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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나는 발로 뛰는 변호사가 되고 싶은 김영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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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나는 발로 뛰는 변호사가 되고 싶은 김영주 입니다

익명 (미확인) | 화, 2016/07/12- 12:14

인터뷰 표지


날이 흐렸다. 가로수 길의 반들반들한 얼굴은 빗물에 화장이 번진 듯 얼룩덜룩했다. 가로수길 입구에 경찰 버스와 앰뷸런스가 늘어서 있었고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커다란 소방차 두 대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 7월 7일 오전 10시. 골목 안쪽에서 한 무리의 의무경찰들이 우르르 걸어 나온다.

 

가로수길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니 ‘우장창창’이라는 가게가 나온다. 이날 ‘우장창창’이 있는 골목은 시가전이라도 치른 듯 어지러웠다. 검은 옷을 입은 용역직원들이 벽을 치듯 서 있었다. 명도집행이 한 여름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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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기 하나 없는 민낯에 청바지, 운동화 차림. 새벽부터 여러 번 울었는지 눈 주변이 달아올라 빨갛다. “새벽에 왔었어야 돼”라고, 좀 전의 상황이 어땠는지 말하는 목소리가 울먹거린다. 스마트폰을 쥔 주먹으로 눈가를 몇 번 문질러 눈물을 닦는다. 우선 상황이 종료되자 여기저기 바쁘게 전화하고, 상의하다가 한참 지나서야 겨우 파란 나무 평상에 앉아 이제 인터뷰 하자고 말한다. 지난 29차 총회에서 모범회원상을 수상한 김영주 변호사(연수원 34기)를 이 곳에서 만났다.

 

음악을 좋아하던 꼬꼬마, 임차상인의 변호사가 되다

김영주 변호사는 농담처럼 “어릴 때 귀엽다는 말 한 번 못 들어본 게 한이 됐다”고 말했다. 몸이 약하고, 키가 크고, 얼굴이 빼쭉한 ‘꼬꼬마 김영주’는 ‘귀엽다’는 말을 한 번만 들어보고 싶었다. ‘꼬꼬마 영주’의 부모님은 자주 싸웠다. ‘꼬꼬마 영주’는 자주 혼자 남겨졌고, 늘 아파서 겨울이면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학교도 자주 빠졌다. 학교를 자꾸 빠지니 성적은 당연히 나빴다. 가장 잘 나온 성적이 ‘수우미양가’ 중 ‘미’ 정도. 뭘 해도 인정받기 어려웠다. 학교 수업에서 시를 쓰면 “네가 쓴 거 아니지?”라는 의심을 받았다. 교사는 ‘꼬꼬마 김영주’에게 교실 바닥에 엎드려 다시 시를 쓰게 했다. 공부를 못하는 애가 이런 시를 썼을 리 없으니까.

 

이런 경험이 반복되자 혼자 상상하기 좋아하는 ‘꼬꼬마 김영주’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자랐다. 늘 혼자 있으니 친구도 거의 없었다. “꼬꼬마 김영주는 되게 시시하고, 재미없고, 좀 우울한 애였다…. 라고 말해놓고 보니 되게 불쌍하네. 그래도 뭐 밥도 많이 먹고 그랬어요. 씩씩하게. “

 

“아파서 집에 누워 있다고 책을 읽는 스타일도 아니고, 그 때부터 음악을 듣기 시작했죠.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 밖에 없더라고요.” 김영주 변호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른 뮤지션은 시규어 로스, 그루브 아르마다, 매시브 어택, 벡 등 1990~2000년대 브릿팝 뮤지션들이다. 얼마 전 작고한 프린스의 추모 영상도 있다. 일렉트로니카, 딥하우스도 좋아하고, 락은 ‘기본이니까 당연히’ 좋아하고, 인디음악을 틀어놓고 혼자 울기도 한다.

 

지금 ‘우장창창’과 대립하고 있는 건물주는 힙합 듀오 ‘리쌍’이다. “음악은 다 좋아해요. 힙합도 좋아합니다만, 리쌍은 오늘부터 안 듣는 걸로.” 뮤지션이 미우면 음악도 꺼려진다. 음악 하는 사람들 같은 감성도 없고, 그런 걸 예술로 풀어내는 능력도 없어서 예술 한다는 사람만 보면 눈이 하트 모양이 된다. 하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이 작품으로 표현하는 그 감성이, 분노건 무엇이건 그 속에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중요시하는 마음이 깔려있지 않으면 꺼려진다.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고, 돈이 중요하면 돈만 있으면 되죠.” 그런 사람이 ‘애인이 떠났다’는 이유로 눈물 흘리는 노래를 만드는 건 모순이란다. 사람이 가장 중심이라는 전제가 없으면 예술이 만들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가끔은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게 씁쓸하다.

 

“내가 생각했던 음악, 늘 부러워하고 존경했던 예술가들이 그런 감성까지도 지어낸 거라고 하면 너무 슬프잖아요.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김영주 변호사는 “그 음악이 나를 신나게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임차상인들의 권리금 문제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도 음악 때문이었다. 늘 음악 들으며 놀고 싶었던 차에, 홍대 어디로 상담을 하러 간다는 동료 변호사를 따라 무작정 ‘음악 들으러’ 갔던 게 시작이었다. 이제까지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운동은 꽤 있었지만, 상인들이 만들어낸 상권과 부가가치, 상인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운동은 거의 없었다. 이에 대한 법적 조력도, 그런 일을 하는 변호사도 드물었다. 김영주 변호사는 “전통적으로 상인들은 ‘도와주고 싶은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냥 (점포에서) 쫓겨나는’ 게 아니에요.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거죠. 회사에서 잘못한 것도 없이 해고당하는 것하고 비슷한 수준의 문제더라고요.”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를 대화로 풀기는 대단히 어렵다. 감정적인 대립이 대화를 방해한다. “임대인 입장에서는 ‘내 건물 내 맘대로 하는데 뭘 대화까지 해’ 하고 생각하겠지만, 임차인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나가라’는 말을 들은 거 자체가 화가 나잖아요. 차분히 얘기할 정신도 없고.” 누구에게나 정의롭게 보이는 일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버는 일도 아니고, 심지어 승소율까지 낮다. 이기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거의 지는 싸움이다. 쫓겨나는 사람에게 돈을 받을 수도 없으니 돈도 못 번다. “사실 변호사 하면 떠올리는 ‘멋진 법리로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그런 이미지하고는 거리가 멀죠. 쉬운 일은 아닌 거 같아요.”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에서 구성한 상가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해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를 중재하고, 합의를 이끌어낸 경우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김영주 변호사도 조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민생위원회에서는 권리금 문제에 있어서 의견이 조금 달라서 민생위원회 이름으로는 활동하지 못했지만, 임차상인의 권리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민변 내에 이견이 없죠.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같이 활동을 하게 될 거 같아요.”

 

변호사가 된 아웃사이더

김영주 변호사의 원래 직업은 회사원, 그 중에서도 공기업 직원이었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을 모아놓고 모르는 문제를 가르쳐주는 걸 꽤 좋아했지만 교사나 선생님이 되지는 않았다. 김영주 변호사는 대학 때 과외 아르바이트도 꽤 했고, 사실 꽤 잘했던 거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선생님이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저 자신에 대한 자신이 별로 없었던 거 같아요. ‘애들이 (나를 보고) 나처럼 어리바리하게 살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을 했었죠.”

 

IMF 시절, 정리해고 문제로 사무실에서 재떨이가 날아다닐 정도로 갈등과 대립이 심해지자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도 ‘잔심부름’만 하는 계약직들이 있었어요. (정리해고 상황이 되니까) 그런 분들만 해고하려고 하고, 그 문제로 갈등이 심해져서 사무실에서 재떨이가 날아다니고 그랬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낮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쫓겨나야 하는 걸까. “그런 걸 보면서 법 공부를 하고 싶더라고요.”

 

민변에 가입하게 된 계기는 연수원 동기들이었다. 황필규, 송상교 변호사와 함께 인권법학회 1기로 활동했다. 그때도 총무였다. 연수원 수료 이후 자연스럽게 민변에 가입했지만 고용 변호사로 일을 하는 8년 정도는 말 그대로 ‘회비회원’이었다. 그러다 남의 고용 변호사로 일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어느 날 여성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진 변호사에게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거냐’는 메일을 보냈다. “여성위원회로 오라”는 김진 변호사의 대답 이후 여성위에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개업한 이후 최근 2~3년 민변 활동을 하는 것이 하나하나 새롭고 재미있다고 느낀다.

 

그렇게 뛰어든 민변 활동이 회원들의 인정을 받았는지, 지난 29차 총회에서 김영주 변호사는 ‘모범회원상’을 수상했다. 아동위원회(이하 아동위) 위원들이 ‘아동위의 자랑 민변의 보배’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와 흔들었다. “지난 활동에 대한 평가보다는 앞으로 열심히 하라고 주신 거 같아요. 어쩌다 보니 활동보다 상을 먼저 받은 거죠.” 웃는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묻어난다.

 

‘아동위의 잡일과 개그 담당’ 김영주 변호사는 어디서나 분위기를 띄우고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어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오바, 육바를 떨어가면서” 열심히 떠든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꼬꼬마 김영주가 남아있다. 우울하고, 작고, 소심한 김영주. 그래서 영화도 ‘엑스맨’ 시리즈, ‘다크나이트’처럼 히어로지만, 아웃사이더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가 좋다.

 

특히 ‘엑스맨’ 시리즈는 보통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다. ‘엑스맨’의 한 장면을 은근슬쩍 언급하니 그 장면의 주인공이 누구고, 어떤 상황인지 술술 나온다. “저한테 ‘엑스맨’의 주인공들 절반만큼의 초능력만 있었어도 저는 신나게 막 살았을 거 같아요. 그런데 ‘엑스맨’ 주인공들은 남들한테 없는 초능력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 자기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고민하잖아요.” 남들한테 배척당하고 자기 스스로도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괴로워하는 주인공들이 끝내 힘을 합쳐 무언가를 이루고, ‘그럼에도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점이 김영주 변호사가 ‘엑스맨’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다.

 

“근본적으로 난 좀 아웃사이더인 것 같아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모두가 옳다고 동의하는 것보다, 시선이 미처 닿지 않은 곳에 더 눈길이 간다. “이미 많은 훌륭한 분들이 조력하고 있는 분야 말고, 아직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는 분야들”, 예를 들면 아동 문제, 젠트리피케이션 문제 같은 쪽에 마음이 쏠린다. “남편이 의사인데, 응급실에서 일할 때 ‘살려주세요!’라고 소리소리 치는 사람보다 구석에서 조용히 있는 사람들을 먼저 찾아 치료했대요. 소리 지르는 사람은 아직 기운이 남아있지만, 정말 조용히 있는 사람들이 정말 위험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 약자들도 있을 수 있잖아요.”

 

“우린 왜 서로가 좋았을까요?”

김영주 변호사가 여성위원회에서 민변 활동을 시작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무작정 메일을 보냈던 김진 변호사가 마침 여성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둘째, 여성 문제에 대한 연구와 참여는 여성으로서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여성위원회에서 조금씩 다루던 아동 문제를 위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참여하는 모임이 생기자 김영주 변호사도 참여했다.

 

김영주 변호사는 아동 관련 분야는 온 나라를 다 뒤져도 전문가가 많지 않은데, 그에 비해 다뤄야 하는 주제는 너무 광범위하다고 설명했다. 아동학대, 소년사범, 소년원 관리 문제, 누리과정, 입양, 베이비박스, 청소년의 참정권 행사…… 아기가 차마 살 수 없는 환경에 사는 아이들이 있으니 빈곤 문제, 주거 문제도 아동 문제가 될 수 있다. 빈부격차로 상처받는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월례회 때 모이면 ‘간단히 해, 간단히 해’ 하면서도 모니터링만 두 시간, 세 시간 걸려요.”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문제들이 모두 아동위가 다뤄야 할 문제가 된다.

 

“하여튼 쿵짝이 잘 맞았어요. 누구 하나가 똑똑해서 그런 게 아니고 서로가 좋았다고 해야 하나? 그랬어요. 그런데 우린 왜 서로가 좋았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네.”

 

아동위 활동을 하다 보면 ‘꼬꼬마 김영주’를 떠올리게 하는 아이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꼬꼬마 김영주’가 내어놓고 무슨 학대를 당한 건 아니지만, 마냥 환하게 웃을 수 없는 사연을 가진 아이들을 만나면 눈물이 앞선다. 김영주 변호사는 “그런 건 나쁜 점인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이들에게 마음이 쓰이다 보니 일을 일로서 처리하지 못하고, 냉철하게 수단을 찾고 법조문을 찾아야 할 시간에 울어버린다는 얘기다.

 

“어떤 미혼모가 아이를 어떻게 했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 아동위원회 다른 분들은 ‘미혼모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게 사회적으로 어떤 보호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관련 법조문이 무슨무슨 법 몇 조인데 이러저러하다’라고 논의하시는데 저는 머리를 쥐어뜯고 화를 내는 거죠.”

 

아동의 피해, 아동의 권리는 직접 찾아 나서지 않는 한 부각되지 않는다. 피해자 집단이 형성되어 이들이 스스로 피해를 진술하고, 민변을 비롯한 시민단체가 결합하여 조력하는 과정이 존재할 수 없다. “아기들은 어른들처럼 ‘투쟁!’하고 외치지도 못하고, 두들겨 맞은 걸 경찰이 발견하고 ‘너 어쩌다 이랬니?’ 하면 설명도 못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댈 곳이 없다는 생각에 자기를 보호해주는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잖아요.”

 

이렇게 자신의 피해를 스스로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들이 재미있고, 한편으로 마음 아프다. 보육시설의 아이들을 잠깐 만나고 돌아오면서 ‘내가 뭐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울면서 일하는 날도 많다. “어떨 때는 권리나 법의 측면으로 사건을 파악하는 게 아니라 나쁜 사람 혼내주고 싶다는 충동도 들어요. 가끔 변호사답지 않은 판단을 하거나 감정에 치우칠 때도 있어요.”

 

김영주 변호사는 김수정 위원장이 균형을 잘 잡고 있는데다 젊은 변호사들의 신선한 의견을 들으면서 자신이 오히려 많이 배운다고 말했다. 민변 활동을 하며 어떨 땐 열등감이 느껴질 정도로 똑똑하고 훌륭한 선후배들을 볼 때마다 “어쩜 저렇게 똑똑할까” 하고 감탄하는 것도 낙이었다고. 그러면서도 “저는 저대로 훌륭한 선배들의 생각을 잘 이어받고 후배들한테 전하면 된다고 생각해요”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고맙고 미안하고 귀엽고 예쁜 아동위의 ‘아가변’들

김영주 변호사는 아동위의 젊은 변호사들을 ‘아가변’이라고 불렀다. ‘아가변’들이 그렇게 귀엽단다. “본인들은 다 컸다고 그러는데, 생각하고 논의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다 너무 귀엽고 예쁜 거예요.” 김영주 변호사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아가변’은 ‘동물권’을 고민하다 아동위로 온 변호사들이다. 말 못하는 동물의 권리를 고민하다 마찬가지로 자기 권리를 소리 내어 말하고 주장할 수 없는 어린이들의 권리를 고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신기했다.

 

“놀 때도 너무 재미있어요. 확실히 젊은 분들이라 노는 것도 색다르고 귀엽고 재미있어요.” 아동위 워크샵에서 ‘아가변’들이 김현근 간사가 준비한 게임을 하는 모습이 그렇게 신기하고 귀여웠다고 한참을 설명한다. 벽에 현대사 연표를 사진과 함께 쭉 붙여놓고, 사진 속 사건을 맞추고 그 시기에 기억에 남는 일들을 얘기하는 게임이다. “우리 아가변들이 얘기하는 걸 하나도 모르겠는 거 있죠. 구석에서 김수정 위원장이랑 술만 마셨네. 한편으로는 자극도 되고, 젊은 감성에 사는 게 좋더라고요.”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 귀여운 게 아니다. 김영주 변호사에게 사람은 누구든 다, 자기는 모르지만 저마다 하나씩 예쁘고 귀여운 구석이 있는 존재다. 자세히 뜯어보면 다 예쁘고 다 귀엽다. “회의 때 발언하면서 하는 손짓, 낙서하는 것만 봐도 귀여운 변호사님도 있어요. 사람은 다 예쁘고, 다 귀엽고, 다 똑똑하고 그래요.” 이렇게 얘기하면 바보 같아 보일까 걱정하면서도 사람에 대한 애정이 단어 사이사이의 웃음에 묻어난다.

 

아동위 위원들에게는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다. 아동위가 다뤄야 하는 스펙트럼이 넓다보니 일도 많고 해야 할 공부도 많다. “뭔가에 대해 결론이 나있고, 자료가 축적되어 있고 논문 쫙 나와 있고 이러면 어떤 사안에 대해 판단만 하면 되는데, 아동 문제는 그런 게 거의 없어요.” 이런 일이 왜 생기는지, 어떻게 해야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을지, 매번 새로 공부하고 처음부터 만들어나가야 한다. 각자 직장을 다니고 생업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늘 숙제 내주듯 해야 할 일을 만들어주다 보니 미안해진다.

 

“아동위 자랑 좀 써 주세요. 일도 잘 하고, 무슨 문서 내고 이럴 때 늦은 적도 없어요. 미리미리 어쩜 그렇게 잘 해주는지…. 이쁘고 고맙고 그렇죠.”

 

김영주가 꿈꾸는 ‘발로 뛰는 변호사’

요즘 김영주 변호사의 고민거리는 아들이다. 정확하게는 아들에게 너무 신경을 못 써주는 것 같아서 고민이다. “아동학대 중에 방임이 있거든요. 나가서 ‘아동학대다, 방임이다’ 라고 소리 지르면서 집에 가면 우리 아들은 널브러져 자고 있고 그런 거죠.” 아이한테는 부모가 온 세상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가끔은 아들을 혼내야겠다 싶지만 제 풀에 웃겨서 포기한 적도 많다. “거짓말하고 숨기는 행동도 귀여워 죽겠어요. 좀 커서 수염 나고 대들고 이러면 쥐어박고 싶을 수도 있겠죠? 그 때는 무서우려나.”

 

가끔은 아들의 눈에 보일 세상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것도 걱정이다. 친구와 주먹다짐 정도만 해도 ‘싸우면 안 된다’고 혼내지만, 정작 아이에게 ‘싸우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어른들의 세상은 온통 싸움판이다. “당연히 법을 지켜야 하지만 꼭 저렇게 해야 하는지 싶고, 서글프기도 해요. 사람들은 왜 다 같이 웃으면서 잘 살지 못할까 하는 의문도 들고.” 재판도 결국은 법으로 하는 싸움이요, 법원의 모든 사건이 하나하나 다 싸움이니까.

 

또 다른 고민거리는 건강 문제. 어릴 때도 많이 아팠고, 지금도 그렇게 건강한 편이 아니다. 엄마가 아프면 나중에 아들이 힘들어질까 걱정이다. 몸이 아프면 웃고 살 수도 없으니 웃으며 살려면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아들 따라다니면 많이 뛰게 되니까 건강해질 거 같아요. 아들한테 물어보고 싶었어요. 넌 왜 걸어도 되는데 뛰어다니니?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들 따라 열심히 뛰어다닐 걸 그랬어요. 그랬으면 많이 건강해졌을 텐데.”

 

인터뷰를 위해 가로수길로 찾아갔던 그 날 ‘우장창창’에는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다녀갔다. 제 의원은 뉴스 인터뷰에서 “변호사도 울고 있더라”고 말했다. 김영주 변호사는 새벽부터 가게 안에 소화기를 뿌려대는 용역직원의 폭력이 너무 심해서 울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변호사도 울고 있더라”는 그 말이 어쩌면 그 말이 김영주 변호사를 요약하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눈물이 앞서는 현장의 변호사. 故 신영복 교수는 비가 내릴 때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비를 함께 맞는 것이 진정한 연대라고 말한 적 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소리조차 못 내는 사람들은 전혀 보호를 못 받아요. 소리 내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좀 찾고 싶어요.”

 

그러면서 김영주 변호사는 ‘변호사’라는 직업 자체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약자들을 찾아내기에 쉽지 않은 직업이라고 말했다. 변호사는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그의 말을 듣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변호사님, 제가 이만저만한 사정이 있는데요……”라고 찾아와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만, 김영주 변호사는 ‘변호사’라는 직업이 그마저도 못하는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하는 직업이라고 믿는 것 같다. 김영주 변호사는 인터뷰를 하던 중 자연스럽게 어떤 변호사가 되고 싶은지 말했다.

 

“법조문에서 느끼고, 판례에서 느끼는 것도 있죠. 멋진 이론을 제시하고 연구하는 것도 당연히 멋있어요. 그런데 어린이를 보호해야 하는 아동학대 현장이나, 철거 현장 같은 곳에서 느끼는 게 많아요. 젊은 변호사들이 이런 현장의 느낌 속에서 일을 하면 더 잘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저는 발로 뛰고 싶고, 너무 똑똑하지 않은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너무 똑똑해서 의뢰인이 한 마디만 해도 ‘내가 다 아니까 됐다’고 하지 않고, 내가 모르는 게 많기 때문에 현장에서 함께 느끼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는 그런 변호사가 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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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위해 가로수길로 찾아갔던 그 날 ‘우장창창’에는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다녀갔다. 제 의원은 뉴스 인터뷰에서 “변호사도 울고 있더라”고 말했다. 김영주 변호사는 새벽부터 가게 안에 소화기를 뿌려대는 용역직원의 폭력이 너무 심해서 울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변호사도 울고 있더라”는 그 말이 어쩌면 그 말이 김영주 변호사를 요약하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눈물이 앞서는 현장의 변호사. 故 신영복 교수는 비가 내릴 때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비를 함께 맞는 것이 진정한 연대라고 말한 적 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소리조차 못 내는 사람들은 전혀 보호를 못 받아요. 소리 내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좀 찾고 싶어요.”

 

그러면서 김영주 변호사는 ‘변호사’라는 직업 자체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약자들을 찾아내기에 쉽지 않은 직업이라고 말했다. 변호사는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그의 말을 듣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변호사님, 제가 이만저만한 사정이 있는데요……”라고 찾아와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만, 김영주 변호사는 ‘변호사’라는 직업이 그마저도 못하는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하는 직업이라고 믿는 것 같다. 김영주 변호사는 인터뷰를 하던 중 자연스럽게 어떤 변호사가 되고 싶은지 말했다.

 

“법조문에서 느끼고, 판례에서 느끼는 것도 있죠. 멋진 이론을 제시하고 연구하는 것도 당연히 멋있어요. 그런데 어린이를 보호해야 하는 아동학대 현장이나, 철거 현장 같은 곳에서 느끼는 게 많아요. 젊은 변호사들이 이런 현장의 느낌 속에서 일을 하면 더 잘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저는 발로 뛰고 싶고, 너무 똑똑하지 않은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너무 똑똑해서 의뢰인이 한 마디만 해도 ‘내가 다 아니까 됐다’고 하지 않고, 내가 모르는 게 많기 때문에 현장에서 함께 느끼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는 그런 변호사가 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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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변호단 2차 워크숍

- 강제동원, 홋카이도를 가다

 

 2015년 8월 그 해, 홋카이도의 여름은 뜨거웠다.

 

 <첫째 여정>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한 서린 홋카이도, 아직도 서러운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 이선경

 

 나에게 있어 홋카이도라는 지역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오고 온천시설이 잘 되어 있는, 겨울 관광지로 좋은 장소 정도의 의미만 있었다.

 

그 홋카이도에 강제징용되어 희생된 분들의 유골이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남아있다는 소식도 이번 워크숍 준비 모임에서 처음 알게 되었을 정도로 나는 홋카이도와 우리 민족의 과거사에 대해 무지하고 또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태로 비행기에 올랐던 나에게, 창 밖에 펼쳐진 삿포로의 풍경은 다소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반듯하게 정리된 논과 밭 사이에 빨갛고 파란색 지붕을 가진 집들이 늘어서 있는 한적한 농촌 풍경은, 그곳이 그 끔찍한 강제징용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게 만들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에 오르자, 이번 워크숍의 가이드 김영환 선생님이 버스가 이동하는 동안 간단히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유골반환 운동의 경과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1997년부터 시작하여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여러 동아시아 지역의 학자와 시민단체가 모여 10여 차례의 학술대회를 거치면서 공동으로 유골발굴을 해왔고, 이는 궁극적으로 동아시아 평화를 모색하기 위한 활동들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방문할 장소들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현장들이라고 하였다.

16일  삿포로별원 - 강제징용 간담회

 

버스로 한참을 달려 101구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본원사 삿포로 별원 납골당에 들어서니 가장 안쪽 구석에 초라한 유골함 3개가 놓여있었다. 본래 일본의 장례절차에 따르면 한 사람의 유골이 하나의 유골함에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삿포로 별원에 101명의 유골이 있으면 총 101개의 유골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1997년도에, 일제시대 강제징용 노동자들에게 노동을 시켰던 지자키 공업의 요청에 따라 삿포로 별원은 무연고 유골이라는 이유로 유골을 모두 합골해 버렸고, 그 때문에 현재 3개의 유골함 안에 101명의 유골이 섞여있다고 하였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최소한의 예우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서글픈 상황들이 담담히 다가왔다. 부디 고국으로 돌아가서 햇볕 잘 드는 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묵념을 하고 돌아섰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2003년 유골 발굴 당시 발굴된 유골이 강제징용 희생자 유골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근거 중 하나가 유골의 발을 감싸고 있던 발싸개 때문이었다는 것인데, 신발이 아닌 천으로 된 발싸개를 신고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강제징용 희생자의 유골임을 확인하였다고 하니, 당시 강제징용 희생자들에 대한 처우가 얼마나 열악하였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16일  삿포로별원 - 납골당 2

 

반가운 소식은 현재까지 홋카이도에 남아있는 미봉환 유골 150구 중(삿포로 별원과 사루후쓰, 비바이 탄광 등에 흩어져있다고 한다) 120구가 올해 9월 한국으로 봉환된다고 한다. 무엇보다 올해 유골봉환은 9. 11.부터 9. 20.까지 9박 10일 동안 진행되는데, 당시 강제징용자들이 끌려왔던 3,500km를 되짚어 서울까지 가는 여정이라고 하였다.

 

이번 유골봉환은 역사적인 의미가 큰 행사이므로 당연히 한국과 일본 양국 정부가 주최가 되어서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정부와 전혀 관계없이 순수 민간 차원에서만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2004. 12. 노무현 정부 때 고이즈미 총리에게 유골봉환을 요청한 이래 정부차원에서 유골봉환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나, 이명박 정부로 바뀌면서 정부가 유골봉환에 의지를 보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현재에는 부득이 순수 민간 차원에서만 유골봉환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였다.

 

물론 유골봉환의 최대 걸림돌은 강제징용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정부의 태도라고 하겠다.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이 일본 정부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입증할 수많은 자료 앞에서도 끝내, 강제징용은 민간기업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므로 일본 정부는 유골봉환을 비롯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일본 정부만을 탓하고 있을 수 있는지… 힘이 없어 자국민이 이 혹한의 땅에 강제로 끌려와 노예처럼 일하는 것도 막아주지 못했던 우리나라는,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서도 그 유골을 봉환해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 국가의 존재이유일 것인데, 과연 우리 정부는 강제징용 희생자들을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둘째 여정>

차별은 조선인만의 몫이 아니었다. 홋카이도의 자연인 아이누를 만나다.

 

- 성춘일

 

8월 17일, 홋카이도 이튿날이 밝았다. 워크숍의 설렘과 고단함을 채 풀기도 전에 오타루 외곽, 해안가에 위치한 청어 잡이 박물관에서 둘째 여정을 시작했다. 가파른 언덕을 굽이굽이 두어 번 올라가자 오래된 낡은 집 한 채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어 잡이 어부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집을 박물관으로 꾸며서인지 박물관 내부와 외부에 전시된 물건은 화려하거나 형식에 치우치기 보다는 100여년 전 어부들의 소박한 삶의 모습을 들려주고 있었다. 박물관 옆에는 해안가 절벽으로 이어지는 아담한 뜰이 펼쳐져 있고 바닷바람에 살랑거리는 풀밭 위, 녹슨 크고 작은 닻과 낡은 고기잡이 도구들이 어부들의 고단한 일상을 전하고 있었다.

 

연세가 제법 있어 보이는 부부가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입장표를 사서 신발을 벗고 건물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는데 두터운 가죽장갑과 눈 위에서 신는 신발이 이곳이 겨울왕국임을 실감하게 했다. 남자 성인용 지게, 여자 성인용 지게, 아이들이 메는 지게를 보니 이곳 주민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생계를 위해 청어 잡이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층에는 당시 주민들의 의상을 걸어 놓고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입어 볼 수 있도록 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아이누족인 가와무라 켄니치(아이누 이름 : 신리츠 에오리)씨가 운영하고 있는 아이누민속박물관에 도착했다. 켄니치씨는 아이누 전통복장 입고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 박물관은 켄니치씨의 조부가 만든 것으로, 일본 정부가 세운 학교에서 아이누 아이들의 교육을 맡길 수 없다며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했다가 현재는 켄니치 씨가 이어 받아 아이누의 역사, 전통, 풍습을 알리는 민속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아이누들의 배, 의상, 그릇부터 낚시, 사냥도구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켄니치씨는 아이누의 역사, 전통, 풍습 등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어머니’를 뜻하는 아이누의 ‘하루코노’라는 단어는 원래 식량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아버지’는 돈 버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한다. 가족의 호칭에 가족 구성원의 역할이 녹아 있어 신기했다.

17일  아이누민속박물관 1

 

아이누족은 일본 정부가 금지하기 전까지 연어잡이와 수렵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민족이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메이지유신 이후 홋카이도를 점령하더니 홋카이도 전체를 일본 정부의 관할 하에 두면서 아이누족들은 일정한 구역에서만 거주할 수 있도록 하고 아이누들의 생활수단이었던 연어잡이와 수렵을 금지했다.

 

일본 정부는 홋카이도를 다스리기 위해 일본 본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둔전병으로 근무하는 일본인에게 일정 면적의 홋카이도 땅을 나누어 주어 유인함). 아이누들이 농사를 지으면 홋카이도 땅을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으나,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는 아이누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모두 빼앗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는 아이누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아이누 전통의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금지했다. 또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누족들의 호적에는 출생지역(아이누 거주지역)을 별도로 표기한 결과, 아이누 거주 지역 출신들은 공직 진출을 금지당하거나 교육 기회가 제한되는 등 많은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출신 지역 표기제는 없어져 눈에 보이는 차별은 사라졌지만 보이지 않는 차별은 여전하다고 한다.

 

아이누 사람들은 몇 년 전 일본정부를 상대로 본래 자신들이 주인이었던 홋카이도를 돌려달라고 반환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다고 한다. 수렵민족인 아이누들에게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자연을 소유한다는 인식이 희박했고, 문자도 없었던 탓에 땅에 대한 소유관계를 표시한 공부 자체가 없었다. 고도 문명의 발명품인 글자로 표기된 문서를 가지고 다투는 법적 소송에서 이들의 패배는 어쩌면 예정된 결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억센 모기마저도 정겨워진 숲 속 고겐사에서의 깊은 밤

17일  고겐사2

 

점심을 해결한 후, 북쪽으로 한참을 달려 슈마리나이 댐 부근에 위치한 고겐사에 도착했다. 고겐사는 현재 ‘동아시아 공동워크숍’의 개최 장소이자 홋카이도 역사교육의 학습장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고겐사가 평화교류와 역사교육의 장소로 변모한 것은 1976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씨가 고겐사 본당에서 죽은 이들의 이름, 나이, 사망 연원일이 적힌 다량의 위패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위패에는 조선인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승려로 활동하면서 위패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죽음이 슈마리나이 댐 공사와 철도 공사 도중 희생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학습장 내부 각 벽에는 유골 발굴 작업과 유골 반환을 위한 각종 활동이 담긴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현재 밝혀진 바에 의하면 슈마리나이 댐 공사와 철도 공사로 희생된 이는 210여명 정도인데 그 중 40여명이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저녁을 먹기 전 슈마리나이 댐을 둘러보기로 했다. 어둠이 조금씩 밀려오는 시간, 일본 최대의 인공호수인 슈마리나이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여름을 잊게 만들 정도로 제법 매서웠다. 거대한 댐의 수문이 물길을 가로막고 서 있고 1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 탑이 수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탑은 슈마리나이 댐 공사 도중 사망한 수백 명의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세운 탑인데, 정작 탑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희생자들의 이름 대신 ‘순직자 위령탑’이라는 이름과 댐을 건설했던 우류전력 사장 아다치 다다시 이름만이 새겨져 있다. 슈마리나이 댐 공사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자 이 지역 사람들이 우류전력에 이들을 위로하는 위령비라도 세워 줄 것을 요구했는데, 위령비 세울 돈 조차 아까웠던 아다치 다다시는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건설했던 교각의 기둥을 옮겨와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일본 각지는 물론 우리나라와 중국에서까지 강제로 끌려와 새벽 4시부터 밤 9시까지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죽어간 사람들에게 위령비 세울 돈조차 아까워했으니 이들이 당시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대했을지 상상이 되었다. 슈마리나이 댐 공사의 참혹함은 이 공사장 집단합숙소의 이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당시 사람들은 슈마리나이 댐 공사장 근처에 있는 집단합숙소를 어항에 들어간 문어가 다시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이 합숙소에 잡혀 들어간 자는 살아서는 나올 수 없다는 의미로 ‘타코베야(문어방)’라고 불렀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 타코베야는 죽음과 공포의 대명사였다고 한다.

 

저녁식사 후, 고겐사에서 위패가 발견된 후 위패의 주인인 유골 발굴 작업과 한‧일 교류를 통해 수십년 동안 유골 봉환운동을 했던 오노데라 마사미(小野寺正巳)교수님과 야마자키 다다시(山崎忠司) 선생님으로부터 슈마리나이 공사 현장의 참혹함은 물론 유골 봉환 운동에서의 에피소드 등 유골 봉환활동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밤이 깊도록 계속 이어졌다.

17일  변호단회의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힘든 몸을 이끌고 고겐사에 도착한 직후부터 슈마리나이 댐, 조선인 유골 매장지까지 우리를 안내해 주신 오노데라 교수님, 일흔 셋의 연세에도 유골봉환 운동을 계속하고 계신 야마자키 다다시(山崎忠司) 선생님, 누가 알아주어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기에 묵묵히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의 활동을 이어가고 두 분의 모습은 마음에 큰 울림을 남겼다. 밤이 깊어가는 것도 잊고 한 잔 한 잔, 비워지는 술잔은 늘어만 간다. 그리고 우리들의 추억도.

 

 

<셋째 여정>

새하얀 메밀밭 한 가운데서 굳은 도약을 외치다.

 

- 이동준

 

고겐사(光顯寺) 조릿대 묘표전시관에서의 숙박. 겨울이면 기온이 영하 41도까지 내려간다는 슈마리나이답게 새벽의 추위가 제법 매서웠다.

 

일본 남자들은 “매일 아침 나에게 된장찌개를 끓여줘요”라고 청혼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어디선가 진짜 일본된장국 냄새가 발길을 이끌었다. 모두들 한솥밥을 떠서 둘러앉아 정겹게 식사하면서 돈독한 정을 나누었다.

 

고겐사를 떠나면서 우리는 9월 본국 봉환 예정인 희생자들의 유골을 살피고 위령의 의미를 담아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70여년의 긴 세월 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유골로 남아있는 희생자들의 원혼을 떠올리니 가슴 한 켠이 아파왔다.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가 편히 잠드실 수 있기를 기원하며 다음 달에 돌아오시는 길 또한 밝혀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18일 아침  유골

 

버스를 달려 슈마리나이(朱鞠內) 호수가에 도착하였다. 동양 최대의 인공호가 보여주는 절경에 감탄사가 나왔지만 잔뜩 찌푸린 하늘과 세찬 물살이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슬픔을 담은 듯 느껴져서 이내 숙연해졌다.

 

삿포로 시로 이동하는 길에는 광활한 메밀밭이 계속되었다(농업은 홋카이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일본의 총 경작 가능한 땅의 4분의 1이 홋카이도에 있다고 한다). 우리는 백은의 언덕이라 명명된 사진촬영지 및 시마다야란 회사의 계약 농장터에서 단체사진을 남겼다. 새하얗게 펼쳐진 메밀밭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한편으로 그들이 가진 풍요로움에 대해 부러운 마음 역시 들었다.

18일  메밀밭2

 

이어서 방문하게 된 곳은 다카도마리의 한 공동묘지였다. 슈마리나이 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후카가와시 다카도마리 공동묘지에는 2명의 조선인을 포함한 5명의 피해자가 묻혀 있었고 그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들 외에도 더 많은 희생자들이 그 인근에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매장 추정지 위로 일반인들의 공동묘지가 들어서 있어 발굴 작업이 어렵다고 하여 몹시 안타까웠다.

 

이어서 이치조지(一乘寺)와 부설 다도시(多度志) 보육원을 방문하였다. 보육원은 이치조지의 주지스님이 서양식 어린이집을 모티브로 하여 만든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모델이었는데, 서양식 종탑과 일본 특유의 견고하고 단정한 목재구조의 건물이 인상적이었고, 해맑은 아이들의 미소는 발길을 돌리기 어렵게 하였다. 벽면에는 매해 어린이들의 졸업 작품으로 공동 제작된다는 대형 판화가 걸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많이 인상적이었는지 보육원을 떠난 뒤에도 동심을 가득 담은 어린이들 특유의 그림체가 자꾸만 머리에 남았다.

 

강제징용이 이루어지던 시절엔 하루가 걸려도 당도하지 못하던 길을 이제는 반나절이면 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토록 우리의 문명은 그 외관(外觀)이 눈부시게 진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內面)은, 특히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는 한국도 일본도 야만(野蠻)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자꾸만 과거로 회기하려 하고 있다. 수십 년이 지나서도 계속 야만과 대치해야하는 작금의 현실에 맞서 우리는 계속해서 투쟁하고 마침내는 승리할 것을 다짐한다.

 

변호사는 단순히 “타인의 송사(訟事)”만을 대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대리하면서 몇 배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번 워크숍은 보고 듣고 느끼는 시간을 거쳐 우리가 힘이 되어드리고자 하는 그분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보고 듣고 느껴서 담은만큼 무거운 마음을 금할 길 없지만, 변호단이 “일시적인” 부침을 겪고 있는 지금, 단단히 심신을 다잡고 도약할 수 있게끔 해주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화, 2015/08/25-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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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법 실무교육 수강 후기

안지희 회원

 

변호사시험을 치르고 방황하던 어느 날 민변에서 노동법 실무교육을 실시한다는 공고를 보았습니다. 노동법 공부를 해야 하는 줄 어떻게 알고, 할 일 없는지는 어떻게 알고 이런 찰떡같은 기획을 마련하셨는지. 감탄하며 회원신청서를 다운받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교육도 끝나버렸습니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밤에는 노동법 실무교육 덕분에 외롭지 않았는데, 아무 일정이 없는 화요일 저녁이 왠지 쓸쓸합니다.

1강부터 10강까지 모든 강의가 각자 훌륭했는데, 어떻게 후기를 작성해야 하나 난감합니다. 변호사님들의 강의력이 훌륭해서, 경험담이 재미있어서, 강의 자료가 좋아서…등등 강의마다 워낙 특색이 있어 하나씩 언급하기에는 자칫 길어질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강의를 들으면서 좋았던 점들을 편하게 털어놓음으로써, 강의를 준비해주신 변호사님들과 간사님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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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2017년 3월은 앞으로 어떤 법조인으로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막연하게 공익변호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구체화하고, 그동안 수험공부에 치여 미뤄두었던 노동문제를 나름대로 깊이 고민해보고 싶었습니다. 노동법 실무교육은 이런 시기에 필요하고도 유익한 강의였습니다. 수업 중간 중간에 선배 변호사님들께서 갖고 계신 문제의식과 고민들이 저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더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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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 현장에 가보니 비로소 서면을 제대로 쓸 수 있었다는 말씀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의뢰인이 하는 말만 듣고 서면을 작성하기 보다는, 직접 의뢰인이 일하는 곳에 가서 의뢰인이 어떤 일을 하는지 살펴보면 변론준비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록에 답이 있다.’ 시험을 볼 때는 그러했더라도 변호사가 되고나면 의뢰인과 함께 현장에도 가볼 수 있어야겠다고. 그렇게 조금 더 따듯하고 실력 있는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또 어떤 주장을 펼치기 전에 왜 그래야만 하는지 생각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조언도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철저하게 노동자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다가 빠지게 될 수 있는 오류를 항상 경계하라는 취지의 말씀이었습니다. 노동법을 공부하다가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고 상처받을 때가 있는데, 거기에서 나아가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연습이 부족했다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태까지는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것들에 대해서, 이번 실무교육을 통해서 왜 그래야만 하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시간이 쌓여 언젠가는 저도 선배님들의 지혜를 닮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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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가입 후 처음 참석했던 탄핵 촛불집회부터, 최근에 참여했던 강북월례회까지. 여러 기회에 변호사님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시간이 즐거웠지만, 노동법 실무교육은 그중에서도 가장 깊게 변호사님들과 소통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2시간 동안 준비된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 선배 변호사님들의 후배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전달되었습니다. 교육과정에서 배운 것들 열심히 복습해서, 그동안 변호사님들께서 짊어지신 무거운 짐을 후배로서 조금이라도 함께 들어드리고 싶다고 한다면 감사한 마음이 표현될까요. 2017년 3월 노동법 실무교육을 들었던 서초의 따뜻한 봄. 항상 기억하겠습니다.

화, 2017/04/2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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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 광주전남지부 총회 그리고 ‘의미가 되고 싶은’ 광주의 공익변호사 활동 들여다보기

글 정리 : 이혜정 변호사

 

  • 이야기 하나 : 광주전남지부 총회

2017. 2. 8. 쌀쌀한 저녁. 민변 광주전남지부에서 정기총회가 열렸다. 총회에는 대략 30여명의 회원이 참석하였고, 이 날 두 명의 신입회원이 가입하여 총 53명의 성원보고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총회가 시작되었다. 최근 광주지방변호사회 회장으로 당선된 최병근 변호사님과 정연순 회장님의 인사말에 이어 2016년 주요 안건과 사업에 대한 보고와 결산 및 세세한 평가가 이어졌다. 광주전남지부 총회를 위해 본부에서는 7명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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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적인 것은 신입회원에 대한 가입 승인과정이 본부와 달리 매우 엄격하다는 것이었다. 이 날 승인된 두 명의 신입회원은 가입신청서 제출 후 40여분에 이르는 집행부의 심층 압박 면접을 견뎌야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신입회원에 대한 보증 절차를 거쳐야 했고, 승인 전 표결을 위한 질의를 받은 다음, 6인 이상의 반대가 없으면 그제서야 비로소 광주전남지부의 정식회원이 되는 것이다! 이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는 의미로, 지부에서는 회원임을 인증하는 커다란 벽시계를 선물로 증정한다. 그 시계에는 “민변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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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당일 험난한 과정을 거쳐 신입회원 승인을 받고, 인증 시계를 수여받은 길탁균, 김춘호 변호사님

총회자료집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각종의 활동들이 지난 한 해 동안 지부가 얼마나 분주하게 공익을 위해 헌신하였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각종 사업보고에 이어지는 정량평가와 정성평가는 아주 세심하고 날카로웠다. 가령 2016. 공익소송기획에 대한 정량평가의 경우 5점 만점을 기준으로 공익소송 활동은 4점, 배당은 2점, 사건발굴은 4점을 부여받았는데, 양질의 사건을 발굴한 것이 높게 평가되었다. 회원사업의 보고는 회원 상호간 친목도모의 경우 배점은 7점이나 그 평가에 있어서는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점수를 줄 정도는 아니라고’ 자평. 또한 활동을 하면서 회원들이 자연스레 만나는 과정에서 인생의 동반자가 됐거나, 회원과 지부에 관심이 많은 비회원 간에 곧 결혼할 커플이 있었는데, 이러한 인연 뒤에는 회원사업단이 의미 있는 인과관계를 끼쳤다며 회원사업단의 업적으로 자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소 억지스러운 자찬을 의식해서인지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인과관계가 없다는 측의 항의를 우려해 각주처리를 하면서, 막연하나마 인과관계에 대한 근거를 곁들이며 설명한 것은 마치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게 하는 나름의 설득력이 있어 어느새 수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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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나면서도 따뜻한 정감이 느껴지는 총회자료집만 봐도 광주전남지부의 활동과 분위기가 얼마나 가족적이고 화목한지 추운 날씨 속에서도 절로 훈훈함이 느껴졌다. 6시가 넘어 시작된 총회는 8시로 넘어가자 식사를 위해 뒷풀이 장소로 이동했다. 숨소리마저도 크게 들릴 정도로 근엄했던 총회와 달리 뒷풀이는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즐거웠다. 지부 사회는 총회며, 뒷풀이며 정인기 변호사님 전담으로 보였는데, 진행이 깔끔하고 착착 진행되는 느낌에 감탄스러웠다. 김상훈 지부장님은 귀여운 얼굴을 더 돋보이게 하는 덧니가 매력적이어서 보기만 해도 웃음이 삐져나오곤 했는데, 그 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부장님의 그 덧니 뒤에는 또 다른 이가 숨어있는 게 아니라 익살스러움과 유머스러움이 한가득 자리 잡고 있음을. 특히 본부에서도 시급히 도입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 건배사 전의 지부장님의 호명 3창은 분위기를 흥겹게 달아오르게 하면서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었고, 서 있는 사람으로서는 짧게나마 건배사 멘트 준비시간을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친구따라 조건 없는 기부를 거침없이 하시고, 자그마한 얼굴에 우병우와 유재석, 최근 대한변협 회장으로 당선된 그 분의 얼굴까지 두루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그맨보다 더 웃겼던 강성두 변호사님, 지부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선한 아우라를 가진 임태호 변호사님, 소고기도 아닌데 겉만 익었다 싶으면 마구 먹어치우는 제 앞에서 연신 고기 굽느라 바빴던 박인동 변호사님, 가장 지부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부족했다며 활동이 뜸한 회원을 위축시키게 한 송창운 변호사님, 너무도 아름다우신 임선숙 변호사님, 광주지부 여성회원들은 어찌 다 그리 고우신지요. 이름만 접했을 때는 원로변호사님 같은 느낌이었는데 실제는 최강 동안인 이상갑 변호사님. 그가 있어 광주가 낯설지 않은 동기 김정우 변호사님. 지부를 든든히 지키고 있는 두상이 잘생긴 전직 락커 박상희 간사님 등 한분 한분이 그렇게 정겹고 그 시간이 너무도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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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 쪽 세 번째가 “웃기려고 하는 게 아닌데 여기저기 빵빵 터트리는 놀랍고 신비로운 일”(박상희 간사)을 일으킨다는 강성두 회원. 광주지부 제공

광주에서 발견한 것은 지부 회원들의 따뜻함만이 아니었다. 그 날 식당은 낙지마을로 예정돼 있었는데 실제는 낙지가 아닌 메뉴에도 없는 생뚱맞은 삼겹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낙지전문점인 그 식당에서 맛본 삼겹살은 그 동안 먹어 본 삼겹살 중 가히 최고라 말할 수 있었다. 역시 맛과 멋의 고장 광주는 남달랐다. 전공이나 전문이 아니더라도 최고의 맛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아마도 광주지부의 변호사들 또한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전문영역뿐 아니라 때로는 낯설고 막막한 공익사건을 마주할 때도 최고의 실력과 헌신으로 준비한다는. 광주는 이런 전통과 습관이 모든 곳에서 자연스레 베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으면서도 불의 앞에 당당했던 민주화의 성지 광주는 지부 회원의 면면 속에 그대로 담겨있었다. 따듯한 추억 한아름을 선물해 주신 광주전남지부 회원여러분, 정말 감사드리고, 5월 총회에서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겠습니다!

  • 이야기 둘 : 광주전남 지부 속 공익전담 이소아 변호사의 사는 이야기

이혜정 : 오랜만입니다. 모르는 회원들도 있으니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이소아 : 안녕하세요?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의 이소아 변호사입니다. 저희 단체는 수도권을 벗어난 지역, 특히 인권의 도시 광주에서 공익인권 전업으로 법률지원을 하는 비영리단체이구요. “존엄과 권리를 상실한 이들 곁에서 바라보는 귀, 듣는 눈으로 들어 법의 목소리로 세상에 전달하고자“하는 지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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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정 : 서울에서 활동하다 광주로 가셨는데 광주에서의 근황은 어떤가요.

이소아 : 2013년 광주에 내려오면서 개인적으로는 정말 많은 일이 있어서 정신없이 지냈어요. 친정 부모님 두 분이 모두 편찮으셔서 간병을 해야 했고, 지난 가을에는 아빠가 돌아가셨구요. 아이를 낳게 된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생활에 있어 변수는 더 많아지는 것이니까요.그래도 뭐 어찌어찌 다~ 어떻게 지내왔어요. 주변 분들의 도움도 컸고, 신랑의 도움도 컸구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오히려 미리 걱정하는 버릇이 줄어들었어요. 미리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두더지와 같은 근시안으로 살기로 했어요. 닥친 일을 하나씩 해나가는 걸로. 일적인 측면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지요. ‘동행’이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으니까요. 처음 이 일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부정적인 전망도 많았어요. 광주는 도시 자체가 생산 도시가 아닐뿐더러 후원에 대한 시민의 인식도 상당히 박하거든요. 또 변호사가 왜 굳이 비영리단체의 상근변호사로 일하냐, 그냥 지금처럼 자신의 사무실에서 좋은 일하면서 지내면 되지 하는…. 그런데 사실 저는(이런 말 하면 겸손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뭔가 잘될 것 같은, 잘 해낼 것 같은 자신이 있었어요. 제가 광주에 내려와서 계속하여 접촉했던 인권단체들은 법률전문가의 결합에 매우 목말라 하고 있었고, 지역에도 지역 고유의 여러 가지 인권 이슈들이 있었거든요. 저는 서울에서 계속 단체 내 상근변호사로 일을 했었기에 이를 어떻게 하면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고 있고, 이를 잘 엮어낸다면 시민들에게도 후원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현재는 약 170명 정도의 후원회원들이 계시고 월 약 300만원 정도의 정기 후원금이 들어오는 단체로 성장했어요. (지역에서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이 정도 규모로 성장한 비영리단체는 없답니다)

이혜정 : 와 대단하시네요. 광주에서 공익전담으로 전업하게 된 과정과 동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소아 : 제가 올해 9년차 변호사인데, 해마루 광주분사무에서 근무했던 1년 반 동안만 로펌에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단체 내 상근변호사로 있었어요. 그러니 해마루에서 공익전담으로 전업을 했다기 보다는, 공익전담으로 다시 복귀를 했다고 보시면 되어요. 저는 연수원을 수료하자마자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성매매피해여성을 위한 ‘다시함께센터’에서 일을 했고 아파서 잠깐 쉬다가 2011년 5월에 민변에 상근변호사로 들어갔었지요. 왜 공익전담으로 일을 하냐고 물으신다면…. 그게 저한테 재미있고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얼마 전에 제가 2004년도에 적었던 일기장을 보고 웃었던 적이 있어요. 당시는 제가 사법시험 1차에 여러 번 떨어지고 마음속으로 굉장히 지쳐있던 상황이었는데, 1년 후, 5년 후, 10년 후, 30년 후, 계획을 써놨더라구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왜 하고 싶은가, 어떻게 이룰 것인가 순으로….5년 후 계획이 단체 상근변호사로 일한다, 10년 후 계획이 뭐더라… 이거랑 비슷한 거였는데… 아무튼 그때 왜 하고 싶은가를 적는 칸에 “의미가 되고 싶어서”라고 써있더라구요. 당시에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상태라 인정욕구가 정말 강해서… 그런데 지금은 이유를 바꾸고 싶어요. “재미있게 살고 싶어서”라고.

그리고 광주에서 변호사가 상근하는 비영리단체를 만든 이유는 간단해요. 필요하니까. 그리고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광주에 내려와서 1-2년 동안은 앞에서 말했던 개인사 때문에 돈이 좀 많이 필요해서 로펌에 잠시 있었지만, 광주에 내려오면서부터 제 마음 속에 광주의 공감 같은 단체를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지요. 그래서 광주지역 인권단체 현황을 계속 알아봤었어요. 그냥 먼저 전화하거나 찾아가서 저를 알리고 함께 일할 부분 있으면 함께 하자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1년 반 이상 네트워킹을 쌓아갔어요. 그러던 중 마침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공익전업변호사 자립지원사업 공모전을 하는 거에요. 2년간 변호사의 급여를 어느 정도 지원해주는 거에요. 기회다 싶어서 바로 단체를 만드는 것을 실행에 옮겼지요. 실질적으로 단체를 만드는 부분은 ‘희망법’이나 ‘감사와 동행’, 법률사무소 ‘보다’, 이주민센터 ‘친구’등에 의견을 구하면서 진행했구요. 결국 저 혼자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이혜정 : 그러면 공익 전담을 결정했을 때나, 현재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어려움이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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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 전담을 결정했을 때 어려움은, 제가 광주에서 공익전업을 다시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무래도 신랑이 약간 당황했었어요. 전보다 줄어들긴 했지만 엄마 간병비 등 계속 고정적인 목돈이 들어가거든요. 그래도 결국 흔쾌히 받아들여줬고, 이제 시아버님과 시누이도 저희 단체의 든든한 후원자세요.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는 법원에서 실무자가 화난 목소리로 전화해서 변호사를 찾을 때, 제가 변호사라고 했더니 목소리 톤이 바뀐다거나… 하는. 단체의 실무자가 없어서 모든 실무를 제가 직접 하는데, 제가 숫자에 어두워서 홈택스 등 세무 신고에서 오류가 날 때. 뭐 그럴 때.

이혜정 : 현재 주로 진행하는 공익 사건은 어떤 사건들인가요.

이소아 : 장애인권 관련해서 근육병 환자가 노인장기요양등급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활동보조서비스를 신청할 수 없게 되어있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활동보조서비스 변경신청 거부처분 취소소송, 성매매 피해 여성에 대한 사건들 중 특히 태국 여성들이 한국에 데려와져서 성매매를 하도록 강요당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는데 그 여성들에 대한 지원, 뇌전증 환자 장애등급변경취소소송, 결혼이주여성의 이혼사건, 이주노동자의 난민불인정처분취소소송, 장애여성에 대한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원, 국가보안법 형사변론, 세월호 현장에서 70일간 근무하다가 자살하신 진도경찰분 유족의 유족보상금거부처분취소소송 등…. 뭐 지금 생각나는 건 이 정도입니다. 올해에는 주로 장애인권분야와 이주노동분야에 집중하려고 해요. 농업법률분야도 신경 쓰고 싶은데 아직 여력이 없네요.

이혜정 : 다양한 사건들을 두루 하시네요. 광주에서의 공익사건 현황이나 루트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이소아 : 주로 단체들을 통해서 진행돼요. 성매매피해여성상담소, 성폭력 상담소, 장애인권센터,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발달장애지원센터, 이주노동자 상담소 등. 저희 단체가 상담소처럼 붙박이로 상담하는 인력이 배치될 수는 없는 구조여서 개인이 직접 찾아오시는 경우는 아직은 잘 없어요.

이혜정 :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이소아 : 2014년 겨울 여수의 한 유흥주점에서 여성종업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이 사건은 원래 조용히 묻힐 뻔했는데, 함께 일했던 동료 여성 9명이 업소를 나와 광주에 있는 언니네 상담소에 제보를 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어요. 보통 다른 성매매 관련 사건의 경우 동료들이 이렇게 증언해주지 않아요. 왜냐하면 어찌 되었건 간에 자신의 생계가 달렸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사건의 경우 9명의 여성 모두가 업주의 끈질긴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고 일관되게 증언해 주었어요. 9명의 여성은 수사과정에서만도 각 2-3회 조사를 받았고, 재판 과정에서도 업주가 혐의를 부인해 모두 법정에서 2-3시간씩 증언을 했었거든요. 그 과정이 언니들에게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증언을 해주었어요. 그래서 업주들도 상당한 처벌을 받았구요.

여수 여성 사망 사건 언니들의 손

‘여수 여성 사망사건’에서 흔들림 없이 증언했던 ‘언니들’의 손. 이소아 변호사 제공

이 사건은 제가 일을 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여성들이 용감하게 증언을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사건이어요. 그래서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그리고 진도 경찰분 유족보상금거부처분취소소송 1심에서 승소했을 때, 1심만 거의 2년이 걸렸는데요. 당연하고 마땅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심리적 부검이라는 입증방법에 대해서 고민도 많이 하고 여러 가지 자료도 많이 찾아보았던 사건이라 보람이 되는 사건이었어요. 아직 2심이 진행 중이긴 하지만요.

이혜정 : 활동가와 변호사 그 경계선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차이가 있나요?

이소아 : 변호사와 활동가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거죠. 활동가는 그 문제에 전면적으로 결합하게 되는 부분이 있어요. 활동가로서 당사자, 단체 분들과 함께 가며 일을 진행하는 방식이 저와 맞아요. 반면 변호사로써 거리두기가 필요한 경우도 있어요. 그래야지 나의 전문성이 인정받고, 내가 제출하는 서면에 힘이 실리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이 부분의 강약을 조절하기가 참… 힘들어요. 그럼에도 당사자, 단체 분들과 ‘함께’ 가는 것이 좋아요. 법률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거든요. 저는 ‘내가 이 문제 전체를 해결하겠다.’라는 마음으로 일하지는 않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해야 할 부분을 다하는 것일 뿐이지, 그 결과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이혜정 : 광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이소아 변호사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든든하네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혜정 : 저희 단체가 광주에 있긴 하지만 저희가 다루는 인권 이슈들이 단지 광주에만 한정되는 문제들이 아니에요. 장애인권, 이주노동자 인권도 마찬가지로 저희가 다루는 문제들이 결국 관련한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일들이더라, 그래서 인권의 연대의 중요성에 대하여 새삼 깨닫게 돼요. 광주전남지역에 사는 분이 아니더라도 저희 단체가 다루는 문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후원을 해주시길 바래요. 여러분의 후원이 작지만 커다란 변화를 이끌어낼 원동력이 될 것이거든요. 후원신청은 www.companion-lfpi.org 홈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간편하게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금, 2017/02/10-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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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위 워크샵 소식

 

국제통상위는 2015. 7. 17.∼18. 경기도 용인 파운타운에서 워크샵을 가졌습니다. 다들 업무로 바쁘신 가운데에도 준비를 많이 해 주셔서 1박 2일의 일정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워크샵 발제를 나누는 과정에 발제부분보다 참가자가 많은 초유의 사태가 벌어져 사다리타기를 통한 엄정한 분배로 발제를 맡지 못하신 분들을 위로할 수 밖에 없는 뒷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우선 워크샵의 꽃인 발제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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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ISDS) 제도론중에서 김종우 변호사님께서 ISDS 분쟁해결절차 일반론을, 임영환 변호사님께서 ICSID 중재절차에 관한 연구 부분을, 오현정 변호사님께서 ISDS와 최종성의 원칙 부분을, 차명심 변호사님께서 ISDS와 투명성 확보를 위한 국제적 논의 부분을 맡아서 발제를 해 주셨습니다.

 

다음으로 ISDS 비교 및 사례연구와 관련하여 박삼성 변호사님께서 우리나라가 체결한 국가별 투자협정에 포함된 ISDS 규정의 비교, 분석 부분을, 노주희 변호사님께서 미국투자자들이 세금 부과한 멕시코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ISDS 사례 분석 부분을, 박일지 변호사님께서 사법작용에 관한 ISDS 사례 분석 부분을 발제하여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송기호 변호사님께서 TPP의 현황과 대응과제를 발표하시면서 워크샵 1부의 막을 내렸습니다.

 

노주희 변호사님의 국민MC급의 사회로 발제를 마치고 드디어 바비큐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우를 가져오신 임영환 변호사님께서 직접 요리까지 담당해주시는 멋진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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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샵 뒷풀이의 메인 음료는 역시 요즘 대세남인 백종원표 수박소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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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과 음료가 있는 베란다에서 신입 이연지 변호사님, 오현정 변호사님의 소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뒷풀이가 시작되었고, 밤 깊은 시간까지 멋진 음악을 배경으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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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가볍게 아침을 먹고 산책을 하며, 다음 워크샵을 기약하면서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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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5/08/1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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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1일 오전, 대림에 위치한 공공운수노조 건물이 시끌벅적해졌습니다. 민주노총 법률원의 원장으로 임하고 계신 권두섭 변호사님을 만나기 위해 모여든 인파 때문인데요. 이 날 인터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민변 자원활동가 14기 다섯 분이 오셨습니다. 인터뷰를 진행할 저와 간사님들까지, 총 8명의 눈과 귀가 권두섭 변호사님을 향하게 된 것이죠.

민주노총 법률원 10주년에 맞춰 출간되었던 「노동자의 변호사들:대한민국을 뒤흔든 노동사건 10장면」에도 잘 소개되어 있듯이 법률원은 한국사회 굵직한 노동사건을 도맡아 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권두섭 변호사님은 초대 구성원으로써 법률원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함께 해 오신 분이십니다.

마치 노동법 강의와도 같았던 이번 회원 인터뷰. 한 번 들여다보실까요?

 

노동변호사로서의 삶

 

조영신 : 먼저 법률원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권두섭 : 법률원이 생긴 건 2002년 2월 1일입니다. 형식적으로 보면, 법률원은 민주노총의 정책연구원처럼 부설기관으로 되어 있는데요, 현재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에 개별 법률원이 있고, 지역에는 광주에도 법률원이 있습니다. 금속노조의 지역사무소로 창원에 경남사무소가 있고, 올해부터는 충남에도 법률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전교조에는 강영구 변호사님이 가 계시고, 사무금융노조에는 차승현 변호사님이 가 계십니다. 이 분들 또한 법률원 소속이에요.

이렇게 흩어져 있는 것 같지만 재정은 하나로 통합이 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 변호사 수만 21명 정도이고, 전체 구성원은 45명입니다.

 

조영신 : 「노동자의변호사들」에 보면 변호사님을 인터뷰하며 당황하는 최규석작가의 모습이 나오기도 해요.

 

권두섭 : 너무 재미가 없어서 그래요(일동 웃음). 미국영화에 나오는 것 같이 드라마틱하게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힘들고, 말을 재미있게 하지 못하는 편이에요.

 

조영신 : 한 편으로 ‘노동변호사’라는 표현에는 어느 정도 과격하기도 하고, 목소리에 힘을 넣어 발언을 하는 사람이 떠오르는데 변호사님은 그런 부분과는 거리가 멀어 보여요. 조용한 성격 때문에 힘들었던 점은 없나요.

 

권두섭 : 그건 편견이에요. 노동조합이라고 하면, 경험해보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붉은 머리띠에 조끼를 입고 주먹을 쥔 팔을 들어올리는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이지요. 투쟁하는 모습만을 떠올려요.

실제로 한국처럼 노조를 하기 어려운 곳의 경우, 독립운동을 한다는 마음으로 노조활동을 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반노조 인식이 강해서 그런 것이죠. 그러다보니 ‘과격’과 같은 편견을 갖게 된 것이죠. 노조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저도 제 조용한 성격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없었고요.

 

노사정 ‘대’타협? 그 속을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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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신 : 2015. 9. 15. 노사정 합의가 이뤄졌죠. 그 이후 전반적인 노동계의 분위기가 궁금합니다.

 

권두섭 :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정부에 민원을 넣은 적이 있었어요. 그 민원사항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노사정 야합에서 합의됐던 내용들이 다 전경련의 요구사항들이에요. 그 요구사항을 그대로 관철시키는 내용이었던 것이죠.

야합이 있은 후 며칠 뒤에 새누리당이 그 내용을 골자로 노동법개정안을 발의했어요. 그대로 통과된다면 노동법이 무력화되고 노조가 무력화되는 한국사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의 노조조직률은 10%밖에 안돼요. 것도 노조가 강력해서 미조직노동자에게까지 단체협약이 적용될 여지가 있는 상황도 아니죠(프랑스의 경우 노조와 사용자가 체결한 단체협약을 지자체의 결정으로 지역에 확대적용이 가능하다). 즉, 노조조직률이 낮은데다가, 노조가 단체협약을 맺는다 하더라고 같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미조직노동자들에게는 적용될 여지가 없는 거예요. 결국 노사정야합의 내용이 그대로 관철된다면 더 쉬운 해고, 더 낮은 임금, 더 많은 비정규직을 양산할 뿐이고 노동법과 노조가 무력화되는 상황이 만들어지겠죠.

 

조영신 : 노사정 합의의 내용이 무엇인지 점점 궁금해지는데요, 먼저 그러한 합의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권두섭 : 2014년 12월에 고용부가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내놓았습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고용불안정으로 인한 노동기본권 보장, 간접고용의 경우 사용자의 책임이나 차별적인 임금 등 비정규직과 관련한 문제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정부에서 내놓은 종합대책이라는 것의 내용을 들여다보니 이러한 문제들을 개선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대량 생산하기 위한 내용들만 가득했어요.

그리고 2015년 상반기에 단체협약시정지침이라는 것이 노동현장에서 공공연하게 돌았어요. 그게 갑자기 왜 나오게 됐냐하면, 그 기사 기억나실지 모르겠네요. ‘고용세습조항’이 단협에 들어있다는 내용으로 연일 신문에 보도됐던 적이 있죠. 실제로 들여다보면 그런 단협을 가지고 있는 노조가 없어요. 정년퇴직한 노동자들의 자녀에 대해서는 그 회사에 지원했을 때 가산점을 준다? 그런 조항은 없어요. ‘산재로 사망한 유족에 대해 일자리를 알선해준다’는 내용이 주로 있을 뿐이죠. 이 조항은 대법원에서도 효력이 있다고 판결한 바 있어요. 적법한 단협조항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노동부가 교묘하게도 ‘위법은 아니나 경영권을 저해하기 때문에 불합리한 조항’이라는 식으로 지침을 만들고, 현장에 이러한 단협이 있는지 조사하고 개선하도록 지도하라고 한 거예요.

속된 말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합니다. 현장에서 지침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주먹을 휘두르는 것과 같아요. 그 부당성을 다퉈 법원으로 가더라고 판단받는 데에는 수년이 걸리니까 법은 멀기만 하죠. 그런 ‘주먹’같은 지침을 내려서 관련 단협 조항들이 현장에서 유지되는 것을 막고, 이미 체결된 경우에는 그 조항을 없애도록 하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9월 15일, 노사정 야합이 있었고, 그 이틀 뒤에 새누리당이 법안을 발의했죠. 이렇게 일련의 움직임을 가지고 나온 결과인 것입니다.

 

조영신 : 이미 이전부터 노사정 합의를 위한 준비과정이 있었던 거네요. 도대체 그 합의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권두섭 : 가장 큰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역시 ‘해고’부분입니다. 노동법 교수님들이 늘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노동법을 보면 근로기준법부터 시작해서 몇 천 개의 조항들로 이뤄져 있는데, 그 중에서 노동자들이 마지막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근기법 제23조,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할 수 없다’는 내용이라는 것이죠.

 해고제한조항이 없는 노동법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 조항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입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기 위해 15년 전부터 엄청난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도 조직률이 늘지 않아요. 1.5%~2% 정도밖에 안됩니다. 기사를 봐도 현재 투쟁하고 있는 노조는 대부분 비정규직 노조인 것 같지요? 그런데도 그 정도밖에 안됩니다. 생겼다가 깨지고, 또 생겼다가 또 깨지기를 반복해서 그래요. 쉬운 해고가 가능하기 때문이죠.

이번의 야합은 정규직노동자도 그렇게 하겠다는 거예요. ‘저성과자해고’라는 이름으로, 공정한 평가기준을 만들겠다고 말하죠. 노동현실을 모르는 판사나 일반국민들은 ’그래, 사용자가 꼭 저성과자들을 다 안고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럴듯하게 보일 수 있어요.

실제로 현장에서 성과를 평가하는 기준들을 보면, ‘리더십, 업무적극성, 원만한 소통, 창의적인 마인드’ 같은 것들이에요. ‘물건을 몇 개 팔았냐’와 같이 실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극소수죠. 대부분은 주관적인 평가가 이뤄질 수밖에 없어요. 이러한 평가는 사측이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다 보니, 결국 공정한 평가기준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게다가 모든 평가라는 것은 언제든지 하위권자를 발생시켜요. 예를 들어 사측이 100명을 구조조정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60점 이하인 사람을 100명 만들어낼 수 있어요. 6개월 정도 교정기회를 주겠다(연수와 같은 식으로 교육을 시키겠다)고 하는데, 재평가를 했을 때 또 그 점수를 받으면 근기법 23조의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버리는 것이죠. 평가기준이 공정했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노동사건을 15년간 해 왔지만, 평가가 부당한 것을 다퉈서 이건 적은 거의 없습니다. 평가한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는 없기 때문이죠.

 

조영신 : 그런 경우 법원에서는 어떻게 판단을 하나요.

 

권두섭 : 법원은 대량관찰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노조 간부들을 승진시키지 않아서 부당노동행위가 문제됐던 사건에서 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승진에서 누락된 사람 100명 중 노조간부나 조합원이 60명이고, 그 회사의 노조 조직률을 보니 1000명 중 600명이 가입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법원은 승진누락률이 노조조직률에 비해 높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봐요.

반대로 조직률은 20%(1000명중 200명)인데, 승진누락자는 60명이다. 그러면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부당노동행위라고 보는 것이죠.

결국 사용자 입장에서 보면, 법원이 말하는 ‘균형점’에 해당하는 인원에 조합원들을 적절히 섞기만 하면 돼요. 법원이 취하는 대량관찰방식에 따르면, 균형만 이뤘다면 공정한 평가에 의한 것인지 불공정한 평가에 의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조영신 : 하지만 이러한 합의의 내용은 근기법 23조에 위반되는 불법적인 지침일 뿐이지 않나요.

 

권두섭 : 해고된 노동자 100명이 있다면 그 중 몇 명이나 소제기를 할까요. 아주 극소수의 노동자들만 가능합니다. 비용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하니까요.

부당하게 평가가 이뤄져서 해고됐다고 해도 그 사건이 법원에서 다뤄질 가능성은 굉장히 낮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노동부가 지침을 만들어서 법보다 가까운 주먹으로 접근하는 것이죠. 90%의 미조직 노동자들은 그냥 당할 수밖에 없어요.

9월 13일에 합의하고 15일에 도장을 찍었는데, 야합 직후 사용자들이 모인 간담회 자료를 보니, 이미 저성과자해고제도 가능해졌다고 교육을 하고 있더라고요. 노동자들에게는 이러한 지침이 법처럼 강제돼요. 그래서 우려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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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신 : 그렇군요. 노사정합의의 다른 내용들도 말씀 부탁드립니다.

 

권두섭 : 해고 다음으로 문제되는 부분은 취업규칙에 대한 내용이에요.

취업규칙이 중요한 이유를 쉽게 설명하자면, 노조가 있으면 단협이 있죠. 그런데 노조조직률은 10%밖에 안되니 나머지 90%는 모두 취업규칙의 규정에 따를 수밖에 없어요. 설사 노조가 있어서 단협을 체결했다 해도 단협조항은 보통 100개 정도밖에 안되니까, 노동조건의 상당수는 취업규칙이 규정하게 되는 것이죠.

이번 야합에서는 이러한 취업규칙을 불리하게 변경하는 데에 동의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어요.

근기법 제94조에서는 취업규칙을 불이익하게 변경하는 경우 집단적 동의를 받게 되어 있죠. 과반수노조가 있으면 노조의 동의, 없으면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야 해요. 그것도 노동자들이 전체 모인 상태에서 사용자가 취업규칙 개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후 사용자가 배제된 상태에서 자유롭게 논의하고 찬반을 결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고치지 않은 불이익변경은 무효에요.

물론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다면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법입니다. 이에 대해 판례는 엄격하게 제한적으로 해석해요. 일례로, 한 공기업에서 수년간 적자가 누적되자 정부가 지침을 바꾸라고 요구해서 공기업이 취업규칙을 개정했어요. 이에 대해 대법원은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즉, 수년간 적자가 누적되었다 하더라도 사측의 일방적인 취업규칙 개정의 경우 사회통념상 합리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판례의 태도를 확대해석해서 마치 이러이러한 경우에는 합리성이 있으니까 이러한 요건을 갖추면 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사측이 일방적으로 취업규칙을 불이익변경할 수 있다고 해석하면 안돼요. 그러면 90%의 미조직노동자, 특히 중소영세사업장의 노동자들에게는 심각한 타격이 될 수 있으니까요. 결국 근기법 제94조는 노동자들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절차규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무력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이번 야합의 골자로 들어가 있으니 반대할 수밖에 없죠.

 

조영신 : 그렇군요. 취업규칙과 해고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그 밖에도 이번 노사정 합의 내용 중 알아야 할 부분들이 있을까요.

 

권두섭 : 임금피크제와 비정규직 연한 연장, 파견도급구분 기준 정도의 내용이 더 있습니다.

먼저 임금피크제의 경우, 정부는 정년을 연장하면서 임금피크제를 병행하는 방안을 내놓고 있어요.

예를 들어 58세부터 정년이 2년 연장된다면 200%의 임금이 늘어야 해요. 그런데 임금피크제를 적용한다면 계속 임금이 깎여서 결국 깎이는 임금이 200%인 상태가 되죠. 노동자 입장에서 보자면, 일을 2년 더 하는데 임금은 계속 깎여서 무료노동을 하는 셈이 되요.

그러니까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영미법의 경우 아예 정년제도를 무효라고 봅니다. 연령차별로 보기 때문이죠. 독일이나 프랑스의 경우에는 연금수급연령이하로 정년을 두면 다 무효에요. 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의 정년은 용인해주는 셈이죠. 이 국가들의 연금수급연령은 70세 정도입니다.

한국의 경우 현재 연령수급연령이 61세죠. 그런데 58세부터 60세까지가 임금피크가 적용되는 연령대에요. 사실, 58세까지 일하는 노동자도 소수죠. 대부분은 ‘사오정’이라고 해서 40대에 구조조정으로 명예퇴직이나 희망퇴직, 정리해고로 쫓겨납니다. 정년까지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실상인데 이런식으로 정년을 연장해줄테니 임금피크게 하자고 여론을 호도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음으로 비정규직 대책의 경우, 이번에 야합에서 내놓은 방안은 비정규직 연한을 4년으로 연장하는 내용이에요. 고용부에서 여론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80~90%의 계약직노동자들이 연장하는 정부정책에 동의했대요. 그래서 질문을 살펴보니, ‘2년하고 짤릴래요, 2년 연장해서 4년 일할래요’의 수준이더라고요. 그러면 당연히 연장을 선택하겠죠.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서 해당 조항의 본래 취지는 비정규직으로 고용해서 2년보다 더 고용하려면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라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취지대로 잘 되지 않고 있다면 정규직전환을 강제하는 수순을 밟아야 상식적이죠. 설문의 내용도 ‘2년 후 정규직 될래요, 아니면 2년 더 연장해서 비정규직으로 4년일할래요(그런데 4년 후 짤릴 수 있어요)’라고 했어야 해요.

노동통계하는 분들의 말에 따르면, 기간제법 시행 이후 미미하긴 하지만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있었어요. 보통 무기계약직, 즉 ‘중규직’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지만요. 그런데 야합의 내용대로 된다면, 이제 사측이 절대 전환시키지 않겠죠.

2년 일하다 짜르고 또 사람 뽑으려하니, 이제야 기존에 뽑았던 사람들이 일을 좀 할 만 하니까 교체하는 셈이 돼서 부담이 있었는데, 4년으로 연장되면 그런 부담이 적어지잖아요. 결국 전환률이 줄어드는 것은 불 보듯 뻔하죠. 결과적으로 이것은 기간제 노동자의 희망고문 기간만 늘이는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파견도급구분기준에 대한 내용을 말씀드릴게요. 이 부분은 민변에서 의견서를 발표하기도 했던, 굉장히 심각한 내용을 답고 있어요. 현재 재벌회사들이 공공연하게 시행하고 있는 사내하청을 완전히 합법화시키자는 내용이거든요.

현대기아차, 삼성, 에스케이, 포스코 등 재벌회사들은 거의 다 불법파견으로 걸려있는 상황이에요. 결국 재벌들이 민원을 넣어서 만든 법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불법파견을 완전 합법적 도급으로 둔갑시키는 안입니다.

 

노사정 ‘야합’의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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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신 : 들어보니 근기법 제 23조, 94조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으로 보이는 내용도 있고, 기간제법의 취지에 맞지 않는 내용들도 많아 보이는데요. 무효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을까요.

 

권두섭 : 야합의 내용은 합의사항일 뿐 법적효력이 없기에 법적으로 무효화될 수가 없습니다. 구체적인 케이스가 있을 때만 대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업이 저성과자 해고를 했다고 칩시다. 해고된 노동자가 법원에 소제기를 했습니다. 이 경우 사측이 주장할 것은 뻔합니다. ‘노사정이 합의한 사항대로 한 것이다’고 주장하겠죠. 만약 법원이 ‘이러한 해고도 가능하다’고 해석해버리면, 입법화되기도 전에 판례법으로 굳어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노동부에서 용역을 준 연구자료들을 보면, 근기법 개정을 요구하게 되면 모든 논의가 그 조항으로 블랙홀처럼 빨려드니까 지침을 통해 완화해야 한다고 나와요. 또 그 지침이 노동현장에서 정착하면 법원에서도 받아들이게 되어 판례가 나오니, 국회의 입법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입법을 한 효과를 볼 수 있게 되니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이죠.

 

조영신 : 법원에 이번 합의에 손을 들어주는 판례를 내놓을 것으로 전망하시나요.

 

권두섭 : 그런 판례가 나오면 안되겠죠. 하지만 장담을 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조영신 : 새누리당이 발의한 근기법 개정안이 이번 회기에 통과될 것으로 예상하시나요.

 

권두섭 : 잘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민변 노동위원회 중심으로 TF팀을 꾸려서 입법의견서를 내며 대응을 하고 있습니다. 민주노총에서도 11월 14일에 총궐기를 예정하고 있고, 법안이 상정되면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발표한 상태입니다. 국회에서 어떻게 처리될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영신 : 지난 노사정 합의 때, 한국노총 조합원이 몸에 신나를 붓고 분신을 시도해서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했었는데요. 노사정 합의사항이 법원의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면, 왜 민주노총이 그 합의 테이블에 나가지 않는 것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권두섭 : 민주노총에서는 대의원 결정으로 노사정 합의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해 왔습니다다.

기본적으로 노사정위원회라는 것은 그 취지에 맞게 사회적 대화기구 혹은 교섭기구로서 운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노조의 힘이 강력해야 하고, 합의가 됐을 때 국회에서 관철 될 수 있는 정치적 세력화가 되어 있어야 하죠. 독일의 경우,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로 집권이 가능할 정도로 노조의 힘이 강력합니다. 그래야만 균형성 있는 합의가 가능해지는 것이고요.

그런데 한국사회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노동자가 사실상 들러리로 이용됩니다. 논의의 내용자체를 봐도 그렇지 않습니다.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것들이 가득한데, 그 논의 테이블 자체가 균형을 잃은 상태이니 들어가 봤자 뻔한 진행이 아니겠습니까.

민주노총이 설사 들어가 강력하게 반대를 했더라도 정부는 한국노총을 끌어당겨 합의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국 총연맹과 총연합이 정부가 하려는 노사정 합의의 외피를 씌워줄 뿐인 것이죠.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국회 내의 특별기구라든지 여러 통로를 이용해서 정부와 노정교섭을 하자는 요구를 해오고 있습니다. 노사정 위원회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위의 이유일 뿐입니다.

 

조영신 : 이렇게 노동계에 시급한 현안들이 많이 있는데요. 민변회원인 변호사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이 있을까요.

 

권두섭 : 일단 한국사회에서 노동자가 힘을 가지려면 노조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조합원으로 가입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어야 합니다.

최근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큰 이슈가 됐었죠. 그런 일이 생기기 이전에 삼성에 자주적인 노조가 있었다면 막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요. 환기시설도 없는 작업공간에서 무슨 냄새인지도 모른 채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작업을 했던 수많은 노동자들도 노조가 있었다면 환경개선을 요구하고 현장조사를 요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대응을 통해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 아닙니까.

민변의 천 명이 넘는 변호사들이 어디 가서라도 ‘우리 사회에는 노조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하고 다녀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변호사들이 말하면 설득력있게 들릴 수 있지 않을까요. 설이나 추석같은 명절에 고향에 내려가서도, 무슨 모임에 가서도 노동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그래서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대화를 하지 않다보니 우리 사회가 이렇게 극단적인 불균형 상황이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천막을 치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 아닐까요. 대화가 안되니까요. 일방적으로 탄압만 받으니까요.

왜 노조는 그렇게 극단적으로 투쟁만 하냐고 비판할 게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이 모두 노조를 만들어서 길가는 사람 중 70~80%는 모두 조합원이 되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뭐, 민변 노동위원회는 워낙 현장에서 발생하는 현안이나 노동개악 문제에 대응활동을 열심히 하고 계시니 더 바랄 것도 없습니다. 계속, 지금까지처럼 잘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일동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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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권두섭변호사님과의 노동법 강의와 같았던 인터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아! 함께 강의를 들었던 민변 14기 자원활동가 분들과 간사님들의 질문타임이 있었네요. 그럼 못 다했던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겠습니다.

 

 14기 자활 강한성 : 삼성의 경우 대외적으로 무노조경영을 천명하고 있고, 노조 결성시 불이익을 주는 기업으로 유명합니다. 노조결성의 권리를 뺏겠다고 대놓고 말하는 기업인 것인데,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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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섭 :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상 부당노동행위입니다. 명백한 지배개입행위이죠. 2년이하의 징역 혹은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범죄행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범죄행위를 공공연하게 해도 처벌이 안된다.

예전에 삼성 모계열사에서 노조설립을 하려고 민주노총에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삼성이 노조를 만들려 한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치기 위해 저와 산별노조에서 한 명, 총연맹의 조직가 한 명, 이렇게 총 세 명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노조설립신고증 나올 때까지 공개하지 않으려고요.

그렇게 준비를 해서 설립신고를 딱 했는데, 바로 미행이 따라붙었습니다. 설립신고 내려면 노조위원장 이름을 써야 하는데, 그걸 보고 바로 안 것이죠.

당시 고대 총학생회의 도움을 받아 조합원 간부들이 총학생회실에 머물렀습니다. 왜냐면, 삼성에서 조합간부들을 회유하기 시작하거든요. 우리끼리는 이걸 두고 ‘납치한다’고 말해요. 중국에 데리고 가기도 하고, 그 분들은 강원도에 갔다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돈이 오갈 수도 있고, 협박이 있을 수도 있고요.

설립신고를 하고 나서 3일 안에 설립신고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반려가 된 거예요. 우리는 강남구청에 접수를 했었는데, 우리가 접수하기 20분 전에 중구청에 회사 과장 몇 명이 신청한 노조설립신고가 접수돼버렸던 것이죠. 그렇게 비밀유지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시간조작 의심을 강하게 가졌고, 소송까지 준비했어요.

그런데 조합원들이 사라졌어요. 부당노동행위를 다투려면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그 주체들이 사라진 거예요. 또 지배개입증거를 찾아 입증을 해야 하는데, 주체가 사라지면 검찰이나 노동부가 맡아야 해야 하지만, 안하죠 그 사람들이.

보름쯤 지나서 조합 간부들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미안하다고. 같이 못해서 미안하다고. 결국 노조설립이 와해됐어요.

14기 자활 김서영 : 국내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계신데요, 이분들에 대한 지원현황을 물어보고 싶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기업이 외국에 나가면서 인권문제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에 대한 국내 법률가들의 활동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권두섭 : 이주노조는 몇 달 전에 설립신고를 받았죠(무려 10년 만에 받아냈다).그런데 아직은 조직화가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개별 사업장에서 노조를 만들어야 하는데 잘 되지 않는 것이죠. 이주노동자들에게도 근기법이 적용이 됩니다. 법원이 판례를 통해 그렇게 말했어요.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현장에서 실제로 그 보호를 받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노조가 있어야만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생각만큼은 잘 조직이 되지 않고 있네요.

그리고 민변 노동위원회에는 이주노동팀이 있고 국제노동팀도 있습니다. 이 곳에서 한국 기업의 외국에서의 사례나 한국 내 이주노동자에 대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에게 상담과 법률지원을 하는 법률가 지원단체들도 많고, 법제도 개선을 위한 활동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유진 간사 : 사법시험 보기 전부터 노동변호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셨나요.

 

권두섭 : 아니오~ 어떻게 하다보니까(일동 웃음).‘ 내가 그 때 그 자리에 없었다면’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요? 저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연수원에서 노동법학회를 했어요. 어떻게 하다 보니 거기서 총무를 하게 됐고요. 나이 때문이에요. 딱 중간나이라서요. 그리고 그 때 처음으로 민주노총 부당노동행위고발센터로 상담활동을 나가게 됐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을 나갔는데, 그 당시가 99년, IMF 직후였어요. 상담을 나가보면 줄이 저 끝까지 늘어져 있어요. 끝나면 밤 9시가 넘고요. 원래는 학회원들이 돌아가면서 갔었는데, 주로 총무들이 땜빵을 하거든요. 결국 자주 가게 된 것이죠. 그러다보니 익숙해지고, 그러면서 노동변호사를 해야겠다는 어렴풋했던 생각이 자연스럽게 뚜렷해진 것 같아요.

 

이유진 간사 : 민변 공공의료팀 활동도 하셨던데, 의료쪽에도 관심이 많으신가요.

 

권두섭 : 민주노총의 모든 산별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공의료문제에도 같이 대응을 해 왔던 거예요.

 

14기 자활 강한성 : 노동자들의 처우와 관련한 제도를 봤을 때, IMF때 정리해고가 합법화되고 이제는 저성과자 해고까지 합의가 되는 등 갈수록 사용자들에게만 유리한 세상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긍정적인 미래를 볼 수 있을까요. 밖에서 볼 때는 너무 답답하거든요.

 

권두섭 : 안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엄청난 희열을 느낄 때도 있었어요. 소송에서 이겼을 때도 그렇고, 노조가 투쟁을 통해 부당한 부분을 시정했을 때도 그랬죠. 예를 들어 재능교사노조가 설립신고 받을 때 처럼요. 그 당시에 한 달 반 정도 집회하고 투쟁을 통해 설립신고를 받아냈거든요. 그 전까지는 학습지교사와 같은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은 노동자성이 인정되지 않아 노조 신고가 잘 안됐었거든요. 대한항공조종사노조가 만들어졌을 때에도 굉장했어요. 당시 조종사들이 김포에 있는 모처에 모여있었는데, 새벽에 비행기가 뜨질 못하니까 노동부장관이 갑자기 노조설립을 하라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벽두새벽에 부랴부랴 노조설립증 들고 사진찍고, 공항으로 가서 일 시작했었죠. 청원경찰법, 복수노조 등등 걸려있는 골치아픈 법리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파업 한 번에 그렇게 된거죠. 기뻤어요.

그런데 그 뒤로는 노동자들 투쟁이 너무 힘들어졌습니다. 수 백 억의 손배가압류에 고통 받는 노동자들이 많아요. 내가 노조에 가면 늘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투쟁은 끝나도 재판은 끝나지 않는다고요. 철도노조 파업의 경우에는 2002년에 파업을 했는데, 지금까지도 재판이 진행 중이에요.

결국 변호사들은, 간접적이지만 그 고통을 지속적으로 느낍니다. 기일이 잡히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그 옛날에 있었던 현장이 떠오르는 거죠. ‘아오 손배가압류. 아오 수 백 억!’이러면서 영원히 고통 받는 거죠.

이런 고충이 있어요. 결론적으로 내부에서도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뭐 희망을 가지라는 것은 아니고, 법률가가 가장 필요한 곳이 어디겠어요. 인권이 보장되지 않고 소수자가 보호되지 않는 곳 아닌가요. 결국 법률가들이 해야 할 일이 많아진 거죠. 법률원의 변호사들에게도 자주 말해요. 노조가 희망도 없고 힘드니까 그만둬야 겠다는 생각은 말이 안된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수록 노동권이 보장받지 못해 고통받는 노동자가 많다는 이야기니까 내가 해야 할 역할이 더 많다고 생각하라고 말해요. 쉽게 전망이 없다거나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해 버릴 것은 아닌거죠.

 

 

 

 

 

화, 2015/10/27-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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