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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나는 발로 뛰는 변호사가 되고 싶은 김영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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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나는 발로 뛰는 변호사가 되고 싶은 김영주 입니다

익명 (미확인) | 화, 2016/07/12- 12:14

인터뷰 표지


날이 흐렸다. 가로수 길의 반들반들한 얼굴은 빗물에 화장이 번진 듯 얼룩덜룩했다. 가로수길 입구에 경찰 버스와 앰뷸런스가 늘어서 있었고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커다란 소방차 두 대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 7월 7일 오전 10시. 골목 안쪽에서 한 무리의 의무경찰들이 우르르 걸어 나온다.

 

가로수길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니 ‘우장창창’이라는 가게가 나온다. 이날 ‘우장창창’이 있는 골목은 시가전이라도 치른 듯 어지러웠다. 검은 옷을 입은 용역직원들이 벽을 치듯 서 있었다. 명도집행이 한 여름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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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기 하나 없는 민낯에 청바지, 운동화 차림. 새벽부터 여러 번 울었는지 눈 주변이 달아올라 빨갛다. “새벽에 왔었어야 돼”라고, 좀 전의 상황이 어땠는지 말하는 목소리가 울먹거린다. 스마트폰을 쥔 주먹으로 눈가를 몇 번 문질러 눈물을 닦는다. 우선 상황이 종료되자 여기저기 바쁘게 전화하고, 상의하다가 한참 지나서야 겨우 파란 나무 평상에 앉아 이제 인터뷰 하자고 말한다. 지난 29차 총회에서 모범회원상을 수상한 김영주 변호사(연수원 34기)를 이 곳에서 만났다.

 

음악을 좋아하던 꼬꼬마, 임차상인의 변호사가 되다

김영주 변호사는 농담처럼 “어릴 때 귀엽다는 말 한 번 못 들어본 게 한이 됐다”고 말했다. 몸이 약하고, 키가 크고, 얼굴이 빼쭉한 ‘꼬꼬마 김영주’는 ‘귀엽다’는 말을 한 번만 들어보고 싶었다. ‘꼬꼬마 영주’의 부모님은 자주 싸웠다. ‘꼬꼬마 영주’는 자주 혼자 남겨졌고, 늘 아파서 겨울이면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학교도 자주 빠졌다. 학교를 자꾸 빠지니 성적은 당연히 나빴다. 가장 잘 나온 성적이 ‘수우미양가’ 중 ‘미’ 정도. 뭘 해도 인정받기 어려웠다. 학교 수업에서 시를 쓰면 “네가 쓴 거 아니지?”라는 의심을 받았다. 교사는 ‘꼬꼬마 김영주’에게 교실 바닥에 엎드려 다시 시를 쓰게 했다. 공부를 못하는 애가 이런 시를 썼을 리 없으니까.

 

이런 경험이 반복되자 혼자 상상하기 좋아하는 ‘꼬꼬마 김영주’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자랐다. 늘 혼자 있으니 친구도 거의 없었다. “꼬꼬마 김영주는 되게 시시하고, 재미없고, 좀 우울한 애였다…. 라고 말해놓고 보니 되게 불쌍하네. 그래도 뭐 밥도 많이 먹고 그랬어요. 씩씩하게. “

 

“아파서 집에 누워 있다고 책을 읽는 스타일도 아니고, 그 때부터 음악을 듣기 시작했죠.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 밖에 없더라고요.” 김영주 변호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른 뮤지션은 시규어 로스, 그루브 아르마다, 매시브 어택, 벡 등 1990~2000년대 브릿팝 뮤지션들이다. 얼마 전 작고한 프린스의 추모 영상도 있다. 일렉트로니카, 딥하우스도 좋아하고, 락은 ‘기본이니까 당연히’ 좋아하고, 인디음악을 틀어놓고 혼자 울기도 한다.

 

지금 ‘우장창창’과 대립하고 있는 건물주는 힙합 듀오 ‘리쌍’이다. “음악은 다 좋아해요. 힙합도 좋아합니다만, 리쌍은 오늘부터 안 듣는 걸로.” 뮤지션이 미우면 음악도 꺼려진다. 음악 하는 사람들 같은 감성도 없고, 그런 걸 예술로 풀어내는 능력도 없어서 예술 한다는 사람만 보면 눈이 하트 모양이 된다. 하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이 작품으로 표현하는 그 감성이, 분노건 무엇이건 그 속에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중요시하는 마음이 깔려있지 않으면 꺼려진다.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고, 돈이 중요하면 돈만 있으면 되죠.” 그런 사람이 ‘애인이 떠났다’는 이유로 눈물 흘리는 노래를 만드는 건 모순이란다. 사람이 가장 중심이라는 전제가 없으면 예술이 만들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가끔은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게 씁쓸하다.

 

“내가 생각했던 음악, 늘 부러워하고 존경했던 예술가들이 그런 감성까지도 지어낸 거라고 하면 너무 슬프잖아요.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김영주 변호사는 “그 음악이 나를 신나게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임차상인들의 권리금 문제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도 음악 때문이었다. 늘 음악 들으며 놀고 싶었던 차에, 홍대 어디로 상담을 하러 간다는 동료 변호사를 따라 무작정 ‘음악 들으러’ 갔던 게 시작이었다. 이제까지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운동은 꽤 있었지만, 상인들이 만들어낸 상권과 부가가치, 상인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운동은 거의 없었다. 이에 대한 법적 조력도, 그런 일을 하는 변호사도 드물었다. 김영주 변호사는 “전통적으로 상인들은 ‘도와주고 싶은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냥 (점포에서) 쫓겨나는’ 게 아니에요.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거죠. 회사에서 잘못한 것도 없이 해고당하는 것하고 비슷한 수준의 문제더라고요.”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를 대화로 풀기는 대단히 어렵다. 감정적인 대립이 대화를 방해한다. “임대인 입장에서는 ‘내 건물 내 맘대로 하는데 뭘 대화까지 해’ 하고 생각하겠지만, 임차인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나가라’는 말을 들은 거 자체가 화가 나잖아요. 차분히 얘기할 정신도 없고.” 누구에게나 정의롭게 보이는 일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버는 일도 아니고, 심지어 승소율까지 낮다. 이기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거의 지는 싸움이다. 쫓겨나는 사람에게 돈을 받을 수도 없으니 돈도 못 번다. “사실 변호사 하면 떠올리는 ‘멋진 법리로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그런 이미지하고는 거리가 멀죠. 쉬운 일은 아닌 거 같아요.”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에서 구성한 상가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해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를 중재하고, 합의를 이끌어낸 경우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김영주 변호사도 조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민생위원회에서는 권리금 문제에 있어서 의견이 조금 달라서 민생위원회 이름으로는 활동하지 못했지만, 임차상인의 권리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민변 내에 이견이 없죠.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같이 활동을 하게 될 거 같아요.”

 

변호사가 된 아웃사이더

김영주 변호사의 원래 직업은 회사원, 그 중에서도 공기업 직원이었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을 모아놓고 모르는 문제를 가르쳐주는 걸 꽤 좋아했지만 교사나 선생님이 되지는 않았다. 김영주 변호사는 대학 때 과외 아르바이트도 꽤 했고, 사실 꽤 잘했던 거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선생님이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저 자신에 대한 자신이 별로 없었던 거 같아요. ‘애들이 (나를 보고) 나처럼 어리바리하게 살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을 했었죠.”

 

IMF 시절, 정리해고 문제로 사무실에서 재떨이가 날아다닐 정도로 갈등과 대립이 심해지자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도 ‘잔심부름’만 하는 계약직들이 있었어요. (정리해고 상황이 되니까) 그런 분들만 해고하려고 하고, 그 문제로 갈등이 심해져서 사무실에서 재떨이가 날아다니고 그랬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낮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쫓겨나야 하는 걸까. “그런 걸 보면서 법 공부를 하고 싶더라고요.”

 

민변에 가입하게 된 계기는 연수원 동기들이었다. 황필규, 송상교 변호사와 함께 인권법학회 1기로 활동했다. 그때도 총무였다. 연수원 수료 이후 자연스럽게 민변에 가입했지만 고용 변호사로 일을 하는 8년 정도는 말 그대로 ‘회비회원’이었다. 그러다 남의 고용 변호사로 일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어느 날 여성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진 변호사에게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거냐’는 메일을 보냈다. “여성위원회로 오라”는 김진 변호사의 대답 이후 여성위에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개업한 이후 최근 2~3년 민변 활동을 하는 것이 하나하나 새롭고 재미있다고 느낀다.

 

그렇게 뛰어든 민변 활동이 회원들의 인정을 받았는지, 지난 29차 총회에서 김영주 변호사는 ‘모범회원상’을 수상했다. 아동위원회(이하 아동위) 위원들이 ‘아동위의 자랑 민변의 보배’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와 흔들었다. “지난 활동에 대한 평가보다는 앞으로 열심히 하라고 주신 거 같아요. 어쩌다 보니 활동보다 상을 먼저 받은 거죠.” 웃는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묻어난다.

 

‘아동위의 잡일과 개그 담당’ 김영주 변호사는 어디서나 분위기를 띄우고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어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오바, 육바를 떨어가면서” 열심히 떠든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꼬꼬마 김영주가 남아있다. 우울하고, 작고, 소심한 김영주. 그래서 영화도 ‘엑스맨’ 시리즈, ‘다크나이트’처럼 히어로지만, 아웃사이더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가 좋다.

 

특히 ‘엑스맨’ 시리즈는 보통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다. ‘엑스맨’의 한 장면을 은근슬쩍 언급하니 그 장면의 주인공이 누구고, 어떤 상황인지 술술 나온다. “저한테 ‘엑스맨’의 주인공들 절반만큼의 초능력만 있었어도 저는 신나게 막 살았을 거 같아요. 그런데 ‘엑스맨’ 주인공들은 남들한테 없는 초능력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 자기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고민하잖아요.” 남들한테 배척당하고 자기 스스로도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괴로워하는 주인공들이 끝내 힘을 합쳐 무언가를 이루고, ‘그럼에도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점이 김영주 변호사가 ‘엑스맨’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다.

 

“근본적으로 난 좀 아웃사이더인 것 같아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모두가 옳다고 동의하는 것보다, 시선이 미처 닿지 않은 곳에 더 눈길이 간다. “이미 많은 훌륭한 분들이 조력하고 있는 분야 말고, 아직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는 분야들”, 예를 들면 아동 문제, 젠트리피케이션 문제 같은 쪽에 마음이 쏠린다. “남편이 의사인데, 응급실에서 일할 때 ‘살려주세요!’라고 소리소리 치는 사람보다 구석에서 조용히 있는 사람들을 먼저 찾아 치료했대요. 소리 지르는 사람은 아직 기운이 남아있지만, 정말 조용히 있는 사람들이 정말 위험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 약자들도 있을 수 있잖아요.”

 

“우린 왜 서로가 좋았을까요?”

김영주 변호사가 여성위원회에서 민변 활동을 시작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무작정 메일을 보냈던 김진 변호사가 마침 여성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둘째, 여성 문제에 대한 연구와 참여는 여성으로서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여성위원회에서 조금씩 다루던 아동 문제를 위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참여하는 모임이 생기자 김영주 변호사도 참여했다.

 

김영주 변호사는 아동 관련 분야는 온 나라를 다 뒤져도 전문가가 많지 않은데, 그에 비해 다뤄야 하는 주제는 너무 광범위하다고 설명했다. 아동학대, 소년사범, 소년원 관리 문제, 누리과정, 입양, 베이비박스, 청소년의 참정권 행사…… 아기가 차마 살 수 없는 환경에 사는 아이들이 있으니 빈곤 문제, 주거 문제도 아동 문제가 될 수 있다. 빈부격차로 상처받는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월례회 때 모이면 ‘간단히 해, 간단히 해’ 하면서도 모니터링만 두 시간, 세 시간 걸려요.”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문제들이 모두 아동위가 다뤄야 할 문제가 된다.

 

“하여튼 쿵짝이 잘 맞았어요. 누구 하나가 똑똑해서 그런 게 아니고 서로가 좋았다고 해야 하나? 그랬어요. 그런데 우린 왜 서로가 좋았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네.”

 

아동위 활동을 하다 보면 ‘꼬꼬마 김영주’를 떠올리게 하는 아이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꼬꼬마 김영주’가 내어놓고 무슨 학대를 당한 건 아니지만, 마냥 환하게 웃을 수 없는 사연을 가진 아이들을 만나면 눈물이 앞선다. 김영주 변호사는 “그런 건 나쁜 점인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이들에게 마음이 쓰이다 보니 일을 일로서 처리하지 못하고, 냉철하게 수단을 찾고 법조문을 찾아야 할 시간에 울어버린다는 얘기다.

 

“어떤 미혼모가 아이를 어떻게 했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 아동위원회 다른 분들은 ‘미혼모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게 사회적으로 어떤 보호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관련 법조문이 무슨무슨 법 몇 조인데 이러저러하다’라고 논의하시는데 저는 머리를 쥐어뜯고 화를 내는 거죠.”

 

아동의 피해, 아동의 권리는 직접 찾아 나서지 않는 한 부각되지 않는다. 피해자 집단이 형성되어 이들이 스스로 피해를 진술하고, 민변을 비롯한 시민단체가 결합하여 조력하는 과정이 존재할 수 없다. “아기들은 어른들처럼 ‘투쟁!’하고 외치지도 못하고, 두들겨 맞은 걸 경찰이 발견하고 ‘너 어쩌다 이랬니?’ 하면 설명도 못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댈 곳이 없다는 생각에 자기를 보호해주는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잖아요.”

 

이렇게 자신의 피해를 스스로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들이 재미있고, 한편으로 마음 아프다. 보육시설의 아이들을 잠깐 만나고 돌아오면서 ‘내가 뭐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울면서 일하는 날도 많다. “어떨 때는 권리나 법의 측면으로 사건을 파악하는 게 아니라 나쁜 사람 혼내주고 싶다는 충동도 들어요. 가끔 변호사답지 않은 판단을 하거나 감정에 치우칠 때도 있어요.”

 

김영주 변호사는 김수정 위원장이 균형을 잘 잡고 있는데다 젊은 변호사들의 신선한 의견을 들으면서 자신이 오히려 많이 배운다고 말했다. 민변 활동을 하며 어떨 땐 열등감이 느껴질 정도로 똑똑하고 훌륭한 선후배들을 볼 때마다 “어쩜 저렇게 똑똑할까” 하고 감탄하는 것도 낙이었다고. 그러면서도 “저는 저대로 훌륭한 선배들의 생각을 잘 이어받고 후배들한테 전하면 된다고 생각해요”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고맙고 미안하고 귀엽고 예쁜 아동위의 ‘아가변’들

김영주 변호사는 아동위의 젊은 변호사들을 ‘아가변’이라고 불렀다. ‘아가변’들이 그렇게 귀엽단다. “본인들은 다 컸다고 그러는데, 생각하고 논의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다 너무 귀엽고 예쁜 거예요.” 김영주 변호사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아가변’은 ‘동물권’을 고민하다 아동위로 온 변호사들이다. 말 못하는 동물의 권리를 고민하다 마찬가지로 자기 권리를 소리 내어 말하고 주장할 수 없는 어린이들의 권리를 고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신기했다.

 

“놀 때도 너무 재미있어요. 확실히 젊은 분들이라 노는 것도 색다르고 귀엽고 재미있어요.” 아동위 워크샵에서 ‘아가변’들이 김현근 간사가 준비한 게임을 하는 모습이 그렇게 신기하고 귀여웠다고 한참을 설명한다. 벽에 현대사 연표를 사진과 함께 쭉 붙여놓고, 사진 속 사건을 맞추고 그 시기에 기억에 남는 일들을 얘기하는 게임이다. “우리 아가변들이 얘기하는 걸 하나도 모르겠는 거 있죠. 구석에서 김수정 위원장이랑 술만 마셨네. 한편으로는 자극도 되고, 젊은 감성에 사는 게 좋더라고요.”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 귀여운 게 아니다. 김영주 변호사에게 사람은 누구든 다, 자기는 모르지만 저마다 하나씩 예쁘고 귀여운 구석이 있는 존재다. 자세히 뜯어보면 다 예쁘고 다 귀엽다. “회의 때 발언하면서 하는 손짓, 낙서하는 것만 봐도 귀여운 변호사님도 있어요. 사람은 다 예쁘고, 다 귀엽고, 다 똑똑하고 그래요.” 이렇게 얘기하면 바보 같아 보일까 걱정하면서도 사람에 대한 애정이 단어 사이사이의 웃음에 묻어난다.

 

아동위 위원들에게는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다. 아동위가 다뤄야 하는 스펙트럼이 넓다보니 일도 많고 해야 할 공부도 많다. “뭔가에 대해 결론이 나있고, 자료가 축적되어 있고 논문 쫙 나와 있고 이러면 어떤 사안에 대해 판단만 하면 되는데, 아동 문제는 그런 게 거의 없어요.” 이런 일이 왜 생기는지, 어떻게 해야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을지, 매번 새로 공부하고 처음부터 만들어나가야 한다. 각자 직장을 다니고 생업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늘 숙제 내주듯 해야 할 일을 만들어주다 보니 미안해진다.

 

“아동위 자랑 좀 써 주세요. 일도 잘 하고, 무슨 문서 내고 이럴 때 늦은 적도 없어요. 미리미리 어쩜 그렇게 잘 해주는지…. 이쁘고 고맙고 그렇죠.”

 

김영주가 꿈꾸는 ‘발로 뛰는 변호사’

요즘 김영주 변호사의 고민거리는 아들이다. 정확하게는 아들에게 너무 신경을 못 써주는 것 같아서 고민이다. “아동학대 중에 방임이 있거든요. 나가서 ‘아동학대다, 방임이다’ 라고 소리 지르면서 집에 가면 우리 아들은 널브러져 자고 있고 그런 거죠.” 아이한테는 부모가 온 세상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가끔은 아들을 혼내야겠다 싶지만 제 풀에 웃겨서 포기한 적도 많다. “거짓말하고 숨기는 행동도 귀여워 죽겠어요. 좀 커서 수염 나고 대들고 이러면 쥐어박고 싶을 수도 있겠죠? 그 때는 무서우려나.”

 

가끔은 아들의 눈에 보일 세상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것도 걱정이다. 친구와 주먹다짐 정도만 해도 ‘싸우면 안 된다’고 혼내지만, 정작 아이에게 ‘싸우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어른들의 세상은 온통 싸움판이다. “당연히 법을 지켜야 하지만 꼭 저렇게 해야 하는지 싶고, 서글프기도 해요. 사람들은 왜 다 같이 웃으면서 잘 살지 못할까 하는 의문도 들고.” 재판도 결국은 법으로 하는 싸움이요, 법원의 모든 사건이 하나하나 다 싸움이니까.

 

또 다른 고민거리는 건강 문제. 어릴 때도 많이 아팠고, 지금도 그렇게 건강한 편이 아니다. 엄마가 아프면 나중에 아들이 힘들어질까 걱정이다. 몸이 아프면 웃고 살 수도 없으니 웃으며 살려면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아들 따라다니면 많이 뛰게 되니까 건강해질 거 같아요. 아들한테 물어보고 싶었어요. 넌 왜 걸어도 되는데 뛰어다니니?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들 따라 열심히 뛰어다닐 걸 그랬어요. 그랬으면 많이 건강해졌을 텐데.”

 

인터뷰를 위해 가로수길로 찾아갔던 그 날 ‘우장창창’에는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다녀갔다. 제 의원은 뉴스 인터뷰에서 “변호사도 울고 있더라”고 말했다. 김영주 변호사는 새벽부터 가게 안에 소화기를 뿌려대는 용역직원의 폭력이 너무 심해서 울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변호사도 울고 있더라”는 그 말이 어쩌면 그 말이 김영주 변호사를 요약하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눈물이 앞서는 현장의 변호사. 故 신영복 교수는 비가 내릴 때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비를 함께 맞는 것이 진정한 연대라고 말한 적 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소리조차 못 내는 사람들은 전혀 보호를 못 받아요. 소리 내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좀 찾고 싶어요.”

 

그러면서 김영주 변호사는 ‘변호사’라는 직업 자체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약자들을 찾아내기에 쉽지 않은 직업이라고 말했다. 변호사는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그의 말을 듣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변호사님, 제가 이만저만한 사정이 있는데요……”라고 찾아와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만, 김영주 변호사는 ‘변호사’라는 직업이 그마저도 못하는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하는 직업이라고 믿는 것 같다. 김영주 변호사는 인터뷰를 하던 중 자연스럽게 어떤 변호사가 되고 싶은지 말했다.

 

“법조문에서 느끼고, 판례에서 느끼는 것도 있죠. 멋진 이론을 제시하고 연구하는 것도 당연히 멋있어요. 그런데 어린이를 보호해야 하는 아동학대 현장이나, 철거 현장 같은 곳에서 느끼는 게 많아요. 젊은 변호사들이 이런 현장의 느낌 속에서 일을 하면 더 잘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저는 발로 뛰고 싶고, 너무 똑똑하지 않은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너무 똑똑해서 의뢰인이 한 마디만 해도 ‘내가 다 아니까 됐다’고 하지 않고, 내가 모르는 게 많기 때문에 현장에서 함께 느끼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는 그런 변호사가 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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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위해 가로수길로 찾아갔던 그 날 ‘우장창창’에는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다녀갔다. 제 의원은 뉴스 인터뷰에서 “변호사도 울고 있더라”고 말했다. 김영주 변호사는 새벽부터 가게 안에 소화기를 뿌려대는 용역직원의 폭력이 너무 심해서 울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변호사도 울고 있더라”는 그 말이 어쩌면 그 말이 김영주 변호사를 요약하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눈물이 앞서는 현장의 변호사. 故 신영복 교수는 비가 내릴 때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비를 함께 맞는 것이 진정한 연대라고 말한 적 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소리조차 못 내는 사람들은 전혀 보호를 못 받아요. 소리 내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좀 찾고 싶어요.”

 

그러면서 김영주 변호사는 ‘변호사’라는 직업 자체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약자들을 찾아내기에 쉽지 않은 직업이라고 말했다. 변호사는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그의 말을 듣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변호사님, 제가 이만저만한 사정이 있는데요……”라고 찾아와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만, 김영주 변호사는 ‘변호사’라는 직업이 그마저도 못하는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하는 직업이라고 믿는 것 같다. 김영주 변호사는 인터뷰를 하던 중 자연스럽게 어떤 변호사가 되고 싶은지 말했다.

 

“법조문에서 느끼고, 판례에서 느끼는 것도 있죠. 멋진 이론을 제시하고 연구하는 것도 당연히 멋있어요. 그런데 어린이를 보호해야 하는 아동학대 현장이나, 철거 현장 같은 곳에서 느끼는 게 많아요. 젊은 변호사들이 이런 현장의 느낌 속에서 일을 하면 더 잘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저는 발로 뛰고 싶고, 너무 똑똑하지 않은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너무 똑똑해서 의뢰인이 한 마디만 해도 ‘내가 다 아니까 됐다’고 하지 않고, 내가 모르는 게 많기 때문에 현장에서 함께 느끼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는 그런 변호사가 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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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가?’

 - 김서영 (14기 자원활동가)

 

 * 본 후기는 주제별로 나왔던 논의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맨 뒤에 제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이는 형태로 작성하였습니다. 토론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부 자유 토론 (각 20분): 혐오발언 형사처벌해야 하는가? 일베·메갈리아 사이트 폐지해야 하는가?

2부 형식 토론 (40분): 아이유 ‘Zeze’ 음원 판매를 중지해야 하는가?

3부 마무리 발언 (20분): 표현의 자유,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가?

 

 [들어가며]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는 자유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가장 근간이 되는 기본권입니다. 인격권의 핵심을 이룰 뿐 아니라 정치적 담론 형성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에, 일반적으로 다른 기본권보다 우월적 지위를 갖습니다. 올해는 계속적으로 늘어나는 인터넷 신조어들로부터 불거진 혐오발언의 정의규명부터 아이유의 노래 ‘Zeze’에 대한 해석까지, 온·오프라인에서 표현의 자유와 그 보장 범위에 대한 논의가 뜨겁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에 저희 14기 자원활동가들도 ‘표현의 자유,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가?’에 대한 토론을 해보았습니다.

 

 [주제 1] 혐오발언 형사처벌해야 하는가?

먼저 혐오발언(hate speech)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로 토론의 장을 열었습니다. 각각 제시한 의견들을 종합하면 “인종, 국적, 종교, 성별, 성적 지향과 같은 어떤 속성을 갖는 집단이나 개인에게 그 속성을 이유로 가하는 차별표현” 정도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혐오발언의 예시로는 ‘김치녀’, ‘맘충’, ‘홍어’ 등이 언급되었습니다. 아직까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정의는 없지만, 유엔의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자유권규약), ‘인종차별철폐조약’ 등에는 위와 같은 혐오발언을 막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혐오발언이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한국법제원에 따르면 특정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사적인 혐오발언은 형법상 명예훼손죄와 모욕죄로 처벌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두 죄목 모두 피해자가 특정되어야 하기에, ‘김치녀’와 ‘홍어’처럼 특정 집단이나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혐오발언은 처벌하기 어렵습니다.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또한 사실상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저희는 특정인을 겨냥하지 않은 혐오발언도 형사처벌 가능케 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진행해 나갔습니다.

 혐오발언의 형사처벌에 찬성하는 활동가들은 혐오발언이 공동체에 미치는 심각한 악영향을 그 이유로 들었습니다. 혐오발언은 한 개인의 좋고 싫음의 표현을 넘어선, 소수자에 대한 차별 및 폭력을 선동하는 사회적 행위이기 때문에 마땅히 형법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혐오발언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추세를 보아, 자정작용을 기대하기 어렵기에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주요 선진국에서 혐오발언자를 무겁게 처벌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혐오발언이 심각한 사회적 범죄로 인식되어 그 수가 줄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실제로 영국은 ‘1986년 공공질서법’에 따라 피부색과 인종, 국적, 출신국 의해 구별되는 집단에 대한 혐오발언을, ‘2006년 인종·종교혐오금지법’에 따라 특정 종교에 대한 혐오발언을, ‘2008년 형사사법 및 이민법’에 따라 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각각 형사처벌하고 있다고 합니다. 독일 또한 형법 제130조1항으로 ‘특정 인구집단을 모욕하거나 악의적으로 비방해 타인의 인간적 존엄성을 침해하는 행위’를 형사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 또한 특정 집단 및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혐오발언을 형사처벌할 수 있는 법규정을 마련해 혐오발언을 효과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반면, 혐오발언의 형사처벌을 반대하는 활동가들은 형사처벌이 지나친 표현의 자유 제한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한국의 특수한 정치적 경험과 지형을 고려하면, 혐오발언에 대한 형사처벌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개연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현 법체계상의 명예훼손죄와 모욕죄를 국가권력이 악용한 사례가 이미 여럿 있는데, 특정 집단 및 불특정 다수에 대한 혐오발언까지 형법 항목에 포함시키면 표현의 자유가 지나치게 위축될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혐오발언이 일상이 된 현 사회분위기 대한 문제 의식은 공유하지만, 혐오발언을 규제한다면 형사처벌이 아니라 민사상 손해배상이나 행정적 제재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비록 입법이 몇 차례 좌절되었지만, 뉴질랜드(1993년), 아일랜드(2004년), 프랑스(2008년), 스웨덴(2009)을 따라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여 혐오발언을 규제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주제 2] 일베·메갈리아 사이트 폐지해야 하는가?

 혐오발언과 이의 범죄화에 대한 논의에서 자연스럽게 일간베스트 저장소(이하 일베) 및 메갈리아에 대한 논의로 넘어왔습니다. 먼저 혐오발언이 만연한 일베 사이트를 폐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았습니다.

 간략하게 이슈를 소개하자면, 일베는 극우성향 인터넷 사이트로 1분당 동시 접속자 수가 대략 1만7000~2만명, 모바일 기준 한 달 순방문자수만 약 173만명으로 전체 커뮤니티 사이트 중 8위에 해당하는 규모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여성과 특정 지역 및 종교를 폄훼하는 게시글과 댓글들이 하루에 수백 건씩 올라옵니다. 이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별 문제없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일베 컨텐츠 자체에 대해서 여러 갈래의 의견이 나왔습니다. 한 활동가는 일베를 무조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하기보다 ‘무임승차 논리’와 같이 일베를 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논리에 대한 이해가 우선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다른 활동가도 무임승차 논리의 타당성 자체가 일베 문제의 핵심은 아니지만, 무임승차 논리 자체는 꽤 타당한 것 같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일베 유저들이 사용하는 많은 표현들은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선을 자주 넘는다고 덧붙였습니다. 다른 활동가 또한 일베의 정치적 성향과 논리 자체에는 문제를 제기할 수 없지만, 혐오발언으로 분류될 수 있는 과격한 표현은 심각한 사회적 해악이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논의가 일베 사이트를 폐지할 수 있는지, 폐지해야 하는지에 이르자 입장이 둘로 갈렸습니다. 먼저, 사이트 폐지 가능 여부에 대해서는, 변호사님께서 현 법체계에 특정 단체를 해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법조항이 없다는 점을 짚어주시면서 논의가 일단락 되었습니다. 일베에 올라오는 많은 게시물들은 형사상과 민사상 범죄요건에 성립되지만, 일베 사이트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고정적 주체나 조직이 아닌 열린 온라인 플랫폼이기 때문에 폐지하기 더 어려울 것입니다. 설사 운영금지 가처분 신청이 통과되어 도메인이 폐지된다고 해도, 또 다른 유해 사이트인 소라넷이 도메인을 이동하며 계속 운영되듯,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금껏 해왔던 활동을 지속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었습니다.

 폐지해야 하는가, 즉 당위성에 대한 논의에는 여러 입장이 있었습니다. 한 활동가는 혐오가 공기보다 당연한 일베 같은 과격한 사이트는 폐지되었으면 좋겠으나, 근 10년 이내에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입장을 내비췄고, 다른 활동가들은 특정 게시물에 대한 사과나 삭제조치 요청은 할 수 있지만, 사이트 운영을 금지하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게시물 뿐 아니라 해당 사이트의 모든 게시물이 제한을 받는다는 점 등에서 과도한 표현의 자유의 침해를 우려했습니다. 특정 사이트를 폐지하기 이전에 형법 개정, 차별금지법 제정 등 혐오발언 자체에 대한 법적 규제를 강화하고 사회적 인식을 개선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였습니다.

 다음으로 지나치게 과격한 발언으로 타인에게 불쾌감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몇 차례 삭제된 메갈리아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에 대한 논의를 했습니다. 예전부터 존재해왔던 일베나 김치녀 페이스북 페이지는 멀쩡히 운영되는데 메갈리아만 삭제되는 것은 형평성의 문제가 있다는 점에는 동의가 있었지만, 메갈리아와 일베가 본질적으로 다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그렇다면 메갈리아의 미러링 전략이 혐오인지, 그 과격성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그리고 메갈리아와 일베를 같은 층위에서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차례로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활동가들은 첫 질문인 ‘메갈리아의 미러링 전략이 혐오인지’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먼저 각각 ‘김치녀’와 ‘삼일한’에 대한 대응어로 탄생한 ‘김치남’과 ‘숨쉴한’ 등의 용어를 남성에 대한 혐오로 보는 입장이 있었습니다. 이 용어들의 탄생 및 사용 목적이 어떠하든 그 안에 담긴 혐오를 부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남성 혐오’가 아니라 ‘여성 혐오에 대한 혐오’라고 바라보는 입장이 있었습니다. 즉, 남성을 혐오하기 위해 과격한 표현들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성별을 막론하고 익숙하고 만연했던 여성 혐오적 발언을 거꾸로 뒤집어 낯설게 하여 그 문제성을 지적하기 위해 미러링 전략을 채택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메갈리아의 과격한 표현이 혐오이든 아니든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준다면 그 과격성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젠더 갈등을 부추기는 행동이 아닌지 등의 의문이 제기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활동가들은 목적이 정당하다고 해서 수단마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보았고, 다른 활동가들은 미러링은 혐오발언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과격성에도 문제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고인드립이 난무하고 뚜렷한 정치성향을 띄는 일베와 메갈리아는 탄생배경과 활동 목적 및 내용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은 층위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나왔던 의견을 일일히 옮겨적을 수 없을만큼 논의가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첫 질문인 ‘메갈리아의 과격한 표현이 혐오인지’에서 벌어진 간극을 그대로 유지한 채 양측 모두 같은 말을 반복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아마 그 간극이 혐오발언의 본질 및 정의의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몇십년전에 비하면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고 하나, 아직까지 한국은 성차별이 만연한, 여성에게 녹록지 않은 곳입니다. 한국의 여자들은 같은 일을 하는 남자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임금을 받고 있으며, 세계경제포럼이 올해 발표한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성평등지수는 세계 최하위 수준입니다. 불평등 뿐만이 아닙니다. 빈번하게 벌어지는 성폭력 및 데이트폭력 사건에서 아직까지도 ‘충분히 조심하지 못한’ 피해자 여성을 질책하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이처럼 한국에서 여성은 수적으로는 인구의 반을 차지할지 몰라도,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의 아래에 놓여 있는 소수이며 약자입니다.

 메갈리아의 거친 표현이 혐오인지, 다음으로 메갈리아와 일베가 다른지에 대해 논하려면 위 맥락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좋고 싫음의 표현과 달리 혐오발언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대상자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고 선동하여 그를 사회에서 배제시키고 그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자의 사회적 발언력이 약할수록 그 위험이 더욱 크며, 자칫하면 물리적 폭력을 포함한 차별적 행위까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소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차별적 발언만을 혐오발언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가장 뜨겁게 달아올랐던 일베와 메갈리아에 대한 논의는 이처럼 혐오발언의 정의에 대한 논의로 되돌아가면서 마무리 되었습니다.

 

 [주제 3] 아이유 ‘Zeze’ 음원 판매를 중지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최근에 가장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던 아이유의 노래 ‘Zeze’에 대한 형식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찬반은 개인적 입장과 상관없이 사다리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간략하게 이슈 소개를 하자면, 아이유의 네 번째 미니앨범 ‘챗셔(CHAT-SHIRE)’에 수록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주인공인 다섯 살 꼬마 ‘제제’를 모티브로 한 노래 ‘Zeze’의 가사에 대하여 학대를 받고 자란 다섯 살짜리 아이를 성적 대상으로 묘사한 것인지, 창작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원작을 왜곡한 것인지, 원작 재해석에 대한 문제를 넘어 소아성애ㆍ롤리타신드롬을 자극하는지 등 논란이 일었습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한국어판을 펴낸 동녘 출판사는 아이유가 원작 속 캐릭터 ‘제제’를 잘못 해석했으며 다섯살 제제를 성적 대상으로 삼아 유감이라며 문제 제기를 했으나, 2차 창작물에 대한 해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을 받고 “해석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아이유 또한 “맹세코 다섯 살 어린아이를 성적 대상화하려는 의도로 가사를 쓰지 않았”지만 가사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사과문을 본인의 페이스북 공식 페이지에 게재하였습니다. 허지웅, 진중권, 소재원, 윤종신 등 문화 인사들도 자신의 의견을 적극 표명하며 설전을 벌였습니다. 11월 9일 기준, 다음 아고라에서는 ‘Zeze’ 음원 폐기와 보전을 요청하는 서명운동에 각각 3만2천여 명과 1천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사실 ‘Zeze’의 가사가 소아성애적 표현을 담고 있는지, 컨텐츠 자체에 대한 논의가 주가 되었어야 하지만, 시간상 가사 한 줄 한 줄을 분석할 수 없어 소아성애적 표현이 있다는 전제 하에 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간단하게만 요약을 하자면, “넌 아주 순진해 그러나 분명 교활하지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듯해도 어딘가는 더러워”,“어서 나무에 올라와. 여기서 제일 어린잎을 가져가. 하나뿐인 꽃을 꺾어가”, “발그레해진 저 두 뺨을 봐”에서 나타나는 성적인 은유로 흔히 쓰이는 표현과 함께, 제제가 갖고 있는 (이중적인) 성질을 “섹시하다”고 느꼈고 “제제를 질투하는 모습에서 밍기뉴가 여자로” 느껴졌다는 아이유의 인터뷰, 그리고 핀업걸을 연상시키는 제제 일러스트를 한데 묶어 생각해보면 명백히소아성애적 은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찬성 측은 ‘Zeze’의 소아성애적 표현이 일차적으로 이미 피해를 입었거나 앞으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소아들에게 폭력적이며, 이차적으로 사회의 성도덕을 침해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정의에는 부합하지 않아도, 가사에 담긴 소아성애적 은유 자체로 충분히 음란하고 부적절하다는 것입니다. (참고: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은 “아동·청소년 또는 아동·청소년으로 명백하게 인식될 수 있는 사람이나 표현물이 등장하여 제4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거나 그 밖의 성적 행위를 하는 내용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필름·비디오물·게임물 또는 컴퓨터나 그 밖의 통신매체를 통한 화상·영상 등의 형태로 된 것”으로 정의됩니다.)

 반대 측은 창작물 속 제제는 원작 속 제제와 다르게 다뤄져야 하지 않냐고 질문했습니다. 아이유의 노래는 어디까지나 원작 속 제제에 대한 아이유의 해석을 바탕으로한 2차 창작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찬성 측은 아이유의 노래 ‘Zeze’에서의 제제가 원작 속 가난함과 가족들의 폭력 및 몰이해에 상처 받고 사랑에 굶주린 다섯 살 아이이든, 아이유의 이차적 창작물 속 가상의 인물이든 중요하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유의 ‘Zeze’가 주체적인 입장과 목소리를 가지기 힘든 소아에게 성적 은유를 부여했다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소아는 대리인 없이는 법정에도 서지 못하는 약자이기 때문에 더욱 소아성애적 표현에 문제를 제기하고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반대 측은 현아의 ‘버블팝’, 그리고 비슷한 컨셉을 차용한 수많은 아이돌들의 노래와 아이유의 ‘Zeze’가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에 대해 찬성 측은 현아가 자기 자신에게 롤리타적 컨셉을 입히는 것과, 성인 아이유가 소아인 제제를 성적 대상화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미성년자이더라도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청소년인 아이돌 가수들과 다섯 살짜리 아이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형법에서 미성년자에 대한 간음과 추행 사건에서 피해자가 13세 미만인 경우 더 엄중히 처벌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말입니다. 앞서 나왔던 이야기로 돌아가, 13세 미만의 경우, 주체적인 입장과 목소리를 가지기 힘들다는 판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롤리타 컴플렉스’라는 단어를 만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와 아이유의 ‘Zeze’는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찬성 측은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세계적으로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 받은 문학 작품이지만, 아이유의 ‘Zeze’는 소아성애적 컨셉을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소비만 한, 예술성 없이 음란성만 있는 노래라고 평가했습니다. 대법원 2000.10.27. 선고 98도679판결을 근거로 들며 “문학성 내지 예술성과 음란성은 차원을 달리하는 관념이므로 어느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문학성 내지 예술성이 있다고 하여 그 작품의 음란성이 당연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그 작품의 문학적·예술적 가치, 주제와 성적 표현의 관련성 정도 등에 따라서는 그 음란성이 완화되어 결국은 형법이 처벌대상으로 삼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가지고 ‘롤리타’와 ‘Zeze’ 둘 다 소아성애를 다루는 창작물이지만, ‘롤리타’는 소아성애가 작품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소재이며, 작품 자체의 예술적 가치가 매우 뛰어난 반면, ‘Zeze’는 소아성애를 소재로 상업적으로 소비하기만 하기에 예술작품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을 살펴보기 위해선 ‘Zeze’가 예술성이 있는지 없는지 컨텐츠 자체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하는데, 시간 관계상 그럴 수 없어 아쉽게도 예술성과 음란성과 관련된 논의는 여기서 일단락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Zeze’ 음원 판매 중지 방법에 대한 논의를 했습니다. 시간이 부족해 많은 의견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찬성 측과 반대 측 모두 음원 판매 중지를 하는데 있어서 국가권력 혹은 기타 독점적 권력에 의해 제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의 음원 불매 운동, 민사 소송,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음원 폐기 서명운동 등에 의해 소속사 및 아이유 측에서 자체 판매 중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모았습니다.

 

[마치며] 표현의 자유,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가?

 토론을 준비하면서, 토론을 하면서, 토론 후에 후기를 쓰면서 생각이 계속 달라졌습니다. 그만큼 새로운 시각들도 많이 접하고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던 월례회였습니다. ‘표현의 자유,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가?’는 아마 논란이 되는 문제마다 계속해서 던져야 할 질문일 것입니다. 다만, 표현은 사회적 행위이며 헌법이 정한 범위 내에서 행해야 한다는 점은 항상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술가를 비롯한 표현의 주체가 자신의 표현에 폭력이 내재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이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인지한 채 보다 성숙한 비판을 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수, 2015/12/2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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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는 문예반 학생이었다. 법률 전문기자가 되려고 법대에 갔다. 그러다 혼자서 민사 소송을 해 엄마가 떼인 돈을 받아냈다. 이후 법학이 다르게 보였고, 재판이 재미있어 변호사가 되기로 했다. 변호사가 되고 나서는 ‘노동법으로 밥벌이를 해야겠다’고 맘먹고 금속노조법률원에 들어갔다. 그러다 다시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진로를 틀었다. 보좌관으로 잔뼈가 굵을 무렵, 국회 문을 열고 나와 이번엔 국선전담변호사가 되었다. 6년간 국선전담 변호사 활동을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40일간의 유럽 순방(?)을 마치고 민변으로 온전히 복귀한 조수진 변호사를 만나 그 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B내리고 C뿌리던 법대생, 민사 소송을 하다

문예반 활동을 하던 ‘고등학생 조수진’은 국문과를 갈 줄 알았다. 대학 진학 무렵, ‘얼결에 들어간 거지만 시 쓰는 문예반에서 활동했으니 국문과를 가야겠지.. 그런데 시를 쓰면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라는 여러 생각과 의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신문방송학과를 가서 기자 생활을 하면 시를 쓰는 것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생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조수진 변호사의 언니가 조수진 변호사를 꼬드겼다. “법대에 가서 법조기자가 되면 얼마나 좋겠니?”

언니의 꼬임(?)에 넘어간 고등학생 조수진은 이내 ‘수업이 이해가 안 돼 학점이 안 나오는 법대생’이 됐다. 논리학을 공부하는 것도 어려웠고, ‘내가 이걸 왜 외워야 하나’ 이해도 되지 않았다. 한창 학점에 B가 내리고 C를 뿌리던 대학생 조수진에게 어느 날 큰 일이 생겼다.

당시 조수진 변호사의 어머니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300만 원 정도를 달아놓고 먹던 중소기업이 부도 위기를 맞자 그간 누적된 식대를 주지 못하겠다고 나왔다. 딸이 법대생인데, 소송 까짓 거 못 할 게 뭔가. 조수진 변호사의 어머니는 ‘돈을 받아내면 10%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가족이니까 엄마를 대리해서 재판을 해서 돈을 받겠다”고 대학생이 서면을 써서 법원에 제출했다. 상대방은 재판에 출석도 하지 않았고, 결과는 조수진 변호사의 승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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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소하면 돈을 당연히 받는 줄 알았더니, 그게 또 아니란다. 집행 절차가 필요했다. “‘이게 뭐지?’ 하면서 집행관에게 서류를 줬어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집행관이 ‘그 사무실에 있는 집기에 딱지를 붙입시다’ 하더라고요.” 집행 절차에는 집행인이 동행해야 했다. 그래서 법원 집행관이 사무실 집기에 ‘빨간 딱지’ 붙이는 데 따라갔다. “그 사무실 분들이 뜨아한 표정으로 보는 거예요. ‘이건 뭐냐’ 이런 분위기로. 근데 그 딱지를 붙인 다음날 바로 돈이 입금됐어요.”

그때부터 법 공부에 흥미가 붙은 조수진 변호사는 죽기 살기로 공부에 매달렸다. “그때 저는 변호사가 적게 일하고 돈 많이 버는 직업으로 잘못 알고 있었어요. 노동시간도 짧은데 단시간에 큰돈을 버는 줄 알았죠.”

그렇게 본격적인 법 공부를 시작해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사법연수원에서 노동법학회를 했어요. 그러다 ‘노동법으로 밥을 먹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노동법만 할 수 있는 사무소를 찾다가 금속노조 법률원에 들어갔어요.” ‘입사’하니 선배들은 당연히 노동위원회에 가입해야한다는 거 아닌가. 그래서 ‘당연한가보다’ 생각하고 변호사가 된 첫 해에 노동위원회 가입으로 민변 활동을 시작했다.

국회에 가다

막상 변호사가 되니 ‘적게 일하고 많이 번다’는 오해가 깨진 것은 둘째 치고, 비정규직 법안 자체가 잘못되어있는 상황 속에서 ‘변론’으로만 할 수 있는 활동에 한계를 느꼈다. “거기서 한 2년 반 정도 하다보니까 비정규직 법 때문에 너무 문제가 많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여성인권위원회에서 한 번 만난 인연으로 연락을 준 이정희 변호사님. 당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셨던 그 분의 보좌관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제가 알기로는 돌아가신 김승규 변호사님께서 저를 추천해주신 걸로 알아요. 그래서 2년 반 정도 18대 국회 때 의원실에서 보좌관 활동을 했죠.”

조수진 변호사의 표현에 따르면, 국회의원이 299명이면 국회에는 299개의 중소기업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회의원 월급 다 삭감하자’는 식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국회에서 활동해본 조수진 변호사의 설명으로는 국회의원이 제대로 활동한다면 세비 900만 원은 남아나지 않는 게 정상이다. 사람도 만나고, 지역구 사무실도 운영해야 하고, 정책개발을 위해 연구자들에게 용역비용도 지출한다.

이렇게 역동적인 국회는 변호사들에게도 좋은 무대다. 입법 보좌관들의 노력으로 법을 처음부터 잘 만들면 재판까지 이어지는 사건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같은 나라는 국회와 행정부에 굉장히 많은 변호사들이 들어가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법을 만들거나 집행하는 단계부터 문제가 없게 하기 때문에 사법부로 넘어가는 사건을 줄일 수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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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생활은 조수진 변호사의 변호사 생활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다. “옆에서 ‘아, 이런 식으로 문제를 파고 들어서 공부하는 거구나’를 배웠어요. (이정희 의원은)어떤 문제가 있어서 ‘새로운 법을 만들자’라고 맘먹으면 자료를 그냥 보는 게 아니라 관련 법안, 관련 연구 논문까지 다 찾아보시는 거예요. 1차 자료를 다 보고 나서 그걸 보강하는 2차 자료, 어떤 때는 3차 자료까지 보셨어요.” 법 이론상 가능한 이야기인지, 부작용은 없는지 다방면으로 검토한 후에야 새로운 법안이 탄생했다. 자료를 어떤 식으로 보고 정리해 나가야 하는지, 얼마나 다양하게 검토해야 하는지 큰 영향을 받았다.

재판을 좋아해서 다시 변호사 생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때의 경험은 조수진 변호사가 법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을 바꿔놓았다. “만들어진 법을 공부하는 건 음식점으로 치면 설거지 같은 단계예요. 법을 만드는 일은 재료 다듬고 음식 만드는 일로 비유할 수 있을 거 같고요.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국회에서 지켜보니 너무 신기했어요.”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역동적이고, ‘선한 가치’라고 하여 필연적으로 법안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판례는 유연하게 바뀌어야 한다

국회를 나온 조수진 변호사는 국선전담변호사로 다시 송무를 시작했다. 형사 피고인을 변호하는 형사 국선전담변호사. 1~2년 개업 변호사로서의 경험과 역량을 다지는 계기로 삼으려던 게 어느 덧 6년이나 이어졌다.

형사 국선전담변호사를 하면 한 달에 20-30명가량의 피고인을 만난다. 1년이면 300명이 넘는다. 당연히 형사 재판을 처리하는데 속도가 붙는다. 조수진 변호사는 “변호사의 업무능력 면에서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효율성을 배운 것 같다”며 사람을 매우 많이 만난다는 점을 국선전담변호사의 특징으로 꼽았다. 또 “아무래도 배움이 길지 못했거나 저소득층이 국선을 신청하시는 분이 많다”며 “변론 외적으로도 챙겨주는 마음이 필요한 게 이 분야의 특이한 점”이라고 짚었다.

사건을 수행하다 보면 당연히 안타깝거나 기억에 남는 사건도 생기게 마련이다. 조수진 변호사가 꼽는 ‘정이 많이 갔던 사람’은 취업사기를 당했는데 오히려 사기 공범으로 몰렸던 젊은 여성이다. 이 여성은 사장이 중국 출장 중이라는 말만 믿고 쇼핑몰 회사에 취업한 뒤 ‘카카오톡’으로 업무 지시를 받아 쇼핑몰을 운영했는데, 어느 날 사기 공범으로 체포됐다. “알고 보니 그 쇼핑몰은 허위였던 거예요. 완전 취업사기죠. 사장이라는 사람은 중국에서 아예 입국하지 않고 돈만 환치기 형식으로 중국으로 넘어갔어요.” 사건을 설명하는 조수진 변호사의 목소리가 점차 격앙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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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몇 십 억 대 사기사건의 공범이 됐고, 유죄를 인정받으면 20대 젊은 사람이 손해배상을 계속 당할 수도 있잖아요. 평생 어떻게 살겠어요?” 이 여성은 언니와 함께 발 벗고 나서 직접 증거로 쓸 수 있는 CCTV 영상을 찾아다니고, 몇 개월간 온갖 증인을 찾아 법정에 세웠다. 법정에는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 계속 방청을 왔다. “분연히 다퉜는데 집행유예를 받은 거예요. 아마 그 판사님은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졸지에 ‘사기사건 공범’이 된 ‘취업사기 피해자’는 “꼭 무죄를 끝까지 다투겠다”며 2심으로 넘어갔다. “국선전담이 약간 아쉬운 게, 그렇게 애착이 가는 사건을 끝까지 추적할 수가 없어요. 빨리 정을 떼야 돼. 빨리 정 주고, 빨리 떼고. 그런 게 약간 힘들죠.”

국회에서의 경험은 변호사로서 재판을 수행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기존 대법원 판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대법원 판례를 깨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별로 무섭지도 않아요.” 법은 시대와 사회의 모습에 따라 변한다. 현상이 변해 더 이상 기존의 법으로 담아낼 수 없다면 누군가 새 법안을 발의하고, 법이 바뀐다. “하물며 그 법을 해석한 판례야말로 현실이 바뀌어도 최대한 많은 현실을 담아낼 수 있게 더 넓게, 적극적으로 법을 활용하는 것이 맞는 판례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나의 취미는 민변!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취미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일과 일 사이에 잠깐 쉬고 재충전하기 위한 취미, 두 번째는 여가를 즐김으로써 평소의 일과 생활에서 한 발짝 떨어질 수 있는 취미, 세 번째는, ‘지금 여기’에 집중함으로서 삶의 의미를 고양하는 취미. 조수진 변호사에게 민변은 ‘세 번째 종류’의 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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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너무 가볍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주변에서 ‘너 민변도 나가니?’라고 놀라는 분이 있으면 ‘취미생활’이라고 얘기해요.” 대학교 서클 활동처럼, 돈을 벌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재미있어서, 내 선택으로 하는 활동이다.

조수진 변호사가 주로 활약하고 있는 위원회는 민생경제위원회다. “민생은 전통적인 인권 개념과 달리 굉장히 새로운 분야예요. 그만큼 실생활과 밀접한 여러 문제에 대해 활동하실 수 있죠.” 부동산, 임차 등 주택정책, 부산저축은행 사태와 파산회생 등 금융정책, 중소기업을 보호하고 재벌을 견제하는 공정경제 분야, 세금 낭비를 감시하고 조세정의를 실현하는 조세재정 분야 등 실생활의 많은 문제들이 민생경제위원회의 소관이다. 5월 15일부터는 매주 월요일 저녁 민생위가 준비한 민생 관련 법률 실무 강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민생위의 장점은, 어느 위원회나 그렇겠지만,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고, 민생위가 다루는 문제들이 후배도 큰 소리 낼 수가 있는 분야라는 점이에요. 생계형 문제가 많기 때문에 후배들이 선배들의 노하우를 배워서 금방 뛰어넘을 수 있죠.” 그래서 조수진 변호사는 민생위를 ‘봉숭아 학당 같아서 정이 간다’고 표현한다.

다시 새로운 도전 앞에서

민변 활동에서 조수진 변호사가 자신의 첫째가는 롤모델로 꼽는 선배는 ‘민생경제위원회의 조물주’ 김남근 변호사다. “공익활동 하면서도 변호사로서의 전문성도 유지하시고, 박사도, 또 공익이 아닌 전문법으로 박사학위 받으셨잖아요.” 여전한 열정에 철저한 건강관리까지, 닮고 싶은 부분이 많다. 이제 새롭게 개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선배 변호사들에게 묻고 도움 받는 부분이 많다.

“요 며칠 2-3주 개업을 준비하려고 생각해보니, 내가 구슬만 많이 모았고 한 줄로 꿰지는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앞으로는 뭔가를 좀 진득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변호사로서 해볼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구슬을 모았다’고 표현하는 것을 듣고 있으니 문득 만화 <드래곤볼>이 떠올랐다. 7개를 모으면 무엇이 되었든 하나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신비한 구슬을 찾아 떠나는 모험 이야기다. ‘드래곤볼’처럼 변호사가 할 수 있는 7개의 역할을 모으면…… 그런 상상을 하다 웃고 말았다.

“(‘드래곤볼’)다 모으면 ‘여자 김남근’ 되는 거 아니에요? 조수진 변호사님 개업과 동시에 여자 김남근 변호사님이 되실 거 같네요.”

“저야 영광이죠!”

조수진 변호사는 개업과 함께 민변에서 더욱 활발하게 활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 우선 민생경제위원회 조세재정팀에서 인천 아시안게임 당시 사용한 예산에 대해 진행 중인 주민소송부터 참여할 계획이다. 변호사로서의 다양한 역할을 담금질하고 있는 조수진 변호사, 내일은 또 무슨 도전을 할지 그 행보가 사뭇 기대된다.

화, 2017/04/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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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은 조지훈 변호사님인데요. 자기 소개부터 부탁드릴게요

 

조지훈 저는 연수원 38기이고 현재 법무법인 다산에서 일하고 있는 조지훈입니다.

 

김지미 조변호사님에 대해서 찾아봤더니 처음엔 전자계산학과를 다니시다가 다시 법대를 들어가셨더라구요.

 

조지훈 네. 처음엔 수원에 있는 경기대 전자계산학과에 들어갔었는데요, 들어가고 나서 학과공부는 전혀 안하고 동아리 생활만 하다가 3학년 때 동아리연합회 부회장, 4학년인 96년도에 총학생회 부회장을 하면서 연세대 투쟁, 그것 때문에 구속이 됐었어요. 1996년 8월에 구속이 돼서 99년 2월에.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어요. 6개월 정도 있었죠. 민변 다른 선배님들에 비하면 아주 짧은 기간이었죠.

 

김지미 1심에서는 실형을 받으셨던 거죠?

 

조지훈 네. 실형 1년 받았었어요. 그때 변호해주셨던 분이 해마루에 계신 박세경 변호사님이에요.

 

김지미 우리 회원 중에 그런 분들이 있어요. 민변의 변론을 받다가 민변 회원이 되신(웃음).

 

조지훈 그런 인연이 있었죠. 출소하고 났더니 제적이 되어 있어서 군대를 공익근무요원으로 다니면서 수능 공부를 했어요.

 

김지미 법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직접 재판의 과정도 겪어보고 그러면서 필요성을 느끼셨던 거에요?

 

조지훈 공대 출신이고 한겨레 신문 정도만 보던 때인데, 형사절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전혀 예견할 수가 없는 거잖아요. 내가 어떤 지위인지도 전혀 몰랐고. 그게 좀 컸었던 것 같아요.

김지미 되게 답답했을 것 같아요.

 

조지훈 네. 그때는 경찰한테 엄청 맞았어요. 끌려갈 때도 맞고, 경찰서에서도 엄청 맞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왜 계속 맞고 있었나(웃음). 저는 연대 안이 아니고 밖에 있었는데 밖에서 들어가다가 연행됐던 거죠. 신촌 지하철역에서 연행돼서 교차로까지 맞으면서 왔었어요.

 

김지미 가담 정도에 비해서 형이 많이 나온 것 같네요(웃음). 1심에서 1년이 나왔으면.

 

조지훈 그때는 모든 걸 직책으로 판단해서 총학생회 부회장이라는 게 컸죠.

 

김지미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셨다고 했는데 어떤 동아리였어요?

 

조지훈 민속연구회라고. 탈패였는데요. 탈춤이나 장구나 이런 것들은 전혀 못치고(웃음) 그래서 형들이 이상한 거 쥐어주면서 그냥 너는 앞에 나가라, 그러면서 인생이 어떻게 보면 꼬인거죠.

 

김지미 그러다가 한양대 법대는 언제 들어가신 거에요?

 

조지훈 00학번이요. 27살에 들어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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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군대까지 다녀오고. 늦은 나이에 대학을 다시 가게 됐는데 특히나 이과생이 법학이라는 학문에 적응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을 것 같아요.

 

조지훈 저는 적응하는 데만 1년 6개월 정도 걸린 것 같아요. 대규모 강의도 경험이 없고, 1년 반 정도는 내가 왜 여기에 왔나하는 생각을 했죠.

 

김지미 늦은 나이에 법대를 가신 건 당연히 고시를 염두에 둔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요. 한양대에 가서는 학생운동이나 이런 쪽에는 관여 안하셨어요?

 

조지훈 그 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어요. 학생회 활동을 하던 친구들하고 같이 고시공부를 했죠.

 

김지미 적응이 너무 어려웠다 라고 하는 것 치고는 2004년에 졸업을 하시고, 2006년에 합격을 하신 거니까 비교적 단기간에 붙었다고 볼 수 있는데, 공부 열심히 하셨나봐요.

 

조지훈 운이 좋았어요. 04년에 졸업하고 그 다음해에 1차, 그 다음해에 2차를 붙었으니까요.

 

김지미 조변호사님이 38기 노동법학회장이잖아요. 제가 37기 노동법학회였는데, 38기 노동법학회장이 굉장히 훈남이다 라는 소문이 있었어요(웃음).

 

조지훈 그런 잘못된 소문이.(웃음)

 

김지미 학생 때 가지고 있었던 지향을 이어가는 의미에서 학회활동을 하신 거겠네요.

 

조지훈 연수원 가서 다들 그렇겠지만 연수원 공부가 많이 안 맞았어요. 연수원 공부에 매달리기에는 나이도 많았고. 그리고 저희 학회에 좋은 친구들이 많았어요.

 

김지미 노동법학회가 맥이 끊겼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회원 중에도 예전부터 열심히 활동하시던 분들은 다 노동법학회 말씀을 하시거든요., 그래서 노동법학회 맥이 끊긴 게 참 안타까워요. 연수원 수료 후에 바로 다산으로 들어가신 거죠?

 

조지훈 네. 제가 다니던 경기대가 수원에 있었고 그래서 그때 사건이 터지면 대부분 다산에서 변론을 해 주셨어요. 우연찮게 저희 노동법학회 지도교수님이셨던 노정희 교수님이 또 다산 출신이세요.

 

김지미 변호사님이 활동하시는 걸 보니 ‘인권재단 사람’ 감사도 하시고 약간 특색있는 게 성남에 있는 ‘이로운재단’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시고 지금까지 이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계시던데 이로운 재단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요?

 

조지훈 아름다운 재단이 전국단위의 재단이라면 이로운 재단은 지역 재단이라고 할 수 있어요. 미국 같은 경우에는 그런 재단이 각 카운티마다 있어서 큰 역할을 하는데요, 그런 걸 모태삼아서 지역에서 기부와 나눔을, 아름다운 재단의 지역판을 만들어보자. 그래서 시작을 하게 된 거죠.

 

김지미 여기에는 어떻게 처음부터 참여를 하시게 된 거에요?

 

조지훈 저희 집이 성남이에요. 거기에서 지역 시민사회단체 분들을 만나면서 같이 하게 됐죠.

 

김지미 ‘이로운재단’은 지금 잘 운영이 되고 있는가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기부를 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이런 모토로 운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가 어쨌든 기부문화가 굉장히 취약하잖아요. 그리고 지역에서만 기반해서 활동을 하면 범위가 좁아질 수밖에 없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조지훈 아직 성공이라고 보기에는 좀 그렇지만 일단 성남에 기업들이 많잖아요. 판교테크노밸리나 이런 곳에 있는 기업들한테 기부를 받고 있고 그 다음에 성남시와 같이 거버넌스를 형성해서 만들어 가려고 하는 단계예요. 그래서 지금은 청년 문제를 지역재단 차원에서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공모사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얼마 전에 성남시에서 청년수당 주겠다는 얘기도 한참 이슈가 됐었고, 성남에서 청년문제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네요,

 

조지훈 네. 이런 사업들이 자리를 잡아서 시장이 바뀌더라도 유지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김지미 변호사님 예전 이력도 있고 수혜를 받았던 입장이기도 해서 아무래도 시국사건, 집시, 노동 쪽으로 변론을 많이 하시게 되겠네요.

 

조지훈 네. 그런데 아시겠지만 노동사건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민주노총 법률원에서 주로 담당을 하셔서. 아무래도 국가보안법 사건, 집시법 사건을 많이 하죠.

 

김지미 국가보안법 사건은 조금 후에 애기를 하기로 하고, 보니까 집단소송을 꽤 하신 것 같더라고요. 비료담합 관련해서 농업인들 대리해서 2만 8천명 규모의 집단소송을 하신 것도 있고, LPG 담합과 관련해서 개인택시 운전자 만 명을 대리해서 집단소송 하신 것도 있고. 집단소송도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활성화가 되어 있지 않잖아요. 인용되는 경우도 잘 없고.

 

조지훈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나라 집단소송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되게 어려운거죠. 원고 2만 8천명 개별로 입증을 해야 되는 거니까요. 비료담합이면 2만 8천명의 비료 구매량, 손해액 이런 것들이 다 특정이 되어야 해서, LPG 담합도 마찬가지고. 그런 게 너무 어렵고 담합행위에 대해서는 손해액추정 이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해야 되는데 아직 법원이 다른 민사사건이랑 동일하게 취급을 해요.

 

김지미 담합이 있었다는 결정이 나오더라도 그것과는 별개로 손해입증은 또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조지훈 네. 그냥 일반 민사와 거의 동일한 기준으로 판단을 하고 있어서 그런 점이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그리고 담합 같은 경우는 기업들이 어떻게 대응을 하냐면, 행정소송으로 시간을 무조건 끌어요. 행정소송에서 담합이 맞냐, 안 맞냐 이거 판단 받는 것만도 몇 년이 걸리는 거에요. 그렇게 결정이 되면 다시 민사가 시작되는 거죠. 그래서 말씀하신 사건들이 2010년. 2011년 사건들인데 아직까지 진행 중이에요.

 

김지미 길고 어려운 싸움을 하고 계시네요. 변호사님 하면 피해갈 수 없는 게 국가보안법 사건일 텐데 특히 내란음모 사건 정말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내란음모 사건 변호인단 중에서도 조지훈 변호사님이 제일 고생 많이 했다라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어요. 간사를 맡으셔서 실무를 거의 도맡아 하셨잖아요. 민주변론에 박치현 변호사님이 변론기도 쓰셨는데 그 내용도 굉장히 흥미진진했거든요.

 

조지훈 제가 실무담당을 하게 된 이유가 사건이 수원 남부서라서(웃음). 제 사무실과 되게 가깝고 영장실질심사를 수원지법에서 하고, 그래서 피해갈 수 없었던 거죠. 제 담당 직원은 다음부터 이런 사건 또 오면 회사 나가겠다 이런 얘기를 하고(웃음). 내란음모사건은 진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간사변호사 실무를 제가 하게 됐는데 모두 다 열심히 하셨어요. 김칠준 변호사님도 여러 가지 경험을 했지만 이번처럼 변호인단이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움직인 경우는 처음인 것 같다고 하셨으니까요. 저는 이런 대규모 변호인단으로 한 사건은 거의 처음이었으니까 그게 좀 달랐던 것 같아요.

그리고 워낙 여론이 안 좋았고 저도 처음에는 워낙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아서 언론의 얘기가 맞나 이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증거기록을 다 분석하면서 이게 진짜 아니구나 하는 걸 계속 깨달아 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른바 제보자라고 하는 사람에 대한 증인신문. 그 분은 저도 아는 사람이었거든요. 제가 통합진보당 경기도당 당기위원장을 했었는데 그 사람이 당기위원이었어요, 김칠준 변호사님은 더 잘 알고. 그래서 그때 신문과정이 뭐랄까 같은 사람인데 완전 다른 사람을 보는..기분이 이상했어요.

그 사람이 김칠준 변호사님하고 저한테 그런 식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대놓고 그래서 김칠준 변호사님께서 정말 화가 나셔서 큰 소리 치고 그랬었죠. 인간이 저렇게 될 수 있나하는 철학적인 고민까지 하게 되더라고요.

 

김지미 저랑 같이 사는 사람도 그랬지만 조변호사님도 거의 이혼당할 뻔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집에 들어오지를 않으니까(웃음).

 

조지훈 설변호사님이 저한테 한 번 그러던데요. 자기는 그래도 자주 들어가는 거라고, 조변호사는 더 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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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말씀하신 것처럼 사건을 직접 하는 사람은 기록을 보면 볼수록 이거 진짜 아니구나 하면서 점점 사건에 빠져들고 어떤 사명감도 생기고 그렇지만 어쨌든 집에 있는 사람은 모르잖아요. 이게 큰 사건이고 언론에도 나오고는 하지만 이해받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해를 시키셨어요?

 

조지훈 끝날 때까지 이 재판의 역사적 의미와 무게에 대해서(웃음). 와이프가 경기대에서 학생회 활동 같이 했던 동기에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이해는 좀 하죠.

 

김지미 이해 안 되던데요(웃음).

 

조지훈 이해는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참는 거죠. 분노를 관리하고 참는 거죠.(웃음)

 

김지미 처음에는 다산에서 쪽잠을 자다가 나중에는 아예 숙소를 잡았잖아요. 그리고 조변호사님하고 설변호사하고 몇 분은 거의 상주하다시피 거기서 지내셨잖아요. 그런 식의 작업을 하는 사건은 저도 처음 봤거든요. 또 변론기를 읽어보면, 대규모 변호인단을 꾸리더라도 이름만 올려놓은 사람들이 많고 실질적으로 수행을 하는 사람은 소수인데 이 변호인단은 참여한 사람이 모두가 다 역할을 갖고 일을 했던 유일한 변호단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내용이 있거든요. 어떻게 해서 변호인단이 그렇게 잘 운영이 됐을까요?

 

조지훈 일단 변호인단 구조를 김칠준 변호사님, 천낙붕 변호사님, 심재환 변호사님 이 세 분을 대표단 그룹으로 하고, 저랑 설변호사님이랑 박치현 변호사님이랑 하주희 변호사님 포함해서 5-6명이 실무단 변호사, 그리고 나머지 변호사님들은 각자 역할을 나눠서 그런 체계가 잘 잡혀있었어요. 그리고 대표단 세 분이 잘 이끌어 주셨던 것 같아요.

 

김지미 제가 들은 것 중엔 구글드라이브를 통해서 여러 명이 하나의 서면을 동시에 작업을 했다라고 하던데 이건 윤영태 변호사님의 공이었던 거죠?

 

조지훈 네. 윤영태 변호사님의 역할이 아주 컸어요. 윤변호사님이 IT 쪽으로 아주 해박하셔서 디지털 증거와 관련해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김지미 디지털 증거의 증거능력 관련해서 최근에 저도 관심이 많이 생겼어요. 디지털 증거는 사실 왕재산 사건이나 일심회 사건 같은 국가보안법 사건을 통해서 이론이 정립된 측면이 있거든요. 이번에 내란음모 사건도 녹음파일과 관련해서 치열하게 다투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부분과 관련해서 디지털 증거의 증거능력을 다투는 것이 왜 중요한지 얘기해 주신다면요?

 

조지훈 저도 이전에는 큰 고민 없었는데 국가보안법 사건은 디지털 증거가 많이 나오거든요. 일반사건에서는 파일 같은 디지털 증거 관련해서 다투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다퉈보면 약점이 나오더라고요. 내란음모사건에서도 녹음을 디지털 녹음기로 했는데, 그 중에 2개는 해쉬값 자체가 틀렸어요. 해시값의 동일성이 인정이 안된 거에요. 우리가 동의했으면 그냥 넘어갈 문제인데, 부동의 하니까 해쉬값을 다 맞춰보는 거죠. 그런데 기재된 해시값 자체가 다른 거에요. 그렇게 해서 2개는 증거능력이 인정이 안 되었어요.

 

김지미 해쉬값이 다르다는 건 증거로 낸 파일이 원본과 동일한 파일이라고 볼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검찰에서 그걸 그냥 증거로 냈다는 거죠.

 

조지훈 네. 그런데 기술적인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쉬값 자체가 다른 것은 심각한 결함이잖아요. 이런 것을 발견하려면 디지털 증거는 정말 꼼꼼히 봐야 한다. 많이 문제 됐던 것은 암호를 푸는 복호화 과정인데, 복호화 과정 자체를 통제 안 한 것은 위법하다는 판결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어요. 그런 것들이 의미가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김지미 조금 더 이야기를 해 보자면 국가보안법 같은 시국사건을 통해서 디지털 증거의 증거능력에 대해서 문제점을 인식하신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최근 카톡이나 국정원 해킹 등 정보인권 관련해서 굵직한 사건들도 생겨서 지금 민변에서 정보인권위원회 준비모임을 하고 있고, 조변호사님도 참여를 하고 계시죠. 그래서 형사사건에서 동영상이나 녹음 파일, 디지털 사진 같은 것들이 증거로 나왔을 때 첫 대응을 이렇게 해야한다는 팁을 알려주신다면.

 

조지훈 처음에 디지털 증거, 녹음파일이나 디지털 사진 이런 거에 대해서 부동의 의견을 밝히면 많은 판사들이 그래요. 그럼 이게 그 현장을 찍지 않았다는 얘기냐. 이게 조작됐다는, 위변조 됐다는 얘기냐. 위변조 되지 않았으면 왜 부동의 하느냐 이렇게 물어보는 거에요. 그럴 때는 디지털 증거는 본질적으로 조작이나 변개에 아주 취약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변조가 되지 않은 증거능력 있는 증거라는 입증을 먼저 검사가 해야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부동의 하는 거다 그렇게 해야 되는 거에요. 동영상을 찍었으면 촬영한 사람, 파일을 저장하고 복사한 사람을 다 불러서 증거의 연속성, 무결성이 지켜졌는지 봐야 하는 거고. 동영상 파일이 해당 캠코더에 저장된 원본이 아니라고 하면 해쉬값에 따라서 연속성이나 동일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거고. 이런 것들을 법정에서 다 밝혀야 되는 거거든요. 그걸 요구해야 해요.

 

김지미 그러면 어떻게 하랴는 얘기냐, 국과수에 보내서 감정이라도 하라는 말이냐, 감정 비용을 피고인에게 부담하게 하겠다는 식으로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판사도 있거든요. 그때는 어떤 식의 답변을 해야 할까요?

 

조지훈 만약 녹음파일이라고 한다면 녹음자를 출석시켜야 하고 그것을 다른 디지털 저장 장치에 넘길 때 있었던 사람들이 다 나와야 하는 거죠. 저희 내란음모사건 때 그래서 녹음자들이 다 나왔거든요.

김지미 저도 처음에 디지털 증거에 대한 자료를 보면서 해쉬값이 뭐지? 무결성이 뭐지? 어떻게 하라는 거지? 되게 막연했거든요. 디지털 증거가 증거능력을 가지기 위한 요건에 관해서 짧게 얘기해주시면.

 

조지훈 과정상의 자료의 동일성 인정되어야 되는 것이죠. 수집절차, 복제하는 절차, 그리고 증거로 제출되는 절차. 디지털 파일이라는 것이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0101, 이렇게 이진법으로 되어 있는 자료이기 때문에 위변조가 너무 용이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걸 봉쇄할 수 있는 조치가 취해졌느냐 그게 요건의 가장 기본 뼈대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어요.

가장 간편한 게 해쉬값을 추츨해서 원본하고 사본의 해쉬값이 같으면 동일성이 인정이 되는데,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 녹음자 아니면 경찰이 채증한 거면 채증한 사람, 이걸 또 저장한 사람 각각 다 불러서 이게 무결하게 계속 원본 동일성이 유지되는지가 입증이 되어야지만 증거능력이 있다라는 거죠.

 

김지미 사실 이건 민변 변호사들 아니면 싸울 수가 없는 부분이고, 최근에는 우리 회원들 사이에서도 이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물어보시는 분들이 꽤 계시거든요.

 

조지훈 왕재산 사건 이후에 천낙붕, 이광철 변호사님 위주로 이런 문제의식이 있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디지털정보위원회 준비모임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 분야에 관심이 있거나 공부하고 싶으신 분들이 오시면 많이 배우고 굉장히 유익할거예요. 그리고 지금시기에 굉장히 필요한 작업인 것 같아요. 증거능력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정보인권 관련해서 카톡도 있고 해킹도 있고 사실 산재해 있는데, 민변에 대응할 만한 단위가 없어서 내년에 정식 위원회 발족을 목표로 하고 있고 선배들의 노하우도 배울 수 있는 좋은 모임입니다. 많이 참여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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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내란음모 사건 얘기로 다시 돌아오면 기록을 보면서 진짜 이건 아니다는 생각을 하셨는데 1심에서는 모두 유죄가 나왔잖아요. 몇 달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가고 엄청 고생을 했는데 결과가 그렇게 나왔을 때 상실감이 굉장히 컸을 것 같아요.

 

조지훈 네. 멘붕상태였죠. 아직도 생생해요. 1심 판결을 법정에 가서 들었고, 김칠준 변호사님이 선고 후에 바로 나와서 그 자리에서 즉흥연설을, 거의 절규를 하셨죠. 그래서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한데, 한쪽에서는 우리가 너무 쉽게 봤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 식으로 판단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거죠. 또 한편으로 항소심에서 더 크게 칼을 갈아서 붙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김지미 1심에서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항소심 가서 특별히 더 할 것이 있을까 생각이 언뜻 드는데, 항소심에서 뭔가를 할 만한 게 더 있었나요?

 

조지훈 역사적인 무게도 있지만 기록도 방대하고 증인신문도 저희가 조금 부족했던 게 주5일 재판이었잖아요. 그래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던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논리체계나 변론의 실질적인 내용이 구조적으로 체계적으로 짜임새 있게 탁 다가가지 못했던 그 부분은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항소심에서는 거기에 좀 더 집중을 했던 거였죠.

 

 

김지미 언뜻 생각해 봐도 변호인단은 그렇게 많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주5일 재판을 하다보니까 정리가 안 되는데, 재판부는 당연히 정리가 안 될 것 같거든요. 그래서 어쩌면 이 판결을 그래도 조금 뒤집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더 들었을 것 같아요.

 

조지훈 1심 판결문 자체가 비약이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항소심에서 충분히 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내란음모를 인정하는 부분에 있어서. 그래서 항소심에서는 음모를 깨는데 있어서, 윤영태 변호사님이 아이디어를 주셔서 음모에 관한 하급심 판결을 다 뒤졌어요. ‘음모’자 들어가는 모든 하급심 판결을 다 뽑아서 그거를 의견서로 제출했죠. 그게 음모부분에 대해서 법리적으로 깨는 근거가 됐고, 또 하나는 일본에 이른바 삼무판결, 예전 오키나와 투쟁 때 했던 음모와 관련한 아주 중요한 판결들이 많아서 그걸 조사해서 제출했어요. 그게 법리적으로 큰 근거가 됐었죠.

 

김지미 그런데 항소심에서 내란음모는 무죄가 됐지만 내란선동은 유죄가 됐단 말이죠. 모르는 사람이 듣더라도 내란음모는 무죄고 내란선동은 유죄라는 게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그게 결국에는 대법원까지 확정이 돼서 그 사건은 종결이 됐는데, 그런 엄청난 큰 사건을 끝내고 났을 때의 감회랄까 이제는 정리가 좀 되셨나요?

 

조지훈 개인적으로 쭉 정리해 볼 시간은 없었는데, 그 이후에 계속 재판을 하다보면 문득문득 내가 많이 좀 성장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사건을 겪으면서 재판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 그 다음에 변론기술이라면 기술 이런 것들이 아직도 많이 부족한데 문득문득 이런 큰 여러 가지 다양한 것을 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가졌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김지미 변호사라는 직업이 혼자서 하는 직업이잖아요. 보통은 내가 혼자 서면 쓰고 혼자 재판 나가고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를 알기가 쉽지 않은데 변호인단 활동을 하면 배우는 것도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의 변론 스타일이나 증인신문 할 때 태도 이런 것들 보면서도 굉장히 많은 공부가 될 것 같거든요.

 

조지훈 설변호사님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증인신문을 능숙하게 잘 하시더라고요.

 

김지미 마치 제가 이 대답을 유도한 것 같네요.(웃음). 그럼 이쯤에서 피해갈 수 없는 개인사를 또 여쭤보면. 아까 살짝 사모님하고 학생시절에 만났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조지훈 네. 알게 된 건 94,5년도부터 알게 됐는데, 결혼은 2006년도에 했지요.

 

김지미 2006년이요? 2차 시험을 본 해이신 것 같은데요.

 

조지훈 2차 시험 보기 1달 전에 결혼을 했어요.

 

김지미 시험보기 한 달 전에요? 시험을 포기하셨나요(웃음)?

 

조지훈 많은 사람들이 제 청첩장을 보고 얘는 포기했구나 이렇게 봤죠.

 

김지미 2차 시험을 끝내고 했어도 됐을 텐데..아무래도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겠네요.(웃음)

 

조지훈 우리 첫째요.(웃음) 첫째 딸 생일이 2006년 10월 11일인데, 그 다음날 2차 발표가 있었어요. 복덩이죠. 산부인과에서 와이프랑 있어서 저는 합격자 명단도 못 봤어요. 신림동에 있는 후배가 됐다고 알려줘서 알았죠.

 

김지미 출산과 합격 중 어느 쪽에 더 마음을 졸이셨어요? 예정일이 거의 같았을 텐데.

 

조지훈 제 와이프가 출산 전에 너무 아팠어요. 저희가 참 무식해서 자연분만 좋다고 그래서 늙은 거는 생각지도 않고 그거 한다고 고집을 부렸던 거에요. 그래서 아프다고 하는데 산부인과 가면 안 좋다고 해서. 엄청 고생했어요. 출산하기 몇 주 전부터 일어나지 못했어요. 출산하고도 6개월 동안 못 일어났어요 골반 쪽에 문제가 있어서. 그래서 출산하러 갈 때도 친구들 불러서 들고 이동하고 그랬었어요. 그래서 2차 발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죠.

 

김지미 그렇게 무사히 아이도 태어나고 다음날 바로 합격도 하고 진짜 복덩이네요. 아이가.

 

조지훈 요즘 말을 참 안 들어서(웃음).

 

김지미 2006년이면 지금 10살 됐겠네요. 그럼 아이는 1명이신가요?

 

조지훈 저희 사무실 이름이 다산이기 때문에 거기에 부응하느라 2010년에 둘째를 낳았지요. 저희 사무실은 변호사님들도 다 다산이에요(웃음).

 

김지미 사모님은 학교 때 알고는 지냈지만 본격적으로 사귄 건 그때는 아니었나 봐요?

 

조지훈 제가 학교를 그만두는 그 때쯤부터 해서 연애를 10년 정도 했어요. 제 공부 뒷바라지를 지금의 와이프가 해 줬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제가 꼼짝을 못해요. 뒷바라지 다 해줬더니 당신이 지금은 뭐라도 된 줄 아냐? 부터 해서 나없었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말이야 막 이래요(웃음).

 

김지미 변호사님들 인터뷰 하다보면 사모님들 훌륭하신 분들이 많더라구요. 오세범 변호사님은 사모님을 가리켜서 ‘장비’같다고 표현하셨어요.(웃음) 그러면 사모님은 변호사님의 성인 이후의 거의 모든 걸 다 알고 계시는 것과 마찬가지네요.

 

조지훈 네. 그래서 제가 사람들에게 잘 공개하지 않아요(웃음).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입 뻥끗하면 너는 끝난다 이러고 있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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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저희 회원행사에 한 번 같이 오시죠(웃음). 변호사님은 지금 정보인권모임 말고는 위원회 활동을 특별히 하시진 않으시죠?

 

조지훈 네. 수료하고 노동법학회장 출신이라서 노동위원회 해야 된다 이런 얘기 들었었는데 사무실이 수원이라 모임에 참석하는 게 쉽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디지털정보인권위에 주력을 하려고 하고 있어요.

 

김지미 어느덧 7년차 중견변호사가 되셨는데 요즘 정세가 참 암울하잖아요. 이럴 때 민변이 이런 역할을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조지훈 7년차 중견변호사인데, 저희 다산에서는 아직도 막내에요. 제 후임이 오세범 변호사님이라(웃음). 제 주위에 지인들이 제가 민변 회원이라고 하면 그것 자체로 되게 높이, 아 정말 고생 많다 이렇게 해주는 분들이 많거든요. 시민들이 민변에 바라는 요구는 되게 높은 것 같아요. 특히 지금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민변이 한 발 더 치고나가는 역할을 해야 되지 않나. 지금도 잘 하고 있지만, 더 뭔가 시민들의 쌓인 분노를 어떤 지식인의 목소리, 전문가의 호소 이런 것을 모아서 반 발짝씩이라도 더 치고 나갈 필요가 있지 않나.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내란음모, 정당해산을 쭉 다 겪었잖아요. 내란음모 할 때 어떤 변호사님이 내란음모까지 터졌으면 재네들 다 한 거다, 이보다 더 할 게 있겠나 했는데 정당해산까지 갔잖아요. 지금 정권은 로드맵이 있는데 저도 그렇지만 지식인들이 대부분이 김대중, 노무현 10년의 역사가 있는데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을 거다 이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한홍구 교수님이 하신 얘기 중에 예전에 국정원 과거사위 할 때 자기 밑에서 열심히 도와준 담당자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유우성 사건에서 증거 위조한 과장이라는 거에요. 정말 우리가 잘못한 게 이 정도 하면 청산이 될 줄 알았는데 그건 정말 환상이었다. 인적 청산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무지했거나 너무 방관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는데 그게 냉철한 진단인 것 같아요.

 

김지미 민변의 역할이 커질수록 어쨌든 회원들을 믿고 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 조변호사님의 적극적인 활동을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좋은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목, 2015/11/1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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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어도 따뜻한 기억으로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 기억만으로도 온기가 전해지는 사람. 균형감각과 여유, 그리고 온기를 동시에 가지면서도, 술도 세고 스피드를 즐기는 반전 있는 멋진 여자, 위은진 변호사님을 만나기 위해 잰걸음으로 사무실을 찾았다. 2년 연속 큰 상을 받았다고 하니 그 신공이 궁금하기도 하고! 자랑스러운 민변의 울 언니, 어디 한 번 만나 볼까요?

이혜정(이하 이): 2015년 첫 번째 사회공헌대상을 수상하신데 이어 2016년에는 변호사공익대상까지 수상하셨네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먼저 간단한 소개 부탁드릴게요.

위은진 변호사(이하 위) : 감사합니다. 저는, 기수는 31기이고 위은진입니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드려요. 상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제가 변호사로 활동한 기간이 길고, 지속적으로 했기 때문에 주신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는 변협 산하 이주민이나 외국인 관련 위원회 활동 위주로 공익활동을 했기 때문에, 변협 입장에서 다른 변호사들보다 제가 활동하는 게 더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이 사람이 계속해서 활동을 하고 있구나’ 해서 남들보다 쉽게 보이는 위치에 있어서 받은 상 아닌가 싶어요.

: 이주민과 관련된 공익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 이주민 관련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처음엔 사업적인 이유였어요. 초보 변호사로 막 개업한 이후에 앞으로 시장 상황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고, 일반적인 변호사 업무 외에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라고 생각하다 찾은 게 이민에 관련된 업무였거든요. 한국에서 미국, 캐나다 등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사업도 괜찮을 거 같은데, 아직 변호사들이 이 분야에서는 활동이 많지 않구나, 내가 한 번 해보자, 이런 식으로 이주민 관련 업무를 시작했죠.

처음엔 우리가 이민을 보내는 나라인줄로만 알았지 우리나라로 이민을 오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몰랐거든요. 그런데 이주노동자나 이런 분들은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 위치에 있어서 인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오히려 들어오는 이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니 이분들이 경제력이 없었어요. 법률 상담은 물론이고 변호사라는 사람을 한국에서 처음 만난 거죠. 돈이 없으니까 만날 생각도 안 했었고. 굉장히 작은 일에서부터 한국 법을 모르니까 무조건 불이익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자기가 받는 부당한 처우에 대해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사업으로, 영리목적으로 이 사람들을 만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영리 목적으로 일을 할 만큼 잘 하거나 잘 아는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이주민들을 만나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듣고, 돌아오면 다시 공부를 했어요. 법전도 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그런데 혼자 공부하는데 한계가 있잖아요. 공부를 하려고 해도 하다못해 참고할 책도 없었고요. 그때 판례 등을 공부하기 위해서 법률신문, 대한변협신문 같은 것들을 굉장히 열심히 봤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대한변협신문에서 UN 이주노동자 권리협약 비준을 준비하는 공청회가 있다는 기사를 봤어요.

이 기사를 스크랩해놓고, 기사에 위원장으로 나온 변호사님한테 그냥 전화를 했는데, 그 변호사님이 그렇게 연락이 잘 안 닿더라고요. 제가 좀 끈질긴 구석이 있거든요. 그래서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점심 먹고 전화를 했어요. 메모도 남겨놓았는데 리턴 콜이 잘 안 되더라고요. 결국 ‘오늘도 연락이 안 되면 포기해야겠다’고 맘먹고 전화를 했는데, 그날 전화 연결이 된 거예요.

제가 ‘공청회를 같이 준비하고 싶다’고 하니까 간사변호사를 통해서 연락을 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때 간사변호사가 황필규 변호사였어요. 그렇게 공청회 준비를 같이 하기 시작해서 12월에 공청회를 치르고, 처음으로 UN 이주노동자 권리협약을 소개하는 책자도 만들었고요. 그때 참여했던 사람들이 외부 토론회 등에 발제자, 토론자로 활동하면서 관심을 환기시켰던 거죠. 공청회 때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오셨고, 국회 보좌관들이 관심을 갖기도 하고 그랬어요. 물론, UN 이주노동자 권리협약은 아직도 비준이 안 되긴 했지만.

이 공청회 준비를 통해 변호사들 중에 이주민 활동을 하시는 분들을 처음 만났어요. 황필규 변호사님이 공감에 계시잖아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공감에 있는 회원들하고 일을 많이 하게 됐어요. 소라미 변호사님은 이주여성 관련 활동을 하시고, 장서연 변호사님도 이주노동자 관련 일을 하시고. 이런 식으로 공감의 그룹과 조금씩 같이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그분들이 100% 하실 때 저는 10%, 20% 일을 늘려 나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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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사업으로 이주민 업무를 시작하시다가 변협 활동으로 그 폭을 넓히셨는데, 그러면 민변 활동은 어떤 식으로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

: 처음에 어소로 변호사를 시작할 때 대표가 “민변 이런 데 가입하면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당시 민변을 잘 몰랐는데, 이때 ‘민변’이라는 단체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웃음)지금은 창원에 계신 손명숙 변호사님이 제가 막 개업하던 그 즈음에 회원팀으로 활동하고 계셨는데, 손변호사님이 저한테 밥이나 한 번 같이 먹자고 하셨어요. 옆 건물에 있는 여자 선배가 밥을 먹자고 하시니까 당연히 먹었죠. 그렇게 그날 밥을 얻어먹었어요. 비싼 건 아니지만. 밥을 사주시면서 ‘민변에 가입하는 게 어떠냐’고 하시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고, 제가 친했던 분들 중에 민변에 이미 가입하신 분들도 많아서 ‘알았다’고 대답했죠. 활동은 바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고, 그때는 제가 돈을 좀 벌 때였으니까 회비 10만 원도 낼만한 것 같고요. 아무 생각 없이 회비회원으로 가입했던 거죠. 그러다 이주민 활동을 하면서 공익활동을 더 하게 됐는데, 변호사 5년차를 지나던 즈음에는 ‘내가 돈 벌려고 변호사 됐나?’ 그런 고민이 밀려왔어요. 그런데 공익활동을 하고 싶다고 해도 이런 활동을 혼자 막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던 차에 민변이 공익활동을 한다고 하니까 2006년에 처음으로 여성인권위원회 송년회에 갔어요. 처음 자기소개를 하면서 ‘가입한지는 조금 됐는데, 공익활동을 더 활발하게 해보고 싶어서 송년회도 왔다’고 했더니 선배들이 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러시더라고요. 이제부터는 민변 활동을 좀 더 하겠다고 했더니 여성인권위원회 빈곤노동팀 김진 변호사님이 바로 전화를 하셨어요. 그래서 빈곤노동팀에서 스터디를 시작했고, 그러면서 민변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여성인권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점차 민변 활동을 하게 됐고, 이후 사무차장으로 활동하면서 제가 민변 성원이라는 걸 더 느꼈던 거 같아요. 여성인권위원회 할 때는 여성 인권에 관심 있는 변호사들의 모임이라고 느꼈다면, 사무차장을 하면서는 민변 전체가 활동하는 모습이 보이니까 제가 ‘정말 민변 회원, 성원이구나’ 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 남편인 김차곤 변호사님도 민변 회원이시잖아요. 요즘 노동위 뿐 아니라 특위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그 유명한 민변 내 김&김 변호사님! 김차곤 변호사님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 제가 96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고시공부를 한답시고 신림동으로 간 적이 있었어요.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상황이라 진짜 열심히 공부했어요. 내 인생에서 제일 공부를 열심히 했던 시절이었죠. 1차 시험에 막 합격한 뒤에 독서실 총무 중에 한 분이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걸 눈여겨보고 저한테 스터디를 같이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때가 공부 시작한지 2년째였는데, 2년 동안 혼자 공부를 하니까 정말 폐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전공이 문과가 아니라 그때까지만 해도 글을 길게 쓰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에 누가 스터디를 같이 하자고 한 거예요. 그때 그 분이 데려온 멤버가 저희 남편과 몇 명이었어요.

남편하고는 처음엔 그냥 스터디 내에서 좀 친한 오빠동생이었어요. 둘 다 지구과학에 관심이 있고, 스포츠도 좋아하고 해서 말이 잘 통한다고 느껴서 친해졌죠. 그러다 2차 시험을 치르고 결과가 발표됐는데 남편은 떨어지고 저는 붙은 거예요. 전화를 했더니 남편이 “너는 붙고 난 떨어졌는데 술이라도 한 잔 사야하는 거 아니니” 그러더라고요.

일주일 후에 만나서 술을 마셨는데, 마시다 보니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뭔가 분위기가 묘한 게 거기 더 있으면 안 될 거 같더라고요. 그런데 남편이 그때 저한테 “시험에 떨어진 건 괜찮은데 앞으로 널 못보는 게 너무 맘이 아프다”고 하는 거예요. 아 이 소리를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웃음). 저는 붙고 오빠는 떨어지니까 안쓰럽고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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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러면 딱 한 달만 만나보자”고 제안을 했고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네 번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런다고 없는 감정이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한 달 뒤에 “내가 특별히 감정이 안 생긴다”고 솔직히 말하고는, 둘이 소주를 세 병을 마시고 헤어졌어요. 그때 남편은 한 달 후에 1차 시험 봐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집에 돌아오고 나니 ‘이러다 그 오빠 한 달 후에 시험 못 보면 어떡하지? 시험 볼 때까지만 만나야 하나?’ 그런 걱정이 또 막 드는 거예요.

결국 ‘다시 한 달만 더 만나고, 시험 끝나고 결정하자’고 맘먹고 한 달을 더 만났어요. 그러고 나서 한 달 후에 남편이 1차에 또 떨어졌네? 그래서 당시 남편은 바로 취직하고, 저는 연수원에 들어갔는데 연수원에 남편 아는 사람들이 “어머 너 누구랑 사귄다며?” 이러는 거예요. 저는 그냥 오빠 동생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런 식으로 남편하고도 연애를 못하고 연수원에서 누굴 만나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시간이 흘러흘러 여름이 됐어요. 같은 조 사람들하고 지리산을 가기로 하고 남편한테 얘기했더니 “처음 맞는 휴가인데 어떻게 딴사람들이랑 갈 수 있냐”고 자기랑 지리산을 가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조 사람들이 아닌 둘만 따로 지리산에 갔는데, 그 날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거에요. 산에 다 오르지는 못하고 산장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자게 되었는데, 아침에 남편이 저를 깨우는데 이마를 손가락 하나로 톡톡 치면서 깨우더라고요. 그때 사람이 되게 깔끔한 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웃음) 또 내려갈 때 비가 갑자기 쏟아져서 계곡물이 불어났는데 남편이 저를 보호하면서 건너게 해주더라고요. 지리산에 갔다 온 후로 이 사람 좀 괜찮은 거 같다, 그런 생각이 조금씩 들었어요.

문제는 저는 첫눈에 반한 건 아니더라도 불꽃같은 연애를 하고 싶단 로망이 있었는데, 저희 남편하고는 너무 평탄한 관계가 쭉 이어졌다는 거예요. 남들이 공인한 남자친구는 늘 있는데 우리 둘은 너무 뜨뜻미지근하고. 계속 “이렇게 해서 결혼까지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뭔가 매듭을 짓겠다고 생각을 하고 밤에 전화를 해서 헤어지자고 했죠.

그랬더니 남편이 “그럼 그건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더라고요. 다음날 만났더니 저희 남편이 결혼하자고 하는 거예요. 난감하잖아요? 바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그래서 ‘그럼 한 시간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카페에서 나와서 한 시간 동안 같이 산책하면서 한 마디도 안 하고 각자 생각을 했어요. 이 사람하고 결혼을 했을 때, 아니면 이 사람하고 헤어지고 딴 사람하고 연애를 할 때, 시나리오를 계속 생각해봤어요.

지금 불꽃같은 연애를 못하지만, 이 사람하고 결혼하면 죽을 때까지 평온하게 살 거 같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내 성격을 봤을 때 불꽃같은 연애에 휘말리는 일은 없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한 시간쯤 산책하면서 생각하다 ‘불꽃같은 연애는 이 생에는 틀렸다, 다음 생에 태어나서 하자’고 결정하고 ‘결혼하자’고 대답했어요.(웃음)

: 두 분의 연애 이야기 너무 재밌네요. 너무도 평온하면서도 살짝 심쿵하면서도 애뜻한 느낌도 있고. 그런데 그런 두분 실제 결혼하고 나서도 진짜 평온하신가요? 두분 싸우실까요?

: 실제로 지금도 잘 안 싸워요. 결혼하고 한 번도 안 싸우다가 이라크 파병 때 의견이 서로 달라서 한 번 싸웠나. 그 정도?(웃음). 그리고 제가 남편에게 배운 것이 제가 약간 욱하는 성격도 있는데 그 때 남편이 ‘어떻게 가족에게 화를 내냐’고 그 말을 듣고는 반성도 했어요. 정말 처음에 남편을 만날 때 ‘이 사람과 결혼하면 정말 평온하게 끝까지 함께 살 것 같다’ 그런 느낌이 있었는데, 실제 그랬어요.

: 와 ‘어떻게 가족에게 화를 내냐’. 전 가족이라 화 더 많이 내는데…반성되네요(웃음). 김차곤 변호사님 정말 멋있으시네요! 변호사님은 제가 옆에서 보기에도 변협 활동도 많이 하시고 민변 활동도 정말 많이 하시고 계시는데..이렇게 활발한 공익활동과 생계이자 직업으로서의 송무의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지는 않으신가요? 공익활동을 하기엔 시간이나 여건이 안 되는 젊은 변호사들도 많은데, 조언을 좀 해주신다면?

: 이런 얘기를 하게 되면 사실 후배 변호사님들한테 되게 죄송해요. 어쨌든 저는, 시장 상황이 나쁘지 않아서 제가 그냥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변호사 일을 시작했거든요.

저는 2002년에 어소로 변호사를 시작했는데, 남들보다 좀 빨리 개업을 했어요. 연수원 다닐 때부터 개업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연수원에 있을 때 선배 언니들에게 ‘개업할 때 꼭 나랑 같이 하자’ 라고 해놨거든요. 사실 주변 교수님들이나 선배들은 젊은 여자변호사가 개업을 한다는 걸 되게 불안해하시더라고요. 교수님도 내심 걱정이 되셨는지, “어디 인터뷰 있다더라, 가봐라” 이러시면서 취업 자리도 알아봐주셨고. 그래서 어소로 취업을 한 다음 어쨌든 1년여 정도 기본 업무를 배운 게 당시 개업하려던 저한테 굉장히 도움이 됐던 거 같아요.IMG_7356

연수원에 같이 있었던 선배 언니들 중에 저하고 비슷하게 한 1년 정도 어소 변호사로 활동하다 개업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언니가 있었어요. 그 언니가 개업을 준비하면서, 제가 항상 “개업하려면 저 좀 껴주세요”라고 얘기하고 다녔던 걸 생각해내고는 저하고 같이 개업할 생각을 한 거예요. 그 선배 언니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서 갔더니 대뜸 “사무실을 보러 가자” 그래서, 2002년 12월에 어소 변호사로 1년을 채 안 채우고 전격적으로 개업을 하게 됐어요.

제가 변호사가 되었던 시점이, 여성 변호사가 다 합쳐 100명을 막 넘긴 상황이었어요. 변호사 시장 상황도 나쁘지 않았고, 여성 변호사라는 점도 사건 수임하기에 나쁘지 않았어요. 여성 변호사라는 것 때문에 찾아오시는 분도 있었고요. 그리고 굉장히 열심히 성실하게 일을 많이 했죠. 저는 한 번도 사무장한테 상담을 시켜본 적이 없어요. 제가 처음 개업했을 때는 거의 매일 밤 11시까지 일했고, 휴가도 딱 세 번 갔고. 그런데 지금은 시장 상황이 달라졌으니, 어떻게 보면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얘기에요.

2005년~2006년 즈음에는 제가 변호사 5년차가 되면서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한 시기였어요. 많이 벌어서 많이 쓸 건지, 적게 벌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건지에 대해서요. 제가 변호사 일을 하면서 많이 벌어서 명품 가방 같은 것들 사고, 만족감을 느끼고 그런 생각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가방을 사도 좀 지나면 그 가방이 그 가방이다 싶고, 결국 적게 벌더라도 원하는 일을 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게 됐죠.

이주민과 관련된 공익 활동을 시작할 때에는 그 분들이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일단 내가 무료로 하거나 소송 구조를 받아서 변호를 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10년 후에는 이분들이 상황이 나아져서 고객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죠. 의뢰인들 중에 작은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사건을 마무리할 때 헤어지면서 “당신이 성공하면 꼭 나를 고문변호사로 선임해달라”고 인사하기도 하고요. 제가 많지는 않지만 외국인 사건을 계속 하다 보니 실제로 돈이 있는 분들도 소문을 듣고 유료로 사건을 맡기시는 분들도 계세요. 이태원 커뮤니티에 제 연락처가 알려져 있대요. “어떻게 오셨냐” 물으면 이태원 커뮤니티에서 제 연락처 보고 왔다고 답하시는 분들도 있고.IMG_7349

지금은 사건을 좀 가리게 되기도 해요. 다시함께센터에서 성매매 여성들을 도운 적이 있는데, 그 반대의 업무를 맡기시면 거절하기도 하죠. 사건 내용을 들어봤을 때 무죄일 것 같은 경우에는 맡기도 하지만 제가 듣기에 처음부터 좀 아니다 싶은 사건들은 안 맡아요. 가령 “저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많이 대리하는 변호사이기 때문에 선생님 사건을 맡는 건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고 설명하거나, 제가 보기엔 무죄가 아닌데 무죄를 주장하시는 경우엔 “방향이 맞지 않아 제가 적절한 변호를 제공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면 그분들이 알아서 저를 변호인으로 선임하지 않기로 결정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공익활동을 하다 보면 그것도 변호사 업무잖아요? 변호사는 결국 사람을 많이 만나고, 네트워크를 통해서 사건이 생기기도 하니까요. 저는 오히려 공익활동을 2006년부터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시간을 내서 10%, 20%, 나중엔 50%까지 공익활동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조율하고 있어요.

: 마지막 질문이에요. 민변을 전혀 모르고 회비 회원으로 가입하시다가 지금은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잖아요. 변호사님에게 민변이란,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IMG_7347

: 뭐랄까, 마음이 되게 편해지는 공간이에요. 함께 활동하는 변호사님들도 항상 감사하고 존경하는 분들이고. 누가 ‘존경하는 변호사가 누구냐’고 물으면 전 항상 민변 변호사님들이라고 대답해요.

제가 민변하고 결이 굉장히 다른 변호사님들하고도 잘 지내는 편이에요. 그런데 그 분들이 나중에 제가 ‘저 민변이예요’라고 했을 때 깜짝 놀라시는 분들도 있어요. 저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민변 변호사에 대한 변호사 내의 편견들이 좀 있는 거 같아요. 선거 같은 게 있으면 저한테 도와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었는데, 한 번은 “저 민변에서 사무차장을 하고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되물었어요. 그랬더니 그 분이 “아 그럼 안 되겠네?” 하시는 거예요. 민변하고 꽤 친한 편이신 분인데도 그랬어요. 그때 정말 ‘민변에 대한 변호사들의 편견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어떤 변호사님들은 변협 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민변에 대해 제 앞에서 노골적으로 욕하시는 분들도 있었고요. 어떨 땐 ‘내가 그렇게 민변 티가 안 나나?’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는데.(웃음)

그래서 제 역할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민변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것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해요.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저는 민변 선배들 다 존경스럽고 대단하다,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 분들 많지 않다”고 얘기하기도 해요. 제가 다른 데서도 일해 봤지만 민변처럼 일을 펑크 내지 않고 열심히 해주시는 분들이 없어요. 회원들끼리 서로 사정을 아니까 서로 “이번엔 제가 할게요”라고 적극 나서주고. 정말 일하는 모습, 평소 행동이 선배든 후배든 다 존경스러워요.

그래서 저에게 민변은 점점 더 애정도 가고, 내가 편하게 마음을 둘 수 있고, 얘기할 수 있고, 존경하는 분들이 계시고 그 분들과 함께 일하는 것 자체가 기쁜 그런 곳이에요. 여기서 만나는 선배님들, 동료, 후배님들, 밖에서 만나도 한 식구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너무 애정을 듬뿍 담은 대답이었나?(웃음)

: 애정 어린 말씀 너무 감사드려요. 다시 한 번 막강한 후보를 제치고 큰 상을 받으신 거 정말 축하드리고, 이렇게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금, 2017/01/2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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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라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탄핵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은 사실 탄핵을 믿는 사람들이 소망하는 어떤 것의 실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령, 탄핵 이후 우리는 반드시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모두가 평등한 그야말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세울 수 있다는 소망 말이다. 또한,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우리가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함께 만들어낸 일들은 ‘한국 사회가 적어도 비정상적이었던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고 다시금 환한 민주주의의 빛을 밝힐 역량이 있었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사실의 증거가 되어있지는 않을까. 탄핵 과정에서 민변이 했던 수많은 활동에 수많은 회원이 함께 하며 지난겨울을 보냈다. 분홍빛 벚꽃 피는 봄을 목전에 둔 3월, 추운 겨울과 함께 했던 수많은 회원 중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했던 세 사람의 회원에게 지난 ‘겨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첫 번째 이야기: ‘2017 민변 탄핵버스킹과 광화문 본무대 발언에 참여했던 김도희 변호사

민변 박근혜 정권 퇴진과 헌정질서 회복을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퇴진특위’) 특검대응팀과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 국민행동’(이하 ‘퇴진행동’) 법률팀에 참여했던 김도희 변호사. 퇴진특위 활동과 회사 일을 병행하다 보니 점점 바빠져서 “아침에 출근하면 제일 먼저 두세 시간 바짝 퇴진특위 논평이나 성명을 쓰고 업무를 시작”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김도희 변호사는 그래도 지난겨울이 재미있었던 것 같은 얼굴이었다. 김도희 변호사는 민변이 지속적으로 성명과 논평을 발표하고, 때로 특검에 고발하기도 하는 일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검찰과 특검이 헌정유린의 주범과 비리 재벌을 수사하는 과정에 대해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메시지를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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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김도희 변호사는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겨울 김도희 변호사는 방송 출연, 팟캐스트 출연, 길거리 버스킹, 광화문 본무대 발언 등 유난히 시민들 앞에 서서 몸을 드러내고 입을 벌려 말해야 할 일이 많았다.

두 차례 광화문 본무대에 올라갔던 일을 두고 김도희 변호사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제가 사실 앞에 나서서 이슈를 만들고 사진을 찍고 그러는 걸 정말 싫어하고, 잘 못해요.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말이 안 나오는 그런 스타일이거든요.”

김도희 변호사가 처음 광화문 본무대에 올라갔을 때는 ‘반올림’에서 활동 중인 삼성반도체 산업재해 피해 노동자와 그 어머니, 현대자동차 노조원까지 네 사람이었다. 김도희 변호사는 “너무 떨려서 겨우 1분 이야기하는 건데, 원고 볼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후로도 계속 다른 사람 앞에 나설 일이 생겼다. 민변 탄핵 정국 특별 팟캐스트 ‘탄캐스트’에도 출연했고, ‘김어준의 파파이스’에도 출연했다. 라디오 인터뷰도 있었고, 눈이 펑펑 내리던 1월의 어느 토요일 ‘2017 민변 탄핵 버스킹’의 두 번째 버스커로 시민들 앞에서 길거리 버스킹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탄핵 전날에는 두 번째로 광화문 본무대에 올랐다.

 

“두 번째 올라갔을 때는 혼자 올라가서 5-6분 정도 발언했어요. 정말 달달달달 외워서 올라갔죠. 그래도 그 때는 좀 흥분하긴 했지만 틀리지는 않았어요. 잠깐 얼어서 말을 못 하는 순간도 있었는데, 보시는 시민 분들이 환호를 해주시면서 괜찮다고 격려해 주시더라고요.” 광화문 촛불집회 본무대만큼 거대한 객석을 마주보는 무대도 없을 텐데, 신기하게도 격려해주고 호응해주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다 들렸다. 그날 김도희 변호사는 “내일 탄핵 인용이 결정되면 박근혜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검찰 앞까지 데려다주고 싶다”고 말해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대면 의사소통에서 언어의 뜻으로 전달되는 정보는 7%밖에 되지 않는대요. 나머지는 전부 눈빛, 표정, 제스쳐, 목소리, 억양 같은 비언어적 정보라는 거예요. 제가 전달하는 정보의 93%가 ‘난 지금 당황했다, 난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잊어버렸다’는 메시지를 ‘뿜뿜’ 내뿜고 있는데, 보시는 분들이 모를 수가 없죠.” 이 이야기를 하면서 김도희 변호사는 광화문 본무대에 섰던 자신의 모습이 다시 생각해보면 민망한 듯 웃었다.

그러면서도 “적성에 안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모두가 탄핵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뛰는데 ‘저랑 안 맞아서 못 하겠어요’라는 말이 안 나오더라”고 말했다. 상황에 떠밀렸다고 할 수도 있지만, 김도희 변호사 스스로의 의지인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이런 경험이 저의 내성적인 성향도 극복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요?”

퇴진특위는 해단식을 치렀지만, 김도희 변호사의 활동은 끝나지 않는다. 특검대응팀은 앞으로도 박근혜에 대한 검찰 수사를 모니터링하고, 필요할 경우 논평과 의견을 발표할 계획이다. 이번 퇴진특위 활동을 계기로 재벌개혁 문제에도 관심이 생겼다. “재벌을 포함한 국정농단 세력이 얻은 그 재물들을 뺏어 와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고, “그게 이뤄지지 않으면 유신 세력이 권력과 돈의 힘으로 뭐든 해결하려는 행태는 계속 남아있을 것”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상 지난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돈으로 흥한 자는 돈으로 응징해줘야” 하고, 범죄수익이 환수되어 “그들이 빼돌린 돈까지 탈탈 털어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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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희 변호사는 “탄핵이 된다는 것에 대해 별로 의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범죄 수익을 환수하고 재벌의 권력을 해체하는 것도 언젠가 이뤄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탄핵 직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진행자가 집요하게 ‘탄핵이 몇 대 몇으로 인용될 것 같냐’고 묻자 “8:0, 최소 7:1”이라고 말했던 김도희 변호사다. 주변에서 “다들 입 조심하는데 8:0을 이렇게 질렀다”고 놀렸지만, 그게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 기쁘기만 하다. 그러니까 재벌과 유신 세력의 범죄수익환수도 언젠가 반드시 될 것이라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제 세대에서는 안 될 수도 있지만, 이것도 믿고 가는 거죠. 되어야 하니까.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거 같아요. 믿고 시작하지 않으면…….”

두 번째 이야기: 국회 탄핵 소추위원 대리인단 전종민, 탁경국 변호사

국회 탄핵소추위원 대리인단에 합류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떠오른 생각 세 가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재판에 참여하게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시작으로, 처음 생각은 ‘역사 앞에 무거운 책임을 지는 재판이니 책임이 무겁구나’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현실적으로 “야, 이거 일이 많겠구나”라는 생각이었다. 마지막은, “민변 회원으로서 탄핵 심판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정말 잘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전종민 변호사와 탁경국 변호사가 탄핵소추 대리인단에 합류한 것은 12월 중순이었다. 국회 법사위원장인 새누리당 권성동 의원이 민주당과 합의하지 않은 채 대리인단을 선임하자 더불어민주당에서 항의했고, 그 과정에서 민변 회원인 두 사람이 9개의 소추 사유 중 언론의 자유 침해 부분을 맡아 합류하게 됐다.IMG_9017

겨울에 시작한 재판이 끝날 때까지 석 달 남짓,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재판이었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엔 사실관계를 두고 다툰 바는 많지 않았지만, 이번엔 반대로 사실관계를 대통령측이 치열하게 다투어서 사실관계를 어떠한 증거조사 방식으로 인정할 것인지, 증인신문, 사실조회, 서증제출을 어느 범위까지 할 것인지에 대하여 대통령 측 대리인단과 치열한 다툼을 벌여야 했다.

전종민 변호사는 “헌재 재판관들도 사실 처음 재판을 시작할 때는 기준을 세우지 못했다”고 전했다. “쉽게 얘기하면 증거를 채택할 때 형사재판에 준하여 채택할 것인가, 아니면 민사재판에 준하여 채택할 것이냐가 문제였거든요, 형사는 굉장히 엄격한 조사방식을 거쳐 증거채택을 하잖아요. 그래서 국회에서는 ‘민사처럼 진행해달라’고 요청했어요,” 형사재판처럼 엄격한 증거 채택 절차를 거친다면 제출된 증거에 대한 피고인의 동의 절차를 거쳐야 하고, 피고인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원 진술자가 재판에 출석하여 진술의 진위를 확인해야 해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재판부는 절충적인 방식을 기준으로 세웠어요, 형사법상 전문법칙을 적용하는 쪽으로 원칙을 세우되, 다만 검찰 기록 중 변호인이 입회하여 진술한 조서는 원진술자가 심판정에 나오지 않더라도 증거로 채택한다는 것 등이지요.” 증거 채택 절차부터 매 순간이 고비였다.

두 번째 고비는 안종범과 정호성의 증인신문이었다. 최순실이 사실대로 증언할 것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다행이 안종범, 정호성이 사실관계를 인정했다. 안종범은 ‘업무수첩 내용은 대통령 재임 기간 중에 작성된 것이 맞다’고 인정했고, 정호성 역시 ‘청와대 내부 문건을 최순실에게 보낸 것은 맞다’고 증언했다. 전종민 변호사는 “안종범이 수첩을 인정하는 순간 ‘5부 능선을 넘었다’고 생각했고, 정호성을 신문하면서 ‘7부 능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고 돌이켰다.

탄핵소추 대리인단이 겪은 마지막 고비는 태극기 집회가 가열되기 시작한 이후였다. 김평우 변호사 등 원로 변호사들이 대거 대통령 측 대리인단으로 선임되었고, 재판은 전종민 변호사의 표현에 따르면 “법리논쟁보다는 정치적인 싸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탁경국 변호사에게 가장 인상적인 증인은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었다. 증인신문에 출석한 유진룡 전 장관은 “2014년 1월 초까지만 해도 ‘장관 소신대로 하라’던 박근혜 대통령이 어느 순간 좌파 척결을 주창하는 김기춘 측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안창호 헌법재판관이 “도대체 어느 시점에 박대통령이 태도가 변한 것 같냐”고 묻자 유 전 장관은 “아마 세월호 참사 이후로 태도가 변한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고 답했다. 탁경국 변호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탁경국 변호사는 “세월호 참사, 언론 자유 침해, 뇌물죄 부분에 대해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세월호 참사와 세계일보에 대한 언론 탄압은 검찰 등 수사기관의 수사 자료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뇌물죄 역시 국회가 탄핵 사유를 작성할 당시 검찰 공소장에 근거해 박근혜 대통령의 위법행위를 ‘직권남용’과 ‘강요’라고 제시한 상태였다. 특검이 박 대통령을 뇌물죄로 입건했다 한들 재판부에 특검 수사 결과를 증거로 제출하는 그 순간부터 대통령 측에 반박할 시간과 기회를 제공해야 했다. 두 사람은 “안종범이 5부 능선, 정호성이 7부 능선이었다. 조기에 승부를 보자는 대리인단의 전략이 주효했다”면서도 “그러한 전략으로 인해 언론 탄압과 세월호 참사가 탄핵 사유로 인용되게 할 수가 없었다”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부터 “탄핵이 인용되지 않을 거란 의심은 없었다”고 했지만, 탄핵 전날 전종민 변호사는 극도의 긴장감을 느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라의 운명을 헌법재판관 8명한테 맡기다니 가혹하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전 변호사는 “말로는 동네방네 8:0이라고 떠들고 다니면서도 한편으로는 긴장됐다”며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이렇게 내기라도 해야 한다”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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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탄핵 선고를 지켜봤던 사람들 입장에서 가장 궁금했던 건 아마도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무슨 생각,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아닐까. 역사적인 재판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탄핵소추 대리인단이 그 순간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지 궁금했다. 전종민 변호사는 “사실 처음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문체부 1급 공무원들에게 사표 받은 것도 배척하고, 세계일보에 대한 언론의 자유 침해도 배척하고, 세월호까지 배척하는 걸 보면서 ‘아 이거 이상한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렸다는 것까지 탄핵 사유에서 배척되자 불안감도 느꼈다.

“사실 세월호 참사를 탄핵 사유에서 배척할 때는 좀 불안했죠. 저희는 문체부 1급 공무원들 사표 받은 것까지 두 개는 인정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국정농단과 기업의 자유를 침해한 부분만 인정했으니까요.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게다가 대통령측 대리인단은 그날 하나같이 밝은 얼굴이었다. 전종민 변호사는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채명성 변호사가 날 보면서 씩 웃는 것 같더라고요.”라고 떠올렸다. 대통령 측 대리인단을 마주보고 앉는 국회 소추위원들이 “저쪽은 우리보다 정보가 훨씬 많을 텐데 뭔가 불길한 일이 있는 거 아니냐”는 의심을 했다는 이야기가 방송에까지 회자됐다.

그러나 탁경국 변호사는 “원래 소추사유는 첫 번째가 국정농단이고, 세계일보 언론 탄압과 세월호 참사는 세 번째, 네 번째였다”고 지적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소추 사유가 먼저 등장하는 것을 듣고 선고 도중에 ‘아, 인용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탄핵이 인용되어 “주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문장이 낭독되자 전종민 변호사를 바라보며 웃던 채명성 변호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이동흡 변호사 역시 급히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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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선고 직전, 탄핵 소추 대리인단 단체 톡방에서는 탄핵이 인용되더라도 웃으면 안 된다는 말이 오갔다. 탁경국 변호사는 “기각되면 웃어도 되죠?”라고 되받았다. “뭐, 저는 워낙에 자신 있었으니까.” 라면서도, “막상 ‘파면한다’는 주문을 듣고 나니까 좀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탄핵을 믿었고, 믿음 그대로의 결과를 만들었지만 감격이 없을 순 없었을 테다. 탄핵 소추 대리인단 중 흡연자들은 담배를 피우러 나간 뒤 서로 치하했고, 탄핵 소추 대리인단에 함께 참여했던 이용구 변호사 역시 언론 인터뷰에서 울었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따로 회포를 풀 만한 여유는 없었다. 전종민 변호사는 “사실 도망간 거죠. 그날 안국역 일대 어땠는지 아시잖아요”라고 웃었다.

인터뷰 말미 전종민 변호사는 “민변에서 치열하게 활동하고 헌신하는 회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며 92년 윤종현, 김선수, 김한주 변호사를 도와 故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을 준비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사법시험 직후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 준비를 돕다가 시험 합격 후 판사가 되었던 전종민 변호사가 법원을 그만 두고 나왔을 때, 10년 만에 다시 마주친 김선수 변호사가 “법원 왜 나왔어? 법원에 좀 더 있지, 밖에 나와서 뭐하려고.” 하시던 게 그렇게 서운했다고. “그 후에 민변 활동을 대의원회 참석하는 정도밖에 못 했어요. 변호사 생활이 바쁘더라고요. 민변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지 못한 마음의 빚 같은 게 있어요. 처음 탄핵 심판에 참여하게 됐을 때 그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으려고 정말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민변에서 법조 첫 출발부터 지금까지 치열하게 활동하고 계시는 변호사님들에게 존경과 격려를 보낸다고, 꼭 적어달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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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끝나고 사진을 찍는 동안, 탁경국 변호사는 “잘 생긴 얼굴이 아니”라며 부끄러워 했다. 육아 및 가사 분담에 철저한 가정적인 남편과 아버지로 유명한 탁경국 변호사 얼굴에 웃는 주름이 선명했다. 탁경국 변호사는 지난 2015년 <계란찜 아빠, 꼬막 남편>이라는 에세이집도 냈다. 탁경국 변호사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것이 가정”이라며 “어려운 이론 말고,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찍었을 때 예쁘게 나오는 얼굴은 따로 있다. 탁 변호사님은 얼굴에 웃는 주름이 잡혀있어서 사진 찍었을 때 근사하다”고 말하자, 탁경국 변호사의 답이 이랬다. “아내한테 사랑받아서 그래요.”

수, 2017/03/29-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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