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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한국탈핵운동 전개와 과제 - 20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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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한국탈핵운동 전개와 과제 - 2016.3.

익명 (미확인) | 수, 2016/07/27- 12:03

<녹색평론 20163월호 원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한국탈핵운동 전개와 과제

 

이헌석(에너지정의행동 대표)

 

사실상 고사 상태였던 반핵운동

2011311일 오후 246.

 

동일본 지방에서 대규모 지진이 일어났다. 이후 이 시각은 현대사의 새로운 분기점으로 불리고 있다. 동일본 대지진은 2만여 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한 일본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특히 21세기 초 국가 에너지정책이나 시민사회운동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빼 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다.

 

5년 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기 전, 한국 반핵운동은 암흑기를 걷고 있었다. 2005년 경주와 군산, 영덕, 포항에서 이뤄진 정부 주도의 핵폐기장 유치 찬반주민투표는 반핵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 주민투표 과정에서 사상 유래 없는 금권, 관권 선거 논란이 있었지만, 지자체간의 경쟁과 ‘3천억 원 + 알파라는 천문학적인 지원금 앞에 많은 이들은 주민투표에서 핵폐기장 유치 찬성표를 던졌다. 그리고 경주시민 89.5%의 찬성으로 경주가 핵폐기장 부지로 확정되었다.

 

이 사건 이후 핵발전소, 핵폐기장에 대한 찬반은 해당 지역주민이나 극소수 반핵운동가들의 전유물처럼 취급되었다. 2006년 고리 1호기 수명연장이나 2008년 저탄소녹색성장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크게 부각되지 못했고 과거 지역주민과 시민사회단체가 결합한 강력한 반핵운동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 기름을 부은 것은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의 아랍에미리트(UAE) 핵발전소 수출이었다. 당시 정부는 정규 방송까지 중단하면서 핵발전소 수출 사실을 홍보했고, 핵발전소는 단순한 발전소가 아니라 외화 수입까지 가져다주는 효자 상품으로 각인되었다. 반면 핵발전소 수출에 반대하는 이들은 수출까지 반대하는 생각 없는 빨갱이로 몰려 인터넷 상에서 치도곤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흐름은 진보진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보를 외치는 이들 중에서도 핵발전소는 필요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적극적인 반핵은 매우 부담스러운 정치적 의제로 취급받았다.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알리는 예로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가 있었지만, 이것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많은 청소년들은 아예 체르노빌이란 단어를 몰랐다. ‘30대 이상은 바이러스 이름으로 기억하고, 20대 이상은 좀비가 출연하는 게인 배경으로 알고 10대는 아예 모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체르노빌 사고는 생소했다. 국내엔 체르노빌 사고를 제대로 다룬 책도 거의 없었고, 학교에서도 내용을 배오지 않았고, 언론도 언급하지 않는 그저 먼 나라에서 벌어진 옛날 사건에 불과했다. 수십 년째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핵발전소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이들은 반대를 위한 반대론자로 치부되거나 근본주의에 빠진 환경론자 정도로 인식되었다.

 

전국적으로 반핵운동을 자신의 주요 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적었고, 2005년 이후 전국의 반핵운동가들이 함께 회의나 행사를 가져본 적도 없는 상황. 그런 상황이 몇 년째 지속되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핵산업계 사람들이 공개적인 석상에서 한국의 반핵운동가들은 다 합쳐봤자 한수원 홍보실 직원보다 작다며 한줌 반핵운동이라는 자극적인 말로 비아냥거리는 일도 생기곤 했다.

 

후쿠시마 사고로 모든 것이 달라지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은 이 모든 상황을 정반대로 만들었다. 그동안 핵산업계는 핵발전소는 핵무기와 달라 절대 폭발하지 않는다는 말을 반복해 왔다. 하지만 동일본 대지진 이후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차례로 폭발했고, 그 장면을 모두가 TV 생중계로 지켜보았다. 정부와 핵산업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이제 없어졌다.

 

반핵운동이 급격히 위축되었던 2011, 일부 반핵운동가들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2011년은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25년이 되는 해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2012년엔 서울에서 핵안보정상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핵안보정상회의는 원래 핵물질의 안전한 관리 등 핵발전소와 무관한 행사였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이 회의를 계기로 핵발전소 수출을 추가로 성사시키고 싶었다. 다른 한편에선 국제 행사 때마다 진행되는 노점상 단속, 경관 정리로 새로운 갈등이 생기고 있었다. 따라서 핵무기 문제를 다루는 평화운동, 빈민 운동과 함께 핵안보정상회의 대응을 준비하면서 기존 반핵운동을 재구성하기 위한 기획이 추진 중이었다.

 

공교롭게 2011311일은 이런 제안을 평화운동 활동가들에게 제안하고 함께 토론을 하는 날이었다. 다양한 활동가들과 기본 제안을 나누었고,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하는 모습에 모두가 놀랬던 터라 공동 투쟁을 위한 제안과 행동은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316, 시민사회단체, 정당, 노동조합, 종교단체 등 40여개 단체 80여명의 대표자가 긴급히 모여 일본대지진, 핵사고 피해지원과 핵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염원하는 시민공동행동(핵시민행동)’을 결의했다. 이후 10여개 단체가 추가 참가의사를 밝혀 326일 연대체가 공식 출범했다. 이 연대체는 2005년 핵폐기장 주민투표 반대활동을 했던 반핵국민행동 이후 6년 만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전국적 규모의 반핵운동 연대체였다.

 

이후 328일 미국 쓰리마일 핵발전소 사고 기념일과 426일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기념일을 거치면서 다양한 활동이 벌어졌다. 기자회견, 길거리 콘서트, 일본 반핵운동가 초청강연회, 거리 캠페인, 고리 핵발전소 앞 대규모 집회, 모금활동 등 짧은 시간동안 벌인 활동이 과거 몇 년간의 활동보다 많았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전과 달라진 모습들

지진과 쓰나미에 대한 피해 수습이 조금씩 진행되자, 핵시민행동은 이후 핵없는 사회를 위한 공동행동(핵공동행동)’으로 이름을 바꾸고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사실 큰 현안이 발생하거나 공동 대응의 필요성이 제기될 때, 시민사회진영이 연대체를 구성하는 것은 매우 일상적인 활동이다. 이는 반핵운동 뿐만 아니라 4대강 문제나 제주 강정해군기지 건설 문제, 밀양 송전탑 문제 등 다양한 현안이 있을 때마다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반핵운동은 단순히 이런 활동에만 그치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보다 광범위하고 큰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 폭넓어진 반핵운동 : 명칭 변화와 개념 확대

가장 크게 눈에 띄는 변화는 과거 반핵운동이란 표현이 탈핵운동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핵발전소와 핵폐기장, 핵무기 등 핵분열 물질의 위험성과 차별성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핵에너지 이용을 막는 운동을 흔히 반핵(反核, Anti-nuke)운동이라고 부른다. 반핵운동의 역사와 전통은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1955년 러셀과 아인슈타인의 핵무기 폐기에 대한 선언, 이에 영향 받은 1957년의 퍼그워시 회의, 이후 대중적으로 확산된 반핵무기·평화운동, 1970년대 독일 흑림지역 핵발전소 반대운동, 1979년 미국 스리마일 핵발전소 사고 이후 확산된 핵발전소 반대운동은 매우 유명한 사건이다. 이들 운동을 통칭하는 표현은 흔히 반핵운동이고 이는 국어사전에 등재될 만큼 보편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반해 탈핵(脫核)이란 말은 그리 널리 통용되는 표현이 아니다. 영어권에선 일부 단체가 핵을 넘어(Beyond Nuclear)란 표현을 사용하고는 있으나 운동 전체를 통칭하는 개념은 아니다. 일본의 반핵운동가 다카기 진자부로 박사가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이후 탈핵(脱原発)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으나, 정작 일본에서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전까지는 반핵(反核)이란 표현이 더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탈핵이란 말이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확산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기존 반핵운동이 갖고 있는 극단적이고 소수파적인 이미지보다 핵발전소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의 탈핵이 핵발전의 대안을 함께 갖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핵발전소 인근 주민들의 과격한 시위, 근본주의자들의 고함과 구호와 달리 탈핵은 합리적 대안과 정책적 접근을 포괄하는 용어로 각인되었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새롭게 핵발전소 문제에 눈뜬 이들에게 선택되었다.

 

이전의 반핵운동이 핵발전소의 대안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에너지 수요관리, 효율 향상, 재생에너지 확대 등은 반핵운동의 주요한 논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핵에너지에 반대한다는 의미의 반핵으로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엔 부족함이 있었고, 반면 탈핵은 자연스럽게 이 모든 것을 포괄한 개념으로 다가갔다.

 

한편 이런 변화는 용어의 변화로만 그치지 않았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방사능에 오염된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우려, ‘방사능 아스팔트등 일상생활 주변의 방사성 물질에 대한 문제는 과거 반핵운동의 주제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일본의 경우에 1986년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이후 생협을 중심으로 방사능 오염 식품에 대한 광범위한 모니터링과 점검이 있었다. 또한 가공식품이나 감자 등의 방사선 조사(照射)식품 문제 같은 것도 반핵운동의 주요한 의제 중 하나이다. 하지만 핵폐기장과 핵발전소 건설반대운동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한국 반핵운동에서는 이런 주제가 활성화 되지 못했다. 그러나 탈핵 운동으로 이름이 확장되면서 전통적인 반핵운동의 주제인 핵무기, 핵발전소, 핵폐기물 문제 이외에도 에너지 전환, 재생에너지, 에너지 자립, 방사능 식품 오염 같은 주제들이 포괄적으로 탈핵운동에 담기게 되었다.

 

이와 같은 명칭과 개념의 변화는 전국적인 방사능 안전 급식조례 제정운동, 농수산물에 대한 방사능 감시운동, 생활주변 방사능 우려, 고리 핵발전소 인근 해수담수화 설비 문제까지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 기존 반핵운동의 폭을 더욱 폭넓게 만들었다.

 

 

2) 탈핵을 주제로 한 모임·단체 구성

흔히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큰 이슈가 발생하면 다양한 조직이 힘을 모아 연대체를 만들고 해당 이슈에 대응하는 사업을 펼치는 방식으로 활동을 해왔다. 이는 한국 시민운동의 독특한 연대 전략이다. 4대강 문제, 제주 강정해군기지 문제, 밀양 송전탑 문제 등 큰 이슈가 발생하면 환경단체, 평화단체, 지역주민단체만이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연대 단체들이 함께 문제 해결에 나서는 것이다.

 

반핵운동의 경우에도 안면도, 굴업도, 부안 등 굵직굵직한 핵폐기장 문제가 불거졌을 때, 해당 지역주민과 환경단체들만이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해당 문제에 관심이 있는 다양한 단체들이 함께 연대활동을 벌여 투쟁을 승리로 이끈 경험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활동방식은 큰 이슈에 대해 규모 있는 대응을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매우 효과적이다. 하지만 사회적 파장이 크지 않거나 장기적인 사안, 전문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힘을 내기 어려운 한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런 단점들 때문에 그동안 반핵운동 내부에선 반핵운동을 전담하는 단체의 필요성이 제기되곤 했다. 즉 이슈의 부침에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문제를 모니터링하고 활동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반핵만을 주제로 한 단체(모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 반핵운동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특히 2009UAE 핵발전소 수출 이후엔 아예 반핵 담당자를 없애버린 단체가 다수였고, 설사 담당자가 있더라도 반핵문제 이외에도 다른 업무를 겸직해서 업무 우선순위에서 반핵문제는 항상 뒷전으로 밀렸다.

 

하지만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이런 모습을 달라졌다. 차일드 세이브 같은 주부모임, 탈핵신문 같은 탈핵전문 언론사, 탈핵학교나 태양의 학교처럼 탈핵교육을 고민하는 단체, 반핵의사회나 탈핵교수모임, 탈핵변호사모임 같은 전문가 모임, 천주교탈핵연대 같은 종교조직들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또한 이런 조직들의 연대체도 종류가 많아져서 앞서 언급한 핵공동행동이외에도 핵발전소와 연구용 원자로 등 핵시설 인근 지역주민대책위의 연대체인 탈핵지역대책위가 활동 중이다. 지역별로는 광역단위로 탈핵운동을 고민하는 단체들이 모여 광역단위 연대체를 새로 만들었는데, 대구경북, 광주전남, 전북, 충북지역에 광역단위 탈핵연대체가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다.

 

이들 조직의 큰 특징은 모두 2011년 이후 만들어졌다는 점과 탈핵운동이 조직의 목적이라는 점이다. 조직별로 구성원의 성격이나 활동방식, 지역은 모두 다르지만 탈핵운동을 위한 조직이 다양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탈핵운동이 향후 지속적으로 발전해 갈 근거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닐 것이다.

 

3) 언론과 정치권의 변화

탈핵운동이 대중적으로 확대되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은 언론과 정치권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전 언론은 핵발전소 문제 보도에 매우 소극적이거나 설사 다루더라도 핵산업계의 입장을 그대로 따랐다. 대표적인 사례로 2006년 고리 1호기 수명연장 문제가 있다. 당시 수명연장 찬반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이 문제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보도되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반핵운동가들은 고리 1호기 수명연장 찬반 논쟁은 고사하고, 부산에 핵발전소가 있다는 기초 정보부터 전달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또 다른 예는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사고가 발생하기 한 달 전인 20112월 발생한 대전 유성의 원자력연구원 하나로 원자로 사고이다.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에서 발생한 이 사고로 근무자들이 안전을 위해 대피하고, 백색비상이 발령되었다. 백색 비상은 핵시설 내부에 방사성 물질이 확산될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에 발효하는 비상 경고로 추가 사고확대에 대비해서 비상사태를 유지해야 한다. 원자력연구원은 이날 주변 방사능 수치를 잘못 발표하고, 주변 연구자들이나 주민들에게 사고 내용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 등 초동대처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해당 내용은 연구소 내부의 해프닝처럼 알려져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고, 그 결과 인근 주민들은 사고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사건 수습을 둘러싼 혼란보다 큰 일이 아니고 곧바로 수습되었다는 연구원측의 발표가 언론에 더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러나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이후 언론의 보도 태도는 크게 바뀌었다. 단순 기사는 말할 것도 없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전 10년 동안 제작된 다큐멘터리, 기획 보도보다 많은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이는 단순한 사건사고 보도뿐만 아니라, 핵발전소 문제에 대한 탐사보다, 기획 취재가 이뤄짐을 의미했다. 특히 2013년 한수원 비리 사건, 2015년 고리 1호기 2차 수명연장 등 주요한 이슈를 중심으로 많은 보도와 분석이 이뤄졌고, 이는 탈핵운동 확산에 큰 힘이 되었다.

 

정치권의 탈핵문제에 대한 관심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다음해인 2012년 출범한 19대 국회에는 2개의 탈핵국회의원 연구모임이 만들어졌다. 핵발전소의 운영과 안전문제를 다루는 상임위인 산업위원회와 미래창조위원회에선 탈핵문제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질의가 이뤄졌다. 이런 흐름은 201212월 대통령 선거에도 그대로 이어져, 대통령 선거 TV 토론 사상 최초로 핵발전소에 대한 후보들의 발언이 이뤄졌다. 그동안 핵에너지정책을 비롯한 에너지 정책은 각 후보의 정책 자료집에는 실려 있지만, 쟁점이 되지 못하는 의제였다. 즉 구색 맞추기 정책일 뿐 실제 쟁점과는 거리가 먼 주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2012년 대통령 선거는 노후 핵발전소 수명연장과 신규 핵발전소 문제를 둘러싼 후보들의 발언이 이어졌고, 이는 탈핵문제 정치 의제로까지 발전했음을 의미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변화는 탈핵을 중심의제로 삼는 녹색당이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창당되었다는 점이다. 2011년 이전에도 반핵은 진보정당의 주요 정책 중 하나였다. 많은 진보 정당이 강령에 핵발전소 폐기를 명시했고, 다양한 반핵운동에 동참했다. 그러나 반핵운동이 중심 의제로 설정되지는 못했고, 반핵운동의 침체기를 맞아 반핵의제는 더욱 뒤쪽으로 밀려났다. 이런 상황에서 녹색당의 출범은 탈핵운동에 큰 지지자를 얻은 것이다. 녹색당은 출범 이후 아직 원내 진출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탈핵운동에서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언론과 정치권의 탈핵문제에 대한 관심은 줄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관심과 활동은 탈핵운동을 더욱 폭넓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런 면에서 향후 탈핵운동의 든든한 파트너로 언론과 정치권을 만드는 과제가 제기될 것이다. 이런 과제는 기존 언론이나 정치권과의 연대를 통해 풀어나가는 면과 독자적인 그룹을 형성하는 문제가 함께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즉 기존 정치권의 한계를 넘어 진보정당과 녹색당이 더욱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탈핵 이슈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독자적인 탈핵언론의 필요성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4) 탈핵을 향한 다양한 민주주의적 실험

2011년 이후 국민들의 핵에너지에 대한 우려는 높아졌지만, 정부는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해당 지역을 중심으로 삼척과 영덕의 신규 핵발전소 반대운동, 대전 유성의 민간환경감시기구 건설운동, 부산 기장군의 해수담수화 가동 반대운동 등 다양한 운동이 벌어졌지만, 그 때마다 정부는 강행을 선택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해당지역주민들은 단순히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민주주의적 행위로 연결시키는 실험을 단행한다. 주민소환과 주민투표, 조례 청원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주민투표는 한국반핵운동에게는 승리와 패배, 2가지 선물을 가져다 줬다. 2004년 부안 핵폐기장 찬반 주민투표는 지역주민들이 의사표시를 위해 실시한 최초의 자발적 주민투표였다. 당시 정부는 주민투표의 법적 효력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고, 주민투표 결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핵폐기장 건설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을 수차례 강조했다. 하지만 정부는 주민들의 절대 다수가 반대한 결과를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부안 핵폐기장은 백지화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진행된 4개 지역 핵폐기장 주민투표는 철저히 반핵운동의 패배로 이어졌다. 정부 주도의 주민투표, 허술한 주민투표법, 금권과 관권이 난무하는 가운데, 일부 반핵운동진영은 주민투표를 보이콧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주민들이 스스로 입장을 밝힌다는 주민투표의 취지를 부정하기는 쉽지 않았고, 결국 2005년 주민투표는 반핵운동에 참담한 후과를 남겼다.

 

이런 가운데, 삼척에선 지역주민들의 의사를 묻지 않고 핵발전소 유치신청을 진행한 삼척시장을 소환하기 위한 운동이 벌어졌다. 삼척의 주민소환운동은 안타깝게도 투표율 미달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 성과를 바탕으로 2013년 주민투표 운동에 돌입, 결국 삼척시민 다수가 핵발전소 유치에 반대함을 확인하였다. 이에 정부는 2004년 부안 주민투표와 마찬가지로 삼척 주민투표는 법적 효력이 없는 행위라는 것을 강조했지만, 주민들의 의견을 묵살하지는 못했다. 결국 정부는 2015년 확정된 제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삼척 핵발전소는 부지를 확정짓지 못한 채 2018년 최종 부지를 확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명목상으론 삼척 주민투표를 인정하지 못하지만, 그 결과까지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 시켜준 결과이다.

 

2013년 삼척 주민투표의 성공은 이후 영덕과 기장으로 이어졌다. 2015년 영덕에서 진행된 자발적 주민투표는 영덕주민들 또한 핵발전소 유치에 반대함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올해 3월 진행 예정인 기장의 해수담수화 시설 찬반 주민투표 또한 고리 핵발전소 인근의 바닷물을 수돗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기장 주민들의 의사를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편 2015년 대전 유성에선 1만여 명의 주민들이 민간환경감시기구를 설치해달라는 주민 청원에 서명했다. 대전 유성엔 핵연구시설은 한국원자력연구원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모든 핵발전소의 핵연료를 생산하는 한전원자력연료, 병원이나 연구소에서 사용한 방사성동위원소 폐기물을 관리하는 중저준위 핵폐기물 보관소 등 핵시설이 산적해 있다. 그동안 수많은 사회적 갈등을 겪었던 핵발전소 지역과 달리 유성의 핵시설은 큰 갈등을 겪지 않으면서 지역주민의 알권리와 안전 문제가 등한시 되었다. 핵발전소 지역은 지역주민들의 반핵운동을 통해 정보공개와 안전 규제에 대한 최소한의 장치를 갖췄으나 유성에선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유성주민들은 다른 핵발전소 지역과 동일하게 민간환경감시기구 건설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번번이 무산되었고, 결국 주민청원을 통해 이를 공식적으로 요구하게 된 것이다. 조례 제정과정에서 수차례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유성엔 전국 최초로 주민청원에 의해 핵시설에 대한 조례가 만들어졌다.

 

그간 반핵운동은 대규모 집회와 항의방문, 기자회견과 토론회 등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그것을 관철시켰다. 하지만 2011년 이후 탈핵운동은 주민소환, 주민투표, 조례 청원 등 활동 방식을 다양화시켰다. 이와 같은 방식은 반핵운동이 소수 활동가 중심의 운동에서 대중운동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수의 선도적인 투쟁뿐만 아니라, 다수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취합하고 이를 통해 보다 큰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식이 본격화된 것이다.

 

기존 반핵운동과의 이런 차이점들은 단순히 수십 개 단체가 연대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는 피상적인 수치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단체 활동가 중심 활동에서 자발적 대중의 폭넓은 활동으로 탈핵운동은 급성장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나갈 것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5, 남은 과제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국탈핵운동은 아직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17년 수명이 끝나는 고리 1호기의 수명을 재연장하고자 했던 한수원의 계획을 막은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와 별도로 신규 핵발전소 건설을 계속 추진 중이어서 현재 25기인 핵발전소가 2035년이 되면 40기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국 탈핵운동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을 것이다. 그럼 앞으로 탈핵운동은 핵없는 한국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첫째 현재의 탈핵운동은 더욱 대중화되어야 한다. 더욱 대중화된 탈핵운동을 위해서는 일상적으로 핵발전소 문제를 접하고 고민할 수 있는 매체와 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기존 언론, SNS는 물론이고 탈핵신문과 블로그 같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탈핵이야기 전달되었다. 하지만 이를 통합적으로 관리하고 핵심 이슈를 부각시킬 종합적인 기획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내용은 탈핵교육을 통해 광범위하게 확대 재생산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다양한 사이트들이 시도하고 있는 스토리텔링과 온라인 저널리즘의 다양한 실험 사례, ‘씨앗강사 양성을 통해 탈핵운동의 풀뿌리를 만든 대만 사례 등은 우리가 참고해 볼만한 사례가 될 것이다.

 

둘째 탈핵 내부에서 대중운동과 전문운동으로 분화되어 상호 보완적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탈핵운동은 매우 초보적인 단계이지만, 미약한 역할 배분을 갖고 있다. 탈핵이란 목표는 동일하지만, 서울과 지역, 국회와 시민사회, 전문집단과 대중교육, 종교, 여성 등 다양한 영역에서 조금씩 다른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다수의 활동가들은 이런 영역을 넘나들며 혼재된 활동을 하고 있다. 즉 이것저것 다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애매한 경계는 다양한 활동을 엮을 때는 큰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개별적인 영역의 활동을 지속하는 면에선 오히려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운동을 대중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새로운 대중을 만나고 풀뿌리를 확대시키는 일과 복잡한 숫자와 개념을 갖고 정부와 핵산업계 전문가들과 싸우는 일은 매우 다른 영역의 일이다. 세련된 문구와 디자인이 가득한 컨텐츠를 생산하는 일과 찬반 갈등이 부딪히는 현장에서 목소리 높여 싸우는 일을 한사람이 모두 잘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허황된 꿈과 같다. 규모가 커지면 자연스러운 분업이 필요하다. 소수가 반핵운동을 하던 시절엔 한 두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잘 했지만, 이제는 이를 나눠야 할 때이다.

 

이것이 단순히 한 사람의 업무를 두 세 사람이 나누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동안 어려운 여건에서도 한 사람이 이 모든 것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커져감에 따라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 전문적인 역량을 쓰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자원 활동이든 기부이든, 갹출이든 희생이든 자원 투입 없는 성과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위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한 분업이 아니라, 이런 분업이 지속가능하기 위한 운동의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다양한 재단이나 정당이 전문적인 분업을 기획하고, 전국의 풀뿌리 운동이 그 성과를 나눌 수 있도록 지원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런 것들이 없다. 전문성과 분업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탈핵운동 내부의 노력이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다.

 

셋째, 현재의 탈핵운동은 더욱 복잡하게 얽혀야 한다. 단일하거나 고립된 네트워크는 큰 힘을 내지 못한다. 탈핵운동 내부의 네트워크뿐만 아니라, 탈핵운동과 다른 운동의 폭넓은 네트워크를 통해 탈핵운동의 내외연을 넓혀가야 할 것이다. 밀양 송전탑 반대운동은 이런 면에서 좋은 예를 보여준다. 밀양 투쟁은 밀양 주민과 시민사회단체의 연대를 넘어 노동운동, 민중운동, 평화운동, 다양한 자치 운동과 관계 맺기를 했고, 그런 복잡성은 수년 동안 외롭게 이어온 밀양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투쟁을 전국적 투쟁으로 만들었다. 탈핵운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역설적이지만, 탈핵을 중심으로만 모여 있으면 결코 탈핵에 성공하지 못한다. 핵발전소 문제는 거대 자본의 문제이기도 하고, 노동의 문제이기도 하고, 차별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사회와 인류가 겪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한국사회 다양한 운동과 탈핵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기 위한 새로운 기획과 행동이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탈핵한국을 실현되기 위한 마지막 열쇠를 정부가 쥐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는 표면적으론 정부의 에너지정책을 바꾸는 문제이지만, 핵발전 위주의 에너지정책은 대용량 중앙집중식 전력시스템 위주의 산업구조와 맞물려 있다. 즉 핵발전 역시 사회적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는 탈핵이 몇몇 정부 관계자를 잘 설득 로비하거나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바꾼다고 이뤄질 수 없는 문제임을 의미한다. 탈핵이 주요 선거공약이었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대만 천수이볜 총통이나, 핵발전 모라토리움과 탈핵선언을 했지만 수십년째 핵발전소를 가동 중인 국가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사회적 합의를 통해 탈핵의 필요성을 확산시키는 일과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함께 경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탈핵운동이 우리사회 생산 양식, 삶의 모습과 연계되기 위한 노력이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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