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5회를 맞이하는 한양도성 걷기여행은 신한금융그룹 봉사단 50명과 지역아동센터를 이용하는 친구들 50명이 1:1 멘토와 멘티가 되어 한양도성을 걸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를 응원하는 시간입니다.
올해는 늘푸른 방과후교실, 신상도지역아동센터 그리고 좋은친구지역아동센터 친구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함께 해주셨던 자원활동 선생님들과 사전모임을 통해 동선도 확인하고, 역할도 서로 나누고, 매뉴얼도 만들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행사 당일에는 미리 모여서 다시 한번 교구와 각종 물품을 확인하며 각자의 동선을 점검하며 한양도성걷기여행 출발을 준비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나눠줄 교구와 간식꾸러미를 정리하고 나니, 신한금융 봉사자들이 도착을 하였고, 봉사자를 대상으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였습니다. 지역아동센터에 대한 이해부터 해서, 아이들에게 [꿈, 희망, 넒은 세상]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고, 많이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몇가지 안전사고에 대한 주의사항까지 당부의 말씀을 하고 나니 아이들이 도착하였습니다. 1:1 멘토와 멘티를 맺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나이와 성별을 고려해서 멘토와 멘티를 맺어주려고 하지만, 생각만큼 의도한 대로 잘 이루어 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사전 신청을 받아서 성인과 아동의 수를 1:1 이 되도록 맞추지만, 행사 당일에는 항상 못오는 친구들이 생기다보니, 아이들이 원하는 멘토를 맺어주는 것이 늘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최대한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순발력있게 멘토와 멘티를 맺어줍니다.
처음 만나 사이, 아무리 성인과 아동이더라도, 서로의 이름을 묻고 나면 사실 그 다음 말이 생각 안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때는 몸으로 친해질 수 있는 놀이를 시작합니다.
먼저 몸으로 인사하기 놀이를 합니다. 진행자의 지시대로 서로의 신체를 이용해서 하는 인사입니다. 서로 손도 잡아야 하고, 이마도 맞대야 하고, 발도 마주치면서 서로의 벽 하나를 허물어 갑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멘토와 멘티가 한몸이 되어 발로 하는 묵찌빠 놀이를 하면서 기차놀이도 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도록, 문열기 놀이도 했습니다. 물론 만난 곳이 흥인지문, 즉 동대문이다보니, 한양도성도 설명하고 성문도 설명하면서 동동동대문을 열어라, 남남남대문을 열어라 ~ 노래에 맞춰 짝꿍과 함께 성문을 통과 하는 놀입니다. 문지기에게 잡히면 다시 문이 되어서 점점 더 큰 문을 만드는 놀이였습니다. 큰 문이 어느순간 하나의 큰 원이 되면 이 놀이는 끝이 납니다. 모두들 백미터 달리기 하듯 전속력으로 성문을 통과하는 사이, 느슨하게 잡았던 손을 더욱 꽉 잡게 되고, 어색했던 사이가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 큰 원이 만들어졌고, 마지막으로 오늘 하루 즐겁게 지내자는 약속을 하고, 본격적인 한양도성 탐방에 들어갔습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아침식사를 거르고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인이든 아동이든 말이죠. 그래서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는 간식을 준비하게 되고, 간식으로는 과일과 견과류 그리고 초코바 정도를 준비합니다. 간식을 먹으며 한양도성에 누가 살았었는지를 알아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도성길라잡이 선생님들의 설명을 들으며 캐릭터 스티커를 옛지도에 붙여보기도 하고, 빈칸이 있는 옛지도를 채워보기도 합니다. 일명 한양도성 도전 골든벨입니다. 외부활동과 고학년의 학습력을 필요하다보니, 참가대상을 초등 3학년이상으로 제한을 두고 있지만, 대부분의 지역아동센터를 형제,자매가 함께 다니다 보니,저학년 친구들도 함께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양도성에 대한 맛을 보았으니 이제 본격적인 한양도성 탐방을 시작해야겠죠?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에 하나인, 낙산구간을 걸었습니다. 이화마을을 지나, 낙산 성곽길을 걸었습니다. 이화마을 꽃그림은 아쉽게 사라졌고, 물고기 계단만 남아 있어서 그쪽으로 동선을 진행했습니다. 사전답사때, 물고기계단 옆에 붙여있었던 호소문을 이미 보았기에, 이 이화마을을 지날 때 다시 한번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용히 지나갈 것을 말씀드리고 지났습니다. 낙산성곽길로 접어드니, 노랑꽃, 하얀꽃 그리고 연두연두한 새싹들이 한양도성과 어우러진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전날 미세먼지가 '매우나쁨'이어서 급하게 준비한 마스크가 필요없을 정도로 날씨가 맑았습니다. 계속 기상예보를 확인하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아침에 보니 [보통]으로 예보가 변경되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이렇게 푸른 날에 아이들과 풀피리 배우기와 나만의 에코백도 만들어보았습니다. 풀피리는 늘 인기가 많습니다. 김완식 선생님의 멋진 연주는 모두를 압도합니다. 풀피리는 단계별로, 풍선, 필름 그리고 풀피리 순으로 눈높이 교육이 시작됩니다. 성인, 아동 모두 집중하고 재밌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풀잎으로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 자체를 신기해 합니다.
나만의 에코백도 인기 있는 순서입니다. 에코백에 각자의 개성을 담아 수선전도를 만듭니다. 가끔 예술작품을 만드느라 모두를 기다리게 만드는 친구도 있지만, 완성된 가방을 보면 짧은 시간동안 집중력있게 색칠한 모습이 대견합니다.
이렇게 한양도성 걷기여행이 끝날 때가 되면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마무리 시간이 됩니다. 어색해서 말을 많이 못 나눠서 죄송하지만, 오늘 재밌었다고 편지를 써준 친구 오늘 하루 같이 있어줘서 고맙고, 앞으로 맑고 밝은 꿈을 갖기를 바란다는 봉사자 등등 서로의 마음을 조심스레 나누면 어느덧 점심시간입니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헤어질 시간이 됩니다. 늘 이시간이 제일 힘듭니다.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할지 조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하루 서로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헤어집니다. 각 지역아동센터에서 왔던 친구들은 저희가 준비한 차량을 이용해서 다시 센터도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아이들을 배웅하고 자원활동가 선생님들과 짐정리도 하고, 평가도 합니다. 평가내용은 에코백 만들기 후 친밀감이 형성되었으나, 프로그램을 좀더 단순화 해야 한다는 내용부터 마이크소리 조심, 아동을 고려한 동선에 대한 배려 부족, 팀구분을 좀더 소그룹으로 만들자는 의견까지...
평가시간은 늘 냉정합니다.
이렇게 냉정한 평가를 마치고 나면,
아침의 생생했던 자원활동가 선생님들은 어느덧 떼꾼해져버립니다.
그래도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하고 나니, 마음만은 뿌듯하다고 하시는 선생님들이십니다.
그래서 늘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늘푸른 방과후 교실의 인솔교사 선생님께 감사의 메일도 받았습니다. 자랑도 할 겸 감사메일 소개합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토요일 한양 도성 걷기 여행에 참석했던 늘푸른 방과후 교실입니다.
그날 감사인사도 제대로 못드리고 급하게 돌아온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ㅠ_ㅠ
KYC선생님들이 준비해주신 재미있는 프로그램 덕택에 저희 아이들 오랜만에 콧바람도 쐬고,
좋은 역사 공부도 하였네요.
아이들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자기 큰 짝궁선생님과 있었던 일,
오늘 프로그램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나누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하였습니다^^
또 저희 교실 밴드에 사진을 올렸더니 부모님들께서 오늘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서 너무 재미있었다고
이야기 하였다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해주시기도 했습니다.
KYC선생님들과 신한금융그룹 선생님들 덕에 저희 아이들이
오랜만에 많은 사랑도 받고 또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시간이 된 것 같아서 감사인사드립니다.
(그리고 저희 장애아동들 덕에 고생하신 선생님들께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항상 좋은 일과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체험 아이들에게 제공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해방70년, 강제징용과 피폭의 땅에서 생각하는 전쟁 그리고 평화 [2015 서울KYC 동아시아 이해를 위한 일본 평화여행 in 큐슈]
지난 8월8일부터 11일까지 3박4일의 일정으로 서울KYC회원 20명과 함께 일본의 강제징용과 피폭의 장소인 후쿠오카, 나가사키, 기타큐슈 지역을 다녀왔습니다. 1945년 전쟁은 멈추었고, 식민지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70년이 지난 2015년 일제강점기 당시의 상처와 고통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이런 상처와 고통을 어떻게 기억하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또 하나의 과제를 안고 온 여행이었습니다. 가장 뜨거웠던 일본을 뜨거운 가슴으로 만나고 온 기억을 사진을 통해 되짚어 봅니다.
여행첫날, 인천공항에 6시에 집결하여, 입국수속을 마치고, 8시 비행기를 탔습니다. 후쿠오카에 도착하여, 강제징용의 역사를 온몸으로 전하고있는 배동록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여행 내내 저희와 함께 해주신 재일조선인 2세 선생님이셨는데, 연세가 70대의 고령이었지만, 늘 뛰어 다니실 만큼 정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날이 너무 더워서 건강이 무척 걱정되었습니다.
답사 첫번째 장소는 지쿠호 지역의 [무궁화당] 지쿠호 지역 탄광에서 강제징용으로 끌려와서 가혹한 노동에 목숨을 잃은 조선인들의 유골은 방치되었고,
방치된 무연고묘를 2000년 지쿠호지역의 재일동포와 뜻을 함께 하는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납골당입니다. 당시 이 납골당을 만들었던 분들이 함께 해주셔서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고향에 못가는 안타까움을 [고향의 봄] 노래를 합창했습니다.
두번째 장소는 덕향추모비! 1936년 아소탄광 화재로 25명의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고, 이후 노동자들의 동요를 막기위해 추모비를 세웠으나, 관리하지 않아 쓰러져가는 추모비를 1997년 뜻있는 일본인들과 동포들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세워졌습니다.
아소탄광은 전 총리였던 아소다로 집안이 운영하는 탄광으로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했다", "위안부결의는 조작이다"라는 망언들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인적 드문, 주택가 공터에 자리잡은 덕향추모비 찾는 사람이 없는지,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외로운 추모비 앞에서 향도 피우고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도 한잔 올렸습니다. 지금이라도 편히 쉬셨으면 하는 마음...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강제징용의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도 해봅니다.
세번째 장소는 보타야마를 지나, 타가와지역의 [한국인징용희생자위령비]로 갔습니다. 이곳은 미쓰이 타가와 탄광이 있던 곳으로 폐광한 후 석탄역사박물관을 만들었고, 가장 높은 곳에 한국인 강제징용자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생전에 가장 낮은 곳에서 힘겹게 살았지만, 죽어서만은 가장 높은 곳에 영혼을 쉬도록 한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석탄역사박물관은, 조선인 강제징용, 강제노동의 역사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 높은 곳에 세워진, 위령비가 당시의 아픔을 말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지쿠호지역은, 탄광이 밀집되어 있던 곳으로 큐슈 강제징용 역사의 아픔을 잘 보여줍니다. 그중에서,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휴가묘지에서 우리는 모두 할말을 잃었습니다.
보타이시(쓸모없는 돌)로 겨우 이곳이 묘지였다는 표식만 되어있는 조선인 무연고묘인 휴가묘지
집에서 기르던 개 고양이를 기억하는 묘비까지도 세우는 이곳에서! 조선인의 묘는 작은 돌들로 표시되어 단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아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만 그 위치가 전해져 오는 곳이었습니다. 묘역표시인지, 그냥 돌인지 구분하기도 힘든 휴가묘역에서 실수로 돌을 밟기라도 할까봐 조심조심 걸으며, 배동록 선생님께서는 강제노역의 상황을 [신세타령]이라는 곡조로 증언해주셨습니다.
강제노역의 처참함과 고달픔, 배고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신세타령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들려줬습니다. 듣는것만으로도 아픔이 느껴지고, 상상할 수 없는 고통에 모두가 숙연해졌습니다.
새벽부터 시작한 첫날의 평화여행은 휴가묘지를 마지막으로 마무리 하였습니다.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던 그런 더운날, 저 한복을 입고 잊혀질지 모르는 역사를 얼마나 알리고 다니셨을까요? 낡아진 배동록 선생님의 한복 바짓단을 보니, 더워도 덥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여행 두번째날은 나가사키로 이동하였습니다. 1945년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8월 9일! 조선인위령제는 나가사키 평화공원 '조선인위령비'앞에서 7시30분에 있어서 그 시간에 맞춰서 도착했습니다.
일본 남쪽의 가장 큰 항구도시 나가사키는 2차대전 당시 군수품, 선박, 무기등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도시로, 두번째 피폭도시입니다. 물론 이곳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노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1차 피폭이 되었고, 피폭된 이후 이곳에서 사고처리까지 하게 되어 2차 피폭까지 입게되었습니다. 일본은 원자폭탄의 유일한 피폭국이 일본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피폭된 많은 수의 조선인들도 있었습니다. 재일조선인 피폭자의 인권을 지원하는 시민단체, 그리고 피폭자들이 이른 시간부터 많이 모였습니다. 정작 한국인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계단 한켠에 자리잡고 반핵평화에 대한 기원 그리고 조선인 피폭자들을 추모하는 마음, 그들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손피켓에 담았습니다.
추모제 이후, 피폭도시 나가사키를 알기위한 필드워크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리구치 선생님과 함께 나가사키 평화공원, 폭심지와 주변, 우라카미 성당 등을 답사했습니다. 모리구치 선생님은 고등학교 교사출신으로 은퇴 후 일본의 전쟁에 대한 반성과 책임을 요구하는 일본시민모임에서 활동을 하고있는 자원활동가십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졌을때의 상황과 복구된 지금의 모습을 모리구치 선생님의 꼼꼼한 해설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나가사키 형무소가 있던 평화공원 주변을 돌아보며, 피폭당시 떨어져나간 우라카미 천주당의 석탑, 형무소의 돌담의 흔적, 반공호 등등 70년전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현장을 직접 둘어보았습니다.
자료가 가득 든 무거운 가방을 메고, 따가운 뙤약볓 속에서 나가사키의 고통과 아픔, 일본의 씻을 수 없는 전쟁의 책임을 이야기 하시는 모리구치 선생님 앞에서 모두가 숙연해졌습니다. 더욱이 70세가 넘으신 모리구치 선생님이 피폭자였다는 사실에 우리는 잠시 할말을 잃었습니다. 본인이 전쟁의 피해자이기때문에, 더욱 생생한 증언을 할 수 있고. 그렇기때문에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비판에 더욱 울림이 있었습니다.
다음 장소는 스미요시터널입니다. 아직도 터널 위로는 도로가 놓여있어 이곳에 이런 터널이 있었을까 상상하기 힘든 곳에 터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일본 비밀 터널공장으로 미쓰비시 병기 스미요시 터널공장이었습니다. 이곳 역시 조선인들의 강제 노역을 통해 침략전쟁의 병기를 만들던 곳입니다. 처음엔 시원한 바람이 나와서 좋아했는데, 이곳의 용도를 알고 나니 오히려 서늘해졌습니다.
나가사키를 둘러보며 느꼈던 것중 하나, 일본은 원폭도시를 통해 전쟁 피해자의 모습만 보여줍니다. 전쟁가해국으로써의 책임과 반성은 나가사키 역사관에서도, 또 평화의 공원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일본의 가해책임과 보상문제에 초점을 다룬 자료관이 있었습니다. 1995년 오카마사하루 목사의 뜻을 이어받아 만들어진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입니다.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에 의해 운영되는 이 기념관은 원폭의 참상을 초래한 원인이 극도의 잔학함을 만든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있다는 사실과 일본의 무책임한 태도를 알리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자료관입니다. 이곳에서 강제징용당시의 탄광 갱도의 모형, 당시의 피해자들의 참상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빡빡한 일정이 모두 이렇게 진지했던것만은 아닙니다. 개항도시인 나가사키의 데지마지역에서 항구도 걸어보고, 약간의 여유도 느끼며 하루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세번째 아침은 처음으로 호텔조식을 먹었습니다. 새벽비행기, 새벽출발 등으로 매번 간단하게 빵이나, 삼각김밥으로 아침을 해결했는데, 모처럼 호텔조식을 먹어보았습니다. (물론 처음이자 마지막!)
제대로 된 아침을 먹고 가야할 장소는 다카시마(高島) 입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과 전쟁포로들이 목숨을 걸고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곳이고, 군수품 생산과 수송등으로 재벌이 된 미쓰비시중공업이 있는 곳입니다. 다카시마는 하시마와 함께 이번 '메이지근대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 곳곳에 [근대문화유산 세계문화유산등재]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번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중 일부는 강제징용의 현장임에도, 이런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공간이 어떻게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훼리를 타고 도착하여 기무라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한국어를 공부하셨다는 기무라 선생님은 한국어로 해설을 해주셨는데, 이분도 교사출신으로 모리구치 선생님과 같은 자원활동가이십니다.
우리가 갈 장소는 나가사키에서 강제노동으로 돌아가신 조선인 무연고 묘지인 공양탑입니다. 가는길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물을 만나고 그 바로 옆에 방치된 수직갱도도 눈에 보였습니다. 또 이제는 관광상품이 되버린 강제노역의 지옥섬 쿤칸지마(군함도, 하지마)도 멀찍이서 바라보았습니다. (한수산씨의 [까마귀]라는 소설에 보면 이 쿤칸지마가 무대입니다.)
군칸지마는 1년전에 예약을 해도 입도가 쉽지 않다는 관광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에겐 아픔의 공간인데, 일본인들에겐 근대유산(?)의 공간이 되버렸습니다. 각자의 기억이 이렇게 다를수가 있을까요?
조선인 위령비가 있는 공양탑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는 않았습니다. 숲속으로 들어가 낫으로 길을 만들어가며 찾아간 공양묘 주변은 한동안 인적이 없었던 것 처럼 주변에 풀들이 가득했었습니다.
각자 갖고 있는 장비들을 이용해서 주변 묘역을 정리하고, 각자 갖고 있던 음식들을 조금씩 내어서 제물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먼곳에서라도 편히 쉬시라며 모두가 한마음으로 제를 올렸습니다. 일본의 오봉이 얼마 안남은 날이라, 마치 조상님들께 차례를 지내듯 모두가 절을 하고, 이제라도 편히 쉴 수 있기를, 돌아가신 분들의 평안을 기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시작한 [고향의 봄] 노래는 그곳에 있는 모든이의 어깨를 들썩거릴만큼 눈물지게 했습니다. 다카시마 공양묘를 나와 주변의 납골당과 다카시마 신사를 방문했습니다. 다카시마 신사의 위령비에는 어느순간 조선인의 이름이 빠졌다는 말씀을 들으니 죽어서도 차별받는게 너무 서러웠습니다. 다카시마를 나와 미쓰비시 조선소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이름없는 조선인들과 전쟁포로들이 목숨을 잃었을까요? 그리고 2차대전후 일본은 군수사업으로 재벌이 된 기업을 해체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미쓰비시는 주요산업을 갖고 있는 어마어마한 기업입니다. 조선소 앞의 아리랑 고개를 바라보면서 함께 해주셨던 기무라 선생님과 이별을 하였습니다.
어제의 모리구치선생님, 오카사마하루에서 만난 일본인들 그리고 기무라 선생님을 만나고 나니, 보통의 일본은 전쟁에 대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었으나, 이번 여행에서 만난 일본인들을 통해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해준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한일관계를 평화적으로 풀어가는데는 이런 일본의 시민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시민들의 힘이 중요하다는것도 다시한번 느꼈습니다.
이렇게 3일째의 답사는 마무리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가자 교류회를 가졌습니다. 여행의 기억 그리고 각자의 이야기가 더해져 진솔한 시간이었습니다. 의외로 우리 가까이에 강제징용의 피해자들이 많았다는것과 이 아픔의 역사가 과거가 아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또 각각 활동하는 공간은 다르더라도, 역사를 해설하는 자원활동가로써 한국에 돌아가서 이 아픈 역사를 많은 시민들에게 알리고, 잊지 않도록 해야 겠다는 이야기 등등 일본 평화여행을 통해 마음은 분노와 안타까움, 고마움으로 요동쳤지만, 적어도 평화가 왜 필요한지는 몸으로 눈으로 가슴으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8월 12일일 마지막날은 기타큐슈지역으로 갔습니다.
1901년 만들어진 야하타제철소, 뜨거운 용광로에 피땀을 흘렸을 조선인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경제의 큰 축으로 자리잡은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등등의 일본의 기업들 .. 그 누구도 당시 조선인의 노역에 대해선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최근 한국법원 판결에서 일본제철이 조선인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판결을 내리긴 했지만, 많은 일본기업은 65년 한일조약을 근거로 배상책임을 지려들지 않습니다. 65년 졸속으로 맺은 한일조약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강제징용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머물렀던 이곳에 학교가 만들어졌습니다. 후꾸오카 조선학교, 언덕배기 질척한 곳을 직접 일구어 만들었던 '우리학교'입니다. 일본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해 비싼 학비를 내야 하는 현실이지만, '우리학교'이기에 모두 감내하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관몬터널을 지나 혼슈에 있는 시모노세끼로 넘어갑니다. 복어그림이 크게 그려진 칸몬터널을 뚫을때 조선인들이 많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저 터널을 지나 일본에서 제일 먼저 조선학교가 만들어졌다는 시모노세끼 조선학교를 둘러보았습니다.
조선학교를 지나 만난 곳은 지금은 오오츠보라고 하는 똥굴마을입니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이곳에는 분뇨처리장, 화장터 등등 혐오시설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어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 모여살던 곳이었고, 그러다보니,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살던 곳이었습니다. 곳곳에 조선식 문패라던가 당시의 배수시설의 흔적을 만날수 있었습니다. 40년째 이곳에 거주하신다는 엄선생님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마지막 장소인 시모노세끼 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곳은 대륙침략의 발판이었던 관부연락선이 닿는 곳으로
조선과 일본,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연결시키는 곳이었습니다.
이 항은 많은 군수물자도 실어날랐지만, 많은 조선인들도 이곳으로 실어날랐습니다. 시모노세끼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제일먼저 도착하는 곳으로,
창고에 2~3일 감금되어 있다가 큐슈, 홋카이도 등으로 강제노동 현장으로 끌려가는 곳입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얼마나 배고팠을까요? 얼마나 그리웠을까요?
일본 강제징용이 시작되는 출발점에서 이 평화여행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시간은 흘렀고, 그 당시의 기억과 기록은 사라지고 있지만
우리들이 보고듣고느끼고 배웠던 것들은 다시 또렷해지고 있습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3박4일동안 함께 해주신 배동록 선생님과
오랜 작별 인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다시 관몬터널을 지나 후쿠오카 공항으로 갔습니다. 이제 서울로 갑니다. 내 소중한 가족있고, 내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서울로 갑니다.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음이 이리 큰 기쁨인줄 새삼 느낍니다. 그리고 지척에 가족을 두고도 못만났던 그때 그 사람들,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수 없었고, 죽으려 해도 죽음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 전쟁이 만들어낸 참혹한 현실이 70년 전 과거의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준 현실은 아직도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의 아베총리는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더 많고 사과도 여러차례했으니 이젠 전쟁을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하면서도
유사시 전쟁도 할수 있는 법안 통과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과거의 일본의 모습을 통해 일본의 잔혹함을 직접 당한 역사이기에 이런 일본의 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번 평화여행을 통해,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픈역사라도 기억하고 잊지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역사를 해설하는 자원활동가로서 이런 역할을 우리가 해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최근 몇년간의 평화여행중 가장 힘든 여정이었지만, 가장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여행이었습니다.
지난 5월 30일(토)~31일(일) 도성길라잡이가 정기답사를 다녀왔습니다. 매년 다섯번째주가 있는 달을 정해 1박2일로 다녀옵니다.
강화산성 일주와 고려산부터 해서 해미읍성과 개심사, 수원화성과 남한산성, 공주일대와 공산성 그리고 마곡사
도성길라잡이로서 역량강화도 하고, 또 멤버쉽도 돈독히 하는 도성길라잡이 정기답사!!
올해는 작년에 이어 백제역사와 문화의 상징인 부여를 다녀왔습니다.
4월에 사전답사를 다녀오고 그 다음날 뉴스에 백제문화권 (공주,부여,익산) 세계문화유산등재 확실이라는 기사를 읽고선, 아~ 도성길라잡이와 세계문화유산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구나하면서 2017년 서울 한양도성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겠다는 알 수 없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마지막 백제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부여의 역사와 문화가 어떤 점에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지 그 근거도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부여국립문화재연구소에 계시는 양숙자 학예사님을 모시고, 부여를 샅샅히 살펴보았습니다.
첫 장소는 국립부여박물관. 백제문화의 이동경로를 알수 있는 전시물들. 혼자가면 몰라서 그냥 지나치던 청동검과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저 기와일뿐인 백제유물이 학예사님의 설명을 들으니, 생생한 백제의 역사가 되고, 살아있는 유물이 되었습니다.
부여박물관의 감동은 역시 백제대향로입니다. 국사책에서 배운 세대와 못배운 세대로 나눌 만큼 최근에 발굴된 대향로 ! 보는 순간 절로 감탄이 나옵니다. 그리고 바로 박물관 바로 가까이에 있는 발굴지로 가서 기초석만 있는 모습만으로도 당시의 건축물을 상상해보았습니다. 이동하면서 보니, 파란천막이 씌여있는 곳들이 많았는데, 전부 발굴하는 현장이라고 합니다.
점심으로 연잎밥을 먹고 나니, 떨어진 당이 재충전되었습니다. 좋은 기분 갖고 능산리 고분군으로 갔습니다. 백제 금동대향로가 나왔던 곳이기도 하고, 부소산성의 외곽성인 나성이 연결되어 있는 능산리 고분군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고분군에 대한 설명도 이어집니다. 원래 백제의 무덤은 사진으로 보는것처럼 봉분이 저렇게 거대하지 않다며, 이는 복원하면서 보기좋게 신라의 형태를 따라하게 된 모습이라는 것과 백제의 무덤형식때문에 많은 도굴을 당하게 되었다는것과 함께 능을 지키는 능사의 모습 그리고 신분에 따른 무덤의 위치등등... 박물관에서 들을수 없는 현장감넘치는 백제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아..이런 지난번 사전답사 때 정림사지는 시간과 동선때문에 이번 답사에는 넣지 않았던 장소인데,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백제의 생활문화를 엿볼수 있고, 백제의 석탑 2기중 하나가 바로 이 정림사 5층석탑이라는 말씀에, 바로 정림사로 향했습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예사 석탑으로 안보입니다. 좀더 꼼꼼하게 보게 되고, 보다보니, 계측장치들도 눈에 보입니다. 한양도성에 요즘 많이 붙여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눈이 오거나 해가 질 무렵에 오면 더 멋지다고 하는데, 다음에 기회되면 다시 한번 찾고 싶은 공간이었습니다. 특히나 기와로 만들어진 기단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것은 석불좌상을 모셔놓은 그 시멘트 덧집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1970년대에 복원된 한양도성의 모습도 생각나고 그랬습니다.
오후 일정의 백미 부소산성으로 갑니다. 백제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장소이고, 도성길라잡이들에겐 포곡식 산성과 테뫼식산성을 만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사비백제의 주거형태와 한성백제의 주거형태를 비교해보고, 판축기술에 대한 강의도 듣고, 현재의 부소산성의 형태가 일제강점기때 이루어진 형태, 일본인들도 자신들 문화의 뿌리가 백제임을 인식하였고, 이 자리에 신궁을 지으려고 했던 사실도 놀랍습니다. 한양도성도 일제강점기때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는데 말이죠.
산성을 돌아 삼천궁녀의 전설이 내려오는 낙화암에도 가보고, 고란사에 가서 젊어지는 약수도 마시고, 산성에 있는 루에 올라 부여일대도 조망해보면서, 부소산성 일주라고 큰마음 먹고 왔는데, 생각보다 여유있게 걸어볼 수 있었습니다.
부소산성이 끝나는 지점에서 만난 관북리 유적. 부소산이 후원으로도 사용되었으니, 당연히 그 앞에는 왕궁이 자리했을 터, 왕국의 기단석과 흔적들, 그리고 당시의 주작대로로 추정되는 공간배치 등등. 기단석 하나에서 당시의 왕궁의 규모를 상상하고, 거리의 흔적에서 당시의 공간배치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저녁식사하는 장소에서 계속 전화가 옵니다. 도대체 언제 도착하느냐고...음식 다 식는다며 재촉전화를 3통 정도 받은 후에 끝난 첫날의 답사. 끊이지 않는 질문은 잠시 후 특강시간에 하기로 하고 해지는 백마강을 뒤로 하고 식사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저녁은 매년 늘 그렇듯 간단하게 산채 비빔밥을 먹고, 이어진 양숙자 선생님의 [우리가 만들어가는 백제왕도] 특강이 이어집니다. 백제문화권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과정에 부여의 유산에 대한 강의와 질의응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교류의 시간~!! 답사에 대한 소감도 듣고, 또 빠질수 없는 바베큐 파티 본 파티를 위해 마장동에서 30년동안 고기장사만 하신 조사장님께 직접 구매한 우주 최고의 육즙을 간직한 돼지목살을 참나무에 구워 먹는...햐~~생각만해도 군침 돕니다. 거기에 재간둥이 최원명 선생님이 만들어주신 웃음 넘쳐나는 퀴즈와 이야기 시간 맛있는 음식과 좋은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의 열고,오늘의 이 시간을 좋은 추억으로 만들어가는 시간입니다.
둘째날은 조금 여유있는 일정입니다. 아침에는 상콤하게 요가와 접시돌리기로 몸도 풀어주고 궁남지로 갑니다. 선화공주와 호동왕자의 전설이 전해지는 궁남지에 가서 연꽃을 보며 우주만물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셀카봉 들고 추억만들기도 해보았습니다.
한결 첫날보다는 여유있는 표정들입니다. 그리고 들뜬 마음도 진정시킬겸 무량사도 이동하였습니다. 백제가람의 특징인 일탑일당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고,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와 영정을 직접 확인해보면서 각자 갖고 있는 지식을 서로 나누어주는, 참여와 나눔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무량사를 마치고 유홍준교수가 늘 이곳에 오면 방문한다는 삼호식당에서 산네들네 물씬 풍기는 산채비빔밥으로 점심까지 먹고, 서울로 출발~~
이렇게 1박2일의 도성길라잡이 2015 정기답사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三國史記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백제 온조왕 15년에 지은 왕궁 건출물에 대한 평으로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하여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 하였습니다.
부여에서 만난 문화유산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백제의 미학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가장 기본이 되는 OUV (탁월한 보편성) 아닐까 합니다.
부여를 보면서 높은 건물이 없는 주변경관또한 백제의 문화를 간직할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부여를 톺아보고 나니 한양도성이 많이 생각났습니다. 한양도성의 관리보존과 도성길라잡이로서의 역할 등등 많은 숙제도 안고 온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도성길라잡이 선생님들의 후기도 잠깐 옮겨봅니다. - 도성길라잡이 7기 유나래 선생님 후기 중 일부
토요일의 알찬 답사 덕분에 2박 3일 처럼 느껴졌던 1박 2일 부여 답사였습니다. 답사의 첫걸음. 부여 톺아보기 에서도 강조한 백제 금동 대향로가 있는 부여 박물관에서 시작했습니다. 항상 보아오던 박물관 초입의 다른 고대 유물과 비슷해 보여 슥 지나칠만도 한데, 선생님의 안내와 같이 걸으니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능산리 고분에서는 많은 유물이 있는 박물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언제 발굴이 되었고, 지금의 묘가 왜 이러한 크기가 되었는지 능산리 고분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데, 한편으로는 수학여행으로 능에 오면 아무 설명 없이 차에서 내려 적당히 보기만 했던 그 때, 이러한 안내가 있었더라면 무덤 있는 넓디 넓은 잔디밭이 아니라 조금 더 다르게 기억했을까 싶었습니다. 정림사지도 부소산성도 유유자적했던 궁남지도 무량사도 다시 볼 기회였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고, 개인적으로 이번 답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마지막 PPT 설명이었습니다. 오늘 걸어왔던 유적을 되새겨 보기도 하고, 가지 못한 다른 백제 유적을 살펴보는데 왜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고 하는지 자세히 보고 이야기를 들으니 알 것 같았습니다.
이제 한성백제의 흔적도, 웅진백제의 흔적도, 사비백제의 흔적도 다 찾아보았으니 다음에는 익산에 한 번 가봐야지 하며 다음 답사를 생각하게 된 부여 답사였습니다.
-도성길라잡이 7기 박형록 선생님 후기 중 일부 이번 답사는 전문가의 해설과 함께 해서 더 유익하고 즐거웠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실감한 답사였습니다. 박물관에서도 설명을 들으면서 보니 정말 문화재들이 새롭게 다가오더군요. 청동거울은 그냥 보면 어떻게 얼굴이 보일까 싶지만 물을 묻히면 얼굴이 잘 보인다고 합니다. 청동검은 짧은 검 가운에 길게 홈이 파여 있는데 이렇게 해야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고 합니다. 피가 솟구쳐나와 그 홈으로 흘러내린다고 하네요...흐미... 수막새와 암막새 설명도 듣고...보통은 수막새이고 암막새는 여기서만 발견되었다고 했던가요? 그리고 부여를 먹여 살리고 있는 느낌이 드는 금동대향로.. 그리고 백제의 무덤은 산비탈에 많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앞쪽으로만 무덤을 크게 만들면 되니 훨씬 힘이 덜 들었겠지요. 자연환경을 알차게(?) 이용해 수고로움을 던 백제인들의 현명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본 무덤의 크기는 가짜라고 합니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
알 수 없다고 하더군요. 신라의 무덤을 보고 대충 이 정도지 않았을까? 하고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하더군요...일본인들이-.- 그리고 백제 무덤은 문만 열면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일본인들이 참 알차게(?) 도굴을 해갔다고 합니다... 소중한 문화재는 다 어디에 있을까요?-_- 그리고 정림사지 5층석탑을 보러 갔을 때 출입구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원래는 정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주차장을 만드는 바람에 옆 문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이런 일도 생깁니다... 정림사지는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되어 있습니다. 금당 안에는 은지 쌤 동생과 똑같이 생겼다는 불상이 있습니다. 정림사지박물관도 꽤 볼 만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거겠죠?^^ 그리고 부소산성... 여기는 옛 유물이 널려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가져가도 된다고 하시더군요. 아래를 보고 걸어가다 보면 여기 저기서 보인다고. 정말로 여러 선생님들께서 마구마구 발견하셨습니다...그저 신기할 뿐이었지요.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좋은 것은 알아가지고...-.-) 그런데 이곳에 신사를 지으려고 했다는군요. 그래서 땅을 파서 그 흙은 저 멀리... 그런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행스럽게도 신사는 세워지지 않았고 부소산성은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파낸 흙이 부소산성 밖으로 나가게 되면서 땅을 이루었고 그 위에 건물이 세워졌기 때문에 어떤 유적지는 꽤 많이 파야 유적지의 흔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낙화암은 3천 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데 해설자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보시면 알겠지만 거기에 어떻게 3천 명이 떨어졌겠어요. 아마 나중에 떨어진 궁녀는 다 살았을 거예요. 사람 위로 떨어져서" 그래서! 확인하러 갔습니다....여기에 3천 명이 떨어져 죽기는 힘들겠죠? 그런데 우리 은지 쌤은 말합니다. "3천 명이 떨어져 죽을 수 있지 않을까요?" 흐음...은지 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고란사로 향합니다. 고란사에 있는 물을 마시면 젋어진다나요? 신윤아 선생님이 묻습니다. "선생님은 10년 전으로 돌아가면 뭐하고 싶으세요?" 제가 대답합니다. "제가 왜 10년 전으로 돌아갑니까? 어떻게 지나온 10년인데... 저는 지금이 가장 좋습니다 ㅋㅋㅋㅋㅋ" 이렇게 여기저기 다 보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온 곳이 왕궁터. 학예사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그런 터로 추정이 된다...이 정도셨습니다. 위치를 보면 과연 그런 것도 같습니다. 앞으로 가면 정림사지가 있고 더 앞으로 가면 궁남지가 있습니다. 일직선으로 쭉 늘어서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왕궁 터 앞에 건물들이 있는데 분명히 그 건물들 아래에 뭔가가 있을 거라고 합니다.. 제 생각에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건물들은 교회와 모텔이었던 것 같은데(제 기억이 맞는지-_-)...건물 철거가 쉬워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옛 부여박물관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쓰이고 있는데 김수근 건축가가 상까지 받은 건물이라고 하는군요.. 그런데 건물 모습이 일본 사무라이가 쓰는 투구(?) 같습니다. 철거해야 하는 게 맞겠죠?? 저녁에는 해설자 선생님의 프레젠이션까지 보고 질문도 이어집니다. 프레젠테이션 하기도 전부터 이것저것 질문을 해댔습니다. 선생님이 많이 피곤하셨을 거예요...-.- 제가 물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한국에서 문화가 전파된 것을 인정하나요?" 선생님이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럼요...인정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뭐 아닐지 모르겠지만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학자들이 이곳에 옵니다." 역시...그렇군요... 그리고 또 묻습니다. "부여 자체가 문화유적지으로 된 것에 대해 주민들의 불만은 없나요?" 선생님이 대답해 주십니다. "당연히 있지요...이것저것 제약이 많으니까요" 이 또한 역시...그렇군요... 그렇게 질의응답까지 마치고 답사도 거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다음 날은 궁남지로 향했는데 연꽃이 여기저기 보였습니다. 여름이 되면 훨씬 더 많은 꽃들이 필 것이고 그러면 정말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하겠지요?^^ 그리고 무량사에서는...아, 어떤 보살님께서 저희를 부르시더니 사과와 수박을 주셨습니다. "보살님, 감사합니다~성불하세요~~~" 그리고 저희는 마지막으로 무량사 앞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유홍준 교수가 추천했다는 그 맛집! 맛은! 정말 좋았습니다 ㅋㅋㅋ 맛있었어요~ 그곳에서는 표고버섯도토리묵(?)도 있었는데 정말 맛있었어요~이거 사오신 선생님들도 계셨는데 많이 사신 분께는 쥔장이 선물로 막걸리도 주셨다는 ㅋㅋㅋㅋㅋ 쌤들이 여기서 폭풍 쇼핑을 하신 듯이요 ㅋㅋㅋ 우미정 쌤에게 물었습니다 "쌤, 식당 쥔장에게 커미션 얼마나 받으셨어요?ㅋㅋㅋㅋㅋ" -도성길라잡이 7기 신윤아 선생님 후기 일부 -
설레는 마음으로 선생님들과 함께한 부여답사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네요. 일박이일동안의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이 날아가기 전에 속닥속닥
남겨봅니다??
1)국립부여박물관과 금동대향로
: 부여에 도착해서 향한 곳은 국립부여박물관이었습니다. 드디어 "금동대향로"의
실물을 마침내 보게되었습니다.
우아하면서 아름다운 백제인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한눈에 보여준 감동적인 문화재였죠.
2)정림사지
오층석탑
:우리가 하마터면 지나칠뻔 한, 유홍준 교수님께서 극찬을 하셨다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의 탑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문화재였습니다.
석탑 뒤의 불상집(?)이 NG였지만요.
3)부소산성 일대
:한양도성을 알게 된 후 변화가 있다면 그동안 지나쳤던 우리 주변에
있던 "성"에 관심이 생겼다는거죠.
무엇을 말하던지 가장 끝! 가장 위!! 마지막이 어울리는 그곳 고성
민간인의 숫자보다 군인이 더 많다고 하는 원통, 양구, 화천...
부대와 민간의 모습이 낯설지 않게, 인적이 드문 동네들.
분단의 상처가 일상을 지배해버린 모습이 새삼 놀랍습니다.
부산에서부터 이어져오는, 7번 국도를 달려서 민통선 가장 북쪽 끝
저 멀리, 금강산의 모습이 아련하게 들어옵니다.
군사분계선지역이라, 바다도 철조망에 갇혀버렸고
동해북부선과 부산에서 온성까지 잇는 7번국도도 멈췄습니다.
남과북의 연결과 소통이 끊어진 자리가 아프게 다가옵니다.
메르스로 끊어졌던 사람들의 온기로 오랜만에 북적이는 통일전망대입니다.
DMZ 박물관
DMZ, 비무장지대인데, 한반도에서 가장 무장한채 대결을 벌이는 곳
서쪽에서 동쪽까지 군사분계선이 그어져, 비무장지대가 형성된 지역을
"전쟁의 역사" 뽐내며 다양한 자료와 함께 전시해놓았습니다.
이곳은, 김일성 별장이라고는 하지만 크게 상관없어 보이는 '화진포의 성'입니다.
바다는 어느쪽으로도 흘러갈 수 있는데, 이곳의 바다는 철조망에 갇혀있었습니다.
이곳이 어디일까요? 지금 3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평화의댐!
어릴적, 강제(?) 모금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게 진정 댐의 모습일까요? 댐 맞나요?? 모두들 뜨악하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현장입니다.
"불신과 낭비를 상징하는 사상 최대의 기념비적 공사."
북한이 추진하던 금강산댐의 위협을 과대포장해
연일, 서울시내가 물바다가 되는 공포를 조장하고
시국안정과 국면전환을 위한 대국민사기극!
정권안보의 수단이 된 대규모 토목공사
그때나 지금이나 뭐가 달라졌을까요?!!
정부는 물론이고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학자, 방송신문 등 언론까지
총동원되어 거짓과 조작으로 만들어진 평화의댐.
남북대립과 반공을 정치적으로 악용한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지 바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세계 각지에서 보내온 탄피를 가지고 만든 평화의 종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걸었던 고성, 화진포, 양구, 화천에 이르기까지
분단의 최전선 지역에서 '분산의 일상'을 느끼고
다시한번 분단에 균열을 내고 평화를 생각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가졌습니다.
노란 종이에, 우리들 각자의 평화를 기원하는 리본을 만들고 달았습니다.
평화의댐을 구경하러와서, 한편으론 분노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분단의 고통과 아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도록
깨어있는 시민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오늘 한가지 꿈을 가지고 갑니다.
경의선 도라산역
동해북부선 제진역
우리나라에 딱 두개있는 국제선열차 기차역입니다.
북한을 통해 중국까지, 러시아까지 연결되는 "유라시아적 상상력"
대륙으로 연결되는 기차! 평화와 통일의 꿈을 실어나르는 기차!
참가자들의 평화기원 리본은 "동북아열차"의 꿈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서울KYC 근현대사 아카데미 답사에 함께 해주신 평화통일 전문강사 이영동 선생님 고맙습니다.
7월 25일 토요일, 평화와 인권의 관점으로 역사적 현장을 해설하는 평화길라잡이의 남영동 대공분실 시민안내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바뀌었지만, 국가라는 이름 아래 무자비한 폭력이 이루어졌던, 아픈 과거의 기억이 남아있는 장소입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이,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사망한 곳이기도 합니다.
7월 시민 안내에는 총 21분이 오셔서 안내를 들었습니다.
우선 건물에 들어가, 80년대 사회상을 다룬 영상을 잠시 보았습니다. 80년대를 직접 경험하셨던 분들도, 교과서로만 민주화 운동을 접했던 젊은 분들도 주의깊게 영상을 시청했습니다.
영상을 본 뒤에는 뒷문으로 이동했는데요,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뒷문으로 들어가면 5층으로 곧장 연결되는 나선형 계단이 나타납니다. 얼마나 올라가는지 자신도 모르게, 빙글빙글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5층에 도착합니다. 엘리베이터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직접 계단을 걸어 올라왔습니다.
5층은 박종철 군과 김근태 전 의원을 비롯, 무수한 사람들이 조사를 받았던 공간입니다. 박종철 군이 고문을 받았던 509호는 보존이 되어 있습니다.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가구,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좁게 만들어진 창문, 그리고 욕조까지. 좁은 공간이라 모두가 한번에 들어갈 수는 없어, 차례차례 들어가 살펴보았습니다.
김근태 전 의원이 고문을 당했던 515호 내부는 보존이 되어 있지 않고, 공간만 남아있습니다. 이곳은 509호보다 넓었는데요, 더 체계적이고 복합적인 고문을 했던 공간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안내를 통해 이곳에서 이루어졌던 고문에 대한 설명도 듣고, 고문 이후의 후유증이 또한 얼마나 힘든 고통인지도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설명이 끝난 뒤에는 박종철 기념 전시실이 있는 4층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에는 80년대 사회상과 박종철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과정을 보여주는 문서,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박종철 군의 사진과 그가 남긴 책, 옷가지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전시실 관람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왔습니다. 1층에는, 지금 변화한 모습의 인권센터를 소개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변한 것일까요? 양천 경찰서 고문사건,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등 조사과정에서의 폭력은 과거의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1층에서는 하나 더 생각할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 건물 입구에는 '주춧돌을 정하다'는 뜻의 '정초'라는 글씨가 있습니다. 이는 일제 시대 때 판검사를 지내고, 이후 서울고등지법 지검장을 거쳐 검찰총장, 내무부 장관까지 올랐던 김치열의 흔적입니다. 그의 경력 뒤에는 김대중 납치사건, 인혁당 사건 등 국가 권력의 폭력이 이어집니다.
또한 이 건물을 치밀하게 설계한 김수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유센터, 올림픽주경기장 등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음에도, 이 건물에는 밝지 못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느낍니다.
하지만 어두운 시절에도, 박종철의 시신을 보고 물고문을 알아채서 최대한 이를 알리려고 한 의사, 박종철 사건을 외부에 알리려는 과정에서 도움을 준 교도관 등 체제에 순응하지만은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역할과 책임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닐까 라는 안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한 가지 더 특기할 만한 사항은 대공분실 내부에서 안내를 들을 때도 끊임없이 들리는 남영역의 안내 방송이었습니다. 실제로 대공분실 건물은 남영역 플랫폼에서도 한눈에 보이는 건물이었는데요. 우리가 일상 속에서 평범하게 지나치는 것들 중에서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어쩌면 절대 평범하지 않은, 어쩌면 아연실색할 만큼 폭력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가 오고, 다소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오신 시민 분들 모두 내내 진지한 표정으로 대공분실 현장을 보고, 안내를 들었습니다. 지인을 따라 오신 분, 메일을 보고 오신 분, 집 근처여서 와보신 분 등 오신 이유는 각자 달랐지만, 인권과 민주주의를 한번 더 생각해보고, 현재 우리 사회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 안내였습니다.
다음 안내에도 많은 시민 분들이 함께 해서, 가슴 아픈, 그러나 잊지 않아야 할 현장을 함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정된 8월, 9월 안내도 많이 신청해주세요!
7월 근현대사 아카데미 실내강의는 "남북관계의 현실과 대안"이라는 주제로 코리아연구원 김창수 원장님과 함께했습니다.
"통일"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마음이 생기시나요? 지금 통일이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이번 시간을 통해 수강생들의 가슴을 뛰게 해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강의는 시작되었습니다.
본격적인 강의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통일은 왜 필요할까요? 통일이 필요한 이유는 다섯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한국 경제의 신성장동력 창출을 위해, 전쟁 위협 제거와 평화 정착을 위해,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과 북한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이전에는 과반수가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지만 지금은 많이 줄었고, '전쟁 위협 제거'와 같은 응답이 늘었습니다.
사실 현재는 통일 운동이 많이 어려운 사정입니다. 정치적으로 남북관계는 멈춘지 오래되었고, 남북 화해와 협력를 위한 민간교류도 거의 없습니다.
군부독재는 공안정국을 만들어 유지되었고, 반공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를 지배했기때문에
"통일"은 거의 금기시되었습니다.
통일 운동은 4.19혁명 이후 그리고 6월 항쟁 이후 민주화된 공간이 만들어지고나서야 활발해졌습니다.
지금을 어떤 모습일까요? 김대중, 노무현 시절의 두차례 남북정상회담 이후,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 화해협력의 상징이었던 금강산과 개성 관광은 닫혔고, 개성공단은 멈췄습니다. 지금도 남북한의 정치적 협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사회는 '종북몰이'가 유행이 되었고, 이해할 수 없는 북한의 행태는 상식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로인해 북한에 대한 피로감이 높아졌고, 통일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니, "통일"에 대한 공감대는 더욱 멀어지고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통일담론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말만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 한국의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서, 북한을 통해 중국, 러시아와 대륙으로 연결되면 새로운 성장동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측면으로 본다면 이는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통일은 과정이기 때문에, 준비와 실행이 필요합니다.
우선 북한과의 관계가 개선되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은 안보와 경제, 즉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져야 안보와 경제 사이에서 눈치를 보지 않고, 동아시아 질서 재편에 우리가 주도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중국을 만들기 위해 2013년 중국 시진핑 주석이 발표한 일대일로 구상처럼, 한국판 일대일로 구상이 필요합니다. 환황해권, 환동해권을 형성해 남북한과 중국, 러시아를 연결하는 아시아 물류, 에너지 공동체를 이룰 것을 제안합니다. 북한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로 가는 철도가 연결되면 물류비용이 절감되고, 러시아의 천연가스가 북한을 통해 들어온다면 에너지 비용을 크게 절약할 수 있습니다.
북한을 통해 대륙과 연결된다면 일제강점기 손기정, 나혜석이 그랬듯, 기차를 타고 유럽에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기차를 타고 유럽에 간다면, 그들의 상상력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화려가 수사를 가득담은 비전은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결국 그것을 어떻게 만들고 실현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지금 정부는 단지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남북을 빌미로 동북아시아에서 표출되는 현재 상황에서,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에서 벗어나, 유라시아, 동아시아라는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우선 동아시아 경제 공동체를 이룬다는, 경제를 통한 공감대와 협력을 모으고, 거기에서 반전과 평화의 가치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얼마전 전경련은 남북경제교류 신5대 원칙을 발표했습니다. 중국의 주요 2개국(G2) 부상, 북·중·러 접경지역 개발, 북한의 시장화 흐름 등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남북 경제협력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방안인 것입니다.
남북경제협력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높아진다면, 남북간의 불필요한 군사적.정치적 긴장을 낮추고 반전평화의 환경을 만드는 것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반도 평화가 이루어진다면, 2045년 광복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이 세계 5강 국가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권에 관계없이 지속될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토론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 꿈과 비전을 가지고 문제점 또한 비판할 수 있는 열린 논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열린 토론이 풍성해질때, 통일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펼쳐질때, 사람들과 통일을 이야기하면 "다시" 가슴이 뛰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김창수 원장님의 강의를 통해,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좀더 넓은 범위에서 한반도를 바라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한 언젠가 기차를 타고 육로를 따라 유럽 여행을 가게 될 날을 상상해보게 됩니다.
열정적으로 강의해주신 김창수 원장님과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8월 근현대사 아카데미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등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치를 잃는 수많은 표, 국민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대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하는 정당까지.
유권자의 의사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현행 선거제도를 바꾸기 위해, 청년, 정치인, 학자, 시민사회활동가 12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민주행동, 비례대표제포럼,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가 주최한 제9회 대안담론포럼이 7월 13일 홍대 카톨릭청년회관에서 열렸습니다. 이번 포럼은 "누가 어떻게 선거제도 개혁을 이룰 것인가? '정치기업가'론"이라는 주제로 이루어졌습니다.
함세웅 신부, 최병모 변호사의 인사말과 김상곤, 심상정, 천정배 의원의 연대발언 이후 최태욱 비례대표제포럼 운영위원장이 '정치기업가'라는 개념을 가지고 발제를 진행했는데요, 정치기업가란 시민들에게 정책 정보를 알리고 여론을 모아 시민들의 선호를 담은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정치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서 정치인들이 정치기업가로 나서야 하며 시민사회단체와 학자들이 그 주위에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에는 여러 시민사회단체에서 선거제도개혁 추진 전략을 이야기했습니다. KYC 하준태 대표도 이 자리에서 청년 정치기업가들이 모이는 '총선청년연대'를 제안했습니다.
발제와 지정토론 이후, 모두가 참여하는 원탁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12개의 테이블마다 청년들이 절반 이상의 자리를 차지했고, 정치인, 학자, 시민사회활동가들이 함께 자리를 채워 열띤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토론 주제는 "어떻게 선거제도 개혁 여론을 조성해나갈 것인가?"였습니다. 선거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선거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개혁 움직임에 동조할 수 있어야겠지요. 각 테이블에서 30분 가량의 토론을 통해 나온 다양한 의견들은, 새로운 콘텐츠 개발, SNS 활용, 언론의 협력을 구하는 것, 정치인 압박 등으로 정리될 수 있었습니다.
이어진 두 번째 토론 주제는 "어떻게 선거제도 개혁을 실현시킬 것인가?"였는데요, 여론 조성과 더불어 구체적인 방안이 나와야 실제로 바꿔갈 수 있기에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청원입법운동을 벌인다, 정개특위를 생중계한다, 대선과 총선 때 정치인을 압박해 공약화 시킨다 등의 의견이 나왔습니다.
1시간 이상 지속된 토론 후, 120여 명이 앉아 있는 각각의 테이블에서 나온 의견은 정리되어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앞으로의 해야 할 일을 제시하는 하나의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토론 후, 열기는 이어가고 흥은 더한 '길가는 밴드'의 공연이 있었고 원탁토론의 결과를 반영해서 완성된, '선거제도 개혁 연대'를 요구하는 공동선언문 발표를 끝으로 포럼은 막을 내렸습니다.
어느덧 예정 시간을 훌쩍 넘긴 밤이었지만 많은 분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함께했습니다. 우리 선거제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고, 청년들과 정치인, 학자, 시민사회활동가 등 선거제도 개혁과 관련해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분들을 직접 만나 정책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눌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자리였습니다.
내년 총선과 이후 대선까지, 선거제도 개혁은 지속적인 의제가 될 것입니다. 선거제도가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지속적인 관심과 시선 부탁드립니다.
최저임금 법정시한인 6월 29일을 넘긴, 7월인 지금까지도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동결을 주장했던 경영계는 제9차 전원회의에서 30원 인상을 제시했습니다. 30원이라니요. 3,000원도 아닌, 하다못해 300원도 아닌 30원이라니.
7월 6일 제10차 전원회의에서는 "방학에 한두 달 일하는 학생들은 생계가 목적이 아니다. 핸드폰을 바꾸거나 여행을 가고 싶어서 일을 하는 것이다. 부가적 용돈벌이 초단기간 노동자에게까지 최저임금이 똑같이 적용되니 유연하게 결정하기 어렵다. 획일적인 전국단일 최저임금이 문제다." 라고 한 경영계 위원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방학에 일하는 학생들이 정말 생계목적이 없는걸까요? 방학때 일해서 다음학기 등록금을 마련하려는 학생이 대다수일것 같은데... 그리고 핸드폰을 바꾸거나 여행을 가고 싶어서 일을 하면 안되는건가요? 이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무조건 5,580원이라는 최저시급을 받아야하는걸까요?
고등학생, 대학생, 취업을 준비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최저시급에 얽매여,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임금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최저시급을 단순히 아르바이트에만 한정시키고, 이를 자영업자들의 어려움과 연결시켜 최저임금 인상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경영계의 태도에 화가 납니다.
경영계는 7월 7일 제11차 전원회의에서는 1차 수정안(30원 인상)에서 35원 인상한 5,645원을 제시했습니다. 그 이후 회의에서는 5,715원을 제시하였습니다.
노동계는 10,000원->8,400원->8,200원->8,100원을 제시하였고 공익위원측이 심의촉진 구간으로 5,940원(6.5%) ~ 6,120원(9.7%) 을 발표하여 2016년 적용 최저임금 심의는 이 구간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최저임금위원회에서도 치열한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밖에서도 최저임금 인상을 외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이어졌습니다.
7월 6일, 점심시간인 12시부터 1시 사이에 보신각에서 최저임금 1만원 인상 촉구 문화제가 진행되었습니다.
최저임금에 대한 발언과 공연, 서명, 참여 프로그램, 퍼포먼스 등으로 구성되어 길을 지나는 시민들에게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관심과 공감을 촉구했습니다.
현재 30원 인상을 제시한 경영계에게 30원은 편의점에서 비닐봉투 한장을 살 수 있는 돈이라며 현재 대중교통 요금도 몇백원이 오르는데 최저임금 30원 인상은 말이 안된다는 이야기를 한 참가자도 있었습니다.
30원, 하루 8시간을 일하면 240원을 더 받는건데 이걸로 대체 뭘하라는걸까요?
한쪽에서는 최저임금이 1만원이 되면 하고 싶은걸 적었는데 부모님과의 여행, 공연 보기, 친구 밥 사기, 자랑하기, 맛있는것 먹기, 저축, 여자친구와 결혼, 연애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청년들이 최저임금을 받고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꿈을 꿀 수 있고, 저축을 통해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만 대한민국의 미래도 밝지 않을까요?
현재 최저시급을 받고 있는 청년, 비정규직,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이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꿈꿀 수 있을, 정말 현실적인 최저시급이 정해질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87년 6월 항쟁을 기억하기 위해 지난 6월13일 [이한열 기념관]과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현장인[남영동 대공분실]을 다녀왔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안내는 평화길라잡이의 새로운 활동 장소로 이날 첫 시범안내가 있었던 역사적인 날입니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총칼로 진압한 전두환은 간접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87년은 전두환 이후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해 1월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독재타도, 호헌철폐 그리고 대통령직선제를 외치는 시위가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납니다.
그해 6월 대학생이한열은 경찰이 쏜 SY-44 직격 최루탄을 뒷머리에 맞고 쓰러집니다. 이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내일 시청가야 하는데..."였다고 합니다. 만화동아리에서 활동을 했고, "혁이"라고도 불리었던 젊은 대학생은 그렇게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후 27일간 중환자실에서 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된 87년 민주화 열기는 이한열 최루탄 피격 및 치사 사건을 정점으로 대통령 직선제와 국민투표로 지금의 헌법으로 개정이 됩니다.
87년 6월 항쟁을 기억하며,첫번째 장소로 신촌에 있는 이한열 기념관을 방문하였습니다.
계단을 오르자 모자이크 속 청년은 민주주의라는 나무를 가꾸고 그 건너편에 그가 좋아했던 "시"가그 청년 가슴에 맺힙니다. 그리고 입구에 붙어있는 많은 사람들의 애도의 글들...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이경란 관장님의 안내로 2층 전시실로 들어섰습니다. 2013년에도 서울KYC민주올레를 통해 방문했었는데, 그때와 다른 전시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6월9일 부터 9월25일까지 한시적으로 기존의 전시물을 잠시 교체하여, [운동화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기획전시가 진행중이었습니다. 이 운동화는 87년 당시 이한열이 쓰러지면서 떨어뜨린 '운동화'를 최대한 당시의 상태에 가깝게 복원하여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복원된 운동화는 3층 전시장에 보존처리된 의복, 가방등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고, 2층 전시장에는 복원과정과 과정에서의 어려움들을 이경란 관장님을 통해 알수 있었습니다.
이한열이 남긴 한 짝의 운동화는 오른발입니다. 전시회에는 이한열이 남긴 오른발에 자신의 왼발 운동화를 나란히 놓은 코너가 마련되어 이었습니다. 이한열의 어머니, 동아리 선배, 쓰러지는 이한열을 부축했던 친구, 그리고 현재 이한열장학금을 받는 학생 등 각자의 왼발에는 자신의 소감이 적혀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6월이 왔다. 운명처럼 마주칠 그 날, 나는 무슨 생각을 할까? 친구, 미안하다. 나는 올해에는 더 밝고, 더 즐거운 얘기를 우리의 청년들과 해보려 한다." -경제학과 동기 우석훈
이한열 기념관을 나오면서 지금 우리는, 87년 아스팔트위의 청년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숨으로 일궈낸 그 민주주의가 지난 8년간 꼼짝도 못하고 있는 현실이 무겁게만 느껴졌습니다.
오전 이한열 기념관을 나와 간단한 점심을 먹고 다시 남영동대공분실로 이동하였습니다.
남영동대공분실은 1976년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만들어졌습니다. 1985년 김근태의원의 고문사건으로 세계언론에 실체가 알려지게 되었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및 은폐사건으로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곳입니다. 1991년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경찰청 보안분실로 변경된 후 2005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지금의 모습으로 갖추게 되었습니다.
본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설계된 건축물입니다. 건축주가 어떤 용도로 사용할지를 정확히 파악한 영리한 건축가의 영민한 작품(?)입니다. 외관은 멋진 일반 건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외부로 들어가면 건물의 용도가 무엇인지 잘 알려줍니다. 지금은 하얀 대문으로 바뀌었지만, 얼마전까지 두꺼운 철제 대문으로 소리만으로도 공포감을 주는 대문 몇층으로 가는지 알수없는 원형계단, 빛만 들어오도록 하여 조사자의 자살을 막는 좁은창문 등등 이 건물이 어떤 용도로 사용될 것인지를 설계자는 충분히 이해하고 설계한 것임을 곳곳에서 알수 있었습니다.
오늘 남영동 대공분실은 서울KYC에게는 특별한 날이기도 합니다. . 그동안 평화길라잡이 선생님들이 준비한 [남영동 대공분실 시민안내]를 인권과 민주주의의 관점으로 시민들에게 (물론 우리 회원분들이시만요) 소개하는 날이기때문입니다. 이날의 안내는 안은정 선생님이 해주셨습니다.
원형계단을 따라 5층 조사실로 가보았습니다. 5층 조사실 509 호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던 장소이고. 이곳은 현재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당시의 고문치사 사건후 은폐과정을 소개하였고, 같은층 515호에서는 김근태의원의 고문과정을 통해 고문은 고문피해자를 파괴하여 반대세력에게 국가에 저항하지 말라는 분명한 메세지를 학습하는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고문피해자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까지 힘들게 만들며, 고문피해자가 고문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그때 가졌던 트라우마로 여전히 일상생활을 하는것이 어렵게 된다는 것을 해설을 통해 알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최근까지 이 공간이 조사장소로 사용이 되었고, 작가 조정래 선생도 이곳에서 조사를 받았었다고 합니다.
5층에서 4층으로 내려오면 [박종철 기념전시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아픔에 걱정을 했고,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한 대학생 박종철의 평범한 일상과 고문치사와 은폐조작 그리고 이사실이 세상밖으로 나오게 된 과정을 이곳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군사정권시대에는 월북자, 납북어부, 재일교포 등 사회적 약사들이 고문으로 간첩이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서울시 공무원간첩조작사건처럼 탈북자가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고문피해에 대한 체계적인 실태조가나 치유대책, 고문방지법, 고문피해자구제지원법안등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인재근 의원이 발의한 '고문방지와 고문피해자 보상 구제법안'은 국회에 계류중인 상태입니다. 헌법12조 2항에는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라고 나옵니다. 이 법은 박정희 정권에 재정되었던 부분이라고 하는데, 참 아이러니한 현실입니다. 자유로운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과 책임으로 사회를 운영하는것이 민주주의라고 합니다. 고문은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간성을 파괴하여 공동체를 위험 빠뜨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헌법 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렇게 훌륭한 헌법을 가진 우수한(?) 대한민국입니다.
이 헌법에 나온대로 우리의 기본권이 누군가에 의해 침해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잘 만들어 가는것이
살아있는 우리가 해야할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을 기억하며 서울KYC 회원들과 함께 했던 [이한열 기념관]과 [남영동 대공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될 평화길라잡이의 [남영동 대공분실]시민안내에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근현대사 아카데미 6월 현장답사는 이시우 선생님과 함께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던 고양시 금정굴을 시작으로 장준하선생의 묘역이 있는 통일공원을 지나 오두산전망대, 임진각을 다녀왔습니다. 전쟁과 분단의 현장을 단비를 맞으며 다녀왔습니다.
첫번째 장소는 고양시 금정굴입니다. 수직으로 만들어진 굴로 한국전쟁당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던 곳 입니다. 최근 금정굴 사건에 대한 법원이 인정한 내용을 살펴보면, -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우익 치안대등에 의하여 부역혐의로 연행되어 경찰에 인계되어 조사를 받다가 희생자들의 주거지 인근 금정굴에 끌여가 경찰의 조준사격에 의하여 사망하였다. 그 과정에서 희생자들은 부역자 여부나 부역의 정도에 관한 적법한 조사를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굶은 상태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부역자에 대한 불법처리 금지지시를 어긴 경찰에 의하여 살해당했다.(이후생략) 공권력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현장이 바로 이 금정굴입니다.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가뭄끝에 내리는 비여서 달게 느껴지는 단비를 맞으며 장준하선생의 묘역이 있는 통일공원에 도착하였습니다. 독립운동을 했던 장준하 선생, 그리고 해방이후 언론인과 정치인으로써의 삶과 아직도 풀리지 않는 그의 죽음. 해방 후 그의 삶을 살펴보면, 진정한 보수의 삶이 어떤 삶인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준다고 하였습니다.
비속을 다니는것은 많은 체력소모가 필요합니다. 금정굴과 장준하선생 묘역을 다녀오니, 당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임금님께 진상했던 장단콩으로 만든 두부로 떨어진 당을 그득그득 보충하고 오후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이어 오두산 통일전망대로 이동하였습니다. 이 곳 통일전망대는 임진강 너머로 북한의 황해도 개풍군 주민들의 생활을 망원경으로 볼수 있는 지역인데, 이날은 비가 와서 주변을 살펴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북분단 이후,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햇빛정책이 우리 경제에 미쳤던 선순환적 기능과 지금은 중단된 6자회담을 통한 집단안보체제에서주도권 확보를 통한 통일의제 선점등 평화적 관점으로 한반도를 너머 유라시아 대륙으로 뻣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장소는 임진각으로 갔습니다. 이곳에서는 해방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부터 한국전쟁당시의 미국과 소련의 개입, 한반도의 분단상황등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실향민들이 명절때 고향을 향해 절을 하는 망배탑을 지나 자유의 다리로 이동하였습니다. 자유의 다리는 임진강에 놓인 남과 북을 잇는 통로로, 원래는 경의선의 철교였던것이 한국전쟁때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 공산군의 포로가 되었던 국군과 유엔군이 이 다리를 건너와서 판문점의 돌아지 않은 다리와 함께 남북분단의 비극을 상징하는 다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소는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퇴계 이이가 관직을 물러난 후에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꼐 여생을 보냈다는 화석정입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고 저희는 품이 아주 넉넉한 느티나무 아래서 6월 근현대 답사를 정리하였습니다. 1945년 일제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고, 38선을 중심으로 소련군과 미군이 주둔하면서 남북으로 분단되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전쟁은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참혹하고 비극적입니다.
분단의 현장을 걸으며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의 역사를 다시 한번 짚어보았습니다. 분단의 역사를 극복하는 방법은 평화와 통일입니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북한땅을 지나 유라시아 국경을 넘는 상상을 해봅니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그날, 남과 북이 평화라는 손을 맞잡는 그날을 다시 상상해봅니다. 6월의 근현대사 아카데미 현장답사는 분단의 현장에서 평화를 생각하며 마무리 하였습니다.
6월 18일 근현대사아카데미 실내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강의는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장 김승은 실장님께서 함께해주셨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 재조명"이 주제였는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일협정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맺어졌고, 일본은 그 당시 배상을 모두 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일협정이 어떤 상황에서, 무슨 내용으로 맺어진 협정인지는 대부분 모르고 있습니다. 이번 근현대사아카데미 강의에서는 한일협정에 대해 쉽게, 자세히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강의였을지 궁금하시죠?
우선 한일협정이란 무엇일까요? 한일협정은 한국과 일본의 국교를 정상화하는 협정입니다.
20여년동안 국교를 정상화하지 않고 있었다가 한일협정때부터 국교가 정상화되었습니다. 실제로 한일협정을 맺기위해 1952년 한일회담을 했고 협정을 맺기까지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일협정하면 많이 이야기하는것이 일본에서 주장하는 '배상금'인데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차관 3억달러였지만 실제로 '돈'을 받은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상 3억달러의 경우 이에 해당하는 생산품, 시설, 기자재 등을 받았고 유상과 차관은 배상이라 볼 수 없습니다. 결국 일본에서는 배상이었다고 말하지만 간접적으로는 "수출"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이에 대해서 배상금이 아닌 독립축하금이라는 명목을 달았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세계를 상대로 한일협정때 돈을 다 줬음에도 피해자들이 계속 돈을 달라고 떼쓰고 있다며 이들을 떼쟁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 당시 전쟁은 '돈'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은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고 청일전쟁 배상금 역시 예산의 4년치에 해당할만큼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때 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해 대공황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패전국과 승전국 모두 어려운 경제상황을 겪었습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줄 곳이 일본뿐이라 생각했던 미국은 만약 일본 역시 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해 어려운 경제상황을 겪을 경우 공산주의가 확대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고 일본의 전쟁 책임과 식민지 지배책임을 강하게 추궁하는 대신 대소반공체제 구축을 위해 일본을 파트너로 삼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일회담을 조속히 마무리짓기 위해 미국이 한일회담 과정에 깊게 관여하여 정치적 타결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한일협정을 위해 나섰던 한국 정부 역시 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과거사 청산, 피해자에 대한 사과 및 보상에 대한 부분은 뒷전으로 둔 채 경제발전과 안보에만 집중하여 금액 조정에만 신경썼습니다. 이는 일본이 바라던 바이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만, 조선인을 모집하여 포로감시원으로 활동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패망후 사로잡혀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포로감시원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들어가게 된 사람이 200여명, 사형을 당한 사람도 수십명이었습니다. A급 전범으로 사형을 받은 일본인이 7명임을 감안한다면 이는 과연 옳은 판결과 형 집행이었을까요?
당시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조선인들은 동진회를 만들어 지금까지도 그때의 억울함에 대한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만 그때그때의 작은 보상을 할뿐 일본은 여전히 그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포로감시원으로 활동했던 사람들, 강제징용되어 끌려갔던 사람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본군 위안부로 처절한 삶을 살았던 여성들, 일본에 있으면서 원폭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까지.
너무나 많은 피해자들이 있었지만 한일협정에서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한일협정은 언뜻 보기에도 우리에게 유리한점이 별로 보이지 않는 협정입니다. 침략에 대한 사과도, 그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들에게 전해진 사과와 보상도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실제로 한일협정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국민들을 진압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국민들의 목소리를 억눌렀습니다.
피해자들이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할때마다 일본은 한일협정때 다 정리가 됐다라는 입장이었고 그러다보니 한일협정 내용을 알기 위해 정보 공개 소송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한일협정 정보가 공개되었고, 일본에서도 정보 공개 소송이 진행되어 내용이 공개됐습니다. 우리나라가 가진 정보에는 간략한 내용들만이 담겨있었지만 실제 일본에서 공개된 정보는 그 양도 엄청났고 세세한 이야기들까지 다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동북아역사재단 홈페이지에서 원본을 볼 수 있으니 직접 보셔도 좋을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일본이 근대 산업시설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되었던 하지마 지역 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 한단 소식이 자꾸 들려옵니다. 그 중 한곳은 요시다 쇼인의 개인 서당인데 이곳이 대체 산업화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걸까요? 요시대 쇼인은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 등을 주창하며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이토 히로부미 등 이 서당 출신 사람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봤을때 일본의 산업화는 침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전쟁에 대한 반성이 보이지 않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에게 진실된 사과 역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일협정에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는 일본, 산업화라는 말로 침략을 대신하려는 일본. 그리고 그런 일본에게 제대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지 못하는 한국까지.
이러한 일들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우리 세대가 성숙해야 과거 청산 역시 가능합니다.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이를 세계인과 공유해야 합니다.
이 강의를 들으며 한일간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사 마찰의 시발점이 된 1965년 6월에 체결된 한일협정에 대해 다시 배우고,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쉽지 않은 내용인 한일협정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신 김승은 실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정부가 추천한 공익위원 9명, 노동자 대표(노동자위원) 9명, 기업대표(사용자위원) 9명이 최저임금위원회에서 논의하여 내년도 최저임금이 결정되게 되는데요. 올해에는 노동자위원에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위원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청년 노동자위원이 함께하고 있는만큼 청년, 학생 단체들도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위한 청년학생연석회의를 통해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KYC도 청년학생연석회의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6월 25일(목) 저녁 신촌에서 최저임금 페스티벌인 최저임금 올리는 라디오 공개방송 "그래서 내년에 얼마래니?"가 열렸습니다.
원래는 신촌 연세로에서 진행을 하며 많은 청년들과 함께할 계획이었는데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인해, 근처 신촌 아름다운 시절에서 진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엔 라디오 공개방송 형식으로 진행되어 사회를 봐주는 DJ와 랩, 노래 등의 공연, 최저임금과 관련된 청년들의 사연, 그리고 회의를 마치고 부랴부랴 달려온 김민수 최저임금위원회 노동자위원이 바로 전해준 회의 내용까지 들을 수 있는! 의미있는 자리였습니다.
최저임금과 관련된 소식을 조금 더 전해드리고 싶어서 노동계의 노동자위원들의 목표, 현재의 상황 및 쟁점에 대해 조금 더 적어봅니다.
최저임금과 관련하여 노동계의 주요 목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최저임금 심의 근거가 되는 소득분배율 공식 기준 통계를 보다 풍부하게 활용
2. 최저임금 심의 근거가 되는 생계비 조사를 보다 풍부하게 활용
3. 최저임금위원회의 투명한 공개, 사회적 책임 강화
첫번째는 종전 중위임금만을 기준통계로 하였는데, 평균임금도 포함하고 1인 이상 사업장 및 5인 이상 사업장을 병기하자는 내용입니다. 이는 3차 전원회의때 표결을 통해 통과되었습니다.
두번째는 종전 단신가구의 생계비만을 조사했는데 2~3인 가구 생계비를 포함하자는 내용입니다. 가족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최저임금이 되도록 하기 위한 목표였는데 4차 전원회의때 논의가 급물살을 타 5차 회의때 다시 논의하기로 하였으나 현재 논의가 멈춰져있는 상태입니다.
세번째는 최저임금위원회의 회의 내용을 심의 기간 중 상시 공개하여 최저임금 당사자들이 최저임금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알아야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역시 다시 논의하기로 한 뒤 논의가 멈춘 상태입니다.
현재 최저임금위원회의 회의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6월 25일 회의때 사용자 위원들이 모두 퇴장을 하고
오늘 6월 29일 회의마저 참석 거부를 했기 때문인데요. 무슨 이유때문에 이렇게 사용자 위원들이 회의를 거부하는지 궁금하시죠?
이는 바로 최저임금의 시급 병기와 함께 월급을 병기하자는 공익위원의 작은 제안 때문입니다. 월급 병기는 말 그대로 최저임금을 월급으로 환산했을때 얼마인지를 함께 병기하자는 것입니다. 현재 최저임금 5,580원을 월급으로 환산하면 116만원정도인것 처럼 말이죠.
그런데 이 제안이 왜 이렇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는걸까요? 사용자측에서는 월급병기가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크게 설득력이 있어보이진 않습니다.
또 다른 이유로 제기되는 것은 바로 유급휴일입니다. 현재 주5일을 일할경우 이틀을 쉬는데 하루는 유급휴일, 하루는 무급휴일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월급으로 환산할 경우 유급휴일인 32시간(8시간x4일)이 월급에 포함되게 됩니다. 법으로 정해져있는 내용이고, 최저임금 월급을 함께 명시하자는것 뿐인데 사용자측에서 회의를 불참할만큼 반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마 유급휴일을 주기 싫어서 그러시는건 아니겠죠? 설마요~
아무튼 6월 29일 회의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2016년 최저임금은 아직까지 정해지지 못했습니다. 7월에 다시 최저임금에 대한 협상과 조정을 통해 2016년 최저임금이 확정될텐데요.
6월 22일에는 9년 연속 최저임금 동결을 요구한 사용자단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관 앞에서 가졌습니다.
[9년 연속 최저임금 동결(삭감) 요구 사용자단체 대기록 달성 규탄 청년학생단체 공동 기자회견]
경영계는 고용감소 · 경제위기 협박을 중단하고
청년문제 해결을 위한 최저임금 대폭 인상에 동참하라
2016년 최저임금에 대한 심의가 법정 시한을 일주일 남겨두고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한국경영자총협회 등으로 구성된 최저임금위원회 사용자위원은 지난 18일 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2016년 적용 최저임금 사용자위원 최초요구로 동결안을 내놓았다. 이로써 사용자단체들은 지난 2007년의 심의에서 0% 인상안을 제시한 이후 무려 9년 연속으로 최저임금 동결 혹은 삭감을 요구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사용자위원들은 현재의 최저임금 수준이 충분히 높으며 인상요인이 없다고 밝혔다. 경총은 최저임금이 대폭 인상되면 중소·영세기업의 고통이 가중되고 고용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한다. 하늘 같은 재벌·대기업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조직 된 경총에서 중소·영세기업의 어려움을 굽어 살피고, 혹여나 청년들이 갈 수 있는 일자리가 줄어들지 않을까 염려하는 모습이 참으로 황송하다.
그러나 경총의 사려 깊은 주장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 많다. 한국의 재벌·대기업들은 지난 10여 년간 고용 없는 성장과 불평등한 경제 구조를 쌓아 올리며 경제성장의 과실을 탐욕스럽게 독차지하고 중소·영세기업, 더 나아가 청년들의 고통을 가중시켜왔기 때문이다.
노동유연화와 정리해고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았고, 중소기업에 고용의 책임을 떠넘겼다. 납품단가를 후려치고 갑질을 일삼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위한 방안들을 두고서는 시장 질서를 유린하는 정책이라며 아연실색했다.
소상공인들이 어렵게 일궈낸 상권에는 버젓이 대기업이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사업장과 대형 유통마트가 들어섰다. 하루하루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는 자영업자들의 고달픔은 아랑곳없이 고율의 카드수수료를 받아내며 땅 짚고 돈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청년세대가 괜찮은 일자리로 이행할 수 없는 불모지가 되어갔다. 중소·영세기업의 어려움은 우리 사회가 함께 해결해나가야 할 과제이지, 그것이 최저임금 인상을 가로막는 논리가 될 수는 없다.
재벌·대기업에 한 말씀 올린다.
작작 좀 하시라. 부끄럽지도 않은가.
경총을 위시한 사용자 단체들은 ‘최저임금 인상되면 고용 줄어든다’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뿌릴 시간에 불평등으로 점철 된 사회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보라. 진정으로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말이다.
2015년 최저임금 시간당 5,580원, 월급 기준 116만원은 최저임금위원회가 발표하는 청년층의 한 달 평균 생계비인 194만원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한 달을 꼬박 일해도 78만원 수준의 적자를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편의점 삼각김밥과 자그마한 식당의 6,000원 밥상 사이에서 망설이는 삶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 절벽 끝에 선 이들의 삶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최저임금이 대폭 인상되어야 한다.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여 450만 저임금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청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괜찮은 일자리’의 폭을 넓혀야 한다. 땀 흘려 일하는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오늘의 생존을 넘어 내일의 희망까지 품을 수 있는 최저임금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물가상승률조차 고려하지 않는 몰상식함으로 무려 9년 연속 최저임금의 동결 혹은 삭감을 주장해 온 경영계를 강하게 규탄한다. 경영계는 앵무새처럼 반복해 온 고용감소·경제위기 타령을 중단하고 청년 문제 해결을 위한 최저임금 대폭 인상에 동참하라.
2015년 6월 22일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위한 청년학생단체 연석회의
이후에도 최저임금과 관련하여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지속적으로 공유하겠습니다.
근현대사아카데미 5월 현장답사는! 민주주의 함성이 타올랐던 5월, 뜨거웠던 광주로 다녀왔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방문한 광주. 올해에는 석가탄신일이 있는 때에 갔더니 광주까지 가는 길이 무지막지하게 막혔습니다...... 자도자도 버스는 달리고 있고...ㅠㅠ
긴 시간끝에 드디어! 광주에 도착했습니다!!
광주 첫번째 답사 장소는 5.18 자유공원이었습니다. 5.18 자유공원에는 상무대와 영창, 군사재판을 받았던 재판소 등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여성들이 시민군과 학생들에게 만들어 나누어줬다는 주먹밥 만들기 체험을 해봤습니다. 광주의 정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주먹밥' 밥과 김뿐인데도 맛있다는 말이 절로 나는 주먹밥. 주먹밥을 만들어 앞과 옆에 앉은 사람들에게 먹여주고 나눠주며 그날의 상황을 다시 한번 떠올려봅니다. 광주의 나눔 정신은 따뜻했습니다^^
그 당시 광주 시민들은 군인들에게 끌려와 고문과 조사를 받았습니다. 잡혀온 사람들을 조사를 통해 특A, A, B, C, D로 분류되었고 C와 D는 훈방, B는 삼청교육대로 보내졌고 특A와 A는 군사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영창에 수감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죄없는, 무고한 시민들이었습니다. 조사를 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고문을 가했고, 원하는 대답을 할때까지 그 고문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각본에 따라 만들어지는 거였습니다.
이렇게 고문으로 거짓된 조사를 한 뒤 많은 사람을 영창에 가두어뒀는데 영창 안에서의 수감생활 역시 말도 안될만큼 잔혹했습니다. 움직여도 안되고, 마음대로 화장실을 갈수도 없었고 무조건적인 폭력이 수반되었던 영창 생활. 영창에서 6개월을 지내다 계엄이 해제된 후 일반 민간 수감실로 갔는데 지옥에 있다 천국에 온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군사재판을 위해 만들었던 재판장 역시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무장한 군인들이 사이사이에 함께했고, 조사했던 내용이 거짓이라고 말할경우 다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주시는 분들은 5.18 당시 상무대로 끌려와 고문을 당하고, 수감생활을 했던 분들입니다. 시민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이야기 한다는것이 쉽지 않은 일일텐데... 아니 고통스러울텐데도 당시의 광주를 잊지 않기 위해 다시는 그러한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해주시고 계셨습니다.
이후에는 오월지기 김용철 선생님께서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먼저 5.18 민주묘역으로 향했습니다.
민주항쟁 열사들이 잠들어있는 구묘지에 들려 참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묘역에 놓인 투명한 함에 들어있던 편지를 꺼내 읽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학생들이 남긴 편지들이 여럿 있었는데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열사에게 전하는 미안함, 고마움, 그리고 자신 역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행동하겠다는 내용들이 담겨있었습니다.
다음으로 향한곳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희생된 광주 시민들이 잠들어있는 묘역이었습니다. 이곳에 잠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을때마다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아 언어장애가 함께 있었던 바람에 계엄군에게 가장 먼저 희생되었던 분... 이 분의 묘비에는 그 당시 1살이었던 딸이 17살이 되어 쓴 글귀가 새겨져있었습니다.
아빠! 늘 어디서든 저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은 저미게 뵙고 싶을때가 많아요. 한번만이라도 아빠를 불러보고 싶은 이 소망 아실련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나무 뒤에서 기다리다 군인의 조준사격에 그자리에서 사망했던 임신 8개월이었던 여성...
시민들을 위해 헌혈하는 짚차에 올라 헌혈을 하고 집으로 오던길에 계엄군 총탄에 사망했던 고3 여학생...
밖에서 놀고 온다더니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광주역에 아이가 죽어있다는 소식에 광주역으로 달려갔으나 시신이 사라진... 지금까지도 행불자로 남아있는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아이까지.
우리 이웃들의, 평범함 일상생활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극적인 죽음입니다.
너무나 많은 시민들이 잠들어있는 이곳. 3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현재 진행중인 그 아픔과 고통을 대하는 시간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흐릅니다. 다시한번 잊지말자! 기억하자!! 국가에 의해 희생되었던 이 수많은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망월동을 지나, 금남로에 있는 전남도청과 5.18 민주광장으로 왔습니다. 전남도청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본부가 있었던 곳이며,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곳이었습니다.
아마 이 사진을 많이 보셨을것 같은데요. 이 곳이 바로 5.18 민주광장입니다. 중앙의 분수대를 기점으로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전남도청은 새로운 모습을 준비중일까요.. 텅비어 있습니다. 광주의 상징! 한국 민주화운동의 성지가 홀로 덩그렇게 남아있는 모습이 외로워보였습니다.
도청과 5.18 민주광장을 뒤로하고 금남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시민들이 가두시위를 하고, 차량시위를 했던 금남로. 그곳에서 청소년들이 모여 518페스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펄떡거리는 청소년들의 각자의 다양한 방식으로 광주를 표현하고 참여하는 모습이 대견합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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