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제작소와 함께 한 2015년 어떠셨나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베어나왔던 절망과 한숨의 소리를 희망과 대안을 찾는 활동으로 바꾸고자 했던 한 해였습니다. 그러한 활동들 속에서 희망제작소와 만났던 분들께서 2015년을 돌아보며 정성스런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아파트 작은도서관에서, 또 다른 심장을 찾는 퇴근후렛츠 모임에서, 목민관클럽 포럼과 연수활동에서, 그리고 한국사회 대안을 찾는 새로운 연구작업까지…올 한 해 희망제작소와 함께 해주신 분들의 인사, 감사히 듣겠습니다.
[희망제작소와 함께 한 2015년 ② 목민관클럽 대표]
지방자치 실시 첫 해에 기초의원이 되어, 주민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며 줄곧 달려왔으니 내 정치경력과 지방자치는 똑 같은 나이다. 최근 몇 년간 중앙정부의 통제 특히 재정자치의 숨통을 조여오는 상황에서 목민관클럽은 회원 단체장들의 산소통 역할을 했다. 창립 당시 희망제작소 소장이었던 박원순 시장의 지방자치에 대한 경험과 열정은 지역에서 올바른 지방자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단체장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음은 새삼 말할 나위 없다.
희망제작소와 함께 한 2015년을 돌아보면, 첫 1박2일 프로그램에서 여러 단체장들이 함께 현장을 둘러보고 밤샘토론을 했던 생생한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목민관클럽 단체장 대부분이 재선에 성공하였고, 전국적으로는 1/4에 해당하는 60여 명이 참여하는 견실한 조직이 되었다. 어느새 단체장은 물론이고 소속 공무원들이 더 많이 참여하고 배우는 참 좋은 모임으로 발전한 것을 보면서 희망제작소를 이끌고 계시는 분들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힘들고 빡빡하기로 정평이 난 목민관클럽의 해외연수는 여러 프로그램 중 단연 백미로 꼽힌다. 금년 영국∼스페인 도시재생과 사회적경제 연수는 지역의 비전을 고민하던 나에게 가능성의 해답을 찾아가는 빛줄기가 되고 있다.
세상은 스스로 진화하지 않는다. 정의로운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진화한다. 목민관클럽 활동을 통해 세상이 조금이라도 진화되기를 희구한다. 홍미영 목민관클럽 대표
많은 시민들이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외치며 같은 마음으로 울고, 슬퍼하고, 분노하였습니다. 참여연대에서는 "기억하고,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주 수요일 오후 4시~9시 참여연대 건물에서 노란 리본을 만들어 왔는데요.
충북/청주에 계신 회원님들과도 함께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찾아가는 리본 공작소>를 열었습니다. 지역회원 만남의 날 행사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번 행사는 지난 10월 29일 토요일, 청주시에 있는 충북NGO센터에서 열렸습니다.
비록 많은 회원님들이 참여하진 못했지만, 회원님들과 함께 세월호를 기억하며 한 땀 한 땀 리본을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참여연대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진행해왔던 활동들과 진상규명 운동 현황 등을 회원님들께 보고 드리며 여러 얘기를 나눴습니다. (물론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한 얘기도 많이 나왔습니다!)
“참여연대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지역에 있어서 행사나 집회에 자주 참가하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참여연대 활동 소식을 보고 있어요. 세상을 바꾸기 위한 일에 미약하나마 동참하고 있다는 생각에 왠지 뿌듯해지곤 합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인지라 세상 소식은 참여연대 소식지와 팟캐스트를 통해 주로 듣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참여연대 하는 활동은 정말 소금과 같아요. 마음 같아서는 서울에서 열리는 박근혜 하야 집회에 매주 참가하고 싶습니다. 참여연대의 활동을 늘 응원합니다.”
세월호 특조위가 강제 종료된 이후 국회 내 법 개정이 여의치 않아 새로 법 제정 준비 중이고, 민간 차원의 세월호 국민조사위워회 구성도 논의 중이라고 하는데요. 현 시국이 세월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참여연대에서도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지역에 계신 회원님들을 찾아 뵙고 참여연대 활동에 대해 많은 조언을 구하겠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6월 근현대사 아카데미는 한국 근현대사 "광장 민주주의" 시작이라고 하는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했습니다.
이이화 선생님과 함께했던 실내교육 120여년전, 그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민중들의 항거! "농민들"이 들고일어나, 과거의 폐습을 없애고 부정부패 척결로 사회를 바로잡고,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등 그야말로 아래로부터 시작된 "혁명"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1894년에 동학농민군의 함성과 투쟁은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 갑오농민전쟁, 동학난 등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전국각지에서 일어난 농민군의 봉기, 그 중에서도 우리는, 혁명의 시작을 알린 "정읍"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동학역사문화연구소 조광환 소장님과 함께 동학농민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봅니다.
마을 언덕 위, 사발통문 서명자 후손자들이 건립한 동학혁명기념탑! 죽산마을, 송두호의 집에서 전봉준 등 20여명이 모여 고부 농민 항쟁을 계획하고 그 결의 내용을 적은 후, 사발을 엎어놓은 모양으로 20여명 참가자들이 서명하여 각리의 집강에게 돌렸다하여 일명 사발통문이라 합니다. 농민들의 봉기는 사발통문으로 작성된 것처럼,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거사 계획은 고부군수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발령되어 보류되었으나, 이듬해 1월 10일 고부 봉기로 점화되었습니다.
19세기 세도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중앙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탐관오리가 득세하였습니다. 매관매직이 성행하며 과거제도는 유명무실해지고, 민심이 동요하며 삼정 즉 전정(토지세), 군정(성인나자들이 군대 안가는 대신 내는 세금), 환곡(춘궁기때 관곡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갚도록 한 제도)이 문란해져 농촌사회의 파탄을 가져왔고, 봉건사회의 모순과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불만은 커져만갔습니다.
한편 개항이후, 청일 양국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조선은 일본 식량공급지이자, 일본쌀 수입이 늘어나면서 민중들은 물가고와 식량부족에 허덕이게 됩니다. 이런한 상황에서, 전국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됩니다.
고부지역은, 호남제일의 쌀 생산지이며 농산물 집결지로, 봉건적 수탈과 일제의 경제적 침략이 극심한 곳이었습니다. 특히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이 심각해, 전봉준을 중심으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결의 드디어, 고부봉기가 일어납니다. 고부봉기는, 이전의 농민봉기와 전혀 차원이 다른 것으로 전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진격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지역봉기를 넘어, 전국적 혁명을 계획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 "사람이 하늘이고, 밥이 하늘인 세상" 을 만들고자 한 반봉건항쟁 외세의 국권침탈에 맞서 보국안민을 이루고자 했던 반외세 항쟁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입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고택은, 찾는이 없이 쓸쓸하게, 뜨거운 해를 맞고 있습니다. 이곳은, 고부 농민 봉기가 일어나기 수년전에 전봉준이 살던 곳으로 훈장생활을 하면서, 고부봉기 전까지 살던 곳이라고 합니다. 전봉준의 유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전봉준은 동학조직을 이용하여, 농민봉기를 전국적으로 확산해가려고 합니다. 고부 동학교도들과 농민군들이 무장하고, 1894년 1월10일 말목장터에 집결합니다. 고부관아를 점령, 감옥을 부수고 무고한 백성들을 석방하였으며, 창고문을 열어 곡식을 주민들에게 나눠줬습니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백산으로 진을 옮기며 부대로서의 대오를 정비하고 장기전에 돌입하였고, 각지의 창의격문을 발송하는 등 혁명의 전국화를 준비해갑니다.
고부관아 습격후, 농민군들은 바로 다음날 만석보를 허물어 버립니다. 만석보는 태인천과 정읍천이 만나는 곳에 쌓았던 수리시설로, 고부군수 조병갑이 강제로 농민들을 동원하여 쌓아놓고, 물세를 받아 원성을 자아낸 곳입니다. 태인천과 정읍천 가까이 이평이라 불리는 넓은 평야가 보입니다. 그 비옥한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이, 못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없는 착취가 벌어집니다. 사람들의 분노와 한이 서린 이곳에 오늘도 강물은 유유히 흘러갑니다.
혁명의 지속과 확대를 모색하던 전봉준은, 손화중과 의기투합하여 무장에서 포고문을 공포한 후 북상하여 고부관아 재점령, 김개남 등 지도자들과 함께 백산에 총집결합니다. 당시 농민군 숫자가 8천여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백산에서 농민군의 지휘체계와 조직 정비를 통해 황토현과 황룡촌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전라감영과 서울에서 파견된 관군을 격파한 후 파죽지세로 전주성까지 함락시켰습니다. 전주성 함락에 놀란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이에 일본도 조선에 출병을 합니다. 동학농민군은 외국 군대 철병을 위해, 폐정개혁27개조를 보고한다는 것과 해산할때 신변보장을 약속받고 전주화약을 체결, 전주성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조선을 대륙침략 교두보로 삼고자 했던 일본은, 전쟁을 도발하여 조선반도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터로 변한 조선의 치안과 행정 공백을 메꾸기 위해 동학농민군은 '집강소'를 설치합니다. 집강소는 농민스스로 자치하는, 최초의 주체적인 농민통치 기구로서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폐정개혁을 실천에 옮겨갑니다.
정읍 곳곳에는, 동학농민군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탑과 동상이 들어서있습니다. 정치권력은 입맛에 맞게 "동학농민혁명 혹은 운동, 난리"로 해석하였고 민중들의 힘과 승리를 자신의 치적으로 비유하곤 했습니다. 기념탑이나 동상에 그 시대의 특징, 모양, 글귀가 들어있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전봉준과 농민군을 친일 작가 김경승이 만드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 황토현을 비롯한 동학농민유적지는 전두환 정권에 대대적인 정비가 이뤄집니다. 군부독재정권의 정당성을 "호국유적지" 정화 사업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한많은 전라도에서 전두환의 이름은 수없이 지워지고 덧칠해지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동학농민기념관입니다.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고, 경복궁을 무단점련하고 친일내각을 수립하자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을 내쫓고자 반일항쟁을 기치로 2차 봉기를 단행,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서울을 향해 진군해갑니다. 여러 전투를 벌이면서, 농민군의 숫자는 줄어들고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올라갑니다. 일본군과 마지막 전투. 우금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계속 돌진하는 농민군 내 목숨만큼 가치있는 것이 없을텐데... 근대적인 신무기에 맞서, 옛날 총들고 죽창들고 산으로 산으로... 결국엔 관군과 일본 연합군에 맞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게 됩니다.
이 무모한 전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 왜그랬을까요? 농민군들이 목숨걸고 싸웠던 이유.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간절함이 아니었을까요? 나는 어쩔 수 없이 노비로 천대받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나처럼 천대받지 않고 평등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꿈. 그것이 20-30만명이 죽어간 이유일 것입니다. 억압받는 수많은 사람들의 한과 소망이 모여 분출될 것이 동학농민혁명입니다.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신분제가 사라지면서 평등한 세상을 열었고 집강소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의 실험이 빛났습니다. 제폭구민(폭정을 제거하여 백성을 구함)과 보국안민(나라를 돕고 민중을 편안하게 함)으로 인간존중, 사람이 다시 하늘이 되는 세상을 앞당겼습니다.
자유 평등 자주 민권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은, 이후 3.1운동과 해방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4.19혁명 등으로 이어져 민주주의를 열매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광장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을 들여다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는 동학농민혁명에서 시작된 것을 다시한번 확인한 하루! 광장민주주의 시작은 동학농민혁명입니다.
답사에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7월 근현대사 아카데미는,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전국 봉기.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주제로 합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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