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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평화] 탈북자 신상터는 헬조선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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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평화] 탈북자 신상터는 헬조선 정부

익명 (미확인) | 목, 2016/04/28- 16:48

북한의 핵 위협, 일본의 재무장과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 중국의 군사력 확충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국가들의 군비 경쟁과 군사적 긴장은 점점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 불안하고 위험한 악순환의 고리를 언제까지 그냥 두어야 할까요? <프레시안>과 <참여연대>는 악순환의 출발점인 정전체제의 한계를 진단하고, 한반도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안녕과 평화를 보장하는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이제는 평화'를 연재를 진행합니다. 다양한 분야의 필진을 통해 현안에 대한 분석과 대안, 국방·외교 분야를 바라보는 평화적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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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신상 터는 헬조선 정부

[이제는 평화] 대한민국 정부에게 난민은 누구인가


이일 공익법센터 어필 상근변호사


 


탈북자 신상 공개를 감행하는 세계관 

 

총선을 닷새 앞둔 지난 4월 8일, 통일부는 '집단 탈북 관련 브리핑'을 통해 "북한이 해외 식당에 파견하여 근무 중이던 남자 지배인 1명과 여자 종업원 12명이 4월 7일 서울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그들의 탈북 동기와 마스크 착용 전신 사진도 앞장서서 공개했다.

 

이 브리핑은 내용과 시점 양면에서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제재가 성공적으로 효과를 발휘하고 있음을 선전하는 북풍 몰이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총체적인 숙고가 부재했던 이 브리핑은 총선 결과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오히려 현재까지도 풀기 어려운 문제만을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정략적 행위의 타당성이나 목적의 탈법성 자체보다, 한국에서 난민을 옹호하는 활동가들을 더욱 분노케 한 것은 난민의 생명을 담보로 정무적 이익을 얻으려는 시도를 감행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그들의 세계관 자체다.

 

난민의 신상은 왜 보호되어야 하는가 

 

탈북자들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국민이다. 하지만 제3국에서는 난민협약 등 국제법에 따라 명확히 '난민(Refugee)'에 해당하며, 난민협약은 난민에 관한 신상 정보는 물론이고 난민이 특정 국가에 비호 신청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공개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탈북자들이 이에 적용을 받진 않지만, 한국의 난민법 역시 제17조 제1항에서 본인의 동의 없이 난민 신청자를 특정할 수 있는 인적 사항과 사진 등의 공개 금지, 정보 공개 및 누설 금지 규정과 벌칙 규정을 두고 있다. 

 

왜 이렇게 난민의 신상 정보를 보호해야 하는가? 국적 국가로부터 박해를 피해 제3국에 난민 신청을 했다는 정보는 난민인 탈북자들에게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당사자를 특정할 수 있는 정보가 누설되어 본국 정부가 이를 알게 될 경우, 본국에 있는 가족 및 기타 관련자들에게 조사, 처벌 등 박해가 가해질 것이 명백하다.

 

과연 대한민국 정부는 이 브리핑에 대해 그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한 동의를 거쳤는가? 브리핑이 난민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에게 끼칠 무서운 결과에 대해 과연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질 수 있는가? 난민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이뤄진 이 브리핑은 과연 한국 정부에게 난민이란 누구인가를 질문케 한다.

 

한국 정부에게 난민은 누구인가

 

한국 정부에게 난민은 구체적 인간이 아니라 정책적 재료다. 우선 난민은 '인권 선진국'이라는 허구적 이미지의 대외 선전 수단이다. 아시아에서 사실상 최초의 난민법 입법 및 시행, 유엔난민기구 집행이사회 의장국 역임, 시리아 난민에 대한 인도적 체류허가 등은 국제사회에 반복적으로 선전된다. 

 

1994년부터 2015년까지 21년 동안 1만5250명이 난민 신청을 했고, 그중 576명이 난민 인정을 받았으며, 910명이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았다. 21년간 신청자 중 평균 3.78%만이 난민 인정을 받아 한국에서 살 수 있었고 나머지는 미등록 체류자로 살거나 추방되어야 했다는 사실은 대외적 선전 뒤로 숨겨진다. 

 

한국 정부에 난민은 사실 거의 존재하지 않는 허구다. 비호를 구하는 대부분의 난민 신청자들은 난민 제도를 남용해서 한국 체류를 꾀하는 허위 신청자들로 여겨질 뿐이고, 난민 제도는 강력한 국경 관리와 체류자 관리를 저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또한 한국 정부에게 난민은 정책적 필요에 따라 활용되는 얼굴과 목소리가 없는 '타자'다. 난민 문제에 더해 남북 관계의 모순까지 함께 투영된 존재인 탈북자는 이번 사건에서처럼 체제 우위성의 선전도구로 활용되거나, 분단 체제를 항구화할 담론을 간접적으로 유포할 도구로 활용된다. 

 

심지어 난민들은 한국 사회에 안보 불안을 가져오는 잠재적인 대상으로까지 이해된다. 작년 말 시리아 난민에 대한 국정원장의 느닷없는 현안 보고는 난민과 테러를 연계시켜 소위 '종북 세력'과 구별된 새로운 안보 불안의 주체로 난민을 활용하려는 시도였다.

 

예일 대학교 정치학 교수인 제임스 스콧은 저서 <국가처럼 보기(Seeing Like a State)>에서 국가가 공간과 사람을 읽기 쉽게 치환해가는 속성을 '가독성과 단순화'라는 키워드로 분석한다. 

 

한국 정부에게도 난민은 통계로 읽히는 체류 외국인 중 일부, 지방자치단체 시설 보수 예산에도 못 미치는 연 17억 가량 예산의 집행 용처, 극히 적은 숫자로 존재하는 무명의 체류 관리 대상일 뿐이지 구체적 인간이 아니다. 과연 대한민국 정부에게 피와 살, 존엄한 영혼을 가진 난민의 인간성은 어디에 있는가. 

 

난민과 국가의 보호, 평화 

 

박해를 피해온 난민은 우리에게 국가의 보호를 되묻는다.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비극적 사건 속에서 우리는 '국가가 과연 인간을 보호하는가'에서부터 '오히려 국가가 인간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질문을 곱씹어왔다.  

 

난민 역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할 뿐 아니라, 국가와 그에 준하는 집단으로부터의 박해를 피해온 사람들이다. 그들의 고국도, 그리고 한국도 그들을 선뜻 보호하지 않는 경계 속에서 자신의 몸뚱어리에만 의지하고 있을 뿐이다. 

 

난민의 존재는 평화의 소중함을 되묻는다. 국가와 그에 준하는 집단들의 폭력적 박해를 피해온 그들은 언어, 문화, 역사적 경험이 모두 다른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로서 또 다른 비평화를 경험한다. 평화를 찾아온 난민들이 경험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에게마저도 가혹한 '헬조선'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영상 메시지를 통해 "전쟁의 처절함을 체험한 난민들은 어떻게 평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난민의 존재는 우리가 모두 지구에 온 외부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한다"고 심오한 통찰을 줬다.

 

우리는 우리가 국가의 경계를 초월한 코스모폴리탄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역시 어디에선가 이방인이며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에 난민들 곁에 선다. 한국 정부가 그들을 얼굴도 목소리도 없는 존재로 치환하여 정책적 재료로 활용하고 있을 때, 국가의 의무를 요구하고 평화를 희망하는 우리는 어떻게 그들 곁에 서고 연대할 것인가.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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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광장에 부는 페미니즘 – 시민연구자 박재승 님

우리는 되돌릴 수 없는 바람 속에 광장으로 나간다. 바람이 여성을 부른 것이 아니라 여성이 바람을 불렀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기에 그들을 반기는 것도 그들 서로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성은 하늘 가장 가까운 곳으로 마이크를 들었다. ‘우리의 문제는 한 번도 끝난 적이 없어.’ 나는 그런 마음으로 여성의 광장을 촬영해왔다.

여성의 목소리는 광장 밖으로 나가 일상으로 들어가는 순간 다른 목소리에 비해 훨씬 빠르게 사라진다. 나는 그것들이 사라지게 놔두기 싫었다. 페미시국광장을 주시한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당시 ‘버닝썬’에 대한 의제를 놓치지 않는 시위는 이곳이 유일했다.

페미시국광장에 처음 갔을 때 다 같이 모리바야사(Moribayassa) 춤을 췄다. 모리바야사는 서아프리카 기니 북동쪽에서 여성들이 기쁨을 나누고 싶을 때 추는 춤이다. 성차별에 대항하는 힘과 의지를 북돋기 위해 준비한 퍼포먼스라고 했다.

그때 추석을 앞둔 시점이었다. 광장에서 나와 수차례 버닝썬 수사와 검찰 개혁 등의 공적의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서 추석 명절의 스트레스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문제는 공적이었고, 그것은 다시 사적이었으니 여성의 삶은 속속들이 모든 것을 고발해도 모자란 지경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 뒤로 10차까지 페미시국광장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10차 집회가 마지막이었는데 강간죄개정을 두고 머리에 빨간 두건을 둘렀다. 시위 현장에 도착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그 광경을 보던 노년의 남성이 웃으면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저기 봐. 민주노총이야. 서초동 시위를 여기에서도 하나 봐.”

이때가 서초동 시위와 맞물려 검찰개혁의 의제가 광장 내에 한참 퍼지는 시기였다. 그리고 10차에서는 강간죄개정이라고 적힌 빨간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기에 이를 노동궐기로 착각했던 것 같았다. 웃겼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 한편이 뒤척거렸다.

어떻게 보면 강간죄 개정은 여성에게 노동 운동이기도 했다. 왜냐면 여성이 직장 내에서 노동을 안전하게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강간죄 이슈가 잘 해결되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투쟁의 상징인 빨간 두건을 사용한 것도, 강간죄 개정은 정말 ‘투쟁’이며 그것은 더 남성의 얼굴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기에 그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러일으킨 오해를 풀 길이 없어서 그랬는지, 이것이 새삼스러운 감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엇인가 마음을 계속 들쑤시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이후 행진 때의 기억은 더 선명하게 남았다. 한 시간 넘도록 긴 행진을 하고 광화문 앞으로 돌아왔을 때 마주한 광경은 그야말로 ‘광장’이었다. 광화문 앞에는 서초동 시위의 연장선인 집회가 큰 무대 구조물 사이로 조명 빛과 노래를 흘리고 있었고, 반대편 길에는 그에 반하는 집회가 열려 수많은 소리와 다른 외침이 한 공간에 섞여 있었다.

페미시국광장의 행렬은 사이를 지나가며 강간죄 개정과 검찰개혁을 외쳤다. 같은 검찰개혁 의제를 외치고 있는데 다른 집회던가, 아니면 같은 집회던가. 그 생각을 안고 광장의 한 가운데를 넘어보며 걸어 내려왔다.

페미시국광장 10차의 참여자 수는 백 명을 겨우 조금 넘겼다. 서초동 시위의 규모가 아주 컸던 것을 보면서 의제 집중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했다. 문제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여성시민의 의제는 과연 광장의 중심에서 발화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사념이 되어서도 떠돌아다닐 것 같은 오랜 고민이었으나 그날 따라 한참 맴돌았다. 버닝썬 수사에 대한 의제, 불법촬영물 카르텔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검찰개혁을 말하는 것은 순서를 따지기 이전에 여성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여성에게 강간죄 개정과 남성카르텔과 검찰개혁, 불법촬영카르텔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 시스템의 권력관계가 여성의 삶 곳곳에 존재하는 아주 미세한 이야기가 맞닿아 있다. 그렇기에 여성의 시국은 일상의 두려움에서 버닝썬 수사와 양진호 카르텔로 이어지고, 검찰개혁에 대해 말하다가도 설·추석과 같은 명절에 독박으로 소진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광장에 한 개 의제가 아니라 열 개 의제가 나오게 된 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과연 필연적인 것을 새롭다고 볼 수 있을까. 페미시국광장의 열 가지 의제의 등장을 새로운 형태의 광장이 유의미한 것으로 보고 연구를 시작했으나 그것은 사실 필연적이다.

어떤 공적 담론에서도 본인의 의제가 우선하지 못하고 밀려나는 삶을 지속하는 자에게는 공적 담론과 사적 담론은 구분되지 않는다. 일상과 공공(public)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둘 중 하나가 해결되려면 다른 하나가 해결되어야 한다. 일상에서 안전은 버닝썬의 강간 문화가 사라지지 않으면 영위할 수 없고 버닝썬 수사는 검찰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여성 시민은 열 개 의제가 계주를 달리듯이 이어지는 것을 그다지 새롭지 않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특정한 의제에 공감하기보다 이 흐름 자체를 자연스럽게 따라가듯이 달려야 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일상 정치라는 것은, 분명히 따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영역이지만 공적인 것으로 담론화 못했기에 일상의 것으로 밀려난 자들의 정치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광장의 형태가 새로운 운동 네트워크-미시맥락적 동원 네트워크-를 부르는 것일까. 아니면 언론이나 정부로부터 알림 받지 못한 이들의 네트워크는 사적 네트워크를 통해 구성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연구를 마무리 지을 때는 이것을 중점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어떻든, 어떤 경로든 비집고 스며들어 광장에 맴돌게 된다. 그 경로가 아무리 사적인 통로가 될지라도 결코 좁지마는 아닐 것이다.

[칼럼] 필연(必然)의 운동: 90년대생의 페미니즘운동 – 시민연구자 소정 님

“조선일보 폐간하라”라는 문구가 흔들리지 않던 조선일보 건물을 뒤덮었고 나의 SNS엔 친구와 함께, 동료와 함께 붉은 머리끈을 동여매고 나선 인증샷이 피드를 가득 채웠다. 7월 12일부터 9월 28일까지 두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어진 페미시국광장이 보여준 모습들이었다.

1997년생인 나에게 거리로 뛰어나가 목소리를 외친다는 건 필연인지도 모른다. 2014년엔 나와 동갑인 친구들이 가라앉는 와중에도 수능영어기출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외치는 어른들 틈에 진절머리가 났다.

행동할 용기는 없고 숨은 탁탁 막혀와서 친구들의 손을 부여잡고 매일같이 어떤 감정인지 모르는 수많은 감정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016년 그 감정이 분노이고, 공포이고, 두려움이었다는 걸 찾아가면서 대학교에 입학해 1년을 보냈다.

그러던 중에도 강남역에서 누군가 살해 당했으며 고등학생 때 미처 말하지 못한 성폭력 사건이 공유됐고 디지털성범죄 피해를 호소하던 주변인은 생사의 길목에 섰다. 그 모든 시간을 거쳐 2016년 말에는 먹먹한 마음을 풀어내기라도 하듯 광화문에, 시청에 우리는 모여들었다.

2016년 촛불집회는 정권을 교체해내는 쾌거를 이뤘지만, 우리의 분노와 먹먹한 응어리는 여전히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2018년 미투운동은 언어화되지 못한 수많은 성폭력 사건들을 수면 위로 떠올렸지만 동시에 문제 해결이 절대 쉽지 않다는 절망을 느끼게도 했다. 풀어지지 않는 응어리진 마음들은 모이고 모여 다시 우리를 시위 현장으로 이끌었고 우리는 광장에서, 길거리에서, 학교 동아리에서 그렇게 다시 만났다.

누군가는 사회운동의 사회라고 말한다. 사회운동이 사회 내에 하나의 영역(sector)으로 자리 잡아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창구가 될 수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의 목소리가 과연 사회에서 하나의 영역을 구성할 만큼 견고한가’라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 같다. 사회운동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조차 일반 시민이 남성으로 상정된 이상 여성의 목소리는 배제되거나 타자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운동의 불씨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에 대한 고발과 남성권력카르텔에 대한 문제 제기는 페미시국광장 한참 전부터 이뤄졌다. 페미시국광장 이전에도 오랜 기간 고발의 역사가 있었고, 저항의 역사가 있었으니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성폭력 문제는 친한 몇몇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도 했고, 피해자들은 용기를 내어 언론을 향해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사가 뿌리 깊은 남성 중심의 권력을 뽑아내기에는 그 권력의 뿌리가 너무나 견고했다.

사회학자 래윈 코넬은 안토니오 그람시가 재정립한 헤게모니 개념을 차용해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제안했는데 이 권력의 뿌리를 이해하기에 적합한 개념이다. 헤게모니는 개인이 벗어나고자 해서 쉽게 벗어날 수 없고 벗어나기 위해서는 저항이나 협상을 통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이들이 쉽게 벗어날 수 없도록 사회 전반적으로 성별 역할 및 지위에 관여하고 기존의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적 권력 체계를 유지한다.

1990년대생에게 이 헤게모니는 일생에 거쳐 강력하게 작동했다. 그러나 2014년, 2016년, 2018년에 걸쳐 헤게모니가 ‘평화롭게’ 굴러가기 위해 탄압과 폭력이 전제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화했다는 게 90년대생의 특징이다.

앞서 언급했던 무수히 많은 사건과 90년대생보다 앞서 길거리에서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의 역사는 작게 나마 90년대생에 저항의 싹을 틔웠다. 학교를 다니며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한 또래는 동아리를 만들거나 주변 지인들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연대를 이끌어나갔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전진했다.

그렇게 사회 운동을 체화한 세대에게 열 개 의제는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90년대생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느꼈던 응어리를 토해내는 광장이었다. 응어리와 공명하는 지점을 명확하게 포착하고 그 문제의식을 기존의 집단과 공유·연대하면서 사회운동은 일상이 됐다.

과연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공유된 토대 위에서 개인이 각자 쌓아 올렸던 경험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무엇에 공명해 이들은 시위에 참여했는지 분석하는 게 중요하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감정과 경험을 어떻게 체득했는가에 따라 페미시국광장의 원동력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응어리져있는 우리의 감정들, 우리의 경험을 펴내고자 한다.

화, 2020/01/21-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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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혹자는 모 심리학과 교수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정답이 아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이를 본 네티즌”이다. 실제로 네이버 뉴스 검색창에 “이를 본 네티즌”으로 한 달 치만 검색해봐도 무려 765건이 나온다. 일간지와 주요 방송사만 한정하면 국민일보, 서울신문, MBN, 연합뉴스, 조선일보 등이 “이를 본 네티즌”을 최근에 가장 많이 인용했다.

왜 “이를 본 네티즌”을 많이 인용할까? 검색어 유입을 위한 만능열쇠이기 때문이다. 별다른 취재가 없이도 포털 상위에 뜨는 검색어가 들어가는 기사를 작성할 수 있다. 효율을 추구하는 언론사라면 놓치고 싶지 않은 코멘테이터(해설자)이다.

두 번째로 많이 인용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한 업계 관계자”가 아닐까 한다. 네이버 뉴스 한 달치 검색 결과는 551건이다. 다만 “한 업계 관계자”를 인용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비판을 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정부가 어떤 정책을 발표했는데 업계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보기에는 탁상공론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특정 업체의 이름을 밝히고 멘트를 하기는 사실 쉽지 않다. 이럴 때, 소속과 실명을 밝히지 못하고 “한 업계 관계자”의 의견을 전하는 사정도 이해될 때도 있다. 또는 업계의 잘못된 관행이나 대기업의 갑질 등을 전하는 익명의 “한 업계 관계자”의 목소리는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한 업계 관계자”를 인용한 홍보성 멘트는 분명히 잘못된 기사다. 홍보성 발언을 하는 업계 관계자라면 반드시 소속과 실명을 밝혀야 오해를 피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연합뉴스의 “총수 이재용, 예상 뛰어넘는 파격 선언…’뉴삼성’ 탄력받나”라는 기사는 여러모로 아쉬운 기사다. 최근 이재용씨가 선고를 앞두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를 전하는 연합뉴스는 제목을 통해 ‘파격 선언’, ‘뉴삼성’이라고 평가했다. 그 근거를 보면 “삼성의 잘못된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는 변곡점을 만들어 일대 혁신을 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사과를 넘은 ‘뉴삼성’ 선언이라는 분석”이다.

 

(중략)

 

마찬가지로 기사는 “이병철 선대회장의 83년 도쿄 선언(D램 산업 진출), 이건희 회장의 93년 ‘신경영선언’(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말이 나온)에 이은 ‘뉴삼성’ 선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고 전했다. 그러나 역시 그 평가의 출처는 ‘삼성 내부에서는’이라는 불명확한 집단일 뿐이다. 이는 “삼성 미래전략기획실 김XX 부장은”과 같은 형식으로 바꿔야 한다. 차라리 ‘삼성 관계자는’이라고 쓰는 것이 좋다. ‘삼성 내부에서는’이라는 출처는 마치 삼성 임직원의 여론을 분석해서 파악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비판적 기사에도 오류가 많다. 예를 들면 ‘편법 상속’이라는 단어로 비판하는 기사가 종종 보인다. 그러나 일단 상속은 사망했을 때만 발생할 수 있다. 이재용씨는 물론 이건희 회장도 아직 사망하지 않았으니 상속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편법 증여도 맞는 단어는 아니다. 만약에 이건희 회장이 자신의 재산을 이재용씨에게 편법으로 전달했으면 편법 증여가 맞는 단어일 수 있다. 그러나 에버랜드 사건부터 최근 삼성물산 합병사건까지 이건희 회장의 재산을 이재용씨에게 준 것이 아니다. 다른 주주의 재산을 이재용 씨에게 넘긴 것이니 ‘불법 횡령’ 정도가 맞지 않을까 한다.

경영권 승계란 말 자체도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회사를 경영하는 이사는 주주가 선임한다. 주식회사를 경영할 수 있는 지배력은 승계의 대상이 아니다. 회사 지분의 50%+1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주식지분보다 경영능력을 통해 이사에 선임되는 것이 원칙이다. 이재용씨가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은 불과 0.7%일 뿐이다. 그리고 경영을 할 수 있는 권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배력이란 말이 맞다. 이제부터 경영권이라는 말 대신에 지배력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어떨까?

 

 

이재용 칭찬기사, 출처가 이 사람이어도 괜찮나? - 미디어오늘

한국 언론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혹자는 모 심리학과 교수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정답이 아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이를 본 네티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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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5/2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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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시대’로 접어든 지 4개월, 사회 시스템의 상당 부분이 멈춰 있다. 여러 시스템 중에서도 가장 우려되는 곳은 학교다. 방역 모범국이라는 싱가포르마저 개학 후 확진환자가 급증한 장면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대학생은 그나마 성인이라 문제가 덜하다. 하지만 초·중·고, 특히 초등학교의 돌봄 문제는 심각하다. 교육부도 문을 열어달라는 학부모와 열어서는 안 된다는 학모들 사이에서 묘수를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아이돌봄서비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영아 종일제 돌봄서비스는 만 2세 이하의 아동을 대상으로 하며, 시간제 돌봄서비스는 만 12세 이하 아동을 대상으로 돌봄서비스를 제공한다. ‘중위소득 150%까지’라는 제한이 있기는 하다. 사업의 목적은 맞벌이 부부 등 취업 부모의 양육 부담을 줄이고, 양육 공백 가정에 서비스를 제공해 안전한 육아 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다. 여성의 경제활동을 높이려는 저출산 대책의 중요한 사업으로 국정과제 중의 하나다.

고용효과도 있다. 아이돌봄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주로 경력이 단절된 중년 여성이다. 주로 정부가 지원하고 지방이 매칭해 진행하는데 이용자가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2014년 5만4000가구에서 2018년 6만4000가구로 크게 늘었다. 나라살림연구소가 최근 예산현황을 분석해본 결과 코로나19 이전보다(전년 대비) 지방자치단체 총지출액이 1.3배 늘어났다. 원래 늘었던 추세였던데다 코로나19로 인해 학교 개학이 늦어지면서 돌봄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지역별 집행현황에 차이는 있다. 시·도별 집행률을 보면 충북이 38.6%로 가장 낮고, 경북이 73.9% 가장 높았다(4월 말 기준). 시·군·구에서도 지역별 편차가 있다. 일부 시·군·구 중 집행률은 90% 이상이다. 문제는 이런 일부 시·군·구가 이미 사업 예산 절반 이상을 써버려 남은 기간 사업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전년 대비 총사업비를 1.2배 늘렸지만, 지출액이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중략)

여러모로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바야흐로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바꾸는 계기로 작동할 것이다. 위기는 활용에 따라 기회일 수 있다. 사회가 책임지는 육아와 돌봄, 이로 인한 행복의 증가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정창수의 ‘나라살림을 제대로 바꾸는 법’]코로나19 시대 아이는 누가 돌보나?

‘코로나19 시대’로 접어든 지 4개월, 사회 시스템의 상당 부분이 멈춰 있다. 여러 시스템 중에서도 가장 우려되는 곳은 학교다. 방역 모범국이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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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6/10-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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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사의 가장 기본은 무엇일까? 경제성장률을 정확히 전하는 것 아닐까. 불행히도 경제성장률을 전하는 기사에도 오류가 많다. 경제성장률은 보통 전분기대비 성장률과 전년대비 성장률로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전분기대비 성장률은 원 값 그대로 표현할 수 있지만 이를 연율로 환산할 수도 있다. 

지난달31일 헤럴드경제 기사에 2분기 GDP 성장률 비교표가 있다. 한국은 -3.3%, 미국은 무려 -32.9%다. 미국이 거의 10배 더 나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오류다. 미국 2분기 경제 하락폭이  -32.9%인 것은 아니다. 2분기 경제성장률 원 값은 -9.5%다. 그래서 한국 2분기 성장률 -3.3%와 -9.5%를 비교해야 한다. 매분기 -9.5%만큼 역성장이 일년간 지속하면, 연율로 -32.9%가 된다는 뜻이다. 한국도 매분기 -3.3% 역성장을 일년간 지속하면, 연율은 -12.6%가 된다.   

이런 식의 오류 기사는 분기 경제성장률 발표 때마다 나타난다. 지난 1분기 경제성장률 발표 때도 뉴스1코리아(뉴스1)이 비슷한 오류를 범했다. 불행히도 이 기사는 다음 탑에 올라가 댓글만 3000개가 넘을 정도로 많이 회자됐다. 뉴스에는 한국 1분기가 -1.4%, 미국은 -4.8%로 나와있다. 그러나 미국 1분기 -4.8%는 연율을 의미한다. 한국 1분기 성장률 -1.4%를 연율로 환산하면(4승을 하면) -5.5%다. 1분기는 한국이 미국보다 더 하락 폭이 크다. 한국은 2월부터 코로나19피해가 심했지만, 미국은 3월 중순이후에 코로나19 환자가 크게 늘었다. 3월말까지 경제실적을 평가하는 1분기 미국 경제실적이 한국보다 좋은 것은 이해 가능하다. 

 

(중략)

 

이참에 경제성장률 통계 기준을 정리해보도록 하자. 전분기 대비 성장률은 원 값과 연율 환산기준 두 가지 기준이 다 의미 있는 기준이다. 각 분기에 실제로 달성한 원 값도 중요하지만 이를 연율로 환산한 수치를 알려주는 것도 의미가 있다. 코로나19 이전 분기별 경제성장률 수치가 발표될 때마다 많은 언론은 ‘0%대 성장률’이라는 기사 제목으로 소식을 전할 때가 많았다. 분기 성장률이 0%대라는 제목은 한국 경제성장률이 매우 낮은 것처럼 느끼게한다. 그러나 만약 분기 성장률이 0.99%라면 이는 연율로는 4%가 넘는다.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약 2.6%)보다도 높은 수치다. 이론적으로는 잠재성장률보다 높은 성장률은 과열이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0%대 성장률’이라는 부정적 뉘앙스의 기사 제목은 모두 잘못된 제목이다. 

그런 의미에서 분기별 경제성장률을 연율로 환산해 설명하는 것이 0.9% 성장의 의미를 정확히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다. 그러나 이도 잘못된 정보를 줄 수 있다. 이번 분기 성장률이 4분기 연속 지속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오늘 주식이 1% 올랐다고 이를 연율로 환산하여 1800% 올랐다고 말하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분기 성장률에는 기저효과가 크게 작용하기에 이번 분기에 고성장을 하면 다음 분기는 성장률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중략)

 

요약하면 전기대비 성장률을 주지표로 원 값과 연율기준으로 비교하고, 전년대비 성장률을 보조지표로 살펴보는 것이 정석이다. 각각의 기준과 지표가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두 가지 기준을 섞어서 기사를 쓰면 대혼란에 빠진다. 한국은 전기대비 성장률 원 값으로, 미국은 연율기준으로, 중국은 전년대비 성장률로 각각 비교하는 기사는 정보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러한 기사가 포털뉴스 탑에 선정돼 유통되는 일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출처 :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

 

 

미국경제, 진짜 한국경제보다 10배 나쁠까? - 미디어오늘

경제 기사의 가장 기본은 무엇일까? 경제성장률을 정확히 전하는 것 아닐까. 불행히도 경제성장률을 전하는 기사에도 오류가 많다. 경제성장률은 보통 전분기대비 성장률과 전년대비 성장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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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8/12-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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