어야하는구나’라는 사실을 하나 배운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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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사실은 변호사라는 게 사건들이 쌓여가면서 시야가 더 넓어지는 거 같아요. 우리가 이전에 법률공부를 하고 실무공부를 하고 했지만 그건 그야말로 공부 수준에 있는 거고 이게 내 걸로 만들기 위해서는 현실에서의 숙련이 필요한 거죠. 변호사 업무 했을 때 많아봐야 1년에 몇십 건이나 하겠어요? 그 중에는 법률적인 내용이 서로 겹치는 사건도 많고, 변호사가 하는 일 중엔 굉장히 간단하고 단순한 업무도 많잖아요. 사실은 우리가 배웠던 많은 법적 이슈들을 실제로 경험하는 건 많지 않다고요. 제일 좋은 건 내가 사건을 맡아서 깊이 공부하는 거죠. 그 사건과 연관된 다른 판례들을 열심히 공부해보고, 이 사건에서 이 부분을 어떻게 하면 결과가 어떻게 달라질지 스스로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이 제일 좋은데 또 공부나 경험이 부족하면 그것 자체도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법률신문 추천해요. 판례공보는 판례 자체니까 잘 안 들어오잖아요. 그런데 법률신문은 기사 형식으로 제공하니까 좀 더 실감나고 흥미 있게 읽을 수 있어요. 법률신문 일주일에 두 번 나오는데 굉장히 많은 사건들이 나오거든요. 그걸 잘 공부하면 베스트지만 이런 사건이 있구나, 이런 법적 문제가 있구나 하는 것만이라도 차곡차곡 쌓아두면 몇 년이 지나면 어느새 자기가 확 달라져있는 걸 느낄걸요.

chapter2. 자랑과 멀미

심: 저는 선배님들 자랑하는 게 되게 듣고 싶어요. 사실 저는 자랑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후배들 만나면 엄청 뻥튀기 하면서 허풍을 치기도 하고요. 가끔 판결 잘 받은 거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거 사무실 책상에 쓱 올려뒀다가 “아니 뭐 이런 걸” 하고 시치미 떼고 그래요(웃음). 저는 아직 젊고, 후배들하고 나이 차이도 많이 안 나는데도 가끔 후배가 어린애처럼 보일 때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민변에서 강연하시는 선배님들은 저한테는 정말 높은 선배님인데 꼬박꼬박 존댓말 해주시고, “원래 그런 사건이고 저는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모두 이렇게만 말씀하시면 어떻게 ‘드라마’가 탄생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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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사건이 잘 마무리되어도 내가 잘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생각은 잘 안 드는 거 같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일을 하면서 ‘결과가 잘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좀 더 많이 드는 사건은 ‘내가 뭔가 부족하지 않았을까?’ 라는 걱정이 많이 들고요.

지금까지 일을 하면서 기분 좋은 경험으로 남아있는 건 이혼사건이었는데 4살 정도 되는 아이를 남편이 데리고 있으면서 아이를 못 만나게 하는 상황이었어요. 엄마는 이 아이를 데려오고 싶다는 의지가 굉장히 강했고요.

우리나라 재판 경향이 이혼소송과 별거 기간 중에 양육하고 있는 측이 주양육자가 되도록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처음에 사전처분 자체에서 굉장히 이례적으로 면접교섭을 길게 하면서 재판 결과 엄마가 양육자 지정을 받았어요. 처음 사건을 시작할 때 이 사람의 모습은 아이를 뺏기고 힘든 결혼생활을 보냈던 것 때문에 너무 핼쑥하고 초췌했거든요. 재판이 애가 5살 때 시작해서 초등학교 입학할 때 끝났어요. 근데 아이를 데리고 오고 나니까 얼굴이 정말 화사하게 피는 거예요. 그 사람 재판 끝나고도 2년에 한 번씩 찾아오고 그랬어요. 어떤 사람의 인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게 되게 기분 좋았어요.

심: 그러고 나면 자랑하고 싶은 생각 안 드세요? 저는 무죄 판결 받으면 연수원 교수님들한테 자랑하고 그러거든요. 검찰 교수님한테 교수님 어제 누구 검사 장난 아니었다고 위로해달라고, 잘 키웠다고 칭찬해주시라고 그러고. 저희 아내는 법조계가 아니니까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잘 모르거든요.

조: 사건이 하나 끝나고 나면 그 사건 관련 기록을 볼 때마다 멀미가 나요. 사건이 상고심쯤 가면 사건 자료를 보면서도 그렇고요. 가끔 여성위에서 옛날에 있었던 사건을 가지고 월례회를 할 때가 있는데 끝난 지 얼마 안 된 사건을 보면 속이 울렁울렁하고 그래요.

chapter3. 민변은 괴로워(?)

심: 변호사로서 일하면서 민변인 걸 드러내는 게 불편했던 적이 있나요? 전 가끔 관공서를 갈 일이 있거나 그러면 신경 쓰이거든요.

류: 전 직장에 있을 때 큰 기업들이 클라이언트일 때가 많았어요. 그때 우리 사무실이 민변 계열의 사무실, 민변 회원이 많은 사무실이라고 인식되는 게 싫었어요. ‘민변=반 기업’이라고 사회적으로 오인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럴 때는 위축됐죠. 민변이 아니라고 거짓말하지는 않지만 언급을 안 할 때가 많았어요.

심: 요즘은 그냥 검색 같은걸 많이 하더라고요. 작년에는 특히 더 민감했는데, 사건 하나하나가 아쉬운 상황에서 할아버지들이 검색해 보시고 전화하시고 그랬거든요. 최근엔 그런 전화 하시는 분들은 어차피 나한테 사건을 의뢰할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조: 어차피 변호사 업무를 하면서 민변 관련된 사람만 만나는 건 아니니까요. 나는 민변 활동을 비공개로 하는 회원들도 존중해요. 민변 활동을 공개적으로 하면 직장을 떠나야 할 수도 있으니까. 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정도의 활동을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류: 오히려 그런 경우도 있지 않나? “민변 변호산데 이런 식으로 해도 되냐” 라는 식으로.

조: 나는 공익 사건을 무료 혹은 저가로 생각하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공익적인 의미가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무료 변론을 해야 할 필요는 없어요. 그 사람이 지불할 만한 능력이 있으면 당당하게 요구해야 해요. 정말 사회적 의미가 있어서, 그 사람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이거나 제도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돈을 받지 않더라도 그 일을 하겠다는 결의가 있다면 하면 돼요. 하지만 나한테 너무 무리가 되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특히 어느 정도 지불능력이 있는 공익 재단들이 장애, 여성, 아동, 노동과 관련된 일이라는 이유로 긴급한 구조가 필요한 영역이 아닌데도 무료자문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그런 식으로 변호사들의 공익활동이 이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혜정(이하 이): 혹시 공익 사건을 하면서 사람들로 인해 실망하거나 상처받은 적은 없나요? 제가 최근 그런 일이 있어서요. 촛불집회 사건이었는데, 1심에서 유죄 받은 것을 제가 항소심 맡아 정말 열심히 해서 결국 무죄를 받았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1심이 어떻고, 자기는 집회에 참여 안했다는 등 유독 집착이 심한 분이어서 법정에서도 제 서면과 다른 얘기를 하고…무죄는 받았지만 1심, 2심 모두 그 사람이 집회참여는 증거로 인정했는데 그게 잘못 됐다고 무죄 받고도 언성 높이며 따지는 거예요. 고맙다는 말은커녕 실랑이를 하게 되니 제가 참다 못 해 전화를 끊었어요. 그러고 나니 심장이 막 뛰고 한동안 일도 손에 안 잡히고…

조: 아니, 그거를 당연하게 생각한 사람이 이상한 거고. 내가 이렇게 엄청난 일을 했다는 걸 알려줘야 돼요.

이: 제가 아직 도량이 안 돼서 그런 사람을 못 다루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류: 그런 사람에게는 보답을 못 받는다는 걸 알아야 해요. 그 보답은 그 사람이 아니라 이 사회의 다른 사람들이 줄 거예요. 보답을 바라는 건 인지상정이지만, 그 보답을 다른 사람들이 받는 보통의 방식으로 받기를 바란다면 그런 보답은 기다려도 오지 않아요. 대신 다른 방식의 보답은 오죠.

심: 가끔은 너무 화가 나서 욕이라도 하고 싶은데, 상대가 제가 민변 변호사라는 걸 알잖아요. 내가 상대에게 욕하는 게 ‘민변이 일반인한테 욕을 한다’ 이런 상황이 될까봐 고민이 들어요.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어요. 간사님 그 진상 있었잖아요?

김서정: 제가 출근 일주일 쯤 됐을 때였는데, 북한 해외식당 탈북 종업원 사건으로 한창 시끄러울 때였거든요. 야근 할 때는 사실 사무처로 오는 전화 안 받아도 되는데, 혼자 야근하다 무심코 전화를 받은 거예요. 그런데 그 분이 너무 진상인 거죠. 끊으면서 화가 나서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혼잣말로 욕을 했는데 마침 심 변호사님이 들으셨어요.

심: 그 사람이 다시 전화를 했길래 제가 받아서 욕을 좀…… 했었나? 근데 끊고 고민이 되는 거예요. ‘아, 이게 내 사무실이 아니었는데……’ (일동 웃음) 그리고 몇 주 뒤에 채희준 위원장님이 탈북자들, 납북자 가족들과 인신구제청구소송 건으로 면담을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는 분명히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민변의 선배 변호사님들은 ‘허허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가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 이런 경우에 일일이 대응하며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어요. ‘전화 끊겠습니다’ 하고 끊으면 돼요. 시민들이 진보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도덕적 너무 높아요. 사소한 걸로 트집이 잡혀서 이상하게 내가 사랑하는 조직에게 피해를 줄 수 있거든요. 그런 상스러운 말에 똑같이 대꾸를 해봐야 나만 힘들어요. 우리가 왠지 상대방 말이 안 끝났는데 끊으면 안 될 것 같잖아요? 그럴 필요 없어요. 욕하면 끊으면 돼요.

chapter4. 우리 서로 친해지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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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사실 민변에 있는 변호사님들은 되게 훌륭하다는 선입견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생각도 사실 편견이죠, 편견. 막연한 존경심 같은 것으로 선배들을 대하다 보니까 어려웠던 것 같아요. 저 선배들이 기대하는 후배가 되고 싶은데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나를 까발려놓고 보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 거지. 아직도 그런 사람이 아니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할 것 같고.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인 것 같고. 그래서 자꾸 회피하고 싶고, 그런 것들이 관계를 더 어렵게 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 돌아보면, 민변에서 민변 회원으로 활동을 한다는 게 꼭 정해진 객관적 기준을 충족해서 인격적으로나 업무적으로 훌륭한 사람들만 하는 것은 아니에요. 어느 면에서나 훌륭하신 분들도 있지만, 꼭 그런 분들만 있는 건 아닌 거죠.

조: 어떤 면에선 다들 훌륭하신 분들이에요. 그런데 그게 어떤 이상향의 존재는 아니라는 거죠. 사람에 대해서 어떤 이상향을 상정해놓고 그 사람을 바라보면 그 사람이 가진 인간적인 부족함이나 그 분이 잘 모르는 어떤 부분에서 갖고 있는 잘못된 생각에 굉장히 큰 배신감을 느끼고 그 사람의 모든 걸 다 부정할 수도 있거든요. 그 선배들은 하나하나가 훌륭한 점이 있어요. 그런데 그게 모든 부분에서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 거죠.

류: 솔직하게 소통하는 게 참 중요한데, 예를 들면 지금 우리 사이에 나이나 경험의 차이가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소통할 준비가 되어있어요. 나이든 세대가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런데 이건 일방적인 열림이고 (젊은 후배들한테) 어떻게 다가가는 게 좋은지 잘 모르죠. 생각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마음 터놓는 게 다르기 때문에 조금 더 노력해야 하는 게 분명하지만 어쨌든 민변 선배들도 후배들이 먼저 다가와주기를 원할 수 있어요. 그걸 알아차려준다면 선배들과 관계를 이어가는 열쇠를 얻은 것과 다름없죠. 우리의 마음을 알아차려준다면. 알아줬으면 좋겠네.(웃음)

조: 어떻게 하면 ‘꼰대’ 소리 듣지 않으면서 후배들하고 친해질 수 있을까. (선배 변호사들도) 그게 고민이죠.(웃음)

심: 저는 선배 변호사 분들이 어려워서, 카톡하시면 사무실 직원 통해서 지금 선배님 통화 가능하신지 여쭤보고 답장하고 그랬거든요. 뭔가 먼저 말씀드리는 게 어렵기도 하고, 또 제가 그 분들이 얼마나 바쁘신지 눈에 보이는데 그냥 연락드리기가 죄송스럽기도 하고요.

조: 후배들이 ‘다나까’ 말투로 이야기하고 경직되게 대하면 좀 거리감을 느끼고, 나한테 다가오지 말라는 메시지로 느껴져요. ‘저 친구는 나이 많은 우리랑은 어울리고 싶지 않구나’(웃음) 하는 마음도 있고.

내가 생각하는 민변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랑 일상적인 이야기까지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점이에요.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사실 많지 않거든요. 그런데 민변에서 말 통하는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만나서 내가 만난 진상 의뢰인들이나 잘못된 정부정책도 욕하고, 아이 키우다 아이랑 싸운 이야기도 하고요, 정기적으로 만나 정말 모든 걸 다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기는 거죠. 최근 들어 후배들이 특히 깍듯하게 대하는데, 내가 나이가 들었나 싶기도 하고 불편해요.

가끔 그냥 무작정 찾아와서 제가 하는 일을 물어보는 친구들이 있어요. 로스쿨 학생이 찾아온 적도 있고, 중학생이 찾아온 적도 있었고. 제 친구 아이들이 중학생 쯤 되면서부터 직업 탐방을 할 때 저를 찾아오는 친구 아이들이 많았거든요. 그게 아니더라도 대개는 부모님을 통해서 찾아오는데. 그 아이는 그냥 나를 검색을 해서 나한테 메일을 보낸 게 너무 기특한 거지. 사실 메일 내용이 다짜고짜 자기가 언제 언제는 연락이 안 되고 문자로만 연락할 수 있다고 그러는데…(웃음) 그런데 그게 너무 예쁜 거예요. 보통 다른 아이들은 부모의 소개로 만나서 면담을 했었지만 직접 알아서 메일을 보내는 그 용기가 너무 좋다고 생각해서 그 친구를 만났었죠.

두 분도, 저희 둘보다 더 위의 선배들에게도 아 저 선배님하고 밥 한번 먹어봤으면 생각이 들면 그냥 메일을 보내요. ‘인사드리고 싶어요’라고 하면 정말 바쁘면 ‘나중에 연락해라’ 라고 하시지 그냥 거절하지는 않으시니까 너무 어려워할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이: 사실 오늘 후배님들이 선배님 만난다고 많은 질문을 준비했는데 한정된 시간 때문에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요. 아쉽긴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마지막으로 각자 소감 한 마디 부탁드릴게요.

류: 저는 언론위원회에서 초년차 후배님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는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후배들과는 그럴 기회가 없었거든요. 오늘 해보니까 ‘소통의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이제 민변 회원이 많으니까 그런 소통이 좀 어려울 수는 있지만 오늘 얘기를 나누고 나니까 ‘나오길 잘했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좋았어요.

조: 선배 자격으로 인터뷰 섭외 연락을 받았을 때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굳이 나를…?’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민변 회원들 중에 중간에서 조금 아래, 이 정도의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정도가 조금 더 편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드네요.(웃음) 오늘 이야기 해보니 ‘후배들이 생각보다 어려워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십년 차는 별로 멀게 느끼지 않고 있었거든요. ‘내가 조금 더 편하게 다가가야 되는구나’ 싶고요, ‘후배들이 생각보다는 나를 더 어렵게 여기는구나’ 하는 반성도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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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저는 민변 활동도 열심히 하고 싶고 선배 변호사 분들하고도 가까워지고 싶긴 한데 선배 변호사 분들을 대하는 데 약간 부담감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두 분 말씀을 들으니까 ‘내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구나, 먼저 다가가야 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 저는 제가 두 분 선배님 년차가 될 때까지 민변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다지 큰 재미도 없고요.

조: 그게 재미있는 거예요.(웃음) 이만한 재미가 있는 데가 없어요.

류: 다른 재미있는 게 없어요, 변호사 활동에.(웃음)

심: 그래서 ‘재미있게 해야지, 노력을 더 해볼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두 분과 말씀 나누면서 보니 크게 부담 갖지 말고 자연스럽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신입회원들이 늘어나면서 민변도, 회원도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소통이 필요함을 느낀 차에 서로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오늘의 자리를 마련했다. 처음의 어색함은 온데간데없이 쏜살같은 시간이 얄미울 정도로 민변의 선후배는 살가웠고, 서로 간의 할 말이 너무 많아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후배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다음 날 너무도 좋은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서로를 위해 한 걸음 다가가려는 노력, 이것이 진정한 소통이 아닐까 한다.

혹시 또 다른 소통의 자리나 참여의 기회를 원하는 회원이 있다면 출판소통팀에 문의해주시길!

금, 2016/08/1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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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돌봄으로 가기위한 한걸음

 

인터뷰 : 김남희(참여연대 복지조세팀장)
패널 : 이경민(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윤지영(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배연희(전국요양보호사협회 협회장)
정리 : 이경민(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도입된지 올해로 8년이다. 그러나 제도 도입 초기, 공공 인프라 구축 없이 시행됨에 따라 서비스 공급에 대한 민간기관 의존도가 높았는데 장기요양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열악한 기관은 소멸될 것이라는 정부의 주장과는 다르게 민간기관이 난립하는 등 불법운영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또한 국가 및 지자체의 관리감독 미흡으로 요양보호사의 노동환경 및 처우는 열악했고, 이는 결국 대상자의 서비스 질 저하 문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고령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의 수혜자는 늘어날 것이며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우리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최근 우여곡절 끝에 장기요양에 대한 국가책임강화, 요양보호사의 처우개선, 기관의 회계기준 마련 등을 골자로 한 노인장기요양보험법 개정안 통과를 이끈 숨은 주역들이 있었다. 그들을 통해 현재 장기요양제도를 진단하고, 좋은 돌봄을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았다.

 

자기소개 부탁한다.

배연희 : 현재 전국요양보호사협회 협회장을 맡고 있다. 전국요양보호사협회는 2008년 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되면서 당사자가 주축이 되어 운영하고 있다.

윤지영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윤지영이다. 공감에서는 주로 노동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불안정한 노동자, 청소년, 이주노동자, 중고령 노동자의 노동문제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경민 :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 주로 보건의료, 돌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된지 벌써 9년째이다.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무엇이 있는가?

배연희 : 법과 제도가 여전히 미흡하다. 특히 방문요양 같은 경우, 임금가이드라인이 없어 시급이 다르고 최저임금 수준도 안 된다. 또한 처우개선비가 있지만 여전히 요양보호사에게 지급하지 않은 곳이 많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상자가 사망하거나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요양보호사는 실직하게 된다. 이처럼 요양보호사의 노동환경 및 처우는 굉장히 열악한 실정이다.

윤지영 :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는 사회보험으로 운영된다. 즉, 노인에 대한 요양을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처음 제도를 설계할 때, 민간에 위탁하면서 민간장기요양기관이 필요이상으로 늘어나고 사회보험 누수현상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요양보호사 같은 경우 불안정한 고용의 형태, 강도 높은 노동 등 노동환경과 처우가 매우 열악하며, 전문가임에도 전문가로 능력을 발휘한다기 보다 국가공익파출부같은 처우를 받고 있는데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이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시행 이후,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19대 국회에서 노인장기요양보험법 개정을 추진했었다. 그 과정에 대해 설명해 달라.

윤지영 :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될 때, 정부는 경쟁을 통해 질을 높이겠다고 했으나그 예상은 빗나갔고 민간기관들의 난립, 그로 인한 부정행위, 요양보호사의 처우문제가 발생하는 등 제도가 엉망이 되었다, 그래서 당사자인 요양보호사협회, 여성단체, 노조 등이 모여 제도의 전면개편을 요구하고자 공대위를 2011년에 꾸렸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의 전면개정을 주장했다.

 

처음 제안한 개정안과 통과된 개정안의 내용이 많이 다르다고 하던데...

윤지영 : 개정안을 만들기 전에 요양보호사 및 당사자, 공단, 기관의 이야기를 들으면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으며 설명회도 진행했다. 그리고 1년 가까이 법안을 만들었고 마침내 의원을 통한 입법발의를 했다. 처음 개정안에는 기관 설립 허가제, 국가와 지자체 책임 강화, 요양보호사 및 대상자의 인권보호를 위해 기관장과 대상자의 책무 강화 등의 내용을 담았었다. 그러나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많은 내용들이 빠졌다.

이경민 : 김성주, 오제세 의원이 발의한 기관의 회계기준 마련에 대한 내용과 조정하면서 빠진 듯하다.

윤지영 : 회계기준 마련 안은 좋다고 생각한다. 공대위가 제시한 안 이외 정부가 발의한 내용이 먼저 통과되면서 조정된 것 같다.

 

개정안이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있을 때, 참여연대가 결합했다.

이경민 : 작년 초 노인장기요양보험법 개정안 통과를 위한 연대 요청이 있었고, 그 때부터 참여연대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공대위에서는 일부 반대하는 의원실 및 지역사무실을 찾아다니며 면담을 하고, 피켓팅을 하였고, 참여연대는 입법로비 및 대중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것은 작년 5월 1일 법사위에 안건이 상정되었는데 노동절 행사에 나가서 계속 법사위 결과를 주목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일부 의원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하고, 그 이후 일 년 넘게 법사위에 상정조차 안됐었다. 의견서를 발표하고 법사위 및 보복위 의원들에게 의견서를 보내고, 홍보물을 만들어 의원들 트위터 및 페이스북에 게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19대 국회 마지막 법사위를 앞두고 반대하는 의원의 실명을 거론한 성명까지 발표하기도 했다.

윤지영 : 민간기관들의 반대가 엄청났다. 개정안이 통과 되지 않을 것 같아 의원들에게 편지를 썼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이며 모든 국민의 이해관계가 달려있는 사안을 특정집단의 반대로 법안 통과를 주저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배연희 : 참여연대가 함께 결합해서 의견서도 내고, 기자회견도 하는 등 더 힘을 모을 수 있었다.

이경민 : 개정안이 통과되기 위해 이 전부터 노력한 요양보호사분들과 공대위의 공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한다.

 

실질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양보호사의 노동 현실은 어떠한가?

배연희 : 인터뷰 전에도 요양보호사들과 상담을 했었다. 요양보호사의 노동환경과 처우는 문제가 많다. 최근 최저임금이 높아지면서 요양보호사의 시간은 줄고 노동일수는 늘어 토요일에도 근무를 하게 되었다. 평균적으로 임금이 5~8만 원정도 줄었다고 한다. 요양보호사들의 평균임금 55만 원인데 여기서 더 줄었다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누가 요양보호사에 대한 직업을 전문직업으로 여기겠는가. 이와 같은 일은 대부분 기관에 대한 관리감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요양보호사의 처우 등에 대해 기관의 재량에 따라 운영되는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그리고 요양보호사의 처우와 노동환경이 열악하고 기관의 이익추구는 결국 서비스 질 저하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인권침해 사례도 많다고 들었다.

배연희 : 방문 요양은 좁은 공간에 여자든 남자든 어르신과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장기요양등급 3급 같은 경우, 혼자 목욕을 시킬 경우가 있는데 그 때 성희롱이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일에 대해 기관에 건의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왜냐면 대상자가 끊기면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일을 하면서 발생하는 일에 대해 요양보호사를 보호하는 창구가 없다.

윤지영 : 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사회에서 여성의 돌봄과 헌신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 제대로 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허드렛일이라고 생각한다. 시설에 근무하는 요양보호사들은 장시간 노동을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재가는 근무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임금이 보장되지 않는다. 현재 시간당 수가가 정해져 있는 바우처 방식이 문제인데, 노동에서 호출형 노동이라고 표현한다. 기관은 공급자로서 안정적인 노동 유지, 그에 대한 대가 지불 등을 해야 하는 책임이 있지만 이에 대해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대부분 요양보호사에게 책임을 떠맡게 된다.

이경민 : 그 뿐만이 아니라 인권문제,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심각하기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면, 사회복지사가 방문상담을 할 때, 특히 남자인 경우 2인 1조가 되어 움직이는 경우가 많은데, 요양보호사에게는 그런 가이드라인이 없다, 성폭력, 성희롱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배연희 : 이런 환경에서 좋은 돌봄이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좋은 돌봄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윤지영 : 시설 같은 경우, 24시간 맞교대 근무가 많은데, 밤은 휴게시간으로 잡아 임금으로 주지 않는다고 들었다. 사실 밤에도 대상자의 상태를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업무를 하고 있는데 말이다.

배연희 : 업무도 굉장히 강도가 높다. 어르신들의 몸무게가 70-80kg인 경우가 많은데, 체위변경을 하려면 50대 이상의 요양보호사가 온몸으로 노동을 한다. 그래서 요양보호사들이 근골격계질환을 비롯한 산재직업병 등이 많이 발생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요양보호사의 출퇴근시간을 체크하는 RFID를 적용하고 있다. 개인정보 유출이 아닌가 싶은데, 이것은 위치추척이고, 통신비 2000원도 요양보호사가 지불해야 한다. 동의를 받고 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설명과 숙지 없이 하는 것이 문제이다.

윤지영 :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이나 노인복지법도 그렇고 요양보호사의 책무는 얘기하면서 그들을 보호하는 제도는 미비하다. 그나마 이번 개정안을 통해 일부 요양보호사를 보호하는 제도가 시행 될 것인데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여전히 미흡하지만 개정안이 통과되었는데, 앞으로 우선적으로 보완되었으면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윤지영 : 법이 애매하게 통과된 부분이 있어 아쉽다. 그래서 앞으로 기관장의 책무, 난립하는 민간기관의 통제, 국가와 지자체의 책무강화 등의 내용 등을 다시 정리해서 제안해야 할 것 같다.

배연희 : 요양보호사협회 협회장이기 때문에 요양보호사의 노동환경과 처우개선을 위해 제안할 수밖에 없다. 임금가이드라인을 통해 적당한 노동과 합당한 임금을 요양보호사들이 받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요양보호사의 책무 이외 업무를 명확히 하여 요양보호사가 전문가로써 사회적으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국가 및 지자체에서 업그레이된 교육을 하고 양질의 서비스를 대상자에게 제공할 수 있길 바란다.

이경민 : 이번 개정안이 여전히 미흡한 부분은 있지만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씩 바꿔나가길 바라며 많은 인내심이 필요할 것 같다. 무엇보다 재가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각 구마다 공공재가서비스센터가 설립되어 운영의 본보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바우처 방식의 문제 등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스템 부분의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좋은 돌봄은 무엇일까?

윤지영 : 좋은 돌봄은 누군가의 희생을 기반하면 안된다. 돌봄의 가치를 인정하고 정당한 보상이 주어져야만이 성립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요양보호사 및 대상자를 존중하는 가운데 좋은 돌봄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배연희 : 고령화 시대에 요양보호사들이 어르신들의 삶을 돌봐주고 있다. 핵가족화되는 사회 속에서 요양보호사의 역할은 크다고 본다. 따라서 그들의 전문성을 인정할 때, 대상자에 대한 서비스 질도 높아지고 좋은 돌봄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요양보호사의 노동이 귀하게 여겨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경민 : 늙는다는 것은 절망과 좌절이 아니다. 늙음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이에대한 책임을 사회가 함께 져야 한다. 그래서 사회보험으로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시행되고 있지만 제도만 있을 뿐 내용은 여전히 허접하다. 돌봄은 누군가의 희생이 아님을 우리가 인식해야 하며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이 더 강화되어야 할 것 같다.

금, 2016/07/01-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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