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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 굴뚝청소부와 미친 모자장수 (산업재해의 역사와 건강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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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 굴뚝청소부와 미친 모자장수 (산업재해의 역사와 건강의 관계)

익명 (미확인) | 수, 2016/03/16- 17:49

* 이 글은 <노동자 건강의 법과 현실> 이라는 강좌의 내용이다.  산재와 직업병에 대해서 법적인 인정기준을 알고보상받는 방법론에 대해서 아는 것도 필요하겠지만이 번 강좌는 그 이면의 정치사회적 맥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1강 에서 의학적 의료적 건강담론이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2강에서는 노동운동과 노동자건강권 운동의 관계

이 지면에서 소개하는 것은 3강 법이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  
4강 현재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알바,하청노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학문적 운동적 연구와 노동현장에 대한 관리감독 영역을 두루 경험 하고다시 학교로 돌아가 안전과 환경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이어서 지금 이 시간 노동현장의 최전선에서 부조 리와 부당함에 맞서 싸우고 있는 두 노동자와의 대화를 들려드리고자 한다법을 공부하든 그렇지 않든 노동과 건강의 현실 너머 정치사회적 맥락을 이 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시길 바란다.


법이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 굴뚝청소부와 미친 모자장수

 

제가 재야연구소에서도 일하고, 정부에서도 일해 보고 이제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게 되었다. 법에 대해서는 법학개론만 들은 사람인데 법조인들 앞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웃음). 근래의 동향부터 얘기해보겠다. 세월호 사건 이후 세 개의 법안이 통과되었다. 안전을 다시 보려고는 하는데 좌충우돌 하는 상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안 내놓고 있다, 사실 실정법 속에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이 대표적으로 좋은 법이다. 법의 철학과 원칙을 외국 에서 베낀 거라 내용이 좋다(웃음). 세월호 사건이 그냥 일어난 게 아니다. 일련의 큰 사고들이 있어 왔다. 그리고 뻥 터진 거다. 저는 그 시작을 20128LG화학 공장 폭발사고로 본다. 주목받지 않은 사고인데, 다이옥산 이라는 인화성 물질, 이것을 OLED 만들 때 추출 회수하는 것인데, 다이옥산 증기가 인화성 물질이라 폭발할 수 있다. 대기업인 LG 마저도 제대로 못해서 폭발이 일어나고 11명이 돌아가셨다. 후속보도는 그 기업에 지역도서관에 책을 기부했다는 이야기가 후일담으로 나오더라. 20129월 구미 휴브글로벌 불산누출 사고가 일어났다. 5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2013127 삼성불산 누출사고가 일어났다. 여론도 악화되었다. 우리 사회는 더 큰 사고가 일어나서 앞의 사고를 잊게 한다, 앞의 기업들은 얼마나 좋아할까. 사람들은 이걸 노동안전의 문제로 받아들이나? LG 사건은 망각했고, 구미는 환경문제로 받아들였다. 삼성도 환경안전의 문제로 봤다. 삼성과 대중 모두 노동안전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환경안전의 문제가 없진 않지만 기업, 노동안전의 문제다. 우리 사회의 안전논의, 정상인가. 최근 많이 나오는 이름, 하인리히 법칙은 사고의 법칙이다. 사고가 발생하는 매커니즘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이야기이다, MAJOR INJURY 1이 있을 때 MINOR INJURY 29, NO INJURY ACCIDENT300 이라고 정리했다. 이건 75,000건의 산재를 분석한 거다. 1931년에 출판했는데, 미국 산재보험이 민영보험인데 책 쓴 사람이 보험사직원이었다. 이 사람은 (학자가 아리라) 돈을 벌려고 쓴거다. 사고를 바라보는 과학적 법칙이 최초로 산업재해로부터 나왔다. 안전은 어느 부처에서 해야 할까. 국민안전처? 거기서 뭘 하겠나, 국민이 들어갔으니 국가보단 나은 것 같지만, 구조를 중심으로 하겠다는 거다. 비전문가들은 안전으로 퉁치지만 예방은 전혀 다른 거다. 잘못된 조직이다.

 

이렇게 모을 것 같으면 여기에 예방하는 조직들도 가져다 붙여야 한다. 실제 예방 업무는 20개 부처에서 다 한다. 안전을 나눠보자. 해상안전 교통안전 환경안전 식품안전 노동안전 제품안전 시설안전 이것들이 다 독립적으로 있나. 겹쳐 있다. 법은 적용범위가 서로 있는데 상충 안 되게 하려고 하지만 모든 곳에 들어가는 감초 안전이 있다. 노동안전이다. 생산의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들, 그 겹치는 지점, 자본주의는 생산을 하기 때문에 모든 위험은 생산에서 나온다. 노동안전은 하인리히가 드러내주기도 했지만 제1의 피해자이기도 하고 비율도 높고, 모든 불안전 상태를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이기도 하다. 최근 동향은 이 노동안전을 쏙 빼놓고 한다. 일부러 빼는데 한 몫 하는 곳이 정부, 그 중에서도 바로 노동부다. 심지어 판교 환풍구사태도 노동부는 관계당국이 된다. 피해자들이 야근을 했기 때문에. 산재 여부도 논란이 된다. 노동부가 거기 갔다. 감독관이 갔다. 노동부가 관계당국이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 경제부처인양 행동한다. 문제가 터지면 책임져야 하니까 하지 않는다. 영국이나 미국처럼 노동자안전 관련 정부기구가 독립해야 움직일 수 있는데, 그렇게 할 생각조차 안하고 있다. 그게 핵심적 문제다. 노동안전은 역사가 가장 오래된 안전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시작부터, 사회법의 시작이다. 노동법 중에서도 실은 노동안전이다. 노동법 역사를 말하면 안전의 원칙이 도출된다. 유럽의 안전법들이 그렇게 입안이 되었고 철저한 원칙이 있다. 놀라울 정도로. 노동법의 역사는 다들 아실텐데, 최초의 노동법은 공장법이다. 1833년 공장법을 말하는데, 이 때 근로감독관을 최초로 임명했다. 앞서서 최초의 노동법은 1799년 단결법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건 단결금지법이었다. 사실 노동법이 아니다. 1824년에 단결금지법을 금지하는 법안이 나온다. 1802년의 법이 하나 있다. 구빈원이 거리에 있는 부랑아들을 강제 수용해서 강제노동을 시켰다. 교도소였다. 어린 아이들은 일을 더 시켰다. 아이들을 대공장에서 가혹하게, 16-17시간 일을 시켰다. 헬스(환기-주로 면공장이라) 모럴(교회 갈 시간이라도 주고 일을 시켜라)는 법이다. 사실 노동안전보건법이다. 아이들이 죽거나 병든 것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1776년 국부론이 나오는데 국부론이 나오기 1년 전에 최초의 직업성 암이 밝혀진다. 굴뚝청소부. 왜 굴뚝 청소가 갑자기 필요해졌을까. 산업혁명 영향으로 이 때부터 가정에서 석탄을 때야만 했다. 석탄 질이 나빴다. 부산물도 유독하고. 당시 기차가 달리고 철강, 엄청난 고열을 필요로 하는데, 나무가 좋은 연료였지만 다 써버렸다. 석탄도 많고 하니, 코크스 오븐 방법을 개발해서 석탄을 쓰기 시작한다. 당시 영국 굴뚝의 지름 평균 46센치. 굴뚝 청소부가 드나들었고, 어린 아이 여야만 했다. 이 아이들에게 질병이 생겼는데, 무슨 암이었을까. 고환암. 피부암에 속하고, 숯검댕의 피부노출이 극심하게 되면서 고환 밑이 변색되고 사마귀가 나면서 암이 되고, 전이가 일어나서 매우 고통스럽게 죽는 병이다. 1775년 퍼시벌 포트 라는 외과의사가 밝혀내는데, 당시 굴뚝 청소부에게는 폐암이 더 많았을 건데, 그 때 고환함을 진단했고, 국회의원으로써 국정감사를 했다. 1788년에 가서 굴뚝청소부 법이 만들어진다. 몇 살 이하 어린이는 굴뚝에 올리지 말자고 했다, 8살이다. 고환암은 양반이었다. 청소하는데 불을 때서 불에 타죽거나 질식으로 죽는 게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독일은 같은 시스템에서 안 걸렸다는데, 갑옷을 입혀서 피부노출이 안 되었다고 한다. 이게 최초의 노동안전보건법이다. 1788-1802년 이 때 만들어진 노동법이 다 노동안전보건법이다.

 

13-4 굴뚝청소부.jpg 

<사진. 좌측 그림, 영국의 굴뚝청소부 (http://fyeah-history.tumblr.com) / 

우측 그림, 굴뚝청소부의 작업 모식도 (wikipedia)>

 

산재보상법을 보자. 그 사이 노동시간에 대한 법이 만들어지고, 1884년에 보상법이 최초로 나온다, 독일 비스마르크가 어떤 사람인가. 빨갱이 사냥꾼이다. 극렬 우파가 보상법을 왜 만들었을까. 유럽의 공산주의 유령에 노동자들이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산재법을 만든 거다, 공산주의에 감염되지 않도록, 산재는 체제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팔 잘리고 목숨을 잃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던 거다. 노동자들은 공제회를 만들었는데, 비스마르크는 이걸 자기 걸로 한 거다. 산재는 체제를 위협했다. 여담을 하자면 <레미제라블>도 산업재해 때문에 일어났다. 왜 빵을 훔쳤나. 누나를 도와야했다, 누나는 엄마 같은 존재였는데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으니까. 아버지의 직업은 가지치기 노동자였는데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다, 보상을 못 받았다. 배경은 1800년대 초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이 성립이 된다

 

여기 보면 산재 얘기 많이 나온다.1847년 안데르센, <성냥팔이 소녀>. 스토리는 간단하지만 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나. 섣달 그믐날 성냥 팔던 소녀가 얼어 죽는 얘기. 안데르센 평전을 보면, 성냥팔이 소녀가 그려진 판화를 선물 받았다고 한다. 당시 풍속화에 굴뚝 청소부도, 성냥팔이 소녀도 등장한다. 그림을 보면 턱이 무너져 있다. 성냥 공장에서 쫓겨난 아이들이다. 쫓겨날 때 먹고 살라고 성냥을 준거다. 당시 성냥이 엄청난 유해물질, 인이다. 노란 인을 썼는데, 이걸 먼지처럼 마셨다. 뼈가 제일 약한 곳부터 녹아내린다. 그게 바로 인턱. 대표적 직업병이다. 이 소녀들은 이 병으로 죽었다는 얘기다. 과도한가? 안데르센이 받은 판화에 인턱 인 아이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 일본의 어른들을 위한 안데르센 해석 책에도 이 말이 나온다. <이상한나라의 앨리스> 를 보면 다 상상 속의 인물, 그 중 실존인물이 하나 있다. 실제로 당대 영국에 많았던 사람, 직업병의 당사자, 매드 해터, 미친 모자장수라고 번역이 되는데, 모자 장수는 모자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쫓겨난다. 왜 미쳤을까. 모자를 만들 때 양가죽에서 털을 제거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데, 어떤 물질에다가 담그고 양털을 끓여야 한다. 무두질이라고 하고, 태닝이라고 한다. 그 물질은 신경독성이 있는 중금속, 수은이다. 수은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 미백효과도 있다. 앨리스에 나오는 매드 해터는 실존인물이다. 그 동네에 모자공장이 많았다. 사고는 얘기꺼리도 안 된다. 너무 많았기 때문에. 고전을 읽어라. 찰스 디킨스의 이야기는 보고이다. 그런 예가 허다하다. 원칙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성냥팔이 소녀들이 죽어가고 1908년 황인이 금지되고, 빨간 인이 대체물질로 개발됐다.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법 37조에 금지물질, 맨 위에 있다. 역사가 묻어있다. 1919ILO가 탄생한 해인데, 이 때 8시간 노동이 기준이 되는데, 저는 1944년 필라델피아 선언이 중요하다고 본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안전보건과 관련된다. 노동은 인격과 분리할 수 없다. 인격의 기초는 생명이다. 자유권도 건강 생명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 원칙을 천명한 사건이다.

1974년 영국 안전보건 관련 법들이 통합되면서 만들어진 안전보건법의 원칙이 있다. 첫째, 권한과 책임의 일치를 분명하게 한다, 특히 생명을 좌우하는 안전보건에선 더 그렇다. 둘째, 사전예방의 원칙이다. 보호구를 먼저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지 않도록 개선하거나 위험을 없애는 것이 우선이다. 셋째, 사고는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98%의 사고가 막을 수 있는 재해라고 한다, 2%만이 천재지변에 가까운 사고라는 것이다. 공식문서에도 inccident라고 쓴다. 넷째, 양립불가의 원칙이다. 안전규제가 여기저기 다를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원칙이 법에 담겨있다. 이 법은 1989EU가 산업안전의 원칙으로 선언하면서 유럽전역에 퍼지고 여기서 위험성평가가 나온다. 일본이 유럽의 스탠다드를 따르면서 한국 법에도 들어온다. 이런 점에서 산업안전보건법을 보겠다. 산업안전보건법은 1981년에 제정되고, 90년 전면 개정되었는데 그사이엔 법실효성이 없었다. 1953년 안전보건이 근로기준법에 들어가고, 1961년에 대통령령으로 안전보건규칙이 만들어졌다. 90년 개정에는 문송면, 원진 사건이 있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1장은 총칙, 2장에 안전보건관리체제가 나오는데 이게 조직이다. 아까 말했듯이 권한 책임이 일치되어야 한다, 2장에 13조 안전보건관리책임자 14조 관리감독자 순서로 책임이 큰 순서로 나오는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국민의식 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것이다. 의식은 개인의 문제로 보는 거 아니냐. 법은 조직으로 되어 있다. 총칙에도 책임소재라는 말이 명확히 들어가 있다. 책임소재라는 말이 들어가는 데가 두 개의 법, 산업안전보건법과 식품법이 있다. 책임의 소재는 누구에게 있냐, 법률 주어가 85% 이상 사업주다, 왜 사업주인가, 사용자가 아니라. 사용자가 더 넓은 개념인데, 사업주는 법인이 되는 거다. 조직이 움직여야 하는 법이라고 저는 해석한다. 사업주가 처벌 대상이 된다.

사법처리와 행정처분, 행정처분은 과태료이고 사법처리가 많은데 이걸 사업주가 받는 거다. 피의자가 법인이 되는 거다, 그럼 행위한 사업주 사람은 어떻게 되나 양벌규정이 들어간다. 이번에 검찰이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기업 처벌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법인이다. 대부분 형법이 개인으로 되어있는데 자본주의 시대에는 조직이 일을 저지른다. 책임을 분산시키고, 법인이 책임을 져야 하는데 법인은 감옥을 갈수가 없다, 벌금을 낼 수 있는데 지금 산업안전보건법에 1억 이하로 되어 있다. 662가 최고 형량인데 삼성도 1, 5인사업장도 1억이다. 그래서 삼성은 사내하도급을 쓰고 거기서 사람이 죽으면 최고형량이 1천만원이 된다. 영국, 미국은 고의성이 농후하고 반복적이면 1000만 달러 이상으로 되어 있다. 삼성이 1998년 괌공항 리모델링 공사 하다가 한국노동자 1명이 사망했을 때 860만 달러 벌금을 받았다(현재 환율 기준 93억 정도). 그렇게 혼이 나고 나서 삼성건설은 좀 달라지긴 했다. 하여튼 법인이 책임자다. 이런 위계를 산업안전보건법은 명확히 하고 있다. 그 아래조항들은 기술법이다. 법령집이 두껍다, 행정규칙이 72개인 법이 있나. 지침까지 합치면 캐비넷에 다 들어가지도 않는다.

 

대단히 복잡하면서도 영양가가 없다. 노무사도 포기하고 시험 본다. 변호사는 이 법 이름을 듣지도 못했을 거다. 법조인이 없으니 법이 개발되겠나. 개악이 이루어진다. 산업안전보건법이 기술법이라고 알고 있는데 실제로 1,2장이 제일 중요하다. 책임소재가 다 나와 있다. 시시콜콜한 3,4장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큰일을 그르친다. 감독관을 보자면 산업안전근로감독관이 따로 300명 정도 되고 일반 근로감독관이 1200명 정도 있다. 300명의 산업안전근로감독관은 113개 조항을 다 활용하고 있고, 근로감독 15년을 한 감독관도 늘 새롭다고 말한다.(웃음) 내용이 많아서 어렵다. 감독관은 늘 300명이다. 이중 행정직이 50%. 이분들은 대부분 5년 미만이다. 암담하다. 제가 17년째 이 일을 하고 있어도 사업장에 가면 암담한데 여긴 늘 새로운 업종을 봐야 하고 내가 못 보던 라인을 봐야 하는데, 서류만 보고 하는 실정이다. 조직과 인력 문제가 있다.

 

감독관이 하는 일은 예방업무와 조사업무인데 예방업무는 감독, 조사업무는 재해조사. 감독은 정기 수시 특별감독이 있다. 행정대상은 계획을 짜서 감독한다. 사법조치, 행정조치 있는데 2012년부터 즉시 과태료 행정을 시작하니 구글에 산업안전보건법 검색도 폭주하더라. 산업안전보건법은 상당부분 과태료다. 90년 이전에는 사법조치였는데 사법조치가 너무 어렵다, 일도 10배 더 많다, 증거채증부터 시작해서 어려운 작업이다. 실효성이 없다. 과태료는 죄도 아니고 일도 적다, 과태료가 많아졌다.

 

감독을 하려면 모니터링 시스템이 있는데 산재보험 가입하면 시스템에 올라간다, 영국은 사업자등록 내고 동시에 안전보건청에 등록을 한다. 우리는 산재보험 가입을 안 하면 통계추계가 안 된다. 원칙이 없다, 생각이 없다. 법은 잘 되어 있는데 행정을 잘못하는 대표적 사례다. 한국 행정의 문제가 또 뭐냐면 감독대상을 선정할 때 전년도 재해율을 갖고 한다. 얼핏 생각할 때는 재해가 높으면 감독을 받아야 상식적으로 보이지만 보험을 타먹은 죄로 너 때문에 감독이 왔잖아이렇게 된다. 산재보험이 무과실이고 사회보험인데 이게 두려운 대상이 되어 버린다. 미국은 산재가 민영보험이라 개별사업장이 산재 얼마나 타 먹는지 알수 없다. 통계는 표본사업장을 통해 수집한다. 사고가 있는데 누락하면 패널티를 세게 간다. 개별 사업장을 타겟팅 안 하고 위험업종을 추려서 무작위 감독을 나간다. 산재보험 타 먹었다는 낙인이 없고 보고를 소홀히 하는 문제는 덜 발생한다. 안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보고하지 않는 문제는 한국이 가장 심각하다. 한국 사고율이 만인율 1.23명 정도 된다. OECD 1~2위다. 재해율은 0.57%. 독일이 3%. 우리가 재해율이 12%가 되어야 한다. 더 심한 곳이 건설이 다. 왜 더 심화되냐 하면 산재보험과 산업안전보건법이 밀착되고 자료도 공유되면서 감독 문제가 일어난다. 건설산업에 환산재해율이 있고, 국토부 법에는 재해율 갖고 시공감액기준이 있다. 이게 분명이 대규모 업체의 재해, 중대사고를 줄이기는 했으나 언더리포트를 많이 발생시켰다. 국가를 상대로 하는 계약이기 때문에 기업들이 어마어마하게 관심을 갖는다. 사망사고가 나면 곱하기 10으로 환산되는데 대법원 가서 무죄가 되면 없는 일이 된다. 대기업이 변호사 사서 끝까지 가는 이유다. 대기업이 이걸 따라하는데 하도급사 신임도 평가를 이걸로 한다. 하도급사

가 절대로 보고를 안 한다. 이게 더 큰 문제를 야기하는 거다, 나쁜 관행을 국가가 그만두지 못하니까, 원칙적으로 잘못되었다.

 

, 산업안전보건법이 산재보험이랑 너무 밀착되어 있다, 보상은 자유롭게 돼야 하는데 이게 막히고, 안전을 한다는 명목 아래 노동자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산재를 산재로 얘기해야, 실제 우리 규모를 알아내는 게 중요하다, 지금 1년 산재가 10만명 수준으로 나오는데 이건 현실이 아니다, 근로환경조사 해 보면 연간 250만명이 산재라고 나온다, 문제의 규모조차 우리는 모르고 있다.

 

산재보험법 이름도 업무상재해보상법으로 바뀌어야 한다, 산재는 훨씬 폭이 넓다, 그 중 인정 받는 게 적을 수도 있고, 산업재해는 격의 없이 리포팅 될 수 있어야 한다. 감독도 그렇게 맞추어 가야 한다. 이렇게 안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산재가 많은 건 알지만 Not In My Desk, 나 나가고 나서 하라는 거다. 언제 해야 할까. 청와대에서 결심해야 한다, 문제를 드러내고 출발하자 해야 한다.


* 참고 

 [유럽방문기]베를린 런던 헬싱키, 노동자를 존중하는 사회를 가다

http://laborhealth.or.kr/38115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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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8일 동대문에서 용산으로 이전하여 전기, 전화, 랜선, 서버구축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업무에 다소 차질이 생기고 있습니다. 더불어 회원님들의 여러 가지 문의사항에 제 때 응답하지 못하고 있는 점 사과드립니다. 빠른 시일 안에 업무 정상화에 힘쓰겠습니다.

금, 2017/12/29-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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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명박을 구속해야한다

금, 2017/12/29- 16:12
100
0

wp-content/uploads/2017/12/201712.pdf

금, 2017/12/29- 15:24
158
0

항일음악회창원의 정호영임더,
이공일팔엔
약조희빌
결재가능할거가슴더,
저는도움격려덕부네.
리화장모텔에서 버서나 회원구 봉암동 지역의 학원가..
원루메?
원룸하나 어더 슴더,
팔용산 여풀때기…..
아이구 오메아베!(사진은경남민언련)

일, 2017/12/31-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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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학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 민족문제연구소서 발간

0102-1

▲ 전범이 된 조선청년’ 저자 이학래 씨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의 포로 감시원으로 동원됐다가 전후 이른바 ‘B·C급 전범’으로 전락했던 이학래(92) 씨의 회고록이 국내에서 출간됐다.

신간 ‘전범이 된 조선청년'(민족문제연구소 펴냄)은 1925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난 조선인 청년이 어떻게 이국땅에서 일본군의 말단 포로감시원이 됐고, ‘전범’의 멍에를 지게 됐는지를 구술한다.

17살 청년의 인생은 3천 명의 포로 감시원을 2년 계약으로 모집한다는 일제 광고를 접하면서 일순간에 뒤바뀐다.

면사무소에서도 그에게 시험을 볼 것을 권했는데, 당시 관공서의 이야기를 거절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사실은 강제징용”이었다는 게 이씨 주장이다.

2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은 뒤 도착한 곳은 태국·미얀마 철도 건설 현장이었다.

포로 감시와 작업 인원 모집 등을 맡은 이씨는 허기져 몰려든 포로들에게 화를 내거나 규칙을 위반한 이들의 뺨을 때리는 등 별다른 인식 없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했음을 숨기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인정머리 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하고는 하지만, 당시의 일본군은 포로를 인간으로 취급한 적이 없었어요. 일본군에게 포로는 무시해도 좋은 존재였어요.”

일제 패망 직후 이씨와 동료들은 자기 변론도 허용되지 않는 전범 재판을 받으며 변호사의 민족적 편견 등으로 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책 후반부는 사형수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이씨가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일본 정부를 상대로 평생을 싸우고, 또 스스로 반성했던 과정을 펼쳐 보인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젊은이는 공부 모임 ‘평화그룹’ 참여, 중앙노동학원 입학 등을 하면서 왜 식민 피해자인 자신이 전범이 되었는지를 공부해 나간다.

이씨와 조선인 전범 동료는 1955년 4월 ‘동진회’를 결성하고 일본 정부에 지속해서 국가 보상과 유골 반환을 요구했다.

1960년대 초 실현될 듯하던 국가 보상은 1964년 한일협정 타결로 없던 일이 됐다.

일본 정부는 보상은 한국 정부의 몫이라며 책임을 외면했고, 대일 민간 청구권이 1945년 8월 15일 이전으로 한정되면서 조선인 전범의 사형 같은 경우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씨는 “양국 정치의 사각지대, 전전·전후의 사각지대에 우리 문제는 함몰되고 말았다. 한일 어느 나라 정부와 교섭해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당시 답답했던 마음을 토로했다.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입법화 운동 등을 펼쳐 온 이씨는 1997년부터 전 연합국 포로와 가족들을 초대해 사죄하면서도 조선인 전범들은 못 본 척하는 일본 정부의 이중적인 면모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포로에 대해서 정중한 사과를 하는 한편, 포로 관리를 시키고 책임을 떠안긴 우리는 왜 방치 상태로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일본에 의해 잠시 쓰이고 버려졌습니다. 우리 문제는 한국과 일본 정부간 교섭대상에서도 제외됐습니다. 실로 허무하고 비통한 심경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씨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전범이 돼 일본의 책임을 떠안고 죽어간 동료의 원한을 다소나마 풀어주는 것이 살아남은 자신의 책무라는 것이다.

‘동진회’가 수십 년의 활동을 이어오는 동안 생활고와 우울증, 친일파라는 손가락질 등으로 조선인 전범 자신이나 그 가족이 비극적 선택을 한 사례들은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 씨는 한국판 발간 후기에서 “반강제적이었다고 해도 동시대에 독립 투쟁을 한 분들도 있었기에 부채감은 쉽사리 떨칠 수 없었다”라면서 “한국 정부가 2006년 일본 강점기하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해 명예 회복해준 점에 감사한다”고 밝혔다.

312쪽. 1만5천 원.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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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2> 연합뉴스
☞기사원문: “전범 돼 죽어간 동료들 원한 푸는 것이 제 책무”

화, 2018/01/0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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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IDS 홀딩스의 피해자입니다.

15년형을 받은 IDS 홀딩스 대표 김성훈의 파산은 부당합니다.

IDS 홀딩스 사건 관련 내용 :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0&article…

파산 반대 청와대 국민 청원 및 제안 :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45021?navigation=petitions

1조 피해, 37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 입니다.
정재계 인사들이 엮인 일반 시민이 겪기엔 이미 너무 큰 사기 사건입니다.

피해자들은 오늘도 1심에서 무죄를 받은 지점장들을 2심에서 유죄로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곳에 집중하기에도 모자른 이 시간에
파산을 막기 위해 또 생업을 뒤로하고 진정서와 시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성훈의 파산은 김성훈의 파산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책임을 져야 하는 지점장과 본부장 또한 피해자를 수배하여 피해자로 인한 파산 신청을 할겁니다.

그리고 현재 재판을 받거나 사기를 진행 중인 많은 금융사기꾼들의 표본이 될것입니다.
현재 파산 신청인들 중에 영업자 등록을 한 자도 포함되어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의도가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훌륭한 일을 하시는 정만순 변호사님
더이상의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사기꾼 파산을 소수의 피해자들로 인하여 다수의 피해자에게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 한번 이 사건을 들여다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과거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훌륭한 일을 하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의 잘못도 바로 잡을 줄 알아야 과거의 잘못도 올바로 바로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소수의 피해자들과 파산을 진행중인 정만순 변호사님에게 부디 부당한 파산으로
김성훈이 어디에 숨겨놨을지 모를 재산들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목, 2018/01/0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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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와 국민TV가 함께하는 내역사 ‘역적’ 시즌2 1-2

“효창원 역사적폐청산 과제_차영조 선생님과 함

(차영조 선생님) 영상은 국민TV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국민TV : https://www.youtube.com/watch?v=b39IxmCb32I

팟빵 : http://www.podbbang.com/ch/14024?e=22493120

목, 2018/01/04-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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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문용식 <아시아엔> 독자] 답답한 심경에 이 글을 올린다.

나는 실향민인 아버지(문순남)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김포공항 인근 농촌마을에서 자랐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형편은 더 어려워져 중학자격 검정고시를 거쳐 공고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할아버지에 대해 종종 묻곤 했지만 실향민인 부친과 함께 한 시간이 짧아 제대로 알려줄 수 없어 늘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

그같은 미안한 마음은 언젠가는 부친의 생전 삶을 복원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중 2005년 한 시민단체가 한일양국간 체결한 청구권 문서 공개 요청 소송에서 법원이 “협정문서를 공개하라”는 판결을 한 사실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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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뉴시스>

그 결과 국회에서 ‘일제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나 역시 본격적으로 부친의 삶을 복원하는 일에 나서게 됐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 일본, 러시아 정부기관에 3년간 민원을 넣어 부친의 스무살 젊은 시절 삶을 확인하는 공식문서를 러시아정부로부터 받았다.

부친 문순남은 1924년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출신으로 1945년 6월 2차대전 막바지에 강제동원되어 일본 관동군 130여단 776대대 소속으로 8월16일 중국 선양에서 소련군에 체포됐다. 부친은 이어 러시아 연방 카자흐스탄공화국 내 카라간다 탄광지역 99수용소에 수용돼 강제노동을 하다 49년 2월 남한으로 귀환하였다.

74년 부친이 사고사가 아닌 지병으로 별세했는데, 당시 상가에 파출소 순경이 와서 이것저것 묻고 갔다. 시간이 지나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부친은 과거 적성국가에 체류한 일로 ‘요주의 인물’로 늘 기관의 감시를 받고 사셨다는 것을···.

오는 2월이면 ‘시베리아 억류 한국인 귀환 69주년’이 된다.

일본은 2차대전 막바지 패전 위기에 몰리자 만주에서 중국과 전쟁 중이던 정예병력을 본토방어를 위해 차출했다. 이에 따라 부족 병력은 그들이 식민지로 삼았던 지역에서 동원령을 선포해 무차별 징집하고 만주 등 최전선으로 내몰았다.

한국인 귀환자들은 전쟁 막바지에 일본 군인으로 동원되어 일본의 항복선언과 동시에 만주와 사할린 등에서 소련군에 포로가 됐다. 이들은 시베리아 등에서 강제노동에 내몰리다 천신만고 끝에 북측 지역인 흥남을 거쳐 1949년 2월 남한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2009년 2월 27일, 귀환 60주년 행사가 민족문제연구소 주관으로 국회도서관에서 진행되고 곧 이어 3월 2~15일 관련 자료전시회가 열렸다. 벌써 9년 전 일이다. 당시 행사에는 일본에서 곤노 아즈마 참의원과 몇몇 의원이 참석했으나 정작 한국에선 이정희 의원과 노회찬 전 의원(당시)만 참석할 뿐이었다. 국회 내에서 진행된 행사임에도 주요정당의 ‘잘난 의원님’들은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서운한 마음이 많았다.

해방 이후에 전쟁포로가 되어 지옥같은 체험을 하고 조국에 귀환한 지 70년이 되도록 ‘시베리아 억류문제’는 국가가 해결도 못하고 있어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동안 국가의 무관심 속에 피해자들은 한을 품고 하나둘 쓰러져 이제 생존자는 채 10명도 안 된다.

촛불혁명으로 달성한 문재인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정부와 정치권이 과연 이 문제에 대해 해결할 의지는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와 외교부에 그간 수차례 호소문을 제출하며 문제해결을 요청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한일의원연맹 총회가 매년 봄·가을 양국을 오가면서 2번씩 열려도 지금까지 의제로 의논 한번 되지 않았다. 피해를 당한 국민이 명백히 존재하며, 정부에 기록도 있고 수년 전 진상조사도 완료한 사안이다.

나같은 유족은 그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해야 한단 말인가? 일제하 징병 갔다가 구소련에 의해 억류돼 강제노동을 해야 했으며, 이같은 행위는 명백히 국제법 위반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피해국민의 주권국가가 가해자인 상대국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이상한 일이 대한민국에서 70년이 지나도록 일어나고 있다.

새정부 들어 촛불민심을 반영하는 국민참여 제안에 18만건이 접수되고 정부는 그 제안을 바탕으로 5개년 국정 계획으로 5대 국가비전 전략목표와 20대 국정 전략과제를 수립하고 총 100개의 현안 목표를 수립했다. 과거사 문제는 전략목표 1번 3번째에 위치할 정도로 중시하고 있다. 특히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과거사 문제해결을 내걸고 있다.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처리해달라는 여망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새정부가 과거사 문제를 국정 우선과제로 삼아 관리해 나갈 계획을 갖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어 온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닌가 하고. 내 가슴이 이럴진대 당사자이자 먼저 가신 아버지, 그리고 아직도 생존하신 피해자들 마음은 어떨까 생각하면 피눈물이 솟는다.

<2018-01-05> 아시아기자협회

☞기사원문: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유족의 피맺힌 절규

금, 2018/01/05-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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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에 “우리에게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SNS 해시태그 운동을 펼쳐 큰 호응을 얻은 ‘초등성평등연구회’가 제7회 이돈명인권상을 받았다. (이미지 출처 = 초등성평등연구회 페이스북)

초등학교 페미니즘 교육을 실천해 온 교사 모임이 이돈명인권상을 받는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초등학교 교사 13명이 모인 ‘초등성평등연구회’를 제7회 이돈명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1월 4일 밝혔다.

이에 대해 초등성평등연구회 서한솔 회원은 “2017년은 이룬 것이 없는 굉장히 고생스러웠던 해였는데, 이돈명인권상 수상은 유일하게 들려온 좋은 소식”이라면서 “여성 인권, 모든 인간의 삶에 관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교육의 역할로 조금 더 나아지게 노력하겠다”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말했다.

천주교인권위는 초등성평등연구회가 창립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SNS에서 “우리에게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해시태그 운동으로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을 알렸다고 소개했다.

또한 천주교인권위는 초등성평등연구회의 활발한 활동, 자체 연구 제작한 교안의 완성도와 수업 활용도, 향후 활동에 대한 기대 등을 종합해 볼 때,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실질적 성평등 과제를 초등학교까지 넓혀 사회적 확산효과가 크다”고 시상 이유를 설명했다.

초등성평등연구회는 교과서의 성불평등을 분석하고 재구성하기, 학생들이 접하는 미디어를 젠더(성, Gender)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보기 등을 수업에 적용해 왔고,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성편견 인식과 생리에 관한 수업, 독서교육을 통한 양성평등 수업 등 다양한 페미니즘 교육을 하고 있다.

이돈명 변호사(1922-2011)는 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피해자 권인숙 사건 변호를 맡는 등 민주화와 천주교 사회운동에 기여했다.

천주교인권위는 이 변호사를 추모하고 인권의 가치에 대한 고인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2011년 인권상을 만들었다. 2017년 이돈명인권상은 평화운동 단체 ‘전쟁없는세상’이 받았다.

시상식은 1월 10일 오전 11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gt;

<2018-01-05> 가톨릭뉴스 

☞기사원문: ‘초등성평등연구회’에 이돈명인권상 

금, 2018/01/05-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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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2017년 겨울 호 어직 출판 안되었나요???

토, 2018/01/06-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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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중 11월 29일 탑재된 가이드북 한글파일 자료가 탑재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확인 부탁 드립니다.

영문이나 일문은 다운이 가능한 것 같구요…

 

일, 2018/01/07-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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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용 교육홍보실장

11월 9일(목) 워싱턴을 향해

지난 11월 9일 임헌영 소장님을 모시고 인천공항 오전 10시 15분발 워싱턴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미국의 워싱턴, 뉴욕, LA에 민족문제연구소 지부를 결성하기 위해 8박 9일의 긴 출장에 오른 것입니다.
워싱턴까지는 무려 13시간 40분. 비행시간이 긴만큼 기대는 높아졌습니다.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IAD)에 도착하니 시차 때문에 여전히 9일 아침 9시 50분입니다(이후 일자 시간은 현지 기준).
주희영 회원과 박현숙 님(윤흥로 박사님 부인)이 공항에 마중 나와 주셨습니다. 인사 후 바로 숙소로 향했습니다. 숙소는 워싱턴 교외인 알링톤(Arlington)의 가정집입니다. 이번 워싱턴 지부 결성에 핵심 역할을 해주신 윤흥로 민주평통 워싱턴지회장님 댁입니다. 이미 한국에서 뵈었던 터인데다가 유머도 있으신 분이라 내 집 같이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짐을 풀고 잠시 쉰 후 ‘설악가든’이라는 식당으로 갔습니다. 점심식사를 겸해서 중앙일보 워싱턴지국, 한국일보 워싱턴지국, 기쁜소리방송 등 현지 한인 언론과 합동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중앙일보 워싱턴지국 기자들은 한국 본사와 달리 진보적인 분들입니다. 출국하기 전 제가 보낸 원고도 그대로 실어주었습니다. 다만 양면 통광고로 이승만·박정희 유료광고가 같이 실린 건 유감이지만 말입니다. 소장님이 쓰신 원고도 한국일보 워싱턴판에 실렸고요. 이 글들이 실리자마자 워싱턴에 도착해 또 한 차례 심층인터뷰를 진행한 겁니다. 시작이 좋습니다.
윤흥로, 정석구, 주희영, 김미현 등 곧 조직될 워싱턴지부 핵심 회원들과 함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내용은 주로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소개, 친일인명사전, 식민지역사박물관, 워싱턴지부 결성의 의미와 앞으로의 활동계획 등이었습니다. 소장님이 주로 인터뷰를 하시고 그 외 현지 회원분들과 저도 거들었습니다.
점심 후 숙소로 돌아와 몇 시간 정도 숙면했습니다. 시차적응도 안 된데다가 14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숙소에서 환영을 겸한 만찬을 했습니다.

윤흥로 부부, 노병원, 김조명, 박희구, 정석구, 주희영, 김미현 등 70대부터 30대까지 어우러진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노병원 선생께서 갑자기 “박선생은 민족주의를 무어라고 생각합니까?” 라고 물어보시기에, 저는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 담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정도로만 대답했습니다. 조심스럽기도 해서요.
식사에 와인을 곁들인 멋진 만찬이었지만, 모두 차를 갖고 오신 터라(밤 10시30분경 끝냈습니다) 전 헨리 16세가 먹었다는 술부터 시작해 다양한 와인을 빨리 많이 마셨습니다

10월 10일(금) 워싱턴 2일차, 민주평통 특강

이날 오전은 주희영, 김미현 두 분의 안내로 워싱턴의 몇 군데를 들러보았습니다. 먼저 아메리카홀로코스트 뮤지엄에 갔습니다. 미국 유대인들이 출연한 민간기구로 무료입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와 시설에는 놀랐지만 진품이나 원본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홀로코스트는 기억해달라면서 정작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현실을 생각하자니, 다소 불편했습니다. 또 나치 희생자에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집시, 동성애자 등이 있었는데 왜 자신들에게 가해진 것만 보라는 건지… 문득 수구집회 때의 이스라엘 국기가 생각나 감정이 롤러코스트를 타는 듯했습니다.
이어 국회의사당도서관에 들렀습니다.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 전시회를 비롯해 각종 이벤트가 열려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토마스 제퍼슨의 기증자료를 기반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담에는 맞은편의 국회의사당 건물을 겉으로만 보았습니다. 미국 대통령도 이 건물 정문 계단 위 월대에서 취임 선서식을 합니다. 그 악명 높은 가쓰라-태프트밀약이 이뤄진 방도 이 건물에 있다고 주희영 회원이 일러줍니다.
점심은 워싱턴 DC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식당인 Old Ebbit Grill에서 박진영(American University 교수. 동아시아사상사 강의) 교수님, 주희영, 김미현 씨와 함께 먹었습니다. 박교수님은 워싱턴의 초대 지부장이 되실 분입니다. 식사하면서 우리 연구소와 지부의 향후 사업방향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박교수님과 헤어졌습니다.
저녁 6시 30분. 한미과학협력센터(Koran-US Science Cooperation Center)에서 워싱턴 민주평통 초청 특강 ‘분단을 넘어 통일의 길로’라는 주제로 제가 두 시간 정도 강연과 질의응답을 했습니다. 제가 정부유관단체에서 통일을 주제로, 그것도 워싱턴이라는 제국의 수도 부근에서 강의하다니!!!
당연히 임헌영 소장님이 하셔야 할 강연을 외람되게도 제가 하게 되어 송구했습니다. 민주평통 사무국의 일부 잔존 인사들이 제가 좌빨이라는 이유로 반대함에도 관철시키고 마땅히 소장님이 하셔야 함에도 일부러 제게 기회를 주신 윤흥로 회장님의 깊은 뜻에 감사드립니다.
강의 내용과 평가는 어땠냐구요? 직접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베리 굿!”이었다고 합니다. 초청측 인사나 우리 연구소 위상에 누가 되지 않아 천만다행입니다.
밤 9시쯤 고려촌이란 식당에서 심훈 선생의 손주 사위, 이재수님 등도 합석해 순두부에 막걸리를 함께 마시고 밤 11시경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10월 11일(토) 워싱턴 3일차, 지부 창립대회 개최

이날은 소장님께서 강행군 하신 날입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워싱턴지역의 문인들을 대상으로 ‘사랑과 행복, 구원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주제로 점심시간을 포함해 6시간 가까이 강의를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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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에 저는 고약하게도 주희영, 김미현 회원과 링컨기념홀, 백악관 앞 등을 ‘관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일식 초밥집에서 윤흥로 정석구 두 분도 함께 어울려 점심을 먹었습니다. 웬만하면 엄두를 내기 어려울 정도로 푸짐하게 각종 초밥을 맛보게 해주신 윤흥로 회장님 덕에 모두들 잘 먹었습니다.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어제와 같은 곳인 한미과학협력센터에서 우리가 온 목적인 강연회와 워싱턴지부 창립총회가 열렸습니다. 제 강의 주제는 ‘우리 시대 역사적폐를 말한다’였는데, 썩 잘하진 못했습니다. 그래도 지부는 순조롭게 결성되었습니다. 지부 이사장에는 윤흥로, 지부장은 박진영 교수, 사무총장 주희영, 간사 정석구 김미현 등 기본꼴을 갖추었습니다.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소장님은 ‘세계의 수도’라고-에 최초의 미주 지부가 결성되는 감격의 순간입니다. 이렇게 워싱턴의 마지막 밤은 깊어갔습니다.

10월 12일(일) 뉴욕 지부 창립준비위원회 개최

워싱턴 Reagan National 공항에서 10시에 출발해 뉴욕 JFK 공항에 11시 좀 넘어 도착했습니다. 박매헌-클래어 부부회원이 공항까지 마중 나오셨습니다. 뉴욕 촛불집회를 이끈 젊은 부부입니다. 박매헌 회원의 미국식 이름은 Kevin인데 스스로 윤봉길 의사의 호를 따서 활동할 정도로 민족의식과 민주주의 신념이 투철한 분입니다. 곧장 숙소이자 모임장소인 이춘범님 댁으로 갔습니다. 70대의 이춘범 선생님은 한국에서 코리아 헤럴드 기자로 3년간 일하시다가 뉴욕으로 오셨답니다. 전면에 나서지는 않고 뒤에서 뉴욕 한인들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셨고, 박매헌 부부 등의 촛불집회에도 많은 응원을 해주신 분입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관련 자료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해 많은 자료들을 소장하고 계십니다. 소장님이나 저도 전혀 몰랐던 분입니다. 이춘범 선생님의 말씀에 소장님과 저는 감격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일체의 단체 직을 맡지 않았지만, 죽기 전에 민족문제연구소 뉴욕지부를 만들어 활동하는 게 유일한 희망입니다. 인터넷으로 늘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을 보고 응원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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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지부 창립준비위원회 결성 후

저녁 5시부터 사모님이 손수 마련한 음식들로 저녁을 나누면서 뉴욕지부 창립준비모임을 위한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80대부터 40대 뉴욕 촛불집회세대까지 30명 이상 모였습니다. 소장님과 저는 연구소 소개, 해외지부 설치 의미 등을 설명한 후 참석자분들과 질의응답식으로 진행해 뉴욕지부 창설을 결의했습니다. 지부 이사장님으로 이춘범 선생님을 만장일치로 추대했습니다. 내년 3월경 창립총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뉴욕지부는 정치의식이 뛰어난 원로부터 작년 뉴욕 촛불집회를 주도한 젊은 세대가 어우러져 아주 좋습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노동운동가도 한국인 아내인 이선아 회원을 따라 참석해, 미제국주의를 규탄하고 한국의 민주화와 남북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발언을 해서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에서 19세 소녀가 1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절 만나러 와 또 감격했습니다.

10월 13일(월) LA 첫날, 지부 결성 준비회의를 하다

이춘범 선생님의 차로 JFK공항으로 가 11시 15분발 비행기로 마지막 행선지인 LA로 향했습니다. 6시간 넘게 걸려 JFK공항에 도착했는데도 시차 때문에 LA 현지 시간으로 오후 2시 반쯤 되었습니다.
마중 나온 정찬열 선생님(문인)의 차를 타고 곧장 ‘명동교자’라는 식당으로 직행했습니다. 기내에서 점심을 사먹지 않아서 배가 많이 고팠습니다. 칼국수와 만두국 등을 시켜먹었는데, 칼국수가 기가 막히게 맛있었습니다. 1인분이 한국에서는 2인분 정도입니다.
식사 후 소장님과 함께 숙소인 JJ Hotel로 들어갔는데, 이 호텔 2층에서 박정희출생백년기념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숙소에 짐을 풀고 로비로 내려오다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조갑제 씨와 마주쳤습니다. 소장님이 아는 체 하자(실은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이) 조갑제 씨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몸을 굽신굽신하면서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타는 겁니다. 이겁니다!!! 가짜는 진짜를 만나면 쥐가 고양이를 만나듯이 됩니다.
저녁 6시 우리는 중국식당인 용식당에서 LA지역 유력 단체 관계자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지부 결성건을 논의했습니다. 70대의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 1세대 어른부터 40대 성공회 신부님, 세월호, 일본군 ‘위안부’ 관련 운동단체, 촛불집회 핵심관련자들이 함께 참가했습니다.
마치 LA시민단체 연석회의 분위기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조갑제 김평우 같은 수구 인사들이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학술대회를 열었고, 우리가 지부창립총회 준비회의를 하는 동안 건넌방에서 이들도 뒤풀이 모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두 개의 LA가 미래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시작한 셈입니다.

11월 14일 LA 2일차, LA지부 창립

오전과 오후는 소장님을 모시고 LA 민족학교와 지역 문인들을 만나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LA원불교 교당에서 민문연 LA지부 창립대회 겸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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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식에서 정찬열 선생님이 지부장, 김창옥님(국선도 사범)이 사무국장으로 선출되셨습니다. 드디어 미국 속의 작은 한국 LA에 연구소 지부가 출범한 것입니다. 이어 신은미 님의 축가와 저의 특강이 이어졌습니다. 박근혜정권 때 북한 방문기를 순회토크쇼로 진행하다가 추방되었던 바로 그분입니다. 부군과 함께 2시간 반이나 차를 몰고 참석했습니다.
신은미 님이 피아노를 치면서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니 그만 저까지 울컥해졌습니다. ‘우리시대 역사적폐: 분단적폐’라는 주제로 강의를 시작하는데 목이 메어 잠시 민망했습니다. 처음에 사람이 많지 않아 걱정했는데 강연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당이 꽉 찼습니다. 강연 반응은 매우 좋았습니다. 소장님도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비로소 저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머나먼 미국까지 와서 강연마저 신통치 않으면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겠습니까.

11월 15일(수) LA 3일차, 소장님의 문학 강연

소장님의 인맥은 넓고 다채롭습니다. 이날 점심은 미주한국문인협회장 이윤흥, 미주시인협회장 조옥동, 재미수필문학가협회장 김화진, 미주소설가협회장 곽셜리, 미주가톨릭문협회장 정찬열, 미주시학회장 정미셸 등과 함께 했습니다. 점심 후 저는 할 일이 없습니다.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소장님은 현지 문인들을 대상으로 ‘사랑과 행복, 구원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셨습니다.
저는 따로 연구소 이상윤 회원이 긴급 연결해준 외삼촌이란 분과 횟집에서 편안하게 술 한 잔 했습니다. LA에 다시 들르면 술친구 삼아 만나자고 하십니다. 신은미 씨 부부도 뒤늦게 합류해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워싱턴 뉴욕 LA에 가면 우리를 맞아줄 동지들이 있으니 얼마나 즐겁습니까.

 

11월 16일(목) 서울을 향해

미국시간 11월 16일 톰브레들리공항에서 오전 11시발 비행기를 타고 13시간 정도 걸려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8박 9일의 출장으로 워싱턴, 뉴욕, LA 등 미주 3대 지부를 결성하는 역사의 현장을 함께하여 그 보람은 이루 말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현지 회원들의 노력도 컸지만 소장님이 오랫동안 공을 들이신 결과이기도 합니다.
7박 8일 동안 칠십이 훨씬 넘으신 고령이심에도. “박실장, 이런 출장, 신나지 않아?” 하시며 놀라운 체력과 열정을 보여주신 임헌영 소장님. 새삼 존경합니다. 그리고 워싱턴 뉴욕 LA지부 창립에 헌신하신 현지 동지들과 기꺼이 회원이 되어주신 동포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출장을 매끄럽게 준비해준 연구소 사무총장님 이하 상근 동지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화, 2018/01/0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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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 친일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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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운동과 신소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인직은 일본육군성 한국어 통역으로 임명되어 제1군 사령부에 배속되며, 1905년에 그 공적을 인정받아 80원의 사금(賜金)을 받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이미 일본제국주의에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그였기에 가능했던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가 러일전쟁의 성격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기 위한 전쟁,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 한국 강점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 결정적 계기부터 기여했다는 것은 그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호의가 곧바로 직접적인 매국행위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늑약 등을 계기로 일제로부터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고, 문학에 있어서도 계몽주의 문학이 전개됩니다. 한국의 계몽주의 문학은 갑오개혁 이후의 창가나 신소설 등을 말하는데 이인직이 쓴 <혈의누>가 신소설로는 최초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계몽주의는 서구의 계몽주의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어찌 보면 계몽운동이 일어나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차이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서구의 계몽주의는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되어 18세기를 풍미합니다. 계몽주의의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단어인 ‘enlightenment, Aufklärung, lumières’에 볼 수 있듯이 서구의 계몽주의는 빛(light)과 관련된 말로 표현됩니다. 그 빛의 연원은 성경에서 출발합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가 그것입니다. 즉 빛은 그것이 생김을 통해 무질서한 혼돈의 카오스(chaos)가 질서정연한 코스모스(cosmos)로 변화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계몽주의에서 이 빛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이성(reason)’입니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이성에 의해 우주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고, 무한히 진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성을 통해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펼치는 철학운동이었습니다.
계몽주의의 핵심적 가치들은 이성, 기계론적 과학, 보편주의, 진보, 개인주의, 관용, 자유주의, 사유재산, 세속주의 등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이른바 근대주의의 총합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민족주의’까지 연관됩니다, 좀 복잡한 문제라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르네상스부터 시작하여 계몽주의, 19세기 사회진화론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사상적 흐름들을 설명해야겠지만 이 정도에서 갈음하겠습니다. 결과론적으로 계몽주의는 교회와 절대왕권으로부터의 ‘자유주의’ 확산을 가져왔으며 세계 3대 시민혁명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렇게 보면 ‘계몽주의’라는 번역은 ‘enlightenment’라는 단어로 보나 내용적으로 보나 뭔가 부족한 번역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물론 서구의 계몽사상가는 ‘계몽’을 위해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설 수단을 개발했으며 소설, 연극, 풍자시, 심지어 포르노그래피까지 동원하여 기성 세계와 가치관을 비웃고 공격했습니다만 핵심이 ‘계몽’ 그 자체에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에 반해 한국의 계몽주의는 서구의 근대화를 쫓아가기 위한 계몽이었습니다. 근대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 사회의 반영으로서 근대적인 사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중국적 세계질서가 깨지고 서구의 근대적 국제질서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을 의미합니다. 화이(華夷)사상에 입각해서 야만, 오랑캐로 상징되던 서양이 아니라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의 반영이었습니다. 개화, 자강 등의 단어가 이를 상징하는데 그래서 한국의 계몽주의․계몽운동은 개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특히 1904년 이후의 계몽주의·계몽운동은 일제 침략에 대한 구국운동의 성격을 가집니다. 이는 그 자체로 혼란입니다. 또한 역사적 배경이 서로 완전히 다른 서구사상 즉, 18세기 계몽주의의 뒤를 이은 19세기 ‘사회진화론’까지 동시에 혼재되는 양상이 이 혼란을 증명합니다. 서구에서 2세기에 걸친 사상적 흐름이 10여 년 정도의 기간에 왜곡된 형태로 압축되어 전개된 것은 제국주의라는 외부 충격에 의해 억지로 근대로 진입하고자 하는 시도가 얼마나 큰 혼란을 초래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인직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1906년 2월 국민신보 주필을 거쳐 1906년 6월 만세보 주필을 역임하면서 1906년 7월부터 <혈(血)의누(淚)>를 만세보에 연재합니다.이후 <귀(鬼)의성(聲)>(1906.10)을이어서 연재한 다음 1908년 유일서관에서 <치악산(雉岳山)>과 <은세계(銀世界)>를 출간합니다.

 

양반을 보면 대포로 놓아서 무찔러 죽여 씨를 없애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 거죽으로 따르고 (귀의 성)

우리나라 일은 깊은 잠 어지러운 꿈과 같아 불러도 아니 깨이고 몽둥이로 때려도 아니 깨이는 터이라. 어느 때든지 하늘이 뒤집히도록 천변이 나고 벼락불이 뚝뚝 떨어지기 전에는 저 꿈 깨기가 어려우리라 싶은 것도 옥남의 생각이라(은세계)

 

이인직의 신소설은 평가가 엇갈리는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위의 글에서 보이는 것처럼 반봉건사상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사회주의 문학운동가 임화조차 경우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낡은 사회기구의 부패상이나 몰락과정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계층적인 제 모순과 사회적인 제 갈등이 투쟁의 높이에까지 고조되어 표현되고 있다. 즉 봉건적인 학정 하에 신음하는 인민의 참을 수 없는 상태와 더불어 그들의 반항심과 그것이 유발하는 행위가 부패한 구기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취급되고 있다. 이 점은 범백의 신소설 중 <은세계>를 가지고 최고봉을 삼지 아니할 수 없다.(임화, 「개설 신문학사」, <조선일보> 1940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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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의 글에서도 이인직이 일관되게 봉건의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고 표현했듯이 “이인직에게 글쓰기는 봉건체제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쟁”(한기형, <한국근대소설사의 시각>,1999)이라는지적은일면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글이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된 것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혈의누>와 <귀의성>의경우제목에서부터 일본의 영향을 드러냅니다. <혈의누>와 <귀의성>는우리말로‘피눈물’과‘귀신소리’인데한문혹은 한국어는 이렇게 복합명사를 간단히 붙여 쓴 명사의 나열로 표기하여 앞의 명사가 뒤에 오는 명사의 재료 또는 구성요소임을 나타내는 게 일반적입니다. ‘피의 눈물’과 같은 방식으로 ‘~의(の)’를 체언의 뒤에 관형격 조사를 붙여 복합명사를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血의淚>와 <鬼의聲>은일반적으로 <血淚>와 <鬼聲>이라고 간단히 표현합니다. 이런 식으로 관형격 조사를 붙이는 방식은 石の橋(돌다리), 竹の子(죽순) 등처럼 일본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복합명사의 표현방식 중 하나입니다. 이인직이 10년간 일본생활을 했던 습관이든 아니면 의도적이었든 최초의 신소설이 일본어투의 제목을 달고 계몽주의를 표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인직의 신소설은 대부분 한국의 후진성에 대비한 문명개화의 당위성과 이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물론 이인직뿐만 아니라 신소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문명개화’ 사상 전파의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계몽이 누구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인가 입니다.

 

구씨의 목적은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를 독일국같이 연방도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 같은 마음이요.(혈의누)

 

만일 우리나라가 칠십년 전에 개혁이 되어서 해삼위(海蔘威)에 아라사 사람이 저러한 근거지를 잡기 전에 우리나라가 먼저 착수하였을 것이요, 만일 오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다면 해삼위는 아라사 사람에게 양도하였으나, 청국 만주는 우리나라 세력 범위 안에 들었을 것이오.
만일 사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으면 우리나라 육해군의 확장이 아직 일본만 못하나, 또한 당당한 문명국이 되었을 것이오. 만일 삼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으면 삼십년 동안에 중등 강국은 되었을지라. 남으로 일본과 동맹국이 되고 북으로 아라사 세력이 뻗어 나오는 것을 틀어막고 서로 청국의 내버리는 유리(遺利)를 취하여 장차 대륙에 전진의 길을 열어서 불과 기년에 또한 일등 강국을 기약하였을 것이오.(은세계)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에 기초한 「삼진연방(三陣聯邦)」을 비롯해 이인직은 소설을 비롯해 여타의 저작을 통해 일관되게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이인직의 계몽운동은 일본의 관점에서 바라본, 즉 일본의 세계관에 입각한 계몽사상이라고. 그가 가진 이런 사상과 관점은 그의 논설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며 경술국치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 3부에 계속

김덕영 선임연구원

화, 2018/01/0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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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자료]

심정섭 지도위원 제60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0점 보내와
10월 25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0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발행한 우편저금통장, 보험증서가 주를 이룬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자료 기증 잇달아
10월 19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의 히구치 유이치 공동대표가 연구소를 방문하여 1950~60년대 소책자와 ????民族時報????등 총 18점을기증했다.아울러11월 14일 우편으로 소장자료 5박스를 기증했는데, 주로 일본의 과거사 청산운동과 인권운동에 관한 자료로 전단, 포스터, 뉴스레터, 전단지 자료 등이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 제5차 일본 교류관계의 소장자료 전달
일본에서 수화 통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회원이 이번에도 교류단체와 개인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11월 20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1941년 태평양전쟁 등 관련 기사가 실린 일본의 주요 신문(나고야, 마이니치, 아사히, 서부마이니치 신문) 등 총 33점이다. 또한 지난 9월 26일에는 우편으로 소장자료 2점을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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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의 외증손 조근송 선생이 1961년 재건운동본부 관련 자료 3점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화, 2018/01/09-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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