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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범죄와 덤핑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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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범죄와 덤핑 자본주의

익명 (미확인) | 금, 2016/05/27- 12:33

(이 칼럼은 한겨레신문(2016. 5. 17)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보면서 세월호, 메르스 사태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다. 한국 정부, 여당은 200명 이상의 국민이 목숨을 잃고, 최소 30여만명의 피해자가 발생해도 그 책임을 전혀 인정하지도 않는 것은 물론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 매우 소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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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옥시 대표이사를 지냈던 신현우씨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으로 출석했다

2013년 야당이 피해자 구제법안을 제출했을 때 기획재정부와 여당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고 법안 처리를 반대했다. 세월호 참사 대처의 판박이다. ‘교통사고’와 같은 것이니 기업과 피해자 간의 소송으로 해결하라 한다. 외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이 유해 제품을 만들었고 한국 지사가 판매를 했기 때문에 원인제공자는 외국 기업이다. 그러나 가습기 살균제 피해는 유독 한국에서만 일어났다. 미국 환경청과 가습기 살균제 제조 기업들은 오래전부터 독성 경고문을 통해 이런 사고를 예방했다고 한다. 우리 정부의 대응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기업 총수가 회계장부를 조작하거나 세금을 떼어먹거나 가격 담합 등의 방법으로 공정거래 질서를 위반한 일이 통상의 기업범죄다. 그러나 더 심각한 기업범죄는 이익을 위해 독성 물질을 사용하고, 모든 안전성 검사나 정부의 규제를 비켜가는 일이다. 소비자와 노동자의 건강과 귀중한 ‘생명’을 위협하면서 이익을 챙기려는 다국적 기업의 행태는 이 지구화 신자유주의 시대의 가장 큰 ‘인위적 위험’이다. 그런데 경제성장과 기업 경쟁력의 명분 아래 국가가 소비자 보호나 노동 보호를 후순위로 돌리는 후발국가에서 ‘기업’의 자유는 극대화되고 소비자나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은 하찮은 것으로 취급된다. 이것은 일종의 소셜덤핑이다.

이번 가습기 살균제 사건처럼 피해가 고립 분산적일뿐더러 인과관계 규명에 상당한 전문성이 요구되는 경우, 생산 기업이나 기업주에게 책임을 묻기가 쉽지는 않다. 특히 한국처럼 기업이 노골적인 범법을 해도 과징금도 미미하고 기업주가 거의 처벌을 받지 않거나 구속되어도 곧바로 사면 복권되는 나라에서 기업의 반사회적 행태를 법적으로 단죄하기는 매우 어렵다. 외국에서도 기업범죄를 ‘화이트칼라 범죄’라고 하면서 책임 주체를 슬쩍 흐리는 경향이 있지만, 회계장부를 조작했던 미국의 엔론이나 기름유출 사고로 큰 피해를 준 다국적 기업 비피(BP)는 파산하거나 큰 타격을 입었다. 한국처럼 매년 수십명의 산재 사망사고, 자살자를 낳은 ‘죽음의 기업’의 사용자가 처벌은커녕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활보하지는 못한다.

5년 전 한국 정부는 피해 역학조사를 했지만 공정거래위원회는 옥시 제품의 유독성을 발견하고도 5천만원의 과징금만 때리는 데 그쳤고, 검찰은 수사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까지 소비자들의 죽음의 행진이 계속된 이유도 김대중 정부 이후 한국이 기업 경쟁력을 최우선의 목표로 하는 ‘기업 국가’로 변하면서 정치권, 정부, 사법부, 언론, 전문가들이 기업범죄의 방조자 혹은 변호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경제를 위해 기업을 살리고, 기업(주)의 사기를 올려야 한다는 논리로 기업범죄라는 개념 자체를 지워버렸다.

옥시의 변호인인 김앤장의 범법 여부는 더 지켜봐야 하지만, 이번 사태를 보면서 한국에서 전문가의 직업윤리는 교과서에만 있는 이야기라는 점을 새삼 실감한다. 적어도 수백명의 전문가들이 4대강 환경평가, 세월호 사고, 메르스 사태의 실상을 나름대로 알고 있을 것이지만, 소신을 갖고 발언한 내부자나 전문가들은 거의 없었다. 이번 옥시 등 가습기 살균제 피해도 환경운동가 최예용씨나 백도명 교수 등 몇 사람의 뜻있는 학자들이 자기 호주머니 털어서 실태를 조사하고 그 위험을 경고하지 않았으면 계속 묻혔을 것이다.

기업 감시 등 경제민주주의, 사법정의, 그리고 직업윤리 없는 자본주의는 가장 천박하고 타락한 것이고, 사람 목숨 값싸게 쳐서 돈을 번 @덤핑 자본주의다. 한국의 시장경제, 기업문화, 교육, 법조인 양성 제도 모두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는 전쟁보다 더 위험하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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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한겨레신문(2017. 3. 21)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외환위기가 터진 지 20년이 되었다. 그동안 정치는 두 번의 ‘진보개혁’ 정부 그리고 두 번의 보수 정부로 회귀하는 등 시소를 타고 오르내렸다. 박근혜씨가 촛불의 압력으로 대통령직에서 중도하차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시소가 위로 힘차게 올라가고 있다.

그런데 청소년과 청년들도 시소를 타고 올라간다고 느낄까? 지난 20년 동안 정치는 시소처럼 오르내렸는지 모르나, 교육 노동 인권 영역은 거의 변하지 않았거나 오히려 더 나빠졌다.

즉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조금 좋아졌다가 그 후 9년 동안 나빠진 것이 아니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실직한 가장들이 자살하는 일은 많아도 지금처럼 콜센터 실습 중인 학생이 자살하거나, 구의역에서 일하던 19살 청년 노동자가 전동차에 끼여 죽는 일은 없었다.

지금 세계는 1% 부자들이 99%를 약탈하는 세상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유독 한국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가혹하고, 이것은 바로 비인간적인 교육과 살인적인 노동 현장이 하나로 얽혀서 서로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과도한 입시만능 교육은 노동자의 무권리 상태와 사회적 연대감 해체의 다른 표현이다. 학교의 입시학원화는 노동시장의 극심한 차별과 불안정, 취업 절벽이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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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안 나오면 인간도 아니고, 대학을 나오면 비정규직이다. 모두가 미친듯이 뛰는 세상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제 자리일 뿐이다. 반노동, 과도한 경쟁이 모두를 패자로 만들고 있다.

상위 10% 노동자들이 임금이나 직업 안정성에서 특권적 지위를 얻고, 나머지 90%가 불안한 저임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면 노동 현장의 위험과 폭력은 그냥 감내해야 할 숙명이 되고, 자녀를 상위 10%의 직장에 밀어 넣을 수 있다면, 노후 복지를 희생하고서라도 자녀 교육 투자에 나서겠다는 학부모의 출혈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입시 과열은 반(反)노동, 사회안전망 부재라는 현실과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약자가 노조나 정치적 대표체를 통해 권익을 보장받을 수 없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구의역에서 사망한 청년은 140만원 수입 중 100만원을 저축해서 대학을 가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터에 나갔다. 이제 스카이(SKY) 대학은 거의 부유한 가정 출신자들로 채워지고 그들조차 안정된 직업을 얻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불안하고 비인간적인 노동 현장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명문대 학벌, 공무원 합격밖에 없다는 것이 이 시대의 명제다.

지난 20년 동안 비정규직을 희생시키고 고임금을 얻은 조직 노동자들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내 식으로 표현하면 노동 문제를 교육, 복지, 재벌 문제와 한 세트로 보지 못하게 만든 기업노조주의에 원인이 있다.

노동계의 책임이 2라면, 단기 이윤 확보에만 매진해온 재벌 대기업, 교육과 노동을 경제의 부속품 정도로만 보는 경제관료, 국가의 장기적 정책에 무관심한 야당에는 8의 책임이 있다.

즉 비정규직 사용제한, 임금격차 축소, 노동시간 단축, 노조조직률 제고 등 노동의 절망을 해소하자는 각 대선 후보의 공약은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대기업의 경제 논리의 반격에 부딪힐 것이다.

한편 학교교육 정상화, 학벌주의 극복 등 교육 관련 정책안도 노동 현장의 차별 해소, 일터의 민주화와 노동의 자력화를 수반하지 않으면 해결의 물꼬를 틀 수 없을 것이다.

임금을 적게 받더라도 고용의 안정성이 좀 더 높아진다면, 그리고 인위적 위험을 막아주는 사회적 안전망이 더 확충된다면, 청소년과 청년들은 희망을 가져볼 수 있다. 일자리와 주거 불안에 시달리는 청년들에게 결혼과 출산은 언감생심이다.

지금 우리는 87년이 성취한 반쪽의 민주화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적 요구는 더 심층적이고 엄중해서, 한국은 사실 8·15 해방 시점과 맞먹을 정도의 체제 전환의 국면에 놓여 있다.

대선 후보들은 표 얻기 위한 공약에 매달리거나 지엽적 문제로 싸울 것이 아니라 노동 차별과 입시 과열이라는 ‘생존 전쟁’ 체제를 넘어서서 기회가 열려 있고, ‘고루 잘 사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은 촛불시민의 능동성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사회정책은 하나의 세트로 묶여 있다. 그래서 각각을 떼어서 해결할 수 없고, 긴 호흡이 필요하다. 현재와 같은 5년 단임 대통령은 시작하다가 말 것이다. 장차 국가교육위원회, 아니 국가사회정책위원회를 수립해야 한다.

화, 2017/03/28-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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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 등이 지원하는 동남아 국제개발 사업에 참여했던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옆의 외국 단체는 모두 사업을 어떻게 잘할 것인가 토론을 많이 하는데 한국 팀들은 각자 컴퓨터 앞에 앉아 보고서 쓰기에 바쁘다고 한다. 외국의 한국학 연구소에 관계하는 교수들은 한국 정부의 연구지원비를 받으려면 보고할 것이 너무 많아 짜증나서 다시는 지원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 정부가 발주하는 각종 공모 사업을 하다 보면 지나치게 까다로운 영수증 처리 작업에 질릴 정도다. 마치 “너희는 돈을 떼먹을 준비가 되어 있지”라는 의심을 받으면서 구차한 돈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된다.

지난 몇달 동안 한국의 모든 대학의 대학평가 담당 교수들은 교육부에 제출할 서류 준비에 날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그들을 더 힘 빠지게 만든 것은 점수 0.1점을 올리기 위한 각종 그럴듯한 ‘말 만들기’ 작업이었다. 그 알량한 정부 지원금에 목을 맨 대학의 슬픈 풍경이다. 그렇게 해서 지원을 받게 된 대학과 탈락한 대학의 교육 성취가 실제 크게 다를까? 그래서 지원을 독식한 대학들이 정말 한국 대학교육을 선도하고 있을까?

‘진보’ 교육감이 들어서고 정권이 바뀌어도 교육당국에 제출할 각종 보고사항 처리나 지원비 따내는 일에 머리를 맞대느라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은 여전히 수업과 학생지도를 뒷전으로 돌려야 한다. 교사들 사이에서 교육문제를 토론하는 일은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데 교육부는 교사를 평가하고, 교사는 학교생활기록부를 채우기 위해 학생의 모든 활동을 평가한다. 지금 학생들은 평가받으러 학교에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두 번의 평가 결과에 따라 개인과 조직의 운명이 좌우되는 사회에서 평가자는 수치화된 점수나 등급 매기기 시험을 선호하게 된다. 그래서 애초에는 졸업장을 자격증으로 인정하자는 로스쿨 변호사 양성 제도도 결국 시험 제도로 퇴행했고, 시험을 거쳐 입사하지 않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도저히 못 받아들이겠다는 공기업 정규직 청년들의 분노가 거세다.

예산을 집행하는 관료들은 예산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집행하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변명할 것이다. 수량화된 점수로 등급을 매기지 않고서는 이해 당사자들이 그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정, 절차가 해당 조직의 미래와 존립의 이상을 압도하면 자발성과 창의성의 싹은 아예 자랄 수도 없을 것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한국은 관료적 형식주의와 신자유주의적 효율성의 논리가 완벽하게 결합하여 성과 평가의 큰 칼이 모든 학교, 정부, 공기업의 문화를 지배하는 ‘평가국가’가 되었다. 평가 절차가 빈번하고 평가 방식이 더 정교해질수록 평가자 즉 관료의 권력은 더 커지고, 평가받는 쪽은 더 무력화되며, 그들의 온 삶은 피폐해진다.

물론 평가권력의 창궐은 사회의 도덕적 진공 상태와 맞물려 있다. 한국에서 시험 성적, 정량평가 방식이 이렇게 위세를 떨치는 이유는 그것 외에는 믿을 만한 사회정치적 권위체나 이상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권, 사법부 등에 대한 신뢰 수준이 언제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거의 최하위에 머물러 있는 불신사회에서 평가권력의 힘은 더 커진다. 특히 시민사회의 자정능력이 약하고 전문가 집단의 직업윤리가 없다는 것이 큰 원인이다. 직업집단 자체의 이상과 성취의 기준이 없으니 평가권력이 개입해서 본말이 전도되는 현상이 생긴다.

평가 만능주의는 구시대의 자의적 권력행사보다 진일보한 것처럼 보이나, 그것은 ‘합리’의 이름으로 ‘비합리’를 은폐할 수 있다. ‘기회의 평등’ 없이 ‘과정의 공정’은 허구적인 것이다. ‘실적’을 말하기 전에 그 실적이 무엇에 쓰기 위한 것인지 먼저 물어야 한다. ‘단기적 실적’, ‘성과’, ‘경쟁력’을 내세우는 평가권력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바로 ‘평가권력’을 제대로 심판할 수 있는 정치적 지도력과 사회적 권위가 필요하고, 재벌과 경제관료들 간의 오랜 공생관계를 끊을 수 있는 사회정치적 대항력이 있어야 한다.

한국 사회의 비극은 정작 평가받아야 할 집단, 세력, 세대는 평가의 무풍지대에 있고, 평가와 무관하게 꿈과 실력을 키워야 할 사람들은 매일 지독한 평가의 칼날 위에 있다는 점이다.

학생과 청년들을 ‘평가권력’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자.

원문보기: 한겨레 김동춘 칼럼

수, 2018/05/23-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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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한겨레신문(2016. 8. 9)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나는 성주 사람들의 지혜에 큰 박수를 보내면서도 이대의 ‘느린 민주주의’를 지켜볼 작정이다. 그들의 발랄한 행동에 박수를 보내면서 그들이 동문과 한 몸이 되기보다는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대학생들과 손을 잡는 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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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세력 개입론’…시위와 저항이 일어날 때마다 정부가 내놓는 말이다. 이것의 근원은 독재정권시절, 그리고 식민지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시위대들은 정부와 보수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피하고, 자기 주장의 순수성을 위해 외부세력을 절단해내지만, 그럴수록 그들은 고립되고, 그들의 주장은 잊혀진다. 그런데 공화국 시민은 질서를 잘 지켜서 시민인 게 아니라,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끼어들기 때문에 시민인 것이다. 그게 공론의 장이고, 시민의 덕성이다. 외부세력론은 그런 시민의 덕성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왼쪽 사진 출처: 헤럴드경제)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 학생데모가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공산폭동과 흡사”, “오열(좌익) 조종혐의 농후하다”라고 겁주면서 데모를 주저앉히려 했다. 그러나 데모는 서울과 전국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졌는데, 그러면서도 학생들은 “우리는 공산 오열의 침투를 경계한다”, “학생들의 순수한 피, 민주당은 오용 말라”고 방어막을 쳤다.

이번 성주 사람들도 사드 반대 서울역 시위에서도 “외부세력 개입” 운운한 보수언론과 정부의 공격을 피하려고 ‘명찰’을 돌려 ‘외부세력’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이화여대생들도 평생교육 단과대학 설립 반대 농성에서 ‘운동권’과 ‘외부세력’의 개입을 차단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외부세력의 개입을 법으로 금지한 예가 있었다. 바로 노조활동에서의 ‘3자 개입 금지’ 규정이 그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이 악법이 80년에서 97년까지 노조 탄압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될 수 있었던 논거도 노동 현장의 분쟁은 노사 간의 ‘순수’ 이익다툼이므로 제3자 운동권이 ‘순진한’ 노동자들을 선동해서 정치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것은 노동자들의 요구가 오직 ‘직접 근로관계’에서 발생한 이익 문제이며 노동자들을 오직 임금과 근로조건에만 관심을 가진 존재라고 보는 것이고, 사용자가 일상적으로 동원하는 정부, 법, 언론, 정치세력 등 모든 외부 지원은 ‘제3자’가 아닌 것으로 보는 점에서 사실상 노동자 노예화법이었다.

비록 3자 개입법은 없어졌어도, 이번 성주나 이대에서처럼 보수언론이나 정부의 ‘외부세력’론과 그에 맞선 저항세력의 ‘순수성’론은 이 사회에 그대로 살아 있으며, 저항세력은 군사정권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순수’하니 내 문제에 정치권과 운동권이 개입하지 말라”고 방어막을 쳐야만 했다.

그런데 저항세력이 방어를 위해 내세운 ‘순수성’론은 당장의 탄압을 피하는 ‘자원’이 될 수 있지만, 결국은 발목을 옥죈 쇠줄을 녹여 철사로 온몸을 감는 일이기도 하다.

‘운동권’의 이념과 정치를 배격한 대기업 노조는 ‘순수한’ ‘임금인상’ 투쟁에 매진하다가 자기 이익만 챙기는 ‘귀족노조’가 되어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으며, 중소기업 노조는 용역폭력과 경찰, 검찰, 언론, 사법부에 알몸으로 맞서는 신세가 되어 어제의 유성기업이나 오늘의 갑을오토텍처럼 처절하고 외로운 저항을 하다 하나하나씩 사라져 갔다.

일제가 조선을 점령했을 때, 채찍 다음으로 비중을 둔 일은 교육을 통해 조선인의 정신을 노예화하는 것이었고, 그 핵심이 바로 “민도(民度)에 맞게” 교육을 한다는 것, 즉 오로지 ‘실용’에만 충실한 인간을 기르되 ‘정치’에는 일체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개돼지’론의 원조는 일제인 셈인데, 식민지 백성들이게는 먹을거리만 주되 공민으로서는 행동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논리다. 성주와 이대를 향해 날리는 ‘외부세력’론, “성주 참외 사주기”론은 모두 일제와 독재정권의 백성 노예화 작업의 반복이다. 즉 “정치는 우리가 하는 것이니 너희들의 당장의 먹을거리만 챙겨라”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성주 사람들은 이 ‘외부세력’론의 허구를 깨달았다. 그들은 이제 “성주뿐 아니라 한반도 사드배치 반대”를 외친다. 그들은 사드가 성주 내의 외진 곳이나 김천으로 가면, 자신들은 전자파를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국 다른 지역 주민의 희생을 담보로 자신만 살게 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자신들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이대생의 농성은 아직 이대 안에 머물러 있다. 과거에 학생들은 이념을 먹고 살았고, 민중들은 ‘밥’의 문제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반대의 양상이 나타났다.

물론 이대생들의 ‘운동권 배격’ 행동을 비판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 우리 세대 사람들은 이념과 정치만 앞세우면서 민중들의 ‘밥’을 깊이 고민하지 못한 채 무책임하게 사라졌다가 자신만의 ‘큰 밥상’을 챙기려고 이념을 버리고서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성주 사람들의 지혜에 큰 박수를 보내면서도 이대의 ‘느린 민주주의’를 지켜볼 작정이다. 그들의 발랄한 행동에 박수를 보내면서 그들이 동문과 한 몸이 되기보다는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대학생들과 손을 잡는 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수, 2016/08/1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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