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홍소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추진위 자료실장이 1949년 6월 백범 김구 선생이 네 발의 총탄을 맞고 서거한 경교장 2층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있다. [이승환 기자]
툭 치면 와르르 쏟아졌다. 중국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향하는 길, 한 장의 사진에서 독립운동가 생애가 재현됐고 한 권의 책 표지에서 100년 전 기억이 육화됐다. `독립견문록, 임정을 순례하다`의 마지막 편을 송고한 뒤 만남을 청하자 “독립운동사의 교통순경일 뿐,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진심을 다하는 막후(幕後)의 배후자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설득해 오래 사양하던 그를 탁자에 앉혔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이면을 쫓아 38년간 외길을 걸은 홍소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자료실장(61)을 지난 5일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 서울 경교장(京橋莊)에서 만났다.
―첫 출근 날 풍경부터 기억해 볼까요.
▷1982년 가을, 친구 집에 놀러가니 친구 시아버님이 “뭐하는 친군가” 하고 물으셨어요. 그분이 백범 제자 안윤기 선생이었습니다. 얼떨결에 출근했죠. 을지로3가 상지빌딩 3층, 좁은 방에 철제 책상 3개뿐이었어요. 안 선생님이 떠나시면서 맡게 됐습니다. 그 일이 평생 업(業)이 됐네요.
―벅차오르는 한순간은.
▷글쎄…. `백범일지` 영인본을 만든 1994년 기억이 생생해요. `백범일지` 원본(原本)을 품고 인쇄소를 한 달간 오갔어요. 흑백으로 하자는 어른들을 겨우 설득해 컬러로 했죠. 가슴이 두근거려 혼났어요. 시대의 분신(分身)이었으니까요. 아, 그땐 `백범일지`가 보물로 지정되기 전이었습니다(`백범일지`는 1997년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됐다).
―보급판 `백범일지`도 만드셨죠.
▷도진순 교수님을 우연히 알게 됐고, 돌베개 출판사를 만나 의기투합했어요. 백범김구기념관 10주년을 맞아 2013년 `백범 김구 사진 자료집`을 만들었는데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에요( `주해본 백범일지`는 스테디셀러이며 현재 55쇄로, 총 63만부가 팔렸다. 역시 홍 실장이 참여한 `쉽게 읽는 백범일지`는 39쇄로, 12만부가 팔렸다).
―임정 길을 20회 밟으셨어요. 비행기에 오를 때마다 설렘과 절망, 어느 쪽입니까.
▷가끔은 거꾸로, 중국이 집 같아요. 그중에서도 충칭의 화상산 묘지는 특히 애착이 가는 임정 유적지예요. 갈 때마다 모습이 달라져요. 이제 죽음과 거리가 멀어진 장소가 돼 버렸어요.
―중국에서 느낀 건데, 이봉창 의사를 특히 존경하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울퉁불퉁하게 살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정확한 길을 간 분이니까요. 이봉창 의사는 우리 같은 사람이었다가 결국 시대정신을 알아채고 그 길을 걸은 분이에요. 시대정신요? 그 시대에 해야만 하는 불가능한 일을 실천하는 것이죠.
―조명이 필요한 독립운동가는.
▷이명서·이명선 형제를 꼭 기억해 주세요. 황해도 장연에 살던 형제가 재산을 다 처분하니, 가족은 `우리 서울 가나` 했는데 내려보니 만주더랍니다. 두 형제는 독립운동 기지를 만든다고 떠나고 나머지는 여자들 몫이 되었지요. 훗날 손녀를 만났는데, 할머니가 그러셨대요. “김구의 `김(金)자`도 입 밖에 내지 말라.” 그보다 미운 사람이 있었겠어요?
―서거 전날 이곳 경교장에서 백범과 단둘이 만났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어떤 대화가 오갈까요.
▷역사에 선생님이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말도 하고 싶어요. 결국 `김구(金九)`는 수십만 명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하나의 앞선 이름이에요. 그 이면에는, 이름조차 못 남긴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었습니다. 이 말은, 독립운동을 실천한 모든 분께 올리는 말씀입니다.
―`임정 안내자`로 평생을 사셨습니다. 후회는 없습니까.
▷한참 어려울 때 안윤기 선생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적어도 우린 이 세상에 나와 뭐가 옳은 길인지 알고 가지 않느냐.` 옳음을 안다는 게 건방진 얘기인지 몰라도, 적어도 나쁜 길을 걷지는 않았으니 후회는 없습니다.
중국 난징의 거리에서 작은 기념품을 사는 홍 실장 옆에 오래 서 있었다.
한자가 새겨진 금속활자를 골라 만드는 기이한 도장이었다. 고심 끝에 그가 선택한 두 글자는 `쟁족(爭足)`이었다. 백범이 던진 화두로 `대가리가 되려 싸우지 말고, 발이 되길 다투라`는 뜻이다. 다들 우두머리를 탐하는 세상, 누군가는 평생 `발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해방직후 친일파 처벌 특별법 제정 착수, 경기도 등 일제 잔재 청산 작업 이어져
군사·산업시설 관련도 상당 부분 존재해…‘철거 방법’ 가장 언급되지만 역사 잊혀져, 문화콘텐츠 등
활용 주민참여형 개발 필요
걷어내지 못한 친일파·기업… 기념·조형물도 곳곳 산재
1944년께 동원된 어린 소녀들이 미쓰비시 중공업기숙사 사감으로부터 지시사항을듣고 있다. 경기일보DB
걷어내지 못한 친일파·기업… 기념·조형물도 곳곳 산재
■친일 인물 청산을 위한 노력
친일 잔재는 ‘일제강점기 남겨진 유산 중 부정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지만, 개념적으로 볼 때 상당한 의미와 기준 등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유형들이 부정적으로 남아있다. 가장 많이 언급하고 청산하고자 하는 것이 이른바 친일 인물이다. 우리에게는 ‘친일파’로 많이 알려졌다. 그동안 친일 인물에 대해서는 상당한 노력을 하였다.
이를 위해 해방 직후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 제정에 착수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 설치한 바 있으며, 2004년에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으로 국가가 직접 친일 인물을 선정하였다. 민간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여 친일 인물 청산을 주도하였다.
특히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계기로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이를 계기로 경기도 등 광역 지자체에서 구체적인 일제 잔재 청산이 진행됐을 뿐 아니라 크고 작은 지자체에서도 일제 잔재 청산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친일 잔재의 유형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동안 친일 잔재 청산은 ‘친일 인물’이 주요 대상이었다. 이는 친일 인물이 사회적으로 영향을 많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친일 잔재의 유형은 친일 인물 외에 상당한 잔재들이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
친일 잔재는 우선 인적 잔재와 물적 잔재로 구분할 수 있다. 인적 잔재는 구한말 일제의 침략과 강점기 식민 지배통치에 부역한 반민족 행위를 한 자라 할 수 있으며, 물적 잔재는 반민족 행위로 인해 얻은 재산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를 흔히 ‘친일 인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옹호하는 세력을 ‘친일파’라고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친일파는 가장 먼저 청산되어야 할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인적, 물적 친일 잔재 외에도 유형 잔재와 무형의 친일 잔재로도 구분할 수 있다. 유형 친일 잔재는 일제가 침략전쟁과 식민 지배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조성한 시설물 등 선전 조형물이다. 여기에는 식민 지배와 관련된 건물, 상업과 산업시설, 군사시설, 기념탑 및 기념비, 종교시설, 전쟁 기념물, 찬양조형물, 일본식 가옥 등이 포함된다.
무형 친일 잔재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 지배 시기에 역사와 문화 등 주로 정신적으로 왜곡된 잔재들이다. 여기에는 언어 등 생활문화를 비롯하여 법과 행정제도, 관습과 의식, 교육, 문화예술, 역사 등이 포함된다. 그렇다면 친일 인물과 건축물을 제외한 유형의 친일 잔재가 어느 정도 남아 있고, 청산되었는가 살펴보자. 그리고 이를 위한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가.
■군사 관련 친일 잔재의 현황
친일 잔재 시설물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조선 왕궁의 맥을 끊고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한편에서는 해방 후 이른바 ‘중앙청’이라 불리며 정부 건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보존하자는 여론도 있었지만 결국 해체돼 지금은 독립기념관에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이처럼 식민 지배와 관련된 건축물은 대부분 철거되거나 일부에서는 리모델링하여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에 비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군사시설은 아직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것이 상당 부분에 이르고 있다. 군사시설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체제기에 주로 형성됐다. 일제는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강제 동원하여 군사시설을 설치했다. 이를 전쟁유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비행장, 격납고, 연병장, 대피호, 동굴 진지, 방공호, 지하호 등이 있다. 국내에서 조사된 바로는 군사 관련 잔재는 전국적으로 1천300여곳이 산재한다. 경기도의 경우 비행장 건설이 적지 않았는데 수원, 오산, 시흥, 평택, 고양 등이 해당된다. 군사시설물 구축과 관련된 곳으로는 시흥, 양주, 평택, 포천 등이 있다. 이외에도 평택 함정리의 방공호, 평택 안정리의 해군시설대 보급기지, 의정부와 수원, 김포 등지에는 군부대가 있었다.
■산업 관련 친일 잔재 현황
일제강점기 산업시설과 관련한 친일 잔재도 상당 부분 존재한다. 산업 관련 친일 잔재는 공장을 비롯하여 탄광이나 광산, 철도, 도로, 토건, 하역 수송 등이 해당된다. 이 가운데 철도와 항만은 산업 관련 잔재이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에 식민통치 잔재이기도 하다. 산업 관련 잔재는 탄광과 광산이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한다.
일제는 전시체제기에 들어서면서 전쟁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석탄 외에 금, 은, 구리 등 일반 광물과 텅스텐, 석면, 몰디브덴 등 특수 광물까지 채광하였다. 광산과 탄광은 지하자원이 풍부한 북한지역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경기도는 320여개가 있었다. 철도와 도로는 교통의 편리함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한반도에서 물적 자원을 수탈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산업 관련 잔재는 대부분 일제 지배를 지원하거나 적극 후원하는 일본 기업들이었다. 현재도 널리 알려진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 아소(麻生), 스미모토(住友), 일본제철(日本製鐵) 등 대기업 등이 있다. 이들 대기업 외에도 가네보(鐘紡), 다이니치보(大日紡), 도요보(東洋紡) 등 방적공장도 있었다.
경기도의 산업 관련 친일 잔재는 앞서 언급했듯이, 광산과 탄광이 가장 많았다. 해당 지역을 살펴보면 가평 12곳, 고양 3곳, 광주 6곳, 김포 1곳, 부천 26곳, 수원 9곳, 시흥 9곳, 평택 1곳, 안성 35곳 등 각지에 산재하고 있었다.
인천시 부평구 부평2동에 위치한 일제 강점기 한국인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미쓰비시 줄사택’. 경기일보DB
■친일 인물 관련 기념물과 조형물
유형의 친일 잔재 중 가장 우리 일상생활과 밀접한 것은 친일 인물 관련 기념물과 조형물이다. 기념물과 송덕비, 찬양비 등 비석류가 해당된다. 어느 지역에 답사를 간 적이 있는데, 일제 말기 지역에서 면장을 한 분의 기념비가 있었다. 면장은 친일 인명에는 빠져 있지만, 전시체제기 최말단에서 식민 지배에 협력한 직책으로 지역에서는 부일협력과 관련하여 가장 영향력을 미쳤다. 그런 점에서 지역과 관련된 부일협력을 한 면장을 비롯하여 반민족 행위를 한 인물과 관련된 기념시설은 친일 잔재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경기도에 산재한 친일 인물 관련기념 시설은 160여개다. 이중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120여개, 확인 불가능한 것이 26개, 망실되거나 매몰된 것이 2개 정도였다. 지역별로 보면 안성 57개, 화성 18개, 평택 13개, 용인 10개, 이천 9개, 광주와 양주 8개, 여주 7개, 포천 4개, 의정부 3개, 파주 3개, 연천 2개, 남양주 2개 등으로 대부분의 지역에 분포돼 있다. 이들 기념시설은 대부분 강점기 군수나 읍장, 면장 등 공직을 맡았던 인물과 부일협력을 한 인물의 송덕비 또는 기념비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안성의 경우 읍내면장, 공도면장, 금광면장, 소초면장, 미양면장, 보개면장, 원곡면장 등 면장으로 활동한 인물들의 송덕비이다. 평택은 서면장(진위), 현덕면장 등의 송덕비가 있다.
이외에 친일 인물과 관련된 기념시설로 기념탑과 동상 등이 아직도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수원 서둔동의 옛 농촌진흥청 구내에는 ‘혼다 코스케(本田幸介) 권업모범장장 흉상 좌대’, 안성농업학교 교정에 세워졌다가 금속물 회수에 헌납 제공된 ‘박필병(松井英治) 중추원 참의 동상’, 현재 현재 용인문화원에서 보관 중인 ‘팔굉일우비(八紘一宇碑)’ 등이 있다.
■식민 잔재 청산 방안과 앞으로의 과제
친일 잔재의 청산 중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이 철거이다. 그렇다고 철거가 청산의 진정한 방법은 아니다. 철거를 하면 이후 잊힌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킨다. 역사를 언급할 때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한다. 자랑스럽고 기억할만한 것은 기록하지만, 역사에 부정적인 것은 대부분 없애거나 지우려고 한다. 그러면 잊힌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도 남겨야 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유형의 친일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들 잔재의 아카이브 구축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이후 망실된다 하여도 역사적 기록이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자료집을 편찬하여 연구와 교육 자료로 활용돼야 한다.
또한 기존의 친일 잔재를 알리기 위해서는 현재 남아 있는 친일 잔재가 어떠한 연유로 만들어졌으며, 관련된 인물의 친일 행적에 대해 최소한의 기록을 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친일 잔재 기념시설물은 송독이나 찬양으로 일관하고 있다. 기존의 기념시설물과 함께 부일협력을 기록함으로써 인물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록은 관련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안내판을 설치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문화콘텐츠는 ▲교육프로그램 운영 ▲웹 또는 모바일 콘텐츠 개발 및 활용 ▲교육형 테마파크 활용 ▲기억의 공간 활용 ▲다크 투어 등 다양한 방식이 있다. 이러한 방식은 관이 주도할 것이 아니라 주민참여형으로 개발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 일시 : 2021년 6월 10일(목) 10시
– 장소 : 서울중앙지법 앞(교대역 법원 삼거리)
– 주최 :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 취지
1.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양호)가 지난 7일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등 85명이 일본 전범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하였습니다. 재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 배상 문제가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에 일본 기업을 상대로 청구권을 행사 할 수 없으며,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을 인정하면 일본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한미동맹으로 안보와 직결된 미국과의 관계 훼손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근거를 들어 판결하였습니다.
2. 이번 판결은 2018년 대법원전원합의체가 내린 강제동원 배상 판결과 전면 배치되며, 침략국의 불법성을 부정하는 가해자(일본) 중심 국제정치 논리와 외교 편향의 자의적 잣대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원통한 세월을 두 번 짓밟는 것으로 매우 충격적인 판결입니다.
3. 한일협정에 따라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입장은 가해가 일본의 입장이며, 외교관계를 문제로 강제징용피해자들의 인권을 희생하는 사법부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법부인지 의심마저 들고 있습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부정하고 피해자들의 인권과 원통함을 해결하지 않는 한일관계는 정의로울 수도 없으며, 미래지향적이지 않다는 것은 지난 100년 한일관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4. 이에 이번 강제동원 소송 판결의 문제점을 강력히 규탄하며, 판결의 원천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공동 기자회견을 개최하고자 합니다. 귀사의 적극적인 취재와 보도를 바랍니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4민사부(재판장 김양호)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각하했다. 우리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철저히 외면하고, 반역사적이며 반헌법적인 판결을 선고한 재판부를 강력히 규탄한다.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한 2018년 대법원의 판결을 의도적으로 폄훼한 재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을 짓밟았으며 기나긴 소송투쟁 끝에 대법원 판결을 쟁취한 피해자들의 투쟁의 역사를 유린했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외면한 채 일본 극우세력의 논리만을 그대로 답습한 재판부는 인권최후의 보루라는 사법부의 사명을 내팽개쳤다.
재판부는 일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선언하고,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장벽을 뛰어 넘어 피해자 개인의 인권 보호에 대해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2018년 대법원 판결을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폄훼했다. 재판부는 ‘국제사회에서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인정되지 않았다.’고 강변하지만, ‘더반선언’ 2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국제사회는 지난 세기에 강대국들이 저지른 식민지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역사청산을 요구하며 식민지주의의 극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한일 시민사회가 수십 년 동안 끈질긴 투쟁으로 일궈낸 소중한 성과이다. 법관은 헌법정신을 지키며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재판부는 법의 정신이 아니라 법관 개인의 왜곡되고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판결하여 주권자인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모욕했다. 이 판결은 사법농단의 가해자들이 단죄되지 않고 있는 오늘의 참담한 현실과 지금 왜 사법개혁이 필요한가 그 이유를 스스로 입증했다.
우리는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와 극우의 논리를 따르는 역사부정론의 그림자가 법원에까지 드리운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다. 그러나 피해자의 인권회복과 역사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민들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와 가해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는 그날까지 연대하여 투쟁할 것이다.
2021년 6월 10일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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